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특강 2009-08-29  고신 화란개혁주의(성화론) vs 십자가(인자의 나라)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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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대구특강 - 리델보스의 ‘하나님 나라’ 2
                                                   2009,08,29  강의, 이근호 목사   녹취, 한윤범 목사
지금 하려는 둘째 시간의 강의가 이해가 안 되면 회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데, 왜냐하면 지금까지 강의한 것 중에서 제일 어려운 시간이 바로 이 둘째 시간이지 싶은데 말입니다. 아까 목사님도 그러한 질문을 했는데, 그 어려운 것을 글로 미리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좋았겠다고 말입니다.
◈ ‘옐름슬레우’에 의하면 !!
사실 지금 강의할 것은 이 논문 2페이지의 관주 2)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있는데, “옐름슬레우에 의하면, 기호는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고, 기능으로 작용하면서 의미가 발생된다고 보았다” 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문장도 엄청 어렵지만 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번 둘째 시간을 시작하겠는데, 먼저 첫째 시간 한 것을 요약해보면, 이렇게 예수님의 몸이 있고, 그 다음에 우리의 몸이 여기에 이렇게 있다고 하면, 사실 우리가 정신, 혹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가 다 우리의 몸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흙에 하나님의 신이 하면 우리의 몸이 만들어진다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 몸은 깨어지고 없어지는데, 나중에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몸이 이미 하늘에 올라감으로 말미암아서, 즉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정보가 담겨있는 우리의 몸도, 결국에는 예수님과 같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으리라는 것입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과연 우리의 몸 안에 예수님 정보가 들어 있는가?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몸 안에 예수님 정보가 들어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이 관건인데, 그런데 예수님의 정보는 예수님의 몸을 가지고 만든 것으로서, 그것은 예수님의 역사이고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정보는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나온 것인데, 그러면 그 공생애는 어디까지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바로 그 십자가와 부활, 승천 등이 다 포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십자가에 있는데, 왜 그런고 하면, 사도바울이 복음과 비복음을 나눌 때 그 기준이 무엇인고 하면, 부활로 나눈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하면서, 즉 십자가로 기준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정보인데, 그런데 그 십자가를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언약의 완성’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교회 - 예수님의 피와 살을 나누는 무리 !!
여기 리델보스의 책에 502페이지에 보면, 이 언약의 완성을 예수님의 피와 살로서 표현했고, 이러한 피와 살을 가지고 그 다음에 교회를 만들 때 어떻게 했는고 하니, 그냥 ‘믿어라’ 라고 한 것이 아니고, 언약적으로 교회가 무엇이냐고 할 때는, 이렇게 예수님의 피와 살을 같이 마시고 먹는 무리, 즉 먹는 집단, 그것을 두고 ‘교회’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예수님의 피와 살에 이르려면 피와 살이 찢어지고 피부 안의 피가 바깥에 나오려고 하면 반드시 어떤 사건이 있어야만 되는데, 그 사건이 곧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모일 때마다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라고 하면서, 그것이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데, 교회는 그것을 반복한다는 말입니다.
(고전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고전 11: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전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십자가 - 예수님 몸과 인간 몸의 차이성의 무한반복 !!
그런데 이렇게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있었던 사건, 즉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반복한다는 것은, 그것은 곧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는 것이고, 그렇게 반복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인간에게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성만찬은 해봐야 전혀 반복이 되지도 않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라는 것이 예수님 몸과 인간 몸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니, 결국은 무엇을 반복하는고 하니, 그 차이됨의 무한 반복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어디까지 계속이 되는고 하니까, 천국에 가서도 되풀이해서 반복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천국에 가서도 어린양의 보좌에서 날마다 찬송하면서, 주님의 몸과 우리 몸과의 차이성을 계속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건 중심으로, 즉 언약 중심이라면 이해가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내 몸이 구원된다” 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느냐 하면, “야, 천당에 왔다. 됐어. 그러니 이제 천당에 가고 싶으면 날 따라와야지 드디어 천당에 다 왔어” 라고 한다면, 마치 풀어놓은 강아지처럼 “이제 니 마음대로 살아. 니가 스타야. 이제 다 왔는데 뭐”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볼 때 자기 몸을 여전히 유지한다고 하면, 결국에는 복음을, 십자가를 아무리 집어넣어도, “목사님, 이 십자가를 믿으면 내 몸이 구원을 받습니까? 만약에 언약을 믿으면 내 몸이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는데, 즉 매일같이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자기 몸 안에 무슨 정보만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 정보만 담겨있어야 되는데, 도대체 누구의 정보가 가득히 들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 로마서 10장의 ‘자기 의’는, 곧 차이성 !!
그것은 바로 “나도 이렇게 했습니다” 라고 하는 자기 공로가, 즉 “나도 교회에 봉사를 했습니다” 라고 하는 자기 공로가, 즉 자기 정보가 가득한데, 그러한 자기 정보는 다른 사람과의 차이성을 낳게 되는데, 그것을 로마서 10장에서는 바로 ‘자기 의’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렇게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간직하는 것, 즉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기도,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냐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그러한 차이를 만들어내는데, 그리고 그것을 되풀이하고 반복하는 겁니다.
◈ 사람들이 왜 기도를 하는가?
사람들이 왜 교회에 가서 기도합니까?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첫째로는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이고, 두 번째로는 “과거에 나는 이러 이러 했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나아졌다” 라고 하는, 자기 자신과의 시간적인 차이, 바로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기도는 이렇게 해야 되는데, “주여, 주님의 정보가, 십자가가, 언약의 완성이 저에게 들이닥침으로 말미암아서, 저는 항상 죄인임을 알게 하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의 정보인 줄 알아야 하는데, 즉 “나는 항상 죄인이고, 주께서는 항상 나를 용서하시는 분인 줄 어느 자리든 깨닫게 하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 기도 외에 다른 기도는 없는데. 물론 주기도문의 내용도 또한 그러한데, 그래서 주기도문은,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내 죄를 용서해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 리델보스는 자꾸만 사람들을 납득시키려고 !!
