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116 피14강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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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091116피p048세상에속하지않은나라

피14강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09 대구강의 18] - [피 14] -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09,11,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 나라’와 ‘세상 나라’ !!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교재 47페이지부터 살펴보겠는데, 지난 시간에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여기에 보면 ‘내 나라’ 라는 것이 있고, ‘세상 나라’ 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니 나라가 이렇게 두 개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나’ 라는 것은 예수님을 의미하는데,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누구인가?” 라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의 부분의 물음표로 해놓고, 아니면 빈 공간으로 해놓던지 말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예수님 나라가 도대체 어떤 나라인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두고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일단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아니다’ 라고 하는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이렇게 “~은 아니다” 라고 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나라를 알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나라에서 왕이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그 ‘나라’ 라는 부분을 잘라내면 예수님의 나라가 보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 나라는 아니다” 라고 했으니 말이다.

◈ 그러면 ‘세상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분위기를 막 띄우려고 하는 전화가 와서 그만 김이 새고 말았는데(ㅋㅋ), 다시 해보면, 지금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한데, 그래서 먼저 예수님의 나라를 알아보고 있는데, 그런데 그 힌트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즉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세상에 속한 나라를 분석해서, “아하,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것이 예수님의 나라이구나” 라고 정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세상을 사람이라고 본다면, 그러면 사람에 대한 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에 속한 나라가 진짜로 그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것은 성경에 잘 나와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이 나라에 대해서 두 종류로 이야기하는데, 먼저 하나는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있고, 그 다음에는 이 이스라엘과 싸우는 이방나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라고 했을 때는 누구와 마주쳤을 때에 그렇게 하셨는가? 그것은 본디오 빌라도 및 유대나라인데, 즉 대제사장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방나라는 물론 예수님의 나라가 아닌데, 그리고 이스라엘도 역시 아니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도 모두 세상 나라 !!

그러니 성경에서 이렇게 두 가지의 나라를 다 이야기하고 있으니, 우리는 이러한 두 종류의 나라를 다 알아서, 왜 이러한 두 가지의 나라가 다 예수님의 나라가 아닌지를 알면, 그러면 예수님의 나라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요 18: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 1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요 18: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현재 신학자들은 이 이스라엘을 교회로 연결시키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이스라엘이 하늘나라가 아니면 교회도 역시 하늘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데, 즉 이스라엘은 하늘나라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누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가? ‘이스라엘’ 이란 나라가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오히려 이스라엘은 악마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악마의 나라는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먼저 하나는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으로 악마의 나라가 등장하고, 다른 하나는 이방나라를 통해서 악마의 나라가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이스라엘조차도 악마의 나라가 되니, 그 어떤 인간이라고 해도 이 악마의 나라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 그러면 ‘국가’ 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지금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점이 무엇인고 하니, 기존의 ‘나라’ 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구성이 되는지, 거기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인간들은 자기의 씨족들로 구성이 되었는데, 이것을 ‘빌리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국가가 처음에는 마을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이런 마을은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역사는 할아버지로부터 해서 그렇게 대대로 내려오는데, 그렇게 씨족을 구성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산이 있고 강물이 흐르고 있으면, 여기에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서 사는데, 이 산을 넘고 강을 넘어서는 또 다른 씨족들이 살고 있고 말이다. 그렇게 한 가지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같이 모여서 사는가? 그것은 그 당시가 농경시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 농경시대는 농사를 짓는 노동집약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즉 농사를 짓는데는 일군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식구 수가 적으면 자연히 수확물이 적어지는데, 반면에 식구 수가 좀 많으면 농사를 제법 크게 지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도 일손이 모자라면, 산을 넘어서 이웃 마을 습격하게 되는데,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약탈’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노예를 만들고 말이다. 여자의 경우에는 임신을 하게 해서 자기들의 씨족을 넓혀 나가는데, 아무튼 그런 식으로 해서 새로운 농지를 습득하고 개간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농경시대는 씨족사회인데, 이것이 요즘 인기 드라마인 ‘선덕여왕’에 보면 잘 나오는데 말이다. 즉 씨족들이 균등하게 골짜기에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데, 거기서 사병도 형성이 되고 말이다. 그런 것을 두고 ‘호족’ 이라고 하는데, 물론 씨족의 의미인데 말이다. 그런 호족들이 모인 것을 신라시대에는 ‘화백제도’ 라고 해서, 그렇게 서로 의사결정을 하고 했다는 것이다.

◈ 국가는 반드시 전쟁용 !!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저기 옆쪽에 백제라고 하는 강력한 나라가 있으면, 자기들끼리는 서로 힘을 합치지 않으면, 즉 그렇게 서로서로 힘을 모이서 자기들의 경계를 지키지 않으면 그만 침범을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국가’ 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발생이 되는고 하니, 반드시 전쟁용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전쟁이 없으면 서로 힘을 합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지묘동이 있고 봉묘동이 있는데, 평소에는 서로 힘을 합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쪽 불로동에서 쳐들어온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일시적이지만 서로가 좋던 싫던 간에 힘을 합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서 갈라서든지 말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쟁이 없으면 국가가 성립하지 않고, 서로 그냥 평화롭게 산다는 말이다.

왜 선덕여왕에 보면, 미실과 덕만 사이에 내분이 생기니 어디서 들먹이는가? 백제가 쳐들어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시적으로나마 단결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니 국가라고 하는 것은, 전쟁이라는 사건이 국가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러니 전쟁이 없으면 국가는 당연히 없어진다는 것이다.

지금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서로 싸운다고 난리인데, 그런데 북한에서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 내부적인 싸움을 중단하고, 북한이라고 하는 공통의 적을 향해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싸운다는 것이다. 거기서 태극기는 국가를 상징하는 깃발이 되는데, 그렇게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되었다가, 그 전쟁이 끝나고 나면 다시 과거처럼 서로 치고 박고 난리를 친다는 말이다.

◈ 국가는 곧 육의 나라 !!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런 국가는 ‘육의 나라’ 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육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는데, 그것이 바로 육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씨족이나 호족이 무엇인가? 모두가 다 인간의 몸에 의해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낳고 해서, 즉 그렇게 자식새끼를 낳아서 뭉쳐진 관계인데, 그것을 ‘혈연관계’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육(肉)’ 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이러한 육에서 영의 나라로, 즉 예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느냐는 말이다. 지금 제가 이렇게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육의 나라에서 영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 같나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이 국가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바탕에서 당기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제가 서울에서 강의를 하면서 그것을 ‘조총(?)’ 이라고 하는데, 왜 엿을 만들기 전에 물컹물컹한 그것 말이다. 고체도 아닌 것이, 액체도 아닌 것이 말이다. 그것을 살짝 잡아당기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당겨진 체로 굳어지게 되면 그것이 바로 엿이라는 것이다.

◈ 우리 몸에서 당기는 것이 곧 ‘육’ !!

그렇게 뭔가 우리 몸에서 기본적으로 당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육’ 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혈육이라고 하는데, 예수님도 이 혈육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는데 언제인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하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1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때는 뭔가 당기는 것이 있는데, 혈육 중심이 당긴다는 말이다. 11시에 예배시간에 참석은 하지만, 그러나 예배를 마치고 곧장 어디로 가는가? 자식새끼들에게 밥을 해주려고 집으로 곧장 뛰어간다는 것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아빠, 힘내세요 ??

그러니 교회에서 제 아무리 철야기도회를 하고 40일 금식기도를 해도, 그것은 예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 그것이 궁금하고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지금 자기가 전방 위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자기 자식은 이번 수능시험에서 좀 좋은 점수를 받도록 해달라고, 그래서 기도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뒤에는 누가 있는가? 자기가 지키고 사수해야 될 혈육이, 즉 가족이 있다는 말이다. “아빠, 힘내세요” 라고 하는, 그야말로 자기 눈에 넣어도 전혀 아프지가 않은, 그런 꼬물꼬물 거리는 자기 자식새끼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이렇게 철저히 가족중심이고 혈육중심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도저히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 나라’, 즉 예수님의 나라에 가려고 하면 무엇이 끊어져야 하는가? 이러한 가족중심이고 혈육중심이 모두 다 와장창 끊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경우에 !!

구약의 아브라함의 경우에, 그는 원래 무슨 중심인가? 당연히 혈육중심인데, 그런데 그가 하늘나라에 가려고 하면 그 중심이 혈육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래서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고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지, 그 속은 여전히 혈육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가 와서 자기 아내인 사라가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해도 믿지를 않았는데, “나도 늙고 내 아내도 늙어서 경수가 끊어졌는데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미 태가 죽었는데, 즉 아기집도 없는데, 어떻게 아기가 태어날 수 있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 않는가? 아기집이 멀쩡해도 아기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도 수두록 한데 말이다.

그런데 그때 누가 태어났는가? 이삭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이삭에 속한 노선이 따로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언약의 노선’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육으로 나는, 즉 이스마엘에게서 난 노선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노선이 두 개라는 말이다.

