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221 피16강 정의(노동의 댓가)냐 vs 지시(간섭)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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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091221피p070정의냐지시냐

피16강 인간 노동(정의) vs 갈라서게 하는 생명(예수님의 노동) 
       - 정의(노동의 댓가)냐 vs 지시(간섭)냐 

[09 대구강의 20] - [피 16] - 정의 구현인가? 지시 받기인가?
                                                                                
                                                          10,12,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나님의 노동 !!

오늘은 교재 70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사람이란 노동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그 모든 공로와 영광을 더욱 더 자기에게로 모아들이는 경향을 지닌다. 자신이 행한 노동만큼 그 어떠한 경우에도 그 가치를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 가스 배관을 타고 내려오면서 도적질을 하는 도둑이 제 딴에는 얼마나 수고가 많은가? 유다 나라를 삼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는 바벨론 군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 속에서 행군을 감행했을 것이다. 고생에 합당한 열매를 자기가 챙기고 싶어서 그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에 보면 “노동은 고생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고생하는 것은 모두 노동인가?” 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런 이야기를 여기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고생을 하게 되면 그 고생에 합당한 열매를 기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 교제에도 예가 나오지만, 가스 배관의 타고 도둑질을 하는 도둑놈의 경우에도, 그 도둑은 중력을 무시하는 그런 중노동을 하게 되는데, 그러니 당연히 그 도둑도 거기에 합당한 자기 노동의 열매를 기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도 그런 고생을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 도둑놈은 뭐라고 생각하는고 하니, “나는 이런 고생을 했기 때문에 이러 이러한 열매를 얻는 것이 합당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을 바로 ‘정의’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내 고생의 열매가 맺힐 때 - ‘정의롭다’ !!

언젠가 제가 ‘정의롭다’ 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 싶은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고생을 한만큼 열매가 맺히게 될 때, 그때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도둑의 경우에 가스 배관을 타고 고생을 해서 자기에게 소득이 생긴다고 하면, 물론 빈집을 턴 경우겠지만 말이다. 그때 그 도둑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자기 나름대로는 그것을 두고 정의롭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해서 지금부터 심도 있게 강의를 한번 시작해보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 것을 두고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지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해답부터 먼저 살펴보게 되면, 여기 이 교재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다른 노동이 나온다. 다른 노동의 질이 있었다. 예수님이 하시는 노동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6:48)”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

여기에 보면, “하나님에게는 다른 노동이 나온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어떠한가? 자기가 고생을 해서 열매를 맺는 것을 정의롭다고들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다른 노동을 말씀하시는데, 즉 하나님의 하시는 노동은 무엇인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노동은 열매로 이어지는데, 그것이 곧 생명을 주는 열매라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해 인간노동의 열매는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죽음의 위치와 생명의 위치에서 거꾸로 소급을 해보면, 이 인간노동의 열매는 자기를 죽게 하는 열매이고, 그러니 결국에 인간의 노동은 아무리 해봐야 자기를 죽게 만드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살려고 노동을 했는데, 그만 죽음으로 이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 6장에서 !!

요한복음 6장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데, 그때 인간들의 신체 에너지가 얼마나 소모가 되겠는가? 그렇게 예수님을 열심히 다녔는데, 그것도 역시 노동에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노동에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만한 노동의 성과, 즉 열매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즉 그렇게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다시 두 번 다시는 만나지 않는 갈라섬의 계기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헤어지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왜 자기를 따라 왔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는가? “그들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 하면 생명의 열매를 얻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요 6:24)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요 6: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노동을 !!

그러나 예수님의 노동은 사람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누구와 관련이 있는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노동을 해서, 거기서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당연히 인간이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꾸만 자기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설치는데, 심지어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겠다고 하는 것조차도 열매를 초래하게 되는데, 하지만 이런 인간들의 열매와 예수님의 열매가 같으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고 하면, 즉 자기가 그러한 노동을 했다고 하면 당연히 그만한 열매를 기대하게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 열매가 예수님의 열매와 같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전혀 같지 않다는 것이다.

◈ 노동에도 질이 !!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계속해서 발로서 차시는데, 즉 우리 인간들이 열심히 전도를 했다고 해도 발로 차고, 기도를 했다고 해도 차고 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와 예수님이 하시는 것은 전혀 다른데, 그야말로 정반대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래서 가스배관을 타고 다니는 도둑놈도 뭐라고 하겠는가? “너희들이 열심히 교회에 다닐 때, 나는 가스배관을 타고서 남을 집을 털었는데, 그 차이점이 있는가? 전혀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도둑놈의 말이 맞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노동에도 질이 있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 70페이지에 나오는데, 즉 모든 노동에는 질이 있고, 그것이 각자 다 다르다는 말이다.

(마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 혹시 ‘레비나스’ 라는 양반을 아세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인간의 그런 노동과 열매가 죽음을 초래하게 되는지, 그것을 설명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유명한 유대교 철학자 ‘레비나스’ 라는 양반의 주장인데, 그것을 소개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무슨 주장을 했는고 하니까, “인간의 윤리인가? 아니면 인간의 지식인가?” 라는 것을 논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지식이라고 한다면 신은, 천국은, 그리고 교회는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인데, 즉 그런 것은 다 지식에 관한 것이라는 말이다.

◈ ‘윤리’ 인가? ‘지식’ 인가?

그런데 레비나스에 의하면, 인간의 윤리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자기 몸을 가지고 남을 위해서 실제로 베푸는 것이 윤리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반해서 지식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배우면 된다는 것이다. 그냥 배우면 말이다.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무엇을 하는고 하니, 예배를 드리는데 앉아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기도는 오직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그러니 남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이, 그런 것은 이 지식에서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오잉, 고른판 ??

다시 말해서, 왜 이런 지식에서 하나님의 윤리가 나올 수 없는고 하니까, 지식은 무엇으로 통하는고 하니, 그것을 ‘동일성’ 이라고 하는데, 어떤 동일성인고 하니, 자기 동일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지식은 누구 좋아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 좋아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서 자기를 다지고 다지고 또 다지는데, 그러니 모든 자연의 변화를, 그것을 ‘고른판’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용어들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것들인데, 고른판이 무슨 뜻인가? 아주 판판하게 판을 고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울퉁불퉁한 자기 자아를 어떻게 바꾸는고 하니, 매끈하게 한다는 말이다. 아주 윤기가 나도록 반짝반짝하게 고르고 고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지식을 습득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전부가 울퉁불퉁한 자아를, 즉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자아를 아주 깔끔하고 깨끗하게 균일하게 정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동일성’ 이라고 하고 말이다.

◈ 자기 동일성 !!

다시 말해서,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라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는 “아, 모르겠다” 라고 하다가,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고 나니까, “아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렇게 되어가는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했을 때에 자아는 기분이 좋은데, 왜냐하면 울퉁불퉁한 것들이 어떻게 되는가? 마치 유리알처럼 매끈하게 정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바로 그것을 두고 ‘자기 동일성’ 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런 자기 동일성이 도대체 남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도를 닦는 것이 남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말인데, 자기가 성불하는 것이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성화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즉 자기가 도를 닦는 것이 어떻게 남에게 윤리가 되느냐는 것인데, 자기가 도를 닦는데 옆에 거지가 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도를 닦는데 방해가 되니 쫓아낸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도를 닦는 것은 자기를 매끈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 ‘나’를 위한 타인 !!

그런데 왜 이렇게 지식이 발달하게 되는고 하니, 레비나스의 이론에 의하면, 모든 서양의 역사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로부터 와서 자기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타인이 있으면,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타인을 거쳐서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타인은, 즉 이 남은 누구를 위한 남인고 하니, 자기가 실컷 이용해서 빼먹을 것은 빼먹는 남이라는 것이다. 즉 “나를 위한 타인이다” 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울퉁불퉁한 굴곡이 많은 인생을, 이미자의 노래에 ‘여자의 일생’ 이라는 슬픈 노래가 있는데,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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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 일생 (이미자) -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 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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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매일같이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으로, 눈물로 지새우는 여자의 일생인데, 그것이 언제 고른판이 되겠느냐는 것인데, 물론 돈이 많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대번에 고른판이 되겠지만 말이다.

◈ 인간의 ‘의존성’ !!

