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특강 2009-08-29  고신 화란개혁주의(성화론) vs 십자가(인자의 나라) a

음성파일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특강090829a리델보스하나님나라a.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특강090829b리델보스하나님나라b.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특강090829c리델보스하나님나라c.mp3

동영상파일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특강090829a리델보스하나님나라a.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특강090829b리델보스하나님나라b.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특강090829c리델보스하나님나라c.wmv

녹취파일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특강090829a리델보스하나님나라a.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특강090829b리델보스하나님나라b.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특강090829c리델보스하나님나라c.hwp





================================================

09 대구특강 - 리델보스의 ‘하나님나라’ 1

                                                   2009,08,29  강의, 이근호 목사   녹취, 한윤범 목사

◈ 목사님, 이 책을 평가해 주시와요 !!

이제 시작을 하겠습니다. 최일규 집사님이 저한테 먼저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바로 이 책에 관한 인데 말입니다. 즉 헤르만 리델보스의 ‘하나님 나라’ 라는 책인데, 이렇게 제법 두꺼운 책에 대해서 평가를 좀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 의도가 뭐냐 하면, 이 책이 현재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의 하나의 교과서와도 같은 책이니, 지금 간증이나 하고 돌아다니는 부류 말고, 그래도 공부를 좀 해서 한국교회를 개혁해보겠다고 하는 분들의 사상이 대부분 이런 책에서 기초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리델보스의 책이 과연 복음적인지 아닌지, 거기에 대해서 검토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 화란 개혁주의는, 천국을 인간의 몸에 입각해서 !!

그래서 제가 오늘 배정을 받은 것이 세 시간인데, 그런데 제가 이 책을 먼저 다 읽고 나서, 이 책에 대해서 굉장히 간략하게 제가 쓴 글에다가 관주형식으로 주를 달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화란 개혁주의 신학의 한계는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인데, 그런데 이 천국을 뭐로 보느냐 하면, 인간의 몸에 입각해서 천국을 쳐다보는 방식으로, 그들은 그렇게 천국을 구성했다고 보는 겁니다.

◈ 그러나, 천국은 예수님으로 몸으로 !!

그러면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실제로 성경 내용을 보면, ‘인간의 몸’은 배제를 해버리고, 천국은 ‘예수님의 몸’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예수님의 몸이나 우리 인간의 몸이나, 다같이 살로 되어있고, 또 피로 되어있고, 그리고 아담의 몸으로 되어있는데, 도대체 그것이 뭐가 그리 차이가 나느냐고 할지 몰라도,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예수님의 몸에는 의가 담겨있고, 인간의 몸에서는 죄가 담겨있어서 죄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몸, 즉 죄에서 나오는 시선을 가지고 천국을 바라보게 되면, 이 천국은 예수님 중심의 천국이 아니고, 현재 있는 우리의 몸을 구원하기 위한, 즉 우리 몸을 소멸하지 않고 영원토록 복락을 누릴 수 있는 나라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나라인고 하면, 놀랍게도 그것이 곧 인간의 나라, 즉 ‘유토피아’ 라는 말입니다. 즉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전부이고, 내가 그리워할 수 있고, 내 아픈 몸을 보상받을 수 있는, 내 몸을 영원히 맡길 수 있는 최고의 나라, 내가 그리던 에덴동산보다 더 월등한 최고의 나라, 그것이 곧 인간의 나라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나라는,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의 긍극적인 도달점, 즉 긍극적인 도착지점이란 말입니다.

◈ 불교 - 산꼭대기에 올라가기만 하면 돼 !!

그래서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진리라는 것은 하나의 산과 같아서, 즉 최고 지점에 진리가 있다면, 거기에 나아가는 길은 꼭 기독교를 우길 필요 없고, 기독교가 되었든, 불교가 되었든, 이슬람교가 되었든, 심지어는 종교가 없던지 간에, 사람이 순수한 경지에 이르면 모든 감각을 뛰어넘는, 그래서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모두가 다 말입니다.

‘켄 윌버’ 라는 사람이 이런 사상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즉 모든 사상을 뛰어넘는 긍극적인 상태에 거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인데, 즉 길은 여럿이지만 도착지점은 오직 한 곳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목표는 제일 높은 산꼭대기이니, 남쪽으로 등정을 하던, 북쪽으로 등정하던,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곳은 한 곳이니, 즉 진리는 하나라는 말입니다.

◈ 개혁주의 신학 - 아니, 아니야 !!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학은 어떠한고 하니, 기본적으로 이러한 사상을 반대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를 하려면 말로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즉 “나는 이러이러해서 그런 범인류적이고 종교적인 것을 반대한다” 라고 말입니다. 분명히 제 말이 맞지요?

◈ 그러면 리델보스는 과연 그 근거를?

그렇다면 그 근거가 무엇인지, 즉 “왜 기독교만 천국에 가고, 나머지는 천국에 가지 못하는 그 근거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과연 리델보스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해명하고, 어떻게 제대로 반박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 근거를 찾는 식으로 제가 이 책을 훑어봤다는 말입니다.

이쪽에서 켄 윌버나 일반불교나 천주교 쪽에서 말하는 ‘인간’ 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 천주교가 참 문제인데 말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말하기를, 신의 자비의 작품인데, 그러니 비록 인간이 예수를 모르고, 즉 기독교 복음을 못 듣고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했을 때,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가 인간을 만들어놓고 지옥 불에 보내겠느냐는 겁니다. 즉 그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매몰차게 일을 하겠느냐는 말인데, 물론 그럴 정도는 아니라고 그들은 주장을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이라면 거기에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자비가 있을 것이고, 또한 그 자비에 근거해서 그들은 영원한 구원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들의 그런 주장에 대해서, 과연 이 리델보스가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이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는지,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제가 이 책을 살펴보았다는 말입니다.

