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9. 모든 허물을 뚫어버리는 기쁨의 창조 (누가복음 총정리)


희년 :  뚫힘을 당함으로써 소멸을 통해 증거되는 창조

할 것이 있는 (행함)의 자식이 아닌, 할 것이 없는(믿음) 이미 완료된 자식 : 탕자의 자리 = 새피조물의 자리


처음자리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의 자리로 되돌리는 창(무능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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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방식 외에는 구원 없다.

천국에서의 탕자의 방식 vs 부자의 선지자 보내기 방식

2009년 8월 29일 토요일 오후 8:54:21


구원이란 그 정도로 가망이 없다는 불가능성이다.
그런데 부자는 선지자를 보내면 된단다.
이런 부자들이 어쩜 그리 오늘날 개혁주의 자들과 똑같은 소리는 하는지
그야말로 지옥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교회에서 울려 퍼진다.
탕자의 방식이 아닌 부자가 요청한 방식 선지자를 보내면 된다는 방식

전형적인 지옥에서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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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총정리

부활이 뚫어버리는 옆으로 선 자들 =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아서


구원이 그 사람을 뚫어버려도 다시 사는 자는 처음자리의 첫사랑에 있는 창세전에 택한 노선인 예정된 사람입니다.

결국 구원이란 뚫어도 상관 없는 자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구원의 뿔로 아무리 뚫어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오뚜기가 아님이 밝혀집니다.

(시 1:1, 개역)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개역)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3, 개역)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 1:4, 개역)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5, 개역)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 1:6, 개역)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은 마치 요한복음처럼 모든 인간을 어두움 취급하며 그 어두움에 빠진 자 속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는 빛의 활약상과 같은데

여기서 반드시 숨겨진 존재인 원수가 밝혀져야 하고
또 그 빛은 반드시 억울하게도 목배임을 당함으로써 하늘에 그 머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기름부음 받은자의 모습으로써
이 두 세력의 갈등이 시편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즉 원수는 숨겨진채로 빛을 시기하고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서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그러나 그 원수로부터 억울하게 목배임을 당하는 의인은 심판 속에서도 하늘의 머리를 쳐다보기에 자기 목숨에 연연하거나 또는 자기 목숨을 내어주어도 상관 없는 자유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죽어도 상관 없는 자기의 목숨을 내어줌입니다.

결국 누가복음의 희년은 목을 내어주어도 상관 없는 하늘에 목숨이 있는 자를 찾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아서

희년 and 목 배임

(처음 자리로 되돌리기 : 역사 이전)

그러나 악인은 땅이 전부입니다. 하늘에서 끌어 당기는 동앗줄이 없습니다.
오로지 땅에서 끌어당기는 음부의 권세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의인 곧 목배임을 당해도 상관 없는 영혼은 자기 목숨이 아닌 참생명 되신 예수님의 생명나무 되심에 도리어 철저하게 소모되는 머리가 이 땅에서 짤려 미말에 둔 구경꺼리요 찌끄레기요 미끼로써 이미 머리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생명나무에 속한 것임을 서로 서로가 이 땅에서 짤리도록 목이 없는 자로써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십자가의 못 밖는 광야의 소리(닭의 울음, 성경의 눈물)이 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악인은 서로에게 성경의 울음소리를 외치는 꼬끼오 라고 외쳐주는 광야의 소리가 없습니다. 억울한 자의 목배임이 없습니다. 구원의 뿔로써 뚫혀져도 상관 없는 심판이 없습니다.

심판이 없어서 망하는 겁니다.
이미 서로 서로가 다 덮어주기로 약속을 했고
이미 서로 서로가 다 용서하기로 다 약속을 했기에
긍휼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없어서 망하는 겁니다.

누가복음의 희년은 그 심판을 곧 처음자리를 (성령 : 소멸의 처소)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은 거부하고 도리어 이방인이 그 심판을 통해서 처음자리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음으로 인해 팔이 어긋맞게 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겁니다.

탕자가 심판의 자리인 용서받지 못할 자임을 아는 자리에서 오히려 긍휼이 나오고
도리어 맏아들의 자기 목을 지킬려는 모습인 안정적인 자리가 도리어 강퍅의 자리로 변하는 겁니다.

