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강의 2009-10-19  피 12강 [자아] 라는 괴물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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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091019피p042괴물

피 12강 자아구상 - [자아] 라는 괴물

[09 대구강의 17] - [피 12] - 괴물
                                                                                
                                                           09,10,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나’, ‘나’, ‘나’, 그러나?

오늘은 교재 42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그러나 세상을 엄밀히 보면, 이 세상에는 자기 말고 엄연히 타인도 있다. 따라서 나만 고집하는 질문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로 귀속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말이다. 이런 현실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에 이렇게 ‘A’, ‘B’, ‘C’ 라는 것이 있다면, 여기 ‘A’ 라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알던 예수님을 알던 성경을 보던 간에 자기 세계가 따로 구축되어있고, 반면에 또 ‘B’와 ‘C’ 라는 사람도 각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A’ 라는 사람이 알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은 넓어봐야 이 동그라미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이 ‘A’ 라는 사람이 ‘B’ 라는 사람의 세계를 과연 포섭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그것이 그렇지 않은데, 즉 포섭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에 된다고 해도 기껏해야 A와 B의 공통집합이 되는 정도인데, 그래서 여기 한 쪽은 기독교이고 다른 쪽은 불교라고 한다면, 이 둘의 공통점은 기껏해야 축구를 좋아한다는 정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지만 둘 다 연속극을 좋아하고 말이다.

그리고 성경에 있는 대로 이야기하자면, 한쪽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쪽은 사두개인이라고 하면, 그들은 서로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서 사실 사이도 별로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점에서 하나가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대해서는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을 수가 있는데,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이 땅 자체에서 분리된 이 모든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로 뭉쳐놓고, 이 뭉쳐진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 즉 “그날에 저희들은 적이 아니었고, 하나가 되었다” 라는 것이다.

◈ 오잉, 십자가로 하나가 ??

그렇게 예수님의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흩어진 것도 하나가 될 수 있는데, 그러니 불교나 기독교나 천주교나 이슬람교나, 모두가 다 십자가만 들이대면 신기하게도(?)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3장에서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참으로 결정적인 말씀인데, 그러니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 속에는 하늘의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주실 때만, 비로소 하늘의 것이 담긴다는 말이다.

(요 3: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 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속성이 있는데, 그것을 ‘공유적 속성’ 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속성을 가지고서 하나님과 접촉이 가능하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개혁주의 신학이고, 칼빈의 주장이기도 한데 말이다.

◈ 루터 - 칼빈도 신앙이 있나?

그래서 루터는 어떤 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는데, “칼빈은 아무리 보아도 기독교 신자가 아닌 것 같다”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래도 하나님이라고 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늘의 것으로서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칼빈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미 우리 인간의 하나님의 존재 정도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다만 모르는 것은 그 하나님의 존재의 내용에 대해서 모르는데, 그래서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알아가자는 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루터 자기가 보기에는 칼빈은 신자가 아닌 것으로, 그냥 깨놓고 말해서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십자가를 중간 과정에 들어갔다가 빼내는 십자가로 여기는지, 도대체 어떻게 십자가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육으로 본 십자가와  영으로 본 십자가 !!

어제 낮 설교가 무엇이었는고 하니, 십자가에는 두 종류의 십자가가 있는데, 즉 “육으로 본 십자가와 영으로 본 십자가가 있다” 라는 것인데, 여기서 육으로 본 십자가는 하나의 대상이 되는데, 즉 세상에서의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 중에서 하나의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사건에서 의미를 두면 그것이 의미가 되는 식으로 믿는데, 그것이 바로 육으로 보는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영으로 보는 십자가는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보던지 간에, 여기 역사 속에서 튀어나와서, 하늘의 것으로 우리 속에 아예 들어와 버릴 때, 그렇게 되면 우리 기존의 것들이 다 폭발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폭발이 되면서 이 십자가가 우리의 분석과 관찰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 십자가에 완전히 함락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제 어떻게 설명을 했는고 하니까, 그것이 참 어려운 내용이었는데, 처음에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는 자기가 따먹는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선악과가 인간에게 따먹혔다는 것이다. 그 차이점을 알겠지요?
 
◈ 선악과가 인간에게 따먹힘으로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

그렇게 선악과가 따먹혀서 인간은 그만 선악과의 징벌 안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러니 이제는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몸 깊숙이 낚시바늘이 걸린 것처럼 말이다. 그런 것을 두고 ‘계륵(鷄肋)’ 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닭 뼈가 걸렸다는 것이다. 닭 뼈가 목에 걸리면 개는 죽는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빼도 박도 못하고 걸려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목에(?) 걸려있는 선악과 때문에 생긴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도 자유의지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인데,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비로소 그런 자유의지가 발생한다는 말이다. 그 이전까지는 전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즉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자유의지를 이야기하게 되고, 그것을 활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 총체화, 동일시, 정체성 !!

아무튼 인간은 바깥에 타인이 있던지 어떻든 간에 그것을 자기 생각으로 다시 정리하게 되는데, 즉 이것을 ‘총체화시킨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어려우니 다른 말로 하면 ‘동일시한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정체성’ 이라고 하는데, 즉 모든 것을 다 자기 위주로 평정을 시킨다는 말이다. 물론 자기 안에서 말이다. 그렇게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있더라도 자기 중심으로 배치를 시키는 것인데, 즉 “너는 이 자리에 있고, 너는 저 자리에 있어” 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사업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거래를 하면서, “아하, 저 사람은 우선 순위가 1번째이고, 저 사람은 3번째이고, 그리고 저 사람은 절대로 상대하지 말아야 될 인간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기 위주로 다시 편성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변화들을 다 이렇게 자기 위주로 편성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니 아까 말한 동그라미 ‘A’ 라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살다가 보면 ‘B’와 ‘C’ 라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세계로, 그러니 ‘내’가 생각하는 것이 그만 한계가 되어서, 그 ‘B’와 ‘C’ 라는 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우주에서 대기권으로 어떤 물체가 들어오면 불타버리듯이 말이다. 그런 것은 하나의 유성이 되어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나’의 세계로도 그들이 못 들어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외부에 있던 그 어떤 것이라도 자기 영향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자기의 해석으로 모두가 다 변화가 되어서, 즉 자기가 좋은 대로 해석을 해서, 그것을 다 서랍에 집어넣어 놓는다는 것이다.

◈ 마누라, 서류가 이게 뭐야?

예를 들어서, 집에서 살림을 하는 주부의 경우에, 자기 집에 남편이 사업과 관련된 서류가 배달되어 왔는데, 그래서 자기는 그것을 남편의 일을 들어준다고 마음에서 분류를 해서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정리를 해놓았는데, 그런데 저녁에 신랑이 퇴근을 해서 왜 서류를 함부로 분류했느냐고 야단을 칠 때, 그때 아내는 자기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데, “아하, 내가 모르는 것이 있구나” 라고 말이다.

바로 그 한계가 무엇인고 하니까, 남이 있음으로 인해서 자기가 조정하고 자기가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즉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단순히 가정주부가 서류를 정리하는 것으로 끝이라고 하면 그것이 무슨 하자가 되겠습니까만, 조금 고생이 되어도 그냥 다시 정리하면 되는데 말이다.

◈ 이것은 선한 것, 저것은 악한 것 !!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서 오는 외부적인 것들을, 우리 인간은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까, 근본적으로 자기의 선악과에 의해서, 즉 의와 죄와 심판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전부를 다 자기 서랍에다가 다시 배치를 해서 넣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선한 것, 저것은 악한 것”, 아니면 “이것은 의로운 것, 저것은 죄악된 것” 이라고 말이다. 

악과 죄는 같은 말이 아니고 차이가 나는데, 악은 인간 외부에 있을 때 부르는 말이고, 그리고 죄라는 것은 그 악이 인간내부에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악과 죄를 같이 여기면 안 되는데, 물론 서로 섞어서 죄악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악은 악마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리고 죄는 그 악마에 의해서 발생된 악한 짓을, 바로 그것을 우리 인간 속에서 죄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짐승은 죄가 없는데, 그러니 그런 죄가 없는 짐승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기억이 나는데, “코끼리가 십자가의 영향을 받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코끼리나 코스모스나 거북이에게 해당이 되느냐는 것이다.

