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강의 2009-09-21  피 10강 지혜의 등장 vs 우상의 자리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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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090921피p038지혜의등장

피10강 우상의 자리 VS 지혜의 등장

[09 대구강의 15] - [피 10] - 지혜의 등장
                                                                                
                                                           09,09,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지혜가 곧 인간인가?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38페이지의 ‘지혜의 등장’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처음부터 어려운 것을 하게 되어서 조금은 골치가 아프지 싶은데 말이다. 먼저 살펴볼 것은 “지혜가 인간인가?” 라는 것인데, 이것을 다르게 표현을 하면, “지식이 인간인가?, 지식이 실존인가?, 지혜가 신체인가?” 라고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지혜라는 것은, 일종의 정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가 정보인가?” 라고 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그러나 “지혜가 인간인가?” 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곤란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잠언서 8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이 지혜는 그렇게 단순히 정보가 아니라, ‘어떤 분’으로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8장 2절에 보면, ‘그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잠 8: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잠 8:2) 그가 길가의 높은 곳과 사거리에 서며

◈ 특수인간과 보통인간 !!

그렇게 되면 “지혜가 인간인가?” 라고 할 때에, 그 ‘인간’ 앞에다 뭔가를 하나 집어넣어야만 하는데, 즉 “지혜가 특수한 인간인가?” 라고 말이다. 여기에서 신학자들은 보통 이 지혜를 특수한 인간으로서 보고, 그 특수 인간이 나중에 메시야가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되면 문제가 또 하나 더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특수 인간과 보통 인간에게 있어서 그 차이점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을 성경대로 하면, 이 특수 인간은 지혜가 있는 반면에, 보통 인간은 지혜가 없는 것으로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 이전부터 계신 분은 바로 지혜가 있는 이분이기에 말이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는 결코 창세 이전부터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세 이전부터 계시는 분은 ‘지혜’ 라는 이름을 가진 예수님이기 때문에, 즉 메시야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지혜가 특수 인간이라고 하면, 그러면 보통 인간은 무엇인가? 지혜 바깥에 있는, 즉 지혜가 없는 세계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잠언 8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너희가 지혜를 가지면 생명을 얻고, 그렇지 않으면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잠 8: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잠 8:36)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 ‘지혜’에 대한 3가지 문제 !!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문제가 쉬워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더욱 더 복잡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여기에 대해서 3가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것을 한번 살펴보자는 말이다.

첫 번째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지혜가 되시는 이분을, 과연 보통 인간이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식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인식이 가능한가? 아니면 불가능한가?” 라는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둘째 문제는, 설령 이분이 지혜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했을 때, 이분이 하는 행동들 중에서 지혜가 따로 있는지, 아니면 이분 자체가 지혜인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말이다. 즉 지혜의 범위 문제가 그만 발생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지혜를 알아야 생명이 있고 아니면 생명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이분의 지혜를 아는 그것이 지혜인지, 아니면 이분의 모든 것을 통채로(?) 아는 것이 지혜인지 하는, 그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목사님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모두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리고 이런 질문이 가능해야만 설교시간에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비록 논리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쉽게 쉽게 설명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씀에 대한 봉사자의 모습이 아니냐는 말이다.

◈ 신학자들의 책이 왜 어려운고 하니?

그러니 이런 것 하나만 하더라도 A4 용지 10페이지를 넘어가고 마는데, 그런데 이런 어려운 이야기들을 폰라드나 칼바르트와 같은 신학자들이 함축을 해서 책에 담아놓기 때문에,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같은 책은 그야말로 첫 페이지부터 읽어보면 짜증이 난다는 것이다. 집사님, 혹시 책이 있나요?

그래서 교인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물론 책을 좀 읽는 양반들이 말이다. “목사님, 성경은 쉬운데, 왜 신학자들의 책은 그렇게 어려운가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왜 책을 그렇게 어렵게 써서 복음전파를 가로막느냐고, 그렇게 오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자기의 책을 통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복음전파를 하고 있는데, 물론 저도 ‘선택’ 이라는 책 때문에 그런 오해를(?) 종종 받곤 했는데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 ‘피’ 라는 책은 짜증이 아니라, 아예 고혈을 짜내게 합니다. 으아악!)

여기에 대해서 변명을 좀 하지만, 너무 쉽게 풀어서 책을 쓰면, 오늘 이야기한 이런 문제만 하더라도 책이 한 권이 나오기 때문에, 사실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 기초가 되었다고 보고, 그런 가정 아래에서 책을 쓴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더 깊이 있는 문제들을 논쟁과 토론을 통해서 밝혀낼 수 있다고 하는 취지로서, 그래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방금 제가 지혜에 대해서 3가지 문제를 제시했는데, 그것을 하기에 앞서서 서론 삼아서 먼저 언급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지혜가 무엇인가?” 라고 했을 경우에, 그 첫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지혜가 무엇인가?” 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지혜를 알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혜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하지만 전혀 관심조차도 없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목사님, 우리가 굳이 그것을 꼭 알아야만 합니까?” 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관심이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이다.

◈ 잠시 칼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을 !!

이것을 하기에 앞서서 먼저 교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칼바르트가 ‘교회 교의학’ 이라고 제목을 붙여서 책을 썼는데,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데, 즉 천국을 이야기할 수 있는 교회가 진짜 교회라는 것이다.

물론 칼바르트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 11월에 바르트에 대해서 특강 때도 하겠지만, 너무 중요해서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해보자는 말이다. 아무튼 교회가 천국과는 무관하게 교회 그 자체로서만 존립을 하게 된다고 하면, 교회는 오는 고객들, 즉 교인들의 원하는 바가 가득하게 뭉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공통적으로 엮어내어서 단체를 만들고, 그것이 교회가 될 때, 그런 교회는 과연 어떤 특징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 교회인가? 예수님인가?

예를 들어서, 어떤 ‘A’ 라는 사람이 무슨 교회, 무슨 교회라고 하면서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그러나 어떤 ‘B’ 라는 사람은 천국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과연 어느 쪽이 교회부흥에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 이야기하는 것과 교회 이야기하는 것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을 더 좋아하고, 즉 교회에 오기 쉽겠느냐는 말이다.

당연히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즉 “교회에 오시면 가게에 단골이 생기고, 교회에 오시면 아는 사람도 많이 생겨서, 아이들 교육을 시키는데도 엄청난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교회 목사님이 그 얼마나 설교를 시원하게 잘 하시는지, 그만 스트레스도 모두 다 날아가 버립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우리 교회는 얼마나 화목한지, 날로 교인수가 늘어납니다” 라고 말이다. 또한 그렇게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비로소 사람들도 알아듣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하, 교회에 가면 그런 유익한 점이 있고, 좋은 점도 많이 있구나” 라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눈치도 없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버리면, 사람들이 듣기를 싫어하는데, 그렇게 듣기 싫어한다는 것은, 그런 사람은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교회는 기피하고, 즉 나오기 싫다는 것이다. 그러면 날로 부흥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가족만이 덜렁 남는다는 말이다.

◈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면 천국에 입장불가 !!

그런데 이렇게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쪽과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쪽을, 천국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어떠한가?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러한 천국에 입장을 하려면, 다른 것을 몰라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로 양심적이고(?) 성령이 함께 있는 교회라고 하면, 가능한 한 교회 자체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어떤 사람이 그러한 교회 이야기를 듣고서 혹해서 왔다고 하면, 그런데 그런 사람은 교회에 와서도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경우가 항상 발생하기 때문에 말이다. 항상 그렇게 발생한다는 말이다.

◈ 누가 빵구난 보트를 타겠는가?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보트가 나란히 두 대가 있다고 하면, 그런데 한쪽 보트는 멀쩡한데 다른 보트는 그만 빵구가 났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산상설교의 끝 부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을 말씀하시면서 말이다.

아무튼 정상적인 보트와 빵구가 난 보트가 있는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보트라고 한다면, 무엇에 관심이 있는고 하니, 과연 보트를 움직여서 천국에 갈 수가 있는지,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보트 그 자체의 화려함이나 크기가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교회라고 하면 예수님 이야기만 나와야 하는데, 사도바울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말고는 다른 것은 전혀 나올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에 가지 못하는 교회는 무엇인고 하니, 그런 예수님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교회 자체의 화려함과 규모에 집착하게 되는데, 즉 교인수가 얼마이니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김 집사, 옆에 있는 교회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목사 가족만 달랑 남았다고 하는데, 맞나?‘ 라고 하면서, 그렇게 교회와 교회끼리 비교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교회에 모인 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막상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왜 우리를 보고 예수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고 하는가? 얼마나 우리교회 목사님이 예수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우리도 열심히 잘 듣는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오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 불량서클에는 가지 말아야 !!

그러니 목사나 교인들이 예배를 다 마치고 나서, 성경말씀이 아니라 세상 정치나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이야기한다고 하면, 하지만 그러한 잡다한 이야기를 해버리면, 그러면 교회가 아니라 일종의 친목단체에 와있는 것인데, 그것도 불량금지 단체에 말이다. 왜냐하면, 빵구난 보트와 같으니 말이다. 그런 곳에 가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천국에 관심이 없는 자들이 모였는데, 그렇다면 복음을 하는 목사라고 하면 설교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물어야하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이런 이러한 의미입니다” 라고 한 마디를 던지고 나서, “그런데 여러분은 과연 여기에 관심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이제 계속 설교를 해도 될까요” 라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교인들이 아무런 대답이 없다고 하면, 이번에는 “한나라당의 박근혜가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과연 어떻게 될까요? 여기에는 관심이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정치적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 저기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는데, “이명박이 모르는 척 하면 안 되고, 당연히 박근혜를 밀어주어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서로가 꾹꾹 참으면서 !!

