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사무엘하 : 왕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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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교재 


                  왕의 무대  

               - 사무엘하 속의 그리스도 -
           
Ⅰ. 서론 

1. 근원적 삶의 모습 

사람은 자유롭기를 원한다. 그러나 마음에 동요가 생긴다. 불안이나 공포를 말한다. 불안이나 공포는 고통과는 다르다. ‘고통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분이다. 사람은 고통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알게 되었을 때 실제로 그것을 본 것도 체험한 것도 아닌데 강한 영혼의 동요를 느낀다. 오히려 본 적도 체험한 적도 없기에 불안이나 공포는 제한 없이 확대된다. 그리하여 종교나 미신이 생겨난다. ‘신화(神話)’란 그러한 종교나 미신의 기능을 가리킨다. 

영혼의 동요를 야기하는 신화는 ‘거짓된 무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제한을 두지 않는 무한은 ‘아무리 해도 당신들에게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라고 말해서 불안과 공포를 부추긴다. 따라서 정신적 지배자를 찾게 된다. 

자연주의란 ‘신화’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삶의 방식을 말한다.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에 터전을 두고 관습에 그냥 맡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관습이나 최소한의 규약은 자연과 대립하지 않고, 그것조차 일종의 자연이라고 믿는다. 자연주의는 발명으로 자연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으로 만족한다. 인간의 불행은 ‘거짓된 무한’을 지레 두려워한 데서 오는 것이다. 신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 대신, 자연을 닮아가는 것, 그것으로 인생의 삶이 족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주의다. 동시에 이것이 ‘인간적 자연’이다. 

2. ‘인간적 자연’에서 주체로

주체 구성은 믿음부터 시작된다. 자기 기억에서 나오는 믿음이다. 믿음이 체험을 판정한다. 믿음이 확실해질수록 주체는 더욱 단단해진다. 믿음에는 소기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주체의 절대성 증명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주변의 경험들을 모은다.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모은다. 

그러나 주체는 시간 속에서 분열된다. 쪼개진다. 갈라진다. ‘나’를 시간 속으로 가져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는 나(능동적 자아)와 그것에 의해 규정되는 나(수동적 자아)가 갈라진다. 규정작용은 시간 속에서 실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한 수동적 자아로서 규정되는 것이지만 그 자아에는 ‘생각하는 나’는 ‘다른 것’이다. 이로써 “나는 한 사람의 타자이다”가 성립한다. 자아 속에 균열이 발견되는 것이다. 금이 간 ‘생각하는 자아’다. 

인간의 생각은 갈수록 번져나간다. 질문에 질문을 이어간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이나 지혜란 어디까지나 ‘전개되는 질문’이지 답이 아니다. 필히 뭔가 접혀 있다고 여겨지는 그 의미를 찾아 계속 전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개발하는 것이다.

3. 주체의 전개 

생물학적 유기체로서 그리고 사회적 행위자로서 우리는 자연적이고 인위적인 외연적 경계들이 한계를 정한 공간들 안에서 삶을 영위한다. 즉 경계선이 표기한 한계까지의 공간으로 연장하는 지대들 안에서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도시, 인근 지역 혹은 생태계의 경계들에 대해서 해당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피부, 기관의 외피, 세포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외연적 공간들에 거주하는 것은 우리의 사회적, 생물학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사회적 조직의 형태들은 이런 생물학적 정체성과 다를 바 없다. 고대 사회라고 할 수 있는 수렵-채집인들에게도 중앙 국가장치가 이미 가능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의 시대에도 권위자들이 있었다. 권위자들의 중앙집중권력을 원시인들은 마을-문턱 너머에 있는 것을 용납했다. 그리고 그 권력으로 인해 국가-문턱이 생겨나는 것을 위해 아낌없이 그들의 노동을 헌납했다. 이 노동의 집중이 사회가 중앙 권위 위주로 확대되도록 에너지가 저장되는 것에 그들은 기꺼이 협조했다. 

4. 권력의 출처 

권력의 출처는 ‘욕망’이다. 군주형 권력은 폭력을 대중들 앞에 과시하여 민중을 지배하려 한다. 예를 들면, 군주의 권위에 대해 합당한 존중을 표하지 않는 백성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공개처형이라는 볼거리를 조장한다. 

군주, 곧 스스로 ‘백성의 지도자’라는 자는 체제 유지를 위하여 백성들 앞에서 본보기를 제시한다. 군주에게 철저히 순응하는 인사를 채택하여 ‘복종의 시범’을 보이게 한다. 이와 같은 본보기는 어떻게 하면 권력 핵심부와 결속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군주 쪽에서 백성들에게 군주의 욕망과 어떻게 합치할 수 있는지 그 기회를 열어놓는 것이다. 

만약에 이런 제안에도 백성들이 무관심하거나 반발하게 되면 처벌이 뒤따른다. 규범이 추가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권력 장치’다.

지도자는 백성들의 욕망을 지도층 자신의 욕망으로 자극하는 것이다. 백성들을 군주 자신의 권력 욕망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 백성들의 삶에 정치적 욕망이 생기게 만든다. 그 욕망의 흐름으로 인해 군주 사회를 유지하고자 한다. 이것이 ‘통치 규칙’ 같은 것이다. 감시가 뒤따른다.

기율(紀律)형 권력, 그것은 감시하는 것으로 사람에게 행위에 나서게 한다. 그러나 왜 감시되면 사람은 정해진 행위를 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그러한 행위를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시험이나 단계적 학습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학습성과를 가시화하는 그러한 방식이 학생들을 움직이는 것은 학생들 속에 원래 ‘나만 뒤처지고 싶지 않다’라는 욕망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한 욕망의 배치가 널리 사회에 미치고 있을 때만 이 권력 장치는 작동한다. 그러므로 욕망의 배치가 일단 변화해버리면 이 권력 장치는 전혀 작동할 수 없다. 

