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특강 2009-08-29  고신 화란개혁주의(성화론) vs 십자가(인자의 나라)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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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대구특강 - 리델보스의 하나님 나라 3

                                                   2009,08,29  강의, 이근호 목사   녹취, 한윤범 목사
 
◈ 신상이 무너졌다 !!

이제 시작을 하겠는데, 아까 말한 다니엘서의 신상을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신상이 무너졌다고 했는데, 그렇게 신상이 무너지고 이렇게 발이 있다면, 이 신상 전체는 금, 은, 놋, 철, 그리고 철과 진흙으로 되어있는데, 여기 끝에 있는 이 발과 인자의 나라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즉 역사전체를 넘어뜨리는 인자의 나라, 즉 묵시의 나라가 그렇게 온다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역사적으로 보면 전혀 틈이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시간적으로 바로 바로 그 다음에 온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그 어떤 틈도 없이 바로 밑층에 주어진다는 겁니다. 즉 계속해서 주어진다는 의미로서 빈틈이 없다는 말입니다.

◈ 선취(先取) - 미래가 현재를 공격 !!

그런데 사람들은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묵시가 미리 와서 전한다” 라고, 혹은 “미래가 미리 와서 주어진다” 라고 해서, 그것을 미래의 ‘선취(先取)’라 하는데, 즉 미리 취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표현인데, 왜냐하면 이 ‘선취’ 라고 하면 미래의 것을 미리 취득한 것이 되는데, 그런데 원래의 뜻은 미래의 선점, 내지는 미래의 침노, 혹은 공격이라는 말입니다. 즉 미래가 현재를 공격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도 사실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데, 왜냐하면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가 그때 미래에 가서 잘하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마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처럼 말입니다. 즉 “아직은 그때 미래가 아니니까, 그때에 가서 하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

그러니 여기서 사용하는 이 ‘선취’ 라는 말은, “지금 주인이 나가도 없더라도, 주인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의미인데, 만약에 주인이 있다면 당연히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다섯 처녀나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말입니다. 즉 주인이 먼 타국에 갔더라도 지금 있다고 본다는 말입니다.

◈ 예수님 - 나는 너희들의 룰에 놀아나지 않는다 !!

그러면 주님께서는 “주인이 먼 타국에 갔다” 라고 하는, 그러한 비유의 말씀을 왜 하십니까? 그런데 지금 주님은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멀리 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너희들이 생각하는 시간론에는 내가 저촉을 받지 아니한다” 라는 것을, 즉 “너희들이 만든 게임의 룰에 내가 놀아나지를 않는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게임의 룰을 이 리델보스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임시적인 것, 현재적 왕국, 미래적 왕국 등등을 주장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슈바이처는 ‘철저적 종말론’ 이라고 해서, 즉 종말도 아닌 것이 현재도 아닌 것이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그저 종말이 가까이 왔다” 라는 것만을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몇 센티나 가까이 왔는지, 또한 시간이 얼마나 남았다는 겁니까?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을 도저히 풀어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왔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것을 말하는 제가 잘못이지 싶은데, 방금 말한 것은 취소하겠는데, 해봐야 어차피 어려우니까 말입니다.

아무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그 나라가 아무리 가까이 와도, 그러한 가까이 옴을 역사적 의식을 갖고 있는 우리들은 그것을 해석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는 항상 미래라고 하는 것을, 그것이 아무리 가까이 와도 미래는 여지가 있는, 즉 아직도 뭔가 남아있다고 여기니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미래를 맛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여전히 남아있으니 말입니다.

◈ 회개하라 !! - 저리 꺼져 !!

그러니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의미는, 그것을 풀어서 보면 “물론 너희들에게 회개할 시간은 주겠다. 왜냐하면, 아직 완전하게 온 것이 아니라 가까이 왔으니 말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말은 그렇게 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이 ‘회개하라’ 라는 것은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렇게 회개가 된다는 겁니까? 안 된다는 겁니까? 도저히 회개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결국 너희들이 시간을 가지고 아무리 회개를 해도, 그 회개가 될지 않을 뿐더러, 그러니 너희들은 하늘나라가 와도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죄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말입니다.

◈ 사도바울의 경우에 !!

그렇다면 죄는 언제 압니까? 죄는 주님이 오셔서, 그 자체적인 의미를 담고 십자가에 죽어야 되는데, 사실은 그렇게 죽어도 인간들은 죄의 의미를 모른다는 겁니다. ‘사울’ 이라는 사람이 그 대표적인데, 그는 예수님 십자가에 죽어도 죄를 의미를 몰랐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이단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어떤 인간이 와서 십자가 죽었는데, 그 십자가의 피가 죄를 용서해준다고 하는 놈들이 있네. 참 웃기지. 그러니 내가 이런 놈들을 가만두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지. 어서 잡아 죽여라” 라고 해서, 사울이란 자가 앞장서서 사람들을 덮쳤다는 겁니다. 그러니 25년 전에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은, 그냥 하나의 과거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울에게 성령이 오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지난 과거의 사건이 어떻게 되었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라고, 그야말로 전혀 다른 사건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분명히 십자가 사건 때는, 그 옆에 강도 둘밖에는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자기는 그 십자가와 함께 죽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나만 그렇게 죽은 것이 아니고, 여러분도 십자가에서 함께 죽지 아니하면 예수님과 연합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세례, 연합 - 묵시적 개념으로, 역사를 죄라고 공격 !!

그렇다면 이 ‘세례’, 혹은 ‘연합’ 이란 개념은 이미 무슨 개념을 벗어나야 됩니까? 역사적인, 즉 내가 정렬해놓은, 내가 배열을 시킨 역사적이고 시간적 의미를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것을 공격하고, 그것을 죄라고 지적해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렇게 지적하는 힘, 그 힘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비로소 주님의 묵시적 사건의 의미가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날 치세요. 내가 무슨 생각하든지 나를 때려주세요. 저는 주님이 까라면 깝니다. 그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주님이니 말입니다. 주님이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할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 리델보스는, 인간의 가능성으로 접근 !!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이 리델보스의 약점이 바로 그런 점인데, 즉 주님께서는 안 된다는 차원에서 공관복음서를, 즉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이 리델보스가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주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으로 채우다보니까, “그렇게 하면 이렇게 됩니다” 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즉 “회개를 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본인은 주춤주춤 하지만, 그런 식의 논리가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리델보스가 제대로 하늘나라를 알았다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쓰면서도, 그 제목을 일단 ‘하나님 나라’ 라고 해놓고, 그 부제로 ‘남아있는 하나님 나라’ 라고 하든지, 아니면 ‘덜 된 하나님 나라’ 라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가 다 완성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마태, 마가, 누가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천국이나 하늘나라라는 개념이 거기에 중점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아마 그것을 뽑아내면 하늘나라의 책이 한 권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 책을 보지 않아서 말하기가 좀 그렇지만, 하지만 이 책에 목매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때문에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 천국도 역시 불가능 !!