◈ 원숭아, 회개하라 ??

이러한 점이 왜 어려운고 하니, 피조물이 서로 같이 후패하고 썩어 가는데, 그래서 짐승의 야성적인 성질을 발휘해서 포악하게 굴면서도, 그런데 왜 그 책임이 짐승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유독 인간에게만 있느냐는 것이다. 즉 “원숭아, 회개하라" 하고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 속에 하나님에 대한 책임성의 요소가 있기 때문인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한 마디로 ‘대표성’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렇게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바로 6일 날에 태어났던 모든 짐승과 피조물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날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대표성’을 !!

그러니 인간이 피조물의 대표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즉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분이 대표로서 죄를 담당하게 되면 죄가 없어지는 것이고, 그리고 그분이 부활을 하게 되면 인간도 역시 부활하도록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란 그 속성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누가 가지고 있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아담도 역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담이 제 아무리 새끼를 까고 또 까더라도, 그 모든 새끼들은 여전히 아담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즉 인간은 아무리 해도 여전히 아담을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 속에서 만들 때, 피조성이 !!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해서 피조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만들 때 비로소 ‘피조성’ 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냥 창조를 했다고 되면, 그 창조했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데, 단지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사실 천주교에서 이렇게 주장을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 만들었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이다. 그래서 신이 만든 자녀를 왜 뱃속에서 지우느냐고 하면서 낙태를 반대하는데, 즉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인간이 왜 죽이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뱃속에 있는 아이가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가지고 논쟁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야기할 때는,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한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말도 참 어려운데, 마치 피자를 나누어주듯이, 그렇게 각자 각자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인데, 인간이 바로 그 하나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왜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형상을 일부 떼어서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이 그 인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 노아언약의 경우에 !!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새로운 언약을, 즉 무지개 언약을 주시는데, 그것이 곧 ‘노아언약’ 인데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노아언약을 통해서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하는데, 만약에 피를 흘리면 저주가 임하게 되고, 그렇게 저주가 임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창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 그러면 니가 죽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 말의 앞뒤가 잘 맞지 않는데, 이것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 단 하나님이 죽이는 것은 허용이 된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간이 죽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하나님이 죽이는 것만 허용이 된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죽이면 안 돼 !!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인간 운명의 주도권은 이미 인간에게는 없고 누구에게 있다는 말인가? 그 주도권은 이미 노아언약을 쥐고서 그대로 실행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인간을 피 흘려서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에 말이다. 

지금 내용이 조금 어려운데, 이 강의가 다행히 녹화가 되니 다시 보면 되는데, 아니면 녹취를 읽던지 말이다. 어제 어떤 분이 메일을 보냈는데, 지금 아내가 추수를 한다고 아직 오지 않아서 저녁시간에 동영상을 잘 보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그분은 농사를 짓는 땅이 조금 있어서, 지금 추수를 해야되는 모양인데 말이다. 

◈ 너도 신이 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

아무튼 의와 죄와 심판이라는 것이 이 선악과에 기초해서 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자유의지에 기초해서 의와 죄와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는 자유의지가 없었다가 그 뒤에 생겨났다는 것은, 그러니 이 자유의지는 하나님만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되는데, 그래서 마귀가 이것을 알고 “너도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면 선악과를 따먹어라” 라고 유혹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마귀가 하는 말이, “너도 신이 될 수 있다” 라는 것에서 출발해서, 그 다음에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이제는 “너도 신이 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귀가 신을 규명할 때 뭐라고 했는고 하니, 무한한 자유를 가진 존재로 보았는데,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신의 그 속박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자유를 행세할 수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유에서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니, 놀랍게도 ‘선택권’ 인데, 이 선택권을 우리 인간 행세한다고 하면, 만약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면 어디를 선택하겠는가? 당연히 천국인데, 어느 미친놈이 지옥을 선택하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오기로 말을 그렇게 할지 몰라도, 결국은 모든 사람이 다 천국에 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아니, 사랑의 하나님이 지옥을?

여기서 여호와의 증인이 등장해서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지옥을 만들지 않았다고 하는데, 즉 지옥이 없어야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이 있으면서도 사랑이라고 하면, 그것은 누구의 입장에서 말이 안 되는고 하니까, 여기 ‘A’ 라고 하는, 즉 인간의 독자적인 자유의지의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에게 납득이 되는 하나님만 진짜 하나님이고, 그런 예수님만이 진짜 예수님이고, 그런 십자가만이 진짜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은 그럴 경우에만 믿어주겠다고 하는데, 그러니 믿음도 결국은 무엇인가?

◈ 결국, 믿음이 아닌 ‘행함’ !!

그러니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기 자유의지가 포함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믿음이 아닌 ‘행함’ 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행함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즉 자기가 행세한 이 자유의지는 그 행함으로 인해서, 즉 그만 ‘자기 의’ 라는 서랍에 집어넣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 자체에는 손을 대지 말고,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권면이나 명령을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율례와 규범을 중개매체로 말이다. 그런 말씀을 달라는 것인데, 말씀이 명령으로 주어지니 말이다. 그렇게 중개매체로서 말씀을 주시면, 즉 율법이란 말씀을 주시면 자기들이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그 말씀을 자기들이 지켜서 천국에 한번 가보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최고점으로 !!

바로 여기에 자기들의 한 평생을 바쳐서 열심이었던 자들이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그 노선은, 하늘에게 뭔가 주지 않는 육적인 최고의 정점에 그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바리새인들은 그야말로 혹뿔(?)과 같은데, 우리 몸에서 솟아난 말이다. 우리 인간들 중에서 가장 자유의지를 최고로 발휘했던, 그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을 대변해주고 있는 자들이 바로 이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인간들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이 ‘십자가’ 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은 절단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즉 이미 하늘과 땅은 그 자체로서 건너갈 수 없다는 말이다.

◈ 십자가는 일종의 선악과 ??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일종의 선악과인데, 즉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자기의 죄를 드러내는 것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이처럼 저희들은 하나님마저도 죽일 정도로 다른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었습니다” 라는 것이 노출되고 발각된다는 말이다. 그런 계기가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우리의 영역 안까지 침범해 들어와야 하는데, 만약에 밖에 십자가가 있으면 우리는 또 우리의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그 십자가를 믿어주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십자가를 믿어준 자기의 행함은 자기의 의로운 서랍에 보관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 이라고 하는 새로운 타인을 통해서 이 죽음이라는 것을 뚫고 들어와서는,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하신다” 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요한복음 16장에 나오는, 성령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이근호 목사는 행함을 몰라 ??

이렇게 성경말씀이 있는데, 여기에 십자가가 아니고, 행함도 나오고, 그리고 율법도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근호 목사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잘 푸는데, 그런데 행함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는가?” 라고 하는데, 그런 양반은 어떤 입장인고 하니, 십자가의 안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즉 제3자의 입장에서 서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성령을 받지 못해서 십자가를 육으로 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양반이 하는 말이, “이근호 목사는 왜 행함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가? 십자가는 제대로 이야기하는데, 이웃사랑은 부족해” 라고 하는데, 반야월에서 교회에 다니다가 삐쳐서 나간, 그런 분이 있다는 말이다. (누구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성령을 받지 않으니 마치 바리새인과 같이 나오는데, 이 바리새인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다시 오면 얼마든지 또 죽일 놈들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 의를 치니 그러한데,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은 손대면 전혀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성령은 ‘차이’를 발생시켜 !!

하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모든 인간들의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 바로 그 자체가 죄가 되는데, 즉 인간들끼리 서로 수평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죄가 무엇이지?” 라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타인이 오게 되면, 즉 예수님이라고 타인이 몰고 온 새로운 천국과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알고 있던 천국이 서로 비교가 되는데, 이것을 두고 ‘차이’ 라고 하는데, 이 차이성을 무산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매일같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 차이를 성령께서 발생시킨다는 말이다.

◈ 지젝의 ‘시차적 관점’ !!