아무튼 여기 십자가의 사건이, 여기에서 피와 살이 되고, 또한 이것을 같이 먹고 마심으로서 교회가 된다는 것인데, 그것이 이 책 502페이지에 보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리델보스가 성경에 없는 소리를 한 것이 아니고 맞는(?) 소리를 했는데, 그런데 무엇을 자꾸만 구분을 하느냐 하면, 그래도 인간적으로 납득이 되는, 즉 우리들이 기존의 알고 있는 천국과 결합을 시키려는 대목으로, 그렇게 자꾸만 시간적으로 나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교회가 만약에 분리된다면, 그러면 교회에 있는 청년들이나 선교단체는 무엇을 해야 됩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었다” 라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반드시 할 일이 있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땅 끝까지 다스리고 정복하라” 라고 하는, 즉 유명한 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인데, 그렇게. 다스리고 정복하고, 그 다음에 전도해서 구원하자는 것입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인간은, 자기 몸의 확장을 노려 !!
그래서 온 각처에서 그 어떤 직업이든, 교사든, 농부든, 회사원이든, 그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 되게 하도록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자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가라. 아프리카로, 이라크로!” 라고 하는데, 선교비를 책임진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게 뭡니까? 아까 심 목사님이 이야기하듯이, 바로 그것이 진화론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 교재에 보면, “인간은 자기 몸의 확장을 노린다. 자기 몸의 지평을 넓혀간다” 라고 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유토피아, 즉 인간들이 상상하는 천국이라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하늘나라에 확장이 있습니까? 지가 무슨 수제비를 할 것도 아니고, 떡을 늘일 것도 아니고, 피자를 만들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왜 확장을 합니까? 물론 겨자씨 비유를 대면서 “확장하라, 확장하라” 라고 하는데, 그러나 천국은 사이즈가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 사건은 소멸하는 처소 !!
이런 것은 적어놓으면 좋은데, 즉 “사건은 소멸하는 처소이다” 라고 말입니다. 즉 한 점으로서 인자의 있는 자리가 곧 보좌인데, 그 보좌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한 처소, 즉 한 지점에 있다는 겁니다. 그 지점에서는 오직 누구만이 앉아 있는고 하니, 어린양만 거기에 앉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을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만물의 모든 것들이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고, 주님을 위하여,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져서, 모든 것이 주로부터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려 함이라”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소멸되는 한 지점인데, 물론 우리가 지금 여기서 보면 없는 지점이고 말입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지금까지는 둘째 시간의 서론까지를 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둘째 시간 강의를 하려니까, 사실 저도 겁이 나는데, 하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이 어려운 대목을 한번 해보자는 말입니다.
◈ 역사는, 낯선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재조립이 !!
여기에 이렇게 사건층이 있고, 또한 역사층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그런데 사건이 그만 역사에 개입을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역사는 그만 뒤틀리게 된다는 겁니다. 즉 역사는 낯선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재조립이 된다는 겁니다. 재조립이 말입니다.
왜 이전에 수련회를 할 때 그런 가슴 아픈 이야기를 했는데, 아빠 엄마와 같이 바다에 낚시를 갔다가 그만 사고로 둘 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서, 그 아이는 졸지에 서울대학교를 준비하는 고3 수험생의 신분에서 졸지에 고아가 되어서 공장에 취직을 해야만 했다고 말입니다. 자기는 분명히 서울대학에 가려고 했는데, 그런데 낯선 사건이, 즉 아빠와 엄마가 돌아가게 한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자신의 미래가 다시 재조립이 되면서, “나는 공장에 가서 열심히 일해야지”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죽었다고 하던 엄마는 수영선수 출신이 되어서, 바다에서 헤엄을 쳐서 나오다가 그만 바위에 부딪쳐 기억을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엄마가 사업에 성공을 하고 다시 기억을 되찾았는데, 알고 보니 자기 아들이 자기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다시 그 아들은 재벌 2세가 되었다고 하는,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이지만 말입니다(ㅋㅋ).
아무튼 이렇게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역사에 균열이, 즉 깨어진다는 겁니다. 무엇이 깨어집니까? 지금까지 자기에게 주어졌던 의미가 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메섹에서 사울이란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난 뒤의 모습인데, 그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의미가 완전히 다 깨어졌다는 겁니다. 즉 자기 중심으로 있다가, 그만 졸지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는, 완전히 중심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
그렇게 되면, 철저하게 내 몸 중심의 역사 속에 무엇이 흘러 들어오는고 하면, 마치 은하철도 999가 주인공 철이와 늘씬하고 아름다운 메텔과 괴상한 차림의 차장이, 과거 일제시대 때에 개를 잡던 만주사람의 복장을 하고서(ㅋㅋ), 나의 역사 속으로 마구 쳐들어온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은하철도999가 이 인간의 역사 속에 파고 들어오면, 지금까지 나의 과거는 흘러오다가 무엇과 접속이 되는고 하면, 위에서 내려오는 주님의 몸의 역사와 결합이 되면서, 그래서 앞으로의 모든 역사는 나의 역사는 다 사라지고 누구의 역사로만 이전이 되는고 하니, 이제는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몸으로서 이뤄지는 은하철도 999가 달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사람들이 아는데, 그런데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바로 그것, 즉 “은하철도 999가 이렇게 달리는구나” 라고 생각한 것은,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의 몸이 생각하는 또한 나의 역사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주님의 역사가 아닌, 나의 역사가 말입니다.
