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3월 1일 피20강 늙어 죽는(섬길려는) 신체 vs 죽어(예수님의 내어주심) 섬기심에 섬김 당하는 신체

100301 피20강 섬김 당하는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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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301피p080섬김당하는신체

피 20강 늙어 죽는(섬길려는) 신체 vs 죽어(예수님의 내어주심) 섬기심에 섬김 당하는 신체 

[10 대구강의 4] - [피 20] - 섬김을 당하는 신체
                                                                                
                                                          10,03,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인간의 몸은 자기 실용성 !!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80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여기서 수립되는 ‘나’ 라는 존재는 신은 자기 신체가 요구하는 실용성 이외는 없다.

여기 이렇게 바깥에 있는, 즉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고 하니까, 여기 대상을 ‘X’ 라고 한다면, 자기가 이 대상을 보는 순간에 그 대상 때문에 자기가 구축되는데, 즉 ‘나’ 라는 것이 구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자기가 누구인지 모호하다가, 그 어떤 대상을 바라보게 되면, 바로 그 ‘X’ 라고 하는 대상으로 인해서 자기가 하나의 주체로서, 즉 자아로서 구축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제가 하나 물어보겠는데, 이렇게 자기 자아가 어떤 인간이든지 관계없이 자기 몸은 어떻게 되겠는가? 계속해서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즉 “나는 김연아을 좋아해”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이전에는 김연아를 몰랐는데, 그런데 김연아가 피겨를 하는 것을 보니 좋아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안에 김연아를 좋아하는 요소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아는 순간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자기에 대해서 알았다고 하더라도 자기 몸은 어떻게 되는가? 김연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자기 몸은 속절없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닌데,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우리가 어떤 대상에 그만 필이 꽂히게 되면 무엇을 잊어버리는고 하니, 자기가 늙어가고 있고 또한 죽어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내 신체를 관리한다 ??

늦게 오신 분들이 있어서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여기에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 신체는 또한 여기에 있고 말이다. 오늘은 초반에 이야기하는 이것이 중요하니 잘 들어야만 하는데, 아무튼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신체를 관리한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의 이야기이고,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여기에 이렇게 주체가 있고,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겠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아의 생각인데, 그런데 우리 자아라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다가도 갑자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오게 되면, 방향을 그만 ‘휙’ 하고 틀어서 그만 그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돈을 버는데 전력을 다한다든지 말이다.

◈ 역시 돈이 좋아 !!

그렇게 되면, 이 ‘돈’이라는 것은 하나의 대상이 되고,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으로서 돈을 보게 되면, 그런 돈을 바라보는 하나의 주체가, 즉 자아가 된다는 것이다. 즉 “역시 돈이 있으니 좋아” 라고 하는 새로운 주체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자기 신체는 늙어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이것을 중간에서 가로채어 가지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데, 그러나 사실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섬긴다는 말이다. 말이 좀 어려운가요?

◈ 인자가 온 것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20장에서 뭐라고 하셨는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몸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즉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는데, 그러니 자기가 이 자아와 플러스를 해서, “하나님, 영광을 받으세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마 20:28, 개역)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보다 더 좋은 것이 생기면, 즉 세상적인 유혹이 오게 되면, 3초 정도 하나님을 생각하다가, “아이쿠, 내 자식, 내 남편!” 이라고 하면서 자꾸만 방향을 튼다는 말이다. 그렇게 틀어서 가다가, 그것이 깨어지고 나면 “아이쿠, 하나님!” 이라고 하면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무엇이 되는고 하니, 대상 ‘X’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대상 ‘X’ 라고 하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그 하나님의 내용이 날마다 그만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감사하게도 성령을 통해서 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9살 때 어떻게 알았고, 20살 때 어떻게 알았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몸을 약속대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믿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혼자서 촐랑거리면서 까불 때도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고, 또한 화를 내면서 코를 벌렁벌렁 거릴 때도, 그리고 혼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우쭐거릴 때도, 거기에 전혀 개의치를 않으시고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예수님’ 이란 주체가 예뻐서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그것은 우리 주체가 예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중간에 끼어든 ‘예수님’ 이라는 주체가 예뻐서,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예뻐서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진다고 하는 것, 그게 곧 성령님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즉 “너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죽은 너희의 몸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곧 로마서 8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바로 그분의 영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까, 바로 베드로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을 인정했다가도, 또한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가 예수님에게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곤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베드로의 주체와 실존은 항상 들락날락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다고 했다가, 또 자기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다가 말이다.