◈ 과연 성경말씀을 열심히 보면 구원이?

그런데 만약에 여기서 개혁주의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기독교의 성경을 몰라서 그렇다.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너희들은 모든 인류도 구원이 된다고 한다” 라고, 그렇게 개혁주의가 반박을 한다면, 하지만 그것은 바로 성경을 열심히 탐구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논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둘이 있는데 이쪽 ‘A’ 라는 사람은 사람은 불교 집안이라서 어려서부터 성경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하고, 그런데 ‘B' 라는 사람은 기독교 집안인데, 그러면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유아세례 받고 했다고 해서, 즉 과연 성경을 많이 알아서 그 만큼 진리에 가깝겠느냐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NO!’ 라고 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 구약 성경의 전문가들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참 장난도 심한데, 아니 세상에 누구보다도 어릴 때부터 외우다시피 했고, 또한 구약성경을 다 꿰뚫어 보는 그런 사람의 손에 의해서 메시아를 죽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 아니, 성경을 몰라도 성령이 임하면?

그리고 이러한 구약성경은 고사하고, 십계명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사도행전에 보면 무슨 일이 있어 났는고 하니까, 즉 성령이 임하니까 그만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이 임하니 말입니다. 전혀 구약성경에 대해서 무지하고 몰라도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구약성경에 정통하고 하나님만을 위하여 모든 걸 헌신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한다면,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영이 임해서 그만 의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을 결정짓는 그 기준을 가져다줘야만 제대로 천국에 대해서 명확하게 안다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 리델보스 - 성경을 많이 읽으세요 ??

그런데 최일규 집사님이 소개해주었던 리델보스의 ‘하나님나라’ 라는 책에 보면, 성경을 깊이 알라는 말은 있지만, 즉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야 된다는 말은 여기 저기에 가득하지만, 그러나 “신약성경을 달달 외워도 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제대로 몰라도 성령이 임하면 구원되는 이유에 대해서 이 책에서 결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야기해버리면 어떻게 되지요? 자기들이 개혁주의를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그만 의미가 없어지고 말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개혁주의 목사의 존재자체가, 즉 소위 목사가 교인들 가르치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굳이 가르치지를 않아도 성령이 오니 구원을 받고, 또한 가르친다고 해도, 가르친 그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한다면, 목사가 교인을 가르친다고 하는 가르침, 그 자체도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 아하, 목사의 가르침도 의미가 없구나 !!

그러니 적어도 복음을 안다고 하면, “목사의 가르침도 의미가 없다” 라는 식으로 증거를 하고 고백을 해줘야만, 그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말입니다. 즉 이렇게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마저도 전혀 소용이 없다고 하면, 그렇다면 “인간의 불가능한 그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인간들의 모든 손을 다 배제하고, 도대체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기에 대해서 쓴 것이 바로 이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이라는 글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동기에서 이 글이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들의 모든 손을 다 배제하고 나서 말입니다.

◈ 아무튼 3시간 동안 전력질주를 !!

아무튼 오늘 주어진 3시간 동안에 리델보스의 책을 통해서 개혁주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되고, 또한 다니엘서의 이것도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무슨 재주로 그것을 다 설명하겠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은 건드리면서 속도를 박차를 가해서, 하여튼 3시간만에 한번 해보자는 말입니다.

이것도 건드리고, 저것을 건드리고, 다 건드리면서, 아까 이야기한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한계를 해보자는 말인데, 지금 여러분은 이 리델보스의 책이 없기 때문에, 저한테만 최일규 집사님이 줬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 있는 내용을 제가 가끔씩 읽어보면서 하겠습니다. 

일단 책 280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죄 사함이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약속인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앞으로 알려질 것이 이제는 전달되는 지식, 그리하여 이제는 이러한 의미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경험하는 지식을 의미한다.

◈ 리델보스 -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 ‘죄’는 아는데, ‘사함’은 몰라 ??

이것이 무슨 말이고 하면, ‘죄 사함’에 대해서 리델보스는 주장하기를, 죄 사함이 뭔지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리델보스의 그런 주장을 들으면, 복음을 아는 사람이 동의를 하는데, “그렇지. 인간은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자기 죄 사함이 뭔지 모르지” 라고 말입니다. 

◈ 이근호 - 인간은 둘 다 모르지롱 !!

그런데 여기서 리델보스가 죄 사함을 둘로 나눕니다. 즉 ‘죄’는 아는데 ‘사함’을 모른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주장하기를,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죄는 아는데’ 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죄가 뭔지도 전혀 몰랐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까지는, 우리는 이렇게 죄가 뭔지를 몰랐는데, 그러니 당연하게 죄 사함도, 즉 용서함도 모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누군가가 “이근호 목사는 리델보스보다도 더 똑똑한가? 그렇다면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대봐라” 라고 한다면, 그 근거는 제가 간단하게 그림으로 설명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아주 간단하게 말입니다.

여기에 이렇게 아담에게 속한 우리 인간이 이렇게 있고, 또한 이렇게 예수님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에게서 쏘아대는 어떤 편견, 선입견, 가다머의 이론대로 하면 그것이 곧 ‘선(先) 이해’ 인데, 즉 우리 인간들은 그런 것으로 예수님을 파악해서, 마치 예수님을 코끼리 더듬듯이 더듬어서 “예수님은 이런 분이야” 라고, 그렇게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보고를 한다는 말입니다.

