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자(잉여)와 복의 근원 그리고 은혜의 창조


창조의 방식(십자가의 지혜) :

있는자 더 받고 없는자 그 있는것까지 빼앗기는 방식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 라는 잉여성

(처음부터 처음자리가 있는 자로 태어났고, 처음부터 처음자리가 없는 자로 태어남)


기도하자, 하나(한 몸) 되자, 남은자 되자, 찬양하자 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잇기를 지님) VS

VS 기도자로 남은자로 한몸인 채로 찬양자로 태어났음 그래서 얼마든지 버려도 죽어도 자기부인해도 상관없음

(불가능성을 지닌채로 태어남, 죄인으로만 태어났어야 했기에 구원자를 드러낼수 밖에 없음 누락으로써 ...)



성경에서 말하는 비유는 복과 관련이 있다.

무엇이 복 된 것인가?

복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거짓으로 펼쳐놓은 가짜 복의 실체를 드러내어야만 할 것이다. 육체가 형성한 복, 곧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생명나무에 대한 집착은 모든 인류의 강박증에 해당된다.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 생명나무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심지어 교회를 짖고 예수를 믿어서라도 그 생명나무를 따먹어야만 영생을 하게 된다는 것을 모든 인간은 선악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영생은 감추어버렸다. 생명나무를 부랴 부랴 치워버린 이유도 은폐시키기 위한 목적이다.

복을 아무나 누리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복에 대한 결핍과 갈증 그리고 집착은 더욱더 더 해 간다. (가인의 족보)
욕심이 그 지옥 소굴과 같이 들끓어 차오른다.

그래서 복된 인간이 되고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저주성을 감추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우는 모습을 취한다. 바로 이러한 이중성을 들추어내는데 동원되는 자들이 있다. 성령을 입은자요 믿음을 선물로 부여받은 자 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할례 그 수치를 스스로 가리운 껍데기를 벗겨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자로써 동원이 된다. 곧 십자가라는 지혜로써 말이다.

그러므로 복의 근원인 믿음은 이 수치를 벗겨냄과 동시에 은혜로 덮혀진채로 태어난 남은자라는 잉여성 곧 창조성을 소멸로써 보여준다. 죄악의 소멸이다. 어두움의 소멸이 곧 창조다.

저주가 가리움 당하는 것이 피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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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비유를 통해서

없는자와 있는자로써 복의 근원이 뭔가를 증거하신다.

그 이전에 있었던 수 많은 설교는 깡그리 무시하고서 말이다.

즉 잉여성이 없는 것이다.
복되지 않은 것이다.

복의 근원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곧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 질투다. 하나님의 질투로 창으로 찔러 꼬챙이 만든 사건을 보라.

(민 25:11, 개역)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애굽 족장 속에서 사라 라는 복된 여자가

그들의 있다고 소위 떠벌리는 잉태성을 불임 여성으로 만들어 버린다.

있던 것도 빼앗는 식이 복의 근원이다.

원래 택함을 받지 못한 것도 억울할 터인데
더더욱 증식하는 방식으로 그 택함 받지 못함을
복의 근원이 누구인가(잉여=남은자)를 보여주기 위해서 동원되는 소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남은자가 되자 가 아니라 (악한 종의 특징) 남은 자로 태어났음을 누리는 방식이다.

그 차이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브라함 언약이다.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충돌이다.)(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눅 19:26, 개역)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25:29,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막 4:25, 개역)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눅 8:18,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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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4:22-28 (있는자와 없는자)  이름 : 우리교회

2008-06-15 09:48:02 조회 :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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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자와 없는 자

2008년 6월 15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4:21-29

(막 4: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막 4: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막 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막 4: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막 4: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막 4: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막 4: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막 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 4: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초대교회는 참으로 소박했습니다. 예수님으로만 행복하다고 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행하고 계신 솜씨에 탐복하고 고마워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결코 자신들의 애씀과 솜씨와 결과를 자랑하기 위해 모여든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도 창조주의 솜씨와 능력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코 소위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의 솜씨나 능력을 나타내라고 당부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창조주되시는 분의 능력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인간’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제멋대로 자신을 지칭해서 ‘인간’이라고 우기는데 사도 바울에 의하면 인간은 없고 오직 ‘영의 인간’과 '육의 인간‘ 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개념은 실체가 없는 허구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실제로 있는 것은 ‘영의 인간’이냐 아니면 ‘육의 인간’ 이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러한 분류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 위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다 이루었다”라는 그 순간에서부터 소급해서 적용해야 합니다. “다 이루었다”고 외치는 시점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때입니다. 곧 요나의 기적입니다. 죽음 속으로 들어가셔서 죽음의 내막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어 다시 우리에게 부활로서 알려주신 그 기적 말입니다.