◈ 아니, 은하철도 999도 나의 역사로 !! 
이런 부분이 정말 어려운데, 즉 “은하철도 999가 나를 관통해서 이제는 소급해서 과거와 미래까지 주께서 인도하는구나. 그러면 앞으로는 이렇게 인도하시겠지” 라고 생각했다면, 그 다음에 터지는 십자가 사건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십자가 사건은 계속 반복되니까, “그것도 역시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새롭게 조립된 우아한 나만의 괜찮은 간증이고 역사였다” 라고, 즉 그것도 죄라고 하면서, 역시 박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 “목사님, 우리보고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걱정을 하들들 말고 그냥 맡기라는 겁니다. 앞으로도 사건이 여럿이 남아있는데, 물론 각자에게 무슨 사건이 있을지 우리는 전혀 모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고마운 것은, 그것이 그 어떤 사건이든지 간에 소멸되는 하나의 지점에, 하나의 처소에, 즉 전부가 다 인자가 되시는 분이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고 하는, 즉 모든 것은 이미 다 용서가 되었다고 하는, 그러니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이미 다 용서된 상태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즐겁고도 행복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A’ 라는 지점에서 은하철도 999가 이렇게 관통하고 난 뒤에, 나는 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삼 년 정도가 지나고 난 뒤에, 즉 이것이 이미 어느 정도 역사화가 된 뒤에, 그 역사를 다시 깨기 위한 사건 층이 또 떨어지니까, 즉 기존의 것이 깨지고 새로운 몰랐던 또 다른 내가 몰랐던 은하철도 999가 와서, 또 다시 나를 또 관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 사건의 층에서는 오직 사건들만 !!
그렇다면 이 사건층에서는 따로 은하철도 999의 묵시의 흐름이 있습니까? 아니면 사건들만 있습니까? 누가 답변을 한번 해보세요. ①사건들만 있다. ②나름대로의 역사의 흐름이 있다. 여기서 과연 몇 번입니까? 항상 정답이 2번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건이었는데(ㅋㅋ), 이번 정답은 1번인데,. 거기는 오직 사건들만이 있다는 말입니다. 
왜 사건들만 있느냐 하면, 제 아무리 사건이 우리 속에 개입을 해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 몸에서 주체라는 것은 버리지 않는데, 즉 ‘나’ 중심을 버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고 했을 때, 우리 인간은 여기서 ‘나’ 라는 말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아무리 괜찮은(?) 사건들을 일으켜서 우리를 구원해도, 우리는 며칠을 못 가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면서, 그만 또 다시 ‘나’를 끼워 넣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렇게 사건 덩어리가 있는데, 이 사건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주체가 되어서 사건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또 다시 사건을 일으켜버리는데, 그 사건을 ‘나’ 라는 주체가 이해를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체가 되어야지 말입니다. 그렇지요?
◈ 역사층에서 ‘의미’의 주체는 누구인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그래도 쉬운 편에 속하는데, 지금부터 어려운 이야기할 테니까, 조금 어렵더라도 참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위에는 묵시의 세계가 있다면, 이렇게 아래층인 역사층에서 ‘의미’가 있는데, 그런데 그 의미의 주체가 누구인고 하면, “내가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즉 ‘나’ 라는 것이 있기에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장로님이 집에서 수박을 먹을 때, 장로님이 혼자 먹으면서 “이 목사, 수박이 맛있는 걸 니가 알아?” 라고 한다면, 그러면 저는 분명히 그 수박을 먹는 주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저는 수박을 먹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수박 맛을 먹지 않는 남이 압니까? 모릅니까? 당연히 모르는데, 그것이 바로 ‘주체’ 라는 말입니다.
◈ 오잉, 둔스 스코투스?
‘둔스 스코투스’ 라는, 루터가 활동하기 직전의 신학자인데 말입니다. 그가 주장한 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즉 “하나님 한 분 밑에 어떻게 남이 모르는 어떤 개별자가 등장하는가?” 라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는 겁니다. 여기 교재 관주 3)의 ‘영혼론’에 보면 그것이 나오는데, 거기에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이야기도 나오고 말입니다.
◈ 하나님은 분명 하나인데, 왜 각자가 또 하나인가?
무슨 말인고 하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면서도, 만약에 하나님이 하나라고 하면, 적어도 형제간 정도는 다 알아야 되는데, 그런데 어떻게 동생이 지난밤에 무슨 짓을 했는지 형이 모를까? 즉 하나님은 하나인데, 왜 각자가 그렇게 하나가 생겼는가?” 라는 문제를 다룬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스코투스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 놈들아, 각자 하나 하나가 다 신으로 알아라” 라고 말입니다. 그때부터 주체사상이 ‘확’ 하고 다가온다는 겁니다.
◈ 아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신랑은 구원을 왜 받지 못하는가?