통제는 지배가 아니라 체크를 의미한다. 감시에 의해 사람들에게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행위를 하거나 이동하거나 하는 그사이에 점검 사항(√)을 설치하여 그 기준에 만족한 인간만을 앞으로 내보내는 것이 통제사회의 작동양식이다. 

어떤 권력 방식이든 이미 정해진 욕망의 배치를 전제로 하고 있다. 특정 권력 양식이 특정 욕망의 배치를 전제로 하고 있음은 그 권력이 어떤 이유에서 사람들에게 욕망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주형 권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군주형 권력에 의한 지배가 욕망 되어야만 한다. 기율형 권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기율의 지배가 욕망 되어야 한다. 통제사회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기율이 아닌 체크 포인트형 관리방식에 의한 지배가 욕망 되어야만 한다. 

5. 욕망의 배치형태 

욕망의 배치에 권력 장치를 동반한다. 그렇지만 권력 장치는 배치의 다양한 구성요소 속에 위치해야만 한다. 따라서 권력 장치는 배치의 한 구성요소가 될 것이다. 

권력이란 욕망의 변양(變樣)이다. 사적인 에너지(힘)의 흐름이 양상으로 변한 것이다. 이 힘은 욕망의 배치 속에서 구성된 한 부품으로서의 미시(더욱 작은 세미한 권력) 장치를 통해 ’행위와 상호 연결되는 행위’로서 혹은 다이어그램(diagram)으로서 작동한다. 

권력은 어디서부터인가 무언가로 작용한다. 이것은 권력이 그것이 작용하는 대상과는 다른 수준에 위치하게 됨을 의미한다. ‘정말로 하고 싶은 것’과 ’실제로 하게 되는 것’의 구별이 어떻게 해도 권력의 개념 속에서 스며들어와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은 높은 곳이든 낮은 곳이든, 어쨌든 어딘가로부터 와서 주체에 작용하고 그 주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억제해서 무언가 행위를 하게 한다. 즉 권력은 아무리 해도 어떤 주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도식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게끔 되어있다. 억제(억누름)나 이데올로기(이념, 명분)는 힘들 간의 투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에 의해 말려 올라간 흙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은 항상 주체를 밀수입하고 있다. 권력 장치의 주체에 대한 억제는 욕망 배치의 최선단에 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주체에 내재하는 힘이다. 

그 내재하는 힘이 여러 요소와 조합되어 욕망의 배치가 구성된다. 기율에 있어서 감시에 따르는 노동자나 학생이나 병사는 따르도록 강요받고 있지는 않다. 그들은 그렇게 행위를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다. 권력이란 이러한 발생 과정의 결과요 욕망 배치의 선단이다. 

사회란 어떻게 욕망하는 주체 속에서 욕망이 자기 자신의 억제를 욕망하게 되는가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욕망과 사회만이 존재하고 그 외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은 자유롭게 될 수가 없는가? 아니, 왜 사람은 자유롭게 되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주체의 자리가 사회 권력의 일부로 행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에서의 자신의 배치를 사랑한다. 

6. 다이어그램(diagram)

점과 점을 선으로 연결함에 작동하는 권력의 기능이 다이어그램이다. 예를 들어 철도운행에서 말하는 ‘다이어(dia 편재하는)’, 즉 운행상황을 점과 선으로 표시하고 관리하는 그 지도이다. 철도의 다이어는 역이라는 점을 열차의 운행이라는 선으로 묶는다. 사고와 같은 비상사태로 운행에 지연이 생긴 경우에는 선과 선 사이가 좁아진다. 철도회사는 선과 선 사이를 조금씩 넓게 해서 열차를 운용하고 다시 통상의 다이어로 돌아간다. 다이어그램은 확실히 유연하고 상황에 대응하고 전체를 일정 목적에 따르게 한다. 따라서 이 개념은 각 요소를 배치와 배분에 의해 관리하는 권력관을 설명하는데 적절하다. 

7. 습관으로 옹립되는 권력   

습관은 항상 경험에 후속(後續)하지만, 경험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다. 어떠한 의미일까? 경험에서 습관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습관에서 새로운 습관이 나온다는 말이다. 반복이 반복을 유발한다. 반복되는 것은 하나하나가 다른 것이지만 완전히 동일한 행동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며 완전히 동일한 사태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복은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낸다. 습관은 경험으로 대체할 수 없는 새로운 체험을 갖게 한다. “무언가 새로운, 즉 차이를 훔쳐내는” 것으로 성립한다. 그리하여 반복적인 새로운 습관이 인간 행동의 규범이 된다. 

그러나 사람은 매번 새로움을 감당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피곤해진다. 누가 잡아주어야 한다. 여기서 습관이 현실 원리, 혹은 통치자의 배려와 손을 잡는다. 습관이 안정성을 바라는 것이다. 이런 습관이 ‘수동적 종합’이며 지복(至福 - 더없는 행복)으로 이해한다. 

사람은 이 지복(至福)이 내내 자기를 둘러싸기를 원한다. 그 안에 자신이 멈춰 있기를 바란다. 권력자는 이 지복을 보장한다. ‘수동적 종합’을 도와준다. 이로써 대중들은 자신의 안정적 습관성을 방해하는 것은 자신의 지복을 방해하는 것이고 이것을 ‘불법 침입’으로 간주한다. 일종의 ‘폭력’이며 ‘적(敵)’이 된다. 이처럼 권력을 인간들은 애타게 사모하게 된다. 