◈ 우리 몸은 예수님 손에 !!

그런데 거기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베드로를 위하여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지금도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로마서 8장 34절에 나오는데, 즉 예수님이 우리 신체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즉 우리의 신체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에, 그러니 우리 몸의 관리는 예수님 손에 달린 것이지, 우리의 주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음 생활을 잘하면 복을 받고 하는 것이 전혀 아닌데, 왜냐하면 우리 몸은 이미 주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에, 더 이상 마귀로부터 정죄함을 받지 않고, 그렇게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지 않도록(?), 그런 주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소유로서의 주체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몸은 주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그런 주님의 사랑으로 인한 관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좋던 싫던 말이다.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이제는 예수님을 위하여 !!

그것을 두고 옛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고 난 다음에는, 즉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서, 즉 예수님의 은혜로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라는 것인데, 하나님이 아니고 말이다. 이제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순서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예수님이 먼저 우리 몸을 위하여 죽으셨는데, 그렇게 된 몸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죽었다가 사신 자를 위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그게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새로운 피조물은 전혀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예수님께 맡겼으면 그것으로 끝 !!

예를 들어서, 만약에 세탁기가 고장났다고 하면, 그래서 그것을 AS센터에 맡겼는데, 그런데 나중에 고치고 나서 거기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는 세탁기가 이제 고쳐져서 가지고 가려고 하는데, 그런데 거기서 세탁기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이 세탁은 당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가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말을 하고 보니 예가 좀 이상한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다시 찾기 위해서 맡겼는데, 그렇게 하려고 예수님을 이용했고 말이다. 그런데 일단 그렇게 예수님에게 맡겼으면 그것으로 그만 끝이라는 것이다. 즉 더 이상 우리의 몸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이제 우리 몸은 자기 소유가 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유월절에 관한 말씀인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쿠, 이제 내 자식은 살았다” 라고 할지 몰라도, 그러나 그 자식은 이제 자기들의 자식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되던 저렇게 되던, 이제 이스라엘에게 자식은 없는데, 즉 자기 자식은 끝났다는 말이다. 즉 어린양에 복속이 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성경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경험이 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 어느 누구에게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가 죽지 않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가 죽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누구 앞에서 큰 소리를 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자기를 핍박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몸이 아닌 주님의 몸을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심판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 달려있다고 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아, 이번에 재떨이를 던지는 건데 !!

저도 이번에 서울에서 참 많이 참았는데, 발표를 하는데 중간에서 발제자의 말을 가로막으면 안 되는데 말이다. 그것이 곧 상식인데, 그런데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제가 재떨이를 집어던져서 정수리에 맞아도 그들은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40분을 저에게 할당을 주었으면, 당연히 이야기를 하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중간에서 더 이상은 들을 것이 없다는 식으로 나와버리면, 그게 얼마나 큰 반칙이냐는 말이다. 물론 그러한 수모를 당하는 것도, 그 모든 것이 다 주님께서 배치한 것이지 싶어서, 그리고 초청하신 분의 입장을 고려해서 참았다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래서 사람들은 큰 흐름 찾기에 나섰고, 그 흐름을 과학, 혹은 ‘과학적’ 이라는 명칭으로 규정을 했다. 이제 과학이 현실을 선도한다. 미래를 책임진다.