예수님의 ‘다 이루심’은 정작 심판 때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홀로 아신 상태에서 외친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완전한 거룩과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이 거룩과 의는 인간들의 자기 위주의 생활로서는 얻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즉 거룩은 돈을 주거나 열심히 행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적 인간으로 태어난 것으로서는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자신들이 뭘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등불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등불의, 기능을 높이 들어서 널리 비추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가 들어준다고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 등불 스스로 그렇게 처신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22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뿐만아니라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라고 하십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아무리 숨겨진 일이요 감추어진 일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국 온 찬하에 드러나고 만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과 세상의 밑바닥을 말합니다. 밑바닥이 내부로부터 올라오게 되면 세상을 움직이는 장치가 됩니다.

이 장치는 마치 세차장에 설치는 자동 세차기계와 같습니다. 차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그 털북숭한 기계가 허연 거품을 물고서 앞뒤좌우로 왔다갔다 하면서 차의 모든 면을 씻어줍니다. 그런데 차 안에 탄 사람이 느끼는 것은 마치 기계가 가만히 있는 차가 앞 뒤에 움직여서 차의 먼지를 씻겨지는 것 같아 보입니다.

사람들이 평생 살면서 자신이 자기를 움직여야 자신이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입니다. “있는 자는 더 받겠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았다고 여기는 그것은 ‘목숨도 아니요 생명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특성은 외부에서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을 알지 못하고 자꾸만 신기하고 놀라운 것을 찾아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데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어린아이들에게 심판의 개념이 없습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나를 심판해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말입니다”하고 나옵니다.

사고방식이 자기가 중심이 되어 수평적으로 뻗어나가려고 합니다. 수직적인 심판성이 늘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저희들을 죽여주옵소서. 그래서 비로소 우리의 해골 위에 예수님께서 엄연히 살아계심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살아있으면 참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의 세차 기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자신이 움직여야 무슨 일이라고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옛말에 말하기를 “작은 복은 부지런해야 하고 큰 복은 하늘이 내려다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에 대해서 들을 귀 있던 없든 다 잘 알아듣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위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심판을 모릅니다. 심판이란 자신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심판 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양과 염소입니다. 양이란 자신이 모시는 왕이 따로 있는 자요 염소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최종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나는 나로 인하여 행복해요’는 지옥 갈 염소인 반면에, ‘나는 예수님으로 행복해요’는 천국갈 양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인간보고 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시키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사명이 우리 내부에 침투하게 되면 우리는 초대 교회 사람들처럼 “나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행복해요”라는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있는 자는 더 있겠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아버린다’는 말씀은 소유개념으로 자기에게 뭔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예수님보시기에 ‘전혀 없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는 그 ‘있다는 것’도 실은 ‘없는 것’에 해당됩니다. 여기에 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있다’고 여기는 자는 그 ‘있는 것’이 제대로 ‘있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에게 각자 자기 사업이 있고 자기 가진 것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의 것으로만 있는 것’으로서 있어야 할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것에만 더 주시고 키우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의 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서 나의 자랑거리가 없어지게 하시고 예수님만이 자랑임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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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마 13:11-17 (비유에 대한 해석)  이름 : 이근호
2004-01-12 18:48:39 조회 : 720  
 
http://222.231.1.74/~woorich/성경강해/마태복음-2002/073강-마13장,11-17(비유에,대한,해석)-mat040111.mp3
   