◈ 왜 두 가지 노선인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삭 노선과 이스라엘 노선으로, 그렇게 두 개를 만드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 약속의 노선만이 최종적으로 천국에, 즉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에 속한 노선은 천국이 아니니,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즉 가족중심인 혈연중심은 지옥에 가고, 반면에 육에서 영으로 난 사람은 하늘나라를 본다는 것이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것을 가지고 한국교회가 얼마나 사기를 치던지 말던지 간에, 그것과 상관이 없이 성경말씀은 전혀 한 치의 틀림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가 뭐라고 하는가? “여러분, 열심히 기도하시면 여러분의 가족이 잘 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구라를 쳐서 고객들을 확보해놓아도,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육으로 난 것은 그냥 육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헤어지려면 그냥 헤어지라고 한다는 것이다.

◈ 세상의 나라는, 인간의 ‘피’ 중심 !!

그러므로 아무리 성경을 불태우고 없앤다고 해도 이러한 사실은 전혀 변함이 없는데, 그러면 진리는 무엇인가? 가족중심, 혈연중심에서 벗어나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 세상에 속한 나라, 즉 가족중심이고 혈연중심의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의 나라를 조사해보니 인간들의 피 중심인데, 예수님의 피가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국가에서 전쟁이 일어날 때는 이 모든 씨족들을 하나로 집결시킬 힘이 필요한데, 그렇다면 여기에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명령체계가 필요한데, 그래서 마치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꼭대기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되어버리면, 이 둘 사이에 권력이 분산되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명령체계가 이렇게 두 개로 나누어지게 되면, 여기에는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잠시 ‘민주주의’에 대해서 !!

바로 이것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것이 발생하게 되는데,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민주주의는 악마의 제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신문에 보면 노회를 민주적으로 해야한다고 하는 기사들이 있는데, 물론 기독교 신문이 악마의 신문이기에 그렇지만 말이다. 이 민주적이라는 것이 얼마나 악마적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이 민주적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악마적이고 마귀적인지를 말이다. 당회도 민주적으로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마귀적으로 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들이 왜 그런 소리들을 하는고 하니까, 이 민주주의라는 것이 유럽의 봉건주의 사회에서 그 어떤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로 정착을 하게 되었는지, 그러한 과정에 대해서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민주주의가 좋은 것으로만 알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여러분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혹시 주무세요?

◈ 먼저 유럽의 ‘봉건주의’ 제도를 !!

유럽의 ‘봉건주의’ 라고 하는 것은, 표현 자체가 상당히 구식 냄새가 나지요? 이 봉건주의는 그 이후에 ‘입헌군주제’ 라는 것이 등장하는데, 상당히 말이 어렵지요? 이 군주가 무엇인고 하니, 일종의 임금인데, 그런데 왕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임금과 왕이 다르다는 말인데, 임금은 왕 밑에 있는 하나의 졸다구라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말이다.

사실상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왕은 중국에 한 사람만 있고, 임금은 여러 명이데, 그 중에서 조선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종속관계인데, 즉 주종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니 “으흠, 여봐라” 라고 하면, “예, 여기 있습니다” 라고 꼬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존의 왕을 다른 임금들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황제’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임금인가? 황제인가? 황제라는 것이다. 그것을 ‘절대주의국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고종을 황제라고 하는데, 왜 그런 표현을 쓰는고 하니, 더 이상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의미인데, 그러니 그 이전까지는 중국의 내정간섭을 받는 임금이었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반드시 서열이 있는데, 특히 권력자들끼리는 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서로가 동등하다고 하게 되면, 분명히 서로 힘의 차이가 나는데도 그렇게 막 먹으려고 하면, 그렇게 하다가는 힘이 약한 쪽이 언젠가는 얻어맞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돌아간다는 말이다.

◈ 임금이 있는 ‘입헌 군주제’ !!

여기서 ‘입헌 군주제’ 라는 것은 왕이 아니라 임금인데, 그리고 입헌은 요즘 말로 하면 의회제도이고 말이다. 즉 임금은 있지만 각 지방의 유지들이, 즉 산과 강을 경계로 해서 살고 있는 그 지방의 유지, 즉 호족들이 평소에는 자기들끼리 그냥 살다가 어떤 위기가 닥치게 되면 서로가 힘을 합치기 위해서 모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전쟁과 같은 것인데, 그런 위기가 닥쳐오면 임금은 그들의 사병을 모집해서 공동의 적을 물리친다는 말이다. 물론 임금은 평상시에는 각각 지역의 행정체제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고 그들의 자율성을 인정해주는데, 세금만 받고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각자의 독자적인 체제를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종의 지방 자치제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러한 것을 두고 ‘state’ 라고 하는데, 지금 미국이 무엇인가? 그냥 ‘아메리카’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이 미국을 ‘미연방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 라고 한다는 것이다. 50개의 ‘state’가 모인 말이다.

◈ 결국, 인간은 혈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

우리가 지금 왜 이런 공부를 해야하는고 하니,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인간은 아무리 해도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한, 그런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다 성이 같은 한 가족이고 친척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 왔다고 하면 그 사람은 나그네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객이 되고 나그네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과거 농경시대에는 토지가 없으면 그냥 빌어 붙어서 살아야 하는데, 이렇게 빌어먹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거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토지가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농사일이 없으면 굶어죽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곳에 가든지 말이다.

◈ 계란이 왔어요, 싱싱란이 왔어요 !!

요즘도 마찬가지인데, 정규직이 아니라면 2년 계약직으로 들어가는데, 그 계약이 끝나면 다른 회사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영업을 해도 점포가 없으면 떠돌이가 되고 마는데, 시골 장터나 떠돌아다니는 말이다. 물론 요즘은 각 아파트마다 장이 생겨서, 그런 장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점포가 있는 사람들보다 더 수입이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파트의 부녀회에 자릿세를 얼마나 뜯어먹는지, 그것도 요즘은 별로 재미가 없다고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고정된 자기 가게가 없으면 그렇게 돌아다니게 되는데, 자동차에 계란을 가득 싣고는 “방금 갓 태어난 싱싱한 계란이 왔어요” 라고 확성기를 틀어놓고 온 거리를 다니듯이 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기존의 점포에서 자리를 잡고 일하던 사람들이 좋아하겠는가? 당연히 내치게 되는데, 그러니 결국은 손님도 없는 곳에서 장사를 하다가, 또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만약에 땅이 없다고 하면 !!

그러니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자기 땅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가? 땅이 없으면 곧 나그네인데, 그런 경우에는 그야말로 비참하기가 짝이 없는데, 정말이지 그것처럼 서러운 게 없다는 것이다. 아마 자기 가게도 없이 장사를 하다가 쫓겨난 경험을 한 사람은 잘 알지 싶은데 말이다.

그런데 어떤 마을에 있어서 누군가가 그 땅을 차지한다고 하는 것은, 경제를 공부해보면 그런 것이 다 나오는데, 아무튼 땅을 새롭게 개간을 하던지 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개간을 하게 되면 임시적으로 그 사람의 땅으로 인정해준다는 말이다. 

성경에도 보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있을 때 애굽 사람들이 무엇을 시켰는고 하니, 개간을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조건을 내거는데, 즉 “너희들이 개간을 하면, 그 땅에서는 50년 동안 살고 나서 돌려다오. 비록 씨는 다르지만, 그 땅에서 먹고살도록 선처를 해주겠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성씨가 다르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문제인데, 만약에 경주 ‘이’씨가 살고 있는 땅에 다른 ‘우’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와서 농사를 좀 짓겠다고 한다면, 기존의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정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지금 농사를 짓는 땅이 아닌, 다른 땅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고, 20년 이후에 돌려주시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것이 선덕여왕에도 보면 나오는데, 지금 경주의 안강 근처에서 민란이 일어나니, 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왕이 그들에게 농사를 개간하도록 해주고 세금을 감면해주려고 하니, 그 지역의 호족들이 또 반발을 하는 장면이 말이다.

◈ 세상 법은 언제나 강자의 편 !!

물론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자기가 개간하면 자기 땅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 몰라도, 하지만 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와서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한다면, 당연히 힘이 센 사람이 와서 빼앗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법이라는 것이다. 즉 법은 이렇게 언제나 힘이 센 강자 편인데, 그러니 법은 항상 강자가 진리인데, 즉 정치적으로 강한 자가 다 먹어버리는 것이 곧 법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약자는 항상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

그래서 성경에 보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항상 보호하고 돌보아라” 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이 세상은 언제나 자기 혈육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씨’가 다르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맞아죽어도 당연하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와도 같다는 것이다. 

(출 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출 22: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 하필이면 왜 ‘아들’ 인가?

