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9강 세상 구조 a

피/피 2009. 10. 25. 18:25

대구 강의 2009-09-07  피 9강 세상 구조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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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090907피p037세상구조

피 9강 세상 구조

[09 대구강의 14] - [피 9] - 세상구조(世上構造)
                                                                                
                                                           09,09,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우리 힘으로 이 세상 구조를 만들자 !!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3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세상 도안(圖案)] -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파악할 수가 없다. “가만히 있어 … 알지어다” 라는 방식 외에는 대안이 없다.

(시 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나는 도다

◈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오늘 교재의 소제목이 ‘세상 도안’ 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상 구조’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한, 바로 거기에 대한 구조인데, 물론 이 구조는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조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는 두 가지 구조가 있게 되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구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바라보니, 즉 인간이 만든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 구조가 말은 간단하지만,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구조를 알 수 있는가? 그러면 여기에도 역시 두 가지인데, 하나님의 구조를 알 수 있음과 알 수 없음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구조를 알 수 있다고, 즉 ‘예스’ 라고 하면 그것은 전혀 거짓말인데, 그러니 ‘노’ 라고 해야만 맞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해보면, 이 세상은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인데, 즉 하나님의 구조와 사람의 구조로서, 그렇게 두 종류가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서 하나님이 만든 구조를 모르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우기는고 하니, 두 번째의 구조로 흘러가는데, 즉 “우리가 세상 구조를 만든다” 라고 말이다. 즉 세상 구조를 인간들이 만든다고 하는 것이 대세를 이룬다는 것이다.

◈ 80년의 역사적 전통을 !!

예를 들어서, 여기에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의 역사를 80년이라고 주장을 했다고 하면, 그렇게 교회의 역사를 80년이라고 하면 이미 거기에는 역사가 개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는 어떠한고 하니, 반드시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구조로서 말이다.

여기서 인간들은, 바로 이런 구조를 위해서 나머지 모든 것을 다 제거를 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제거를 하는고 하니, 그 방법이 선악적으로 한다는 말이다. 즉 선과 악으로 제거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여기 있는 자기 교회에 유리한 쪽은 선이 되고, 불리한 쪽은 당연히 악이 된다는 것이다.

◈ ‘나’는 선이고, 그 나머지는 전부가 악 !!

굳이 교회를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인생을 살펴보면 되는데, 만약에 자기가 50년을 살았다고 하면, 그것을 자기가 구조화를 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를 두고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그것을 두 글자로 ‘추억’ 이라고 하는데, 즉 “나는 인생을 이렇게 살았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살아온 인생을 무엇을 가지고 설명하는가? 선과 악의 구조로서 설명을 하는데, 즉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선이고, 불리한 것은 악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인간들이 만든 구조는 어떻게 되겠는가? 곧 선악구조로 짜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인생을 살다가 그만 사기를 당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사기를 친 것은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에게 불리하니 말이다. 물론 자기가 사기를 당한  그 자체는 악이지만, 그렇게 악한 일을 당하게 되면 자기가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자기가 사기를 당한 것은 참 억울하지만, 그렇게 사기를 당한 것을 남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아이쿠, 불쌍해라” 라고 하면서 동정심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한 평생 동안 저지른 악은 다 사라져버리고, 졸지에 자기는 그만 피해자가 되고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짜여져 가는 구조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선과 악의 구조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인간들이 만든 이 세상 구조에서는, “나는 선이 되고, 나를 쏙 빼놓고는 전부가 다 악이 된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태복음 19장 16절에서 22절의 말씀을 한번 살펴보자.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 어느 부자청년의 경우에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인데(?), 여기에 어느 부자청년이 한 명 나오는데, 그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는가? 자기는 선하다고 했는데, 즉 자기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모두 다 지켰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곧 “저는 선합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전에 이것을 강의를 했었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더 해보자면, 여기에 이렇게 부자청년이 있는데, 그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보고 선한 분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그렇게 상대방을 보고 선하고 하는 것은, 즉 선한 것을 알아본다는 말은 무슨 뜻인고 하니, 자기도 역시 선하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청년의 그러한 사고방식을 깨기 위해서, 자기는 선하지 않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되니, 이 부자청년의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자기가 만든 구조를 가지고서 그만 예수님을 판단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분으로 보았다면, 그리고 자기가 계속해서 선한 자로서 남기를 원한다고 하면 선하신 예수님을 따라야만 하는데, 그 어떤 경우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니, 그 부자청년이 그만 근심하면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부자청년이 ‘돌아갔다’ 라는 의미는 바로, 자기가 계속해서 선으로 남기 위해서는 누구와 결별을 해야하는고 하니, 예수님과 결별을 해주어야만, 그래야 자기에게 유리하고, 또한 자기가 선하다고 하는 것이 표시가 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렇지 않고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라다녀 봐야, 재산을 모든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서, 즉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 악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친구를 잘못 만나면 악한 자가 되듯이 말이다. 그런데 좋은 친구에게 둘러 쌓이면 자기도 선한 자가 되고 말이다.

그러니 이 부자청년이 예수님과 결별을 하는 이유는, 자기가 생각했던 선악구조에서 자기를 계속해서 무엇으로 남기기 위함인고 하니까, 의인으로 남기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부자청년이 예수님과 붙어 다닌다고 하면, 예수님에게 매일같이 닥달을(?) 당한다는 말이다. “너는 재산을 언제 팔래?”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예 수 님 : 니, 재산을 언제 팔래?
* 부자청년 :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 예 수 님 : 지금까지 많이 기다렸는데.
* 부자청년 : 조그만 더 기다려주세요.
* 예 수 님 : 그래도? 언제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줄기고?
* 부자청년 : 정 그렇다면 일주일 안에 팔겠습니다.
* 예 수 님 : 빨리 해라. 알겠지?
* 부자청년 : 예, 송구합니다.

◈ 아, 예수님만이 홀로 의인이구나 !!

이 부자청년은 자기는 선하고 싶은데,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있어봐야 계속해서 악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만의 구조가 구축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매일같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니, 언제 죽을래? 언제 십자가를 질래” 라고 하면서, 그렇게 다그침을 당하니 말이다. 예수님과 붙어 다니면, 예수님은 도대체 자기가 의인이 될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예수님을 제대로 증거하게 되면, 자기가 의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나가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작전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주어야만 “너희들은 죄인이고, 예수님 홀로 의인이구나” 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예수님을 떠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자들이겠는가? “저는 주님 앞에서 항상 죄인이 맞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임을 인정하는 자들은 결코 예수님을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누군가가 떠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증거해야 한다는 말이다.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어떻다는 말인가? 누구의 피로 샀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피로 샀다고 한다는 것이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지금부터 조금 어려운데, 이렇게 세상구조가 있는데, 아까 인간의 구조는 무슨 구조라고 했는가? 선악구조라고 했는데, 바로 이 선악구조와 하나님의 유일한 만남을 바로 사도행전 20장에서는 교회라고 했고, 그 교회를 에베소서 1장에서는 만물의 중심이라고 했다는 말이다.

◈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매개체는, 오직 ‘피’ !!

그런데 바로 그런 관계에서 한 글자로 ‘피’가 나온다는 것이다. 즉 선악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접촉할 수 있는 매개체가 바로 ‘피’ 라는 말이다. 물론 살과 피라고 할 수도 있는데,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살을 찢으면 피가 나오니, 그러니 그것을 피를 얻기 위함인데, 그래서 합쳐서 피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새언약을 히브리서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곧 ‘피 언약’ 이라고 하는데, 제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에서 그렇게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언약의 피’ 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모든 것이 피로서 중심이 잡혀있다는 말이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 더 이상 제사가 필요 없어 !!