그것을 두고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즉 “나는 고생이 심하다. 그렇게 나는 고생이 심하니까, 매끈하게 고생이 없는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고 하니, 타인을 통해서 나에게로 오게 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레비나스는 말하기를, 인간의 ‘의존성’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의존성이 되니, 남편이 죽고 난 다음에 과부가 된 여자는 참으로 힘드는데, 왜냐하면 그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기에 말이다. 그렇게 의지할 곳이 없으니, 의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고 하니, 교회로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회로 가게 되면, 그곳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어르신이 계시는데, 즉 신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와 성령을 의존해서 자기 자신을 편평하게 아주 만족스럽게 고르게 한다는 말이다. 즉 이렇게 타인의 자리에 하나님, 예수, 성령을 집어넣어 버리면, 그렇게 되면 누구의 위한 하나님이고, 누구를 위한 예수님이고, 누구를 위한 성령님이냐는 것이다.

◈ 아무런 짝에도 쓸모가 없는 ‘지식인’ !!

그것은 바로 고생으로 점철된 여자의 일생을 전혀 고생이 없는 편평한 여자의 일생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울퉁불퉁하고 굴곡이 심한 자기의 인생을 매끈하게 정리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바로 ‘지식인’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아무런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즉 자기는 자기에게 미쳐서 만족하고 있는데, 그런데 남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자기가 한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 두 사람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이 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서로가 결코 만만치 않는데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결국은 정치적인 타협점을 찾게 되는데, 그런데 이 정치적인 타협점은 무엇인고 하니, ‘미흡함’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미흡함이라는 것은, 앞에서는 항상 웃으면서 악수를 하지만 뒤쪽에서는 음흉한 노림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지금은 내가 많이 양보를 하지만, 조금 있다가 한번 보자” 라는 식으로 말이다. 여차하면 가차없이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동업일 수도 있고, 아무튼 음흉한 노림수라는 말이다. 즉 같은 교회에서 김 집사와 최 집사가 서로 만나서 “아이쿠 성도님, 안녕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형제 자매가 어떻고 하는데, 그런데 뒷구석에서는 음흉한 노림수가 있다는 말이다.

◈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점은?

그러니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윤리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2000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나, 또한 유대교의 수 천년의 역사가 모두 다 자기 동일성, 즉 굴곡이 많은 자기 인생을 편평하게 만들려고 하는, 그렇게 오로지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전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이렇게 타인과 자기가 만날 때, 그것을 두고 레비나스는 무엇이라고 여겼는고 하니, 그것을 전쟁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양반은 일차대전과 이차대전을 모두 다 거쳤던 사람이기 때문에 말이다. 즉 왜 그런 전쟁이 일어나는고 하니, 인간이란 것은 각자의 자기 동질성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전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그런데 여기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무엇을 하겠는가? 모든 백성들을 자기 마음에 맞도록, 자기 취향에 맞도록 동일성을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반발하는 민족이나 국가가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침범을 해서 그들을 몽땅 다 자기가 원하는 자기 동일성으로, 그것을 ‘전체성’ 이라고 하는데, 즉 자기가 구상한 전체성에 전부를 다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을 국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목사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교인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목사는 자기가 생각하는 동일성에다가 교인들을 마치 자기 부하처럼 다 집어넣어서 지배를 해버리는데, 그러니 그것이 무슨 윤리이고 또 섬김이냐는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이웃사랑이고 말이다. 그러니 레비나스는 그런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 자기 사랑을 위한 이웃사랑 !!

그러니 결국은 이웃사랑을 우회해서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내 사랑’ 인데, 즉 자기 사랑을 위한 이웃사랑이라는 말이다. 자기 사랑을 위한 기도이고, 자기 사랑을 위한 전도이고, 자기 사랑을 위한 헌금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나 기독교이고, 또한 모든 종교단체가 가지고 있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물론 서양자체가 기독교 문화이기 때문에, 레비나스는 그런 것을 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 왜 지식이 아닌 윤리인가?

인간이 바로 이러할 찐데,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레비나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데, “도대체 당신은 무슨 재주로 진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지식이 아닌 윤리라고, 그렇게 펼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지금부터 바로 그 근거에 대해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다들 안다고 치고, 사실은 알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모습이니 말이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에서 몇 가지 개념들을 빌려오는데, 그러면서도 하이데거를 반박하고 말이다. 프랑스어로 “il y a” 라고, 영어로는 “there is” 라고, 즉 “거기에 있다” 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저에게 번역을 하라고 하면 “거기에 그냥 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 창세기 1장 2절 - 무질서 !!

창세기 1장 2절에 의하면,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어디서 하셨는가? 빛이 있기 이전에 말이다. 흑암과 혼돈에서 창조를 하셨는데, 그것을 두고 ‘무질서’ 라고 하는데, 즉 무질서에 말씀이 오게 되면 질서로 바뀐다는 것이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그렇다면 여기서 이 레비나스에 의하면, 그는 유대교 철학자이니 그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 무질서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하나는 인간적인 방향과 하나님의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향은 무질서에는 질서로 바뀔 때 당연히 말씀으로 인해서 바뀐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말씀으로 인한 방향을 따르지 않고, 무질서에서 무질서끼리 뭔가 뭉치게 되는데, 그것을 바로 ‘자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질서끼리 뭉치게 되는 말이다.

다시 이야기를 해보면, “거기에 있다” 라고 했을 때, 그냥 그렇게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존재가 아니라고 해서 ‘비존재’ 라고 하는데, 즉 그냥 그렇게 무질서한 상태로서 있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다 말이다.

◈ 무질서는 나쁜 것이고, 질서는 좋은 것이다 ??

그런데 이렇게 “거기에 있다” 라는 것이 ‘존재’ 라고 하는 굳히기에 들어가게 되면, 이 존재는 주변에 있는 무질서를 모두 끌어 모아서 하나로서 응축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일종의 덩어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일단 덩어리가 되고 나면 어떻게 하는가?

이러한 무질서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나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게 문제가 되는데, 즉 “무질서는 나쁜 것이고, 질서는 좋은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사람이 흙이 되면 나쁜 것이고, 반대로 흙에서 사람이 되면 좋은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 흙이면 흙답게 !!

그런데 그것이 과연 맞는 말인가? 하지만 레비나스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흙이면 그냥 흙으로 사는 것이 바로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정작 흙이면서 흙이 아닌 척하는 것 자체가 바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 자기가 흙으로 돌아가고 있으면서도 “에헴!” 라고 하면서 입을 닦고는, 자기가 인간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남에게 인식을 시키는 것, 그것을 바로 ‘위선’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위선을 품고 사랑을 해댄다든지, 또한 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렇게 인간이 만든 존재에서 하나님의 결속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라는 것은 반드시 무질서를 거쳐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인간은 반드시 무질서를 거쳐서 !!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여기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나’ 라는 것이 없었던 시절로 해서 돌아가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성질이 너무 급해서 이근호처럼 말이다(ㅋㅋ). 그냥 바로 가버린다는 것이다. ‘나’ 라는 인간에서 하나님 나라로 곧바로 말이다. 말씀에 의해서 무질서를 거쳐서 가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무질서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가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 무질서를 나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즉 자기 해체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자기 해체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자기를 부인하라 ??

불교에서는 “자기를 부인하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즉 “저는 부족합니다” 라고 입으로 내뱉는데, 곧 그렇게 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라는 것이다. 즉 “저는 부족합니다” 라고 열 번을 한 사람하고, 백 번을 한 사람하고 누가 더 위대한 사람인가? 당연히 열 번을 한 사람보다도 백 번을 한 사람이 더 위해하다는 것이다. 회개를 해도 백 번을 한 사람이 더 위대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위대한 존재에게 부족하다는 것이 해당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백 번이나 회개한 인간을 또 다시 부족하다고 하게 하려고 하면, 그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회개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 회개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러나 회개를 백 번이나 한 인간이 회개를 또 하려고 하면 엄청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흥사들을 보고 회개하라고 하면 정작 그들은 회개를 할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한번 써먹은 레파토리를 또 써먹고 또 써먹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부흥회를 할 때마가 수백 번씩의 회개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인간들에게는 자기들이 일일이 만들어놓은 회개의 레파토리가 따로 다 있고 말이다. 

◈ 신체의 특징은 ‘즐기기’ !!

계속해서 레비나스 이야기를 해보면, 이렇게 “거기에 있다” 라고 해서 존재가 될 때, 그런데 이러한 존재를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신체’ 라는 것이다. 지금 이것이 레비나스가 주장한 이야기인데, 마치 들뢰즈를 보는 듯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대도 거의 동시대이고 말이다.