예를 들어서,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정 목사님이 구원을 받습니까? 아니지요.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리고 정 목사님이 예수님을 믿으면 정 목사님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정 목사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왜 되지를 않는지, 바로 그런 것을 따진다는 겁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렇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어떤 분은, “목사님이 믿으면 저도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불신자는, “당신은 교회에 가라. 그래서 나도 당신 덕분에 천당에 한번 가보자” 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불교에서나 하는 이야기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남편이 아무리 잘 믿어도, 아내가 안 믿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오 목사님, 아시죠? (그 반대로 물어야 할 것 같은데, 즉 “사모님이 아무리 잘 믿어도 비록 남편이 목사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오 목사님, 맞지요?” 라고 말입니다. ㅋㅋ) 
◈ 스피노자 - 한 사람이 믿으면 둘이 효과를 볼 수 있다 ??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신학공부를 하면서 왜 그런지 물어보지 않았습니까? 참 이게 사실 골치가 아프고 어려운 문제인데, 왜 한 사람이 믿으면 둘이 안 되느냐는 겁니다. 소위 일석이조가 말입니다. 그런데 용감하게(?) 된다고 한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이 믿으면 다른 사람에 영향을 준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누구인고 하면, 그 유명한 ‘스피노자’ 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수박이 있는데, 스피노자는 여기에 있는 이 파란 부분이 하나님이고, 또한 빨간 부분이 우리 자신들이라고 한다면, 여기 파란 부분을 흔들면, 그런데 이것이 만약에 액체라든지 끈이라고 한다면, 빨간 부분은 자기가 흔들리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다같이 흔들리게 된다는 겁니다.
◈ 아니, 성령의 은사론도 스피노자가?
그러므로 성도가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된다는 말인데, 그것이 곧 스피노자의 이론이라는 겁니다. 이 스피노자의 이론이 개혁주의에서 주장하는 성령의 은사론과 똑같지 않습니까? 놀랍게도 같은데, 그러니 개핀 교수가 아무리 성령의 은사론을 이야기하고, 개혁주의에서 성령의 은사론 언급해도, 이미 그것을 철학에서 스피노자가 이야기를 다 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실 더 이상 할 것이 없는데, 하지만 신학자들이 철학공부를 제대로 하지를 않으니까, 마치 철학자들은 지옥에 가고, 자기들은 천당에 가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데, 하지만 스피노자가 이미 자기들이 하는 이야기를 다 해버렸다는 겁니다. 
마치 뱀 꼬리를 흔들면 머리도 흔들리듯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흔들어대니 그 파동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왜 영화 ‘해운대’를 보면, 파도가 치니까 해변까지 밀리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이쪽에서 흔들면, 저쪽에서도 흔들리니까, 즉 “우리는 헤어진 관계가 아니고 하나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안 믿어도 모든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이기도한데, 다만 그들이 여호와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이런 여호와의 증인이나 신천지와 같은 곳을 보면, ‘144,000’ 이라는 ‘TO’ 때문에 그들이 바짝 긴장을 해서 전도를 해야만 되고, 또한 교회에 돈을 바쳐야 되고,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임원까지는 안 되도 구원은 받는다고 하는데, 여호와의 증인이나 신천지는 아예 천국은 없으니 말입니다.
◈ 이제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으로 !!
아무튼 그것이 전부가 다 스피노자의 아이디어에서, 즉 인간들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가 둘이 되는가?” 라는 것인데, 이제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에 들어가겠는데, 아직 어려운 것은 근처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일단 층을 나누어보면, 먼저 하나의 층은 영적 세계인데, 이것을 말씀의 완성이라고 하고, 그 밑에는 육의 세계인데, 즉 역사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육의 세계, 즉 역사 세계에서는 어떠한고 하니까, 내가 내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하더라도 한다는 말입니다.
◈ 야, 수박이 맛있네 !!
예를 들어서, 장로님이 혼자서 수박을 잡술 때는 그 수박 맛을 장로님은 알고 있는데, 바로 그것을 가지고 “나만의 의미가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야, 이 수박 맛이 괜찮다” 라고 했다고 하면, 하지만 저는 아직까지 수박을 먹어보지를 않았으니 그 수박 맛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장로님 입에 들어가는 것을 빼앗아 먹을 수도 없고 말입니다(ㅋㅋ).
그런데 장로님이 배가 좀 불러서(?) “이제 목사님도 좀 잡수어 보시지요?” 라고 해서, 제가 얼른 먹었는데, 그래서 저도 “야, 맛있네” 라고 했다면,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과연 장로님이 말하는 ‘맛있네’ 라는 것과 제가 말하는 ‘맛있네’ 라는 것하고, 과연 서로가 다같은 ‘맛있네’ 라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우리 각자의 이 몸의 개별성이 있는 한, 목사가 아무리 “여러분, 믿습니까?” 라고 해도, 그래서 교인들이 “예, 믿습니다” 라고 해도, 그러게 백날 믿는다고 해도, 목사가 믿는 것과 교인들이 믿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말입니다. 교인이 백 명이라면 백 명이 모두 다르다는 겁니다. 즉 모두가 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의미층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의미가 나왔느냐고 묻는다면, 즉 “내가 꽃이라고 불러줌으로서 비로소 나에게 의미가 된다” 라는 겁니다. 김춘수가 이 ‘꽃’을 출판해서 히트를 쳤는데, 그런데 그런데 꽃은 평소에는 늘 무관심했는데, 어느 날 꽃이라고 이름을 불러주니까 비로소 하나의 의미가 된다는 말입니다. 남에게 말인가요? 남이 아니라, 나에게만 의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 내가 나를 의식하는 자체가 모든 죄의 근원 !!
그렇다면 지금 무엇이 문제이지요? 내가 나를 의식하는 자체가 모든 죄의 근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인 줄로 알면서도, 인간은 누구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합니까? 때려죽여도 ‘나’ 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니, 내가 나를 잊다니,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겁니다. 어떻게 내가 나를 잊을 수가 있습니까? 나는 나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그렇게 아무리 의심을 해도, 나를 의심하는 나를 결코 의심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주장인데, 즉 어떻게 내가 나를 잊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나는 건망증이 왜 이렇게 심해?” 라고 한다면, 그렇게 자기가 건망증이 제 아무리 심하다고 해도, 건망증이 심한 사람이 남이 아니고 ‘나’ 라는 사실만은, 그것은 건망증에 걸려있는 가운데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누구에게만 의미가 있나요? 나에게만 의미가 있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하나님을 20년 동안 믿다가 어느 순간인가 그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과연 그 하나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명히 없는 하나님이 되고 마는데, 왜 그런가요? 내가 쥐고 있는 하나님을 내가 그만 놔버리니 말입니다.
