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강의 2009-10-05  피 11강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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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091005피p040아담아네가어디있느냐

피11강 나의 자리

[09 대구강의 16] - [피 11]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09,10,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아담 선배님, 어디 계셔요?

오늘은 교재 40페이지 ‘나의 자리’를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살펴보겠는데, 일단 교재를 보자.

** 신을 빙자한 인간학이며 곧 자기학(自己學)이다. 이러한 자기학 속에 신을 포섭해서 집어넣는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을 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로서 구원받은 자다운 삶을 그 이후에 지속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올바른 교회를 이울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이렇게 묻는 물음 속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내가’ 라는 것이 들어있다. 자기학에 대한 우직스러운 신뢰심의 발로이다.

◈ 성경엔, 언제나 두 가지 질문만 !!

이렇게 인간은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데, 성경에 보면 그 질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내가 하는 질문”이 있고, 둘째는 “하나님이 하시는 질문”이 있다는 말이다. 성경에는 이렇게 두 가지 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하는 질문은 자기가 답을 알고 있는데,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확인작업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하는 질문은 이미 답을 짐작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 쪽에서 공감을 하는 쪽으로 확인을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는가?” 라고 했을 때, 아담은 뭐라고 대답을 했는가? “예, 제가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좀 동의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흔히 ‘기도’ 라고 하는데, 즉 인간이 신에게 하는 질문을 두고 말이다.

◈ 근호야,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두 번째인데, 즉 하나님이 하시는 질문이 말이다.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는가?” 라고 질문을 하시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질문을 하면서, 그 답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 질문의 의도를 알고 있는지, 그것을 묻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질문 자체가 말이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질문은 우리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 이라고 하는 이 세상구조 전체에 대해서, 즉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질문은 하나밖에 없는데,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는가?” 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그 질문의 틀을 벗어난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아담에게 묻는 것이니 말이다.

◈ 너 자신을 알라 ??

과거 창세기 3장의 그 아담이 바로 우리들의 영원한(?) 선배인데, 우리는 그 아담 안에서 전혀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소제목이 ‘나의 자리’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너의 자리를 알고 있는가?” 라고 질문을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새삼스럽게 우리들의 재롱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는 우리의 자리가 어디인지, 그것조차도 모르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런 질문을 하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해서 주저주저하는데, “어떻게 대답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할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 마태복음 16장에서 !!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은 것인데,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세상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더냐?” 라고 했을 때,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등등이 나오는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했을 때, 베드로와 제자들은 정답을 맞추려고 애를 쓰는데, 마치 무슨 퀴즈대회에 나온 것처럼 말이다.

(마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정답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하나님은 자기가 던진 질문자체가 이미 정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질문자체의 의도만 알면, 정답은 굳이 알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 질문자체가 정답이니 말이다.

◈ 베드로는, 하나님의 여정 속의 열매 !!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그 질문하신 의도를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했을 때, 보통은 학생이 답변을 제대로 하면 선생은 그 학생에게 칭찬을 해주는데 말이다. 그런데 과연 주님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주님은 그 베드로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그렇게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있도록 해준 바로 그 자리 자체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즉 “베드로야, 니가 복을 받았구나. 니가 알도록 하신 분은 바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은 누구에게 칭찬을 하신 것인가? 하나님은 베드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칭찬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 베드로가 그런 고백을 하게 된 모든 능력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그런 여정(旅程) 가운데, 즉 그러한 절차 가운데서 하나의 열매로서 그만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키우는데, 바로 그 포도나무를 키우는 과정에서 열매가 툭툭 불거지는데, 그렇게 불거지는 열매들 중에서 하나가 베드로이고, 요한이고, 사도바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너희들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아야 된다” 라는 것이다.

◈ 왜 질문을 하는가?

그런데 신학교에 가보면 신학생들이 왜 그렇게 질문이 많은지, 물론 요즘은 질문도 별로 하지 않는데, 공부를 하지 않으니 아는 것이 없어서 말이다. 그리고 교수들도 이제는 그런 질문에는 관심이 없는데, 강의 자체가 그냥 귀찮고 하니 말이다. 

사실은 교인들이 전도사나 목사에게 질문이 많은데, 물론 속으로 말이다. “목사님, 어떻게 해서 그렇습니까?” 라고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목사가 해답을 주려고 할 때, 그래서 목사가 “예,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됩니다” 라고, 어떻게 하라고 하면 교인들은 만족을 하는데, 그런데 그만 그 목사가 복음을 알고 있어서, 그 모든 질문과 답변을 하나님께 돌려버리면, 교인들은 그렇게 만족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사람들이 하는 질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데, 그리고 그 답을 하나님을 통해서 확인하고 싶어하는데, 그런데 복음을 알고 있는 목사가 그만 하나님 쪽으로, 즉 하나님이 하시는 그런 질문 쪽으로 그만 해답을 미루어버리니 말이다. 즉 방향을 그쪽으로 틀어버린다는 것이다.

◈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이 옵니까?

그러나 교인들은 사실 그런 하나님의 질문과는 무관하게 질문을 했는데 말이다. 그런 교인들이 하는 질문은 주로 어떤 것인고 하니,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이 옵니까?” 라는 것인데, 사실상 모든 질문이 다 여기에 포함이 된다는 말이다.

이전에 제가 강의를 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사람은 이빨이 아플 때 비로소 자기에게 이빨이 있음을 감지한다고 말이다. 즉 하나님은 고통을 줌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번 돌아보도록 하시는데, 그것을 ‘자각(自覺)’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바로 그런 식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환난 가운데 소망을 주시고 말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사람은 고통이 없으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저는 그것을 달리 이야기를 하겠는데, 즉 “고통이 없는데 성경을 왜 보는가?” 라고 말이다. 아마 이 소리를 듣고서 뜨끔한 분들이 좀 있을 텐데, 그러니 그런 고통이 없으면 설령 성경을 보더라도 진지하게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건성 건성으로 보지 말이다.

◈ 고통이 없는데 성경을 왜 보는가?

다시 말해서, 진지한 성경보기, 진지한 기도 등과 같은 것이 나온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지금 아프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물론 마음이 말이다. 그렇게 아프기 때문에, 즉 여기 이렇게 ‘아픈 나’와 ‘아프지 않은 나’가 있을 때, 그렇게 아파 버리면 아프지 않았을 때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래서 자기는 아프지 않다고 여기고는 질문을 마구 해댄다는 것이다.

그런데 욥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너는 내가 아프게 했어” 라고 하심으로서, 즉 “그렇게 아파하는 것이 바로 지금 제대로 된 너의 자리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제가 지금 아픕니다. 왜 아픕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질문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은 그렇게 아파야 할 시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아픈 것이 너의 자리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 아픈 것이 곧 나의 자리 !!

다시 말해서, 아프지 않는 것이 자기의 자리라고 여기고 그런 질문을 한 것이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만 했기 때문에, 그래서 ‘아프지 않는 나’ 라는 것 정상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생각했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지금쯤은 아파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사람이 자주 아픈 것은, 그렇게 아픈 것이 없으면 자기가 별로 할 일이 없어서, 그렇게 아픈 것이 자기 일이기 때문에 아프다는 말이다. 그러니 만약에 그 사람이 다른 일에다 몰두를 하게 되면, 자기가 아프다는 것을 미처 자각을 하지 못하는데, 그런데 일이 없으면, “야, 지금쯤은 아파야 되는데, 역시 아프구나. 그러니 이것은 내 일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아이와 엄마 !!

아이들이 언제 부모의 관심을 받는고 하니, 역시 아플 때 많이 받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부모가 관심을 주게 되면, 아이들은 아주 영리해서 주기적으로 아픈 흉내를 내고, 그렇게 아파하면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려고 꾀를 내도록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그런 꾀를 부리지 못하도록 고통을 주게 되는데, 어릴 때는 그 일을 누가 담당하는고 하니,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담당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는 아이에게 매를 들어야 하는데, 그러니 그런 아픔을 통해서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즉 자기의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는 말이다.

엄마가 아기에게 젖만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에너지를 다 주는데, 그러니 기계적으로 젖만 준다고 아기가 크는 것이 아니라, 만져주고 안아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독일에서 실험을 했다고 하는데, 젖이나 모든 영양분을 기계적으로 주었는데, 단지 누가 옆에서 안아주고 함께 해주지는 않고 말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놀랍게도 아기가 죽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기를 간호사가 끌어 안아주니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다. (정말로?)

◈ 엄마는 자식 때문에 고통을 !!

