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이한 ‘라캉(1901-1981)의 정신분석학’

2009년 1월 31일   이 근 호 목사


자크 라캉의 글을 대하는 사람은 라캉의 함축된 개념과 용어에 질려버려서 처음부터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이것은 라캉이 일부러 독자를 애를 먹이기 위함이 아니라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수립하기 전에 이미 숱한 철학적 흐름과 주장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기존의 철학적 주장을 의식하면서 그 철학과는 다른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논리 구조를 반박하면서 숲을 헤쳐 나가듯이 제쳐나갈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헤겔, 소시르, 삐아제, 데카르트, 신칸트주의, 현대 신학, 현상학, 해석학, 심리학, 물리학, 현대 수학, 하이데거, 융, 실증주의 철학, 분석학 같은 대가들과 차별화를 하면서 독자적인 견해를 주장하려니 자연적으로 용어하나에 신중하게 선택하고 무게 있는 의미를 담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지만 라캉을 처음 대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가지들까지 고려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도대체 라캉이라는 분이 주장하려는 게 뭐냐’를 단독 직입적으로 묻고 싶은 겁니다.

라캉은 ‘아동성욕발달 단계’를 가지고 인간의 자아와 주체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즉 아동들이 보여주고 있는 ‘성욕발달 단계’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모든 정신의 밑바탕을 장식하고 있다고 봅니다.

아동 성욕발달 단계는 다음과 같이 펼쳐집니다. ‘구강기→항문기→남근기→잠복기→성기기’

이것은 곧 생물체에 불과한 인간이 어떤 식으로 주체의식을 갖게 되느냐를 보여줍니다. 의식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요. 왜냐하면 ‘의식’이란 이미 성인이 된 상태에서나 나올 ‘성인들의 의식’이기 때문에 제대로 인간의 밑바닥을 들추어낼 수 없다고 보는 겁니다. 의식이 아니라면 ‘무의식’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라캉은 보는 겁니다.

의식이란 이미 통제되어 있는 것이고 질서 잡혀 있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질서와 통제가 필요하다는 말은 인간의 정신 바탕에는 통제하지 아니하면 사회생활을 할 수 없고 질서를 잡지 아니하면 짐승 같은 속성이 터져 나오는 그 어떤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기존의 모든 철학과 신학과 윤리는, 인간 사회 안에서 얼마나 유용한 인격체를 만들어낼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의식→의식’으로 나아가기 논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여기에서 나오는 주체나, 정신세계는 모두들 뭔가 감춘 채 위선적인 자아들만이 드러내는데 일관했습니다. 하지만 의식이 쉬는 사이, 즉 밤에 잠을 잘 때면 무의식은 각 개인들의 침상 위에서 춤을 춥니다. 타인이 대신 꾸는 주는 꿈이 아니라 점잖은 본인들이 쏟아져내는 상스러운 내용들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보면 평소 대낮에는 의식이 무의식이 계속 억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무의식 세계를 따로 정립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런 무의식 세계를 모르고서는 평소에 본인들이 어떤 식으로 본인들을 감쪽같이 속이면서 살아오고 있는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주체, 소위 ‘나’라는 것은 어떻게 나 내부에서 형성됩니까? 라캉은 데카르트(1596~1650)라는 철학자의 주장을 염두에 두면서 정반대로 나갑니다.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주장하는 주체는, 자기라는 존재를 생각하는데서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주장을 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봅시다.

존재라는 이름으로 동그란 원을 그려보시고, 그 옆에서 ‘생각’이라는 원을 동그랗게 그려보세요. 그리고 이 두 개의 원을 걸치게 해보세요, 그러면 겹치는 부분이 나오지요. 이때 눈에 보이는 것은 생각도 아니요 존재도 아닙니다. 바로 겹치는 그 부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주체가 생겨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짐승처럼 존재만 느끼면 주체의식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 존재를 생각하는 순간,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정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정립하는 주인공이 본인이요 주체입니다.

그런데 라캉에 있어 두 개의 동그라미를 겹쳐놓고서는 그 겹치는 부분만이 사라진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것이 데카르트하고는 정반대의 주장입니다. 그 사라진 부분이 바로 주체라는 겁니다. 즉 장소적으로는 데카르트하고 같습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나타나기에 주체답다고 말했고, 라캉은 도리어 사라짐으로서 주체답다는 겁니다.