그러니 옛날 씨족사회부터 무엇을 그렇게 중요시했는고 하니, 자식을 낳는 것을, 그것도 아들을 낳는 것을 그렇게 귀히 여겼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힘인데, 그러니 자손이, 즉 대가 끊어지게 되면 그것을 저주로 보았다는 말이다. 반면에 자손이 번창하게 되면 그것을 축복으로 여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적자원이 중요한데, 땅을 모두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고 말이다. 즉 자식을 순풍순풍 잘 낳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주신 복인데, 그렇게 많은 자손으로 땅을 잘 개간해서 영원토록 자기들의 가문을 이어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런 정착할 수 있는 복을 주셨다고 본다는 말이다.

◈ 결국, 땅을 위한 하늘 !!

이러한 방식으로 철저하게 구약과 신약을 보게 되면,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본다고 하더라도, 하늘을 그냥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늘이 무엇으로 당겨지는고 하니까, 모두가 다 땅에 속한 것인데, 즉 자기 식구와 자기 집안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땅을 위한 하늘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언제나 하늘을 쳐다보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늘이 좋아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늘에 있는 전능한 힘을 당겨서 땅을 더 융성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이 땅에서 더욱 더 번창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늘을 쳐다보고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고 갓바위를 찾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알 수 있는데,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런 혈육적인 본성에서 떠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조총’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는데, 이것은 총의 일종이 아니라 엿을 만드는 기본적 재료인데, 그 조총을 손으로 ‘주욱’ 하고 잡아당기면, 거기서 이렇게 튀어나와서 돌출이 되는데, 그렇게 해서는 딱딱하게 굳어진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식으로 여러 번 잡아당기면 공기가 골고루 들어가서 맛있는 엿이 되고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목사님, ‘조총’이 아니라 ‘조청’이 아닌가요?

이런 망신살이, 조총에서 조청으로 수정합니다(ㅋㅋ). 그렇게 조청을 잡아당기면, 그렇게 당겨진 조청과 그 밑바닥에 있는 바탕이 되는 조청의 성질이 서로 차이가 납니까? 성질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잡아당겨진 조청이 그 밑바닥이 되는 조청을 부정할 수 있는가? 전혀 그럴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 출신이 거기이니 말이다. 자기는 거기서 튀어나온 일부이고, 그 기둥은 여전히 조청이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이 제 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부르면서 기어올라가도, 역시 우리 인간은 땅에서 출발한 육이기 때문에 전혀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은 일종의 바벨탑 쌓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벨탑은 제 아무리 높이 쌓아도 그 뿌리가 여전히 땅에 위치하고 있는데, 다만 누가 좀 더 많이 올라가고 덜 올라가느냐는 차이뿐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여전히 같은 조청이라는 것이다. 조총이 아니라 조청이 말이다.

◈ 조청은 계속해서 조총이 아닌 ‘조청’ !!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에 교회에 와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무엇과도 같은가? 그것은 바로 교회에 와서는 지옥으로 가는 것과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지옥으로 통하는 하나의 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럴 바에는 그냥 집에 있어도 되는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10년 20년을 교회에 다녔다고 하면서, 마치 천국에 입성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얼마나 웃기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가 동일한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육적인 인간들에 지나지 않는데, 도대체 그들이 무슨 차이가 나느냐는 말이다.

◈ 임금, 대통령, 왕 !!

바로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 입헌 군주제에서 의회제도로 바뀌게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임금이라고 하는 것은, 각 지역의 호족세력들이 세금을 내어서 그 임금의 생활비를 대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임금의 역할은 무엇인고 하니, 외부의 적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즉 자기들의 영토를 지키기 해서 있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요즘의 대통령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래서 대통령이 취임할 때 뭐라고 선서를 하는가? 국가의 안녕과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존토록 하겠다고 다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키기 위해서 외부의 적들과 전쟁을 하려고 하면 비용이 어떻게 되겠는가?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드는데, 그래서 각 지역의 유지들에게 비용을 각출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 비용이 너무 과다하게 들게 되면, 결국 임금이 유지들에게 빚을 지게 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그때마다 군사로 모집하고, 끝이 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짓고 했는데, 우리나라도 그렇게 했고 말이다. 물론 전문적인 장교들은 그대로 있지만, 일반 군졸들은 그렇게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터지면 나가는, 그런 예비군용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지나다가 이제는 국가가 24시간 밥을 먹여주는 군인들이 생기기 되는데, 그것을 두고 예비군이 아닌 ‘상비군’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상비군이 생기게 되면 세금을 더 거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상비군을 유지하고 세금을 더 많이 거두려고 하면 이 임금의 권한이 전쟁이 아니 무슨 위급한 일이 일을 때만 필요한 임시적이 아니라 항존적으로, 즉 언제나 임금으로서의 그 권한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법을 만들어 더 높은 권력인, ‘왕’으로 !!

그렇게 되려고 하면 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즉 언제나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군사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을 말이다. 그러면 그 법에 의해서 임금의 자리가 바로 권력이 되고, 그런 권력이 일반 지역 유지들이나 호족들보다 더 높은 권력이 되게 되면, 그것을 ‘왕’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왕이 있다는 것은 이미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말인데, 그래서 ‘선덕’ 다음에 ‘왕’ 이라는 것이다. 물론 ‘임금’ 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글자도 임금 ‘왕(王)’이니 말이다.

◈ 드디어 왕이 신의 아들로 !!

만약에 호족이 이렇게 12명이 있는데, 1번이 반란을 일으키면 나머지는 힘을 모아서 왕의 이름으로 여기 1번을 처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왕의 이름이 전쟁뿐만이 아니라, 왕의 이름이 이렇게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 그 권력이 호족에게만 아니라, 그 호족 밑에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도 침투하게 되는데, 그렇게 모든 백성들의 왕이 되려고 하면 종교적으로도 역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각각의 산마다 고을마다 다 섬기는 신이 다른데, 그래서 한 나라에 여러 종류의 신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을 두고 ‘다신교’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왕이 등장하고, 그렇게 해서 국가체제가 잡히게 되면서, 그들이 믿는 여러 신들이 이제는 왕이 믿는 신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게 다신교가 일신교로 바뀌면서 이 왕은 이제 신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그 백성들은 자동적으로 신의 백성들이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니 마치 유사 이스라엘과도 같지 않은가? 사실 이스라엘 당시에 다른 이방 민족들도 마찬가지인데, 그들도 나름대로는 다 각자가 신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할 때는 깃발을 앞세우는데, 거기에는 자기들의 믿는 신의 문양이 새겨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르둑 신의 이름으로!”, 혹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라고 하면서, 그렇게 해서 전쟁에 나가가 된다는 것이다.

◈ 결국 ‘하나’의 국가인 ‘바벨론’으로 !!

그러면 전쟁은 결국 신과 신의 싸움이 되는데, ‘이스라엘’ 이란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인간과 신을 이긴다는 의미인데, 그러니 야곱이 앞으로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야곱의, 그런 개인적인 가족 중심의 야곱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이라는 특정 국가중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나타내는데, 거기에 야곱의 후손이 가동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육의 나라가 점차 점차 확정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늘나라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 나머지 혈육에 속한 나라는 여러 나라가 있더라도 그것을 하나로 만드는데, 그것이 곧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 제국이란 것이다.

◈ 혈육에 속했다면, 곧 짐승에 속한 것 !!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 제국은, 이 땅에 나라가 제 아무리 많아도, 220개가 넘더라도 그것은 바벨론 제국으로, 즉 그렇게 하나로 만들 수 있고, 그 바벨론 제국을 영적으로 표현하면, 바로 그것을 두 글자로 ‘짐승’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 짐승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모든 나라들이 혈육에 속했다고 하면, 그것이 곧 짐승에 속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구약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무슨 층과 무슨 층을 갈라내어야만 하는고 하니까, 이렇게 짐승의 층과 하나님의 층을 이스라엘 내부에서부터 구분해서 해석을 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두 개의 층을 이스라엘 내부에서 말이다.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이 다윗의 나라인지, 아니면 사울의 나라인지, 그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구분이 굳이 우리가 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께서 사건을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즉 다윗에 속한 것과 사울에 속한 것이 어떻게 전쟁을 하게 되는지, 그런 것을 살펴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전쟁 이야기를 이렇게 했고 말이다.

◈ 전쟁을 통해서 권력구조가 !!

다시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전쟁이 일어나야 뭔가 흐릿했던 권력구조가 뚜렷하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전쟁이 일어나야 “나는 점잖은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못하는데, 옆에 폭탄이 떨어지는데 자기가 양반이랍시고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이 있겠는가? “걸음아, 날 살려라” 라고 하면서 마구 뛰지 말이다. 그렇게 전쟁이 터지면 점잖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서, 제 아무리 목사나 신부라고 해도 운전대를 잡고 도로의 전쟁터에 뛰어들게 되면, 그야말로 전쟁광(?)으로 돌변하게 되는데, 김대식 씨가 그것 때문에 운전을 배우지 않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자기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고, “이게 어디서 내 앞에서 속도를 내지?” 라고 하면서 광란의 추격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운전대를 쥐게 되면 사람이 달리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본래 자기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육’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육의 특징은 조청과 같아서, 즉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는 새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줄줄 새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이렇게 육이 있는 이상은 짐승의 본능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이제는 왕의 나라가 !!