◈ 잠시, 과학에 대해서 !!

여기에 보면, 사람들이 과학을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과학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고 하니, 방금도 말했지만, 인간의 몸은 자기 실용성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의 신체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누구의 것이 되는가?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신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은 이 신체를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주체로 보는데, 무슨 주체인가? 악마에게서 나오는, 즉 아담의 죄로부터 나오는 주체로 본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주체를 위해서 자기 신체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 과학에서 힘은 왜?

이렇게 ‘힘’ 이라는 것이 있는데, 시간만 좀 있으면 이 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 힘은 형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힘이 신체를 만나면 힘이 신체를 지배하게 되는데, 그런데 이 신체는 힘의 힘을 빌려서 무엇을 하는고 하니까, 바로 신의 얼굴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신의 얼굴이 곧 악마의 얼굴이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의 신체는 아담에게서 물려받았기 때문에, 당연하게 선악과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과 같이 되리라” 라는 것이 잠재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힘이 없어서, 그래서 그것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결국, 인간은 악마의 얼굴을 !!

하지만 힘이 있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것이 반드시 권력으로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권력으로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신의 얼굴, 즉 악마의 얼굴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곧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후손인 라멕과 같은 경우인데, 즉 누구든지 자기를 해치면 벌이 칠십에 칠 배라는 것이다.

(창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이러한 인간의 신체를 두고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바다에서 올라온 태고적인 어두운 힘에 의해서 우리 신체가 농락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죄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신체가 힘을 받게 되면 독자적인, 즉 “하나님, 니만 신이가? 나도 신이다” 라고 하는 독자적인 신의 얼굴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세리와 창기가 왜 천국에 간다고 하는데, 그들이 왜 천국에 가는고 하니까,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왜 지옥에 가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세리의 차이점을 보면 되는데, 그 차이점이 무엇인가? 한 쪽은 힘이 있고, 다른 쪽은 힘이 없다는 것이다. 힘을 쓰려고 하니 소경이 되고, 또 앉은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 당시 사회의 제일 밑바닥에 있게 되는데, 그러니 힘을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사회에서 힘이 있는 자가 뭐라고 하는가? “당신은 저주를 받아서 그렇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들은 저주를 받아서 그런 줄로만 알고, 그렇게 여겼다는 말이다.

◈ 소위 ‘포도원 비유’에 보면 !!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위 ‘포도원 비유’가 있는데, 그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이 나오는데, 그가 포도농사를 지으려고 일군들을 불렀는가? 그 대목만 보게 되면, 주인은 농사를 짓기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 삯을 주되 일군들의 사고방식을 들추어내고 뜯어고치기 위해서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그리고 5시에 온 사람들에게 동일한 임금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포도원의 존재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이 참 재미있는데, 그게 바로 “너희들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포도원 존재의 의미인데, 그런데 예수님을 그 말씀을 뭐라고 하시면서 시작하셨는가? 1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포도원의 주인이 바로 천국의 주인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마 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마 20: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마 20:3)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마 20: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마 20:5)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마 20: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예수님이 포도원 이야기까지 하시면서 그 당시의 누구와 대비를 시키는고 하니, 바로 바리새인들과 대비를 시킨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에 힘을 가진 사람들인데, 그렇게 힘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하는 것으로 인해서 나는 복을 받아도 마땅하다” 라는 것인데, 즉 자기가 하는 일에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된다는 말이다. 즉 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16절에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라고 하시면서 이 비유의 말씀을 맺는데, 바로 이런 점을, 즉 자기가 자기가 하는 일에 주인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아침 10시, 12시, 오후 3시, 그리고 5시에 온 사람들에게 똑같이 나누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점점 더 예수님을 어떻게 하는가? “지금까지 이러한 해석을 우리가 듣지 못했다” 라고 하면서 밀치게 된다는 것이다.

◈ 해석사에 이런 경우는 없었다 ??