◈ 나는 이제부터 예수님을 안 믿습니다 ??
마치 어떤 분의 용감한 고백처럼, “나는 이제부터 예수님을 안 믿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고백은 사실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왜 그런가요? 그 사람이 이틀 뒤에 다시 예수님을 믿는다고 나올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자기가 하나님을 안 믿고 천당에 안 간다고 하는, 즉 “나는 여기 대추밭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하나님과 예수는 안 믿는다. 이제 빠이빠이!” 라고 해도, 하지만 그것이 사실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의미는 위층에서 분배하기 나름이니 말입니다.
◈ 성도에게는, 위층과 아래층의 의미가 다 함께 주어져 !!
그렇게 위층에서 의미를 줄 때, 비로소 아래층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두 개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하나는 “나는 나밖에 모른다” 라는 의미와, 또 하나는 그렇게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구원하셨던 돌발적인 사태, 즉 주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을 아는, 즉 모든 일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의 중심은 예수님 중심으로, 즉 “아하,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는구나” 라는 사실, 바로 그러한 두 가지의 의미를 함께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100% 라는 겁니다. 즉 100% 신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 중에서 누군가가 “목사님, 전에도 그런 의미가 있었는데, 그런데 그만 그 의미를 모두 잊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질문을 하신다면,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곧 나의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 뜻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그동안 잘 믿다가 어느 순간에 가서 안 믿게 되면, 그러면 저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묻는 물음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나의 몸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연이란 말은, 끝장이 나야만 비로소 그 인연이 어떠한지를 아는 것처럼, 그렇게 마지막에 가서야 안다는 말입니다.
◈ 의미, 질료, 재료, 기능, 구조, 표현, 내용 !!
그렇다면 이 의미에 있어서, 이 의미를 질료라고 한다면, 이 질료란 말이 어려워서 편의상 재료라고 하면, 아무튼 여기에 이렇게 ‘의미’ 라는 재료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땅에 있던 하늘에 있던 간에, 이 의미라고 하는 것은 재료가 있고, 또한 그 재료가 감당하는 기능이 있는데, 그런 기능들이 모아져서 구조를 이루고, 바로 그 구조를 두고 ‘표현’ 이라고 하고, 또한 그 재료를 두고는 ‘내용 ’이라고 하는 겁니다. 옐룸슬레우의 이론에 의하면 말입니다. 
◈ 다니엘서의 경우에 !!
그러한 입장에서 이 다니엘서에 보면, 거기에 ‘이레’ 라고 나오는데, 이 이레가 7년인데, 즉 “1+1+1+1+1+1+1”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1년’은 ‘내용’이 되고, 이렇게 “1+1+1+1+1+1+1”로 뭉쳐진 것은 바로 이레의 ‘표현’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 있는 이 표현과 내용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이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이레, 즉 7년이라는 것이 또 다시 내용이 되어버리고, 그리고 나서 표현이 되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 “주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심” 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곧 표현이 된다는 것입니다.
 
◈ 목사님, 너무 디피컬트해요 !!
제가 미리 어렵다고 했는데, 그러면 아마 “그렇게 어려우면 목사님이 쉽게 설명해줘야 할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물론 마음속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다들 자식이 있을 것인데, 없는 사람은 좀 양해를 하시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만약에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되면 그 아이는 졸지에 환자가 되고 마는데, 그래서 병원해서 가면 “000 환자 분, 들어오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가 학교에 가면 어떻게 됩니까? 학생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표현’ 이라고 하는 것은, 단독적으로 어떠하다고 규정을 짓지 못하는데, 즉 “내 아이는 이렇다” 라고 말입니다. 그 아이가 어느 장소, 혹은 어느 공간에 존재하느냐에 따라서, 그때 그때마다 의미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여기서는 자식을 예로 들었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고 말입니다.
◈ 아, 닭보다 못한 베드로 !!
이왕 시작을 했으니 내일 설교할 것 미리 지금 한번 해보면,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가 예수님을 버렸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버리기 이전에 예수님이 함께 있을 때는, 예수님 안에서 자기 존재는 반석이고 수제자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예수님과 결별하고, 어린 소녀와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 사이에, 그런 분위기에 있을 때, 그때 베드로는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그런데 그런 표현으로서 누가 사용을 했습니까? 말씀으로 주께서 그렇게 사용을 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열심히(?) 예수님을 배반하고 있는데, 그런데 옆에서 갑자기 어디서 닭이 두 번이나 울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베드로는 뭡니까? “나는 배신자요,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 라는 의미로서 존재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닭이 울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 닭은 어느 계열입니까? 즉 닭이 운다는 것은 묵시적 사건의 계열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묵시적 사건 계열에서, 즉 “예수님이 말씀이 응해서 닭이 울리라” 라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 닭이 그만 베드로의 인생에 개입하니, 이제는 내가 예수를 미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적응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말씀대로 순종했던 닭 앞에서 베드로는 새로운 자아가 발생되면서, 그만 어떻게 되는고 하니, 자기는 죄인이며 또한 배신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베드로는 울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 천국은, 오직 예수님의 정보만 !!
그렇다면 베드로가 그렇게 우는 것은 누구의 표현입니까? 물론 베드로 자신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께서 말씀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 즉 말씀의 표현이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말씀의 표현을 가지고, 이제 예수님의 정보가 누구 안에 들어있다는 것입니까?