그러니 이미 교인들의 마음속에 천국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물론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데, 그런데 목사가 천국과 예수님에 대해서 설교를 하니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꾹 참고 설교하는 목사도 많이 있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런데 그렇게 꾹 참았던 것이 예배를 마치고 나서 점심시간에 드디어 터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설교시간을 그야말로 헛되이 보낸 것인데, 그러니 그들은 교회가 아니라, 마치 대구의 번개시장에 온 것과 같다는 것이다. 새벽에 와서 값싼 물건이나 사고, 또 잡담이나 하고 말이다.

◈ 사람들은, 지혜를 정보의 일종으로 !!

아무튼 이렇게 “예수님은 지혜입니다” 라고 하니, 사람들은 이것을 정보나 혹은 지식으로 여기는데, 그래서 “우리 아이가 예수님을 믿으니, 지금부터 얼마나 똑똑해지는지 한번 두고보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아이를 사립학교에 보내었는데, 그 학교 교훈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서울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지식을 더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자기 자식에게 말이다.

그렇게 되니,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복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식이 남들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목사가 눈치도 전혀 없이 십자가의 피를 이야기한다면, 그 다음에는 당연히 그 교회에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 잠시 장경동 목사를 소개합니다 ??

그런데 그 옆에 있는 교회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여러분 예수님은 지혜입니다. 이 지혜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경영의 지혜가 있고, 둘째는 교육의 지혜가 있고, 또한 셋째는 윤리와 도덕적 지혜가 있는데, 이런 모든 지혜는 예수님에게서 나왔고, 그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기에, 여러분이 그 하나님을 믿으면, 보다 경제적으로 잘살 수 있고, 자식이 공부를 더 잘하게 되며, 윤리적으로 남보다 더 뛰어날 수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지금 완전히 약장수가 된 기분인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되면, 이제 사람들이 알아듣는데, 왜냐하면 평소에 관심사가 천국이나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식에게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서 나와서 옆 교회로 가게 되는데, 물론 혼자가 아니라 자기 가족까지 다 데리고 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예수님만 전하는 교회는 점점 사람이 줄어들고, 이웃 교회는 부흥을 하는데, 물론 엉터리 부흥이지만 말이다.

◈ 칼바르트 - 천국은 교회가 아닌, 예수님의 나라 !!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가? 그런 불량서클에 가게 되면, 당장에는 흥이 나고 좋을지는 몰라도, 그러나 천국과는 단절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바르트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천국은 교회의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모르는데, 그러니 교회에서 교회 이야기는 빠져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현실 속에서, 성경말씀을 아무리 이야기하고 서로가 같은 성경책을 보더라도, 본인의 관심사에 의해서 성경말씀에서 빼먹으려고 하는 것이 따로 나온다고 하는 것이, 바로 교재 37페이지부터 시작하는 ‘세상도안’ 이라는 부분의 주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왜 이 세상은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쪽으로 성경말씀을 해석할 수밖에 없는지, 도대체 그런 심보가 이 세상에, 즉 우리 인간들 속에서 어떤 식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지, 그것이 바로 ‘세상도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서론격으로 지금까지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 잠언서 - 지혜를 얻는 자만이 생명을 !!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즉 “지혜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잠언서 8장에 의하면 ‘특수 인간’을 두고 이야기한 것인데,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특수 인간이 등장함으로서, 그러면 보통 인간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혜는 특수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보통 인간에게는 그런 지혜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혜가 없으니 보통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저주를 받게 되어있는데, 그래서 잠언서 8장 35절에서는 지혜를 얻는 자만이 생명을 얻는다고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특수한 존재와, 즉 특수 인간과 무관하게 가만히 있으면, 그렇게 가만히 있는 체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특수 인간인 이 지혜를 얻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생명을 얻는다고 한다고, 이 잠언서 8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잠 8: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니 지혜가 없는 자는 당연히 생명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런 점이 참 재미있는데, 성경이 좀 얄굿다고 할까, 아무튼 그러한 대목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가진 자는 더 가질 것이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라고 말이다.

◈ 예수님은 장난꾸러기 ??

이것을 딱 잘라서 보면 그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아무튼 사람을 간이 졸이게 만들고 살이 떨리게 한다는 것이다. 당황스럽기까지 하고 마치 장난꾸러기들이 하는 것 같은, 그런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가진 자가 더 가진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런데 없는 자는 있는 것마저도 빼앗긴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보로 하는 말이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없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빼앗길 것도 없다는 것인데 말이다.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 있는 자는 더 있게, 없는 자는 빼앗기게 !!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고 하니까, 아무 것도 없는 자가 꼭 있는 척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복음을 하나도 모르는 인간들이 복음을 아는 척을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가 있는 척을 하는 자들은, 모두가 다 진짜 복음 앞에서는 말짱 도로묵으로 들통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아하,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라고 말이다.

◈ 인간들은, 없으면서도 있는 척을 !!

그러니 결국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즉 “있는 자가 더 받는다” 라는 것은, 진짜로 있는 자는 자기가 있다고 하는 소유의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없는 자는 어떠한가? 자기가 없으면서도 꼭 자기에게 뭔가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소유하는 행세를 해왔다는 것이다. 전혀 자기의 소유의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말이다.

그러한 것이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앞에서 모두 들통이 나고 마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는, 소위 ‘씨 뿌리는 비유’를 하고 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것들이 전부가 다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어떻게 지혜를 얻을 것인가?

지금 제가 본론을 하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아까 “지혜를 얻으면 생명을 얻는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지혜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생명이 없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지혜를 얻으면 생명을 얻게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과연 지혜를 얻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지혜를 얻는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 우리에게는 난감한 문제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지혜를 얻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지혜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되니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다” 라고 하게 되면, 그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까지도 챙겨주셔야 하는고 하니, 우리가 지혜를 보고 “야, 저것은 지혜이다” 라고 깨닫고 믿을 수 있는 능력까지도 모두 집어넣어서, 즉 그런 것조차도 모두 주님께서 제공해주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지혜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 아니, 예수님도 아담 안에?

그런 의미에서 이 지혜는 인간이 되어야만 하고, 더 밑으로 내려가서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당황스러워하고 힘들어하는 것까지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말이다.

더욱 더 확실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예수님도 아담 안에 계셔야 한다” 라는 것이다. 아담이 가졌던 그 신체를 아담 안에서 가지고 있는데, 거기서 새로운 아담으로 드러나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있는 자도 더 있게 된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즉 지혜 쪽에서 뭔가를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하면, 즉 지혜가 믿음을 심어주지 않으면, 왜냐하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은사이니 말이다. 그렇게 믿음을 심어주지 않으면, 인간들이 이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것을 감추기 위한 위장술에 그만 들어가고 만다는 것이다. 

◈ 어떻게 교회가 발생하게 되었는가?

그래서 아까도 말했지만, 정말로 천국을 보여주는 교회라고 하면, 교회는 항상 교회 자체를 부정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는데, “교회성장에 있어서, 어떻게 교회가 성장을 하느냐고 묻지를 말고, 도대체 누가 이렇게 성장을 하도록 했는지 물어보아라”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더 교회가 성장을 할 것인지에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누가 무슨 짓을(?) 해서 이렇게 교회를 교회가 되게 해놓았는지, 즉 어떻게 해서 교회가 발생이 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늘’ 말이다.

◈ 당신을 누가 보내었습니까?

그러니 교회 자체를 붙들려고 하면 안 되고, 교회를 교회가 되게 하는 천국의 능력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을 꼬드기려고 하지 말고, “당신을 누가 보내었습니까?” 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당신은 무슨 책으로 공부를 해서 그러한 이야기를 하십니까?” 라고 하지 말고, “당신을 누가 보내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라고 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내용들이 상당히 어려운 것이기에 찬찬히 한번 해보려고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 지혜는 인식 자체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인식이 전혀 불가능한데, 즉 지혜의 범위가 우리보다도 더 넓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혜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이 지혜에 포함이 될 것이냐는 문제 또한, 역시나 이 지혜 자체가 제공을 해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 38페이지 밑에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 지혜에 의하면 인간은 머무름이 없다.

제가 이 글을 먼저 메모지에 써놓고도 무슨 글자인지 몰라서 한참을 더듬거렸는데, 너무 날려 적어서 말이다. 물론 글을 쓸 때에 또박또박 쓰면 되겠지만, 그러나 글을 그렇게 또박또박하고 천천히 쓰면 그 다음에 쓸 글 내용을 그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뭔가 번개가 ‘쾅’ 쳤을 때 계속해서 빨리 써내려 가야지 말이다. (녹취자 - 그래서 강의도 발음이 꼬이도록 그렇게 빨리 하시는지? 다음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말입니다. 그래도 조금만 더 또박또박하게 해주세요. 플리즈!)
 
◈ 인간은 머무름이 없어 !!

여기 교재에서 “인간은 머무름이 없다” 라고 되어있는데, 즉 인간은 신속히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무슨 의미로 이렇게 적었는고 하니까, 모든 변화는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변화가 하나도 빠짐이 없이 모두 그러한데, 그것이 곧 ‘지혜’ 라는 말이다.

