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강의 2009-07-20  피8강 십자가를 보여주는 몸 (죄인 만들기) b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090720피p033죄인으로출발하는몸.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090720피p033죄인으로출발하는몸a.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090720피p033죄인으로출발하는몸b.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090720피p033죄인으로출발하는몸.hwp





==================================================================


대구090720피p033죄인으로출발하는몸

대구 7월20일 피 8강 하나님의 속성을 담는, 드러내는 몸 (죄인 만들기)

[09 대구강의 13] - [피 8] - 죄인으로 출발하는 몸
                                                                                
                                                           09,07,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인간’은 허구이고, 허상 !!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33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예수님의 죽으심을 잊은 교회는 쓰레기이다. 서로를 위해서 재미나게 노는 데만 열중한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잊은 교회는 쓰레기라고 할 수 있는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서로’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사실 이 책에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심사숙고를 해서 쓴 것들인데, 하지만 이 책에서 그런 과정들을 다 설명하지는 못하고, 그냥 단어들로서만 나열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 단어 하나하나를 파보면, 그 밑에 !!

그러므로 이 책에 있는 단어들은, 마치 감자나 고구마처럼 땅위에 보이는 것과 같은데, 그런데 그 땅 아래를 파보면, 감자나 고구마가 줄줄이 달려나오듯이, 그렇게 그 밑에는 엄청난 내용들이 깊숙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위에 단어들이 이렇게 나열되어 있으면, 그 각각의 단어 밑에는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내용들이 그 아래에 줄줄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책을 쓰다가 보면, 그 밑에 있는 것들은 일일이 다 설명을 하지는 못하고, 그 위에 단어들만 이렇게 쓰다가 보니,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해서 말이다. 그러니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무슨 의미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파악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을 일일이 모두 설명을 하게 되면, 이 책이 지금 약 350페이지가 정도 되는데, 그 몇 배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1,000 페이지를 훌쩍 뛰어넘지 싶은데 말이다.

◈ 여기서 ‘서로’ 라는 개념을 파내려 가보면 !!

여기 읽은 교재에 보면 “서로를 위해서 재미나게 노는데 것에만 열중한다” 라고 하는데, 사실상 내용 자체는 전혀 어렵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앞에 ‘서로’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흔히 사용하는 그리 어렵지 않은 용어인데, 하지만 진리적 차원에서 보면 상당한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인간이다” 라고 했을 때, 하지만 원래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도 없는 것인데, 그렇다면 무엇만 있는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마지막 때에 부활될 때도 몸만 부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혼이라는 것은, 몸이 만들어낸 조작된 개념이라는 말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영혼이란 표현을 사용하셨지만, 즉 비유로 어리석은 부자를 말씀하시면서, “오늘밤에 너의 영혼을 데리고 가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혼이 떠나시다” 라는 표현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런 인간들이 흔히 사용하는 용어를 차용해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몸을 만들어놓고, 이 몸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과 육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자아는 몸이 만들어낸 임시방편 !!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몸에서 만들어낸 자아가, 즉 자기가 자기를 볼 때 만들어진 임시방편적인 것으로서, 즉 인간이라는 실체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없는데, 하지만 인간을 생각하도록 한 “니는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만드신 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복잡한데,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이 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어놓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이 몸에서 자아를 구축하게 되었고, 물론 그렇게 해서 구축된 자아는 허구인데, 그런 자아를 즐겁고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몸을 일방적으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아담의 후손들인 모든 인간들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공중에 나는 참새도 누가 기르는가? 분명히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기르신다고 하는데, 그러니 참새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즉 “참새야, 참새야, 너는 누가 키우지?” 라고 하면, 참새는 “하나님이 키웁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짹짹짹” 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물어보면 과연 그런 대답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 개만도 못한 모든 인간들 !!

그것이 강 장로님의 ‘개’ 에피소드인데(?), 그러니 우리는 개보다도 더 못하다는 것이다. 개는 자아가 없는데, 왜 자아가 없는가? 굳이 자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개를 만들어놓았지, 결코 개 자신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님을 이 개는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모르니, 인간이 개만도 못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자아는 허구라는 것인데, 그러니 자아는 곧 악마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하나님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서부터 출발을 하는데, 그래서 그 인간을 조사해보니 몸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인데, 모두가 다 인간을 위한 철학이고, 인간을 위한 과학이라는 말이다. 그런 기술을 배워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돈이 되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전 세계의 인류는 무엇인가? 모두가 다 개보다 더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이 지렁이 같은 야곱아!”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아마 지렁이가 들었으면 엄청 섭섭했지 싶은데 말이다.  

그러므로 이 인간이라는 것이 없으면 무엇도 없겠는가? 가정이라는 것도 없는데, 자아가 곧 ‘나’이니 말이다. 그렇게 ‘나’ 라는 것이 있으니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도 허구이고, ‘너’도 허구이고, 또한 가정도 허구라고 하면, 이 사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론 국가도 허구이고 말이다.

◈ 국가는 짐승의 속성을 보여주는데 !!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국가의 허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다니엘서와 스가랴서에서는 국가를 국가로 보지를 않고, ‘짐승’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는 말이다. 어떤 신부는 국가가 있어야 교회가 있다고 하는데, 얼마 전에 조찬기도회도 열고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분명히 국가를 짐승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짐승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국가를 짐승이라고 이야기함으로서, 국가는 짐승의 속성으로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하나님이 만든 몸은, 몸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즉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다윗의 몸과 죽어가는 아기의 몸은?

어제 예배시간에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는데, 즉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만 그 아기가 죽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지만, 그 아기는 죽고 말았는데, 그러자 다윗은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럴 때, 이 다윗의 아기라는 몸과 다윗이라는 몸이 서로 어떤 역할을 하는고 하니, 그 아기는 자기를 위한 몸이 아닌데, 또한 다윗의 몸도 아기를 위한 몸도 아니고 말이다. 그 아기와 다윗의 몸이 합쳐서 누구를 보여주는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즉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미리 배치되어 있는 몸이 바로, 하나는 아기의 몸이고, 또 하나는 다윗 자신의 몸이라는 말이다. 또한 둘 다를 합쳐도 몸이고 말이다.

◈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몸을 자기 몸으로 만들어서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햇빛과 공기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다 기르신다는 것이다. 즉 ‘기르시나니’ 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당신은 누구 덕분이 삽니까?”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모두가 다 자기가 노력해서 먹고산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길러주신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지난 시간에 한 것처럼 일종의 농담이고 말이다.

하지만 병원에서 아파서 누워있으면서 숨을 헐떡이는 사람조차도 누구의 힘으로 그렇게 숨을 쉬는가? 분명히 하나님께서 숨을 쉬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몸이 아픈 사람은 병원에 누워서 뭐라고 하겠는가? 하나님께 항의를 하는데, 물론 숨을 쉬는 것은 기본이고 말이다. 왜 자기 몸을 아프게 하느냐고 말이다.

◈ 하나님아, 왜 내 몸을 아프게 하는가?

하지만 그렇게 몸을 왜 아프게 하느냐고 항의를 한다는 것 자체는, 그 앞에 무엇이 전제가 되는가? 그것은 바로 “내 몸은 내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타인이 왜 나의 몸을 아프게 하는가? 이 악한 하나님아!” 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그런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몸이 그만 누구의 소속이 되고 말았는가? 자기가 몸에서 허구적인 자아를 만들어놓고, 그 몸은 순전히 ‘나’에게 복종하는, ‘나’를 즐겁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나’를 절대화시키는, 즉 ‘나’를 신으로 만드는 몸으로 전환을 시켜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엄연히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말이다.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이 바로 악마가 한 짓인데, 그렇게 인간을 마구 버려놓았다는 것이다.

◈ 성경해석을 하는 ‘너’는 도대체 무엇인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성경해석이라고 하는 것이, 즉 성경이 아무리 문자로 되어있다고 해도, 그렇게 “성경해석을 하는 너는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즉 “인간인가? 아니면, 성령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몸인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몸으로서 성경을 해석할 때는 하나님의 속성이 나오게 되고, 그런데 그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고 성경해석을 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다 자기 영광이 된다는 말이다. 즉 자기 몸으로 여긴다면, 거기에서는 자기 영광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재에 있는 이 ‘서로를 위하여’ 라는 것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나를 위하여’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재미나게 노는데 열중을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전혀 안중에도 없고 말이다.

◈ 잠시  ‘몸’에 대해서

여기에서 ‘몸’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면, 이 ‘몸’ 이라는 것은 일종의 덩어리인데, 그런데 이 덩어리를 씻겨주고 먹여주고 입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밤이 되면 잠도 재워주어야 하고 말이다. 그렇게 감당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아프면 간병도 해주어야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몸이라는 덩어리를, 그렇게 씻겨주고 먹여주고 입혀주어 재워주는데 아프지 않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벌기가 힘이 들면 기껏해야 들고 나오는 대안이 무엇인고 하니, “그냥, 꺅 죽자” 라는 것인데, 즉 자살이라는 말이다. 즉 자기 덩어리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집채와 같은 커다란 덩치를 감당을 하려고 하니 돈이 필요하고, 그런데 돈을 벌려고 하니까 짜증이 난다는 말이다. 그렇게 짜증이 나니 그만 자살이나 하려고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살을 하려고 하니, 그동안 공들인 자기 인생이 너무나 아깝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 아, 감당이 불감당 !!

이것을 한 마디로 “감당이 불감당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괜히(?) 덩어리를 주어서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날씨가 조금만 더우면 시원한 것을 마셔주어야만 하고, 샤워도 해주어야하고, 또한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TV를 봐주어야 하고 말이다.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운동을 한다고 난리를 피워주워야 하고 말이다.

우리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하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또한 ‘나’ 라는 인형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이 인형을 가지고 놀아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드는지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란 무엇인가?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감당할 수도 없고 말이다. 그야말로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딜레마도 이런 딜레마가 없다는 것이다.

◈ 술은, 몸을 없애는 굿 아이디어 !!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이 몸을 그만 없애버리는데, 그렇게 없애는 방중에서 제일로 좋은 방법이 바로 ‘술’ 이라는 것이다. 술을 먹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술은 먹는 것이 아니라 처먹는 것인데, 그러면 왜 술을 처먹는가? 그것은 바로, 술을 처먹게 되면, 인형과도 같은 큰 덩치를 감당해내려고 하면, 술을 처먹는 그 짧은 순간에는 그것을 잊을 수가 있는데, 마치 마약처럼 말이다. 얼마 전에도 식당에서 술을 처먹는 사람을 보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술을 처먹으면 나중에 술이 깰 때가 되면, 머리가 깨어지게 아프다는 것이다. 물론 술을 처먹지 않는 사람은 그 고통을 모르지 싶은데, 그러니 마치 술은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까, 자기가 자기 몸에 마취주사를 놓고, 자기 머리를 자기 주먹으로 때리고 치는 것과도 같은데, 그리고는 마치가 끝나면 “누가 내 머리를 때렸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술이 아니라면 과도한 몸부림을, 즉 춤을 춘다고 하든지, 흡연을 한다든지, 지나친 여행을 한다든지, 도박에 빠진다든지, 그렇게 해서 잠시동안 자기를 잊는 그 순간만큼은 “나도 없고, 너도 없는”, 그렇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잊기 위한 모든 조치는, 고스란히 몸의 아픔으로 그대로 남아서 자기 몸에 되갚아주게 되니, 결국에는 감당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알았던 ‘들뢰즈’ 라는 철학자는, 병원에서 입원을 해있으면서 링겔을 뽑아버리고서는 그만 창문에서 뛰어내려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까뮈는 엽총으로 자살을 했고 말이다. 바로 이것이 집채만한 덩어리를 가지고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몸과 자아의 관계만 남게 되니 !!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니 남는 것은 무엇인가? 몸과 자아의 관계만 남는데, 고상하고 점잖고 훌륭하기 짝이 없는 자아를 누가 괴롭히는가? 그만 자기 몸이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동안 쌓아온 업적, 훌륭하고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또한 남에게는 해꼬질을 하지 않고 모범적으로 살았다고 하는 자아가 말이다.

그런데 나이가 70이 되고 80이 되어서 정신이 그만 혼미해지고 하니, 자기가 그만 자기에게 실망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 아닌데, 왜 이렇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도 치매현상을 보이는데, 그러면서 “이것은 원래 내 모습이 아니야. 내가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야” 라고 제 아무리 소리를 쳐도, 머리의 회로가 이미 다 망가지고 말았는데,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나와서 아무나 붙잡고서 “권사님, 저를 미워하지요? 당신, 나에게 욕했지?” 라고 하는데, 그렇게 치매현상이 나타날 때는 누가 말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돌아서서 뭐라고 하는가? “내가 왜 그랬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치매도 계속이 되면 그만 습관성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그러니 고상한 자아를 남기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자기를 죽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 아하, 인간이 이렇게까지 대단할 수도 있구나 !!

다시 말해서, 이 몸을 자기의 고상함으로, 왜냐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착함으로, 즉 자기의 고상한 자아상으로, 즉 “내가 이렇게 멋있는 인간도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즉 자기도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말이다. 바로 그런 자기 몸을 가지고, 즉 자기가 보고싶어하는 것을 두고서 ‘성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하, 인간이 이렇게까지 대단할 수도 있구나!” 라고 말이다. 그것이 곧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화론이라는 말이다. 그런 성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100퍼센트 다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 ‘나’ 뿐이야 !!  ‘나’ 뿐이야 !!

다시 정리하면, 즉 “우리교회는 이렇게 훌륭한 교회가 될 수 있고, ‘나’ 라는 인간이 이렇게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멋있는 존재가 될 줄 알았어. 그럼시롱(?)” 이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가 자기 몸에게 감사하고 싶어서 환장을 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서 그들은(?) 기독교에 입문을 했는데, 그러니 처음부터 자기밖에 모르고, 끝까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 우리 몸이 죄를 보여줌으로서, 하나님의 속성을 !!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지겠는데, 너무 일방적으로 강의를 해버리면 좀 그러니 말이다. 하나님과 몸 사이에 있어서, 그것이 무슨 관계라고 했는가? 아까 분명히 제가 이야기했는데,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준다고 말이다. 즉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려고 하면, 우리 몸은 반드시 죄가 무엇인지, 그 죄를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그렇게 사용을 하시겠다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 몸을 아주 가뿐하게 죄를 짓는 몸으로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가뿐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 지옥의 속성(?) - 아니야, 내 몸은 내 것이야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떤 놈들이 지옥에 가는고 하니까,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끝까지 움켜쥐고 놓지를 않는 놈들, 바로 그런 놈들이 악마이고, 또 악마의 하수인이고, 또한 지옥에 가야될 쓰레기 같은 놈들이라는 것이다. 감히 자기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서, 자기 것이라고 끝까지 버티는 놈들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해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 몸을 내어놓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는데, 그러므로 죄인을 불러서 의인이 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몫인데, 즉 주님께서 다음 작전을 펼쳐서 알아서 하신다는 말이다.

참 쉬죠잉? 무엇만 알면 되는가? 이 ‘몸’ 이라는 것이 ‘나’ 라고 하는 허구적인 개념의 몸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가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순간에도 누구의 몸이었는가? 그 순간에도 햇빛을 주시고, 또한 장마가 져서 저수지에 물이 차이게 하시는데, 즉 포항지역에 가뭄이 들 때 영천지역에는 단비를 내리시고 말이다. 심지어 황무지에도 비를 내리는데, 그런 것이 다 누구의 조치 때문에 그러한가?

◈ 주님이 함께 계심으로, 졸지에 죄인이 !!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하시는 차원인데, 그런데 그렇게 관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를 보고 이쁘라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하고, 그리고 나서 생명과를 따먹게 하시는데, 그 이유가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몸이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한 그 형상은 아니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해서 우리 몸을 죄의 몸으로서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을 철저하기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어유, 복잡해!)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 인데, 즉 주님이 함께 계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졸지에 죄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자기가 졸지에 스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괜찮은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 사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성화론자 !!

물론 제가 이렇게 성화론자들을 공격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저 어린 최 집사님 아이인 ‘강이’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다 성화론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성화론자에서, 자기 몸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기는 인간으로, 그렇게 바뀌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 기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에게 갈 자만이 자기 몸이 죄를 보여주기 위한 몸임을 알게 되는데, 그렇지 않은 자들은 자기 몸이 자기가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존재라고, 그렇게 다들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것과 한 평생을 싸운다는 말이다.

지금 제가 오늘 강의를 하면서 이 ‘서로’ 라는 개념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었는데, 즉 그 ‘서로’ 라는 개념 아래에 이렇게 많은 내용들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서로’, 즉 ‘나와 너’ 사이에서 공동체를 이루어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말이다.

사실은 이런 ‘나’, ‘너’ 이런 것들이 모두 개념이 없는 것인데, 즉 ‘나’ 라고 일컬어지는 몸과 ‘너’ 라고 일컬어지는 몸은, 그 몸들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죄가 무엇인지, 그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생겨난 몸들이라는 말이다. 물론 아담의 속성이 담겨있는 말이다.

◈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은 계속 새끼를 까야 !!

그렇게 아담이 흙으로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해서 계속해서 자기 새끼를 까는 것은, 즉 아담의 형상을 흘리고 하고 퍼지게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아담은 계속해서 새끼를 까서 퍼트려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거기에 다 실어서 표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 몸과 몸이 합쳐져서 두 몸이 되어봐야 결국 죄의 두 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 어떤 의로움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서로 도와주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그렇게 도와주어도 그 공동체는 여전히 죄이니 말이다.

여기 교재 33페이지를 다시 살펴보자.

** 예수님의 죽으심을 잊은 교회는 쓰레기이다. 서로를 위해서 재미나게 노는 데만 열중한다. 이처럼 세상 멸망의 이유를 찾지 못한 교회나 가정이나 기업체나 국가는 멸망의 대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피 흘리신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라는 것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빠져버리면, 자기들끼리 아무리 재미있게 놀아도 그들은 자신들이 근본적으로 죄인임을 모르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참새처럼 기르시는 이유에 대해서 알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자기들을 존재케 하는지 말이다.

◈ ‘세상 멸망’에 대해서 !!

그리고 그 다음에 보면 ‘세상 멸망’ 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 ‘세상 멸망’ 이란 어떤 개념인고 하니, 그것도 밑을 파보면 원주처럼 그렇게 내용이 꽉 차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차있는 것을 한번 끄집어 내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내용인고 하니, 인간의 몸을 허구적인 자아의 몸으로 엮어져 버리는데, 즉 하나님의 자기 몸이라는 관계가 끊어지고, 그렇게 해서 엮어지게 되면 이 자아는 어디에 예속이 되는고 하니, 그만 시간관에 예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관에 예속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교재에 보면 나중에 나오는데, 인간의 시간관이 무엇인고 하니,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과거가 굴러서 현재가 되고, 그 현재가 굴러서 미래로 ??

예를 들어서, 이렇게 지붕에 눈이 쌓여있는데, 그 지붕의 꼭대기에서 눈을 굴리면 나중에 여기 밑바닥에 떨어질 때는 눈덩어리가 제법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지붕 꼭대기가 과거이고, 밑바닥이 미래이고, 그 중간이 현재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과거에 자기가 생각했던 눈덩이가 뭉쳐져서 현재가 되고, 그 현재가 굴러가게 되면 자기의 미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자아가 보는 몸이 되어버리면, 어디서 어디까지 아는고 하니, 자기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만 자기 몸의 개념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엇을 잊어버리는고 하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하는, 그런 시간개념으로 늘일 수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몸이 없어지면 그만 ‘나’도 없어지니, 자기가 죽고 난 뒤에는 “나는 몰라” 라고 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

그러한 자들이 바로 여호와의 증인들인데, 그래서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죽고 난 뒤가 무슨 소용이 있노? 흙이 되면 그만인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철스님도 역시나 그러한데, 그래서 법어라고 하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 이아무개 : 스님, 계셔요?
* 성철스님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 이아무개 : 우리가 어디서 태어났어요?
* 성철스님 : 그런 건 나도 몰라.
* 이아무개 : 저,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하는데요?
* 성철스님 : 니가 하나님을 데리고 와서 보여주면 믿을게.

이렇게 흔히들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 라고 하는 것은, 이 몸의 개념이 자아가 느끼는 시간 속에서의 몸인데, 그러니 이 몸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냥 “어, 있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여기에 있는, 옥수수 수염차의 경우에 !!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하는 점은,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다른 것은 없고 옥수수 수염차만 있다고 하면, “이것을 누가 가져다주었지?” 라고 생각해야 할 텐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어, 있네” 라고 하면서, 그냥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 옥수수 수염차가 우리 몸이라고 한다면, 그런데 우리의 몸은 어떠한고 하니까, 심리학에서는 사람이 태어난지 6개월이 되면 그때부터를 ‘거울단계’ 라고 하는데, 그 이전까지는 거울에 비친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입의 크기만큼 이 세상을 안다는 것이다.

◈ 갓난아이는, 자기 입의 크기만큼 이 세상을 알아 !!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왜냐하면 6개월 이전에는 아이는 모든 것을 다 입으로만 집어넣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바깥의 세계는 전혀 모르고, 그냥 자기 입에 들어오는 크기만큼만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도 자기 입의 크기 정도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거울을 보게 되는데, 즉 아빠하고 자기하고 거울 앞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꼼지락거리는 것은 자기이고, 그 옆에 서 있는 것은 자기가 아닌 아빠, 즉 ‘타인’ 임을 안다는 말이다. 물론 그때는 완전히 분화가 된 상태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발육이 느린 아이는 엄마를 때리면 아이가 우는데, 엄마와 자기가 아직 분화가 되지 않아서 말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옥수수 수염차가 여기에 이렇게 있다고 하면, “야, 누가 주었지?” 라고 하면서 주신 분을 생각하면서 감사히 여기고 마시면 되는데, 그런데 거울에 가지가 비치듯이 그렇게 자기가 “어, 있네” 라고 하면서, 술이나 처먹고 담배를 마구 피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술 담배를 하십니까?” 라고 하면, “이것은 내 몸인데, 니가 왜?”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 와서도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게임이나 생각하고, 여학생을 꼬실 생각이나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제 집사님 아들이 예배시간에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노트에 적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았는지 말이다. 복음을 들으면서 그렇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기적을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인간은 마귀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

아담 이후에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귀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몸 하나 즐겁게, 그냥 씻어주고, 놀아주고, 웃겨주고, 그런 것 말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괴로우면 술을 처먹고 도박이나 하고 바람이나 피우고, 또 마누라나 때리고 말이다. 그러다가 낚시나 훌렁 떠나버리곤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괴로움을, 즉 자기 몸 덩어리를 잊으려고 하는데, 우리 인간은 바로 그런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면 ‘세상 멸망’은 무슨 의미인가?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세상 멸망’ 이라는 것은, 이미 눈이 굴러서 그런 시간관을 당겨보면, 거기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해야 하며, 멸망을 시켜야 하는가?” 라고 하는, 그것을 인간들이 모르는 것을 ‘비밀’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바로 그 비밀문서에 보면 책이 두 종류가 있는데, 먼저 생명책이 있는데, 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영생에 들어가고, 하지만 행위책에 기록된 자들은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바로 그러한 내막들이 양쪽 책에 다 기록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는가?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미 세례요한은 시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자기가 경험한 시간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시간대를 쫙 늘여놓았다는 것이다. 즉 자기 중심에서 벗어난 시간대,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 자기 몸 중심의 시간대에서 벗어나게 되면 !!