비유에 대한 해석

2004년 1월 11일 
                                   
마태복음 13:11-17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으심부터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뭐가 나올까요? 옛말에, '한국사람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등장할 때, 사람들은 잔뜩 기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서 나올 게 뭔가는 아예 따져 보지도 않고 무조건 얻을 것은 일단 챙겨보자는 식으로 나옵니다. 원래 구경꾼들이 모여들 때는 이유없이 그냥 모여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한 소문이 들면, 그분이 직접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감안하지 않고, 새로운 것이라면 일단 갖고 보자는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빼앗으려 오신 분입니다. 소위 믿음이라는 것을 빼앗으려 오신 분입니다. 천국에 대한 믿음을 점검하려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믿음이 있는 자는 더욱 더 많이 받게 되고 천국에 대한 바른 믿음도 아니면서 믿음이 있다고 우기는 자는 그 엉터리 믿음까지 도로 폐기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이 빼앗길 수 밖에 없는 신앙을 소유한 자들입니까? 현대인들은 스스로 서려는 자들입니다. 교회와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배워서는 그 배운 지식으로 이제는 자기 손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지탱하려는 방도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저도 이제 복음에 대해서, 천국이 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습니다. 정말 이제부터는 제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신앙관과 천국관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바입니다.

지옥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그 누구도 지옥에 들어갈 수 없듯이 천국도 같은 원리입니다. 마치 엄마의 손에 이끌리어 횡단보도를 건너는 어린 아이의 경우와 같습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 한테 장담합니다. "엄마, 나 저 신호등의 신호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제 알아. 빨간불은 건너가지 말라는 것이고 파란 불은 건너가라는 신호래. 엄마 이제 나는 엄마 손목에 안잡혀도 나 힘으로 건너갈 것 같아"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갈 때까지 그 아이는 엄마에게 단단히 손목이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틈만 나면 자립하려고 하고 독립하고 독자적으로 자기 인생을 본인이 책임지려고 합니다.

인간이 독자적으로 봐서 얼마나 선한가 악한가를 가지고 그 인간의 가치가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선함은 독자적인 자질이 아니라 누가 그 인간의 손목을 꽉 잡고 있는가 여부와 그분과의 관계성 문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 붙잡힌 바가 되지 않는 천국과 신앙은 하늘에서 원하시는 그 천국과 신앙이 전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천국의 비밀'입니다. 보통 천국이라고 우리가 연상하기에는 그냥 하늘에 존재해 있는 그 '무엇'으로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제게 어릴 때 별명이 있습니다. '건들바위'입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건들건들 거린다고 해서 집안 어른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집안 어른들 입장에서 저를 보기에 피곤했겠지요. 가만히 존재해 있어야지만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어 저를 관찰할 수 있는데, 자꾸 건들거리니까 정확하게 저를 관찰할 수가 없는거지요.

즉 변화나 운동이 없이 그냥 마냥 동일한 상태도 정지되어 있다면 정확히 그 내막과 실체를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참 변화도중에 있는 사물은 뭐가 뭔지 정확하게 포착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천국이 하늘에 그냥 고정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마치 마당에서 옥상에 있는 물탱크를 쳐다보듯이 쳐다 봄의 대상으로 고정되어 있기를 바라는 거지요. 그런데 만약 그 물탱크가 미쳐 환장을 해서 옥상에 가만히 있지않고 갑가지 마당으로 내려와서  개집에도 들어갔다가, 헛간에서 굴려다니면서 온갖 것에 다 받혀서 유리창도 깨고, 정원의 꽃나무 가지도 부러지게 만들고, 안방을 진흙 진창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혼잡을 한껏 떨고 난 뒤 물탱크가 옥상 위에 도로 올라가면서 말하기를 "네들이 물탱크를 알아?"라고 한다면 아마 기가 찰 것입니다. 고정된 물탱크가 아니라 움직이는 물탱크를 사람들이 감히 상상치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가운데 물탱크가 사납게 부산을 떨고 돌아다녔으니 사람들의 뇌리 속에 물탱크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바로 이와같이 천국이라는 것이 평소에 사람들이 생각한 그 '좋은 나라 이미지'로서의 천국이 아니라 한참 활동 중인 천국이라는 겁니다. 어떤 활동을 펼치는데요? 바로 사람들의 천국관을 헤집고 다니시면서 모조리 다 부숴놓는 그런 천국으로서의 활동을 뿜어내는 천국입니다.

즉 천국은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의 완전품으로 다 만들어놓고서는 사람들 앞에서 세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 그 자체를 천국의 실상으로 받아줄 수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20-21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은 현재 인간들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상치도 못하는 참으로 약하고 쓸모없고 불편하고 귀찮기만 한 천국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왜 그 귀한 씨가 허비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알려줍니다.