만약에 자기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20년 동안 믿었다고 하면, 그렇게 20년 동안 믿은 십자가는 내일 믿는 십자가로 인해서 차이가 생기는데, 그것을 ‘시차적 관점’ 이라고 하는데, 지젝이 쓴 책제목인데, 그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쉽게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난로가 손을 대면 뜨거운데, 그렇게 난로가 뜨거운 것과, 거기에 손을 대면 피부는 세포로 되어있고, 그 세포는 단백질로 되어있으니 200도가 되면 탄다는 것이다. 그래서 뜨겁다고 느끼게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실제로 피부가 타는 것과 자기가 그것을 뜨겁다고 느끼는 것은 ‘시차적(視差的)’인 것이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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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차적이란, 동일한 공간 속에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한 대극이 하나의 공간, 하나의 윤곽 속에 공존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관점입니다. - 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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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람이 어디 한 가지 일에 몰두하게 되면 다른 것을 그만 잊어버리는데, 그러다가 그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나면, 그제야 나중에 “아이쿠, 이런 일도 있었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그것이 느껴진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이라는 것은 사건들이 같이 일어나는데,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우선 순위를 정하게 되는데, 즉 “나는 이것부터 먼저 하고, 그 다음에는 이것을 하고, 그 다음에는 저것을 하겠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순서를 정한다는 것이다.

◈ 그건 마누라, 니 생각이고 ??

물론 이것은 저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남편들이 힘든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내들이 자기들이 생각한 것이 있기에 순서가 있어서 “여보, 이것 이것을 좀 해놓으세요” 라고 하는데, 즉 그렇게 한꺼번에 열 가지를 퍼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기억해서 몇 가지를 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릇을 씻으면서도 세금을 내라고 한 것을 기억하는데, 그때 마침 마누라가 와서 또 다른 것을 묻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는 나름대로 순서를 정해서, 이것부터 먼저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대답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그때 마누라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당신은 왜 제 말을 무시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물은 것을 답변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사실은 무시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순서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서로가 다 순서를 정하는데, 그런데 그만 그 정한 순서가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건 니 생각이고?”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가 감각된 것을 인식하는 사이에 차이가 나듯이, 주님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하는 것과, 우리가 그 구원의 기쁨을 느끼는 것은 시차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 구원의 깊이를 알아 가는 여정(旅情)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 이미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

그러므로 ‘구원’ 이라는 것은 새롭게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게 되는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시차적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을 모르기에 말이다. 그런데 그때 주님은 깨닫도록 해주시는데, 성령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사건들을 일으키는데, 즉 “예수님, 이 정도면 다 알았습니다” 라고 하면 또 일으키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 정도면 다 알았습니다” 라고 하면 또 다시 어떤 숙제가 주어져서, 즉 어제 안 것과 새로 안 것이 서로 틈이 있어서, 바로 그 틈을 통해서 주님께서 은혜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구원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구원에 자기가 소유된 자로서, 즉 천국에 이미 소유된 자로서, 즉 “아하, 내가 주님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소유하셨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타인’ 문제가 상당히 중요하고도 어렵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간극’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인간들은 아무리 외부에 타인이 있고 해도, 그런 것들이 일단 자기 안에 들어가면, 자기 나름대로 재편된 자기만의 세계 안에, 즉 그런 외부의 것들은 자기 영역의 하나의 부속품으로 다시 배치가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것을 가지고 새로운 타인을 만들어서, 그렇게 해서 ‘간극’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즉 ‘시간적인 간격’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 ‘간’과 ‘극’을 합쳐서 ‘차이’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주님은 이런 차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게 해서 성도로 하여금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그 풍성함을 알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 목사님, 그러면 어떻게 기도를?

어떤 분은 강의가 끝나면 “목사님,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데, 그러면 저는 “사도바울이 기도한대로 하면 됩니다” 라고 대답을 하는데, 즉 “주여,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그 풍성함을 알게 하소서” 라고 말이다. 물론 여러분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그렇게 대답하면 되는데, 선교단체에서 강의를 할 때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면 부부의 사랑이 더욱 더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것이 원칙인데, 즉 주님께서 우리의 남편이 되었으면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더욱 더 알아서 살아가는 것인데, 그러니 얼마든지 기도할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기도할 것이 없다고 하는고 하니, 이미 주님의 자기의 소유가 되어서, 그렇게 소유가 되니 그만 또 하나의 장벽이 생기게 되는데, 그러면 성령이 쳐들어와서 모두 다 부수어 버리고 말이다. 그렇게 주님은 허물어서 또 관리를 하신다는 것이다.

◈ 우리는 ‘친구’ 아이가?

바로 이러한 우리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주님은 그만 타인이 되는데,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점령하시고 자기 것으로 삼아나가고 확인하게 하시는 타인이란 말이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오셨을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즉 “누가 내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한다는 것이다.

(눅 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런데 그것을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이웃’ 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앞으로 너희들을 종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라고 하겠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친구라고 하고는 것은, 그렇게 있는 자들을 친구로 만든다는 것이지, 결코 인간들이 예수님의 친구라는 것은 아닌데, 즉 주님께서 친구로 들어낸다는 말이다.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 서로가 죽고 못 사는 관계 !!

그러니 예수님이 그렇게 친구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새로운 것이 주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계명인데, 그것이 곧 ‘사랑’ 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랑을 쪼개보니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놀랍게도 그것이 바로 ‘죽음’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으니, 너도 나를 위해서 죽어달라” 라는 말이다. 그것이 곧 친구 사이인데, 이렇게 친구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죽음으로서, 그렇게 됨으로서 그것을 하나의 관계라고, 즉 친구관계가 형성이 된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서 유일무이한, 오직 하나밖에 없는 계명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너희가 바로 내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리라”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제는 서로가 죽고 못 사는 그런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가장 소중한 것을 달리고 하시는 하나님 !!

어제 낮에 설교를 하면서 은혜를 받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브라함의 신앙은 농담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고, 그야말로 자기 아들을 자기 손으로 잡아죽이라는 것인데, 그것이 곧 신앙이란 것이다. 완전히 그 중심부를 집중타를 해버리는데, 우리가 챙기고 싶고 우리가 놓치지 싫은 그 중심부를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완전히 박살을 내버리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그야말로 차라리 자기가 죽는 것이 낫지 어떻게 자기 아들을 죽이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신앙이라는 것은 그 정도로 다급하고 긴급한 현실인데, 교회에 나가주고 헌금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즉 신앙은 그렇게 “해주고, 해주고” 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방적인 침투라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즉 아무도 손대면 안 되는 바로 그 보물을 와서는 그냥 박살내어 버리신다는 말이다.

마치 옥합을 깨부수는 그 여인처럼,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을 부수는 것인데, 그러므로 신앙은 “너에게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나와?”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런 면에서는 참 못된 분인데, 그냥 “교회에 다녀라. 그러면 내가 구원해줄게” 라고 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러면 얼마나 수월하냐는 것이다. 교회에 갔다가 주는 점심을 먹고, 또 시간이 되면 월요일에는 성경공부를 하러 가면 되고 말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인간들이 교회에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고 말이다. 아무튼 우리가 제 아무리 깊숙이 숨기고 또 숨겨놓아도, 주님은 기어이 찾아와서 그 숨겨놓은 것을 달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놓으면, 예수님은 그것을 두고서 믿음이 있다고 여겨주시겠다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저의 경우에는 아내가 거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ㅋㅋ).

◈ 아브라함은 어디를 쳐다보는가?

이것이 좀 어려운데, 그래도 계속해서 해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에게 가장 귀한 것을 내놓아라” 라고 했을 때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고 아브라함은 또 여기에 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너에게 가장 귀한 것을 바쳐라” 라고 하면, 아브라함은 어디를 쳐다보겠는가? 다른 곳이 아닌 자기 내부를 살피게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해서 아들을 바치고 나면, 또 생기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걷어내면 또 생기고 말이다.

◈ 인간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괴물’이 !!

그렇게 계속해서 중심부에 뭔가가 생기는데, 마치 지구의 내핵이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인간의 그 안에는 뭐가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괴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괴물인데, 그런데 그 괴물의 성격이 어떠한고 하니, 그것이 창세기 4장에 나오는데, 그것이 곧 ‘살인’ 이라는 말이다.

