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수수께기, 비밀) :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8, 쉬운)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 묶은 것은, 하늘에서도 묶여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너희가 푼 것은,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 18:18, 킹흠정)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8, 현대인)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땅에서 처벌하면 하늘에서도 처벌할 것이며 너희가 땅에서 용서하면 하늘에서도 용서할 것이다.』

(마 18:18, 현대어)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땅에서 매어 놓은 것은 무엇이나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어 놓은 것은 무엇이나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5-07 22:31:04,

흠..유치한 질문 같은데요

누군가가 싸운것을 보고 누구도 개입해 봤자 소용없는일 같아서   하나님이 알아서 하겠지요 했는데 그건 하나님이 알아서 하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하던데  어차피 어떤문제든 주님의 허락하에 이루어지는것이 아닌가요 주님이 아니면 어떤 문제든 풀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걸 어떻게 봐야 할까요

2009-05-07 22:37:49,

주님이 풀어야 할 문제는 주님의 언약에 관한것 그리고 사람이 풀어야 할 문제는 육에 관한것 이렇게 봐야 할까요

답변 :

1. 무슨 일이든지 사랑으로 하지않는 것은 죄 라고 했습니다.

싸움에 개입하더라도 사랑으로
그 싸움을 외면하고 무관심하는 것도 사랑으로
언약을 보더라도 사랑으로
육에 대한 문제 풀이도 사랑으로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사랑으로 할 수 없고 그 사랑을 소유로 보기 때문에
사랑이 뭔지 모른다는 겁니다.

사랑은 피를 제시하는 겁니다. 피의 시선을 가지는 겁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면 선악의 시선이 되고 법의 시선이 됩니다. 법의 시선으로써 개입해 본들 시시비비의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 라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개입밖에 안되고 잔소리하는 식이고 그런식이라면 깡패를 제대로 만나봐야 다시는 개입을 하지 않겠지요.

모든 인간을 틀렸다 라는 시선으로 피 만이 옳다 라고 개입하게 된다면 아마 개 죽음 당할 겁니다. (유일한 사랑임에도 다들 외면하기에)

그래서 차라리 피하는 것이 낫죠. 문제나 어떤 일을 볼 때
인간들의 탐욕 즉 욕심으로 인한(우상=자기의 유익 때문에 벌어지는 일)것이 아닌
십자가가 벌리시는 사건으로 인한 문제는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성도는 개입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일이 아니라 집단 이스라엘의 일인 광야교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자체가 광야(처음자리)를 외면하였기에 무엇이 광야이고 처음자리인줄 모릅니다.

마치 향유를 전부 때려부어 예수님의 발을 씻는 그 마리아의 모습을 개입하는 제자들의 시선은 
처음자리를 비로소 보는 것이 아니라. 처음자리를 도리어 싫어하고 고발하고자 개입하는
정의감에 분노를 일으키는 행동이 마리아가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모습인 겁니다.
오히려 그런 분노를 촉발시킨 것이 처음자리인 셈이니까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라는 주창도 사기입니다.
지금이 초대교회와 동일하게 성령이 활동하고 있는데 그 때의 그 순수함으로 돌아가자 라고
순수함을 말하지만 순수함이 아니라 지금의 처음자리도 외면하는 자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라는
구호로 또 사기를 치는 겁니다. 돈벌이 마케팅으로 자기자리를 확보하겠다는 거죠.
광야를 외면하면서도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라는 소리는 세례요한 까지 즉 아벨의 피 부터 사가랴의 피 까지 흘리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라는 소리죠. 실제로 이런 말이 먹혀든다는 것이 마귀적이다는 겁니다. 순진한 놈 등쳐먹겠다는 소리죠.)

예수님이 죽는다는 것을 본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모습입니다.
오직 그 비싼 향유를 부은 마리아에게만 보이는 겁니다.

질고를 지고, 싫어버린바 되고, 째찍질을 맞고, 찔림을 당하는 모습을 본 자는 마리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자(참인간)의 형상으로 새로 창조를 그 순간 마리아에게 했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형상입니다. 그 상대적인 형상이 바로 정의감의 형상입니다. 법적인 형상이지요.

그 차이성을 벌려 놓는 사건으로써 십자가가 매일 매일 이런 사건을 터르려 벌리시는 겁니다.

이런 언약이, 즉 피가 벌리는 사건이 아닌 것은

모조리 다 육의 일일 뿐입니다.

육의 소욕의 서열 싸움에 아무리 개입해 본든 누가 좀더 크냐 작냐 라는
그 선을 긋는 물에 선 긋는 짖입니다.
아무 의미 없는 헛된 겁니다. 내일 되면 또 크냐 작냐 또 싸우니 의문만 있을 뿐입니다.

(막 9:34, 개역)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눅 9:46, 개역)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눅 22:24, 개역)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양심 곧 정의감이란 의문의 증서에 쓰여진 유대인에게 주어진 율법과 같은 양심이
이방인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러니 정의감은 헛된 의문의 짖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문에 종지부를 찍으러 죽음 곧 피로 밀어붙입니다.
명확한 선을 긋기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 마다 전혀 다른 양상의 싸움 충돌 질투 전쟁 소동 다툼 등등이
예수님만이 규정한 죄를 겨냥한 입장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벌어집니다.

오늘날 성도에게 벌어지는 사건은 딱 하나입니다.

십자가를 새롭게 볼 수 있도록 십자가가 벌리는 사건에 육을 지적받는 매입니다.

사생아가 아니기에 매를 대십니다.