그렇게 자기 중심에서 벗어난 시간대가 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좀 어려운데, 그렇게 자기 몸 중심으로 생각한 시간대에서 벗어나게 되면, 자기 몸은 그만 자기보다 더 큰 것을 바라보는 분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나요?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과거 경험한 것이 자기 현재로 뭉쳐진다는 것에서 벗어나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찾아오게 되면, 자기는 그야말로 하나의 손바닥이고 안개와 같은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는데, 하지만 자기가 그런 손바닥만하고 안개와 같아도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제는 더 큰 것 속에 아주 작고 순간적인 것으로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래도 그것이 어디냐는 말이다.

그래서 마음놓고 웃으면서 이 세상을 보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도다” 라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 말이, 슬퍼서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 그것은 허무주의이고 말이다. 그야말로 기뻐하면서 그렇게 외치면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 멸망’ 이라는 개념에 담겨있는, 밑에 들어있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을 다 설명을 하려고 하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지 싶은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의 피 속에 들어오는 일은, 단순히 자기 목숨을 끊는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가고자 했지만 거절을 당했다.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예수님, 저도 따라가고 싶어요 !!

예수님이 죽으려고 하니 베드도로 따라서 죽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구약에서 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니 뒤따라오는 애굽군대도 갈 수 있는 것으로 따라오다가 죽은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즉 베드로도 예수님을 따라서 죽으면, 자기도 예수님과 함께 있을 줄로 착각했다는 말이다.

지금 추운가요? 그러면 에어컨을 끄고 하겠는데, 온도를 낮추면 좋겠는데, 이게 그만 중고가 되어서 온도조절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양 아니면 염소인데, 천국이 아니라면 지옥이라는 말이다(ㅋㅋ). (아니, 그럼 지금부터 지옥의 경험을?)

그건 그렇고, 아무튼 예수님의 죽으심은 특수한 죽음인데, 그러니 어떻게 감히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들어올 수가 있느냐는 것인데, 그러니 전혀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가 되는 것은 오직 세례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그 세례라는 것은 성령이 와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 자살을 한다고 되는 문제도 아니고 말이다.

◈ 자기 목숨으로도 죄를 지울 수 없다는 점이, 곧 절망 !!

그러니 예수 안에는 자기 죽음으로도 들어갈 수가 없는데, 이것을 달리 말하면, 자기 죄 값은 자기가 죽는다고 해도 결코 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부엉이 바위 위에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자기 죄 값은 없앨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것이 절망이 아니라, 그렇게 지은 죄가 자기 목숨을 바쳐서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 바로 절망이란 말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절망은 바로 그 절망인데, 그러니 전혀 대책이 없다는 말이다. 영원토록 말이다. 도저히 그런 죄를 씻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으면 귀신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타나셔서, 그 죽은 놈을 다시 살려서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대책이 없다는 말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가 죽으면 모든 것이 그만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자기가 막상 죽으니 더욱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살아있다는 말인가? 지옥에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라는 말이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가롯유다의 역할은?

그래서 예수님이 가롯유다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차라리 너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니가 태어나는 것은, 너의 자아의 입장에서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러나 너의 몸은 악마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하다” 라는 것이다. 이해가 됩니까?

그러므로 가롯유다의 몸은 필요한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주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롯유다가 협조하지 않았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를 못했을 것이라는 말도 하는데, 그러니 이렇게 악마가 협력을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일도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 악마가 협조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어 ??

그런데 우리는 이 몸을 자기 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매일같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악마가 여기 있어요. 이단들이 너무 많아요” 라고 하는데, 그렇게 아무리 집구석에 악마가 있고 이단들이 줄줄이 깔려있어도, 모든 것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두고 이단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이단이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다 필요에 따라서 있게 하시는데, 이단이든 삼단이든 간에 말이다.

이제 교재 34페이지를 보자.

** 성도가 거꾸로 사는 것은, 세상을 골려먹는 것이 재미가 나서가 아니요, 일탈의 자유를 만끽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거룩과 대조해볼 때, 홀로 심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자체가 감동적인 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진담이기 때문에 무섭고 무겁다.

◈ 홀로 심각함 !!

여기에 “홀로 심각하기 때문이다”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왜 성도가 이 세상을 거꾸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고 하니, 남들은 다 정상적인(?) 삶을, 즉 넓은 길로 가는데 말이다. 이러한 넓은 길과 좁은 길은 그 길의 폭도 문제이지만, 사실은 그 방향이 더 큰 문제인데, 길의 방향이 전혀 정반대라는 것이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은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나아갈 때, 사도바울은 저 낮은 곳을 향해서, 즉 십자가를 향해서 나아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그것은 곧 ‘다급함’ 때문에 그러한데, 그렇다면 사람들이 과연 언제 다급한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라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바로 그때가 제일 다급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일 년 동안 먹을 것을 먹지도 않고, 입지고 않고 악착같이 저금해서 금방 찾은 빳빳한 현찰 일천 만원이 든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그때 뉴스에서 전라도 지방에 큰 태풍이 올라온다고 한들, 그것이 자기에게 그 무슨 뉴스거리가 되겠느냐는 말이다. 왜 그런가? 다급함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누구의 다급함인가? 자기만의 다급함인데, 그러한 자기만의 다급함이 있어야만 정말로 주님이 귀한 줄로, 즉 복음의 귀함을 안다는 것이다.

◈ 혹시, 오뎅이라도 좀 사드릴까요?

제가 일전에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첫 차로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공중전화박스에서 전화를 하고 나서는 그만 지갑을 통 채로 놓고 왔다는 것이다. 성격이 급해서 지갑을 챙기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이다. 그러니 보통 큰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휴대폰도 없고, 또 돈도 한 푼도 없고 말이다. 서울하늘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 집에 전화를 했는데, 집에 있던 아내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여보, 어떤 여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자기가 이근호 씨 지갑을 주워서 종로 파출소에 갖다 놓았으니 찾아가라고 연락이 왔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종로 파출소로 가서 지갑을 찾고 너무 고마워서 오뎅을 사 줄려고 했는데, 극구 사양을 해서 그냥 나왔다는 말이다.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민중의 지팡이로서 시민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말이다(ㅋㅋ).

시골 목사의 서울 탐방기는 그만 하고, 아무튼 구원을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다급함인데, 즉 예수님의 죽으심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당신, 똑바로 살아” 라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나’의 문제라는 것이다.

◈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신앙’ !!

바로 이것을 두고서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적 신앙’ 이라고 했는데, 그러므로 이 실존적 신앙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고 하니, 집단적 교회, 혹은 제도 교회의 종교 부흥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키에르케고르 당시의 독일의 모든 목사들이 월급을 받아가면서 교회를 키우는데 전념을 다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커야만 정치적인 힘이 세어지고, 그렇게 정치적 파워가 있어서 압력을 가하고, 그렇게 정치꾼이 될 때 목사로서 성공을 했다고 보니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이 ‘실존적 신앙’을 주장함으로서,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을 이길 정도로, 즉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이사야 선지자처럼 말이다. 그렇게 뭔가를 잃어버렸는데, 과연 무엇을 말인가?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인데, 그러면 왜 ‘나’를 잃어버렸는가? 그것은 바로, 그동안 당연히 잃어버려야 될 것을 계속해서 자기 것이라고 쥐고 있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 잃어버린 양 - 에헤헹, 나의 목자가 누구예요? 

그렇게 자기는 죄인이 되었는데, 그런데 그 죄인을 누가복음 15장에서는 ‘탕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탕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원래 자기 몸의 주인은 주님이 볼 때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잃어버린 양으로 간주해서,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나’로 하여금 주님이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잃어버린 양임을 알게 되는데, 이렇게 자기가 주님의 잃어버린 양인 것을 알게 된다면 무슨 개념이 떠오르겠는가? 그렇다고 하면 제대로 된 목자가 과연 누구인지, 물론 기존 목사는 아니고 말이다. 즉 중요한 것은 “그 목자가 누구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곧 “너를 얻기 위해서 오라고 하지 않고, 내가 가서 목숨을 바침으로서 니가 잃었던 생명을 얻었다” 라는 하는, 바로 그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목자는 양을 뜯어먹는 목자가 아니고, 오히려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목자가 진짜 목자라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이고 말이다. 이것이 다음 주일날 오전설교에 해당이 되기 때문에, 거기에 넣을까 생각 중인데 말이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 진짜 다급함에 부딪치게 되면 !!

아무튼 이 ‘다급함’ 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동안 자기가 구축한 거룩이,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성화론자인데, 그렇게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자기의 가치, 자기 존재의 의미 등이 하나님의 거룩한 만나게 되는 순간에, 그 모든 것이 다 와르르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하, 이런 위선적이고 가증한 놈이었구나”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진짜 다급함을 만나게 되면, 집에 불이 났다고 하든지, 자기 아이가 아프다든지,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하든지, 그런 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를 지내게 하라고 했다는 말이다. 자기가 아무리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잘 지키고 해도, 그런 모든 것들은 다 헛된 것인데, 그래서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교재 34페이지를 계속해서 보자.

**  따라서 성경자체가 감동적인 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진담이기 때문에 무섭고 무겁다.

◈ 성경말씀은 농담이 아니기에 !!

시인이나 예술가들은 성경을 보고 감동을 먹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결코 감동적인 글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진담이기에, 즉 농담이 아니라 말이다. 그래서 너무나 무섭고 무겁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진담의 무게인데, 즉 진리의 중량이 말이다. 어떻게 감동을 받는다는 말인가? 짓눌려서 숨을 쉴 수가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아하, 나는 이제 죽었구나”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님, 성경을 어떻게 보셨나요?” 라고 하면, “예, 감동을 받았습니다. 좋은 이야기가 정말 많아요” 라고 하면 안 되고, “예,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이 좋은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도올 김용옥이 하는 이야기인데, 하여튼 성령을 받지 못한 인간들은 티를 낸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티가 난다는 말이다. “성경말씀은 참으로 감동적이야” 라고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감동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가 없는데, 성경말씀이 얼마나 무서운지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렇다면 “무엇이 죄냐?” 라는 문제만 남는다. 분명 죄가 있기에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이다. 만약에 자신의 죄를 모르는 채 예수님의 피를 거론하는 것은 기존의 자기 죄에다 “십자가 피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죄”를 추가한 것이 된다. 죄도 모르면서 죄 씻음을 거론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것이다.

◈ “십자가 피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죄” 추가요 !!

그렇다면 이제 남는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죄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의 죄를 모르는 채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기존에 있는 자기 죄에다 또 하나의 죄를 ,즉 “십자가 피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죄”를 추가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마치 “여기, 밥 추가요” 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그런 인간들은 아예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자청하는데,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죄도 모르면서 죄 씻음을 받았다고 주장하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 ‘죄 씻음’ 이라고 하니, 박옥수가 생각나는데, 그가 하나님께 매를 맞을 것을 생각하니 정말로 끔찍하다는 것이다.

◈ 신학자들 중에서 죄를 아는 자들이 있는가?

바로 그렇게 “여기, 밥 추가요” 라고 하듯이 추가하는 것이 곧 신학인데, 그래서 신학자들 중에서는 죄를 아는 자들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죄를 제대로 안다고 하면 아무리 고생이 되어도 개척교회를 하면 했지, 신학교 교수를 해서 신학자 노릇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너무 간곡히 부탁을 하든지 하면, 어쩔 수 없이 개척교회를 하면서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자기가 교수를 한번 해보려고 그렇게 생쇼를 벌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 주님이 주신 다급함을 만났는데, 그런 교수자리가 눈에 들어오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교수자리가 뭐가 안정되었다고 좋아하는지 말이다. 제 아무리 4대 보험을 다 대주고, 연봉을 아무리 두둑하게 준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그 다급함 앞에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교 교수들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물론 “여러분,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본인들이 믿는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보너스를 제대로 안 주던지 하면 서울시청 앞 광장에 가서 삼보일배를 한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한 숨밖에는 나오지 않는데, 여러분은 그렇지 않은가요?

◈ 양의 탈을 쓴 까페를 아세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한 자들이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나오는데,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인간들이라는 말이다. 요즘은 양의 탈을 쓴 까페도 등장을 했는데, 죄도 무엇인지 모르면서 복음을 다 안다고 한다는 것이다.

(고후 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 11: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러주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 세계에서 말하는 죄는, 실은 “죄가 아니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 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러주지 않는 상태에서, 그런 상태에서 이 인간 세계에서 말하는 죄는, 사실 죄라고 할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소페림’ 이라고 해서 서기관들이 있는데, 그들은 마카비 이후에 활동한 자들로서, 성경말씀을 필사만 한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도 했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죄’ !!

그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죄관(罪觀)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죄는 어떠한가? 예수님은 요한복은 15장 22절에서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그들이 이야기한 그런 것은 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죄인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이다.

◈ 목사님, 사도바울의 말씀도 율법적 기능이?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사도바울의 말씀도 율법적 기능이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당연히 있는데, 사도바울의 모든 권면 속에는 누가 들어있는가? 예수님이 들어 계시는데, 그러니 그런 말씀을 하면 할수록 없었던 죄가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나오니, 그것이 곧 율법적 기능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율법을 더함은 죄를 더함이라” 라고 하는데, 왜 그러한가?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의 몸은 죄인 된 몸으로 한껏 드러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의인이 아닌 죄인이 된 몸으로 말이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무시로 기도하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무시(무?)를 먹으면서 기도하라는 뜻인가?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하라는 의미인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물론 티벳의 승려들은 조금 그런 폼을 잡는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경전을 돌리고 있고, 또 달라이라마에게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모든 직업을 다 포기하고 말이다.

◈ 너희들은 안개인 줄 알아라 !!

그러니 사도바울을 비로한 사도들의 권면의 말씀들은 어떤 차원인가? 그 어떤 말씀이라고 해도 우리들로 하여금, 사도 야고보의 권면처럼 “누가 뭐라고 해도 너희들은 안개야” 라는 것과도 같은 의미인데, 그러니 그것은 “너희들은 안개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라” 라는 것이 아니라, 즉 “너희들은 안개인 줄로 알아라”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안개인 줄 알아야만 하는데, 그러니 우리는 어느 도시에 가서는 장사를 해서 이득을 볼 수밖에 없는, 우리가 바로 그러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야고보서 4장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도들의 말씀이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율법적 기능 가운데 최고의 율법적 기능이 바로 ‘십자가’ 인데,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들의 감추어졌던 모든 어리석은 죄들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제 교재 35페이지 살펴보자.

** 그런데 그 질서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새삼스럽게 자신이 바라보는 죄를 말하는 순간이 오면, 이제 소위 자칭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더 이상 예수님 앞에서 죄가 없다고 우길 수는 없다. 이것은 곧 인간이 생각하는 죄관(罪觀) 자체가 된다는 말이다.

◈ 십자가는 돌맹이 ??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뭐라고 했는고 하니, 돌맹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즉 자기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십자가에 부딪치면 깨어지게 되고, 또한 그들의 행위 위에 이 십자가가 떨어지게 되면, 그들을 아예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그야말로 박살을 내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마치 시속 200km를 달리는 자동차와 절벽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과도 같은데, 또한 동키호테가 돌아가는 풍차를 보고서 적인 줄로 알고 칼을 휘두르면서 덤비는 망나니짓을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위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내 행함이다. 왜? 내가 선악과를 따먹고 내가 알게 된 선한 행위이다” 라고 하면서, 마치 동키호테처럼 칼을 휘두르면서 공격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벽과도 같은데, 그렇게 해서 부딪치면 누가 아프고 손해를 보겠는가? 본인이 아프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부딪침이 성령의 인도하심인데, 즉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일어난 사건, 즉 예수님과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즉 “사울아, 사울아, 니가 엄청나게 고생을 하는구나. 니가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봐야 니만 고생이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

그때 사도바울은 비로소 이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는데, 즉 “야, 이 ‘십자가’ 라는 것이, 내가 새삼스럽게 어떻게 지키고 말고 할 수 있는 율법의 한 조항이 아니라, 그 전체가 절벽처럼 다가와서 나를 박살내는 능력이로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를 완전히 박살을 내어버리는 능력임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라는 것은 자기 몸을 비롯해서 자기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박살을 낸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사도바울이 이러한 말씀을 쓸 때는 결코 함부로 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그야말로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부수어지면서 썼다는 말이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러니 사람들이 아무리 계시와 양심에 입각해서 죄에 대해서 탐구하고 분석하고 조사하고 정립을 해도 모조리 죄가 된다. 그동안 죄인들의 죄를 논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어쨌든 구원이 되고 싶은 종교적 열의로 뜨거운 내가 “회개하는 죄인은 예수의 피로 용서를 받는다” 라는 공식에 맞추어보려고, 부지런히 자신이 죄라고 여긴 모든 것을 다 고백하고 반성하고 회개를 해봤자 바로 그런 행위 자체가 죄가 된다는 말이다. 물론 자기 딴에는 이 회개하는 행위만큼은 의로운 행위일 것이라고 자부해보지만.

◈ 금식하고, 반성하고, 회개를 !!

바리새인들이 구원이 되고 싶어서 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물론 여기 교재에는 “회개하는 죄인은 예수의 피로 용서를 받는다” 라고 했는데,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피가 아니라 양의 피라고 했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공식에 맞추어보려고 바리새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금식하고 반성하고 회개를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근거가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그 근거를 다시 해보면, 아까 이야기한 그 공식 하나면 다 통하는데 말이다. 즉 여기 이렇게 지붕이 있는데, 그 지붕에 눈이 구르게 되면, 과거에 자기 조상들이 어떻게 했는고 하니, 예레미야나 에스겔 등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으니, 자기들은 다시는 조상들과 같은 그런 실수를 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을 하고 회개를 해야한다고 여기고 자기를 비우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금식을 하는 기간에는 오락과 같은 활동을 금하고, 재를 뒤집어쓰고 하자고 했다는 말이다. 또한 그러한 것이 이사야서 등에도 나오고 말이다.

◈ 그러나, 금식조차도 죄임을 !!

그렇게 조상들이 금식을 하고 한 것을 바리새인들도 그대로 따라서 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뭐라고 하시는가? 금식을 할 때는 재를 뒤집어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서, 즉 금식을 하는 표시가 전혀 나지 않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또 무슨 새로운 법 조항이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하라’ 라는 것을 그대로 해도 전혀 소용이 없는데, 물론 하지 않아도 소용이 없고 말이다. 이래도 소용이 없고 저래도 소용이 아무런 없는데, 그래서 구원은 예수님께서 “너, 들어가!” 라고, 그렇게 넣어주는 사람만이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증거하는 자비를 보여주는 몸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판은 한 마디로 ‘분류작업’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자기 조상들이 과거에 했던 회개를 아무리 다시 불러보아도 전혀 소용이 없는데, 오히려 예수님에 의해서 그런 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사실로 드러나고 만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왜 회개하는 행위조차도 의가 되지 못하고 죄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 어느 인간도 예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다.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나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여기서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즉 예수님은 마이크를 들고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찾습니다” 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나타났는가? 바디메오 같은 소경이나 절뚝발이, 그런 자기가 생각해도 그렇고 남이 생각해도, 그렇게 저주를 받아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감히 자기 죄를 아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저는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지금 눈을 감아도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지은 죄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자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귀한 자들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천대를 받지만 말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개만도 못하게 여기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자들도 역시 그러한데, 아마도 그 여자에게 자기 아들이나 딸이 있으면 그 이름도 ‘독구(?)’ 라고 지었지 싶은데, 그렇지 않은가? 아니, 세상에 그런 자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같이, 전부가 다 자기 잘남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래서 없는 잘남도 만들어내기 위해서 성형수술도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습인데, 자기 몸값을 올리려고 말이다. 그런데 올리기는커녕 낮추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 십자가 - 그것으로 족한 줄 알라 !!

지금 더운데 문을 좀 열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니 이 ‘십자가’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 부분이 중요하니 잘 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즉 ‘십자가’ 라는 것은, “제발 선악과를 따먹은 그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서, 너 자신도 판단하지 말고, 남도 판단하지 말고, 오직 생명나무가 되신 주님이 너를 보고 의인이라고 하면, 그것으로 족한 줄로 알아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모든 것을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죄인데, 가롯유다를 보라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가? 사실상 그는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왜 자기가 판단해서 자살을 선택하는가? “나는 죽어서 마땅하다” 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가롯유다는 죽어가면서도 !!

하지만 우리 몸은 누구의 것인가? 분명하게 주님의 것인데,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기 것이라고 우긴다는 말이다. 가롯유다는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주장했고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충실한 악마의 종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는 주인이 바뀌면 대번에 안면을 몰수하고 새주인을 따르는데, 그렇게 하는데는 불과 채 1분도 걸리지 않는데, 아마 개를 키워본 분들은 잘 알지 싶은데 말이다. 물론 조금 똑똑한(?) 개들이 그렇지만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에게 밥 주는 사람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와는 단절인데,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재 자기에게 밥을 누가 주는지, 그 양반이 주인이고 최고라는 말이다. 제가 왜 이런 변절한(?) 똥개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우리도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를 하면, 이 ‘십자가’ 라는 것은 율법적 기능으로서 심판인데, 즉 우리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그렇게 이 세상을 책망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인간이 인간을 건방지게 판정을 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인간세계는 오로지 인간의 판단만이 진리로 통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죄라고 지적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 오직 십자가뿐이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성령 - ‘죄’, ‘의’, ‘심판’에 대하여 !!

이것을 조금 설명을 하고 지나가야 하겠는데, 여기 이렇게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래서 선과 악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무엇에 대해서 말인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선악과에서 나온 죄를 가지고서 판단하고, 또 선악과에서 나온 의를 가지고 판단하고, 또 선악과에서 나온 심판을 가지고서 판단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선악과에서 나온 죄, 의, 심판을 하나로 묶으면 딱 선악과가 되는데, 물론 선과 악에서 나왔으니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나무인가? 아니면, 아직도 니가 주장하는 선악과인가?” 라는 것인데, 즉 성령님이 오셔서 선악과를 가지고 있는 그 자체를 책망하신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이런 방식의 인간은 애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이라고 간주해서 만든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런 선악과를 품은 인간은 누구의 작품인가? 놀랍게도 악마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 선악과는, 악마를 잡기 위한 하나님의 덫 !!

이것을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왜 악마를 선악과를 가지고 유혹을 했겠는가? 그것은 바로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악마를 처벌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녹취자 - 그러면 아담이 악마의 덫에 걸린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악마가 하나님이 쳐놓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인가요?)

그러므로 이 선악과는 악마를 영원한 형벌에 집어넣는 근거로서의 역할인데, 그러니 여기에 사람이 끼어 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항은 금붕어가 살라고 만든 것이지, 사람이 살라고 만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사우나 - 아가들은 나가 놀아라 !!

그리고 사우나의 뜨거운 터키탕과 같은 것은 어른들이 들어가서 퍼지고 놀라고 만든 것인데, 그러니 아이들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른도 몸이 단련된 자들만 들어가고 말이다. 물론 단련이라기보다는 이제 피부가 늙어서 감각이 둔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뜨거운 곳에 아이들이 들어가면, 그 연약한 피부가 적응을 하지 못해서 그만 병이 생기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안 되는데, 마치 금붕어가 사는 어항에 우리 인간이 살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만 악마가 하나님과의 천상의 전쟁에서 지고 나니 그만 약이 올라서, 그만 하나님에게 당한 그 분풀이를 우리 인간에게 했는데, 즉 악마 자신에게 적용이 되는 선악과를 그만 인간에게 집어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 예수여,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그렇다면 이 선악과가 악마이게 해당이 된다는 것이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까,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악마가 뭐라고 하는가? “예수여, 우리를 여기까지도 멸하러 오셨나이까?” 라고 하는데, 즉 자기들이 하늘에서 당했는데, 이제는 이 땅에서도 박살내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끝까지 쫓아와서 말이다.