◈ 셀프가 아무리 의논을 해도, 결국 바리새인의 수준 !!

다시 말해서, “어이, 나 자신 self야! 왜 불러?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야? 응, 예수님을 내가 알아보니까, 이러 이러한 분이라고 하더라”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셀프(에고)가 셀프(에고)한테, 즉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이, 우리는 이 분을 믿기로 하자. - 그래, 알았어” 라고 해서, 그렇게 ‘믿습니다’ 라고 해서 나가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그것이 바로 일상적인 교회에서 말하는, 소위 ‘믿는다’ 라는 형태라는 겁니다. 그들이 제 아무리 복잡하게 이야기하고 그럴 듯하게 꾸며도 그것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목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고, 정보가 들어오게 되면 두뇌에서 종합을 하는데, 즉 자기와 자기가 서로 의논을 말입니다. 즉 “지금 믿을까? 2년쯤 뒤에 믿을까? 아니 죽을 때쯤 믿자. 지금 믿으려고 하니까 벌여놓은 사업도 있고, 교회에 가기가 귀찮으니 죽을 때쯤 믿고 천당으로 가자. 아니지? 그것보다는 미리 믿어야만 돼. 그래? 그럼 미리 믿자”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내부에서 나름대로 의견조절이, 즉 조율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만약에 해서 믿는다고 하면, 그것이 곧 바로 전형적인 바리새인들이 이야기하는 종교라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에게 책망을 받고,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종교라는 말입니다.

◈ 그러나, 말씀은 우리를 장악해 !!

그런데 제가 아는 성경말씀은 무엇인고 하면, 물론 여러분도 다 알지만 “예수님은 살아있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이렇게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예수님이 우리를 장악해버린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프로 레슬러나 강호동이 같은, 그런 무지막지한 놈이 나의 목을 마구 조르면서 “야, 믿을래, 안 믿을래, 이 놈아!” 라고 해버리면, 우리는 ‘켁켁’ 거리면서 “예, 믿습니다” 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제로 살아계신 분이 실제로 우리를 다룰 때, 그때만 이렇게 ‘믿습니다’ 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 나는 나 홀로 있지 않다 !!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믿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대전에서도 그런 강의했습니다만, 즉 “나는 나 홀로 있지 않다” 라는 것을 남에게 알려주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정말이지 바보처럼, 등신처럼, 그것을 남에게 알리고 또 알려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신학교를 졸업해서 “신학은 이렇고, 또 개혁주의 신학은 이렇다” 라고, 그런 것을 시킨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냥 숨이 막혀서, “켁켁, 알겠습니다. 주님 정말로 살아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가 직접 만났던 주님을 직접 증거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실존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 아, 목이 쉬는데, 내일 걱정되네 !

◈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을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가?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하나님을 증거하는데,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신학과 함께 있기 때문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악마와 함께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신학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내 안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분”이, 그렇게 자기와 함께 있는 아버지를 이야기하니까, 도대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 바리새인들은 아버지도 없고, 또한 성령도 전혀 없는데, 즉 그들은 악마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아무리 듣고 또 들어도 납득이 되지 않고, 전혀 이해도 되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전혀’ 라는 겁니다.

◈ 그런데, 12 제자들도 역시 납득이 안 돼 !!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바로 열두 제자들도 역시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끔씩(?) 성령의 능력, 즉 주님이 자기 세력을 약간 나눠주니, 그 나눠주는 그때만 뭐라 하는고 하니, 베드로가 그런 경우인데,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라고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예수님께서 “네가 알게 된 것은 혈육이 아니고, 내 아버지가 알게 했다” 라고, 즉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간 권세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베드로가 그 신앙을 자기의 소유화를 했는데, 즉 “나는 반석이 되리라”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자기의 몸으로서 예수님의 말을 듣고 또 다시 예수님을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자가 고난을 받고 사흘만에 살아나리라” 라고 하니까, 베드로의 셀프가 하는 말이,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입니다.

◈ 신앙고백은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어 !!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말입니다. 베드로가 방금 괜찮은(?) 신앙고백을 했는데, 하지만 그 괜찮은 고백은 결코 베드로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결코 안 된다고 하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믿음을 주었기 때문에, 이제는 믿음이 예수님 쪽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왔다고 하는 인식, 그것은 전혀 잘못이라는 겁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믿음을 주셨으면, 도리어 그 반대로, 이제는 우리가 예수를 배신하고 모독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도 누구 안에서 이뤄지느냐 하면, 우리 자신을 떠나지 않는 주님의 손아귀에서 작용을 받는, 그런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 말씀이 응하게 함이라 !!

그렇게 되니, 베드로가 배신하고 제자들이 떠났을 때도, 나중에 그들이 와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내가 그렇게 예수를 배신한 것도, 주께서 나로 하여금 반석 되게 한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함이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뻔뻔스러워 보이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글,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이미 읽어본 사람들도, 이 글의 핵심을 그렇게 잡기는 힘들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이 글의 핵심부분을 여러분이 좀 더 알기 쉬운 말로 강의를 해볼 것인데, 물론 이렇게 적어놓은 것을 보고서도 이해가 안 되면 참 곤란하겠지만 말입니다.

◈ 인연이란, 상황 끝에 와서 말해야 된다 !!