8. 기호의 압박

인간은 기호 체제 안에 놓여 있다. 기호란 우연적 만남의 대상이다. 기호는 만나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기호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에 대해 강한 작용을 향한다. ‘나’에게 무의식적인 상기(想起)를 강요한다.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며 ‘강제’이다. 이 폭력 혹은 강제의 작용에 의해서 비로소 사람은 사유하기 시작하고 진리에 도달한다. 사람은 적극적 의지에 의해 진리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진리는 항상 어쩔 수 없이 사유하게 됨의 결과로서 획득된다. 

사람은 사유하는 것은 아니다. 사유하게끔 된다. 사고는 강제의 압력에 의해서만 개시되는 것이고 그것을 강제하는 기호는 항상 우연적 만남의 대상이다. 

여기에는 단호한 명령이 기다리고 있다. 헌신에 실수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한시도 무의미한 몸짓이나 생각을 용납하지 않는다. 기호가 충실성 흐름의 선단(先端)이다. 이는 모두다 동일한 충실성으로 기호 속에 녹아 들어가기를 권력이 원하기 때문이다. 이 기호 그물망 속에서 인간은 기계가 된다.

9. 기계로서의 인간

기계는 기호들의 체제에서 부분을 차지한다. 이로써 주체는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구조에서 구성품으로 조립되는 것이다. 상황적으로 어쩔 수 없이 기계와 기계 사이는 절단되고 연결된다. 역사 속에서 주체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주체를 통제하는 영역이다. 어느새 주체는 세상을 향하여 통제를 요구하게 된다. 그 통제의 방법이 기호다. 

10. 뻔하지 않은 게임 

‘로고스(말, 이성, 진리) 놀이’가 있다. 논쟁과 갈등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는 놀이다. 그러나 공이 제멋대로 튀는 것처럼, 정답을 아는 누가 알아서 조종해주기는커녕 놀이 참여자들 어느 쪽도 미리 알 수 없는 우연의 길로 접어들게 한다. 서로가 던지는 질문에는 답도 없으며 질문하는 사람은 새로운 무지에 직면한다. 힘겹게 상호 공통적인 융합의 장(場)을 형성했다고 안도하는 순간, 다시금 진리는 틈을 내보인다. 휴식할 여유가 없다. 자꾸만 해체되는 사태로 인해 모두들 하늘에서 순수한 대상이 오셔서 모든 것을 종결지었으면 하고 고대하게 된다. “왕이여, 유령같이 오소서!”

10. 왕의 자격

생은 더 거대한 세계를 맞이하기 위해 죽어야 한다. 자아의 죽음만이 말씀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더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세계의 내용은 이 세상에서 기호가 되고 다윗은 그 기호로서 옹립되고 기호처럼 움직이는 기계다. 다윗의 태도와 생각과 행동, 모두가 다 ‘하늘의 기호’다. 

다윗의 주체는 기호로서의 기계작동을 방해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기계로 하여금 수시로 자아를 잃게 한다. 그 순간에 포착되어 진리 사건은 나타난다. 여기서 ‘(율)법’이 효과를 발휘하는 대목이다. 법은 하늘의 기호가 인간 주체를 만나 정립되는 것으로서 여기에 다음과 같이 마법같이 현상이 일어난다.

마치 절벽을 벗어나 걷다가 밑을 내려다보고는 아무것도 받쳐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전까지는 떨어지지 않는 만화의 인물과 같은 존재를 율법은 소개한다. 법을 지키려고 할 때는 정의(正義)와 무관했고(삼하 12:5), 법 없이 행동할 때는 법이 정의(正義)로 작용하여 책임을 묻는다(삼하 24:4, 10). 

다윗의 일대기는 이처럼 진리가 연속적으로 출몰하는 구조를 갖춘다. 다윗의 생애는 율법의 개별화다. 율법은 왕이라는 인물을 친히 선정하고 스스로 표현한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신 17:18-20).”


Ⅱ. 본론  

1. 다윗의 등장 
다윗이 사울에게 배척받게 된 것은 백성들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을 때부터이다(삼상18:7-9). 사울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유일한 통치양식으로 지속시켜나가고 싶은데 다윗으로 인해 차질을 빚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특히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이 시점에서 다윗의 긍정적 활동으로 백성들의 눈에 자신의 버림당한 결정적 증거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울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다윗을 자기 사위로 삼아 그를 위험한 전쟁터에서 죽도록 내보낸다(삼상18:25-27). 

그러나 그것이 사울과 다윗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쳐지는 계기가 되는데 원인은 한쪽은 하나님이 함께하지만 다른 한쪽은 함께하지 아니한다는 차이 때문이며 원수 관계로 표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18:28-29). 

이후부터 다윗의 편이 아닌 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란 말로 등장한다(시편에서). 따라서 다윗의 활동에 따라 하나님의 원수가 새로운 양상으로 정리된다. 다윗이 쫓겨 다니면서 사울 왕, 즉 기름 부음을 입은 자에게 행하는 태도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면 곧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뜻에 무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윗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도망자로서 살면서 그는 무엇을 이스라엘에 남기며 보여주고자 했던가? 그것은 모든 것을 무(無)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도 다윗에게는 해당이 된다(21:1-6). 거룩과 비거룩을 다윗의 활동에서 다시 봐야 하기 때문이다(삼상23:9/30:7). 