(마 8:29) 이에 저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그래서 악마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이것이 욥기나 스가랴서에 보면 나오는데, 이 생명나무의 기준을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온갖 발악을 다 한다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오는데, 즉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라” 라고 말이다.

(고후 4: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렇게 복음의 광채가 비추어지지 않으면 무엇만 남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선과 악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든지, 믿음과 소망 등등은 없다는 말이다. 그냥 남을 지적하고 송사하는, 즉 법대로 하자고 말이다.

◈ 개혁주의 신학 = 마귀 신학 !!

마귀는 우리가 그런 것에 벗어나지 못하고 꽁꽁 묶이도록, 그러한 방향으로만 악마는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즉 선악과의 테두리 안에서만 살도록 말이다. 복음의 광채보다 자기 잘만 맛에 살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성화론은 마귀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개혁주의 신학이 마귀의 신학이라는 것을 도출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는데 말이다. 

아무튼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성령께서 오셔서 뭐라고 하시는가? “예수님으로 만족하는가? 만족하면 되었다. 그러면 니가 니 자신을 판단할 권한도 니에게는 없다. 니 몸도 아닌데 니가 왜 판단하는가? 니는 지금까지 니가 스스로 판단해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니 심장을 뛰게 해서 살려오신 것을 모르는가? 그런데 왜 자꾸만 니가 노력해서 살아온 것처럼 여기는가? 그렇게 하지 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이에 반해서 뭐라고 하는가? 마치 우리가 훌륭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자꾸만 노는 동네를 선악과 동네라고 여기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렇게 해야만 생명나무가 가려지니 말이다.

저는 식당에 가면 담배 피우는 사람을 보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데, 그래서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곤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입고 물고 있는 담배를 빼앗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면, 얼마나 인간이 선악구조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 수 있는데, 자기 몸이니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자기가 판단해서 말이다. 물론 식당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인간도 그렇고 말이다.

* 저근호 : 아, 담배 맛이 참 좋구나.
* 이근호 : 여기는 식당입니다. 담배를 피우지 마세요.
* 저근호 : 여기에 ‘금연’ 이라고 써 붙여놓지 않았는데, 왜 그래? 참 이상한 사람이네.
* 이근호 : 그것은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 저근호 : 아니, 내가 피우겠다고 하는데, 왜 그래?
* 이근호 : 그래도 안 됩니다.
* 저근호 : 이봐요, 여기 식당 주인장 없나?
* 이근호 : 아니, 식당 주인은 왜요?
* 저근호 : 밥을 다 먹었으니 밥값을 계산하려고 말이야. 왜 당신이 해줄래?
* 이근호 : ? ? ?

여기서 요한복음 16장 11절의 말씀을 다시 보자.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잠시 ‘세상 임금’에 대해서 !!

여기에 보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라고 하면서, ‘세상 임금’이 나오는데, 이것도 정말 어려운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임금, 혹은 군주라고 보면, 다니엘서에 보면 4마리의 짐승이 등장하는데, 그 짐승들을 각각의 군주들로 본다는 것이다. 즉 왕이라는 말이다.

물론 요즘 세상에는 왕이 없는데, 그런데 이렇게 성경에서는 짐승을 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밑에 있는 백성들은 무엇인가? 즉 왕과 백성의 관계는 어떠하냐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민주주의가 아니고, 백성들은 임금의 운명에 함께 놀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주와 백성의 관계가 무엇을 설명하는데 아주 적절한고 하니, 악마에게 얽매여 있는 인간들의 현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이것보다 더 적합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 개성 없음을 즐기려면 군대말뚝을 !!

그 상세한 논리적 내막은 굉장히 복잡한데, 그것은 그때 가서 하고 말이다. 어떻게 임금이 시킨다고 해서 그대로 따라가느냐는 것이다. 그런 것이 참으로 웃기는 짓인데, 하지만 군대에 가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물론 군대에 안 갔으면 말을 하지 말고 말이다.

군대에 가면, 그야말로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종의 장기판의 체스와 같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입던 옷은 다 소포로 집으로 보내버리고, 그때부터는 똑같은 옷을 입혀서, 개성이고 자존심이고 뭐고 간에 그런 것은 일절 인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조작이라고 하는데, 즉 하나의 병졸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관계가 좋고 즐거울 때는, 그때는 말뚝을 박으면 된다는 것이다. 즉 개성이 없는 것을 즐기게 될 때 말이다.

◈ 이 세상 자체가, ‘선배님!’ !!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미셀 푸코의 주장에 의하면, 그러한 것이 군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집단, 즉 병원, 학교, 교회 등등, 그러한 모든 세계에 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직장에서 어떠한가? ‘선배님!’ 이라고 하면서 아부를 하는데, 즉 선배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동기들끼리라도 경쟁을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체제, 바로 그런 것은 모든 직장에 다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말이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십자가 마을 안에도 말이다.

그러니 심판을 아래에 있는 졸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윗대가리를 심판하는데, 즉 이 세상의 군주를 심판해버리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이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살았는가? 천만의 말씀인데, 군주의 운명이 누구의 운명이라고요? 그것이 곧 백성들의 운명이 되니, 백성들도 같이 박살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모두가 군주와 같은 한 통속이니 말이다.

◈ 임금이 심판을 받는데, 왜 백성들도 덩달아 받는가?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문제인데, 왜 군주가 심판을 받는데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같이 받는지 말이다. 이것을 젊은 아이들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데, 대통령이 잘못하면 직언을 하든지 해서 바로잡아야만 하는데, 왜 바보같이 그렇게 덩달아 비비면서 같이 가느냐고 말이다. 그러면 그쪽에서는 뭐라고 하겠는가? “니가 청와대에 한번 가봐라. 그런 말이 나오는지” 라고 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생각이 얼마나 이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리인지 모르는데, 하나의 기업체가 범죄를 하게 되면, 구성원들이 그 기업체를 보고 썩었다고 하면서 도려내든지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범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주체집단’ 이라고 하는데, 즉 집단자체가 하나의 주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주체 자체가 하나의 집단으로 !!

그렇게 주체가 집단이 되어버리면, ‘나’ 라고 하는 개인 주체는 그만 힘을 쓰지 못하는데, 이러한 주체집단은 샤르트르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주체집단이 싫은 사람들은 종교에 입문하게 되는데, 자기 혼자서 머리를 밀고 산 속에 들어가서 중이 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그러한 중들이 모여서 회의를 어떻게 하는가? 여기 저기서 ‘선배님!’ 이라는 소리가 마구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돈을 조금이라도 더 타게 되니 말이다. 또 돈이 되는 좋은 주지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선배님?’ 이라고 하면서, 빌고 또 빌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에게 비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천주교의 수녀 세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그냥 보면 수녀들이 다 평범해 보이고 같아 보이는데 말이다. 수녀의 세계에도 학력은 짧은 수녀는 식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서울대학교 정도를 나와서 수녀가 되면, 그 어디를 가도, 농띠를 부려도 유능하고 인정받는 수녀가 된다는 말이다. 거기에 비해서 시시한 지방 성경학교 출신의 수녀는 어디를 가도 허드레 일만 하고 말이다. 그러니 높은 자리는 일류대학을 나온 년들이(?) 다 차지하고 만다는 것이다. 

◈ 아무튼, 세상 자체가 곧 짐승 !!

제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 이 세상 자체가 바로 짐승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 남은 논리적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하면 그런 임금에 의해서 이 세상이 운영이 되고 유지가 되느냐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은 이야기를 하자면 아주 길다는 것이다.

일단 교재 39페이지를 읽고 나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 메시야를 학수고대를 했던 그들이, 도리어 오신 메시야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저주하고 조롱하고, 결국 제거해버리는 그 심성, 이 심성이 곧 죄였던 것이다. 이 심성이 모든 인류의 보편적 심성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심성이 어떠하기에 그토록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제 교재 37페이지의 ‘세상 도안’을 살펴보자.

** [세상 도안(圖案)] -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 왜 ‘세상 도안’ 인가?

저는 슬슬 더워지는데, 여러분들은 괜찮은가요? 여기에 제목이 ‘세상 도안’ 이라고 되어있는데, 말은 쉽게 ‘도안’ 이라고 했는데, 그 내용은 무엇인고 하니, 여기 이렇게 몸이 있다면, 이 몸에서 이미지가 나온다는 것이다. 즉 ‘이미지(image)’가 말이다. 이 ‘이미지’ 라는 것은 뭔가 머리에 떠오르는 느낌인데, 즉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저 사람은 이미지가 참 좋아” 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이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은, 그 사람의 속에 들어있는 그 사람의 성격과 같은 것으로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독특한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물론 바깥 외모에서도 풍기는 것이 있고 말이다. 그러니 “이미지를 5kg만 주세요” 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즉 이미지는 분명히 없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있는 것이 진짜 있는 것인가? 아니면 거기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진짜로 있는 것인가?

◈ 전지현 씨, 술 좀 그만 마시세요 !!

예를 들어서, ‘전지현’ 이라는 여배우가 있다고 하면, 그런데 이 전지현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늙은 의사가 전지현의 위를 내시경으로 검사한다고 할 때,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냥 평소에 하든 데로 무덤덤(?) 하다는 것이다. 물론 “야, 참으로 늘씬하고 예쁘구나. 혹시 연예인가?” 라는 생각은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늙은 의사가 그 다음에는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아직 나이도 젊은 아가씨가 무슨 술을 이렇게나 많이 마셔서 위가 엉망입니까? 그러니 앞으로 술을 조금은 절제하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전지현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혹시 명예 훼손 죄로 고발을?)

하지만 전지현이 검사를 다 받고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병원에서 팬들이 그만 장사진을 치고 있는데, 젊은 의사나 간호사들도 사인을 받으려고 난리이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이미지라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나름대로의 전지현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의 몸도 있지만, 그러한 몸은 키 얼마에 몸무게 얼마, 그렇게 숫자적인 것밖에 없지만, 진짜 전지현의 전지현 됨은 그런 세포조직이 아니라, ‘전지현’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길쭉하고 늘씬한 롱 다리에, 잘록한 허리에, 그리고 찰랑찰랑한 생머리라는 것이다(ㅋㅋ).

그것이 바로 ‘이미지’ 라는 것인데, 결국 사람들은 그 무엇이 손에 잡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무엇을 먹으면서 살아가는고 하니, 자기 이미지와 남의 이미지를 먹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이미지에 속으면서 살아가는 것이지만 말이다. 즉 사람은 나름대로 이미지를 관리하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 예, 엄마는 밥해주는 사람입니다 ??

예를 들어서, 어느 엄마가 자기 아이에게 “엄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지?” 라고 하면, “예, 밥해주는 사람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 아이에게 엄마는 무엇인가? 그냥 밥 해주는 식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엄마는 그런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엄마다운, 즉 다른 엄마들과의 차이가 나는 것이 무엇이지,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물으면 아이가 그 질문을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질문을 알아들었다고 하고, 그렇다면 그 아이는 뭐라고 하겠는가? “엄마는 나의 천사, 엄마는 나의 모든 것” 이라고 하면, 엄마는 그만 입이 옆으로 좍 찢어지면서 “옳지. 아이쿠, 똑똑한 내 새끼. 뭐 먹고 싶어? 이 엄마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모두 다 사줄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엄마는 밥을 해주는 사람” 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엄마는 자식에게만은 식모나 식당 아줌마가 아니고 싶다는 말이다. 

◈ 사람들은 무엇에 현혹이 되어서 살아가는가?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이미지를 이 아이가 어디서 가지고 오는고 하니까, 그것이 곧 ‘세상 도안’ 이라는 말이다. 교재 37페이지에서부터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려고 하는데, 즉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에 현혹이 되어서 살아가는가?”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그런데 여기서 제가 왜 성경말씀 이야기를 하다가 이미지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 이렇게 우리가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인간이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누구를 생각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이미지도 만들어내고, 예수님의 이미지도 만들어내고, 교회의 이미지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교회는, 여전히 천국 여행사의 이미지가 !!

그래서 교회가 제 아무리 썩었다고 하더라도, 이 교회의 이미지는 아직도 어떤 이미지인고 하니,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즉 그런 천국행 티켓을 구입할 수 있는 여행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 가려고 하면, 적어도 절에 가면 안 되고, 이 ‘교회’ 라는 여행사를 가야만이 천국으로 간다는 말이다.

제가 왜 하필이면 이 ‘여행사’ 라는 이미지를 사용했는고 하니까, 여행사라는 것은 어떠한가? 특별히 거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그 정보를 얼마든지 활용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대의 젊은 아이들이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이 ‘여행사’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교회에 충성과 봉사를 전혀 하지를 않는데, 물론 헌금도 하지를 않고 말이다. 다만 교회에 가끔 나와줄 테니, 자기들을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 여행사 노릇만 제대로 해달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바램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이미지’가 잘못되면, 제 아무리 성경을 공부해도 !!

그렇다면 하면, 도대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그런 이미지가 형성되었는지, 바로 그것을 한번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가 잘못되었다고 하면, 제 아무리 열심히 성경말씀을 공부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이 세상 도안에 대해서, 즉 이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도안’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제 아무리 거기에 성경말씀을 투입해도,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의 이미지를 정당화하는, 그런 왜곡된 성경해석만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공동체가 어쩌고저쩌고 해도, 그런 것도 다 이미지에 불과한데,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교재 37페이지의 ‘세상 도안’을 다시 살펴보자.

** [세상 도안(圖案)] -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어 … 알지어다” 라는 방식 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런데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심정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해봤자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도 모르게 되어 있고, 자기 자신이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거론하는 것도 제멋대로 임이 뻔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나 몸은 항시 ‘잠잠’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 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나는 도다

◈ 가만히 있어 … 알지어다 !!

이제 정말로 이것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논리가 참 어려운데 말이다. 쉽다고요?(ㅋㅋ)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가만히 있어, 그러면 하나님이 알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자기의 이미지 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 그러면 하나님이 알 것이다” 라는 것조차도 말이다.

그러니 거기에 아무리 성경말씀을 처발라도, 자기 자신이 죄인임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거기에 아무리 성경말씀을 처바르고 덧칠을 해도, 그런 것은 여전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마치 고장난 TV를 제 아무리 열심히 닦고 그 위에 못난이 삼형제 인형을 올려놓아도, 여전히 TV가 나오지 않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가 제 아무리 교회당을 꽃으로 장식을 하고, 인터넷으로 예배시간을 생중계를 하고 홈페이지를 만들고, 그렇게 무엇을 하더라도 복음이 나오지 않는다면, 즉 피 흘리신 주님의 말씀이 없다고 하면, 그런 것은 교회의 이미지 일뿐이지, 즉 교회의 도안일 뿐이지, 거기에서는 전혀 구원의 능력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그런데 나는 왜 복음을 싫어하지?

이제 진짜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따라서 우리가 “아, 그것이 복음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알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말이다. 자기 자신이 곧, 그렇게 예수님을 싫어하고, 십자가를 싫어하고, 복음을 싫어하는 존재로서, 그런 상태에서 아빠 엄마로부터 태어나야만 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들은 왜 그렇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에 싫어하는지 말이다. 물론 우리 자신도 그러한데, 도대체 왜 그러하냐는 말이다. 그것은 다음 시간에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직접 만날 때 우리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화로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죽어도 마땅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흔들리지 않도록, 영원토록 지속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9,19 오후 10시에 마침.

                                                           갑자기 정애가 땡기네. 이미지라도...
 
대구090720피p033죄인으로출발하는몸

대구 7월20일 피 8강 하나님의 속성을 담는, 드러내는 몸 (죄인 만들기)

[09 대구강의 13] - [피 8] - 죄인으로 출발하는 몸
                                                                                
                                                           09,07,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인간’은 허구이고, 허상 !!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33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예수님의 죽으심을 잊은 교회는 쓰레기이다. 서로를 위해서 재미나게 노는 데만 열중한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잊은 교회는 쓰레기라고 할 수 있는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서로’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사실 이 책에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심사숙고를 해서 쓴 것들인데, 하지만 이 책에서 그런 과정들을 다 설명하지는 못하고, 그냥 단어들로서만 나열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 단어 하나하나를 파보면, 그 밑에 !!

그러므로 이 책에 있는 단어들은, 마치 감자나 고구마처럼 땅위에 보이는 것과 같은데, 그런데 그 땅 아래를 파보면, 감자나 고구마가 줄줄이 달려나오듯이, 그렇게 그 밑에는 엄청난 내용들이 깊숙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위에 단어들이 이렇게 나열되어 있으면, 그 각각의 단어 밑에는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내용들이 그 아래에 줄줄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책을 쓰다가 보면, 그 밑에 있는 것들은 일일이 다 설명을 하지는 못하고, 그 위에 단어들만 이렇게 쓰다가 보니,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해서 말이다. 그러니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무슨 의미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파악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을 일일이 모두 설명을 하게 되면, 이 책이 지금 약 350페이지가 정도 되는데, 그 몇 배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1,000 페이지를 훌쩍 뛰어넘지 싶은데 말이다.

◈ 여기서 ‘서로’ 라는 개념을 파내려 가보면 !!

여기 읽은 교재에 보면 “서로를 위해서 재미나게 노는데 것에만 열중한다” 라고 하는데, 사실상 내용 자체는 전혀 어렵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앞에 ‘서로’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흔히 사용하는 그리 어렵지 않은 용어인데, 하지만 진리적 차원에서 보면 상당한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인간이다” 라고 했을 때, 하지만 원래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도 없는 것인데, 그렇다면 무엇만 있는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마지막 때에 부활될 때도 몸만 부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혼이라는 것은, 몸이 만들어낸 조작된 개념이라는 말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영혼이란 표현을 사용하셨지만, 즉 비유로 어리석은 부자를 말씀하시면서, “오늘밤에 너의 영혼을 데리고 가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혼이 떠나시다” 라는 표현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런 인간들이 흔히 사용하는 용어를 차용해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몸을 만들어놓고, 이 몸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과 육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자아는 몸이 만들어낸 임시방편 !!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몸에서 만들어낸 자아가, 즉 자기가 자기를 볼 때 만들어진 임시방편적인 것으로서, 즉 인간이라는 실체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없는데, 하지만 인간을 생각하도록 한 “니는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만드신 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복잡한데,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이 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어놓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이 몸에서 자아를 구축하게 되었고, 물론 그렇게 해서 구축된 자아는 허구인데, 그런 자아를 즐겁고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몸을 일방적으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아담의 후손들인 모든 인간들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공중에 나는 참새도 누가 기르는가? 분명히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기르신다고 하는데, 그러니 참새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즉 “참새야, 참새야, 너는 누가 키우지?” 라고 하면, 참새는 “하나님이 키웁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짹짹짹” 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물어보면 과연 그런 대답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 개만도 못한 모든 인간들 !!

그것이 강 장로님의 ‘개’ 에피소드인데(?), 그러니 우리는 개보다도 더 못하다는 것이다. 개는 자아가 없는데, 왜 자아가 없는가? 굳이 자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개를 만들어놓았지, 결코 개 자신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님을 이 개는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모르니, 인간이 개만도 못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자아는 허구라는 것인데, 그러니 자아는 곧 악마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하나님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서부터 출발을 하는데, 그래서 그 인간을 조사해보니 몸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인데, 모두가 다 인간을 위한 철학이고, 인간을 위한 과학이라는 말이다. 그런 기술을 배워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돈이 되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전 세계의 인류는 무엇인가? 모두가 다 개보다 더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이 지렁이 같은 야곱아!”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아마 지렁이가 들었으면 엄청 섭섭했지 싶은데 말이다.  

그러므로 이 인간이라는 것이 없으면 무엇도 없겠는가? 가정이라는 것도 없는데, 자아가 곧 ‘나’이니 말이다. 그렇게 ‘나’ 라는 것이 있으니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도 허구이고, ‘너’도 허구이고, 또한 가정도 허구라고 하면, 이 사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론 국가도 허구이고 말이다.

◈ 국가는 짐승의 속성을 보여주는데 !!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국가의 허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다니엘서와 스가랴서에서는 국가를 국가로 보지를 않고, ‘짐승’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는 말이다. 어떤 신부는 국가가 있어야 교회가 있다고 하는데, 얼마 전에 조찬기도회도 열고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분명히 국가를 짐승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짐승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국가를 짐승이라고 이야기함으로서, 국가는 짐승의 속성으로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하나님이 만든 몸은, 몸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즉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다윗의 몸과 죽어가는 아기의 몸은?

어제 예배시간에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는데, 즉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만 그 아기가 죽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지만, 그 아기는 죽고 말았는데, 그러자 다윗은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럴 때, 이 다윗의 아기라는 몸과 다윗이라는 몸이 서로 어떤 역할을 하는고 하니, 그 아기는 자기를 위한 몸이 아닌데, 또한 다윗의 몸도 아기를 위한 몸도 아니고 말이다. 그 아기와 다윗의 몸이 합쳐서 누구를 보여주는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즉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미리 배치되어 있는 몸이 바로, 하나는 아기의 몸이고, 또 하나는 다윗 자신의 몸이라는 말이다. 또한 둘 다를 합쳐도 몸이고 말이다.

◈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몸을 자기 몸으로 만들어서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햇빛과 공기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다 기르신다는 것이다. 즉 ‘기르시나니’ 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당신은 누구 덕분이 삽니까?”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모두가 다 자기가 노력해서 먹고산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길러주신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지난 시간에 한 것처럼 일종의 농담이고 말이다.

하지만 병원에서 아파서 누워있으면서 숨을 헐떡이는 사람조차도 누구의 힘으로 그렇게 숨을 쉬는가? 분명히 하나님께서 숨을 쉬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몸이 아픈 사람은 병원에 누워서 뭐라고 하겠는가? 하나님께 항의를 하는데, 물론 숨을 쉬는 것은 기본이고 말이다. 왜 자기 몸을 아프게 하느냐고 말이다.

◈ 하나님아, 왜 내 몸을 아프게 하는가?

하지만 그렇게 몸을 왜 아프게 하느냐고 항의를 한다는 것 자체는, 그 앞에 무엇이 전제가 되는가? 그것은 바로 “내 몸은 내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타인이 왜 나의 몸을 아프게 하는가? 이 악한 하나님아!” 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그런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몸이 그만 누구의 소속이 되고 말았는가? 자기가 몸에서 허구적인 자아를 만들어놓고, 그 몸은 순전히 ‘나’에게 복종하는, ‘나’를 즐겁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나’를 절대화시키는, 즉 ‘나’를 신으로 만드는 몸으로 전환을 시켜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엄연히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말이다.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이 바로 악마가 한 짓인데, 그렇게 인간을 마구 버려놓았다는 것이다.

◈ 성경해석을 하는 ‘너’는 도대체 무엇인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성경해석이라고 하는 것이, 즉 성경이 아무리 문자로 되어있다고 해도, 그렇게 “성경해석을 하는 너는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즉 “인간인가? 아니면, 성령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몸인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몸으로서 성경을 해석할 때는 하나님의 속성이 나오게 되고, 그런데 그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고 성경해석을 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다 자기 영광이 된다는 말이다. 즉 자기 몸으로 여긴다면, 거기에서는 자기 영광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재에 있는 이 ‘서로를 위하여’ 라는 것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나를 위하여’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재미나게 노는데 열중을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전혀 안중에도 없고 말이다.