이야기를 계속 해봅시다. 제가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해도 해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는 것인데, 즉 불가능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불가능 속에 놓일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 불가능을 어디까지 확장시키느냐 하면, 우리가 들어가고자 하는 천국까지, 즉 천국까지 합쳐서 우리는 항상 불가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가지 힘들다” 라고 하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누가 갈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은 뭐라고 단정을 하십니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 라는 것인데, 즉 불가능성으로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신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말 자체가 우리한테는 모순이 된다는 말입니다.

◈ 인간은, 해석 자체가 불가능 !!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는 안 된다, 하나님은 하신다” 라는 것은 포함시킬 때, 이것은 역시 예수님이 보시기에 “해석이 틀려먹었다” 라는 것이 되는데, 왜 그런가요? 그렇게 해석하는 자체가 어디서 나온 해석입니까? ‘해석 불가능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다짐에 다짐을 해도 그것은 어디에 포함이 됩니까? “여전히 너는 나를 몰라” 라는 것에 포함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만약에 제자들이 그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더라면 누구를 죽이지 않았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지 않도록 했든지, 아니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에 아마 자기들도 같이 자결을 했을 겁니다. 비겁하게 도망치지를 않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무리 “우리가 안다, 안다” 라고 해도 백 날을 이야기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모두가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놈은 팔아먹고, 한 놈은 배신을 때리고, 또 다른 놈들은 36계를 놓고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예수님의 말을 많이 듣고 기억을 해도, 그것은 여전히 어디 안에 녹아있는고 하니, ‘나의 불가능성’ 안에 녹아있다는 겁니다. 즉 잘못된 해석의 풀장에, 그러한 욕조 안에 그저 눌러 앉아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우리는 아니지요?”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물론 우리는 아닐지 몰라도 그런 절차를 밟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런 제자들의 절차들을 밟고 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밟으면 됩니까?” 라고 한다면, 그 절차를 평생 끌고 가야만 된다는 겁니다. 즉 “주체는 불가능, 주체가 깨지면 가능” 이라는 말입니다. 

◈ 종은, 자기 의견이 없어 !!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이 하신다” 라는 것을 예수님이 어떻게 표현했는고 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을 했는데, 즉 ‘주인과 종’으로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늘나라는 독자적으로 자기가 알아서 판단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누구의 종이 되어야만, 그래서 그 주인 덕분에 들어가는 나라이다” 라는 겁니다. 즉 누구누구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종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종은 절대로 자기 자신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종은 먹든지 마시든지 누구를 표현해야 됩니까? 오직 자기 주인이 어떠한지, 그 주인을 표현해야 된다는 겁니다. 자기 주인만 말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발전시키면서(?),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리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너희들은 나의 신부이다” 라고 하면서 혼인잔치를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또한 어떤 때는 “너희는 나의 종이다” 라고 했고 말입니다. 이것을 한꺼번에 말해서, 구약적으로 해서 ‘백성’ 이라고 했고, 또한 ‘내 자녀’ 라고, 즉 ‘내 아들’ 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 아들은, 당연히 아버지만을 이야기해야 !!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쉽게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종이라면 누구 이야기를 합니까? 주인만을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아들이라면 누구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오직 아버지만을 이야기하고, 그러면 신부라면 누구만 이야기해야 합니까? “나는 신부이다” 라고 하면 안 되고, 누구를 증거해야 됩니까? 오직 자기 남편을 증거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항상 남편과 아버지와 주인을, 그렇게 예수님과 연결을 시켰는데, 그런데 그것을 집어넣어도, 아직까지 불가능 속에 있는 자들은 아직도 신부가 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녀가 됨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종이 됨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려는 초점이 무엇인고 하면, 그들이 아직도 이렇게 아들 됨을 이해하지 못할 때,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누구의 아들이라고 했습니까?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아들에 의해서 아버지는 장차 아들들이 될 제자들에게 아버지는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지,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제자들에게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아들 됨이 무엇인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아버지를 안다는 말입니까? 모른다는 말입니까? 누가 답변을 한번 해보세요. 그 당시 제자들이 말입니다. 분명히 아버지를 모르는데, 그렇게 모르면서도 그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을 우회해서 아버지를 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 가짜 아버지를 붙들고 있는 제자들 !!

그래서 도마가(빌립?) “예수님, 아버지를 좀 보여주세요”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내 뒤에 계신다” 라고 하면서 보여주면 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시는데, “나를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보았는데, 왜 자꾸만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알고 있는 아버지라는 것은, 즉 그들이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즉 “예수님이 계시고, 이렇게 아버지가 계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그 아버지는 진짜 아버지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가짜 아버지라는 말입니까? 그것이 바로 가짜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 아직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기에 !!

그렇게 가짜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래서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가 예수님이 끌려가는 곳에 아버지 계시기 때문에 저도 가겠습니다. 목숨, 그까짓 것은 버리고 죽기까지 가겠습니다” 라고 하니,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너는 죽어도 못 가는 곳이다. 왜 그런고 하니, 아직 처소가 마련이 되지 않았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아직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는데, 그런데 인간이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버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처소를 마련하려고 가신다는 겁니다.

(요 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 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리델보스 - 율법이 아닌, 주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들어간다 ??

그런데 놀랍게도(?) 리델보스의 이 책에 보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방식이 나오는데, 즉 리델보스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즉 “율법으로는 못 들어가고, 주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들어간다” 라고 말입니다. 물론 분명히 맞는 말인데,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게 내용상으로 맞지만, 그러나 표현상 다르다는 겁니다. 표현상 말입니다.

또 앞에 한 것을 모두 다 잊어버렸지 싶은데, 표현은 어디에서 표현이 된다고 했습니까? 표현은 혼자서는 안 되고, 어떤 구조 안에서, 즉 어떤 주변의 환경 속에서 표현이 된다고 했는데, 이제 기억이 나십니까? 하여튼 돌아서면 곧장 잊어버리는데, 물론 그래서 제가 이렇게 계속해서 강의를 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ㅋㅋ).

◈ 천국은, 자기만의 의미가 아닌, 어떤 구조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 !!

아무튼 그래서 어렵다는 겁니다. 자기 혼자서 의미를 알아버리면, 그것은 자기 몸 안에서의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은 일방적인 의미이고, 어디까지나 자기만의 표현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그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만약에 천국을 율법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면, 베드로의 경우에 자기 목숨까지 바칠 각오이니, 주님을 따라서 천국에 따라갈 수 있다고 장담을 할만 합니다. 왜 그런가요? 그동안 사랑을 받은 것이 그야말로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말입니다. 심지어 그는 물위까지 걸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주님께서 “율법으로 못 들어가고 사랑으로 간다” 라는 의미조차도, 아직까지 천국에 처소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석하는 율법과 사랑의 개념은 옳은 의미입니까? 아닙니까? 당연히 옳은 의미가 아니라는 겁니다.

당연히 엉터리이고 잘못된 것이고, 그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기존의 베드로가 알고 있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그야말로 진짜 베드로처럼 주님을 배신할 사람이고, 또한 객기를 마구 부릴 사람이라는 겁니다.