여기서 히브리서를 조금 더 살펴보면, 히브리서 10장 1절에 보면, 즉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제 피만 있다고 하면, 너희 죄를 용서할 제사가 필요하지 않다” 라는 것인데,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피’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제 피만 있다고 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해줄 어떤 것이, 즉 예배나 미사 등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 10: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히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 천주교의 성만찬의 경우에 !!

그런데 천주교는 그것도 모르고, 죄만 지으면 미사를 드리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돈을 바치라는 것인데, 즉 지은 죄는 반복해서 미사를 들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천주교는 그것을 성만찬에까지 연결시키는데, 왜 성만찬을 자주 해야만 하는고 하니, 일년에 한 두 번만 해서는 안 되고 여러 번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성만찬을 할 때마다 죄가 용서되니 말이다. 왜냐하면, 이 성만찬 자체가 죽은 예수를 불러내는 것인데, 마치 엔돌의 신접한 여인처럼 말이다. 신부들이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은 예수를 불러내는데 있어서, 그 매개체로서 떡이라는 물질과 포도주라는 물질을 사용하는데, 그렇게 하면 죽은 예수를 불러낸다고 본다는 것이다. 떡을 사용하면 흘린다고 해서 딱딱한 비스킷 비슷한 것을 사용하는데, 또 포도주는 흘린다고 자기들끼리 다 마시고 말이다. 

그것을 두고 소위 ‘화체설(化體設)’ 이라고 하는데,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이 된다고 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 여기에 말려든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닌데, 루터와 칼빈도 모두 넘어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만 쯔빙글리만 홀로 남았는데 말이다.
 
◈ 물질은 ‘의미 없음’을, 그러나 !!

아무튼 그들은 이러한 물질에 의미를 두려고 집착을 하는데, 정작 물질은 의미 없음을 이야기하려고 있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 없음’에 의미를 두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짜로 어려운 대목이라서 조금 있다가 강의를 하기로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을 꺼내어놓고서 그냥 넘어가 버리면 찜찜해서 안 되니, 조금만 하고 나서 계속해서 이 ‘피’ 이야기를, 즉 세상 돌아가는 그 내막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여기서 고린도전서 2장 4절을 찾아보겠는데, 1절부터 5절까지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고전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복음은, 말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

여기 4절에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은 말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성령의 능력이라고, 그러니 분명하게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말이 전달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문자, 혹은 언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말이라는 것은, 즉 언어는 인간의 신체가 만들어낸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안경을 다오” 라고 하면 안경을 줄 수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안경이라는 말을 달란 말이야” 라고 하면, 그것은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안경이라는 말 자체는 입에서 나오는 진동으로 된 음파로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신체의 표면적 효과 ??

왜 그런가? 우리는 신체를, 즉 우리는 물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즉 안경을 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물질을 보여주는데, 그것을 신체의, 즉 물질의 표면적 효과라고 하는데, 그러니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있는데, 그러니 서로 실제로 안경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부끼리 서로 떨어져 있어도 대화가 되고 말이다. 즉 “밥도, 그만 자자” 라고 하면, 마누라는 밥을 주고 잠도 같이 자준다는 것이다. 즉 밥이 있는 곳에 가서 달라고 손짓으로 일일이 하지 않아도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신체가 표출하는 효과가 실제로 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신체에서 말이 나올 때, 조금 전에는 제가 ‘살과 피’ 라고 했는데,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이 살과 피에는 그 어떤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신체로서 말이다. 그런데 개신교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일종의 상징이고, 거기에서 나오는 표면적 효과가, 즉 말로서 하는 그 효과가 의미가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방금 읽은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라고 하는데, 즉 이러한 신체의 표면적인 효과가 있는 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체가, 즉 어떤 어르신께서, 즉 성령의 나타남과 그 능력으로 한다는 것이다.

◈ 성령이 나타나면 자기 주체는 죽어야 !!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성령이 나타나면 누구의 주체는 죽어야 하는가? 사도바울이란 주체는 당연히 죽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와 누구와 비교를 하는가? 사도와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비교하는데, “아이쿠, 사도는 참으로 좋겠다. 성령께서 역사를 다 해주시고 말이다. 부럽네”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장작 사도의 경우에도, 그런 사도인 자신조차도 성령에게 눌려있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나오는데, 즉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다” 라고 말이다. 결코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 사람과 사람이 아닌, 사람과 사건을 비교해야 !!

그래서 어제가 설교하기를,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지 말고, 자기를 사건과 비교를 하라고 했는데, 사람들끼리 비교를 하면, 서로 경쟁심과 유발하게 되는데, 서로 누가누가 잘났는지를 말이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승리한 놈에게 영광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전형적인 선악구조인데, 인간은 분명히 선악과를 인간이 따먹었는데, 그래서 인간은 결코 선악구조를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구조가 아니라 생명나무의 구조로 다가오시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외부에서 무엇이 주어지든 간에 무엇을 기초로 해서 그것을 해석하는고 하니, 자신들의 선악구조체제 아래에서 모두 다 해석을 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부자청년의 예를 들었는데, 그가 뭐라고 했는가? “아이쿠, 예수님은 좋은 말씀만 하시고, 선한 분이 맞네요”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선악구조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서, 즉 자기는 예수님을 선한 분으로 이야기할 정도로 역시 자기도 선하다는 의미인데, 그러니 전혀 선악구조를 포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악구조를 포기하지 못하면 자기 신체성도 역시 포기하지 못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 신체성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내뱉은 말과 추상적인 것들도 역시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인간의 말과 추상적인 것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역사가 나오고, 또한 구조가 나온다는 말이다. 

◈ 왜 인간은 선악구조를 포기하지 못하는가?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생각보다 훨씬 더 간단한데 말이다.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을 보면서 추상적인 구조를 가지는데, 비록 자기 몸이 이렇게 있어도 말이다. 바로 그렇게 세상의 구조를 잡는 이유는, 그것은 자기 몸에서 발휘하는 표면적인 효과 때문인데, 즉 추상적인 효과로 인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렇게 추상적인 구조를 잡고, 또 그 구조를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은 그러한 구조를 만들어낸 자기의몸을, 즉 자기의 신체성을 선악적인 구조가 꽉 잡고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우리 인간은 이러한 추상적인 구조를 전혀 포기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포기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 결국, 인간은 자기 몸을 포기하지 못해 !!

그런데 이제 그 다음이 문제인데, 이렇게 추상적이든 뭐든 간에, 그러한 모든 것이 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인데, 역사든 뭐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처음에 인간의 그런 구조를 ‘추억’ 이라고 했는데, 즉 “나는 어릴 때 이렇게 고왔지” 라고 말이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신체를 결코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이렇게 자기의 선악구조를 포기하지 못하는데 비해서,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고 하니, 인간이 그렇게 선악구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선악구조가 인간을 잡아먹었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 악마가 이미 이 선악구조를 알고 있는데 !!

