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여호수아 ; 없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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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교재



없는 땅

- 여호수아 속의 그리스도 -

Ⅰ 서론

1. 공간 개념의 형성

물리학에서 말하는 공간

가장 친숙한 세계관의 기반이 되는 공간 개념은 공간을 거대한 ‘통’으로 보는 방식이다. 이 공간 개념에서는 공간을 일정하고, 균일하며 특정한 방향도 없는 거대한 상자로 보고 그 안에서 온갖 일이 일어나는 개념이다. 이것이 뉴턴 (Isaac Newton, 1642?1727)의 공간관이다. 그 안의 모든 물체는 이 상자 공간 안에서 이동하는 입자들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뉴턴의 이론이 발표되고 약 200년이 지난 19세기 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 ? 1879)과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 ? 1867)는 전하(電荷)들 사이의 전기력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그 결과는 공간에 대한 설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들은 공간, 입자와 함께 ‘전자기장(電磁氣場)’이라는 제3의 요소를 찾아냈고, 새롭게 등장한 전자기장은 이후 물리학 전체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자기장은 전기력과 자기력의 매체이다. ‘장(場)’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일종의 널리 퍼진 형태의 개체를 의미한다. 패러데이는 장이란 양전하에서 출발해 음전하에 이르는 ‘선(線)’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공간의 세 차원 속에 무형의 거미줄을 친 것처럼 무한한 수의 선들이 공간 전체를 연속적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발견이 대단한 이유는 이 장이 전하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독립적 개체라는 점이다. 전하가 없어도 패러데이의 역선(力線)은 여전히 존재한다. 만약 선이 도달할 수 있는 전하가 없다면 이 선들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공간 내에서 고리 형태의 폐곡선을 그게 된다.

즉 전자기장은 전하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전자기장은 항상 존재하는 독립적인 개체이며 때때로 전하의 존재에 따라 변화할 수는 있지만, 전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전자기장이 존재하기 위해 전하가 필요하지는 않다.

라디오파는 매우 느린 파동이고 빛은 매우 빠른 파동이지만, 두 경우 모두 전자기장의 규칙적인 변형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현상의 범주에 속해 있다.

한편 전자기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야말로 전자기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물체를 봤을 때, 우리는 그 물체를 직접적으로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물체와 눈 사이의 전자기장의 진동, 즉 그 물체가 반사한 빛을 감지하는 것이다.

거울도 마찬가지고 영화관의 스크린, 홀로그램이 모두 이런 현상이다. 세 가지 모두 무언가가 보이긴 하지만 그 위치에 실제로 물체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 물체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빛이 반사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패러데이와 맥스웰이 뉴턴의 세계관을 어느 정도는 바꾸어 놓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다. 상자와 같은 공간 개념이 존재하며 그 공간 안에서 사물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보는 관점은 여전했다. 단지 상자 공간과 입자라는 기본적인 개체에 전자기장이라는 제3의 요소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공간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에 근본적인 혁신을 일으킨 사람은 1915년,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 ? 1955)이다. 맥스웰의 업적에 깊은 감명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이번에는 중력을 설명할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전자기장과 유사한 형태의 ‘중력장’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하들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전자기장을 통해 전기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두 질량 사이의 중력 역시 중력장을 통해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력장은 공간 전체를 채우게 되며 움직이고 진동하고 파동을 만들 것이고 두 질량 사이를 연결하는 ‘중력선’들이 존재해 중력장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중력장은 아인슈타인은 뉴턴이 말한 상자 공간과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둘이 사실은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보자.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어차피 동일 인물이므로 B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반대로 A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발견 역시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중력장은 존재하지 않으며 공간 자체가 파도치는 바닷물처럼 움직이고 진동하며 변형될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반대로 공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유동적인 중력장만 존재한다고 보는 방법이다. 현실 세계를 표현할 때 더 자주 사용되는 방식은 첫 번째 방법이다. 흔히 ‘탄력적 공간’이라고 말하면서 질량체 주변이 휘어있는 공간의 이미지들이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이렇게 표현할 경우 여전히 공간이 장과는 다른 고유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다. 이때의 공간은 무정형적이고 수동적인 개체,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체들과 독립적인 개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일반상대성이론에서의 공간이 지닌 특성은 오히려 전자기장의 특성에 더 가깝다. 이때의 공간은 공간 내부의 물체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역동적인 개체이기 때문이다.