즉 씨를 인간 세상의 죄악으로 인해 허비되고 손해보는 것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점을 보여주면서 등장하는 천국의 비밀에 대해 소개하시는 겁니다. 천국이 마치 이 땅에서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모습으로 등장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들이 적극적으로 천국을 탈환하기 위하여 악마로부터 사주를 받고 있다는 그 현실성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은 적극적으로 예수님이 소개하는 천국 활동을 저지하고 있는 세력에 의해서 장악당하고 있는 형편인데 예수님의 비유는 이 세상 형편을 정죄하는 양상으로 우리 인간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에게 있어 최종 목표는 엄청난 수확입니다. 그런데 그 수확에 있어 땅의 그 어떠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달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관에 대해서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대처하려고 합니까?

인간들은 스스로의 귀와 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즉 악마의 시험과 유혹을 스스로 감시해 대처하고 천국의 씨앗을 안 빼앗기려고 하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도 스스로의 인내성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또한 세상의 그 많은 유혹도 스스로의 절제력으로 뿌리 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천국의 비밀에 의해서 제거당하고 빼앗기게 될 수 밖에 없는 엉터리 믿음입니다. 천국의 활약상은 곧 예수님 혼자만의 활약상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 엉터리 천국과 구원노력에 열중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들의 헛된 노고에 대해서 사정없이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 이사야 예언의 성취는 예수님 손으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정죄할 수 있는 근거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비유를 들고 나왔고, 그것이 시발이 되어 결국에는 예수님의 자신의 목숨이 십자가에서 없어지는 경우로서 이 세상의 부질없음을 고발하려 합니다.

바로 이러한 활동 전체가 곧 천국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 16-17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 눈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무엇을 보고자했으며 무엇을 듣고자 했습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하나님의 참된 천국 활동을 보고자 했고 듣고자 했습니다. 인간들의 그동안 모든 수고를 무용지물을 만들어 버리는 그런 관점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아무런 희생도 없이 순전히 천국 자체의 활동으로 인해 천국이 드러나고 나타내는 그 현장을 보고자 했으며 듣고자 한 것입니다. 이 이사야 예언의 말씀은, '어떤 인간이 구원받느냐'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구원하느냐?'에 초점이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러 이러한 인간들이 구원된다'는 식으로 나오면, 너도 나도 그 인간 흉내내기에 분주할 것입니다. 구원이란 우리 쪽에서 출발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순전히 예수님의 허락만이 가능한 사항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허락'이 유효하려면 인간들 쪽에서 시도하는 모든 노력과 노고를 하나님께서 나서서 무(無로) 돌리고 차단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우리 인간이 죽든지 살든지 상관두지 않고 그저 옥토에 뿌리진 씨앗처럼 거대한 결실을 맺는 그러한 옥토의 위력을 볼 날을 선지자는 애타게 고대했습니다. 누가 옥토인지 아닌지를 천국의 씨가 떨어져 봐야 아는 것입니다. 동시에 누가 옥토가 아닌지도 씨를 던져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넘어질 자는 넘어지고 반항하고 대들자는 대들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 자체가 곧 천국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을 언제나 느낄 수 있음을 절실하게 고맙고 감사하게 여기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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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 잉여

살지 못하는 공간 - 텅빈 공간

삼상 19: 1- 7 (다윗을 죽여라)  이름 : 우리교회

2009-05-10 10:06:53 조회 :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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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10 15:42  

2009년 5월 10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19:1-7

(삼상 19:1, 개역)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삼상 19:2, 개역)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삼상 19:3, 개역)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하고』
(삼상 19:4, 개역)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삼상 19:5, 개역)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삼상 19:6, 개역)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삼상 19:7, 개역)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알게 하고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

하늘의 태양이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죽일 대상으로 본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참 하나님과 통하는 통로가 오직 하나입니다. 즉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가 되는 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이 ‘하나’를 부각하는 상황이 오늘 본문의 상황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여라고 하는데 그 아들되는 요나단은 어떻게 하든지 다윗을 지켜주려고 애쓰게 됩니다. 즉 다윗을 죽이라고 하는 아버지의 진정한 뜻이 어떠한 지를 수시로 다윗에게 알려주어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는 길을 챙기도록 해줍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은 사울과 다윗 사이에는 세상을 보는 서로 다른 기준을 둘 다 보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님과 세상, 양쪽 다를 보고 있는 우리는 입장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할 정도로 세상 권력으로부터 밉상 받는 자를 지켜주려는 위험을 우리가 감수 할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흔히 오늘날 십자가가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곧 ‘재판’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곧 인간들이 하나님을 피고로 세워놓고 재판벌리고 선고해버린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 재판 사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재판 과정을 보여진 거꾸로된 가치관을 죄악된 것으로 인정하고 들어가는바가 되는 겁니다.

