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2010년 1월 18일 강의 피 18강 인간의 선택과 vs 십자가의 파편인 교회

100118 피18강 인간의 선택 vs 십자가의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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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118피p074인간의선택vs십자가의파편

피 18강 인간의 선택과 vs 십자가의 파편인 교회 

[10 대구강의 2] - [피 18] - 인간의 선택 vs 십자가의 파편
                                                                                
                                                          10,01,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인간의 자기 선택 !!

오늘은 교재 74페이지부터 한번 살펴보자.

** 이 작업은 본인의 기대로부터 비롯된다. 기대가 의도가 되고, 의도는 선택으로 이어지고, 선택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선택하는 존재다. 자유의지와 자유의사를 가지고 선택한다. 심지어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을 때조차도 어디까지나 자기 계산 하에 선택한 한시적 책략이다. 외부에서 강요하고 위협했다는 핑계와 변명을 대지만 인간이란 자신이 선택하지 아니한 일은 못하는 법이다. 이러므로 인간 자신이 선택하지 않는 현실은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안중에도 없다. 인간은 왜 ‘자기 선택’을 고집하는가?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인간은 왜 ‘자기 선택’을 고집하는가?

여기에 인간의 선택이 나오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아니한 일은 못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있으면, 그 주변에 있는 것들을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혹은 자연이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인간은 그런 것들 중에서 일부를 가져오게 되는데, 즉 이렇게 ‘A’도 가지고 오고, ‘B’도 가지고 오고, 또한 ‘C’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지고 오지 않은 것들도 있다는 것이다. ‘D’나 ‘E’나 ‘F’나 ‘G’와 같이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온 것만 가지고 자기 세계를 만들게 되는데, 그런데 자기가 가지고 온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의 원리원칙이 다르게 되면, 서로가 다투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즉 ABC는 골라서 가지고 왔는데, 그런데 나머지 DEFG는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DEFG가 자기를 공격하게 되면, 자기만의 세계와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세계가 서로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내가 선택을 했기에 다 옳다 ??

그런데 그렇게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아직도 내가 세상을 다 모른다” 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대충 자기가 원하고 편리한 것만 골라서, 즉 자기가 아쉬운 것만을 골라서 한 것이지, 세상 전체에 대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DEFG라는 요소는 빼놓고 일시적으로 가지고 왔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아직도 세상을 다 모르면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선택을 했기에 다 옳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제인데, 즉 자기가 선택했기에 모두 옳다고 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선택을 했기에 말이다.

다시 정리를 해보면, “1번, 나는 이 세상을 다 모른다. → 2번, 하지만 나는 세상의 일부를 선택해서 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 3번, 그래서 내가 옳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혹은 자기는 최선을 다했다고 하든지 하면서 버틴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성경을 대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하지만 이 세상 전체가 모두 다 누구 손에 있는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 조금 쉬운데, 즉 이렇게 자기가 선택한 ‘A’ 라는 사람이 있고, 하지만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D’ 라는 사람도 역시 있다는 것이다. 물론  ‘A’ 라는 사람은 자기가 마음에 들어서 선택을 했고, ‘D’ 라는 사람은 보기 싫다고 꺼지라고 한다는 말이다.

◈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선택하는가?

하지만 이러한 모든 전체는 다 누구 안에 있는가? ‘나’ 자신을 비롯해서, 자기가 싫어하는 자와 좋아하는 모든 자기들이 다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데,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선택을 하면서도 정작 누구는 선택하지 않는가? ‘나’를 비롯해서 그 전체를 다 포함하는 하나님은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면 자기가 꿀리니 말이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면 자기는 하나님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왜 내가 시키는 데로 하지 않지? 똑바로 해” 라고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 저는 제 몸이 편안한 대로만 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바로 그러니까 니가 문제이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꾸만 잔소리를 듣게 된다는 말이다.

◈ 엄마, 라면 하나만 끓여 줘 !!

좀더 쉽게 말해서, 이 전체를 엄마라고 보고, 그 안에 있는 우리 인간을 아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렇다면 이 아이가 엄마 마음을 알겠는가? 모르겠는가? 아이는 자기가 필요할 때만 엄마를 찾게 되는데, 바로 그와 똑같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이는 엄마에서 자기에게 편한 것만 찾는데, 즉 자기에게 젖을 준다든지 기저귀를 갈아주는 말이다. 하지만 “어머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라는 것은 전혀 묻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관심도 없고 말이다. 그러니 아이는 엄마에게서 자기가 필요한 일부만을 빌려와서는, 그것을 곧 ‘선택’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선택해서 가지고 와놓고는 뭐라고 하는가? 만약에 엄마가 간섭하게 되면 “엄마는 들어오지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게임을 한다고 하면서 문을 걸어 잠그든지 말이다. 그리고 나서는 문을 살짝 열어 젖히고는 “엄마, 라면 하나만 끓여 줘”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고는 다시 문을 닫는다는 말이다.

◈ 살짝 뚜껑 열린 통 !!

이러한 모습을 두고 어떤 학자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살짝 뚜껑 열린 통’ 이라고 말이다. 표현이 참 재미있는데, 그러니 이것이 쓰레기통인데, 그런데 그것이 완전히 닫힌 것이 아니라 살짝 열려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는 그 쓰레기통 안에 들어있는데, 그렇게 자기 세계 안에서 뚜껑만을 살짝 열고는 눈만 빼꼼히 내놓고 있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얼른 닫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세계로 침작해 버린다는 말이다.

지금부터는 여기에 대해서 강의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즉 “인간은 왜 자기밖에 모르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오늘 우리 교재에도 나와있지만, 로마서 1장 28절에 보면,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라고 하는데, 즉 우리 인간이 왜 그렇게 이 전체가 다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는지 말이다. 즉 하나님이 들어오는 것을 말이다.

◈ 인간은 왜 영원한 노숙자인가?

하지만 그 반대로, 하나님이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이 세상 전체를 다 알게 되니까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하지만 우리 인간은 결코 그렇게 하나님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자기가 편리한 것만 골라서 취사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들어오지 말라고 추방을 시켜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선택을 했다고 옳다고 우기면서 자기만의 쓰레기통을 만들어서, 그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그야말로 노숙자인데, 자기가 펴놓은 포장지 위에다가 자기 영역을 표시해서 자기 잠자리라고 해서 그 위에서 누워서 자고 말이다. 그리고 옆에 자던 사람이 가면 그 박스를 빼앗아서 자기 영역을 넓히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자기 세계밖에 모르는 영원한 노숙자라고 할 수가 있는데, 자기가 펴놓은 그 종이박스 위에서만 노는 말이다.

그것은 의사나 변호사가 되어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쪽 세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슨 얼라(?)도 아니고 참으로 기가 찬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에 바빠서, 단지 그것 때문에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힘들게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그런 짓을 하려고 했느냐는 것이다. 즉 겨우 한다는 짓이 자기 구역을 표시나 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왜 그렇게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바로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제가 전에도 이러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아무튼 지금은 자꾸만 되풀이를 할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 구강단계 ??

예를 들어서, 지금 여자가 임신을 해서 배가 부른데, 그러면 그 부른 배 안에 누가 들어있는가? 물론 아기가 들어있는데, 그런데 그 아이가 이제 때가 되어서 여자의 뱃속에서, 즉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게 되는데, 그렇게 나오게 되면, 이때는 엄마와 아기는 서로 하나가 되어있기에 말이다.

그때 엄마의 뱃속에서 막 나온 아기가 느끼는 것은, 자기의 전체를 다 아는 것이 아니라, 구강(입)과 시각(눈) 정도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갓난아이에는 천장에 모빌을 달아놓곤 하는데, 눈동자를 움직이는 연습을 하라고 말이다. 그리고 입은 무엇인고 하니까, 밖에 나와서 양식을 먹으라고, 젖을 빨라고 그렇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갓난아기는 구강과 시각밖에 모르는데, 물론 청각도 약간은 되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물론 ‘나’ 라는 것은 없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엄마의 신체적인 위치에 따라서, 즉 엄마가 팔을 어떻게 해서 아기를 끌어 앉는가에 따라서 그때 그때마다 자기 형체가 변형되어서 자리를 잡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 ‘트랜스포머’에서처럼 말이다. 즉 엄마가 길게 들면 자기는 길다란 줄로 알고, 또한 엄마가 포근하게 끌어 앉으면 자기는 그만 동그란 줄로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윤곽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것이 바로 갓 태어났을 때라는 말이다.

◈ 옹아리 단계 !!

그런데 여기서부터 3개월이 지나게 되면 드디어 옹아리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리고 6개월을 지나면 거울을 보게 되고, 드디어 3년을 지나게 되면 자아 단계라고 해서, 즉 자아라는 주체가 형성이 된다는 것이다. 3년을 지나면 말이다.

여기서 3개월이 되어서 옹아리를 한다는 것은 모방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이렇게 “옹알옹알” 이라고 하면서 옹아리를 하면서 모방을 하는데, 그것이 행동을 모방하는가? 아니면 결과를 모방하는 것인가? 꽤나 어려운 질문이지 싶은데, 보통 상식 선에는 행동을 모방한다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인간은 결과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 선악과 - 결과만 모방하려는 인간 !!

그것이 바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모방했는가? 아니면 그 천지창조의 끝머리를 모방했느냐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런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첫날부터 한 그런 모든 수고는 다 생략하고, 마지막의 그 결과만을 따먹으면 앞의 것도 모두 따라오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즉 선악과만 따먹으면 천지창조도 모두 따라오는 것으로 여겼는데,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과정도 없이 그만 결과만 따먹은 것이 그만 문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엄마, 나도 높이 뛰고 싶어 !!