부피란 무엇인가? 부피는 공간의 크기이다. 어떤 방의 부피는 그 방 안에 담겨 있는 전체 공간의 양을 의미한다. 그런데 공간은 곧 중력장이므로 부피는 결국 중력장의 크기이다. 또한, 양자이론을 다루고 있었으므로 부피 역시 불연속적인 값, 즉 ‘부피 알갱이’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보았다.

부피는 실제로 불연속적인 변수였고 따라서 공간은 부피 양자, 즉 공간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수학 계산 속에 등장한 수수께끼 같았던 교차점은 바로 그 공간 알갱이였다. 여기서 cm(물리학적으로 성립 가능한 최소 단위)라는 플랑크 단위 차원에서 요동치는 루프(loop)개념이 등장한다(루프란 머리 묶는 고무줄 모양의 폐곡선).

패러데이의 역선보다 교차점이 더 중요하다. 루프들은 닫힌 패러데이 역선을 통해 여러 교차점을 연결한다. 또한, 각각의 점은 하나 또는 다수의 루프에 속해 있으며 이것은 루프들이 점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두 점 사이의 일부분 또한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두 교차점 사이를 잇는 연결선에는 하나 이상 패러데이의 역선(力線)이 지난다. 한 상자의 부피가 1m³라고 말한다면, 실제로는 상자 안에 있는 공간 알갱이의 개수, 즉 중력장 양자(스핀 네트워크의 교차점)의 개수를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양자는 매우 작기 때문에 1m³ 크기의 상자 안에 존재하는 양자의 개수는 100자리 수에 이른다(600cm의 면적을 지니는 A4용지 안의 루프 개수는 가 될 것이다).


2. 시간 개념의 형성

여기에는 두 종류의 시간 개념이 등장한다.
크로노스(chronos 현재적 시간, 곧 과학적 시간)와 아이온(aion 영원의 시간)을 말한다.

(1) 물리학에서 말하는 시간

오늘날 양자중력을 통해 얻은 새로운 사실은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간이란 망처럼 연결된 알갱이들의 확률 구름으로 이루어진 중력장만이 존재할 뿐이다. 시간과 공간은 긴밀하게 이어져 있으므로 공간의 부재(不在)는 결국 시간의 부재를 의미한다.

우주 속 한 장소의 시간 흐름은 그 장소를 지배하는 중력장을 따른다. 실제로 지구의 중력장이 위성 궤도의 중력장보다 더욱 강력하기 때문에 지구에 있는 시계는 위성에 있는 시계보다 느리게 간다.

블랙홀 속의 시간은 어떨까? 물질이 붕괴될수록 중력장은 강력해질 것이며 시간은 -외부에 비해- 거의 멈춘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극도로 느려진다. 그러므로 지구상의 사람들의 눈에는 수백만 년에 걸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과정도 블랙홀의 시계에서 고작 1초만에 일어나는 일이다. 붕괴 후에는 내부 폭발과 외부 폭발이 곧바로 이어지지만 만약 강력한 블랙홀 중력장 바로 외부에서 본다면 이러한 과정은 거의 정지 화면에 가까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게 된다.

GPS 시스템(GPS는 'Global Positioning System'의 줄임말로서 위성항법장치衛星抗法裝置이다. GPS는 1970년대 초 미국 국방부가 지구상에 있는 물체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만든 군사용 시스템이었다)이 상대성이론에 따른 보정이 필요하다. GPS 시스템은 궤도상의 위성과 지구상에서 오는 신호가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GPS 위성은 지구에 있는 우리에 비해 지구의 중력장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다. 결국 위성에서의 시간과 지구상이 시간은 동일하지 않으며, 위성의 시계가 지구의 시계보다 아주 미세하게 빨라지게 된다. 만약 이 시차를 무시하고 거리 계산을 보정하지 않으면 GPS를 통해 얻은 결과는 지구상에서 쓸 수 없는 틀린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전체 우주의 일생에 맞춘 우주 시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우주 속의 모든 물체는 각각의 고유한 시간을 가지고 있으므로 시간에는 지역적인 조건이 있다. 마치 일기 예보 같은 상황이다. 각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날씨처럼 시간도 그러하다.

한편 각기 다른 시간을 가진 물체들이 조우하거나 신호를 주고받을 때, 그 시간들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이라는 분리된 개념 대신 ‘시공간時空間’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시공간이란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의 집합 같은 것이다.