이제는 예수님의 정보가 베드로에게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베드로는 빼도 박도 못하고 예수님의 정보의 나라에 가게 되는데, 자기 의사가 아니라 자기 안에 들어있는 정보 때문에 말입니다. 바로 그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킹덤, 즉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렇게 해서 베드로는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정보가 가득한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사건의 집합인데, 거기에는 개인적인 역사가 있어서는 전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절대로 개인적인 역사는 용서가 안 되다는 겁니다.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그런 것은 전혀 필요가 없는데, 오로지 “어떤 사건이 너에게 도착해서, 너로 하여금 집어내었는가?” 라고 하는, 바로 그 정보, 즉 예수님의 정보만 들어있는데, 바로 이 예수님의 정보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 니들이 ‘죄’를 알어 ??
그래서 이 십자가를 분해하면 예수님의 살과 피가 들어있는데,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주어질 때, 우리는 십자가 앞에 무엇이 되는고 하면, 언제나 죄인이 되고, 그러한 죄는 예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전혀 알 수가 없고 감도 잡을 수가 없는, 그런 독특한 사건으로서의 ‘죄’ 라는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편하기가 짝이 없는데, 왜 그런가요? 우리가 지금 배추밭에, 아니 대추밭에 있다가 집에 가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뭡니까? 마누라가 목욕을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나의 죄가 나를 기다린다고 하는 그 엄청난 즐거움(?), 즉 내가 지은 죄가 오늘밤에 한껏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즐거움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이미 벗어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 죄인이 아닌, 착함으로 만나려고 하니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착해지려고 하니까, 우리의 인생이 그만 고롭고 또 고롭다는 겁니다. 그렇게 내가 착해지려고 한다는 것은, 나의 착한 과거와 더 착한 미래를, 즉 나만의 차이를 주장하려 하니 그만큼 더 힘이 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해도 죄임을 알아야 하는데, 강의해도 죄고, 설교해도 죄고, 모든 것이 다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라고 하는 보편적인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십자가라는 사건이 우리에게 터져 버렸으니까, 그때는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무엇으로 만납니까? 잘난 사람과 덜 잘난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와 괴수의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서로가 또 괴수라고 우기는 것이 십자가 마을인데, 특히 이상규 집사님이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정낙원 목사님은, “나는 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서로가 더 죄인이 못 되어서 그야말로 환장했는데,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서로 우기지 않아도 모두가 다 죄인이니 말입니다.
마치 코미디 프로에 ‘어흠’으로 시작하는 양반 인사처럼, 왜 옛날에 구봉서가 나와서 서로 엎드려서 머리를 맞추고, 그렇게 서로 겸손하다고 폼을 잡는 코너인데, 혹시 기억이 납니까? 사실 그것은 절에서 잘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부흥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부족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돈은 다 챙기는데, 그 돈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자기가 부족한 값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 위에는 무지개가, 밑에는 피가 떴는데 !!
아무튼 표현과 내용은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데, 그것을 설명한다고 제가 이 글 앞에 그 어려운 노아홍수에 대해서 설명을 했는데, 즉 “위에는 무지개가 떴고, 밑에는 피가 떴다” 라고 말입니다. 그때 당시에 무지개가 떴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제 비가 오면 죽었구나” 라는 것인데, 왜 그런가요? 이미 홍수를 만나서 시껍을(혼줄이?) 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아버지, 또 비가 옵니다” 라고 하면, 아버지는 “우린 이제 죽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곧 그렇게 비가 오면 죽음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날이 개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즉 자식이 “아버지, 날이 개었습니다” 라고 하면, 아버지는 “휴, 이제 살았구나”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날이 갠 것을 은혜로 여기는 사람은 그때 그 사람들밖에 없었는데, 요즘은 매일같이 날씨가 맑아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하지만 한번 된통 호되게 당한 자들은, 즉 몇 개월 동안이나 비를 맞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 비가 오는 것을 저주로 느낀 사람들은 그 당시 사람들밖에 없었고, 비가 개인 것을 축복으로 여긴 자들도 역시 그들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 무지개 - 물은 막아주는데, 그 대신 땅에 피는 흘리지 마 !!
그러한 비가 옴과 비가 갬의 중간에 바로 무지개가 위치해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가 이제 막아줄게. 물로 조지는 것은 내가 막아줄게.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다. 그 조건이 뭔고 하니까, 땅을 봐라. 그 땅에 누구든지 의로운 자의 피를 흘리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창 9:5)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창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 드디어 종말이 !!
여기서 제가 ‘의로운’ 이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은, 성경에는 없는데 말입니다. 그 뒤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는 피를 내는데, 그러니까 무조건 피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고, 또 소를 잡으려다가 피를 낸다는 겁니다. 즉 인간들이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흘린 피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고, 즉 무지개를 철수하겠다는 겁니다. 즉 은혜를 철수하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의로운 피는 결국에는 누구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인데, 즉 예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다 죄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서 무엇이 철수하는고 하니, 드디어 “인간 세계는 종말이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은혜가 철수하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종말에서 과연 구원받을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데, 그런데 만약에 있다고 하면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묵시가 되는, 즉 인자가 되는 분이 대신해서 모든 저주를 다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너를 긍휼이 여겨줄게. 너를 용서해줄게” 라고 해서, 바로 그러한 사건의 필이 꽂힐 때, 그렇게 꽂힌 사람은 성령이 옴으로 말미암아서, 역사적 성경해석이라든지, 역사적 말씀순종과 같은 그런 모든 자기 의를, 그런 모든 것은 다 무(無)로 돌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직 그러한 ‘무’ 위에 무엇만을 남기는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용서했던 바로 그 용서하심의 정보, 즉 예수님의 사랑의 정보만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런 사람이 바로 누가 뭐라고 해도 구원받는 주님의 백성이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정보가 묻어있는 자가 말입니다. 