그러니 그것은 엄마의 어떤 보이지 않는 것이 아기에게 건너가는 것인데, 그런데 엄마 쪽에서만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아기 쪽에서도 건너가는데, 그러니 아이가 있음으로 엄마가 엄마가 되는데, 그래서 “아이를 못 낳으면 여자도 아닌가?” 라는, 입에 담기에는 좀 그런 말이 있기도 한데 말이다.

그러므로 아기가 없으면 엄마는 엄마인 줄도 모르는데, 물론 아빠는 자식을 낳아도 일시적인데, 요즘 젊은 아빠는 말고 말이다. 그렇게 아빠는 아기를 낳아도 나 몰라라 하는데, 그러니 아빠는 아기 때문에 아빠가 되는 것인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아기 때문에 엄마가 되어간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엄마는 자식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커서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이 사고를 치게 되면, 아빠는 “나가 죽으라고 해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엄마는 사식을 만들어서 구치소를 찾아가는데,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물론 아빠도 따라가기는 하지만, 그것은 엄마가 잔소리를 하니 할 수 없이 운전을 하면서 따라가 준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빠는 뭐든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엄마는 엉엉 울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돈과 눈물 중에서 어느 것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냐는 말이다.

◈ 반면에, 아빠는 돈과 관찰자 !!

그렇게 엄마는 자식을 눈물과 아픔으로서 키우는데, 반면에 아빠는 돈과 관찰자인데, 멀찍이 팔짱을 끼고 그냥 쳐다본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성질이 나면 잔소리나 해대고 말이다. 그래서 아이를 두고서 엄마의 연장이고 하는데, 즉 엄마의 존재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엄마가 ‘좌악’ 하고 늘어난 것이 엄마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아프면 엄마도 같이 아파하는데, 왜냐하면 서로가 주고받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대할 때, 그 성령을 두고 성경에서는 ‘엄마’ 라고 하는데, 그것이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데, “너거 엄마는 하늘에 있다” 라고 말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성령을 ‘보혜사’ 라고 하는데, 즉 돌보아주는 사람인데, 곁에 서서 언제나 떠나지 않고서 말이다.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 성령은 베이비시트 ??

그러므로 성령님은, 성도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돌보아주시는 분인데, 그러니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하늘의 엄마를 알게 되었다는 말인데, 그래서 엄마와 더불어 함께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는 바로 하늘나라의 아기라는 말이다. 즉 성령은 ‘베이비시트’와 같은 역할인데, 그야말로 아주 친절한 유모와 같이 돌보아 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인데, 그것을 시편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하나님을 알게 된 짧은 순간의 그 기쁨이 어떤 것인고 하니,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서 젖을 마음껏 먹고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엄마의 눈을 쳐다보는,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때 아기의 표정이 얼마나 평화스러운지 모르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기분이라는 것이다. 캥거루 새끼가 어디에 있나요? 엄마 뱃속에 있는데, 그러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 어, 취한다 ??

성경은 ‘성령 안에서’ 라는 것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노골적인 것이 아마도 에베소서 5장이지 싶은데, 거기에 보면 ‘취한다’ 라고 하는데, 이렇게 취하는데 어디에 취하는고 하니, 술에 취한다는 것이다. 아마 여러분들은 술을 마신 적이 없어서, 술에 취한 것이 어떤 것이지 모르지 싶은데, 물론 집에서 가서 실험을 하는 것은 자유지만 말이다(ㅋㅋ).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아무튼 술에 취하면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 “여보, 우리 집이 부도가 났어” 라고 하면, “그랬어? 괜찮아”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술 취한 것이라는 말이다. 집에 불이 나도 기분이 좋고, 마누라가 바람을 피워도 기분이 좋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만취상태인데,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와서 이러한 만취상태를 신경적인 자극을 주어서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한다는데 있는데, 즉 조작하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손뼉을 한 시간 동안을 치든지, 머리를 흔들든지 해서 말이다. 그렇게 신경을 자극하면, 엔돌핀이 마구 분출이 되어서 마치 마약을 한 것처럼 된다는 것이다.

◈ 성령을 받으면 아주 정숙하고 고요한데 !!

진짜 성령을 받으면 아주 정숙하고 고요한데, 물론 술을 마셔도 조용히 취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것을 고린도전서에서 ‘질서’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은 어지러운 분이 아니라 질서가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성령을 받았으면, 방언통역을 하려면 조용히 기다리라는 것인데, 즉 질서가 있도록 하라는 것인데, 그 당시에는 성경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 계시가 계속해서 주어졌으니 말이다.

(고전 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요엘서의 예언대로 마지막 때에 성령이 주어지게 되면, 그렇게 성령이 주어지게 되면 고요해지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까, 저는 이렇게 고요한 것을 두고서 자아를 잊는 것으로 보는데, 잃는 것이 아니라 잊는 것으로 말이다. 돈을 잊는 것과 잃는 것은 분명히 다르지 않는가?

아무튼 자아를 그 순간만큼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왜 잊어버린다고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그런 하나님의 자기 작업 가운데서 일어나는 어떤 진동 중에 하나로 발생한 것이 바로 새로운 자기 주체라는 말이다. 즉 ‘성도’ 라는 이름의 자리라는 것이다.
 
◈ ‘성도’ 라는 이름의 자리 !!

그렇게 성도의 주체가 생기는데, 그것은 흔히 ‘은혜’ 라고 하는데, 혹은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열매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의 특징이 바로 자아를 잊어버리는 것인데, 이것을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러므로 그 사람이 성령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목사가 그들이 하는 질문을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자체가 하나님의 질문이니, 하나님의 질문을 다시 한번 그들에게 던져본다는 것이다. 즉 “여러분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자꾸만 무엇을 ‘행하라’ 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행하라’ 라고 하는 그런 행함이 아니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바로 당신의 자리입니다” 라고 통고해준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예를 들어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라고 하니,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설치는데, 하지만 이것을 그런 의미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자리인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마치 엄마 젖을 먹고는 엄마와 눈을 맞추고 흐뭇하게 웃고 있는 아기처럼, 그렇게 엄마의 품속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임을 압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확인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니 온유와 양성과 절제와 형제우애 등은,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확인되는 것인데, 즉 “아하, 이것이 바로 그 자리로구나” 라고 해야 한다는 말이다.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만물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여기서 “근신하고 기도하라” 라고 하는 그 명령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현재 위치하고 자리가 근신하고 기도하는 것이 통하는 자리임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주님께서 고통을 주게 되면 !!

그것이 만약에 우리가 새로 행위를 해야한다고 하면, ‘나’ 라고 하는 것을 잊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분명하게 빼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경우인고 하니, 즉 아까 말한 고통스러운 경우라는 말이다.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 환난과 고통을 주게 되면,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자아를 끄집어내어서, “내가 뭔가 엉뚱한 생각을 하니 자아가 내 속에서 고통을 받는다” 라고 여기는데, 왜냐하면 고통은 분열이니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어떻게 하는고 하니, “나는 아프지 않아야 하는데 아프구나. 그러니 다시 아프지 않던 때로 되돌아가야 되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꾸만 분열, 혹은 균열이 생겨서 아프고 고통스러우니 아프지 않은 옛날 과거로 되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 아하, 나는 망치로구나 !!

그런데 그 고통이 무엇인고 하니,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물론 고통 가운데서 말이다. 그런데 그 질문과 더불어서 뭐가 오는고 하니, 하나님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그런 절차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절차는 그냥 절차가 아니라 거기에서 능력이 나오는데, 바로 그 능력으로 인해서 성령이 주어지게 되고, 또한 성령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하는데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도구로 쓰여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목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시는 일에 마치 망치나 드라이버처럼, 그렇게 사용이 되도록 동원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정도까지 진도가 나가게 되면, 이제 하나님 나라와 전쟁개념을 설명해야 되는데, 그것을 이야기하려니 조금 주저가 되는데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하시는 질문 자체가 성경이고, 그 속에서 능력이 나와서, 그 능력이 만들어내고 배태시킨, 즉 임신을 시킨 것이 바로 성도의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도가 100% 넓게(?)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도의 자리, 즉 우리의 신분이 그렇다는 말이다.

◈ 다시, 인간은 왜 질문을 하는가?

