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사무엘상 : 두 종류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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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겨울수련회 교재


두 종류의 구원

- 사무엘상 속의 그리스도 -


Ⅰ 서론

1. 현실의 진실

인간은 자신이 더럽다는 생각을 못한다. 그저 의미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긴다. 가끔은 의미없는 기쁨에 환호하지만 본인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모른다. 고통만이 현실이고 인간은 거기서 출생한 것이다. 즐거움이란 고통을 잠시 잊은 경우다. 그래서 장난이나 익살이나 놀이를 원한다. 현실에서 잠시 비켜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현실이 아니라 고통이 현실이다. 더러움이 현실이다. 여기에 ‘나’가 등장한 것이 화근이다. 그 ‘나’는 고집스럽게 고통이나 슬픔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고통을 삶의 진실로 삼은 적이 없다. 그만큼 우리는 내부로부터 망상을 꾸며내고 있고 그 망상 안에서만 돌아다니고 싶어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는 자세가 인생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악과 선은 여기서 시작된다.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경우나 대상체를 악이라고 정해놓았다. 선이란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경우나 대상체로 정해놓았다. 이러고서 진실을 짜맞춘다. 이렇게 되면 진실은 악의 모서리와 아귀가 맞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현실은 저주받은 것으로 퍼즐 그림이 짜맞춰지는 것이다.

여기서 낯선 발자국을 만난다. 두 개의 구원의 길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먼저 그 길을 가신 주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답습하는 자가 성도다. 진실이 등장하게 되면 사람들은 고통을 느낀다. 상주한 악이 악다운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다. 거짓이 진실의 둘레를 회전한다. 저주가 인간을 어떤 식으로 변모시켰는지가 거짓과의 만남에서 드러난다. 저주의 독가스가 가득한 어항 안에서 인간들은 진실에 목말라 한다.

삶의 공허함(진공 느낌)? 신경질적인 열광? 그룹 형성을 촉구함? 이념에 집결됨? 계급 형성? 전쟁? 승리자로 환생

승리자가 되는 즐거움으로 고통을 잊으려고 허망함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해석한다. 차라리 ‘벌써 죽은 유령으로 살라’고 말씀하신다. 비로소 성도는 비-자발적으로 진리에 합류되었음을 안다. 고통과 즐거움이란 반복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2. 자아가 문제다

나는, ‘너는 존재한다.’라는 대답을 듣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의지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인지는 사실상 알 수 없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자신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과 마주하는 법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의 광기는 편집병, 즉 동일성의 광기이자 자신의 절대적인 예외성을 손상시킬 수 있는 일체의 것을 무조건 지키려는 광기이다. 자기를 으뜸가는 기원성으로 설정한다.

타인을 대할 때도 이런 성향이 발동한다. 자신이 상대하는 타인의 이면에 달라붙어 자신이 만나게 된 모든 경우의 항(項)들을 통해 통합적인 관계망을 구성한다.

누군가를 향하여 말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내가 말을 하는 순간, 본인이 사라지고 가상 자아가 대신한다. ‘나’, ‘이것’, ‘여기’, ‘지금’은 경험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나는 대명사 ‘나’를 사용하여 동일한 자아인 나를 나 자신으로 명명하지만 나는 언제나 이미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내 발언의 형식은 그것을 지시하는 것과 같지 않다.

이 논리는 사물, 어떤 것, 어느 것에나 다 적용된다. 사용하는 말과 그 말의 내용 사이에 존재하는 역설이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복화술의 허구다.

나는 누구인가? 나란 실제로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그 사람이 누구든지 특정 말하는 행위 속에서 스스로를 말하는 자로 지칭하는 인물이다. 한편 상대방은, 스스로를 ‘말하는 자’로 일컫는 사람에게 말 걸기로 걸려든 사람이다. 제대로 ‘남’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상대방’이 내가 한 말을 다 들어주기를 고집한다. 하지만 상대는 진정 나와 상관되는 자가 아니기에 나의 뜻은 절대로 대답의 형식으로 상대방의 반응을 얻어낼 수가 없다. 의사소통에 있어 결정적인 사실은 소통이 결국에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과 적절한 대답이 실패해야 한다는 점이다. 상대 품 안으로 제대로 닻을 내릴 수 없다.

의사전달에 늘 실패한다는 것은 ‘나’와 ‘타인’ 사이의 간격 문제가 아니라 ‘나’와 ‘나’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지만 그자가 누구인지 아는 데 실패하고 다시 본인에게 되돌아온다. 궁극적으로 본인은 가상 본인을 자기를 지키는 보호막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보호막과 자기 사이의 간격 안에는 나의 것으로 마저 돌릴 수 없는 여분의 것이 생긴다. 그 차이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돌릴 수 없다면 그로 인해 ‘나’는 ‘가상의 나’와 결코 일치되지 않음이 증명된다. 타인을 의식해서 나를 지키기 위해 장만한 나의 보호막이 온전히 나를 가려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 원인은 자신이 이미 거대한 질서 안에 삼켜져 있기 때문이다. ‘나’라고 여기는 것이나 ‘남’이라고 여겼던 것들도 실은 거대한 질서의 활동 일부가 되어 있다. ‘나’는 ‘나’라는 가면을 쓰고 활동 중이다. 거대 질서 안에 나만의 것을 따로 챙기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쓴 가면이다. 가면은 ‘나’만의 것을 챙기기 위한 구원 활동의 일환이다.

맹렬히 이 거대 질서에서 따로 빠져나오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이 벌리는 모든 활동이나 말들도 온전히 자기만이 절대가 되기 위한 노력이다. 이 노력을 통해서 그동안 인간을 지배해온 공적 질서의 실상이 드러난다.

모든 것을 다 묘사할 필요는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온전한 구원의 동지를 만나게 되면 그분과 비교해서 나의 구원 노력이 얼마나 가짜요 헛수고에 불과한지 알 수 있다.

3. 공적 세계의 모순

지배자들이 통치하는 이유는, 왜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배 행위는 궁극적으로 지배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백성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박탈한다.

개인은 근원적으로 자기 일 말고 남의 일에 간섭할 권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어떠한 권리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의 권리이며 결국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될 수 있는 권리자다.

즉 지배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로 이루어진 잉여 공동체가 지배자를 지배한다. ‘지배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란 모든 사람(everybody)을 의미하는 동시에 누구나 (whoever)를 의미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평등을 보장할 지배를 원한다. 누구나(anybody)와 다른 모든 사람(everybody else)과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정치적인 것(통치성)이 사라지는 조건으로 빈번하게 조건들을 다시 제정함으로써 정치적인 것의 한계를 변경해 나가려는 것이다.

즉 실제적 평등과 형식적 평등 간의 대립을 항상 생각한다. 형식적 평등은 현실 불평등의 겉모습이다. 현실상 가차 없이 내몰리는 경쟁 마당에서 이미 출생부터 차이 난 불평등한 명백한 불공정 속에서 가혹한 경쟁자들은 그 격차를 더 벌려놓으려고 안달이다. 여기에 인정사정은 일절 없다. 따라서 인간들은 하소연할 곳을 찾고 매달리기 마련이다.

겉으로는 엄격한 법에 대한 헌신으로 평등이 마련된 것처럼 보이지만 평등 밑에는 사유재산을 통한 쾌락과 고통의 셈법이 있다. 법적인 평등 세계를 극찬하는 것이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적 평등을 위해 형식적 법 제도를 끊임없이 흔들어대야 한다. 이상적인 평등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 국가 형식은 계속 분열 조짐을 보여야 한다.

형식적 평등을 극복해서 실제적 평등으로 들어섰다고 여길 때에 나타나는 것은 ‘사목(司牧) 정치’다. 소위 ‘장로(長老) 정치’다. 연장자의 이미지를 지닌 자만이 국가의 수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성한 목자가 우리 세상을 지배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병폐에 대해서도 신성한 목자는 전지전능한 처방전으로 해결책을 낼 수 있음에 대한 믿음의 가치가 살아 있기를 원한다.

‘타인을 다스릴 권리가 없는 자’의 ‘다스리지 않겠다’는 겸손의 가치를 사적으로 고이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4. 하나님의 통치 방식

하나님께서는 이런 백성들의 의도에 틈새를 벌리신다. 백성들이 고대하는 이상 세계를 미래에 도착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간 안에서 구성해서 개입시키신다. 이 시간은 약속을 실어나르는 시간이 두 개의 통치가 같은 시간 안에, 같은 공간에 겹쳐지게 하신다.

누구에게나 오는 약속의 시간도 아니요 아무에게나 오는 시간도 아니다. 어느 누구도(nobody) 알지 못하게 오는 시간층이다. 그것은 공적 통치 안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지는 ‘제비뽑기’ 방식의 통치다. ‘제비뽑기’란 인간 세계의 일체의 근원을 부정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everybody)의 기대를 피해가신다. 모든 인간을 좌절시키신다. 심지어 선택받은 당사자까지!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삼상 10:20)” 공적으로 제비뽑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미리 사울 머리에 사적으로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셨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 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삼상 10:1).”

즉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들의 근원성을 공격하셔서 일체 인정하지 않으신다. 인간 세계 구성 자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들만의 세계가 따로 형성되는 것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5. 준비해두신 나라

하나님의 이야기가 지상에서는 ‘죽은 자의 이야기’가 된다. 자기를 향해 달아오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여서 그 죽음으로 온통 세상을 훑고, 쓸고 다녀야 하는 자들의 이야기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에피소드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사건 안에서는 ‘죽음 이야기’로 후끈 달아오르게 된다.

다윗은 ‘이미 죽은 자’ 신세가 되어 사울 왕에게 쫓긴다. 다윗은 늘 죽음에 포위되었으며 어디를 가든지 죽음이 주변에 형성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예상치도 않는 약속이 마중 나오고 그 안에서 생존한다. 거룩한 떡을 먹게 된다(삼상 21:6). 쫓겨가면서 다윗이 구성해내는 세계는 마치 인간 세계 밖의 세계로서 유령 같은 세계며 인간 세계로부터 공격 대상이다.

사무엘은 망령이 되어 현실에 개입한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삼상 28:14).”

망령이란, 어떤 상황을 거쳐서 제대로 돌아올 자기 자리에 찾아오는 것이 당연함을 말해준다. 죽으면서도 영원히 떠나서는 아니 되는 요소를 다윗이나 망령이 지정해준다. 다윗의 여정은 세상 밖에 나가 있던 자가 예전에 없는 새로운 나라 형성을 위해 다시 찾아드는 과정이다. 이러한 여정이, 이 세상 나라 사람인 사울 왕에게는 공포다. 마치 사무엘 망령을 맞이해야 하는 경우와 같다.

세상 사람들에게 공포를 유발하는 망령의 나라, 바로 이런 나라가 주님이 준비해두신 나라다.
죽음이 나를 향하여 달려오는데 그 죽음을 향해 달려갈 것을 명받은 자들이 주님이 준비해두신 나라의 백성들이다. 이 지상에 이미 죽어 사라진 자로서 발자국을 남긴다. 더 이상 세상 짐을 질 필요가 없다. 인간 세상을 하나님께서 안 받으신다는 흔적만 남기자.


Ⅱ 본론

1. 사울의 등장
사울이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라는 데서 사사와 영속성을 갖는다(삼상 9:15-16/ 10:6, 12-13/ 11:
6). 하나님이 사울을 통해 보여 주시고자 하는 뜻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결코 사울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울은 사사와 같은 계열에 서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왕 제도 자체는 백성을 왕 개인의 것으로 사유화(私有化)하는 동시에 운명도 같이 되는 제도이므로(삼상 8:9-18) 만약 왕 제도가 구성되고 난 뒤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언약의 땅의 법칙에 부합되게 살지 못할 경우에는 왕 개인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무너지는 위험성을 갖게 된다(신 17:14-20/ 삼상 12:13-15/ 13:13).

여기서 사사의 한계성이 드러난다. 사사 임무 수행은 개인의 자질과 상관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백성의 운명이 이방의 왕 제도처럼 한 인간에 예속된다면 그 인간의 한계와 무능으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책임져야 한다. 그들을 사용하신 것은 그들의 변변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온 것을 봐서 이스라엘의 보호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한 인간이 출중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허락하신 것은 왕 제도가 이방 나라와는 달리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고자 함이다. 소위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처신은 어떠해야 하는가?

언약 안에서의 왕이 되기 위한 기름 부음을 입는 것이 아니라 기름 부음을 위한 왕이어야 한다. 그러면 언약 안에 기름 부음이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기름 부음이란 성별(거룩)과 관계되고(창 28:18/ 출 29:2, 30:23, 26) 부름이란 선택과 관계된다(출 28:41, 30:23/ 레 8:30). 따라서 기름 부음 받은 자(또는 기름 발린 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일반인과는 달리 구별되도록 선택된 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보편성만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특수성을 두어 그 특수성 안에 보편성을 흡수, 집약시켜 구원을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단, 이 특수성의 등장이 보편성에 어떤 취약점이 있다든지 제도상 모순 된다거나 문제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보편성을 유지해 나가는 기반이 특수성이 내포하는 본질과 관련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기름 발린 자가 하는 특수하고 거룩된 작업에 무관심하면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선택도 무너진다.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간택할 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을 사무엘에게 내린 것은(삼상 9:16, 10:1) 왕이라는 제도와 직능이 제사장과 같은(삼상 2:18) 차원에 두어지는 것이며, 이는 구원이 그동안 카리스마를 입은 사사 본인의 자질과 무관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왕이 모세 율법의 기준으로 봐서 백성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을 홀로 져야 하고 회복시켜 주어야 할 형편에 놓여 있다.

이스라엘의 성패가 왕이라는 인격 하나에 예속된 이 시점에서 왕이 취할 태도는 율법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카리스마적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삼상 12:13-16). 이제 왕이 하는 일은 사사시대 때 백성들이 어떤 위기와 외부의 침입에 대해 자신들의 무기력에 절망하고 있을 때와 거의 동일한 역할을 한다. 자기의 왕을 구한 죄악도 포함된다(삼상 12:19). 이스라엘은 왕을 얻어 놓고서야 비로소 우리에게는 왕이 필요 없음을 안다.

결국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발하기 위한 왕이었다(삼상 12:5). 이제 사울 왕 개인의 신앙적 위기는 곧 이스라엘 전체의 위기로 여겨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된다. 사울 왕은 개인적 자질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법보다 백성의 동향에 더 신경 썼다. 그는 백성의 편에 서지 않아야 한다는 카리스마적인 임무를 망각했다. 백성을 고발하기 위해 세워진 왕이기에 왕의 바른 자세는 늘 백성들로부터 호응받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율법을 선택해야 한다. 사울은 이점에 실패한 것이다(삼상 13:8, 14:9, 15:24). 사울과는 달리 아들 요나단은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신앙고백을 한다(삼상 14:6). 이는 왕의 기능을 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왕 자신도 이러한 왕적 직능에 예속되어야 한다. 왕적 직능이란 제사나 수양의 기름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있다(삼상 15:22-23). 이 순종이 바로 약속의 땅에서 구현하고자 한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체제이다.

2. 사울의 실각

다윗 이전에 사울 체제에 도전한 자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요나단이다. 사무엘상 14장에 보면 왕만이 행사할 수 있는 전쟁 개시를 그가 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카리스마적인 맹세를 그는 무시한다. 그것을 무시하는 이유는 왕이란 왕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백성의 구원을 위한 왕이라는 것이다(14:29). 조금 후에 백성들이 기다리기에 지쳐 율법을 어기고 송아지를 피채 먹는 일이 발생한다(14:32-3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전쟁에 성공한 후였다. 여기서 무엇이 범죄인가 하는 문제가 관심거리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14:38). 이 사실을 두고 사울은 하나님께 물어본다. 그 결과 백성들은 면제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이 남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만약 죄라면 그것은 사울 왕가의 책임임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최후에 남은 자는 사울이 아니라 요나단이다(42절).

사울은 요나단을 죽이고자 하나 백성들은 요나단을 통해서 승리하여 구원을 가져왔는데 어떻게 구원자를 죽일 수 있느냐고 송사한다. 사울은 자신의 맹세에 입각하여 죄를 결정하지만 백성들은 구원의 성취 능력을 가지고 죄를 결정하려고 했다(45절). 꼭 왕이 아니더라도 구원자는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울 왕이 가진 카리스마의 일부가 붕괴됨을 나타낸다. 즉 왕의 고유 권한이 상대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꼭 사울 왕을 통해서 일하지 아니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왕가의 균열은 도전받는 왕위의 조짐이다. 이것은 후에 또 다른 왕, 다윗 등장의 정당성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 틀림없다. 왕과 그 아들 요나단의 갈등은 다윗 통치 이후 여러 번 나타나는 모반이 다만 왕가의 대를 잇는다는 구실이라면 그 부당함이 쉽게 밝히는 데도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요나단조차도 다윗의 정통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20:16). 이토록 다윗 등장의 정당성은 사울 왕가인 요나단에게도 지지받는 일이었다. 요나단이 이해하는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다.”라는 것인데 이는 어린 다윗과 일치된 생각이었다(14:6/ 17:47).

이스라엘에게 왕이라는 직능은 하나님이 왕 없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그 방식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세 언약이 겨냥한 도달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언약의 땅의 유지책이다. 거기에 비해 사울 왕은 율법이 지닌 고발의 기능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아니했다. 이것은 직능에 위배되는 것이다.

다윗의 선택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사울의 어떤 점을 고발하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카리스마적인 사무엘의 선택마저도 거부하고 하나님이 직접 선택에 나섬으로써 인간과의 어떠한 접촉점도 허락하지 아니한다(16:6-13).

제사와 율법의 노선에서 벗어나 있다(16:2-5). 제사와 율법마저도 다윗의 자의적 행위에서 재해석 되어야 한다. 사무엘의 등장이 엘리 제사장 가문을 고발하기 위해서라면 다윗의 등장은 사울 왕가와 거기에 고착되어 있는 백성들의 현 사고체제에 대한 고발이다.

인간의 선택행위가 얼마나 부실했으며, 율법해석에 얼마나 큰 실수를 하고 있는지 새로 등장한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선택과 활동으로 분명해진다. 이방 나라들처럼 왕을 달라는 요청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바로 이해했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주장이다. 왕은 하나님이 선택하는 것이지 인간이 선택할 권리가 없다.

왕이란 직능은 율법이 추구하고 목표로 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왕은 단순히 백성의 대표자만이 아니라 율법에 의한 중보자적 기능도 있다. 따라서 왕이란 제사장직까지 흡수하게 된다. 왕을 세움으로 자신들의 부르짖는 행위를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왕직 자체가 율법의 속성으로서 백성들에게 죄를 들추어 저주하는 기능이 있음을 망각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무(無)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카리스마적인 직능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새로운 선택 안에 흡수한다(16:13). 사울과는 달리 다윗의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전개하는 것은 어린 사무엘의 의미와 맥을 같이하고 있음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다.

여기서부터 문제는 다윗이 보여주는 왕적 사역이 어떠하며 여기에 대한 이스라엘의 양분된 정치 상황과 태도를 검토하는 일이다. 동시에 두 왕이 존재하면서 나타나는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생성되며 발전되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서서히 해체되면서 그 속에서 숨소리를 내고 있는 또 다른 실체를 지닌 이스라엘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일까?

3. 다윗의 등장

다윗이 사울에게 배척받게 된 것은 백성들로부터 직접 주목을 받을 때부터이다(18:7-9). 사울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있어 백성들을 향한 유일한 통치양식으로 지속시켜나가고 싶은데 다윗으로 인해 차질을 빚고 있다고 여겼다. 특히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이 시점에서 다윗의 긍정적 활동으로 백성들의 눈에 자신은 버림당한 결정적 증거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울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다윗을 사위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를 전쟁터에 내보냄으로 다윗 죽음에 대한 책임회피의 구실도 됨을 염두에 두고 다윗을 위험한 전쟁터에 보낸다(18:25-27). 그러나 그것이 사울과 다윗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쳐지는 계기가 되는데 원인은 한쪽은 하나님이 같이 하지만 다른 한쪽은 같이하지 아니한다는 차이 때문이며 원수 관계로 표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18:28-29).

이후부터 다윗의 편이 아닌 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란 등식이 성립된다(시편에서). 따라서 다윗의 활동에 따라 하나님의 원수가 새로운 양상으로 정리된다. 다윗이 쫓겨 다니면서 사울 왕, 즉 기름 부음을 입은 자에게 행하는 태도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면 곧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뜻에 무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윗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도망자로서 살면서 그는 무엇을 이스라엘에 남기며 보여 주고자 했던가? 그것은 모든 것을 무(無)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도 다윗에게는 해당이 된다(21:1-6). 거룩과 비거룩을 다윗의 활동에서 다시 봐야 하며(23:9/ 30:7), 원수로부터 배척받은 것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의 심정과 동일한 차원이기 때문이다(23:21/24:17). 그때부터 다윗은 없이 지내는 왕, 악인들에게 쫓겨 다니는 왕, 비천하고 소외된 자로부터 환영받는 왕(22:1-2), 그런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카리스마적인 구원자의 역할을 수행한다(30:7-20).

여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 전리품(헤렘)을 유다 장로들에게 나누어준다(30:26). 이는 여호와 전쟁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여호수아와 동일한 차원에서 이루어짐을 유다 지파에 알리는 셈이 된다(수 22:8). 이처럼 그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카리스마적인 직능인 기름 부음에만 기대를 건다(24:5-6). 그는 왕 직능을 원초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하는 가운데서 발견하고자 한다. 그 원초적 모습은 긍휼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이스라엘은 구원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이스라엘을 규정한 모습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곧 긍휼이다. 긍휼을 이해 못하는 자는 비-이스라엘적이다.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은 다윗이 왕으로서 보여준 긍휼에 무관심함으로 하나님이 그를 친히 치신다(25:38). 그뿐 아니라 사울 왕도 그 아들과 함께 블레셋 전쟁에서 사망한다. 한 왕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경험하고(28:18) 새로운 왕이 그 사실을 애도함으로서 앞으로 새 왕이 등장해서 통치하는 방식은 이스라엘의 실패로 받아들임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기대를 거는 방식임을 알게 된다(삼하 1:16-27).