제가 글로서 한번 적어보겠는데, 즉 “인연이란, 상황 끝(종결)에 와서 말해야 된다” 라는 것인데, 여기에서 ‘인연’ 이란 말은 기독교 용어로는 ‘예정’ 이란 의미이고 말입니다. 여기 ‘종결’ 이란 말 대신에 제가 이 글에서는 ‘종말’ 이라고 했고, ‘예정’ 이란 말은 여기서는 ‘묵시’ 라고 표현했는데, 그리고 그 다음에 상황 전에 있던 모든 것을 ‘역사’, 또는 다른 말로 ‘나의 인생’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노사연이 “우리의 만남은 인연이었어” 라고 했는데, 그것은 상당히 건방진 표현인데, 왜냐하면 아직도 역사가 남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말을 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했다가 나중에 헤어지면, 전혀 그것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마지막에 이야기할 것은, 즉 “마지막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라는 문제인데, 우리 인간은 그것을 안다는 말입니까? 모른다는 말입니까? 그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역사는 누가 구성을 합니까? 어디까지나 역사는 자기 위주로 구성하는데, 그러니 마지막에 일어나는 일을 “나는 모른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 인자(人子) - 역사를 끝자락을 끄집고 와서 !!

그렇게 인간들은 모르는데, 그런데 이 모든 역사의 끝을 미리 다 가지고 계시는 분이 오신다고 하면, 바로 그분은 모든 해답을 갖고 있겠지요? 바로 그분을 ‘묵시적 존재’ 라고 하고, 그분을 이 글에서는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곧 ‘인자’ 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표현할 때 자꾸 ‘인자’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올 것이다” 라는 의미는, “너희들은 구름 타봤어? 구름도 못 타면서 안다고 까불지 마!” 라는 의미인데, 그리고 뒤에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라”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 역사는, 철저히 내 몸 중심 !!

이것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의도하느냐 하면, 지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구원을 위한 모든 시도를 이미 다 해보았는데,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전부가 다 ‘역사적’ 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역사적이 되려고 하면, 항상 그 역사의 중심은 내 몸이, 즉 자기 몸 중심의 역사가 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역사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10명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역사는 몇 개가 나오겠습니까? 당연히 10개가 나온다는 겁니다.

◈ 강이 - 야, 인생이 괴롭네 ??

예를 들어서, 지금 최일규 집사님의 아이인 강이가 몇 살이죠? 만약에 강이가 10살인데 숙제를 하면서 이런 소리를 했다고 합시다. “참, 인생이 고롭네(괴롭네?). 살기가 힘들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누구에게 감동이 되느냐 하면, 만약에 5살 먹은 동생이 있다면, 그 아이가 감동을 먹는다는 겁니다. “야, 오빠는 인생 제대로 사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나이 80이 넘은 할머니가 계시다면, 그 할머니에게 한 대 얻어맞지 맞지 싶은데, “아니, 니가 10년을 살아놓고 인생을 아느냐?”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강이는 겨우 10년 살아놓고는, 왜 인생은 고롭다는 임시적인 역사를 제공하는 겁니까? 제가 왜 ‘임시적’ 이라는 표현을 하는고 하니까, 리델보스가 천국을 이야기할 때 바로 ‘임시적’ 천국이라고 했는데, 즉 ‘한시적’ 이라는 겁니다.

◈ 역사는, 내 몸으로 내가 이루어야지 !!

그런데 겨우 인생을 10년밖에 살지 않은 이 아이가 “아, 인생은 정말 괴로워” 라고,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누가 옆에 있어도, 비록 자기 옆에 인생을 80년을 산 할머니가 있어도, 그것은 누구의 체험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자기의 체험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자기 역사는, “내가 내 체험을 이루어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기 체험이 이루어 가는, 그것이 곧 강이에게는 하나의 계시가 된다는 겁니다. 즉 10살을 먹은 이 아이는, 자기 몸을 중심해서 외부에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신의 계시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외부에 신이 있다고 가정을 하면, 그 신에게서 쏟아지는 그 모든 사건들이 10살 먹은 이 강이를 힘들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하나님을 볼 때 어떻게 보겠습니까? 당연히 자기를 힘들게 한 하나님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 역시, 좋으신 하나님께서 !!

그런데 그것을 자기의 구원위주로 여긴다면, 만약에 그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 아이는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겠어요? “나는 10년 동안 이렇게 힘들게 살았지만, 그러나 그 좋으신 하나님이 언젠가 이 힘든 것을 보상해주리라” 라고, 그럴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이야기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각이 무엇인고 하니, “이제 조금만 더 참자. 이 지긋지긋한 로마의 압제에서 조금만 더 참자. 왜? 다니엘이 있잖아. 에스겔이 있잖아. 스가랴 있잖아. 우리가 그 말씀을 믿어야지. 그래 믿자. 파이팅!” 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구약의 도사였고, 구약에 빠싹했고(?), 정말로 모르는 것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태도는 오늘날 교회에 가는 사람과도 똑같은데,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이 무엇인가요? “비록 지금은 이렇게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언젠가 보상을 해주리라. 그러니 그것을 믿자” 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잘못됐다는 것은 누군가와의 마주침에서 발각이 되는데, 사실상 현대철학에서 이 ‘마주침’이 굉장히 중요한데. 아무튼 그들이 누구하고 마주쳤습니까? 예수님하고 마주쳤지요. 그러한 마주침을 두고서 현대 포스터모더니즘 철학에서는 ‘타자(他者)’ 라고 하는데, 혹은 ‘타인(他人)’ 이라고도 하고 말입니다. 라캉, 들뢰즈, 알렝 바디유, 레비나스 등등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그들의 공통된 관심사가 무엇인고 하면, 돌발 사태를 가져오는 ‘낯선 타자’ 인데, 왜 그러한고 하면, 그 이전까지는 무엇인고 하니, “주체가, 내가, 자아가, 즉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라고 하는, 여기 있었다면, 그렇게 해서는 사회 꼴이 말이 아닌데, 너무나도 삭막해서 말이다.