이런 인간의 신체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욕구’가 있고 또 ‘욕망’이 있는데, 여기서 욕구라는 것은 바로 의식주, 즉 의복과 식품과 주택인데, 특별히 레비나스는 주택을 강조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인간의 신체가 있게 되면, 이런 신체의 특징이 바로 ‘enjoyment’ 라고, 즉 ‘향유’ 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즐기기’ 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와의 차이라는 것이다.

◈ 인간의 신체는, 그냥 솔직함이다 !!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그것을 ‘염려’와 ‘불안’으로 보았는데, 그런데 레비나스에 있어서 신체라는 것은 ‘즐기기’ 라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그렇게 ‘즐기기’ 라고 하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했는데, 즉 “인간의 신체라는 것은 그냥 솔직함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복음(?)이냐는 말이다. 즉 “껍데기는 가라” 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솔직하게 한번 깨어놓고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왜 사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냥 내 신체가 즐기기를 원한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정답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체가 먼저 있고 난 다음에 비로소 ‘나’ 라는 것이 있기에 말이다. 레비나스가 분명히 그렇게 주장을 했는데, 즉 인간의 신체가 먼저 있고, 그 신체를 보존하려고 하다가 보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신체를 자기가 소유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원래 신체는 소유되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신체를 관리하다가보니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팔 다리가 있으면 그 옆에다가 추상적으로 ‘나’ 라는 것을 설정해서, 그렇게 해서 자기가 신체를 소유하는 식으로 해서 신체를 관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 신체는, 그냥 즐기는 것 !!

사실은 이런 태도는 솔직한 것이 아닌데, 만약에 ‘나’ 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면 “솔직해야 한다, 점잖아야 한다, 착해야 한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신체는 그것이 아니라, 이 신체는 점잖고 착한 것 등이 적용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고, 아까도 말했지만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그냥 거기에 그렇게 자기 신체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체는 거기에 그렇게 있으니, 이 신체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냥 즐기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즐기는 것이 있어서는, 등산을 하면서 즐기던, 낚시를 하면서 즐기던, 그런 것조차도 필요가 없는데, 그냥 편하게 즐긴다는 것이다.
 
◈ 행복 - 편하면 최고 !!

지금까지 강의한 결론에 의하면, ‘나’ 라는 것이 있기 이전에 신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편하면 최고라는 것이다. 이렇게 편한 것을 두고 행복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그냥 편하면 최고인데, 그런데 그 기준은 각자의 신체가 다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편한지는 각자 본인의 신체가 발현하는데 따라서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률적으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데, 그런데 만약에 일률적으로 편한 것이 있다고 하면 어디에 빠지는고 하니, 그것이 아까 우리가 우려한 것인데, 그만 동일시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즉 “어이, 니는 나처럼 해야 편하고 행복해. 그러니 나를 본받아!”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인데, 즉 “니는 니가 편한 것이 따로 있고, 나는 내가 편한 것이 따로 있다” 라는 것이다.

◈ 그냥 내버려둬 !!

그런데 그렇게 않고 그 사람의 행복을 따라가려고 하면, 그 사람이 모델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그만 그 사람의 수작에 말려들게 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이 천 목사님에게 “천 목사님, 저처럼 해야 행복합니다” 라고 하면, 천 목사님은 자기 신체는 그만 포기하고 그 사람의 신체에 복속되고 예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그야말로 자기 이름 대로인데, “그냥 내버려둬!” 라는 것이다(ㅋㅋ). 그냥 각자의 신체대로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즉 그냥 솔직함이라는 말이다. 

◈ 신체가, 자꾸만 누구를 흉내내려고 !!

여기서 레비나스는 라캉과는 그 의견이 다른데, 라캉의 경우에 인간의 신체가 즐긴다는 점은 같지만 말이다. 이렇게 인간의 신체를 주체인 ‘나’ 라는 것이 관리를 하다가보니까, 이 ‘나’ 라고 하는 신체가 어떻게 하면 즐겁게 되는지, 그것이 신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자꾸만 흉내를 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저 사람처럼 되면 행복할까? 아니면 이명박처럼 대통령이 되면 행복할까? 아니면 내 자식이 김연아처럼 되면 행복할까?” 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꾸만 누구를 흉내를 내려고 설치기 때문에, 정작 자기가 누구인지를 그만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는 자꾸만 기웃거리게 되는데, “어떻습니까?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습니까? 행복합니까?” 라고 하면서 자꾸만 기웃거린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런 것을 왜 묻는가? 그것이 나중에 나오는데, 즉 ‘대화’ 라고 말이다. 물론 이 대화는 레토릭과 다이아로그로 나누어지는데, 아무튼 그렇게 물어서 자기가 어느 누구에게 근접하게 되면 행복해질 수가 있는지, 그것을 찾아가는 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하게 되는지, 소위 기도를 좀 한다는 사람을 찾아가서 그 방법을 배우게 되고, 또한 전도를 잘하는 사람을 찾아서 전도를 잘하는 방법을 배우고 말이다. 목사를 찾아가서는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하게 되는지, 그런 방법을 배우고 말이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잘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그냥 무질서로 돌아가면 되는데 말이다.

처음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 인간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누구의 소관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주시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성질이 급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노선을 인간들 자기 자신의 힘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 규칙과 규칙성 !!

제가 이번에 개혁신학학회에서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데, 그 논문의 마지막 각주에 보면 뭐라고 되어있는고 하니까, “율법은 규칙인데, 그런데 인간은 그 율법을 규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규칙성으로 본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율법은 원래 규칙인데, 우리 인간들을 그것을 규칙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은 율법 그 자체로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일단 자기가 행동을 해놓고는, 그 다음에 그것이 율법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대조하는 식이라는 말이다. 즉 일단 행동은 자기가 해놓고, 그것이 어디에 맞는지, 혹은 어디에 저촉이 되는지 말이다. 그렇게 자기 행동이 어디에 성취가 되는지, 혹은 위반이 되는지를 모든 성경구절을 다 동원해서 확인을 한다는 것이다. “아하, 내가 이것을 성취했구나, 이것을 위반했구나” 라는 식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규칙을 차후에 자기 규칙성에 맞도록 그렇게 조작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 내가 어제는 이웃사랑을 다 하다니”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큰 마음을 먹고 어제 시간을 내어서 고아원에 가서는 쌀을 조금이나마 팔아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이라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결국 무슨 짓인가? 율법은 분명히 주님의 소관인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안에다가 자기 나름대로의 율법성을 따로 만들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생겨난 못된 버릇인데, 즉 자기의 법을 나름대로 따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법에 대해서, 결국에는 거기에 맞추려고 동일성을 시도한다는 말이다.

사실은 우리 인간이 이렇게 자기 일방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빌미로 해서 우리를 무질서로 밀어 넣는데, 즉 우리가 흙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그런 작전을 벌린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지만 말이다.

◈ 즐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곧 세상 !!

아무튼 레비나스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이렇게 즐기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보다 더 즐기기 위해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레비나스는 그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레비나스는 무엇을 예로 드는고 하니, 마치 어항에 있는 금붕어가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듯이, 바로 이 물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 하이데거 - 세계 내의 존재 !!

이것을 하이데거에 의하면, ‘세계 내의 존재’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나’ 라는 존재에 세계 안에 있을 때만 발견이 되는 것이지, 세계 밖에 나가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즉 “‘나’ 라는 것은 어떤 구조 안에서의 ‘나’이기 때문에, 그 구조를 치우게 되면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오니 자기가 성도인 줄을 아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자기가 과연 성도가 맞는지 안 맞는지, 거기에 대해서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오히려 믿음을 방해할 수가 있는데, 교회를 치우고 나더라도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인데, 그런데 교회에 와야 자기가 성도라고 하는 것을 자꾸만 확인케 하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결국 하이데거에 의하면 무엇인가?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세계 내의 존재’ 라는 것이다. 즉 ‘나’ 라고 하는 존재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다 그 모든 책임을 다 미룬다는 말이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다 말이다.

◈ 잘되면 자기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 ??