시간이란 근대 물리학에 들어오면서부터 파동의 일정한 주기를 의미할 뿐이다. 진짜 시간은 없고 상대적인 진동들만 상호 비교해서 시간을 정할 뿐이다. 옛날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진자’의 진동이 진폭의 크기와 상관없이 항상 동일한 주기를 가지고 왔다 갔다 흔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발견한 시간 개념이 이것이다. 갈릴레이는 이 시간을 가지고 자연의 운동을 측정했다. 즉 시간이란 자연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편리하게 써먹을 관계성을 나타낼 뿐이다.

이로써 인간은 시간 그 자체를 절대로 측정할 수 없다. 항상 시간이 아닌 물리적 변수 A, B, C(진동, 맥박, 태양운행주기 등)를 측정하고, 늘 이 변수를 다른 변수와 비교하고 있을 뿐이다. 시간이란 각각의 물체가 다른 물체에 비해 변화하는 방식인 것이다.

만약 시간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금 흐르고 있는 이 시간, 즉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무엇인가?

시스템을 결정하는 무수히 많은 변수 중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특정 온도의 금속 조각에 대해 연구한다면, 그 조각의 온도, 길이, 위치 등은 측정할 수 있지만 온도의 원인이 되는 원자 각각의 미시적 운동은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경우 시스템의 물리적 상황을 기술하기 위해 동역학적 방정식과 함께 통계역학 및 열역학 방정식을 추가로 사용한다.

통계역학은 시스템의 모든 미시적 변수들의 운동을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예측은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열역학은 많은 입자로 이뤄진 시스템을 연구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입자들을 개별적인 차원이 아니라 통계적 형태로 법칙을 활동하여 서술해 주게 되는 것이다.

양자역학은 연산에 있어 비가환성과 관련되어 있다. 양자역학에서는 연산 순서를 서로 교환할 수 없다. 연산 A를 한 후에 연산 B를 하는 것과, 연산 B를 한 후에 연산 A를 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시간의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열역학계에서의 반응은 확률적이며 엔트로피(주위 환경질서가 뒤죽박죽이 되는 혼란의 정도)는 시간에 따라 상승한다. 예를 들어, 열역학계가 아닌 경우, 공간 속에서 단 하나의 원자 또는 입자만이 이동하는 경우라면 엔트로피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으므로 시간이라는 전형적인 현상들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가역적이고 시간이 특별한 변수로 여겨지지도 않을 것이다.

위, 아래의 개념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 자리 잡은 근본적인 개념이지만 우주에는 상(上), 하(下)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방향이 동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래라는 개념은 지구가 가진 지역적 조건에 의해 정의된 것이며 이 지역의 중력장에 의한 산물이고 효과이자 결과이다. 아래는 그저 ‘낙하의 방향’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전(前)과 후(後)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단 하나의 양성자에는 이전도 이후도 존재하지 않으며 관련 방정식에도 시간변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동물, 이를테면 한 앵무새의 내장기관 속 액체 안에 속해 있는 분자의 경우라면 이러한 조직화의 각 단계들은 열역학 법칙들과 엔트로피를 만드는 통계적 상태를 따른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시간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결국 시간은 그저 ‘엔트로피화의 방향’에 지나지 않는다. 엔트로피의 증가가 관찰되는 방향을 시간이라고 부를 뿐이다. 물체가 낙하하기 때문에 ‘아래’라는 개념이 생겨나듯, 엔트로피(뒤죽박죽되는 혼란의 정도)가 증가하기 때문에(즉 혼란의 정도가 더욱 심해지기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2) 영원과 의미의 관계

인간은 시간을 느끼는 것보다 영원을 느낀다는 점이 더 신기하다. 더 근원적이다. 영원은 ‘시간의 죽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일상의 삶이 끝나고 죽음이 오면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영원함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즉 물리학(과학)에서 말하는 시간은 어디까지나 잠시 생존하는 동안 삶의 편리를 위한 것이다. 죽음은 달리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이제 다른 식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그동안 겪어왔던 시간감이 죽음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종결점에 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죽음의 인식이 살아생전에도 발휘되는데 그것이 바로 ‘영원’에 대한 감각이라고 보는 것이다. ‘영원=죽음=무기물’이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모아놓은 모든 의미도 무의미가 된다.