◈ 아가페, 그대는 짝퉁 !!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기존의 신학에서는 그런 사랑을 뭐라고 봅니까? 방금 말한 그 엉터리 사랑을 세 글자로 ‘아가페’ 사랑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기존의 조직신학에서는 사랑을 셋으로 나누는데, 제일 위에 있는 것을 아가페, 두 번째로 있는 것을 필레오, 세 번째로 있는 것을 에로스, 그렇게 말입니다.

하지만 철학과 교수들의 귀에 이런 소리가 들어가면, 곧 바로 멱살을 잡히고 귀싸대기를 세 방에다가 반을 더 맞습니다. “이 무식한 놈아!” 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입니다. 철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데, 목사들이 자기 마음대로 가져다 부쳐서 그렇지 말입니다. 즉 아가페는 신의 사랑이고, 필레오는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고, 또한 에로스는 육적인 욕망에 의한 성적인 사랑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미안하게도 다 틀렸다는 겁니다. 

철학에서 원래 이야기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 에로스 사랑 안에 신의 사랑이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에로스 사랑은 무엇인가? 신을 향하여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사랑을 에로스 사랑이라고 하고, 그리고 몸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아가페 사랑이라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 아가페에서의 신은 무슨 신인고 하니, 물론 모두가 다 잡신인데, 즉 다신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필레오 사랑은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을 말하는데, 그런데 이러한 인간 대 인간의 사랑도 역시 신이 주신 아가페 사랑에서 나온 사랑이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아가페 사랑에 예속이 된다는 겁니다. 즉 육체보다 정신이 더 높다는 뜻에서 아가페, 필레오, 그리고 제일 밑에 에로스, 그렇게 서열을 매긴다는 겁니다.

◈ 아가페 사랑을 믿으면, 반드시 지옥에 !!

그러니 이것과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이것을 믿으면 제가 장담을 하건데 반드시 지옥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에서 이런 아가페 사랑을 이야기합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역사적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철학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철학을 하든 무엇을 하든 너나 나나 다 같은 인간이고, 즉 같은 몸인데, 그러니 철학자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나보다 좀 더 연구를 많이 했겠지만, 그러나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모두가 다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것은 가능성인데, 불가능성이 아니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란 이름으로 가능할 수 있는 최고 정점에 바로 철학자들이 있고, 또한 성경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들어낸 최고의, 그야말로 고상하고, 품위가 있고, 우아하고, 또한 성스러운 것들을 모두 다 모아놓고는, 그러한 것들이 곧 자기들 인생의 하나의 목표가 된다는 겁니다.

◈ 나도 이근호처럼 ??

그러한 것이 바로 교회에 다니는 목표, 하나의 비전, 하나의 소망이라는 말입니다. 즉 교회에 다니는 어떤 동기유발이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야, 나도 테레사 수녀처럼!”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십자가 마을은 그런 것이 없어서 참 좋은데, “나는 이근호처럼!”, 그런 것이 없어서 좋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동의를 하지 않아서, 나 혼자 웃고 말아야 하는 분위기인데 말입니다(^^)(ㅋㅋ).

강의를 계속해서 하기가 좀 쑥스러운데, 아무튼 어떤 경우라도 사람은, 즉 육은 목표가 있다는 겁이다. “저 사람처럼 잘살기!”, 혹은 “저 사람처럼 똑똑하기!” 라고 말입니다. 그러한 목표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앞날의 아름다운 성과를 위해서 지금은 자기 몸을 때려가면서, 인내하고 절제하고 참는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 사랑의 구조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그것이 곧 지옥의 힘이라는 겁니다. 전혀 천국의 힘이 아니고 말입니다.

◈ 목사님, 저는 순교해서 죄인이 된 것을 알려고 합니다 ??

이런 것이 바로 소위 순교라는 것인데, 즉 “내 목숨을 바치고 주님한테 가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닌데, 그러니 복음을 안다고 하면 제발 순교와 같은 것을 생각조차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굳이 순교를 해서 죄인이 되려고 합니까? 순교를 하지 않아도 이미 얼마든지 죄인인데 말입니다.

물론 “목사님, 저는 순교해서 죄인이 된 것을 알려고 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얼마든지 순교를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순교하는 작자들이, 어디 자기가 죄인이 되려고 순교를 합니까? 오히려 그와 반대로, 죄를 벗어나서 의인이 되려고 순교를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죄악 된 모습이냐는 말입니다.

조금 있으면, 강의를 마치고 돼지고기 바비큐를 합니까? 그렇게 바비큐를 먹는 것이 바로 죄고, 또한 그것이 순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 간에 오직 주님만 증거하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정보가 나온다고 하는 것 자체는, 내가 순교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순교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성도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정보만 나오기 때문에 말입니다.

◈ 요약 - 예수님의 자기 정보 캐내기 !!

그렇다면 일단 여기까지 강의한 것을 결론으로 내려보면, 주께서 일하는 모든 사건은 우리를 파괴시켜서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자기 정보 캐내기인데, 그것이 바로 바로 성도의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를 발로 차고, 말씀으로 때리고, 쪼개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예수님은 왜 그렇게 말씀으로 우리를 후비고, 비비고, 또한 쪼개고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니 안에 내 정보가 들어있다” 라는 것인데, 즉 우리 속에 예수님의 정보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성령인데, 즉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오면, 그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니 정보 말고, 그런 죄의 정보 말고, 너를 용서하는 나 예수의 정보가 들어있다” 라는 것인데, 그 정보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모든 종말에 모든 인간은 다 저주를 받아야만 마땅한데, 그런데 “나는 너를 이렇게 사랑했다. 끊이지 않는 사랑을 줬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정보를 가지고서, 우리가 만날 우리 자신을 도배를 하면 떼어버리고, 또 도배하면 떼어버리고, 그렇게 말씀으로 해체를 시킨다는 말입니다.

◈ 설교는, 우리 몸을 해체하는 작업 !!

그게 바로 설교이고, 성경공부이고, 이러한 강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은혜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묵시의 사건이 아직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는 그 무엇을 해도 죄며, 또한 그러한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항상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늘 깨어지고, 늘 부셔자고 해도,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 자체가 바로 복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그것이 축복인 줄로 알아라, 이 놈들아!” 라고 하시는데, 즉 우리 안에 누가 들어있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계시는데, 그것이 두고 뭐라고 합니까? 그것을 두고 바로 ‘주님의 종’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정말로 자기가 종이라고 하면 무엇을 해야됩니까? 종은 그냥 주인만을 이야기하고 자랑하면 된다는 겁니다. 마치 신부가 자기 신랑만 이야기하면 되듯이 말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신랑을 잘 꿰찬 자기 자신을 자랑하려고 하겠지만 말입니다. 

◈ 주님과의 결혼인가? 아니면 동거인가?

