98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사 57,14-2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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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주님) (사 57,14-21) 


의인의 죽음과 무녀의 자녀 (사 57, 1-13)
이사야 2017 2020. 8. 1. 10:52
18-97 의인의 죽음과 무녀의 자녀 (사 57, 1-13) 

(사 57:14, 개역) 『장차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
(사 57:15, 개역)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사 57:16, 개역)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사 57:17, 개역)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사 57:18, 개역)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사 57:19, 개역)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사 57:20, 개역)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사 57:21, 개역)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사 57:14, 새번역) 『"내가 말한다. 땅을 돋우고 돋우어서 길을 내어라. 나의 백성이 걷는 길에 거치는 것이 없게 하여라."』
(사 57:15, 새번역)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다.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 / ㉦또는 '보좌에 앉아 계시는 이'』
(사 57:16, 새번역) 『나는 사람들과 끝없이 다투지만은 않는다. 한없이 분을 품지도 않는다. 사람에게 생명을 준 것이 나인데, 내가 그들과 끝없이 다투고 한없이 분을 품고 있으면, 사람이 어찌 견디겠느냐?』
(사 57:17, 새번역) 『사람의 탐욕스러운 죄 때문에 내가 노하여 그들을 쳤고, 내가 노하여 나의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그들은 끝내 나를 거역하고 제 마음에 내키는 길로 가버렸다.』
(사 57:18, 새번역) 『사람의 소행이 어떠한지, 내가 보아서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고쳐 주겠다. 그들을 인도하여 주며, 도와주겠다.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사 57:19, 새번역) 『이제 내가 말로 평화를 창조한다. 먼 곳에 있는 사람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 평화, 평화가 있어라." 주님께서 약속하신다. "내가 너를 고쳐 주마."』
(사 57:20, 새번역) 『그러나 악인들은 요동하는 바다와 같아서 고요히 쉬지 못하니, 성난 바다는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아 올릴 뿐이다.』
(사 57:21, 새번역) 『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악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
(엡 2:17, 새번역)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 ㉢사 57:19; 슥 9:10』


(습 2:1, 개역)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습 2:2, 개역)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습 2:3, 개역)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겸손한 자를 찾는다는 단어 문자 그대로는 없습니다
여러번역서 중에서 소제목을 단 것 중에서 있더군요

(습 2:1, 쉬운) 『<의롭고 겸손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부끄러움을 모르는 백성아, 함께 모여라.』

그러나 그 스바냐 2장의 내용 또한
겸손한 자를 주님이 찾는게 아니라
겸손한 자야 주님을 찾으라 라꼬 거꾸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물론 내용은 같은 의미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15장이 생각이 났습니다,

(요 15:5, 개역)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6, 개역)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7, 개역)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겸손한 자도 주님을 찾고
주님도 겸손한 자를 찾는
이 관계성을 말이죠
결국 이 말은 인간 쪽에서는 겸손함을 갖출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겸손한 자의 반대는 뭡니까? 교만한 자 이겠지요
역시나 이 말도 주님 쪽에서 교만한 자를 새롭게 만드시는 겁니다
나는 교만할 꺼야 라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이라는 검색어로 인터넷 내용을 찾아 보니
다들 거꾸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즉 겸손한 자가 아니라 교만한 자를 이야기 하고 있더군요
대부분 성화론이나 개혁주의자들이라서 그렇거든요

제가 만났던 대부분의 목사들이
말로는 겸손한 자를 이야기 하면서 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정작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처럼 될려고 발악을 하고 있더라 말이죠
교인들을 완악한 사탄의 회 유대인을 못 만들어서 안달이더라 말이죠.

그것이 진리인줄 알고 마구 마구 가르쳐요


겸손을 교만으로 가르치고
교만을 겸손으로 가르치고 있는

이 상황이
그들이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종말을 땡기시기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정신차려라 깨어라 속지말아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세대가 악하다 라고 말이죠


바로 앞의 글 두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외치는 자가 겸손한 자입니다.

제가 여지껏 들어본 목사들 설교에서
이 두 소경이 외치고 있는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그 외침이야 말로 
겸손한자의 모습이다 라고 말해주는 목사를 만나본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 마태복음 본문에 나오듯이
다들(목사든 교인이든) 어떤 모습인고 하니
마치 제자들처럼 고함치지 말라꼬 두 소경을 말리는 모습들이
바로 오늘날 사기치는 목사와 교인들이였다는 겁니다.
그저 교회 질서를 방해하는 자를 쫓아내기 바빠요.