창세기 4장에서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살인하지 말라” 라는 법이 들어온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사람은 눈을 돌려서 자기 내부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러면 내부에서 괴물이 “뭘 보나? 어서 살인을 해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누구를 말인가요?” 라고 하면, 그 괴물은 다시 “너에게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한 그 양반을 죽여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타인을 죽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십자가라는 말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살해하도록 되어있는데,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이다. 즉 우리 인간에게 율법을 주면, 우리 인간은 반드시 율법을 주신 그 하나님을 죽이도록 되어있는데, 바리새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그만 죽이게 되었는데, 그러니 당연히 우리 인간들도 하나님을 죽인 대가로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렇게 죽은 우리 인간을 일방적으로 건져내는 것이 바로 ‘구원’ 이라는 것이다. 전혀 일방적으로 말이다.

◈ 괴물은 ‘성격’으로 드러나는데 !!

이렇게 우리 인간 속에는 악마가 있는데, 그런데 그 악마는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고, 다만 성격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성격이 특별하게 무엇이 나쁘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 모든 성격은 그 특징이 “나를 건드리면 죽여버린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 책에도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 신은 나를 저주해도, 나는 나를 저주하지 않겠다 !!

십자가 마을에 김영완 씨가 올린 글에 보면, “신은 나를 저주해도, 나는 나를 저주하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그 내용도 이 ‘피’ 라는 책에 보면 나오는데, 진도를 나가보면 나중에 만나게 되는데 말이다. 즉 신이 제 아무리 자기를 저주해도, 그렇게 자기는 저주를 받아서 지옥에 가더라도, 그런 자기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지옥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반박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김영완 씨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자기 자신을 고발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피’ 라는 책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화과나무의 저주’에 대해서 나오는데, 즉 무화과나무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나무에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한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보고 예수님이 그만 저주를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누가 의아해했는가? 누가 당혹스러워했느냐는 말이다. 무화과나무는 오히려 덤덤했지 싶은데, 말 그대로 나무이니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당혹스러워했는데, 왜냐하면 그 무화과나무가 자기 자신들이라고 하면, 자기들도 역시 그런 입장에 처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이 목사, 금반지 하나만 줘 ??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저에게 “이 목사, 금반지 하나만 줘” 라고 했다면, 요즘 금값이 얼마나 비싼데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하고 말이다(ㅋㅋ). 그런데 제가 금반지가 없어서, “예수님, 저에게는 금반지가 없습니다” 라고 했다면,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렇다면 이 목사 너는 저주를 받아라” 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해야 하겠는가? 그야말로 예수님에게 “Why Me?” 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즉 “예수님, 제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다고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때 금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왜? 이 목사는 저주를 받는 것이 싫어?” 라고 한다면, 차마 싫다고는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거기에는 자유의지가 들어가는 것이고, 그러면 메시야이신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니 말이다. 그러니 자유의지가 거기에 대해서 타협을 하는데, 즉 “예수님의 뜻이니 일단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해놓고는, 자기 겸손한 척을 한다는 것이다.

◈ 반성을 하고 회개할 줄 아는 ‘나’ !!

그것을 어제 제가 설교를 하면서, “반성을 하고 회개할 줄 아는 나” 라고 했는데, 즉 “반성도 전혀 못하고 회개도 하지 못하는 저들보다는 얼마나 더 뛰어납니까?” 라는 말이다. 설교가 어려워서 그런지 몰라도 교인들의 반응이 ‘멍’ 하게 있었는데, 노선이 어디서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사실은 십자가의 그 관계가 상당히 어려운데, 그동안 어렵지 설교하지 않은 것은 사실은 하고 싶어도 많이 참았는데, 그런데 그날 따라 성질이 나는 일도 있고 해서, 그냥 어렵더라도 나오는 대로 모두 다 내뱉고 말았는데, 가는 데까지 한번 가보자고 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들 속은, 그 속을 제 아무리 캐내어도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진짜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을 정작 자기가 모른다는 말이다. 정말 자기에 소중한 것을, 즉 “나는 이것을 빼앗기면 자살을 할거야” 라고 하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빼앗기고 나면, 그 뒤에 어떻게 하는가? 물론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지, 그럴수록 더 힘을 내어서 열심히 살아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살만하다고 하는 그 토대가 새롭게 생겨난다는 말이다.

◈ 미지의 X, 큰 타자(Other), 물(物), 정신 !!

그렇게 똑똑한 철학자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그것이 뭔지를 모르겠다고 하는데, 그래서 라캉은 그것을 ‘미지의 X’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그냥 타자가 아니라 ‘큰 타자(Other)’ 라고 하는데, 즉 뭔가 있기는 있는데,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다는 말이다. 칸트의 경우에는 ‘물(物)’ 그 자체이고, 헤겔은 ‘정신’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게 곧 악마인데, 그러니 철학자들은 그것이 악마라는 소리는 차마 하지 못하고, 그렇게 빙빙 돌려서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 우리는 악마를 끄집어내어서 쟁반에 담아 가면 되는데, 즉 “주님, 여기 악마를 가지고 왔습니다” 라고 하면 말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한 방에 날려주신다는 것이다. 

◈ 프로이드 - 죽음 충동 !!

프로이드는 이렇게 우리 인간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인해서 뭐가 생긴다고 했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프로이드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뭐라고 했는고 하니, 놀랍게도 ‘죽음 충동’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프로이드가 말하는 이 ‘죽음 충동’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배후에는 영원히 살고 싶은 생각이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죽고자 하는 충동이 나오는 것을 보니, 그 뒤에 또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해서,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 꿈은 두려움으로 인해서 !!

프로이드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고 하니까, 그는 인간의 모든 꿈은 두려움으로 인해서 생긴다고 보았는데, 즉 “나는 죽으면 안 돼” 라고 하는 두려움, 즉 공포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타나토스(Thanatos)’ 라고 한다고 했는데, 죽음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 속에 있는 타인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를 때, 자기는 점점 더 왜소해지는데, 거기에 대한 반발로서, 즉 “누가 감히 나를 왜소하게 만드는가? 니나 사라져라”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 인간의 ‘살인충동’을 드러내면서 창세기가 !!

그래서 하나님은 그냥 드린(?)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고, 반면에 정성을 다한 형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음으로 말미암아서, 가인으로 하여금 인간 내부에 악마가 들어있음을, 즉 살인충동이 있음을 드러내면서 구약의 창세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런 살인충동으로 말미암아서 피가 발생이 되었고, 또한 그 피가 새로운 노선을 발생시킨다는 말이다. 이 노선은 아벨 대신에 새로운 ‘셋’ 이라고 하는 가문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셋은 결국 그 안에 아벨의 피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노선이 가인의 노선과 비교가 되면서 여자의 노선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 이라고 하는데, “아벨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재물을 드렸으니” 라고 말이다. 즉 “그리스도는 이런 분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차원에서 재물을 드렸다는 것이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질문은 누가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이제 진도를 나가야 하는데, 그 이전에 이 강의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다시 정리를 하면, 즉 ‘A’ 라는 곳에 인간의 내부가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요한복음 18장과 19장에 나오는데, 예수님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인물이 바로 빌라도인데, 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두 가지를 묻는데, “진리가 무엇인가?” 라는 것과,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 라고 말이다.

물론 예수님은 빌라도가 한 두 가지에 대해서 답변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질문을 누가 해야 하는고 하니, 즉 쳐들어오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것을 질문해야 하는지, 그런 질문까지도 다 주신다는 것이다.

(요 18: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요 19: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이제 교재 42페이지를 살펴보자.

** 하나님도 타인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질문할 때도 결국 질문자의 의도가 실리게 된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에게 무슨 질문을 해야 하는 존재입니까?” 라고. 물론 이 질문에 하나님은 답변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질문을 던지지 아니한 그 어떤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답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 하나님도 타인이다 ??