의미는 시간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시간이 끝나고 영원이 되면 일시적 의미는 흐름 속에서 곧장 풀어져 버려서 무의미로 해체된다. 의미가 흐름 안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중에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동안 살면서 발생한 의미는 어떤 식으로 자신을 죽음에 이르는 흐름이 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무엇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지를 기존의 시간 속에서 발생한 의미 뭉치들 속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최후에 맞이할 영원관 관련지어 현재의 시간과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다.

아직 시간 의식이 생생한 죽음 이전의 삶 속에서는 항상 결핍이 작용한다. 의미를 만들려고 애는 쓰지만 늘 불충분한 의미로 전락한다. 의미가 일단 만들어지는 그것은 잠시 시간성을 잃어버리고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곧 ‘시간의 공간성’이다.

의미가 충족되니 더 이상 일시적으로 결핍을 느끼지 않고 의미가 그것으로 충족된 상태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결혼 전 연인들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살기를 염원하다가 결혼으로 말미암아 공식으로 동거에 들어가면서 그 기쁨이 최고조에 도달하면서 ‘이대로 영원했으면’하는 감정을 갖는 것과 같다.

이는 곧 쌍방이 ‘자아의 죽음’을 즐거이 맞이하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즉 물리적 시간관마저 이 감성적 시간관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의미 충족’ 때문이다. 물리적 시간들이 감성적 시간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 정도가 되면 물리적으로 그 연인은 살아 있는 상태인지 죽은 상태인지를 평가할 대상조차 되지를 않는다. 타인의 평가에서 이들의 개체적 만족도를 보면 ‘무의미 상태’에 돌입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란 의미와 무의미와 시간과 영원이 뒤엉켜진 존재이다. 이는 곧 인간 존재는 그 영원적인 것, 즉 무기물로 변하는 죽음의 요소가 늘 깔고 앉아있다고 볼 수 있다. 내부적으로 잠복되어 있는 것이다.

내재하는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흐름에 의해 해체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공간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순간이란 그 자체로서도 공간적인 점이다. 흘러가는 지속이 연속체인데 대해 그 극한적인 한 계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개체가 보여주는 동일성이요 그 동일성에서 생산되는 의미이다.

이 의미는 모든 무의미를 극복한 최종적 의미이기에 미리 축제를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바가 된다. 의미가 과잉으로 흘러넘치기에 거기서 나오는 과잉된 행위는 자신을 신적(神的) 존재로 착오하는 모습을 보인다. 연극배우가 매번 다른 역할을 맡으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동일하다고 자각하는 것과 같다.

기억은 바로 여기서 생긴다. 기억을 통해서 자신을 중심으로 놓은 지도 제작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이 나를 향해 연속적으로 돌진해 왔다고 믿는 것이다. 단절을 모른다. 교회 예배 시간에 찬양함으로써 천국에 온 자신을 미리 축하하는 것이다. 자신은 자신이 그려낸 일종의 그림이다. 마치 모네(Claude Monet, 1840~1926)가 그린 그림 속의 수련이 세상 사람들에게 모든 수련의 표준이 되는 것처럼. 모네가 그린 수련이야말로 다른 모든 수련을 온전한 의미완성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개체의 일반성은 사실상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신(神)들이고 절대자로 행세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상호 소통이 가능한 의미는 각자 개별성 안에서 무의미로 전환된 지 오래다. 인간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사과하거나 용서도 없다. 이미 자기 내부적으로 의미의 종결을 맛보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가 지닌 고유한 결핍성이 세상에 풀어지기 위해서 인간에게는 망각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개별적 기억을 조장해 온 집단적 기억은 그 집단이 파괴됨으로써 같이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의미-군(group)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 작업은 이질적 집단과 마주침으로 가능하다. 인간의 혈통에 실려 전달되는 무근거적인 의미들은 태초의 의미군 앞에서 좌초되어야 한다. 혈연의 세계가 생물적-사회적인 것을 계속 미래로 실어나르는 근거가 되기에 인간 혈통 이전의 무근거적인 바탕에 의해서 인간의 모든 집단 기억은 공격받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원적(始元的)인 하나님의 조치다.

이 시원적 조치는 말(말씀=언약=약속)에 의해서 실시된다.

3. 소실점 발생

지상에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 곧 무의미한 것들은 참으로 그들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제대로 된 완성된 무의미와 마주쳐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집단적 의미를 지탱하고 유발해 온 기억 속에 소실점이 발생해야 한다. 구멍이 뚫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2-15).”