옛말에 “잘되면 자기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다” 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는데, 그렇게 우리 인간들은 모든 탓을 어디로 돌리는고 하니, 그것을 자기가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소속이 되어있는 것에다 같이 묻혀서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삼성맨’ 이라고 하면 다 똑똑하고 착실한가? 그것이 아닌데, 그런데도 ‘삼성맨’ 이라고 하는 뺏지를 달고 있으면 일단 먹혀든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다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아닌데, 연고대보다 떨어지는 과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서울대학교라는 뺏지를 달게 되면, 모두가 다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묻혀 들어간다는 말이다.

◈ 과연, 이 세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와 같이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이 세상 속에서 둘러싸여서, 그렇게 싸여진 것을 가지고서 자기의 질(質)을 결정지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 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렇게 우리 인들은 이 세상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곧 ‘요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세상에 대한 요소에 둘러싸여서 신체는 자기 욕구를 달성하는데, 그렇게 해서 이 세상 속의 신체는 세상과 함께 즐긴다는 것이다. 물론 레비나스에 의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일단 이렇게 되면 아무런 문제점이 없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즐기면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무엇이 문제가 되는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결핍’, 즉 ‘모자람’이 발생하고 만다는 것이다.

◈ 라캉 - 타인으로 인한 결핍 !!

여기서 라캉의 의견과는 구별이 되는데, 라캉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이 모자람이라는 것은 누구 때문에 생긴다고 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기 세계에 침범한 타인으로 인해서 그 모자람이 생겼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닌 타인으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한 칸의 방에서 식구 3명이 오손도손 자미나게 살아갈 때는 행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옆집을 보니 달랑 두 식구만 사는데 그만 집이 백 평이나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안 보았으면 되는데, 그렇게 백 평 짜리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 순간 갑자기 자기 만족함이 깨어지고 그만 모자람으로 변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집사님이 오후예배시간에 나름대로 기도를 참 잘했는데, 그런데 기도를 더 잘하는 교인이 우리교회에 왔다고 하면, 그러면 그 집사님은 다음부터는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남들은 그 집사님을 보고 아무리 기도를 잘 한다고 칭찬을 해주어도, 그러나 본인이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그만 모자람을 느낀다는 말이다.

◈ 레비나스 - 타인이 아닌, 본인이 즐기는데도 모자람이 !!

그것이 바로 라캉의 의견인데, 그런데 레비나스는 그것이 아니라 무엇인고 하니, 즉 타인이 와서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본인이 즐기는데도 이 세상은 넉넉하지 않다는 것이다. 흔히들 욕망을 남이 와서 주는 욕구라고 하지만, 그러나 레비나스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 신체라고 하는 무질서는 무엇인고 하니까, 즉 신체는 자기 세포를 보고서 “야, 똑바로 해!” 라고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가? 그것은 바로 이 세포는 이미 우리의 선악의 관계를 떠나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쌍꺼풀이 없는 사람이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쌍꺼풀이 생기는가? 전혀 그것이 아닌데, 또한 키가 작은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서 키가 커지는가? 역시 그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사실 키가 클 이유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키가 커버리면 타인의 동질성에 말려든다는 것이다.

◈ 키 160에 몸무게 55면 OK !!

옛날에는 여자가 160이 되면 큰 키라고들 했는데, 충분히 모델도 되고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서양에서 170이 되는 여자들이 인기를 끄니까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160은 아예 뽑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는 키 160에 몸무게 55면 모델이 되었는데, 즉 우리나라에서는 “아이쿠, 복스럽다. 참, 통통하네” 라고 하면서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170에 45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 세상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데, 마치 물고기가 물이 없이는 전혀 살아갈 수가 없듯이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세상이 ‘나’의 멱살을 잡고 마구 뒤흔든다는 것이다. 못살게 말이다. 누구는 주식을 해도 일주일만에 500 만원이나 꼴고 말이다.

◈ 왜 세상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할까?

그런데 그렇게 흔들어댈 때, 즉 “왜 이 세상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할까?” 라고 하는, 즉 “나의 동질성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라는 것에 있어서, 그것을 전부가 다 누구 탓으로 돌렸는가? 자기 탓이 아니라 남의 탓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레비나스가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욕구 → 집 → 욕망 !!

그것이 바로 두 번째의 ‘주(住)’ 라는 것인데, 즉 의식주의 곧 ‘주택’ 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욕구에서 욕망으로 가는 그 중간에 보면 이렇게 주택, 즉 집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이것을 ‘집’ 이라고 하지 않고 ‘가족 공동체’ 라고, 즉 ‘가족’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그것을 가족이 아니라 집이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에게 그렇게 거주할 집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전세든 월세든, 아니면 10평이든 100평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그 집에서 누구를 맞이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 집 - 손님을 대접 !!

이런 이야기를 하니 성경의 어떤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가? 창세기 18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나오는데, 롯이 구원을 받은 것은 바로 손님을 환대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유대교에서는 성경이 아니지만, 신약의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손님을 대접하면 자기도 모르게 천사를 대접한 것이 되어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히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히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그러니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세상 내의 요소가 바로 ‘집’ 이라는 것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말이다. 그런데 이 집에서 어떻게 욕망으로 바뀌는고 하니, 흔히 욕망이라고 하면 나쁘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레스나스에 있어서 욕망은 좋은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상 이 욕구는 우리가 보기에 나쁘다기보다는, 어쩔 수가 없다고 본다는 말이다. 즉 우리 인간에게 이 욕구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어쩔 수가 없는 것을 어떻게 하려고 덤벼드는 것이 수상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본인이 도저히 어쩔 수가 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어쩔 수가 없는 것에다 손을 대겠다고 하는 것은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신체 말고 다른 추상적인 ‘나’ 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나’가 누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고 하니, 즉 ‘나’가 그만 자기 신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레비나스에 의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나’ 라는 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당연히 신체에서 나왔는데, 즉 신체가 있어야 ‘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나온 그 신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 그것은 도대체 누구 탓이냐는 것이다. 즉 “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을까?” 라고 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누구 탓이냐는 말이다. 보통 “엄마가 키가 작아서 그렇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 욕망은, 타인을 영접하고 싶은 힘이다 !!

그래서 레비나스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래서 그는 이 ‘욕망’에 대해서 새로운 개념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가 뭐라고 주장하는고 하니, 즉 “욕망은 타인을 영접하고 싶은 힘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남에게 다가가고 싶은 것이 바로 욕망이라는 말이다. 그 타인에는 3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이웃집, 즉 자기와 만나는 접촉자이고, 둘째는 어려운 이웃이고, 그리고 셋째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 욕망은 첫째에서 둘째로, 그리고 둘째에서 셋째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 첫째가 바로 무엇인고 하니, 사람은 고독하면 살지를 못하니 교회에 가서 친구든 누구든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가 많으면 교회가 저절로 부흥이 되는데, 정(情)이 생기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어려운 이웃이 생기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아까 말한 바로 그 자기의 동질성에 방해가 되는데, 그러면 그것은 친구로서 탈락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인데, 그런데 레비나스는 그렇게 보지 않고, 인간에게는 자기를 떠나서 타인의 세계에 파고드는 욕망이 신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 지식이 아닌 윤리로 !!

그렇다고 하면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실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실행할 수 없다고 착각을 했는데, 그런데 사실은 자기도 모르고 잊어버렸던, 즉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바로 그 신체가, 즉 우리 신체의 본성 중에서 남에게 다가가는 본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끄집어내어야, 그것이 바로 지식이 아니라 윤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윤리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지식에서 나왔기 때문에 백 날 착한 일을 해도 그것을 어디로 가는가? 자기에게로 가서 자기만 더 부풀어진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잘남과 자기 우수함과 자기 성실함과 자기 착함 등등이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매끈하게 동질화를 시키는데 보탬이 되었다는 것이다.

◈ 신체에는 ‘타인의 종’이 되고 싶은 욕망이 !!

하지만 레비나스에 의하면, 하나님이 주신 신체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고 하니까, 자기를 잊어버리고 타인 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타인의 종’ 이라고 하는데, 즉 남의 노예라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타인의 종이 되고 싶은 욕망이 우리 신체 속에 자연적으로 발휘가 되고 있었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잊어버렸다는 말이다.