그러니 ‘지혜서’ 라고 하는 잠언서와 전도서에 말하는 지혜는 서로 같은 것인데, 잠언서는 “~은 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반면에 전도서는 “~은 아니다” 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아니다’ 라고 하면서도 반드시 인간과 결부를 시키는데, 왜 그런고 하니, 이 인간 자체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 꼭 ‘이다’ 라고 바꾸고 만다는 것이다. 개뿔도(?) 지혜도 없으면서 있는 척을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잠언서의 전체 내용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 어떤 지점에 머무를 수 있도록 전혀 허용을 하지 않는데, 즉 계속해서 변화를 준다는 말이다. 이 잠언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교재에 썼듯이 “지혜에 의하면, 인간은 머무름이 없다” 라고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

잠언서 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데, 즉 사람이 아무리 잘 듣고 깨닫고 해도, 보는 눈과 듣는 귀와 씹는 이가 있어도, 그 모든 것이 마치 모래성과 같이 허물허물 주저앉아 버린다는 것이다. 아무리 풍각 소리가 들려도, 즉 잔칫집의 음악소리가 들려도 왜 들려오는지를 모르는 시절이 곧 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아무리 청년이라고 폼을 잡아도, 조금만 있으면 맛이 가고, 그렇게 ‘훅’ 간다는 말이다. 아마도 요즘 40대는 이것을 실감하지 싶은데 말이다. (어디에 있지?)

특히 노인네가 되면, 결혼식에 가서라도 뭐라고 하는가? “야야, 여기서 오늘 무슨 일이 있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결혼식에 와서 부조까지 다 해놓고도 말이다. 전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의 어머니의 경우에도, 제가 교회에 오시라고 해서 모시고 왔는데, 그런데 거기서 저를 찾는다는 것이다. 제가 미리 전화로 연락을 다 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약간은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

◈ 십자가 마을은 실체가 있는가?

아무튼 이렇게 머무름이 없는데, 즉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게 지나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 마을의 경우에도 실체가 없다고 할 수 있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체로 보일 때는, 실체가 정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본인이 일단 하나의 실체로 우기기 때문에, 즉 그것이 본인에게 포착되니, 마치 실체처럼 보일 뿐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지혜에 의하면 인간은 머무름이 없다. 신속히 사라져 주어야 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헛됨’을 통해서 깨닫는 자가, 곧 지혜를 아는 자 !!

여기서 전도자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 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셨다고 하는 것을 ‘헛됨’을 통해서 깨달을 때, 그런 사람이 바로 지혜를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따로 자기 것이라고 뭔가를 쥔다는 것 자체가 잘못인데, 즉 얼마나 지혜와 동떨어진 짓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많이 배워도 그것도 역시 그냥 ‘훅’ 지나가는데, 그러니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착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가 다 죽을 때는 똑같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착하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또한 악하다고 빨리 죽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한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데, 즉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또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말이다.

◈ 근호씨, 가지 마세용 ??

그래서 사람들은 신혼시절의 그 알콩달콩한 감정을 잊지 못하는데, 그것도 당연히 변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상대방을 보고는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여보, 왜 지금은 나를 사랑하지 않지?” 라고 하면서 마구 닥달을 낸다는 것이다. 특히 여자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결혼을 정의하기를, “남자들은 호기심으로 결혼을 하고, 여자들은 운명적으로 한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남자가 더 결혼을 보는 눈이 훨씬 더 지혜롭다는 것이다(ㅋㅋ). 왜냐하면, 여자는 거기에 목숨을 걸지만, 그러나 남자는 결혼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니, 즉 머무름이 없는 흘러가는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가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남자는 결혼식 때 양복만 입고 있으면 되는데, 하지만 여자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그 빈약한 가슴을 거의 드러낸 드레스를 입고는, 그리고 부케를 던지고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머무름이 결코 없음을 잊지 말아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 남자가 언제 떠날지 모르니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게 된다. 스스로 “나는 이런 인간이다” 라고 자기를 확정적으로 표현해줄 만한 것들을 찾아보지만, 그런 것은 다 바람을 잡는 격이다. 많은 공부를 해서 지식을 쌓는 것으로도 안 되고, 실컷 먹고 마시는 향락으로도 자신을 확정지을 수가 없고, 열심히 수고해서 재물을 모아도 그것으로 자신을 규정해주지 못한다.

(전 1: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전 2: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 그림자는 주체가 아니기에 !!

여기에 ‘그림자’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런데 이 그림자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림자의 특징은 주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원래는 주체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법인데 말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움직인다는 것이다.

강의시간에 저에게 매일같이 질문하는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목사님, 어떻게 기도를 하면 됩니까? 어떻게 전도를 하면 됩니까? 아무 것도 하지를 말까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질문 아닌 질문을 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이미 ‘나’ 라고 하는 주체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무엇이라도 해야만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저가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림자는 자기가 주체가 아니더라도, 즉 주체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 주체를 따라간다고 분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움직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자는 결코 그림자를 자랑한다든지, 또한 그림자를 내세우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림자를 그림자가 되게 한 주체는 따로 있는데, 그래서 그림자는 그 주체만 증거하면 되는데, 하지만 그 주체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그림자들끼리 서로 싸우는 것인데, “니가 잘았니? 내가 잘났니?”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직장을 가지고 싸우고, 한달 수입을 가지고 싸우고, 또한 외모를 가지고서 싸운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다 그림자인데 말이다. 다만 이 그림자가 실재처럼 나타날 때는 단호하게 거기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런 지적에 대해서 거부하는 자들과 피가 튀도록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그림자는 그 특징 가운데 하나가 색깔이 검다는 것인데, 즉 모든 색채를 다 검게 만든다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이 그림자를 없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시커멓고 차등이 없다고 해야하지 맞지 말이다. 그런데 없다고 하면 곤란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하게 있으니 말이다.

◈ 진짜 교회는, 교회 자체를 이야기하지 않아 !!

하지만 사람들이 저를 보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근호 당신처럼 하면 교회는 없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 자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국을 이야기하는 교회는 분명히 있는데, 그러나 그런 교회는 교회가 있다고, 그렇게 교회 자체를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체는 곧 천국이고, 교회는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그림자가 실체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체가 그림자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즉 실체가 움직이면 그림자는 따라온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런 그림자의 제일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졸졸 따라다닌다는 것이니 말이다.

◈ 목사님,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아무튼 인간은 그렇게 자기를 확정하게 되면, 그것은 바로 지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지혜의 노선에서 벗어나면 당연히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이다. 전도서의 마지막에 보면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어떤 분이 “목사님,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해답은 이미 전도서 1장부터 이미 모두 했다는 것이다. 즉 성경말씀이 “헛되고 헛되다” 라고 하면, 그렇게 알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앞으로 제가 헛되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하면서 묻는 것 자체가 무슨 도대체 뜻이겠느냐는 말이다. 즉 무슨 의도를 가지고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것이다.

◈ 성경이 정말 쉽죠잉 ??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예 시험문제를 자기가 내는 꼴이 되고 마는데, 왜냐하면 “헛되고 헛되다” 라고 하는 것 자체가 시험문제인데 말이다. 그러니 “헛되고 헛되다” 라고 하면, 거기에 동의를 하고 나서 그분의 그림자로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헛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묻는 것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이 어떻게 보면 참 쉽다는 말이다.

물론 이렇게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성경책에서 손을 떼는데, 물론 그 교회에도 나오지 않고 말이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방식만 심어준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아예 성경말씀은 덮어놓고, 교회 이야기만 하려고 하는데, 즉 “우리교회는 분위기도 좋고 재미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은 그런 교회에 모이는데, 물론 유감스럽게도 천국과는 단절된 불량서클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오늘날 교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이 들키기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을 하는데, 즉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관심이 없음을 아주 교묘하게 덮어서 위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인들도 역시 가면을 쓰고 다니고 말이다. 이것을 ‘페리소나’ 라고 하는데, 그것이 곧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일단 교회에 등록만 하면 같은 편이 된 것으로 여기고 말이다.

◈ 인간은 그림자인데, 왜 실체 노릇을 하려고 하는가?

그렇다고 하면, 왜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그림자에 불과하면서도 실체 노릇을 하려고 그렇게도 애를 쓰고 난리를 피우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인간들 속에 무슨 괴물이 들어있기에 말이다. 바로 그 괴물이 바깥으로 표출하는 것들이 교재 39페이지 ‘(2)나의 자리’에 보면 나오는데, 물론 내용이 어렵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또 알고 보면 쉽다는 것이다.

◈ 잠시 프로이트가 말하는 ‘꿈’에 대해서 !!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인데, 우리 인간에는 누구나 다 ‘꿈’ 이라는 것이 있는데, 프로이트가 꿈을 이야기하기 전에는 사실 사람들은 이 꿈을 정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모든 꿈은 다 개꿈이다” 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꿈이 아닌, 정신을 버쩍 차렸을 때에 가지고 있던 인간의 의식이나 이성이나 감정 등을 지혜로 보고, 바로 그런 것을 철학이라고 해서 다루었다는 것이다.

◈ 모든 꿈은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 !!

그런데 여기에 프로이트는 꿈을 집어넣음으로 해서, 곧 “의식이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꿈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공포’ 라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인해서 꿈을 꾼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꿈은 다 일종의 가위눌림인데, 제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하고 비키니 차림의 아가씨들이 많이 등장해도 말이다(ㅋㅋ).