아무튼 이렇게 왕이 등장하면서, 그 나라에서 왕의 권력이 세어지게 되면, 그 나라는 그 이전까지는 호족의 나라이고 백성들의 나라였는데, 그런데 왕이 등장하면 그만 왕의 나라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왕의 나라가 된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입장에서는 기분 나쁜 이야기일지 몰라도,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어휴, 이젠 살았다” 라고, 그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는 말이다.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이 없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는데, 그리고 사사기 끝에도 보면 반드시 나오는 것이 있는데, 즉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라고 말이다. 즉 왕이 없어서 자기들 마음대로 했다는 것이다.

(삿 21:25)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 드디어 신이 눈에 보이는 왕의 모습으로 !!

그러니 뭔가 중심이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즉 자기들을 누군가가 좀 잡아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렇게 잡아준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신의 나라이기 때문에, 여기 이렇게 인간이 있다고 하면, 그 보이지 않는 신을 좀 보게 해달라는 것이다. 무슨 모습인가? 사람의 모습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면, 그것은 곧 왕이 되는데, 그러면 백성들은 무엇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가? 그 왕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구원은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축복과 저주의 통로의 이미 한 곳으로 정해져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왕’ 이라는 말이다.

◈ 왕 하나 잘 만나면 !!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백성들은 좀 부족하고 제대로 살지 못하더라도 왕이 제대로 하기만 한다면, 즉 제대로 된 왕이 있다고 하면, 바로 그러한 왕 덕분에 백성들은 편안하게 복을 받아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잘난 왕이 있으면 말이다.

예를 들어서, 신라시대에 있어서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면, 그 책임은 누가 지겠는가? 왕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왕이 해야하는 종교적인 일을 누가 했는고 하니까, 제사장들이 정기적으로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말이다. TV에 보니 매일같이 다 여자 제사장만 나오던데, 고구려의 주몽의 경우에도 그러했고 말이다.

그러한 제사장들이 신에게 축복을 구하고, 국가와 왕의 안녕과 평안을 구하다가, 그렇게 하다가 아주 다급한 시기가 닥쳐오면, 즉 일식이 된다든지 가뭄이 닥쳐오게 되면, 왕은 제사장을 쫓아내고 자기가 직접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는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라 무슨 옷을 입고 나가는데, 그것이 바로 ‘에봇’ 이라는 것인데, 다윗이 입었던 말이다.

그렇게 왕 자신이 제사장의 옷을 입고 나가서 산 제물이 되고 제사장이 되어서 신에게 비는데, 물론 그 뒤에는 신하들이 다 엎드려 있고 말이다. 즉 이전에 제사장들이 가던 제단에는 이제 왕이 나와서 “오, 신이시여! 복을 주시옵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왕의 모습을 백성들이 지켜보면서 !!

바로 이러한 광경을 육에 속한 가족 공동체가 지켜본다고 하면, 그때는 모든 권력이 어디에 집중이 되는가? 그들은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장면을 지켜보게 되고, 그것이 바로 왕이 드디어 모든 권력을 취하게 되는 시점이 된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솔로몬의 성전이 완공이 되고 나서 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가? 제사장이 아닌 솔로몬 왕이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그렇게 하자 그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니 왕만 놀란 것이 아니라 제사장과 백성들이 모두 다 놀랐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전을 완공해서 왕이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해서 놀랐다고 하는 것은, 앞으로 이 국가가 솔로몬 왕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그것을 언약화를 시킨 것이 곧 다윗언약인데, 즉 다윗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러한 국가체제로 가되, 반드시 다윗의 언약에 따라서 자손이 나오는데, 다윗이 아닌 다윗언약에 따라서 말이다. 바로 그 자손이 모든 하나님의 법을 이루는 영원한 메시야가 된다는 것이다.

◈ 과연, 민주주의 제도인가? 왕 제도인가?

그렇다고 하면,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백성들이 과연 민주주의를 원하겠는가? 아니면 왕을 원하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왕을 원하는 쪽이 훨씬 더 편안한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왕만 쳐다보면 되니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비해서 이 민주주의는 자기를 쳐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왕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어도 “주여, 이 제물을 보고 용서해주세요” 라고, 그렇게 성전에서 기도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패배를 해도, 다음에는 승리케 해달라고 하고, 또한 가뭄이나 기근이 와도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주고, 이스라엘에 복을 내려달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열왕기상 9장에 보면 나오는데,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실제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그렇게 약속을 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주시겠다고 말이다.

(왕상 9: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왕상 9: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왕상 9: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왕상 9: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왕상 9: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그러니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편한지 모르는데,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왕이 누구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왕의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왕의 자리만 있다고 하면, 그 누가 오더라도 왕으로 인정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러한 왕의 자리와 왕의 인격이 일치가 되는지 안 되는지, 그것은 도대체 누가 결정을 하겠는가? 그 기준은 백성들이 정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백성들은 자기들의 육적인 욕심과 합치된 왕을, 그러한 왕을 자기들의 왕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이다.

◈ 그러나, 다윗언약에 의해서 오신 왕은?

하지만 다윗언약에 의해서 오신 왕은 어떠한가? 무엇하고 맞지 않겠는가? 백성들이 원하는 혈육적인 왕과는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했는가? “니, 누구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들이 보기에는 전혀 메시야와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는 말이다.

* 유대인 : 당신은, 누구세요?
* 예수님 : 나는 메시야이지.
* 유대인 : 어, 아닌데?
* 예수님 :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야.
* 유대인 : 지금 뭐라 하노?
* 예수님 : 내가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양들을 찾으러 왔어.

그렇다고 하면 결국은 무엇이 문제인가? 왕이나 왕의 자리가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혈육에 속해있다고 하는 것, 즉 인간은 ‘조청’ 이라는 것이다. 조총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혈육에 속한 인간이, 스스로 혈육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이 자체, 즉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이런 혈육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그 한계,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던지 부처님을 믿던지 간에, 그러한 것은 하늘나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모두가 다 지옥으로 가고 만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이 육으로는 전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 민주주의는, 왕 제도의 분산화 !!

흔히 사람들은 이 ‘민주주의’ 라는 것을 왕 제도에서 변화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이다. 즉 왕 제도가 민주주의 제도로 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왕 제도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다 배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이제는 모두가 다 왕으로서, 그렇게 권력이 흩어졌다는 말이다.

그렇게 흩어졌는데, 그런데 경제적으로 어렵고 대재앙이 닥쳤다고 하면, 그러면 이 왕 자리는 어떻게 되는가? 평상시에는 공백으로 있다가, 하지만 국가에 전쟁이 터지든지 위기가 닥치게 되면, 민중들은 이 공백을 메워줄 영웅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민주주의 제도 아래에서도 언제든지 왕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민중들은 왕을 원하고 있는데, 그러니 왕이 없어진 게 아니라, 왕은 인간 각자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 것이 마음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혹시나 우리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기를 원하는데, 그래서 투표장에 가서 그런 사람임을 고대하면서 자기 표를 던진다는 것이다. 물론 다 속고 말지만 말이다. 그렇게 해서 몇 번 속고 나면 더 이상 투표를 하지 않는데, “어느 놈이 하더라도 다 똑같더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가서 또 찍는 사람도 있고 말이다. 그냥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이명박을 찍던, 그 누구를 찍던 간에 말이다.

그러면 왜 북한은 민주주의가 되지 않는가? 그것은 왕의 권력이 민중들에게 분배가 되지 않아서 그러한데, 그러니 그들은 죽은 김일성 귀신이 없으면 일이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남쪽도 마찬가지인데, 둘 다 육적이기 때문에 말이다. 지금 남쪽은 어느 정도는 왕 제도가 분배가 되었기 때문에, 소위 그것은 언론의 자유라고 하는데, 즉 할 소리는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듣기 싫은 잔소리가 되어도 말이다. 물론 요즘도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 이제는 백성들의 마음에 다 ‘약탈’의 기능이 !!

하지만 우리는 단 한 순간이라도 이 왕 제도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는데, 즉 백성들은 절대군주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쪽이나 북쪽이나 모두가 다 짐승의 나라인데, 즉 하나의 ‘바벨론’ 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왕의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약탈’ 인데, 즉 왕의 자리의 기능이 곧 약탈의 기능인데, 그리고 그러한 기능을 각 사람들마다 다 분배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의 심성에는 무엇이 담겨있는가? 역시 약탈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야, 저 건물은 언제 내 것이 안 되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로또복권이 뭔가요? 그것도 역시 약탈인데, 1등으로 당첨이 되면, 그 돈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복권을 산 다른 사람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주식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1등이라고 하는 허구를 걸어놓고는, 즉 1등이 20억을 받는다고 하면, 그 20억이 행여 자기 미래에 자기의 것이 될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을 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용’ 이라고 하는데, 오늘 참 어려운 것을 하는데, 이 신용이라는 것은, 미래에 결제할 것을 미리 했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신용이라는 말이다. 즉 물건이 팔리지도 않았는데 이미 팔렸다고 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꾸만 물건을 많이 만들게 되는데, 그것을 미리 어음과 같은 것으로 끊어서 팔린 것으로 여길 때, 그렇게 되면 정신도 못 차리게 계속해서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내면서 가격을 매기는데, 물론 그 가격은 상품이 팔렸다고 여기고서 매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로또이고 일종의 도박인데, 왜 그런고 하니 팔리지를 않으면 그 상품의 가치가 그만 모두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주식시장의 선물이나 옵션 같은데, ㅋㅋ)

◈ 리카르도와 마르크스 !!