예를 들어서, 높이뛰기 선수가 열심히 훈련을 해서 3미터를 뛰어넘는데, 그런데 그것을 지켜보던 아이가 엄마에게 자기도 그것을 하고 싶다고 하니, 엄마가 사닥다리를 놓고는 그 아이를 3미터의 높이에 덜렁 놔두게 되면 그 아이는 그만 기겁을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높이뛰기 선수는 열심히 연습을 하는 과정 속에서 그렇게 3미터를 날아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런 것은 모두 다 싫고, “야, 사람이 3미터나 올라가게 되다니, 나는 저것이 너무나 부러워” 라고 하니, 엄마는 그렇게 부러우면 그렇게 해보라고 하면서 그 아이를 3미터의 높이에 두게 되니, 아이는 기겁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멀리서 보면 그렇게 뛰어넘는 것이 멋있게 보일지 몰라도, 그러나 막상 자기가 그런 높이에 올라가게 되면 당장에 내려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그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은 무엇이든지 다 그러한데, 즉 남에게 있어서 좋은 것은 그냥 다 가지고 싶은데, 그런데 그 사람이 그렇게 가지게 된 그런 모든 과정들은 다 생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모방하는 것은 그렇게 남처럼 되고 싶어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경과나 절차를 다 무시하고 남의 것의 그 결과를 무조건 가지고 오려고 하는, 즉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는 그런 더러운 행세, 즉 1등만 하려고 하는 그런 더러운 행세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 아, 목사가 되고 싶다 ??

예를 들어서, “목사가 되고 싶다” 라고 하면, 그런 힘든 과정들은 다 생략하고 큰 교회당에서 큰소리를 떵떵거리면서 설교하는 것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병헌처럼 초코릿 복근을 가지고 싶다고 하면, 그것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죽으라고 고생을 해야만 되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어린아이가 옹아리를 하는 것은, 어른들이 어떻게 해서 말을 하는지,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이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이 말을 하니 자기도 그렇게 흉내를 내본다는 것이다. 그 결과만을 말이다.

◈ 중요한, 거울단계 !!

사실 이런 옹아리는 별로 중요하지를 않고, 6개월 째의 거울단계가 아주 중요한데,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즉 아이가 6개월이 되면 약간 크게 되니 거울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울에 있는 자기의 완성된 모습이 바로 자기의 완성된 모습이라고 동일시하게, 즉 같이 보게 된다는 말이다. 즉 거울 속의 모습과 자기를 같이 본다는 것이다.

물론 어른들은 아는데, 거울 속의 모습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여러분은 모르는가요? 무슨 말인고 하니, 거울을 때리면 자기가 전혀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6개월이 된 아이는 그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자기를 때리면 그만 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울 속의 자기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니 말이다.

바로 이런 단계를 두고서 라캉은 ‘상상계’ 라고 했는데, 지금 이런 어린아이의 이야기가 성경과 무슨 상관이 있는고 하니, 그리고 이 ‘피’ 라는 책과 무슨 관련이 있는고 하니, 그 이유를 미리 말씀드리게 되면, 사람은 이렇게 상상하고 싶은 것을, 그것이 나중에 지나게 되면, 즉 그것이 3년 정도가 지나게 되면 상상계에서 무엇이 되는고 하니까, ‘상징계’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데, 이렇게 상징계로 바뀌게 되면서 앞의 상상계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것이 밑바닥에 담기게 된다는 것이다.

◈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

다시 말해서, 이 상상계는 그야말로 무대포로 모든 것을 다 자기와 동일시하게 되는데, 그래서 어린아이들의 경우에, 형과 동생에게 똑같이 빵을 나누어주어도 철없는 동생은 자기 손에 분명히 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의 빵을 보고 무조건 달려들게 된다는 것이다. 전혀 이유도 묻을 필요도 없이 그냥 달려들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마구 울음을 터트리고 말이다.

심지어 나이가 마흔이 되어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산을 다 골고루 나누어주었는데, 그런데도 형님의 유산을 보고 달려든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은 그런 유산이 없어서 그런 고민을 안 해도 되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래서 이것을 ‘무의식’ 이라고 해서, 즉 밑에 침전되어 있다고, 즉 잠겨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동생은 그것이 못된 짓인 줄 전혀 알지를 못하는데, 왜냐하면 이제 태어난 시기가 겨우 6개월이 된 아이가 도대체 무엇을 알겠느냐는 것이다. 즉 그런 아이에게 무슨 윤리와 도덕이 있고 선과 악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6개월이 된 아이는 그냥 자기 본성대로 움직이게 되는데, 그런데 그 본성이 무엇인고 하니, 조금 전에 아이가 3개월 이전에는 자기 팔다리를 모른다고 했는데, 그냥 엄마가 묶어주는 대로 그것이 곧 자기 형체가 된다는 말이다. 마치 ‘트랜스포머’ 라는 영화에서 그냥 조작하는 되듯이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아이는 엄마가 묶어주는 대로만 하다가, 즉 아이는 자기의 형체가 미완료의 상태로서, 정작이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 아이는 엄마가 앉아주지 않고 보살펴 주지 않으면, 오줌도 그냥 마구 싸고 만다는 것이다.

◈ 그런데 ‘엄마’ 라는 타인이 와서 !!

그런데 엄마가 기저귀를 갈아주던지 하면, 그것을 타인이라고 하는데, 즉 엄마라는 타인이 와서 자기 기저귀를 갈아주게 되면, 그때 아이는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아하, 나는 입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밑에 또 뭔가가 있구나” 라고 여기게 되고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까지 그것은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아하 지금 내 밑이 아주 시원하구나” 라고 느끼지만 말이다. 하지만 거울단계로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아하, 내 하체와 상체가 연결이 되어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무엇을 보고 말인가? 거울을 보고서 안다는 말이다.

그런데 거울이 이렇게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엄마나 아빠가 오게 되면, 그 아빠와 엄마를 보고서 자기를 아빠와 엄마와 같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난 삼아서 이웃집 아주머니가 자기 엄마를 때리게 되면, 아이는 기겁을 하고서 넘어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얻어맞았으니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거울을 보고서 울지만, 그런데 엄마나 아빠를 때리면 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아이는 엄마나 아빠와 떨어지지 않는 상태로서, 즉 그들이 남이 아니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아이의 경우에는 엄마가 여전히 자기를 대신하기 때문에, 즉 이 아이는 엄마의 자궁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빠는?) 그렇게 아직까지는 자기가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거울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이것을 ‘상상계’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아이는 무조건 자기와 일치를 시킨다는 것이다.

◈ 실패 장난감(fort da) !!

그렇게 일치를 시키면서 “아하, 사람은 각자 각자가 어머니구나” 라고, 즉 서로가 따로 떨어진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6개월이 되면, 엄마가 아이를 놔주고서 시장을 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것을 ‘fort da’ 라는, 즉 ‘실패 장난감’ 이라는 것인데, 성공하고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로 묶어놓은 패라는 말이다.

그것이 어떤 장난감인고 하니까, 주로 외국에 있는데, 던지고 나서 다시 잡아당기면 다시 끌려온다는 것이다. 사실은 모든 장난감이 이와 비슷한 원리인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처음에는 여기 있었는데 그런데 던지게 되면 그만 부재한 상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엄마가 여기에 있었는데 그만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시 당기니까 온다는 것이다.

◈ 아하, 엄마가 없을 때도 있구나 !!

그래서 이 아이는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엄마가 있을 때와 없을 때를 분간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엄마가 없으면 자기도 역시 없는 것인데, 그러나 이제부터는 “아하, 엄마가 없을 때도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즉 그렇게 엄마가 없을 때가 있게 되면, 그 엄마의 자리는 그만 빈자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기는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엄마의 자리는 그만 비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엄마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도 용납해서, 그 덩어리를 전체로 해서 자기와 동일시하게 보게 되는데, 그것이 곧 ‘상상계’ 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엄마가 없어도 언젠가는 엄마가 돌아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엄마가 돌아오면, 자기는 제대로 된 ‘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이렇게 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않게 되는데, 그것이 평생을 간다는 것이다.

◈ 오늘의 주제 -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라는 것인데, 여기서 인간의 행동은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행동하는데, 그렇게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은 이미 어릴 때 형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어떻게 행동을 하는고 하니까, 자기가 잃어버린 그 무엇을,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데, 아무튼 그 잃어버린 것을 자꾸만 추구하고, 그것을 ‘지향성’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잃어버린 것을 추구하면서, 즉 “아니냐, 그게 아니야. 또 뭔가가 있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모르고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데, 그것이 아주 분주한 곳이 바로 꿈속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꿈속에서, 사실은 찾는다기보다는 자꾸만 들쑤셔본다는 것이다. 이쪽에서 쑤시고, 저쪽에서 쑤시고 말이다. 그렇게 뭔가 미흡하고 결핍된 것을 찾는데, 그것은 나이가 70이나 80이 되어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 시므온 - 주여, 종을 평안히 !!

지난주에 ‘시므온’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그가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말로 자기 마음이 편안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서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라고, 즉 “제가 찾던 분이 바로 이분입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 과연 인간의 빈자리는 누가?