아무튼 “우리 신랑 괜찮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것을 제대로 이야기하면 신부라고, 그런데 남편하고 살면서 남편이 아닌 자기를 자랑하면, 그것은 결혼생활이 아니라 그냥 동거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지금 있는 신랑은 아직까지 진짜 신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다음과 같은 무지막지한(?) 비유를 했겠습니까? 즉 하늘나라라는 것은, 강도가 쳐들어와서 주인을 묶고서는 집구석을 뒤져서는, 그동안 주인 안에 예속되어 있던 가구들을 빼앗아서 마구 들쳐업고 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말입니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 마귀에서 예수님이 주인으로 바뀌었다 !!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 어느 인간도 독자적인 존재는 없고, 우리에게 주님이 오시기 이전까지는 우리의 주인은 누구였다는 겁니까? 마귀가 주인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주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주인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즉 성령의 전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뀌는 힘이 바로 하늘나라가 임했기 때문에, 즉 묵시가 덮쳤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서에서 하는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 리델보스님, 니나 잘해보세요 ??

그런데 리델보스는 그것을 보면서 “사랑을 행하자. 왜? 마태, 마가, 누가에 있잖아?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 왜? 여기에 있잖아”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리델보스에게 “니나 한번 해보세요” 라고 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사랑을 하는 것이 하늘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즉 믿는 것이 하늘나라가 아니고, 믿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하늘나라라는 말입니다. 그 둘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는 세 번째 시간은, 두 번째 시간의 어려운 고비를 견뎠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지 않지 싶은데, 이제 세 번째로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을 하겠는데, 그래도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면 이해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또한 그 뒤에는 돼지가 자기 온 몸을 바쳐서 기다리고 있으니 말입니다(ㅋㅋ).

◈ 다니엘이 이스라엘 역사와 접속이 되니 !!

그것이 바로 다니엘의 기도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것을 그림으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면서 하겠는데, 제가 혼자 하면 서로가 너무 힘이 드니 말입니다. 다니엘에게 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명히 몸이 있는데, 그러면 다니엘에게 역사적 의미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분명히 나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니엘도 역시 몸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자기와 연결고리가 된 타인의 역사와 접속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제가 서울에서 강의를 한다든지, 어디 볼일을 보려고 멀리 가버릴 때, 그때 조금 미안한 게 무엇인고 하니, 누군가가 인터넷에 질문하면 즉각 답변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1박 2일로 멀리 갔다 오면 질문이 그냥 그대로 놓여있다는 겁니다.

◈ 목사님은 질문도 차별을 하시나요?

그러면 제가 속으로 참으로 미안한데, 왜 그런고 하니까, 질문을 한 상대방이 “야, 목사님은 내 질문은 무시하는 모양이다. 왜 다른 사람은 곧잘 답변을 해주면서, 왜 내 질문은 벌써 세 시간째 답변을 해주지를 않지” 라고 하지 싶어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냥 저만의 생각입니까?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건과 접속이 되어서 그러한데, 즉 ‘나’ 라는 역사적 환경에서는 다른 역사적인 것과 접속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타인과 접속이 되어버리면, 이쪽에 이전에 되어있던 접속은 잠시 동안 중지가 되고, 그만 타인과 접속이 되어버린다는 말입니다.

◈ 하필이면 왜 70년입니까?
◈ 왜 우리는 포로 잡혀야 됩니까?

그런데 지금 다니엘은 누구와 접속이 되어있는고 하면, 이스라엘 역사와 접속이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예레미야 예언과 접속이 되어있는데, 이 예레미야의 예언에 보면, “70년만에 돌아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기도하는 가운데, 첫 번째로 “하필이면 왜 70년입니까?” 라는 질문과, 그 이전에 “왜 우리는 포로 잡혀야 됩니까?” 라고 하는 이 문제가 반드시 대두가 된다는 말입니다.

(렘 25:11)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렘 30: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왜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이스라엘과 접속이 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과 접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즉 이명박 정권하고 접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포로생활이 왜 70년이고, 왜 또한 그렇게 잡혀가야만 했는지,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안 되는데 말입니다. 4대강 살리기가 중요한 이슈이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접속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4대강이고 나발이고 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해야만 하고, 그것도 70년 동안이나 포로로 잡혀있었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거기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궁금해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브리엘이 와서 고맙게도 이 두 가지를 모두 응답을 해줍니다. 특히 두 번째 질문인, 즉 “왜 우리 민족은 성전이 불타버려야 되고, 또 왜 우리는 남의 나라에 쫓겨다니고 해야만 됩니까?” 라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단 9:21)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단 9:22)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단 9:23)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단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단 9: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단 9: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단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 죄의 개념은, 미래 소년 코난에게 ??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인고 하면, “너희들이 지금 지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래서 죄라고 알고 있는 그 죄는 잘못된 죄의 개념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죄의 개념은, 지금 당장에 그들이 살고 있는 거기 현재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찾아와야 된다는 겁니다. 마치 미래소년 코난처럼(?) 말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미래에서 찾아오지를 않으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우리가 어누 정도는 잘못을 했는데, 그렇다고 그 정도 잘못으로 성전까지 불에 타다니, 그것은 주님께서 너무 오바하시는 것 같은데, 그냥 먼저 이야기를 해주시면 우리가 알아서 회개를 할텐데, 이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하나님?” 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죄를 알기 위해서, 그들은 떠나야만 되고, 성전은 깨어져야만 !!

다시 말해서, 우리는 현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윤리관으로 우리의 죄를 평가하고, 회개하고, 반성을 하다 보니까, 진정한 죄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즉 주님이 말씀하시는 죄의 의미는, 지금 현재 우리가 지은 죄를 자기고, 그렇게 죄의 의미를 아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를 알 수가 있습니까? 차후에 진짜 그 죄를 유발시킨 분이, “진정한 죄는 이렇다” 라고 알려주어야만, 그제야 비로소 죄가 무엇인지 제대로 드러나게 되는데,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살던 정들었던 그 자리를 떠나야만 되고, 또한 성전은 깨져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유레카!!)

◈ 죄도, 내 몸이 아닌 주의 이름이 있는 성전과 관련해서 !!

이것 마지막으로 어려운 거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하면, 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각자 지은 우리 육체, 즉 나의 몸과 관련된 죄가 아니라, 성전에 깨어짐과 관련이 되어야만 비로소 죄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우리는 각자 우리 자신의 이름이지만, 성전은 주의 이름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이 있는 성전이 깨어질 때, 즉 주의 의미층에서 비로소 알려주는 죄가 우리에게 덮치는데, 그것이 바로 70년 동안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70년 동안 성전은 마음껏 유린이 되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 누구야, 성전을 깬 놈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성전이 유린이 되면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즉 “누구야? 이 성전을 깬 놈이?”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예, 바벨론과 앗수르가 그렇게 했습니다” 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주님은 “아니야, 아니야. 그건 역사적 의미야. 도대체 누구야? 주의 이름이 있는 성전을 깬 놈이? 어서 이리 나와봐” 라고 하는데, 그러면 뭐라고 답변을 해야합니까?