즉 재판 과정은 서로의 다른 가치관이 만나서 대립이 되고 충돌이 되는데 그 각각의 기준이 왜 화합될 수 없는지 그 이유까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기준을 고수한다는 것은 곧 누구를 제거해야만 하는 바탕을 마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 기준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니까 그 기준에 의해서 그 누구가 마땅히 미움받고 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세워놓고 재판하는 와중에서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만약에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내 기준과 다른 기준을 갖고 있는 자는 자동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제거하고 싶은 자가 말하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면 그 주장으로 인하여 더욱더 그 사람을 죽는 자리까지 밀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재판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즉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믿음이 있느냐’는 겁니다. 즉 없는 믿음이 새로 생겨나야 그래야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지금 죄 안에 갇혀 있으니 죄의 권세를 스스로 떨쳐버리고 나설 위인은 없는 겁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죽음에까지 밀릴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서 가까이했던 추종 세력도 다 흩어지고 맙니다. 남는 것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됨으로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스스로 예언하신대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것이 성취된 겁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것입니다. 아무도 예수님께서 메시야인줄을 알아먹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없는 믿음을 새로이 만들어서 자기 사람들 속에 넣어줄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없음’의 의미를 ‘아예 없음’으로 생각하지 말고, 분명히 나타났으나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한 그런 의미에서 ‘없음’을 생각해 봐야합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아파트라는 공동주택 건물에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공간이 엄연히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엘리베이트가 다니는 통로입니다. 이 어두운 통로는 지하실에서 맨 꼭대기층까지 하나로 통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검고 어두운 공간은 엘리베이트 문 뒤편에 있기에 사람들은 그 존재를 잊고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엘리베이트라는 빈 공간의 덕택으로 우리는 아래층에서 맨 윗층까지 편안하게 안내받습니다. 이처럼 세상을 받혀주는 인물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다고 거부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치 ‘없음’으로 간주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의 모습을 자신네들의 기준에 준해서 따로 정립해 놓으므로서 없음이 없고, 모두 있음으로 전환되어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소위 신을 부르는 그 세계 안에서도 오로지 인간의 기준만 진리로 남게 됩니다. 즉 십자가라는 재판에서 감히 죄인들이 자신을 최후 심판할 수밖에 없는 심판주를 피고로 세워놓고 사형 판결을 내렸던 그 기준이 여전히 이 세상에 통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신의 기준이라고 통용하는 그 기준이 곧 하나님을 죽인 기준이기에 악마의 기준이라고 보면 됩니다. 즉 사람들은 악마를 신인줄 알고 열심히 신봉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행위를 하면 할수록 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은 마치 ‘없는 존재’가 분류되어 핍박과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악마같은 신을 더 선호하느냐 하면, 자신의 기존 기준을 옹호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준은 바로 이 사울왕이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악마가 인간들에게 늘 희망을 주면서 보장해주겠노라고 하는 내용은 바로 최고의 자리를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말고 네가 간수하고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본성은 인간이 악마로부터 배운 것이요 사울이 그것을 잘도 써먹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요나단은 사울왕이 자기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다윗편을 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은 곧 아버지의 기준보다 다윗의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임을 인정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요나단의 자신의 기준을 포기한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오늘날 십자가를 영접한 자들은 곧 그 재판의 잘못된 점까지 인정하는 자이기에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기준마저 죄악된 것으로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 기준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자신의 본성마저 죄인임을 고백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다윗이 있기에 자신의 영역마저 자진 포기할 줄 아는 그 요나단이야말로 진정 다윗관계가 정상적으로 이어진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억울한 다윗의 자리가 곧 예수님이 출현하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십자가 사건으로 지금도 출몰하는 주님을 증거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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