그렇게 선악구조가 인간은 잡아먹었다고 하려고 하면, 이러한 선악구조를 잘 알고 있는 그 누군가에 의해서 지배를 당한다는 말인데, 그러한 선악구조를 인간은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아시고 또한 누가 아는가? 천사들이 아는데, 그런 천사들 중에서도 하나님께 반역한 악한 천사가, 즉 악마가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 아무리 까불고 촐랑대도, 아무리 그렇게 해도 여전히 인간은 마귀에게 종속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오게 되면 집주인을 묶고 나서야 세간을 가지고 가듯이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보시게 인간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인간은 악마에게 종속되어있는데, 그래서 우리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 영혼을 동원해서라도, 성공자로 남기 원하는 인간 !!

어제도 설교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 세상에서는 죽음을 무엇을 보는가? 당연하게 실패로 보는데, 그래서 인간들은 비록 육체는 죽지만 죽지 않는 것을 끄집어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영혼이라는 것이다. 그런 영혼을 제공함으로서, 즉 육체라는 껍데기는 비록 없어져도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식으로, 인간은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실패자가 아닌 성공자가 되도록, 그렇게 간절히 소원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 이런 식으로 선악구조에 매여있다고 할 때, 제가 강의를 하면서도 이런 인간을 보면 속이 상하는데,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말이다.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몸은 선악을 감당하는 몸이 아닌데, 하지만 포도주 부대는 어떠한가? 반드시 그 포도주를 감당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감당을 해야만 포도주 부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포도주를 담을 수 있기에 말이다.

◈ 몸을 죽여주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 !!

하지만 인간의 몸은 처음부터 선악과를 담으면 안 되게 만들어져 있는데, 담으면 터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담으니 그만 과부하가 걸리게 되는데, 그런 과부하가 걸린 선악과가 가득한 몸을 죽여주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죽여주어야만, 새로운 몸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말이다. 마치 쓰지 못하는 토기를 토기장이가 깨듯이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자가 산다고 했는데, 그러니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죽이려고 하면, 우리는 주님이 자기를 미워한다고 여기는데, 그러나 전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말이다. 감사하게도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죽여주신다는 것이다.

어제 그런 설교를 하고 하니, 집사님 한 분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목사님, 저는 빨리 죽고싶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집사님,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더욱 더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나서 죽어야 합니다”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우리 인간들의 임무이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세상구조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돕는다고 착각하면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너무 자기가 죽으려고 하면, 그런 것은 자칫 잘못하면 그것 자체가 자기 자랑이 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죽음도 당연히 주님이 죽여주셔야 한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구조가 예수님의 피 안에 담겨있다’ 라는 의미는?

아무튼 우리가 “하나님의 구조가 예수님의 피 안에 담겨있다” 라고 할 때, 물론 그것이 말은 쉽지만, 그러나 “하필이면 왜 피입니까?” 라고 했을 때, 우리 인간이 그런 선악구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를 해줘야, 진짜로 그 피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있다고 하는 것이 점점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만들 때 다른 것은 전혀 안 되고, 오직 예수님의 피만 있으면, 목사도 필요 없고, 장로도 필요 없고, 집사도 필요 없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선악구조로 교회가 만들어져서, 그러한 교회가 분란이 일어나고 와장창 무너지고 해야만, 즉 “이놈의 교회, 완전히 없애버려라” 라는 생각이 들 때, 그때 진짜 하나님의 교회는 그 피로서만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사도행전 20장에서는 ‘하나님의 피’ 라고 하는데 말이다.

◈ 이미 ‘피’ 안에 교회가 !!

그렇다고 해서 그 피를 가지고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구조이고 말이다. 하지만 피 안에 이미 교회가 들어있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그 피를 가지고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데, 십자가를 꼭대기에 달고, 십자가의 피를 전하는 괜찮은 교회를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인간들이 만든 교회가 진짜 피 안에 교회를 방해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피로서 이미 교회가 되었다고 하면,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진짜 교회를 드러내기 위해서 미리 배치가 된 어떠한 장치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니 일종의 애굽이라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애굽이 있어야 이스라엘이 구체화가 되듯이 말이다.

◈ 잠깐 울산강의를, ‘누가 애굽이고, 누가 이스라엘인가?’

그것을 울산강의에서 했는데, 여기서 잠깐 다시 해보면, 이렇게 모세에게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칭칭 감겨있었다고 하면, 그래서 모세는 그 프로그램대로 분리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하나는 애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아직까지 애굽과 이스라엘이 확정되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즉 누가 애굽이고, 누가 이스라엘인지 말이다. 그것은 바로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사건이 벌어져야 비로소 갈라진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광야에까지 가서 말이다.

◈ ‘광야’ 라는 환경을 통해서 !!

그래서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자기들이 이스라엘이 되고 싶어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되는데, 그것이 무슨 환경이라는 말인가? 즉 ‘광야’ 라는 환경인데, 그렇게 그들이 광야에 있어야만, 이스라엘이 무엇이고 애굽이 무엇인지가 제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오자마자 어디로 돌아가자고 말하는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즉 또 다시 애굽이라는 인간구조를 따로 뽑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조가 아니라,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조로 바라보니, 애굽이란 나라가 따로 있고,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따로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 모세는 피 남편으로서 나가야 !!

그것이 바로 그들의 오해한 점인데, 심지어 모세까지도 그렇게 오해를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전에 모세를 불러서, 이 모세에게 ‘무슨 남편’ 이라는 라벨을 하나 붙여주시는데, 무슨 남편인가? 그것이 바로 ‘피 남편’ 이라는 것이다. 물론 ‘피’씨 성을 가진 남편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만약에 그렇게 하지를 않고 그냥 평범한 남편으로 가게 되면, 그것은 애굽과도 똑같이 되고 마는데, 즉 “하나님이여, 우리가 노예로서 너무 힘이 듭니다. 구원을 해주소서”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오냐, 알겠다. 구원을 해줄게” 라고 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스라엘을 흉내나 내는 가짜 이스라엘, 즉 애굽의 재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 집구석부터 피를 내야 되고, 또한 모세가 마지막에 애굽과 이스라엘이 갈라지는 순간에도 해야하는 것은 피를 내는 일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선악구조와 생명나무의 만남은 반드시 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십자가는 복음인가? 율법인가?

여기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십자가는 복음인가? 아니면 율법인가?” 라는 것이다. 누가 답변을 한번 해보세요. 사실은 이 십자가 안에는 두 가지가 다 들어있는데, 히브리서에는 이것을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이다” 라고 하고 있는데, 그래서 히브리서에 말씀하기를, 다시는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제사나 미사나 예배가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데, 즉 피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 목사님, 피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립시다 ??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목사님, 그러면 피로 예배를 드리면 됩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분명히 성경에는 피만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그 피로 자기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식으로,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다. 즉 피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자고 말이다.

그러니 여기 ‘A’ 라는 지점에서 ‘B’ 라는 지점으로 인간의 종교적인 행위를 가미해서, 즉 “우리는 피의 예배를 드렸다”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의 솜씨를 들어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만족해하고 즐거워하는데, 물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들이 말이다.

인간들은 왜 그렇게 해야 즐거운가? 그것은 바로 피 자체가 되어버리면 생명나무 쪽이 되어버리는데, 하지만 피로서 무엇을 만들자고 하면, 즉 피에서 예배라고 하는 인간의 행함이 나오면 그만 선악구조가 되고 마는데 왜 그런가? 예배에 참석하는 자기는 선한 사람이 되고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또 다시 선악구조를 포기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예배도 이러할 진데, 하물며 이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것들은 오죽 하겠느냐는 것이다.

◈ 야야, 반찬을 많이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라도 정성껏 해라 !!