그러니 꿈을 꾸고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뭔가가 캥기는 것이 있고, 또한 일이 그렇게 안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두려움을 모면해보려는 어떤 염원과 같은 것이, 그런 것이 꿈으로 편집이 되어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 꿈이 그 어떤 종류의 꿈이든지 간에 말이다.

심지어 예수님을 만나는 꿈이라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왜 그런 꿈을 꾸겠는가? 혹시나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까 싶어서 꾼다는 말이다. 그것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만나는 꿈을 꾼다는 것이다. 즉 두려움에 대한 일종의 보충(보상?)이라는 것이다.

◈ 그리고, 공포는 곧 죽음에서 주어진 것 !!

그렇다고 하면, 우리 인간은 왜 두려워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때문에 두려워하느냐는 말이다. 그것을 프로이트는 인간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서, 더 확대해서 모든 동물까지도 다 포함시켜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곧 죽음에서 오는 공포라고 보았는데, 즉 죽음이 그런 공포를 준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은 시시하게 보니 별로 개의치 않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체가 뿜어내는 에너지가, 즉 그러한 생명력이 중지가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는 불안감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신체는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 정박아들이 모여서 화투를 치면 !!

예를 들어서, 정박아들이 모여서 화투를 친다고 하면, 그들은 화투를 치면서 뭐라고 하겠는가? “나는 지금 손에 그림을 들고 있는데, 무거워서 그만 제일 오른 쪽에 있는 한 장을 내려고 한다” 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인들이 모여서 화투를 치면 그리 간단하지가 않은데, 즉 “내가 이것을 내면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까?” 라고 하는,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박아들은 그냥 내면 그만이지, 오히려 기분이 좋게 말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겁을 낸다든지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박아들은 암이 거의 없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를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들뢰즈가 말하는 '기계‘와 같다는 것이다.

아무튼 정박아들에게 화투를 치게 하면, “아이, 화투가 무거워요. 빨리 내놓고 싶어요” 라고 하는데, 그래서 어떤 정박아들은 그냥 한꺼번에 다 내놓기도 하는데, 그러면 옆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주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게임의 법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신체의 느낌, 즉 자기가 느끼는 감정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중력이 주는 고통밖에는 것이다. 그런 것을 두고 동물적이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 그러나 인간은 화투를 치면, 먼저 두려움을 !!

하지만 인간은 미리 당겨서 행동을 할 때, 자기 행동의 반대가 되는 경우를 미리 생각하면서 행동에 옮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행동하는 인간이 지금 살아있으니, 그런 살았음의 반대가 무엇인가? 당연히 죽음인데, 그러니 인간은 그 모든 행동들이 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있음의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모든 인간의 모든 행동이 다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죽음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될까 싶어서 겁을 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겁이 나는 것을 숨기려고 하다가, 그만 밤에 잠을 자게 되면, 이런 의식이 중지가 되면서, 이제는 무의식 세계에서 죽음이 주는 공포를 계속해서 느낀다는 것이다.

자기가 낮에는 그러한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해서 일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잠을 자게 되면 그런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모든 행동들이 다 올스톱이 되었으니, 그때는 머리로서 계속해서 이러한 죽음의 공포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싸울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꿈을 통해서 커버하고 있다는 것이다.
 
◈ 치환, 환유, 비유 ??

여기서 좀더 깊이 들어가면, 그 커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나오는데, 치환이니, 환유니, 비유니 하면서 말이다. 아주 복잡한 논리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매를 미리 맞게 되면, 자기는 면역이 되었다고 하면서, 즉 매를 미리 맞았으니 때리지 말아달라는 의미도 있고, 또한 자기는 착하니 자기를 때리지 말고 비켜가 달라고 하는 방법도 있고 말이다. 그런 온갖 심리적인 복잡한 방법들이 다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것들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바로 이 ‘공포’ 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잠을 자지 않는 낮에는 어떠하겠는가? 그런 공포가 억압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이제 활짝 만개를 하고 말이다. (오잉, 밤에 피는 장미?)

◈ 프로이트에 의하면 종교는?

그렇다고 하면, 이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종교는 무엇이겠는가? 즉 인간에게 있어서 신은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이 신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결코 인간들이 그 죽음이 주는 공포와 무관하게 신을 찾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맨 정신으로, 즉 의식이 있을 때 교회에 가는 것도, 역시나 자기의 무의식 속에 있는 “죽으면 안 돼!” 라고 하는, 즉 그렇게 자기 죽음을 모면하려고 하는 의도와 무관하게 교회에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음의 공포와 관련이 되어서 교회에 간다는 말이다.

◈ 잠시 ‘신칸트주의’에 대해서 !!

이러한 프로이트의 주장에 대해서, 그 당시 교회의 목사들이 입이 백 개라도 도저히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은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그들은 주로 예배시간에 산상설교를 설교하면서, 칸트의 윤리와 접목을 했는데 말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리츨’ 이고, 그는 프로이트 그 당시에 독일신학을 지배했던 ‘신칸트주의자’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이 신칸트주의가 무엇인고 하니, 간단히 말해서, 교회의 존재 의의는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다 있으니 그래도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인들이여, 여러분의 착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라고 하는 신학적 흐름이 바로 리츨의 주장아고, 그것이 곧 ‘신칸트주의’ 라는 것이다. 

현상계와 신의 세계에 있어서, 물론 우리가 신의 세계는 알 수 없지만, 그러니 이 하늘나라와 이 땅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는 윤리와 도덕밖에 없는데, 여기서 윤리는 “우리가 무엇을 지키자” 라는 차원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한다” 라고 하는, 즉 ‘MUST’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말이다.

◈ 독일 국민들이여, 예수님의 산상설교대로 삽시다 !!

그것이 곧 칸트가 이야기하는 ‘윤리’ 라는 것인데, 바로 그 윤리를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결합시켜서 신칸트주의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구원을 받은 자들이, 다른 말로 하자면, 세례를 받은 자들이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프로이트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서, 바로 그런 하나님일 때만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서 약간 완화가 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해서, 그래서 인간은 그런 식으로 종교를 만들어서 믿는다고, 프로이트가 그 당시 기독교를 보았다는 것이다.

◈ 칼바르트 -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을 !!

그렇다고 하면, 이러한 공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즉 어떻게 자유로울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칼바르트가 이야기했는데, 즉 아예 처음부터 끊어버리자는 것이다. 그 출발점을 인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해서, 그 예수님이 주시는 것으로 우리가 받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받으면 된다고 하면, 그것이 어떤 점이 좋은고 하니까, 그 동안 자기 좋아라고 예수님을 믿던 그것이, 전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 모두 들통이 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를 위해서 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갔던 그 모든 것이 다 교만이 되고 거짓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을 칼바르트가 지적했다는 말이다. (녹취자 -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그 당시 독일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아니지요?)

그것이 바로 칼바르트의 ‘말씀의 신학’ 인데, 그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지키면 된다고 했는데, 하지만 그렇게 인간이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모든 보상이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점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지킬 수도 없지만 말이다.

◈ 칼바르트 -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을, 말씀이 새로 만들어낸다 !!

그러나 칼바르트는 그것이 아니라, 즉 말씀을 인간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을 말씀이 새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에게 아까 말한 그런 공포가 아예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신앙이 된다는 말이다. 즉 칼바르트가 그런 주장을 함으로서, “공포를 커버하기 위한 하나님 믿기” 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는 문제점이 없는지, 일단 교재 39페이지를 보자.

** 결국 인간의 몸은 흙이 되어 땅으로 돌아가고, 인간의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전에 기억하라

◈ 결국, 인간의 몸은 흙이 되어 !!

여기에 보면 “인간의 몸은 흙이 된다” 라고 했는데, 방금 한 이야기를 조금만 더하면, 아무튼 그 당시 교회가 프로이트에 의해서 궁지에 몰리게 되었는데, 즉 지금까지 교회가 마구 헛된 짓을 했다는 것이 프로이트에 의해서 발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바르트가 나서서 그런 식으로 커버를(?)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당시 칼바르트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고 수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프로이트가 주장한 ‘무의식’을 그대로 끝까지 밀어 부쳐서 인간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이론이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현상학(現象學)’ 이라는 것이다.

◈ 신체 현상학 - 무의식은 신체에서 !!

물론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때부터는 소위 ‘신체 현상학’ 이라고 해서, ‘메를로 퐁티’ 라는 사람이 주장한 것인데, 의식이나 무의식이라는 구분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말이다. 물론 프로이트는 “의식은 무의식에서 나왔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무의식은 어디서 나왔는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신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여기 교재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우리 인간의 신체는 점차 흙으로 분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분해가 되면 결국 죽음만이 남게 되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 몸이 죽는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을 ‘선취(先取)’ 라고 표현을 하는데,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이다.

◈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이 되면, 그것이 곧 ‘자유’ !!

그렇게 우리 신체가 죽는다고 하는 것을 미리 알아서, 그러한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그런 죽음의 공포에 대해서 벌벌 떨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죽음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버리면, 인간에게 있어서 그렇게 이미 안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다룰 수 있는 범위에 속한다는 말이다. 즉 인간의 손으로 다룰 수 있는 범주 내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이전까지는 죽음을 인간의 범주 바깥에 두었는데, 그런데 그것을 범주 안으로 집어 넣어버리면, 구태여 죽음이 무서워서 교회에 갈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그 죽음 앞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하이데거나 사르트르가 그것을 연구해서 내린 결론이, 그러한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성경말씀에 나오는 데로(?), 그것이 바로 ‘자유’ 라는 것이다. 즉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자유를 느낀다는 말이다.