만나의 시절은 끝났다(수 5:12). 더 이상 만나가 내리지 않음으로써 만나를 먹어야 사는 자들은 다 죽었다. 무기물이 된 것이다. 모든 의미는 종결되었다. 의미는 무상함 속으로 흘러가서 사라졌다. 이제는 새 시대다. 하늘에서 나타나신 분의 지배를 받은 세상이다. 만나 없이 사는 자는 이제 하늘의 요소로서 살아야 했다. 이를 위하여 여호수아 및 이스라엘 사람들은 난데없는 분을 만나게 된다.

여호수아는 우연을 보았다. 이스라엘은 사건 속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제부터 사건으로 작용하는 새로운 공간(=땅)과 덩달아 새로운 시간(영원)이 펼쳐질 것이다. 인간의 개별적 기억에 의해 고대하는 가짜 영원(가짜 ‘의미완성’)은 더는 인정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진짜 영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은 날마다 좌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사와의 동행은 곧 ‘완전한 죽음’과의 동행이다.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말씀=언약=약속)의 승리다. 이는 인간형 교체를 뜻한다. 완전한 영원에서 시간을 거꾸로 쏟아내면서 ‘없는 땅’이 새로 발생 되는 것이다. 그 현장이 곧 ‘약속의 땅’이다.

신약에 와서 이 땅은 곧 예수님이요 성령이요 아브라함 언약이 약속한 내용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4).” 성령이 곧 약속의 땅이었던 것이다.

땅은 먼저 인격화되어야 한다. 그러면 여기서 인격과 인격의 부딪침은 필연적이다. 그 부딪침의 결론은 십자가 죽음이었다. 약속된 땅이 ‘없는 땅’이었던 이유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거부하시면서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Ⅱ 본론

여호수아 줄거리

여호수아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일임한 사역의 연장이라고 봐야 한다(5:13-15). 하지만 모세에서 여호수아에게 사명이 넘어오는 과정을 결코 순조롭지 않다. 하나님은 왜 모세에게 약속의 땅으로 백성을 인도하지 못하게 하시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모르면 자칫 여호수아는 마치 모세와는 다른 노선에 있는 자로써 오히려 모세의 잘못을 간접적으로 공략하는 인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보아라. 여호수아는 과연 모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아니냐!”라는 식이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민수기 12:1-10절에서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우호적인 평가와 특별한 배려를 간과하는 것이 된다. 모세는 지면의 어떠한 사람보다 온유한 사람이었다. 그가 본 것이 너무나 엄청남에도 그것을 백성의 차원까지 낮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단지 모세를 대신하여 모세의 남은 일을 마무리 하기 위해 들어간 사람에 불과하다(민27:17, 신명기 1:38). 여호수아는 자기가 나서서 모세가 해야 하는 일에 특별히 더 보탤 필요가 요구되지 않는 자이다. 원래 이 일은 모세에게 맡긴 것이지 여호수아에게 맡긴 것이 아니다. 그는 모세에게 철저히 종속된 자다(1:7-9, 11:15, 12:6, 22:5). 그러기에 여호수아는 모세가 알고 있는 표상(表象)에 자기가 뛰어들어야 했다.

모세가 이해한 약속의 땅에서 벌어질 하나님의 사역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 출애굽 때의 율법과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해한 율법관의 차이를 파악해야만 한다. 모세는 자신의 실패와 이스라엘의 실패를 40년 동안 체험하고 난 뒤에 나온 것이 신명기 사상이다.

신명기 신학의 핵심은 지난 40년간, 광야에서의 고생을 모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행하신 시험(신 4:34)이요,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낮추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속되는 교훈의 일환(신 4:36)이었지 결코 그 자체로서 버림이 아니라는 것이다(신 8:1-6).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신 6:4-5)는 것이 먼저 등장할 수밖에 없다.

즉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의미는 이스라엘이 실패하여 가나안 정복이 40년간 후퇴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기 전의 언약을 지금 여기에 모여 있는 자에게 다시 제공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신 5:2-5). 지난 광야 길은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안듯이 한 하나님의 사랑의 작품이었다(신 1:31).