그러면 그럴수록 두 소경은 더더욱 고함 칩니다.

(마 20:30, 개역)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 20:31, 개역)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제가 어제 어머니랑 이 부분의 말씀을 나누면서
제자들이 꾸짖어 잠잠하라 라고 했고
그 다음에 제가 말을 할려고 하니까
어머니께서 마구 마구 신나게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고함을 질러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어머니께서 외치시더라 말이죠

제가 할 말을 가로채시면서 신나게 말이죠

바로 그러면 그럴수록
제자들이 말리고 꾸짖어 잠잠히 해?
조용히 해 라고 하면 할수록

더더욱 소리지르고 고함치는 이 모습이 바로
겸손한 자 의 모습이다 라는 겁니다.
자 그러면 모두 다 고성방가하면 그러면 겸손한 자냐 라고 또 묻겠지요
이 사건 속에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버릇없이 구는 것은 겸손하지 못하다 라고 가르치고 있는 목사들은
그야말로 독사의 자식들입니다.

왜? 다윗의 자손을 무시하거든요

왜 하필이면 다윗의 자손이냐
다윗이 왕의 자리가 아닌
원수의 자리
죄인 중의 괴수의 자리에서 외쳤거든요

오늘날 목사들이 어쩌면 그렇게 바리새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지
성경이 살아 있어요
눈에 보이는 교회는 정작 죽어있고요
어쩌면 제대로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시는지
정말 정말 그대로입니다.

바리새인은 모든 겸손함을 갖추어서
주여 십의 일조를 냈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저 매국노 세리처럼 토색 곧 세금을 삥뜯어서 로마에게 바치지 않게 해 주신 것 하나님께 감사하다 라고
때려죽어도 이것이 겸손으로 보고 있지
완악함으로 못 보고 있다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찾으시잖아요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내가 할 것이 아무것도 없군요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비로소 다윗의 자리
원수의 자리에서
불쌍히 여겨주심만을 바라는

이 공백의 자리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즉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으시는

주님의 의에 목마른자로 만드신다는 거죠

이것이 주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
곧 겸손한 자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또는 사제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거꾸로 이야기를 하는지?

세리 매국노 나쁜놈이라는 것 다 알아요
바벨론 왕의 거짓 점괘가 거짓된다는 것 다 알아요
그러면 그것이 거짓됨을 안다면
왜 거짓을 구할려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냐 말이죠
자기들이 욕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게 바리새인 기도 아닙니까
십의 일조를 냈다 라고
이레에 두 번 금식을 했다 라고
이것이 그들은 겸손함을 갖추었다 라고 외치지만
이것이 도리어 완악함을 대 놓고 자랑하는 줄 모르는
속고 있는 자들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속지 말라꼬 다 날려버리시는 것이 바로
주님의 겸손함입니다.
십의 일조 냈다 라는 것을 다 날려버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 라는 것을 다 날려버리고
남을 7번 용서했다 라는 것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것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다는 것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 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다 날려 버리는 것이 주님의 겸손함입니다.

왜죠? 그것은 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는 것
삭제되는 것
이 전의 것 이기 때문인데

그것이 뭐 그리 자랑스러워서
하나님의 집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 와서까지 기도를 하냐 말이죠
그 정도로 엉터리 우상을 믿었던 겁니다.

앞의 글 에스겔에서
이스라엘 왕의 자리는 바로 꺽으신 뼈 만이 차지하는 자리입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왕 또는 하나님은 권력의 자리이지만
꺽으신 뼈는 뭡니까? 내 죄 때문에 대신 심판 받는
섬기시러 오신 인자 곧 누구 누구의 아들
임마누엘의 자리입니다.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 내 하나님은 바로 대신 심판받는 자리

곧 이스라엘의 왕 자리는 공백의 자리입니다.

다윗은 왕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원수의 자리에서 비로소 이 공백의 자리의 위상을 알게 됩니다.