Ⅲ 결론

단지 성도이기에 제대로 죽는다. 주님과 동류라는 이유로 제대로 죽는 것이다. 세상이란 거대 질서는 주님을 비참하게 만들고 성도를 비참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반면에 악마는 세상을 격려한다. 희망을 제시한다. 마치 거대한 용의 몸통 같다. 악마는 인간들에게 말한다. “내 등에 올라타라. 살려줄게. 딱 붙어서 떨어지지 말라”고 하지만 복음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생애가 악마로부터 과격하게 거절당한 삶임을 알린다. 이를 근거로 세상은 악마와 더불어 불바다가 된다.

스스로 만든 관점과 말과 질서체제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인간을 가리는 그 어떤 것도 소용없다. 사람이 죽는 것은 죽을 만하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지 말자. 죽음을 지연시켜도 소용없다. 그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 것에 감사하자(롬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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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십자가 마을 겨울 수련회

1강 유령의 영토

사실이 뭐냐? 진실된 것이 뭐냐? 이익과 상관없이 진실된 것을 알 수 있다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 목숨 처리할 때가 없다. 죽기 전 내 목숨을 던져 넣을 진리가 있어야 하는데 성경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리가 있다는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목숨까지 바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을 따로 다루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을 우리가 읽고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에 있는 사실을 실제 현실로 바꾸는 분이 따로 계시다. 주님이 하신다.

성경은 진실의 세계다. 진실의 세계가 성경을 통해 나타날 때 그분은 언어에 포착되지 않는 다. 곧 유령이다. 우리는 유령과 싸워야 한다.

성경은 인간 언어에 포착되지 않는 분이 성경을 다루고 진리를 말씀하신다. 성경은 진실의 세계다.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사무엘상을 펼쳐놓고 인간 언어로 포착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진짜 하나님은 언어에 포착되지 않기에 이 자체가 죄가 된다. 성경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죄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인간들만 성경을 접근하면 신학이 펼쳐진다. 인간들의 아이디어다. 인간이 신학을 하면서 자신이 죄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다. 인간이 죄고 인간이 죄되기 위해 성경을 주었는데 그게 무엇이 나쁜가이다.

사무엘상의 전개과정은 연못에 물이 가득 찼는데 물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른다. 물을 다 빼니 괴물이 등장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인간세계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언어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사무엘상은 샤머사회다. 무당들의 사회다. 그래서 인간들은 여기에 대해 기분 나쁘다. 그래서 인간들은 무당사회를 문명사회로 바꾸려고 한다. 문명사회는 질서가 있다. 샤먼사회는 질서가 없다. 통합이 되어야 한다. 질서가 한곳에 모여야 한다. 그곳이 왕 자리인데 왕 자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인간 사회의 모든 언어는 왕 자리가 극한이다. 왕 다음은 없다. 왕이 하는 일은 국가를 보호하고 유지 지탱시키는 일이다. 최고의 공동체는 국가다. 사무엘상에서 이것을 말해준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시라 여기는 말씀을 다루는 분이 따로 계신다. 유령의 세계다.

사무엘 상 10:10 그들이 산에 이르되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했고,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한다. 삼상 19:22 다윗을 잡으러 갔을 때 예언을 한다.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다. 인간의 이성으로 통제가 안 된다. 인간 언어에 포착되지 않는 사회다. 유령의 사회, 샤먼의 사회다. 인간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씀을 캐내어 도로 내 의미로 가져올 수 없다.

샤먼 사회는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데 그 죄는 문명사회, 앞뒤가 분간되는 사회, 체계가 잡힌 세계다. 곧 왕의 자리다.

이스라엘은 왕이 있으면 안 되는 나라다. 샤먼 사회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언어에 포착되지 않는다. 왕의 위치에 제사장이 있었다. 제사장이 있으면 되지 왜 왕이 끼어드는가? 제사장은 무당을 모집해 세운 것이 아니다. 제사장은 시내산에서 내려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어 시내산에서 지시하셨다.
제사장은 시내산을 기원으로 한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통해 제사장의 복장과 할 일이 내왔다. 제사장 사회가 어떠한지를 알려 주셨다. 제사장들의 특징은 중앙부분이 비어있다, 성막에 있는 지성소. 그곳에서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이 올라온다. 그곳을 이 땅의 것으로 다 채우지 말라.

이스라엘은 왕의 자리를 비워놓으려니 허전하다. 그래서 세상 나라처럼 힘의 출처를 세상 나라처럼 매꾸면 안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자리인 공백을 메꾸어 버리면 예언이 막힌다. 예언이 오면 해석할 수 없다.

예언이 그냥 와 버리면 왕 자리를 쳐다보는 인간은 해석할 수 없다. 힘의 중앙을 비울 것인가, 채울 것인가? 이성적인 문명사회를 원하는가, 샤머니즘 사회를 고수할 것인가? 샤머니즘 사회를 유지할 때 시내산에서 주어진 교류가 이스라엘에 유지되기 때문이다..

왕 자리, 가장, 당회장 자리의 힘이 유지 되려면 구심점이 있어야 되고, 구심점을 위해 각자의 힘을 양도해야 하고 그 힘이 집결된 곳이 왕의 자리다.

힘을 양도한다는 것은 왕의 지시를 따르겠다는 것이다. 너희에게 직접오는 계시는 없고 왕에게 종속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왕이 있어야 될 나라가 아니다. 왕의 자리는 비워 놓아야 한다. 제사장 제도에서 중앙은 비어있다.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힘이 나온다. 그 힘은 인간과 협의하고 타협하는 힘이 아니라 인간을 죽이는 힘이다.

생명나무가 위에서 눌려버리면 선악과로 사는 인간은 마땅히 심판받아야 된다. 그래야 선악과 존재를 부각시키는 취지로 선악지식을 아는 자를 심판하는 것을 유지시켜야 하나님의 취지인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 유지된다.

샤먼사회와 문명사회의 대비로 보면 사무엘상을 하나로 꿰뚫어 볼 수 있다.

한나의 기도는 엘리 제사장이 보기에 술에 취했다. 언어의 혼란이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언어가 정돈되지 않는다. 어린 사무엘이 언어와 분리된 세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엘리 제사장이 자신을 불렀다고 세 번이나 생각한다. 사무엘은 언어와 밀착된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성과 못하는 것을 분리하면 사무엘상 윤곽이 잡힌다.

삼상 5장에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다곤 신당에 두었는데 다곤신상이 엎드려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머리, 두 손목은 끊어졌고 다곤의 몽둥이만 남았다. 이런 일이 문명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가? 상자를 두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암소들이 떨어진 새끼가 있음에도 곧장 베스메스에 도착하는 것, 삼상 6:19 언약궤를 들여다봤다고 칠십 명이 죽음, 이스라엘은 백성을 죽였다. 아군과 적군이 구분인 안되다. 삼상7:10 번제 드릴 때 우레가 발하여 블레셋과 싸워 승리함. 삼상 10:10 사울이 하나님의 신이 임해 예언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왕 있는 이스라엘로 진격하게 되면 문명사회를 죄로 규정한다. 죄가 더 크진다. 죄가 죄답게 더 크진다. 다윗이 골리앗을 제거하고 블레셋을 쳤으면 다윗을 인정해야 하는데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지 못해 환장을 했다. 다윗에게 일어나는 이해되지 않는 승리가 사울을 약 올려 악신 들리게 만든다. 다윗이 성신 들렸다. 충돌이 일어난다.

힘은 상호작용으로 충돌한다. 세상의 힘은 힘의 구심체를 만든다. 개별적 단위체다. 입자다. 상호작용은 본인의 결정이 아니다.
사울은 악신에 걸렸고 다윗이 수금을 타니 악신이 물러간다. 성신, 악신은 보이지 않는 상호 작용을 제시한다. 성신과 악신은 매개입자로 작용한다. 둘 사이를 붙잡아 주는 매개입자.

광자, 보숀도 매개입니다. 한쪽에 쏠리지 않고 묶어준다.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있다.

입자를 쪼개니 매개입자가 있더라. 입자가 뭉쳐져 원자가 되고, 분자가 뭉쳐져 단백질 구조체가 되고 유기체가 되고 모여 인간이 된다. 인간의 모든 두뇌는 전기적 힘에 의해 주고 받아 자극이 사랑이다. 에너지 전달과정에서 자극이 생겨 개념이 생기고 이미지를 만들고 언어가 생기고, 소통이 되고, 집단적 지향성, 사회를 이루고, 상호작용의 힘을 이루는 것이 국가다.

성경은 왜 있는가? 기독교 믿는 사회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모든 중심은 힘의 축에 의해 과거로부터 유지되어야 되기 때문이다.
혈육-가족-시민단체(사회)-국가를 이룬다. 국가가 끝이다. 국가가 되면 다른 나라를 침략한다.

시민단체 사회는 자기 이익만 추구하기에 국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국민들은 국가에 충성해야 된다. 나라가 있어야 교회가 있고 성당이 있고 가정이 있다. 나라가 든든해야 가정이 산다. 정 밀들면 이민가면된다.

국가가 서로 협의 하고 단합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타국가와 동일할 수 없다. 실제 인간들이 살아가는 속내는 우리나라 만세다. 내가 살 동안 내가 속한 나라가 든든하면 침략해서 다른 나라를 뺏어 다른 나라 백성을 노예로 삼아야 한다. 인류역사가 이런 일을 해 왔다. 무리한 짓을 한 것이 역사다. 과거에는 대포로, 지금은 금융자본주의 방식으로 침략한다. 지금이 훨씬 종속적이다.

사회 국가는 오직 힘만을 숭상한다. 내 속의 입자의 힘이다.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다.

모든 것은 힘이다. 힘 뒤에 무엇이 있는가? 파동이 있다. 내가 파동 밖에서 관찰할 때 파동이 입자로 바뀐다. 파동은 에너지로 되어 있다. 관찰하는 순간 입자로 바뀐다. 파동과 관찰자인 내가 상호작용하고 있다.

그러면 왜 사람은 힘의 응축을 좋아하는가? 내가 구체화되면 너가 필요 없게 된다. 최후의 내가 되기 위해 남이라는 남을 모조리 죽이면 된다. 나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가? 만나는 자를 다 죽이기 위해서다. 이것이 나답다. 그런데 이 죽이는 것 속에 하나님도 걸려든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너는 내 앞길 막지 말라. 십자가 사건.

사무엘상에서는 반대로 진행된다. 유령이 입자를 죽이는 것이 사무엘상이다. 사무엘 상 마지막에 유령이 등장한다. 사무엘이 죽었는데 죽은 사무엘이 나타난다. 예언이 살아 있다. 입자가 없어도 파동이 남아 있다. 그 파동은 사울 왕은 죽는다는 말한다. 사울을 죽이기 위해 사무엘을 미리 죽이셨다.

역대상 10:13 사울이 죽는 것은 여호와께 범죄함이라.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여 여호와께 묻지 않았기에 죽는다.

왕이 무너지만 이스라엘이 무너지기에 신접자에게 묻는다. 블레셋은 힘의 나라다. 힘의 나라는 오직 자기국가밖에 모른다. 내가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내 앞에 모든 나라는 없앤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했다.

사무엘이 죽기 전까지는 무당같은 사무엘같은 자로부터 참고를 받음. 그런데 사무엘이 죽었다. 왜 사무엘을 죽이시는가? 사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드러내기 위해. 우물물을 다 빼 내니 괴물만 남는다. 인간은 영물이다. 인간은 요물인데 왜 모르는가? 본인이 본인을 보니 보는 순간 입자로 변한다. 영으로 보이지 않고 개별 존재체로 보인다. 힘의 구심점으로 보인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 하나님은 입자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것을 창조하셨다. 낳았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서 본인이 본인을 살려야 된다고 생각함. 본인이 본인을 관찰하고 지탱한다.

힘의 구축이 나온다.

저주받은 땅에서 이마에 땀을 흘린 노력으로 내가 밥먹고 산다. 이것이 혈육, 가족, 사회공동체, 국가로 간다. 저 국가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 약속의 자손인 히브리인들을 이스라엘 국가로 만들었다. 표준을 만들었다. 키트. 하나님께서 키트를 갖고 내가 만든 사람이 맞는지를 보신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모든 제도가 위에서 내려왔다. 모세만 올라갔다. 오직 이스라엘 자체의 모든 시작점이 샤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힘의 세계가 아니라 예언의 세계요 말씀의 세계다. 끊임없이 이스라엘이 말씀의 세계가 맞는지 아닌지 대조가 되어야 된다. 사무엘상의 흐름이 두층으로 되어 있다. 하나의 일을 통해 가능성이 둘로 나누어짐. 중첩. 중첩되면 갈라지면서 분기점이 나온다. 분기점에 서 있는 사람이 사무엘, 요나단, 다윗이다.

다윗은 제사장 중심의 이스라엘이 붕괴하면서 새로운 매개입자로 등장한 사람이 다윗(요나단) 사무엘이다. 이스라엘이 망해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상화작용이 가능하도록 붙여주는 역할을 사무엘이 다윗과 요나단이 함.

하나님의 언약, 기름 부은 자가 나올 것이다. 언약의 세계가 따로 놀고, 사울의 세계가 따로 논다.

이것을 위해 지상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이 등장하기 위해 아래층에 죄악 된 일이 필히 일어나야 한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육신이라는 죄와 함께 있다. 악마와 떨어져 있지 않고 결합되어 있다. 이것을 물리학에서는 스핀이라고 한다. 스핀으로 설명하니 한쪽으로 빠지지 않는다. 하나의 전자가 자체 괘도를 유지함. 서로 상반되는 힘이 서로 견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의가 된다. 열려 있으면서도 닫힌 구조를 같이 갖고 있다. 죄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는 방법은 죄가 나오는 방법밖에 없다. 육신의 죄가 나오는 방법이다. 이것을 우리를 대표해서 사울왕이 보여준다. 키트가 사울왕도 있어야 되고 다윗왕도 있어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온전한 이스라엘까지 악과 의가 중첩되어 나란히 끝까지 간다.

언어의 파괴, 문장의 파괴도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전쟁할 때 제사를 먼저 드려서 한다고 하셨다. 제사를 반드시 드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무엘 상 15:22.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 사울이 제사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해야 하지 않는가?

문제는 약속시간을 사무엘이 어겼다. 블레셋으로 인해 군사들이 다 흩어지니, 입자의 힘이 끊어지니 사울이 왕 행세하기 위해 제사를 지냄, 그 순간 사무엘이 등장한다. 사울을 질책하기 위한 사무엘 선지자. 잔소리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사무엘이다. 우리에게 마음껏 죄짓게 하시고 성령으로 책망하심. 이것이 하나님 백성다움이다. 키트다. 책망 받으면서 책망없는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하신다.

2강
예언과 소유
유령의 영토의 반대는 삶의 영토다.

사무엘상 1장에 브닌나가 등장한다. 엘가나가 제사 드리는 날, 브닌나와 한나의 이야기가 나와 있다. 삶의 영토는 소유로 이야기할 수 있다. 소유는 소유로 말을 전달할 수 없다. 소유가 되려면 소유를 제거해야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태어난 목적은 타인을 죽이기 위해, 남을 죽여야 나답게 된다.

소유는 다른 소유에게 말을 전하기 위함이 아니다. ‘됐어’, ‘살아있는 것’, ‘잘했어’, ‘훌륭했어’, ‘대단해.’ 살아남은 자들끼리 찬미하는 그것뿐이다. 살아남았다는 자체가 승리가 된다. 소유가 있다는 자체가 이러하다.

살아남은 자끼리 서로 하이파이브 한다. 자기 찬미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말을 전달할 수 없다. 브닌나는 한나에게 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자기찬미를 한다. 삶의 영토다. 너는 아들이 없지, 나는 아들이 있다.

이에 반해 영의 영토는 언어를 전달한다. 말을 던진다. 언어가이 소유를 뭉개는 것이 사무엘상이다. 말이 소유를 박살내는 것이 사무엘상이다.

소유는 입자요 입자는 힘의 집결이다. 말이 힘의 집결, 개별체를 박살낸다. ‘됐어, 살아 있는 것, 잘했어, 훌륭해, 대단해’를 박살낸다.

일반 사람들도 서로에게 말을 주고받지 있지 않는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말을 할 때 그 말을 내가 지금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르고 말을 한다. 인간은 말을 해도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나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말을 할 때 생각하고 말한다. 내 생각은 나만 안다. 그러니 내 생각을 타인이 모른다. 그래서 말은 나에게 돌아온다. 나를 찬미 할테니 너는 박수나 쳐라.

통계에서 부부가 결혼 후 7년 동안 말하고 7년 후에는 말하지 않는다. 부모가 아이에게 말할 때 칠세까지 말하고 그다음부터는 말을 하지 않는다.

소유는 예언을 다룰 수 없다. 예언을 다루지 못하면 언약에서 배제되고 그것을 죄라 한다. 소유는 유령의 영토에 속한 예언을 다룰 수 없다. 예언이 등장하는 경우는 이 소유가 악으로 들추어내기 전에는 예언은 주어지지 않는다. 예언이 등장했다는 말은 너희들은 자기 찬미는 죽었어라는 말이다.

한나가 자식을 낳았는가, 언어를 낳았는가? 한나는 자식을 낳은 것이 아니라 사무엘, 예언자를 낳았다. 말을 낳았다. 자기 소유가 아니기에 하나님께 갖다 바친다.

이 세상의 말은 들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사무엘의 말은 들을 대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언약궤다. 가로 110센티미트 세로 68센티미트 높이 68센티미트 되는 상자를 향하여 사무엘은 말을 던진다. 달리 말하면 언약궤가 유령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말하는 자를 이 인간의 영토, 이스라엘에 만들어 낸 것이다. 언약궤가 만들어 냄.

브닌나가 아들 낳았다고 자랑질하기 때문에 언약궤와 소통될 수 없는 것이다.

사무엘이 언약궤에 말을 던지기 위해 그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 브닌나다. 소유했다는 것이 성공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망했어. 망했어다. 소유가 있으면 언약궤가 배제된다. 소유가 있으면 예언을 다룰 수 없다. 가진 것이 아깝기 때문.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떠날 수 밖에 없다. 돈을 갖고 예수님께 영생얻는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네 가진 것 갖고 지옥가든지, 아니면 말씀되신 예수님을 선택하든지 하라고 하니 부자가 근심하며 돌아갔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이렇게 말하면 저에게 통장에 이십만은 있는 것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 돈이 있다는 것이우리 자신 속에 유령과 삶이 겸비하라고 있다. 스핀이라고,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자체적으로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주셨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 육신 가운데 들어오신 것이다. 이 자체가 브닌나, 소유이기 때문이다.

브닌나의 소유가 존재를 출현시킨다. 존재는 경계선이 쳐진다. 여기까지는 내 것 저기까지는 네 것이라 해줄게. 소유가 없으면 존재가 없다. 아무것도 없기에 마포대교에서 자살한다. 내가 나되기 위해 끊임없이 모아야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의 영토다.

그래서 사람들의 대화는 남에게 자기 소유를 이야기한다. 너 취직했니? 나 취직했다는 말이다. 나 중소기업에 취직해 한달에 이백받아. 너는 어디에? 난 삼성에 취직했는데 육백받아. 그러면 난 너 죽여 버리겠어가 된다.

왜냐하면 나보다 수입이 많은 자를 죽여야 내 소유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해결책이 없다. 힘과 힘의 부딛힘이다. 소통이 될 리 없다. 여기에 한꺼번에 죽여줄께가 언약궤다. 언약궤만 남기고 다 죽인다.

예수님을 말씀으로 보내셔서 말씀으로 이 세상 모든 소유를 심판해버린다. 이 사건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다. 약속이 거대제국 애굽을 이긴 사건이다.

사무엘상을 읽어보면 꾸준히 핵심 내용이 반복되어 나온다. 옛날에 바로의 집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런 식으로 끄집어내어 주었잖아는 이야기가 사무엘 상에서 꾸준히 나온다. 2:27, 4:8, 6:6, 8:8, 10:18, 12:6,8; 15:2,6 절에 나온다. 계속해서 애굽에서 너희들의 부르짖음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다고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이 거대 힘의 집합체, 국가라는 힘의 집결체를 박살낸 사건이다.
하나님이 국가 집결체를 박살낸, 묵사발 만든 사건이 출애굽사건이다. 그 애굽 사건을 사무엘상에서 되풀이 하는 것은 이스라엘은 애굽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함께 할 나라는 절대 이세상의. 삶의 영토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말씀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약속의 세계다. 말씀이 나오는 원천은 언약궤다. 언약궤에 대해서 현재 이스라엘이 얼마나 잘못 사용하고 있는가를 언약궤를 뺏은 블레셋을 통해 이스라엘이 곡해 했는가를 이야기 해준다.

블레셋은 언약궤를 액땜용으로 사용한다. 내 소유 흠집을 처리해주는, 보완해 주는 액땜용으로 언약궤를 사용한다. 이스라엘이 백성이 전쟁에 언약궤를 앞장세우니 블레셋이 “우리엑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블레셋이 출애굽 사건 소문을 듣고 알고 있다. 이스라엘을 항상 승리케 하는 무기가 있는데 언약궤라고 블레셋이 잘못 생각하듯이 이스라엘도 잘못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앞장세워 이만한 힘을 누가 당할것인가? 소유가 소유되게 하는 승리를 위해 언약을 앞장세웠지만 언약궤를 빼앗겼다.
마치 브닌나가 아들 가졌다고 형님은 아들 없지요 라고 하면서 남편사랑 독차지 하겠다고 하는 그것, 자식을 자신의 힘의 소유로 여겼던 것과 동일한 사고방식이다.