이런 차원을 깨닫는 시절에서 이스라엘은 이제 제대로 여호와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실패에서 다시금 가나안 땅을 마주하게 된 것을 마치 옛날 애굽에서 이제 막 홍해를 건너 빠져나온 순간과 동일하게 여긴다(신 1:30, 5:15, 4:12).

실패 그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는 새로운 홍해 역할을 한 것이다. 즉 애굽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의 죄로부터의 탈출이다. 이제 새로 시작하자는 것이다. 신명기에 와서 하나님은 애굽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싸움에 개입하신 것이 아니라, 애굽적인 사고방식(비언약)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제시한 사고방식과의 싸움에 개입하신 것으로 드러났다.

그 하나님의 사고방식이란 ‘사랑에 의한 선택(신 4:31, 37-38, 7:6-11, 9:27, 10:15)’이다. 그 언약의 구체적 형태를 모세는 법궤로 보고 있다(신 4:13). 그것은 그 상자 안에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 원망했을 때의 물증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9:4).

돌판이 그러하고(신10:1-5) 만나가 그러하고(출16:32-33)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그러하다(민수기 17:10). 따라서 여호수아가 법궤를 앞세우는 것은 하나님이 언약을 앞세우는 것과 같다. 이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와 만나는 장소와 연관되어 있다(출25:21). 거기에서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으로서 임재하신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이 땅에서 그 이름이 영원히 안식할 장소를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을 몰고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신 12:5,11/ 14:24/ 16:2, 6,11). 그 이동은 법궤가 맡는다. 법궤가 안착하는 그곳이 바로 여호와께서 목표로 잡은 도달지점이다.

율법에 대해 여호수아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야 할 방침은 먼저 여호와에 대한 사랑이 우선이어야 하며, 그 사랑은 법궤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유지 보존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표현된다. 이제 여호수아는 자기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땅에 들어서게 된다(1-7).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들어가려 했지만 여호수아는 지팡이 대신 모세의 실패 경험이 담긴 법궤를 앞장세우며 들어간다.

그 언약궤는 모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한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가 서려 있다. 그 법궤가 지닌 의미가 역사와 공간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 모습으로 펼쳐지는가 하면, 인간의 공로와 능력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전 이스라엘은 홍해를 갈라지게 한 유월절 어린 양에 동참해야 하며(4:22-23 5:10-11), 여호수아는 유월절 시기에 맞추기 위해 3일을 기다려서 요단강을 건너야 했고(3:2), 여호수아는 모세처럼 여호와의 사자 앞에서는 그의 종처럼 신발을 벗어야 했다(5:15).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은 기념물을 세움으로 여호와의 언약 속에 자신들이 놓여 있음을 확실히 한다(4:24). 그리고 앞으로 이 땅에서 일어날 모든 일은 언약과 관련된 것들만 일어날 것입니다. 전쟁 같은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언약은 그것만을 두고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야곱의 축복에 참여될 민족의 출현까지를 포함한다. 그 공동체의 특징은 이미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반복되어 왔다. 희년 사상의 실천은 그것의 절정이 될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만으로 땅의 안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여호와 사랑의 확산만이 진정한 안식이다(신15:1-17:20).

그 증거로서 6:5에 보면 여리고 성을 돌 때 양각 나팔을 부는 것이다. 나팔을 그냥 부는 것이 아니라 성을 일곱 바퀴를 돌면서 불게 되어 있는데 이는 레위기 25:8에 나오는 희년 때 부는 나팔이다(민 10:1-9에 나오는 나팔은 두 개의 은 나팔로서 그것의 기능은 전쟁에 나갈 때 사용되는 나팔이다. 따라서 양각 나팔의 사용은 곧 희년의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

즉 여리고 성 함락이 주는 의미는 이 여리고 성을 시발점으로 하여 모든 약속 땅의 점령지를 이스라엘에게 거져 준다는 것을 말한다(6:16-17). 마치 희년 때 집 주인이 노예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그냥 풀어주고 채무는 면제하듯이 말이다(레25:33,40,54). 이 모든 은전의 근거는 그들이 언약의 백성이라는 이 외의 다른 뜻은 일절 없다.

철저한 약속 이행의 확인은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을 자신의 소유로 돌리지 않고 이번 전쟁에서 승리케 한 그분에게만 돌릴 줄 아는 신앙고백에서 드러나며(6:17,24 7:21-
21), 뿐만 아니라 이방의 비언약 민족과는 언약을 맺지 않고 희년을 선포하여 평화적으로 점령하되 거절할 경우에는 언약에 대한 거절이라 여기고 사정을 보아주어서는 아니된다(신20:10-18).