비로소 겸손하게 회개를 합니다.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음을
즉 이전 것
사라지는 것
지나가는 것만 가득했지

새 것 곧 예수님의 죽음이 없었다 라고 말이죠 
이 새 마음을 달라고
예수의 마음을 달라고 낮아지신 겸손한 분의 마음을 달라고 말이죠

그 동안 얼마나 겸손의 반대인 교만했으면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 라고 했겠냐 말이죠
그게 우상이였던 겁니다.
그런 우상을 믿어놓고서는
율법을 지켰다니

율법이 없는 이방인과 뭐가 다르냐 말이죠
율법은 죄 아래 가두기 위함입니다.
즉 남이 아닌 내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도록 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바벨왕과 다를바 없는 거짓 점괘를 치는 자와 다를바 없이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된 재판을 했다고 자부한 것이
바로 율법이 없는 바벨론 왕의 거짓점괘와 같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교만 한 겁니다.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음을 아는 것이 비로소 겸손한 자인데 말이죠

그러니 육의 소욕에서는 겸손을 교만하다고 꾸짖고
교만을 겸손으로 보고 있고요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남을 7번 용서했다고 말이죠

반대로 성령의 소욕에서는 교만하게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 제발 불쌍히 여겨주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고성방가하는 것이 겸손이고

교만은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고 부자청년 말이죠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고 하는 것이(맏아들)
이것이 교만 이였던 겁니다.

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 그렇게 주장하거든요

정작 율법은 우리를 원수로 만드는데 말이죠

율법(말씀, 거룩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하거든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요 글쎄
그 율법의 고소를 당하는 겁니다.

사울왕이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더욱 안 지키는 다윗왕을 죽이고 싶어서 환장해요
차라리 안 지켰으면 살인의지도 없을텐데
제사장만 먹을수 있는 진설병을 줬다고
다윗을 죽일 것을 제사장 까지 다 죽여요

맞아요 다윗은 율법을 어긴 것 맞아요
바벨론 왕이 거짓점괘 친 것 거짓인줄 알아요
그러면 본인은 안 그래야 되잖아요
본인 또한 거짓점괘를 하나님께 구하고 있거든요
십의 일조 했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이것이 그들은 거짓을 구하고 있는 줄 몰라요
그 정도로 소경이다 라는 겁니다.

사람은 참이 없으면 불안해서 못 삽니다
거짓 속에서 늘 속기 때문에
그것을 달래기 위해서
왜? 돌려막기 하듯이(카드 사용자들이)
안 속았다 라고 돌려막기 라는 똑똑한 짖을 했다고 우기지만 역시나 속은거다 말이죠

참이 없기에 불안해서 말이죠

어떤 아프리카의 언어 속에는 자유 라는 단어를 모른다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자유 라는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유 롭기 때문에
왜 굳이 그런 단어를 쓰냐 라는 거죠

결국 언어도 거짓이다는 거죠 인간이 언어를 다루는게 아니라
언어에 구속이 되어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에 속아 살기 때문에
참 되어야 한다 라는 것에 억압에 시달려 사는 겁니다. 
막살면 안돼 반드시 바르게 살아야 해 라고 말이죠

그러나 놀랍게도 그 바르게 살아야 함에 목숨까지는 안 걸어요
왜? 그 참이 참인지 거짓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제 또 변할지
자기가 아니면 그 참이라는 외부의 것이
언제 변할지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그래서 목숨을 걸때가 없기에
그냥 자기의 꾀임에 자기가 속아넘어가는 것을 알면서
달리 다른 답이 없기에 데면데면 하게 그냥 살아갑니다.
익숙한 대로 편안한 대로 말이죠
그러니 사는게 아니지요 그것이 죽은 것이니까 말이죠

이것이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율법이 있는 자는 제발 죽지 말고 살아라 라고
목마른 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즉 참을 봤기에
그 참에 목숨을 거는 겁니다.

사실은 본인이 목숨을 거는게 아니라
참이 우리를 목숨 걸어도 상관 없을 정도로 넉넉함을 보여주셨기 때문이거든요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이 의는
우리를 원수의 자리에 놓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자리는 바로 원수의 자리 인 겁니다.
하나님이 왕인데
어딜 감히 인간이 왕이 되겠냐 말이죠

그것이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미를 통해서 나타난 겁니다.
왕의 자리를 보필하는 역시나 왕 급의 높은 자리인
영의정 좌의정 자리를 명령으로 왕의 명령으로 허락해 달라고 말이죠

이런 소원과

다윗의 자손이여 제발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외치는 두 소경에게
무엇을 얻기를 원하느냐?
너의 소원을 말해봐 라는 그 소원과

두 소욕이 서로 달라요
육의 소욕은 왕이구요 왕 자리를 구하구요
성령의 소욕은 원수의 자리입니다. 죄인의 자리를 구하고 있어요

세상에 교회에 와서 죄인의 자리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자 봤어요?
없잖아요
아무도 이 공백을 구하는 자가 없어요

우리는 매일 매일 우상을 구하고 있지
예수님의 마음을 구하는 자 없다 라는 겁니다.

