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자기 몸을 쳐다 볼 이유가 없기에 자기 머리가 날라가도 상관없는 것이 바로 새 머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12몸

새 머리에 새 몸 (새 술은 새 부대에) 반드시 헌술 헌부대 헌 머리 헌 몸과의 차이성으로 드러남

12지파의 범주에서 벗어난 자는 이스라엘이 아님 왜냐하면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자기백성이라는 한정성을 말하기에
죽었다가 살아난 자, 잃어버림의 경험이 있는자, 심판 속에서도 심판이 묻지 않는 자를 말하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예수님 곧 머리가 직접 주관하는 몸이기 때문이다.
부활이란 그래서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자기목숨도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박탈당한 것을 부활이라고 한다.


사도행전 2. 12 사도란 머리가 누가인가를 보여주는 몸 (행 1: 12-26)

제비 뽑기로 반드시 탈락 해야만 하는 인물과 반드시 맛디아로 뽑혀야 함을 보여주는 사도의 직무

한 몸 이란 한 머리 때문에 자기 목이 날라간 12지파의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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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12, 개정)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행 1:13, 개정)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행 1:14, 개정)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행 1:15, 개정)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행 1:16, 개정)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행 1:17, 개정)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행 1:18, 개정)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행 1:19, 개정)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행 1:20, 개정)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행 1:21, 개정) 『이러하므로 요한의 침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행 1:22, 개정)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 1:23, 개정)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행 1:24, 개정)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행 1:25, 개정)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행 1:26, 개정)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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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쭐이 난 요셉

(시 105:15, 개역)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시 105:16, 개역)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시 105:17, 개역)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시 105:18, 개역)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시 105:19, 개역)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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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과 물병 (목이 날라가 머리가 없는 다윗 vs 자기 목을 사수하기 위해서 자기가 머리 됨을 주장하는 사울왕)


다윗의 판단

2009년 8월 23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26:5-12

(삼상 26:5, 개정)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삼상 26:6, 개정)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삼상 26:7, 개정)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삼상 26:8, 개정)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삼상 26:9, 개정)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삼상 26:10, 개정)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삼상 26:11, 개정)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삼상 26:12, 개정)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누군가 다녀갔습니다. 물병만 가져갔습니다. 마땅히 당장 지옥으로 보내도 마땅한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물병만 가져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노합니다. 그 물병은 나의 생존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나의 소유요 나의 존재 의미를 살리는데 없어서는 안되기에 나의 분신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도 성도를 예수님은 쉬지않고 관여하십니다. 마치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될 수 있대로 복음이 안들려오는 곳으로 멀리 도망쳤지만 하나님은 환경을 통째로 이끌고 와서 하나님이 주목하고 지목해놓은 인간은 따로 있음을 늘 통보해주십니다. 즉 “너는 나를 떠나도 나는 너를 떠나지 않는다”는 식입니다.

거기서 요나는 뱃사람과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복음을 전합니다. “내가 죽으면 여러분들이 삽니다. 나를 물에 집어넣으세요” 이 말은 곧 여호와의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봐야만 삽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왔다가 가시는 이유는 우리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위해서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처신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것은 세상이 험악해서가 아니라 성도 자신이 벌써 세상 방식에 푹 젖어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인도함을 받기는 받지만 그 내부에서는 하나님의 인도 방식과는 100% 반대가 되는 성향을 지닌채 인도받고 있습니다. 성도가 날마다 하나님이 다녀간 흔적으로 못 본척합니다. 걸레질 해서라도 하나님두기를 싫어합니다.

오늘 본문에 아비새라는 장군이 등장합니다. 앞으로도 다윗과 동거동락을 할 장군입니다. 사무엘하 2:18에 보면, “그 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 같이 빠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복 중에서도 심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윗 왕에게는 충성을 다합니다. 하지만 인간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는 겁니다.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이라는 귀순 장군을 다윗 몰래 죽인 것은 사적인 복수심이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적인 이해관계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다윗을 힘껏 돕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개인적인 한맺임을 다윗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아비새의 이상형입니다. 문제는 단지 계속 이상형이기에 자신의 욕망과 일치되지 않는 순간이 오면 더 이상 매력은 없어진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동기부여는 결핍으로 야기됩니다. 뭔가 모자람이 상주하므로서 그 모자람을 해소하려는 차원에서 인간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아비새는, 다윗에게 주어진 모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자신이 제대로 관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성질은 다윗과 정반대로 나갑니다.