삼상 6:6절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을을 강퍅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함녀서 금독종 형상 다섯과 금쥐 다섯을 만들어 언약궤와 함께 수레에 실어 액땜하듯이 보낸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있을 때 자기 소유를 지키기 위해 언약궤를 사용함. 삶의 영토다. 살아남으면 성공했고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무엘은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 어떻게 처리하는가? 사무엘의 모든 말은 언약궤 답게 작동하는 예언의 말씀으로 예언한다. 언약궤 쪽으로 예언한다.

현 이스라엘을 언약궤 안에 집어넣고 못을 박아버린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언약대로 움직인다. 언약대로 움직인다는 말은 애굽에서 나온 약속의 원칙에 위배되면 이스라엘은 망한다. 언약궤 내부에서 망하기에 언약대로 이루어진다. 십자가 안에 들어가야 산다.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 안에 들어가 두 번 다시 못 나오게 못을 박아야 한다. 탈출하면 지옥이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된다. 내 소유를 죽여줘야 한다. 그렇다면 사무엘 말씀대로 언약궤대로 성사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죽은대서 살아난다. 살아난 이스라엘은 어떤 모습인가? 그 모습이 다윗이다.

언약대로 나온 것이 다윗 왕이다. 다윗 왕이 나오기 전에 죽을 왕을 먼저 주셨다. 사울 왕이 죽어야 된다는 것은 사울 왕을 옹립한 모든 이스라엘은 사울 왕과 함께 죽어야 된다는 것이다다. 그곳에서 다윗이 빠져 나왔다는 말은, 언약의 완성의 의미에서 다윗 왕이 빠져 나왔다는 말은 곧 백성이 생산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다윗의 등불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존립은 개개인의 자질과 신앙이 아니라 다윗의 등불이다. 신약에 오면 예수 이름으로 새롭게 등장한 주의 이름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다. 새롭게 생산된 성도. 기존 나의 이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나는 죽고 나와 함께 묻혔던 분이 내 대신 먼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헤이, 성령으로 우리이름을 불러주면 그때부터 우리는 나의 이름은 죽고 주의 이름으로 산다. 이름을 늘려보면 우리 인생이다. 아담은 흙이고 흙으로 돌아가는 고단한 인생이듯이.

삶의 영토에서 보면 NPC 가 된다. NON PLAYER CHARACTER 게임할 때 프로그램에서 미리 작동하게 하는 것. 내가 다룰 수 없는 것. 이것이 유령이다. 이것은 고정적이다. 확정적이다. 주님은 고정적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호들갑을 다뜬다. 매사가 자기 뜻대로 안되니 금식, 기도 예배 헌금 전도 등 온갖 호들갑을 뜬다. 이것은 고정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모방해서 내가 나를 영원히 고정된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절대 신이 되고 싶어서다. 우상이 되곺다는 겁니다.

이 고정된 것을 폴대라면, 장대라면, 이것을 두고 돈키호테처럼 너 뭐 잘났어라고 하면 술에 취했다고 한다. 인생이 취했다.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고 하는데 십자가만 다냐? 내 몸은 왜 아픈데. 내 병 낫게 하면 십자가 믿어줄게. 자기혼자 횡설수설하고 있다.

당신이 십자가 졌는데 왜 우리 교회 교인은 자꾸 줄어드는가? 이런 짓을 사울왕이 했다.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다. 내가 잘해야 이스라엘이 산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날 도와주지 않는가?

삼상 15:2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사무엘의 일은 애굽에서 나왔을 때 약속을 바라보고 말을 던짐. 죄를 죄되게 도출되게 하기 위한 작업니다. 내 소유, 나만의 소유가 따로 있다고 우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출애굽 정신과 배치된 방식이다.

지금가서 아말렉을 진멸하되 남녀소아 젖 먹는 아이까지, 정인이까지 다 죽여라. 젖먹이도 입자요 소유다. 한나는 아들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아들 있는 것이 왜 죄인가를 알려주는 말씀을 원했다. 그래서 삼상 1:6절에서 대적이라 한다.

진멸하라고 하니 사울이 출애굽 정신에 입각해서 약속이 소유를 무시한다고 생각하여 약속을 위해 진멸해야 하는데 사울은 순종하지 않는다. 진멸은 했는데 가치없고 낮은 것은 진멸했다.

교제 1페이지 위 12
악과 선은 여기서 자신에게 고통주는 것은 악,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선. 진실을 짜맞춤. 현실은 저주받은 것으로 퍼즐그림이 짜 맞춰짐.

사는데 부담없이 살면 진리.

왜 사울 왕이 진멸하지 않는가? 내가 진멸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구분함.

두 구의 시체가 장례사 앞으로 왔다. 천국과 지옥의 분류 기준은? 성립 안됨. 천국은 예언의 세계요 약속이 세계다. 그러니 소유가 죄가 된다. 이스라엘과 성도는 알아야 된다. 그런데 브닌나는 한나에게 아들을 소유로 자랑함. 소유 없는 것은 지옥, 소유 있는 나는 천국간다고 이야기함. 본인에게 찬미가 되돌아옴. 브니난의 소리를 우리는 평생하고 있다. 브닌나는 자신의 말이 말도 안되는 것을 모른다. 브니난를 정신차리게 하는 방법은 기도했는데 아들이 생겼다로 다가감. 기도 했는데 아들 생김. 구박하는 브닌나가 없었으면 아들 안 생김. 아들의 출생은 브니난의 죄를 까발림. 주께서 오신 것은 우리 죄를 까발리기 위해 오셨다.

소유를 버리는 것도 저주 받을 짓이다. 심판은 주님 마음대로다. 만약 장의시가 죽은 시체의 인생을 안다면, 착하게 산 사람을 천국, 나쁘게 산 사람을 지옥간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 깊이 들어가면 죽은 시신이 장례사 나보다 더 착하면 천국, 나쁘면 지옥간다는 말입니다. 착함에 대한 장례사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착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조폭들도 착하게 살자고 한다.

자기 소유로 돌아옴. 브닌나가 한나가 아들을 낳지 못했을 때 신났다. 소유가 없는 것은 존재가치가 없다.

사울이 좋은 것을 살렸다는 것은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릴 수 있는 근거로 아말렉 전쟁을 함. 목사가 복음 전해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을 때 자신의 목사 정당성이 공고화 되는 것과 같다.

목사가 고별설교할 때 이웃에서 교인수가 오십명이 들어 왔을 때 그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 부부 싸움에 이혼하려는데 주식 대박이 나면 이혼하겠는가? 잠시 보류한다.

이처럼 선과 악은 자기 소유의 강화와 관련

출애굽 취지를 살리려면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사울은 이번 전쟁을 통해 백성들로부터 인기 얻고 왕의 권력의 강화를 노렸다. 하나님의 약속의 유지되어야 될 이스라엘의 위상이 힘들어짐.

삼상15:10 내가 사울을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부르짖음.
하나님이 후회할 짓을 사울 왕이 했다. 사울 왕에게 후회할 짓을 했다고 촉구하는 의미해서 후회하셨다고 하심. 내가 너라면 후회하겠다는 말씀이다. 너라는 존재는 나에게 도움되는 존재가 아니라 훼방하는 존재, 방해하는 존재임을 이제 알았느냐는 것이다.

15:22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길갈로 내려갔다. 자기 이름을 세김. 사울의 행동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똑똑히 보여준다. 인간이 살아가는 길마다 자기 기념비를 세우는 짓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금도 기념비다. 나는 나로 인하여 살겠다. 내 소유로 인하여 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인간들이 하나님의 예언을 다룰 자격이 못된다.

이해 반해 사무엘은 어떤가?
은퇴할 때 너희 것을 탐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사울의 문제점과 브닌나가 아들 낳았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음. 유령의 영토와 땅의 영토가 중첩됨. 매사 소유에 쏠림에 충실하라. 자기밖에 모르는 일이 충실하라. 이것은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죄일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중첩된 예수 이름. 죄 씻어주는 주의 이름이다.

이 구조다 이스라엘 구조다. 위에서는 예언, 아래쪽은 소유. 소유가 크지만 예언도 크진다.우상숭배를 통해 예언을 공격, 예언은 피해를 입는다.

율법에 피흘림으로 죄용서된다는 취지가 분명해짐. 구약은 선지자들이 피흘리다, 예수님이 피를 흘림. 신약으로 올수록 더 확고해짐. 하나님이 죽을때까지 예언이 멈출 수 없음. 언약궤에 피가 뿌려졌기에 진노가 멈춤.

예언의 관 안에 이스라엘을 집어 넣고 못을 박음. 폐쇄공간이다. 이스라엘은 그 안에서 손댈 수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과만 상대하며 상호작용하는 폐쇄공간,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잡는 관계, 십자가 안, 성령 안, 십자가 안에서 화목케 하셔서 구원하심.

3강.
사울이 자기 국가에 대해 관심갖는 것이 삶의 영토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국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의 소유를 따로 가지는 것이 존재이유요 목적이다. 사울왕의 명분은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적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니 싸울 수 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왕권을 강화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15:13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왕의 자리가 빈자리가 될 때, 작다, 그 왕이 다윗 왕이다. 다윗은 매개입자다. 매개입자의 특징은 질량이 거의 없다. 만약 진짜 진량이 없으면 천사와 같다. 천사는 진량이 없다.

물리학계에서 매개입자 진량이 아주 없이 않으니 진량을 부여해 주려 한다. 힉스입자. 30만 킬로미터 속도를 넘을 수 없다.

이것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가는 모든 것은 빛의 속도 안에서 움직인다. 만일 있음에서 없으로 나가면, 없음의 세계는 유령의 세계다. 유령의 세계는 인간의 언어로 포착못함. 위협적인 존재. 이런 존재는 있음의 존재에서는 제거대상, 죽여버린다.

눅23:28 여자들이 따라가면서 운다. 우는 이유는 나보다 불쌍하기 때문에.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않아야 할텐데 걱정이 되어 운다. 나는 어떻게 살지 자기 걱정하면서 운다.

예수께서 돌이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너희가 날 걱정할 군번이 아니다. 예수님은 언약궤다. 예언이 등장하는 것은 죄를 죄인줄 모르는 것을 들추어냄. 자기 소유를 지켜내지 못할 때 운다. 있음의 세계는 유령의 세계가 위협적이다.

예수님은 참 좋은신 분이라는 것은 난 당신의 일에 관여하기 실다. 내것 다치면 안되기 때문이다.

위협적 존재를, 있음을 가지고 유령의 세계를 처리하는 방법.
i 곱하니 마이너스가 나오는 것. 허수를 통해 경계짓는다. 과거에는 삼차공간이었는데 이젠 XYZ에 시간을 집어 넣는다.

우주는 광속으로 움직인다. 이 세상에 멈추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NPC가 없다. 모든 것은 상호작용한다. 불교와 비슷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원인,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은 이유는, 왜 진멸하라는 말씀을 못 지키는가? 인간이 행동에 나설 때 순수하게 나설 위인이 못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유불리를 계산해서 행동에 나서기 때문이다.

유불리를 누구에게 배웠는가?
어린아이의 환경은 기성세대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이 둘러쌈. 여기에서 잔소리가 나온다. 옳고 그름에 대한 잔소리를 들으면 여기에 아이가 맞추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나의 욕망은 날아가고 타인의 욕망이 나의 욕망이 된다. 아버지의 기대감에 내가 살아간다. 너는 머리가 좋으니 사법고시에 합격해라 했을 때, 아버지 돌아가시면 합격증 들고 무덤에 찾아간다.

왜 아버지에게 그렇게 하느냐? 아버지의 요구사항을 들어줘야 아들 답고, 아버지와 상호작용은, 가족의 힘은, 내가 효자가 될 때 가정의 영광은 빛난다고 생각한다. 가족 씨족 사회 국가가 되면, 국가의 명예를 위한 삶의 명분 범위가 확장됨.

모든 인간은 자체적으로 자기의 자아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기존 사회가 없으면 자아가 구성되지 않음. 아버지 소원을 들어 주지 못해 정신병 걸림.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기대 거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서 되겠는가? 정신병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언제 기대하셨는가?

사울이 악신걸렸다. 인간은 영물이다. 성신 악신은 매개입자다. 악신걸렸다는 것은 자기기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기념비 세운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제사 드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은 것을 살린 이유를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라고 하니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함.

제사가 순수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이 왕임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삼상 15:32 사무엘이 너희는 아각을 내게로 이끌고 오라. 사무엘이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었다. 이간의 존엄성이 있는데 무슨 원한 유발을 위해 이렇게 찍어쪼개어 죽이는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약속이 없으면, 예언과 접촉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인간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타국과의 차이점이다.

오늘날 주님이 우리를 쪼갠다. 주님 앞에 쪼개질 때 우리는 주님께 참예된다. 이것은 횡재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못 쪼개기 때문이다. 우린 줏기 바쁘다. 또 쪼개진다. 그렇게 성도는 산다.

그러면 도대체 국가는 도대체 무엇인가?

삼상 2장에서 브닌나는 자식을 소유하길 원했고 한나는 예언의 말씀을 드러낸다.
삼상 2:1절 한나의 찬양이 나온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후 찬양과 동일하다. 정답은 한나가 마리아의 것을 베꼈다. 유령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입자가 아니고 파동도 아니고 사건이다. 속도 속력이 없다. 그러니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량이 없다 정도가 아니라 허수 질량, 허수 시간이 나온다. 사건만 나온다. 불꽃놀이. 올린 적이 없는데 하늘에서 터진다.

사건은 소유대상이 되지 않는다. 사건은 우리가 유발하지 않았다. 예측이 안된다. 관찰,관측 측량이 소용없다. 예언이기 때문이다. 한나의 예언에 주목해야한다. 그 이유 10절 여호와께 대적하는 자를 산산이 , 기름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라.

한나의 예언정신이 사무엘에게 그대로 이전됨. 사무엘의 정신이 다윗에게 이전. 다윗의 자손이 복음이 말하는 당사자, 인물이다. 다윗이 왕되기 위해서는 한나의 예언이 집약된 왕이 등장해야 한다. 예언에 소유로 자랑하는 자를 치는 작업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자가 진짜 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짜 왕이 필히 등장해야 한다.

삼상 8장 사무엘이 늙고 아들은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이를 따라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한다. 사무엘은 말이고 아들은 소유이기 때문에 서로 다름. 아들은 자기 소유로 가버림. 엘리 제사장처럼 자식들을 감싸지 않음.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이 모여 우리에게 다른 나라와 같이 왕을 세워 달라고 함. 사무엘이 왕이 다스리는 제도를 알려줌. 소유함. 아들들을 천부장으로. 왕이 너희 마음 상태가 그대로 구현된 것이 왕이다. 소유의 집약. 왕제도다. 왕이 있음으로 국가로서 권력을 행세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게 좋으냐고 하니 우리에게 왕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왕의 정신상태나 그 백성의 정신상태가 둘다 똑같다. 목사가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사고방식이 문제다. 목사는 복음만 전하면 된다. 국가라는 것은 이념적인가?(상상의 제도인가?) 아니면 실제적인가? 이념적이면 정치적이고 실제적이라는 것은 경제다.

경제적으로 떠받쳐서 정치적 왕이 힘을 발휘
출애굽정신을 놓침, 출애굽 정신은 하나님의 소망이지 우리의 본성이 아니다. 우리의 소원을 사울왕이 들어준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와싱턴, 제프슨, 프랑스 독립혁명정신 부여, 인간은 동등. 삼백명 노예갖고 있는 제프슨이 말함. 헤밀튼-뉴욕맨허턴,- 연방나라를 만든 것은 정치적이 아니라 경제적이다. 부채를 연방정부에 넘기고 싼 값에 기업에 대출해줌. 관세 높게. 자원은 높은 가격으로 수출, 통합된 금융제도로 처리.

뉴욕을 보면서 이런 곳에 어떻게 살까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센트럴 파크 주변 최고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윗 편이 아니라 사울편이다. 심지어 다윗도 사울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출애굽 정신에 입각해서 다윗을 사울에게 계속해서 쫓기면서 출애굽 정신을 구현해 낸다. 이것이 복음적 변화다. 돈을 좋아하고 지기 싫어하면서, 기름 부음 받았는데 어떻게 중첩되어, 동시 다발로 두명이 등장,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사울을 따르든 백성이 다윗을 따른다? 뭔가 수상하다. 왕을 달라는 정신이 동일하다. 출애굽 정신, 하나님의 언약구현이 아니다. 내가 풍요하게 살고 싶은 심보가 천천보다 만만이 낫다는 것이다.

이기는 방법을 할례 있다 없다이다. 시내산 위에서 율법이 내려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끊어지면 그 자체가 저주다. 계약으로 율법을 주셨다. 하나는 지켜라. 또 하나는 못 지킬 때 죄 씻어줄게. 책에다쓰고 피를 부음. 모든 구현은 죄사함으로 이루어진다. 이 정신을 모름. 동행해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번제 화목제 잘 드리면 복 받을 줄 생각함. 본인을 잡아야 하는데.

본인을 잡을 생각하지 않고 소나 양을 잡았다. 이렇게 하면 받겠지라고 생각한다. 본인을 드려야지 십일조 드린다. 뒷방 노인처럼 용돈 드리듯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말씀하신 것은 진멸에 왜 너 자신을 안 드리고 너를 남겨놓는냐는 것이다. 자유 낙하하듯이 약속 속에 뛰어 들어가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뛰어들어 갈 사람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 자체를 어린양, 제물로 삼는다. 이미 네가 제물이라. 네가 드린 것이 제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몸을 드림으로 내 몸이 제물이 아님을 알아라. 네 몸은 어떤 말씀도 지킬 수 없는 몸으로 타고 났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악하게 태어났다. 어린애들도 악하게 태어났다. 교수님 백날 가르쳐도 안돼. 개는 개다.

우리는 인간되면 안되고 인간을 포기하라고 인간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이 얼마나 즐겁고 가벼운 마음인가 ? 사울을 고집이 세서 버틴다. 내가 왕인데. 그래서 다윗을 창으로 죽이려고 함. 악신들린자가 성신들린 자를 없애려고 함. 나만 있어야 한다.

매개 입자는 사건이기 때문에 사울 왕이 네가 참으로 옳다고 하면서 네가 왕이 되어야 된다고 함. 자기도 자기 맘대로 못함.

우리가 사울이다.

만일 여러분이 담임목사인데 부목사가 설교를 더 잘하면 종용히 불러 쫓아내려고 한다. 그러면 부교역자가 교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낸다.

삼상하처럼 지금 이순간 우리가 이렇게 살아간다. 질투심, 반항, 감히 나를 건드려. 엄마 나 취직했어. 그래 결혼만 남았다. 근데 한달 후 사표 내려한다. 지옥보다 전쟁이 났다. 돈 없나, 나 사업할레. 붙어 있어야 돼.

나와 타인, 내가 남을 죽일 때 그 사람이 내가 없는 것을 갖고 있을 때 그것을 빼앗고 죽인다. 사울이 다윗을 죽일때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생각하지 않고, 현재 나의 소유를 근거로 해서 다윗을 생각함. 내 소유를 근거로 타인을 생각함. 아무리 말해 봤자 내 좋은 쪽으로 부매랑처럼 되돌아 온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긴다. 쫓기면서 나오는 것이 시편이다. 22편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다윗은 언약궤를 보고 말함. 언약궤로 나와 언약궤로 돌아가는. 왕은 말씀의 완성이다. 유령이 실제로 왕으로 등장하는 세계를 다윗을 통해 보여줌.

사울이 유일하게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엔돌의 신접한 여자를 통해 사무엘에게 말을 건넸을 때 자신이 누군지를 앎. 무당이다. 신접한 여인과 동급임을 앎. 신접한 자를 죽이라 해서 다 죽이고 쫓아내 놓고, 다시 무당을 찾음. 내가 죽인 타인을 찾아 가니 무당이 사울이 되고 무당이 사울이 됨. 무당이 사울의 본모습, 곧 율법에 의해 저주 받아야 할 자다.

사무엘상은 유령으로 시작해서 유령으로 끝난다. 유령이 진짜다. 유령의 영토, 말씀의 세계가 진짜고 나머지는 저주받을 대상이다.

이스라엘은 언약이라는 특수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우끼는 일이다. 예수 안에서는 이 구약의 이스라엘의 상황이 그대로 왕성이 된다. 사울을 보면서, 다윗을 보면서 먼저 사울 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내가 왜 미국 맨하튼이 좋은지 나에게 납득이 된다.

그럴 때 진리 속에 들어 온 것이다.
고급 차 사는 것, 사울이다. 우린 이런 것을 기대한다. 복음 잘 믿으면 부자되게 해 주세요. 사울의 사고방식, 본심은 악신이 들릴 때 나온다.

다윗은 비파치면서 긴장해서 친다. 언제 악신이 걸릴지 모르기 때문. 본인이 통제 안됨. 하나님의 일이 악신도 꼭 필요하다. 복음으로 기뻐한다는 것이 몇초갈지. 돌아서면 공부못한다고 지어박는 우리의 모습.

다윗의 특징은 예측이 안되는 인생이다. 미래가 예측이 안 된다. 사울이 언제 마음이 바뀔지, 계속 쫓겨다니면서 사울과 다른 노선임을 아는 것, 상반되는 두 개의 노선, 한쪽은 사울, 다른 한 쪽은 다윗, 무당과 관련, 복음과 관련.

사울이 처음으로 말을 건넴. 그 대상이 무당. 사울이 탈진 상태였을 때 무당이 먹을 것을 챙겨줌. 무당이 사울의 본모습. 신접한 여인은 이스라엘 전체가, 사울 같은 다윗을 원한 이스라엘도 무당과 같이 망해야 한다. 블레셋에 망함, 언약궤 안에서 망하기에 죽은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선지자를 제공한다.