아무튼 인간은 자기 자신의 빈자리가 있는데, 이것을 조금 더 어렵게 이야기하자면, 자기의 빈자리가 있고 그것을 자기가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자기가 하는 것을 인간의 선택, 혹은 선택행위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에 의하면 원래 인간의 빈자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빈자리를 하나님이 만드시고, 그 빈자리에 무엇을 채우느냐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주셔야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될 때 우리 인간은, “아하, 나는 독자적이고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

그래서 아까도 본 로마서 1장에 보면,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리가 없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분명히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 자리를 술로 대신해서 때운다든지, 아니면 타이거 우주처럼 여성편력으로 때운다든지, 아니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가족이나 친구로 때운다는 말이다.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아무튼 그렇게 우리 인간은 여러 가지 취미생활이나 오락이나 돈 등을 가지고 때우게 되는데, 그렇게 하나님을 대체하는, 즉 하나님은 말고, 하나님처럼 전적으로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엇은 잡았다고 하면 곧장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만 식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 아무리 큰 예배당을 지어도 !!

예를 들어서, 큰 예배당을 지을 때 처음에는 교인들이 얼마나 흥분하고 좋아하는지 모르는데, 하지만 다 완성이 되고 나면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가 장담을 하던데 그냥 6개월만 지나게 되면 그런 것이 식상해져서 아무런 기쁨도 주지를 못하는데, 그때는 처음 자기들에 예배를 드렸던 처음의 작은 교회가 그만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어떤 교회는 기존의 작은 예배당을 허물지 않고 옆에 건물을 크게 다시 짓는데, 물론 교인들이 처음에는 “야, 우리가 저런 작은 교회에서 어떻게 예배를 드렸지?” 라고 하다가, 하지만 나중에는 뭐라고 하는가? “그래도 우리가 그때 저 작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을 때가 살갑고 참 좋았다. 지금 이렇게 건물만 크게 지어서 이게 뭐꼬? 누가 와도 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이제 뭐 다른 것이 없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목사가 뭐라고 하는가?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선교를 해야 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선교라고 하는 미지의 영역을 또 다시 남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인들도 하여금 다시 돈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게 해서, 다른 엉뚱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거기에 몰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선교가 막히면, 또 다시 노인복지를 내놓고 말이다.

◈ 인간은 사랑 받기 위해서 !!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을, 즉 무엇인지는 몰라도 뭔가 잃어버린 것, 그것을 상상계라고 하는데, 그런 상상계가 6개월이 지나면 누가 등장하는고 하니, 물론 아이의 경우에 상상계 이전까지는 아직 엄마와 분리가 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아직 분리가 되기에는 그 빈자리가 너무나 크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말이다.

바로 이것을 두고서 우리가 잘 아는 ‘사랑’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사랑은 우리 인간이 커가면서 위에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무의식 속에서 내면에 침전되어서 가라앉는다는 말이다. 즉 우리 밑에 차곡차곡 쌓인다는 것이다.

◈ 천주교 - 예수님이 아닌 마리아 !!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 아주 간단한 공식이 등장하게 되는데, 즉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라고 하면,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유명한 유행가도 있는데, 즉 인간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 살아가는데,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섬긴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니고 엄마인 마리아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사랑, 즉 그런 어머니의 사랑은 주체와 객체가 분리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냥 있는 그 자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있는 것인데, 그렇게 하나가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때 그렇게 하나가 된 시절에서, 거기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은 분리인데, 그렇게 분리가 되었다는 것은, 반대로 그만큼 당기는 힘도 같이 더욱 더 강하게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 엄마 찾아 삼만리 !!

왜 인질극을 벌릴 때, 그 범인을 붙잡기 위해서 누구를 동원시키는가? 바로 엄마인데, 그래서 엄마가 와서 뭐라고 하는가? “영철아, 에미가 여기에 왔다. 이제 그만하고 에미에게로 나온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영철이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어머니, 용서하세요. 이 사회가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엄마 찾아 삼만리’ 라는 것이, 그것이 그 어떤 인간이라고 해도 그 밑에 모두 깔아 앉아있는데, 미리 이야기를 하면 그것을 두고 ‘상징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것이 누적이 되어있는데, 이러한 상징계는 어디서 만드는고 하니, 바로 사회에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첫 번째 사회가 곧 가정인데, 거기에는 아빠의 법이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가문은 그런 것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똑바로 앉아. 그리고 신발은 바로 정리해!” 라는 법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 가정, 학교, 직장 !!

아무튼 그렇게 해서 법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그런 가정의 법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학교로 보내는데, 물론 이 학교에서는 나중에 커서 직장으로 보내고 말이다. 사실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곳이 바로 직장인데, 이 세상에서 직장보다 더 무서운 곳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엄마의 말을 안 듣는 놈도, 또한 학교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는 놈이라고 해도, 직장에 가면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그렇게 말을 고분고분하게 잘 듣는지, 상사의 말과 선배의 말을 말이다. 말이 아니라 그야말로 말씀인데, 그런데 그렇게 학교에서 직장으로 가는 도중에 남자들만 가는 곳이 있는데, 여자는 안 되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군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가 군대에 갔다오지를 않으면 인간도 아니라고 하는 말이 등장하는데, 물론 방위는 조금 곤란하고 말이다. 도시락을 사들고 다니면 그것은 반 토막이 난 것이기에 말이다. 그렇게 되면 생판 자기밖에 모르던 그야말로 짐승과 같은 놈이, 드디어 군대에 가면 남의 말을 잘 듣고 고분고분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사회생활도 할 수 있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을 두고 ‘상징계’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의 욕망과 본능을 전부 다 계속해서 양보하고 양보하는데, 오직 질서와 법을 준수하기 위한 하나의 배치, 혹은 하나의 점, 혹은 도구나 역할이라는 것이다.

◈ 삼성맨의 비애 !!

예를 들어서, 여기에 어떤 사람이 하나 있는데, 사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한데 말이다. 흔히들 삼성이나 현대에 다니면 좋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거짓말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성이나 현대는 없는데, 가보면 자기가 삼성이 되어야 하고 현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삼성을 만들고 현대를 만들어야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자기가 삼성이나 현대를 먹여 살리지 못한다고 하면, 자기는 거기서 쫓겨나야 한다는 말이다.

◈ 인간은, 하나의 철근 구조물로서 !!

사실 이런 것을 강의하려고 하면 10시간 이상을 해야하는데, 아무튼 여기에 이렇게 하나의 구조가 있다고 하면, 마치 공사판의 철근 구조물처럼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삼성에 있다고 하면, 자기는 이런 철근 구조물에서 하나의 철근으로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하나의 철근 구조물로서 다른 철근과 서로 아구(?)가 맞아야 하는데, 즉 그렇게 맞아주어야 거기서 돈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을 ‘잉여’ 라고 하는데, 즉 여분의 것이란 말이다. 그렇게 해야만 계속해서 돈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되지가 않으면, 즉 돈을 벌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그런 사람은 삼성이나 현대라는 회사에서 제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 혹시 ‘KOTRA’ 라고 아시는지?

혹시 ‘KOTRA’ 라고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는데, 한국의 무역을 담당하는 해외지사를 의미하는데, 하나의 공기업인데 말이다. 무슨 일을 하는고 하니까, 젊은 아이들을 뽑아서 과테말라나 우간다로 보내서 우리나라의 물건을 팔게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분명히 ‘KOTRA’ 라는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니 자기는 아프리카의 잠비아에 가서는 여자 속옷을 팔고 컴퓨터를 팔아야 한다는 말이다.

거기서 새로운 물건을 100만원을 팔게 되면, 50만원은 회사에 주고 50만원은 자기가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취직을 한 것이냐는 것이다. 그냥 자기가 활동한 것이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활동을 할 수 있는 그 구조는 ‘KOTRA’ 라는 공기업에서 제공을 해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다른 회사들도 다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 상징계의 특징 - 인간은 없고 법이 !!

그러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여기서는 인간은 없고 법이 있는데, 그 법에 인간이 복종하는 체계인데, 그것을 두고서 바로 ‘상징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상징계에서 인간을 되찾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취직을 하지 않든지, 아니면 여자의 경우에는 집에서 아이나 낳고서 키우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 세상에 나가게 되면 무엇을 양보해야 하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나’ 라고 하는 인간을 그만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고 즐기고 싶은 것은 양보하고 법을 지켜야 하는데, 그런데 그 법은 회사의 사장이나 회장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의 구조가 된다는 것이다.

◈ 오잉, 주체의 확대 ??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부분인데, 즉 목사가 교회를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등록된 교인들끼리 서로의 욕망과 욕심이 딱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교회가 커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욕심이 이탈을 하게 되면, 그런 사람은 그 교회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두고 ‘주체의 확대’ 라고 하는데, 그러니 누구를 욕할 문제가 아니라 그 전체에 대해서 자기가 동의를 할 것인지, 아니면 그 전체의 흐름에서 자기가 빠질 것인지, 그것은 본인이 결정하면 된다는 것이다. 강제로 누군가가 하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분위기에 자기가 편승을 하겠다고 하면, 같이 휩쓸려서 한 덩어리가 되어서, 즉 주체가 되어서 흘러가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빠져 나오면 된다는 말이다.

지금 지진이 난 ‘아이티’에 식료품이 없어서 사람들이 칼을 들고 강도짓을 하면서 설친다고 하는데, 아마 처음에 한 사람이 그렇게 하니 따라서 한 것 같은데 말이다. 그리고 길거리에 휴지를 한 사람이 먼저 버리면 눈치를 보다가 우르르 따라서 버리곤 하는데, 그것은 서로가 동의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인데, 물론 먼저 버린 남을 핑계를 대지만 말이다.