혹시 속아서 맺었다면 그 맹약을 변치 않아야 한다(9:19,22-23). 이와 같이 모세 언약의 유효성은 이 가나안 땅에서 절대적인 법칙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아이 성 재함락과 관련하여 알게 된 여호수아는 신명기 27:1-26에 이미 모세가 지시한 대로 에발산에다 돌로 단을 쌓는데 그 돌은 요단강 한가운데서 채취한 것들이다.

그것을 축복 산에다 쌓지 않고 저주 산에다 쌓는 것은(8:30 신27:4) 축복산의 맞은 편에 있는 에발산을 향하여 축복을 선포하기 때문이다(신11:29). 언약이 계속 유지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율법에 의한 저주에 참여함으로 되어진다. 여기에 이스라엘도 동참해야 한다. 축복과 저주로서 갈라놓은 것은 이방 민족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과 맹약관계에 있는 기드온에 대한 이방 민족의 적대행위는 곧 여호와의 분노를 자초한 것이다. 가나안 연합군의 지도자 다섯 왕은 철저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10:24). 심지어 태양까지 자기 질서를 수정하면서 하루에 처리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을 돕게 된다(10:12).

이런 식으로 중부전선(여리고와 아이 성), 남부전선(기브온과 벧흐론), 북부전선(메론)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낚는다.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으로서 여호와께서 붙이시매 이긴 전쟁이다(10:8). 이제 남은 문제는 12지파 각자가 해결해야 한다.

모세 언약의 특징은 각자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언약의 원만한 유지를 위하여 각 지파나 개인은 자기책임을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땅은 특정한 한 지도자의 개인 소유가 될 수가 없다. 모든 땅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기 때문이다. 땅뿐 아니라 백성들도 기업이다(신9:26/창 12:1-3).

따라서 여호수아는 이 약속에 유의하여 땅 분배에 들어간다. 땅의 의미를 아는 지파가 되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안식에 들어갔을 때(23:1) 여호수아는 모세의 약속이 성취됨을 알리면서 이것이 모두 아브라함 언약으로부터 시작하여(24:2) 요셉의 시신이 이 약속의 땅에 안장될 때까지의 그 내용이 모세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음을 확인시킨다.

이는 바로 모세 언약의 영원성과 그 언약이 선조들의 언약과 같은 맥락임을 천명해 주는 것이다(24:32). 따로 지도자가 필요치 않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으로만 통치되는 것이 여호와께서 바라는 안식이었다.

끝으로 요약하면, 모세가 여호수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모세 언약의 일관성이 여호수아를 낳았다. 모세 언약이란 모세의 실패를 딛고 나타난 언약이다. 만약 모세보다 위대하다면 여호수아와 갖는 언약이 마련되어야 하지만 그게 없다는 말은 실패한 모세가 승리한 여호수아보다 하나님의 기본된 방침에 부합됨을 나타낸다.

모세 언약을 좀 더 분석해보면, 모세의 실패를 극복하고 나온 ‘법궤의 이동에 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언약’이다. 모세와 그 일행은 실패해도 법궤는 그들과 계속 동행했으며 만나는 내려졌다. 그렇게 하신 것은 다른 근거에 의해 조치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모세와 맺은 언약이 아니라 법궤가 지속적으로 함께 해주시는 모세와 그 무리와 맺은 언약이다.

즉 그들은 언약 공동체였다. 신명기에서 중요시되는 관심사는 이동하고 있는 법궤가 어디에 가서 정착하느냐에 있다. 모세는 그 장소조차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음을 알았다. 그 선택된 장소는 바로 모세 언약이 추구한 목표가 달성됨을 보여 줄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이다(일단 여호수아에서는 세겜이다. 24:1,25). 인간은 실패하지만 언약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임을 여호수아를 통해 보여 주신다.

Ⅲ 결론

내가 죽음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약속된 죽음(십자가 죽음)이 나를 덮치는 일을 계기로 ‘나의 세계’의 소멸 속에 나타난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 생명의 열매다. 따라서 언약적 전쟁에서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바는 아무것도 없다. 아니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우리’로 하여금 은혜와 약속과 하나님의 의를 고백하게 하시는 불변의 원칙이 언약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모든 행함은 믿음이 된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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