4강.
이스라엘 나라에 사사, 제사장이 있고 왕이 있다. 사사, 제사장, 왕이 있는데 사무엘이 사울 왕을 세우기 전까지는 없었다. 제사장은 율법에서 왔고 사사는 성신에 의해 만들어진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이스라엘 나라의 구성은 원래 율법과 제사 제도를 통한 거룩한 나라다. 언약 나라가 된다. 위에서 결정된 언약이 밑으로 땅에까지 정착되는 구조가 이스라엘 구조다.

여기에 성신이 나올 이유가 없다. 율법과 성신이 같이 나란히 이유가 없다는 말은 율법으로도 언약의 나라가 구성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신은 언제 나타나는가? 율법에 의한 언약의 취지에 이스라엘이 맞지 않을 때, 언약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을 언약의 취지에 맞도록 돌려세운다. 언약의 취지와 율법의 취지가 같은 것이다.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이 구성되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언약취지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여길 때에는
언약의 취지와 부합하지 않을 때는 언약과 다른 노선을 개설한다.

성신을 통해 사사를 되게 하신다. 사사의 일은 재판하는 일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을 재판한다. 성신에 의해서 재판할 경우에는 중간에 율법이 완전히 날아간다. 율법이 빠진 것이다. 율법의 결과가 율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면, 율법을 준수할 경우 복을 받고 율법을 위반했을 경우에는 저주를 받는다. 율법 경로는 제거해 버리면 준수 위법이 아니라 사사를 통해서 복이 오고, 성신이 없어지면 저주가 된다. 성신이 매개자 역할을 한 것이다. 매개자 같은 성신은 인간이 붙들 수 없다. 율법은 항상 있지만 성신은 사건화 되어 그 때 그때 작용할 뿐이다. 성신이 율법화 되었다면 사무엘 상에 사울이 등장해서 성신만 매개자가 아니라 악신이 등장한다.

성신은 어떤 일을 하느냐? 악신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느냐를 통해서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악신의 노림수는 이 지상에 이스라엘 나라가 언약의 나라라는 것을 방해하고 그것을 싫어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 지금 이 논리가 맞다면 율법의 통해 언약의 나라를 이루어야 할 이스라엘 나라가 언약에 부합되지 못하고 언약을 공격하는 셈이 된다. 그러면 율법에 의해 언약의 나라를 구성하겠다는 이스라엘이 악신과 한통속이 된다.

예언이라는 것, 말의 등장은 악이 악대로 드러날 경우에 예언이 등장한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신이 사사를 통해 내려 왔다는 것은, 사사 존재 자체가 율법체계자체가 하나님 마음에 부합하지 못하다는 기능으로 사사를 등장시킨다. 사사는 율법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어중이 떠중이일까요? 어중이 떠중이다. 이들도 하나님의 복을 받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잖아. 율법이 있고 제사장이 있어 율법을 지킨다고 한 너희들은 뭘 한거야?

이것이 사사시대다. 그러면 사무엘 시대가 되면 무엇을 제거하느냐 하면, 사사시대를 끝내버린다. 그리고 제사장 시대도 끝내버린다. 율법 가지고 유지하든 것, 사사 가지고 하든 것이 실패했음을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악신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둘다 실패했다. 둘 실패한 후에 등장한 것이 드디어 왕시대다. 왕시대에서 다시 사사시대나 율법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왕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 중심으로 백성을 재편성하고 재생산하는 구조로 돌입했다는 것이다.

삼상 4:18절에 보면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 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년이었더라.” 우리가 알기로는 엘리가 제사장이다. 엘리가 가진 제사장과 사사의 효용이 끝났다는 것을, 소용없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임신하지 못한 한나를 통해 사무엘을 출생시킨다. 사무엘은 사사도 아니고 제사장이 아니라면 사무엘은 선지자라고 이야기한다.

이번 강의 제일 어려운 대목에 직면했다. 선지자가 무엇이냐? 네가 왕이냐? 아니요. 그러면 선지자가 뭘 하는거냐? 제사장 작살 냈으면 선지자 네가 그 역할을 해야하지 않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을 이해할 때 당신이라도 사사처럼 통치해 달라는 것이다. 사무엘은 나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무엘 당신은 뭐냐? 행 3:22-24절에서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하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사무엘을 처음 선지자로 본다. 베드로 설교에서. 이것이 무엇이 어렵다는 말인가? 선지자를 동원해서 사사 잘라내고 사사같은 왕도 잘라내고, 그 다음 제사장을 무용지물 만들고 왕세우는 일을 선지자가 말을 통해 했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비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선지자가 하는 일은 비존재다. 있음의 입장에서 있지 않은 무엇이다. 있음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나처럼 있지 않는 그 무엇이 비존재, 곧 선지자다. 그러면 다윗왕은 무엇이냐? 없음이다. 없음과 비존재의 차이가 어렵다.

없음과 비존재자의 어긋남, 다른 층위의 차이가 어렵다. 선지자 입장에서, 백성들 입장에서 다윗은 없음의 존재가 아니라 비존재에 속한다. 이스라엘은 존재하는데 적절한 지도자가 없다. 그러면 현재 이스라엘에 비어 있는, 결핍된, 빠진 대목을 괜찮은 왕이 와서 채워준다면 온전한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존재의 결핍을 마저 채워주는 비존재, 존재를 존재답게 하기 위해 비어있는 곳을 마저 채워주는 자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이다.

사무엘, 이스라엘 백성, 다윗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이 비존재에 속한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없음으로 대할 수 없다. 이미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나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모습이다. 그래서 아이가 있으면 기성세대가 잔소리 한다.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는 것을 기성세대가 알려준 그대로 받들어 모실 때 그것이 나의 나다운 것이고, 나라는 것을 구성할 수 있다. 그런데 커서 부모의 말과 기성세대의 말이 결함이 있다. 기성세대에 뭔가 빠져 있음을 안다. 내 육신이 갖고 있는 온전한 쾌락를 기성세대의 말대로 했지만 내 쾌락이 기성세대의 요구보다 더 깊고, 더 풍부하다.

기성세대의 말을 받아 들이면서 늘 마저 채우지 못한 요소가 있다. 그래서 마저 채우지 못한 것을 채우기 위해 설쳐되면 기성세대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예를 들면 결혼식 하는데 부모를 오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성은 남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성질상 부모에게 실망해서 우리끼리 살겠다고 해도 이미 내 테두리 자체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안정성을 얻게 된다. 일단 안정성 확보해 놓고 모자라는 쾌락의 욕구는 억눌러야 된다. 인간의 마음이 이게 다다. 죽을 때까지.

아무리 돈 많이 벌어도, 하고 싶은대로 해도 역시, 산 너머 산이다. 산에 가보니 나의 욕망을 자격하는 또 다른 산이 있다.

인간의 욕구나, 쾌락이 이미 기성세대화 되어 있는 내 마음을 다 만들 수 없다. 따라 잡으려고 한다. 기성세대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믿고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이런 짓 왜 하는가? 이 기성세대가 나를 인정해 주는 그것이 나답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고 한다. 이천년 동안 해온 사기다. 하나님은 나에게 기대한 적이 없다. 우리가 뭔데 기대하는가? 하나님이 내게 기대한 것이 아니죠. 악마가 하나님이 너에게 기대하고 있으니 악마가 뒤에서 부추겼다. 악마에게 속여왔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기대하셨다. 우린 본질성 진노의 자식이다.
우리 행동과 상관 없이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기대하는 줄 알고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았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쾌락을 내가 보듬어 주려는 나만의 업무요 성과요 알수 없는 목적, 내가 나답게 되는 목적이었다.

하나님 저 어때요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갖고 놀았다. 그 원인은 내 존재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있기 때문에 결핍되었고 결핍된 것을 마저 채우자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자를 통해 자신을 구원하소서라고 할 때 구원자 사사를 주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를 비존재로 생각한다. 내 존재를 위해 채워줄 비존재를 보냈다고 생각한다. 작살나야한다. 율법을 주신 것은 내가 속한 이스라엘이 잘되게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윗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무엘의 모든 예언은 비존재를 작살낸다. 없음이다.

없음은 하나님의 자신의 길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선택하고 자기를 찾아가는 그 길이 없음의 길이다. 왜냐하면 출3:14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셨다. 나는 나를 찾는 그길 외에 다른 일은 없다. 그 자리에는 시작부터 인간이 없다.

예를 들면 어떤 항구에 팻말이 있었다. 이 항구에 도달해서 내가 발견하거나 나를 발견한 그분이 바로 나입니다. 내가 당신을 발견하거나 당신이 나를 발견할 때 그 발견된 것이 바로 납니다라고 했을 때 이것을 본 사람은 “네가 누군데?”라고 한다. 사람이 보여야 누구라고 할 것인데, 나라고 지칭할 사람이 없는데 팻말만 있다. 이것이 선지자의 예언이다. 말이다.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작업에서 인간의 존재성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기 때문이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이세상을 만들고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만들었다. 스스로 자기를 찾는 과정이다. 그런데 악마가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경로에 죄된 인간이 그 길에 끼어든 셈이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기 찾기는 죄악된 인간 영토를 통과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기 찾기의 형태가 변형되는 것이다.

신진서라는 바둑선수가 있다. 천위라는 선수에게 역전승했다. 그 배가 응창기배다. 대만 재벌인데 백만달러내서 세계 바둑대회를 만들었다. 본인 이름을 걸고 시합을 만든 것이다. 우승 상금 사십만 달러라고 할 때 우리는 무엇만 보는가? 누가 이겼다만 본다. 그러나 그 위에서 보는 응창기는 너희들이 바둑두는 것은 나의 이름을 위해서 나의 돈을 받고 시합하는 것이야. 돈이 누구에게 갈지 모르는데 신진서가 뛰어 든 것인데, 응창기 쪽에서는 네가 돈 받기 위해 선택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자기 자아를 찾아가는 그 길에 자기 백성이 선택되었는데 죄인으로 선택되었다. 그것이 사무엘 상 9:3절에 나온다.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를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를 찾으라 하매.”
유령의 영토 아래 삶의 영토가 있다. 삶의 영토는 소유의 세계고 유령의 영토에는 예언이 작용한다. 삶의 영토는 사적 소유가 있다. 출발이 암나귀라는 사적 소유물을 잃어버렸다. 그 암나귀를 위해서 기스의 아들 사울에게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서 암나귀를 찾으라고 시작된다.

원더우먼은 평상시 옷을 입고 있다가 사건이 일어나면 갑자기 작업복장으로 변한다. 머리에 원더우면 써고 쫄쫄이 입고 빨리간다. 아버지 사적 재산 소유물을 찾아 갔는데 도달한 장소가 선택의 장소다. 기스의 아들이 선택받는다. 우리도 사울을 따라 암나귀를 찾아보자. 암나귀가 네비게이션 역할을 한다. 찾아지지 않는다. 암나귀는 비존재에 속하는가, 없음에 속하는가? 소유를 잃어버렸기에, 결핍되었기에 비존재로 시작해서 없음으로 되돌리는 이것이 이스라엘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하나님의 방식이 된다.

암나귀를 찾으러 갔는데 삼상 9:9-16절에서 선견자를 만나러 간다. 15절을 보면 사울이 오기 전 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보낼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고 하셨다.

사울은 없음이 아니라 비존재적 입장에서 사무엘의 예언, 말씀과 만났다. 사무엘은 예언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실제로 구현되기 위해서 삶의 영토의 소유에 해당되는 것이 사용된다.
삶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유령같은 것이다. 그러나 내 존재가 결핍되었을 때는 새벽기도 나온다. 앞이 캄캄할 때 내 존재를 가득 채우기 위해서 빈다.

네 존재는 아버지에게, 목사에게 배웠다. 하나님께서 예수 믿어야 천국간다고 했다. 누구 좋아라고? 내 좋아라고. 나는 천국 간다는 것은 자기 존재에서 나왔다. 이 존재가 주님의 존재를 방해한다.

빼빼로 데이 때 먹는 밀가루 작대기에 쵸콜렛 코팅이었는데, 쵸콜렛 코팅 위에 땅콩이 더해졌다. 이 제조 과정을 보면 쵸콜렛을 땅콩 가루에 묻힌다.
주님이 자기를 찾는 작업에 그 작업에 관련된 자기 백성을 묻힐 때 그리스도의 몸, 지체다. 십자가에 붙어있을 때 우리는 비존재에서 아에 없음이 되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는 존재가. 반대로 하면 안 된다. 내가 예수님의 피를 묻히면 안 된다. 주객이 바뀌었다. 악신이 이런 짓을 한다.

매개입자는 질량이 없다. 악마가 천사이기 때문이다. 시공간에 매이지 않고 불쑥 튀어 나온다. 다윗이 성신 받았다고 해서 늘 성신받은 것이 아니고 악신받은 사울도 마찬가지다.

구약이 성신과 신약의 성령의 차이점은 구약의 성신은 단회성, 일회성, 출몰적이다. 언약의 보조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성신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언약의 이루심, 율법의 이루심 속에 오시면 성령은 십자가의 완전함 속에서 들어오시기 때문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항상 늘 함께 계신다.

성신은 십자가로 완성하기 전이기 때문에 그때그때마다 임하신다. 언약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예레미아, 이사야도 성신 받아 성령의 시대를 내다봐야 한다.

누가복음 4장에서는 ‘성신이 임하면’를 ‘주의 영이 임하면’으로 바꾼 것이다.

삼상 9:20절에 사흘 전에 잃은 암나귀를 사흘 동안 찾아다녔다. 지도책을 보면 암나귀 하나를 찾기 위해 얼마나 그 동네를 다 헤매고 있다. 암나귀 하나 잃어버렸다고. 사흘 전에 잃어버린 네 암나귀를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이 암나귀가 이스라엘이다. 암나귀는 비존재에서 없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을 잃어버리게 했고 다시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잃어 버릴 때 주께서 잃어버리게 하셨다고 생각하라. 잃어 버릴 때 우리가 삶의 영토에 살고 있음을 절실하게 느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현찰보다 더 기쁜 소식이다. 우리 온 몸으로 전율을 일으키게 한다. 돈 없이 나도 없다는 식으로. 내 결핍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역시 나는 내 존재 중심이었어. 이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은 나에게 기대하지 않고, 어떤 책임도 없다는 것을 머리 속에 잘 넣어 놓았지만 그런데 자녀가 조금이라도 늦게 오면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 탓이야. 내가 엄마노릇 못해서 아이를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집나간 암나귀를 찾고 있다. 내 소유, 비존재를 찾는다. 자살충동까지 느낀다. 기억한 것은 아무소용없다.

존재 안에 들어 있는 어떤 것도 내 존재가 그것을 할당한다. 부모로 교육받은 나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때부터 내가 결심하고 결정하고 판단한다. 오늘 스케줄은 이렇고, 스케줄 관리를 내가 한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내 존재가 어쩔줄 모른다. 내가 누구를 선택하든 내가 나를 선택한 것이다. 내가 나를 선택한 방식으로 내가 나를 찾고 있다. 비존재에서 벗어나 완전한 존재로. 이것이 악식이 들렸다는 사실을 몰랐다. 사울을 통해서 알려준다. 사울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의 집대성이다. 모든 속성의 모음이다.

악신들린 경우에만 사울이 다윗에게 창을 던진다. 나는 살고 너는 죽어야 됨을 보여주는 것은 모든 인간 속에 이 속성을 악마가 깔아놓았다. 우리 친가 아이가라고 해도 급하면 창들고 친구를 죽이고 내 결핍을 마저 채우려 한다. 친구가 나에게 배신 때리느냐고 하면 너는 나에게 배신 때리지 않느냐고 한다.

삼상 10장에서 사울이 지도자가 되었다. 지도자가 되고 난 뒤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 곧 염소 새끼 셋을 이끄는 사람, 떡 세 덩이 가진 사람, 포도주 한 가죽부대 가진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한다. 5절 하나님의 산에 이른다. 이상하다. 암나귀 찾으러 갔다가 온갖 사람을 다 만난다. 삶의 영토에서 안 만나도 될 사람을 유령의 영토에서 다 만나고 있다.

10:6 네게는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하니 너도 그와 함께 예언하고 변하여 새사람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기회를 따라 행하라.
10:10 그들이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고. 일시적 현상이다. 성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주어진다.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고 예언하니 전에 사울을 알든 모든 사람들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기스의 아들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더라.

어느 집에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 아들을 보냈다. 그 아들이 암나귀를 찾아오는 과정을 지어내서 한번 써보라. 이렇게 하면 9,10장 이야기가 나올수 없다. 나올 필요가 없다. 암나귀는 존재다. 존재만 되찾으면 끝이다. 그것을 통해 내가 원더우먼 될 필요가 없다. 내 잃어버린 소유물을 뒤찾으면 그만이지. 내가 기성세대로부터 받은 나다운 것은변하면 안된다. 나는 이것을 고수할거라는 것이 인간 존재의 한계다.

사울이 하나님이 선택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바뀌었다면 이스라엘도 사울처럼 달라져야 할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10:14 사울의 숙부가 암나귀를 찾아 얻지 못함으로 사무엘에게 갔나이다. 10:2절을 보면 암나귀를 찾았다. 암나귀가 유인책이었다. 하나님은 우리 어느 집안 자식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 하나의 유인책이다. 이것은 나의 인생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기성세대 모두가 문제 있고, 그 중 하나인 우리 자손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이 세상에 미련두지 말라고 하신다. 이 세상은 악마가 통치하는 세상이다. 인간의 본능은 내가 구축한 나다움을 견고하게 한다. 본능적으로 인간은 자기 지키기 우선이다. 생물학적 유기체의 본능이다. 세포단위도 마찬가지다. 해로운 것은 거부한다. 세포내부에 체널이 있어 어떤 화학물질은 받아들이고 어떤 화학물질을 거부하는 펌퍼역할을 하는 것이 세포 내에 있다.

세포 자체가 전기적 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생명이란 전기의 흐름, 파동이 생명이다. 여기에 나가 어디에 있는가? 전기자기적 힘일 뿐이다. 이것이 있음의 정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악마에 의해 박힌 과학적 인식을, 성경을 통해 인간이 영물임을 알려주신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 갇힌 상태에서 그것이 전부라 생각한다. 인간의 죽음의 심판으로 간다.

5강
지난 시간에는 비존재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 시간에는 없음에 대해서.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선택당했다, 나의 예상한 바에는 없다’ 인간에게서 없다는 말은 내가 예상한 내용 속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기에 없는 것이다.

외계인이 나타난다면 무서워 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기존에 알고 있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기존에 알고 있는 것은 친숙함이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과 다른 것이 나를 침투하면 당황스럽다. 영어 못하는데 미국사람이 다가오는 것만도 공포의 순간이다.

이 친숙함을 알고 있는 여기에 외계인이 오면 공포를 느낀다. 내가 감당 범주밖에 있기 때문이다. 불길함을 느낀다. 낯설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 천국 지옥 정보를 파악하려한다. 예비하고 대비함으로 나의 목적인 존재의 온전함을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나의 목적이 없다. 왜냐하면 너의 대피와 예비가 너의 존재를 위함이기 때문에

주님은 낯설음으로 온다. 그래서 우리는 거부반응을 한다.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 기름부음 받은 후 사울 왕을 소개할 때 삼상 9:21절 말씀처럼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지파중에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다. 열두 지파 중에 대세를 이루는 지파중에 왕이 나와야 마땅한데 제일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을 왕으로 선택했다.

삼상 10:20-21절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베냐민 지파를 그 가족대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만나지 못한지라.”
하나님의 선택작용만 있고 당사자는 없다. 사무엘과 사울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었다. 사울이 미리 예상한 것도 아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왕재목이 아니다.

왕재가 되든 안되든 하나님이 사울을 이미 선택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뽑았다. 예수님이 뽑았다면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파는 기능을 감당해야한다. 주님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없는데 사람들이 찾는다. 선택의 위력이다. 선택은 나라는 존재 밖에서 일어난 결정이기에 존재가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가룟유다가 자신이 예수님을 팔아먹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공손히 제안했을 것이다. 예수님 저 말고 다른 악마의 자식을 선택해서 예수 파는 일을 하게 해 주면 좋겠습니다. 저는 빠지겠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은 그런 소리하는 것이 악마다. 왜 너는 네 존재를 지키려고 하는가? 너 밖에서 일어난 사실을 왜 거절하는가? 만일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는 일이 아니라 천국에서 예수님 측근에 위치한다면 가룟유다가 자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시킬까요?

주님이 하신 일을 보고 선택을 내가 하겠다는 것은 친숙함이지 낯섦이 낯섦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10:22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행구 사이에 숨었느니라.”
그가 어느 사이에 숨었다. 여기에 ‘영구없다’가 나온다. 영구는 있는데 본인이 없다고 한다. 왜 숨었는가?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영구없다’고 한다. 마스크 쓰고 있기 때문이다.

사울이 자신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시선에서 벗어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선 뒤에는 응시가 있다. 우린 응시에 후달리고 쫓기는 인생이다. 그것이 악마일수도 있고 성령일 수도 있다. 사람마다 다르다. 시선은 나로부터 출발하지만 응시는 나밖에서 출발해 나를 등 떠민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 시선에서 출발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켜보는 응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 낯섦을 친숙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낯섦을 계속 낯섦으로 살려내는데 내가 뽑힌 것이다.

죽음을 이기는 것은 새로움이다. 내 예상 밖에 위치, 이것이 부활의 힘이다. 부활이 부활되기 위해 날마다 죽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내 예측 정보 지식이 날마다 새로움에 의해 작살나야 한다. 깨어져야 한다. 이것은 과거의 관점이 된다. 날마다 새롭다. 익숙한 것도 주께서 새롭게 보신다.