여기에서 “하나님도 타인이다” 라고 하는데, 이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이만큼 길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인간이 누구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질문은 이미 자신의 의로움을 챙겨놓고 하는 것인데, 즉 “나 자신은 의로우니, 나는 손대지 마세요” 라고, 그것을 기정사실화를 해놓고 질문을 한다는 말이다. 

◈ 너, 어느 별에서 왔어?

그러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게 어떻게 질문을 해야하는가? “하나님, 제가 하나님에게 무슨 질문을 해야하는 존재입니까?” 라고 해야하는데, 그러니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예수님, 제가 예수님에게 무슨 질문을 해야 하는 존재입니까?” 라고 질문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렇게 질문하지 않고, 시건방지게도 예수님에게 “너, 어느 별에서 왔어?” 라고 했고, 또 “진리가 뭐야?” 라고 질문을 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먼저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결코 답변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아담에게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는가?” 라는 것인데, 즉 아담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깨닫도록, 그렇게 다시 한번 아담의 방향을 돌아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바벨탑을 쌓아서 자꾸만 하늘로 올라가고자 하는데, 그래서 주님은 반대로 우리 내부를 살피게 하신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왜 우리 내부를?

하나님은 왜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내부를 돌아보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내부에 괴물이 있기 때문인데, 즉 자기 자신을 망치고 죽게 만드는 악의 원흉이 움트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야말로 ‘에어리언’ 인데, 그 무시무시한 악마가 우리 몸을 인큐베이터로 삼아서 점점 더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회에도 나오지 않고, 또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한다는 말이다. 말로서 죽이든, 실제로 죽이든 간에 말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사람의 심리 가운데 제일 통쾌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복수’ 라는 것인데, 이 ‘복수’ 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변화가 아니라, 바깥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가장 즐거워하는데, 즉 “나는 손대지 말라” 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의 기도는 쾌감을 가장 향유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하게 되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곧 “너희들이 나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보고 싶다” 라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 그런데 솔로몬의 기도는?

그런데 놀랍게도 솔로몬은 기도할 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는가? 자기의 원수가 죽기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고, 또한 자기가 오래 살기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고, 그리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는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솔로몬이 그렇게 기도하니, 하나님이 다른 것도 다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도이고 말이다.

어제 주일 낮에 중고등부 설교를 하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부자가 되기를 애쓰지 말라” 라는 것이었는데, 과연 그런 기도를 누가 하겠는가? 그런 기도를 꼭 가난한 사람들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외치고 말이다. 이미 부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자가 되고 싶어서 간절하게 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부자이니 말이다.

◈ 예수님의 나타나심 자체가 곧 ‘질문 던짐’ !!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동생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소연을 하는데, 형이 아버지의 재산을 다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예수님 자신은 재산을 공평히 분배해주는 그런 재판관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당회장이 되면 당장에 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눅 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눅 12: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눅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일종의 ‘질문 던짐’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예수님께서 “니가 이 세상을 판단하지 말고, 니 속을 보아라” 라고, 그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런 질문의 절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십자가’ 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표적은 원하는데, 여기서 표적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즉 기적과 표적의 차이점이 뭔고 하니, 신기한 일을 두고 기적이라고 하는데 비해서, 표적은 그 신기한 일을 행하신 분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내는 것, 즉 어떤 일을 통해서 그 일을 일으킨 분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두고서 기적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 가나 혼인잔치의 경우에 !!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째 표적이 무엇인고 하니, 기적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가나 혼인잔치의 포도주를 만드신 것인데, 결혼식을 나오니 생각이 나는데, 이번 11월 13일에 이미아 양이 결혼을 하는데, 서울의존교회에서 성경공부 시간에 혼인예식을 올린다는 말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성경공부이고, 결혼식은 모인 김에 하는 것인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되는데, 그런데 거기서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는 예수님의 때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시차’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표적과 표적의 실제 내용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온 표적이 어느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이 낫는 것이고 말이다. 

(요 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요 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요 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 2: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그러니 이런 표적은 반드시 우리의 몸과 관련이 되어있는데, 지금 결혼식을 거행하는데, 그런데 그만 포도주가 떨어져서 손님들은 포도주를 더 달라고 하면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몸과 관련되어 있는데, 그렇게 몸과 관련되어있는 이 과거와, 예수님과 관련되어있는, 그 예수님의 몸과의 시차, 그것이 바로 표적이라는 말이다.

◈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표적 !!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가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뭐가 되는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표적이 되는데, 왜 그런가? 자기 몸에서 일어나니 말이다. 자기 남편, 자기 아내, 자기 자식들, 자기 교인들, 그렇게 모든 것이 몸과 몸이 부딪치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주님의 뜻이 말이다.

그러므로 진짜 표적의 실체는 누구인고 하니까, 그것이 곧 예수님의 몸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의 실체는 무엇인고 하니까, 물론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즉 신하의 아들이 병이 낫고, 또 떡을 먹고 배가 부른 것은 모두 다 표적이란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의 경우에,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하는 것은, 그것이 다 예수님의 집안 이야기라는 말이다.

◈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신의 피와 살 !!

하지만 예수님께서 정작 주시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시차’를 넘어서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피와 자신의 살이었는데, 그러니 결국 이 피와 살이라는 정답을 알고 난 다음에, 그런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이 일종의 기적이 아니라 결국은 예수님이 죽어야만 산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에게는 마치 있는 것에다 더욱 더 보태주는 기적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

사실 진짜로 ‘복’ 이라는 것은, “나는 이제 죽어도 괜찮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우리는 살고 싶어서 “예수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하의 아들이 죽게 되었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살려주시니 뭐라고 하는가? “야,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구나”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시차적인 착각이냐는 것이다. 시차를 넘지 못하는 말이다.

강의를 하면서도 몹시 어려운데, 예수님이 하신 일은 우리가 먼저 질문을 던져서 나온 답변이 아니라, 즉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라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한 질문인가? 마리아가 자기 아들인 예수님에 한 질문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했는데, 하지만 그 답변이 마리아가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니라는 것이다.
 
 
◈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래서 예수님이 마리아를 보고 “여자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고 하는데, 즉 “니 몸 중심과 내 몸 중심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내려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받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오해해서 뭐라고 하는가? “그러면 그 살과 피를 먹과 마시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즉 또 다시 자기 몸을 챙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 라고 물으셨는데, 여기서 만약에 하나님이 제시한 답변이, 물론 이미 주님은 그 대답을 아시는데, 예수님의 피와 살, 즉 예수님의 죽으심이 답변인데,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모든 표적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두루마기를 입고 훌렁훌렁 지나가면 다 무엇이 나오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펄럭이면서, 그렇게 주님은 이 땅을 통과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질문과 답변은 모두 예수님의 피로 모아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 라고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다 정해져있는데, 그것이 곧 ‘피’ 라는 말이다. 그러니 거기에 합당한 질문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구원되지 못한 노선에 속해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마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답변에 대해서,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뭐라고 하시는가? “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 라는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마치 아이들이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니는 니 중심으로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책망을 하셨다는 것이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이제 교재 44페이지를 살펴보자.

**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전부터 있어온 얽히고 설킨 관계망의 구조 안에서 출현되는 현상이다. 여기에는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서로 다투고 쫓아가는 구조로 되어있다.

◈ 얽히고 설킨 ‘관계망’의 구조 안에서 !!

여기에 이렇게 구조가 있는데, 이 구조가 마치 엠보싱처럼 그렇게 볼록 볼록 튀어나와 있는데, 바로 그렇게 튀어나온 것이 저와 여러분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고 난 뒤에는 자기가 돗대라고 여기는데, 즉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관계망이 서로 융기가 되어있어서 있어서 얽히고 설킨 체로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돌출된 것인데, 아마 이것을 지난 시간에 했지 싶은데 말이다. 