◈ 드디어 서양철학은 동양철학과 조우를 !!

여기서 드디어 서양철학은 동양철학과 연결점을 찾게 되는데, 불교에서는 부처를 믿으라고 하면서도, 그 부처를 길에서 만나면 죽여버리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이 곧 부처이기에 말이다. 즉 자기가 부처가 되는데 방해가 되면, 그것이 부처라고 해도 제거를 하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길에서 죽음을 만나면 아예 죽어주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더 이상 자기를 두렵게 할 죽음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요즘도 인도에 가면 자칭 도사들이 엄청 많은데, 티벳의 승려들도 그렇고 말이다. 지금도 출입이 전혀 금지된 수도원에서 도를 닦고는 있는 천주교 신부들도 있고 말이다. 그런 공동체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그렇게 완벽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천주교 공동체의 경우에는 완벽한 거룩의 삶들을 추구하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쿰란 공동체가 또한 그러했고 말이다. 그렇게 완벽한 거룩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즉 소위 도인 수준이 되면 죽음과 같은 것은 그야말로 콧방귀를 뀐다는 것이다.

◈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

이러한 동양철학과 결합해서 완벽한 삶을 추구한 경우가 이번 십자가 마을에서 언급한 이호식과 같은 부류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미 우리 십자가 마을과는 10여년 전에 한번 만나서 강의도 듣고 했는데 말이다. 제가 그 양반을 너무 과대평가를 했나요?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성화의 단계를 부르짖으며 개척교회를 해서 성공하려고 한 놈들이 그야말로 한 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성화의 단계를 줄줄이 나열을 하면서, 즉 “이 세상은 썩었으니 우리교회에 나오시면 신비의 경지까지도 도달할 수 있는데, 제가 그것을 인도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지도자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선교단체에도 이런 유사한 것들이 많고 말이다.

◈ 깨달음인가? 예수님의 공로인가?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놀랍게도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깨달음’ 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과연 이러한 깨달음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공로인가?” 라는 것인데, 아마 칼바르트도 이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지 싶은데, 아직 제가 확인은 못했는데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공로이지 결코 우리의 깨달음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호식과 같은 부류들이 한방에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너무나 목회가 제대로 잘 되지 않으니, 이렇게 나가는 인간들이 엄청 많은데, 즉 성화의 레벨을 정해서 말이다. 점점 더 가면 갈수록 복잡한 단계를 만들고 해서 말이다.

◈ 결론은, ‘돈 내놔라’ !!

그렇게 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목표점을 주는데, 왜냐하면 계속해서 자기 교회에 붙들 수 있는 어떤 추진력을 남기려고 말이다. 물론 그들을 사랑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기어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다 빼먹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술을 교회마다 지금도 열심히 열심히 부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요즘 교회는 ‘깨달음’ 인데, 물론 영지주의 이단이라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 “우리는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을 믿습니다” 라고 붙이는데, 하지만 그런 말을 하나마나한 소리하는 것이다. 어차피 노림수는 따로 있는데, 무슨 소리인들 하지 못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장사가 되지 않으니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순복음 교회가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도 같은데, 즉 자기들은 결코 이단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조용기는 칼빈주의도 인정한다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삼박자 구원인지 축복인지를 이야기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모든 것이 다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장난에 말이다.

* 질문 - 제자훈련도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물론 그럴 수가 있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은 결코 제자들을 훈련시킨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제자는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인데, 그런데 네비케이토에서는 이것을 정반대로 이야기하는데, 즉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된다” 라고 말이다. 과거에 그들이 만든 책자들을 보면, 다 그렇게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요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훈련’ 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아 !!

사실상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 ‘훈련’ 이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까지도 지어야 하니 말이다. 그들은 그러한 임무를 맡은 자들이기에, 심지어 어떤 제자는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아먹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니, 스승을 팔아먹고 배반하는데 굳이 무슨 훈련까지 필요하냐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스스로 후회하게 만드는데, 즉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슬프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욥의 경우처럼 말이다. 즉 “주여, 왜 나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했습니까? 차리리 태어나지 말도록 하시지요”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자기 존재에 대해서 완전히 망했다고 여기는데, 그것을 두고서 제가 ‘잃어버린 양’ 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말이다.

◈ 깨달음이 아닌, 전적인 예수님의 공로 !!

아무튼 중요한 것은, 깨달음은 아니고 전적으로 예수님의 공로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렇게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면, 이런 깨달음은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주장한 것인데, 그렇다면  그들이 이야기하는 깨달음의 경지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인간이 흙이 된다는 것인데, 물론 하이데거나 샤르트르는 인간이 죽음 앞에 설 때에 비로소 인간의 실존이 드러난다고 했고 말이다. 키에르케고르도 역시 그렇고, 또한 라캉이나 지젤도 그러한데, 그럴 때는 정말로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고 있기는 한지 그야말로 혼돈스럽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 - 인간은 십자가 앞에 서야만 !!

하지만 칼바르트는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가 누구인지 안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인간은 십자가 앞에 서야만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가 있다고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십자가 앞에 세우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서게 된 것이 과연 율법의 행함인지, 아니라면 성령의 능력인지, 그것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그렇게 십자가에 의해서 떠밀려서 올 수밖에 없는 사람이 곧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끌고 오셨다는 것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 ‘죄’가 어떻게 우리 몸을 흙이 되게 하는가?

그런 증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간은 흙이 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렇게 흙이 된다는 것을 로마서의 경우에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렇게 미리 알아차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은 그만 여기에다가 ‘죄’를 집어넣는데, 여기서 또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왜 어려운고 하니까, 죄가 어떻게 우리 몸을 흙이 되도록 하는지, 그 매카니즘, 즉 논리적인 고리를 찾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말로서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 성경말씀에 보면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믿으세요. 알았지요?” 라고 하면 안 되고, 물론 말은 맞지만 그렇게 해서 도대체 무엇을 알았느냐는 것이다. 즉 어떻게 죄가 우리 자신을 흙이 되도록 하는지를 제대로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여러분,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이 옵니다. 그렇지요?” 라고 하는 것은 쉬운데, 하지만 어떻게 죄를 지으면 우리 인간이 모든 박테리아의 먹이감이 되고, 허물허물 해체가 되어서 결국은 흙이 되고 마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말이다.

◈ 그것은 바로, 인간을 흙으로 되돌리는 ‘능력’ 때문에 !!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을 흙으로 되돌리는 힘이, 즉 능력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러한데, 바로 그러한 능력이 홍해를 갈랐고 여리고 성을 무너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는 그 능력이 ‘언약’에서 나온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 언약이 이 세상의 어느 한 부분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 세상이 통채로 언약이 작용하는 범위 내에 포함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 전체가 다 말이다.

◈ 노아홍수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창세기 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홍수를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나서 무지개를 주셨는데,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무지개 언약인데, 어찌 되었던 간에 물을 가지고서 다시 이 세상을 심판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느냐는 말이다. 

◈ 이제 땅에서는 피를 흘리지 마라 !!

물론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악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그 희생제물을 보고 그렇게 하시겠다고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즉 “이 땅에서는 다시 피를 흘리지 말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그냥 지나가면 안 되고, 도대체 이 땅에서 피를 흘리는 것과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 연관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목사라고 하면, 그것을 교인들에게 설명해주어야 하는 임무가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땅에서 피를 흘리는 것과 물로서 심판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말이다.

◈ 아하, 예수님을 죽이는 세상 !!

여기서 말하는 피 흘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형상에 피를 낸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그 형상이 누구인가? 예수님인데, 그러니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는 세상이라고 하면, 그런 세상이라면 예수님에 의해서 반드시 망한다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창 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창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
(창 9:5)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창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아무튼 지금 제가 모든 것을 다 생략하고 아주 간단하게 축약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제대로 설명을 다하려고 하면 너무 복잡하고, 또 성경을 모두 끄집어내어서 일일이 다 언급해야 하니 말이다. 그것은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하기로 하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아벨의 피부터 우리 자신들의 피까지 누가 감당을 해야하는고 하니까, 이 땅이 감당을 해야하는데, 그것도 저주스럽게 감당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땅에는 누구도 들어있는고 하니, 인간도 역시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 아니, 인간 속에 악마가 !!

그렇게 해서 더 나가보면, 물론 “인간이 땅에서 피를 흘리지 않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반문할지 몰라도, 그러나 나중에 신약성경에 보면, 우리 인간도 미처 몰랐던 것인데, 즉 우리 인간 속에는 우리 인간을 지배하고 있던 악한 신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 칼바르트과 이근호 신학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칼바르트와 저의 신학이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칼바르트는 주장하기를, 그런 악마는 이미 하나님께서 다 정복을 하셨다고 말이다. 반면에 저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데, 물론 악마는 예수님께서 다 정복하신 것은 맞지만, 그러나 그 속성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속성인고 하니, 진노를 받아야 될 속성은 남아있다는 말이다.

◈ 칼바르트는, 하나님의 진노마저도 하늘로 !!