초등학교 다닐 때 김치반찬, 무말랭이 반찬이 지겨웠다. 그런데 정말 배고플 때는 지겹다는 반찬도 그렇게 맛일 수 없다. 동일한 반찬, 재료인데 상황에 따라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새로움이 되려면 잃었다가 돌아와야 한다. 존재에서 없음을 경유하면 있음이 소중함을 깨닫는다. 코로나 시대에 과거 세계여행을 보면 약이 오른다. 어떤 누구도 마스크 쓰지 않았다. 그 때는 당연한 줄 알았다. 그것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야 그 때가 그러함을 안다. 이것을 아는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돌아간다. 태어날때부터 새로움을 위해 출생했다. 태어나면서 살아온 모든 것이 다시 낯섦, 뒤에서 떠미는, 응시에 의해서 늘 새롭게 바뀌는 시선으로 볼 때 싫은 것들도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안다. 이것이 말씀이 주는 새로움이다. 구약이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이 주는 새로움이 있다.

행구뒤에 숨었다는 것은 영구없다는 것이다. 마스크 작용이다. 그럴싸하게 마쓰크 썼는데 어느새 자아가 하나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남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암울한 현실상을 반영하는 영화 마스크다. 남들을 욕하지만 우리가 이미 한통속이다.

마스크를 벗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삼상 10:3절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다볼 상수리 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께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을 말한다. 세 사람의 기능은 이스라엘이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벧엘로 올라가고 있다. 하나는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하나는 떡 세덩이를 가졌고 하나는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졌다. 약속의 땅이 궁핍한 것이 아니라 풍족할 때의 소산물을 갖고 있다. 이것을 사울이 받는다.농업 소산물을 받고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렇게 해야 정상이고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길에서 보여준다.

예언에 말씀에 도취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합체가 정상적이 집합체가 아니고 무엇이냐? 이것을 사울을 통해 알려준다. 여기엔 악신들렸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

사울은 선택 당했다. 선택당했다는 것은 일하기 위해서다. 사울의 자리는 사무엘로부처 기름부음받은 자다. 메시야의 자리다. 메시야의 자리로 선택되었다. 그래서 메시야 자리로 선택당한 위력이 11장에 나온다. 암몬사람 나아스가 올라가 길르앗 야베스에 대하여 진치매. 삼상 11:6-7절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디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한 겨리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두루 보내어 가로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사울이 왜 이렇게 화를 내는가? 화를 낼 이유가 없는데. 기름부음을 받은 자리, 머리는 선택되었지만 몸통은 옛날 그대로다. 사울 왕은 기름부음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의 죄가 있다는 것은 이방 나라가 얕보고 조롱하면 공격하고 있는 것으로 알수 있다. 이 공격에 대해 슬퍼한다(삼상 11:4). 모든 백성이 소리높여 울더라. 내 존재에 대해 내가 감당 못할 것이 올 때 공포를 느끼며 ‘어찌할꼬?’하면서 운다. 이렇게 운다는 것은 사울이 그들 소원대로 왕이 되었지만 왕이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여긴다. 그까지 것 작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울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내 존재를 어떻게 보존하고 유지하느냐만 생각한다. 온통 이 생각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개선하기 위해서 암몬사람 나아스를 통해 공격개시하게 하셨고 이스라엘은 본모습을 드러냈고, 사울이 이것을 보고 분노하여 애꿎은 소를 각을 뜯었다 분노로 찢어다. 쉽게 말해 누가 내 앞에서 기침하는가라고 하는 애꾸눈 궁예가 하는 소리다. 이것이 카리스마다. 영적이다. 사울이 삼상 11:6절에 하나님의 신이 크게 감동했다. 사울의 분노는 뒤 쪽에 여호와의 응시가 있었다. 뒤에서 떠민다. 내 분노를 네 분노를 드러내라. 이게 분노할 상황이다. 적들이 와서 멸망한다고 우는 것이 하나님을 개무시하는 분노의 상황이라고 사울이 그대로 표현하라는 말이다.

성경에 있는 말씀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되다. 과학은 나의 관찰이 출발점이다. 철학도 내 뒤에 응시가 없다. 성경은 삶의 영토 외에 유령의 영토가 있다. 인간의 언어로 포착될 수 없다. 이데올로기 외부, 이념의 외부가 유령이다.

존재가 감당하기 못하는 낯섦이다. 그래서 레미나스라는 철학자는 성경은 우리에게 찾아온 낯선 이웃이다. 우리를 향하여 상처받은 이웃으로 왔다. 메시야가 상처받은 이웃으로 왔다. 모든 자가 우리가 사랑을 베풀 이웃이라고 하면서 이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 사람들을 봐준다. 유대인을 괴롭힌 나치를 처벌해야 된다는 주장에 대해 레미나스는 그냥 넘어가자고 한다. 진리는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어야 진리가 된다. 수식으로 표현되지 아낳는 것은 없다. 수학적 공식으로 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본다.

수학적 공식은 언어다. 언어밖에 있는 유령은 상대하지 않는다. 주님 보시기에 네가 악신들렸다고 하신다. 우리가 세상에서 푹 젖어 살아야 되는 이유가 우리의 한계가 말씀과 비교해서 알아야 한다.

첫 시간에 성경이라는 언어를 놓고 우리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유령같은 분이 다루신다. 우리가 성경보고 해석하는 자체가 내가 죄라는 것이 들통난다. 하나님의 자기 찾기를 우리가 악마의 부추김을 받아 우리가 훼방자로 서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하나님께 우리를 비켜가지 않고 우리를 돌파해서, 우리의 죄를 통해서 의를 드러내는 식으로 성경이 해석되어야 한다. 로마서 5장처럼. 하나님이 원수가 원료가 되어 그 심판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오고 구원이 나오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11:6절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한 사울 왕이다.
암몬사람 나아스는 전쟁에 끝난 후 그들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11절에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한 자가 없었다고 한다. 없다. 승리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누구 있고 누가 없는가? 이스라엘만 있고 암몬 사람 나아스는 없다. 그런데 삶의 터전에서는 암몬 자손 나아스는 있고 이스라엘은 없다. 이스라엘은 있더라도 하나님의 신에 의해 승리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인정하겠는데 죽었다가 부활한 것은 없는 것으로 넘기자고 한다. 이것이 비밀이다. 비밀을 누설함으로 비밀이 더욱 비밀다워진다. 공개함으로써 왜 인간은 이 사실이 비밀이어야 했을 정도로 자기 위주임을 들통내는 방식으로 비밀이 전파되어야 한다.

비밀 자체가 완성이기에 결핍이 없다. 말씀이 들어온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완성이다.

롬 3:22절에 차별이 없다는 말에 주목해보자. 유령의 세계에서는 차별이 없는데 이 땅에서는 차별이 있는 것처럼 여겨져야 한다. 이 땅의 모든 차이와 차별이 위에서 보면 차이가 없다. 이 시선은 하나님의 응시에 의해 우리를 관통함으로 우리의 시선을 보게 하신다. 차이가 없다.

그런데 내 존재가 방해물로 등장한다. 돈 많고 적다. 키 크고 작다고 차이를 느낀다. 이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싼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머리 부분, 사울의 분노만 있어도 암몬 자손 나아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지장이 없다. 없다는 것은 없다는 것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뭐가 있어야 한다. 그 있음으로 말미암아 없으므로 등장한다.

사무엘상 1장부터 차례로 하는 방법이 잘못된 방법이다.
사무엘상 4:4절에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왔고.” 언약궤가 있는가, 없는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5장에서는 언약궤가 없다. 그럴 때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이 여기에 없음이 드러난다. 이스라엘 만들기 위해 언약궤가 집을 떠난다. 같이 있는 것이 너희들이 이스라엘답기 때문에 있는 줄 알았지.

악마가 왜 필요한가? 악마는 매개입자다. 복음 복음, 예수 주님 너무 지겨워. 잠시 떠나 있으면 일곱귀신이 들어온다. 주인 없어. 친구 일곱 데려와 라면 끓여먹는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인줄 자부하기에 귀신 들어와도 이길 수 있다고 하지만 못 이긴다. 계속해서 못이기니 기도, 전도, 헌금, 열심, 회개, 믿습니다를 한다. 이것이 내가 내 식으로 나를 지키는 방법이다. 어떤 방법도, 수단도 아무짝에 쓸데 없는 이유는 나는 날마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려면 날마다 없어져야 하는데 있음을 고수하니 마귀가 방문히 엉망징창 만든다.

이스라엘이 있음에서 항상 추가되는 것이 비 있음. 오래가고 온전한 있음을 추구하기 위해 비 있음을 추구한다. 주님은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기 위해 언약궤를 내세운다.

언약궤에서는 율법과 하나님이 영이 나온다. 사무엘이 율법을 강조하는 것은 언약궤 있음을 내세운다. 언약궤가 있지만 없는 식으로 이스라엘이 굴었다. 그래서 언약궤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삼상 5장이다. 언약궤 홀로 포로로 잡혔다. 블레셋은 최고의 전리품을 얻어다고 해서 다곤신전에 두었다. 아침에 보니 다곤 신상이 목과 손목 발목이 부러져 엎드러져 있다.

언약궤가 상자인 것은 인간이 자연과 경쟁하면서 문명이 발달한다. 자연에서 버터내면서 만들어내는 것이 문명이다. 인간은 자연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자연의 일부를 형상화한다. 형상화한 이것이 가재도구다. 가재도구는 예술품이다. 예술품은 자연을 모방해 형상화한 것이다. 두구적인 것을 장식용으로. 인간은 자연과 라이벌 의식을 가진다. 자연에게 순응하는 것 같지만 내가 필요한 것으로 자연을 누르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연을 누르기 위해 자연을 응축해 법칙을 끄집어 낸다. 법칙에다 장식을 입힌다. 자연법칙 더하기 형상이 신이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살아 왔다. 신이 시키는대로 하라는 것은 인간이 자연에 대해 겁을 먹고 있기에 그 두려움을 외부적으로 순환시키기 위해 밖의 자연을 내 손으로 다룰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한 것이 예술이요 문화 문명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 과학법칙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B.C. 5세기 그리스도 철학의 모든 시도는 내부적인 자연질서를 법칙, 형상화 시켜, 법칙 자체를 다루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연 법칙을 우리 안에 내면화 시켜 인간의 행동과 자연이 일치된다면 자연에 거슬리지 않고 균형있게 살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철학자들이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다. 너무 과하지도 말고 부족하지도 말고 자연그대로 살자.

인간의 자연법칙을 말할 때 출발점이 나의 시선이다. 숨어 있는 진짜 없음의 세계, 매개입자를 놓쳤다. 악마가 그짓 했다는 것을 놓쳤다. 그리고 성령께서 악마가 해 온 일을 저지해 오게 계심을 놓쳤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특수한 나라다. 농사가 내 노동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율법대로 살면 젖과 꿀이 흐른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대로 살아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던 시절, 가나안 원주민들은 율법 안 지켜도 잘 먹고 잘 살았다.

가나안 땅에 풍부한 소산이 나는 것은 광야를 경유한 자에게만 약속의 소산물이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요 자비라는 사실이 눈에 보인다. 응시다. 떠미는 것이다. 율법을 따라오면 응시 시선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적으로 제사를 지낸다. 삼상 2장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사환이 하는 짓을 통해 보여준다.

삼상 2:13-16절에
“아무 사람의 제사를 드리고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남비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우너치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삼상 2:17절에
“이 소년들의 죄가 심히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이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제사가 낯섦이 아니라 제사 정도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엘리 제사장이나 사울의 잘못은 내가 무엇을 못하는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꽂혔다. 이것이 사단나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게 되면 나의 존재 하자없음이 긍정된다. 이것이 악신들린 모습이다. 그렇게 해서 삼상 2:30절에,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내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께서 왜 일관성이 없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관성을 나의 시선으로 요구한다. 그런 입장이 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일관성은 하나님의 일관성을 요구하는 내가 방훼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성이다.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혹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렇게 말하면 한탄할 일을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왜 했는가라고 지적할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일관성을 드러내기 위해, 그런 인간들의 주제 넘는 평가가 필요함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보시면 막힌 성경이 뚫린다.
모든 것을 응시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나의 시선으로부터 출발했다. 이것이 이 땅에서 과학적 철학적 사고방식이다. 악마적 사고방식이다.









관리자 21-01-11 23:52

답변

6강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어려운 것이 하나 들어갔다. 보통 사랑 있다는 것을 살아 있는 식물, 동물, 인간에 대해서 살아 있다고 하지 광물같은 것을 살아있다고 하지 않는다. 언어나 말씀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으 율법이 살아 있다는 말이 정확할까 아니면 하나님이 살아 있다가 정확할까? 하나님은 살아계시는데 눈이 보이지 않는다. 유령의 형태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졌다. 그 자체로 율법이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살아 있으려면 인간 동물과 같이 되어야 된다.

제사장이 제사장다운 면모를, 행위를 보일 때 율법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제사장이 살아 있다는 말은 율법이 인격화 되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이 인격화 될 때 어떤 장애물이 등장한다. 이것은 우상이다. 인간들의 행위가 자연물에 있는 것을 모방해서 형상화시키고, 사물화 시키고, 사물화 시킨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이것이 우상이 된다.

제사장은 제사행위를 했고, 아들도 제사를 드렸다. 물론 육회를 좋아한 것이 문제지만 제사를 방해한 것은 아니지 않는냐? 이것이 인간속에 내재되어 있는 모방성격으로 본다. 율법이 생생화되는 것에 장애물로 본다.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멸시했기에 2:31절에 조상의 지파를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는 날이 이를것이라고 멸시한 댓가를 말씀하신다.
우리가 보기에 뭐 그정도해도 많이 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멸시라면 도대체 어느 수준에 이르러야 멸시에서 벗어나 존중에 도달했다고 할 것인가?
만일 제사할 때 생고기 싫어 삶은 고기를 가져가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되는가? 하나님을 존중한다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멸시한다는 경계선도 분명치 않다. 다만 엘리 집안이 왕창 망한 것을 통해 율법은 살아 있음을 안다. 어떤 집안이 망했을 때 하나님을 멸시한 것이라면 멸시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되는가를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짖어도 여기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삼상 2:10절에서 말씀했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히 깨어질 것이다.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 기름을 받은자의 뿔을 높이시리라.

멸시하고 경멸히 여기는 자들은 내가 경멸히 여기고 나를 존중하는 자를 따로 조치하겠다는 말씀, 존중과 멸시를 제시하면 우린 존중편에 줄 선다. 우리 가문이 멸망당하지 않도록 나서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은 기름부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라는 말씀이 확정되었다.

기름부음이 뭐냐?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자아상이다. 지상에 자기를 드러내는 자아상이다. 성경적 용어로 바꾸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이 형상화 시키지 않은 하나님 스스로 나타나는 형상이 기름부음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 나타내고 싶어하신다. 스스로 나타내시기 위한 사전작업이 2:9절에 나온다. 거룩한 자들을,... 악인들을 잠잠케 하시고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히 깨어지리라.
기름부음 받은 자, 하나님의 자기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 필히 적이 요청된다. 하나님께 얻으 맞을 적이 필요하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악당에게 빰을 치는 대목이 있다면 그 주인공이 칠, 김치 싸대기를 맞을 자가 필이 필요하다. 그래야 주인공의 캐리터가 산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형상, 기름부음으로 나타날 때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유지 전개 할 때 적이 필요하다. 이 적중에 하나가 엘리가문이다. 엘리가문이 등장하면서 뭐라고 죄를 뒤집어 씌우는가? “너는 나를 경멸히 여겼다.” 경멸히 여긴 증거가 육회먹었다는 것이다.

엘 리가 하나님보다 자식을 높였기 때문에 그 벌로 가문이 망한다. 삼상 2:20,25
이것을 엘리제사장이 자기 아들에게 말했다. 네가 한 것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다. 이런 아버지가 없다. 교회가기 싫다고 하면 가지 말라고 한다. 네가 교회가서 예배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를 벌하시고 너를 판결하신다고 하는 부모가 없다. 자식에게 트라우마 생기게 하는 겁 없는 부모가 별로 없다. 그런 가운데 엘리제사장이 장래를 걱정해서 이정도 했으면 되지 않는가? 더 이상 어떻게 잔소리를 하겠는가? 몽둥이 들고 패야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느냐?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또 다른 것을 끄집어 내신다. 팰 때 살살 팼다고 하신다.

그들이 아비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라. 엘리의 아들은 필히 망해야 된다. 왜냐하면 삼상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기 형상을 드러내기 위한 과정 속에서 필히 요청되어지는 적이기에, 그 나타난 적을 꺾으면서 기름부음 받은 자에 부합됨을 보여준다. 사울이 왕되는 사건이다.

삼상 10:1절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운다. 이렇게 언급했는데 사무엘이 언급해 놓고 사무엘이 예언한 기름부음이 등장했다. 그런데 무엇이 빠져 있는가? 제대로된 기름부음이 되려면 요청된 적들을 제대로 꺾어야 된다. 아직 기름부음 사울 왕이 적들의 모양새를 드러낸다. 그래서 삼상 16:13절에 사무엘에 다윗에게 기름 붓는다. 사무엘이 기름뿔을 가져서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그날 이후로 다윗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니

이새의 아들에게 기름 붓는 장면에 이새의 아들 다윗이 없다. 이새의 생각에 다윗은 없는 자식이다. 자식이 총 여덟명인데 사무엘이 나타났을 때 이새는 일곱명만 도열시켜 이 중에 하나를 뽑으라고 한다. 자신은 큰 아들이 제일 마음에 든다.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 중에서 뽑고 싶어한다. 16:6 제일 큰 아들 엘리압을 보고 여호와의 기름부으심이 과연 그에게 있도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는 이미 그를 버렸노라.
진즉에 말씀하시지. 왜 절차 과정이 필요한가? 하나님의 자아성을 드러낼 때 그 어떤 인간의 행위도 방훼물로 등장함을 하나님이 아신다. 기름붓더라도 내가 했습니다를 용납지 않는다.

내 이름으로 경건으로 신앙으로 했습니다를 쏙 뺌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을 피해가면서 인간을 억누르는 적들을 파괴하신다.
하나님의 적이라는 그 적이 인간이 보기엔 너무나 친숙하고 사모하는 대상이 된다. 사울왕도 처음 왕 될 때 인물이 월등했다. 삼상 9:2절을 보면 기스의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 중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다.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에 더했다. 탁월한 유전자다. 월등한 유전자다. 그런데 삼상 16장에서는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고 하신다. 사울은 분명 용모와 신장이 준수했다. 엘리압도 마찬가지다.

16:7절에서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아상을 드러낼 때 인간이 보는 것을 비켜간다. 인간이 보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율법에 대적하여 자연물을 모방하여 그것을 형상화시킨다. 인간이 마음에 든다, 흡족하다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다. 이쁜 사람을 세워놓고 이쁘다고 생각하면 아닌 줄 알아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나는 중심을 본다고 하신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도 인간의 기준에서는 혼선이다. 왜냐하면 12절에 보면 없는 아들을 데려왔다. 여기 애들 외에 없나이까? 그때 이새가 막내아들을 빼돌렸는데 그를 데려왔는데 그의 빛은 붉고, 눈은 빼어나고 얼굴은 아름답더라. 왜 기준에 일관성이 없는가?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는데 다윗의 중심을 무슨 수로 압니까? 사무엘은 하나님의 자기 일에 거수기 역할을 한다. 꼭두각시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서 왕을 통해서 사사도 끝내시고, 제사장도 끝내시고 왕 자체가 율법의 준해서 율법의 인격화로 하나님이 형상으로 등장한 것이 왕이다. 문제는 왕이 둘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왕은 사울이고 둘째 왕은 다윗이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을 지키기 위해 사사가 필요했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제사장이 필요했는데 둘다 필요없다면 왕이 율법과 사사의 기능을 완수해야 한다. 두 기능이 완수가 되었다면 외부적이 쳐들어 왔을 때 이스라엘이 승리하면 이 왕은 율법과 사사 기능을 제대로 완수 했다고 볼수 있다.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과연 사울이냐, 다윗이냐를 한번 보자. 사울이 분명 사사 기능처럼 적을 이겼다. 문제는 율법을 어기면서 이겼을 때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자아상에 부합되느냐? 이것을 따지는 계기가 마련되어 있다. 삼상 13장. 점검위에 적들이 쳐들어 온다. 병거 삼만 마병 육천이 해변의 모래같이 아말렉 군대가 쳐들어 온다. 이 블레셋의 공격 기능은 NPC다. 이것은 주체측에서 만든 플레이어다. 과연 게임을 하는 당사자가 이 핸디캡을 이기기에 적절한가를 다루시는 아말렉 민족이다. 처음 출애굽했을 때의 이스라엘이 존속해야한다. 여호수아때 물리친 적들이 계속 침범할 때 제대로 물리치면 제대로된 이스라엘이고 물리치지 못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이스라엘이 아님이 드러난다.

블레셋 삼만 육천이 왔을 때 8절에서 사울이 사무엘을 길갈에서 기다렸는데 정한 시기에 사무엘이 오지 않았다. 요단강, 여리고, 길갈에 언약궤가 머문다. 그 다음에 실로에. 사무엘이 오지 않으니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졌다. 사울이 온전한 율법정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자아성을 드러내기 위해 예언이 완성을 위해 우리를 사용했고, 내가 왕이고 내 자체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율법이 일이기에 나를 따라 달라고 하면 될 것인데, 약속된 시간에 사무엘이 오지 않았다. 오지 않아도 병사들이 사울 왕의 명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기다릴 수 있는데 흩어졌다. 사울의 마음이 급했다. 그래서 사울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마치자마자 사무엘이 왔다. 사무엘이 왕이 행한 것이 무엇이냐? 무슨 짓이냐는 말은 왕이 망령되이 행했다는 것이다.