이 죽는 하나님이 먼저 떳기에
그 증상으로써 겸손한 자가 증상물로 발생하는 겁니다.
그것도 필연적이지 않고 우발적으로
우발적이다 라는 말은 필연 보다 더 필연적인 그 정도로 겸손하게 
왜? 참 하나님이신 새 마음 곧 죽는 하나님이 먼저 떳기에
그 증상물로 겸손한 자가 새롭게 나타나거든요

겸손한 자가 하나님을 찾도록
하나님이 새롭게 떳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겸손한 자는 안나타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아 그럼 필연적인거지 우발적인 것이 아니네 라고 생각할 겁니다.
바로 이겁니다
필연의 자리를 교만한 자들이 다 차지를 합니다.
왜? 필연이니까
반대로 우발적인 자들이 겸손한 자로 그 뒤에 나타납니다.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되게 하시는

높은 자 낮추시고
낮은 자 높이시는

이 섬기는 주님이 서로 달랐던 겁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미가 구했던 것처럼
권력자의 권력을 임의로 휘두르잖아요
임의로 지 마음대로 말이죠

그런데 섬기는 자는 그 섬김 조차도 임의로
자기 멋대로 휘둘러요

그래서 나온 것이 겸손한 자 라는 증상물인데
오죽 하면 세상과 안 맞으면
고래 고래 고함치면서 고성방가 하는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자를
겸손한 자 라고
섬기는 인자의 증상물로 새롭게 발생시켰을까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교만한 자만 양성해요
강도의 소굴이다 보니 그런가 봐요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개역)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울려고 하는 자들이 교회에서만 양성이 되니까 말이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자들
그저 하나님께 열심히 있는 것으로 때울려는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십자가를 좇은 것이 아닌
새 것 곧 하나님의 죽음을 좇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기 의를 세운다 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자기 일이 있다는 것이거든요
이것이 교만한 자입니다.

겸손한 자는 자기 숙제가 없어요 모조리 다 예수님에게 떠넘겨요
얼마나 저들이 보기에
저들 겸손함을 추구하는 자들이 보기에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까
오죽하면 저들이 예수님에게 별명을 붙여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강도의 친구로다 라고 말이죠

어느 방송인 김용땡 이라는 목사는 술먹는 것은 이 구절을 이용해서 허용하면서
주변에 다 그런 놈들 뿐이다 보니 말이죠
세리와 강도의 친구
곧 이땡박과 닭그녀의 친구는 때려 죽어도 안하겠다 라고
자기들이 선별작업을 해요 글쎄 ㅋㅋㅋㅋ

겸손도 아니고 교만도 아니고
어중간하게 양다리 걸치는
완전 사기꾼들 아니냐 말이죠

제가 아는 어떤 고신측 유명 목사도
담배 피는 것은 허용해요 글쎄
그 이유가 더 웃껴요
성경신학 박사들인 유명한 유럽의 신학자들이 대부분 담배를 피다 보니 말이죠

우와 사기꾼들이구나

법을 저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만들어요

율법은 이유 없이 우리를 무조건 죽이는 식입니다
보세요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 라는 부자청년을 무조건 죽이는 식이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라는 것 아닙니까
부자청년이 왜 근심하고 돌아섰겠냐 말이죠
나 보고 죽으라구요?

그래 죽어라

그럼 나 뭐 먹고 삽니까

너? 율법으로 살지?

율법이 뭔데요?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의 이거든요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거든

엥? 나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는 것 취소 취소 ㅋㅋㅋㅋ

부자청년이 어릴적부터 목숨 걸고 지켰다는 그 율법이
사실은 율법이 아니였던 거죠
껍데기를 지켜놓고선 어딜 꾀냐 말이죠
속 알맹이는 사랑 곧 섬김 곧 죽기까지 내어주심 이라는
남을 사랑하는 겁니다.
생판 모르는 남을

아니 왜?