◈ 잠시  ‘몸’에 대해서

여기에서 ‘몸’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면, 이 ‘몸’ 이라는 것은 일종의 덩어리인데, 그런데 이 덩어리를 씻겨주고 먹여주고 입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밤이 되면 잠도 재워주어야 하고 말이다. 그렇게 감당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아프면 간병도 해주어야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몸이라는 덩어리를, 그렇게 씻겨주고 먹여주고 입혀주어 재워주는데 아프지 않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벌기가 힘이 들면 기껏해야 들고 나오는 대안이 무엇인고 하니, “그냥, 꺅 죽자” 라는 것인데, 즉 자살이라는 말이다. 즉 자기 덩어리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집채와 같은 커다란 덩치를 감당을 하려고 하니 돈이 필요하고, 그런데 돈을 벌려고 하니까 짜증이 난다는 말이다. 그렇게 짜증이 나니 그만 자살이나 하려고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살을 하려고 하니, 그동안 공들인 자기 인생이 너무나 아깝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 아, 감당이 불감당 !!

이것을 한 마디로 “감당이 불감당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괜히(?) 덩어리를 주어서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날씨가 조금만 더우면 시원한 것을 마셔주어야만 하고, 샤워도 해주어야하고, 또한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TV를 봐주어야 하고 말이다.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운동을 한다고 난리를 피워주워야 하고 말이다.

우리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하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또한 ‘나’ 라는 인형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이 인형을 가지고 놀아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드는지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란 무엇인가?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감당할 수도 없고 말이다. 그야말로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딜레마도 이런 딜레마가 없다는 것이다.

◈ 술은, 몸을 없애는 굿 아이디어 !!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이 몸을 그만 없애버리는데, 그렇게 없애는 방중에서 제일로 좋은 방법이 바로 ‘술’ 이라는 것이다. 술을 먹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술은 먹는 것이 아니라 처먹는 것인데, 그러면 왜 술을 처먹는가? 그것은 바로, 술을 처먹게 되면, 인형과도 같은 큰 덩치를 감당해내려고 하면, 술을 처먹는 그 짧은 순간에는 그것을 잊을 수가 있는데, 마치 마약처럼 말이다. 얼마 전에도 식당에서 술을 처먹는 사람을 보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술을 처먹으면 나중에 술이 깰 때가 되면, 머리가 깨어지게 아프다는 것이다. 물론 술을 처먹지 않는 사람은 그 고통을 모르지 싶은데, 그러니 마치 술은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까, 자기가 자기 몸에 마취주사를 놓고, 자기 머리를 자기 주먹으로 때리고 치는 것과도 같은데, 그리고는 마치가 끝나면 “누가 내 머리를 때렸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술이 아니라면 과도한 몸부림을, 즉 춤을 춘다고 하든지, 흡연을 한다든지, 지나친 여행을 한다든지, 도박에 빠진다든지, 그렇게 해서 잠시동안 자기를 잊는 그 순간만큼은 “나도 없고, 너도 없는”, 그렇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잊기 위한 모든 조치는, 고스란히 몸의 아픔으로 그대로 남아서 자기 몸에 되갚아주게 되니, 결국에는 감당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알았던 ‘들뢰즈’ 라는 철학자는, 병원에서 입원을 해있으면서 링겔을 뽑아버리고서는 그만 창문에서 뛰어내려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까뮈는 엽총으로 자살을 했고 말이다. 바로 이것이 집채만한 덩어리를 가지고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몸과 자아의 관계만 남게 되니 !!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니 남는 것은 무엇인가? 몸과 자아의 관계만 남는데, 고상하고 점잖고 훌륭하기 짝이 없는 자아를 누가 괴롭히는가? 그만 자기 몸이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동안 쌓아온 업적, 훌륭하고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또한 남에게는 해꼬질을 하지 않고 모범적으로 살았다고 하는 자아가 말이다.

그런데 나이가 70이 되고 80이 되어서 정신이 그만 혼미해지고 하니, 자기가 그만 자기에게 실망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 아닌데, 왜 이렇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도 치매현상을 보이는데, 그러면서 “이것은 원래 내 모습이 아니야. 내가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야” 라고 제 아무리 소리를 쳐도, 머리의 회로가 이미 다 망가지고 말았는데,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나와서 아무나 붙잡고서 “권사님, 저를 미워하지요? 당신, 나에게 욕했지?” 라고 하는데, 그렇게 치매현상이 나타날 때는 누가 말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돌아서서 뭐라고 하는가? “내가 왜 그랬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치매도 계속이 되면 그만 습관성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그러니 고상한 자아를 남기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자기를 죽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 아하, 인간이 이렇게까지 대단할 수도 있구나 !!

다시 말해서, 이 몸을 자기의 고상함으로, 왜냐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착함으로, 즉 자기의 고상한 자아상으로, 즉 “내가 이렇게 멋있는 인간도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즉 자기도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말이다. 바로 그런 자기 몸을 가지고, 즉 자기가 보고싶어하는 것을 두고서 ‘성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하, 인간이 이렇게까지 대단할 수도 있구나!” 라고 말이다. 그것이 곧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화론이라는 말이다. 그런 성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100퍼센트 다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 ‘나’ 뿐이야 !!  ‘나’ 뿐이야 !!

다시 정리하면, 즉 “우리교회는 이렇게 훌륭한 교회가 될 수 있고, ‘나’ 라는 인간이 이렇게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멋있는 존재가 될 줄 알았어. 그럼시롱(?)” 이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가 자기 몸에게 감사하고 싶어서 환장을 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서 그들은(?) 기독교에 입문을 했는데, 그러니 처음부터 자기밖에 모르고, 끝까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 우리 몸이 죄를 보여줌으로서, 하나님의 속성을 !!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지겠는데, 너무 일방적으로 강의를 해버리면 좀 그러니 말이다. 하나님과 몸 사이에 있어서, 그것이 무슨 관계라고 했는가? 아까 분명히 제가 이야기했는데,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준다고 말이다. 즉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려고 하면, 우리 몸은 반드시 죄가 무엇인지, 그 죄를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그렇게 사용을 하시겠다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 몸을 아주 가뿐하게 죄를 짓는 몸으로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가뿐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 지옥의 속성(?) - 아니야, 내 몸은 내 것이야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떤 놈들이 지옥에 가는고 하니까,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끝까지 움켜쥐고 놓지를 않는 놈들, 바로 그런 놈들이 악마이고, 또 악마의 하수인이고, 또한 지옥에 가야될 쓰레기 같은 놈들이라는 것이다. 감히 자기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서, 자기 것이라고 끝까지 버티는 놈들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해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 몸을 내어놓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는데, 그러므로 죄인을 불러서 의인이 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몫인데, 즉 주님께서 다음 작전을 펼쳐서 알아서 하신다는 말이다.

참 쉬죠잉? 무엇만 알면 되는가? 이 ‘몸’ 이라는 것이 ‘나’ 라고 하는 허구적인 개념의 몸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가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순간에도 누구의 몸이었는가? 그 순간에도 햇빛을 주시고, 또한 장마가 져서 저수지에 물이 차이게 하시는데, 즉 포항지역에 가뭄이 들 때 영천지역에는 단비를 내리시고 말이다. 심지어 황무지에도 비를 내리는데, 그런 것이 다 누구의 조치 때문에 그러한가?

◈ 주님이 함께 계심으로, 졸지에 죄인이 !!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하시는 차원인데, 그런데 그렇게 관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를 보고 이쁘라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하고, 그리고 나서 생명과를 따먹게 하시는데, 그 이유가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몸이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한 그 형상은 아니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해서 우리 몸을 죄의 몸으로서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을 철저하기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어유, 복잡해!)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 인데, 즉 주님이 함께 계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졸지에 죄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자기가 졸지에 스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괜찮은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 사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성화론자 !!

물론 제가 이렇게 성화론자들을 공격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저 어린 최 집사님 아이인 ‘강이’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다 성화론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성화론자에서, 자기 몸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기는 인간으로, 그렇게 바뀌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 기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에게 갈 자만이 자기 몸이 죄를 보여주기 위한 몸임을 알게 되는데, 그렇지 않은 자들은 자기 몸이 자기가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존재라고, 그렇게 다들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것과 한 평생을 싸운다는 말이다.

지금 제가 오늘 강의를 하면서 이 ‘서로’ 라는 개념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었는데, 즉 그 ‘서로’ 라는 개념 아래에 이렇게 많은 내용들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서로’, 즉 ‘나와 너’ 사이에서 공동체를 이루어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말이다.

사실은 이런 ‘나’, ‘너’ 이런 것들이 모두 개념이 없는 것인데, 즉 ‘나’ 라고 일컬어지는 몸과 ‘너’ 라고 일컬어지는 몸은, 그 몸들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죄가 무엇인지, 그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생겨난 몸들이라는 말이다. 물론 아담의 속성이 담겨있는 말이다.

◈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은 계속 새끼를 까야 !!

그렇게 아담이 흙으로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해서 계속해서 자기 새끼를 까는 것은, 즉 아담의 형상을 흘리고 하고 퍼지게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아담은 계속해서 새끼를 까서 퍼트려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거기에 다 실어서 표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 몸과 몸이 합쳐져서 두 몸이 되어봐야 결국 죄의 두 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 어떤 의로움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서로 도와주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그렇게 도와주어도 그 공동체는 여전히 죄이니 말이다.

여기 교재 33페이지를 다시 살펴보자.

** 예수님의 죽으심을 잊은 교회는 쓰레기이다. 서로를 위해서 재미나게 노는 데만 열중한다. 이처럼 세상 멸망의 이유를 찾지 못한 교회나 가정이나 기업체나 국가는 멸망의 대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피 흘리신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라는 것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빠져버리면, 자기들끼리 아무리 재미있게 놀아도 그들은 자신들이 근본적으로 죄인임을 모르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참새처럼 기르시는 이유에 대해서 알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자기들을 존재케 하는지 말이다.

◈ ‘세상 멸망’에 대해서 !!

그리고 그 다음에 보면 ‘세상 멸망’ 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 ‘세상 멸망’ 이란 어떤 개념인고 하니, 그것도 밑을 파보면 원주처럼 그렇게 내용이 꽉 차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차있는 것을 한번 끄집어 내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내용인고 하니, 인간의 몸을 허구적인 자아의 몸으로 엮어져 버리는데, 즉 하나님의 자기 몸이라는 관계가 끊어지고, 그렇게 해서 엮어지게 되면 이 자아는 어디에 예속이 되는고 하니, 그만 시간관에 예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관에 예속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교재에 보면 나중에 나오는데, 인간의 시간관이 무엇인고 하니,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과거가 굴러서 현재가 되고, 그 현재가 굴러서 미래로 ??

예를 들어서, 이렇게 지붕에 눈이 쌓여있는데, 그 지붕의 꼭대기에서 눈을 굴리면 나중에 여기 밑바닥에 떨어질 때는 눈덩어리가 제법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지붕 꼭대기가 과거이고, 밑바닥이 미래이고, 그 중간이 현재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과거에 자기가 생각했던 눈덩이가 뭉쳐져서 현재가 되고, 그 현재가 굴러가게 되면 자기의 미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자아가 보는 몸이 되어버리면, 어디서 어디까지 아는고 하니, 자기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만 자기 몸의 개념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엇을 잊어버리는고 하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하는, 그런 시간개념으로 늘일 수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몸이 없어지면 그만 ‘나’도 없어지니, 자기가 죽고 난 뒤에는 “나는 몰라” 라고 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

그러한 자들이 바로 여호와의 증인들인데, 그래서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죽고 난 뒤가 무슨 소용이 있노? 흙이 되면 그만인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철스님도 역시나 그러한데, 그래서 법어라고 하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 이아무개 : 스님, 계셔요?
* 성철스님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 이아무개 : 우리가 어디서 태어났어요?
* 성철스님 : 그런 건 나도 몰라.
* 이아무개 : 저,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하는데요?
* 성철스님 : 니가 하나님을 데리고 와서 보여주면 믿을게.

이렇게 흔히들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 라고 하는 것은, 이 몸의 개념이 자아가 느끼는 시간 속에서의 몸인데, 그러니 이 몸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냥 “어, 있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여기에 있는, 옥수수 수염차의 경우에 !!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하는 점은,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다른 것은 없고 옥수수 수염차만 있다고 하면, “이것을 누가 가져다주었지?” 라고 생각해야 할 텐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어, 있네” 라고 하면서, 그냥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 옥수수 수염차가 우리 몸이라고 한다면, 그런데 우리의 몸은 어떠한고 하니까, 심리학에서는 사람이 태어난지 6개월이 되면 그때부터를 ‘거울단계’ 라고 하는데, 그 이전까지는 거울에 비친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입의 크기만큼 이 세상을 안다는 것이다.

◈ 갓난아이는, 자기 입의 크기만큼 이 세상을 알아 !!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왜냐하면 6개월 이전에는 아이는 모든 것을 다 입으로만 집어넣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바깥의 세계는 전혀 모르고, 그냥 자기 입에 들어오는 크기만큼만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도 자기 입의 크기 정도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거울을 보게 되는데, 즉 아빠하고 자기하고 거울 앞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꼼지락거리는 것은 자기이고, 그 옆에 서 있는 것은 자기가 아닌 아빠, 즉 ‘타인’ 임을 안다는 말이다. 물론 그때는 완전히 분화가 된 상태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발육이 느린 아이는 엄마를 때리면 아이가 우는데, 엄마와 자기가 아직 분화가 되지 않아서 말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옥수수 수염차가 여기에 이렇게 있다고 하면, “야, 누가 주었지?” 라고 하면서 주신 분을 생각하면서 감사히 여기고 마시면 되는데, 그런데 거울에 가지가 비치듯이 그렇게 자기가 “어, 있네” 라고 하면서, 술이나 처먹고 담배를 마구 피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술 담배를 하십니까?” 라고 하면, “이것은 내 몸인데, 니가 왜?”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 와서도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게임이나 생각하고, 여학생을 꼬실 생각이나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제 집사님 아들이 예배시간에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노트에 적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았는지 말이다. 복음을 들으면서 그렇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기적을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인간은 마귀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

아담 이후에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귀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몸 하나 즐겁게, 그냥 씻어주고, 놀아주고, 웃겨주고, 그런 것 말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괴로우면 술을 처먹고 도박이나 하고 바람이나 피우고, 또 마누라나 때리고 말이다. 그러다가 낚시나 훌렁 떠나버리곤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괴로움을, 즉 자기 몸 덩어리를 잊으려고 하는데, 우리 인간은 바로 그런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면 ‘세상 멸망’은 무슨 의미인가?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세상 멸망’ 이라는 것은, 이미 눈이 굴러서 그런 시간관을 당겨보면, 거기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해야 하며, 멸망을 시켜야 하는가?” 라고 하는, 그것을 인간들이 모르는 것을 ‘비밀’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바로 그 비밀문서에 보면 책이 두 종류가 있는데, 먼저 생명책이 있는데, 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영생에 들어가고, 하지만 행위책에 기록된 자들은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바로 그러한 내막들이 양쪽 책에 다 기록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는가?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미 세례요한은 시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자기가 경험한 시간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시간대를 쫙 늘여놓았다는 것이다. 즉 자기 중심에서 벗어난 시간대,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 자기 몸 중심의 시간대에서 벗어나게 되면 !!

그렇게 자기 중심에서 벗어난 시간대가 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좀 어려운데, 그렇게 자기 몸 중심으로 생각한 시간대에서 벗어나게 되면, 자기 몸은 그만 자기보다 더 큰 것을 바라보는 분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나요?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과거 경험한 것이 자기 현재로 뭉쳐진다는 것에서 벗어나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찾아오게 되면, 자기는 그야말로 하나의 손바닥이고 안개와 같은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는데, 하지만 자기가 그런 손바닥만하고 안개와 같아도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제는 더 큰 것 속에 아주 작고 순간적인 것으로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래도 그것이 어디냐는 말이다.

그래서 마음놓고 웃으면서 이 세상을 보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도다” 라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 말이, 슬퍼서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 그것은 허무주의이고 말이다. 그야말로 기뻐하면서 그렇게 외치면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 멸망’ 이라는 개념에 담겨있는, 밑에 들어있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을 다 설명을 하려고 하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지 싶은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의 피 속에 들어오는 일은, 단순히 자기 목숨을 끊는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가고자 했지만 거절을 당했다.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예수님, 저도 따라가고 싶어요 !!

예수님이 죽으려고 하니 베드도로 따라서 죽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구약에서 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니 뒤따라오는 애굽군대도 갈 수 있는 것으로 따라오다가 죽은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즉 베드로도 예수님을 따라서 죽으면, 자기도 예수님과 함께 있을 줄로 착각했다는 말이다.

지금 추운가요? 그러면 에어컨을 끄고 하겠는데, 온도를 낮추면 좋겠는데, 이게 그만 중고가 되어서 온도조절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양 아니면 염소인데, 천국이 아니라면 지옥이라는 말이다(ㅋㅋ). (아니, 그럼 지금부터 지옥의 경험을?)

그건 그렇고, 아무튼 예수님의 죽으심은 특수한 죽음인데, 그러니 어떻게 감히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들어올 수가 있느냐는 것인데, 그러니 전혀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가 되는 것은 오직 세례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그 세례라는 것은 성령이 와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 자살을 한다고 되는 문제도 아니고 말이다.

◈ 자기 목숨으로도 죄를 지울 수 없다는 점이, 곧 절망 !!

그러니 예수 안에는 자기 죽음으로도 들어갈 수가 없는데, 이것을 달리 말하면, 자기 죄 값은 자기가 죽는다고 해도 결코 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부엉이 바위 위에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자기 죄 값은 없앨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것이 절망이 아니라, 그렇게 지은 죄가 자기 목숨을 바쳐서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 바로 절망이란 말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절망은 바로 그 절망인데, 그러니 전혀 대책이 없다는 말이다. 영원토록 말이다. 도저히 그런 죄를 씻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으면 귀신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타나셔서, 그 죽은 놈을 다시 살려서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대책이 없다는 말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가 죽으면 모든 것이 그만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자기가 막상 죽으니 더욱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살아있다는 말인가? 지옥에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라는 말이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가롯유다의 역할은?

그래서 예수님이 가롯유다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차라리 너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니가 태어나는 것은, 너의 자아의 입장에서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러나 너의 몸은 악마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하다” 라는 것이다. 이해가 됩니까?

그러므로 가롯유다의 몸은 필요한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주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롯유다가 협조하지 않았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를 못했을 것이라는 말도 하는데, 그러니 이렇게 악마가 협력을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일도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 악마가 협조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어 ??

그런데 우리는 이 몸을 자기 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매일같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악마가 여기 있어요. 이단들이 너무 많아요” 라고 하는데, 그렇게 아무리 집구석에 악마가 있고 이단들이 줄줄이 깔려있어도, 모든 것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두고 이단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이단이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다 필요에 따라서 있게 하시는데, 이단이든 삼단이든 간에 말이다.

이제 교재 34페이지를 보자.

** 성도가 거꾸로 사는 것은, 세상을 골려먹는 것이 재미가 나서가 아니요, 일탈의 자유를 만끽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거룩과 대조해볼 때, 홀로 심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자체가 감동적인 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진담이기 때문에 무섭고 무겁다.

◈ 홀로 심각함 !!

여기에 “홀로 심각하기 때문이다”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왜 성도가 이 세상을 거꾸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고 하니, 남들은 다 정상적인(?) 삶을, 즉 넓은 길로 가는데 말이다. 이러한 넓은 길과 좁은 길은 그 길의 폭도 문제이지만, 사실은 그 방향이 더 큰 문제인데, 길의 방향이 전혀 정반대라는 것이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은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나아갈 때, 사도바울은 저 낮은 곳을 향해서, 즉 십자가를 향해서 나아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그것은 곧 ‘다급함’ 때문에 그러한데, 그렇다면 사람들이 과연 언제 다급한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라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바로 그때가 제일 다급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일 년 동안 먹을 것을 먹지도 않고, 입지고 않고 악착같이 저금해서 금방 찾은 빳빳한 현찰 일천 만원이 든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그때 뉴스에서 전라도 지방에 큰 태풍이 올라온다고 한들, 그것이 자기에게 그 무슨 뉴스거리가 되겠느냐는 말이다. 왜 그런가? 다급함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누구의 다급함인가? 자기만의 다급함인데, 그러한 자기만의 다급함이 있어야만 정말로 주님이 귀한 줄로, 즉 복음의 귀함을 안다는 것이다.

◈ 혹시, 오뎅이라도 좀 사드릴까요?

제가 일전에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첫 차로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공중전화박스에서 전화를 하고 나서는 그만 지갑을 통 채로 놓고 왔다는 것이다. 성격이 급해서 지갑을 챙기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이다. 그러니 보통 큰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휴대폰도 없고, 또 돈도 한 푼도 없고 말이다. 서울하늘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 집에 전화를 했는데, 집에 있던 아내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여보, 어떤 여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자기가 이근호 씨 지갑을 주워서 종로 파출소에 갖다 놓았으니 찾아가라고 연락이 왔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종로 파출소로 가서 지갑을 찾고 너무 고마워서 오뎅을 사 줄려고 했는데, 극구 사양을 해서 그냥 나왔다는 말이다.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민중의 지팡이로서 시민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말이다(ㅋㅋ).

시골 목사의 서울 탐방기는 그만 하고, 아무튼 구원을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다급함인데, 즉 예수님의 죽으심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당신, 똑바로 살아” 라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나’의 문제라는 것이다.

◈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신앙’ !!

바로 이것을 두고서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적 신앙’ 이라고 했는데, 그러므로 이 실존적 신앙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고 하니, 집단적 교회, 혹은 제도 교회의 종교 부흥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키에르케고르 당시의 독일의 모든 목사들이 월급을 받아가면서 교회를 키우는데 전념을 다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커야만 정치적인 힘이 세어지고, 그렇게 정치적 파워가 있어서 압력을 가하고, 그렇게 정치꾼이 될 때 목사로서 성공을 했다고 보니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이 ‘실존적 신앙’을 주장함으로서,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을 이길 정도로, 즉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이사야 선지자처럼 말이다. 그렇게 뭔가를 잃어버렸는데, 과연 무엇을 말인가?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인데, 그러면 왜 ‘나’를 잃어버렸는가? 그것은 바로, 그동안 당연히 잃어버려야 될 것을 계속해서 자기 것이라고 쥐고 있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 잃어버린 양 - 에헤헹, 나의 목자가 누구예요? 

그렇게 자기는 죄인이 되었는데, 그런데 그 죄인을 누가복음 15장에서는 ‘탕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탕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원래 자기 몸의 주인은 주님이 볼 때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잃어버린 양으로 간주해서,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나’로 하여금 주님이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잃어버린 양임을 알게 되는데, 이렇게 자기가 주님의 잃어버린 양인 것을 알게 된다면 무슨 개념이 떠오르겠는가? 그렇다고 하면 제대로 된 목자가 과연 누구인지, 물론 기존 목사는 아니고 말이다. 즉 중요한 것은 “그 목자가 누구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곧 “너를 얻기 위해서 오라고 하지 않고, 내가 가서 목숨을 바침으로서 니가 잃었던 생명을 얻었다” 라는 하는, 바로 그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목자는 양을 뜯어먹는 목자가 아니고, 오히려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목자가 진짜 목자라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이고 말이다. 이것이 다음 주일날 오전설교에 해당이 되기 때문에, 거기에 넣을까 생각 중인데 말이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 진짜 다급함에 부딪치게 되면 !!