거룩이란 원수로부터 배척받은 것을 오히려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의 심정과 동일한 차원이기 때문이다(삼상23:21/24:17). 그때부터 다윗은 없이 지내는 왕, 악인들에게 쫓겨 다니는 왕, 비천하고 소외된 자로부터 환영받는 왕(삼상22:1-2), 그런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카리스마적인 구원자의 역할을 수행한다(삼상30:7-20). 그래서 여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 전리품(헤렘)을 유다 장로들에게 나누어 준다(삼상30:26). 

이는 여호와 전쟁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여호수아와 동일한 차원에서 이루어짐을 유다 지파에 알리는 셈이 된다(수22:8). 이처럼 그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카리스마적인 직능인 기름 부음에만 기대를 건다(삼상24:5-6). 그는 왕 직능을 원초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하는 가운데서 발견하고자 한다. 

그 원초적 모습은 긍휼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이스라엘은 구원될 수 없음을 규정한 모습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곧 긍휼이다. 긍휼을 이해 못하는 자는 비이스라엘적이다.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은 다윗이 왕으로서 보여준 긍휼에 무관심함으로 하나님이 친히 그를 치신다(삼상25:38). 그뿐 아니라 사울 왕도 그 아들과 블레셋 전쟁에서 사망한다. 

한 왕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경험하고(삼상28:18) 새로운 왕이 그들을 애도함으로 앞으로 새 왕이 등장해서 통치하는 방식은 이스라엘의 실패로 받아들이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기대를 거는 방식임을 알게 된다(삼하1:16-27).

2. 줄거리 

(1) 점차 강해지는 다윗의 권위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의 과제는 자신이 단순히 다윗(유다) 지파만의 지도자가 아니라 전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왕 됨을 어떻게 백성들에게 납득시키냐에 있다(삼하2:4,10-11). 이런 점에서 사울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왕가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를 존속시키는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사울 자체보다도 그가 이스라엘 왕의 자격으로 죽었다는데서 사울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왕 체제 자체를 계속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양식으로 고정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또 하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발생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다(삼하2:10).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는 무리한 시도였다. 애들 장난 거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삼하2:14). 

다윗은 모두를 용서하고 싶었다(삼하4:10-12). 그러나 요압은 개인적 복수심 때문에 과도한 반응을 나타낸다(삼하3:27-39). 어쨌든 자연스럽게 사울의 집은 약하여지고 다윗의 집은 강해진다(삼하3:1). 사울 집의 약화는 백성들로 하여금 나머지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삼하5:1-3). 다윗은 카리스마적인 언약자로서 백성에 대한 자기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남은 이방인들을 치기 시작한다(삼하5:3,6,19,25). 

(2) 여호와 전쟁의 중심점
여호와 전쟁에서의 중심은 법궤에 있다(수6:6). 그것은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3차례씩 여호와를 뵙기 위해 이곳에 와야 한다(출23:17/34:23/신16:16). 

여호와의 임재 장소를 일정하게 규정했다 할지라도 법궤의 이동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가나안 땅의 성소에 여호와가 임재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출애굽기 20:24의 제단법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토단을 쌓을 것을 명령하시면서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라고 약속했다. 

나중에 이 토단에 성막이 들어서고 법궤가 안치된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에 어떤 의미가 부가되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깨져버린 돌판을 극복하고 그 자리에 새롭게 제공된 돌판이므로 말씀대로 하자면 당연히 멸망 당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을 ‘노하기에 더디하고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출33:19/34:6) 현재 동행하고 있다는 물증으로서의 법궤(시은좌 또는 속죄소)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약속의 땅을 전부 점령했을 때, 바로 그 자리는 여호와의 승리가 영원히 빛날 장소이다(민10:35). 다윗은 신명기에 나오는 ‘여호와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된 장소’를 카리스마적인 사명이 완수된 최종적 장소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거기에만 비로소 안식이 실제적으로 보장된 것을 천명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신12:5,10-11,14,18,26,14:23-15:20/16:
2,6 ?7,11). 

그 택하신 장소까지 승리를 이끌어 가는 당사자가 바로 신명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된 자라는 견해를 다윗은 가지고 있다(신16:16/17:15). 다윗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여부스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추방되어야 할 최종의 족속인데 그것마저 정복했다는 뜻이 있다(창15:21/수3:10/삼하5:7).

드디어 전쟁이 그치고 평정 상태에 들어가게 될 때 법궤로 구현된 하나님의 이상(理想)도 이제는 이스라엘 앞에 보여질 때가 된 것이다. 법궤가 일정한 장소에 영구히 안치될 때 이스라엘의 영원성도 함께 보장받는다. 다윗이 법궤를 자기가 거처한 곳으로 가져온다(삼하6:10).

(3) 사울 왕가의 한계 
여기서 사울가(家)에 속한 왕비 미갈은 왕의 체통을 지킬 것을 요구했지만 다윗은 왕의 임무가 법궤의 유지 보존에 있음을 주장한다. 그 자체가 고발 가운데서의(왕 제도) 긍휼이기 때문이다(법궤). 심판과 긍휼이 왕 제도에서 만난다. 미갈의 불임(不姙)은 이러한 다윗언약에 이탈되는 생각이므로 다윗왕가의 후손을 낳는 왕후의 자격에서 벗어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다윗의 생각도 다윗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생각에 미흡하다.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반대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겠다고 하신다(삼하7:5-17). 하나님이 말씀하신 집은 궁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가문 자체다. 그러나 누가 다윗의 진정한 가문에 속하는가 하는 것은 단순히 혈통 서열로 결정되지 않음이 다윗언약의 신비다. 