하지만 옛날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만약에 물건을 하나 만드는데 있어서 8시간이 소비가 되었다고 하면, 그 8시간의 노동가치를 돈으로 계산을 했다는 것이다. ‘리카르도(Ricardo)’의 경제이론에 의하면,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없는데서 만들어낸 인간의 노동력의 가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물건이 제대로 팔린다면 그렇게 되겠지만, 하지만 물건이 예상한 대로 팔리지 않으면 경제공황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오직 희망인데, 즉 “2010년이 되면 이러 이렇게 되고?”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오직 희망을 돈으로 바꾸는 것이 곧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집에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돈을 빌려서 사업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직장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아서 도저히 안 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직장생활은 시키는 데로만 하니 답답한데, 그래서 자기 사업을 벌리는데, 자기 사업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니, 사업을 하면서 “내가 사업을 해서 이틀만에 망해야지”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사업을 하면서 목사를 불러서 개업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감사헌금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언젠가는 자기도 팔자를 고치고 말겠다는 것인데, 즉 한번 제대로 이름을 날려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족들에게는 뭐라고 하는가? “애들아, 지금은 당장 먹고사는 것이 고달파도, 언젠가는 반드시 뜬다” 라는 것이다.

◈ 왜 자본주의가 인기가 있는가?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뜬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왕의 권한을 보다 많이 부여받은 것이 되는데, 그러니 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의 심성이 곧 왕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가 같은 조청이기 때문에 말이다. 즉 왕이나 자기나 다 똑같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도대체 그 왕을 누가 만들었느냐는 말이다. 백성들이 그 왕을 만들었는데, 그런데 그 왕이 제대로 못하면, 즉 돈을 벌지 못하도록 하는 무능하고 형편없는 왕이라고 하면, 다시 당겨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즉 원래 덩어리인 조청으로 당기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민주주의라는 것은, 바로 본인들이 왕이고 신인데, 즉 아무리 왕을 내세워도 언제든지 잡아당길 수 있는, 그런 제도를 인간들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평상시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의 일인데, 진짜 전쟁이 터지게 되면 잡아당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일의 히틀러처럼?) 오히려 그 왕이 백성들을 압박하게 되는데, 재산과 그 모든 것을 다 걷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 왕 제도의 경우에 !!

그것이 사무엘상 8장에 나오는데, 즉 왕 제대로 세우게 되면 궁중의 예쁜 아가씨들부터 해서, 그것이 곧 ‘할렘(?)’ 인데, 마치 대장금의 그 장금이처럼, 임금을 위해서 재주가 있는 귀한 딸들을 상납한다는 것이다. 즉 왕은 “너희들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도 좋은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삼상 8:10)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러
(삼상 8:11)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삼상 8:12)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삼상 8:13)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삼상 8:14)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5)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6)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삼상 8:17)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삼상 8:18)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삼상 8: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삼상 8:20)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 진짜 왕은 어떤 분인가?

하지만 요한복음 10장에 의하면 진짜 임금은 어떤 분인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는 분인데, 하지만 강도와 도둑놈은 어떻게 하는가? 빼앗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양의 것을 약탈해서 임금이 되니, 결국에는 양이 조청이라면 임금도 조청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제 아무리 자기 나라를 건실하게 만들어도, 그것은 결국 인간의 나라이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8장 36절에 보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라고 예수님이 분명히 선언을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말이다. 바로 이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돌고 돌아서 왔는데, 무려 50분이나 걸렸다는 말이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 천국 문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어 !!

그렇다고 하면 오늘날 교회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조청인데, 즉 육적인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우르르 어디로 몰려가려고 하는가? 천국 문을 한번 열어보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천국의 문은 반드시 다윗의 자손에 의해서만 열리기 되어있는데, 그분이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분이 문을 열어서 자기 택한 백성들을 데리고 가려고 하는데, 감히 마귀들이 샘통이 나서 “저 인간은 천당에 가면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아무리 억지로 당기고 해도,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열린 천국의 문을 닫을 수가 없고, 일단 닫히게 되면 열 자가 없고 말이다.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천국에 넣어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분명히 구별되어있다는 것인데, 그 기준은 누가 제시하는가? 다윗의 자손인 그 왕의 일방적인 기준에 의해서 분류작업을 한 결과로서 들어갈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여기서 이 ‘기준’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기준 문제를 언급하게 되면, 교회가 지옥에 가는 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가 퀴즈를 내겠는데, 과연 “이 기준을 누가 정하는가?” 라는 것이다. “1번은, 예수님이 정한다” 라는 것이고, “2번은, 공동체가 정한다” 라는 것인데,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가?

당연히 예수님이 정하시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 예수님의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성경’ 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이 공동체는 일종의 ‘주체대행(?)’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지금 너무 어려운 표현을 써서 죄송한데, 쉬운 말로 그냥 ‘혈육’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공동체가 하나의 혈육이 되는데, 그렇게 되니 이런 공동체에서 내는 기준은 무슨 기준이 되겠는가? 육이라고 하는 조청의 기준을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 주이상스(Jouissance) !!

그런데 어떤 기준을 정할 때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아까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희망은 다른 말로 하면 결과라고 할 수가 있고 말이다. 즉 “그 결과가 이 육에 흡족한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것에 따라서, 그것을 ‘주이상스(Jouissance)’ 라고, 즉 희열, 혹은 기쁨이라고 하는데, 즉 인간의 모든 기준은 육을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기쁘고 즐겁지 않으면 그 기준에서 탈락되고 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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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이상스(Jouissance) - 라캉의 주이상스는 우리나라에서 예전에는 희열, 향락, 향유, 절대쾌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는데, 최근에는 향락으로 통일되고 있고, 아예 주이상스를 그대로 쓰기도 합니다. 미국에서도 ‘enjoyment’ 라고 번역하다가 아예 브루스 핑크는 ‘주이상스’ 라고 써버리죠. 주이상스는 상징계(법, 언어, 이성, 제도)를 넘어서는 즐거움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무의미한, 고통스러운 즐거움이죠. 목표를 향해 힘든 노력을 할때 힘든 노력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죠? 또한 사람들이 엽기적이고 불쾌한 장면을 보려고 할때 그것은 이성과 제도의 관점에서는 전혀 즐거움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묘하게 끌리죠. 그게 바로 주이상스입니다. 최근 조안 콥젝과 지젝등은 주이상스를 죽음충동의 핵심으로 보며(왜냐하면, 주이상스의 추구는 종국적으로 이성과 현실을 넘어서는 죽음의 영역이므로) 칸트의 철학과 연결시킵니다. - 네이버의 질문과 답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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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예수님의 기준은?

하지만 예수님의 기준은 어떠한가? 예수님의 기준은 구약에 의하면 “거룩인가? 아니면 더러움인가?” 라는 것을 기준으로 보는데, 즉 “하나님의 ‘의’ 인가? 아니면 ‘죄’ 인가?” 라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반해서 인간 공동체의 기준은, 얼마나 육을 즐겁게 해주는지,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라캉에 의하면 ‘주이상스’ 라고 하는데, 방금도 말했지만 이것을 기쁨이 넘치는, 즉 ‘joyful’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오잉, 단세포의 기쁨 ??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기쁨은 그야말로 세포수준인데, 알다시피 우리 인간의 몸은 수많은 세포로서 구성이 되어있는데, 그러한 세포를 기쁘게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사실은 이런 것도 참으로 어려운데, 우리 몸에는 두 종류의 세포가 있는데, 하나는 건강한 세포이고 다른 하나는 무시무시한(?) 암세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암세포를 나쁜 세포라고 하면 듣는 암세포가 상당히 기분이 나쁜데, 왜냐하면 이 암세포도 처음에는 모두가 다 정상적인 세포였는데, 그런데 어떤 조건에 맞게 되면 그만 그 정상적인 세포가 암세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암 발생의 원인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암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주어지게 되면, 제 아무리 건강한 세포라고 해도 그만 언제든지 암세포로 바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암세포가 열심히 활동해서 옆에 있는 건강한 세포를 자기처럼 암세포로 만들 때, 그때 이 암세포는 사실 굉장히 즐겁다는 말이다. 하지만 기존의 세포는 어떠한가? 그만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즉 “나는 즐겁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나’ 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지금 이것이 철학자들의 고민인데, 분명히 자기는 즐겁다고 하는데, 그런데 자기 몸이 그 ‘나’ 라고 하는 없다는 것이다.