◈ 구조가 곧 자기의 주체가 되어서 !!

바로 그러한 모든 것을 어떤 현상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구조에 자기가 발을 들여다 놓으면, 같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움직이는 주체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보고 욕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즉 자기 인생에 대해서 누가 누구를 탓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동의를 했기 때문에 말이다. 바로 그러한 구조가 자기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는 한국이 싫다고 해서 미국에 가게 되면, 그 미국에도 미국의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미국에서 미국 시민으로서의 하나의 주체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체라는 것은 환경에 따라서, 즉 그때 그때마다 본인의 선택에 따라서 달라지지 마련이라는 것이다.

◈ 상징계를 좀 더 살펴보면 !!

지금 강의를 하다가 보니 진도를 나갔는데, 진도를 나가기 전에 여기에 있는 이 부분을 조금 더 해보겠는데, 여기 상징계 밑에서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의 상징계에서는 무엇이 주체가 되어서 자기를 강요했는가?

물론 법과 질서가 그렇게 했는데, 그런데 이 법과 질서는 구조화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조화가 되어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즉 어른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어른은 없고, 그냥 구조자체가 어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참으로 허무한데, 마치 영화 ‘매트릭스’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어른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요받는, 참으로 신비롭고도 이상하다는 것이다. 즉 누군가가 자기에게 “야, 너는 이 땅에서 살아!” 라고 명령한 사람이 없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들이 다 살아가니 자기도 그렇게 살아남아야 하는 것으로,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순응을 하고 수용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군대에 가면 그런 것을 실감나게 느끼게 되는데, 그런 면에서 군대에 가지 않으면 어른이 안 된다는 말이 맞기도 한데 말이다. 그런 군대에서 그 집단 전체가 다 나쁜 짓을 하는데, 그런데 거기서 자기 혼자 빠진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아니, 누가 내 등을 떠밀지?

물론 아주 지독한 놈이 있어서, 즉 학교에서 기독교를 가르친다고 해서 데모하는 놈과 같은 경우에 말이다. 아마 그런 놈들은 군에 가더라도 일찍 제대를 하지 싶은데, 자기 주체가 아주 강력해서 그런 군대라는 구조가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버틴다고 하면 말이다.

그리고 이번에 북한에 가서 선교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면서 스스로 대동강을 건너가는 인간도 그렇고 말이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하면 몰라도,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는 분위기에 편승을 해서,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휩쓸려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나’ 인데, 그런데 그런 상징계에서 무엇을 잊어버렸는고 하니까, 이 ‘나’ 라는 것이 그만 죽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나’ 보다는 법이 우선이고, 그래서 등뒤에서 항상 누군가가 자기를 떠밀고 있는 것만 같다는 것이다. “9시까지 출근해!”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러한 것에 자기가 편승했지만 말이다. 

◈ 사랑 - 태고적이고 무조건적인 것과의 하나 됨 !!

그래서 ‘나’를 찾기 위해서 가끔은 어디로 가는고 하니, 법이 없는 곳에 가게 되는데, 그런 법이 없는 곳이 곧 사랑인데, 그래서 사랑의 특징은 무조건이라는 것이다. 무조건 용서가 아니라 무조건 하나 됨인데, 그렇다면 무엇과의 하나 됨인가?

그것은 바로 ‘나’를 있게 한 미지의 태초의, 그것을 ‘태고적 감정’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나’를 ‘나’로 있게 했던 말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나를 있게 한 분이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그분의 사랑을 듬뿍 받고 싶어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태고적이고 무조건적인 것과의 하나 됨, 바로 그러한 것을 두고서 ‘사랑’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무조건적으로, 자기가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모두 다 받아주는, 그렇게 자기 밑바닥에 있는 바로 그러한 사랑, 그런 사랑을 젊은이들은 20대에 느끼게 되는 것이고, 또한 연애를 할 때 강렬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 근호씨, 못 먹어도 고 !!

그래서 연애를 할 때는 못 먹어도 괜찮고, 하루 종일 마구 걸어다녀도 괜찮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우리 때는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물론 돈이 없어서도 그렇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냥 그렇게 둘이 있기만 하면 좋은데, 그래서 이렇게 연애를 할 때를 두고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타인이 곧 내가 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상상계에서는 타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데, 그런데 상징계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이 상징계에서는 곧 법과 질서가, 혹은 다른 말로 구조가 그만 자기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주체가 곧 자기 자신은 아니라는 말이다.

◈ 우리 인간에게 주체가 몇 개인가?

지금 강의가 좀 어려운데, 하지만 이것 한 가지만 알면 다 알게 되는데, 우리가 거짓말을 하게 되면,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나’가 있는데, 그런데 자기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는가? 모르는가? 당연히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아는 ‘나’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 안에 주체가 몇 개인가? 벌써 두 개가 있다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나’와 그것을 아는 ‘나’가 있다는 말이다.

◈ 거짓말을 하는 ‘나’와, 그것을 아는 ‘나’ !!

그러니 의외로 간단한 문제인데,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나’로 하여금 성경책을 보게 하는 것과, 그리고 자기에게 “야, 거짓말을 이제는 좀 하지마” 라고 하는 ‘나’가 성경책을 보게 하는 것과, 그렇게 서로 둘이 성경책을 본다고 하면 성경해석이 같겠는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분명히 다른데, 그것을 두고 주체의 분열이라고 하는데, 지금 제가 말장난을 하면서 여러분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거짓말을 하는 ‘나’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가 서로 각각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그렇게 서로 각각 따로 놀고 있기에,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해석이 서로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는 거짓말을 한다고 지적하는 그 ‘나’가 하는 성경해석을 적용시키고, 그리고 남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나’가 생각하는 바로 그 성경해석을 또 다시 적용시킨다는 것이다. 즉 “나는 성경을 이렇게 본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계속해서 우기는 우리 인간들 !!

그러니 이런 이야기를 두고 흔히들 철학이라고 하면서 넘어가려고 하는데, 하지만 이것을 그냥 철학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이 자기에게 모두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기에 대해서 모르는고 하니까, 그동안 얼마나 이 밖에 있는 것들에게, 즉 법과 질서와 구조와 같은 상징계에, 즉 태어나고 3년 이후의 인생을 살다보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3년 이전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러니 우리 인간들의 버릇이 무엇인고 하니, 법과 질서와 구조인데, 여기서 나온 것이 체면과 위신, 그리고 자존심과 같은 것인데, 바로 이러한 것들에게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져 있으니, 그것이 마치 진짜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처럼 우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우긴다’ 라고 하는 말이 맞는데, 그렇게 해놓고는 뭐라고 하는가? “성경 말씀대로 행할까요? 지킬까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말씀은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니 꼬라지나 알아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니 본성이나 무엇인지 알고, 그것이나 제대로 드러내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 교인과 하나님과의 대화 !!

제가 오늘 아침에 글을 하나 적었는데, ‘교인과 하나님과의 대화’ 라는 길지 않은 글인데, 그 내용은 간단하다는 것이다. 교인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면 섬기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우선인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우선이란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바로 그런 식으로 나를 공격하는 것이 너의 본성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아마도 제가 올린 글 가운데 제일 짧은 글이지 싶은데,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그것 이상 다른 말은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조건이 필요한데, 즉 하나님이 먼저 자기를 살려주면, 그때는 자기가 고맙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감추고 있었던 악마의 진면목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잘해줄 경우에만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 바로 그것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 다시, A,B,C,D,E,F,G !!

처음에 그린 그림을 다시 그려보면, 여기에 이렇게 A,B,C,D,E,F,G가 있다고 하면, 즉 그런 사건들이 있다고 하면, 우리 인간은 ‘A’도 가지고 오고, ‘B’도 가지고 오고, 또 ‘C’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D’나 ‘E’나 ‘F’나 ‘G’는 같이 가지고 오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 A,B,C와 그리고 D,E,F,G 전부를 다, 그리고 그렇게 구별해서 선택하는 우리 자신조차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누구의 섭리 안에 있다고 하시는가?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은 A,B,C만 선택해서 챙기고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싫어하는 D,E,F,G 까지도 모두 다 합쳐서 밀어 부친다면, 그러니 인간들은 자기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로마서 1장에 근거해서 말이다.

◈ 육(肉) - 엄마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인간의 모습 !!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자기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은, 그런 자기 속에 바로 자기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엄마의 모습으로 출발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출발하는 것을 성경에서 한 글자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바로 ‘육(肉)’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철학에는 없고 오직 성경말씀에만 나오는 것인데, 즉 처음에 출발한 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위에다가 덧붙이는데, 즉 처음 출발한 그 위에다가 상징계를, 즉 윤리와 도덕, 또한 질서와 구조를 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교회도 포함이 되는데, 물론 목사와 장로도 있고 말이다.

그렇게 모든 하찮은 것들이 생색을 내는 식으로 법적으로 폼을 잡고 있으니, 그래서 말씀에 관심이 없고 교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주일이 엄청 피곤한데, 그래서 집으로 가면 그냥 마구 쉬고 싶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본향으로 돌아왔으니 그동안 너무 피곤해서 집에서는 쉬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교회에 가지 않을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교회에 가지 않으면 “너는 왜 교회법을 어기는가?” 라고 하면서 법이 들먹거리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갔다가오면 또 피곤하고 말이다.