그 신비는 누가 진정 다윗의 차기 왕이 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언약을 통해서 언급하셨듯이 다윗의 후손이 곧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특권을 지니게 되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삼하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따라서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뒤 대외적으로 어떤 눈부신 실적을 남겼느냐(삼하 8장), 혹은 대내적으로 얼마나 정치제도를 안정되게 정비했느냐 보다는(삼하 9장) 사무엘 저자가 많은 분량을 다윗의 사생활과 가정에 초점을 맞추고 다윗언약이 가진 실체는 세속적인 정가(政街)에서만 밝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울의 집에 남은 자를 찾아내어 후대함으로 자기의 관대함을 정가에 비치고 이방 나라와의 관계에서 힘의 우위를 선포함으로 내외적으로 말썽의 소지를 없앤 다윗은 다윗언약의 대상인 왕의 실체를 힘에 의한 통치라는 차원에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즉 힘의 대결에서 승리자가 왕이 되고 또 하나님의 양자 자격을 갖는 것으로 여겼다.

(4) 다윗의 인간적 본질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열왕기 저자는 다윗이 사방에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했고, 역대기 저자는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고 한다(왕상5:3/대상22:8/28:3). 전쟁에서의 승리가 결코 다윗언약에 들어 있는 왕의 표상과 상관없음이 다윗 자신의 전쟁 중에 한 행위로 드러난다(삼하11:1).

이미 남편 있는 여인임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와 관계를 가짐으로 율법과 마찰되는 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이 여기에서 무마되면 좋았을 터인데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뒤에는 임신케 한 장본인을 휴가 나온 남편으로 돌리기 위해 일을 꾸몄지만 거룩한 여호와 전쟁 수행에만 관심 있는 우리아는 다윗의 술책에 말려들지 않았다(삼하11:11). 

이러한 우리아의 일관성 있는 태도는 다윗의 다음 범죄를 유발하도록 하는데 의외로 성공(?)한다. 하나님은 우리아 부부를 통해 다윗이라는 인간의 범죄성을 밝힐 수 있는 데까지 밝혀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나단이 다윗을 지적할 때 간음이나 살인의 차원에서 고발하지 않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삼하12:1-6).

나단의 지적은 가난한 자와 부자라는 두 신분계층을 예로 들면서 신분적인 특권이 이스라엘에서 허용될 수 있느냐를 물었다. 특권이란 개인이 지닌 신분의 차이 때문에 각자 다른 법에 규제를 받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과연 이스라엘에서 보편적인 법을 제쳐두고 특정인이 그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먼저 이스라엘 왕인 다윗에게 나단은 묻고 있다. 

여기에 대한 다윗의 대답은 명쾌하다. 소위 이스라엘의 왕 입장에서 볼 때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그런 자의 존재는 용납되지 아니한다(삼하12:5). 율법의 적용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이다(출24:5-8). 쌍방이 책임지는 관계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언약 때문에 유지가 가능했다.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이며 하나님의 긍휼을 거부하는 자는 그 누구든 모세언약의 저촉을 받아 죽게 되어 있다. 그때 나단은 이야기해 준다.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여기서 나단은 왕의 임무에 대하여 중요한 사항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단순히 왕이 백성들 보기에 솔선수범해야 한다든지 모범적으로 먼저 율법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 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왜 나 같이 부족한 자를 왕으로 세웠는가 하는 하나님의 의중과 관련되는 것이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나단에게 지적받고 난 뒤에 한 기도가 적혀 있다. 여기서 보면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는 것과 ‘성신에 관한 언급’과 ‘주님은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상한 심령을 원한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온성(城)이 어떻게 변모되어야 하는지 희망 사항까지 거론하고 있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시51:18-19).”

율법 이전에 먼저 주의 은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윗은 강조하고 있다. 위와 같은 기도를 하게 된 다윗의 신앙적 기반은 무엇일까? 범죄한 자는 반드시 여호와께 벌을 받는다는 강렬한 율법수호 정신을 자신에게 적용할 때 어떤 경우에만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면 자기가 그 범죄를 물리칠 힘을 소유했다는 것이 증명될 때만 가능하다. 

다윗은 자기가 늘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고 표적으로 여겼던 그 죄 자체를 어디서 발견했는가 하면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나님이 나단을 통해서 이 말을 했을 때 다윗은 비로소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존재임이 파악된 것이다. 

그러면 나단이 자기를 찾아오기 전에도 이미 자신은 수많은 범죄를 행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버티고 살아왔으며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위치에 있는가? 여기에 대해 다윗은 하나님의 수많은 인자와 긍휼의 결과라고 이해한다. 

결국 왕이란 다윗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인자하신 하나님의 자리임을 인식한다. 하나님의 긍휼의 자리이다. 다만 자가가 왕의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를 누구보다도 절감하여(시51:4) 오직 긍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道)를 전하고 가르치기 위함이다(시51:13). 

진정한 제사와 번제는 통회하고 상(傷)한 심정이다(시51:17/40:6). 다윗언약에 의한 진정한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다윗의 통회하는 심정을 영원히 담아둘 수 있는 출생의 경험을 지닌 자에 한한다. 

(5) 죄 속에서 피어나는 긍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 해당되는데 그 사랑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윗의 범죄로 잃어버린 자, 그 바탕 위에 다시 태어난 자에 한해서 비로소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삼하12:15-25). 

다윗은 말없이, 아무런 연고 없이 죽어버린 아이의 모습과 자신의 죽음을 동일시하고 있다. “나는 저에게 가려니와”(삼하12:23) 여기서 다윗의 하나님의 용서의 의미를 발견한다. ‘죽은 아이’에게서 희생제물의 의의를 발견한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 행위를 ‘주께서 꺾으신 뼈에 참여시켜 그것으로 기뻐하는 행위’를 두고 말한다(시51:8). 다윗도 아이의 죽음을 자기 죽음으로 간주하여 참여를 선언함으로 자기 말고 자기의 죽음, 그 현장에서 나타날 하나님의 그 다음의 행위에 기대를 건다. 그것이 여디디아, 즉 하나님의 사랑 행위이다. 