그러니 남의 집에서 일어난 부부싸움을 아침부터 구경하겠다고 창문에 얼굴을 대고 기웃거리다가는 튀어나온 냉장고에 그만 부딪치는 수가 있는데(ㅋㅋ),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 자체가 얽힌 인간들의 힘의 구조에 의해서, 그렇게 서로 투쟁하고 다툰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을 구경하다가는 봉변을 당하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음주운전을 하던 차량에 치여서 그만 신혼여행을 떠나던 젊은 부부가 죽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하는가? 이 세상은 모두가 다 같은 구조로 얽혀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인간이 화가 난다고 술을 쳐 먹고는 운전을 하다가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젊은 신혼부부를 그만 죽였다고 한다면, 바로 그것은 지금 우리는 아주 대인져러스한, 즉 아주 위험한 세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이 세상은, 일종의 젤리와도 같아서 !!

그것뿐만이 아닌데, 교회에서 무슨 문제가 있어서 화가 나서 교회 문을 박차고 집으로 가다가 길에 돌이 있어서 그만 찼는데, 그것이 담을 넘어서 텃밭에서 일을 하던 할머니의 정수를 맞추어서, 그만 그 할머니가 3일만에 병원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 할머니를 죽은 범인은 누구인가? 바로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서로가 떠밀고 떠밀려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로마서 특강을 정리한 책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그야말로 꽉 짜여진 하나의 젤리와도 같다” 라는 것인데, 즉 액체도 아닌 것이 고체도 아닌 것이 말이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말이다. 그렇게 한쪽에서 떠밀면 같이 떠밀리면서 남을 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회사를 경영하는데, 먼저 앞에서 부도가 나면 그 다음 쪽으로 줄줄이 나듯이 말이다. 자기는 부도를 내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부도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 있어서 갚는 것은 그야말로 바보짓인데, 어차피 부도는 나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 그냥 있는 돈이라도 가지고 도망을 쳐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도미노 현상이과 같은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를 들면, 아이가 세상에 나오기 이전에 이미 부모가 먼저 있고, 기성세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부모의 자식이라는 관계 속에서만 자기 자리가 위치한다. 이렇게 되면 실은 자기 절대화는 허용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자기 자리가 !!

제가 여기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자식’ 이라는 관계 속에서만 자기 자리가 위치하고, 자기 절대화는 허용되지 않는다” 라고, 그렇게 적어놓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결코 인간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라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양희은이 ‘부모(?)’ 라는 노래를 부르고 했는데,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 부모에게 물어본다고 하는 내용의 노래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물어봐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자기가 절대자가 아니라 기존 세계가 절대이다. 기존 세계의 관계 그물 구조가 멈추지 않고 각종 정보와 관계를 팽창하면서 자존하고 자생하는 중이다. 만약 기존의 관계망에서 도망치고자 한다면, 이는 곧 ‘사회적 죽음’을 맞이하는 셈이다. 신체의 숨이 끊어지는 것과 상관없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존재가 되면 살아도 산 사람이 아니다.

◈ 이름 자체에 이미 선악과 정신이 !!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죽음’ 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살아있어도 나타나지 않으니 이미 사망한 것으로 간주해버린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흔히 연예인들이 대중에게 잊혀지면 이러한 표현을 종종 쓰기도 하는데, 즉 ‘잊혀진 존재’ 라고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이름’ 인데, 사람은 원래 태어나면 자기 이름이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자기 이름이 있어서 자기 가슴에 명찰을 붙이는 게 아니라, 그 이름을 따라서 그 사람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그 자식은 부모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이름을 지어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짓는데, 성이 김씨라고 하면, ‘김지존’은 있어도 ‘김망해’ 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름을 지을 때는 그냥 짓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태어났으면 최고가 되어서 한번 살아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김온유’는 있어도 ‘김괴팍’은 없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이름 자체에 이미 선악과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즉 남의 집안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그들은 죽이 되던 밥이 되건 간에 상관이 없고, 우리 집안만은 무조건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숙’ 이라는 이름도 그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데, 현명하고 지혜로우라는 것인데, 물론 신랑을 잘 만나야 그 이름도 빛이 나겠지만 말이다(ㅋㅋ). 진주도 역시 그러한데, 남의 집안은 모래가 되던지 말던지, 아무튼 우리 집안은 진주가 되어야 하고, 그래서 진주처럼 영롱히 빛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행동이 엉망이라고 하면, 설거지나 청소도 하지 않고 말이다. 그러면 이름 값을 못한다는 것이다.

◈ 사회는 이름이 아닌, 번호 !!

그런데 이 사회에서는 각자가 다 자기가 잘랐다고 하기 때문에, 사회는 그런 이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번호를 매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번호를 매긴다는 것은 모든 것을 균등화를 시키는 것인데, 그렇게 균등화가 되면 이 사회는 세 명이 있어서도 하나이고, 천 명이 있어도 역시 하나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노동시장에 내다가 파는 하나의 상품이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김신애’ 라는 사람이 있는데, 만약에 그녀가 판사가 되었다면, 그 다음부터 이 사람은 ‘김 판사’로 불리는데, 왜냐하면 김신애는 너무 많으니 말이다. 그렇게 많으니까 절단을 시키는데, 즉 “당신은 판사, 당신은 변호사, 당신은 검사” 라고 하던지, 아니면 “당신은 강남에 사는 사람, 당신은 강북에 사는 사람, 그리고 당신은 시골에 사람”, 그런 식으로 말이다.

만약에 그런 분류가 없으면, 그것을 재단, 혹은 절단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사회라는 외부에서 절단을 해주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름은 누구나 다 지어서 가지고 있으니, 그 이름은 통하지 않고, 다만 “당신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라는 것만 있다는 것이다. 어떤 계층에 속하는지 말이다. 그러니 이 부류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주체성이 된다는 것이다. 

◈ 예, ‘피’ 입니다 !!

하지만 성도의 경우에, 십자가 앞에서는 이러한 모든 부류가 다 무효가 되고,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십자가를 앞장 세워서 늘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그래서 그것이 ‘피’ 라고 늘 답변을 해야될 분류에 속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그것을 두고서 ‘하나님께 속한 자’ 라고 하는데, 즉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의 것을 받지 않으면 정답을 모르니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것을 모르는 자들은 당연히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취지에서 우리가 ‘십자가 마을’ 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 마을을 또 다른 부류로서 재단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사회적 죽음에 대해서, 물론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재단이 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어서 하게 되지만 말이다. 그러나 성도는 십자가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러니 바로 그 십자가 안에서 산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즉 성도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었는데,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즉 십자가 바깥에서 죽은 자가 된다는 것이다.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여기서 사도행전 1장 25절을 살펴보겠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행 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 제 곳으로 갔나이다 !!

여기에 보면, 가롯유다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라고 하는데, ‘제 곳’으로 갔다고 말이다. 그러니 이미 재단은 하나님 손에 의해서 되었는데, 그래서 자기의 곳으로 갈 사람은 가야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와 같이 밀어내어야 하는데, 즉 그렇게 잘리고 빨아 당기는 진공 청소기와도 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복음을 쳐보니 교회가 되고, 또 복음을 버리니 같이 다녀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복음, 즉 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눈을 어디에 돌린 것인가? 자기 자신에게 돌린 것인데, 즉 그 교회 내에서 자기의 사회적 존재감을 느끼려고, 즉 “나, 여기 있음”을 이야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 교회는 ‘나, 여기 있음이 필요하지 않아 !!

하지만 교회는 그러한 “나, 여기 있음”이 필요하지 않는데, 그냥 주님 앞에 있으면 되는 것이지, 굳이 교회에서 누군가가 “내가 여기 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해 줄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교회에서 그런 것을 인정해준다면, 그러면 그 사람만 인정해주면 되는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목사가 어려운 점들 중에서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목사가 교회에 처음 온 사람에게 너무 잘해주니, 그런 것을 가지고 삐치는 사람들이 또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전혀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혹시 복음을 아는지 확인하는 것인데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로서 좋던 싫던 기존의 관계망에 운명을 맡겨야 한다. 관계가 좋아하는 쪽으로 자신을 맞추어나가야 한다. 그래야 그 관계망 속에서 나름대로의 자기 둥지를 장만할 수 있다. 