◈ 용서가 안 되는 인간들, 그대 이름은 목사 !!

물론 저도 20대에는 교회에서 이런 생활을 그야말로 남들 못지 않게 했는데, 정말이지 빡시게(?) 했다는 것이다. 일요일에는 새벽 4시 반에 나와서 11시에 퇴근을 했으니 말이다. 평신도가 그 정도 했으면 빡시게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지금 저보다 더 빡시게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ㅋㅋ), 아무튼 저도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엄마가 없으니, 즉 사랑으로 돌아갈 기회가 차단이 되어있으니, 그런데 사랑은 받고 싶고 말이다. 그런 사랑을 상징계에서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 남들이 인정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면 갑절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 나는 반드시 인정을 받아야만 돼 !!

그것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는 “야, 저 사람은 참으로 믿음이 좋네. 교회에서 봉사를 너무 너무 잘해서 복을 받겠네” 라고, 바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자기가 잃어버렸던 태고적 신화의 세계를 바깥에서 눈으로 보면서, 즉 가시적으로 잡을 수가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매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 저에게 그렇게 조작했던 목사들이 지금도 전혀 용서가 되지 않는데, 그것이 복음이라고 구라를 치고 말이다. 새벽 4시에 나와서 11시에 퇴근을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일인가? 정말이지 지금도 생각하면 그냥 씹어먹어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제가 원해서 한 것인데, 그런 목사들이 아니면 제가 어디에 가서 사랑을 받을 곳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저에게도 일종의 노림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 하지만, 둘 다 육에 불과해 !!

하지만 지금 제가 그렇게 용서가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그래도 목사라고 하면 왜 성경말씀대로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성경해석에도 대외적인 것과 대내적이 것이 있는데, 여기서 대외적인 것, 즉 상징계에서 필요한 ‘나’와 진짜로 숨어있는, 즉 편하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은 ‘나’ 중에서, 사실 둘 다 가짜이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둘 다 영이 아니라 육이니 말이다. 하나는 일종의 본성이고, 다른 것은 그런 육체적 본성을 감추어야만 되도록, 그렇게 사회에서 요구한 것이니 말이다. 여기서 이렇게 옮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이쪽을 양지라고 하면, 저쪽은 음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한국교회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본래의 자기 자신을 찾아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즉 음지에서 살던 사람을, 즉 주일학교도 다녀놓고 술과 담배와 여자에 빠져 있는 그런 음지에 속한 사람들을 양지로 끌어올려서, 그렇게 해서 새 사람으로 만든다고 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목표라는 말이다.

◈ 성경은, 음지에서 양지가 아니라, ‘틈’에서 위로 !!
 
그런데 성경에서는 음지에서는 양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틈에서 위로 올라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틈’ 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차이성’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이렇게 매끈하다고 하면 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매끈한 것을 도끼로 찍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사이에 그만 틈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외부에서 가해지는 어떤 폭력이나 찍히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사람은 자꾸만 음지에서 매끈한 양지로 가면서, 자기는 거듭났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성경도 안 보다가 이제는 성경도 보고, 또 기도도 하고, 그리고 전도도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는 약간의 처진 것, 즉 행동이 조금 나쁜 것 어둠에서 그렇지 않은 양지의 밝은 곳으로 나온다고 하는데,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은 둘 다 어둠이라는 것이다. 즉 어둠에서 어둠으로 수평적인 이동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오직, 인간은 자기의 죽음을 맛보았을 때만 !!

그러니 여기에 있는 이런 틈에서 올라오는 것은 자기도 전혀 모르는데, 그렇다면 자기가 언제 알 수 있는가? 자기가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즉 강도가 강도짓을 할 때는 전혀 몰랐는데, 그런데 예수님 옆에 십자가에 달리게 되니, 그렇게 완전히 꼼짝도 못하고 묶여있을 때, 그야말로 그렇게 자기에 대해서 뭔가를 시도할 수 있는 것이 완전히 차단이 되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주여, 그저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되면, 이제는 두 번 다시 자기가 성전을 짓겠다고 한다든지,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그런 소리는 전혀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초죽음이 된 상태에서, 그러니 죽어봐야 비로소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 이런 초죽음 상태가 아니라 음지에 있게 되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 옛날 그때가 좋았는데!” 라고 하면서 자꾸만 가능성을 내비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냥 해골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아예 그런 가능성 자체가 전혀 없게 되는데, 그러한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틈에서 바깥으로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몽땅 100% 누구의 은혜라고 여기겠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이렇게 건방진 자기를 완전히 죽게 해서, 즉 “너는 더 이상 살아도 산 몸이 아니야. 이제는 죽은 몸이야” 라고, 그렇게 이미 죽은 몸이라고 단정을 지어주는 그 행복과 즐거움을 말이다. 즉 “너는 무엇을 해도 죄인이고, 그것이 곧 죄야” 라고 단정지어주는 기쁨을 말이다.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축복인데, 그러니 무엇을 하더라도 모든 것이 은혜가 되고 감사가 되는 축복은, 바로 틈에서 기어올라가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아니라 음지에서 “기다려라. 내가 올라간다” 라는 것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보이스 비 엠비셔서”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것은 아무리 해봐야 어둠에서 어둠으로 수평이동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은 거듭난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 성경은, 인간의 그런 구조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

여기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풀이를 하면 어떠한고 하니까, 즉 “인간이 하나님을 알기는 알 되, 인간과 하나님 사이가 떨어져서, 그런데 하나님의 도움으로 올라간다” 라고 하는, 그런 구조자체가 철폐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구조자체가 말이다.

물론 우리가 보기에 이런 구조가 상당히 건전해 보이는데, 즉 “나는 죄인인데, 예수님 덕분으로 구원을 받아서 천국으로 간다” 라는 것이 말이다. 그것을 이번 겨울 수련회에서 요한복음을 강해하면서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 자체는 우리의 힘으로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 흘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가올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원하는 그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바로 음지에서 양지로 가려는 노림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즉 자기도 모르는 그런 틈에서 기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은 비록 죄인이지만, 하지만 언젠가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 라고 하는, 그런 노림수가 있다는 말이다.

◈ 예수님이 오셔야만, 인간의 노림수가 발각이 되는데 !!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구조라는 것을 인간 스스로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다가오시게 되면, 그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예수님이 직접 십자가의 피로 다가오시게 되면, 우리는 그야말로 영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는 체로, 그러한 노림수만 생각하는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다가오게 되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지금 이렇게 요 모양 요 꼴로, 피부가 쭈글쭈글해지면서 늙어서 죽어가고 있는 것조차도 행복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는 것조차도 마치 군대에서 제대하는 기분인데, 바로 그런 즐거움이 있다는 말이다.

◈ 밀어주는 썰매와 당겨주는 썰매 !!

여기에 이렇게 썰매가 있다고 하면, 이런 썰매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뒤에서 밀어주는 썰매가 있는데, 즉 과거가 현재를 밀어주는 말이다. 이런 썰매는 육적인 썰매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앞에서 끌어서 당겨주는 썰매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남자가 여자를 뒤에서 밀어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남자가 앞에서 마구 당겨주면서 가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미래가 당겨주는 썰매인데, 곧 영적인 썰매라는 것이다. “날 잡아봐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바로 이것을 두고서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성령의 보증금이라고 했는데, 아파트 계약을 해본 사람은 이것이 참 이해하기 쉬운데 말이다. 즉 “너는 이제 니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손대지 마” 라고 했다는 말이다.

(고후 1: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 주님께서, 성령으로 보증금을 !!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보증금을 내었는데, 그 보증금이 바로 주님께서 주신 성령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데, 일곱 귀신이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도저히 주님의 손에서 빼내갈 수가 없는데, 그것을 두고 성령으로 보증금을 걸었다고 한다는 말이다. 즉 성령의 보증금이 오게 되면 죽을 우리의 몸도 살리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의 보증금이 오게 되면, 우리는 과거에서 가던 것이 점점 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아니,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되지?” 라고 하면서, 미래의 소망이 점점 더 우리를 끌고 간다는 것이다. 흔히들 그것을 우리가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 성령론에서의 시간론 - 미지의 세계로 가는 즐거움이 !!

이런 성령의 은사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즉 과거에 우리가 어떻게 했던지 간에 그것은 일거에 그냥 없던 것으로 붙여버리고, 우리 앞에는 항상 소망이라고 하는 성령의 은사가 당기게 되니, 그러면 우리에게는 매일매일 과거가 되면서 사라져주는 즐거움, 그것이 곧 고마움인데, 즉 그렇게 뭔가 우리 자신들의 과거가 자꾸만 사라져주는 고마움이 넘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7살 때 무엇을 했던지 간에, 또한 20살 때 철없이 했던 짓들이 다 삭제가 되는 그 고마움, 그러면서도 헤엄을 치듯이 점점 더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그 행복감, 그것이 곧 성령론에서 다루는 시간론인데, 그렇게 성령에서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이다.

◈ 왜 교회생활이 피곤하고 괴로운가?

그런데 사람이 만약에 자기가 성경말씀을 지켰다고 한다면, 그렇게 지킨 것이 미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의로 남게 되는데, 그것이 누적이 된다는 말이다. 즉 “나는 제 작년에 이만큼 했다. 또한 작년에는 이만큼 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한 봉사와 헌금과 같은 것이 누적되는데, 그렇게 되면 뒤에서 미는 방식이 되어서, 그만 본인이 교회생활을 하기에 너무나도 힘든다는 것이다. 행복이나 감사가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면서 “지난 주에는 그만큼 했는데, 이번 주에는 얼마나 해야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야, 이번 주에는 주님께서 어떤 말씀을 가지고 나를 끄집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지?” 라고 하는, 그런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고마움이 넘쳐야 한다는 것이다.