다윗언약은 다윗의 혈통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내막을 알고 있는 자로 이어진다. 다윗의 경험을 자기 경험으로 여기는 자 말이다. 따라서 이 이후에 나타나는 다윗왕가의 내분은 혈통적 다윗왕가가 얼마나 다윗언약과 상관이 없는가를 보여주는 실례(實例)가 될 것이다. 

(6) 다윗 왕가의 내부적 혼란

사무엘하 13장에 넘어가면 다윗왕가에서 일어난 사적(私的)인 일 하나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사무엘하 12:10-12에 나오는 다윗가(家)의 재난의 예고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그 원인은 결코 힘의 불균형에서 야기된 것이 아니라 다윗왕가의 부도덕성과 비윤리성과 그것을 제어할 수 없는 개인적인 자질과 연관됨을 보여준다.

바로 그러한 가치관의 혼란이 다윗언약과 상관없는 세력들의 준동을 방치할 수밖에 없는 다윗 및 다윗왕가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처럼 성경은 다윗언약이 수립된 후에도 그 기반에는 모세율법이 지향한 정신은 변동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잦은 후계자 문제로 혼란해지는 이스라엘의 정치상황도 원래의 노선을 빨리 찾아가지 아니한데 책임이 있다. 그 원래의 노선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윗의 현 시점에서 다윗의 부도덕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 다시 반복되는 가운데서 누가 실패자이며 그 실패자 때문에 누가 또 우리아 같은 희생을 치르게 되느냐로 밝혀진다. 

즉 의인의 죽음을 값으로 하여 언약의 근저(根底)를 이루고 있는 사상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복오빠 암논의 다말에 대한 범죄는 다윗의 분노는 샀지만 결코 다윗으로부터 왕자 지위가 박탈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입장에 있는 왕자 압살롬에게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싸잡아 공격하고자 하는 기회를 차후에 갖게 한다(삼하13:21-22). 

그러나 이는 다윗 왕의 생각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다윗언약은 보복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못에 대한 후속 조치는 있어야 했다. 공의성(公義性)을 생명으로 하는 왕으로서 피해 당사자로 하여금 복수라는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왕의 미지근한 범죄자에 대한 태도는 피해 측으로부터 가해자를 싸고돈다는 의혹을 낳게 했다. 그렇게 될 경우에 복수하는 측에서는 결국 가해자뿐 아니라 그 가해자를 보호했다고 여기는 배후까지 공격해 버리는 실수를 유발케 하는 것이다. 

(7) 드러나는 권력층의 속셈 

왕가의 혼란은 이래서 야기된 것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다른 이유에서 왕의 정책에 혼선을 조장하는 세력이 있으니 요압이다. 요압의 눈에 다윗왕의 결정은 일관성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다윗 왕의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암논의 다말에 대한 겁탈 사건을 듣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던 왕은 이번에 또 압살롬이 양털 깎는 축제 기간에 왕자들을 몰살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압살롬에 대한 책망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들이 자기 곁을 떠났다는 사실에 대하여 슬퍼할 뿐이다(삼하13:37-39). 

당황한 쪽은 다윗의 명확한 정책 기조를 몰랐던 요압이다. 그래서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어떤지 시험해 보려는 유혹을 받는다. 요압의 이같은 태도는 모호하기만 한 다윗의 의중에서 도대체 누구를 진정 차기 왕으로 앉힐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갖기 위해서다. 그래서 압살롬을 미리 천거해 보는 것이다(삼하14:1).

거기에 따른 다윗의 반응이 궁금했다. 연기(演技)에 능한 여인 하나를 내세워 여인 자기 집안 일인냥 사건 하나를 의뢰케 했다. ‘두 아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는데 그나마 남은 아들도 살인자로 몰려 또 죽여야 하는가’라고 문제를 가지고 상담을 의뢰한다. 

그러나 요압의 이러한 비유는 압살롬과 다윗 사이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다윗언약에 의하면 왕의 후계자는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되어 있고, 그 선택은 왕이 알고 하나님의 심정에 참여된 자에 한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알고 있는 간택문제는 율법의 차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율법에 의한 형벌을 피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그것이 구현이라고 본 것 같다.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한 것은 율법적 차원이 아니라 사랑의 차원이었다. 

(8) 반란 

다윗은 자기가 말한 것이 있어 아들 압살롬을 3년만에 예루살렘으로 올 수 있도록 허락하지만 진정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얼굴 마주 대하기를 거절한다(삼하14:24).

왕의 이러한 태도는 요압으로 하여금 다시 압살롬을 거론하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가 될 것 같아 그와의 관계에 부담을 갖는다(삼하28-33). 이러한 추세가 압살롬으로 하여금 기존에서 탈피한 독자적인 방식으로 거사에 대비케 한다(삼하15:1). 

향후 4년간 그가 한 일은 무엇일까? 왕의 색다른 이미지를 대중 속에 심어나가는 것이었다. 감히 다윗 왕이 생각지도 못한 재판관 제도를 자기가 창안한 것으로 여겨 왕과 대중 사이의 대화와 삶의 유일한 창구를 틀어막아 버렸다(삼하15:2-6). 그리고 제사 순례(예루살렘에서 헤브론, 다시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를 이유로 왕으로부터 허락을 득한 후에 헤브론으로 빠져버린다.