◈ ‘무(無)’로 돌리는 용어가, 곧 ‘7이레’
여기서 제가 방금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무’ 라고 했는데, 즉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데, 그렇게 무로 돌리는 단위가 무엇인고 하니, 곧 ‘7이레’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을 무로 돌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제가 지금부터 설명을 해보겠는데, 이 둘째 시간이 너무 어려우면, 녹화도 되고 녹음이 됐기 때문에 되풀이해서 보라는 겁니다. 한꺼번에 다 알려고 하면 힘이 드니 말입니다. 
◈ 하나님의 창조는 왜 ‘7일’ 인가?
창세기 1장과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1장에서 창조를 며칠만에 합니까? 6일입니까? 7일입니까? 분명히 저는 창조를 7일 동안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데 창세기 1장에 보면 창조를 며칠만에 끝내버립니까? 분명히 6일 만에 끝을 내는데, 그런데 이렇게 6일 만에 끝내버리면, 이 창조의 의미는 역사에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는 겁니다. 의미가 말입니다.
지금 이해가 영 되지 않는다는 표정들인데, 왜 내용이 있고 표현이 있다고 했잖아요? 만약에 6일 만에 다해버리면 무엇만 있는고 하니, 내용만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를 했습니까? 즉 표현은 어디에서 결정이 나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7일, 즉 위에 올라가야 되는데, 그렇게 위로 올라가면 거기에 ‘안식일’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 아직까지 안식의 때가 남아있으니 !!
다시 말해서, 안식일이 표현의 층인 위층으로 올라가 버리면, 이 지상에서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안식의 표현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에 보면, “아직까지 안식의 때가 남아있다. 그러니 무엇을 믿는고 하니, 묵시를 믿어라. 모든 것은 완성된 상태에 이른다” 라고 말입니다.
(히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
(히 4: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
(히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아직 아래층에서는 온갖 사건들이 그대로 !!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그렇게 완성이 되었다는 말은, 이 안식이라는 것이 위의 표현층에서는 그 내용이 이미 완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이 표현층만 떼어버리면 이 밑에 세계에서는 자체적으로 완성이 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여기 밑에는 아직 선악과를 따먹는 죄도 있고, 또 에덴동산에는 뱀이 있어서 그 뱀 안에는 마귀가 들어와서 후작질을(?) 해서 저주를 받고, 또한 아담이 부름을 받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는 에서는 야곱하고 서로 싸우고,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고, 성전은 깨지고, 그렇게 온갖 긴긴 역사가 다 여기 이 밑에 층에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놓고, 나중에는 배신을 때리고, 그렇게 온갖 것들이 다 있다는 말입니다. 
◈ 죄는, 그 자체로 의미를 끄집어내는데 !!
하지만 그렇게 온갖 것들이 여기 밑에는 다 있더라도, 그 자체는 죄니까 죄는 그냥 가만히 있는데, 즉 죄는 그 자체로 의미를 끄집어낸다는 겁니다. 즉 “주여,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 니가 어때서? - 제가 예수님을 믿는데도 몸이 아프잖아요. - 그게 뭐 어때서?”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욥과 같은 경우에는 어떠합니까? “하나님, 왜 제 아들을 죽였습니까? - 그게 뭐 어때서? - 왜 저의 재산들이 그냥 날아갑니까? - 그게 뭐 어때서? - 왜 저에게 이런 고난을 줍니까? - 그게 뭐 어때서?” 라고, 그렇게 표현이 되어서 날아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런데 욥아, 내가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는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그것도 모르면서 까불기는, 저리 꺼져”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 의미를 고수하고 !!
그러니까 이 표현층에, 즉 하늘나라의 의미층에 올라가기 이전까지는, 인간은 누구 중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자기 역사 중심의 의미를 계속해서 고수하면서, “주여, 못 살겠습니다. 괴롭습니다. 응답해주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무슨 응답인데?” 라고 하면, “예, 제가 괴롭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다시 “그래? 그래서 내가 죄인을 구하러 왔다” 라고 하면, 또 인간은 “그러면 제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하니, 인간들은 그러한 주님의 말씀을 무엇으로 잡아당깁니까? “야, 그러면 나는 이제 죽어도 사는구나” 라고 하면서, 또 다시 일방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의미로서 끌어당겨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고, 물론 그것이 이 세상 역사의 형편이란 말입니다.
◈ 아, 찐한 대추차라도 한 잔 !!
지금 야외에서 이렇게 강의를 계속해서 하다보니 목이 아파서 엄청 힘이 드는데, 이 넓은 대추밭에서 대추차도 한 잔 없고 말입니다(ㅋㅋ). 그래도 계속해서 해야만 되겠지요? 왜냐하면, 아직 안식의 때가 남아있으니까 말입니다.