◈ 욕망, 충동, 즐거움, 주이상스 !!

그래서 철학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정리를 했는고 하니, 인간의 모든 행위는 욕망에서 나오고, 또 욕망은 충동에서 나오고, 그리고 이 충동은 즐거움에서, 즉 ‘주이상스’ 라고 하는 여기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인간의 양심이 무엇을 끊을 수 있는고 하니, 욕망은 어떻게 끊을 수가 있는데, 그것이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다시 말해서, 겉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지만, 그러나 그 밑에 가면 속 사람이 좋아하는 또 다른 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충동인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세포수준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충동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디 요즘 유행하는 신종플루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가? (듣지 싶은데?) 이 신종플루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목사이든 신부이든 간에, 그런 것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가고 싶으면 마구 들어간다는 것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말이다.


◈ 충동의 세계에서는, 즐거움이 곧 진리 !!

바로 이러한 수준에서, 이것을 흐름, 혹은 액체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바로 이런 충동의 흐름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서는 특정한 진리라는 것은 없고, 그냥 무엇이 진리인고 하니, 즐거움이 곧 진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냥 즐거움, 그것이 전부라는 말이다.

그러니 일상적인 윤리와 도덕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고 하니, 욕망과 충동을 자꾸만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다. “야, 가만히 있어. 자꾸만 그렇게 나오면 곤란해”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자기 혼자 있든지, 혹은 꿈속에서는 드디어 나온다는 것이다. 정신 분열증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자기 혼자 있는지 같이 있는지, 아니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고 튀어나오게 되니, 그래서 그것을 정신분열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 인간은 ‘세포’ 수준의 기쁨을 !!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나는 기쁘다” 라고 하는 수준이 어떤 수준인고 하니, 결국에는 ‘나’ 라고 하는 인간이 법적으로나 양심이나 신앙으로 조절이 불가능한 상태, 그런 조절이 되는 않는 레벨, 혹은 층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전혀 조절이 안 되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몇 명이 모이든 간에 그렇게 함께 모여있는 곳에는 충동이 설치게 되는데, 예를 들어서,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재미가 별로 없지만, 하지만 함께 모여서 마시게 되면 모든 욕설도 다 용납이 되고, 그 어떤 음담패설이라고 해도, 그것이 서로간의 소통의 재료가 된다는 것이다.  

◈ ‘충동’으로 살아가는 인간들 !!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바로 충동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데, 교회에 갈 시간에 술이나 먹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이 자기에게는 ‘즐거움’ 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인이 즐겁다고 하는데는, 다른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교회에 안 나오지?”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저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이 즐거워요”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뭐라고 하겠는가? 자기는 교회에 다니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즐겁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을 붙잡고 “당신은 왜 즐겁지요?” 라고 물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충동 수준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인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육으로 되어있는데, 세상에 그런 육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 본인이 다스리지 못한 육을 외부에서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서 다스려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만 주님을 사랑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무엇이 즐거움인고 하니, 예수님의 복음을 생각하는 그것이 마냥 즐거운데, 그것은 영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그것을 육을 가지고 어떻게 흉내를 내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괜히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손뼉을 아무리 치고 눈물을 흘려봐야 그때뿐이지, 그것은 얼마 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서 그것을 조장하면 안 되는데, 만약에 흥분하도록 조장하게 되면 충동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충동의 무엇을 위장하는고 하니, 자신의 타고난 본능적인 것을 복음인 것처럼 위장하게 되는데, 방언을 터지게 한다든지 해서 말이다.

◈ 참된 왕은 죽음의 기준으로 !!

그렇다고 하면, 왕이신 예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목사님, 그러면 외부에서 주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즉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 그냥 놔두고, 영이 와서 주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말은 하기가 쉬운데, 하지만 영이 와서 육과 맞닿게 될 때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육을 죽음의 자리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육을 죽었다고 보게 되면, 그러한 죽음의 기준이 무엇인지, 그 죽음의 기준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50년을 더 산다고 했을 때, 너무 많은가요? 그렇다면 20년을 더 산다고 했을 때, 그렇게 죽어서 관속에 들어있다면, 이미 세포도 다 죽고 말이다. 우리는 그 관속에서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누가 나를 죽였으며, 또 왜 나는 죽어야 하는가?” 라는 것인데, 이러한 죽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지금까지 70년이나 80년을 산다고 해도 그것이 무효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 공평한 것인데, 30살을 살다가 죽던지, 몇 년을 곗돈을 부어서 한국에 관광을 하다가 객사를 하든지, 그렇게 30살에 죽든지, 아니면 70살에 죽으나, 일단 죽으면 서로 비교할 거리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다같이 공히 서로 죽어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남아있는 것이지, “당신은 몇 년을 살다가 죽었는가?” 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100년을 살아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니도 죽고, 나도 죽고 !!

다시 말해서, 서로 불꽃같이 사랑을 하다가 죽으나, 매일같이 싸우다가 결국에는 이혼을 하고 외롭게 살다가 죽으나, 그런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일단 죽으면 죽게 한 그 기준만이 작용하는 것이지, 그동안 살려고 애를 썼던 기준은 다 찢어져서 공중으로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에는 그러한 죽음의 기준이 미리 오게 되는데, 성령을 통해서 말이다. 즉 십자가를 통해서 미리 전달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나는 왜 죽어야 하는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는 왜 죽어야 하는가?” 라는 것이, 공동체 안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저놈도 죽잖아”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다같이 죽어가니, 죽는다고 해서 굳이 자기 자신을 의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 인간은 왜 남을 의식하는가?

그런데 여기서 “남을 의식한다” 라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우리 인간이 왜 남을 의식하는고 하니, 인간은 일다시피 세포 덩어리인데, 그런데 이 세포 덩어리가 하나로 집결이 되면서 주체개념이 생긴다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것을 ‘나’ 라고 할 수가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나’ 라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면, 사실 여기에 ‘나’ 라는 것은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로 통솔이 되는, 그렇게 모아지는 것을 가지고, 흔히 그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인간은 각각이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유기체’ 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 목사님, ‘유기체’가 뭔지 아세요?

하지만 이 유기체가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두고 유기체라고 하는데, 그런데 막상 “유기체가 뭡니까?” 라고 하면, 아무도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물론 연결되어 있다고 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연결이 되어있으면 그냥 연결된 것이지, 그 중심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주체는 중심이지 연결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강강수월래를 한다고 해서 손을 잡는다고 하면, 하지만 어디 그렇게 손만 잡는다고 해서 강강수월래가 되는가? 누군가가 중심이 되어서 “이제 시작합니다. 준비하시고, ‘시작’!” 이라고, 그렇게 해주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주어야 돌면서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그러니 그 시작점이 도대체 누구냐는 말이다. 그러니 시작을 하는 사람이 미리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영혼’은?

그런데 이상하게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영혼’으로 보았는데, 즉 영혼이란 것은 모든 유기체를 통합해서 하나로 통일을 시키는 것인데, 그래서 손이 아프더라도 발도 같이 아파하고 말이다. 그렇게 서로가 같은 하나라고, 그러니 서로가 하나인 것을 잊지 말라고 명령하는 듯한, 물론 어느 구석에서 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명령하는 중심체가 있다고 보았는데, 바로 그것을 영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영혼을 어떻게 보았는가? 인간의 몸을 대신한 신의 공유적 속성을, 즉 신의 거룩을 요구하는 그런 명령을 영혼이 대신해서 앞장서서 한다는 것이다. 마치 학교에서 조회시간에 학생 대표로 누군가가 표창장을 받듯이 말이다. 그렇게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수납해서 나머지 졸병들은 순종하도록, 그렇게 하도록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영혼이라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말이다.

그것을 ‘영혼의 자리’ 라고 하는데, 그런데 학자들이 여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연구를 해보니, 그들은 이런 영혼의 자리가 있다는 것만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곧 주체의 자리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혼의 자리가 있기는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또한 그것이 어떻게 고정이 되는지, 그것도 모르겠고, 아무튼 자꾸만 변한다는 것이다.

◈ 데카르트 - cogito, ergo sum !!

이러한 영혼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데카르트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의심하는 당사자인 나는 의심할 수 없다” 라고 말이다. 바로 그것을 영혼이라고, 곧 주체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sum’ 인데,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이다. “나는 생각한다” 라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생각한다” 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게 의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당사자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하는데, 분명히 그렇게 의심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도대체 어디서 의심을 하고 있느냐는 것인데, 즉 의심하는 장소가 어디냐는 말이다. 손이 의심을 하는지, 머리가 의심을 하는지, 그것이 어디이냐는 말이다.