이렇게 되면 말만 다윗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실은 자기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다윗을 이용하는 관계가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누구신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기에 자기가 하는 일에 예수님이 어떤 큰 기적으로 협조해줄 것인가에 우선 관심이 가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름부음’에 대해 아비새와 사울왕이 같은 입장에서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기름부음이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단순히 신앙 이전에 현실적으로 엄연한 나라며 이 나라는 다른 여타의 나라들에 둘러싸여있는 형국입니다. 따라서 아비새과 같은 안목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자신이 속해있는 나라의 안녕과 질서과 정치 권력 장악과 연계시킬 것이 뻔합니다.

소위 ‘인간적인 나라’ 건설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사울왕이 그 표본입니다. 그래서 아비새의 경우, 사울왕은 단지 정치적인 라이벌로 간주될 뿐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운 이상 사울왕은 제거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비새 장군은 기름부음의 실제적 효능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외형적인 정치적인 기능에만 가치를 두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다윗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의 의미에 치중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울같은 사고방식이 앞으로 자기 주변에 들끓는 줄 뻔히 알기에 사울을 정치적 안목으로 보는 인사들 말고 자기처럼 하나님의 언약 관점에서 사울을 볼 자를 찾고자 하는 겁니다.

만약 이것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이스라엘이라면 비록 다윗 자신이 권좌에 앉아도 제 2사울, 제 3 사울이 얼마든지 자기 신복들 가운데 쏟아져 나올 것이 뻔한 겁니다. 옛날 이방나라에서는 왕이란 그저 권세의 표시로만 처 줄 뿐입니다. 그래서 왕이 권세를 쥐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세도가가 등장하면 곧 그가 차기 왕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안목에 대해서 다윗은 나름대로 그런 안목에 대해서 영적 싸움을 해야 될 필요를 더욱 더 느끼게 됩니다. 사울이 죽는다고 해서 적이 멈추지 않는 겁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운명이란 그 하나님이 행하신 ‘기름부음’의 참된 의미를 모른다면 실제적으로 모두가 적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름부음’의 실제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중심부에 있어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 기름부음을 핵심으로 하여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 어떤 인간이라도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여 막는다면 그는 사울에게 도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도전한 셈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 자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나라에 대해서 자신이 사울왕과 얽힌 것, 자체를 하나님의 연속적인 나라 세우기 작업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지금 쫓겨다니는 일조차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의미를 대외적으로 알리려는 뜻인줄 받아들이는 겁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사적인 복수심을 품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시선 돌린 사람입니다.

십자가에서 시선 돌려버리면 사적인 복수심이 다시 발작을 일으키는 순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되기를 싫어하는 이 마음이 도리어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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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알수 없는 애매한 고난

다윗의 하소연 (사무엘상 26장 13-25절)

우리교회/2009오후설교 2009/08/30 10:53

다윗의 하소연

2009년 8월 30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26:13-25

(삼상 26:13, 개정) 『이에 다윗이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 꼭대기에 서니 거리가 멀더라』
(삼상 26:14, 개정) 『다윗이 백성과 넬의 아들 아브넬을 대하여 외쳐 이르되 아브넬아 너는 대답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아브넬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하더라』
(삼상 26:15, 개정) 『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가운데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삼상 26:16, 개정) 『네가 행한 이 일이 옳지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이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하니』
(삼상 26:17, 개정)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하고』
(삼상 26:18, 개정) 『또 이르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삼상 26:19, 개정)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삼상 26:20, 개정) 『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삼상 26:21, 개정)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삼상 26:22, 개정) 『다윗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삼상 26:23, 개정)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삼상 26:24, 개정)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삼상 26:25, 개정)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은 사울을 만나지 아니하면 다윗의 진정한 의미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가 다 그러합니다. 이삭은 이스마엘과 만났을 때, 비로소 이삭의 의미가 드러나고 야곱은 에서와 만났을 때, 비로소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 만났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처럼 상호 이질적인 사항과 만나서 그 차이를 대비하면서 그 속에서 진리는 밝혀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과 사울의 만남이란 참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왕’과 그냥 ‘왕’과의 만남입니다. 다윗은 늘 머리 부분이 하늘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이것이 진정 ‘기름부음을 받은 왕’로서의 입장입니다.