그런데 그 자리에 서있는 우리는 여전히 옛 사람이 남아 있어서, 자기에게 아픔과 고통이 주어지면 자꾸만 질문을 해대는 버릇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질문만을 하는고 하니,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는데, 사람이 질문을 할 때는 자기가 하지 못하는 질문은 하지 않는데, 즉 그 답변을 듣고서 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질문들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중에 보게 되면, 그런 질문은 해서 안 되는 질문인데, 그런 질문만 내뱉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 금식을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예를 들어서, “하나님, 금식을 할 때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 질문에는 무엇이 빠졌는고 하니, 하나님이 금식을 하도록 하신다는 것을 완전히 배제시켜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는 질문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주께서 성도로 하여금 기도를 하게 하신다는 것이 완전히 빠져있다는 말이다. 즉 “기도는 너희가 해서 기도가 아니라, 기도는 고통 가운데 터져 나온다” 라는 것인데, 금식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것이 곧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어느 한 맺힌 과부의 기도인데, 거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도대체 이 과부가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도 무시하고 인간도 무시한 그 불의한 재판관을 매우 성가시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재판관이 그 과부의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고통 가운데서 !!

그런데 이와 같이 하나님도 그런 성도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이다. 즉 ‘택한 자’ 라는 것은, 물론 여기서 선택을 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는데, 그러니 그런 택함을 받은 성도의 자리에서는 이 세상에서 복음으로 인해서 원한에 쌓이도록 여러 가지 고통과 고난이 이 세상으로부터 주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고통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치 용수철이 누르면 그 다음에는 튀어 오르듯이, 그렇게 하나님만을 쳐다보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기도를 하게 하신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서 말하는데, 이런 것만이 제대로 된 기도라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얄밉게도(?) 이런 말씀을 하고 난 다음에 뭐라고 하셨는가?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눅 18: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눅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 십자가의 길 - 하나님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가는 길 !!

하나님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가는 길을 두고서 ‘십자가의 길’ 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의 길을 갔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질문을 요약하면 “니가 십자가를 아는가?” 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서 나온 책이 바로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는 것인데,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출판사에서 다시 찍어내고 했는데 말이다(ㅋㅋ).

그렇다면 “십자가를 아는가?” 라는 질문은 어떤 배경인고 하니, 아담의 후손들이 매일같이 자기 질문을 신에게 쏟아내는데, 바로 그런 환경을 관통하면서 뭐가 나오는고 하니, “니가 십자가를 알아? 니가 복음을 알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는 식으로 말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서로 서로 십자가에 못을 박는데 !!

그렇게 해서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하게 되는데, 그렇게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인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인간들이 예수님을 못을 박으면 박을수록 하나님도 인간을 그만 못박아 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는데, 즉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라고 하는데, 무슨 의미인가? 이 세상이 예수님을 못박으면 박을수록, 예수님도 이 세상을 그만 못박아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저주를 받아서 그만 죽어버린다는 말이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어떻게 사람을 거울 속에 넣을 수 있는가?

그러니 마치 거울과도 같은데, 즉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이 거울 밖을 보는 것과 같고, 또한 거울 밖에 있는 사람이 거울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는 정상적인 거울이라고 하면, 서로 같은 것이 반사가 되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이 거울은 신기하게도 그만 거울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일 난처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목사든 집사든 무사(목사도 집사도 아닌 사람, 일명 평신도?)든 상관없이 제일 곤란한 점이 바로, “어떻게 사람을 거울 속에 집어넣을 것인가?” 라는 것인데, 사실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가당치도 않은 일은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육으로 난 사람은 언제나 반사가 되는 것이 곧 육인데, 그래서 하나님을 이야기해도 자기 육을 위한 하나님이고, 또한 성경해석을 해도 자기 육을 위한 성경해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육을 잊어버리고, 이 육이 영의 절차 가운데서 파생된 하나의 육이라고 이해가 되는 논리의 사슬, 혹은 회전고리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오직 거울 속에 있는 영이 거울 밖에 있는 육을 잡아당겨야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 칼 바르트 - 선포도 계시 !!

놀랍게도 이러한 점을 칼 바르트가 아는데, 그래서 바르트는 선포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계시에다 집어넣는데, 물론 그렇게 해서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것은 다음 달에 칼 바르트 강의를 할 때 ‘계시론’에서 다루기로 하겠는데, 그래도 아쉬워서 조금만 이야기를 하자면, 이 ‘선포’ 라는 것은 남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나오는데, 사도바울이 자기가 전도하는 것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라고 하는데, 그리고 고린도후서 3장에서는, “내 말을 문자로 풀지 말고 영으로 풀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후 3:3, 개역)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그런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을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약을 올리는 것인데,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세요?” 라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마치 버스가 출발하는데 그 안에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직 버스를 타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세요? 없습니까? 출발합니다” 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누가 손을 들겠는가? 아직 오직 않았으니 당연히 못 든다는 것이다.

◈ 잠시 ‘전도특강’을 !!

그러니 이것은 사람을 포섭하는 것이 아닌데, 마치 보험회사에서 생명보험에 들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하시는 전도가 참으로 희한한데, 언제 시간에 나면 하나님의 전도에 대해서 전도특강을 한번 해야 되는데 말이다. 강의를 하면 아마 놀라지 싶은데, 그러니 이 전도라는 것이 “얼래리 꼴래리” 라고 약을 올리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명저 ‘십자가를 아십니까?’의 ‘전도’ 부분에 약간 언급되어있데,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고 하니, 그것이 참 어려운 부분인데 말이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고 또한 성도가 있다고 하면, 성도가 여기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곧 전도라고, 그렇게 대부분이 알고 있는데, 그렇지요? 

◈ 말씀이, ‘전할 자’와 ‘전함을 받을 자’를 새롭게 !!

그런데 그것이 전도가 아니고, 이 ‘전도’ 라고 하는 것은, 이쪽도 무시하고 저쪽도 무시하고, 하나님의 십자가 도가 양쪽을 새롭게 다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이 시대에 인간 세상에 무엇을 하는고 하니, ‘전할 자’와 ‘전함을 받을 자’, 그렇게 양쪽을 다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말씀이 등장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말씀으로 인해서 양쪽이 모두 생겨버리면, 그렇게 해서 만난 사람은 구원의 주체를 서로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의 나타남, 즉 성령의 나타남에 그 영광을 돌리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제가 장담을 하는데, 성경에는 이것 외에 다른 전도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이것을 ‘선포’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선포를 할 때, 선포하는 사람은 그만 빠져버리고 선포하는 그 내용만을 담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구원을 받을 사람이 이 선포에 예속이 되는 기이한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시 자체가 기이하기 때문에, 그런 기이한 신비로서 계속해서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나는 신비로운 십자가의 계시를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렇게 하지 말고, 제가 알아서 전도를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렇게 되면 중간에 그만 그 신비가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부터는 경영기법에 들어가고 행정기법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은 류광수의 ‘다락방’이고, 그야말로 ‘다단계’ 라고 할 수 있는데, 곧 인간 경영학이라는 말이다. 즉 사람을 꼬드기는 방법인데, 그러면 신비가 그만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 카르마조프가의 형제들 !!

그러한 내용이 바로 도스도에프스키의 작품인 ‘카르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라는 책에 보면 나오는데,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1800년경인데, 예수님이 그때 러시아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가 죽은지 1800년이나 지났으니 이 정도라면 다시 올 때가 되었다고 여겨서 사전답사를 겸해서 왔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로 가는데, 교인들의 의견을 먼저 묻기 위해서 말이다. 

* 예수 : 내가 예수다.
* 교인 : 어? 우리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른데, 아니지요?
* 예수 : 내가 예수가 맞아.
* 교인 : 아닌데, 지금 당신이 구라를 치고 있지?
* 예수 : 내가 예수가 맞다니까?
* 교인 : 여러분, 여기 미친놈이 하나 있어요. 자기가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 예수 : 정말 맞는데.
* 교인 : 신부님, 이 사람이 자기가 예수라고 하는데, 미친 사람이 맞지요?
* 신부 : 그래요?
* 교인 : 신부님이 한번 확인해주세요.
* 신부 : 제가 확인을 해보니, 이 양반은 가짜 예수입니다.
* 교인 : 그러면 그렇지.

그리고 나서 신부가, 즉 목사가 예수님을 조용히 불러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예수님, 제가 당신을 진짜라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심정을 이해하겠지요? 만약에 당신을 진짜라고 해버리면 전도가 전혀 안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하는고 하니, 그동안 그분을 예수가 아니라고 해서 이미 국민의 반 이상을 전도를 해놓았다는 말이다.