제가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어느 날 50대 아주머니들이 자기 며느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며느리가 집에 왔기에 자기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야야, 반찬을 여러 가지를 많이 하려고 하지 말고, 한 가지만 하더라도 정성을 다해서 해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듣는 순간 저는 머리에 뭔가가 ‘번쩍’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 동안 이 세상구조가 어떠한지 참 궁금했었는데, 그런데 그 한 마디에 완전한 해답을 발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야야, 음식을 많이 하려고 하지 말고, 한 가지라도 정성을 다해서 해라” 라고 하는 말을, 도대체 이 세상 어느 누가 과연 부인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바로 이 세상구조의 전형,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이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거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구조 그 자체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좋은(?) 말을 한 시어머니와 거기에 순종한 며느리가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혀 아닌데, 그렇다면 인간들의 머릿속이 평소에 텅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한 가지 반찬이라도 정성을 다해서 해야 맛있다고 하는, 그런 상식적인(?) 것이 가득히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 구조라는 말이다.

◈ 그러니 예수님은 ‘피’로서 만날 수밖에 없어 !!

그렇게 보면 이 세상구조가 참으로 간단한데, 누구든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것으로 가득하게 차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가득한 이 세상구조와 무엇으로 만났는가? 바로 ‘피’로 만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생각하는 천국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가 되는 구조라는 것이 정립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반찬이라도 정성을 다해서 해라” 라고 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그 하늘나라가 전혀 들어갈 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한 아주머니에게 “아주머니,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라고 했다면, 아마 그 아주머니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조가 전혀 다르니 말이다. 물론 제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 아니고, 만약에 말이다(ㅋㅋ).

◈ ‘피’를 받아들이고 수용할 인간이, 이 세상에는 없어 !!

다시 말해서, 천국의 구조와 이 세상의 구조가 피로서 만나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그 어느 인간도 이 피를 받아들이고 수용할만한 인간은 이 세상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신체를 가지고 제 아무리 성만찬을 하면서 그것이 새언약이라고 문자로서, 말로서, 언어로서 주장을 한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구원을 받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아까 살펴본 고린도전서 2장 4절의 말씀인데, 즉 성령의 나타나심이 아니라고 하면, 이런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그런데 성령이 인도하시면 이런 모든 것이, 즉 “나는 새언약을 믿는다, 십자가를 믿는다” 라는 것이 바로 ‘죄’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 목사의 설교는 죄입니다 ??

그렇게 되면, 오직 의인은 주님밖에 없으며, 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그것이 이렇게 피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언어나 말, 혹은 자기 고백, 사도바울에 의하면 자기 설교이고, 만약에 이근호 같으면 성경강의와 같은 것이 될 것인데, 그런 것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의 설교나 강의는 바로 죄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제가 이런 긴긴 이야기를 모두 생략하고 바로 “목사의 설교는 죄입니다” 라고 하니 목사들이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목사의 설교가 죄가 되느냐고, 즉 김덕신 목사님의 설교가 죄느냐고 말이다. 자기들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글쎄,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반찬을 많이 말고, 하나라도 정성껏 하면 된다고 하는 것에 자기가 공감한 것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과 합치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 그런 자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김덕신 목사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십자가의 주님과 눈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라고 하는, 그러한 고백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저는 유명한 부흥사의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나서 바로 그것이 죄임을 알았습니다” 라고,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무엇을 해도 행복해 !!

다시 말해서,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서 구원이 된다고 하는 것, 그리고 성령님은 그런 피로서 우리에게 다가섬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도 죄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행복감을, 그런 안도감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청년의 고민처럼, 가난한 자에게 재산을 팔아서 나누어주던 주지 않던 간에, 그는 고민을 해도 우리는 행복한데, 왜냐하면, 나눠주던 주지 않던 다 죄임을 아니 말이다.

그러한 행복감을 누리는 자들이 바로, 하늘나라의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인데, 즉 사도바울이 그렇게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IN CHRIST’ 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 오늘 교재에 들어갈 준비운동이 어느 정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물론 힘이 좀 들어도 이 정도라도 해놓으면 이 책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서론이 길었는데, 이제 교재 37페이지를 살펴보자.

 ** [세상 도안(圖案)] -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파악할 수 없다.

◈ 드디어 ‘세상 도안’ !!

여기에 보면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파악할 수 없다” 라고 하는데, 맞는 말이라는 것이다. 아까 한 것을 간단하게 복습을 해보면, 인간이 선악구조로 자기를 파악하면, 자기는 반드시 선 쪽에 남고, 그리고 상대방은 자기보다 덜 선한 쪽에 남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목사님, 그래도 저는 저보다는 테레사 수녀가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한다면, 바로 그 테레사 수녀만큼의 폭을 악마가 따라잡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뱀이 아담에게, 아담이 아는 선악의 폭을 가만히 두지 않고 유혹을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 폭을 따라잡으면, 즉 테레사 수녀와 자기를 비교해서 어떤 의로움이 생기는고 하니, 자기는 적어도 자기보다 테레사 수녀가 더욱 선하다는 점을 알고 있으니, 그런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존재인지, 그것이 계속 첨부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글을 쓰기를, 테레사 수녀는 정치적으로 놀아서 후원금을 받아서 그렇게 했다고, 그것이 모함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고 아무리 책을 만들고 해도, 그런 책을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녹취자 - 함석헌 선생에 관해서도 그런 책이 있었는데, 그가 얼마나 지저분하게 살았는지, 그것을 고발한 내용인데, 물론 호응을 못 받았는데, 진실 여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만 이 테레사 수녀가 졸지에 사기꾼이 되어버린다면, 그 동안에는 자기가 이 테레사 수녀로 인해서 의인이 되었는데, 그녀를 존경한다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그녀가 사기꾼이 되면, 그런 자기의 존경심을 버려야 하니, 그것을 자기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가만히 있어 … 알지어다” 라는 방식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

◈ ‘가만히 있어 … 알지어다’ !!

하나님께서는 왜 “가만히 있어” 라고 하시는가? 물론 그렇게 가만히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가 있는데, 하지만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인간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서는 날마다 선과 악이 폭발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자기를 의인으로 만들고, 그렇게 해서 죄인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애를 쓰니 말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로마서 7장에 두 가지 층이 !!

바로 그것을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두 가지 층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는 자기에게는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층이 있고, 다른 하나는 그런 선한 것을 훼방하는 악한 층이 있는데, 그런데 그 악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를 장악하고 있는 악마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악마가 있어서 자기 선함을 방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렇게 비판할 수 있는데, 즉 악마가 있으면 있는 그대로 있으면 되지, 왜 그것을 가지고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하면서, 왜 그렇게 애써서 곤고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냥 “저는 원래가 그런 놈입니다” 라고 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누가 배후에서 작용을 했기 때문인가?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작용해서 그러한데, 그것이 로마서 7장 4절에 나오는데, 즉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새로운 남편으로서 삼게 되어서, 바로 그분이 우리 자신의 구조를 알게 하시고, 또한 곤고케 하시고, 그 다음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찬양을 하도록,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곤고케 !!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자기 속에 악마가 들어있으면 내부적으로 갈등과 긴장이 생기고 싸움이 일어나는데,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악마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부족함이라고 여기는데, 즉 자기 실수라고, 즉 자기가 아직 인간이 덜 되어서 그렇다고, 그러니 좀더 노력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마치 공자와 같이 말이다.