◈ 모든 것들과의 화해 ??

그러니 이제는 서로서로 종교의 벽을 넘고, 사상의 벽을 넘어서, 이제는 내가 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선택을 당하면서 살아갈 때, 그때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화해의 삶을, 굳이 그 앞에다가 하나 더 붙인다면, 모든 것들과의 화해인데, 바로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오늘 좋은 말이 제법 나오는데 말입니다(ㅋㅋ).

아무튼 그들이 이야기하는 십자가의 의미가, 즉 화목제물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이렇게 성경에 나오는 그런 의미를, 또한 희년의 의미를 어떻게 보는고 하니, 모든 것들과의 화해인데, 그래서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표현에 보면 “이 집에 오는 사람마다 평화를” 리고 하는데, 그렇게 모든 것들과의 평화를 추구하는데, 그러니 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들과 다같이 손에 손잡고 살아가자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위아 더 월드” 인데, 그리고 얼마 전에 주사를 잘못 맞아서 죽었던 마이클 잭슨이 한 이야기가 바로 “우리는 모두 하나다” 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시도한 사람이 다니엘에 나오는데 유명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었는데, 즉 모든 것을 하나의 신전에 만들겠다는 겁니다.

◈ 이제는 오직 ‘하나’로 !!

이러한 역사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로 소급된다는데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인간들이 만든 바벨탑이 엎어지게 되면, 백날 엎어져도 바벨탑은 인간의 힘으로 만든 그 속성이 어디로 가는고 하니, 결국 하나로 나아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하나로 말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하나가 되려고 하면, 즉 모든 사상이 하나가 되려고 하면, 먼저 그 사상을 실어주는 도구인 언어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언어를 깬다는 것은 곧 사상을 깨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사상은 흩어지겠지만, 그러나 결국 그들은 한 사상으로 모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 먼저 ‘공통성’이 있으면, 거기서 뽑아내어서 !!

이렇게 하나의 사상으로 모이려고 하면, 이제 첫째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 나오니 긴장을 좀 하시고, 그렇게 사상이 하나가 되려고 하면, 하나의 인물과 그 밑에 있는 다수의 인물들 가운데는, 먼저 ‘공통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통성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공통성은 어디서 만들어내는고 하면, ‘너와 나’ 라고 하는 ‘여럿’ 에서 공통점을 모우고 모아서, 그걸 ‘좍’ 뽑아서 위에다가 세우면, 그렇게 하면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렇게 될 때, 쏘아 올렸던 희망의 탑, 즉 비전의 탑과 그 밑에 있는 우리가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이상은 흩어지지 않고 모두가 다 “위아 더 월드”가 되고, 제대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즉 사상적인 하나가 말입니다. 그래서 종교의 벽을 헐고 모든 것들의 화해를, 그것을 지금 이 시대가 주장하는 것입니다.

◈ 누가 누가 잘하나?

그렇다면 그 이전 시대는 무엇이었는고 하니, 그야말로 경쟁의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서양이 대포와 무기를 가지고 어디를 점령합니까? 동양을 마구 점령하는데, 그렇게 서양과 동양이 부딪치면 당연히 서양이 뛰어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서양, 즉 유럽의 열강들은 “누가 누가 더 뛰어나는가?” 라고 경쟁을 했는데, 그것이 곧 제국주의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그때는 독보적으로 자기 자신의 발달을 추구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자본주의 시대에 염증이 생기고, 또한 전쟁에서 지쳐서, 이제는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자고 하는데, 즉 하나의 사상 속에 전부를 다 굴복시킨다는 말입니다.

◈ 하나 - 역사적 종착점이고, 역사적 목적 !!

이것을 저는 “역사적 종착점이고, 역사적 목적이다” 라고 하고 싶은데, 즉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되는 역사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사고방식이 학생들 교과서와 다른 곳에 다 박혀 있을 때, 모든 인간들 머릿속에는 결국 “하나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 즉 이웃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기 때문에, 경쟁에 지친 사람들의 경우에, 그러한 현실이 결국은 “하나가 된다” 라고 하는, 그런 묵시적인 것을 끌어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리델보스가 아 ‘하나님 나라’ 라는 책에서, 리델보스는 교회와 천국을 나누고 있다는 겁니다. 그는 천국을 ‘바실레이아’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이 책에서는 천국과 교회를 분명히 나누고 있다는 말입니다.

◈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 !! 
◈ 교회는, 택함을 받은 자들의 모임 !!

그래서 “리델보스 목사님, 당신이 두꺼운 책을 썼는데, 한 마디로 이야기해주세요. 천국이 뭡니까?” 라고 물으면, 리델보스가 이야기하기를 “예,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교회와 천국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서, 거기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 즉 백성으로 부른 사람들 집합을 교회라고 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단체나 일반 개혁주의 신학을 한 사람들은 이 두꺼운 책에서 달랑 그걸 쏙 뽑아내는데, 그렇게 뽑아내서 자기가 갖고 있던 역사적인 욕구, 즉 자기 몸 중심의 역사를 가지고서 이해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는데, 감이 잘 잡히지 않지 싶은데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이 역사가 어디서 나온다고 했습니까? 아까 10살 먹은 강이에게도 나온다고 했는데, 즉 역사는 자기 몸에서 나오는데, 그런데 자기 몸은 무엇을 담습니까? 자기 체험의 뭉치인데, 즉 자기가 체험한 것이 자기의 몸을 이루고, 그것이 자아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거기서 역사가 나오게 되면 그야말로 일방적인 역사인데, 그래서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모두 다르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다 다르던 말든 간에, 우리는 언젠가는 하나가 다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을 두고, 그들은 리델보스의 주장에 동조를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통치’, 곧 ‘천국’ 이라고 본다는 말입니다.