그렇게 이미 절반이나 해놓았는데, 그런데 진짜 예수님이 와버리면, 그렇게 절반이나 전도를 해놓은 실적이 다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목사는 이 양반이 진짜 예수임을 알기 때문에 흥정을 하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지금 입만 다물어주면, 나머지 절반도 다 전도를 해서 하늘나라를 가득 채워줄 테니까, 지금 당신의 신분을 밝히지 말고, 모든 것을 다 우리에게 일임을 해주시오. 지금 만사가 잘 풀리고 있으니, 지금에 와서 깽판을 놓지 말고 조그만 기다려주시오. 우리가 당신의 하청업체가 되어서 열심히 할 테니”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단 한 사람만 성도가 되어도 !!

그런데 도스도에프스키가 ‘카르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란 책을 통해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한가지 빠트린 것이 있는데, “단 한 사람만이 성도가 되어도, 그 나머지는 성도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데 충분하다” 라는 것이다. 마치 해변가에 금 한 조각만 나와도 그 나머지는 금이 아니라 모래라는 것을 드러내는데 충분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성령에서의 전도가 무엇인고 하니, “망할 자는 이렇게 해서 망하고, 구원을 받을 자는 이렇게 해서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을 구분하면, 그것이 바로 전도라는 것이다. 즉 나머지 사람들을 다 끌어당기려는 것이 전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무엇이 금이고, 무엇이 모래인지, 그것만을 뚜렷하게 부각만 시킬 수 있다면, 그게 최고의 전도라는 것이다. 마치 방주를 만든 노아처럼 말이다. 더 이상의 전도는 없다는 것이다.

◈ 집사님, 말은 맞는데, 쉿 ??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강릉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어느 집사님이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는 책을 읽고 자기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까, 그 목사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말은 맞는데, 입을 다물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그렇게 해버리면 교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는 진리를 포기한 대가로 부흥이 되고 성장이 된다는 것이다. 즉 천국에 갈 사람들을 내쫓으면 교회는 부흥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고 천국에 갈 사람들을 모으게 되면 교회는 그만 거들이 나는데, 즉 전혀 교회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서울에 있는 김효은 집사님이 아주 혹독하게 체험한 것인데, 책을 계속해서 당회장 목사에게 주니, 당회장 목사가 김 집사님을 불러서 하는 말이 “당신의 말이 맞으니, 제발 좀 조용히 해달라” 라는 것이다. 그래서 김 집사님이 저에게 하는 말이 “그래도 그 목사님은 양심은 있던데요” 라고 하던데(ㅋㅋ), 아무튼 입을 제발 좀 다물어 달라는 말이다.

◈ 이 놈들은 새언약을 언제 포기하지?

이런 현상은 비단 서울에 있는 그 교회뿐만이 아니라, 매일같이 십자가 마을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망하라고 기도하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모압과 암몬 자손들 같이 말이다. 즉 “언제 이 놈들이 새언약을 포기하는가?” 라고 하면서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새언약이 뭔지 알지요? 다시는 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즉 “이제는 니가 너의 죄를 씻기 위해서 뭔가 새로운 조치를 할 필요가 없다” 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죄의 용서함조차도 우리가 용서를 받아서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를 데리고 가면서 나타나고 발현되는 그 열매 중의 하나가 바로 용서이고, 또한 의이고, 사명이고, 칭의이고, 영화라는 것이다.

(히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 천국은, ‘아들의 나라’ !!

이것은 마치 다이아몬드와도 같은데, 반짝반짝 빛이 나면서도 서로가 다 다른 빛깔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2보석이 무엇인고 하니, 그 안에 어린양이 쏘아대는 빛이 12가지 보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은 아름답게 때문에 가는 나라가 아니라, 그 안에는 어린양의 피가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천국을 ‘아들의 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나라인데,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고생을 하다가 편히 쉬려고 가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모르면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인데, 자기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생을 했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면 가지를 못하는 나라인데,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라 !!

그러니 천국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때의 그 십자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고통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원형은 따로 있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만이 의미로서 가졌던 십자가라는 것이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살을 찢기면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십자가를, 이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한 십자가로 받아들일 때, 바로 그 십자가 덕분이 우리는 죄가 없는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의 문도 활짝 열리고 말이다.

그래서 닫으면 열 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다고 하는 그 엄청난 문도, 천국의 열쇠를 가진 다윗의 자손이 열게 되면, 그대로 열린다는 말이다. 우리는 거기서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데,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이 열리면,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 22:22) 내가 또 다윗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 ‘법’이 아닌, ‘자리’ !!

그런데 문제는 그 문을 율법의 완성으로 보지를 않고, 또 다시 자기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그런 식으로 잔소리를 하도 많이 하니, 교인들이 교회에 오면 율법이 더 증가되어 버리는데, 즉 “지난주의 법은 뭐였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자꾸만 법을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무엇인고 하니까, “지금 되어있는 것을 확인하면 된다” 라는 것인데, 즉 “지금 여러분의 자리가 그 자리가 맞지요?” 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리’를 이야기하고 하는데, 그런데 그들을 자꾸만 ‘법’을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나중에는 이 법이 바리새인들보다 더 많아지고 마는데, 자꾸만 누적이 되어서 말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가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어디에 두는고 하니까, 자기가 법을 제대로 지키기를 못해서 고통을 당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고통 자체가 하나님의 일인 줄도 모르고서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지금 너의 자리가 어디인지 한번 보라” 라는 것이다.

◈ 다시 정리를 해보면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질문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인데, 그런데 답변을 사실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질문만 제대로 이해하면, 그 질문 속에 답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질문은 사실 우리에게 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를 성도가 되게 했던 바로 그 자리, 그 자리에 대한 확인절차가 바로 하나님의 질문이라는 말이다. 즉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는가?” 라고 말이다.

물론 지금은 예수님께서 “근호야, 어디 있는가?” 라고 하시는데,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안에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있는 자에게 한 질문이 되는데, 즉 십자가 안에 있는 자에게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이 저를 이렇게 만들어놓았습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즉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그 성령의 법으로 우리를 가르시고 인도해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 순간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는 것이다. 즉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만들어주는 자아가 우리 속에 발현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옛 사람은 죄인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함을 받아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라고 하면, 이제는 옛 사람과 새로운 피조물을, 그것을 둘 다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성화론의 문제점은? 반성하고, 또 반성을 !!

기존의 교회에서 주장하는 성화론이 왜 문제가 되는고 하니까, 반성해야 될 주체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인데, 그래서 “반성하고, 또 반성을 해야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반성을 해서 품질이 좋은 자아가 되면, 그것을 또 반성하고 말이다.

그래서 교인들이 저에게 하소연 비슷하게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부흥사가 하는 말이, 작년에 회개한 것을 또 다시 끄집어내어서 회개를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회개를 해야할지 정말로 미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회개할 것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박옥수’ 라는 이단이 주장하는 것이고, “회개를 한번 하면 더 이상 할 것은 없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회개할 거리는 주님이 주시는 것인데, 즉 회개할 거리조차도 주님께서는 복음을 위해서 그때 그때마다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회개할 거리도 안 되는데, 하지만 본인에게는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과 관련을 시켜서 성령께서 하게 하신다는 말이다.

◈ 회개는, ‘내가 누구인가?’와 관련시켜서 !!

그러니 회개는 철저하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과 관련시켜서 하는 것인데, 그러니 이런 것은 다른 사람은 모르는데, 그러니 다른 사람이 흉내낼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아하, 믿음이 좋은 저 양반이 저렇게 하니, 나도 따라서 하면 되겠네” 라고 말이다.

그래서 복음을 아는 목사는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하는데, “이렇게 회개를 하시면 됩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면 이 복음이 각자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는, 그것은 목사라고 해도 제3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복음만을 제대로 전하면 되는 것이지, 교인이 회개를 하고 말고 하는 문제는 전혀 목사가 개입할 입장이 못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목사는 무엇인가? 자기는 자기 회개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남의 회개에 간섭할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제 교재 41페이지를 살펴보자.

** 도대체 인간은 어떤 존재로 살기에 자신이 교주에다가 또한 유일한 신자가 되어서 사는가?

다른 사람이 다 떨어져나가도 자기만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교주이고, 자기가 곧 신자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할렐루야, 믿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것을 넉자로 “하면 된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인데, 여기 ‘최면’ 이라고 하니 어렵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그것을 쉽게 ‘반복’ 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둘 다 같다는 말이다.

◈ 종교는, 일종의 ‘최면 걸리’ !!