소위 ‘목없는 미녀’처럼 몸통은 있되 머리부분은 없는 것처럼 하여 하늘의 긍휼과 정의와 사랑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은 자폐증적입니다. 자신의 왕됨을 자신의 능력으로 지켜내고 유지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그 어떤 것도 자기의 것을 지탱하는데 있어 적이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공격하는 이유는, 결코 하늘의 뜻을 살피기 위함이 아니라 고정된 자기만의 영역을 고수하겠다는 일념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진정 ‘기름부음받은 왕’의 모습이 아닙니다. 거기에 비해 다윗은 하늘로부터 공개된 인생일 뿐만 아니라 주위로부터도 공개된 인생입니다.

쉴새없이 사울측으로부터 공격받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만남과 부딪침과 고난이 곧 장차 오실 메시아로 인하여 정해지는 심판기준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심판 기준을 구성하는데 있어 인간들의 오해도 가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핍박받는 의인의 피’가 이런 환경에서 발생하는 겁니다.

다윗이 늘 하나님의 뜻과 교류하는 것은 마치 꼬치 요리를 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일단 꼬추의 머리부분을 잘라내고 그리고 배를 가르고, 그 속 알맹이는 빼놓고서는 거기에 잡채와 고기와 채소를 다져넣은 것으로 꽉꽉채워서 기름에 튀깁니다. 이럴 경우에 꼬추란 단지 그 형태만 보일 뿐이고 속은 꼬추 원래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그 시대에 있어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왜 지옥은 잠깐만 살다고 나오는 곳이 아닙니까? 즉 그것은 천국의 영원성을 보이기 위한 지옥이지 결코 지옥 단독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지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지옥은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천국에 간 사람은 결코 자신이 내세운 기준을 자기가 달성한 자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옥간 사람은 하늘의 기준을 거부하고 자신에 내세운 기준에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행함책에 있는 자는 모조리 지옥가는 겁니다. 만약에 천국에 들어간 기준이 영원하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요?

즉 천국 간 사람이 천국에서 10년 살고 나온다면 지옥간 자도 10만 살고 나올 겁니다. 하지만 천국 간 사람이 영원히 천국에서 산다면 지옥간 사람도 영원히 지옥불에서 나올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을 가름한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같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비겨가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되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모독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이 와서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목사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란 단지 ‘죽을 영혼은 필히 죽이고 살릴 영혼은 필히 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심판주가 아니라 그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따라서 유일하신 심판주되시는 예수님이 내린 심판의 기준에서 우리는 눈 돌아가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매사가 예수님 하신 일이 반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왕처럼 말입니다.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불렀던 찬양시입니다. 1-5절을 보면, “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계속 수직적으로 하늘을 봅니다. 이것은 마치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사시면서 경험하실 경험을 다윗이 미리 경험하고 있는 듯합니다. 다윗이 의아해하는 것은 분명 이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고 하나님이 계시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 나라에서 왜 하나님 믿는 자가 수난을 당하느냐 하는 겁니다.