바로 이 두 언약의 모습을 희년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시키면서 뚫어버립니다.
뚫혀져도 상관 없는 자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심판의 당연함을 외치는 자이고
도리어 자신의 구원을 챙기는 자는 그 뚫혀짐 목배임당함 소멸당함 심판을 견디지 못하는
악인임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자아가 삭제 당하는 그 처음자리로 뚫힘을 당하는 목배임이 당하는 자가
그 근원의 머리가 하늘에 속한 자이고

자기 구원 자기 믿음 자기 행함 자기 실천 자기 율법 지킴 등등이 자기 목숨을 지키는데 사용된 자는 음부의 권세 죄의 소원 곧 주님의 지독한 미움을 견딜 재간이 없는 악인 땅이 끌어당기는 자로

두 패로 나누는 뚫어버리는 뿔이 바로 십자가 라는 기준에 의해서 쭈우욱 찢어지는 겁니다.

목이 달아나야 마땅함을 알지 못하는 자는 이 구원의 뿔을 정면으로 맞서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러나 희년이라는 은혜가 덮친 자에게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늘 수시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범사에 항상 술술술 그 몸인 신체를 뚫어버려도 상관없는 말씀의 운동력에 매일 매일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림 당하고 쪼개짐을 당하고 마음과 생각과 뜻이 모조리 다 빼앗겨도 이미 그 말씀의 좌우 날선 검에 뚫혀지는 그 은혜의 자리 곧 하늘에 머리 목숨이 있기에 그 생명나무로 족하는 겁니다.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그래서 구약의 참선지자들은 심판의 옷을 입고서 심판을 증거합니다.

누가복음의 희년에 뚫혀버린 은혜를 입은 자들의 특징이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고아 과부 나그네
바로 애굽의 종 되었었던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였습니다.

그 애굽의 종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그저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였는데
처음사랑으로써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함을 마땅히 죽어야 할 자리에서 받았듯이

이제 이방인 곧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잃어버린 양 자리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자가 장대 높이 달린 그 십자가를 이방인의 한 과부 한 문둥병자가 쳐다보고

정작 유대인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음을 통해서

희년을 너끈히 완성하셨습니다.

제대로 뚫힘을 당하는 자는 고아 과부 나그네 곧 잃어버린 자기 양 뿐이였습니다.

오직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자기 양의 입에서만 찬양이 외쳐집니다.


그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는 확대가 바로 성령의 소멸 단절 분리 차단 지우개 삭제 쪼개심 찌르심 들추어내심 통해서 뚫혀져도 상관 없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누구를 앞장세워서? 사도 라는 성령의 검에 의해 이미 푸우욱 찔려서 꼬치구이의 살코기 처럼 이제 더 이상 자기 목숨이 없는 자, 자기 몸이 없는 뚫혀버림 당한자, 더 이상 자기 몸을 챙길 필요성이 사라진 자 그래서 목이 달아난 목이 없는 자들인

사도들을 검에 대롱 대롱 달고서 성령이 직접 행보를 하시는 겁니다.

어서 빨리 항복을 외치는 자가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서 자기 목을 아예 반납하는 그 처음자리만을 쳐다보는 자가 희년을 제대로 본 자입니다.

십자가의 영인 성령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사도행전 입니다.

(눅 14:31, 개역)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눅 14:32, 개역)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눅 14:33, 개역)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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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지 말라

2009년 9월 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7:16-20

(렘 7:16, 개정)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렘 7:17, 개정)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렘 7:18, 개정)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렘 7:19,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 함이냐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
(렘 7:20, 개정)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를 이 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불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신이라고 우기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없는 신’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땅에 진노를 퍼부어신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을 만드는 사람은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나름대로 자기 입맛에 맞는 신을 자기가 제조하는 자들이 됩니다.

이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계시를 거부하고 따로 자신을 위한 신의 계시를 따로 모으고 있는 바가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우상숭배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주신 것만을 도로 내놓기 위해서 자기 백성에게 기도를 시키기 때문입니다.