◈ 성도에게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고마움이 !!

다시 말해서, 미래에서 미리 와서, 그것을 ‘선취(先取)’ 라고 하는데, 즉 미래의 힘이 미리 와서 자기를 좍좍 당겨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현재에 있는 이것도 언젠가는 허물을 벗듯이 그렇게 벗어버려야만 하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벗을 때까지만 그냥 입고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고린도후서 5장에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 4장 끝에서 뭐라고 하는가?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보이는 것을 믿으면 안 되는데, 물론 장로님께서도 그런 기도를 했지만 말이다.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후 5: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고후 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고후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과거에 속한 것인데, 그러니 그러한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지배하도록, 즉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발길로 마구 차버리도록 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미래의 힘이 우리를 잡아당길 때, 우리는 소망의 나라에 가게 된다는 것이다. 찬송가에도 그런 내용이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어떠한가?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 75페이지에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 인간에게는 기억하는 특성이 있다. 기억 속으로 새로운 기억의 내용이 만들어진다.

◈ 잠시 ‘기억’에 대해서 !!

이것을 좀 설명을 해야 되겠는데, 지금 제가 강의하고 있는 것들이 비현실적이고 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들인데, 그런데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흔히 사람들은 기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고 하면, 이렇게 현재에서 과거를 기억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의 선이 있는데, 그 선이 매우 얇다는 말이다.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렇게 현재에서 기억은 하지만, 그러나 이 기억은 이렇게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이렇게 밑으로 깊숙이 내려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밑으로 내려가게 되니, 그렇게 과거에 있던 그것들이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서 여기에 이렇게 쌓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기시감(?)’ 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프랑스 말로 ‘데자뷰’ 라고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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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시감(旣視感) - 데자뷰(프랑스어: Deja Vu)는 처음 보는 대상을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현상을 말한다. 이 데자뷰는 불어로 ‘이미 본’ 이란 뜻으로 최초의 경험인데도 불구하고, 과거에 이와 같은 경험을 경험한 것 같은 착각을 일컫는 말이다. 인간의 뇌는 일상생활에서 엄청난 양의 기억을 저장하는데, 이 엄청난 양의 기억을 저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일상생활에서의 기억을 간략하게 저장하는데, 간략하게 저장된 엄청난 양의 정보는 비슷한 기억이더라도 인간의 뇌는 같은 기억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생긴다는 견해가 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심리학자인 플로랑스 아르노(Florance Arnaud)가 최초로 이러한 현상을 규정하고, 이후 에밀 보아락(Emile Boirac, 1851~1917)이 데자뷰란 단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 위키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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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여기에 온 적이 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어떤 장소에 가니 뭔가 이전에 왔던 느낌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는 전혀 예상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오고 나니 그런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누라에게 “여보, 여기에 전에 우리가 여기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렇지?” 라고 하면, 마누라는 “아니, 나는 모르겠는데” 라고 하면, 그래도 다시 “아니야, 나는 온 적이 있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억을 찾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우연히 그 어떤 공간에, 즉 지점에 그만 와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바닷가에 와보니, 자기가 그 바닷가는 옛날에 온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마누라가 뭐라고 하겠는가? “여보, 누구지? 나는 아닌데, 그때 누구와 함께 왔지? 당신, 나에게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지. 말해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즉 말하지 않은 숨겨진 과거가 있는 말이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과거는 자기가 조작한 과거인데, 즉 “전 대통령, 얼마나 받았습니까?” 라고 하면,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가 만들어낸 과거라는 것이다. 물론 얇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너, 매촌 초등학교 20회이지? 맞지?” 라고 하면, “그래, 맞아” 라고 하는, 그래서 서로 반갑다고 악수를 한다는 말이다. 

◈ 현상학적 시간론 !!

그렇게 어떤 사람을 우연히 만남으로서 말미암아서, 그렇게 되면 현재에 숨어있고 잠재가 되어있던, 미쳐 자기가 발굴하지 못한 것인데, 그런데 어떤 계기가 있으면 저 밑에 있던 것들이 발굴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발굴이 되는 저 아래층에 있던 기억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것이 참으로 어려운데, 이것을 두고서 현상학적 시간론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 여보, 누구하고 같이 왔는지 어서 말해요 !!

예를 들어서, 이렇게 거제도 몽돌 바닷가에 이렇게 있는데, 물론 제 이야기가 아니고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말이다(ㅋㅋ). 아무튼 그 바닷가에 지금의 마누라와 사귀기 전에 어떤 여자하고 놀러왔는데, 그런데 그것을 현재의 자기 와이프와 사귈 때는 그만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보니 그만 그곳에 마누라와 같이 갔는데, 그때 그것이 기억이 났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기억은 여기 이 밑에 있는 이 지점에서 머물겠는가?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단 기억이 난 기억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고 하니, 현재의 표면으로 올라가서, 내일이 되면 여기 윗부분에 앉아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한번 한번 기억을 해서 정립이 되었기 때문에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아하, 내가 옛날에 왔던 곳이로구나” 라고 해서, 그렇게 자기가 과거에 왔던 그곳이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 이렇게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표면에 이만큼 올라와 있다는 것이다. 

◈ 어제가 생각한 먼 미래의 꿈 ??

이러한 것이 어떤 경우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옛날에 있었던 것을 꿈을 꾸었는데, 그런데 그 꿈을 어제 다시 꾸었다고 하면, 그것은 머나먼 미래의 꿈이 아니라 어제가 생각한 먼 미래의 꿈이 된다는 것이다(?). 말이 좀 복잡한가요?

그래서 나중에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꿈을 재탕한 것인지 본인도 모른다는 것이다. 너무나 복잡하니 그만 혼선이 일어나서 말이다. 그래서 만난 사람을 안 만났다고 하고,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만났다고 하는, 그런 치매현상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결국은 여기에 있는 이 현재는, 그리고 과거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되는가? 진짜로, 거제도의 몽돌 해수욕장은 말고 저기 해남에 갔을 때는, 그것은 계속해서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2년 뒤에 해남에 가면 뭐라고 하는가? “아하, 내가 거제도가 아니라 여기도 한번 왔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해남은 거제도보다 더 위에 있는 쪽으로, 그렇게 새롭게 자기를 잡는다는 것이다. 

◈ 베르그송 - 인간의 주체는 ‘기억들의 덩어리’ !!

그렇게 되면, 인간에게 있어서 현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 제가 육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먼저 이 육을 알아야 하니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베르그송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주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기억들의 덩어리’ 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주체와는 조금 다른데, 즉 잡았을 때는 주체라고 하고, 놓아버리면 ‘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하면 주체가 있는가? 없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심히 공부를 하기에 바빠서 자기가 생각나지 않기에 말이다. 그런데 그냥 집에서 놀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지금 뭐하지?” 라고 하면, 그 앞에 ‘나’ 라는 것이 붙는다는 것이다.

◈ 나, 주체 !!

그렇게 해서 바로 그 ‘나’ 라는 것이 주체가 되는 것인데,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공부를 하는 ‘나’는, 자기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아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 누구인가? 그것이 바로 ‘나’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나’ 라는 것이 따로 있고, 또한 주체가 따로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주체라는 것은 바로 상징계에서, 아까 우리가 배웠는데 말이다. 이 상징계에서 “나는 어떤 인간이 되야지”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주체가 되고, 하지만 그런 생각도 없이 그냥 열심히 일을 할 때, 그렇게 일하는 것은 밑바닥에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 전부가 다, 주체이든 ‘나’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 것들은 그냥 기억 덩어리에 불과하고,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기억의 흐름인데, 다른 말로 의식의 흐름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말이다. 즉 인간은 그런 의식의 흐름인데, 그런 의식의 흐름이 어떤 계기를 만나서 돌출이 되고 솟구쳐 나오면, 그것이 바로 잠시동안 주체가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면 그만 다시 기억의 흐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운전을 하다가 보면 어떻게 되는가? 운전경력이 10년 이상이 되다보면, 일일이 상황에 따라서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라고 하는가? 물론 초보 때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운전을 한다는 것이다. 머리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 사고가 나기도 하는데(ㅋㅋ),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다.

◈ 결국, 인간의 행동은 기억에서  !!

그렇게 자동차와 자기가 그만 한 몸이 되는데, 그래서 운전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까, 옛날에 행했던 의식이, 즉 그런 의식이 온 몸에 그대로 달아 붙어서, 그렇게 기억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기억이 되지 않을 정도로, 즉 의식조차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자기의 온 몸을 그 기억, 혹은 의식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결국 인간의 행동은 무엇인고 하니,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행동은 기억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 그러나 영은 낯설음에서 !!

그런데 아까 영은 뭐라고 했는가? 영이 개입되는 것은, 과거의 기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낯설음인데, 그러니 전혀 엉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여, 이런 일은 전혀 저의 예상 밖입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령이 임한 순간인데, 즉 “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전혀 몰랐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것을 두고 일종의 ‘균열’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도끼로 쪼갠다는 것이다. 자기는 휘파람을 불면서 “나는 기억 덩어리, 그래서 과거가 나를 만들었다” 라고 하다가, 갑자기 성령이 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아니, 주여 난데없이 무슨 이런 사건을 일으키십니까?”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니 그런 이벤트는 누가 일으킨 것인가? 그것은 누가 마중을 나간 것이냐는 말이다. 