다윗은 아브넬과 사울왕을 적으로 간주하고 싶지를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적을 잘못 집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더 이상 나를 적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기름부음 받은 자’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유지시켜 다른 저주받아야 될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거룩성을 드러내야 하는 사명을 지닌 나라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벼룩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사울왕이 진정 기름부음을 입은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면 하나님을 크게 생각하셔야지 다윗 같은 자는 하찮게 여겨달라는 겁니다.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다녀간 겁니다. 창과 물병이 이미 다윗 진영으로 넘어간 상태입니다. 다윗은 이 창과 물병을 통해서 다시금 자기에게 환란을 안겨준 유발한 원인이 소실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원점을 염두에 있는 겁니다. 그 원점이란 바로 골리앗을 쳐죽인 그 자리를 뜻입니다.

이처럼 진정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는 할례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조롱하는 상황에서 다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는 처지에서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이 다윗의 논조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누구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머리를 하늘에 들고 하나님의 확정된 기준을 쳐다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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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 선악의 몸을 쳐다볼 이유가 없는 새 몸의 등장 새 몸 새 머리만 쳐다보면 게임오바

죽기를 원한다

2009년 9월 1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8:1-4

(렘 8:1,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렘 8:2, 개정)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렘 8:3, 개정) 『이 악한 민족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8:4, 개정)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사람이란 각오한다고 잘 될 문제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이 죽고 난 뒤에 여운처럼, 긴 그림자처럼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죄는 인간보다 더 길고, 더 깊고, 더 넓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미 죽어버린 시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계속해서 훼손되어지는 사태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보통 상식으로는 아무리 흉악범이라 할지라도 망자의 존엄성만을 지켜주려고 합니다. 사람이 그동안 지은 죄는 그 사람의 사망으로 어느 정도 죄 값은 치렀다고 쳐주고 그 후까지 시신을 훼손하는 심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와서 유대나라의 우상숭배자들의 시신을 철저하게 유린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는 겁니다.

그들이 섬겼던 해와 달과 별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뼈가 먼지가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와같이 죄의 범주가 인간이 지었다고 여기는 그 범주보다 넓은 것은 진정한 죄라는 것은 인간이 몸으로 지은 죄로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다 더 근원적인 죄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과 관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몸, 곧 예수님의 몸으로서 표현되고 규정되는 넓은 범위의 죄가 따로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죄의 범위가 넓은 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단순히 죄를 용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로 하여금 생각지도 못했던 의의 궁극적인 지점까지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그 의는 곧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말씀도 이런 취지입니다.(롬 5:20) 은혜의 능력이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의가 제공되는 그곳까지 인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의(義)의 그릇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와 의의 규정을 자신의 몸으로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미 선악을 아는 지식을 확보했기에 그 범위 내에서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다’고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양심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항상 자기 몸의 태도와 마음가짐이나 행동에 세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이란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몸입니다.

돌발적인 사태에 대해서는 몸 따로, 마음 따로가 됩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준해서 선과 악을 분류하다보니 늘 주인님의 존재를 긍정하는 식으로 해석이 진행됩니다. 즉 “어쩔 수 없었어”라고 식으로 자기 방어를 하게 마련입니다.

어차하면 ‘내 몸 하나 죽으면 그만이지’라고 나올 수도 있습니다. 죄라는 것이 이 한 몸을 죽었다고 그것으로 값을 다 치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시대에 접어들어서, 예수님의 몸이 등장하기 전에, 그러니까 사람들의 자기 몸만을 믿을 때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서기관들처럼 각자의 구원은 각자의 몸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여부에 달렸다고 보고 열심히 하나님의 법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님의 몸이 등장하므로서 이러한 자기 몸 위주, 선악과 위주의 선과 악의 규정은 다 무용지물임이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3:14에 보면,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치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의 몸체도 들리는 용도가 된다는 겁니다.