* 주님 : 누구야, 주의 이름이 있는 성전을 깬 놈이?
* 근호 : 예. 바벨론이고, 앗수르입니다.
* 주님 : 아니야, 아니야. 그건 역사적 의미야. 누구야, 진짜 성전을 깬 놈이?
* 근호 : 예. 주의 이름에 의해서 지옥에 갈 놈이 깼습니다
* 주님 : 그 놈이 누구야?
* 근호 : 지금 땅에 없습니다.
* 주님 : 그러면 어디에 있어?
* 근호 : 예. 바다에 숨어있습니다.
* 주님 : 어서 올라오라고 해.
* 근호 :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놈이 어디에서 올라옵니까? 바다에서 올라오는데, 그래서 바벨론을 뭐라고 합니까? ‘짐승’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땅에서 땅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땅에 있는 놈들은 인간들밖에 없는데, 즉 인간들에게서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 아하, 그래서 ‘해운대’ ??

그렇다면 인간들은 왜 죄를 짓는가? 그것은 바로 바다에 있는 놈이 올라와야만 되는데, 즉 바다에서 올라오는 놈은 한 글자로서 없을 ‘無’ 인데, 바로 이러한 ‘무’에서 새로이 창조가 되려면, 그것은 바로 묵시적 표현층에서, 거기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그쪽 층에서, 즉 안식의 차원에서 있는 창조도 없는 것으로 돌려버리고, 즉 바다와 땅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그래서 바다에 있는 놈이 땅에 올라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영화가 세 글자로 ‘해운대’ 라는 겁니다.  

◈ 이 땅은, 역시 짐승을 왕초로 섬겼구나 !!

원래는 하나님의 노아언약에 의해서 경계를 정하셔서, 바다에 있는 것들은 땅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되어있는데, 그런데 올라왔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드디어 이 땅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땅은 주의 이름을 대적하는 짐승의 세계였음을, 사실은 옛날부터 그랬는데 그게 마지막 때에 와서 적나라하게 다 들통이 났다는 겁니다. “땅은 역시 짐승을 왕초로 섬겼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너희들의 주인은, 너희들이 예수와 하나님을 백날 부르짖어도, 너희들이 만약에 가구라고 하면, 그 가구의 주인은 누구였는고 하니, 마귀였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하고 성령을 받은 인자이신 주님하고 서로 맞짱 떠서, 주님이 이겨서 그 전리품으로 누구를 챙긴다는 겁니까? 그동안 악마에 속한 가구들을 마구 늑탈래서 가지고 간다는 말입니다.
 
◈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

물론 같은 가구라고 모든 가구를 다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약속한, 자기의 택한 가구들만 가지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라고 하셨는데,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입니까?

시편 143편에 보니까, 그들 위에 주의 이름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인자의 이름이 있고 말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언약대로’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언약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미안합니다. 그냥 집에 가주세요” 라고 되고 말입니다.
 
(시 143:10)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시 143:11)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 오직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

그래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기 이름을 의지하지 않고, 누구의 이름만을 의지합니까? 즉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라고 한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내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의 이름에서 나올 수 있는 능력으로, 자기의 능력이 아니고 말입니다. 즉 내가 믿는 능력이 아니라 주의 이름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그래서 “믿음으로, 소망으로, 사랑으로” 라고 한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에서 나오는 ‘믿음’, 주의 이름에서 나오는 ‘소망’, 주의 이름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말입니다. 아까 말한 그런 아가페가 아니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라고 하면 “주의 이름의 사랑으로 저는 구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의 ‘70이레’를 할 때에, 다니엘의 기도내용에 보면, 성전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데 그 성전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하면, 그 성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주의 이름이 나오고, 그렇게 주의 이름은 주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종을 부르게 되어있는데, 그 종이 아무리 도망쳐도 한번 주의 이름이 불러주면 아무리 자기는 반대편인 다시스로 도망을 가도, 반드시 종은 끌려오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 요나의 경우에 !!

제가 지난 수요일에 무슨 설교를 했는고 하니까, 바로 이 부분을 서교했는데, 즉 요나가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다시스로 도망을 갈 때, 요나는 자기 혼자서 나왔다고 여겼는데, 사실은 그 요나를 따라온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람, 구름, 날씨, 기상 캐스터, 선장, 배 등등, 모두가 같이 따라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표현은 어디에서 밝혀집니까? 표현이 의미가 되는 것은 바로 ‘구조’ 라는 겁니다. 또 다시 잊어버렸지 싶은데, 즉 이 ‘요나’ 라는 표현은, 요나가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 요나를 구성하고 있는 환경구조로서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요나는 그만 자기 의미에 의해서 삐쳐서, “아이쿠, 하나님은 이 니느웨 성이 40일 만에 망한다고 해놓고 아직도 망하지 않네요” 라고 하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요나 주변에 박 넝쿨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줘버리니까, 요나는 그만 “어, 박 넝쿨이 참으로 시원하다” 라고, 그렇게 새로운 구조에 시원하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또 졸지에 박 넝쿨이 그만 시들게 하니까, 요나는 그만 뿔다구를 내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너는 환경 속에 나타난 나의 언약을 왜 모르는가?” 라고 하시는데, 즉 “니느웨는 멸망을 당할 족속이 아니고, 멸망을 당할 유다와 이스라엘을 이야기할 하나의 바깥 환경이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바깥 표현층으로서, 그렇게 성경말씀이 전개가 된다는 말입니다.

◈ 천국이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가 곧 천국!!

그렇다면 이 주의 이름은 이스라엘만의 주의 이름이 아니고, 니느웨까지도 포함된 주의 이름이인데, 그러니 온 천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되는 것, 그것이 곧 예수님의 나라이고, 곧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즉 천국이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가 천국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을 두고 예수님의 나라라고 하면 틀렸다고 할 수 있는데, 왜 그런가요? 이미 천국이라는 개념을 자기가 이미 만들어놓고, 거기에 객체로서, 즉 술부로서 채우니 말입니다. 언어에는 주부와 술부가 있는데, 동사 뒤에 나오는 붙어있는 목적어와 같은 것이 술부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주부는 자기가 꽉 잡고 있고, 술부는 성경으로 채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리델보스를 보고 하는 말이 “당신이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나라이지 하늘나라가 아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개혁주의가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왜 그런가요? 주체를 그만 자기들이 아는 신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 아, 돼지 큐 ??

아직 끝난 게 아니고 더 어려운 것이 남아있는데, 조그만 더 참으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에 한번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 강의가 거의 다 종착역에 도착했는데, 돼지 바비큐를 생각하면서 참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제가 묻는 질문에 답변을 좀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잘 모르고 엉터리 답변이라도 해서, 그렇게 자기의 무식함이 들켜야 그것이 제대로 공부가 된다는 겁니다. 제가 내는 퀴즈가 까다롭고 어려워도 말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아는 척을 하고 앉아있어도, 모른다는 것은 서로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말입니다(ㅋㅋ).

◈ 성전에서 주의 이름이 떠나면, 곧 멸망 !!