그런데 이 공자라는 인간은, 인간이 자기 나이가 50이 넘으면 그 어떤 유혹도 이긴다고 했는데(마흔이 아닌가?), 그야말로 공자와 같은 소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트클럽에 한번 가보라는 것이다. 나이 50이 넘은 인간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러니 공자가 인간을 전혀 모르고, 또한 얼마나 철이 없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양심은 무엇인가요?

양심은 율법적인 매개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율법이 오게 되면 무엇을 자극하는고 하니, 우리 속에 있는 잠자는 악마를 깨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하라’ 라고 한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만 하기가 싫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지마’ 라고 하면, 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고 말이다. 율법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율법적 기능이 바로 우리의 양심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한 정답은 이미 나와있는데, 즉 “그냥 내버려둬!”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이 교재에 있는 “가만히 있어” 라는 것인데, 그러니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은 묶어놓는 것이 아니라, 자랄발광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가만히 있어” 라는 것이 출애굽기나 시편 등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런데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심정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해봤자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도 모르게 되어 있고, 자기 자신이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거론하는 것도 제멋대로 임이 뻔하기 때문이다.

(시 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나는 도다

◈ 인간은, 결코 가만히 있지를 못해 !!

여기 시편 46편에 ‘영혼’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까 말한, 즉 인간이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 만든 개념의 영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가 가만히 있다고 여기는데, 그러나 사실은 가만히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가만히 있는 줄 착각을 한다는 말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가 가만히 있지도 못하면서 가만히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데, 그것도 역시 자기가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의인이 되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인간은 그렇게 의인이 되기 위해서 예민한 자아비판을, 즉 잘라내는 작업을 전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해나간다는 것이다. 하여튼 그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기를 긍정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굳이 자기를 긍정하라고 가르치지를 않아도 태어날 때부터 자기 자신을 긍정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이 머리를 빡빡 밀고서 산에 들어가면, 그것 자체를 대단한 일로 여기고 말이다. 그런 것을 아주 멋있게(?) 본다는 것이다.

◈ 자기, 내 콧수염이 근사하지, 그렇지?

그리고 가수 배철수가 콧수염을 기르고 TV에 나오면 자기도 역시나 기르고 싶은데, 물론 주위에서는 보기 싫다고 하면서 없애라고 해도 말이다. 왜 그런가?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멋있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연예인들이 입는 옷이나 악세사리들을 따라서 하고 말이다. 비록 그것이 짝퉁이라고 해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를 옹호함에 있어서는, 옆에서 “제발 잠잠히 계셔요” 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도저히 그렇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쇠사슬로 묶어놓아도 그만 무지막지한 괴력을 발휘해서 다 끊어버리려고 하고, 또 다시 설치려고 한다는 말이다.

◈ 자살을 해서라도 꿈틀거리는 인간 !!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직업도 없고 정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나 그것도 역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살을 하고 마는데, 그렇게 라도 해서 인간은 무엇을 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만 하루에 30명이 자살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인간의 마음이나 몸은 항시 ‘잠잠’이 되지 못하는 혼란 상태에서 요동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을 향하여 잠잠함을 요구하시는 것 자체가 인간으로선 실천 불가능한 조건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말씀은 인간들의 성취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이다. 이렇게 되면 말씀의 조건에 합한 ‘잠잠하게 됨’의 능력은 따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될 사항이다.

이것을 다음과 같은 대화로 엮을 수가 있는데, 한번 들어보자.

* 하나님 : 근호야, 이것을 한번 해볼래?
* 저근호 : 도저히 실천이 불가능합니다.
* 하나님 : 이것을 할 수 없다고 라고?
* 저근호 : 예, 못합니다.
* 하나님 : 그러면 내가 “다른 것으로 바꿔줄게” 라고 할 줄 알았지?
* 저근호 : ? ? ?
* 하나님 : 안 돼. 계속해 !
* 저근호 : 그래도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 하나님 : 그래, 지금은 못하겠다고 말만 하지만, 나중에 나에게 덤빌걸?
* 저근호 : 아닙니다.
* 하나님 : 자슥아, 아니기는? 조금만 더 있어봐.
* 저근호 : ? ? ?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고 “잠잠히 있어라” 라고 하는 이유인데,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렇게 잠잠히 있으라고 하는 말씀을 주심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잠잠히 있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들의 배반, 반항, 대적 등이 마구 솟아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것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잠잠히 있어라’ 라고 하신 이유이다.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벌써 말씀을 던지면서 인간 쪽으로 찾아오시는 방식이 가동되었다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이 먼저인가? 말씀이 먼저인가?” 라는 것인데, 당연히 말씀이 먼저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난 대전강의에서 한 것을 잠시 언급을 해야하겠는데, 거기서 한 강의 중에서 참으로 어려운 내용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을 해보아도 설명을 너무나 어렵게 하지 않았나 싶은데 말이다.

◈ 위로 올라간 안식층 !!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7일(?) 동안 창조를 하셨는데, 물론 그렇게 창조를 하고 난 다음에 안식일이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설명하면서 “안식층이 위로 올라갔다” 라고 상당히 어려운 말을 했는데, 그렇게 안식층이 위로 올라감으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이 그 어떻게 바뀐다고 할지라도, 안식층은 어떻게 되겠는가?

예를 들어서, ‘꼭두각시’ 라는 인형놀이처럼, 그 밑에 있는 꼭두각시가 아무리 변화무쌍해도, 그 줄은 여전히 위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쥐고 있고, 그런 점은 전혀 변화가 없는데, 모든 것을 다 그렇게 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 이 세상의 어떤 사건도 안식과 무관할 수 없어 !!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위로 올라간 그 안식층과 무관한 사건은 결단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의 모든 변화는 다 반드시 하나님의 안식과 관련이 되어서 주어진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안식과 말이다.

바로 그런 꼭두각시 중에서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안식이 지키기’ 라는 것인데, 그런데 기존의 구약 신학자들은 이렇게 안식층이 위로 올라갔다고 보지 않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올라가 주어야만, 여기 올라간 위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안식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이, 그렇게 올라간 안식층과 서로 이렇게(?) 겹쳐질 수가 있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형상은 피조대상이 아니지만 !!

그래서 제가 어려운 말을 했는데, 즉 “하나님의 형상은 피조대상이 아니지만, 인간의 몸은, 즉 인간은 피조물이다” 라고 말이다. 지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그것을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의 대상물이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의 몸은 창조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말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즉 “인간이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은, 밑에서 인간들끼리 서로 끄집어내어서 “이하, 이것이 인간이로구나” 라고 판정을 내려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피조물끼리는 제 아무리 의견을 교환하고 서로 공통점을 찾는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다만 오직 진짜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는 인간이다” 라고 할 경우에만, 그럴 경우에만 비로소 인간은 영원토록 여기 위쪽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어서,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여기 밑에는 인간이 아니라 괴물들만 우글거리니 말이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 !!

이것을 어려운 말로 해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몸의 부활은 우리 몸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그것을 지적하는 신학자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 몸의 부활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만이 진짜 인간이니 말이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이 부활이 되었으면, 성도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사로의 몸도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때에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무덤에서 다시 나온 경험은 있지만, 하지만 그런 몸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 몸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의 경우에, 마지막 때는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천사와 같이, 해와 빛나게 되는데, 그렇게 몸의 형체가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 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데, 자기를 인간으로 보니 말이다. 그래서 자기 몸이 부활을 한다고 여기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즉 ‘나’ 라는 것은 다 날아가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이 인간이니,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에 동참하게 되는 것만이 부활이라는 것이다.