그래서 만약 오줌이 잘 나오지 않으면, 소변기 앞에서 “나온다, 나온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이가 잠이 오지 않는다고 칭얼거리면 “잔다, 잔다” 라고 하면 되는데, 굳이 자장가를 부를 필요가 없는데, 괜히 불러서 음정과 박자가 틀리면 아이가 도리어 깬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라고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못 되는데, 나중에 양이 백 마리나 나와서 아이가 놀라서 운다는 말이다(ㅋㅋ).

아무튼 같은 것에 대한 반복이 좋은데, 그런 의미에서 종교라는 것은, 일종의 ‘최면 걸리’ 라는 것인데, 모든 종교가 다 최면 걸기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면 된다, 하면 된다” 라는 것을 반복하면 되는데, 그렇게 해서 10개중에서 하나만 되어도 능력이 있는 목사가 된다는 것이다.

◈ 목사님, 아다리가 되었습니다 ??

교인들은 점을 10번 보아서 하나만 맞더라도 복비가 전혀 아깝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런 10개의 질문은 사실은 평소에 자기가 답을 다 알고 있는 것인데, 그러니 그 중에서 자기 질문에 맞는 답만 끄집어내면 된다는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교인들이 교회에 나와서 목사에게 무엇을 바라는고 하니, 평소에 자기가 반복하는 게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라도 걸려들기를 바라는데,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아멘’ 이라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는 목사에게 “목사님, 오늘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 말은 바꾸어서 표현하면, “목사님, 오늘 설교에서 하나 아다리가 되었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목회성공의 비법은, ‘자기 긍정’ !!

그러니 목회성공의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물론 믿음은 아니고, 그것은 애초부터 우선 순위에서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자신의 존중인데, 즉 “여러분, 자기 자신을 존중하세요”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다. 즉 자기를 긍정하라는 것인데, 이것 말고는 목회성공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교회든 선교단체든 간에, 물론 회사나 기업체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즉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긍정하는 것은 사실은 평소에 자기가 해왔던 것인데, “나는 나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교회에서 목사가 그런 설교를 하니, 당연히 ‘아멘’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다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나름대로 한 가닥 한다고 하는 박영선 목사가 있는 남포교회가 가서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아마 10명도 미처 남지 않고 다 나가지 싶은데, 그 박영선 목사의 설교를 요약하면 간단한데, “죄를 지어도 긍정하라” 라는 것인데, 즉 죄를 짓는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긍정적으로 여기라는 말이다.

그냥 쉽게 말해서, 살아가면서 죄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정훈택을 비롯해서 유명 인사들이(?) 와서는 알바를 하고 가는데, 아무튼 자기들이 하는 것은 기존의 기복신앙과는 구별되니, 나름대로는 아주 엘리트 교회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긍정이고 부정이고 간에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인데, 그러므로 긍정할 것도 없고 부정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자기 몸은 자기 것이 아니라, 주께서 다루시는 연장에 불과한데, 무엇을 더 긍정하고 말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긍정을 하려고 하면 예수님만을 긍정하면 되는데,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예’가 되니 말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알게 되면, 그 관심사가 어디로 가는고 하니, 십자가를 지지도 않은 자기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를 지신 주님에게로 옮겨가는 것인데, 물론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고 말이다. 마치 거울 밖에 있는 인간이 거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전혀 불가능해도 성령을 받는 사람은 믿는데,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예’가 되니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것은 외부의 무한을 자기 안의 무한으로 빨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외부에다 무한을 펼치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은 자신이 유한한 존재인 줄을 잘 알지만,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

그 어떤 인간이라고 해도 자기가 무한한 신이라고 주장하는 인간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유한한 존재임을 알기에 말이다. 즉 자기가 몸도 자주 아프고, 머리도 모자라고, 또 돈도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어디 낯선 곳을 가면 무섭고 두려워하고, 그러다가 강도를 만다면 다 빼앗기고 말이다.

◈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

이렇게 인간은 자기가 유한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지만, 하지만 그 방향성만큼은 어디를 지향하는고 하니, “나는 무한을 지향한다” 라는 것이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하는 것이 우리나라 국가 정보원의 모토인데, 인간도 이와 똑같은데, 즉 유한에서 무한으로 향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다 그러한데, 물론 기업체나 회사나 교회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동한다는 것은, 자기의 유한함이 어디에까지 뻗치는가를 확인하고 보고싶어하는 것인데, 그래서 인간은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자폐증인고 하니까, 그런 것을 확인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바로 자폐증 환자라고 할 수 있는데, 집구석에 쳐 박혀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 말이다. 즉 “내가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가?” 라는 것을 거부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믿음 ??)

◈ 프로이트 - 인간 속에는 죽음의 본능이 !!

‘타나토스(Thanatos)’ 라고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는데, 프로이트가 말한 것으로서, 그것은 죽음에 대한 본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 속에는 죽음의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프로이트가 초반에는 삶의 역동성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강조했는데, 물론 삶의 역동성은 생식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성적인 욕구로서, ‘리비도’ 라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역동성은 인간의지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기에, 자제나 조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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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나토스(Thanatos) - 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을 의인화한 신. 자주 언급은 되지만 인격신(人格神)으로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용어로서, 자기를 파괴하고 생명이 없는 무기물로 환원시키려는 죽음의 본능을 의미한다, - 네이버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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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인간을 그냥 두게 되면 짐승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에게 맡겨야 한다고 하는데, 이 무의식 속에는 그것을 자제시키는 장치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양심’ 이라고 하는데, 이 양심을 두고 맹자가 4가지로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사단(四端)’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 맹자가 말하는 ‘양심’, 곧 ‘사단(四端)’ !!
 
먼저 ‘측은지심(惻隱之心)’ 이라고 해서, 제 아무리 악한 놈이라도 불쌍한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데, 즉 어린아이가 위험한 곳에 처하면 끄집어 내어준다는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수오지심(羞惡之心)’으로서, 강도라도 자기가 나쁜 짓을 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사양지심(辭讓之心)’으로, 아무리 건방진 놈도 어른 앞에서는 예의를 차리는 마음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서, 조폭들 사이에도 의리가 있고 자체적으로 법을 만드는데, 즉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동양철학에도 나오는데, 즉 사람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우주의 기(氣), 혹은 ‘이(理)’ 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을 칸트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공통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동형설(?)’ 이라고 하는데, 즉 신과 인간은 유사하다는 말이다.

◈ 이런 것이 과연 신학인가?

신학생들이 신학교에서 이런 것을 소위 ‘신학’ 이라고 하면서 배우는데, 하지만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이미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플라톤의 철학에 보면 다 나오는데, 이미 400백년이나 500년 이전에 철학자들이 더 세밀하고 더 완벽하고 철저하게 연구를 해놓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무엇이 어떤 점에서 동물과 다른가?” 라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복잡해지니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인간이 자기 검정을, 즉 반복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알다시피 인간이 유한한데, 그런데 그런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향해서 나아갈 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누가 누구를 밀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정작 자기가 자기를 밀어주지 않으면 아무도 밀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옆에 있는 사람은 조언을 할뿐인데, 그리고 훈계와 양육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충고를 해도, 결국 그것을 알아듣는 능력은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있는가?

◈ ‘유한’에서 ‘무한’으로, 그러나?

그러한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라는, 즉 자기 자신이 인간성이 좋아서 받아들이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은 ‘나’에게 귀착이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착하기 때문에, 그런 착한 나를 밀어 부쳐서 무한까지 간다” 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엄청난 모순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예를 들어서, 물에 빠진 인간이 자기 발을 끌어당긴다고 해서 물에서 올라올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 성화론자들은 이런 짓을 하고 있는데, 물론 발은 어떻게 해서 잠시 올라올 수 있을지 몰라도, 하지만 자기 몸은 어떻게 하겠는가?

◈ 예수님을 ‘내’가 믿는다 ??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예수를 믿어서 교회에 갔다고 하면, 물론 자기 발로 갔으니 자기가 믿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지만 그것은 마치 발만 덜렁 올라온 것과 같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자기 몸은 누가 구원을 하느냐는 말이다. 발만 믿고 구원을 받으면 되는가?

그리고 만약에 자기가 치매에 걸려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래서 예수님을 부인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치매에 걸리기 전에 “내가 믿는다” 라는 것을 믿으면 안 되는데, 물론 그것도 일종의 치매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치매에 걸리기 전에 자기가 인간성이 좋아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 말고, 오히려 그 반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저는 예수님을 도저히 믿을 수 있는 놈이 아닌데, 도대체 누구십니까? 저를 구원해주신 분이?” 라고, 그렇게 치매에 걸리기 전에 자기 말고 다른 분이 외부에서 그런 일을 하셨음을 감지해야 하고, 그것을 느껴야 한다는 말이다.