그러면 라캉에 있어 나타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라진 그 주체부분 말고 나머지 남는 것은 다 나타나는 겁니다. 마치 먹다 남은 사과처럼 존재라는 원에서 남아있는 부분은, 짐승이 충동적인 요소들입니다.(주이상스라고 함) 그러니까, 신체 (이것 보이고 만져지지요?), 그 다음에 말하기, (이것도 느껴지지요?) 이야기하기, 배설하기, 노동하기, 사랑하기, 미워하기, 먹기, 잠자기, 예배 참석하기, 걷기, 찬송하기 이런 것들이 없다고 부인할 수 없겠지요.

이것뿐만 아닙니다. 또 나타나있는 것이 있습니다. 맞은편에 그렸던 생각, 혹은 의미라고 한 동그란 원도 먹다 남은 사과처럼 도려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지식이요 기호요 정신이요 무의식이요 수학, 물리, 신학, 신앙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남겨놓고서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린 것이 주체입니다.

라캉이 왜 이렇게 데카르트와 반대로 생각하는 겁니까? 그것은 아동의 성욕발달 단계가 곧 인간이 정신발달 단계의 환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무의식을 조사해보니 거기에 두 가지 기본 생물적 요구가 발견되었습니다. 하나는 생식본능이요 하나는 죽음본능이었습니다. 즉 생식본능은 살고자하는 것이요 죽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감출 수 없는 본심입니다. 살고자 하는 본심과 죽음으로 나아가보려는 본심으로 정신은 애초부터 분열되어서 간극(틈)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동식물이 다 그러한 것입니다. 즉 생식본능은 어릴 적부터 타고난 것입니다. 라캉은 말하기를, “아동들의 성욕을 어른의 안목으로 함부로 얕잡아 볼 수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성인의 근본을 그들이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겁니다. 유쾌와 불쾌 감정도 성욕과 관련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동들의 이런 동물적 본성을 성인들이 가만 놔 버려두지를 않습니다. 짐승처럼 사회에 나가서 설치도록 방치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안정된 의식 세계의 질서를 가지고 성욕과 죽고자하는 상반된 의지를 다스리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아동들은 무의식 차원에서 의식적 차원으로 나아가면서 새로운 유쾌와 불쾌 기준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참 잘했어요, 상 줄께. 이런 행동은 나쁜 행동이야. 매 맞아야겠어”라고 조절하는 가운데 나름대로 유쾌와 불쾌를 결정짓는 기준에 힘들게 순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아동들은 성인들(부모)의 질서 속에서 자아는 재구성되는 겁니다. 이것이 기호요 언어요 명령이요 학문이요 신학이요 신앙세계요 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의식에서 쏟아져 나오는 동물적 충동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체는 어디에 숨어있단 말입니까?

충동은 그 어떤 법이나 명령이나 질서로도 잡히지 않습니다. 계속 나름대로의 목표를 가지고 돌아다니다가 그 목적지로 되돌아옵니다. 즉 충동은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새로운 목적을 향하여 부지런히 쏘다니는 것 자체가 목표입니다. 이 충동이 겨냥하는 목적은 누가 만들어내는가 하며는 기존의 성인들의 인간 사회가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남’, 즉 '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이 만들어낸 욕망을 보고서 나의 충동이 발작을 일으켜서 환상이 발생하는데 그 환상의 순환노선에 따라 나의 욕망이 같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이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모자람‘을 생산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마라톤 선수하고 거북이하고 경주할 때, 절대로 마라톤 선수는 거북이를 앞질러 가면 재미없습니다. 거북이를 앞질러 가지 않는 상태에서 최대한도로 거북이를 따라잡으려고 하는데서 욕망은 충족되는 겁니다. 하지만 늘 실패하지요 마치 어떤 사람이 돌을 산등성까지 올려놓자마자 도로 산 밑으로 미끄러져 굴러가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지프스 신화)

그런데 이 환상의 대상이 되는 거북이가 한 마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타인 속에서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그 쏟아져 나오는 자리가 바로 그동안 사라져버린 ‘나의 자리’ 곧 ‘나라는 주체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곳은 여전히 사라진 자리요 비워있는 자리입니다. 내가 소유하거나 잡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가 온전히 포착되지 못하기에 나는 계속해서 욕망을 따라 본래의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을 지속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 나오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은 신이라는 타인이 던져준 명령입니다. 그런데 그 명령에 따라 나는 충동 순환 구조에 형성하면서 ‘부모를 온전히 공경하기 위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움직이게 됩니다. 여기서 나는 어떤 수준이 ‘부모 공경인지’를 타인들이 부모 공경 수위를 곁눈질 하면서 ‘환상’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 환성을 따라 나의 모든 욕망이 집중됩니다.