아무튼 이 ‘다급함’ 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동안 자기가 구축한 거룩이,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성화론자인데, 그렇게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자기의 가치, 자기 존재의 의미 등이 하나님의 거룩한 만나게 되는 순간에, 그 모든 것이 다 와르르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하, 이런 위선적이고 가증한 놈이었구나”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진짜 다급함을 만나게 되면, 집에 불이 났다고 하든지, 자기 아이가 아프다든지,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하든지, 그런 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를 지내게 하라고 했다는 말이다. 자기가 아무리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잘 지키고 해도, 그런 모든 것들은 다 헛된 것인데, 그래서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교재 34페이지를 계속해서 보자.

**  따라서 성경자체가 감동적인 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진담이기 때문에 무섭고 무겁다.

◈ 성경말씀은 농담이 아니기에 !!

시인이나 예술가들은 성경을 보고 감동을 먹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결코 감동적인 글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진담이기에, 즉 농담이 아니라 말이다. 그래서 너무나 무섭고 무겁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진담의 무게인데, 즉 진리의 중량이 말이다. 어떻게 감동을 받는다는 말인가? 짓눌려서 숨을 쉴 수가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아하, 나는 이제 죽었구나”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님, 성경을 어떻게 보셨나요?” 라고 하면, “예, 감동을 받았습니다. 좋은 이야기가 정말 많아요” 라고 하면 안 되고, “예,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이 좋은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도올 김용옥이 하는 이야기인데, 하여튼 성령을 받지 못한 인간들은 티를 낸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티가 난다는 말이다. “성경말씀은 참으로 감동적이야” 라고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감동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가 없는데, 성경말씀이 얼마나 무서운지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렇다면 “무엇이 죄냐?” 라는 문제만 남는다. 분명 죄가 있기에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이다. 만약에 자신의 죄를 모르는 채 예수님의 피를 거론하는 것은 기존의 자기 죄에다 “십자가 피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죄”를 추가한 것이 된다. 죄도 모르면서 죄 씻음을 거론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것이다.

◈ “십자가 피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죄” 추가요 !!

그렇다면 이제 남는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죄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의 죄를 모르는 채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기존에 있는 자기 죄에다 또 하나의 죄를 ,즉 “십자가 피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죄”를 추가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마치 “여기, 밥 추가요” 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그런 인간들은 아예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자청하는데,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죄도 모르면서 죄 씻음을 받았다고 주장하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 ‘죄 씻음’ 이라고 하니, 박옥수가 생각나는데, 그가 하나님께 매를 맞을 것을 생각하니 정말로 끔찍하다는 것이다.

◈ 신학자들 중에서 죄를 아는 자들이 있는가?

바로 그렇게 “여기, 밥 추가요” 라고 하듯이 추가하는 것이 곧 신학인데, 그래서 신학자들 중에서는 죄를 아는 자들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죄를 제대로 안다고 하면 아무리 고생이 되어도 개척교회를 하면 했지, 신학교 교수를 해서 신학자 노릇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너무 간곡히 부탁을 하든지 하면, 어쩔 수 없이 개척교회를 하면서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자기가 교수를 한번 해보려고 그렇게 생쇼를 벌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 주님이 주신 다급함을 만났는데, 그런 교수자리가 눈에 들어오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교수자리가 뭐가 안정되었다고 좋아하는지 말이다. 제 아무리 4대 보험을 다 대주고, 연봉을 아무리 두둑하게 준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그 다급함 앞에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교 교수들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물론 “여러분,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본인들이 믿는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보너스를 제대로 안 주던지 하면 서울시청 앞 광장에 가서 삼보일배를 한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한 숨밖에는 나오지 않는데, 여러분은 그렇지 않은가요?

◈ 양의 탈을 쓴 까페를 아세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한 자들이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나오는데,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인간들이라는 말이다. 요즘은 양의 탈을 쓴 까페도 등장을 했는데, 죄도 무엇인지 모르면서 복음을 다 안다고 한다는 것이다.

(고후 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 11: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러주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 세계에서 말하는 죄는, 실은 “죄가 아니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 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러주지 않는 상태에서, 그런 상태에서 이 인간 세계에서 말하는 죄는, 사실 죄라고 할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소페림’ 이라고 해서 서기관들이 있는데, 그들은 마카비 이후에 활동한 자들로서, 성경말씀을 필사만 한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도 했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죄’ !!

그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죄관(罪觀)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죄는 어떠한가? 예수님은 요한복은 15장 22절에서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그들이 이야기한 그런 것은 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죄인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이다.

◈ 목사님, 사도바울의 말씀도 율법적 기능이?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사도바울의 말씀도 율법적 기능이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당연히 있는데, 사도바울의 모든 권면 속에는 누가 들어있는가? 예수님이 들어 계시는데, 그러니 그런 말씀을 하면 할수록 없었던 죄가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나오니, 그것이 곧 율법적 기능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율법을 더함은 죄를 더함이라” 라고 하는데, 왜 그러한가?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의 몸은 죄인 된 몸으로 한껏 드러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의인이 아닌 죄인이 된 몸으로 말이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무시로 기도하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무시(무?)를 먹으면서 기도하라는 뜻인가?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하라는 의미인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물론 티벳의 승려들은 조금 그런 폼을 잡는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경전을 돌리고 있고, 또 달라이라마에게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모든 직업을 다 포기하고 말이다.

◈ 너희들은 안개인 줄 알아라 !!

그러니 사도바울을 비로한 사도들의 권면의 말씀들은 어떤 차원인가? 그 어떤 말씀이라고 해도 우리들로 하여금, 사도 야고보의 권면처럼 “누가 뭐라고 해도 너희들은 안개야” 라는 것과도 같은 의미인데, 그러니 그것은 “너희들은 안개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라” 라는 것이 아니라, 즉 “너희들은 안개인 줄로 알아라”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안개인 줄 알아야만 하는데, 그러니 우리는 어느 도시에 가서는 장사를 해서 이득을 볼 수밖에 없는, 우리가 바로 그러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야고보서 4장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도들의 말씀이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율법적 기능 가운데 최고의 율법적 기능이 바로 ‘십자가’ 인데,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들의 감추어졌던 모든 어리석은 죄들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제 교재 35페이지 살펴보자.

** 그런데 그 질서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새삼스럽게 자신이 바라보는 죄를 말하는 순간이 오면, 이제 소위 자칭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더 이상 예수님 앞에서 죄가 없다고 우길 수는 없다. 이것은 곧 인간이 생각하는 죄관(罪觀) 자체가 된다는 말이다.

◈ 십자가는 돌맹이 ??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뭐라고 했는고 하니, 돌맹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즉 자기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십자가에 부딪치면 깨어지게 되고, 또한 그들의 행위 위에 이 십자가가 떨어지게 되면, 그들을 아예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그야말로 박살을 내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마치 시속 200km를 달리는 자동차와 절벽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과도 같은데, 또한 동키호테가 돌아가는 풍차를 보고서 적인 줄로 알고 칼을 휘두르면서 덤비는 망나니짓을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위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내 행함이다. 왜? 내가 선악과를 따먹고 내가 알게 된 선한 행위이다” 라고 하면서, 마치 동키호테처럼 칼을 휘두르면서 공격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벽과도 같은데, 그렇게 해서 부딪치면 누가 아프고 손해를 보겠는가? 본인이 아프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부딪침이 성령의 인도하심인데, 즉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일어난 사건, 즉 예수님과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즉 “사울아, 사울아, 니가 엄청나게 고생을 하는구나. 니가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봐야 니만 고생이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

그때 사도바울은 비로소 이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는데, 즉 “야, 이 ‘십자가’ 라는 것이, 내가 새삼스럽게 어떻게 지키고 말고 할 수 있는 율법의 한 조항이 아니라, 그 전체가 절벽처럼 다가와서 나를 박살내는 능력이로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를 완전히 박살을 내어버리는 능력임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라는 것은 자기 몸을 비롯해서 자기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박살을 낸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사도바울이 이러한 말씀을 쓸 때는 결코 함부로 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그야말로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부수어지면서 썼다는 말이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러니 사람들이 아무리 계시와 양심에 입각해서 죄에 대해서 탐구하고 분석하고 조사하고 정립을 해도 모조리 죄가 된다. 그동안 죄인들의 죄를 논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어쨌든 구원이 되고 싶은 종교적 열의로 뜨거운 내가 “회개하는 죄인은 예수의 피로 용서를 받는다” 라는 공식에 맞추어보려고, 부지런히 자신이 죄라고 여긴 모든 것을 다 고백하고 반성하고 회개를 해봤자 바로 그런 행위 자체가 죄가 된다는 말이다. 물론 자기 딴에는 이 회개하는 행위만큼은 의로운 행위일 것이라고 자부해보지만.

◈ 금식하고, 반성하고, 회개를 !!

바리새인들이 구원이 되고 싶어서 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물론 여기 교재에는 “회개하는 죄인은 예수의 피로 용서를 받는다” 라고 했는데,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피가 아니라 양의 피라고 했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공식에 맞추어보려고 바리새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금식하고 반성하고 회개를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근거가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그 근거를 다시 해보면, 아까 이야기한 그 공식 하나면 다 통하는데 말이다. 즉 여기 이렇게 지붕이 있는데, 그 지붕에 눈이 구르게 되면, 과거에 자기 조상들이 어떻게 했는고 하니, 예레미야나 에스겔 등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으니, 자기들은 다시는 조상들과 같은 그런 실수를 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을 하고 회개를 해야한다고 여기고 자기를 비우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금식을 하는 기간에는 오락과 같은 활동을 금하고, 재를 뒤집어쓰고 하자고 했다는 말이다. 또한 그러한 것이 이사야서 등에도 나오고 말이다.

◈ 그러나, 금식조차도 죄임을 !!

그렇게 조상들이 금식을 하고 한 것을 바리새인들도 그대로 따라서 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뭐라고 하시는가? 금식을 할 때는 재를 뒤집어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서, 즉 금식을 하는 표시가 전혀 나지 않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또 무슨 새로운 법 조항이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하라’ 라는 것을 그대로 해도 전혀 소용이 없는데, 물론 하지 않아도 소용이 없고 말이다. 이래도 소용이 없고 저래도 소용이 아무런 없는데, 그래서 구원은 예수님께서 “너, 들어가!” 라고, 그렇게 넣어주는 사람만이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증거하는 자비를 보여주는 몸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판은 한 마디로 ‘분류작업’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자기 조상들이 과거에 했던 회개를 아무리 다시 불러보아도 전혀 소용이 없는데, 오히려 예수님에 의해서 그런 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사실로 드러나고 만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왜 회개하는 행위조차도 의가 되지 못하고 죄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 어느 인간도 예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다.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나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여기서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즉 예수님은 마이크를 들고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찾습니다” 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나타났는가? 바디메오 같은 소경이나 절뚝발이, 그런 자기가 생각해도 그렇고 남이 생각해도, 그렇게 저주를 받아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감히 자기 죄를 아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저는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지금 눈을 감아도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지은 죄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자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귀한 자들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천대를 받지만 말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개만도 못하게 여기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자들도 역시 그러한데, 아마도 그 여자에게 자기 아들이나 딸이 있으면 그 이름도 ‘독구(?)’ 라고 지었지 싶은데, 그렇지 않은가? 아니, 세상에 그런 자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같이, 전부가 다 자기 잘남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래서 없는 잘남도 만들어내기 위해서 성형수술도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습인데, 자기 몸값을 올리려고 말이다. 그런데 올리기는커녕 낮추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 십자가 - 그것으로 족한 줄 알라 !!

지금 더운데 문을 좀 열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니 이 ‘십자가’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 부분이 중요하니 잘 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즉 ‘십자가’ 라는 것은, “제발 선악과를 따먹은 그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서, 너 자신도 판단하지 말고, 남도 판단하지 말고, 오직 생명나무가 되신 주님이 너를 보고 의인이라고 하면, 그것으로 족한 줄로 알아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모든 것을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죄인데, 가롯유다를 보라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가? 사실상 그는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왜 자기가 판단해서 자살을 선택하는가? “나는 죽어서 마땅하다” 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가롯유다는 죽어가면서도 !!

하지만 우리 몸은 누구의 것인가? 분명하게 주님의 것인데,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기 것이라고 우긴다는 말이다. 가롯유다는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주장했고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충실한 악마의 종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는 주인이 바뀌면 대번에 안면을 몰수하고 새주인을 따르는데, 그렇게 하는데는 불과 채 1분도 걸리지 않는데, 아마 개를 키워본 분들은 잘 알지 싶은데 말이다. 물론 조금 똑똑한(?) 개들이 그렇지만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에게 밥 주는 사람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와는 단절인데,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재 자기에게 밥을 누가 주는지, 그 양반이 주인이고 최고라는 말이다. 제가 왜 이런 변절한(?) 똥개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우리도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를 하면, 이 ‘십자가’ 라는 것은 율법적 기능으로서 심판인데, 즉 우리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그렇게 이 세상을 책망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인간이 인간을 건방지게 판정을 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인간세계는 오로지 인간의 판단만이 진리로 통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죄라고 지적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 오직 십자가뿐이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성령 - ‘죄’, ‘의’, ‘심판’에 대하여 !!

이것을 조금 설명을 하고 지나가야 하겠는데, 여기 이렇게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래서 선과 악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무엇에 대해서 말인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선악과에서 나온 죄를 가지고서 판단하고, 또 선악과에서 나온 의를 가지고 판단하고, 또 선악과에서 나온 심판을 가지고서 판단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선악과에서 나온 죄, 의, 심판을 하나로 묶으면 딱 선악과가 되는데, 물론 선과 악에서 나왔으니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나무인가? 아니면, 아직도 니가 주장하는 선악과인가?” 라는 것인데, 즉 성령님이 오셔서 선악과를 가지고 있는 그 자체를 책망하신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이런 방식의 인간은 애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이라고 간주해서 만든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런 선악과를 품은 인간은 누구의 작품인가? 놀랍게도 악마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 선악과는, 악마를 잡기 위한 하나님의 덫 !!

이것을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왜 악마를 선악과를 가지고 유혹을 했겠는가? 그것은 바로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악마를 처벌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녹취자 - 그러면 아담이 악마의 덫에 걸린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악마가 하나님이 쳐놓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인가요?)

그러므로 이 선악과는 악마를 영원한 형벌에 집어넣는 근거로서의 역할인데, 그러니 여기에 사람이 끼어 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항은 금붕어가 살라고 만든 것이지, 사람이 살라고 만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사우나 - 아가들은 나가 놀아라 !!

그리고 사우나의 뜨거운 터키탕과 같은 것은 어른들이 들어가서 퍼지고 놀라고 만든 것인데, 그러니 아이들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른도 몸이 단련된 자들만 들어가고 말이다. 물론 단련이라기보다는 이제 피부가 늙어서 감각이 둔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뜨거운 곳에 아이들이 들어가면, 그 연약한 피부가 적응을 하지 못해서 그만 병이 생기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안 되는데, 마치 금붕어가 사는 어항에 우리 인간이 살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만 악마가 하나님과의 천상의 전쟁에서 지고 나니 그만 약이 올라서, 그만 하나님에게 당한 그 분풀이를 우리 인간에게 했는데, 즉 악마 자신에게 적용이 되는 선악과를 그만 인간에게 집어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 예수여,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그렇다면 이 선악과가 악마이게 해당이 된다는 것이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까,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악마가 뭐라고 하는가? “예수여, 우리를 여기까지도 멸하러 오셨나이까?” 라고 하는데, 즉 자기들이 하늘에서 당했는데, 이제는 이 땅에서도 박살내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끝까지 쫓아와서 말이다.

(마 8:29) 이에 저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그래서 악마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이것이 욥기나 스가랴서에 보면 나오는데, 이 생명나무의 기준을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온갖 발악을 다 한다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오는데, 즉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라” 라고 말이다.

(고후 4: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렇게 복음의 광채가 비추어지지 않으면 무엇만 남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선과 악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든지, 믿음과 소망 등등은 없다는 말이다. 그냥 남을 지적하고 송사하는, 즉 법대로 하자고 말이다.

◈ 개혁주의 신학 = 마귀 신학 !!

마귀는 우리가 그런 것에 벗어나지 못하고 꽁꽁 묶이도록, 그러한 방향으로만 악마는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즉 선악과의 테두리 안에서만 살도록 말이다. 복음의 광채보다 자기 잘만 맛에 살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성화론은 마귀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개혁주의 신학이 마귀의 신학이라는 것을 도출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는데 말이다. 

아무튼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성령께서 오셔서 뭐라고 하시는가? “예수님으로 만족하는가? 만족하면 되었다. 그러면 니가 니 자신을 판단할 권한도 니에게는 없다. 니 몸도 아닌데 니가 왜 판단하는가? 니는 지금까지 니가 스스로 판단해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니 심장을 뛰게 해서 살려오신 것을 모르는가? 그런데 왜 자꾸만 니가 노력해서 살아온 것처럼 여기는가? 그렇게 하지 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이에 반해서 뭐라고 하는가? 마치 우리가 훌륭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자꾸만 노는 동네를 선악과 동네라고 여기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렇게 해야만 생명나무가 가려지니 말이다.

저는 식당에 가면 담배 피우는 사람을 보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데, 그래서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곤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입고 물고 있는 담배를 빼앗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면, 얼마나 인간이 선악구조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 수 있는데, 자기 몸이니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자기가 판단해서 말이다. 물론 식당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인간도 그렇고 말이다.

* 저근호 : 아, 담배 맛이 참 좋구나.
* 이근호 : 여기는 식당입니다. 담배를 피우지 마세요.
* 저근호 : 여기에 ‘금연’ 이라고 써 붙여놓지 않았는데, 왜 그래? 참 이상한 사람이네.
* 이근호 : 그것은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 저근호 : 아니, 내가 피우겠다고 하는데, 왜 그래?
* 이근호 : 그래도 안 됩니다.
* 저근호 : 이봐요, 여기 식당 주인장 없나?
* 이근호 : 아니, 식당 주인은 왜요?
* 저근호 : 밥을 다 먹었으니 밥값을 계산하려고 말이야. 왜 당신이 해줄래?
* 이근호 : ? ? ?

여기서 요한복음 16장 11절의 말씀을 다시 보자.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잠시 ‘세상 임금’에 대해서 !!

여기에 보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라고 하면서, ‘세상 임금’이 나오는데, 이것도 정말 어려운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임금, 혹은 군주라고 보면, 다니엘서에 보면 4마리의 짐승이 등장하는데, 그 짐승들을 각각의 군주들로 본다는 것이다. 즉 왕이라는 말이다.

물론 요즘 세상에는 왕이 없는데, 그런데 이렇게 성경에서는 짐승을 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밑에 있는 백성들은 무엇인가? 즉 왕과 백성의 관계는 어떠하냐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민주주의가 아니고, 백성들은 임금의 운명에 함께 놀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주와 백성의 관계가 무엇을 설명하는데 아주 적절한고 하니, 악마에게 얽매여 있는 인간들의 현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이것보다 더 적합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 개성 없음을 즐기려면 군대말뚝을 !!

그 상세한 논리적 내막은 굉장히 복잡한데, 그것은 그때 가서 하고 말이다. 어떻게 임금이 시킨다고 해서 그대로 따라가느냐는 것이다. 그런 것이 참으로 웃기는 짓인데, 하지만 군대에 가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물론 군대에 안 갔으면 말을 하지 말고 말이다.

군대에 가면, 그야말로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종의 장기판의 체스와 같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입던 옷은 다 소포로 집으로 보내버리고, 그때부터는 똑같은 옷을 입혀서, 개성이고 자존심이고 뭐고 간에 그런 것은 일절 인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조작이라고 하는데, 즉 하나의 병졸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관계가 좋고 즐거울 때는, 그때는 말뚝을 박으면 된다는 것이다. 즉 개성이 없는 것을 즐기게 될 때 말이다.

◈ 이 세상 자체가, ‘선배님!’ !!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미셀 푸코의 주장에 의하면, 그러한 것이 군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집단, 즉 병원, 학교, 교회 등등, 그러한 모든 세계에 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직장에서 어떠한가? ‘선배님!’ 이라고 하면서 아부를 하는데, 즉 선배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동기들끼리라도 경쟁을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체제, 바로 그런 것은 모든 직장에 다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말이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십자가 마을 안에도 말이다.

그러니 심판을 아래에 있는 졸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윗대가리를 심판하는데, 즉 이 세상의 군주를 심판해버리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이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살았는가? 천만의 말씀인데, 군주의 운명이 누구의 운명이라고요? 그것이 곧 백성들의 운명이 되니, 백성들도 같이 박살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모두가 군주와 같은 한 통속이니 말이다.

◈ 임금이 심판을 받는데, 왜 백성들도 덩달아 받는가?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문제인데, 왜 군주가 심판을 받는데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같이 받는지 말이다. 이것을 젊은 아이들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데, 대통령이 잘못하면 직언을 하든지 해서 바로잡아야만 하는데, 왜 바보같이 그렇게 덩달아 비비면서 같이 가느냐고 말이다. 그러면 그쪽에서는 뭐라고 하겠는가? “니가 청와대에 한번 가봐라. 그런 말이 나오는지” 라고 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생각이 얼마나 이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리인지 모르는데, 하나의 기업체가 범죄를 하게 되면, 구성원들이 그 기업체를 보고 썩었다고 하면서 도려내든지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범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주체집단’ 이라고 하는데, 즉 집단자체가 하나의 주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주체 자체가 하나의 집단으로 !!

그렇게 주체가 집단이 되어버리면, ‘나’ 라고 하는 개인 주체는 그만 힘을 쓰지 못하는데, 이러한 주체집단은 샤르트르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주체집단이 싫은 사람들은 종교에 입문하게 되는데, 자기 혼자서 머리를 밀고 산 속에 들어가서 중이 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그러한 중들이 모여서 회의를 어떻게 하는가? 여기 저기서 ‘선배님!’ 이라는 소리가 마구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돈을 조금이라도 더 타게 되니 말이다. 또 돈이 되는 좋은 주지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선배님?’ 이라고 하면서, 빌고 또 빌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에게 비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천주교의 수녀 세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그냥 보면 수녀들이 다 평범해 보이고 같아 보이는데 말이다. 수녀의 세계에도 학력은 짧은 수녀는 식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서울대학교 정도를 나와서 수녀가 되면, 그 어디를 가도, 농띠를 부려도 유능하고 인정받는 수녀가 된다는 말이다. 거기에 비해서 시시한 지방 성경학교 출신의 수녀는 어디를 가도 허드레 일만 하고 말이다. 그러니 높은 자리는 일류대학을 나온 년들이(?) 다 차지하고 만다는 것이다. 

◈ 아무튼, 세상 자체가 곧 짐승 !!

제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 이 세상 자체가 바로 짐승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 남은 논리적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하면 그런 임금에 의해서 이 세상이 운영이 되고 유지가 되느냐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은 이야기를 하자면 아주 길다는 것이다.