가브리엘 천사에 의해서 기도응답이 그렇게 나왔을 때, 첫 번째는 이미 했는데, 그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이 곧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그 성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주의 이름이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주의 이름에 있어서 성전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주의 이름이 떠나면 곧 멸망이라는 말입니다. 틀려도 좋으니 답변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의 이름이 떠나면 저주인데, 그렇다면 반대로 주의 이름이 있으면 사랑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주를 알리기 위해서, 즉 주의 이름이 갖고 있는 저주의 속성을 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됩니까? 성전은 떠나야 되는데, 그렇게 떠나고 난 뒤에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무(無)’ 라고 하고, ‘공터’ 라고 하고, ‘빈터’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 주의 이름이 오면, 곧 ‘허공’ !!

다시 말해서, 그렇게 허공이 되는데, 그렇게 성전은 허공이라는 겁니다. 조용필만 허공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렇게 주의 이름이 이 땅에 오면, 허공이 되는데, 며칠 동안 그렇게 허공이 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 사흘 뒤에 부활을 했으니, 즉 사흘동안이라는 말입니다. 사흘동안 그렇게 허공이 된다는 겁니다.

◈ 성령의 신내림으로 !!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도에게는 성령이 옴으로 말미암아 허공이 새로운 주체로서 채워지지만, 그러나 성도가 아닌 자들에게는 영원히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이 보기에 예수를 믿는 놈들은 미친놈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예수는 영원히 없기에 말입니다.

현재 이순신 장군을 믿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이순신 장군의 귀신을 섬기는 무당이란 겁니다. 그리고 지금 최진실을 믿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최진실의 유골을 훔치라고 배후 조종한 무당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최진실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내가 답답해서 못 살겠다. 그러니 좀 뿌려달라” 라고 해서, 그래서 유골을 훔쳤다는 것 아닙니까?

◈ 그러나, 리델보스는 이 ‘허공’을 용납하지 못해 !!

그래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바로 ‘신내림’ 인데, 즉 성령의 신내림이라는 말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의 신내림은 바로 하늘나라, 즉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데. 그것을 리델보스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왜 그런가요? 이 허공이, 즉 리델보스는 허공을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무엇을 가지고 채우더라도 반드시 채워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런데 반면에, 주의 이름은 어떠합니까? 주의 이름이 떠남으로서, 도리어 더욱더 감추어진 주의 이름을 부각시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 누구만 삽니까? 인간들만 사는 줄 알았더니만, 그런데 주의 이름이 바다에 있는 짐승을 불러낸다는 겁니다.

그렇게 짐승을 불러내었는데, 하지만 사람들 보기에는 그 짐승이, 짐승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그냥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그것을 알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7년 동안 계시에 의해서 짐승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말입니다. 즉 “나는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 이근호 - 성전이 아닌 사람은, 사람도 아니다 !!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까, 주의 이름이 없는 곳은, 즉 “성전이 아닌 사람은 사람도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눈과 코와 귀가 제대로 붙어 있어도 전혀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짐승이라는 겁니다. 
 
◈ 짐승과 같이 살아갈 수는 있지만, 그러나 !!

만약에 누군가가 “목사님, 제 남편이 예수님을 안 믿는데, 계속해서 같이 살아야만 됩니까?” 라고 한다면, 그 질문을 다시 해보면, 다음과 같이 바꾸어야 하는데, 즉 “목사님, 제 남편이 짐승인데, 그래도 같이 살아야만 됩니까?” 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런 짐승과도 같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짐승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밤에 잠자리도 짐승처럼 달려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말입니다(??). 그렇게 짐승과 같이 살면서도 자기가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귀찮게 법원에 가서 굳이 이혼까지는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4주 후에’ 라고 하면서, 또 기다려야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짐승이 교회에 가지 말라고 두드려 패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본인도 짐승이이라면 같이 살고, 본인이 주의 이름이 있으면 잠시 떠남으로 말미암아서, 남편은 짐승이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즉 예수의 정보를 가진 사람으로의 기능을 제대로 감당해서, 그러한 표현층을 보여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사세요 ??

그런 면에서 사도바울이 참으로 몰인정하고 야속한 면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러분 속에 주님의 이름이 있습니까? 있으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사세요” 라고 했다는 겁니다. 사실상 너무 심한 말이 아닙니까? 자기는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는 겁니다. 아니, 지금 결혼을 준비한다고 마음이 들떠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하라고 말입니다.

자기에게 예수님 정보가 있는데, 그런데 괜히 같이 살게 되면, 이전에는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저의 주인입니다” 라고 하다가, 결혼을 하고 난 다음부터 남편에게 잘 보이려고 그렇게 애쓰니까, 주님이 얼마나 섭섭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이 제 말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7장에 진짜로 나오는데, 한번 찾아보라는 겁니다.

(고전 7:38)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고전 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고전 7: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그렇다면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잘한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인데, 즉 결혼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반대로 결혼을 한 것이 뭐가 됩니까? 빈터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는 빈터가 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 결혼은 해도 죄, 하지 않아도 죄 !!

지금 제가 말을 해놓고도 무슨 말인지 헛갈리는데(ㅋㅋ) 하여튼 알아서 해석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결혼을 한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은 자가 빈터가 되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결혼을 한 것이 빈터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우리는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죄인’ 이라는 겁니다.

◈ 70년이 아니라, 70이레 !!

다시 다니엘서로 돌아와서, 다니엘이 “왜 하필이면 70년입니까?” 라고 하니까, 가브리엘이 하는 이야기가, “70년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자 다시 다니엘이 “아니, 예레미야서에 보면 분명히 70년이 되면 돌아간다고 했는데요” 라고 하니, 다시 가브리엘이 하는 말이 “아니야, 그러니 돌아가지를 마”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70년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무(無)니까, 그런 무의 세계에선 70년이 아니고 70이레라는 겁니다. 그렇게 ‘70이레’ 라고 하니, 또 ‘70×7’을 하는데, 그래서 “야, 490년이구나”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해석은 역사적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레’ 라는 말은 창조의 단위인데, 그러니 이레를 ‘1’로 해석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이레’ 라는 겁니다. 즉 7년이 뭐가 되는고 하니, 앞으로 일년처럼 앞으로 그렇게 다루겠다. 이레가 창조의 단위니 말입니다. 이것을 잘 모르겠으면 여기 교재에 보면 나오는데, 하여튼 대충 그렇게 알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센티미터(cm)를 ‘c’하고 ‘m’하고 나누면 됩니까? 그러면 전혀 안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렇게 ‘이사도라’ 라는 이름을 있다면, ‘이사’와 ‘도라’를 나누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이름이 그만 개판이 되고 마는데, 오히려 ‘이사’와 ‘도라’는 합쳐야만 된다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레’ 라는 것을 나누면 안 된다는 겁니다. 첫째 날, 둘째 날, 그렇게 해도 그것은 일곱째 날의 안식 안에 모두 다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 ‘이레’는 하나의 창조단위 !!

마치 다음과 같이 “1, 1, 1 ... 7”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안식의 입장에서는, 즉 하나님 형상의 입장에서는 이미 7일 전체가 모두가 다 안식이라는 겁니다. 첫째 날은 괜찮고, 둘째 날은 못하고, 그 다음 날은 또 어떻고,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전체가 다 하나의 창조 덩어리로서, 그렇게 창조단위가 된다는 겁니다.