◈ 천국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예수님 나라 !!

그런데 저는 그것을 뭐라고 비판을 하는고 하니, 그것은 전혀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오히려 ‘인간 나라’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즉 본성적으로 우리 인간들이 원했던 인간의 나라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멱살을 쥐고, “아니, 이근호 당신이 말하는 천국이 뭐야? 한 마디로 요약해봐” 라고 하면, 저는 “예, 예수님 나라입니다” 라고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델보스는 그것이 예수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으로 오늘 강의는 끝났다고 할 수 있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라고 한다면, 리델보스나 그의 계열에 선 사람은 딱 두 가지를 가지고 저를 반박하지 싶은데 말입니다.

◈ 예수님이 그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니, 아버지 나라 ??

첫째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예수님은 그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라 했으니까, 당신 말대로 예수님의 나라는 중간기착지점에 지나지 않고, 즉 예수님 나라는 임시적인 나라고, 최종 나라는 아버지께 때라 해서, 그렇게 아버지께 바치니까, 우리처럼 마지막 아버지의 통치라고 하면, 당신이 말한 예수님의 나라는 이미 포함된 것이니, 거기서 머물지 말고 더 나가야지”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고전 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이런 이야기를 참으로 많이 들었는데, 즉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너희 사도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의 것은 아버지의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예수님의 나라가 맞기는 맞는데, 그러나 그것은 중간지점이고 더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전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 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전 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 예수님의 정보가 없으면, 천국이 아니야 !!

그것이 왜 아니냐고 하면, 중요하니 일단 한번 적어보겠는데, “예수님의 정보가 들어있지 아니하면 천국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즉 천국은 ‘예수님의 정보’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리델보스와 한국교회의 개혁주의자들은 뭘 주장하느냐 하면, 이런 정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정보를 담고 있는 틀, 즉 예수님이 결국은 아버지한테 바치니까, 결국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냐고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제일 어려운 대목에 와 있는데, 그래서 천천히 하겠는데,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대체 예수님의 정보가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점인데, 그것은 곧 예수님의 몸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여기 이렇게 우리의 몸이 있다고 하면, 그런데 문제는 리델보스나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현재 자신의 몸을 유지한 채로 예수님의 정보를 받으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 예수님의 정보에, 나의 정보가 섞이면 안 돼 !!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를 가지고 그만 자기 몸을 유지해버리면, 제 아무리 예수님의 정보가 와도, 일단 나에게 오면 누구의 정보로 변환이 됩니까? 이렇게 내 몸이 살아있으니까 나의 정보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정보에 그만 나의 정보가 섞이게 된다는 겁니다. 즉 나의 기대와 나의 희망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나의 정보가 그대로 예수님 말씀대로 ‘아버지께 바칠 때’ 라고 했으니까, 나의 정보가 섞인 채로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아버지 나라가 이해가 된다는 말은,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나의 정보가 포함된 이 천국은 결국은 천국입니까? 아니면 나의 나라입니까?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나의 나라’ 라는 말입니다.

◈ 나는 부정을 당해야만 !!

그러면 여기서 천국이 온전히 예수님의 정보가 되고, 나의 정보가 없어지려면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나는 죄인이 되고, 나는 죽어야 되고, 나는 심판을 받아야 되고, 또한 나는 부정을 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적으로 우리가 부정을 당해야만, 비로소 면류관을 예수님께 바치게 되고, 오직 순수한 예수님의 정보만 될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 ①, ②, ③ !!

오늘 지금 목이 쉬어서 내일 설교를 못해도 할 수 없는데, 이것이 너무 중요하니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순서는 무엇인고 하면, 예수님 말씀은 이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몸이 ①번이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정보가 ②번이고, 그 정보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모든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고 하는데, 그것이 ③번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①, ②, ③의 노선에,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있으면, 그것을 우리가 이것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누가 한번 답변해보세요. 제가 분명히 없다고 했는데, 왜 없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다, 아니다” 라는 것조차도 우리는 전혀 모른다는 말입니다.

◈ 인간은 왜 죄인인가?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니 우리가 졸지에 뭐가 됩니까?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죄 안에 무엇이 들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성경이 어떤 이야기해도, 이미 내 몸이 있는 이상, 그것이 뭐로 변하는고 하니, 전부가 내 몸 위주의 그렇게 불순물이 섞인 거짓말로 그만 뒤바뀌어서,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①, ②, ③, 즉 예수님의 몸에서, 예수님의 정보를 담고, 그래서 천국을 이룬다는 이런 노선에서, 우리 몸은 철저하게 배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배제를 당하는, 즉 철수하는 내용 가운데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는 내용도, 그것도 역시 우리의 몸에서는 다같이 배제를 당해야 될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의 몸에다 제발 같다 부치지 말라는 겁니다.

◈ 그러면 배제를 했다고 하는 그 몸은?