물론 데카르트는 그 의심하는 장소를 ‘송과체(?)’ 라고 해서, 두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의심하는 장소가 있다고 보았는데, 하지만 나중에 그 두뇌를 잘라서 조사를 해보니 없다는 것이다. 그 두뇌는 그냥 세포로만 되어있지, 그 두뇌의 어느 곳에도 영혼은 없다는 말이다. 즉 대표로 표창장을 받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것이 정자 안에 있다고 했는데, 남성의 생식세포 안에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좀 그렇지만, 아무튼 인간의 생식세포인 정자 안에 영혼이 들어있다고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정자 안에 작은 새끼가 들어있으면, 그 안에 또 새끼가 들어있고, 그리고 또 그 안에 새끼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물론 여자의 난자는 밭이고, 그러니 남자의 정자가 씨앗이 되어서 자식을 결정한다고 보았는데, 성경에도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되어있고 말이다. 그렇게 영혼은 남자에 있어서, 당연히 자식도 남자에 의해서 결정이 되니, 그렇게 남자의 정자 속에 영혼이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심수봉이 노래로도 불렀는데,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 라고, 혹시 아세요? “언제나 찾아오는 두부의 이별이 아쉬워 두 손을 꼭 잡았나 ♬” 라고,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ㅋㅋ).

◈ 그런데, 라이프니치의 경우에는?

아무튼 이렇게 되고 보니까, 그러면 영혼이 어떻게 육과 결합이 되는지, 그 문제가 엄청나게 골치가 아프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치는 뭐라고 주장했는고 하니, 이 영혼을 알기 위해서 육을 쪼개야 된다고 했는데, 바로 여기에서 수학의 미분(微分)이 나왔다는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쪼개보니, 거기에서 ‘사이’가 생기게 되는데, 바로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 손을 대고 있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다스리신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해답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호흡을 주시고 하는 것은, 그것은 글자는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 아하, ‘이미지’ 때문에 !!

다시 말해서,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의심을 하게 되는지, 바로 그 문제에 대해서, 그것이 곧 주체에 관한 문제인데, 오늘날에는 이것을 가지고 ‘이미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뭔가가 떠오르는 것인데, 딱 보면 떠오르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이근호’를 보면 떠오르는 것이 있고, 그리고 ‘김대식’을 보면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그렇게 뭔가가 분명히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떠오르는 이미지가 서로 달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분명히 다른 이미지가 있는데, 그런데 엑스레이를 찍어보면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둘 다 해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엑스레이 사진이 아니라, 실제로 만나서 바라보게 되면 이미지가 떠올라서 “아이쿠, 이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참 사모님과 따님은 잘 계시지요?” 라고,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이런 이미지는 결국 정보의 교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포끼리 뭔가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에 성이 차지 않아서 더 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러니 ‘DNA’ 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 DNA의 서열구조가 서로 달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결국 육에서 나와서 육으로 간 것인데, 이렇게 DNA가 죽는다고 하는 것이고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영과 육의 만남에서, 영은 이미 육을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물론 육은 숨이 끊어진 것을 죽은 것으로 보지만, 영은 죽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영적으로 거부한다면, 그것을 죽음으로 본다는 말이다.

◈ 그러면 언약적인 기준은?

그러므로 성경말씀의 결론은 무엇인가? 인간이 아무리 육을 봐도, 그러한 인간의 육마저도 하나님은 인간의 배후에 있는 영적인 세력에 의해서, 즉 악마의 세력의 관리하에, 즉 죄의 지배아래에 있다고, 바로 그렇게 보는 것을 성경에서는 언약적인 관점, 혹은 언약적인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그 모든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십자가를 지시고 성령이 오시고 말이다. 그것은 오직 언약적 기준이기 때문에, 어제 낮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지만, 영적 장애인이 되어버리면 귀가 있어도 알아듣지를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 그들이 예수님을 그냥 떠밀었는데, 손으로 만져도 그분이 메시야인 줄 알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귀는 분명히 있었지만, 그러나 정작 말씀을 들을 귀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눈은 있어도 예수님을 알아볼 눈은 없고 말이다. 그래서 소경이라는 것이다.

◈ 인간의 자아는 영적인 장애인 !!

그러므로 보는 것은 사실 눈이 아니라, 그 눈을 통해서 자아가 보는 것인데, 그 자아가 바로 영적인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장애인의 자아를 통해서 볼 것이 아니라, 언약적인 기준을 통해서 봐야 하는데, 영적인 기준으로 말이다. 바로 그런 영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받지 않는다고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그렇게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리고 우리도 역시 이러한 영의 일을 전혀 몰라야 될 사람들인데, 그러면 어떻게 알았는가? 12절에 보면, 즉 성령에 오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이 모든 것을 알게 해주신 것을 알게 된다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 언약적인 기준이 없으면, 모두가 ‘꽝’ !!

제 아무리 학자들과 의사들이 연구를 하고 연구를 해도, 즉 문화인류학을 연구하는 자들은 공동체를 연구하고, 정치분야의 학자들이 왕을 연구해도, 그 어떤 연구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영적인 존재로 볼 수 있지 않으면, 즉 언약적인 기준으로 파악을 하지 않으면 전혀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즐거움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마약을 하면 되는데, 부활의 멤버인 김태원이 서대문 교도소에 두 번이나 갔다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기타를 제일 잘치는 가수 가운데 한 명인데 말이다. 대마초를 피우다가 갔다왔는데, 그러면 왜 두 번을 갔다오고 그 다음에 가지 않는가? 물론 대마초를 끊었기 때문인데, 그러면 왜 대마초를 끊었는가? 처음에는 좋았지만 나중에는 그만 시시해져서 더욱 더 센 놈을 찾는데, 바로 그것이 무서워서 끊었다는 것이다. 뭔가 점점 더 빠져 들어가는 말이다.

그것이 곧 즐거움인데, 하지만 그 즐거움은 유효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쾌감의 법칙인데, 즉 점점 더 감소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새로운 즐거움을 찾게 되는데, 그래서 아줌마들이 처음에는 붓글씨를 배우다가 재미가 없어서 치우고, 다음에는 요리를 배우고, 또 그 다음에는 홈쇼핑을 보면서 온갖 물건을 구입하고, 즉 ‘주이상스’ 인데, 즐거움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물건을 사용하는 것보다도, 그렇게 쇼핑을 하고 구입하는 그 자체의 즐거움 때문에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조금 사용할지 몰라도, 결국은 창고에 모두 다 처박아 놓는다는 것이다. 각종 운동기구, 청소기, 안마기 등등 말이다. 처음에는 사용하면 즐거울지 몰라도,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수미 게장도 사서 먹고 말이다. (그래도 먹는 것은 괜찮지 싶은데, ㅋㅋ)

◈ 인간은, 이미 죽은 상태 !!

아무튼 사람은 이렇게 즐거움이 없으면 안 되는데, 하지만 그것을 영적으로 보게 되면 그 모든 것이, 그 사람을 보고 그러한 것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이 이미 죽은 상태라는 것이다. 영적으로 보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해답이 나왔는데, 사람이 산다면 의미가 무엇인가? 즉 우리가 지금 죽어있다고 하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지금 자기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었다고 하는 것은, 즉 남들이 보기에는 살았어도 이미 죽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이미 새로운 기준이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새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

이렇게 새로운 기준이 들어오면, 즉 새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에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사나 죽으나 우리가 누구의 것이 되는고 하니, 오직 주님의 것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된다는 것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렇게 되면 주체가 어떻게 되는가? 즉 자기가 왕이 아니라 누가 왕이 되는가? 자기의 주님의 자기의 왕이 된다는 것이다. 주님이 진정한 왕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나라인데, 그런 사람만이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나라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 너는 어느 나라에 속했지?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개별자로 보지를 않고, “너는 어느 나라에 속했지?” 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비로소 우리의 존재의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즉 “나는 예수님의 나라에 속했는데, 너는 어느 나라에 속했지?” 라고 말이다. “너는 누구야?”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너는 어느 나라에 속했지?” 라고 말이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바로 영적인 기준을 들이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제가 이전에 서울에 갔을 때인지 어딘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어디에 가서 엄청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어떤 낯선 양반이 무엇을 하고 있는고 하니, 그냥 공책에다가 30cm 자를 가지고 선을 죽죽 긋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가게에 사용하려고 그렇게 장부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녹취자 - 저도 매일 선을 긋는데요? ㅋㅋ)

왜 제가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고 하니까,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만 ‘생명책’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 양반은 그렇게 선을 그어서 장부를 만들어 자기의 가게의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는데, 언제 얼마를 팔았는지 말이다. 그렇게 줄을 긋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이미 기준이 있고 질서가 잡혔다는 의미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이 천사를 보내서 선을 긋는데, 그렇게 선을 그어서 그 칸에 누가 적힐지를 미리 다 정해놓고 말이다. 그러니 일종의 분류작업이라는 말이다. 혹은 분리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즉 양은 양대로, 염소는 염소대로, 그렇게 분리를 한다는 말이다.