하지만 그 욕망의 최종 목적지는 처음 나왔던 신의 품으로 귀환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나의 욕망은 신 속에 있다는 그 사라진 빈자리까지 겨냥해서, 그 빈자리와 나의 욕망을 동일시 할 때 비로소 내 주체가 거기에 있음을 느낍니다. 그 순간 나의 주체만 남고 나머지는 타인과 신은 사라집니다. 즉 내가 나임을 주장하는 순간 신도 이웃도 사라지고 오직 나만 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비현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또다시 신이라는 타인의 명령이 나의 주체의 자리에 튀어나오면 이 명령에 의해서 나의 주체의 자리는 홀연히 사라져 버립니다.

예를 들면, “이번에는 예수를 믿으라”는 명령을 듣는 순간 나는 다시 신이라는 타인의 요구와 그로 야기된 욕망 속에서 헤매고 있게 됩니다. 또 다시 내 신체에 맞는 새로운 주체를 정립하기 위한 여정 속을 헤매게 됩니다. 즉 ‘예수 믿는 나’를 찾아가려고 내 욕망이, 내 환상, 내 충동이 나의 신체와 정신과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이처럼 명령을 생각하면 나는 없어지고, 나를 생각하면 모든 명령은 의미 없어집니다. 나는 오직 나일뿐입니다. 신이 나를 버려서 지옥에 데려가도, 끝까지 나를 위로해주고 ‘잘했어’라고 격려해주고 나의 존재를 알아줄 위인은 오직 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고 싶어도 내 신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타인의 욕망에 이미 마음이 빼앗겨버립니다. “나,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나는 신의 명령에 순종해서 천국가고 싶어, 나, 저것 같고 싶어, 저것을 갖지 못한 나는 나를 미워할 거야. 저것이 없다면 나는 계속 불쾌한 일생이 전개될 거야”라고 호소하게 됩니다.

즉 ‘나’라는 신체가 발산하는 본성과 ‘나’라는 인식되는 주체하고는 분열이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일치될 수가 없는 겁니다. 신체는 욕망이 소멸될까봐 무서워하고, 주체는 일치성을 이루지 못하고 자꾸만 대신 타인(신, 이웃, 어른, 부모, 목사)을 요청하니 늘 한 자리에 있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다시 타인의 얼굴과 이름으로 등장하곤 합니다.


결 론

주체를 표현할 상징이란 실은 본 사물이 희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물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이름을 갖는 순간, 사회는 그 이름으로 통용되고 주체는 다시 죽게 됩니다. 만약에 주체를 살리면서 반드시 모든 상징을 자기 발밑에서 짓밟아야 죽여야 합니다. 내가 의미 있으려면 신은 죽어야 하고 내 자유를 인정하려면 신은 철저히 나의 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날까지 교회사에 등장하는 모든 신학이란 겉으로는 신의 영광을 외치나 실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자기 주체를 찾아가기 위한 욕망의 노선 위의 신학이었습니다.

목사는 “내가 곧 신이다”는 내부 욕망의 외침을 의식적으로 교묘하게 억눌러가면서 성경을 펼치고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고 설교를 한 것입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신으로 재해석하고 재조정할거야”라는 욕망을 종교적 상징더미 속에 감춘 채 교회를 다닙니다.


라캉의 이론의 문제점은, 인간이 이미 악마라는 인격체와 관련된 죄인인 것을 무시하고 기존의 인간 자체를 두고서 이론이 개시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룟 유다의 운명과 베드로의 운명이 차이 나야할 이유와 근거를 제시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라캉의 이론대로라면 둘 다 같은 인간이라서 주체 형성에 한계를 지니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들의 행위만으로는 그들의 인생길이 전혀 달라질 수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이 행위가 주도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다음의 말씀이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나 성도 위에 작렬하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 것이니라”(갈라디아서 2:20)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이것을 종교적 상징으로서 흉내 낼 수는 없으니 성령을 받은 자는 성령에 의해서 날마다 라캉이 말한 인간의 이 모든 육과 정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므로, 성도 주체의 열매가 아닌 성령 주체의 열매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오래 참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라디아서 5:24)

이로서 십자가의 구원의 위력은 아직도 여전합니다.


참고 도서

1. [에크리 읽기] 도서출판 b
2. [라캉과 현대철학] 문학과 지성사
3. [자크 라캉] 문예출판사
4. [라캉 정신분석사전] 인간사랑
5. [자크 라캉 세미나] 새물결
6. [자크 라캉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7. [삐딱하게 보기] 시각과 언어
8. [철학의 탈주] 새길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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