여기서 제가 웃음이 나오는데, 왜냐하면 이번이 서울에 가서 제가 논평을 하는 교수들에게 들은 소리인데, 그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런 70이레에 대한 해석은 지금까지 70이레의 해석사에 나온 적이 없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저에게는 너무나 황송한 평가인데 말이다.

그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개혁주의의 성경해석에 있어서 역사적, 문법적 해석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문법적 해석의 밑에는 뭐가 있는고 하니, 철학적 해석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런 철학을 모르는데, 사실은 그런 철학을 알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주체가 있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적이고 문법적 해석의 밑에는 철학적 해석이 있는데, 그런데 바로 그 철학적 해석과 싸웠던 자가 누구인고 하니까, 바로 사도바울이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무엇을 대비시켰는고 하니, 모든 세상의 초등학문과, 즉 철학적 사고방식과 대비해서, 그런 것을 다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이다.

(골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 사도바울의 경우에 !!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다 낮추어서 오직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도바울 본인이 먼저 이런 모든 역사적 문법적 해석의 주체를 내세우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사도바울 본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그런 해석에 정통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철학 박사였고, 해석학 박사였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바로 인간 자체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철학적으로 나아가서, 어떻게 해서 자기 주체를 끌어 모으는지를 말이다.

아무튼 그런 것이 나오게 되는데, 그러니 사도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고 하니, 그것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먼저 사도바울은 자기가 과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죽였던, 그러한 사고방식을 두고서 뭐라고 했는가? 자기는 죄인 중에서 괴수였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감히 괴수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가 죄인 중에서 괴수라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보니 비로소 알게 된 것인데, 그러니 여기에 있는 이 ‘나’ 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온 것인고 하니, 철학적이고, 전통적이고, 역사적이고, 문법적인 해석으로 가득한 ‘나’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 라는 것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자기가 죄인 중에서 괴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오늘날 성도가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졌다는 것을 고백한다고 하면, 그 죄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그들이 학문을 하고 있는 주체에까지 죄가 파급되어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 이번 서울 세미나의 주제 - 인간은, 결국 ‘쑤레기’ !!

그것을 제가 이번에 서울 세미나에서 후벼내었는데, 왜냐하면 그게 저에게 주어진 사명이기에 말이다. 도대체 신학적 학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죄 덩어리인지, 즉 자기들이 죄인 중에서 괴수의 짓을 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신학함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이고 말이다.

그러니 성경해석에는 인간들이 주체가 되어서 하는 해석이 있고, 또한 주님께서 주체가 되어서 하는 해석이 따로 있어서, 이러한 두 주체의 만남에서 십자가의 능력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제발표를 하면서 초반에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먼저 말하지 않고는 진행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미 그때 자리를 떠는데, 세미나고 뭐고 자기는 듣기 싫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주체를 건드리게 되면 인간에게 예의고 뭐고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신학교 교수이기 때문에 제가 목사라고 한 수 가르치려고 했는데, 하지만 그것이 자기들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날 서울 세미나에서 하이라이트는 결국 ‘쓰레기’였는데, 그렇게 목사나 신학자를 감히 쓰레기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날 제가 발표한 ‘70이레’에 대한 해석을 신학사에 없었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신학을 하는 본인을 쓰레기라고 인정하는 신학은 없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신학을 하는 본인이 쓰레기에 지나지 않음을 알지 못하면, 그것은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 다시 과학에 대해서 !!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지금 우리가 과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과학은 자아에게 힘을 모으기 위해서 자연을 이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심심할까 싶어서 묻고 답하는 식으로 하겠는데, 제가 질문을 할 테니 잘 한번 답을 해보세요.

* 질문자 - 신체는 누가 관리합니까?
* 답변자 - 예수님입니다.
* 질문자 - 그런데 우리 속에 아담의 죄가 있을 때 이 신체는 누구 것이라고 여깁니까?
* 답변자 - 내 것입니다.
* 질문자 - 어떻게 그렇습니까?
* 답변자 - 힘을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 질문자 - 그러면 힘을 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답변자 - 자연을 파악하고 분석해서 힘을 모으게 되는데 됩니다.