◈ 베드로야, 니가 별세를 아니?

그 대표적인 예가 변화산에서의 모세와 엘리야인데,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서로가 이야기를 하는데 그야말로 몸에서 광채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별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즉 “예수님, 우리 몸은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됩니까?” 라고 하니(?), 기존의 가지고 있는 몸은 죽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베드로가 하늘에 올라가면 아브라함도 만나지 싶은데 말이다.

(눅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눅 9: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 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 악마의 속삭임, ‘조금만 더 힘을 내’ !!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들의 기존의 몸을 가지고서, 미흡함을 따라잡아서 온전한 몸이 되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이 다 누구의 짓인가? 아까도 말했지만, 선악구조를 가지고 조종하는 악마의 유혹이란 말이다. 그것이 곧 성화론인데, 즉 “니가 아직 요만큼 미흡하지? 그러니 그 미흡함을 채워서 더 높이 날아야지. 왜 그렇게 망설이지? 더 나가면 신에게 도달할 수 있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받아’ 라고 하는 것이, 언뜻 들으면 좋은 말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론에서 출발하는 것이기에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내려오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말이다. 즉 예수님의 것으로 채워질 때, 바로 그것이 주님을 본받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부풀어지고 자라나는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다시 ‘안식층’에 대해서 !!

다시 안식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는데, 이 안식층이 위로 올라가게 되면, 여기 밑에는 역사가 남게 되는데, 그러면 이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경우라도 안식층에서 벗어나는 이 땅의 구조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밑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 여기니, 그렇게 안식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에도 그대로 퍼져서 ‘주일 지키기’ 라는 것이 되었는데, 또 ‘십일조 하기’ 라는 것이 있고 말이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를 지탱하는 두 기둥인데, 즉 주일을 지키려고 교회에 나와서 광고소리를(?) 듣고 헌신하고, 또 십일조를 해서 교회는 돈이 되고, 그렇게 되니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운영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일성수와 십일조로 한국교회가 부흥이 되었다는 말이다.

◈ 그러나,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 !!

그런데 성경에서 “안식을 지켜라”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안식일 지킨다고 하고는 쇠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안식일을 반복적으로 지킨다고 하는 것은, 제 아무리 반복적으로 열심히 안식일을 지켜봐야, 인간 자체가 인간이 아닌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만 안식을 지킬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위에 있는 안식층과 교제하고 계시는 진짜 인간이신 예수님의 몫인데, 그러니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킬 경우에만, 우리 몸도 예수님의 몸처럼 새로운 하나님의 원래창조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에서 “안식을 지켜라” 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점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두고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주인이 와서 자비를 베풀면 모두 다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뭐라고 하는가? 그런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보고, 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다니면서 씹어먹느냐고, 그렇게 시비를 걸고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종종 그런 질문을 하는데, “목사님,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면 됩니까?” 라고 말이다. 아니, 안식일의 주인이 왔는데, 왜 그런 걱정을 쓸데없이 하느냐는 것이다. 결코 이 안식일은 우리가 지키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안식일은 어떤 분의 몸 !!

여기에다가 대구에 있는 어떤 목사는 “모든 시간이 다 안식일입니다” 라고 하니까, 교인들은 또 모든 시간을 다 지키려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안식일은 그런 시간개념이 아니라 어떤 분인데, 즉 어떤 분의 몸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의 시간과 공간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어떤 분의 몸을 보여주기 위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말이다.

◈ 시간과 공간이, 어떤 분의 몸과 어떠한 논리로서 만나는가?

그러니 여기서 등장하는 논리가 상당히 어려운데, 즉 시간과 공간이 어떤 분의 몸과 어떠한 논리로서 연관되어서 만나게 되는지,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힘이 든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구조는 시간과 공간 안의 구조인데, 그러한 세상 구조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연결이 되는 구조로서 논리적인 발전이 되는지, 그러한 점을 다루었는데, 바로 그것이 어렵다는 말이다.

물론 그 과정은 어렵지만 결론은 간단한데, 즉 우리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물론 살은 피를 내는 것이니 없어지고,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시간과 공간에 올라간다(내려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예수님의 피가 있다고 해도, 사실은 그것도 우리에게는 어려운데,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이 피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았던 공생애 때의 바로 그 몸에서 나온 것인데, 물론 그렇게 해도 어렵지만 말이다.

◈ 1개의 몸과 12개의 몸이 서로 충돌되면서 !!

그렇다면 그 예수님의 곁에 누가 있었는가? 예수님은 안식층에서 내려온, 창조의 완성체에서 내려온 몸인데, 그런데 그런 예수님의 몸 옆에 같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12개의 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12제자’ 인데, 그렇게 12제자가 배치됨으로서, 이 12제자의 몸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과 예수님의 몸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을 서로 한번 비교를 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비교를 해보면, 인간의 몸을 대표하는 그 12개의 몸은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달릴 때 모두도망을 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인간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철저하게 자기의 몸만을 챙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12제자의 몸을 통해서 증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 몸과 비교가 되면서 말이다.

◈ 예수님의 피는, 인간 구원용이 아니기에 !!

그렇게 자기 몸밖에 모르는 인간이 예수님의 살과를 피를 먹고 마신다고 할 때, 그것은 결국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자기 몸을 챙기는 쪽으로, 즉 제 아무리 성만찬에 참석을 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는 결코 인간 구원용이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아버지께서 보내지 않으면 너희가 나에게 올 수 없다”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베드로는 그 예수님의 말씀을 또 오해를 한다는 것이다. “야,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셔서 이렇게 구원을 받는구나” 라고 말이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지만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보냈다고 하는 것은, 베드로가 구원을 받으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기존 인간들의 몸이 예수님의 몸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붙여준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 중에서 하나는 마귀였고 말이다. 

◈ 12제자는, 누구보다 더 가까운 세상 구조 !!

그러니 예수님을 뺀 12제자의 무리들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누구보다도 더 가까운 세상” 이라는 말이다. 즉 예수님과 멀리 떨어진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에게서 가장 가까이 형성된 이 세상 구조, 그들이 곧 12제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12제자들 속에 악마가 들어있는데, 예수님을 팔아먹도록 누가 주도했는가? 물론 가롯유다가 그렇게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는 칼을 들고는 말고의 귀를 베었는데, 즉 인간적인 공간과 시간적인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베드로가 아무리 흥분을 해봐야 소용이 없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말고의 떨어진 귀를 붙여주셨는데, 베드로에게 “칼로 선 자는 칼로 망한다”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마 26: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마 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 베드로는 배신을 3번 때려야 !!

그러니 하늘나라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는 것인데, 즉 그런 것은 베드로가 알고 있는 이 세상 구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는 쓸데없이 설치지 말고 예수님을 배신이나 하면 되는데, 그것도 닭이 2번 울기 전에 3번이나 말이다. 즉 베드로는 배신을 때리는 것이 주특기이니 말이다. 실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배신을 했는데, 그러니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 십자가 안에는, 구원받은 자들의 운명이 압축되어 !!

아무튼 하늘나라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데, 바로 여기서 사도바울이 알았던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것이 중요한데,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뭔가가 들어있는데, 즉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든 운명이 압축이 되어서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알았다는 것이다.

◈ 십자가가 곧 피 언약 !!