이것이 이해가 안 되면 강의를 더 이상 못하는데, “목사님, 정 그렇다고 하면 배제를 했다고 치고 믿으면 안 됩니까?”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러나 그것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배제했다’ 라고 치고 믿으면 “주님이여, 저는 배제를 했습니다” 라고 하는 그 몸은 또 누구의 몸이냐는 말입니다. 그것도 역시 자기 몸이 아닙니까? 즉 “나는 자기를 부인한다” 라고 여기는 ‘자아’는 도대체 뭐냐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에고, 에고’ 인데(ㅋㅋ), 즉 셀프가 아니냐는 겁니다. 이차적으로 돌입된 셀프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조차도 “나는 붕괴했다, 나는 부셨다” 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렇게 두 번 부순 자아는 또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그것이 소위 ‘신종 자아(?)’ 라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을 이룬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내 몸이 있는 이상, 나의 신앙 경력, 즉 다른 말로 역사를 이룬다는 겁니다. 그래도 반응이 조금은 있어야 재미가 있는데, 지금 자아를 부순다고 바쁜가요?

* 질문 - 목사님, 그런 하나님 나라를 주장하는 개혁주의가 진화론과도 연결이 되죠?

당연합니다. 그들은 역사를 종착점 없는, 즉 중간 역사는 없다고 하는데, 그러니 그들은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뭡니까? 진화론이 아닙니까? 그러니 말도 안 되는데, 그래서 그들은 미완료, 즉 매일같이 ‘이미, 아직’,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온전한 몸만이 천국을 이루고, 우리가 거기에 가담하지를 않는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데, 진짜 눈에 보이는 예수님이 살아서 우리의 목을 마구 조를 때, 바로 그때뿐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식으로 알려고 한 사람은, 그렇게 지식을 알려고 했던 내가 또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바울이 무엇을 하려고 갔습니까? 그가 공부를 적게 해서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공부를 엄청 많이 했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완벽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압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묵시문학도 다 들어있는데, 그야말로 성경에 도사라는 말입니다.

◈ 문제는, 바로 몸 자체 !!

하지만 백날 그런 소리를 해도 그분이 직접 와서, “야 사울, 너 이리 와. 이 무식한 놈아, 너 죄인이 맞지” 라고 하면서 그를 땅에다 패대기를 칠 때, 그때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식이 떨어진 것이 아니고, 내 몸에 문제가 있다고, 그 몸 자체가 그렇게 패대기를 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에게 성령이 오니까, 그들이 뭐라 합니까? 머리 긁적긁적하면서, “주님, 정말 살아계셨군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유대교가 무엇인지, 구약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공부를 하려고 했더니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죽었다고 사흘만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군요” 라고 말입니다.

◈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맺음 !!

그러니 신학이고, 목사고, 집사고, 나발이고 간에 다 필요가 없는데, 오직 주님이 살아있어서 나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틀을 잡겠습니까? 틀을 전혀 잡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리델보스, 즉 개혁주의 측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목사, 그건 우리가 기본적으로 아는 것이고, 그것은 신앙의 토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믿으니까 하지” 라고 하는데, 아마 리델보스는 자기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 싶은데, 왜냐하면 자기가 이 만큼 책을 지어놓았으니 말입니다.

◈ 오직 그리스도의 몸과 천국만을 !!

하지만 예수님이 직접 관여해서 하게 되면, 이렇게 리델보스처럼 천국을 인간의 몸으로, 즉 사람들을 시간으로 납득을 시키고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으로만 표현이 되는고 하니, “그리스도께서 천국을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가?” 라고,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과 천국만을 이야기만 할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어떤 식으로든 이해를 하든 간에(?), 그 다음에 반드시 우리는 빠져 주어야만 되는데,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이라는 글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반드시 빠져야만 한다는 겁니다.

◈ 리델보스 - 나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을 뿐 ??

그런데 우리가 안 빠지고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이해가 됩니다. 이렇게 하시면 믿어집니다” 라고 한 것이 바로 리델보스의 이 두꺼운 책인데, 여기에 보니까 성경구절로 아예 도배를 해놓았는데, 그러니까 이것을 사람들이 감히 비판을 못한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성경에 있는 그대로 했으니까 말입니다. (좀 비겁한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리고 성경구절을 합법적으로, 즉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적어놨으니(?), 그것을 누가 감히 비판하겠습니까? 도저히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래, 맞아. 천국은 이미 이루었구나. 그런데 그것이 임시적이라고? 아, 그것도 일리가 있구나. 왜? 성경에 이런 구절도 있으니”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침착하게 하려고 다짐을 했지만 또 다시 안 되는데(ㅋㅋ), 아무튼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간단한데, 즉 예수님께서 하신 천국의 말씀을 모아서 전부가 이만큼 된다면, 그것을 뽑아내는 겁니다. 즉 임시적 천국, 그 다음에 현재 이루어진 천국, 또 미래에 이루어질 천국, 그렇게 분류를 시킨 책이 바로 이 두꺼운 책의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책이 두껍다고 해서 기가 죽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리델보스는 이렇게, 즉 예수님의 말씀대로(?) 임시적인 천국은 임시적으로만 분류해놓고, 현재적인 천국은 현재적인 천국으로 뽑아내고, 또한 미래에 아직도 남아있는 천국은 미래의 천국대로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델보스는 말하기를 “어이, 내가 이 책에서 잘못한 것 있으면 찾아내 봐라. 성경에 있는 그대로가 맞지? 나는 주님이 하라고 한 그대로 했다” 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말씀한 그대로 자기가 다 했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 잘못이냐는 말입니다. 흔히들 목사님 가운데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닌데, 자기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했는데 뭐가 잘못이냐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 따위 소리를 하겠지만 말입니다. 

◈ 목사님, 겨자씨 비유를 어떻게?

한번은 대전에서 어느 목사님과 같이 차를 타고 오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목사님, 겨자씨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면 온전한 해석이 됩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해드렸다는 겁니다.  