◈ 자기를 미워하고 주님만을 !!

그렇다면 그런 것을 느낀 것과 느끼지 못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예수님을 자기가 믿었다고 하면, 그러니 그것을 예수님을 믿는 자기를 섬기는 것이니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누구만 섬기는고 하니,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구원해주신 주님을 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서는 제 아무리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는 것을 마구 연발해도, 막상 집에 무슨 일이 생기던지 하면 삐치고서 그만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방을 가서 “집사님, 왜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나는 그래도 잘 믿는다는 말입니다” 라고 하면서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는 것이다.

◈ 당신은, 지금까지 누구 덕분으로?

하지만 그런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신은 지금까지 누구 덕분으로 왔으며, 지금 누가 당신에게 교회에 가라고 합니까?” 라는 것을 묻고 있는데, 하지만 그런 사람은 뭔고 하니, “내가 알아서 왔으니, 내가 알아서 나간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기분이 나빠서 못 가겠다” 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그동안 자기 최면으로 교회에 나온 것인데, “나는 믿는다, 믿는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즉 최면에 걸린 자기 자신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서 복음을 믿는다고 우기고 있는데, 물론 그렇게 해서 얼마든지 믿을 수도 있는데, 정말 그런 사람이라면 자기 가정을 교회로 해서라도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다. 그것도 모르고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 라고 하니, 참으로 안타깝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인간은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는데, 그것을 두고 ‘과학’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유한을 다 모아서 무한으로 나아가자” 라는 것인데, 그런데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안 되는가? 

◈ 무한이 아닌, 유한이 늘어난 것 !!

예를 들어서, 과거에는 인간이 100미터를 10초안에 뛰는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즉 무한으로 보았는데, 그런데 지금은 몇 초에 뛰는가? 우샤인 볼트가 9.58초에 뛴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단 10초대 안으로, 즉 무한한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사실은 그것은 무한이 아니라, 유한이 ‘주욱’ 하고 늘어났다는 말이다.  

어제 성경공부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젊을 때 신입사원으로 회사에 들어가서 월급을 200만원을 받으면, 그야말로 목숨을 바쳐서 일을 하려고 하는데, 누구든지 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는 한 달에 10만원도 만지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10년 뒤에는 그 회사 정문에서 데모를 하고 있는데, 월급을 올려달라고 말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것이 하나의 의식이라고 하면, 그런데 무한에서 유한으로 밀어 부치는 의식 말고 다른 것이 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무의식’ 인데, 바로 이런 무의식에서 인간의 욕망이 나오는데, 이것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일곱 귀신인데, 즉 악령인데 어떻게 인간이 다룬다는 말인가? 세상 신인데 말이다. 

◈ 떡, 인기, 권력 !!

이러한 무의식의 세계에 있는 악령은 우리에게 어떤 요구를 하는고 하니, 그것이 3가지인데, 첫째로 “사람은 떡으로 산다” 라고 하고, 둘째로 “사람은 인기가 있어야 살 수 있다” 라고 하고, 그리고 셋째로는 “권력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는 “떡, 인기, 권력” 이라고 하는 3가지 욕망을 만들어서 우리 인간에게 쥐어주었는데, 즉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말이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그러니 우리 인간이 제 아무리 의식을 가지고, 그것이 아닌 척을 해도 이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데, 즉 자기는 아무리 돈과 명예와 여자를 초월했다고 해도, 하지만 우리 속에 있는 욕망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성령은, 십자가의 영으로서 !!

그러한 현상은 오직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아야만 가능한데, 만약 그렇게 성령의 능력으로 못박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는 그 욕망에 의해서 마냥 놀아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오시는데, 즉 십자가의 영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영으로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분들이 있는데, 즉 “이 목사는 성령을 십자가 영이라고 하는데, 그게 어디 있는가?” 라고 하는데, 그것이 어디 있는고 하니 갈라디아서 5장에 분명히 나온다는 말이다. 24절에 보면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라고 하시는데, 즉 성령이 하시는 일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라는 것이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러니 십자가는 우리에게 믿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못박아 버린다는 말이다. 즉 매일같이 우리를 죽이는데, 정과 욕심을 못박아서 말이다. 그러니 이 말은 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너는 하나님의 도구, 십자가의 도구, 성령의 도구에 불과하다” 라는 것이다. 즉 성령이 오게 되면 반드시 “증인이 된다” 라는 것인데, 즉 자기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거울 밖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거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거울 안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단 한 조각의 금만 있어도, 그것이 다른 것들은 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 아니, 교인도 얼마 없는데 무슨 진리를?

어떤 분이 저를 겨냥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하는데, “그 목사는 자기 교회의 교인 수도 몇 명이 안 되는데, 그러면서 그게 무슨 진리라고 하는가?” 라고 말이다. 우리교회의 교인 수가 적다고 비아냥거리는 것인데, 즉 “만약에 진리라고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인데, 적은 것을 보면 진리가 아닌데 내가 그 양반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뭐가 있는가?” 라고 말이다.

물론 들을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양반은 인터넷에 아예 자기 설교를 올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올리면 자기가 베낀 것이 드러나니 말이다. 물론 베끼고도 당당하게 올리는 양반도 있기는 한데, 십자가 마을에 보면 말이다(ㅋㅋ).

◈ 하늘나라는, 성령과 악령의 만남에 의해서 !!

아무튼 이렇게 유한에서 무한으로 갔는데, 여기서 이야기를 좀 어렵게 해보면, 인간의 자아가 다룰 수 없는 다른 영역, 즉 영역차원이 이미 인간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하늘나라’ 라고 하는 것은 성령과 악령의 만남에 의해서, 그렇게 충돌해서 파생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기존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하늘나라는 가짜인데, 우리 자신이 악령에 사로잡힌 것을 알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데리고 가는 그런 투쟁과정을 통해서, 즉 그런 만남을 통해서, 그런 틈새에서 하늘나라가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좋은 곳에 가려고 하는 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악마의 나라, 즉 지옥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이런 성령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물론 십자가도 모르고 말이다. 그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우리 인간은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지 못하니까, 무한에서 유한으로 다가가는 방식을 사용하자” 라고 했는데, 신학자들도 그렇게 주장했고 말이다. 신학자들도 성령을 믿지 않으니 말이다. 

이것을 가지고 하이데거는 ‘선취(先取)’ 라고 했는데, 즉 “먼저 취한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고 하니까, 그는 인간을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무한을 조사해보니, 거기에는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이데거는 정작 인간에게 왜 이런 죽음이 있는지는 모르는데, 즉 인간은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모르고, 아무튼 자기가 관찰을 해보니 모든 인간은 다 죽더라고 주장을 한다는 말이다.

물론 하이데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는 이 죽음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데, 그냥 죽는다는 것만 알고 말이다. 그래서 기존의 철학에서는 이 죽음을 사는 쪽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끙끙거리는데, 그런데 하이데거는 그렇게 하지 말고, 인간 속에 죽음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니, 그런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을 무한이라고 보고, 즉 그 무한에서 먼저 인간에게 죽음을 가지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주장하기를, 우리 인간이 살려고 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죽었다고 치고 무엇을 할 것인지, 그것을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여기서 불트만의 신학이 나오게 되는데, 물론 바르트도 여기에 영향을 받았고 말이다. 참 은혜롭지 않은가? 일단 자기가 죽었다고 치고 시작하니 말이다. 즉 “인간은 죽음 앞에서 어떻게 설 것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목소리를 높여서 주장하는 것은 죽음 앞에서가 아니고, “인간이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설 것인가?” 라는 말이다.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고 하면, 그러나 이 십자가는 예수님이 못 박혀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나 다르다는 것인데, 어떤 분이 거기에 있는 것과 아무 것도 없는 것과는 말이다. 그것도 피를 흘리면서 말이다.

물론 “아이쿠, 그냥 죽으면 그만이지” 라고 할지 몰라도, 그것은 죽음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나 이 ‘십자가’ 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 내가 바빠서(?) 보지 못한 분을 이제는 제대로 본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이름을 주시고 성령을 주신 분을 말이다. 물론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분명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어 !!