일단 교재 39페이지를 읽고 나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 메시야를 학수고대를 했던 그들이, 도리어 오신 메시야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저주하고 조롱하고, 결국 제거해버리는 그 심성, 이 심성이 곧 죄였던 것이다. 이 심성이 모든 인류의 보편적 심성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심성이 어떠하기에 그토록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제 교재 37페이지의 ‘세상 도안’을 살펴보자.

** [세상 도안(圖案)] -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 왜 ‘세상 도안’ 인가?

저는 슬슬 더워지는데, 여러분들은 괜찮은가요? 여기에 제목이 ‘세상 도안’ 이라고 되어있는데, 말은 쉽게 ‘도안’ 이라고 했는데, 그 내용은 무엇인고 하니, 여기 이렇게 몸이 있다면, 이 몸에서 이미지가 나온다는 것이다. 즉 ‘이미지(image)’가 말이다. 이 ‘이미지’ 라는 것은 뭔가 머리에 떠오르는 느낌인데, 즉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저 사람은 이미지가 참 좋아” 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이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은, 그 사람의 속에 들어있는 그 사람의 성격과 같은 것으로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독특한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물론 바깥 외모에서도 풍기는 것이 있고 말이다. 그러니 “이미지를 5kg만 주세요” 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즉 이미지는 분명히 없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있는 것이 진짜 있는 것인가? 아니면 거기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진짜로 있는 것인가?

◈ 전지현 씨, 술 좀 그만 마시세요 !!

예를 들어서, ‘전지현’ 이라는 여배우가 있다고 하면, 그런데 이 전지현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늙은 의사가 전지현의 위를 내시경으로 검사한다고 할 때,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냥 평소에 하든 데로 무덤덤(?) 하다는 것이다. 물론 “야, 참으로 늘씬하고 예쁘구나. 혹시 연예인가?” 라는 생각은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늙은 의사가 그 다음에는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아직 나이도 젊은 아가씨가 무슨 술을 이렇게나 많이 마셔서 위가 엉망입니까? 그러니 앞으로 술을 조금은 절제하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전지현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혹시 명예 훼손 죄로 고발을?)

하지만 전지현이 검사를 다 받고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병원에서 팬들이 그만 장사진을 치고 있는데, 젊은 의사나 간호사들도 사인을 받으려고 난리이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이미지라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나름대로의 전지현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의 몸도 있지만, 그러한 몸은 키 얼마에 몸무게 얼마, 그렇게 숫자적인 것밖에 없지만, 진짜 전지현의 전지현 됨은 그런 세포조직이 아니라, ‘전지현’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길쭉하고 늘씬한 롱 다리에, 잘록한 허리에, 그리고 찰랑찰랑한 생머리라는 것이다(ㅋㅋ).

그것이 바로 ‘이미지’ 라는 것인데, 결국 사람들은 그 무엇이 손에 잡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무엇을 먹으면서 살아가는고 하니, 자기 이미지와 남의 이미지를 먹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이미지에 속으면서 살아가는 것이지만 말이다. 즉 사람은 나름대로 이미지를 관리하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 예, 엄마는 밥해주는 사람입니다 ??

예를 들어서, 어느 엄마가 자기 아이에게 “엄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지?” 라고 하면, “예, 밥해주는 사람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 아이에게 엄마는 무엇인가? 그냥 밥 해주는 식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엄마는 그런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엄마다운, 즉 다른 엄마들과의 차이가 나는 것이 무엇이지,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물으면 아이가 그 질문을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질문을 알아들었다고 하고, 그렇다면 그 아이는 뭐라고 하겠는가? “엄마는 나의 천사, 엄마는 나의 모든 것” 이라고 하면, 엄마는 그만 입이 옆으로 좍 찢어지면서 “옳지. 아이쿠, 똑똑한 내 새끼. 뭐 먹고 싶어? 이 엄마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모두 다 사줄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엄마는 밥을 해주는 사람” 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엄마는 자식에게만은 식모나 식당 아줌마가 아니고 싶다는 말이다. 

◈ 사람들은 무엇에 현혹이 되어서 살아가는가?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이미지를 이 아이가 어디서 가지고 오는고 하니까, 그것이 곧 ‘세상 도안’ 이라는 말이다. 교재 37페이지에서부터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려고 하는데, 즉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에 현혹이 되어서 살아가는가?”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그런데 여기서 제가 왜 성경말씀 이야기를 하다가 이미지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 이렇게 우리가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인간이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누구를 생각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이미지도 만들어내고, 예수님의 이미지도 만들어내고, 교회의 이미지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교회는, 여전히 천국 여행사의 이미지가 !!

그래서 교회가 제 아무리 썩었다고 하더라도, 이 교회의 이미지는 아직도 어떤 이미지인고 하니,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즉 그런 천국행 티켓을 구입할 수 있는 여행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 가려고 하면, 적어도 절에 가면 안 되고, 이 ‘교회’ 라는 여행사를 가야만이 천국으로 간다는 말이다.

제가 왜 하필이면 이 ‘여행사’ 라는 이미지를 사용했는고 하니까, 여행사라는 것은 어떠한가? 특별히 거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그 정보를 얼마든지 활용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대의 젊은 아이들이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이 ‘여행사’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교회에 충성과 봉사를 전혀 하지를 않는데, 물론 헌금도 하지를 않고 말이다. 다만 교회에 가끔 나와줄 테니, 자기들을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 여행사 노릇만 제대로 해달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바램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이미지’가 잘못되면, 제 아무리 성경을 공부해도 !!

그렇다면 하면, 도대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그런 이미지가 형성되었는지, 바로 그것을 한번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가 잘못되었다고 하면, 제 아무리 열심히 성경말씀을 공부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이 세상 도안에 대해서, 즉 이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도안’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제 아무리 거기에 성경말씀을 투입해도,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의 이미지를 정당화하는, 그런 왜곡된 성경해석만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공동체가 어쩌고저쩌고 해도, 그런 것도 다 이미지에 불과한데,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교재 37페이지의 ‘세상 도안’을 다시 살펴보자.

** [세상 도안(圖案)] -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어 … 알지어다” 라는 방식 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런데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심정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해봤자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도 모르게 되어 있고, 자기 자신이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거론하는 것도 제멋대로 임이 뻔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나 몸은 항시 ‘잠잠’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 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나는 도다

◈ 가만히 있어 … 알지어다 !!

이제 정말로 이것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논리가 참 어려운데 말이다. 쉽다고요?(ㅋㅋ)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가만히 있어, 그러면 하나님이 알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자기의 이미지 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 그러면 하나님이 알 것이다” 라는 것조차도 말이다.

그러니 거기에 아무리 성경말씀을 처발라도, 자기 자신이 죄인임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거기에 아무리 성경말씀을 처바르고 덧칠을 해도, 그런 것은 여전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마치 고장난 TV를 제 아무리 열심히 닦고 그 위에 못난이 삼형제 인형을 올려놓아도, 여전히 TV가 나오지 않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가 제 아무리 교회당을 꽃으로 장식을 하고, 인터넷으로 예배시간을 생중계를 하고 홈페이지를 만들고, 그렇게 무엇을 하더라도 복음이 나오지 않는다면, 즉 피 흘리신 주님의 말씀이 없다고 하면, 그런 것은 교회의 이미지 일뿐이지, 즉 교회의 도안일 뿐이지, 거기에서는 전혀 구원의 능력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그런데 나는 왜 복음을 싫어하지?

이제 진짜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따라서 우리가 “아, 그것이 복음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알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말이다. 자기 자신이 곧, 그렇게 예수님을 싫어하고, 십자가를 싫어하고, 복음을 싫어하는 존재로서, 그런 상태에서 아빠 엄마로부터 태어나야만 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들은 왜 그렇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에 싫어하는지 말이다. 물론 우리 자신도 그러한데, 도대체 왜 그러하냐는 말이다. 그것은 다음 시간에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직접 만날 때 우리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화로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죽어도 마땅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흔들리지 않도록, 영원토록 지속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9,19 오후 10시에 마침.

                                                           갑자기 정애가 땡기네. 이미지라도...
 
대구090720피p033죄인으로출발하는몸

대구 7월20일 피 8강 하나님의 속성을 담는, 드러내는 몸 (죄인 만들기)

[09 대구강의 13] - [피 8] - 죄인으로 출발하는 몸
                                                                                
                                                           09,07,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인간’은 허구이고, 허상 !!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33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예수님의 죽으심을 잊은 교회는 쓰레기이다. 서로를 위해서 재미나게 노는 데만 열중한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잊은 교회는 쓰레기라고 할 수 있는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서로’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사실 이 책에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심사숙고를 해서 쓴 것들인데, 하지만 이 책에서 그런 과정들을 다 설명하지는 못하고, 그냥 단어들로서만 나열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 단어 하나하나를 파보면, 그 밑에 !!

그러므로 이 책에 있는 단어들은, 마치 감자나 고구마처럼 땅위에 보이는 것과 같은데, 그런데 그 땅 아래를 파보면, 감자나 고구마가 줄줄이 달려나오듯이, 그렇게 그 밑에는 엄청난 내용들이 깊숙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위에 단어들이 이렇게 나열되어 있으면, 그 각각의 단어 밑에는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내용들이 그 아래에 줄줄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책을 쓰다가 보면, 그 밑에 있는 것들은 일일이 다 설명을 하지는 못하고, 그 위에 단어들만 이렇게 쓰다가 보니,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해서 말이다. 그러니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무슨 의미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파악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을 일일이 모두 설명을 하게 되면, 이 책이 지금 약 350페이지가 정도 되는데, 그 몇 배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1,000 페이지를 훌쩍 뛰어넘지 싶은데 말이다.

◈ 여기서 ‘서로’ 라는 개념을 파내려 가보면 !!

여기 읽은 교재에 보면 “서로를 위해서 재미나게 노는데 것에만 열중한다” 라고 하는데, 사실상 내용 자체는 전혀 어렵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앞에 ‘서로’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흔히 사용하는 그리 어렵지 않은 용어인데, 하지만 진리적 차원에서 보면 상당한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인간이다” 라고 했을 때, 하지만 원래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도 없는 것인데, 그렇다면 무엇만 있는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마지막 때에 부활될 때도 몸만 부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혼이라는 것은, 몸이 만들어낸 조작된 개념이라는 말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영혼이란 표현을 사용하셨지만, 즉 비유로 어리석은 부자를 말씀하시면서, “오늘밤에 너의 영혼을 데리고 가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혼이 떠나시다” 라는 표현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런 인간들이 흔히 사용하는 용어를 차용해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몸을 만들어놓고, 이 몸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과 육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자아는 몸이 만들어낸 임시방편 !!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몸에서 만들어낸 자아가, 즉 자기가 자기를 볼 때 만들어진 임시방편적인 것으로서, 즉 인간이라는 실체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없는데, 하지만 인간을 생각하도록 한 “니는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만드신 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복잡한데,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이 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어놓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이 몸에서 자아를 구축하게 되었고, 물론 그렇게 해서 구축된 자아는 허구인데, 그런 자아를 즐겁고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몸을 일방적으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아담의 후손들인 모든 인간들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공중에 나는 참새도 누가 기르는가? 분명히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기르신다고 하는데, 그러니 참새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즉 “참새야, 참새야, 너는 누가 키우지?” 라고 하면, 참새는 “하나님이 키웁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짹짹짹” 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물어보면 과연 그런 대답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 개만도 못한 모든 인간들 !!

그것이 강 장로님의 ‘개’ 에피소드인데(?), 그러니 우리는 개보다도 더 못하다는 것이다. 개는 자아가 없는데, 왜 자아가 없는가? 굳이 자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개를 만들어놓았지, 결코 개 자신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님을 이 개는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모르니, 인간이 개만도 못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자아는 허구라는 것인데, 그러니 자아는 곧 악마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하나님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서부터 출발을 하는데, 그래서 그 인간을 조사해보니 몸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인데, 모두가 다 인간을 위한 철학이고, 인간을 위한 과학이라는 말이다. 그런 기술을 배워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돈이 되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전 세계의 인류는 무엇인가? 모두가 다 개보다 더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이 지렁이 같은 야곱아!”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아마 지렁이가 들었으면 엄청 섭섭했지 싶은데 말이다.  

그러므로 이 인간이라는 것이 없으면 무엇도 없겠는가? 가정이라는 것도 없는데, 자아가 곧 ‘나’이니 말이다. 그렇게 ‘나’ 라는 것이 있으니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도 허구이고, ‘너’도 허구이고, 또한 가정도 허구라고 하면, 이 사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론 국가도 허구이고 말이다.

◈ 국가는 짐승의 속성을 보여주는데 !!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국가의 허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다니엘서와 스가랴서에서는 국가를 국가로 보지를 않고, ‘짐승’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는 말이다. 어떤 신부는 국가가 있어야 교회가 있다고 하는데, 얼마 전에 조찬기도회도 열고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분명히 국가를 짐승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짐승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국가를 짐승이라고 이야기함으로서, 국가는 짐승의 속성으로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하나님이 만든 몸은, 몸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즉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다윗의 몸과 죽어가는 아기의 몸은?

어제 예배시간에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는데, 즉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만 그 아기가 죽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지만, 그 아기는 죽고 말았는데, 그러자 다윗은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럴 때, 이 다윗의 아기라는 몸과 다윗이라는 몸이 서로 어떤 역할을 하는고 하니, 그 아기는 자기를 위한 몸이 아닌데, 또한 다윗의 몸도 아기를 위한 몸도 아니고 말이다. 그 아기와 다윗의 몸이 합쳐서 누구를 보여주는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즉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미리 배치되어 있는 몸이 바로, 하나는 아기의 몸이고, 또 하나는 다윗 자신의 몸이라는 말이다. 또한 둘 다를 합쳐도 몸이고 말이다.

◈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몸을 자기 몸으로 만들어서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햇빛과 공기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다 기르신다는 것이다. 즉 ‘기르시나니’ 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당신은 누구 덕분이 삽니까?”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모두가 다 자기가 노력해서 먹고산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길러주신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지난 시간에 한 것처럼 일종의 농담이고 말이다.

하지만 병원에서 아파서 누워있으면서 숨을 헐떡이는 사람조차도 누구의 힘으로 그렇게 숨을 쉬는가? 분명히 하나님께서 숨을 쉬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몸이 아픈 사람은 병원에 누워서 뭐라고 하겠는가? 하나님께 항의를 하는데, 물론 숨을 쉬는 것은 기본이고 말이다. 왜 자기 몸을 아프게 하느냐고 말이다.

◈ 하나님아, 왜 내 몸을 아프게 하는가?

하지만 그렇게 몸을 왜 아프게 하느냐고 항의를 한다는 것 자체는, 그 앞에 무엇이 전제가 되는가? 그것은 바로 “내 몸은 내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타인이 왜 나의 몸을 아프게 하는가? 이 악한 하나님아!” 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그런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몸이 그만 누구의 소속이 되고 말았는가? 자기가 몸에서 허구적인 자아를 만들어놓고, 그 몸은 순전히 ‘나’에게 복종하는, ‘나’를 즐겁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나’를 절대화시키는, 즉 ‘나’를 신으로 만드는 몸으로 전환을 시켜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엄연히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말이다.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이 바로 악마가 한 짓인데, 그렇게 인간을 마구 버려놓았다는 것이다.

◈ 성경해석을 하는 ‘너’는 도대체 무엇인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성경해석이라고 하는 것이, 즉 성경이 아무리 문자로 되어있다고 해도, 그렇게 “성경해석을 하는 너는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즉 “인간인가? 아니면, 성령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몸인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몸으로서 성경을 해석할 때는 하나님의 속성이 나오게 되고, 그런데 그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고 성경해석을 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다 자기 영광이 된다는 말이다. 즉 자기 몸으로 여긴다면, 거기에서는 자기 영광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재에 있는 이 ‘서로를 위하여’ 라는 것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나를 위하여’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재미나게 노는데 열중을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전혀 안중에도 없고 말이다.

◈ 잠시  ‘몸’에 대해서

여기에서 ‘몸’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면, 이 ‘몸’ 이라는 것은 일종의 덩어리인데, 그런데 이 덩어리를 씻겨주고 먹여주고 입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밤이 되면 잠도 재워주어야 하고 말이다. 그렇게 감당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아프면 간병도 해주어야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몸이라는 덩어리를, 그렇게 씻겨주고 먹여주고 입혀주어 재워주는데 아프지 않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벌기가 힘이 들면 기껏해야 들고 나오는 대안이 무엇인고 하니, “그냥, 꺅 죽자” 라는 것인데, 즉 자살이라는 말이다. 즉 자기 덩어리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집채와 같은 커다란 덩치를 감당을 하려고 하니 돈이 필요하고, 그런데 돈을 벌려고 하니까 짜증이 난다는 말이다. 그렇게 짜증이 나니 그만 자살이나 하려고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살을 하려고 하니, 그동안 공들인 자기 인생이 너무나 아깝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 아, 감당이 불감당 !!

이것을 한 마디로 “감당이 불감당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괜히(?) 덩어리를 주어서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날씨가 조금만 더우면 시원한 것을 마셔주어야만 하고, 샤워도 해주어야하고, 또한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TV를 봐주어야 하고 말이다.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운동을 한다고 난리를 피워주워야 하고 말이다.

우리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하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또한 ‘나’ 라는 인형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이 인형을 가지고 놀아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드는지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란 무엇인가?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감당할 수도 없고 말이다. 그야말로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딜레마도 이런 딜레마가 없다는 것이다.

◈ 술은, 몸을 없애는 굿 아이디어 !!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이 몸을 그만 없애버리는데, 그렇게 없애는 방중에서 제일로 좋은 방법이 바로 ‘술’ 이라는 것이다. 술을 먹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술은 먹는 것이 아니라 처먹는 것인데, 그러면 왜 술을 처먹는가? 그것은 바로, 술을 처먹게 되면, 인형과도 같은 큰 덩치를 감당해내려고 하면, 술을 처먹는 그 짧은 순간에는 그것을 잊을 수가 있는데, 마치 마약처럼 말이다. 얼마 전에도 식당에서 술을 처먹는 사람을 보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술을 처먹으면 나중에 술이 깰 때가 되면, 머리가 깨어지게 아프다는 것이다. 물론 술을 처먹지 않는 사람은 그 고통을 모르지 싶은데, 그러니 마치 술은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까, 자기가 자기 몸에 마취주사를 놓고, 자기 머리를 자기 주먹으로 때리고 치는 것과도 같은데, 그리고는 마치가 끝나면 “누가 내 머리를 때렸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술이 아니라면 과도한 몸부림을, 즉 춤을 춘다고 하든지, 흡연을 한다든지, 지나친 여행을 한다든지, 도박에 빠진다든지, 그렇게 해서 잠시동안 자기를 잊는 그 순간만큼은 “나도 없고, 너도 없는”, 그렇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잊기 위한 모든 조치는, 고스란히 몸의 아픔으로 그대로 남아서 자기 몸에 되갚아주게 되니, 결국에는 감당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알았던 ‘들뢰즈’ 라는 철학자는, 병원에서 입원을 해있으면서 링겔을 뽑아버리고서는 그만 창문에서 뛰어내려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까뮈는 엽총으로 자살을 했고 말이다. 바로 이것이 집채만한 덩어리를 가지고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몸과 자아의 관계만 남게 되니 !!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니 남는 것은 무엇인가? 몸과 자아의 관계만 남는데, 고상하고 점잖고 훌륭하기 짝이 없는 자아를 누가 괴롭히는가? 그만 자기 몸이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동안 쌓아온 업적, 훌륭하고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또한 남에게는 해꼬질을 하지 않고 모범적으로 살았다고 하는 자아가 말이다.

그런데 나이가 70이 되고 80이 되어서 정신이 그만 혼미해지고 하니, 자기가 그만 자기에게 실망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 아닌데, 왜 이렇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도 치매현상을 보이는데, 그러면서 “이것은 원래 내 모습이 아니야. 내가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야” 라고 제 아무리 소리를 쳐도, 머리의 회로가 이미 다 망가지고 말았는데,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나와서 아무나 붙잡고서 “권사님, 저를 미워하지요? 당신, 나에게 욕했지?” 라고 하는데, 그렇게 치매현상이 나타날 때는 누가 말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돌아서서 뭐라고 하는가? “내가 왜 그랬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치매도 계속이 되면 그만 습관성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그러니 고상한 자아를 남기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자기를 죽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 아하, 인간이 이렇게까지 대단할 수도 있구나 !!

다시 말해서, 이 몸을 자기의 고상함으로, 왜냐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착함으로, 즉 자기의 고상한 자아상으로, 즉 “내가 이렇게 멋있는 인간도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즉 자기도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말이다. 바로 그런 자기 몸을 가지고, 즉 자기가 보고싶어하는 것을 두고서 ‘성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하, 인간이 이렇게까지 대단할 수도 있구나!” 라고 말이다. 그것이 곧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화론이라는 말이다. 그런 성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100퍼센트 다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 ‘나’ 뿐이야 !!  ‘나’ 뿐이야 !!

다시 정리하면, 즉 “우리교회는 이렇게 훌륭한 교회가 될 수 있고, ‘나’ 라는 인간이 이렇게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멋있는 존재가 될 줄 알았어. 그럼시롱(?)” 이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가 자기 몸에게 감사하고 싶어서 환장을 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서 그들은(?) 기독교에 입문을 했는데, 그러니 처음부터 자기밖에 모르고, 끝까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 우리 몸이 죄를 보여줌으로서, 하나님의 속성을 !!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지겠는데, 너무 일방적으로 강의를 해버리면 좀 그러니 말이다. 하나님과 몸 사이에 있어서, 그것이 무슨 관계라고 했는가? 아까 분명히 제가 이야기했는데,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준다고 말이다. 즉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려고 하면, 우리 몸은 반드시 죄가 무엇인지, 그 죄를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그렇게 사용을 하시겠다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 몸을 아주 가뿐하게 죄를 짓는 몸으로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가뿐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 지옥의 속성(?) - 아니야, 내 몸은 내 것이야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떤 놈들이 지옥에 가는고 하니까,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끝까지 움켜쥐고 놓지를 않는 놈들, 바로 그런 놈들이 악마이고, 또 악마의 하수인이고, 또한 지옥에 가야될 쓰레기 같은 놈들이라는 것이다. 감히 자기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서, 자기 것이라고 끝까지 버티는 놈들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해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 몸을 내어놓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는데, 그러므로 죄인을 불러서 의인이 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몫인데, 즉 주님께서 다음 작전을 펼쳐서 알아서 하신다는 말이다.

참 쉬죠잉? 무엇만 알면 되는가? 이 ‘몸’ 이라는 것이 ‘나’ 라고 하는 허구적인 개념의 몸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가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순간에도 누구의 몸이었는가? 그 순간에도 햇빛을 주시고, 또한 장마가 져서 저수지에 물이 차이게 하시는데, 즉 포항지역에 가뭄이 들 때 영천지역에는 단비를 내리시고 말이다. 심지어 황무지에도 비를 내리는데, 그런 것이 다 누구의 조치 때문에 그러한가?

◈ 주님이 함께 계심으로, 졸지에 죄인이 !!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하시는 차원인데, 그런데 그렇게 관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를 보고 이쁘라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하고, 그리고 나서 생명과를 따먹게 하시는데, 그 이유가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몸이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한 그 형상은 아니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해서 우리 몸을 죄의 몸으로서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을 철저하기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어유, 복잡해!)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 인데, 즉 주님이 함께 계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졸지에 죄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자기가 졸지에 스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괜찮은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 사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성화론자 !!