미리 결론삼아 신약의 예를 들겠습니다. 신약의 십자가는 용서의 표시입니다. 즉 십자가를 참 계시로 보는 이들은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에게 주어진 용서가 그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능력이다”고 하면서 늘 감격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신약 때,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기도와 모습을 통해서 “저는 이러이러해서 용서받았습니다”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을 되돌려 받기 위함입니다. 또 그런 차원에서 십자가 지셨습니다.

잠언 28:9에 보면,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율법 정신이 어떤 것이냐를 먼저 알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안에 하나님의 계명을 삽입시키는데 그 방법이 바로 기도합니다.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으시는 계명을 하나님께서 회수하시는 겁니다.

잠언 15:8에 보아도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직한 자의 기도는 어떠한 기도입니까? 누가복음 18장에서 보면 두 사람의 기도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죄 많은 세리요 다른 한 사람은 참으로 경건해 보이는 바리새인입니다.

그 현장에 예수님이 안 계셨더라면 누가봐도 바리새인의 기도는 응답이 되고 세리의 기도를 거부당할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고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현장에 나타났을 때, 상황은 반전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참 하나님 되시는 여호와께서 진정 원하시는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뜻이 삽입 여부가 결정적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역시 두 종류의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는 이방인의 기도요 다른 하나는 성도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식으로 기도하지 말하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의 기도는 자기 욕구와 기대치와 자기 생존과 야망을 위하여 기도하지만 성도의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는 식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보면, 성도란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방인들의 기도는 반대로 자신의 뜻이 되레 하늘까지 뻗히기를 간구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9:16-17에 보면,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옛 부대에다 새 포도주를 담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대마저 새부대 되게 하시고 거기에 담길 포도주도 옛 포도주가 아니라 새포도주 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기도도 받으십니다. 새 포도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새 계명, 곧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서는 모든 두려움이 없고 심판도 없고 오직 용서 뿐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기도 응답은 자신의 몸이 만들어내는 계시로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의 계시인 용서로 가득차서 이미 용서받은 입장에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식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응답이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성도는 기존의 몸을 수리, 보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포도주로 새로 만들어질 몸이요 새로 창조될 몸입니다. 즉 구원이란 새 창조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을 하나님 홀로 다 하시는데 왜 우리가 구태여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우상숭배자가 다름아닌 우리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낡은 계시, 엉터리 계시, 악마가 심어준 계시, 이런 것들로 가득차서 정작 하나님의 뜻이 들어올 여지를 만들지 않고 세상 것으로 꽉꽉 채운 것을 다 털어놓게 하십니다.

그래야지만 ‘용서’의 의미로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즉 용서받았으면 우리가 받을 기도 응답은 다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서가 세상 사람들에게 큰 밉상과 핍박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 기도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야지만 세상에 대한 심판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8:3-7에 보면,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 심판하는 작업에 성도의 기도가 필히 관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로 하여금 이런 기도가 우러나려면 그만큼 성도는 세상적인 엉터리 기도소리에 마음이 상해야 하고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 가운데서도 ‘여유만만’할 수 있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뜻을 하늘까지 뻗힐 생각말고 우리 빈 마음에 다 이루어신 하늘의 뜻만 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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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목배임

다윗의 하소연

2009년 8월 30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26:13-25

(삼상 26:13, 개정) 『이에 다윗이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 꼭대기에 서니 거리가 멀더라』
(삼상 26:14, 개정) 『다윗이 백성과 넬의 아들 아브넬을 대하여 외쳐 이르되 아브넬아 너는 대답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아브넬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하더라』
(삼상 26:15, 개정) 『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가운데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삼상 26:16, 개정) 『네가 행한 이 일이 옳지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이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하니』
(삼상 26:17, 개정)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하고』
(삼상 26:18, 개정) 『또 이르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삼상 26:19, 개정)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삼상 26:20, 개정) 『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삼상 26:21, 개정)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삼상 26:22, 개정) 『다윗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삼상 26:23, 개정)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삼상 26:24, 개정)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삼상 26:25, 개정)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은 사울을 만나지 아니하면 다윗의 진정한 의미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가 다 그러합니다. 이삭은 이스마엘과 만났을 때, 비로소 이삭의 의미가 드러나고 야곱은 에서와 만났을 때, 비로소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 만났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처럼 상호 이질적인 사항과 만나서 그 차이를 대비하면서 그 속에서 진리는 밝혀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과 사울의 만남이란 참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왕’과 그냥 ‘왕’과의 만남입니다. 다윗은 늘 머리 부분이 하늘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이것이 진정 ‘기름부음을 받은 왕’로서의 입장입니다.