그런데 칼바르트는 그만 이 하나님의 진노마저도 모두 날려보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과 진노가 있어야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천국이 왜 존재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고, 물론 지옥도 역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두 개가 합쳐져서 한 쪽이 소멸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칼바르트는 ‘만인구원설’을 주장했다는 소리를 듣는데, 즉 “모든 사람은,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라고 말이다. 물론 본인은 오해라고 했다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이렇게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그만 없애놓고는, 다른 곳에서 양과 염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그의 ‘교회 교의학’ 이라는 책이 그렇게 내부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인간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구원을 받는다고 해놓고는, 그런데 다른 쪽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또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 이근호 -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

그건 그렇고, 아무튼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어떠한고 하니, 지금 칼바르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받은 계시가 중요하니 말이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이렇게 인간이 흙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물론 그것이 지금까지 제가 주장한 논리에 의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제가 지금까지 한 주장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하나의 그릇인데, 무슨 그릇인고 하니, 즉 “하나님의 진노를 담을 그릇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그릇인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그릇으로 사용을 하셨다는 말이다.

◈ 언약에서 힘이 나와서, 머무름이 없는 세상을 !!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머무름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 그 내부를 파헤쳐 보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어떤 힘이 작용하기 때문인데, 그 힘은 바로 언약에서 나오더라는 것이다. 즉 언약에서 힘이 나와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 증거가 바로 그 언약 때문에 홍수가 일어나고, 그 언약 때문에 홍해가 갈라지고, 그 언약 때문에 바다가 잠잠해질 수밖에 없고, 그 언약 때문에 베드로의 장모의 병이 나았다고 하면, 바로 그 언약의 마무리가 무엇인고 하니, 곧 ‘피’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피에서 무엇이 나온다는 말인가? 히브리서 9장에 보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바로 이 피에서 죄를 용서해주는 능력이 나오는데, 그것이 곧 언약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언약의 능력이란 말이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니 사랑을 이야기해도 이 피를 근거를 해서 이야기를 해야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경우에도 나쁜 짓을 했다고 진노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 피를, 즉 언약의 능력을 부인했기 때문에, 그래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부인하는 능력조차도 어디에서 나오는고 하니, 진노 자체에서 나오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도 주님의 능력으로 ??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 미워하기로 작정된 그 능력에서 힘이 나와서 예수님의 피를 믿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의 능력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표현이 좀 이상한가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즉 주님의 능력을 받아야만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왔으면 교회 이야기만 하면 되지, 복음을 왜 이야기해야 하는가?” 라고 반발을 한다고 하면, 다른 교회는 다들 그렇게 교회를 이야기하고, 또한 교회에서 마카리나와 섹소폰 연주법을 가르쳐준다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회비가 4만원이라서 좀 그렇지만 말이다(ㅋㅋ).

아무튼 그렇게 하니 사람들이 오더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또 십자가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전혀 마음의 상처가 되지 않고, 너무나도 긍정적이더라는 말이다. 즉 인간의 모든 행함과 선함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해주고, 하면 된다고 하는 교회, 그러한 교회는 부흥이 되지 않으려고 해도 도저히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아니라, 그야말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어부라는 것이다. 굳이 낚고 말고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있는 사람을 쓸어 넣으면 된다는 것이다. 쌍끌이로 그냥 마구 끌어 담으면 되는데, 무슨 낚싯대를 드리우고 말고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싫어하는가?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싫어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본인의 능력으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망하는 자나 구원을 받은 자나 모두가 다 복음을 전해야만, 이런 분리작업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이렇게 인간이 감히 하나님에게 겁도 없이 덤벼들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도록 했다면, 그렇다고 하면 인간 나름대로의 뭔가가 있어야만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께 그럴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교재 39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 잡초는 인간보다 정직하다. 잡초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속이는 법이 없다. 지혜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혜를 알지 못하면 늘 하나님께 화를 내게 된다.

(약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여기 야고보서 1장 20절 말씀에 보면,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이렇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하는 것이 성을 내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 신약시대에는 복음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 라는 것이다.

◈ 우리는 복음을 듣는 순간에 화가 나는데 !!

그러면 이 복음이 왔다고 하는 순간에는 우리는 어떠한가? 그것을 최일규 집사님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 복음을 듣는 순간에 “우리는 화가 난다” 라는 것이다. 즉 성질이 난다는 말이다. 도대체 이 복음이 무엇이기에, 아무리 인간을 무시해도 그런 무시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복음이 말이다.

어제 낮에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그때 길에서 노숙하는 자들이 청함을 받아서 잔치에 들어갔는데, 그런데 그만 청함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은 그만 쫓겨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노숙자는 처음부터 임금에게 완전히 농락을 당했는데, 자기는 그냥 놀고 있는데, 오라고 해서 갔는데,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다고 쫓아내어 버렸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 한 나이가 든 여성이 죽은 시체로 발견이 되었는데, 그만 사위에게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즉 사위가 장모를 죽인 끔찍한 살인사건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장모가 사위를 무시했다고 것이다. 아마 처형도 같이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 같은데, 아무튼 이렇게 인간은 자기가 무시를 당했다고 여기면, 상대방을 그만 잔인하게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그 누구이든지 간에 전혀 가리지를 않고 말이다. 자기 부모라고 해도 말이다. 

◈ 사도바울은 왜 고난을 받았는가?

그런데 이것을 누가 알고 있는가? 100% 예수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아시는데, 그러니 인간을 무시하는 식으로 복음이 증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자기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가짜 사도라는 소리를 들어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소리를 전혀 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오히려 너희들이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을 전한다. 사단의 일군들이 양의 탈을 쓰고 가만히 들어와서 너희들을 훌쳐서(?) 지배하고 빼먹는데, 하지만 나는 진짜 사도이다. 그 이유는 내가 지금 주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 자신은 지금 그만큼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고난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전하면, 누가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겠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환영을 하지 말이다. 하지만 자기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전하기에 핍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 왜 사람이 성을 내는가?

다시 교재로 와서, 왜 사람이 성을 내는가? 그것은 자기가 독자적인 노선, 혹은 영역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즉 자기만의 사적인 영역을 말이다. 즉 “이것은 내가 한 평생동안 애쓰고 노력해서 얻은, 나만의 영역이다” 라고 하는 울타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울타리를 건드린다면, 그것이 예수든 하나님이든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 말한 그 사위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은 “이 울타리를 건드리면 저는 ‘확’ 돌아버립니다” 라고 팻말을 아예 세워놓았다는 것이다. 즉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안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것이 우리 인간에는 누구든지 다 형성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에게 다 말이다.

◈ 예수님 - 주체를 부인하라 !!  망하고 나를 따르라 !!

그것을 두고 철학에서는 ‘주체’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인간은 모두가 다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그 주체를 부인하라고 하셨는데, 그리고 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오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말이다.

쉽게 말해서 “망하고 나를 따르라” 라는 소리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주체를 만드는 작업 자체가 전혀 하나님의 의를 이울 수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나는 이제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라고 해서, 그렇게 사도바울은 자기 주체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을 두고 ‘자아분열’ 이라고 하는데, 즉 자아와 자아가 분열이 되면서, 그 중간에 무엇이 서 있는고 하니, 십자가가 떡 하니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그냥 서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십자가는 새언약이기 때문에, 이 새언약에서 조금 전에 무엇이 나온다고 했는데, 즉 능력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바로 이 십자가의 능력 때문에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능력이 나오니 굳이 우리가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 ‘도(道)’를 아십니까?

지난 토요일에 설교를 하는데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모르는데, 즉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라고 성경말씀을 이야기하니 당장에 무슨 질문을 하는고 하니, “어떻게 전도를 미련하게 합니까?” 라고 말이다. 그래서 제가 “그것은 전도를 미련하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 전도의 ‘도’가 미련한 것이니, 그런 미련한 내용을 가지고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라고 답변을 하니, 그 쪽에서 “아, 어렵도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ㅋㅋ).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다시 말해서, 전도(傳道)라고 하는 것은, 새벽에 남들이 자는데 예수를 믿으라고 고함을 자르지 말고, 그것은 ‘도(道)’가 어리석은 아니라, ‘전(傳)’이 어리석은 것인데,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도를 제대로 전하라는 의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미련하게 도를 전하면 전도가 되는 줄로 알고 있는데, 막무가내로, 무대포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상대방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매달린다든지 하는 행동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 십자가의 도는, 잃어버린 양을 겨냥하기에 !!

그렇다면 왜 ‘어리석은 도’ 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양만을 겨냥해서, 오직 그들만이 알아듣는 ‘도’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즉 “저는 망했습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바로 그것을 알아듣고, 또한 그것을 기다리고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망했을 때만 복음이 보이니 말이다. 자기가 완전히 망했다고 여길 때 말이다.

자기가 집이 몇 채가 있고, 강남에 빌딩이 있고, 또 땅이 얼마나 되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부동산이 아무리 많고 적고 간에,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가 그야말로 망했음을 느낄 때, 바로 그때 복음이 보이고 깨달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화를 내고 성을 낸다는 것은, 독자적인 자기만의 노선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 전적으로 망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내려놓기 ??

혹시 알지 모르겠는데, 한 때 유행하던 책이 있었는데, ‘내려놓기’ 라고 말이다. 그 책을 보면서 얼마나 한심스러웠는지, 물론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였고 말이다. 다음에는 ‘더 내려놓기’ 라고 책을 쓰면 되지 싶은데 말이다. 그 다음에는 ‘더 더 내려놓기’ 라고 하고 말이다(ㅋㅋ).

◈ 기독교는 이러 이러해야 한다 ??