물론 제가 이렇게 성화론자들을 공격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저 어린 최 집사님 아이인 ‘강이’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다 성화론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성화론자에서, 자기 몸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기는 인간으로, 그렇게 바뀌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 기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에게 갈 자만이 자기 몸이 죄를 보여주기 위한 몸임을 알게 되는데, 그렇지 않은 자들은 자기 몸이 자기가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존재라고, 그렇게 다들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것과 한 평생을 싸운다는 말이다.

지금 제가 오늘 강의를 하면서 이 ‘서로’ 라는 개념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었는데, 즉 그 ‘서로’ 라는 개념 아래에 이렇게 많은 내용들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서로’, 즉 ‘나와 너’ 사이에서 공동체를 이루어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말이다.

사실은 이런 ‘나’, ‘너’ 이런 것들이 모두 개념이 없는 것인데, 즉 ‘나’ 라고 일컬어지는 몸과 ‘너’ 라고 일컬어지는 몸은, 그 몸들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죄가 무엇인지, 그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생겨난 몸들이라는 말이다. 물론 아담의 속성이 담겨있는 말이다.

◈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은 계속 새끼를 까야 !!

그렇게 아담이 흙으로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해서 계속해서 자기 새끼를 까는 것은, 즉 아담의 형상을 흘리고 하고 퍼지게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아담은 계속해서 새끼를 까서 퍼트려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거기에 다 실어서 표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 몸과 몸이 합쳐져서 두 몸이 되어봐야 결국 죄의 두 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 어떤 의로움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서로 도와주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그렇게 도와주어도 그 공동체는 여전히 죄이니 말이다.

여기 교재 33페이지를 다시 살펴보자.

** 예수님의 죽으심을 잊은 교회는 쓰레기이다. 서로를 위해서 재미나게 노는 데만 열중한다. 이처럼 세상 멸망의 이유를 찾지 못한 교회나 가정이나 기업체나 국가는 멸망의 대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피 흘리신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라는 것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빠져버리면, 자기들끼리 아무리 재미있게 놀아도 그들은 자신들이 근본적으로 죄인임을 모르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참새처럼 기르시는 이유에 대해서 알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자기들을 존재케 하는지 말이다.

◈ ‘세상 멸망’에 대해서 !!

그리고 그 다음에 보면 ‘세상 멸망’ 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 ‘세상 멸망’ 이란 어떤 개념인고 하니, 그것도 밑을 파보면 원주처럼 그렇게 내용이 꽉 차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차있는 것을 한번 끄집어 내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내용인고 하니, 인간의 몸을 허구적인 자아의 몸으로 엮어져 버리는데, 즉 하나님의 자기 몸이라는 관계가 끊어지고, 그렇게 해서 엮어지게 되면 이 자아는 어디에 예속이 되는고 하니, 그만 시간관에 예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관에 예속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교재에 보면 나중에 나오는데, 인간의 시간관이 무엇인고 하니,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과거가 굴러서 현재가 되고, 그 현재가 굴러서 미래로 ??

예를 들어서, 이렇게 지붕에 눈이 쌓여있는데, 그 지붕의 꼭대기에서 눈을 굴리면 나중에 여기 밑바닥에 떨어질 때는 눈덩어리가 제법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지붕 꼭대기가 과거이고, 밑바닥이 미래이고, 그 중간이 현재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과거에 자기가 생각했던 눈덩이가 뭉쳐져서 현재가 되고, 그 현재가 굴러가게 되면 자기의 미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자아가 보는 몸이 되어버리면, 어디서 어디까지 아는고 하니, 자기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만 자기 몸의 개념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엇을 잊어버리는고 하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하는, 그런 시간개념으로 늘일 수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몸이 없어지면 그만 ‘나’도 없어지니, 자기가 죽고 난 뒤에는 “나는 몰라” 라고 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

그러한 자들이 바로 여호와의 증인들인데, 그래서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죽고 난 뒤가 무슨 소용이 있노? 흙이 되면 그만인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철스님도 역시나 그러한데, 그래서 법어라고 하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 이아무개 : 스님, 계셔요?
* 성철스님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 이아무개 : 우리가 어디서 태어났어요?
* 성철스님 : 그런 건 나도 몰라.
* 이아무개 : 저,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하는데요?
* 성철스님 : 니가 하나님을 데리고 와서 보여주면 믿을게.

이렇게 흔히들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 라고 하는 것은, 이 몸의 개념이 자아가 느끼는 시간 속에서의 몸인데, 그러니 이 몸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냥 “어, 있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여기에 있는, 옥수수 수염차의 경우에 !!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하는 점은,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다른 것은 없고 옥수수 수염차만 있다고 하면, “이것을 누가 가져다주었지?” 라고 생각해야 할 텐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어, 있네” 라고 하면서, 그냥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 옥수수 수염차가 우리 몸이라고 한다면, 그런데 우리의 몸은 어떠한고 하니까, 심리학에서는 사람이 태어난지 6개월이 되면 그때부터를 ‘거울단계’ 라고 하는데, 그 이전까지는 거울에 비친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입의 크기만큼 이 세상을 안다는 것이다.

◈ 갓난아이는, 자기 입의 크기만큼 이 세상을 알아 !!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왜냐하면 6개월 이전에는 아이는 모든 것을 다 입으로만 집어넣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바깥의 세계는 전혀 모르고, 그냥 자기 입에 들어오는 크기만큼만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도 자기 입의 크기 정도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거울을 보게 되는데, 즉 아빠하고 자기하고 거울 앞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꼼지락거리는 것은 자기이고, 그 옆에 서 있는 것은 자기가 아닌 아빠, 즉 ‘타인’ 임을 안다는 말이다. 물론 그때는 완전히 분화가 된 상태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발육이 느린 아이는 엄마를 때리면 아이가 우는데, 엄마와 자기가 아직 분화가 되지 않아서 말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옥수수 수염차가 여기에 이렇게 있다고 하면, “야, 누가 주었지?” 라고 하면서 주신 분을 생각하면서 감사히 여기고 마시면 되는데, 그런데 거울에 가지가 비치듯이 그렇게 자기가 “어, 있네” 라고 하면서, 술이나 처먹고 담배를 마구 피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술 담배를 하십니까?” 라고 하면, “이것은 내 몸인데, 니가 왜?”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 와서도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게임이나 생각하고, 여학생을 꼬실 생각이나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제 집사님 아들이 예배시간에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노트에 적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았는지 말이다. 복음을 들으면서 그렇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기적을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인간은 마귀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

아담 이후에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귀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몸 하나 즐겁게, 그냥 씻어주고, 놀아주고, 웃겨주고, 그런 것 말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괴로우면 술을 처먹고 도박이나 하고 바람이나 피우고, 또 마누라나 때리고 말이다. 그러다가 낚시나 훌렁 떠나버리곤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괴로움을, 즉 자기 몸 덩어리를 잊으려고 하는데, 우리 인간은 바로 그런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면 ‘세상 멸망’은 무슨 의미인가?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세상 멸망’ 이라는 것은, 이미 눈이 굴러서 그런 시간관을 당겨보면, 거기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해야 하며, 멸망을 시켜야 하는가?” 라고 하는, 그것을 인간들이 모르는 것을 ‘비밀’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바로 그 비밀문서에 보면 책이 두 종류가 있는데, 먼저 생명책이 있는데, 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영생에 들어가고, 하지만 행위책에 기록된 자들은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바로 그러한 내막들이 양쪽 책에 다 기록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는가?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미 세례요한은 시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자기가 경험한 시간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시간대를 쫙 늘여놓았다는 것이다. 즉 자기 중심에서 벗어난 시간대,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 자기 몸 중심의 시간대에서 벗어나게 되면 !!

그렇게 자기 중심에서 벗어난 시간대가 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좀 어려운데, 그렇게 자기 몸 중심으로 생각한 시간대에서 벗어나게 되면, 자기 몸은 그만 자기보다 더 큰 것을 바라보는 분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나요?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과거 경험한 것이 자기 현재로 뭉쳐진다는 것에서 벗어나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찾아오게 되면, 자기는 그야말로 하나의 손바닥이고 안개와 같은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는데, 하지만 자기가 그런 손바닥만하고 안개와 같아도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제는 더 큰 것 속에 아주 작고 순간적인 것으로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래도 그것이 어디냐는 말이다.

그래서 마음놓고 웃으면서 이 세상을 보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도다” 라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 말이, 슬퍼서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 그것은 허무주의이고 말이다. 그야말로 기뻐하면서 그렇게 외치면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 멸망’ 이라는 개념에 담겨있는, 밑에 들어있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을 다 설명을 하려고 하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지 싶은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의 피 속에 들어오는 일은, 단순히 자기 목숨을 끊는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가고자 했지만 거절을 당했다.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예수님, 저도 따라가고 싶어요 !!

예수님이 죽으려고 하니 베드도로 따라서 죽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구약에서 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니 뒤따라오는 애굽군대도 갈 수 있는 것으로 따라오다가 죽은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즉 베드로도 예수님을 따라서 죽으면, 자기도 예수님과 함께 있을 줄로 착각했다는 말이다.

지금 추운가요? 그러면 에어컨을 끄고 하겠는데, 온도를 낮추면 좋겠는데, 이게 그만 중고가 되어서 온도조절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양 아니면 염소인데, 천국이 아니라면 지옥이라는 말이다(ㅋㅋ). (아니, 그럼 지금부터 지옥의 경험을?)

그건 그렇고, 아무튼 예수님의 죽으심은 특수한 죽음인데, 그러니 어떻게 감히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들어올 수가 있느냐는 것인데, 그러니 전혀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가 되는 것은 오직 세례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그 세례라는 것은 성령이 와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 자살을 한다고 되는 문제도 아니고 말이다.

◈ 자기 목숨으로도 죄를 지울 수 없다는 점이, 곧 절망 !!

그러니 예수 안에는 자기 죽음으로도 들어갈 수가 없는데, 이것을 달리 말하면, 자기 죄 값은 자기가 죽는다고 해도 결코 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부엉이 바위 위에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자기 죄 값은 없앨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것이 절망이 아니라, 그렇게 지은 죄가 자기 목숨을 바쳐서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 바로 절망이란 말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절망은 바로 그 절망인데, 그러니 전혀 대책이 없다는 말이다. 영원토록 말이다. 도저히 그런 죄를 씻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으면 귀신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타나셔서, 그 죽은 놈을 다시 살려서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대책이 없다는 말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가 죽으면 모든 것이 그만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자기가 막상 죽으니 더욱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살아있다는 말인가? 지옥에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라는 말이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가롯유다의 역할은?

그래서 예수님이 가롯유다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차라리 너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니가 태어나는 것은, 너의 자아의 입장에서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러나 너의 몸은 악마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하다” 라는 것이다. 이해가 됩니까?

그러므로 가롯유다의 몸은 필요한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주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롯유다가 협조하지 않았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를 못했을 것이라는 말도 하는데, 그러니 이렇게 악마가 협력을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일도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 악마가 협조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어 ??

그런데 우리는 이 몸을 자기 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매일같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악마가 여기 있어요. 이단들이 너무 많아요” 라고 하는데, 그렇게 아무리 집구석에 악마가 있고 이단들이 줄줄이 깔려있어도, 모든 것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두고 이단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이단이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다 필요에 따라서 있게 하시는데, 이단이든 삼단이든 간에 말이다.

이제 교재 34페이지를 보자.

** 성도가 거꾸로 사는 것은, 세상을 골려먹는 것이 재미가 나서가 아니요, 일탈의 자유를 만끽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거룩과 대조해볼 때, 홀로 심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자체가 감동적인 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진담이기 때문에 무섭고 무겁다.

◈ 홀로 심각함 !!

여기에 “홀로 심각하기 때문이다”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왜 성도가 이 세상을 거꾸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고 하니, 남들은 다 정상적인(?) 삶을, 즉 넓은 길로 가는데 말이다. 이러한 넓은 길과 좁은 길은 그 길의 폭도 문제이지만, 사실은 그 방향이 더 큰 문제인데, 길의 방향이 전혀 정반대라는 것이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은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나아갈 때, 사도바울은 저 낮은 곳을 향해서, 즉 십자가를 향해서 나아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그것은 곧 ‘다급함’ 때문에 그러한데, 그렇다면 사람들이 과연 언제 다급한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라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바로 그때가 제일 다급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일 년 동안 먹을 것을 먹지도 않고, 입지고 않고 악착같이 저금해서 금방 찾은 빳빳한 현찰 일천 만원이 든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그때 뉴스에서 전라도 지방에 큰 태풍이 올라온다고 한들, 그것이 자기에게 그 무슨 뉴스거리가 되겠느냐는 말이다. 왜 그런가? 다급함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누구의 다급함인가? 자기만의 다급함인데, 그러한 자기만의 다급함이 있어야만 정말로 주님이 귀한 줄로, 즉 복음의 귀함을 안다는 것이다.

◈ 혹시, 오뎅이라도 좀 사드릴까요?

제가 일전에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첫 차로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공중전화박스에서 전화를 하고 나서는 그만 지갑을 통 채로 놓고 왔다는 것이다. 성격이 급해서 지갑을 챙기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이다. 그러니 보통 큰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휴대폰도 없고, 또 돈도 한 푼도 없고 말이다. 서울하늘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 집에 전화를 했는데, 집에 있던 아내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여보, 어떤 여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자기가 이근호 씨 지갑을 주워서 종로 파출소에 갖다 놓았으니 찾아가라고 연락이 왔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종로 파출소로 가서 지갑을 찾고 너무 고마워서 오뎅을 사 줄려고 했는데, 극구 사양을 해서 그냥 나왔다는 말이다.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민중의 지팡이로서 시민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말이다(ㅋㅋ).

시골 목사의 서울 탐방기는 그만 하고, 아무튼 구원을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다급함인데, 즉 예수님의 죽으심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당신, 똑바로 살아” 라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나’의 문제라는 것이다.

◈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신앙’ !!

바로 이것을 두고서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적 신앙’ 이라고 했는데, 그러므로 이 실존적 신앙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고 하니, 집단적 교회, 혹은 제도 교회의 종교 부흥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키에르케고르 당시의 독일의 모든 목사들이 월급을 받아가면서 교회를 키우는데 전념을 다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커야만 정치적인 힘이 세어지고, 그렇게 정치적 파워가 있어서 압력을 가하고, 그렇게 정치꾼이 될 때 목사로서 성공을 했다고 보니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이 ‘실존적 신앙’을 주장함으로서,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을 이길 정도로, 즉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이사야 선지자처럼 말이다. 그렇게 뭔가를 잃어버렸는데, 과연 무엇을 말인가?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인데, 그러면 왜 ‘나’를 잃어버렸는가? 그것은 바로, 그동안 당연히 잃어버려야 될 것을 계속해서 자기 것이라고 쥐고 있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 잃어버린 양 - 에헤헹, 나의 목자가 누구예요? 

그렇게 자기는 죄인이 되었는데, 그런데 그 죄인을 누가복음 15장에서는 ‘탕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탕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원래 자기 몸의 주인은 주님이 볼 때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잃어버린 양으로 간주해서,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나’로 하여금 주님이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잃어버린 양임을 알게 되는데, 이렇게 자기가 주님의 잃어버린 양인 것을 알게 된다면 무슨 개념이 떠오르겠는가? 그렇다고 하면 제대로 된 목자가 과연 누구인지, 물론 기존 목사는 아니고 말이다. 즉 중요한 것은 “그 목자가 누구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곧 “너를 얻기 위해서 오라고 하지 않고, 내가 가서 목숨을 바침으로서 니가 잃었던 생명을 얻었다” 라는 하는, 바로 그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목자는 양을 뜯어먹는 목자가 아니고, 오히려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목자가 진짜 목자라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이고 말이다. 이것이 다음 주일날 오전설교에 해당이 되기 때문에, 거기에 넣을까 생각 중인데 말이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 진짜 다급함에 부딪치게 되면 !!

아무튼 이 ‘다급함’ 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동안 자기가 구축한 거룩이,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성화론자인데, 그렇게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자기의 가치, 자기 존재의 의미 등이 하나님의 거룩한 만나게 되는 순간에, 그 모든 것이 다 와르르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하, 이런 위선적이고 가증한 놈이었구나”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진짜 다급함을 만나게 되면, 집에 불이 났다고 하든지, 자기 아이가 아프다든지,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하든지, 그런 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를 지내게 하라고 했다는 말이다. 자기가 아무리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잘 지키고 해도, 그런 모든 것들은 다 헛된 것인데, 그래서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교재 34페이지를 계속해서 보자.

**  따라서 성경자체가 감동적인 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진담이기 때문에 무섭고 무겁다.

◈ 성경말씀은 농담이 아니기에 !!

시인이나 예술가들은 성경을 보고 감동을 먹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결코 감동적인 글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진담이기에, 즉 농담이 아니라 말이다. 그래서 너무나 무섭고 무겁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진담의 무게인데, 즉 진리의 중량이 말이다. 어떻게 감동을 받는다는 말인가? 짓눌려서 숨을 쉴 수가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아하, 나는 이제 죽었구나”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님, 성경을 어떻게 보셨나요?” 라고 하면, “예, 감동을 받았습니다. 좋은 이야기가 정말 많아요” 라고 하면 안 되고, “예,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이 좋은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도올 김용옥이 하는 이야기인데, 하여튼 성령을 받지 못한 인간들은 티를 낸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티가 난다는 말이다. “성경말씀은 참으로 감동적이야” 라고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감동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가 없는데, 성경말씀이 얼마나 무서운지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렇다면 “무엇이 죄냐?” 라는 문제만 남는다. 분명 죄가 있기에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이다. 만약에 자신의 죄를 모르는 채 예수님의 피를 거론하는 것은 기존의 자기 죄에다 “십자가 피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죄”를 추가한 것이 된다. 죄도 모르면서 죄 씻음을 거론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것이다.

◈ “십자가 피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죄” 추가요 !!

그렇다면 이제 남는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죄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의 죄를 모르는 채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기존에 있는 자기 죄에다 또 하나의 죄를 ,즉 “십자가 피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죄”를 추가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마치 “여기, 밥 추가요” 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그런 인간들은 아예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자청하는데,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죄도 모르면서 죄 씻음을 받았다고 주장하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 ‘죄 씻음’ 이라고 하니, 박옥수가 생각나는데, 그가 하나님께 매를 맞을 것을 생각하니 정말로 끔찍하다는 것이다.

◈ 신학자들 중에서 죄를 아는 자들이 있는가?

바로 그렇게 “여기, 밥 추가요” 라고 하듯이 추가하는 것이 곧 신학인데, 그래서 신학자들 중에서는 죄를 아는 자들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죄를 제대로 안다고 하면 아무리 고생이 되어도 개척교회를 하면 했지, 신학교 교수를 해서 신학자 노릇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너무 간곡히 부탁을 하든지 하면, 어쩔 수 없이 개척교회를 하면서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자기가 교수를 한번 해보려고 그렇게 생쇼를 벌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 주님이 주신 다급함을 만났는데, 그런 교수자리가 눈에 들어오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교수자리가 뭐가 안정되었다고 좋아하는지 말이다. 제 아무리 4대 보험을 다 대주고, 연봉을 아무리 두둑하게 준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그 다급함 앞에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교 교수들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물론 “여러분,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본인들이 믿는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보너스를 제대로 안 주던지 하면 서울시청 앞 광장에 가서 삼보일배를 한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한 숨밖에는 나오지 않는데, 여러분은 그렇지 않은가요?

◈ 양의 탈을 쓴 까페를 아세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한 자들이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나오는데,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인간들이라는 말이다. 요즘은 양의 탈을 쓴 까페도 등장을 했는데, 죄도 무엇인지 모르면서 복음을 다 안다고 한다는 것이다.

(고후 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 11: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러주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 세계에서 말하는 죄는, 실은 “죄가 아니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 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러주지 않는 상태에서, 그런 상태에서 이 인간 세계에서 말하는 죄는, 사실 죄라고 할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소페림’ 이라고 해서 서기관들이 있는데, 그들은 마카비 이후에 활동한 자들로서, 성경말씀을 필사만 한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도 했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죄’ !!

그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죄관(罪觀)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죄는 어떠한가? 예수님은 요한복은 15장 22절에서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그들이 이야기한 그런 것은 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죄인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이다.

◈ 목사님, 사도바울의 말씀도 율법적 기능이?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사도바울의 말씀도 율법적 기능이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당연히 있는데, 사도바울의 모든 권면 속에는 누가 들어있는가? 예수님이 들어 계시는데, 그러니 그런 말씀을 하면 할수록 없었던 죄가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나오니, 그것이 곧 율법적 기능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율법을 더함은 죄를 더함이라” 라고 하는데, 왜 그러한가?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의 몸은 죄인 된 몸으로 한껏 드러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의인이 아닌 죄인이 된 몸으로 말이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무시로 기도하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무시(무?)를 먹으면서 기도하라는 뜻인가?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하라는 의미인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물론 티벳의 승려들은 조금 그런 폼을 잡는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경전을 돌리고 있고, 또 달라이라마에게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모든 직업을 다 포기하고 말이다.

◈ 너희들은 안개인 줄 알아라 !!

그러니 사도바울을 비로한 사도들의 권면의 말씀들은 어떤 차원인가? 그 어떤 말씀이라고 해도 우리들로 하여금, 사도 야고보의 권면처럼 “누가 뭐라고 해도 너희들은 안개야” 라는 것과도 같은 의미인데, 그러니 그것은 “너희들은 안개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라” 라는 것이 아니라, 즉 “너희들은 안개인 줄로 알아라”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안개인 줄 알아야만 하는데, 그러니 우리는 어느 도시에 가서는 장사를 해서 이득을 볼 수밖에 없는, 우리가 바로 그러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야고보서 4장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도들의 말씀이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율법적 기능 가운데 최고의 율법적 기능이 바로 ‘십자가’ 인데,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들의 감추어졌던 모든 어리석은 죄들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제 교재 35페이지 살펴보자.

** 그런데 그 질서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새삼스럽게 자신이 바라보는 죄를 말하는 순간이 오면, 이제 소위 자칭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더 이상 예수님 앞에서 죄가 없다고 우길 수는 없다. 이것은 곧 인간이 생각하는 죄관(罪觀) 자체가 된다는 말이다.