 
◈ 창세기 2장부터, 십자가 사건의 반복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창세기 2장부터 이미 이 세상은 7일의 반복이 아닌데, 그건 유대인들이 그렇게 반복이라고 주장을 했고 말입니다. 그러면 무슨 반복입니까? 그것은 곧 위에서의 반복인데, 그러면 이 안식일에서는 무엇이 반복이 됩니까? 그것은 사건과 사건의 반복, 즉 위층과 아래층의 차이의 반복이고, 그것이 곧 십자가 사건의 반복인데, 즉 묵시적 사건의 반복이 지상에 퍽퍽 터진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애굽에 잡혀갔다가 홍해에서 터지는 사건, 또한 홍해에서 터지다가 천당인 줄 알았더니만 그만 광야에 고생하는 사건과 사건들, 그렇게 계속해서 사건들이 주면서 자꾸만 무슨 정보를 주는고 하니, 하늘에 있는 안식의 정보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처음에 창조할 때 왜 안식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안식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람을 만드는 것은 창조의 대상이 되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의 대상입니까? 아닙니까? 창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의 주체인데, 그러니 창조의 주체가 인간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 천국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나라 !!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이 무엇을 한다는 말입니까? 창세기 3장 15절 이후의 모든 인류의 역사를 누가 주관한다는 말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께서 주관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정보는 무슨 정보인고 하니, 아까 이야기한 예수님의 정보인데, 그래서 천국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나라였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정보 안에 아버지께 바칠 그것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철저하게 자기 몸 위주인데,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성자보다는 성부가 더 오야붕이잖아” 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게 이야기할 입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만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진다는 겁니다. 즉 “아버지에게 나라를 바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는 전문가인데, 그러니 이제 그런 예수님을 믿었으니, 예수님은 이제 그만 비켜주시고, 나는 십자가에 머물지 않고, 이제 십자가 이후에 진짜 하나님을 섬길 거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니까 또 죄를 짓는다는 말입니다.
◈ 리델보스님, 구원을 받았는데, 그런데 또 죄를 ??
그래서 “리델보스님,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성령을 받았는데, 그런데 또 죄를 지었어요. 그러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자기 몸을 주장하니까, 리델보스 선생님이 하는 말씀이, “이미와 아직이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려. 긴장관계야. 알겠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 알았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면, “앞으로 점점 더 성화가 되어야지” 라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곧 성화론인데, 그러니 인간들이 이 성화론에 환장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성화가 되었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니 성화 5단계, 6단계로 마구 올라가는데, 그런데 7단계에서 그만 1단계의 죄가 또 나오는데. 그래서 다시 리델보스에게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면, “그것은 크게 회개를 해야지. 한꺼번에 회개하려면 돈이 많이 들걸? 그러니 봉사를 많이 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도 역시 자기 진화론인데, 그러니 그 의미는 무엇인가요? 자기가 구원을 받는, 자기의 일방적인 자기 의미고, 곧 자기 역사라는 말입니다.
◈ 또, 누가누가 잘하나 ??
그러니 이런 것은 교회 내에 경쟁이 발생하게 되는데, 즉 “누가누가 잘하나?” 라고 말입니다. 마치 금요일 오후 4시에 KBS1에서 노래자랑을 하는 것과 같은데, 아니 세상에서 날마다 모두가 다 죄인인데 “누가누가 잘하나?” 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체적으로 자기 내용과 표현을, 즉 자기만의 표현을 또 다시 시도한 겁니다. 
◈ 그러면 어떻게 표현적 의미가 나의 의미로?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목사님, 신학에서 이런 묵시적인 표현적 의미를 어떻게 우리의 의미로 당겨놓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이 묵시가, 즉 ‘인자 같은 이’가 이제는 ‘인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총괄적인 의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그 시점을 두고서 종말, 즉 마지막 때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다니엘서의 마지막 때는?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러면 다니엘서의 마지막 때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상으로서, 즉 다니엘서 2장에 보면 금신상으로 되어 있는데, 그런데 그 금신상이 그만 자빠졌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꽈당’ 하고 자빠지니까, 머리는 이렇게 있고, 여기 발 지점이 바로 종말지점, 즉 끝 지점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끝 지점의 우상을 덮은 것이, 조그만 돌멩이가 하나 날아왔는데, 그런데 그 돌멩이가 커서 태산이 되어서 우상을 다 덮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래층은 역사층이 되고, 위층은 인자층(?)이 된다는 겁니다. 혹은 태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태산은 사실 중국에 있는 산인데, 아무튼 성경에서 태산을 이룬다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이 묵시층이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다니엘서에서 보는 계시가 무엇입니까? 즉 세상은 틈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질문하는 제가 나쁜데(ㅋㅋ),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바벨론 제국과 하늘나라에 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즉 역사라는 직선으로 보면, 바벨론 멸망이 BC500년경이고, 예수님이 오신 때가 BC4년경이라면, 몇 년의 차이가 나는고 하니, 약 500년 정도인데, 그런데 그것을 위에서 보면 어떠합니까? 차이가, 즉 틈이 없는데, 그래서 지혜가(?) 이때 마구 온다는 겁니다. 사건으로 말입니다.
(단 2:27) 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물으신 바 은밀한 것은 박사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장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으되
(단 2: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단 2:29) 왕이여 왕이 침상에 나아가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
(단 2:30)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단 2: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단 2:32)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단 2:33)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단 2:34)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단 2: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 성령께서 예수님의 정보를 우리 몸에 심어주면, 끝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위로 들어갑니까? 위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발이 있는 끝으로 해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발을 통해서 들어가려니 우리의 수명은 너무 짧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려면 역사의 끝 날까지 살아야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 들어가면 되는데(?), 물론 성령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바로 들어가게 되면, 우리 수명이 칠십이든 팔십이든 간에, 아니면 10년이 되든지 간에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굳이 오래 살려고 몸부림을 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몽땅 다 이삿짐을 챙기듯 해서 몽땅 다 가지고 우리 몸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몸을 묵시의 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즉 우리의 몸을 예수님의 정보를 담을 껍데기기로 삼아서, 그렇게 해서 우리 몸 속에 들어와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들어온 묵시의 의미로 인하여, 우리는 날마다 죄인이 되고, 주님은 날마다 용서하시는 분으로서, 그렇게 우리 안에 있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님의 통치이고, 예수님의 통치이고, 또한 ‘인자의 통치’ 라는 것입니다.
이제 10분만 쉬고 하겠습니다.

                                         2009,10,06 오후 11시 26분에 다시 정리함. - 녹취 ‘구‘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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