당신이 늦게 옴으로 블레셋 백성은 믹마스에 모였고 나의 백성들은 흩어지고, 사기 떨어지고, 남은 군사 얼마되지 않은 상태에서 적들이 쳐들어오면 우린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사울이 예측했다. 이것은 사울 왕이 하나님의 자기 증거를 방해하고 나섰다. 사울 왕이 생각하기에 마음이 하나되어야 이기는데 흩어지면 못이긴다는 사고방식이나 이방 나라의 사고방식이나 다를 바 없다. 똑 같다. 그러면 이방나라는 율법이 없다. 사울 왕에게는 율법이 있다. 율법 있는 왕처럼 해야 하는데 율법 없는 사람처럼 행한다. 사울 왕도 나도 그럴 줄 알고 제사 지키려고 왔는데 저 사무엘이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았기에 내가 제사를 지냈다. 백성들은 제사 지내면 승리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나라도 제사를 드려야 하지 않는가? 내가 뭐 잘못되었는가? 그런 것은 율법 없는 적들에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에게는 율법을 방해하는 망령된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한나의 예언대로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적들이 나와야 하는대 기름부은 사울이 기름부음 받은 자의 적이 되기 위해, 이 일에 충실하기 위해 사울이 출몰했다.

교회 올려고 했는데, 주일날 집구석에 앉아 있으니 방식에 그 다음부터는 다섯명이상 모이지 말라고 하니, 나 가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교인이 다섯명이 넘을 것 같아서, 그래도 갈까했는데, 대구 시장이 걸리면 삼백만원, 참석하면 십만원이라고 하니 벌금 뜨끼면 안되니, 예배 안드린다고 택한 백성 지옥보내십니까? 내 하나 빠진다고 교회가 예배 안됩니까? 주님께서 왜 그런 변명을 하는가? 그 의도가 뭐냐? 예측했고 내 존재에서 낯섦을 거부하고 친숙함으로 살려는 내 모습이 메시야의 적이다.

그러면 됐다. 앞으로 내가 벌금 백만원이라도 참석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또 무슨 횡포냐? 오다가 길에 미끄러져 이백만원 더 나와야 한다. 이게 무슨 객기냐? 오기냐? 네가 감사함으로 하지 않았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기대를 걸지 않는다는 말이다. 기대를 걸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면 왜 도대체 나는 나에게 기대를 걸게 하느냐? 나는 이미 나를 형상화시켰기 때문이다. 내가 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주님의 형상의 과정인데, 내가 어찌되었던 주님의 적이 안되려고 하는 식으로 나타나겠다는 것이 하나님 형상의 장애물이다. 여기에서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다.

책임은 코로나 바이러스다. 코로나 바이러스만 아니면 훌륭한 신앙인 것인데. 블레셋이 쳐들어 옴으로 사울왕의 위신을 다 깎아 놓았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왕은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이런 소리 들으면서까지 왕노릇 해야하겠느냐는 자괴감이 들지 않겠는가?
내가 하고 싶어 했는가? 왕 되지 못해 환장한 것도 아니다.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서 실컫 써 먹고 버리는가? 나의 자존심은 어디서 회복하는가? 왜 회복해야 하는데.

나 같은 왕이라도 있으니 이정도이지 나 말고 다른 적절한 왕이 있는가? 없지요?
삼상 14장이 요나단이 나온다. 6절에 요나단이 자기 병기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없는 부대에 건너가자. 험준한 계곡이다. 적들이 안심한 계속이다. 그곳을 건너갔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니라.

삼상 13:8절에 사울이 걱정하는 것처럼 흩어진지라. 11절에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사울은 나 아니면 이스라엘 안된다고 했는데, 14장에 아들 요나단이 하나님의 구원이 할례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를 명확히 구분한다.

왕은 기름부음 받은 자다.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심을 보여주는 자리, 하나님의 자아상이 드러나야 할 그 자리다. 율법을 어겼는데도 승리한 것이 과연 승리인가? 사울 전에는 승리하면 율법적이었다. 그러나 사울의 등장으로 율법을 어겨서 한 승리도 있고, 율법을 지키면서 한 승리도 있음을 세분화 한다. 사울왕 너는 아니다. 기름 부음에 적합한 자가 아니다.

아직도 사울은 자신이 왕이기 때문에 자신 외에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명령을 내려야 된다고 된다. 삼상 14장에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이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울에겐 나만 왕이며 모든 율법은 나의 명령에 의해 되어진다고 생각한다. 군사들이 배고팠을 때 사울왕이 이 전쟁을 끝낼때까지는 아무것도 먹지말라고 명함. 이 때 요나단이 꿀을 조금 맛보고도 눈이 밝아 이렇게 힘이 나는데, 블레셋 사람들을 살육함이 많지 않겠습니까라고 한다.

요나단은 그렇게 했지만 다른 군사들은 절대로 먹지 말라는 명을 받았다. 승리는 했는데 율법과 완성된 계통에서 승리를 했는데, 승리 당사자 요나단의 행위와 사울왕의 지시가 맞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느 노선을 보고 이번전쟁에서 승리케 하셨는가? 여기에 대해 사울 왕이 화가 났다.

고기를 피채 먹은 일에 대해, 사울 왕은 자신의 명령에 의해 율법이 지켜져야 한다.
예배당 본당에서 예배드리고, 아래층에서 예배드리면 꼴이 우습다. 그럴 때 사울 왕이 끝까지 자기가 옳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물어보자고 한다. 아들이라도 용서치 않겠다고 한다. 자기의 자존감 앞에서 자식도 없다. 마지막에 자기 가치 챙기기 바쁘다. 14:39. 추첨을 또 하여 42절 보니 요나단과 사울 왕이 뽑히고 백성은 면했다.

승리는 했는데 어느 쪽이 율법쪽인가를 백성은 빠지고, 기름 받은 왕과 그 아들로 갈라진다. 모래성 쌓아놓고 작대기 가운데 꼽아 놓고 마지막 막대를 넘어지게 하는 자가 진다. 마지막에 건드린 자가 책임진다. 최후에 남은 자는 사울과 요나단이다.

누가 나의 명령을 어기고 먹었는냐고 할 때 42-42절에서 요나단이 내가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45절에 비록 네가 내 아들이지만 요나단아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리라.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은 사람 없이 구원을 이루심을 말한다. 이것을 위해 사람을 사용하신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고백이 나오게 사람을 사용하신다. 일해 놓고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아상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자기 형상을 드러낸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스스로 자아찾기하는 일에 대해서 어떤 인간도 도와 준 일이 없다. 봐라 내 일을 한 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봐.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내가 홀로 한 것 맞아아. 열두 제자를 선택한 것이고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셨다. 성령이 임하셨다. 증인 되라고. 그런 고백을 하게 되면 그런 고백이 주의 일을 방해한다. 안되면 안하면 되지, 그것을 억지로 하겠다는 것은 방금 주께서 아무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대로 살면 되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면 되는데 이것을 글자로 써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를 집어넣느냐? 목적어에 왜 나를 집어넣는가? 나는 빠져도 됩니다는 말로 해야 한다.

사울이 요나단을 죽인다고 하니 여기에 배제된 백성들이 왕이여 그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요나단으로 승리케 되었다고 한다.

왕은 백성들의 반발로 자신의 결심을 시행 못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은 왕 자격이 못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론조사가 그렇게 필요한 것이다.


7강
삼상 13장에서 사울이 사무엘에게 망령되이 행했다고 들었다. 13:13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어 행하였도다 왕의 여호와께서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한지라 .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께서 지키지 않았으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로 가서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당신 짤렸다는 말이다. 인사권자가 하나님인데 하나님께서 당신을 제거한다.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데는 기름부음에 당신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맞는 사람을 구해 당신과 교체할 것이다. 교체될 사람이 있는가?없다. 요나단이 등장히 기름부음

전쟁의 승패를 율법없는 그것으로 끝났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 맞는 행동이다. 그러면 요나단이 왕이 되면 어떤가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사울은 왕으로써 기능이 백성으로부터 무시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나가 예언한대로 기름부음 받는 자를 공격하는 그런 악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 과정이 꼭 필요하다. 15장에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일단은 승리했지만, 다 진멸하라 했지만, 기름진 것과 좋은 것을 남긴 이유가 15:21절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한다.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제사드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무엘이 이것이 우상숭배라고 한다. 율법 말고 다른식으로 이스라엘을 지키겠다는 마음을 품을 때 나오는 마음이다. 당신 위주로 생각하고 있다. 왕의 할 일은 제사가 우선이 아니라 순종하는 자세로서의 제사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이 정신이 없다면 우상에게 절하는 죄가 된다. 그러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내가 율법을 다룰 수 있는 입장이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주셨다면 율법의 주인공은 하나님께 있어 그 율법을 왕에게 준다.

하나님께서 사사에게 성신을 주시고 제사장에게 율법을 주신다.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와야 한다. 언약궤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왕은 율법에 대해 새로운 지시가 있는지를 쳐다보며 순종해야한다. 이스라엘이 갑자기 나의 나라가 된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인들을 자기가 구원했고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 우상숭배다. 대면 비대면이 왜 붙는가?순종하는 되지 않는가?어떡하면 죽을 수 있습니까? 죽으면 안돼. 더 살다 죽어야 돼. 순종해야 돼. 그러면 교회 안나와야지요. 주님의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을 사울처럼 지키겠다는 자기 조치가 문제가 된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 것이다(23). 이런 이야기를 듣고 뒤늦게 사울이 사무엘을 붙드는데, 사무엘이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 옷자락을 붙잡을 때 찢어진지라. 좀 든든한 것을 잡지. 조금 잡았는데 쭉 찢어졌다. 찢어진 면적을 보니,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 떼내어 왕보다 낳은 분에게 주셨다.

사무엘은 찢어진 것 갖고도 사울 왕 당신은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니 사울이 사무엘이 가만히 두겠는가?

사무엘이 죽는날까지 사울을 다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라 여호와께서 사울을 인하여 이스라엘 왕 세우심을 후회함이라. 그 잘못한 것이, 그 핸디캡이 있어줄 때 비로소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계기로 작용한다. 네가 후회 할 일임을 보여준다.

16장에 사울이 짤렸다. 그렇다면 왕은 사사 폐기하고 제사장 제도 극복하고 통합한 체제가 왕 체제다. 왕이 없으면 다시 사사, 제사장 제도로 돌아갈까요? 그럴 수 없다. 이미 그런 것의 한계가 다 드러난 후에 나온 것이 왕이기 때문에 계속 왕으로 가야한다.

대통령 못한다고 대통령 없애고 공석으로 만들면 그게 나라인가? 지나개나 다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이라고 하면 나라가 되겠는가? 왕제도가 왔으면 이미 왕 제도를 통해 왕 제도 자체가 멸망의 신호이다. 여기서 분기점이 등장한다. 한나가 예언한 장차 기름부음 받은 자가 나오는데 왕의 실패 자리와 병행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출애굽의 구원은 심판 속에서만 나온다.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구원이 나오지 않는다. 보편적 심판이 이루어지는 가운데서만 구원이 된다. 소돔과 고모라가 다 유황불에 멸망당해야 롯의 가정이 나오고, 여리고성이 다 무너져야 기생라합 가정이 구원받았다. 누가 구원받았다고 하면 이 세상 전체가 망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구원 받은 자는 전체 심판 속에서 구원이다. 구원받았다는 말은 이 세상 멸망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 다음 나오는 구원자는 다윗이다. 다윗은 사울이 한 그 나쁜짓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엄청난 오해다. 사울이 왕된 것은 백성이 원해서다. 그렇다면 다윗이 왕된 것은 인간이 원한 왕의 한계성이 드러났고, 기름 부음이 예언되어 있으니 인간의 요청이 전혀 배제된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택한 사람이 차기 왕이 된다.

다윗이 왕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 이후에는 일체 왕이 없다. 다윗 다음에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 1이 솔로몬이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자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원한 왕은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 자리에 구원이 있다. 다윗은 죽어 시체가 되었지만 그 자리에서 부활이 일어난다. 다윗의 자손이 메시야가 된다. 이 말은 곧 다윗은 다시 살았다가 된다. 자손이 아버지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을 구원하듯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 다윗을 구원한다. 왜냐하면 그 자리가 인간이 예상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있지도 않은데 기름부음이 먼저다라는 식이다. 사람 있지도 않은데 기름부음이 먼저다. 배를 타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배 안에 그 사람의 소지품이 발견되었다.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않음, 현장에 가지도 않았는데 배에 소지품이 나왔다. 이게 말이 안된다. 말이 안되기 때문에 주께서 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모든 사고방식을 배제하는 방식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창세전에 구원받았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 주께서 에서를 미워하기 때문에 나중에 에서가 꼭 태어나야 된다. 이것은 모든 철학자를 분괴케 하는 말이다. 공정성에 맞지않다. 사람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하기 위해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나야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어떻게 가능한다? 다윗에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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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7장 왜 다윗이 왕되기 전에 기름부음이 먼저 있어야 하는가? 다윗의 모든 발언이 언약궤를 향하기 때문이다. 다윗의 기름부음의 정당성은 나중에 언약궤와 만난다(삼상 6장). 다윗이 여부스를 정복한 후 맨 먼저한 후 언약궤를 가져온다. 모든 것이 언약궤에서 왔다. 언약궤가 나보다 먼저 있다. 계시록에 하나님의 보좌에 언약궤가 보인다. 언약궤를 위해 우리가 존재한다. 언약궤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기름부음받은 자가 하나님의 자아상이다. 하나님이 이 땅위에 오셔서 적들을 물리치는 일이 완료가 되면 하나님의 언약궤의 취지이 부합하다.

삼하 6장을 보면 언약궤가 요단강 여리고 길갈 실로 에벤에셀 롯, 아스돗 가드 에글론 베드메스 아이론 삼상 7장 길랏여아림으로 끝난다. 오벳에돔 집에서 드디어 다윗을 만나 언약궤가 왕궁에 오고 솔로몬 성전에 멈춘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언약궤가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 있는 자이기 때문에, 자아 완성을 위해 길을 냈고 이스라엘이 동원되었다. 주와 주가 만나기 위해 부역에 나선 것이 이스라엘이요 오늘날 우리들이다. 삼하 6:14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다윗이 에봇을 입었다. 왕이란 자리는 사사의 역할과 제사장 역할을 통합한 왕이기에 백성들은 왕만 바라봐야한다. 개인적 율법지킴이 소용없다. 왕이 율법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적들이 침범해도 다윗은 블레셋 사람을 모두 친다.
삼하 6:16 사울의 딸 미갈이 창을 내다 보다가,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느니라. 왜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이 자기성과를 왜 사울 집안에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고 적처럼 불만을 갖는가? 언약궤가 들어올 때 다윗이 여호와 앞에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저를 업신 여긴지라.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운지 방탕한 자가 자기 수치심 없이 자기 몸을 드러낸 것 같이 신복의 눈앞에서

임금이여 체통을 지키소서. 천한 여종 앞에 몸을 드러내는가? “니 뭐꼬?” 다른 사람은 모두 기뻐하는데 너는 네 체통만 챙기고 있다. 사울 집안 식구답다. 하나님이 치신다. 사울의 DNA를 그대로 받았다. 애기 없는 여자의 수치심을 네가 받아라.

다윗은 희한한 존재가 되어 기름 부음을 다윗이 한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받았다. 삼상 17장에서 기름부음의 효과가 나타난다. 골리앗을 치는 대목이 나온다. 골리앗을 치는 대목을 통해서 무엇이 포기되느냐? 요나단이 자기의 왕됨을 포기하게 된다. 차기에 왕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다윗이다. 내가 취할 태도는 다윗과 미리 사전에 계약을 맺어 우리 집아 작살내지 않도록 언약을 맺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한다(삼상 20장).

삼상 20: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우리 두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사울 집안에 변절자가 등장했다. 사울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수라 여기는 다윗을 아들이 도와준다. 집안꼴이 엉망이 되었다. 그렇다면 삼상 17장에 다윗과 골리앗의 만남의 의미가 무엇인가?

골리앗과의 만남에서 키워드는 우연히다. 인간의 예측과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우연히 전쟁을 했다는 말은 다윗 자리는 우연히 만든다는 것이다. 사건이 된다. 그러니 다윗은 사건이기 때문에 개인이 이 사건을 소유할 수 없다. 개인이 그 사건을 소유할 수없다는 말은 골리앗이 죽었으니 망정이지, 골리앗이 그냥 중상을 입고 육개월 뒤에 회복되었다면 골리앗이 모든 게 삼 세판이라 하면서 한번 더 붙자고 할 것이다.

소년 다윗의 자질이 승리케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심의 자리에 철없는 소년 다윗이 얹혀있다고 보면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상대로 싸웠다고 보면 된다. 이스라엘은 지금 사울왕에게 종속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빠개버리기 위해, 사울왕을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사울왕의 기름부음 받은 자리를 뺏기 위해 블레셋 골리앗을 사울과 싸우게 하셨다. 그 다음 다윗이 등장한다.

골리앗이 대빵끼리 싸워 이긴 사람이 다 갖기 하자고 한다. 사울 자체를 문제 삼기 위해 골리앗을 등장시켰다. 아버지도 무시하는 다윗은 존재감이 없다. 사무엘은 안다. 어떤 식으로 짤리는지를 본다. 기름 부어주시는 분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어떻게 처단하고 제거하는 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자신이 기름부어놓고 자신이 기름 부음을 철거하는 방식이 무엇이냐? 이것은 구약이기에 가능하다. 선택해 놓고 취소하는 방법, 생명책에서 이름 적어놓고 지우는 방법과 같다. 욥이 이런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혼돈이 왔다. 어떻게 복을 줘놓고 뺏어가는가? 처음에 주신자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라고 했지만 너무 다 가져가니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 당황했다. 그것은 미래에 오실 메시야가 모든 인간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이 형상에 대해 인간들은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념적으로, 관념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했지 진짜 하나님이 우리 눈앞에 나타날 때 어떤 사건을 대동하여 나타날때는 전혀 우리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울 왕을 기름 부음 받은 자다. 기름 부은 자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골리앗을 세우셨다. 대빵끼리 붙자고 한다. 여자 사사 드보라와 함께 있던 바락이 남자로써 총사령관이다. 그런데 바락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고 드보라에게 맡긴다. 그러면 드보라가 여성이지만 남성처럼 행동해야 된다. 이처럼 사울왕은 왕으로써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다 빠지고 골리앗과 사울왕이 싸우게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면, 내가 구원받은 자라고 자처하고 자부하는 나에게 이 구원이 아무짝도 소용없는 사태, 골이앗이 찾아오는 사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신다. 구원받은 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좀 써 먹으려고 구원받았는데, 하나님은 내 편이다, 임마누엘 좋은 말 다 동원해도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자동차가 빵구 났는데 목사, 집사도 그냥갔는데, 신천지가 도와준다. 통일교, 신천지, 안식고, 여호와증인, 하나님의 교회 교인들이 도와 줄 때 대한예수교 장로회가 아무 짝도 소용없다. 자식들 앞에 내가 예수 믿는다고 자랑질 했는데 안 믿는 자식은 더 용감하고 믿는 나늘 자식 뒤에 숨는다. 아버지 뭐하십니까? 왜 떨고 있습니까? 왜 겁을 냅니까? 내 믿음이 아무짝에서 쓸모없다.

골리앗 앞에서 사울왕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스라엘은 이미 졌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없음이다. 골리앗의 지배는 정당하다. 이말은 이스라엘이 있더라도 이스라엘은 허수아비다. 고리앗이 치면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이스라엘임을 사울왕을 꺼집어 내어 확정짓게 한다. 보게 한다. 사사의 기능 율법기능 몽땅 없어졌다. 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히 아들 세명을 전쟁터로 보낸 아버지가 막내 이삭을 전쟁터로 도시락을 보내는데 다윗이 여기에 끼어든다. 형들이 다윗을 말린다. 네가 끼어들면 어른들이 무시당한다. 그런데 다윗이 보기에 골리앗은 할례받지 못한자다. 이스라엘은 없지만 율법은 살아있다. 그러면 누가 이스라엘인가? 살아있는 율법에 들어온 사람이 지금의 이스라엘이다. 현상황에서 이스라엘이다. 율법 있는자와 없는 자의 싸움인데 율법 있는 자가 반드시 이긴다. 출애굽 사건 자체가 율법 있는 자의 승리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 아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정신, 율법의 정신을 실행에 옮긴다면, 이렇게 연출된 상황은 하나님의 열율법적용은 지금도 여전히 유용함을 증명하기 위해 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삼상17장 이 싸움은 사람이 하는 싸움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이 벌이는 싸움이다. 이 땅에 오신 여호와께서 벌이신 싸움으로 본다. 하나님의 싸움이기에 율법의 완성정신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상황으로서의 싸움이다.

소년 다윗은 골리앗이 되고, 골리앗은 소년 다윗이 된다. 삼미터 가까이 되는 골리앗이 소년처럼 조그만 사람이 된다. 이 시선은 주님의 응시가 밀어낸 시선이다. 골리앗은 다윗보고 쪼그만한 것이 어디서 까불고 있어라고 한다면 다윗은 율법도 없는 것이 어디 까불고 있어라고 한다.

골리앗의 예상한 싸움은 사람의 싸움이다. 다윗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았다. 질적전쟁이다.

47절 “여호와의 구원하심은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심이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은즉 그가 우리 손에 붙이심이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 여호와는 자기 자화상을 위해 필요한 인물을 이 전쟁에 보내셨다. 하나님이 전쟁한다면 어떤식으로 전쟁하는가?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식으로 나타내면 힘 앞에 소년 다윗으로 나타난다. 율법이 인격화 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율법이 주어질 때, 율법대로 순종하면 복이 오고, 승리한다. 율법을 위반하면 저주가 오고 패배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미 경험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골리앗을 이스라엘 앞에 등장시켰다. 이것이 전쟁에 임하는 소년 다윗의 마음가짐이다.