무슨 내용인고 하니, 겨자씨 비유를 어떤 용어나 다른 어휘력을 동원해서 아무리 옮기고 노력을 해도, 지금 만약에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재림했다고 하면, 똑똑하고 신학을 많이 공부한 목사만 구원을 받을 줄 알았더니만, 정작 그렇게 신학을 전혀 모르는 연세가 많은 할머니가 구원을 받았다고 했을 때, 그것을 할머니에게 한번 물어보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폼이 완전히 천국 폼인데, 대추밭에 있어서 이 대추나무를 생명나무라 여기고 말입니다(ㅋㅋ).

“할머니, 할머니는 겨자씨 설교를 할 때 어떻게 들으시고 이렇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제 설교가 괜찮았던 모양이죠?” 라고, 목사가 그렇게 착각해서 묻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할머니 말하기를 “겨자씨 말씀이, 이게 그대로 믿어지던데요”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 말씀은 믿어지는 것 !!

다시 말해서, 목사가 설명을 잘해서 믿는다가 아니라, 그냥 그 말씀이 그대로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소리를 듣고 목사는 입을 닫고 가야되는데, 왜 그런가요? 자기는 전혀  한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사실 그것이 목사의 임무라면 임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분명히 성령께서 말씀을 믿게 했는데, 그런데 그 할머니 앞에서 열광하는 그 목사는 뭐라고 착각을 하는고 하면, 이전에 이 부분 자기가 이렇게 설교해서 여러 명이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즉 자기 몸의 역사, 자기 몸의 체험을 유지하면서, 그것을 그대로 적용시키면 아마 효과를 볼 것이라는 자기 논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목사가 지옥에 간다는 말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천국에 와보니까, 자기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계신 것을, 그것을 자기가 열광적으로 설교할 때는 그만 그 순간에는 잊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의사가 수술을 할 때, 주님께서 수술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분필을 쥐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만 수전증에 걸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님이 수전증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을 허락해서, 그래서 자기가 분필을 쥘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 그런데, 십자가의 영이 오게 되면 !!

그런데 그것을 언제 깨닫는가? 다시 성령이, 즉 십자가의 영이 오니, “주여, 제가 나의 역사를 또 다시 고수했군요” 라고, 그렇게 자기 역사에 대해서 회개한다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죄는 그 사람의 구원을 취소하는 죄가 아니라, 그야말로 성경말씀대로 “내가 죄인을 용서한다” 라는 예수님의 정보가 내 안에 잠재되어있음을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즉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의 정보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작업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날마다 심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 안에 뭐가 있는고 하니, 나의 역사적인 정보는 모두 다 날아가 버리고, 누구의 정보가 임했는고 하니, 예수님의 몸에서 생긴 정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을 통해서, 이미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마치 이렇게 냉장고의 냉장실 안에 음료수가 들어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아하, 그래서 내가 죄인이구나 !!

그렇게 이미 다 들어있는데, 그런데 우리가 까불 때마다 주님이 그것을 부셔버리면, “아하, 주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구나” 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십자가 통해서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사건이 날마다 반복이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는 도저히 설명하지 못할 새로운 죄의 개념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인데, 즉 “아하, ‘나’ 라는 존재가 이 땅에 있는 자체가 바로 죄 때문이구나. 몸이 있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이미 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아직도 이 땅에 나는 태어났어야만 했구나. 죄 때문에 말이다” 라고 말입니다.

◈ 그런데, 역사의 끝에 가면 !!

왜 그런가요? 제가 “우리는 서로 인연이었다” 라는 말을 언제 할 수 있다고 했지요? 마지막 끝에 가서야 비로소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고 했는데, 그러니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은 그 말 자체가 무슨 의미라고요?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끝났으니까, 비로소 예수님의 정보가 우리 안에, 전혀 우리의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우리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가 과연 이 책에 있는가 하면, 물론 있다는 말입니다. 분명하게 있는데, 사실은 제가 이렇게 설명해서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런 틀은 여기에 많이 있는데, ‘현재적’이 어쩌고 할 때 보면 많이 있는데, 그런데 이 양반은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는고 하니, 즉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하면 납득됩니다” 라는 식으로 설명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리델보스는 왜 그렇게 설명을 해주느냐 하면, 우리가 ‘이미’ 되었다고 까불지 말고, ‘아직’ 남아있는 천국도 있기 때문에, 당신은 이미 된 것도 기뻐하고, 또한 아직 남은 것도 있어서, 그러니 너무 긴장을 풀지 말고, 그것을 현재 천국과 올 천국간의 관계를, 그것을 무슨 관계라고 하는고 하니, 신학교 때 다 배웠는데, 즉 ‘긴장관계’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 차려라. 이 놈들아!” 라는 이야기를 이 양반이 하고 싶어한다는 말입니다. 

◈ 여러분, 정신줄을 놓고 사세요 !!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정신을 차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신을 차리면 죄를 안 짓게 되는데(?), 사실은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정신줄을 그냥 마구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정신줄을 놓으면 우리 몸이 정신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여기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에 보면 나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은 컨디션에 따라서, 즉 기분이 좋을 때는 사랑이 나오고, 기분이 나쁘면 미움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신줄을 놔도, 매순간순간 우리 몸이 다 알아서 하는데, 즉 추석 때 음식을 많이 먹고 배탈이 나면 컨디션 안 좋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뭔가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오는 것을 우리는 현재 그 순간의 나의 정신줄이고 영혼이라고, 그렇게 스스로 의미를 주는데, 하지만 그것은, 우리 몸에서 나온 또 다른 죄의 흔적이라는 말입니다.

10분만 쉬고 하겠습니다.


                                          2009,10,06 오후 11시 26분에 다시 정리함. - 녹취 ‘구‘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