마치 우주로 발사하는 로켓이 일 단계와 이 단계 로켓을 합쳐서 하나의 로켓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번에 ‘나로’호가 페어링 분리가 제대로 안 되어서 그만 실패를 하고 말았는데, 그러면 그것은 로켓 자체의 문제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페어링만의 문제가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는 “일단 예수님을 믿고, 그 다음에 선한 행함으로 나서야 되는데, 왜냐하면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있으니 말이다” 라고, 그렇게 둘로 나눈 것이 아니라, 그 믿음 안에는 이미 완료가 다 포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굳이 페어링과 같은 것이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렇게 묵시가 흐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페어링이 없으니 실패할 일도 없고 말입니다.

◈ 그들은 과연 어디로 돌아가는가?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만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70이레가 되면 돌아가게 해줄게” 라고 하시는데, 그들이 어디를 갑니까? 고향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제 가자, 고향으로!”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들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그들은 전에 성전이 있던, 즉 자기들이 살았던 곳을 고향으로 여기는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곳에는 더 이상 갈 필요가 없는데, 가봐야 부서지고 깨어진 성전만이 있는 황무지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고향이 그런 곳이 아니라 하늘나라인데, 즉 ‘인자의 나라’ 라는 겁니다. 제가 이 인자의 나라를 이야기하면서 처소를 뭐라고 했습니까? ‘소멸하는 하나의 처소’ 라고 했는데, 기억이 납니까? 그런데 거기에 가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 가면 두 가지의 사건이 터지는데, 그레서 그것이 곧 ‘관절’ 이라는 겁니다.

◈ 오잉, 웬 관절 ??

그 관절이 무엇인고 하면, 즉 70이레가 되면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70이레가 되면 영원한 성전이 주어지고, 바로 그 성전에 주의 이름이 있으면, 자기 백성에게는 영원한 긍휼과 용서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영원한 긍휼과 용서가 말입니다. 그러나 성전에 이름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영원한 저주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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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절은 ‘단절’과 ‘절단’의 의미를 지닌다. ‘절단’은 역사의식을 쪼개어서 느부갓네살왕의  경우처럼 도저히 예상 못할 돌발적인 사건이 그 쪼개진 틈을 통해 역사 지평 위로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단절’이란 그 방출된 계시가 역사적 의미들을 벼랑까지 밀어붙임으로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황들을 확대시켜 나가는 시도를 의미한다. 즉 코끝까지 성경 글자를 들이대고 수천 번 성경을 보고, 필사를 해도 비밀은 여전히 노출되지 않은 채 역사 세계를 공격하겠다는 묵시적 의도를 말한다. 전도란 십자가 도를 전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복음이니 믿으세요” 라는 식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는 식으로 전달되게 된다(갈 1:8) 즉 ‘다른 복음’이 뭔지를 겸하여 모르고 정리되지 못하면 여전히 복음을 모르는 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이단들이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복음도 얼마든지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십자가’로 변질된다.(고후 11:4) - ‘다니엘서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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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저주에, 영원한 긍휼 !!

만약에 누군가가 “목사님, 왜 저주는 10년만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주의 이름의 속성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데, 그래서 주의 저주가 영원하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저주가 영원해야, 그 반대 편에 있는 주의 긍휼도 영원하다는 겁니다. 만약 저주가 10년이라면, 우리에게 주어질 축복도 10년밖에 안 되는데, 우리가 미쳤습니까? 그런 곳에 가게 말입니다. 천당에 가서 겨우 10년을 살고 다시 나올 것입니까? 그것은 여러분도 미쳐 몰랐지요?  
◈ 지옥은, 천국의 그림자 !!

다시 말해서, 지옥이 왜 영원한고 하면, 천국이 영원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빛과 그리고 그림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뜻인고 하면, 즉 빛이 실체라고 하면, 그림자는 그 빛을 따라가는데, 무엇으로 따라갑니까? 크기와 길이로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즉 영원히 빛이 비추기 위해서는 그림자는 영원히 그림자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무엇입니까? 천국의 그림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지옥으로 간 부자는 누구의 그림자입니까? 천국에 간 거지의 영원한 그림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거지 나사로가 이리로 가면, 부자도 지옥에서 이리로 가는데, 그렇게 서로 짝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즉 천국에 간 탕자가 저리로 간다면, 지옥으로 간 맏아들도 역시 저리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렇게 서로 커플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가 짝인데, 물론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고,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에서는 누구를 위해서 있습니까? 야곱을 위해서 있는데, 그렇다면 야곱은 누구를 위해서 있습니까? 에서를 위해서 있는데, 즉 에서가 저주받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야곱이 있다는 말입니다.

◈ 나는 내 몸을 믿는다 ??

이런 이야기를 하면 참 안타까운데, 누가 그렇습니까? 지옥에 갈 자들이 말입니다. 자기 역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 즉 “나는 때려죽여도 예수를 안 믿는다. 내가 믿는 것은 내 역사이다” 라고 하는 자들이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내 몸을 믿는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런 인간의 자아는, 그때까지 자기에게 있었던 역사적 체험으로 뭉쳐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까 강이의 경우에 10년을 살았으면 10년 짜리 역사가 되고, 그리고 80년을 살았으면 80년의 역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90살을 살고 돌아가셔도, 돌아가실 때가 되면 0살이 되는데, 왜 그런가요? 그 시점에서는 과거는 모두 날아가 버렸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죽는 시간이 오면, 지금까지 살아온 80년이 그 죽는 순간에 다 없어지고, 오직 그 죽는 순간만 남는다는 겁니다.

◈ 인간은, 처음부터 묵시적 존재 !!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역사적 존재가 아니고 처음부터 묵시적 존재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루를 쪼개보면, 또 그 안에 천년이 들어있는데, 또 그 하루를 쪼개보면, 그 하루 안에 천년이 들어있고, 그래서 그 천년이 하루와 같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학에서 말하는 무한분열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집합으로 규정한다는 말입니다. 무한을 표현하지 못해서 말입니다. ‘칸토’ 라는 수학자는 그것을 집합으로 보자고 했다는 겁니다. 즉 “차후에 이렇게 규정하자” 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 주체는, 항상 차후에 규정된 주체 !!

그 말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주체’ 라고 하는 것은 항상 차후에 규정된 주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만든 것이 주체인데, 그렇다면 우리의 주체는 무엇입니까? 매일같이 과거의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아하, 그런 인간이었구나”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타를 좀 좋아하면, “나는 처음부터 기타를 쳐야 했구나” 라고 하다가, 나중에 기타가 재미가 없으면 그 기타를 부셔버리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또 “야, 나는 정말로 바둑을 좋아하는구나”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꼭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차후에 그렇게 자기를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야, 변하지 않는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구나” 라는 것이 믿어지는데, 왜 그렇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정보가 담겨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 주변에는 나의 역사적 정보가 같이 담겨있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앙꼬는 예수님의 정보이고, 그 바깥에는 밀가루는 만날 자기밖에 모르는 나의 정보이고 말입니다. 그것이 같이 섞이면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죄인이며 주님은 그것을 용서하시는데, 그래서 언약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매일같이 살과 피가 먹는 셈이 된다는 말입니다.
 