그렇게 자연을 파악하고 분석해서 힘을 모으게 되면, 이 자아는 그 안에 예수님의 공로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연구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기가 너무 아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기를 못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애써서 연구한 것이 모두 죄인 중의 괴수의 짓이라고 하면, 당연히 자기는 거기에서는 눈을 돌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하면서 교회당이 텅텅 비게 되는데, 이러한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못산다” 라고 하면서 살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농경시대에는 해가 뜨고 비가 오고 해야 농사가 되는데, 그런 것을 도저히 과학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번개가 치면 요한계시록을 들먹이면서 신의 징벌로 여겼다는 말이다.

◈ 이제는 번개가 치고 지진이 일어나도 !!

그런데 미국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인가 누군가가 하는 사람이 피뢰침을 발명하면서 어떻게 되었는가? 번개의 속성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번개는 신의 징벌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여기게 되었는데, 그러니 더 이상 요한계시록 때문에 겁낼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지진의 경우에도 어떠한가? 그것이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 땅 밑에는 아주 거대한 판들이 있어서 그 판들이 서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인데, 왜냐하면 지구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전을 하니 말이다. 즉 지구가 자전을 하게 되면, 지구내부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지구내부에는 쇳덩이가 들어있고, 그 바깥에는 가벼운 것들이 도는데, 그렇게 서로 돌다가보면 균형이 틀러질 때가 있는데, 그래서 서로 다른 에너지를 맞추기 위해서 지각 자기들끼리 조정국면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밑에 있는 맨틀에서 조정국면에 들어가면 지각이 갈라지면서, 그만 위에서는 페루(?)나 아이티(?)가 작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무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들어갈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왜 지진이 일어나는지도 알고, 어떻게 지진이 일어나는지도 아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누가 일으키는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 지혜와 지식에 대해서 !!

그것을 제가 어제 중고등부 설교를 하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즉 지식이 있고 지혜가 있는데,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세계와 통하고, 그리고 지식은 ‘나’의 세계와 통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힘을 모으는데 통한다는 말이다. 아마 베이컨이 그렇게 말했지 싶은데,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말이다.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우리 인간은 왜 힘을 모아야 하는가? 그것은 힘만 모으면 자립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인데, 창세기의 바벨탑이 바로 그런 경우라는 말이다. 즉 “우리 이름을 내어서 하늘에 닿게 하자”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 신체는 어디까지나 주님이 관리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주님이 관리하는 것을 끊어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신체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힘을 모으고 말이다. 아무튼 이런 지식은 자기에게 유리하니, 당연히 우리 인간은 지혜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잠언 30장에 나오는데, 3절과 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잠 30:3)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잠 30: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 그래도 부모라고 하면 !!

여기에 3절에 보면 지혜를 뭐라고 하는가? 분명히 거룩한 자를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굳이 요즘 말로 하면 지혜는 수능시험과도 같은데(?), 김연아의 지혜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트리플 러츠와 점프를 잘하는가에 있는데, 그러면 김연아가 거룩한 분을 알기 위해서 그렇게 어려운 점프를 시도했는가? 그것은 아닌데, 그런데 여기서는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곧 지혜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4절 마지막에 보면,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라고 하는데, 과연 그 아들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비가 된 자의 모습이 무엇인가? 자식들에게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알고 있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도리라는 말이다.

백날 그렇게 전해도 어제 한 명이 왔는데(?), 물론 한 명이 오는 것도 주님의 은혜인데 말이다. 거룩하신 분이 자기 숙제를 그렇게 하시는데, 그것을 두고 제가 어떻게 할 문제는 아닌데, 저는 그냥 증거할 뿐이라는 것이다.