지난 주일에 설교내용이 무엇이었는고 하니까,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우리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고 하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불행이라고 했는데, 죽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그야말로 환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징글징글 맞다’ 라고 했는데, 아무튼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데, 죽어야 고통도 없어지는데 말이다. 그렇게 죽지 않으니 고통도 여전하고, 그래서 지옥을 뭐라고 하는가? 구더기에 소금을 치듯이, 그렇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죽어야 고통도 잊어버리고, 모든 것이 다 사라질 텐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돌아가기는 하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그냥 쉰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오빠가 죽었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는 마리아와 마르다와 그 옆에서 같이 슬퍼하는 유대인들을 보고 예수님이 울었는데, 죽지 않는다고 해도 믿지를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리아와 마르다는 죽었다고 억지를 피우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시청각 교육을 시켜주었는데, “나사로와 나와!” 라고 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나오라고 하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유한으로 남는데, 즉 “예수님, 벌써 죽은지 나흘이나 지났는데, 그러니 이미 썩을 대로 썩었습니다” 라고 말이다. 아마 생물학자가 있었다면 얼마나 부패가 되었는지 살펴보고 하지 싶은데, 또 과학수사대가 동원되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 “야, 무조건 나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조의 능력이고, 말씀의 능력이고, 또 복음의 능력인데, 즉 죽은 자도 살아난다는 말이다.

◈ 원래 인간의 주인은 따로 있기에 !!

그러니 성도가 죽으면 천사와 같이 부활을 하는데, 그러니 결국 죽음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지옥에 간 인간들도 죽지 않는데, 왜 그런고 하니, 원래 우리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원래 주인은 따로 있다는 말인데, 그러니 우리가 이리 만들고 저리 만들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마치 태양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녹아 내리듯이, 그렇게 자기 자신을 가리고 있던 모든 윤리와 도덕과 같은 것이 다 흘러내리고, 원래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즉 “너는 흙이다” 라고 하는, 바로 그 말씀만 남게 되는데, 그러니 우리 자체가 곧 말씀이 만들어낸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 불교는, 인간의 죽음을 ‘해체’, 혹은 ‘영혼의 가루’로 !!

다시 말씀드리지만, 철학에서는 십자가가 없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는고 하니,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먼저 죽음을 가지고 접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비해서 동양철학은 무엇인고 하니, 불교와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죽음에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는데, 즉 인간의 죽음을 ‘해체’로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해체’ 라고 하니 좀 어렵지 싶은데, 이것을 쉽게 표현하면, ‘영혼의 가루’ 라고 하는데, 영혼을 그만 부수어 버리면 가루가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아이디어는 이런 면에서 웃기는데, 즉 영혼도 가루로 만들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영혼을 가루로 만드는 것을 두고서 유식(有識)불교에서는 ‘종자’ 라고 하는데, 즉 ‘씨’ 라는 것이다. 바로 그 씨가 우리 인간에게 있고, 그 씨가 의식을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 ‘욕심’ 이란 무엇인가?

그러니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고통을 면해보려고, 즉 생로병사에서 벗어나려고 별의 별 짓을 다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 인간에게 욕심이 있어서 고통을 받는다고 하는데, 하지만 정작 욕심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욕심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가 만든 자기의 질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 욕심은 누가 질문을 해야 하는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질문을 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가는 여정 속에서 욕심이 무엇인지, 그것이 튀어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고, 그것이 곧 욕심이라는 말이다. 또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욕심이고 말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 욕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에서는 항상 그 출발점이 눈에 보이는 ‘나’로 시작이 되는데, 하지만 성경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출발한다는 것이다. 질문에 거기서 나오고, 물론 답변도 그 안에 다 들어있고 말이다. 그렇게 서로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 할머니, 자식은 부모의 연장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철학을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는가? 그럴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정작 본인이 그렇게 살고 있으니 말이다. 철학과 신학의 덩어리로서 말이다. 글자를 하나도 모르는 할머니를 붙잡고 이야기를 해보라는 것이다. 일자 무식한 할머니에게서도 철학과 신학이 나오는데, 즉 “나는 그냥 내 자식만 보고 삽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철학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럴 때 뭐라고 대답을 해주어야 하는가? “할머니, 자식은 부모의 연장입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다.

* 전도자 : 할머니, 예수님을 아세요?
* 할머니 : 나는 남편이 죽고 그냥 자식만 보고 삽니다.
* 전도자 : 할머니, 자식은 부모의 연장입니다.
* 할머니 : 뭔 말이여?
* 전도자 : 할머니, 자식이 아프면 할머니도 아프지요?
* 할머니 : 그야 그렇지.
* 전도자 : 할머니, 그러니 그것이 곧 할머니의 철학입니다.
* 할머니 : 뭐, 철이라구? 내 아들 이름은 갱수인데.
* 전도자 : 갱수라구요?
* 할머니 : 그래. 그것도 몰랐어.

그러니 이 세상에 철학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데, 그것이 다 자기의 확대라는 것이다. 즉 자기 속에 들어있는 욕망인데, 그래서 남의 자식이 성폭행을 당하면 그냥 지나갈 수도 있지만, 그러나 자기 자식이 당하면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는 말이다. 자기 아이가 죽었다고 이민을 가는 부모도 있는데, 실제로 핸드볼 국가선수 부부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 국가도, 당연히 먼저 ‘내’가 있어야 !!

자기는 국가를 대표해서 표창도 받고 했지만, 그러나 그 국가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자기 자식을 지키지 못하는 국가는 국가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표창이고 뭐고 다 반납하고 국가를 떠나고 말았는데, 그런 것이 다 본인의 철학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철학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들이 다 자기를 잊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인데, 그만큼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강렬하다는 말이다. 즉 유한한 자기를 무한에 가깝게 접근을 시키겠다는 것인데, 물론 고상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뭐라고 하겠는가? “무한이 당신에게 왔으니, 죽음을 생각하고 욕심을 버려라” 라고 할지 몰라도, 그러나 도를 닦던지 무엇을 하든지 결국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41페이지를 살펴보자.

** 인간은 자신의 유한을 근거로 해서 무한을 향해서, 즉 신을 향해서 나아간다. 무한을 위한 빈자리를 내부에 만들면서도 자기 외의 모든 존재는 라이벌이다. ‘신’도 자신의 경쟁자이다.

◈ 무한을 위한 ‘빈자리’ !!

여기에 보면 ‘무한을 위한 빈자리’ 라는 참으로 어려운 말이 나오는데, 혹시 ‘숲 속의 빈터’ 라고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식당 이름이 아니고, 여기 저처럼 가운데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그렇게 소갈머리가 없는 사람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ㅋㅋ). 동영상이 되니 보기 싫다고 군지렁거리는 사람도 있는데, 어디 가발이 한 두 푼을 해야 쓰던지 말던지 하는데 말이다.

우리가 보통 ‘빈터’ 라고 할 때는, 이렇게 나무를 다 잘라내어야 숲 속에 빈터가 생기는데, 거기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은 본인이 알아서 할 문제이고 말이다. 그런데 제가 말한 빈터는, 그렇게 잘라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숲이 이렇게 자라나지 않을 때, 그때는 자연적으로 빈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는, 여기 안에 내핵이 있고 바깥에 외핵이 있고, 그리고 그 위에는 맨틀이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지구에 이런 것이 왜 있는고 하니, 이렇게 내부에 있는 물질과 외부에 있는 물질이, 그것들이 자석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서로 어긋맞게 지구의 자전으로 돌아가니, 거기서 나오는 자기장으로 인해서 태양에서 나오는 모든 유해한 것들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인데, 아무튼 과학자들은 그렇게 주장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안에 들어있는 내핵과 외핵이 고체가 아니라 액체라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액체라는 것는 사실 비어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숲 속의 빈터를 만들 때, 일부러 빈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접근을 해도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곧 ‘신’ !!

예를 들어서, 자기는 1000년을 살고 싶은데 아무리 해도 그렇게 안 되고, 살다가 살다가 950년만 살고 죽을 때 말이다. 그렇게 인간이 아무리 접근을 하려고 해도 접근할 수가 없는 그 자기만의 구멍(?), 혹은 빈터, 그것을 바로 사람들은 한 글자로 ‘신’ 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을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우상숭배인지 모르는데, 그런데 그러한 우상숭배를 배경으로 해서 ‘여호와’가 바로 그 자리를 차지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호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출 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그런데 신약에서 그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그만 십자가에 달려버리니, 그러니 예수님이 바로 그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자기들이 만든 신의 자리, 즉 빈터를 그만 예수가 털썩 차지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 그런데, 그 빈터를 그만 예수님이 !!