늘 십자가가 깔아 놓은 지뢰 밭에 자아라는 허상이 폭발 당하는 일만 남아 있는 사건 뿐이지

다른 헛된 일에는 참견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 일도 헛된 짖입니다. 성화짖도 헛된 짖입니다. 허상인 자아를 위한 짖이니까요
개인 사적인 구원 챙기기인 그런 성화 할 필요 없구요

성령께서 벌리시는 성화 곧 십자가를 밝혀 보여주기 위해서
육체를 패하고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지적하심 앞에서
왜 나는 패해야 하고 틀렸는가?를 알아야 하고
왜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옳았는가를?

성령의 푹 찌르심 앞에서 푹 찔림 당하는 사건만이 남아 있다는 그 기쁨에
기뻐할 일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영원한 일이[곧 피 제사] 아닌 것에는 의미 두지 마세요.
예수님은 창세전에 십자가의 피 그리고 미래의 언약 완료하심도 십자가의 피

이 십자가의 피만을 영원한 것으로 적용하시지 다른 것은 허망한 겁니다.

(갈 5:22, 개정)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정)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개정)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성령의 열매는 십자가에 못 밖히는 정욕 육체 탐심을 지적 당할때에 비로소 알게 됩니다. 아무도 금지를 못할 정도로 매를 대시죠. 이미 열매 곧 자녀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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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마 18:12, 개정)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마 18:13, 개정)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마 18:14, 개정)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 18:15, 개정)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마 18:16, 개정)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마 18:17, 개정)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 18:18, 개정)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9, 개정)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개정)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1, 개정)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 18:22,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간단합니다. 피를 증거하는 것이 유일한 매듭을 푸는 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피를 증거하면서 동시에 그 피를 증거한 자기를 알아달라고
다시 죄악(인간의 공로:자기 의로움)을 은근슬쩍 묻혀서 증거한다는 겁니다.

아무 댓가 없이 증거하지 않고 반드시 그 노동의 댓가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피를 증거하면 반드시 미움받도록 조치를 취하신 겁니다.
피를 증거하면 증거할수록 지독하게 싫어버린바 된 예수님의 운명을 직시하게 되도록 하셨으니
아무나 피 증거를 흉내치 못하도록 하신 겁니다.
미움받아도 상관없고 죽어도 상관 없을 정도로 많이 용서함을 받았다면 많이 사랑하겠지요.

(눅 7:36, 개역)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7:37, 개역)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개역)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9, 개역)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눅 7:4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눅 7:41, 개역)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 7:44, 개역)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개역)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개역)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8, 개역)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눅 7:49, 개역)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눅 7:50, 개역)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이 왜 탈락했는가 하면 바로 아간의 범죄 즉 아니리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자꾸 주님이 홀로 다 하신 결과물을 반드시 자기 쪽으로 챙겨버린다는 사적인 영역을 확보한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자기것으로 챙겨도 집단 이스라엘의 소유요 집단 이스라엘의 영역이요
아무리 챙겨도 광야의 무능함 속이고 광야의 낮아짐 뿐인데, 기여이 자기것을 챙기겠다는 겁니다.
주머니 자체가 없고, 통장 자체가 없는데 통장에 주머니를 기여이 채우겠다는 식이죠. 웃끼는 거죠.

통장에 돈이 가득한 자가 자유로울까요? 아니면 주머니 자체가 없는 자가 자유로울까요?
천사를 생각해 보세요. 돈 자체가 필요 없듯이 천사보다 우월한 성도는 선물 그 자체 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그런식으로 구약 이스라엘 전체가 자기 영역이 있다는 것이 말이 안되고
그것이 성전을 중심으로 더욱더 감추어진 욕심이 말씀지킴이라는 정당성으로 더욱더 구체화 됩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영역이 없는 교회가 도리어 그 영역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겁니다.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지식으로 먹고 사는 길로 빠지고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 사랑을. 직분을, 자기 유익을 위하는데 사용하여

기여이 자기 영역을 확보하고 심지어 천국에서도 그 버릇을 그대로 천국 영역을 확보하는 행함에 돌입하는 겁니다.

결국 매듭을 푸는 것은 피 밖에 없는 도리어 매듭을 더욱더 꼬이도록 하는 짖만 골라서 하는 짖이 바로 자기의 행함을 정당화 하는 짖입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 앞에서도 당당했던 이유가?
사람들에게 다 먹혀든 행적이였고 인정받았으니 예수님도 별수 없이 인정해 줄 주 알았거든요.


그런데 씨알도 안 먹혀든 겁니다.

예수님은 도리어 그들이 확보한 성화나 성숙이나 구원의 마일리지나 착한행동 실적 등등 모든 것을 무로 돌리기 위해서

그들의 모든 공든 탑의 영역을 다 지워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새 출발 하자고 요단강에서 세례 즉 죽음으로 다시 출발하자고 했을때에

다들 싫어 했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하면 늘 새로운 것인데
사랑이 아니라 소유로 했던 것이 들통난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전히 그 버릇 그대로 용서의 숫자를 의식하는 겁니다.

숫자를 의식한다는 자체가 용서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고 그저 용서하는 그 위치가 탐나는 탐심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그것이 탐심인줄도 모르고 아주 당연하듯이 예수님에게 묻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불가능성을 던집니다.

즉 지우개로 지워 버립니다.

무능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어린아이 처음자리 고아 과부 나그네 자리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자고

요단강에 빠뜨려서 세례 함으로써

그런 사고방식이 가득한 예루살렘 도시를 탈출 출애굽 출 예루살렘 출 베드로 하자고 하십니다.

베드로 지워버리고 무능한 어린아이 잉여물 남은자 베드로로 다시 출발하자고 하십니다.


용서하고픈 마음은 없으면서 법 때문에 그 용서의 숫자는 의식해야만 하는

바로 그 악마성에 갇혔다는 것을 예수님이 지적해 주시는 겁니다.

아무나 지적 받는게 아니지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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