그렇게 잊어버렸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다시금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을 하고 있는데, 아까 가난한 이웃을 이야기했는데, 즉 성질이 더러운 이웃이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웃이 말이다. 그렇게 자기에게 불리한 이웃이 있고, 또한 자기에게 유리한 이웃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리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점이 유리한가? 자기 신체가 편하고 여유 만만하게 즐기는데 필요한 에너지원, 즉 자기가 즐기는데 있어서 필요한 에너지원이 되고 재료가 될 수 있는 이웃을 유리한 이웃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부싸움의 경우에도, “너는 나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제발 양보를 좀 해다오” 라는 것인데, 즉 “니가 에너지원이 되어서 내가 편하게 결혼을 참 잘했다” 라고, 그렇게 자기에게 만족함을 줄 수 있도록 거꾸러지라는 말이다. 물론 서로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그러니 평소에 우리가 이웃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동질성 때문에 고르고 골랐던 것인데, 즉 “나쁜 이웃은 저리가. 좋은 이웃만 와”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고 하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자기 위주의 욕망만이 있는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남에게 다가가는 욕망도 역시나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법을 주셨다는 것인데, 물론 그는 유대교 신자이니 그렇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을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무엇에 신경을 쓰다가 그게 안 되었는고 하니, 자기를 위한 윤리, 즉 남을 희생시켜서 자기의 배만 채우려고 했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자기만 편안히 하려고 하는 의식이 강하다가가 보니, 그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반으로 잘라서, 즉 말씀의 진의를 왜곡시켜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 저는 그런 것을 못합니다. 저에게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저는 능력이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만 차버렸는데, 그런데 그렇게 차버리게 되면 처음의 인간은 “거기에 있음” 이라고 하는, 그런 혼돈과 무질서에서 무엇이 와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명령이 올 때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된다고 하는, 그런 본래 노선에서 우리는 이미 이탈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헐벗은 이웃’을 !!

그렇다면 이렇게 이탈한 노선을 원상 회복을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제공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이웃이 오는데 그런데 어떤 이웃인고 하니, 레비나스가 사용하는 용어에 따르면 ‘헐벗은 이웃’ 이라는 것이다. 같은 의미인데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의미의 용어들이 등장한다는 말이다. 폭행을 당한 이웃, 또 매몰차게 거절을 당한 이웃 등등 말이다.

바로 그런 이웃을 누가 앞장을 세우는가? 하나님께서 앞장을 세워서 우리에게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이웃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그 이웃을 인해서 무엇을 깨닫게 되는고 하니, 바로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 헐벗은 이웃의 얼굴을 보는 순간 !!

그러니 잘난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아가게 될 때는 어떠한가? 항상 그 목표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보다도 더욱 잘난 사람을 모델로 삼아서 자기가 나아가고자 했는데, 그런데 만약에 어느 날 이렇게 잘사는 부자동네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헐벗은 이웃이 왔을 때, 그래서 도움을 청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을 레비나스는 ‘얼굴’ 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가 그 헐벗은 이웃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것이 누구의 얼굴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자기의 얼굴일 수 있다고 하는, 그렇게 자기 신체의 본성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현재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을, 그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보았는고 하니까, 자기가 엄청나게 힘을 내고 용을 써서, 즉 어떤 자기 고생의 성과인 것처럼 누렸던 그 모든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와 같은 이웃을 그만 배척하고 되돌려보내는 원인 제공을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의 윤리인데, 그러니 천주교의 신부들이나 감리교 목사들이 그만 깜박하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야, 최고다. 최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즉 이제 기독교에서 다른 것을 더 할 필요가 없이 바로 이 레비나스의 윤리가 최고라고 했다는 것이다.

◈ 다시 그림으로(?) 정리하면 !!

이것을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면, 여기에 이렇게 신체가 있다고 하면, 그리고 자아가 또 여기에 있다고 한다면, 지금 계속해서 반복을 하겠는데, 기억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들 밖에는 세계가 있는데, 그래서 세계와 더불어서 교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와 교통을 하면서 자기에게 괜찮고 유리하다고 싶은 것을, 즉 자기를 편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을 다 끄집어내어서 어디에 집어넣는가? 신체와 자아가 있는 여기에다 모두 다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동일시’ 라고 하는데, 즉 전부를 다 괜찮은 타인이라고 동일시를 했다는 것이다.

◈ 내가 추방시킨 것이 ‘메시야 나라’ !!

우리는 이렇게 동일시를 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동일시하는 과정에 있어서 필요한 것을 모은 것들이 옳은 것만은 아닌데, 그리고 필요가 없는 것들은 바깥으로 그냥 쫓아내어 버린다는 것이다., 즉 “너거들은 나가서 죽어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자기가 추방시킨 것들이 모인 동네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메시야의 나라’ 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다.

◈ 이웃을 사랑하라, 살인하지 말라 !!

그러니 자기가 보기 싫어서 추방시킨 모든 것들이 모인 나라가 곧 하나님 나라인데, 그런데 거기서 뭐라고 하면서 오는고 하니까,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레비나스가 이 이웃사랑보다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살인하지 마라” 라는 것인데, 바로 그 명령을 가지고 헐벗은 이웃으로 이렇게 우리에게 방문을 온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찾아오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살인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하, 살인을 하지 않으면 됩니까?” 라고 하면서, 혹은 “그래도 살인을 할까보다” 라고, 거기에 대해서 늘 묻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데,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사실 먼저 묻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렇게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너는 어디서 왔지?”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 당신은 누구세요?

여기 신체와 자아에서 이렇게 동일성을 하다가 보니, 여기에 “there is” 라는 것이 있는데, 즉 그렇게 거기에 있는데, 그런데 거기에 그렇게 있다고 하는 것은 “나는 여기에 존재한다” 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찾아가면서 계속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는데, 그런데 정작 자기에게 오는 것을 낯선 이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전혀 자기가 예상하지도 못한, 즉 “너는 어느 세계에서 왔지?” 라고 하는, 혹은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그런데 그 낯선 상대방이 그냥 오는 게 아니라 명령을,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는데,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그동안 그 사람을 추방시킨 것이 결국 누구를 추방시킨 것이 되겠는가? 그 사람을 추방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하는 명령, 즉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하는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추방을 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아원을 방문하면서 뭐라고 하는가? “나는 내 이웃을 사랑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냐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거지라고 해도 자기 마음에 쏙 드는 거지를 골라서 도와준 것인데, 즉 자기의 잘남을 증명해줄 수 있는 거지를 말이다. 자기의 착함을 더 확인하고 부각시켜주는 말이다.

◈ 거지를 골라도, 자기 마음에 드는 거지를 !!

다시 말해서, 자기의 잘남과 착함을 소멸시키지 아니하고 누적될 수 있는 이웃만을 누가 고르는가? ‘내’가 고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기와 동일시가 되니 말이다. 즉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저 사람은 내가 일주일에 전에 이 만원을 빌려준 사람이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이미 자기 동일성에 포함이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뭐라고 주장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헐벗고 구박받는 식이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내 앞에서 사랑이라고 이야기하지 말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에 의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알 수 없는, 그래서 그는 여기서 ‘선택’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즉 우리가 전혀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인데, 그래서 우리는 “당신은 여기에 왜 왔지요?”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가 평소에 하던 행동은 누가 선택하는가? 자기가 선택을 하는데, 즉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라는 선택권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 가짜 자유와 진짜 자유 !!

레비나스는 그게 잘못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얽매이는 것은 진짜 자유가 아니라 가짜 자유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모두가 다 가짜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자기가 누구의 종이 되는, 즉 자기가 누구에게 예속이 될 만한 분이 찾아오셔서, 그분에게 순종하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진짜 자유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니 요한복음 8장 32절이 생각나는데, 즉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자유가 아닌데, 왜냐하면 이미 진리라고 하는 것에 예속이 되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나 죽으나 진리가 시키는 대로, 진리가 인도하는 대로, 진리가 주시는 대로 살아야 하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진리와는 한 패가 되었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즉 “나는 내 마음대로 산다” 라고 하는 자기 동일성에 의하면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에 의하면, 그런 자기 동일성은 자기 자유를 그만 자기에게 박탈당하는 상태라고 본다는 말이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여기에서 레비나스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첫 번째로 “타인이 나를 찾아오면 나는 그 타인 속에 있다” 라는 것이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자기가 여기에 이렇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외부에서 오는 타인의 세계에 자기가 놓여있다는 말이다. 즉 타인이 자기 신체를 가지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가져갔다고 해서 자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타인의 신체에 그냥 자기가 들어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신체는 자기를 찾아온 그분을 위해서 헌신을 해야되는 신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의 동일성에서 벗어나서 타인의 동일성에, 즉 자기를 찾아온 낯선 이웃과 하나가 되는 동일성이 된다는 말이다.