◈ 타인에 대한 친밀감이, 항상 의존성으로 !!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것이 참 중요한데 말이다. 다시 정리를 하면, 이렇게 ‘나’ 라는 것이 있고 타인이 있다고 하면, 그 ‘나’에게는 남이 가진 것이 없는데, 여기에서부터 사람은 친밀감이 생기는데, 그런데 이 친밀감이 왜 위험한고 하니, 즉 신앙과는 반대로 나가는고 하니, 그 친밀감이 항상 의존성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꾸만 남에게 기대고 싶어하는데, 그러니 그런 친밀성을 가지고 기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자기는 이렇게 ‘A, B, C’는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D, E, F’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상대방에게는 있는데, 그런데 자기에게 없다는 것이 자기를 화나게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없는 것을 남이 갖고 있으면, 자기 절대성에 누수가 생기고 빵구가 난 것인데, 그런 빵구가 생긴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이것을 “차이를 메우기 위해서” 라고 하는데, 즉 ‘D, E, F’를 가지기 위해서 친밀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결국에 남에게 친밀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남이 가지고 있는 자기에게 없는 것에 대한 친밀감이라는 것이다.

◈ 엄마, 형님아가 다 가지고 갔어 !!

예를 들어서, 형제가 둘이 장난감을 모두 다 가지고 있는데, 각자가 하나씩 다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놀다가 보면 십중팔구는 둘이서 서로 싸우는데, 왜냐하면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지고 것은 이제 실컷 가지고 놀았으니 그만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것을 주고 남의 것을 가져오면 괜찮은데, 그런데 두 놈이 모두 자기 것은 빼앗기지 않고 남의 것을 가지고 오려고 하니, 그러니 서로 싸우고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싸우면 형이 동생의 것도 모두 다 챙겨서 도망을 가는데, 그러면 동생은 ‘엉엉’ 울면서 엄마에게 가서 일러바치고 말이다.

그러면 엄마는 또 형에서 가서 뭐라고 하는가? “내가 같이 그렇게 서로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같이 안 놀면 오늘 간식은 없다” 라고 협박을 해서 다시 빼앗아 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매일같이 자식들을 조정한다고 젊은 시절을 모두 다 보내게 되는데, 즉 자식들의 자아 조정에 한 평생을 바치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자꾸만 타인을 의지하게 되면?

아무튼 이렇게 인간은 모든 것은 다 ‘차이’를 줄이려고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는데, 그러니 결국 인간은 자기에 대한 친밀성을 확장시켜 나가고, 여기에는 의존성을 드러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해서 타인을 의지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히려 예수님은 타인에 대한 것을 깨부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 친밀성으로서 여기에 대해서 자물쇠를 잠그게 되면, 당연히 자기를 공격하는 예수님은 자기 밖에 세워두게 되는데, 그것이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나오고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문밖에 자꾸만 세워둔다는 것이다. 물론 일요일에는 예수님을 부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월요일부터는 새로운 자기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 또 애를 쓰는데, 그것이 곧 타인의 관계망이라는 말이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이 자기 이름으로 등재된 자기 둥지가 어디까지 확장이 될지, 아니면 어디까지 축소되고, 아니면 어디에서 삭제될지 본인이 하기 나름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자아라는 것은 그때그때 관계망들을 주워 모아 놓고서는 ‘일단 이게 아닙니다’ 라고 단정을 지으면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이 한시적으로 정의를 내린 그 자기관(自己觀)에서 자기 ‘이름’이 매겨진다.

◈ 네비나스 - 인간은 집을 짓는 존재이다 !!

‘네비나스’ 라는 철학자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인간은 집을 짓는 존재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새들이 집을 지을 때 어떻게 하는가? 새들이 만든 둥지를 조사해보면, 그 재료들이 다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서 둥지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마치 인간들과 똑같다는 말이다. 가만히 보면 주위에서 다 주워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집간 딸이 친정에 오면 어떻게 하는가? 무엇을 주워서 가기에 정신이 없다는 말이다. 마치 새들이 나뭇가지를 물어가듯이 말이다.  

그렇게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무엇을 세우려고 하는가? 친정 둥지를 자기 둥지로 이동을 시킨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자기 둥지 안에는 자기 새끼들이 있기에 말이다. 모이를 달라고 입을 벌리고 있는 새끼들이 있기에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참새도 주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신학이고 자기 교회인데, 그렇게 전부가 다 둥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네비나스는 주장하기를, 바로 그렇게 빼앗긴 것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로서 오신 분이 계시는데, 그것이 바로 ‘타인’ 이라는 것이다. 그런 얼굴의 특징은 벌거벗음인데, 완전히 가리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그 둥지는 포장을 하고 페인트칠을 하는데, 즉 자기는 자기를 가리기 위한 위선으로 항상 떡칠을 해놓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기로 인해서 상처를 받은 타인은, 즉 자기가 그 타인의 둥지를 뜯어감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뜯기고 말았기 때문에 노출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완전히 상처를 입은 비참한 모습으로, 그런 타인으로 올 때, 우리는 거기서 새로운 윤리적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유대인 철학자 네비나스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타인의 윤리’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다가왔을 때, 비로소 그 분의 그런 모습이 바로 자기 탓이라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이 네비나스의 윤리관을 그야말로 메시야처럼 여기는데, 양손을 들고 환영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 지젝 - 악마는 일그러진 메시야의 모습으로 !!

그런데 ‘지젝’ 이라는 양반이 나타나서 이 네비나스의 윤리관을 그만 박살을 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젝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그렇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찾아오는 타인이, 즉 그 이웃이 상처받은 이웃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괴물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즉 “악마는 일그러진 메시야의 모습으로서, 즉 어린양의 모습으로 찾아온다고 하는 사실을 네비나스 당신은 왜 모르는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비나스가 그렇게 일그러진 이웃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겠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런 의식은 바로 자기도 지금보다 더 착해져야 하겠다고 하는, 그러면서도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까지도 배려한다고 하는, 즉 보다 더 질적으로 우수한 ‘나’를 정립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젝의 주장은 성화론을 주장하는 인간들에게는 그야말로 쥐약인데, 성화론은 이 지젝에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법정스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무소유’ 라고 하는데, 그 따위 소리를 하다가는 지젝에게서 바로 뒤통수를 얻어맞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사람이 자기 체면과 자존심을 다 끄집어내고 나면 또 나오는데, 불교는 이런 것을 잘 모르는데, 그래서 계속해서 끄집어내기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끄집어내면 낼수록 계속해서 생긴다는 말이다. 퍼내도 또 생기고, 퍼내도 또 생기고 말이다. 마치 무저갱이 자기 속에 들어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 과연 인간이 악마의 지혜를 당할 수 있는가?

그러니 이 악마는 전혀 그리 만만한 놈이 아닌데, 악마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제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지혜를 짜내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머리에 쥐만 나고 머리카락만 빠지지 말이다. 이 악마는 언제나 인간이 생각하는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왔을 때 누구만 알아봤는가? 오로지 마귀만이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주여,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귀신이 들린 청년이 예수님을 일아 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마귀가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청년은 나중에 깨면 “방금 내가 무슨 소리를 했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막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계속해서 교재 44페이지를 보자.

** 이 이름은 언제나 자기를 위한 이름이다. 이 이름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산다. 비록 모호하기 짝이 없고 독단적인 공상을 매일같이 꿈꾸면서 ‘자아 구성’을 멈추지 못한다.

◈ 라캉 - 인간은 자꾸만 환상을 !!

라캉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인간은 자꾸만 환상을 꿈꾸는데, 그런데 그 환상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데도 자꾸만 환상을 꿈꾼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환상을 구성하는 재로는 무엇인고 하니, 기존의 있는 것들을 끄집어당기는데, 하지만 그것이 환상의 내용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지었다가 허물어버리는데, 그리고는 또 다시 짓고 또 허물고 말이다. 그렇게 하면서 정작 자기가 어디까지 가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대중가요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는데, 저는 대중가요를 거의 모르는데 말이다(ㅋㅋ). 가수 강은철이 부른 ‘삼포로 가는 길’ 이라고 말이다. 혹시 아세요? 그러면 도대체 그 삼포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참으로 궁금하지 않는가? 그 삼포의 의미는 장소가 명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끝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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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로 가는 길

바람 부는 저 들길 끝에는 삼포로 가는 길 있겠지
굽이굽이 산길 걷다보면 한발두발 한숨만 나오네
아아~ 뜬구름 하나 삼포로 가거든
정든 님 소식 좀 전해주렴 나도 따라 삼포로 간다고
사랑도 이젠 소용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지
저 산마루 쉬어 가는 길손아 내 사연 전해 듣겠소
정든 고향 떠난 지 오래고 내 님은 소식도 몰라요
아아~~ 뜬구름 하나 삼포로 가거든
정든 님 소식 좀 전해주렴 나도 따라 삼포로 간다고
사랑도 이제는 소용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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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여정(旅程)의 존재 ??