유대인들은 그렇게 열심히 자기들의 신의 자리를, 그런 빈터를 만들어놓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그만 자리를 차지하니 유대인들이 좋게 여길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나오라고 하니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곧 길인데, 그러니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즉 자기가 그만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문제인데, 물론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도 역시나 그러했고 말이다. 아무리 용서를 하고 싶어도 용서가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게 못박아 죽여버렸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죽이니 하나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하는 사실을, 십자가를 가지고, 즉 어린양의 보좌로서 그 빈터를 차지해버리고는, 그렇게 해서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가버린다는 말이다.

◈ 빼도 박도 못하고, 졸지에 죄인이 !!

그러니 사람들은 그만 빼도 박도 못하고 그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저주를 받아서 마땅한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신을 의식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인데, 즉 인간이 신을 의식하는 그 자체로 인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사울을 바울이 되게 만들었는데, 하나님은 택한 자에게는 그런 식으로 십자가를 들이민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고 뭐라고 하셨는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셨다는 말이다.

◈ 예수님,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이 빈자리에 옛날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짓을 한다는 것이다. 즉 바리새인들인 빈자리를 만들어놓고 백성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그리고는 하나님과 백성들을 중개하는 역할을 자기들이 하려고 했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이 말씀의 전문가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면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흉내내고 있는데, 즉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말이다.

아까 이야기한 ‘카르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목사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 빨리 좀 가주세요. 지금 이 나라의 절반을 신자로 다 만들어놓았느니, 가셔서 조금 더 기다려주세요.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나타나면 지금까지 한 모든 것이 다 헛수고가 되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짓이란 말이다.

◈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

그래서 요한일서 2장 27절에 보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라는 말씀이 있는데, 즉 중매자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복음을 전할 전도자는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성령을 통해서 택한 자에게 심어진다는 말이다.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 “~도 아니고, ~도 아니고” !!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심는 자도 아무 것도 아니고, 물을 주는 자도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 아니고, ~도 아니고, ~이다” 라는 것인데, 왜 처음부터 “하나님이 하셨다” 라는 말을 바로 하지 않고, 그렇게 ‘아니고’ 라는 것을 집어넣느냐는 말이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런데 처음부터 하나님이 하셨다고 해버리면, 그런 하나님의 일에 자기도 동참했다고 하면서 달려들 인간들이 그야말로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아니고’ 라고 해도 달려들어서 지저분하게 만들어놓는데 말이다. 목사는 설교를 했다고 하면서 들이밀고, 또 장로는 장로대로 들이밀고 말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다” 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반드시 “~도 아니고, ~도 아니고” 라는 말을 해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그런 두 가지가 합쳐져서 복음이 되고, 또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 우리는 공로자가 아니기에 !!

물론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신 것은 맞는데, 그래도 그 말씀에 순종한 사람도 있지를 않는가?” 라는 소리를 한두 번을 들은 것이 아닌데, 그러니 반드시 “~도 아니고, ~도 아니고” 라는 것이 들어가야 하고, 그리고 나서 “~이다” 라고 해야, 그것이 복음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에게는 옛 사람이 남아서, 그렇게 주님이 하신 일이 공로자로서 껴들고 싶어하기에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복음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상황들인 줄 압니다. 그러니 저희들의 자리가 곧 복음의 자리인데, 그것은 그만 잊어버리고, “하나님, 내 자리는 어디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 교만함과 건방짐을 용서해주시고, 그 어떤 자리이든 간에 그 자리가 바로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랑의 자리이고, 복음의 자리이고, 능력의 자리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11,10 오후 11시 30분에 마침.

               오랜만에 ‘피’ 맛을 보니 흥분이 되는데, 그런데 방금 미실이 죽었다. 과연 죽으면 그만인가?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대해서 - YES24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심오한 사상과 다양한 주제 등 내용 면에서 뿐 아니라 그 분량도 방대한 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소재와 긴장감 넘치는 구성으로 인해 한번 손에 들면 끝까지 읽어 내려가게 된다.
부자간의 재산 다툼, 한 여자를 둘러싼 갈등, 결국 이런 반목에서 이어지는 친부 살해라는 다분히 선정적인 소재에, 범죄소설 혹은 추리소설 기법으로 쓰인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가독성이 높다. 여기에,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됨으로서 자극적인 사건은 보다 더 흥미롭게 전개된다.
독특한 개성과 사상을 대변하는 인물들이 빚어내는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삶과 죽음, 사랑과 욕정 등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바로 신과 신념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은 있느냐 없느냐???라는 표도르의 질문과 각기 상반된 이반과 알렉세이의 대답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커다란 화두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꾸준히 탐구해 왔던 일관된 주제는 신과 인간, 선과 악 등 서로 모순되는 원리들이었다. 인간성의 어두운 측면을 부각시켜서 신성(神聖)의 의미를 더욱 높이고, 구원과 부활과 같은 종교적인 개념을 삶의 영역에서 구체화했다. 이를 위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살인 등 범죄 사건을 즐겨 사용했다. 그러나 사건 자체가 아닌, 이러한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사고와 행동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도 친부 살해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살해된 표도르 주위의 인물들이 사건을 전후로 겪는 심리적 갈등에 주목하였다.
출간된 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 작품이 최고의 고전으로 불리는 것은, 문학의 한계를 뛰어넘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세시 후반의 러시아뿐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주제를 다루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여전히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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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 러시아의 심리학자이자 소설가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과 세계에 존재하는 불변의 진리를 종교?철학?사상적 관점에서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20세기 문학 전반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모스크바 말린스키 시립병원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로서 사형 집행 몇 분 전에 특사를 받은 바 있었고,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생활과 불치의 간질병 등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질곡과 고난을 다 겪으며 살았다.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왔던 그였지만 인간 내면의 추악함에만 집착하지 않고 영혼의 아름다움과 궁극적인 정화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집필한 전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상적 기조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모순되는 선과 악의 투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을 대표하며 인간 심성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심리적 통찰력으로, 특히 영혼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20세기 소설 문학 전반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죄와 벌』『백치』『악령』『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등 그의 장편소설들은 삶의 지혜와 영혼의 울림을 전달하는 데 예술...러시아의 심리학자이자 소설가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과 세계에 존재하는 불변의 진리를 종교?철학?사상적 관점에서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20세기 문학 전반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모스크바 말린스키 시립병원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로서 사형 집행 몇 분 전에 특사를 받은 바 있었고,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생활과 불치의 간질병 등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질곡과 고난을 다 겪으며 살았다.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왔던 그였지만 인간 내면의 추악함에만 집착하지 않고 영혼의 아름다움과 궁극적인 정화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집필한 전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상적 기조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모순되는 선과 악의 투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을 대표하며 인간 심성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심리적 통찰력으로, 특히 영혼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20세기 소설 문학 전반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죄와 벌』『백치』『악령』『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등 그의 장편소설들은 삶의 지혜와 영혼의 울림을 전달하는 데 예술이 매체로 이용된 뛰어난 본보기이며, 그에게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의 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이미 가난한 민중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던 그는 1849년에는 출판의 자유, 농노해방, 사법제도의 개편을 역설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으나 총살 직전 황제의 특사로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 받았다. 시베리아의 옴스크 감옥에서 지낸 4년간의 생활은, 그가 인도주의자 ?공상적 혁명가에서 변모하여 슬라브적인 신비주의자 ?인종사상의 제창자로 사상적 전신을 하게 되는 시기였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이 시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유형생활을 마친 그는 다시 창작에 정열을 쏟아 「스테판치코포의 마을」 「학대받고 멸시받는 사람들」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후 유럽 여행을 떠난 도스토예프스키는 한때 도박에 빠져 빚에 시달리면서도 계속되는 창작 활동을 통해 「악어」 「도박사」 「영원한 남편」 등을 써내려갔고,『백치』『악령』을 잡지『루스키 베스트니크』에 연재했다.
1858년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서「온순한 여인」을 비롯한 몇 작품들을 모아『작가일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표했다. 「우스운 자의 꿈」은 이듬해에『작가일기』에 추가되어 발표되었다. 1878년부터 1880년까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루스키 베스트니크』에 연재한다. 1881년 1월 28일, 고질적인 폐질환이 악화되어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유해는 같은 달 31일에 페테르부르크 소재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사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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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 있느냐 없느냐?"
"신은 없습니다."(이반)
"알료쉬카, 신은 있느냐?"
"신은 있습니다."
"이반, 그렇다면, 불멸은 어떠냐?"
"불멸도 없어요."
"알료쉬카, 불멸은 있느냐?"
"
있어요. 신 속에 불멸이 있습니다."
"이반, 그럼, 악마는 있는 거냐?"
"아니요, 악마도 없어요" --- 본문 중에서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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