◈ 70이레 - 7이레, 62이레, 1이레 !!

그건 그렇고,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70이레가 있는데, 제일 먼저 7이레이고, 마지막에는 1이레인데, 그런데 이것이 역사적 순서로 보자면, 제일 먼저 밑에 7이레가 되어있고, 이 위에 62이레가 되어있고, 그 다음 위에 1이레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제일 위의 끝에, 즉 소멸하는 지점에 인자가 있는데, 그러면 이 인자가 되는 예수님은 이 땅에 몇 년을 살았습니까? 33년인데, 그러면 여기 밑에는 7이레라고 했으니까, 성전이 없다가 성전이 계속해서 지어지는 기간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46년인가 진행이 되었지 싶은데 말입니다.

◈ 야, 주님이 정말로 살아계시는구나 !!

이제 이것이 마지막 어려운 고비인데, 그렇게 성전을 지을 때, 그 성전을 지으려고 간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스룹바벨과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물론 다니엘은 70이레를 알았기에 가지 않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 사람들은 성전 안에서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야, 주님이 약속대로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이런 성전을 짓게 하셨구나. 야, 주님이 정말로 살아계시는구나” 라고, 그렇게 자기들 나름대로의 역사 속에서, 그렇게 자기들 나름대로의 묵시를 빼낸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과연 천당에 갔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면, 굳이 메시야가 오지 않아도, 즉 예수님이 오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성전을 지어서 천국에 갔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만 62이레를 거치면서 성전이 다 깨어지는데, 즉 1이레가 올 때까지 깨어진다는 말입니다.

◈ 야, 주께서 또 성전을 깨시는구먼 !!

그렇다면 그렇게 깨어지는 기간 동안에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야, 주께서 또 성전을 깨시는구먼. 아이쿠, 우리가 기다릴 것은 정말로 메시아밖에 없다” 라고, 또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구원이라는 말입니까? 그것이 아닌데, 그것은 그냥 기다림이지 구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이 위에 있는 층들은, 아래에 있는 7이레 층들을 보고서 얼마나 웃겠습니까? “아이쿠, 우리 선배님들, 정말이지 너무나 무식해. 학개 성전을 지을 때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던데, 나 같으면 울지 않는다. 곧 깨어질 것이 뻔한데 울기는 왜 울어. 그래도 하나님이 그런 식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알게 해주시니, 그렇게 주의 이름의 능력을 알도록, 즉 말씀대로 되는 걸 알게 하니, 아마 그 시절은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기다린다. 언젠가는 될 성전 짓기를”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 성전을, 내가 사흘만에 지을게 !!

그러니 이 사람들은 무엇을 짓습니까? 실제로 건축 구조물인 성전 짓기를 기다렸는데,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오셔서 뭐라고 했습니까? 46년 동안 짓는다고 하니까, “그것을 내가 사흘만에 지을게” 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느 수준입니까? 62층도 아니고, 7층도 아니고, 어느 층입니까? 그것은 바로 1이레 층에서 저 밑에 있는 층들을 모조리 다 해석을 해낸다는 겁니다. 물론 묵시적으로 말입니다.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열두 제자는 무슨 층?

그런데 열두 제자는 무슨 층입니까? 아직까지도 62층에 있기 때문에 “아이쿠, 예수님 어떻게 그것을 짓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런데 나중에 주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보니까, 그 성전이 건축 구조물이 아니고, 인자의 이름은 예수님의 몸에 임해서, 즉 몸의 부활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의 몸입니까? 우리 몸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 부활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거기까지라는 겁니다.

◈ 그런데 나중에 사도바울이 보니 !!

그런데 나중에 사도바울이 보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성령을 받은 자들도 이미 있는 한 몸인 예수님의 몸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에 우리가 하나의 모퉁이 돌로서, 또는 여러 가지 벽돌로서 참여한다는 것을, 또한 그것이 주의 이름의 솜씨였음을 알게 되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는 이미 묵시적 존재로서, 또한 역사적 체험의 주체를 가지고 있는, 그러한 두 가지 점을 다 갖고 있다는 겁니다. 즉 죄인이면서도 의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두 개의 층을 이렇게 세 개로 나누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여기서 “그러면 목사님,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역사가 아직 남아 있잖아요?”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나 그것은 남아있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70이레를, 처음에는 그렇게 높아진 신상, 즉 우상이 그만 엎어지니까 마지막 때에는 어디에 놓이게 됩니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지막 때에 도달이 된다는 말입니다.
 
◈ 70이레 - 역사의 시작과 끝 !!

그런데 이 7이레를 다시 오뚝 세워보면, 이것이 이렇게 있던 70이레와 62이레로 있던 것이 시간적으로 7이레 다음에 62이레, 그리고 1이레가 된다는 겁니다. 즉 그것을 인자를 중심으로, 이 삼각형(?)을 우뚝 세워버리면, 70이레 전체가 무엇이 되는고 하니, 역사의 시작과 끝이 된다는 겁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분들은 동영상을 참고하세요.)

결국은 이 보좌가 무엇인고 하니, 역사에 있어서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다” 라고 하신 분이, 우리와 같이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즉 우리의 육십이나 칠십 인생을 그야말로 태산처럼 덮어버리면, 우리는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가 다 갑장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하겠는데,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변화산에 나타날 때에 모세가 나이가 많았습니까? 아니면 모세가 많았습니까? 누가 답변을 한번 해보세요. 정답은 모두 똑같다는 것인데, 물론 우리가 역사적으로 보면 모세가 오래 살아서 선배처럼 보이겠지만, 그러나 어느 개그 프로처럼 ‘선배님!’ 이라고 하다가는 예수님한테 얻어맞는다는 말입니다. 

그때는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모세는 그때 그 시대에 태어나야만 했고, 또 엘리야도 그때 시대에 태어나야만 했고, 오늘날 우리는 대추밭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각자의 나이에 여기 있어야만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죽으면 누구나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집단자살을 하라는 말은 아니고 말입니다.

◈ 주의 이름만 증거하는, 주의 정보가 있는 자가 곧 ‘성도’ !!

아무튼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의 이름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오직 주의 이름인데, 그래서 우리는 누구를 증거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오직 주의 이름만 증거하는, 그런 주의 정보가 들어있는 자만이 성도라는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믿는 것이 아니고, 믿어지고 주께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각자의 주체가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힘들게 살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요령을 부리면서 복을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희들의 타고난 본성이니까 주께서 잘 알아주셔서, 이러한 본성과 저희들 속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 관련성만, 그래서 그 용서받은 것만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9,10,06 오후 11시 26분에 다시 정리함. - 녹취 ‘구‘

                                                                  어휴, 아직도 머리가 빙빙도네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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