바로 그것을 사도바울은 ‘십자가’ 라고 보았는데, 그 십자가 안에, 즉 피 안에 모든 구조가 다 들어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피 안에 들어있는 것을 히브리서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피에다가 무엇을 뒤에 하나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인데, 그래서 ‘피 언약’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언약을 쪼개보니 그 안에 구약 이스라엘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구약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던 언약적 성취가, 즉 “진짜 이스라엘이 누구인가?” 라는 것은, 이스라엘이라고 우겼던 유대인들이 해야할 몫이 아니라, 장차 피를 흘리실 그분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예언을 한 그 언약까지도 모두 다 이루심으로 말미암아서, 그래서 그 피 안에는 이스라엘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와우!)

◈ 요한계시록 - 이스라엘은 다 나와 !!

그러니 요한계시록의 전체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피를 확 뿌림으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은 다 나와!” 라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어떤 찾는 물체를 모를 때 시약을 뿌림으로서 발견을 하듯이, 수사관들이 범인의 흔적을 찾을 때 주로 그렇게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시약을 뿌리면 반응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고 말이다.

그렇게 숨어있는 자기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역사’ 라고 하는 것을 공간화시키는데, 즉 요한계시록에서는 역사를 하나의 공간으로 보는데, 그러면 공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스톱되는 것인데, 시간은 흘러가고 미지의 것이 남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공간은 멈추어져 있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에서는 남는 것이 없으니, 이미 끝도 다 드러나 버렸다는 것이다.

◈ 돌출되어 나오는 자들이 곧 ‘성도’ !!

다만 여기에서 돌출되어서 나오는, 즉 “자기 백성이 누구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뽑아내는 것은 안식층이기 때문에, 즉 생명나무에 속한 것이기에, 그것을 두고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생명책’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명책의 목록에 있는 사람만을 주께서 돌출되게 하셔서 끄집어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돌출을 시키는 시약이 조금은 징그러운데, 그 시약이 바로 무시무시한 ‘목 베인 영혼’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끄집어내는 방식이 아주 살벌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리고 그 살벌한 방식에 동원되는 충실한 일군들이 3종류나 있다는 것이다.

◈ 악의 일꾼들 - 짐승, 거짓 선지자, 정치인 !!

먼저 하나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거짓 선지자이고, 그리고 셋째로는 이 세상의 권력자, 즉 정치인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분들의 도움으로 인해서 돌출이 되는데, 그것을 사건 속에서 돌출을 한다고 해서 ‘주체’ 라고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돌출해서 나온 자들이 곧 성도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성도란 무엇인고 하니, 세상 구조가, 즉 ‘세상 역사’ 라고 하는 두꺼운 책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바로 그 위에다 묵시적 세계의 생명책을, 즉 피를 들이부을 때, 바로 그때 돌출되어서 나온 것을 두고서 ‘성도’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인간의 몸을 찾아갈 수 있는가?

그런데 아직도 설명이 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인간의 몸을 찾아갈 수 있느냐는 것인데, 즉 여기 위에서 어떻게 아래로 갈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는데, 즉 십자가 사건만이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해서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 복음서의 모든 사건들이 다 십자가를 !!

그것이 바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니 복음은 방향을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이 복음입니까? 아니면 십자가가 복음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마태복음 1장 1절도 역시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겨냥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그 전체가 다 복음이란 말이다. 말 그대로 ‘복음서’ 라는 것이다. 

이 복음서를 보면, 즉 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게 되면,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모두 다 당하셨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40일을 금식하면서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3가지 시험을 받았는데, 그런데 그 시험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역시 동일하게 받고 있다는 말이다. 

◈ 체휼하심이 담겨 있는 피 !!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너희들이 주님 앞에 기도해라. 왜냐하면, 내가 너희들이 당할 모든 환난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라고 하는데, 즉 “너희들이 얼마나 너희들 힘으로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나는 동정할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수록 나만 의지하고 믿어라. 왜냐하면, 나도 너희들이 당하는 그런 환난과 고통을 이미 다 당했으니 말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여인아, 간음을 했나? 괜찮아 !!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간음한 여인과의 사건인데, “간음을 했나? 괜찮아. 내가 다 안다. 니가 어떤 놈하고 같이 붙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너무 신경을 쓰지마. 내가 모두 알아서 해줄게” 라고 말이다. 그러면 또 다른 자들은 “예수님, 저는 개입니다. 저는 소경입니다. 저는 38년이나 된 병자입니다. 저는 이방인입니다” 라고 해도, 역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모두가 다 괜찮아!”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에는 “예수님, 제 오빠가 죽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징징 짜는데, 괜찮다고 해서 계속해서 울음을 거치지 않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그 오빠를 불러내었는데, 즉 제대를 시켰다가 다시 취소를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나사로와 여동생들의 사이가 그 다음부터는 별로 좋지는 않았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누이동생들도 잘 두어야 하는데, 물론 그렇게 배치를 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지만 말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피 안에는, “현재 너희들이 복음 때문에 당하고 있는 모든 수난과 고통을 나도 같이 당했다” 라고 하는, 바로 그 ‘같이’의 ‘체휼하심이 담겨 있는 피’ 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괴롭히는 역사는 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해서 되어지고 말이다.

◈ 요한계시록에서는 ‘반복’으로 표현을 !!

그런데 이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을 무엇으로 표현했는고 하니까,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심오하다고 하는데, 그것을 ‘반복’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인데, 여기서 “요한계시록에서 반복으로 표현했다” 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그렇게 반복이 된다는 것이다.

◈ ‘빈터’를 남기기 위해서 ??

그러면 왜 이렇게 반복을 하는가? 그것은 바로 ‘빈터’를 남기기 위해서 인데, 다른 말로 하면 ‘공백’ 이고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복사기를 보면, 위에 있는 이 부분이 이렇게 ‘주욱’ 밀고 나가면 복사가 되는데, 그러면 달랑 종이 한 장이 나온다는 것이다. 또 다시 ‘주욱’ 밀고 나가면 또 한 장이 복사가 되어서 나오면 두 장이 되고 말이다. 

제가 지금 복사기 비유(?)를 통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우리가 이렇게 어떤 특정한 지점에 있을 때, 우리 몸이 받는 것은 어떠한고 하니, 온 우주가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위에 복사가 되어서, 그렇게 복사기처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 마치 복사가 되는 것처럼, 동일한 질이 !!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어렵지요? 영어로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ㅋㅋ).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나는 너희들이 당한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못하겠지?”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질적으로는 동일한 질이, 마치 복사기처럼 그렇게 위로 지나가니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집이 이렇게 있는데, 이 집 위로 비행기가 지나간다고 했을 때, 우리 동네 위로도 비행기가 날아다니는데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비행기의 머리를 보았고, 또 어떤 사람은 날개를 보았다고 한다면, 그러면 서로가 다른 것을 본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동일한 비행기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100년 전에 태어나서 산 사람이나, 지금 이렇게 살고있는 우리들이나, 사실 동일한 질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 세상에서, 즉 동일한 세상에서 살았고, 또한 지금도 살고 있다는 말이다.

◈ 다윗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기에 !!

이것이 참 어려운 내용인데, 왜 그런고 하니, 우리 몸이라는 것이, 2500년 전에 다윗이 가지고 있던 몸과 지금의 우리 몸이 모두가 같은 몸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다윗이 중심이라고 하면, 바로 그 다윗 속에 우리가 포함이 되어있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다윗이 당한 그것을 우리도 지금 동일하게 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윗의 몸이 따로 있고, 우리 몸이 따로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철저히 자기 중심의 시간관과 자기 중심의 공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즉 “다윗 따로, 나 따로” 라는 것이다. 상식으로 보면 당연히 그렇다는 말이다.