◈ 성령께서 방향을 틀어주시는데 !! 

그것은 바로 성령의 보증금으로서, 그렇게 미래에서 미리 당겨주는 것인데, 그것을 두고 ‘선취’ 라고 하는데 말이다. 즉 성령님이 마중을 나가서 “이놈아, 그 길이 아니야. 너는 이 길로 나가야만 돼” 라고 하면서 방향을 좍좍 틀어준다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부터 중요하니 잘 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성령님이 방향을 틀어주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인간의 육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의 육은 곧 주체이고 곧 기억의 덩어리인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나에게 방향을 틀어주었다” 라는 것이 의식과 만나면 주체가 되는데 말이다. 

◈ 주님의 은혜조차도 자기 자아의 바탕으로 !!

그러면 그 주체는 “아하, 주님이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다” 라고 하는 것을 기억을 하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기억을 하는데, “야, 예수님이 작년 이맘때 그런 은혜를 주셨지”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기억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그만 믿는 자기 자아의 바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다시 그 믿는 주체를 그만 도끼를 가지고 찍어버리는데, 즉 “뭐? 니가 작년이 잘 믿었다고 라고?” 라고 하면서, 그것을 또 박살을 내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 ‘성화(聖化)’ 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 그게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자꾸만 자기 과거의 업적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 퐁티 - 인간은 발산하는 버릇이 !!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그 얼마나 엉뚱한 것이 많은지 모르는데, 메를로 퐁티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은 발산하는 버릇이 있다” 라고 말이다. 즉 인간이 주체를 만들게 되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것들을, 즉 아까 말한 그런 ABC를 끌어 모아서 자꾸만 주체를 정당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미래의 것을 가지고 와서 그만 도끼로 찍어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두고 라캉은 ‘S’ 에다가 그만 옆으로 사선을 그어버리는데, 즉 그렇게 해서 그만 빗금칠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항상 두 조각을 내거나, 아니 그야말로 여러 조각을 마구 내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보면 되는데 말이다.

◈ 아니, 돼지고기 속에 다이너마이트를 ??

예를 들어서, 돼지고기 한 근을 사다가 거기에다 다이너마이트를 넣어서 터트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돼지고기는 사방팔방으로 튀게 되는데, 그러면 조금 전에 있던 돼지고기는 어디로 가겠는가?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장로님, 제 말이 맞지요? 여기서 어떻게 지금 실험을 한번 해볼까요? 물론 우리는 아까워서 구워먹으려고 하겠지만 말이다(ㅋㅋ).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이 와서 터트리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모든 기억들이 다 산산조각이 나게 되는데, ‘죄인!’ 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얼마나 육적인 것이 강한지, 그 성령이 물러가고 나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그 흩어진 돼지고기를 모두 다 주워 모아서 뭐라고 하는가? “나, 은혜를 받았다” 라고 하면서 다시 주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 계속해서 성령은 말씀의 폭탄으로 !!

그것이 바로 인간인데,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계속해서 미래에서 당겨주는 성령의 은사가 있어야만 하는데, 그래서 말씀은 한번 지켰다고 해서 그 다음 번에 지워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은 제가 100점이니 다음부터는 안 봐도 되지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없고, 이 말씀이 와서 계속해서 주체를 향해서 폭탄을 터트려 주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면 자기가 어제 지켰다고 하는 것은 오늘 보면 어떠한가? 오늘 또 어제의 행함을 가지고서 자기 자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한다고 하는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성령이 오시게 되면 언제나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게 된다는 말이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상징계에는, 오직 목사의 법과 질서만이 !!

그러니 교회에서 십자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교회는 뭐가 되겠는가? 주체들의 덩어리가 되는데, 주체가 하나 하나가 아니라, 즉 그런 것들이 하나 하나의 고기 살점이 아니라, 그러한 고기 살점들이 모여서 ‘우리교회(?)’ 라고 하는, 엄청난 덩어리 주체가 되는데, 그것을 바로 아까 말한바와 같이 ‘상징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자아는 없고 오직 목사의 법만 있게 되는데, 목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질서가 말이다. 그래서 목사를 주의 사자라고 우기는데, 여기서 교인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한 덩어리가 되어서 순종과 복종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또 마음에 땡기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사랑을 받으니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그러한 행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밑바닥에는 사랑을 받고자 하는 상상계가 있고, 그렇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상징계를 헤매고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뀌면 또 다른 것을 가지고 사랑을 받으려고 하고 말이다.

◈ 육 - 과거에 의존이 되어있는 주체 !!

바로 이렇게 과거에 의존이 되어있는 주체를 두고서 성경말씀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것을 곧 ‘육’ 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자기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자꾸만 십자가가 있는 쪽으로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 세상을 빠져나간 장소가 어디인가? 십자가에서 사흘만에 부활했데, 그러니 오직 십자가만이 육에서 영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고 통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어떻게 되었던지 간에 그 십자가로 가서, 그 다음에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기는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말이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제가 만약에 이러한 설명을 하지 않고 그냥 그 성경본문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즉 음지에서 양지로 가기 위해서 자기가 스스로 고난을 받는다는 의미인데, 십자가를 부르면서 말이다. 즉 자학을 하면서 십자가를 외쳐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마치 구원이 되는 것처럼 여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자기 학대는 구약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주특기인데, 그러니 “주여, 이만큼 제가 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제 아무리 해도 과거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과거로 누적이 된다는 말이다.

◈ 현실세계란 무엇인가?

지금 진도를 제법 많이 나갔는데, 교재 75페이지를 다시 정리하면서, 그 중에서 한 가지만 다시 이야기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즉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상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이제 우리가 알았는데, 즉 “지금 이것이 현실이다, 아니다” 라는 것은 누가 결정하는고 하니, 자기 주체가 결정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현실은 무엇을 가지고 현실이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상징계를 두고서 현실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안에 숨겨놓은, 즉 거짓말을 하는 세계가 바로 상징계이고, 또한 그렇게 거짓말하는, 즉 “참, 내가 봐도 거짓말을 했다” 라고, 그것을 진짜로 알고 있는 자기는 상징계가 아닌 상상계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엄마의 사랑인데, 즉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식이 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는 말이다. 그러니 너무나 자기에게 관대한데, 남에게는 냉정하고 냉혹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징계를 두고 ‘현실세계’ 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렇게 제가 강의를 하고 나면 저를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 목사는 현실을 모르고 매일같이 이론만 가지고서 마구 설치는데, 아니 그렇게 해서 교회가 부흥이 되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현실적으로 교회가 부흥이 되어야, 그것이 곧 주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 이 목사, 당신은 철학만 가르치나 ??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신은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철학만 가르치나?” 라고 하는데, 하지만 자기들이 그렇게 감추고 숨기고 있는 것들이 뻔히 모두 들통이 나고 말 것인데 말이다. 물론 저에게 들키고 말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결국에 자기의 모든 것들을 다 들키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들은 자기의 체면과 위신을 숨겨놓고 내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즉 “내가 얼마나 교회에 충성을 했는데, 그것을 모독하는가?” 라고 윽박지르고 우기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주님에게 어디 통하겠는가?

이제 교재 76페이지를 보자.

** 그렇게 해서 자체적인 이미지가 잡히면, 그것을 가지고 일단 전체 현실을 대변해주리라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 란 마치 얼른 보기에 점이나 입자나 순간이나 물체처럼 그려지지만, 실은 사건들의 흔적에 불과하다.

◈ 이미지는, ‘사건’의 흔적에 불과해 !!

여기에 ‘이미지’ 라는 것이 나오는데, 그런데 이 이미지는 사건의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무엇인가? 왜 제가 여기서 사건을 강조하는고 하니, 우리가 물체는 손에 쥘 수가 있는데, 그러나 사건은 그것이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사건을 우리 손에 쥔다고 하면, 그러면 사건은 이미 떠나게 되고, 우리 주체 안에서, 즉 자기 주체 형성에 있어서 과거가 되고 마는데, 즉 하나의 기억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사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 아니, 바람처럼 !!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바람처럼 분다고 하는데, 그렇게 성령을 바람처럼 분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이 바람은 무엇을 일으키는가? 이 바람은 물질로서, 그때 그때마다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사건을 일으키는 두고서 ‘의미’ 라고 한다는 말이다.

(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그러므로 뭔가 “의미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만약에 바람이 불어서 춥다고 한다면, 그렇게 바람이 불어서 사건이 생기는 것인데, 사건이 그렇게 의미를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람이 일으킨 이 사건은 그렇게 의미를 주고 떠나버리는데, 마치 독수리처럼 말이다,

왜 그런 노래가 있지 않는가?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것을 ‘바담’ 이라고 하는 양반도 있는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그렇게 바람으로 와서는 바람으로 가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폭탄을 투하하듯이 말이다.

◈ 그러면 율법은 왜 필요한가?

아무튼 성경에서는, 이렇게 바람처럼 와서 바람처럼 가버리는 기능을 두고서 성령이 하시는 것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성령 이전에 누가 하시는고 하니, 언약이 하신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모세언약인데, 그리고 이 모세언약은 두 글자로 ‘율법’ 이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아브라함 언약 이후에 율법이 와서, 즉 율법이 모세에게 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율법이 모세에게 와서 어떻게 하는가? 그만 가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 언약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가?