◈ 십자가는 돌맹이 ??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뭐라고 했는고 하니, 돌맹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즉 자기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십자가에 부딪치면 깨어지게 되고, 또한 그들의 행위 위에 이 십자가가 떨어지게 되면, 그들을 아예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그야말로 박살을 내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마치 시속 200km를 달리는 자동차와 절벽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과도 같은데, 또한 동키호테가 돌아가는 풍차를 보고서 적인 줄로 알고 칼을 휘두르면서 덤비는 망나니짓을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위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내 행함이다. 왜? 내가 선악과를 따먹고 내가 알게 된 선한 행위이다” 라고 하면서, 마치 동키호테처럼 칼을 휘두르면서 공격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벽과도 같은데, 그렇게 해서 부딪치면 누가 아프고 손해를 보겠는가? 본인이 아프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부딪침이 성령의 인도하심인데, 즉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일어난 사건, 즉 예수님과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즉 “사울아, 사울아, 니가 엄청나게 고생을 하는구나. 니가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봐야 니만 고생이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

그때 사도바울은 비로소 이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는데, 즉 “야, 이 ‘십자가’ 라는 것이, 내가 새삼스럽게 어떻게 지키고 말고 할 수 있는 율법의 한 조항이 아니라, 그 전체가 절벽처럼 다가와서 나를 박살내는 능력이로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를 완전히 박살을 내어버리는 능력임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라는 것은 자기 몸을 비롯해서 자기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박살을 낸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사도바울이 이러한 말씀을 쓸 때는 결코 함부로 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그야말로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부수어지면서 썼다는 말이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러니 사람들이 아무리 계시와 양심에 입각해서 죄에 대해서 탐구하고 분석하고 조사하고 정립을 해도 모조리 죄가 된다. 그동안 죄인들의 죄를 논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어쨌든 구원이 되고 싶은 종교적 열의로 뜨거운 내가 “회개하는 죄인은 예수의 피로 용서를 받는다” 라는 공식에 맞추어보려고, 부지런히 자신이 죄라고 여긴 모든 것을 다 고백하고 반성하고 회개를 해봤자 바로 그런 행위 자체가 죄가 된다는 말이다. 물론 자기 딴에는 이 회개하는 행위만큼은 의로운 행위일 것이라고 자부해보지만.

◈ 금식하고, 반성하고, 회개를 !!

바리새인들이 구원이 되고 싶어서 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물론 여기 교재에는 “회개하는 죄인은 예수의 피로 용서를 받는다” 라고 했는데,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피가 아니라 양의 피라고 했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공식에 맞추어보려고 바리새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금식하고 반성하고 회개를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근거가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그 근거를 다시 해보면, 아까 이야기한 그 공식 하나면 다 통하는데 말이다. 즉 여기 이렇게 지붕이 있는데, 그 지붕에 눈이 구르게 되면, 과거에 자기 조상들이 어떻게 했는고 하니, 예레미야나 에스겔 등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으니, 자기들은 다시는 조상들과 같은 그런 실수를 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을 하고 회개를 해야한다고 여기고 자기를 비우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금식을 하는 기간에는 오락과 같은 활동을 금하고, 재를 뒤집어쓰고 하자고 했다는 말이다. 또한 그러한 것이 이사야서 등에도 나오고 말이다.

◈ 그러나, 금식조차도 죄임을 !!

그렇게 조상들이 금식을 하고 한 것을 바리새인들도 그대로 따라서 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뭐라고 하시는가? 금식을 할 때는 재를 뒤집어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서, 즉 금식을 하는 표시가 전혀 나지 않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또 무슨 새로운 법 조항이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하라’ 라는 것을 그대로 해도 전혀 소용이 없는데, 물론 하지 않아도 소용이 없고 말이다. 이래도 소용이 없고 저래도 소용이 아무런 없는데, 그래서 구원은 예수님께서 “너, 들어가!” 라고, 그렇게 넣어주는 사람만이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증거하는 자비를 보여주는 몸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판은 한 마디로 ‘분류작업’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자기 조상들이 과거에 했던 회개를 아무리 다시 불러보아도 전혀 소용이 없는데, 오히려 예수님에 의해서 그런 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사실로 드러나고 만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왜 회개하는 행위조차도 의가 되지 못하고 죄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 어느 인간도 예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다.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나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여기서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즉 예수님은 마이크를 들고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찾습니다” 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나타났는가? 바디메오 같은 소경이나 절뚝발이, 그런 자기가 생각해도 그렇고 남이 생각해도, 그렇게 저주를 받아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감히 자기 죄를 아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저는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지금 눈을 감아도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지은 죄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자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귀한 자들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천대를 받지만 말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개만도 못하게 여기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자들도 역시 그러한데, 아마도 그 여자에게 자기 아들이나 딸이 있으면 그 이름도 ‘독구(?)’ 라고 지었지 싶은데, 그렇지 않은가? 아니, 세상에 그런 자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같이, 전부가 다 자기 잘남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래서 없는 잘남도 만들어내기 위해서 성형수술도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습인데, 자기 몸값을 올리려고 말이다. 그런데 올리기는커녕 낮추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 십자가 - 그것으로 족한 줄 알라 !!

지금 더운데 문을 좀 열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니 이 ‘십자가’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 부분이 중요하니 잘 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즉 ‘십자가’ 라는 것은, “제발 선악과를 따먹은 그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서, 너 자신도 판단하지 말고, 남도 판단하지 말고, 오직 생명나무가 되신 주님이 너를 보고 의인이라고 하면, 그것으로 족한 줄로 알아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모든 것을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죄인데, 가롯유다를 보라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가? 사실상 그는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왜 자기가 판단해서 자살을 선택하는가? “나는 죽어서 마땅하다” 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가롯유다는 죽어가면서도 !!

하지만 우리 몸은 누구의 것인가? 분명하게 주님의 것인데,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기 것이라고 우긴다는 말이다. 가롯유다는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주장했고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충실한 악마의 종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는 주인이 바뀌면 대번에 안면을 몰수하고 새주인을 따르는데, 그렇게 하는데는 불과 채 1분도 걸리지 않는데, 아마 개를 키워본 분들은 잘 알지 싶은데 말이다. 물론 조금 똑똑한(?) 개들이 그렇지만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에게 밥 주는 사람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와는 단절인데,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재 자기에게 밥을 누가 주는지, 그 양반이 주인이고 최고라는 말이다. 제가 왜 이런 변절한(?) 똥개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우리도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를 하면, 이 ‘십자가’ 라는 것은 율법적 기능으로서 심판인데, 즉 우리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그렇게 이 세상을 책망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인간이 인간을 건방지게 판정을 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인간세계는 오로지 인간의 판단만이 진리로 통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죄라고 지적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 오직 십자가뿐이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성령 - ‘죄’, ‘의’, ‘심판’에 대하여 !!

이것을 조금 설명을 하고 지나가야 하겠는데, 여기 이렇게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래서 선과 악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무엇에 대해서 말인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선악과에서 나온 죄를 가지고서 판단하고, 또 선악과에서 나온 의를 가지고 판단하고, 또 선악과에서 나온 심판을 가지고서 판단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선악과에서 나온 죄, 의, 심판을 하나로 묶으면 딱 선악과가 되는데, 물론 선과 악에서 나왔으니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나무인가? 아니면, 아직도 니가 주장하는 선악과인가?” 라는 것인데, 즉 성령님이 오셔서 선악과를 가지고 있는 그 자체를 책망하신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이런 방식의 인간은 애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이라고 간주해서 만든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런 선악과를 품은 인간은 누구의 작품인가? 놀랍게도 악마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 선악과는, 악마를 잡기 위한 하나님의 덫 !!

이것을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왜 악마를 선악과를 가지고 유혹을 했겠는가? 그것은 바로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악마를 처벌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녹취자 - 그러면 아담이 악마의 덫에 걸린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악마가 하나님이 쳐놓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인가요?)

그러므로 이 선악과는 악마를 영원한 형벌에 집어넣는 근거로서의 역할인데, 그러니 여기에 사람이 끼어 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항은 금붕어가 살라고 만든 것이지, 사람이 살라고 만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사우나 - 아가들은 나가 놀아라 !!

그리고 사우나의 뜨거운 터키탕과 같은 것은 어른들이 들어가서 퍼지고 놀라고 만든 것인데, 그러니 아이들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른도 몸이 단련된 자들만 들어가고 말이다. 물론 단련이라기보다는 이제 피부가 늙어서 감각이 둔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뜨거운 곳에 아이들이 들어가면, 그 연약한 피부가 적응을 하지 못해서 그만 병이 생기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안 되는데, 마치 금붕어가 사는 어항에 우리 인간이 살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만 악마가 하나님과의 천상의 전쟁에서 지고 나니 그만 약이 올라서, 그만 하나님에게 당한 그 분풀이를 우리 인간에게 했는데, 즉 악마 자신에게 적용이 되는 선악과를 그만 인간에게 집어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 예수여,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그렇다면 이 선악과가 악마이게 해당이 된다는 것이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까,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악마가 뭐라고 하는가? “예수여, 우리를 여기까지도 멸하러 오셨나이까?” 라고 하는데, 즉 자기들이 하늘에서 당했는데, 이제는 이 땅에서도 박살내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끝까지 쫓아와서 말이다.

(마 8:29) 이에 저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그래서 악마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이것이 욥기나 스가랴서에 보면 나오는데, 이 생명나무의 기준을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온갖 발악을 다 한다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오는데, 즉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라” 라고 말이다.

(고후 4: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렇게 복음의 광채가 비추어지지 않으면 무엇만 남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선과 악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든지, 믿음과 소망 등등은 없다는 말이다. 그냥 남을 지적하고 송사하는, 즉 법대로 하자고 말이다.

◈ 개혁주의 신학 = 마귀 신학 !!

마귀는 우리가 그런 것에 벗어나지 못하고 꽁꽁 묶이도록, 그러한 방향으로만 악마는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즉 선악과의 테두리 안에서만 살도록 말이다. 복음의 광채보다 자기 잘만 맛에 살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성화론은 마귀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개혁주의 신학이 마귀의 신학이라는 것을 도출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는데 말이다. 

아무튼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성령께서 오셔서 뭐라고 하시는가? “예수님으로 만족하는가? 만족하면 되었다. 그러면 니가 니 자신을 판단할 권한도 니에게는 없다. 니 몸도 아닌데 니가 왜 판단하는가? 니는 지금까지 니가 스스로 판단해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니 심장을 뛰게 해서 살려오신 것을 모르는가? 그런데 왜 자꾸만 니가 노력해서 살아온 것처럼 여기는가? 그렇게 하지 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이에 반해서 뭐라고 하는가? 마치 우리가 훌륭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자꾸만 노는 동네를 선악과 동네라고 여기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렇게 해야만 생명나무가 가려지니 말이다.

저는 식당에 가면 담배 피우는 사람을 보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데, 그래서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곤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입고 물고 있는 담배를 빼앗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면, 얼마나 인간이 선악구조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 수 있는데, 자기 몸이니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자기가 판단해서 말이다. 물론 식당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인간도 그렇고 말이다.

* 저근호 : 아, 담배 맛이 참 좋구나.
* 이근호 : 여기는 식당입니다. 담배를 피우지 마세요.
* 저근호 : 여기에 ‘금연’ 이라고 써 붙여놓지 않았는데, 왜 그래? 참 이상한 사람이네.
* 이근호 : 그것은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 저근호 : 아니, 내가 피우겠다고 하는데, 왜 그래?
* 이근호 : 그래도 안 됩니다.
* 저근호 : 이봐요, 여기 식당 주인장 없나?
* 이근호 : 아니, 식당 주인은 왜요?
* 저근호 : 밥을 다 먹었으니 밥값을 계산하려고 말이야. 왜 당신이 해줄래?
* 이근호 : ? ? ?

여기서 요한복음 16장 11절의 말씀을 다시 보자.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잠시 ‘세상 임금’에 대해서 !!

여기에 보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라고 하면서, ‘세상 임금’이 나오는데, 이것도 정말 어려운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임금, 혹은 군주라고 보면, 다니엘서에 보면 4마리의 짐승이 등장하는데, 그 짐승들을 각각의 군주들로 본다는 것이다. 즉 왕이라는 말이다.

물론 요즘 세상에는 왕이 없는데, 그런데 이렇게 성경에서는 짐승을 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밑에 있는 백성들은 무엇인가? 즉 왕과 백성의 관계는 어떠하냐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민주주의가 아니고, 백성들은 임금의 운명에 함께 놀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주와 백성의 관계가 무엇을 설명하는데 아주 적절한고 하니, 악마에게 얽매여 있는 인간들의 현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이것보다 더 적합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 개성 없음을 즐기려면 군대말뚝을 !!

그 상세한 논리적 내막은 굉장히 복잡한데, 그것은 그때 가서 하고 말이다. 어떻게 임금이 시킨다고 해서 그대로 따라가느냐는 것이다. 그런 것이 참으로 웃기는 짓인데, 하지만 군대에 가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물론 군대에 안 갔으면 말을 하지 말고 말이다.

군대에 가면, 그야말로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종의 장기판의 체스와 같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입던 옷은 다 소포로 집으로 보내버리고, 그때부터는 똑같은 옷을 입혀서, 개성이고 자존심이고 뭐고 간에 그런 것은 일절 인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조작이라고 하는데, 즉 하나의 병졸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관계가 좋고 즐거울 때는, 그때는 말뚝을 박으면 된다는 것이다. 즉 개성이 없는 것을 즐기게 될 때 말이다.

◈ 이 세상 자체가, ‘선배님!’ !!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미셀 푸코의 주장에 의하면, 그러한 것이 군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집단, 즉 병원, 학교, 교회 등등, 그러한 모든 세계에 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직장에서 어떠한가? ‘선배님!’ 이라고 하면서 아부를 하는데, 즉 선배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동기들끼리라도 경쟁을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체제, 바로 그런 것은 모든 직장에 다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말이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십자가 마을 안에도 말이다.

그러니 심판을 아래에 있는 졸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윗대가리를 심판하는데, 즉 이 세상의 군주를 심판해버리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이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살았는가? 천만의 말씀인데, 군주의 운명이 누구의 운명이라고요? 그것이 곧 백성들의 운명이 되니, 백성들도 같이 박살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모두가 군주와 같은 한 통속이니 말이다.

◈ 임금이 심판을 받는데, 왜 백성들도 덩달아 받는가?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문제인데, 왜 군주가 심판을 받는데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같이 받는지 말이다. 이것을 젊은 아이들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데, 대통령이 잘못하면 직언을 하든지 해서 바로잡아야만 하는데, 왜 바보같이 그렇게 덩달아 비비면서 같이 가느냐고 말이다. 그러면 그쪽에서는 뭐라고 하겠는가? “니가 청와대에 한번 가봐라. 그런 말이 나오는지” 라고 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생각이 얼마나 이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리인지 모르는데, 하나의 기업체가 범죄를 하게 되면, 구성원들이 그 기업체를 보고 썩었다고 하면서 도려내든지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범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주체집단’ 이라고 하는데, 즉 집단자체가 하나의 주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주체 자체가 하나의 집단으로 !!

그렇게 주체가 집단이 되어버리면, ‘나’ 라고 하는 개인 주체는 그만 힘을 쓰지 못하는데, 이러한 주체집단은 샤르트르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주체집단이 싫은 사람들은 종교에 입문하게 되는데, 자기 혼자서 머리를 밀고 산 속에 들어가서 중이 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그러한 중들이 모여서 회의를 어떻게 하는가? 여기 저기서 ‘선배님!’ 이라는 소리가 마구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돈을 조금이라도 더 타게 되니 말이다. 또 돈이 되는 좋은 주지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선배님?’ 이라고 하면서, 빌고 또 빌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에게 비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천주교의 수녀 세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그냥 보면 수녀들이 다 평범해 보이고 같아 보이는데 말이다. 수녀의 세계에도 학력은 짧은 수녀는 식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서울대학교 정도를 나와서 수녀가 되면, 그 어디를 가도, 농띠를 부려도 유능하고 인정받는 수녀가 된다는 말이다. 거기에 비해서 시시한 지방 성경학교 출신의 수녀는 어디를 가도 허드레 일만 하고 말이다. 그러니 높은 자리는 일류대학을 나온 년들이(?) 다 차지하고 만다는 것이다. 

◈ 아무튼, 세상 자체가 곧 짐승 !!

제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 이 세상 자체가 바로 짐승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 남은 논리적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하면 그런 임금에 의해서 이 세상이 운영이 되고 유지가 되느냐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은 이야기를 하자면 아주 길다는 것이다.

일단 교재 39페이지를 읽고 나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 메시야를 학수고대를 했던 그들이, 도리어 오신 메시야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저주하고 조롱하고, 결국 제거해버리는 그 심성, 이 심성이 곧 죄였던 것이다. 이 심성이 모든 인류의 보편적 심성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심성이 어떠하기에 그토록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제 교재 37페이지의 ‘세상 도안’을 살펴보자.

** [세상 도안(圖案)] -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 왜 ‘세상 도안’ 인가?

저는 슬슬 더워지는데, 여러분들은 괜찮은가요? 여기에 제목이 ‘세상 도안’ 이라고 되어있는데, 말은 쉽게 ‘도안’ 이라고 했는데, 그 내용은 무엇인고 하니, 여기 이렇게 몸이 있다면, 이 몸에서 이미지가 나온다는 것이다. 즉 ‘이미지(image)’가 말이다. 이 ‘이미지’ 라는 것은 뭔가 머리에 떠오르는 느낌인데, 즉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저 사람은 이미지가 참 좋아” 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이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은, 그 사람의 속에 들어있는 그 사람의 성격과 같은 것으로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독특한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물론 바깥 외모에서도 풍기는 것이 있고 말이다. 그러니 “이미지를 5kg만 주세요” 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즉 이미지는 분명히 없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있는 것이 진짜 있는 것인가? 아니면 거기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진짜로 있는 것인가?

◈ 전지현 씨, 술 좀 그만 마시세요 !!

예를 들어서, ‘전지현’ 이라는 여배우가 있다고 하면, 그런데 이 전지현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늙은 의사가 전지현의 위를 내시경으로 검사한다고 할 때,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냥 평소에 하든 데로 무덤덤(?) 하다는 것이다. 물론 “야, 참으로 늘씬하고 예쁘구나. 혹시 연예인가?” 라는 생각은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늙은 의사가 그 다음에는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아직 나이도 젊은 아가씨가 무슨 술을 이렇게나 많이 마셔서 위가 엉망입니까? 그러니 앞으로 술을 조금은 절제하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전지현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혹시 명예 훼손 죄로 고발을?)

하지만 전지현이 검사를 다 받고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병원에서 팬들이 그만 장사진을 치고 있는데, 젊은 의사나 간호사들도 사인을 받으려고 난리이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이미지라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나름대로의 전지현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의 몸도 있지만, 그러한 몸은 키 얼마에 몸무게 얼마, 그렇게 숫자적인 것밖에 없지만, 진짜 전지현의 전지현 됨은 그런 세포조직이 아니라, ‘전지현’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길쭉하고 늘씬한 롱 다리에, 잘록한 허리에, 그리고 찰랑찰랑한 생머리라는 것이다(ㅋㅋ).

그것이 바로 ‘이미지’ 라는 것인데, 결국 사람들은 그 무엇이 손에 잡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무엇을 먹으면서 살아가는고 하니, 자기 이미지와 남의 이미지를 먹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이미지에 속으면서 살아가는 것이지만 말이다. 즉 사람은 나름대로 이미지를 관리하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 예, 엄마는 밥해주는 사람입니다 ??

예를 들어서, 어느 엄마가 자기 아이에게 “엄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지?” 라고 하면, “예, 밥해주는 사람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 아이에게 엄마는 무엇인가? 그냥 밥 해주는 식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엄마는 그런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엄마다운, 즉 다른 엄마들과의 차이가 나는 것이 무엇이지,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물으면 아이가 그 질문을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질문을 알아들었다고 하고, 그렇다면 그 아이는 뭐라고 하겠는가? “엄마는 나의 천사, 엄마는 나의 모든 것” 이라고 하면, 엄마는 그만 입이 옆으로 좍 찢어지면서 “옳지. 아이쿠, 똑똑한 내 새끼. 뭐 먹고 싶어? 이 엄마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모두 다 사줄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엄마는 밥을 해주는 사람” 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엄마는 자식에게만은 식모나 식당 아줌마가 아니고 싶다는 말이다. 

◈ 사람들은 무엇에 현혹이 되어서 살아가는가?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이미지를 이 아이가 어디서 가지고 오는고 하니까, 그것이 곧 ‘세상 도안’ 이라는 말이다. 교재 37페이지에서부터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려고 하는데, 즉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에 현혹이 되어서 살아가는가?”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그런데 여기서 제가 왜 성경말씀 이야기를 하다가 이미지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 이렇게 우리가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인간이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누구를 생각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이미지도 만들어내고, 예수님의 이미지도 만들어내고, 교회의 이미지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교회는, 여전히 천국 여행사의 이미지가 !!

그래서 교회가 제 아무리 썩었다고 하더라도, 이 교회의 이미지는 아직도 어떤 이미지인고 하니,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즉 그런 천국행 티켓을 구입할 수 있는 여행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 가려고 하면, 적어도 절에 가면 안 되고, 이 ‘교회’ 라는 여행사를 가야만이 천국으로 간다는 말이다.

제가 왜 하필이면 이 ‘여행사’ 라는 이미지를 사용했는고 하니까, 여행사라는 것은 어떠한가? 특별히 거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그 정보를 얼마든지 활용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대의 젊은 아이들이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이 ‘여행사’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교회에 충성과 봉사를 전혀 하지를 않는데, 물론 헌금도 하지를 않고 말이다. 다만 교회에 가끔 나와줄 테니, 자기들을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 여행사 노릇만 제대로 해달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바램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이미지’가 잘못되면, 제 아무리 성경을 공부해도 !!

그렇다면 하면, 도대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그런 이미지가 형성되었는지, 바로 그것을 한번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가 잘못되었다고 하면, 제 아무리 열심히 성경말씀을 공부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이 세상 도안에 대해서, 즉 이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도안’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제 아무리 거기에 성경말씀을 투입해도,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의 이미지를 정당화하는, 그런 왜곡된 성경해석만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공동체가 어쩌고저쩌고 해도, 그런 것도 다 이미지에 불과한데,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교재 37페이지의 ‘세상 도안’을 다시 살펴보자.

** [세상 도안(圖案)] -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어 … 알지어다” 라는 방식 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런데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심정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해봤자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도 모르게 되어 있고, 자기 자신이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거론하는 것도 제멋대로 임이 뻔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나 몸은 항시 ‘잠잠’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 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나는 도다

◈ 가만히 있어 … 알지어다 !!

이제 정말로 이것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논리가 참 어려운데 말이다. 쉽다고요?(ㅋㅋ)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가만히 있어, 그러면 하나님이 알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자기의 이미지 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 그러면 하나님이 알 것이다” 라는 것조차도 말이다.

그러니 거기에 아무리 성경말씀을 처발라도, 자기 자신이 죄인임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거기에 아무리 성경말씀을 처바르고 덧칠을 해도, 그런 것은 여전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마치 고장난 TV를 제 아무리 열심히 닦고 그 위에 못난이 삼형제 인형을 올려놓아도, 여전히 TV가 나오지 않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가 제 아무리 교회당을 꽃으로 장식을 하고, 인터넷으로 예배시간을 생중계를 하고 홈페이지를 만들고, 그렇게 무엇을 하더라도 복음이 나오지 않는다면, 즉 피 흘리신 주님의 말씀이 없다고 하면, 그런 것은 교회의 이미지 일뿐이지, 즉 교회의 도안일 뿐이지, 거기에서는 전혀 구원의 능력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그런데 나는 왜 복음을 싫어하지?

이제 진짜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따라서 우리가 “아, 그것이 복음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알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말이다. 자기 자신이 곧, 그렇게 예수님을 싫어하고, 십자가를 싫어하고, 복음을 싫어하는 존재로서, 그런 상태에서 아빠 엄마로부터 태어나야만 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들은 왜 그렇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에 싫어하는지 말이다. 물론 우리 자신도 그러한데, 도대체 왜 그러하냐는 말이다. 그것은 다음 시간에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직접 만날 때 우리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화로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죽어도 마땅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흔들리지 않도록, 영원토록 지속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9,19 오후 10시에 마침.

                                                           갑자기 정애가 땡기네. 이미지라도...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