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어두운 실로암 소경과 눈이 밝은 바리새인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의 변화는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다.
즉 자기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모든 감각과 언어와 사고와 행동방식이 자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자각이
드디어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제 하나님도 자기의 판단으로 인식해야 했고
그런 자신도 자기가 판단을 하여야 했다.

눈이 어두었을때는 마치 눈 감고 어두운 캄캄한 밤에서 자신을 찾을 수 없었듯이
자기의 이미지 관리나 자신의 처세요 자신의 행동방식에 대해서 의식을 할 수 없었다.

눈이 밝으니 타인을 의식하게 되었고
타인의 결점이 곧 자신의 결점으로써 본격적인 가리우는 가면의 시대가 시작된다.

타인의 거울로 삼아서 자신을 가리우는 거울로 삼게 되었다.
모든 타인의 곧 자신을 보는 거울이 된다.

타인의 욕망이 곧 나의 욕망이 된 것이다.

벗은 자신은 수치가 드러남으로써 부끄러운 존재인 악이 되고
가리운 자신은 수치가 감추어짐으로써 자랑스러운 존재인 선이 되고 말았다.

자신을 가리우는 성곽을 높이 세우면 세울수록 자랑꺼리가 된다.
자신의 보호막의 절대가면화의 질적 양적인 진화와 발전만이 유일한 생명나무가 되고 만 것이다.

눈이 밝아진 이상 예수도 하나님도 모두다 타인이다.
나를 가리우는 가면으로서 예수를 이용하고 하나님도 이용한다.
좋은 가면이 되는 것이다.

여기 실로암 소경이 있다.
날때부터 소경인지라 실로암에서 쾌 유명만 소경인 눈이 어두운 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미지 관리 조차 할 수 없도록
자신도 자신을 손 못대는 이미 모든 부끄러움이 다 발가벗겨진 자이다.
가면을 써도 소용없다.
이미 발가벗겨진 메마른 뼈와 같은 속까지 다 보이는 속보이는 소경이다.

그런 속보이는 소경을 가지고서 자신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자들이 있다.
저 소경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은 그 당시 가장 질 좋은 가면을 쓰고서 마음껏 소경을 노리개로 삼는다.
자신이 쓴 가면은 모세의 가면으로서
유대인 누구나 한 번 써 보고 싶은 가면이다.

눈이 밝은데 왜 가면을 쓸까?

마치 자신들의 조작된 광채가 모세의 제자인냥 흉내를 내면서 동시에 부재성으로 이용을 한 것이다.
봐라 이렇게 나는 영광스러운 자이다 라고 자신이 모세의 자리 하나님을 대신하는 선지자 노릇을
인위적으로 조작된 성화로써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선지자 노릇을 하는 모세의 제자에게 모세의 수건 앞에,
의의 수건이 등장하고 의의 수건을 외치는 광야의 소리가 등장한다.

참 선지자는 거짓선지자가 없이는 그 차이성을 드러낼 수가 없다.
그런 참 선지자 조차도 예수님의 등장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출 34:28, 개역)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출 34:29, 개역)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출 34:30, 개역)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출 34:31, 개역)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출 34:32, 개역)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출 34:33, 개역)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출 34:34, 개역)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출 34:35, 개역)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바로 그런 가면을 벗기는데 가장 좋은 도구가 바로 눈이 어두운 실로암 소경이다.

[없어질 영광]도 쳐다볼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그 광채를
이제는 없애기 위해서 그 영광스러움을 본 적 조차 없는 소경이 가장 재격이다.
소경만이 보는 영광만으로 그런 [없어질 영광]은 깔끔하게 무대 뒤로 사라져 줘야 한다.
소경을 정죄했듯이 그 정죄 받는 당사자가 그 정죄의 영광을 없애는 [의의 영광]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고후 3:6, 개역)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3:7, 개역)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 3:8, 개역)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 3:9, 개역)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고후 3:10, 개역)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고후 3:11, 개역)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 3:12, 개역)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고후 3:13,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개역)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개역)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개역)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개역)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개역)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마치 마귀의 정죄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으로 인해 그 부재성으로써 의의 옷으로 새롭게 입혀질 새 옷을 증거하듯이
마귀와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새 옷의 등장의 부재성으로써 둘 다 두 그릇으로써 사용이 된다.

(슥 3:1, 개역)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슥 3:2, 개역)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슥 3:3, 개역)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슥 3:4,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슥 3:5, 개역)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슥 3:6, 개역)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하여 가로되』
(슥 3:7, 개역)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슥 3:8, 개역)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슥 3:9,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슥 3:10,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아름다운 옷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으로써 아름다운 옷의 차이성을 드러낸다.

창조를 소멸로써 증거하듯이, 구원을 심판으로만 증거하듯이, 사랑을 저주로써만 생아에게는 없는 자녀에게만 있는 매로써만) 증거하듯이, 용서를 심판으로써만 증거하듯이(일만달란트 빚진자 비유), 이웃사랑을 원수로써만 즉 십자가의 불륜으로써만 증거하는 것이다.
(솔로몬의 지혜의 재판 또한 십자가의 지혜를 드러내는 둘로 나누는 방식으로써 같은 의미이다)

유다 곧 약속의 민족, 약속의 집단성을 오로지 개같은 이방인 창녀같은 이방으로써만 증거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 다섯여자 “~에게서”)

바로 이것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다섯 여자 “~에게서” 로 증거하는 것이다. 무엇을? 약속의 자녀를...

이제 소경은 이 벗겨진 수건, 벗겨진 가면으로써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자유를 마음껏 외친다.

눈이 어두운 소경의 외침이 더 신뢰가 갈까?
눈이 밝은 바리새인의 외침이 더 신뢰가 갈까?

자유 곧 십자가의 도는 바로 이런 세상의 미련한 것을 들어서 지혜롭다는 자를 부끄럽게 하는 방식이다.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30, 개역)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1, 개역)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부끄러운 소경을 들어서 절대가면 절대수건을 벗기시는 방식?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비유는 그 당시의 부끄러운 존재들 창녀 세리 강도를 가지고서
의롭다 거룩하다 깨끗하다 라고 자부하던 절대가면을 홀라당 벗기신다.

가면 쓰고 싶어도 이미 다 까발려진 자들을 활용해서 말이다.

원가지도 벗기시는데 이방인이야 두말 할 것 없다.

정상인을 비정상인을 통해서 정상이라는 그 절대가면을 홀라당 벗기는 그 십자가야 말로
가장 인간에게서는 적이요 원수이요 악마이다.

그 악마적인 방식이 바로 십자가의 지혜이다.
비정상인 실로암 소경
눈이 단 한번도 밝아본적이 없어서
무엇이 옳은지 틀린지 조차도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자에게 의해서
평생을 무엇이 옳은지 틀린지에 대해서만 목숨 걸고 연구한 그 성경박사들을
홀라당 벗겨버린다.

그 처음자리로 되돌려 놓는 유일한 선지자로
바리새인 앞에 붙이신 것이다.

누가 소경을 선지자로 알겠는가?
눈이 어두운 자인데.

그 소경이 눈이 어둡다고 본 바로 너가 소경이 아니고 무엇이랴?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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