◈ 그런데 사도바울의 경우에 !!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에서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이는데(?), 즉 우리 안에 우리가 전혀 기대를 하지 않은 낯선, 즉 우리의 욕망을 채운다고 하던지, 우리를 편하게 해주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분이 우리 속에 들어있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고후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제 교재 70페이지를 살펴보자.

**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 구조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 구조’ 이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이야기하기를, 우리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게 과연 유대교 신자인 레비나스가 주장한 것과 같은 것인지, 그것을 한번 살펴보자는 말이다. 즉 그가 주장한 윤리가 과연 사도바울이 말한 복음적인 윤리가 맞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점이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 레비나스는 ‘대속(代贖)’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즉 레비나스에 있어서 이 ‘대속’은, 밑에서 떠받치는 것을 의미하는데, 즉 “내 자리를 그 사람이 대신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나는 그 사람의 자리를 대신한다” 라고, 그렇게 대속을 해석했다는 것이다.

◈ 레비나스의 문제점 - 헐벗은 이웃의 가해자는 누구인가?

그렇다고 하면 레비나스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보기에는 완벽한 것 같은데 말이다. 어디 약점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완전히 기독교 그 자체처럼 보이니 말이다. 오히려 여기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인간들이 나쁜 놈들로 보이는데, 그렇게 치부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제가 보기에 그의 문제점이 두 가지인데, 그 첫째가 무엇인고 하니, 이웃이 그렇게 헐벗은 이웃이라고 할 때, 그 가해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웃이 도대체 어디에서 폭행을 당해서 박살이 났는지, 아무튼 자기는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에게 찾아온 것은 그 사람을 자기가 돌보아주라고 찾아온 것이지, 결코 자기가 그를 주먹을 내려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그 사람을 주먹으로 때려서, 그래서 그가 폭행을 당한 헐벗은 이웃이라고 한다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일순간에 다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인간은 죄인이 되고 마는데, 즉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 ‘임마누엘’의 의미가 무엇인가? (심판주? 구원자?)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모르겠다는 표정들인데, 이 ‘죄’ 라고 하는 것은 갇혀있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갇혀 있으면 아무리 뚫으려고 해도 뚫리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임마누엘’의 의미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레비나스도 임마누엘 레비나스인데 말이다(ㅋㅋ).

임마누엘은 예수님을 의미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를 ‘죄에서 건져낼 자’ 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 오신 분이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임마누엘로서, 그게 하늘에서 임마누엘이 아니라, 바로 죄에 갇혀있는 우리의 자리에 오신 분으로서의 임마누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오실 때 그냥 헐벗고 폭행을 당한 이웃이 아니라,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인가? 즉 지금 건지려고 하는 바로 그 사람으로부터 누가 폭행을 당했다는 말이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구원자가 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죄인이 된다는 말이다.

◈ 자기가 죄인인 알수록 임마누엘의 가치가 !!

그러니 살인을 하고 간음을 해서 죄인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는고 하니, “이제 당신은 필요 없어. 저리가!” 라고 하면서 그렇게 배척을 할 때, 비로소 죄가 성립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죄가 성립이 되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즉 “아, 구원이 안 되는구나” 라고 하면서 물러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인 줄을 알면 알 수록 하나님의 임마누엘 되심의 가치가 점점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교는 결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즉 유대교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하면, 물론 우리가 죄를 짓기는 하지만 100% 퍼펙트 완전한 죄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유대교의 주장인데, 즉 우리 인간이 연약해서 실수로 죄를 짓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건 무지와 어리석음과 실수와 착각으로 인해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처음부터 우리 인간이 아무런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사도바울 - 사람은 다 거짓되되 !!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사도바울이 바로 그 유대교에서 벗어났음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데, 여기에서 로마서 3장 4절을 살펴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사람은 다 거짓되되” 라고 되어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사도바울은 누구에게 핍박을 받는가? 유대인들과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롬 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다 거짓이 되는데, 그러니 그러한 인간이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래서 바로 그런 말씀을 전혀 지킬 수 없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친히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속에 임마누엘로 오셔서 거하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교는 것이 아니고, “아니, 우리가 하면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왜 하지 않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비해서 기독교는 뭐라고 하는가? “아니, 못한다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사도바울이 전한 기독교의 복음에서 말이다.

◈ 잠시 칸트의 윤리에 대해서 !!

그 유명한 칸트의 윤리가 무엇인고 하니, 이 양반도 임마누엘 칸트인데 말이다(ㅋㅋ). 칸트의 윤리는 레비나스의 윤리와도 다르고, 또 기독교의 복음적 윤리와도 다른데 말이다. 하지만 이 칸트의 윤리가 어떤 것인지 들어보게 되면, 또 여기에 넘어가지 싶은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살인하지 말라” 라고 했을 때, 그것은 칸트에 의하면 말 그대로 “살인하지 말라” 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인하지 말라’ 라는 말을 당신이 할 수 있으면, 당신은 그 말씀을 지킨 것이 된다” 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즉 살인은 나쁜 것이라고 하는 자기의 원칙이 있다고 하면, 즉 이미 그 사람 속에는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하는 기준이 들어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무엇이 나쁘고 옳은지 말이다.

◈ 레비나스, 칸트, 그리고 사도바울 !!

제가 오늘 3가지를 이야기했는데, 먼저 하나는 레비나스의 윤리인데, 즉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잊어버렸던, 즉 우리가 일방적으로 잘라버렸던 “할 수 있다” 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기 위해서 헐벗은 이웃이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대교 신자인 레비나스의 주장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둘째로 칸트는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아하, 이것이 참 좋구나” 라고, 혹은 “이것이 나쁘구나” 라고 하는 것을 안다고 하면, 바로 그러한 것 자체가 이미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러한 판단의 기준이 있다고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셋째로 사도바울의 복음은 무엇인가? 우리가 옳고 그름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신 은혜이고 선물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선물로 인해서 말이다. 그것을 두고 예수님과의 ‘관계성’ 이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과의 관계성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우리도 이런 세상 구조에 온통 !!

제가 “여러분, 이 3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맞습니까?” 라고 묻기가 좀 민망스러운데, 왜 그런고 하니, 우리는 바로 앞의 첫째와 둘째의 그런 세상구조가 온통 우리를 덮어씌우고 있는데, 복음을 마구 훼방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바로 그러한 것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모여서 힘들게 공부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런 생각이 우리에게도 문득 문득 마구 떠오르는데, 도대체 어떤 경우에 그러한가? 그야말로 개판과 같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그리고 교회의 온갖 더러운 모습들을 바라볼 때도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 교회의 모습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아하, 저 사람들이 복음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구나.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을 믿는다’ 라는 말 몇 마디를 가지고, 교회에서 온갖 부정부패를 다 저지르고 더러운 짓들을 하고 있구나. 교회에 오는 목적도 주님을 섬기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와서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기 장사를 더 잘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구나. 그러니 뭔가 교회를 건전하게 바꾸려고 하면, 그냥 죄인이라는 소리만 할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어떤 행함을 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라고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말이다. 

◈ 건전한 교회되기 ??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즉 ‘건전한 교회되기’ 라는 것인데, 그러한 건전한 교회에 누가 다닌다는 말인가? 바로 자기가 다닌다는 것인데, 그러니 당연한 자기는 건전한 교회의 교인이라는 소리인데, 하지만 그렇게 해서 도대체 얻는 것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도대체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기가 편한데, 그리고 즐겁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것은 조금 전에 레비나스가 말한 것과 똑같은 소리인데, 그것이 곧 자기 동일성이라는 것이다. 그 건전한 교회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인데, 즉 자기 마음에 맞게 때문에, 즉 자기와 수가 맞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지, 자기와 수가 틀리면 즉시 그 교회를 떠나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와는 마음이 맞기 때문에 그 교회를 다닌다는 것인데, 즉 자기와 일치성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바로 그 교회를 다닌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자기 자신 때문에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 결코 주님이 아니고 말이다.

◈ 레비나스의 오류 ① - 인간이 전적으로 죄인임을 인정할 수 없어 !!