미쳤다고 생판 모르는 가난한 자를 왜 목숨 같은 내 전재산을 나누어 주냐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그게 선악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내어주셨다 말이죠

이 사랑 아니면 비키라 말이죠 어딜 자꾸 깝죽대냐 말이죠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 곧 이데오피아 군대의 무기 달가닥 달가닥 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라는 겁니다.

겸손한 자를 찾는다 라는 것은
내 속에 사랑이 없고
그저 달그닥 달그닥 거리는 살인 무기 밖에 없다고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이라는 그 스펙이 살인무기였다 라고 말이죠
남 죽이기에 바빳지
자기가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몰랐다 라는 겁니다.

그 원수 그 죄인을 찾는 겁니다.
즉 주님의 의가 그를 불도져로 밀어버리니까
비로소 나오는 고백이기에
그 고백
주여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사오니 정직한 영을 달라고
목마르오니 물을 달라고 하는 자를 찾는 겁니다.

우리가 자주 언급한

변화산에서 갑자기 나타나 주여 죽어주세요 별세해 주세요 라고 외치는
모세와 엘리야가 바로 겸손한 자였고

자기 숙제가 없으니 말이죠

비싼 향유를 부은 창녀 마리아가
주님을 미리 장사 치르는 것이 바로
겸손한 자 였다는 겁니다.

왜? 많이 탕감 받은
원수 중에 원수임을 알았기에

창녀이기에

지난 주에 말한 의인이기에
그냥 의인이 아닌
빨리 죽이시는 의인의 죽음이기에
바로 이들이 겸손한 자이고

즉 이 말은 상대적인 교만한 자는
무녀의 자식
의인을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려고 하는 자들이
교만한 자 이다 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겸손한 자는 자기 일이 없기에
주님이 친히 겸손한 자를 새롭게 만들고
상대적으로 악인도 새롭게 만들어 버립니다.

악인은 지난 주의 무녀의 자식은
불안하다 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자기가 뭔가를 자꾸 해야 한다고 여기거든요

반대로 겸손한 자는 자기 일이 없기에
겸손한 자 자체를 누가 만든다?
주님이 친히 만드시겠다 라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겸손해 질려고 하면
불안해서 미쳐요

막살게 될까봐
안 막살아야 하는데
바르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못 살까봐 불안해 미친다 말이죠
그래서 평강을 억지로 자기 숙제로 만들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그 평강을 주님이 친히 만드시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숙제가 없어요

세베대의 두 아들처럼 하나는 우편 하나는 좌편에 못 앉히면 불안해 미쳐야 합니까?
소위 성공 못하면 말이죠

여기에 화를 내면서 두 아들에 분개를 하고 있는 제자들 역시
불안하다 라는 겁니다.

그 불안했던 제자들이 또 이번에는 두 소경이 고래 고래 고함치는 것을
자꾸 막아서는 겁니다.
그 정도로 불안하다 라는 겁니다.
질서가 깨어지면 안된다 라고 보는 거죠

마치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마음이 분주할 때
싸가지 없는 마리아는 예수님에 턱 고 이고 앉아 말씀만 듣고 있으니
안돼 안돼 그러면 안돼 안돼 예수님 야 좀 머라카이소마(야단 좀 치세요)
넬 모레면 시험기간인에 왜 공부 안하냐
윤시네의 공부하세처럼
예수님을 대접하세 라고 노래 부른다 말이죠
얼마나 불안하면 나발을 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느닷없이 이 싸가지 없는 마리아를
겸손한 자 라고
더 좋은 것을 택했다 라고
오히려 마음 분주히 불안해 하면서 여러일을 하고 있는 너나 제발 좀 손 떼세요 라고
자기 숙제를 손 떼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캬 완전 선악의 시선과 정반대죠
뭘 믿고 주님은 이런 소리를 하시는 것일까요

네 맞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는
그 새일 곧 하나님의 죽음을 기준으로 해서 하시는 소리인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전도 된 겁니다.