내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 실효성있게 현실화되는 과정을 위해 이 전쟁이 벌어졌다고 본다. 이 전쟁은 지금도 임으로 반복해서 우리에게 매일 사건으로 골리앗과의 전쟁이 다가온다. 나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 달라는 자는 이미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승리자다. 그러나 골리앗과 싸워 이기겠다는 것은 자기 전쟁이지 하나님이 전쟁이 아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쟁의 전리품을 이스라엘로 본다. 이스라엘 속에 다윗이 들어 있다. 율법의 성취로 다윗이 들어있다. 이미 전쟁전부터 이미 승리자로 이 전쟁에 참예한다. 여리고성 돌 때 언약궤를 앞장세워 돌 때 무너진다.

일차대전때 큰 나팔을 독일에서 만들어 전쟁터에서 고막터져 죽기를 원했는데 아군편이 먼저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수십미터 되는 나팔을 만들었다. 여리고성이 그렇게 무너졌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 여리고성이 그렇게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접수하셨다. 그 하나님이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다윗의 승리, 율법의 승리로 결정났다. 합격이 된 후 시험치는 것은 가볍은 마음으로 칠 수 있다. 서울대 합격후 본고사 치면 본고사가 장난이다. 무엇을 쓰도 합격이다. 어떤 일을 해도 취소 사유가 되지 않는다.

골리앗과 다윗의 전쟁 핵심은 다윗은 골리앗을 개돼지로 보았다. 골리앗의 입에서 나온다. 44절에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왔느냐

사람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막 패도 되는, 때릴 가치도 없는 개로 보느냐? 그래서 네가 막대기 들고 왔느냐고 한다. 내가 보기에 내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골리앗 네가 개다. 하나님이 너를 살려줄 근거가 네 속에 없다. 너는 이민 죽은 자다. 이스라엘을 위해 잠시 사용할 뿐이지 너는 허상이다.

49절에 다윗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지는데, 과거 짐승 잡을 때 심정으로 돌려 던진다. 앞에 골리앗이 짐승이기 때문이다. 율법없는 자는 짐승이다. 평소 짐승잡듯이 짐승을 잡았다. 양을 지키기 위해 잡은 짐승 잡듯이 잡았다.

이런 말을 하면 다윗은 맨탈이 강하다고 말한다. 맨탈이 문제가 아니다. 자기 실력이 문제가 아니다. 자신은 현재 하나님이 벌리는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참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년 다윗은 지금도 살아 있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 보시기에 이 세상 일은 이미 끝났다. 완료된 입장에서 오늘도 우리를 살리시고 모든 은혜를 주신다. 우린 아슬아슬하고 걱정거리가 넘쳐나는데 주님보시기엔 다 끝났다고 하신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영생을 얻었다. 주님의 응시에서 나온 시선으로 바뀌어 우리 자신을 그렇게 봐야 한다.

하나님의 승리의 전리품으로 주어진 것이 우리 꼴이다. 우린 전쟁을 즐거야 된다. 아무리 세상은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도 우리가 성령을 받아 예수님의 안목으로본다면 굳이 나의 승리를 따로 챙길 필요가 없다. 오늘빰을 치면 외빰을 돌려댄다. 겉옷을 가져가면 속옷을 준다. 승자의 여유. 세상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지만 우리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

8강
완료와 미완료의 싸움

미완료는 사울이고 완료는 다윗이다. 그래서 완료는 미완료에 대해서 수비적이다. 완료되었기에 공격할 가치가 없다. 사울에 대해 공격할 가치가 없다. 그런데 사울은 미완료기 때문에 이미 자기 허라도 없이 완료된 것에 대해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자기는 미완료의 세계에 남겨져 있다는 것이 치명적인, 자기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내 허락도 없이 너는 왜 완료가 되는가?

속담에 닭 좇든 개 신세 되었다. 사울이.
다윗의 입장은 닭의 입장이고, 이미 지붕에 올라 있다. 완료가 미완료로 돌아서는 법이 없다. 완료가 미완료가 될 수 없다. 그 점이 즐겁다. 본인도 그 점에 대해 굳이 설명할 이유가 없다. 본인이 애써서 구원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되려고 애써는 미완료적인 사람에 대해 상대할 가치가 없다. 완료의 입장에서 미완료는 없어진 세계다. 그러나 미완료의 입장에서 완료는 아직 내 앞에 얼쩡거리는 세계다. 그리고 나를 약 올리는 세계다.

마 9:17절에 새술은 새부대, 옛 술은 옛 부대에 어울린다. 놀든 식으로 노세요. 당신이 놀든 식으로 노세요. 나는 당신 놀던 식으로 놀지 않겠다. 완료와 미완료가 겹치는 부분, 새 시대와 옛 시대가 겹치는 부분이 그림자다. 그림자가 다윗에게 고난과 고통을 준다. 여기서 시편이 나온다.

사울에게 당하고 고백은 자기를 완료시킨 하나님께 고백한다. 그렇게 당한 것이 없으면 인간은 하나님께 자기 형편을 고백할 이유가 없다. 상대 가치도 없는 것이 찝쩍거릴 때 그 하소연을 하나님께 한다. 하나님이여 왜 저를 구원하셨습니까? 어떻게 하면 구원될 수 있습니까는 사울이 할 소리다. 왜 벌써 저를 구원하셨습니까는 다윗이 한다. 저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게 납득이 되지 않게 엉뚱하게 구원하셨습니까? 가진 자의 여유다. 예배드리나 안드리나 구원되게 하신 하나님. 예수 안드리면 지옥간다고 하면서 벌벌떠는 저들과 다르게 예배와 상관없이 왜 저를 구원시켰습니까? 어떤 것에 벌벌떨 필요가 없고 국가 권력에 구속받지 않게 하셨다.

사울은 다윗의 그림자를 끊임없이 공격한다. 다윗이 벗어놓은 체육복을 향해 저놈 잡으라고 한다. 내가 벗어 놓은 추리링 잡아 뭘하시려고 합니까라고 한다. 빈대같은 저를 왜 잡으려고 합니까? 다윗이 이유를 한다. 미완료 된 자의 답답함이요 자기 처지에 대한 비관이다. 자신의 미완료를 완료된 자를 향해 한을 퍼부음으로 자기 심정을 달레려고 한다.

두 이질적이 세계의 조상을 하나님이 그렇게 조성하셨다. 다윗의 입장에서 사울의 공격이 그다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사울같은 공격을 받지 않으면 성도가 아니다. 미완료에 속한 자들이 질투와 분노로 너는 뭐가 잘나서 구원받았느냐고 공격해 대고 우린 계속해서 수비만 한다. 새삼스럽게 공격해 쟁취할 여분의 것이 남겨있지 않다. 이미 가진 것을 다 가졌다. 우리 신랑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알아서 다 하신다. 내가 신부답게 되려고 하등 애쓸 필요가 없다. 그것은 사울 시대에나 있을 법한 짓거리다. 마음껏 짓밟고 욕하게 허락하라. 그래야 미완료가 무엇이냐 완료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윤곽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완료의 세계는 있음의 세계다. 미완료는 없음으로 규정받았다. 없음의 세계다. 있음이 없음에게 시달릴 이유가 없다. 미완료의 세계에서는 자기 세계만 있고 있으니 공격한다. 나를 인정해 달라고 공격한다. 완료의 세계에서 있음은 다윗은 없음에 대해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수비는 없음에 대해, 공격은 있음의 세계를 더 나타내기 위해 블레셋과 및 이방나라를 공격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사울에게 추방된 후 기름부은 왕답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공격할 땐 공격한다.

그것이 삼상 30:14절에 시글락에 아말렉이 침략했다. 그곳에 다윗의 두 아내가 있었다. 아비가일과 처자들이 많이 슬펐다. 다윗이 이것을 보고 다윗이 이백을 남기고 사백을 데리고 가서 침범한다. 아말렉이 승리하여 춤추고 있을 때 아내와 모든 재산을 되찾아 왔다. 이러한 기름부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공격을 한다.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이 그들이 우리와 같이 가지 않았은즉 함께 가지 않은 자에게 주지 말자고 한다. 악한자 비류는 다윗이 하나님의 사사의 기능, 율법의 기능, 선지자의 기능을 왕이 된 기능을 시작한 것을 모른다. 이미 완료이기 때문에 전쟁에 나설 때 다윗의 전쟁이 없고 완료된 분의 전쟁이다. 완료된 분이 다윗을 통해 자신의 완료됨을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드러내기 위한 전쟁이다. 이 전쟁의 전리품은 마땅히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이방나라와 전쟁할 때 전리품을 너희가 차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바쳐라. 민수기 37: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탈취한 사람과 수를 계수하고 절반은 싸움에 나갔던 군인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 양떼의 오분의 일을 여호와께 드리엑 하되

하나님께 수고했다고 수고비를 주는 것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그렇게 배분하시는 것이다. 군인들은 고생많이 했으니 많이 주고 그렇지 않는 자는 적게주는 것이 아니다. 수고는 하나님이 홀로 하셨고 일방적으로 배분하신다. 이런 율법적 사실을 모르고 삼상 30장에 다윗이 아말렉을 이겼을 때 함께한 악한자와 비류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게 왜 주느냐고 한다. 이들은 율법의 완성상태를 모른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미완료에 있는 사울의 전쟁으로 생각한다.
말로만 우리는 구원되었다고 하지 말고 완료된 다윗을 통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라. 다윗의 움직임 속에 필히 미완료적이 요소의 윤곽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완료된 자를 사용하신다. 구원하신후 곧장 천국에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남겨두시는 이유다. 구원과 구원과 구원되지 않는 자는 표준이 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신다.

엡 4:8 그가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선물은 아무짓도 하지 않았는데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 누가 누가 잘났는가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가 잘났고 못났다가 되면 완료 자체에서 미완료가 발생하기에 그런 일은 없다. 작게 받아도 완료가 많이 받아도 완료다. 어떻게 쓰시던 간에 완료를 보여준다. 받은 것을 통해 완료성을 드러내면 그만이다. 한달에 칠십만원 받는다. 얼마나 큰 선물인지. 주식이 올라 칠천 육백 벌었다. 왠 선물인지. 이 둘을 같이보라는 것이다. 적다 많다는 주님의 시선을 갖은 자는 내가 평가할 자격이 없다.

그런 짓은 사울 쪽, 옛 부대에 속한 자가 하는 것이다. 미완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골리앗 전쟁 이후에 어떻게 전개되는가? 미완료가 완료를 계속해서 공격하고, 완료인 다윗은 수비하면서, 왕다운 면모를 보이면서 공격할 것은 공격한다.

사울은 왜 다윗을 공격하는가? 어떤 재벌이 용역을 시켜 주인공을 추적한다. 차 타고 가면 반드시 트럭이 나온다. usb가 있기 때문이다. 비리들이 담기 것을 뺏기 위해 깡패들을 시켜 죽인다. 비밀이 있다. 이게 궁금한 것이다. 그 비밀 때문에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미완료의 세계를 외로이 헤맬 수밖에 없다. 킬로만자로의 정상에 사나 썩은 고기를 먹으나 똑 같다.

우리 같으면 사정해서 알려주세요 하고 싶다. 공격보다 타협하고 싶다. 그런데 그것이 안된다. 왜냐하면 완료가 과거로부터 올 것 같으면 미완료가 두달 뒤에 구원받으면 되는데 완료가 미래에서 왔다. 뭘 이야기해도 화만 돋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당신이 기대하는 것처럼 구원받을 것 같으면 당신에게 이야기 해 줄 것인데 당신의 미완료에서 완료로 가는 것은 끊어졌더라가 완료에 와 보니 보이더라. 주께서 하셨다. 이것이 내 구원의 비밀이다. 라고 하니 근처에 있는 창을 들고 죽이라고 한다. 네가 있는 한 나는 괴롭다. 네가 있는한 나는 가짜로 들통나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

사울 왕이 소년 다윗을 채용해 수금 타주면 고마울 것인데 갑자기 매개입자 악신이 덮치니 창을 들고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 다윗은 도망간다. 그다음 아무일이 없다는 듯이 된다. 왜 이런 발작 증세를 일으키느냐? 이게 바로 없음인데 사울의 세계로 판단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인물, 소년 다윗이 등장함으로 졸지에 내가 있는 있음의 세계는 그쪽에서 볼 때 있으나 마나한 세계이기에 내가 용납할 수 없다.

다윗은 왕이여 당신이 공격하는 것은 내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한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땅에 펼치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완성된 분이 내어 놓는 그림자를 공격할 뿐이다. 그 예가 삼상 21장에서 쭉 나온다. 그 중에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삼상 26:12절에서 미친 듯이 추적해서 죽이려고 한다. 무릇 열여섯 군데나 된다. 열여섯 곳을 피신해 다녔다. 사울의 추격이 실패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26:12절에 나온다. 다윗이 사울의 창과 물병을 갖고 가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다.

다윗편에는 아비새, 사울편에는 아브넬이라는 신하가 있다. 이 두 신하는 완성과 미완료를 모른다. 사울 정권 인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사울은 옛세대에 속한다. 구축한 힘을 모아 자기 적들을 공격함으로 내 것을 내가 지키는 것은 사울식이다. 옛부대에 해당된다. 그러나 새시대는 내가 지킬 필요가 없다. 수비만 하면 된다. 기름부음이 있으니 저가 구원되는 것이 제 뜻이 아닙니다. 내가 태어 나기 전부터 있으니, 예수님이 먼저 계시니 내가 콩놔라 팥놔라 할 수도 없고 해도 안먹히고 주님의 일일 뿐입니다. 제가 이야기 할 것은 그것 뿐입니다. 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공격받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왜 저를 공격하십니까?

사울은 네가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는지 궁금하다. 백성들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한다. 다윗은 말한다. 임금님이여. 그것은 신경쓸 일이 아닙니다. 옛시대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 백성들의 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끝내셨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라고 하지만 악신들린 사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옷자락을 베었는데 가책이 되어 아브넬에게 옷자락 도로 가져가라고 한다. 임금님 거기 계십니까? 너 누군데? 임금님이 사랑하는 다윗입니다. 사울이 미안하니. 네가 옳다. 내가 다시는 너를 좇지 않겠다. 네가 이스라엘에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데. 내가 면목없다. 잘못되었다. 다윗이 여기에 대해 알겠습니다 해놓고 도망친다. 그 이유는 사울은 사울 시대에 속했기 때문이다. 미완료가 작렬하는 이상은 이 결핍의 인간은 자기가 견딜 수 없어 몸부림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인간의 주체는 그 자체가 결여기포다. 인간은 항상 뭔가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눈을 번뜩거리면서 헤매는 킬로만자로를 헤미는 썩은 고기를 찾는 하이에나 같이 돌아다닌다. 그게 싫어 산정에 올라 굶어죽는 표범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무엇이 결여되었는지 모른다. 누굴 만나도, 유력한 자를 만나면 이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당신이 나에게 알려 주오. 정신병자다. 내가 무엇을 원해야 되는데 당신이 나에게 알려주오. 내가 무엇이 모자라는지 그 자체를 몰라 괴롭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되는지, 어떤 길이 옳은 길인지, 진리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타인이 조언해 준다. 이런 식으로 인도하게 되면 그 인도하는 자를 사기꾼이라고 한다. 결여는 가르친다고 매워지는 것이 아니다.

사기꾼이 안 되려면 그냥 사세요하면 된다. 결여된 체 사세요 하면 된다. 당신이 복음아니 나도 복음 믿을까? 그냥 사세요. 교회와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진작 교회가자고 했지. 그냥 사세요.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아요. 네가 다니는 교회는 전도도 못하게 하느냐? 내가 욕망한다는 자체가, 결여되었다는 자체가 옛시대에 속한 인간의 모습이다.

결여를 매꾸기 위해 타인의 욕망에 내가 순응하는 위장술을 벌이다. 당신이 말씀만 하면 종이 듣겠나이다. 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행여나 비어있는 곳을 채워줄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서 한다. 이것이 단순한 심리가 아니라 결여의 현실이다.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두가지 법칙하에 움직인다. 자본주의의 제일법칙, 제이 법칙이 있다. 제일 법칙은 알파 이꼴 감마 곱하기 베타. 제이 법칙은 베타 이꼴 지분의 에스. 알파는 자본소득, 감마는 자본 수익률, 베타는 소득비율자본. 제 이 법칙에서 지는 저축률, 에스는 성장률이다.

이 법칙이 있다는 것은, 미완료의 시대에 사는 이유는 그냥 돈 벌기 위해서 산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둘러싼 기성세대다. 유동자본은 주식에 모인다.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는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자아는 돈 버는 것으로 내가 어느 정도 질적으로 우수한가가 측정된다. 측정대상이 되고 수긍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매일매일 살아간다. 돈이 벌리지 않으면 기도한다. 거대한 수레바퀴에 붙어있는 껌딱지, 먼지 같은 것이 우리 존재다. 계속해서 굴러가야 된다. 신용사회기 때문이다. 미래의 신용을 보고 지금 투자한다. 투자해서 언젠가 이윤이 나올 것이라는 법칙이다. 베타는 저출률에서 성장률을 나누는 것이다. 저축했는데 수익이 없으면 기대한 소득이 별로 없다. 이것이 법칙이 된다는 말은 이 법칙의 생산물로 이 땅에 태어나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적 자본이 없으면 국가가 국가도 아니다. 돈 없는 가정, 부부, 교회가 무슨 교회가 되는가?

처음에는 목사들이 순진해서 비대면 예배를 봐도 통장에 헌금을 넣을 줄 알았는데 해보니 오지도 않고 헌금도 안한다. 사람 놓치고 돈도 놓쳤다. 처음에는 양복입고 하지만 나중에는 파자마 바람으로 한다. 인건비는 나가야 하고 수익이 안 들어오니 미칠 지경이다. 이렇게 미완료가 끄는 힘, 비전, 희망, 돈으로 개선이 되는 희망, 자본주의 사회, 우리는 이 사회에 태어났다. 이게 현재 사회라면 사울의 이스라엘은 일차원적 농경시대다. 농업생산물을 크게 하는 땅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라는 경제토대위에 사울 국가가 성립된다. 삼상 8장에 왕이 십일조를 받아 왕궁을 단단히 하고, 외세 침입대비를 위해 상비군을 만들 수 있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 이야기가 돈이 되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문제다. 뻔한 이야기를 꼭 이야기 해야 되나요. 돈 벌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산다. 미완료의 세계. 앞으로 잘 될 것이야. 앞으로 내가 날개를 펴서 비상할거야. 날거야. 전에는 쭈구리 앉았지만 세상에 나가 네 날개를 펼쳐보라. 그래서 날개 있는 것을 증명하지.

사울이 무엇을 공격하는가? 다윗이 공격당하면서 다윗에게 쌓이는 것이 있다. 왕 하나만 쳐다보고 살아간다. 백성들이 성신을 받는가는 상관없다. 왕이 성신 받고 율법 지키면 그 혜택이 모든 백성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것이 왕 중심의 나라다. 사사나 제사장이 자신만 챙기니 외부 적이 왔을 때 도움이 되지 못하고 공격받으니, 무능한 사사, 무능한 제사장 말고 단회적으로 확고한 왕의 자리에서, 왕이 율법대로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왕을 보고 백성들이 선물을 받는 이상적이 나라를 원했다.

그런데 사사, 제사장, 왕까지 작살났다. 이스라엘 전부다 작살났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살아있기에 두 개의 구원이 등장한다. 하나는 언약이 완성된 입장에서 왕이 등장하고, 하나는 내 것 지키기 위해 말씀지키는 왕이 등장한다. 미완료는 공격하고 완료는 수비만 한다.그로 인해 등장하는 시편 중 22편을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완료와 미완료가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이 고백은 완료된 자가 이유없이 미완료에게 핍박을 받을 때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고난을 조성하셨잖아요. 내가 너의 자리를 경유해야 내가 나답다고 하신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결합은 하나님의 버림받는 과정을 거쳐야 결합이 된다. 그래서 이 고백을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언제.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하신다. 다윗 속에 완료되신 예수님이 들어 계신다.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미 버렸다는 것은 완료된 세계가 따로 있다. 옛시대는 단절되어 두 개의 층은 완전히 나누어졌음을 이야기한다.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이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사망에 가도 완료, 사망이 없는 곳에서도 완료, 어떤 환경에서도 완료, 이미 다 이루심이다. 그 자리가 바로 기름부음 받은 자리, 그 자리에 예수님이 오셔서 완료하셨다. 이게 바로 기쁜소식이다. 목자가 일당 받고 양떼를 지켜도 중요한 것은 베들레헴에 가서 어린 아기를 볼 때 그 사람은 완료의 세계에 속한다. 목자지만 기뻐하는 것은 이미 완료되었다. 하나님이 나에게 쳐들어 오셨다. 아기 예수를 보고 증명된다. 본인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본인이 걱정할 필요 없다. 완료된 것이 자본주의에 둘러싸여, 미완료에 둘러싸여 드러난다. 돈을 벌어도 벌어도 또 벌고 싶고, 돈이 흘러가는 수레바퀴에 붙은 껌딱지처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자본주의를 따라 간다. 도박판에 뛰어든 것 같다. 계속 가면서 낙이 있겠지. 오년 뒤에는 뭔가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년 뒤에 죽음에 더 가깝다. 오년뒤에 더 늙어있다. 우린 이미 화살표가 죽음으로 정해져 가고 있다. 무슨 희망이 있는가? 미완료 자체가 희망을 용납하지 않는다. 미완료는 그냥 자신의 상상의 나래를 펼 뿐이다. 결핍이 계속 일어난다. 만족해도 다른 쪽에서 결핍이 일어난다. 전교에서 일등하면 전국에서 일등 해야지.

손흥민 백골 넣어면 더 넣어야지. 토트넘 우승트로피를 받아야지.

그러니 결여에서는 내 뜻이 주님 뜻을 공격한다. 여기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은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과정을 주님이 주님 답게 되기 위한 필수과정으로 완료된 자를 여기에 참여시킨다. 주님의 고난에 당참하라고.