그러므로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첫 번째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들이 전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인데, 또한 그것이 유대교의 관점이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레비나스가 ‘관계성’을 이야기하기는 하는데, 즉 “우리 안에 이웃이 있고, 우리가 그 이웃에게로 들어간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말하는 그런 관계성은 무엇인고 하니, 설령 그렇게 들어간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는 이웃이 아니라, 뭔가 우리 쪽에서 해야만 하는 이웃인데,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지 못한다면 그냥 떠나고 마는 이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만약에 진짜 하나님의 메시야가 온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붙잡지를 않는다는 다고 하면, 그냥 떠나고 마는 메시야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과연 누가 누구를 붙잡을 수 있는가?

그런데 그렇게 붙잡는 시간이 도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15분인가? 30분인가? 30분만 붙잡고 있다가 내보내면 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과연 우리에게 메시야를 평생동안 붙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붙잡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붙잡는 것이지, 결코 우리들이 누구를 붙잡고 말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베드로가 “모두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에라이, 이 닭대가리만도 못한 놈아”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함으로서, 오히려 닭이 베드로보다 낫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마 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 26: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 26: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 롯의 처의 경우에 !!

앞에서 말한 논문에도 그런 내용이 있는데, 즉 창세기 19장에서 롯의 처가 남편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따라나왔는데, 그것은 롯의 처의 입장에서는 자기 세계 내에서는 남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편이 없으면 자기는 모든 것이 불편하니 말이다. 즉 자기의 엔조이먼트가 필요하니 남편을 따라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레비나스의 이론에 의하면, 처는 남편에게 복속이 되어서 어디든지 따라가야 하는데, 그런데 무엇이 이 둘을 갈라놓았는가? 그것은 곧 하나님의 묵시, 즉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렇게 말씀이 갈라놓으니 롯의 처는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남편은 다른 방법으로 자식을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롯의 처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소금기둥이 되었는데, 이 소금기둥 자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묵시가 이 땅에 와서 남긴 하나님의 심판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주장에 의하면, 언제든지 나쁜 인간이라고 해도 자기가 제대로 행할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이 더 이상 필요치 않는고 하니, 심판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레비나스의 주장대로 하면, 하나님이 심판을 하려고 하면 새삼스럽게 찾아가지를 말든지, 그리고 일단 찾아갔으면 누구나 다 영접할 수 있도록 하든지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찾아가 놓고는 그만 심판을 해버리면, 그러면 찾아가지 않은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왜?

지금 제 말을 머리가 나쁜 사람은 이해를 못하지 싶은데(ㅋㅋ),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히터가 있는데 고장이 나서 고치는 사람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이 히터가 너무 오래된 물건이라서 부속이 없어서 고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말을 할 바에는 왜 고치려고 왔느냐는 것이다. 전화를 했을 때 그 모델은 구식이라서 전혀 안 된다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찾아와서 굳이 확인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죄가 없으니 무엇이 없는가? 그래서 심판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그러면 여기서 레비나스는 왜 심판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바로 심판의 주체가 바로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레비나스는 바로 그것이 겁이 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목사가 “나는 너를 치리한다” 라고 했을 때, 그러면 상대방은 뭐라고 하겠는가? “목사, 당신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하는가? 결국은 교회와 당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했을 때, 바로 그런 오류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오류로 인해서 기독교가 누구를 핍박하게 되는가? 미국에서 인디언을 마구 핍박하게 되는데, 또한 기독교와 이슬람이 싸우고 말이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토속종교를 다 말살시키고 말이다. 그것이 곧 전쟁인데, 그러한 전쟁이 어디서 생기는가?

그것은 바로 정체성, 즉 자기만 옳다고 하는, 그런 동일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윤리의 이름으로 벌리는 비윤리적 행동이 되니 그렇게 하면 안 되고, 그러한 아프리카의 원주민들마저도 누가 보내었는고 하니,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하니, 레비나스의 주장이 감리교의 신학과 어떻게 그렇게 딱 맞아떨어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환경운동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천주교와 감리교와 불교가 서로 손을 잡고 무엇을 하는가? “위아 더 월드”를 하고 하는데, 즉 불교도 좋고 천주교도 좋고 기독교도 좋고, 심지어 무교도 좋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다같이 하나가 되어서 신의 뜻을 이루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죽은 마이클 잭슨도 “위아 더 월드” 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착한 일을 이루신다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그 어떤 헐벗은 이웃의 문제도 해결할 수가 없다고 한다는 말이다.

◈ 레비나스의 오류 ② - 만약에 찾아온 이웃이 악마라고 하면?

그리고 레비나스의 두 번째 오류가 무엇인고 하니, 만약에 그렇게 해서 찾아온 이웃이 악마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레비나스의 이론에는 악마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을 누가 지적했는고 하니, ‘지젝’ 이라는 양반이 지적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젝인지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이 ‘지젝’ 이라는 사람이 레비나스의 책들을 읽고 난 뒤에 하는 말이, “도대체 하나님이 찾아갈지, 악마가 찾아갈지, 그것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똑똑한지 모른다는 말이다.

창세기에서 제일 먼저 아담을 찾아온 자가 누구로 기록되어있는가? 그것이 바로 뱀이었는데, 즉 악마였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세계 내의 존재인데, 그러니 우리는 어디에 둘러 쌓여있는고 하니, 바로 악마에 둘러 쌓여서 악마의 종이 되어서, 그래서 사람은 떡으로만 살아야 하고, 또한 사람은 기적이 있어야 인기를 얻게 되고, 또한 사람은 온 천하를 얻는 것이, 그것이 곧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보람이라고, 그렇게 누가 주입식 교육을 시켰는가? 그것은 바로 악마가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경우에 !!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바로 그러한 3가지 시험을 다 물리치셨는데, 그렇게 3가지 시험을 이기신 분이 유일하게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바로 그러한 예수님 안에 있다고 하면, 우리는 동일하게 성령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즉 예수님의 영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동일하게 무엇과 마주치는고 하니, 바로 그 3가지 시험과 날마다 마주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여기서 타인을 영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으로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요한이서의 내용인데, 그래서 그런 적그리스도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한다는 말이다.

(요이 1:9)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요이 1: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러니 우리는 뭔가 이렇게 배척을 해야 하는데, 그런데 배척을 하면 또 레비나스가 시비를 걸겠지만 말이다. 즉 “니가 뭔데? 어떻게 니가 하는 주장만 옳다고 할 수 있는가? 아무나 오면 반기면 되는데, 왜 그렇게 못마땅하게 여기는가? 니가 누구를 골라잡을 군번이라도 되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사도바울의 경우에 !!

이제 결론을 내릴 시간이 되었는데, 아무튼 이렇게 보니 레비나스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칸트는 어떠한가? 강의 도중에도 말했지만 “당신 안에 어떤 도덕적인 규칙이 있으면, 이미 당신은 도덕적인 사람이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칸트의 그런 주장은 로마서 2장 끝에서 사도바울이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데, 즉 “그렇게 가르치고 주장하는 니는 말씀을 다 지켰는가?” 라고 말이다.

(롬 2: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롬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롬 2: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다시 말해서, 그렇게 가르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있느냐는 것인데, 전혀 면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면제가 된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옳고 그름을 알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우리가 무엇이 옳다는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것을 지켰다는 것과 대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

그렇다고 하면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아까도 말했지만 ‘대속(代贖)’ 이라는 것인데, 즉 ‘대신 죽으심’ 이라는 말이다. 대신 행하심이 아니라 말이다. 즉 ‘대신 행하심’이 아니라, ‘대신 죽으심’ 인데, 그러니 우리는 행함으로 연결할 것이 아니라, 곧 바로 죽으심으로 연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죽음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기의 죽음과 그분의 대신 죽으심으로 연결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데,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을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가 결코 장식품이 아닌데, 누구를 죽이는 십자가인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를 진 자기 자신을 죽이기 위한 십자가라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살았던 삶이라는 것은, 즉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이 바로 윤리인데, 그런 예수님의 삶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또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준다고 하는 것은, 빵을 주고 떡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주신다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위하여 우리 생명을 바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윤리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되는데, 또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렇게 하는 방향성이 자기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자기를 죽이는 방식으로, 즉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있으면 이렇게 하셨을 것이다” 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감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황송하게도 말이다.

◈ ‘지시’이고, 곧 ‘사귐’ !!