◈ 다윗의 몸이나 우리 몸이나, 동일한 몸 !!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떠한가?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즉 다윗의 몸이나, 엘리야의 몸이나, 모세의 몸이나, 자기 몸이나, 또한 그리스도의 몸도 전부가 같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러한 몸을 주께서 따로 각각 만든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다같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의 몸이나 우리 몸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만드실 때, 이미 우리에게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속성도 다 들어오도록,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아야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준 시편과 같은 말씀들이, 역시 동일하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 다윗의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 !!

예를 들어서,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고백을 했을 때, 바로 그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된다는 것이다. 거기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다윗만의 여호와 하나님인가? 다윗만이 그런 은혜를 받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또 다윗이 “악인의 장막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했는데, 그것도 역시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라고, 이렇게 다윗과 동일한 몸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시 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 공백으로 만들어서 텅텅 비도록 !!

이것은 바로 ‘빈터’로 남겼다고 할 수 있는데, 즉 공백으로 해서 텅텅 비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복사를 할 때처럼 한번 ‘쑤욱’ 하고 지나가면, “어라, 지금 내 몸이 내가 생각했던 그러한 몸이 아니네. 성경말씀이 맞는 것 같아”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하루에 2.5초이지만, 그렇게 자기 자신을 ‘텅’ 하게 비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는 시어머니가 “며늘아, 반찬을 많이 하려고 하지 말고, 한 가지라도 정성껏 하면 된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 뒤에 목사가 와서 “아주머니, 그것이 곧 죄입니다” 라고 하는 순간에, 그 아주머니는 뭔가가 ‘텅’ 하고 비어버린다는 것이다.
 
◈ 며늘아, 반찬을 니 마음대로 해라 !!

그러니 “며늘아, 반찬을 한 가지를 하더라도 정성껏 하면 된다” 라는 것도, 사실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지어낸 상식에 불과한 것이지, 주님이 주신 몸 안에서는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하겠는가? “며늘아, 반찬을 니 마음대로 해라. 한 가지를 하던 열 가지를 하던 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시어머니 : 며늘아, 반찬을 한 가지를 하더라도 정성껏 하면 된다
* 며 느 리 : 예, 알겠습니다.
* 시어머니 : 며늘아, 반찬을 니 마음대로 해라. 한 가지를 하던 열 가지를 하던 말이다.
* 며 느 리 : 어머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제가 만든 반찬이 맛이 없던가요?
* 시어머니 : 그게 아니란다.
* 며 느 리 : 아까는 정성껏 하면 된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 시어머니 : 정성이라는 것도 내 몸 하나 좋아라고 하는 것이고, 선악적인 사고방식이란다.
* 며 느 리 : ? ? ?
* 시어머니 : 그러니 그런 것들이 다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짓이니, 아무런 소용이 없다.
* 며 느 리 : ? ? ?
* 시어머니 : 오직 주님만이 의인이고 우리는 죄인이란다. 알겠지?
* 며 느 리 : ? ? ?

그러니 “반찬을 한 가지를 하더라도 정성껏 하면 된다” 라고 했던 그 문자적이고 언어적인 추상적인 개념이,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렇게 되려고 하면, 거기에 성령께서 작용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왜 자꾸만 이런 곁가지 같은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이런 것이 다 다음에 나오는 것과 관련이 있어서 그러한데, 그 다음 장이 ‘지혜의 등장’ 인데, 바로 이 ‘지혜’ 안에 모든 창조와 구속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38페이지를 보자.

** (1) 지혜의 등장 -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만 드러난다. 이 세상에는 원칙이 서있고, 그 원칙에 따라서 질서가 갖추어지는데, 그 질서의 원천은 따로 계신다. 그분이 곧 지혜자이시다.

(잠 8: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잠 8:23)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잠 8: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잠 8:25)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잠 8: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
(잠 8: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구약에서는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만 지혜가 알려진다. 지혜가 되시는 분으로부터 지혜를 제공받게 되면, 그들은 지혜의 피조물이 된다. 인간이 곧 지혜의 일부로 편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지혜를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에 의해서 살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이런 자들이 ‘언약의 아들’이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눅 7: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 구약에서는,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만 지혜가 !!

여기 교재에서 “구약에서는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만 지혜가 알려진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선택을 받은 자들의 몸은 어떠하다는 것인가? 그 지혜를 알아서 구원을 받는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혜가 만들어낸 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지혜가 신약에 보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물론 잠언서에서도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안식층에 계셔서,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없는 인간을 새롭게 만들어내신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설계하신 이 세상 구조라는 것이다.

◈ 경계선에서, 피를 가지고 소개하는 것이 곧 하늘구조 !!

그렇다면 이제 이 세상 구조의 결론이 나왔는데, 즉 세상 구조는 두 개의 층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모두 다 만드셨는데 말이다. 아래에는 죄인들이 만든 인간 세상이 있지만, 사실은 그것도 역시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인이 되게 하셔서 만든 것이 바로 밑에 있는 이 세상 구조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그것이 죄라고 하면서 피로서 고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층이 따로 있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이 위에 있는 층은 우리가 보기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밑에 있는 인간들의 층으로 말미암아서, 여기 이 경계선에서 피를 자아내면서, 위에 있는 천국층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를 가지고 말이다. 아주 중요한 내용인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왜 그런고 하니, 위에 있는 이 천국층은 밑에 있는 이러한 인간 아닌 인간으로서는 다 묘사할 수도 없고, 그 어떤 상징을 동원한다고 해도 도저히 충족시켜서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상징이라는 것은, 자기가 이해한 데로 다시금 돌아오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역시, 자기의 말로서는 도저히 자기가 본 것들을 설명하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말이다. 하늘의 삼층천을 보고 나서 말이다.

◈ 아하, 인간 세상으로부터 싫어버린 바를 당했구나 !!

그렇게 그 어떤 인간이라도 이 위의 천국층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여기 이 위에 있는 이 세상이 인간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싫어버린 바를 당한, 바로 그런 세상으로서 남아있다고 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이 천국으로 가면서 뭐라고 했는가?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말은 도저히 나올 수가 없고, “하나님, 저 놈들이 철이 없어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좀 봐주세요” 라고 할 수밖에 말이다. 왜 그런가? 천국이 워낙 좋으니 말이다. 너무나도 좋은 복음의 세계를 모르는 인간들이 너무나 한심스러워서, 그것 말고 도저히 다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 그야말로 촌티나는 인간 세상, 바이바이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펩시콜라(?) 목사처럼 그렇게 설명을 한다고 하면, 즉 “천국에 가니까, 여기는 어떻고, 저기는 저떻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것은 다 인간들이 조작해낸 것이라는 말이다. 그냥 요한계시록에 있는 것처럼, “태양같이, 천사같이, 보석같이 빛난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런 보석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좋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우리 지식으로 상상을 하고 설명을 하려고 하면, 그야말로 촌티가(?) 나고 만다는 것이다.

(계 21:21)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계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계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우리 몸을 만드신 것도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인 줄로 압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무엇인지, 그런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우리 몸을 통해서 날마다 증거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9,23 오후 10시 50분에 마침.

                                                      세상구조 - 드디어 4강에 진출하다 ! ㅋㅋ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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