다윗이 에봇 을 입는 장면이 두 군데 나온다. 삼상21장.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떡을 달라고 한다. 이 때는 제사장이 먹는 음식을 먹는다. 9절에 골리앗의 칼이 에봇되에 있으니 가지려면 가지고 가라. 다윗은 이미 왕으로써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 왕은 제사장과 사사의 기능을 다윗이 통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삼상 22장에 아히멜렉과 팔십명의 제사장이 몰살당한다.
아비아달 제사장은 구사일상, 다윗으로부터 건짐을 받는다. 간신배가 나온다. 도엑이 고자질해 제자상이 죽는다. 하지만 이 세대는 결여된 세계에 속하기에 왕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열 여섯 군데나 떠돌아 다니는 생활을 계속한다.

삼상 25장에 나발이 나온다. 이 나발이 옛 시대에 속했기에, 미완료에 속했기에 다윗을 무시한다. 주인 버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너도 같은 인간이 아니냐? 그래서 다윗이 죽이러 가는데 그 부인이 다윗이 새 시대에 속한 사람인 줄 알고 음식을 갖고 다윗을 마중 나온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는 일이다라고 한다(삼삼 25:32). 그리고 자기 남편을 디스한다. 우리 남편 이름이 나발이 아니냐. 바보 멍충이다. 상대한 가치도 없습니다.

삼상 25:38절에 열흘 후에 나발이 죽는데, 여호와께서 나발을 죽이셨다. 다윗이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는다. 하나님이 함께 하기 때문에 완료다. 다윗은 본인이 뭘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료됨을 알려주시는 일에 참여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일이지 우리가 누구와 비교할 필요가 없다.

9강
사무엘 상 28:3절에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고 라마에 장사했고.” 그 전에 이미 죽었다. 사무엘이 죽은 것으로 인하여 사울이 자신이 물어 볼 사람이 없다. 선지자가 없다. 3절에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땅에서 쫓아냈다. 그때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통치하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안정화 되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사울에게 골리앗이 찾아왔다. 완료된 사람에게 어떤 것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다. 완성됨을 증명하기 위해 붙여준 상황이기 때문에 그 상황을 새삼스럽게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미완료에 속한 자는 이 안정화된 것이 혹시 무산될까 걱정한다. 노력한 것이 수포로 돌아갈까 늘 조마조마해 한다. 바로 그 점을 하나님께서 친다. 골리앗을 사울에게 보내서 쪽도 못쓰게 만들 듯이 4절에 블레셋 사람들이 진을 치게 한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마음이 떨었다. 다윗처럼 완성 쪽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뭘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완성 쪽에서 본다. 기름부음 받음을 위해 선택되었기에 자기 일이 없다. 완료된 주의 일을 내 놓으면 된다. 그러나 사울은 모든 것이 자기일이다. 내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켜줄 사람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니 블레셋에 대해 자신감이 없다. 무너질까 두렵다. 그곳에서 사울 왕은 6절 여호와께 묻는다. 그러나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지 않았다. 그래서 신하에게 나를 위해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명한다. 신접한 여인에게 물어보기 위함이 아니라 죽은 사무엘에게 물어보기 위해 신접한 여인을 찾는다. 사울은 절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절망이라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으면서 나오는 말 건넴이 인간이 갖고 있는 본질이다. 자신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자가 말을 건네는 그 대상자가 죽은 사무엘이다. 그래서 죽은 사무엘, 유령을 찾는다. 사울의 입장에서 자기의 삶의 영토에서 떠나버린 그 유령까지 자기의 손을 내밀었다는 말은 현재 삶의 영토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는데 절망으로 쭉 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을 불러내기 위해 매개입자인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는다. 사울 왕이 변장하여 찾는다. 자신이 신접한 여인을 쫓아냈기 때문에. 율법대로 한다고 신접한 자를 쫓아냈고, 여호와께 물었고, 우림으로도 물었고 선지자로로 물었지만 대답이 없다. 율법이 소용이 없다. 그런데 자신은 기름부음 받은 왕의 자리다. 왕의 자리가 블레셋에 포위되어 있다. 왕은 이스라엘 전체 운명을 끌고 갈 책임자다. 이것이 사울이 갖고 있는 본인의 자리다. 자신이 제대로 처신하면 이스라엘이 살고 못하면 이스라엘이 망한다고 생각하여 중차대한 책임감을 지고 죽은 사무엘을 찾게 된다.

사울은 누가 나로 하여금 율법을 어기게 하는가? 이런 질문을 사울이 자기에게 해 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자체가 모순되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율법 어기게 하는가?’ ‘율법 어기게 하는 자가 누군가?’ 내가 율법을 어긴 자로 자백할 때, 율법 어긴 값은 심판, 멸망이고, 저주가 된다. 이것을 사울이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누가 나를 율법 어기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없다.

주여 내가 왜 죄인이어야 합니까? 와 같은 질문이다. 복음 모르는 사람이 이 질문을 하는가? 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를 질문하지 ‘왜 마땅히 죄인이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질문할 자격이 안 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울이 잘못된 것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못하느냐를 질문해야 한다. 왕의 자리가 그 자리다. 왕은 자기 나라가 아니라 심부름꾼이요 주님의 나라다. 이스라엘 속에 사울이 포함되어 있다. 본인의 일이 주의 일이 되면 되는데 자신이 나라를 소유했다고 생각한다. 내려다보는 위치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울이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사울이 하지 못하는 일을 소년 다윗이 할 때 돌아버렸다. ‘나의 시효가 끝났구나’라고 하면 되는데 권력이 무엇인지? 주님의 자리인데 주님의 자리를 자신의 자리로 오해했다. 주님의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다.

주님을 위해서 마련한 자리인데 내가 왜 주님을 밀치고 그 자리에 앉는가? 모든 율법의 주인공이 주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율법을 주셨는데 주님을 밀치고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이것은 도발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알아야 되는데. 여러분이 게 맛을 압니까? 기본에 충실한 맛이 얼마나 좋은지요!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다. 이것이 기본이요 근본이다.

그래서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다. 신접한 여인이 노인네가 올라왔다고 한다. 사무엘이 백세 가까이에 죽었다. 처음에는 신접한 여인이 나라 분위기가 점치면 죽는 수가 있으니 점 못치겠다고 하니 사울 왕이 여호와께 맹세하여 그럴 일 없다고 한다.

여인이 사무엘을 부르면서, 변장한 사울을 알아보았다. 신접한 여인이 얼마나 용한지. 신접한 여인을 사울이 못 속인다. 점치는 율법의 죄에 대해서 나는 빠지겠다는 것이다. 당신이 나를 이용했기 때문에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는 일에 대해 자신은 책임이 없으니 빠지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접한 여인의 자리에 사울이 들어간다. 율법의 저주받을 자리에 사울이 들어선다.

지금 블레셋에 멸망당할 위기인데 언제 그런 것을 따질 것인가? 신접한 여인 대신에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가는 그런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래서 이제부터 사울이 사무엘과 대화한다. 죽은 귀신과 대화한다. 이 자체가 율법에 위반된다. 저주의 자리에서, 이미 저주의 자리를 사울이 확보한 체 저주스런 이야기를, 순순한 이야기를 사무엘에게 내뱉는다. 저주 받는 이야기를 내뱉는다. 내가 블레셋에 포위되어 답답해서 할 때 선지자도 대답하지 않고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응답이 고 하나님이 나를 떠났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불러올렸다고 이야기 했다.

그 때 죽었던 사무엘이 하는 중요한 말이 있다.
이미 지나간 일, 이미 끝나버린 일, 네가 생각하는 앞으로 블레셋과 어떻게 되는가? 미래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하여 질문한 사울에 대해 너의 본질은 애시당초 끝났다. 너는 블레셋에게 죽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고 너의 본질은 아말렉에게 이미 죽었다.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치 아니하고 너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않았기에 너를 블레셋 손에 맡기셨다. 블레셋에게 멸망하는 것은 블레셋 때문이 아니라 그전에 이미 망한 것을 확인차 블레셋이 엎친데 덮친 것 뿐이다. 이미 지나간 예언이라는 것은 사울이 사무엘을 불러낼 때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어떤 특정 사건에 의해서 사울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미래는 미래인데 오래된 미래다. 오래된 미래는 지옥 간다고 했을 때 지옥은 자신 과거의 지루한 반복이다. 지옥가서 오늘을 일월 십일일, 하나님 저 어떤 인간입니까? 넌 아말렉에게 진노를 퍼붓지 않았어. 일월 삼십일, 계속해서 동일한 질문과 대답이 이어진다.

시계바늘이 가지 않는다. 시계 바늘이 가는 것 같은 데 폼만 낼 뿐이다. 이미 그 사건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특정 사건에 의해 네 본질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옥가서 과거를 되새긴다는 것이 얼마나 지겹겠는가? 내일 아침에 뭘 먹느냐고 하면, 내일 아침에 김밥에도 컵 라면, 점심도 컵라면에 김밥이다. 아무리 맛있게 먹어도 새로움이 있어야 하는데 진척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너는 그 시점으로 끝났다.

지금 나를 찾았다는 것 자체가 너는 저주로 끝났다는 것이다. 율법에 의해 저주의 그 자리에 주저앉고 있다. 더 살아도 신접한 여인의 자리, 저주 받은 자리가 되풀이 되는 지루한 인생이 될 뿐이다.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사람의 자질은 이미 확정된 자리고 앞으로 살아봐야 예수 안 믿음의 세월만 지루하게 되풀이될 뿐이다. 얼마나 비참한가? 인간은 미래를 내가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특이한 사건이 인간의 운명을 확정짓는다. 선악과, 유월절, 십자가 사건이 그 사람의 본질을 최종적으로 확정짓는다. 최종적 사건이 미리 마중을 나가 그 사람의 본질을 확정짓는다. 아말렉에게 진노를 퍼붓지 않는 사건이다.

아말렉 사건은 바로 출애굽 때 일어난 사건이다.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의 지팡이가 올라가면 이기고 내려오면 지는 싸움이다. 모세가 중요한 것도, 여호수아 장군도 아니고, 싸우는 이스라엘 백성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의 싸움이다. 이스라엘의 본질이 어떤 것에 밀리고 진격이 되는가는 아말렉과 싸웠던 그 현장, 그 상황이 이스라엘의 본질을 같이 보여준다. 장갑의 짝이 있듯이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짝을 이루어야 된다. 왜 아말렉이냐? 왜 블레셋이 아니야? 이게 이스라엘의 본 이름이 야곱이다. 아말렉의 본 조상이 에서다. 그놈의 인연은 끈질기기도 하지.

하나님의 약속대로 에서는 저주받아야 되고 야곱은 사랑받아야 된다. 야곱 단독적으로는 사랑이 나오지 않는다. 에서와 붙음으로 복은 복대로, 저주는 저주대로 확연하게 드러난다. 드러나기 위해 둘이 붙어야 한다. 아말렉의 조상이 에서라는 것은 삼상 15:22절에 아각이 나온다. 아말렉의 왕이다. 아각이 에서의 후손이다. 창 36:12절에서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에서계통이다.

아말렉 계통 중에 에스더 3:10절에 하만이 나온다. 하만이 유다족속을 멸절시키려고 달려든다. 하만의 조상이 아각 사람이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적대적 관계를 하라고 이 땅에 태어난 민족이다. 에서 계통에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본질이 뭐냐는 보여주기 위해 가장 적대적인 조를 이루는 민족이 아말렉 민족이 된다.

다시 삼상 28장에서 사울왕이 죽은 사무을 찾을 때에 이미 블레셋 사람에 붙일 것이 확정되었다. 내일 네 아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너는 죽어. 죽는 이유가 무엇인가? 네가 아말렉에게 진노를 퍼붓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아말렉에게 진노를 퍼부어야 되느야?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붙여준 민족인데, 이스라엘의 본질 속에서 아말렉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왕의 위신과 체면을 보장하기 위해 아말렉 전쟁을 이용했다.

예수님의 메시야 됨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손에 의해 죽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룟유다 손에 죽는 이유는 어느 인간도 가장 궁극적으로 죽음의 힘, 죽음의 권세, 음부의 권세에서 갇혀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못이기는 지점을 알려주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이다. 제자들을 죽음 지점까지 데려가서 예수님만 죽고 부활하신다. 그리고 네가 나를 알고 믿느냐? 네가 어느 지점에서 나를 믿는다고 결심했어? 살고자 하는 지점이야, 죽어도 됩니다 하는 지점이야? 구원받은 강도는 땡 잡았다. 인생의 극한 지점에서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보았다.

그전까지 강도는 나의 원수만 생각해서 내가 살기 위해 밀침만 생각했는데 원수로 인해 예수님이 부활된다면, 나라는 것도 예수님의 원수에 포함됨을 알았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이 주님의 원수가 되는 것을 알았다. 못 이기는 지점까지 강도의 손을 잡고 친절하게 데려가셨다. 그 친절한 안내자를 강도가 놓칠 리가 없다. 오늘 밤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주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기 위해 친히 나를 십자가 달리는 지점까지 이끌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것 아프네. 하지만 감사합니다. 왜 이 지점이라고 감수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진정한 나의 적을 몰랐는데 알았다는 것이다. 나의 적을 모르면 나를 모른다. 지금 사울은 절망적이다. 절망적일 때 율법을 지킨다는 위신 때문에 신접한 자와 놀지 않을 때는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자신이 괜찮은 존재인줄 알았다. 답답하고 컬컬할 때, 일을 할 때 예수님이고 뭐고 다 때려 치우고그냥 고사지낸다.

답답하니까. 신접한 여인이든 고사든 다 오라. 그 답답한 순간이 내 본질을 확정짓는 순간이다. 내가 천국맨인지, 지옥맨인지 결정짓는 순간이다. 죽은 사무엘이 사울을 기억할 때 네가 블레셋을 이긴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딱 한 사건만 기억한다. 이스라엘 되게 한 아말렉과 전쟁할 때 분노를 다 퍼붓었느냐? 그때 너는 탈락했어. 그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왕을 바꾸겠다고 뜻을 정하셨다. 이런 이스라엘을 생각한 적도 없다.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 이스라엘을 관리하는데 철저하시다. 여기서 창세기 25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태동할 때 어떤 바탕위에 있는가?
창 25:23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여기에 숫자가 이다. 두 국민이다. 지상에서는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가 둘로 쪼개질 것으로 지상에 살고 있다. 둘로 쪼개질 바탕이다. 색깔이 다른다. 이번 강의 쭉하면서 소유의 세계와 예언의 세계로 나누었다. 삶의 영역과 유령의 영역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소유의 세계와 예언의 세계로 지상에서 볼 수 있다.

두 국민이 나누어진다. 여기 두 국민까지의 숫자가 아니니 두 아이가 시작이다. 두 아이가 장래에 모든 세상의 운명을, 둘로 양분된 운명을 지니고 한 사람씩 여기에 집어넣는다. 한쪽은 야곱이고, 한쪽은 에서가 된다.

한쪽은 예언과 연결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약속과 연결되어 있는 자식이 야곱이다. 나눌 것이라고 하셨으니 두 아이가 통합될 일이 없기에 따로 노는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함께 있다. 서로 사고방식과 시선이 현저하게 차이나는 자를 의도적으로 우리 곁에 붙여주신다. 통합이 안 되고 적대적 관계에 있는 그런 자를 같이 한 조로 붙여 주신다. 한 조가 되게 붙여주신다. 이런 식으로 언약이 굴러간다. 언약의 진격. 둘이 붙었으니 이질적이니 서로 싸움이 벌어진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내부전쟁, 외부전쟁을 해야 된다.

에서의 전쟁은 소유된 힘을 자랑하는 전쟁이다. 네 아버지 뭐 하시노? 울 아버지 깡팬데요. 얻어맞음. 진짜 깡패인데. 선생이 쫀다.

너그 아버지 뭐 하시노? 우리 아버지 이삭인데. 야곱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아버지 없는데요. 예언이 영역, 유령의 영역이기 때문에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를 같이 이 땅에 둔다. 야곱은 처음에는 이 사실을 몰랐다. 힘에는 힘, 힘 없으면 속임수로, 어떻게 하면 아버지 유산을 곱빼기로 따내는가, 장자되는가에 열중했다. 철저하게 싸우지만 근본되는 싸움이 아니라 욕심내는 싸움이다. 둘 다 같은 싸움을 한다. 그러다 야곱에게 연결된 약속의 노선에서 누가 찾아온다. 사다리에서 오르락 내리든 천사 중 한 사람이나 마하나임 집단 중에서 한 사람이 찾아온다.

야곱에게 찾아왔을 때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다. 그러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뀔 때 야곱이 에서에게 복을 따내든 모든 시도 근성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죽어 마땅함으로 드러난다. 세상에서 내 힘으로 버티려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준다는 본성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이제 야곱은 누구와 싸우는가? 에서와 싸울까요? 야곱은 누구와 싸우는가? 야곱이 자신의 옛 사람과 싸운다. 그래서 에서를 만났을 때 에서에게 주여라고 부르며 다 가져 가시라고 한다.

이 말은 형 에서는 야곱 자신과 싸움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나의 적은 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내 소원은 이세상에서 육신을 벗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 내가 나와 싸우니 어떤 의미에선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센 적이 없다.

이 완료된 나를 미완료된 내가 자꾸 발목을 잡는다. 네가 예수 믿는 것이 착각이 아닌가? 내가 나를 자꾸 의심한다. 네가 예수 믿는다고 누가 돈 갖다 줘. 안 갖다 주지. 네가 헛수고 한 거야. 하나님께 이번일로 너에게 벌 내릴거야. 넌 쫄닥 망했어. 아이구 안타가워라. 예수믿고 망했어. 아이고 불쌍해라. 내가 나에게 계속 속삭인다.

그러면 가끔 성령께서 뒤에 와서 마, 너는 이미 죽었어. 네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신다. 옛사람은 자꾸 죽은 나보고 상종한다. 살아있다고 우기는 나가 이미 죽어 버린 나를 붙들고 착해야지, 훌륭해야지라고 한다.

약속으로 봐야하는데 출발을 시선으로, 구원받은 나로부터 시작하니 늘 시달린다. 우리는 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게 하고 규정한 약속을 쳐다본다. 너는 이미 죽고 그리스도로 이미 살았다는 규정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내 안에 또 다른 나가 있어 시작을 개무시 하고 옛 사람에서 자꾸 출발하라고 독촉해 댄다. 그러니 새사람 입장에서는 귀찮아 죽을 지경이다. 주님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나라는 인간 죽이시든지.

가만 두어라. 다 필요할 때 있느니라. 성령받은 사도들은 죽을 때까지 복음 전파자로 계속할동하고 있다. 그러니 상대가 절둑발이든 귀먹거리든 상관없다. 나를 힘들게 하는 나의 원수는 내 안에 따로 있다. 그래서 주여 그들이 하는 일을 그들이 알지 못하나이다. 그저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너희들과 놀 군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에 충만해서 하는 고백이다. 안 믿는 사람들에겐 개무시 하는 소리로 들리지만,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 자신이 본질적으로 특이한 사건에서 확정났다.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성령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확정했다.

천국가면 십자가 사건을 영원토록 찬미한다. 나는 죄인이었는데 주님의 피 공로로 하나님이 사시는 땅에 염치없이 신부로 들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매일같이 반복한다. 그 축복스러운 그러한 상황.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가 계속된다.

사무엘 하 1:8절을 보면 “다윗이 너는 누구냐?” 나는 아말렉 사람이다. 아말렉에 진노를 퍼붓지 못해 죽은 사울과 달리, 이미 완료에 속한 다윗은 삼하 1:14-15절에서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소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저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다윗은 완료에 속했기에 아말렉에 대해 단호하게 처리했다. 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왕으로서 통치하는 나라요 자신은 하나님의 아바타에 불과하다. 그래서 항상 나는 왕이 아님을 고백한다. 물론 그전에 다윗이 실수를 범하지만 그 결과로 ‘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지어도 ‘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라고 고백한다. 그 다윗의 본질의 끝부분이 누구냐?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하신다.

예수님이 인자로 오셨다는 것은 사람의 계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계통으로 온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이 사람 속에 들어오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으면 우린 결단코 하나님의 하나님 됨, 스스로 하나님 됨을 찾아가는 그 경로를 보여주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천국에 갈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 결과물로, 그 열매로 땅콩 부스러기가 묻히듯이 열매로 묻어 나온 사람이 바로 육으로 난 사람이 아니라 영으로 난 하나님의 백성이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일방적으로 받았다. 한나의 예언에 의해서 받았다. 그 기름부음의 출처는 언약궤에 있고, 언약궤를 모신 곳이 성전이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성전을 지으려 하다,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서 성전 지으려고 당부하고 자신은 모든 것을 준비한다. 다윗이 성전 지으려 하는 마음은 나의 나됨은 이 성전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 언약궤에서 나왔다.

모세 시대에는 그 언약궤가 시내산에서 내려왔다. 그 내려온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다. 이스라엘 나라가 완성된 임무를 마치고 드디어 예루살렘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서 하늘나라를 구성한다. 하나님의 스스로 하나님 됨을 영광스럽게, 찬란함을 빛내기 위한 경로 안에서, 과정 안에서 자기 백성이 주님에 의해 만들어지고 생산되고 선택된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이미 아버지로부터 재가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선택하심도 아버지에게 이미 효과가 있다. 주의 이름이 효과가 있다. 내 이름을 죽이고 그 이름이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시고, 우리 안에서 활동하신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나중에 죽어서 우리의 본질과 운명이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주어진 결정적 사건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정해졌다는 사실을 저희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언제부터인가 성령이 왔을 때 이것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의 인생인 것을 알게 해 주신 이 은혜가 계속 우리 안에서 작동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이근호
 (IP:119.♡.87.190) 21-01-12 11:17 
허수란 제곱하면 -(마이너스)가 나오는 수입니다. 제가 강의하면서 실수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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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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