들린다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이상 자기 몸쪽으로 돌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모든 세상 일이 눈 앞에 높이 들리는 저 예수님의 몸에 의해서 결정난다는 겁니다. 무엇이 의이고 무엇이 죄인지는 예수님의 몸으로 판가름됩니다. 예수님의 몸으로 하신 일을 모르는 것이 영원한 죄가 딥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몸과 다른 새로운 몸의 등장의 의미를 말해주는 겁니다. 즉 선과 악은 인간의 몸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등장한 낯선 몸인 예수님의 몸으로 비로소 규정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몸으로 이 땅에서 오신 것은 온전히 저주를 다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로서 저주가 무엇이며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짧은 세월만이 생존하는 인간의 몸 가지고서는 죄의 깊이와 넓이와 거기에 따른 저주의 강도를 다 보여줄 수가 없고 맛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곧 생명나무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선악과 범위 안에서 선과 악을 논하지만, 생명나무이신 예수님은 그 생명나무 관점에서 선악과의 세계 자체를 죄로 규정지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려 죽으시면서 이 세상의 모든 저주를 다 한 몸으로 다 받으셨습니다. 인간들이 집안에 우환이 있고, 자기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나타나는 상실감하고는 족히 비교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만이 진정한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이로서 원죄라는 것이 단순히 인간이 저지른 행위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악마의 반감을 뜻합니다.

마태복음 8:29에서 악마는 예수님을 대뜸 알아보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를 멸하러 오셨군요”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2:14-15에 보면,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거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정사와 권세’란 그동안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의 세력을 뜻합니다. 인간들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어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기껏 신에게 비는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악마가 메시아임을 알아보시고 예수님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우리끼리 잘해보자”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할 때, 그저 세상 부귀 영화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 뻔하니 그런 식으로 예수님도 이 세상 사람으로 그냥 눌러앉아 살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유일하게 죄의 세계에서 벗어난 분이십니다. 뿐만아니라 부활하셔서 그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심으로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이 세상 악마의 작당을 책망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자신이 완벽하냐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어떻게 하면 드러낼 수 있느냐라는 용도로 쓰여지게 될 것입니다. 이미 다른 세계, 생명나무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보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몸을 기준해서 회개할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입장에서 선악과 세계를 똑바로 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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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받는이 "김대식" <crosslamb@hanmail.net>
보낸날짜 2009년 9월 16일 수요일, 오후 23시 08분 18초 +0900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보느냐  하나님을 보는 관점이 문제이다
종교인들과 일반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는 관점은 초월적 존재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위치로 끌어올리는것을 용납못한다
하나님은 종교대상이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종교체제에서는 절대로 하나가 될수 없다 고 생각한다
그것은 율법과 같은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만 높힌다
율법에서는 종이지만 복음에서는 아들이다
아들 삼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육체를 해결 하셨다    외모 문제나 생명아닌 문제들은 제거하시고 그 다음에 부활하셨다
부활하신다는것은 새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종의 생명제거하고 아들의 생명을 주신것이다
성령강림을 통해서 그 분이 우리안에 들어온것이다 이제는 가능하다
육체가 해결됐기 때문에 우리가 영에 속한자이기에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와 하나되는게 가능하다
만약에 율법에서 처럼 하나님만 높은 분이고 우리는 낮은 상태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숭배하는 목적이라면
십자가가 필요 없다 이거 없어도 잘한다
하나님을 높은 분으로 만드는게 어려운게 아니다 그분 의지하고 제물 드리고 도와 주십시요 하면 된다
굳이 이런 과정이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런 과정을 윌를 위해 준비하신것을 보니까
당신은 높은 분이고 우리는 비천한 인간이다라는 것은 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방법을 보니까 우리안에 와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까지 끌어 올릴려고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왔을 때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그러니까 저런 썩을놈이 나온다  신성모독이기에
그런데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다
그분이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그런 얘기 할수 있는 것이다
신앙 과정이 다르다
하나님은 친히 높은 곳에서 내려 오셔서 우리를 끌어 올리시는 것이다
당신의 높은 곳으로 데려 가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기에 따라서 휴거라고 하기도 하고 승천이라고 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우리가 하늘로 올라간다는 얘기가 그 얘기이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 같은 인격 그것을 신의 성품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됨 하나님의 인격안에서 연합되는것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알면 우리안에 계신분이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다
중심을 보니까 우리안에 그리스도가 있다
사람의 근본을 바꾸는게 하나님의 성령이다
세상에 살동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생명의 빛의 열매가 되어야 한다
생명의 빛이 되어 햬택을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해와 달이 없다는 것은 각자 각자가 빛의 존재가 되기에 모두가 빛이기에 필요 없는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안에 그리스도가 있기에 우리가 하는 행동이 그리스도이고
우리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것이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것이다