십자가의 도를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달리 봐야 한다는 거죠

겸손하다고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자를 교만하다고 하시고
교만하다 라고 대중들에게 규정된 자를 겸손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왜? 주님이 지금 이 순간 주님의 숙제로써
평안을 주시느냐 안주시느냐로
마찬가지고 새롭게 불안을 덮어 씌우냐 안덮어 씌우냐 로 결정이 나기 때문이거든요

부자청년처럼 평안한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냐 말이죠
그런데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는 것 보다
불가능 하다 라고

졸지에 다들 부러워 하는 평안을 졸지에 불안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리고서는 다들 싫어하는 불안불안하고 위태한 무능한 어린아이들에게 평안을 심어버리니까

천국은 이들의 것이다 라고 하니까

완전히 기존의 천국관 구원관이 위태위태하게 다 흔들려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이 소문이 바리새인 귀에
대제사장 귀에 들어가서
반드시 죽이지 않으면 종교 질서가 무너지거든요
반드시 죽여야 해요
안 그러면 불안 불안해서 미쳐요

인간의 숙제는 딱 하나입니다
율법 지키는 것? 아닙니다 그거 거짓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것 뿐입니다.

얼마나 불안 할까요?

자기 숙제가 없다 라는 것이 얼마나 겸손한 자에게는 기쁜소식 입니까
주여 죽어주소서
이것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자이고

자기 의를 세우는 자는 불안해서 의를 세우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치는 겁니다.
종교질서가 왜 무너질까봐 걱정할까요?
불안하거든요
즉 주님께서 평안을 주지 않으니까

태어나기도 전에 미움 받기로 작정이 되었기에 불안한 겁니다.
반대로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된 자는 평안이 넘쳐요
왜? 그 사람이 그 야곱이 평안할려고 노력해서? 아닙니다

주님의 숙제가 바로 이렇게 두 사람을 갈라버렸거든요
이것이 의 로움 이다 라는 겁니다.

이 의를 불안해 미치는 자는
자기 숙제가 뭘까요? 네 맞아요
인간은 자기 의로움으로 이 하나님의 의를 바꿀려고
마치 바벨론 여자들이 왜 우상을 섬기느냐
절대로 내 자식은 고아 안되게
내 남편은 나그네 안되게
내 자신은 과부 안되게 해야만 하기에
그 정도로 불안하기에 우상을 섬겼꼬

반대로 주님의 의에 복종하는 자는
그저 예수님 죽어주세요 라는 새 것이 없음을 알고
새 것을 달라고
하나님의 죽음 외에는 답이 없다 라고
상한 심령이 되는 겁니다.

그 정도로 나는 원수 이다는 거죠
환자가 무슨 수로 자기 병을 죽을 병을 고치냐 말이죠
자기 일이 없고
주님의 일하심 밖에 없다 라고 환자는 의사만을 부르짖거든요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말이죠

이 통회하는 마음을 주님이 부으시는 이유는
인간에게서 자기 일은 곧 자기 성공을 추구할 정도로
자기 밖에 모르는 죄인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 죄인을 그런 원수를 용서하시고자
대신 매맞아야 할 정도로
우리는 소경이요
어두운 눈이다 라는 것을
통회하는 심령을 주셔서
이 십자가의 피 용서만을 쳐다보도록 하셨기에 말이죠

사람은 떡으로(자기 성공)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님의 죽음으로
대신 매맞으심 이라는 십자가의 피 용서로 사는 자입니다.

저녁에 뉴스를 보면
정치를 다루고
경제를 다루고

그리고 문화 곧 연예인 또는 스포츠 아닙니까 이것이 종교 이거든요

이 세가지 곧 인간의 자기 일을 다루고 여기서 승부 성공이냐 실패냐 를 다룹니다.

때려죽어도 저녁 뉴스에 아니 모든 뉴스에 새로운 소식에
새로움 곧 하나님의 죽음을 다루지 않습니다.

다 이전 것의 반복이고
의문의 반복인 사라질 것의 반복 뿐입니다.

사람은 떡의 반복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으로만 삽니다.

이 공백의 자리에서 태어난 겸손한 자를

평안 평강 이라는 샬롬이
매일 매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겁니다.

곧 샬롬이라는 십자가의 죽음이 새롭게 겸손한 자는 새삼스럽게 만들어 내시는
이 새 일을 다 이루었기에 말이죠

(시 1:1, 개역)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개역)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3, 개역)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 1:4, 개역)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5, 개역)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 1:6, 개역)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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