그것은 당연히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과연 그 대상이 무엇인가? 장차 이삭처럼 오실 메시야를 믿는 것인데, 즉 그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 아브라함은, 이삭이 아닌 아브라함의 언약을 믿었기에 !!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이삭이 아니라, 이삭처럼 오시는 메시야를 믿은 것인데,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믿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을 믿었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믿었는데, 바로 그 약속의 끝에 메시야가 오시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했다는 것이다. 마치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끌어 앉고서 기뻐했던 것처럼 말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그렇다고 하면, 아브라함 시대의 구원은 인간의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수용함으로서 받게 되는데, 그러므로 이 약속은 아까 말한 것에 의하면 미래에서 땡기는 하나의 썰매라는 것이다. 그렇게 약속이 썰매를 잡아서 좍좍 끌어당기게 되는데, 그렇게 잡아당기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말이다. 또한 끌려 당기는 것은 주님의 자기 백성이고 말이다.

◈ 고급논쟁(?) 한편을 !!

제가 어제 설교를 하는데, 거기에 자아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만 서 장로님과 최 권사님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장로님은 당연히 “우리의 자아를 부인해야만 한다” 라는 것이고, 권사님은 그것이 이해가 제대로 안 된다고 하면서, 즉 “그러면 그렇게 자아를 부인하라는 그 자아는 도대체 어떻게 부인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연세가 80세임에도 불구하고 고급논쟁을 벌리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해주었는데, 즉 여기에 있는 이것이 자아이고, 그 자아 밑에는 이렇게 비닐봉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밑에 있는 비닐봉투를 잡아당기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봉투 위에 있는 것은 손을 댈 필요도 없이 그냥 딸려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설명을 하니까 최 권사님이 이해를 하시는데, 즉 “나를 믿지 잡고, 그 밑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것을 믿어라” 라고 말이다. 그리고 서 장로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자아를 부인해야 그것이 보인다” 라는 것이고 말이다. 장로님, 제 말이 맞습니까? 지금 분위기가 영 아닌데(ㅋㅋ), 아무튼 자아는 위에 있는데, 그 밑에 있는 것을 잡아 당겨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은 그냥 실려서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아브라함의 경우에 있어서, 아브라함 본인은 물론 육임에 분명한데, 그런데 장자 영으로 오실 분이 그 약속 지점을 이끌게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자신이 스스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골치가 아파서 안 된다는 것이다.

마치 약속이 썰매처럼 아브라함의 밑에 발판을 가져다대면, 그 썰매를 누가 끄는가? 아브라함 자신이 그 썰매를 끄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누군가가 썰매를 끌어당기니 아브라함은 거기에 실려서 천국에 간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것을 믿었고, 그것을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갈라디아서 - 아브라함 이후에 율법이 올 필요가 있는가?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아브라함 이후에 과연 율법이 굳이 올 필요가 있는가? 이 율법은 올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갈라디아서의 내용이기도 한데, 왜 율법이 와서 그것을 지키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지키라고 하고, 또 제사법을 지키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그런 율법을 주셨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율법이 와서 바람처럼 사건을 펄럭펄럭 일으키게 되면, 즉 먼저 율법을 통해서 사건을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율법은 그렇게 왔다가 폐지가 되어야 하는데, 물론 우리 생각에는 폐지가 될 것 같으면 아예 오지도 말았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에 의하면 그게 아니라, 일단 율법이 살짝 왔다가 그만 가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율법이 살짝 와서 가버릴 때, 그렇게 해야 만이 우리의 주체가 바로 사건의 흐름으로 인해서 분산이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마치 바람처럼 없는 것처럼 해버린다는 것이다. 비록 80년을 더 산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마치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야말로 안개처럼 말이다. 바로 아까 말한 폭탄을 맞은 그 돼지고기의 흩어진 살점처럼, 그렇게 모든 것이 다 흩어져서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 이제는 성령께서 뭉치도록 !!

그렇게 흩어진 것을 어떻게 하는가?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우리의 육이 뭉치려고 하는데, 그런데 뭉치는 작업을 이제 성령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육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뭉쳤지만, 그러나 이제는 오로지 복음을 위해서, 즉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서 성령이 뭉치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몸은 전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몸을 이루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즉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그런 역할을 감당하라고 팔도 붙여주고, 또 다리도 붙여주고, 그리고 숨도 쉬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 !!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인데, 그렇게 뭉쳐지게 되면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주체가 되고, 우리는 그 몸에 달려있는 하나의 지체가 된다는 것이다. 즉 팔과 다리가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두고 두 글자로 ‘교회’ 라고 하는데, 혹은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하고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같은 교인들끼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로 주체가 아니니, 주체는 따로 있으니 말이다. 예수님이 바로 주체인데, 서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당신도 그냥 붙어서 달려서 있네요. 그러니 우리 교회에 온 것은 하나의 사건이군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서로가 각각의 사건으로 보게 되는데, 그러면 이 사건의 특징은 무엇인가? 어디에 자기 것이라고 할 것이 하나라도 남아있지를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육이 이렇게 있으니, 그렇게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고 여기에 되면, 그러면 무엇이 날아오는고 하니, 성령을 통해서 다시금 말씀이 율법화가 되어서 온다는 것이다.

◈ 율법은 죄 있는 자에게만 !!

그런데 디모데전서 1장 9절에 보면,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라고 하는데, 그러니 율법은 죄 있는 자에게만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하는 짓이 또 다시 자기의 것을 장악하려고 하고, 그것이 곧 죄가 되고 말이다. 그래서 율법이 날아온다는 것이다.

(딤전 1:9)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다시 말해서, 오늘 강의 처음에 말한 것처럼, 이렇게 ABC는 자기 것이니 모든 것이 다 옳은 것이고, 그리고 DEF는 모르는 것이니 싫다고 하는, 그렇게 자기 것과 자기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 구별하는 죄에 대해서, 거기에 대해서 율법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따지신다는 말이다.

* 하나님 : 인간아, 이러 좀 오너라.
* 인  간 : 왜 그러세요?
* 하나님 : 내가 좀 따질 것이 있는데?
* 인  간 : 예, 그렇게 하세요.
* 하나님 : 율법에 보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지킬래?
* 인  간 : ? ? ?
* 하나님 : 그리고 형제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라고 했는데, 그것을 또 어떻게 지킬래?
* 인  간 : ? ? ?

◈ 아니, 내가 내다버린 이웃을 사랑하라고요?

그렇게 되니 우리는 사실 난감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 말고 이웃이 그만 꼴 보기 싫어서 그만 내쳐버렸는데, 그러니 어떻게 이웃을 사랑을 하고 자기 몸을 그 이웃을 위해서 내어놓겠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주여, 제가 죄인이 맞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박살이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여기서 이렇게 아브라함 이후에 모세언약으로 율법이 온다는 것은, 장차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을 미리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우리 인간은 자기 주체와 예수님을 서로 비교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제 아무리 이렇게 ‘나’ 라는 주체가 있고, 또한 그것으로 근사한 신학적 구조를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그것 자체가 이미 예수님 앞에서는 무엇인가? 율법으로 얻어맞아야 하는 하나의 사물이고, 단단히 굳어진 주체, 즉 과거의 기억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진, 그래서 아무런 틈도 없는 그런 자기만의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진 자기만의 세계라는 말이다.

◈ 우리에게 이미 율법은 복음 !!

그러니 이러한 것을 성도는 자기 자신의 힘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또 확인하게 되는데, 그런데 말씀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 말씀은 영이 오는 것과 율법이 오는 것이 다같이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말씀은 이미 높은 단계이기 때문에 과거를 다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율법적인 것과 복음적인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구약의 모세율법은, 우리에게 그냥 율법적인 차원이 아니라 이제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2010년 여름 수련회 주제 - 레위기 !!

이번 여름에 제가 만약에 수련회 강사로 초빙이 된다면, 지난겨울에는 요한복음을 했으니 이번에는 그 어렵고도 복잡한 레위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레위기의 전체 구조를 다 살펴볼 수가 있도록 말이다. 물론 저의 썰매에서 한번 생각해보는 여름 수련회인데, 물론 다른 것을 해달라고 요청이 들어온다면 바꿀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같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관절과 골수가 쪼개짐을 당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나’의 것이 전혀 남아있지 않도록 해야 되는데, 그렇다면 과연 ‘나’의 주체는 없어지는가? 주체가 없으면 대화상대가 없어서 안 되는데, 그래서 주체를 묵시적 몸이신 예수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만드시는데, 즉 ‘나’의 몸이 아닌 주님의 몸으로 말이다. 그래서 심장도 자기 심장이 아니고, 간도 자기 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그때 그때마다 주님의 몸으로 조립해내는 것을 성령께서 하시는데, 즉 미래에서 당기는 썰매가 소망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미 보증금으로 왔다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함부로 우리 몸을 ‘내’ 것이라고 여겨서 “옳다, 틀리다” 라고 평가를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성도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하고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또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저 이 세상에 나와서 남들을 모방하고 흉내를 내면서 그저 결과만 탐을 내는데, 그리고 그것을 빼앗고자 열심을 다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우리의 우리 된 것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즉 우리는 이미 주의 종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또한 이렇게 말씀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랑보다도 오직 주님의 사랑만을 그리워하면서, 또한 주님과 하나되는 세계를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2,27 오후 11시 50분에 마침.

                                                               혹시 예수님도 피겨를 할 줄 아실까?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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