그 책의 내용을 보니 몽골의 선교사 이야기도 나오고 하는데, 그런 것을 통해서 나름대로는 자기의 논리를 펴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을 쓴 양반이 그 책에서 계속해서 유지하는 일정한 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이 아니라, “기독교는 이러 이러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논리인고 하니까, 현재 ‘A’ 라는 지점에 있는 기독교가, 장차 자기가 생각하는 ‘B’ 라는 지점으로 환골탈퇴를, 즉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미래의 이상적인 기독교가 있다고 한다는 것은, 현재 기독교에 대해서 전혀 만족하지를 않는다는 의미인데, 그러니 정작 본인은 미래의 있지도 않는 기독교를 믿는 것이지, 현재 있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 항상 ‘미흡함’이 있지만, 그러나 !!

그것이 바로 ‘미흡함’ 이라는 것인데, 더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그것이 몰트만의 신학인데, 그래서 그의 신학을 희망의 신학, 혹은 소망의 신학이라고 하는데, 또한 개혁주의자들에 의하면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논리이고 말이다. 그러니 항상 미흡함이 있는데, 여기까지가 전부라는 것이 없고, 갈 때까지 한번 가보자는 식인데, 즉 어느 지점까지 가면, 또 더 나아가야 하고 말이다. 그러니 바로 그러한 틀이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은, 이 복음 자체에서 십자가의 능력이 나오는데, 그 능력이 나오면 그런 능력이 자기가 보기에는 미흡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러나 그 자체가 미흡하기 때문에 그 안에 주님의 용서와 자비가 담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많이 용서를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러니 오히려 미래보다 과거에서 배울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 그러니 결국, 성을 내는 인간 !!

과거에는 교인이 5명만 있어도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고 열심히 설교를 준비하고 했는데, 그러나 이제는 어지간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즉 교인이 100명에서 50명이 되면, 설교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를 때려치우고 식당이나 뭐 다른 것을 하고 하려고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에 교인이 5명이 있을 때 감사했던 그 마음은, 그것은 도대체 뭐냐는 말이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해서 인간은 성을 낸다는 것이다.

지금도 부부의 10%가 임신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러니 생각보다도 자식을 낳지 못해서 애를 때우는 부부가 많다는 말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처음 아기를 낳을 때, 그때가 믿음이 훨씬 더 좋았다는 것이다. 아이가 세 명이나 있는데, 하나가 아프다고 찔찔 짤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동안 지켜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우냐는 것이다.

이제 교재 40페이지를 살펴보자.

** (2) 나의 자리 - 인간이 외부를 향해서 아무리 질문을 날려보아도, 궁극적인 질문은 오직 자신에 관한 것으로 되돌아오게 되어있다.

제가 이 ‘나의 자리’ 라는 글을 쓰면서 인간들의 기존 학문에 대해서 더욱 더 알게 되었는데, 왜 성경구절로 가득해야 하는 이 신앙적인 책에, 세상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느냐고, 그러한 반발이 들어올 것이 뻔하다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시동을 걸었는데, 어떻게 걸었는지 한번 알아보자는 것이다.

◈ 독자적인 ‘나의 자리’ !!

여기서 말하는 ‘나의 자리’는 독자적인 ‘나의 자리’를 뜻하는데, 즉 “인간이 외부를 향해서 아무리 질문을 날려보아도, 궁극적인 질문은 오직 자신에 관한 것으로 되돌아오게 되어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뒤에다가 말을 붙이면, 이것을 ‘피히테’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절대자’ 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 ‘절대자’ 라고 쓸 수는 없었는데, 철학적 용어를 가급적 피해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빼더라도, 과연 이 문장이 맞는 문장인지 틀린 문장인지 본인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지금 이 문장이 나쁜지 좋은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자체가 맞는지 틀리는지를 한번 살펴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제가 이 문장이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오늘 아침에 여러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개인적으로 모르는데, 그런데 제가 “대식씨, 아침을 묵었어요?” 라고 해서, 대식씨에게 좋은 일이 있었으면 “목사님도 식사를 했습니까?” 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면 “그것은 알아서 뭘 하게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마음속으로지만 말이다(ㅋㅋ).

◈ 대식씨의 복수혈전 ??

* 이근호 : 대식씨, 아침을 묵었어요?
* 김대식 : 그것은 알아서 뭘 하게요?
* 이근호 :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렇지.
* 김대식 : 당신이 언제 아침을 사준 적이 있어요?
* 이근호 : 내가 그런 뜻으로 물은 것이 아니고?
* 김대식 : 당신은 당신 뜻밖에 모르잖아요?
* 이근호 : 그거야 그렇지만.
* 김대식 : 제 말이 어디 틀렸습니까?
* 이근호 : ? ? ?
* 김대식 : 틀렸으면 틀렸다고 이야기를 해봐요?
* 이근호 : ? ? ?

◈ 이근호 전도사는 너무 주관적이야 ??

제가 총신 2학년 설교학 시간에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일종의 시험인데 말이다. 그런데 마치고 내려오는데 지금 대구의 어느 교회 당회장으로 있는 목사인데, 그 양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근호 전도사는 너무 주관적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198#년인데, 그런데 그 이후에도 제가 계속해서 그런 소리를 듣는데,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바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그러면 전도사님은 주관적이 아닌가요? 도대체 그런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라고 다그쳤다는 것이다. 물론 그 양반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머쓱해 했지만 말이다.

◈ 하나님이 허락하신 ‘주관’ !!

사실 모든 인간은 다 주관적인데, 왜 그런고 하니, 그 ‘주관’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주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얼마나 교만한지, 남들은 다 주관적이고 자기만은 객관적이라고 우기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심지어 객관성을 생명으로 한다는 과학이란 학문에서, 과학자도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꺼번에 고등어를 만 마리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발명했다” 라고 폴리네시아에 있는 원주민에게 이야기를 했다고 하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 거물을 왜 만들었지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침에 세 마리를 잡고 점심 때 또 세 마리를 잡으면 되는데, 왜 그런 짓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만 마리나 잡아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느냐는 말이다.

강원도에 사는 할머니에게 고디를 한꺼번에 많이 잡을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주었다면, 그 할머니가 좋아하겠는가? 자기는 그냥 필요한 만큼만 잡아서 끓여먹으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할머니에게 “할머니, 한꺼번에 많이 잡아야 TV를 살 수 있습니다” 라고 하니, 그 할머니가 말하기를 “나는 TV를 안 본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등어를 만 마리를 잡든, 고디를 많이 잡든지 해서, 삼성의 최고급 LED TV를 산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주관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그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가지고서 소위 ‘과학’ 이라고 해서, 객관적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 철학자들 - 과학이 인간을 망쳐놓았다 ??

그래서 하이데거를 비롯한 모든 철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과학이라는 것이 인간성을 다 버려놓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과학이 점점 발달하면서 철학자들이 갈 곳이 없는데, 대학교에서도 철학과는 찬밥 신세가 된지 오래이고 말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화가 나서 하는 말이, “아니, 어떻게 해서 인간들의 손재주가 진리 노릇을 하는 더러운 세상이 되었는가?" 라고, 한탄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된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전쟁’ 이라는 말이다. 그 모든 것이 전쟁 때문에 말이다.

◈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모든 진리를 독차지 !!

이 전쟁에서 이기려고 하면 반드시 과학을 발달시켜야만 하는데, 물론 전쟁을 해야만 남의 것을 가질 수가 있는데, 그것도 몽땅 다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전쟁의 승리가 남의 것을 다 가길 수 있다고 하는 악한 생각을 정당화시켜주고, 그것이 곧 진리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나온 자칭 아이큐가 500이라는 미친 인간이 하나 있는데, ‘허경영’ 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하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러나 그가 만약에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면, 지금 그가 하는 모든 이야기들이 다 진리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지금은 4대강 개발이 하나의 진리이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이 ‘진리’ 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승리자의 몫인데, 즉 승리자가 그렇게 법으로 정해버리면 그것이 곧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역시 그러한데, 사실상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흔히들 가정에서 남성이 우월하고 어떻고 하는데, 하지만 여자가 경제권을 쥐게 되면 완전히 뒤바뀐다는 것이다. 남자보다 여자가 많이 벌면, 남자는 여자 앞에서 그야말로 고양이 앞에 쥐라는 말이다. 그래서 집에 있는 여자는, 비록 자기가 벌지는 못하더라도 가계부를 잘 써서 경제권을 빨리 쥐려고 한다는 것이다. 

◈ 우상숭배 - 힘을 자기 자리에 모으기 위해서 !!

이제 조그만 더 하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자리’ 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힘’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면 인간들이 우상숭배를 왜 하는고 하니, 그 힘을 자기 자리에 모으기 위해서, 그래서 우상을 섬긴다는 것이다.

특히 바알의 아내인 아세라의 힘은 아들을 낳은 것인데, 즉 대를 잇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결국 힘을 섬긴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바벨탑의 속성이고, 그것이 그대로 전달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이름을 하늘에까지 높이자” 라고 말이다.

도대체 그 어떤 신의 이름을 부르면 힘이 나오느냐는 것인데, 그래서 간증집회를 하는데, 즉 “여러분, 저는 이렇게 이렇게 했더니만 힘이 생겼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힘이 부럽지요? 그러니 여러분도 저와 같이 이렇게 기도하면 동일한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이 세상은 힘의 세계인데, 왜냐하면 힘이 있는 자가 곧 진리가 되니 말이다.
 