◈ 성도도 선을 긋는 작업을 !!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장부에 줄을 긋고 계시는데,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것은 천사와 같이 이 세상을 영적인 기준으로 줄을 그으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왕이 그렇게 하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어느 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에게 주체가 머물러있으면 안 되고, 우리의 주체가 속한 그 나라의 주인에게, 즉 예수님에게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이것을 뭐라고 했는가? 갈라디아서 2장 10절에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주님의 ‘주체 넘겨받기’ !!

그렇게 언제가 그리스도에게로 넘겨져야 하는데, 그러니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그 모든 권면이나 명령이 바로 ‘주체 넘겨받기’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간음하지 말라”, 혹은 “거짓말하지 말라”, 혹은 “너희는 거룩하라” 라는 것도, 그 의미가 바로 “이제 너희의 주체를 넘겨라” 라는 것이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라고 하고, 또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고전 6:20, 개역)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렇게 언제나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우리의 주체에서 주님의 주체로 넘겨받으시는데, 왜 그렇게 하는고 하니, 우리가 속한 그 나라의 주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주체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악마의 나라에서는 악마가 넘겨받겠지만 말이다.

◈ 악마가 넘겨주는 ‘주이상스’ !!

그런데 이 악마의 나라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아까 말한 그 이유 없는 기쁨인데, 즉 ‘주이상스’ 라는 것이다. 그러한 충동의 수준에서, 이유 없는 희열과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홈쇼핑을 보면서 물건을 산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을 때려치우고 다시 새로운 것을 사고 말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꾸만 바꿔치우는데, 남자를 5번째 사귀다가 그만 싫증이 나서 6번째 남자를 사귀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처럼 말이다. 교회도 역시 그러한데, 이 교회에 갔다가 저 교회로 가고, 계속해서 그렇게 갈아치운다는 것이다.

지금 교재 48페이지까지 강의를 했는데, 일단 48페이지를 한번 보자.

** 독일의 정치 지리학자인 프리드리히 라첼(1844~1904)은, 진화하는 유럽의 민족 국가를 생물학적 유기체에 비유했다. 그는 민족은 살아있는 존재의 집합체로서 자아의 움직임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 라첼은, 국가를 유기체에 비유 !!

여기에 보면, 라첼은 국가를 유기체에 비유를 했다고 되어있는데, 그렇게 국가가 유기체라고 한다면, 그 안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주체가 들어있는데,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유기체 안에 들어있는 주체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미 공부를 했는지 한번 대답을 해보면 좋겠는데, 그 유기체의 주체가 누구인가? 그것이 바로 ‘나’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 ‘나’의 기준은 무엇인가? 무조건 자기가 더 확대되고, 자기만 더 오래 살고, 자기만 더 잘되면 되는데, 그것이 바로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육’의 기준인데, 그런데 그 ‘나’ 라는 것이 어디에서 나왔다고 했는가? 따로 ‘나’ 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충동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충동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이유도 없이 터져 나오는 기쁨, 즉 주이상스,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사람을 20명이나 죽였다고 하면, 과연 왜 그런 짓을 했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그런 짓을 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살인을 했다는 말이다. 물론 처음에 한 두 명을 죽일 때는 양심의 가책이 되었겠지만, 그러니 자꾸 하다가 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자기의 즐거움을 찾아서 또 죽이고 또 죽이고 말이다. 이번에 주택가에 세워놓은 차량 수 십대에 불을 지른 연쇄방화범이 잡혔는데, 그 사람은 그게 자기의 취미라는 것이다. 곧 자기의 즐거움이라는 말이다.

목사의 경우에, 교인들 200명 정도를 데리고 자미나게 목회를 하다가 목회를 그만 두게되었다고 하면, 그것을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똘마니가, 즉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환장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동기를 찾아가서, 제발 자기가 설교를 한번만 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말이다. 

◈ 왜 선교사로 가는가?

왜 사람들이 그렇게 고생이 되는데 선교사로 가는가? 그 이유는 바로 말하고 싶어서인데, 대한민국에 있으면 강단에 세워주지 않으니, 그래서 바다를 건너가는데, 그 어디든지 가서 자기가 말하고 싶어서 말이다. 예수를 믿던 누구를 믿던 간에, 중요한 것은 자기가 말고 싶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충동으로 인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왜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갑자기 그렇게 쓸쓸해지는가? 우울증에 걸리고 말이다. 살아있을 때 그렇게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제는 자기가 말한 상대가 없으니, 그렇다고 벽을 보고 할 수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노인정에 가서 고스톱을 치든지 댄스를 배우든지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냥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 부부의 가장 큰 불행은?

그런 의미에서 부부사이에 있어서 가장 불행한 것이 곧 대화의 단절인데, 그런 부부는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부부끼리 같이 식당과 같은 것을 하다가 그만 말다툼이 생겨서 열을 받아서 몇 날 며칠을 서로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박이 터지게 싸우든지 해야 아이도 만들어지는데(?), 그런데 서로 말이 없으면,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참 어려운데,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 지금 제 심정을 잘 알겠지만 말이다(ㅋㅋ).

* 남편 : 밥도.
* 아내 : ???
* 남편 : 아는?
* 아내 : ???
* 남편 : 자자.
* 아내 : ???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돌부처와 사는 것인데, 사실 이 정도도 어떻게 보면 대화가 된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의미가 없는 말이라도 자꾸만 해야 되는데, 사실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의미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 여보, 개미가 왜 작지?

특히 부부사이의 경우에는, 의미가 없어도 자꾸만 말을 서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자가 신랑을 보고 “개미가 왜 작지?” 라고 하면, 그러면 남자는 “이게 미쳤나? 개미와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야?” 라고 하면, 그렇게만 해도 벌써 대화가 두 마디나 진행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화라는 말이다. 그러니 의미가 없더라도 계속해서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TV가 나오고 난 뒤에 어떻게 되었는고 하니, 이제는 그 TV를 통해서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데 말이다. 즉 “나는 저 인간이 나오면 TV를 안 본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대화가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가 의견이 맞지 않아서, 남자는 축구경기를 보려고 하고 여자는 드라마를 보려고 한다면, 그래서 한 사람이 그만 삐쳐서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큰 일인데, 그러면 보통 남자가 뭐라고 하는가? “어서 빨리 안 들어오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여자는 못 이기는 척하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가 축구경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를 보게 되는데, 남자는 보기 싫어도 할 수 없이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드라마의 내용을 좀 아는 것이지, 결코 TV 드라마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ㅋㅋ). 그렇게 해야만 부부사이가 유지가 되는데, 그러니 남자가 속도 비좁게 “나는 드라마를 안 봐”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목사님은 아까 주체를 ‘이미지’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그것이 이미지라기보다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서 아는 것이 아닌가요?

◈ 얼굴은, 이미지를 대표적으로 !!

물론 그러한데, 하지만 얼굴이 그 사람의 이미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몹시 화가 났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의 얼굴만이 마구 일그러지고 인상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손과 발이 부르르 떨리고, 또한 소화도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온 몸이 다 반응을 하는데, 하지만 보통 이 얼굴 이외에 다른 것은 미미하게 나타나니 그냥 무시를 하게 된다는 말이다. 다만 인상이 일그러지는 것은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얼굴에 드러나지만, 그러나 사실은 “저 사람은 화가 나면 밥도 제대로 먹지 않더라” 라는 것까지 포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 전체가 세포 덩어리인데, 그러니 하나의 유기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유기체가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는 것은, 그것을 ‘개별자’ 라고 하는데, 왜 그런 차이가 나는고 하니, 세포 수준에서 번식을 하다가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포수준에서 이유가 없는 것인데, 무조건 번식이고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즐거운 것이 곧 진리가 된다는 말이다.

◈ 성령이 아니면, 관리는 임파스블 !!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이 성령이 아니면 도저히 관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목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그 교회를 떠나게 되면 서로 싸우고 난리가 나는데,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광주 쪽을 염두에 두고서 하는 말이 아니고, 그 어느 교회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내가 이 정도로 성화가 되었으면 스스로 관리가 된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세포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세포들은 자기를 사수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악을 하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는 관리한다는 것이 전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매일같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나는 이미 죽은 자이다” 라고 깨닫게 하시는데, 즉 하늘나라의 기준은 자기를 죽이고 그 안에 누가 사는고 하니, 오직 예수님만을 살린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기준만이 용납이 되는, 그곳이 바로 예수님의 나라이고, 하늘나라이고, 천국이란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는 새 언약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새로운 기준에 돌입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자신이 왜 죽을 수밖에 없고, 왜 그렇게 지독하게 자기 중심인지를 평생을 통해서 깨닫게 해주시고, 그러한 죄인을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오직 긍휼을 베푸셔서 살도록 해주셨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11,27 오후 7시에 마침.

                                     오늘 스틸의 1차 방어전 성공, 굿 !!  아니, 이것이 나의 주이상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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