이는 압살롬 자기가 헤브론에 거처하는 것이 왕의 합법적인 승인에 의한 것임을 알림과 동시에 그 다음 시행될 일도 적법할 것이라는 개연성을 백성들에게 유도해 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초청받은 유지들이 별 의심 없이 압살롬과 행동을 같이한 것이다(삼하15:7-11). 

다윗성을 떠나 피난 길에 나선 다윗왕은 후궁 10명을 궁전에 남겨둠으로써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기대한다. 압살롬의 반란을 일시적인 일로 여기고 법궤까지 이동시키려는 레위인들에게 제자리에 놓기를 당부한다(삼하15:24-29). 피난길에 오르는 다윗과 그 일행은 울음으로 비참한 현실을 맞이한다(삼하15:30). 도대체 누가 이 참담한 혼란으로 이스라엘을 몰고 가고 있는가?  

(9) 반란의 경과

누가 이런 소식을 전한다. 아히도벨이 적군 쪽에 붙었다고. 그때 다윗은 그 아히도벨의 책략을 무산시키는 것 자체가 사태를 원상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고 여호와께 기도한다(삼하15:31). 

마침 후새가 자기 앞에 나타난다. 다윗은 후새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압살롬을 영접하게 한다. 그래서 압살롬으로 하여금 두 사람의, 즉 자기를 따라온 신하와 선왕(先王)을 배반하고 자기를 왕으로 환영하는 신하의 충성도(忠誠度) 사이에서 번민케 하여 정책 결정을 주저하고 있을 때 다윗 일행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삼하17:22).

다윗왕에 대한 변란은 평소에 다윗 왕가에 대한 불만 세력이 누구였고, 또 우호적인 자들이 누구인가가 명확히 구분되는 계기가 된다. 같은 사울 집안에 속한 자 중에도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의 사환으로 있는 시바가 왕의 호의에 대한 자기 주인의 변절을 이야기해서 많은 양의 물자를 받는다. 

왕은 그에게 자기 주인의 것이 이제는 너의 것이 되리라고 약속한다. 주인이 바뀐 셈이다. 거기에 비해 베냐민 지파에 속한 시므이가 나타나 다윗의 행렬을 따라오면서 저주와 악담을 퍼붓고 심지어 돌과 티끌을 뿌린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다윗 자신이 사울 지파를 피 흘리게 한 범죄의 대가가 이제야 자기 아들을 통해 완벽하게 보응받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다윗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원통함을 알고 그의 모든 저주가 오히려 선으로 바뀔 것이라고 여긴다(삼하16:12).

다윗의 이러한 생각은 신하인 아비새와도 다른 것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굴욕 속에서 다윗언약으로 이스라엘을 정비해 보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고 한다. 자신이 굴욕 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언약대로 움직여 나갈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에서는 후새와 아히도벨의 정책 대결에서 후새가 승리하고 있었다. 승리의 비결은 간단했다.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임을 증명한 쪽이 이기게 되어있는 것이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후궁을 차지하도록 권하는데 이는 후궁은 왕에게 봉사하기 위한 왕의 전용물과 같은 의미가 있어 압살롬은 그의 실세(實勢)를 과시한다. 

그뿐 아니라 압살롬으로 하여금 도망 다니느라 지쳐있는 다윗의 세력에 덤벼들어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그들의 군대를 우리 편으로 삼을 수 있고, 고립된 상태에서 다윗 왕을 제거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거기에 대해 후새는 다윗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로 한 후에 성급한 공격은 오히려 적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만의 하나 전투 초반에 우리 편이 밀리는 경우 군 전체 사기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제기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온 이스라엘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다윗 군대를 공격하면 마치 이슬이 땅을 덮듯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는 완전한 승리가 보장된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후새의 의견은 아히도벨의 의견보다 더 극적이고 환상적이라 참모들에게 감명을 끼친다. 이러한 압살롬 편의 현실을 무시한 허망한 꿈은 후새의 계략에 의해 더욱더 자만에 부풀게 된다. 다수의 지지가 후새에게 쏠리자(삼하17:14) 아히도벨은 스스로 죽는 길을 택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다윗 군대는 백성들의 요구대로 왕이 친히 나가지 않는 상태에서 압살롬 군대를 공격한다. 공격 이전에 다윗은 장군들에게 ‘나를 봐서라도 압살롬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처리할 것’을 부탁한다. 

(10) 탈선 왕자의 몰락 

막상 전쟁이 벌어지니 압살롬 군대는 오합지졸이 된다. 압살롬 자신도 짐승을 타고 숲속으로 도주하여 피신하려고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외모의 장점인 긴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생포되고 만다. 이 사실이 요압에게 알려지자 고의적으로 왕의 명령을 위반하고 사정없이 죽여버린다. 그 후 요압은 다음 행동을 염려한다.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보류할 것을 지시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구스인을 하나 보내어 일단 다윗왕의 태도를 엿보기로 한다. 예상대로 다윗은 전쟁에 승리한 병사들을 격려하기보다는 자기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더 슬퍼한다. 이는 다윗언약에 있어 하나님의 언약 상대자의 성실에 따른 것이었다(삼하7:14/18:33).

다윗왕가의 고유성은 단순히 죄지었다고 처단하는 그런 율법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표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남겨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한 다윗 왕 정책의 이상(理想)이었다. 

그러나 다윗의 자기 가문에 대한 집착은 일부 신하와 전 왕의 복권에 미련이 있는 세력들에게 지파 대 지파의 감정대립으로 백성들을 몰아 자신들의 힘 규합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준 셈이 된다.  