소위 ‘목없는 미녀’처럼 몸통은 있되 머리부분은 없는 것처럼 하여 하늘의 긍휼과 정의와 사랑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은 자폐증적입니다. 자신의 왕됨을 자신의 능력으로 지켜내고 유지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그 어떤 것도 자기의 것을 지탱하는데 있어 적이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공격하는 이유는, 결코 하늘의 뜻을 살피기 위함이 아니라 고정된 자기만의 영역을 고수하겠다는 일념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진정 ‘기름부음받은 왕’의 모습이 아닙니다. 거기에 비해 다윗은 하늘로부터 공개된 인생일 뿐만 아니라 주위로부터도 공개된 인생입니다.

쉴새없이 사울측으로부터 공격받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만남과 부딪침과 고난이 곧 장차 오실 메시아로 인하여 정해지는 심판기준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심판 기준을 구성하는데 있어 인간들의 오해도 가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핍박받는 의인의 피’가 이런 환경에서 발생하는 겁니다.

다윗이 늘 하나님의 뜻과 교류하는 것은 마치 꼬치 요리를 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일단 꼬추의 머리부분을 잘라내고 그리고 배를 가르고, 그 속 알맹이는 빼놓고서는 거기에 잡채와 고기와 채소를 다져넣은 것으로 꽉꽉채워서 기름에 튀깁니다. 이럴 경우에 꼬추란 단지 그 형태만 보일 뿐이고 속은 꼬추 원래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그 시대에 있어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왜 지옥은 잠깐만 살다고 나오는 곳이 아닙니까? 즉 그것은 천국의 영원성을 보이기 위한 지옥이지 결코 지옥 단독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지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지옥은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천국에 간 사람은 결코 자신이 내세운 기준을 자기가 달성한 자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옥간 사람은 하늘의 기준을 거부하고 자신에 내세운 기준에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행함책에 있는 자는 모조리 지옥가는 겁니다. 만약에 천국에 들어간 기준이 영원하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요?

즉 천국 간 사람이 천국에서 10년 살고 나온다면 지옥간 자도 10만 살고 나올 겁니다. 하지만 천국 간 사람이 영원히 천국에서 산다면 지옥간 사람도 영원히 지옥불에서 나올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을 가름한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같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비겨가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되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모독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이 와서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목사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란 단지 ‘죽을 영혼은 필히 죽이고 살릴 영혼은 필히 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심판주가 아니라 그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따라서 유일하신 심판주되시는 예수님이 내린 심판의 기준에서 우리는 눈 돌아가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매사가 예수님 하신 일이 반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왕처럼 말입니다.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불렀던 찬양시입니다. 1-5절을 보면, “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계속 수직적으로 하늘을 봅니다. 이것은 마치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사시면서 경험하실 경험을 다윗이 미리 경험하고 있는 듯합니다. 다윗이 의아해하는 것은 분명 이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고 하나님이 계시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 나라에서 왜 하나님 믿는 자가 수난을 당하느냐 하는 겁니다.

다윗은 아브넬과 사울왕을 적으로 간주하고 싶지를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적을 잘못 집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더 이상 나를 적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기름부음 받은 자’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유지시켜 다른 저주받아야 될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거룩성을 드러내야 하는 사명을 지닌 나라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벼룩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사울왕이 진정 기름부음을 입은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면 하나님을 크게 생각하셔야지 다윗 같은 자는 하찮게 여겨달라는 겁니다.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다녀간 겁니다. 창과 물병이 이미 다윗 진영으로 넘어간 상태입니다. 다윗은 이 창과 물병을 통해서 다시금 자기에게 환란을 안겨준 유발한 원인이 소실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원점을 염두에 있는 겁니다. 그 원점이란 바로 골리앗을 쳐죽인 그 자리를 뜻입니다.

이처럼 진정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는 할례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조롱하는 상황에서 다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는 처지에서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이 다윗의 논조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누구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머리를 하늘에 들고 하나님의 확정된 기준을 쳐다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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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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