이효석의 ‘메일 꽃 필 무렵’ 이라는 소설도 보면, 그것의 주제가 ‘나그네’ 인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 나그네가 도착할 장소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그래서 나그네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여정(旅程)의 존재라는 것인데, 즉 도착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어느 곳에라도 도착을 하게 되면, 무엇을 잃어버리는고 하니, 그만 ‘희망’을 그만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희망을 말이다.

◈ 예수님, 조금만 더 있다가 오세요 !!

그러므로 인간들은 메시야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메시야는 기다리는 것이지 와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메시야가 오게 되면 인간들의 희망이 사라지니 말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죽였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니체가 이야기했는데, 즉 “당신이 뭔데, 나의 희망을 빼앗아 가는가?” 라고 말이다. 그래서 메시야는 아직까지 오면 안 되고, 오더라도 조금 더 있다가 와야 한다는 것이다. 메시야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토스도예프스키의 ‘카르마초프가의 형제들’에도 보면 나오는데, 즉 “예수님, 조금만 더 있다가 오세요. 교인들에게 희망이 있어야 장사가 됩니다” 라고 목사가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는 언제나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해야 장사가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144000명이 다 차이면 어떻게 할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144000명의 정원이 모두 다 차게 되면, 그것을 선언해야만 되는 두 종류의 파가 있는데, 이만희의 신천지와 여호와의 증인이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그들도 나름대로는 다 피할 방법은 만들어놓았는데, 그 144000명에서 조금 빼고 조금 더하고 하면서 말이다. 즉 빈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웃기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비록 모호하기 짝이 없고 독단적인 공상을 매일같이 꿈꾸면서 ‘자아 구성’을 멈추지 못한다. 자아의 경계선을 계속해서 넓힐 때까지 넓혀보는 것이다.

◈ 무조건 지경을 넓혀라 !!

여기에 ‘경계선’ 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인간이 경계선을 어디까지 넓혀 가는고 하니, 이것을 어렵게 말해서 “지평을 넓혔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교육할 때 다음과 같이 했는데, “너희의 비전을 넓혀라” 라고 말이다. 그러면 어디까지인가? 그것은 묻지 말고 무조건 넓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넓히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어디에 가서 선교를 하더라도 어디까지 선교를 해야하는지, 그런 것은 묻지를 말라는 것이다. 무조건 지경을 넓히면서 선교를 하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지경을 넓히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존재의 이유가 되니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걸리는 것은 다 삼키고 다 잡아먹는다. 자아가 타인과 만나는 것은 상대방을 잡아먹기 위함이다. 결혼이 그러하고, 사업이 그러하고, 교인을 대하는 목사의 마음가짐이 그러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잡아먹고, 우정이나 동정이나 친교라는 이름으로 잡아먹기에 나선다. 사람은 자기를 키우는데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본능이 그러하다.

◈ 욕망과 본능과 충동 !!

여기서는 ‘본능’ 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을 보통 ‘충동’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세밀하게 구분을 해서 이야기하자면, 충동 뒤에 본능이 있고, 충동의 그 앞에는 욕구가 있고, 그리고 그 앞에는 욕망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구분을 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그냥 이것들을 다 합쳐서 ‘본능’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욕망은 발생이 되는 것이지만, 충동은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언저리에 돌아다니는데, 즉 배회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충동은 뭔가 목적을 이루고 나면, 예를 들어서, 자기 자식이 서울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면, 일단 그것을 달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는 무엇을 목적으로 삼을까? 하버드에 유학을 보낼까?” 라고 하면서 빙빙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것, 그것이 바로 충동이라는 말이다.  

◈ 의사 며느리를 얻을까? 판사 며느리를 얻을까?

그리고 만약에 자기 아들이 사법고시에 합격을 했으면, 아직 총각인데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아들의 엄마는 팔짱을 끼고서 뭘 하겠는가? “어떤 며느리를 얻지? 격에 맞는 며느리를 얻어야 하는데, 의사 며느리를 얻을까? 아니면 그냥 같은 판사 며느리를 얻을까?” 라고 하면서 빙빙 돌아다니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충동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충동은 결코 발생되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족해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기쁨의 성령의 샘이 계속해서 나올 것이기에 말이다.

(사 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 야, 이번 주일에는 대박을 !!

목사들이 이런 충동과 기쁨의 경우가 언제인고 하니, 설교준비를 나름대로 잘 해놓고 이제 주일날만 기다리는데, 즉 “이 설교를 이번 주일에 터트리면 대박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주일날 막상 강대상에 올라가서 보니, 설교를 들을 사람들은 이미 몇 명은 바빠서 교회에 나오지 않고, 또 자기는 대박이라고 하는데 그만 너무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교인들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듣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목사에게 허무가 찾아오는데, 그래서 제가 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의 일인지 아닌지 판가름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죄를 짓던지 짓지 않던지 상관이 없이 과연 감사가 우러나오는지, 그것만 보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감사는 충동을 이기는데, 즉 감사는 한도 없고 끝도 없는데, 고맙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 감사한다는 것 자체가 조건 !!

사실은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감사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언제까지 계속해서 만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자기가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러니 모든 곳에서 다 감사가 마구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감사의 조건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감사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조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감사의 조건을 따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감사의 조건을 만들게 되면, 그것이 충동이 되고 또한 욕망이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자아의 시선은 가정과 기업과 민족과 교회의 경계선마저 주저 없이 타 넘어간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돌리는 데가 있다. 사람이란 가축이나 들풀과 다르다. 사료로 모든 만족이 채워지지 않는다. 악마가 인간을 데리고 다니면서 구경시켜준 데가 있다. 인류의 모든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몸을 바치고 싶은 숙원사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곳은 자신만의 왕국이다. 한바탕 구경을 하고 나서는 남이 벌여놓은 판이 싫어진다. 내 왕국을 갖고 싶어한다.

◈ 천국에는, 주님의 이름이 박힌 자들만 !!

이렇게 인간은 자기 이름이 걸려있는 자기만의 왕국을 갖고 싶어하는데, 하지만 원래 천국은 어떠한 곳인가?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전부가 다 자기 이름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이름이 걸려있는 천국을 만들어놓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다 가짜 천국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진짜 천국에는 우리 인간의 이름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미 이마에부터 주님의 이름이 박힌 자들만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자기 이름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냥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마에 박힌 대로 그렇게 운명이 바뀐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여분의 모든 것을 이 왕국건립에 쏟아 붓는다. 자기 생명을 고이 모셔둘 유기체를 만들고자 한다.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각종 형식과 명의가 동원된다. 교회가 주님을 버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담아내지도 못할 생명을, 담아두는 생명으로서 소유하고자 형식과 제도를 차용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이 꿈틀거리는 것을, 즉 자아 보존의 본능을 생명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명의가 살려고 하면 예수님이 나가주셔야 되는데, 즉 자기가 세운 교회이니 예수님은 좀 나가달라는 말이다. 즉 교회가 있어야 ‘나’ 자신이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음을 증명해주는데,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러한 교회를 날마다 부수어 버리는데, 그런 능력이 임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신학, 나의 교회, 나의 가족을 바치라고 주님은 지금도 요구하고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이미 피로서 그런 주님의 질문과 요구에 다 답변이 된 줄 압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의 피를 벗어나지 않고, 오직 주님의 피만 자랑하면서, 그러한 가운데 기쁨과 만족을 얻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11,16 오후 11시 30분에 마침.

                                            아, 오늘 정말 ‘피’ 봤다. 망할 놈의 스틸 플라워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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