특히 군대장관 요압은 그 와중에 자기 판단으로 전쟁을 수행했는데 압살롬의 살해는 왕의 부재중(不在中)에 벌어졌다는 데서 다윗이 없을 경우에 요압이 취할 태도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왕의 의사에 반하는 승리는 다윗언약 체제에 아무런 의미가 없고 도리어 이방적이다. 다윗언약에 의한 승리는 사사의 속성의 연장으로 힘과 다수에 의한 승리로 귀결될 수 없다. 가장 못난 자를 통하여 승리를 가져오는 방식이 여호와의 전쟁 방식이다(삿8:2). 

다윗은 군대장관을 새로 귀순한 아마사에게 맡기기를 원했다(삼하19:13). 그러나 그 사람도 다윗의 부재중에 요압에게 살해되고 만다(삼하20:10-13). 여기서 요압과 다윗이 전쟁을 보는 견해에 차이가 드러나는데 요압의 경우 승리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며 전쟁 수행 중 다윗을 분노케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삼하3:27-28/18:14-15/19:13/20:10).

요압은 다윗으로부터 우리아를 제거하는데 가담한 자였다(삼하11:16-17). 요압이 생각하는 왕정체제란 왕의 절대적 권한 하에 모든 권력을 집중시켜 질서를 유지하는 체제였다. 이것은 오직 정면 대결에서 힘의 우위를 차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적과 동지의 구분은 정복당한 자와 정복자에서 결정된다고 여긴다.

왕이란 항상 이겨야 그 자격을 인정받는 것으로 생각했다(삼하12:26-28). 요압의 이러한 견해는 귀순해 온 자에 대한 다윗의 파격적인 우대에 대하여 회의를 낳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조금 전까지의 원수를 전우로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배신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러나 다윗은 이방인들과의 전쟁과 달리 국내 분쟁은 그 의미를 달리 이해했는데 그것은 밧세바 간음 사건과 우리아 살해 공작 이후 시온성에 대한 견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시온성은 어떤 분쟁에 휩싸인다 해도 그 은혜성을 인정하는 자의 차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시51:18). 밧세바에 대한 다윗 자신의 범죄는 바로 다윗언약이 내포하고 있는 그 은혜성에 대한 무지의 소치였으며 그것을 간접적으로 가르쳐 준 자가 바로 햇 사람 우리아였다(삼하11:11/신23:10). 

우리아의 언약에 대한 이해는 왕이 행한 형식적인 율법관과 달랐다(삼하11:4/12:6). 언약에 대한 자신의 포기 내지는 헌신이었지 결코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언약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윗이 자신은 비록 왕의 위치에 있지만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위한 충실한 종을 자신이 살해한 셈이 된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범죄로 모아진다(시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이스라엘에서 범죄는 율법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진정한 율법이란 우리아의 죽음에서 그 주체가 밝혀진다(시51:8 ‘주의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34:20). 다윗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계속 왕으로서 존속되고 언약이 유지되는 것은 바로 우리아 같은 의인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대표로 하는 왕, 즉 죄인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고 그 우리아의 아내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여디디아) 새롭게 창조, 혹은 회복된 것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마1:6). 

이로써 다윗은 국내 분쟁의 와중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진정한 언약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고 모든 변란과 반란을 이 정신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섭리로 간주한 것이다. 잃어버렸던 자를 의인의 죽음을 대가로 하여 다시 찾아 나서시는 그 언약적 속성이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피어나고 있음을 다윗은 증명해 보고 싶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진정한 사명은 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이다. 

(11) 정돈되는 권력층

그것은 전쟁의 연속, 피 흘림과 칼부림으로 인해 얻어낸 힘의 우위를 가지고 질서 잡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심판이 있다면 이러한 다윗의 언약적 통치를 이해 못하는,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배반하는 자의 것이 될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은혜성에 어두운 것이 언약과 무관한 자였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요압은 가장 비이스라엘적인 인물이며 그가 어떻게 제거 되었느냐를 통해서도 언약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삼하22:25-26/왕상2:32-34).

압살롬의 난 평정 이후 왕 제도가 다윗(유다) 지파에게만 꼭 한정되어야 하느냐에 대해 불만을 갖는 무리가 등장한다(삼하19:41/20:1-2). 이와 같은 불만이 마치 왕이 자기들의 기업을 다 차지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생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삼하20:19). 

왕과 상속(유업), 이 두 가지의 요소가 다 이스라엘에서 존속되어야 한다. 유업이란 하나님의 고유한 것이라 그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 그러나 왕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용서되지 못한다. 

베냐민 사람 시바의 반란은 이로써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왕의 이스라엘 내부에서의 위치는 다윗의 인구조사에서 밝혀지듯 이 모든 것이 자기 소유가 될 수 없고 자신은 오직 이스라엘에 대한 종으로서 그들이 범죄 했을 때(삼하24:1) 그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역할이 중심이다(삼하24:25).

그 후 다윗은 누구하고도 동참하기를 거부한다(삼상20:3/왕상1:4). 이미 후계자는 이스라엘 내부의 그 누구와도 결탁되지 않는 인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차기 왕으로 등극함으로 비 우리아적인 존재들은 하나, 둘 그의 면전에서 사라진다.  


Ⅲ. 결론 

인간이 왕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왕 되심이 희석되거나 포기될까? 그럴 수는 없다.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 때문에 그 임재가 취소되지 아니하는 것처럼 왕 자체의 변신이 일어난다. 자기 백성에게 주신 긍휼과 자비가 전달되는 통로로 전환시키셨다. 

하지만 그 죄악이 긍휼로 극복되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 자신이 제물이 되는 내용이 개입된다. 하나님 자신의 것의 ‘버림’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언약 밖의 존재다.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자들이 곧 구원된 자, 즉 자아 밖에서 자아를 제대로 바라보게 된 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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