답변 :
예수를 이용해 먹어서 인간의 가치를 높이자 라는 취지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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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는이 "김대식" <crosslamb@hanmail.net> 주소록 추가
보낸날짜 2009년 9월 16일 수요일, 오후 23시 29분 15초 +0900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문제는 주님이 나를 죽이시고 주님의 뜻데로 몰고 가신다는 뜻 아닌가요
하나가 된다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우리 몸에 주님만 담아 움직이겠다는 말 같은데요
그렇게 되면 결국은 주님 혼자가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게 해서 주님 자신의 영광이 주님 스스로 나타난게 하는것이 아닌가요
지금 우리 목사님도 자아 때문에 주님 말씀데로 살기가 힘든것이다라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혼의 구원을 말하거든요
영의 구원은 하나님이 끝내셨고 혼의 문제는 우리의 의지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는데 한편으론 말하길 모든것은 우리가 한것 같은데
결국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하면서도 혼의 문제는 우리의 의지를 사용해야 한다는게 참 아이러니 합니다

답변 :
하나 됨이란 몸을 쳐다 보라는 겁니다.
그 몸은 놋뱀처럼 장대 높이 달린 몸입니다.
그 몸 외에는 다 단절이다는 겁니다.
즉 단절을 모르는 자는 쳐다 볼려고도 하지 않을 겁니다.
놋뱀처럼 달린 몸을 쳐다보는 자만이 비로소 자기 몸을 안 쳐다 보는 자입니다.
인간은 하나 된다는 한 몸 교리를 이용해서
여전히 자기 몸만 챙기고 자기 몸만 쳐다 보겠다는 시도를 멈춘적이 없습니다.
(영도 혼도 몸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된 인간들의 종교적인 용어인데
그런 용어들 마저도 이용해서 몸을 쳐다보라고 차용한 겁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영이 아닌
성령은 바로 이 놋뱀처럼 달린 몸을 쳐다보라고 활동하는 분이 성령입니다.
자기 능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만 쳐다보게 되는데 그것이 영이 임했다는 겁니다.
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더 이상 안 쳐다보는 마음입니다.
오로지 장대 높이 달린 저 몸만 쳐다보는 마음입니다. 즉 뭔가 떠난다는 뉘앙스를 말하는 것이 혼입니다. 머물지 않고 너희들은 뭔가 어디로 떠나야 할 자들이이다는 겁니다.
고정된 자는 발목 잡힌 자이고 - 뱀의 후손과 같습니다. )(창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시 41:9, 우리말) 『내가 믿던 가까운 친구, 내 빵을 나눠 먹던 그 친구조차 나를 대적해 발꿈치를 들었습니다.』
(시 41:9, 공동) 『흉허물없이 사귀던 친구마저, 내 빵을 먹던 벗들마저 우쭐대며 뒷발질을 합니다.』
(시 41:9, 가톨릭)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시 41:9, 쉬운) 『나에게는 가장 친하고 믿을 만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와 함께 밥을 먹는 가까운 친구였지만, 이제는 그 친구마저 나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시 41:9, 킹흠정) 『참으로 내가 신뢰하던 나의 친한 친구 곧 내 빵을 먹은 나의 친구가 자기 발꿈치를 들어 나를 대적하였나이다.』
(시 41:9, 한글킹) 『정녕, 내가 믿었던, 내 빵을 먹었던 나의 친한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자기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시 41:9, 현대인) 『심지어 내가 신뢰하고 내 빵을 먹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까지도 나를 배반하였다.』
(시 41:9, 현대어) 『나와 가장 가까운 나와 한솥밥 먹던 친구들도 내게 등돌리고 돌아서더군요.』
(요 13:18, 개역)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제발 나랑 함께 이 땅에서 하나되어 동업하자 라고 마귀는 예수님을 붙잡으나 정작 배신할 자이기에 발꿈치는 단절의 의미입니다.
떠날 마음이 없다는 것은 마귀와 같은 겁니다.
십자가는 빈터 이지
뭔가를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과 인간 자아의 몸의 차이입니다.
인간의 몸은 신학도 신앙도 믿음도 뭔가 자꾸 채울려고 할 뿐입니다.
무거운 짐만 골라 골라서 말이죠.
선악의 몸은 그래서 생명의 몸과의 차이성을 이렇게 드러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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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는이 "김대식" <crosslamb@hanmail.net> 주소록 추가
보낸날짜 2009년 9월 17일 목요일, 오전 08시 06분 24초 +0900
 