◈ 힘, 힘, 힘 !!

물론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힘이 되는데, 그렇게 돈이 곧 힘인데, 하지만 자본주의 시대이든 그 어느 시대이든 간에 진리가 곧 힘이고, 바로 그 힘이 있는 곳이 자기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자기 자리를 만들려고 하면 반드시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저기 팔공산에 올라가서 텐트를 하나 치더라도 힘이 있는 자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데, 힘이 없으면 쫓겨난다는 것이다. 즉 힘있는 놈이 와서 “여기는 내 자리인데, 그만 나가소” 라고 하면, “예, 알았어요” 라고 하면서 슬그머니 물러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악마의 힘도 무시할 수 없어 !!

그렇다면 그 힘을 누가 주겠는가? 예수님이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을 때 보면, 이 세상 힘은 어디서 나왔음을 알 수 있는가? 뱀의 후손, 즉 악마가 힘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메시야의 기적을 일으키는 힘, 돌이 떡 되게 하는 힘,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는 힘, 그런 힘은 악마에게 잘 보이면, 악마는 서슴없이 지금도 우리의 다정한 친구로서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 그런데 언약이 개입하면, 악마의 힘은?

그런데 이러한 세상적인 힘이 밀릴 때가 있었는데, 그것이 언제인고 하니, 구약에서 무엇이 개입할 때 밀렸는가? 그것은 바로 언약이 개입했을 때, 즉 모세가 지팡이를 드니 지상에 있는 힘의 축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 지팡이가 바로 나중에 모세언약을 보여주는데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언약에서 나온 힘이 생명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의 현재 사람들이 원하는 힘이 생명인가?” 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언약이 없는 우상과 언약이 있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즉 신과 신의 대결이 벌어지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우상을 두고서 힘이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힘이 있기는 있는데, 바로 그것은 저주로 이끌고 인도하는 힘이란 것이다. 즉 저주케 하는 힘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칼바르트의 주장은 맞는데, 즉 아무리 악마의 힘이 세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온 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이 대목에서 그를 비판하는 것은, 거기서 왜 ‘저주’ 라는 말을 빼먹느냐는 것이다.

◈ 악마의 힘은 실효성이 없어 ??

다시 말해서, 칼바르트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악마가 아무리 힘이 세어도, 그것은 실효성이 없는 힘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저는 악마의 힘이 실효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지옥에 갈 사람들이 채워지니 말이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지옥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칼바르트는 그것을 아주 어렵고도 애매하게 표현했는데, 즉 “현실성 있는 무현실성”, 혹은 “현실성이 있는 실재하지 않는 힘” 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용어 하나하나가 매우 함축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악마의 힘도 힘이니, 힘이 아니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인간이 매료되고 굴복이 되니 말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이라는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 악마도 힘이 있기에 십자가 사건이 !!

그러니 분명히 마귀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마귀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는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바로 그 악마의 힘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발휘가 되었는데, 즉 악마도 힘이 있어야 십자가 사건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힘을 빌어서, 예수님을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또한 주님도 그렇게 되기를 원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시켰으니 말이다. 즉 그것이 예수님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이다.

◈ 악마의 한계는, 여기 ‘죽음’ 까지만 !!

하지만 악마는 그렇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 말미암아서, 그만 자신의 한계를 모두 드러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악마가 내뿜는 힘의 한계가 죽음까지임을 발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악마는 죽음 그 이후에는 전혀 손을 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악마의 한계는 바로 ‘죽음까지만’ 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음 이후에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죽음에까지만 자기 힘이 미치는 악마를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즉 사랑할 자는 사랑하게 하고, 또한 미워할 자는 미워하게 하는, 즉 이제는 악마를 그런 용도로서 역할을 맡겨서, 예수님이 마음껏 부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십자가와 부활의 위력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죽음 이전에는?)

◈ 이제 정죄함이 없는 새로운 피조물이 !!

그렇다면 이제 악마가 말하기를,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만 하지 않는가?” 라고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부활하신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래서 내가 부활을 했고, 죄를 용서했다. 그러니 누가 더 이상 정죄를 하겠는가?”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어서, 놀랍게도 정죄함이 없는 새로운 피조물이 등장했는데, 누구 때문에 말인가? 예수님의 부활의 영으로 인해서 말이다. 그 어떤 짓을 해도 정죄함이 없는 새로운 피조물이 말이다.

그렇게 되니, 이 정죄함이 없는 새로운 피조물에게 그야말로 벌 때같이 와락 달려드는 놈들이 있는데, 아직 정죄함을 받고 있는 피조물들이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즉 용서함을 받지 못한 모든 벌 때들이, 그것을 저는 ‘땡벌’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그들은 여왕벌이 아니라, 악마벌이 시켜서 마구 달려든다는 것이다. 여왕벌이 곧 악마벌인가?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더 이상 죄와 용서를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가 교회에 온 것은 쉼을 얻으려 왔는데, 그런데 왜 이근호 목사는 매일같이 죄만 이야기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근호 목사가 용서를 이야기하지 않던가요?” 라고 하면, 그것은 다른 교회에서도 다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교회에서 죄를 용서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무엇을 노리기 위함인가? 그것은 바로 그렇게 용서를 이야기함으로서, 이 세상적인 힘을 좀 얻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용서함을 받은 척을 하고, 죄를 짓지 않은 척을 한다는 것이다.

◈ 칼바르트의 신학이 머무는 곳은?

칼바르트 신학의 문제점이 바로 이런데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래서 이제 구원을 받았잖아. 해탈이 되었잖아” 라는 식으로, 그만 자기 구원에 종결되고 멈출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조금 더 공부를 해보아야 하는데, 그의 신학이 과연 어디서 멈추는지 그 지점을 말이다. 물론 대충 짐작이 가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제 조그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신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이며, 우주가 무엇이며, 내가 무엇이냐를 그 누구에게 물어봐도, 그 모든 질문은 “내가 여기 있다” 라는 사실만 되풀이해서 확인할 뿐이다.

◈ 십자가 마을은 참 좋지요 ??

그러니 “우주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은 사실 솔직하지 못한 질문인데, 그러면 어떻게 질문을 해야 하겠는가? 즉 “내가 여기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위해서, 이 우주는 어떤 해답을 나에게 제공할 수 있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아이가 참 예쁘지요?” 라는 질문도 그 뒤에 뭔가를 좀 붙여야 하는데, 즉 “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내 존재가 참으로 귀하다고 하는 측면에서, 우리 아이가 예쁘다는 것이 동의해주세요” 라고 말이다. 문장이 좀 길어서 이상한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또한 “우리교회가 참 좋지요?” 라고 하는 것도 역시 뒤에 뭔가가 붙어야 하는데, 즉 “그러니까 이근호 목사는 뒈지지 않고 오래 살아야만 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말이다. “십자가 마을은 참 좋지요?” 라고 하는 것도 역시, “그러니 십자가 마을에서 목사로 있는 것이 참 영광스럽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붙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 마을이 그림자이고 실체가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도 그냥 ‘픽’ 하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없다는 것이다.

◈ 복음을 전할 때만, 십자가 마을은 새롭게 만들어져 !!
 
그렇게 없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런 없는 가운데 매일같이 있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십자가 마을도 역시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 마을이 언제나 새롭게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마을은 당연히 예수님의 복음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누구에게라도 개방이 되어있는데, 즉 “저는 예수님을 이렇게 느꼈습니다” 라는 예수님에 과한 글들만 올라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글들이 올라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이 십자가 마을이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신을 빙자한 인간학이며 곧 자기학(自己學)이다. 이러한 자기학 속에 신을 포섭해서 집어넣는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을 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로서 구원받은 자다운 삶을 그 이후에 지속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올바른 교회를 이울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이렇게 묻는 물음 속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내가’ 라는 것이 들어있다. 자기학에 대한 우직스러운 신뢰심의 발로이다.

◈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여기에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인 유대인들이 한 말인데, 즉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기적을 베푸시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알 수 있는 노선과 방식대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알고 있는 수준에서, 그런 범위 내에서 솜씨를 부리면, 비로소 얼마든지 내가 믿을 수 있는데, 그런데 왜 그 기회를 자꾸만 당신은 피해서 가는가? 정말 나를 구원을 하려면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방식대로, 바로 그 노선으로 당신이 좀 오시오. 그렇게 해야 내가 쉽게 믿을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것이다.

◈ 데카르트 - 진리의 출발점은, 곧 ‘나’ !!

바로 그러한 것을 사람들이 요구하는데, 그래서 항상 ‘내가’ 라는 것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다른 것은 다 부정해도, 결코 ‘내가’ 라는 것은 결단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은 다 의심해도, 그것을 의심하고 것이 ‘내가’ 라는 것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모든 것을 다 의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의심하는 그 당사자는 남이 아닌 바로 ‘나’ 라는 사실, 그것만은 도저히 의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모든 진리의 출발점이라고 ‘데카르트’가 자신 있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는 다음 시간에 하기로 하고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뭐라고 해도 저희들은 그림자인데, 그 그림자가 도대체 무엇을 내세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그림자가 된 저희들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저희들을 그림자가 되게 하신 예수님뿐인 줄 압니다. 그러니 언제나 예수님만 증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9,26 오후 11시 30분에 마침.

                                            요즘 이 목사님은 칼바르트 열공 중, 계속 수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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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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