다시 말해서, 오늘 강의에서 정답이라고 하면 정답이 무엇인고 하니, 저는 여기에 대해서 조금도 양보할 마음이 없는데, 그것이 곧 ‘지시’ 라는 것이다. 즉 “성령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지시를 받고 산다” 라는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형식화가 되고 완벽한 논리라고 해도, 그것을 일단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는가? 마치 가지고 있는 그것이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처럼 여길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가? 자기는 완벽한 윤리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결코 자기를 구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두 글자로 ‘지시’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곧 ‘사귐’ 이라는 말이다. 즉 빛 가운데서의 사귐이란 말이다. 여기서 사귄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찾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즉 사귀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찾아왔으면, 그 다음부터는 지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지시를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당신이 하려고 하는 것이 과연 복음적인가?” 라고, 즉 “지금 당신이 하려는 것이 당신을 살리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인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주님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인가?” 라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하는 것이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우리가 천년 만년을 살아도 괜찮은데, 또한 억만장자가 되어도 괜찮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의 잘남을 드러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악마의 세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침범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신종 인플루과 같은 것의 침범을 말이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데, 즉 모든 것이 다 가능한데,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주신 복음의 능력 안에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말씀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놓았사오니, 이제는 홀로 내버려두지 마시고 우리 함께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할 바를 인도해주시고, 지시해주시고, 명령해주셔서, 저희들이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하신 것으로 저희들을 사용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2,07 새벽 00시 30분에 마침.

                                                                           망할 놈의 PIGS !!

 

 

※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1995]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1906년 1월 12일(러시아 구력으로 1905년 12월 30일)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kaunas)에서 유대인 부모 아래서 태어났다. 그는 탈무드 교육이 엄격하게 준수되는 집안 환경에서 히브리어 성경과 푸슈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1837), 톨스토이(Aleksei Konstantinovich Tolstoi, 1817~1875),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 등의 러시아 문학을 읽으며 자랐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의 가족은 우크라이나로 이주하였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리투아니아로 다시 돌아왔다. 1923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1928년부터 1929년까지는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 대학에서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강의와 세미나에 참석해 현상학(現象學, phenomenology)을 공부했다. 그리고 1930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후설 현상학의 직관 이론 La theorie de l'intuition dans la phenomenologie de Husserl>이라는 논문으로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그 해에 바로 출판되었고, 프랑스에 후설의 현상학을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1932년 오스트리아의 빈(Wien) 출신의 음악가 레이사(Raissa)와 결혼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파리(Paris)에 있는 유대인 학교인 동방 이스라엘 사범학교(Ecole Normale Israelite Oriental, ENIO)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사상을 프랑스에 소개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 Cartesianische meditation und pariser Vortr¨age>을 프랑스어로 번역했고, 1932년에는 하이데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레비나스는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러시아어와 독일어 통역을 맡았다. 하지만 1940년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5년 동안 포로수용소에서 벌목(伐木) 등의 강제노동을 하였다. 그가 수용소에 있는 동안 리투아니아에 있던 그의 가족은 나치스(Nazis)의 대량학살에 희생되었다. 수용소 생활의 과정에서 그는 후설이나 하이데거의 영향에서 벗어나 플라톤 이후의 서구 철학의 존재론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독창적인 사상을 형성하였고, 그 내용은 1947년 <존재에서 존재자로 De l'existence a l'existant>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레비나스는 1961년까지 동방 이스라엘 사범학교(ENIO)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프랑스어권 유대 지식인 콜로키엄(colloquium)을 창설하며 유대주의 재건에 참여했다. 이 시기에 그는 본격적으로 탈무드를 공부하였고, 현상학과 유대교의 전통에 바탕을 두어 자신의 독창적인 사고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장 발(Jean Wahl, 1888~1974)의 ??철학 학교(College Philosophique)??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1946년부터 1947년 사이에 행한 그 강의의 내용들은 1979년 <시간과 타자 Le temps et l'autre>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961년 푸아띠에 (Poitiers)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1967년에는 낭떼르(Nanterre)의 파리10대학(Universite Paris X)에서, 그리고 1973년부터 1978년까지는 소르본 대학(Universite de Sorbonne)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79년 이후에는 교수직에서 물러나 책을 저술하는 데에만 전념하였으며, 1995년 12월 25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다.
레비나스는 흔히 ??네 문화의 철학자??라고 불린다. 러시아의 변방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독일 철학을 공부했고, 프랑스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는 레비나스로 하여금 ??내부인(內部人)인 동시에 국외자(局外者)??로서 서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겪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폭력성은 현대 문명이 지닌 전체주의적 속성에 대한 윤리적 성찰로 이끌었으며, 타자에 대한 인격적인 윤리적 책임감을 출발점으로 하는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61년에 출간된 <전체성과 무한 Totalite et infini : Essai sur l'exteriorite>과 1974년에 출간된 <존재의 타자인가 아니면 본질의 저편인가 Aurement que 'etre ou au-dela de l'essence>는 ??타자의 윤리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사상이 가장 체계적으로 표현된 저작들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서구 철학의 전통적인 존재론이 서유럽의 문화나 문명의 위기와 전체주의의 근원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선언으로 대표되는, 인식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존재론은 ??나?? 이외의 모든 ??타자??를 ??나??의 인식 안으로 끌어들이며 ??타자의 타자성??을 무시하고 동일자의 영역으로 환원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인 체계 안에서 재정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론은 모든 것을 예외없이 전체 속에 체계화하는 전체성의 철학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존재론적 철학을 ??동일자의 철학??, ??힘의 철학??, ??자아론(Egology)?? 등으로 규정하며 비판한다. 이러한 철학이 전체성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존재론에 대해 자신의 철학을 형이상학이라고 나타낸다. 그는 존재론적 욕구(besoin)와 형이상학적 욕망(desir)을 구분한다. 주체에서 비롯된 존재론적 욕구는 이기적인 존재 유지의 노력이지만, 형이상학적 욕망은 객체로부터 비롯되며 ??나??에 의해 소유되고 향유될 수 없는 것을 향한 갈망이다. 그리고 존재론이 끊임없이 ??나??의 세계로 귀환하는 사고(思考)라면, 형이상학은 ??나??의 세계에서 떠나 ??나??의 바깥 또는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자를 향한다. 이러한 구분에 기초해 레비나스는 존재론에 대한 형이상학의 우위를 말하며, 존재론의 전체성에 대립되는 형이상학의 무한성을 강조한다. 전체성은 인간이 유한한 자기 인식의 체계 안에 모든 것을 내재화하려는 욕구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타자는 내가 어떠한 수단으로도 지배할 수 없는 절대적 외재성을 지닌다. 때문에 타자가 누구든 관계 없이 그의 생명을 존중하고 윤리적 관계를 맺을 때 ??나??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 이처럼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단지 공존해야 할 ??다른 자아??가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무한자이다. 서구의 전통적인 존재론에서 타자는 사고의 대상으로 ??나??에 의해 그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을 뿐이었지만,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나??에게 윤리적 책임을 갖도록 명령하고 호소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레비나스는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 대한 성찰을 통해 현대 문명의 전체주의적 속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학의 기초를 제시하려 했다. 이러한 레비나스의 사상적 지향은 ??윤리학은 존재론에 앞선다(Ethics precedes ontology)??는 표현으로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그는 ??홀로코스트(Holocaust) 이후 세계의 도덕성을 끊임없이 탐색했던 철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서구 철학의 전통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 기초한 그의 사상은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를 포함해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후설 현상학의 직관 이론 La theorie de l'intuition dans la phenomenologie de Husserl> (1930), <존재에서 존재자로 De l'existence a l'existant> (1947), <후설과 하이데거에서의 존재의 발견 En de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 (1949), <전체성과 무한성 - 외재성에 관한 에세이 Totalite et infini : Essai sur l'exteriorite> (1961), <난감한 자유 Difficile liberte> (1963), <4개의 탈무드 강독 Quatre lectures talmudique> (1968), <타인의 인간주의 Humanisme de l'autre homme> (1972), <존재의 타자인가 아니면 본질의 저편인가 Aurement que 'etre ou au-dela de l'essence> (1974), <시간과 타자 Le temps et l'autre> (1979), <윤리학과 무한 Ethique et infini> (1982), <민족의 시대에 A l'heure des nations> (1988), <타자에 대한 사유에 관한 에세이 Entre nous. Essais sur le penser-a-l'autre> (1991) 등이 있다.  - 두산백과에서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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