 
구원이 되려면 구원받은 사람들의 의식이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인식의 교체’입니다. 즉 교체되지 않는다면 저주받는다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일에 종사하든지 간에 그런 것으로 하나님은 묻지 않습니다. 교회에 얼마나 공헌 했느냐도 묻지를 않습니다.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님 홈에서 이글을 읽었는데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란 부분에서 의문이 드는게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인식의 변화는 자연스레 되는게 아닌가요
그런 표현을 쓴다면 결국 성화구원론자들과 다를바 없지 않나요
성화 구원도 그리스도 안에서 훈련받고 양육 받으면서 깨달아 주님의 뜻을 알게 되고 성장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인격의 분량까지 가는것
그것이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것인데 ~ 해야 합니다 이런 표현들을 보면서 이것도 결국 자기의를 쌓게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문자에 얽매인다면 할말은 없구요 성화구원론자들도 그런식으로 말하거든요


답변 :
당연합니다. 변화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변화를 내가 계속 부여잡지를 못합니다.
왜냐 변화란 세계가 달라졌다는 의미이지 내가 달라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행함의 세계에서 용서의 세계로 옮기워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행함의 의식을 용서의 세계에서 펼쳐 본들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아라 이것들아 라는 것을 느끼라는 겁니다.
결국 그 차이성을 알 때 까지 그 사람은 자꾸 자기 숙제인냥 행함을 용서의 세계에서 펼치겠지요. 헛짓을 해 봐야 헛된 것을 압니다.
솔로몬이 고백한 헛되고 헛되다 라는 취지가 바로 그겁니다.
인간들아 너거들 지혜? 종교지혜? 학문 지혜?
에라이 이미 세계가 다른 세계야 라고 한 겁니다.
다윗이 회개로 금식으로 눈물로 기도로 솔로몬의 형 이름없는 아기를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 들으시고 죽이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갑자기 먹고 마시고 잔치를 배풀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춥니다.
이런 위선적인 이중적 행동에 신하들이 묻습니다.
다윗은 비로소 변화된 세계를 아는 겁니다.
세계가 다른 세계로 달라졌다는 겁니다.
회개 금식 눈물 기도가 통하는 세계가 아니라
회개 금식 눈물 기도가 안 통하는 세계로 변화 되었다는 것을 말이죠.
바로 이런 인식이 회개입니다. 돌이킨 겁니다.
선악의 행함에서 생명나무의 긍휼의 세계로 말이죠.
(바로 이런 배경 아래에서 태어난 여디디아 사랑받은 자가 솔로몬 입니다.)

내가 백날 변화 해 본들 세계가 안 바꾸어진 자는 그 변화 다시 원위치 됩니다.
그러나 세계 자체가 변화 되어 덮쳐진 자는 그 사람이 아무리 변화되지 않아도 상관없이
세계 자체로 옮기워진 겁니다.
장독대 안에 든 쥐가 아무리 변화되지 않듯이 장독대 자체를 옮겨 버린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인간과 마음판의 할례 인간의 차이겠지요.
세례지키기 인간과 세례자체인간의 차이입니다.
세례 지키기 인간은 심판 속에서 살아 남지를 못하지만
세례 자체 인간은 심판 속에서도 살아 남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 심판을 해 보면 아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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