◈ 누가 힘없는 지혜자를 따르겠는가?

왜 이런 현상들이 벌어지는고 하니, 사람들이 지식을 통해서 힘을 모은다고 시간을 다 바쳐서, 정작 지혜를 외쳐도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지혜를 말이다. 이 지혜는 돈이 안 되고 힘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가? 그렇지 않은가?

지혜자가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죽으셨는데, 그러한 지혜를 따른다고 하면, 거기에서 무슨 힘이 나오고 돈이 나오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거기서 힘과 돈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신학교 교수들밖에 없는데, 박사학위를 팔아먹는 그야말로 장사꾼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가 그렇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 오용익 - 당신들, 그냥 배설물이잖아?

그러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논문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오 목사님이 열을 받아서 뭐라고 질문을 했는고 하니, “아니, 그 논문원칙을 누가 전했습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묻기를 “그런 신학자체가 사도바울이 전한 배설물에 해당이 됩니까? 안 됩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답변을 못하도록 주최측에서 끊었는데, 만약에 그 자리에 사도바울이 있다면, 과연 사도바울에게도 그렇게 논문형식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물을 수가 있는지, 그러니 그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소위 신학을 한다는 인간들이 모여서 그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81페이지를 보자.

** 그런데 과학은 인간의 본성을 대변한다. 인간의 성질을 닮았다. 실용적이지 않은 것은 시원스럽게 삭제하는 묘미를 갖는다. 과거에 재미를 봤다는 것을 유지하는 것도 과학이다. 나머지는 다 삭제를 당해야 한다. 경제 효율성을 위해서이다.

◈ 경제 효율성 !!

여기서 말하는 경제 효율성은 무엇인고 하니, “얼마나 작은 힘을 가지고 큰 힘을 끌어당기는가?” 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즉 적게 투자하고 많이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경제 효율성을 따랐는가? 그렇지 않은가? 노아는 방주를 아주 크게 지었는데, 그런데 몇 명이 구원을 받았는가? 달랑 8명인데, 그러니 그것은 효율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냥 퇴출감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을 하실 때, 그냥 예수님을 곧 바로 보내면 되는데, 그런데 먼저 아브라함을 보내고, 이삭을 보내고, 그 뒤에도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효율성이 떨어지는 일을 하셨는가? 그냥 예수님을 직접 곧 바로 이 땅에 보내셔서 건지면 되는데 말이다.

◈ 효율성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예수님 !!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들이 생각하는 경제 효율성과는 전혀 무관하게 주님은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돈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즉 우리 인간은 두 주인을 동일하게 섬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돈을 사랑하는 자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식으로 예수님이 친히 오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는 것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보여주는, 즉 그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아마도 신학교 교수들 중에서 이러한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교수가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지 싶은데, 그렇지 않은가? 즉 그들은 예수님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교수로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다 신학을 통해서 구원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그런 짓거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주체가 생각하는 성경해석과 바늘구멍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성경해석이, 우리의 한 평생동안을, 즉 우리의 삶 가운데 언제나 마주치게 되어있는데, 그러한 마주침에서 깨어지면, 바로 그러한 자가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주여,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전혀 안 되는군요” 라고 말이다.

◈ 나는 지옥에 갑니다 !!

그런데 그날 서울에서 제가 발표를 하는데 옆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녹음을 들어보면 다 나오는데 말이다. 즉 “이근호 목사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신학을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라고 치고 나온다는 것이다. 어느 집사가 옆에서 그렇게 했지 싶은데, 교회에서 보통 집사들의 생각을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집사들이 보통 교회에 모여서 뭐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고, 교회봉사를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인가? 그러면 역사도 없다는 말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는 지옥에 갑니다” 라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실컷 교회에 나와서 지옥에 간다는 말이다. 

하지만 진짜 성도라고 하면, 그냥 푹 찌르면 그 어디에서든지 뭐라고 나와야 하는가? “저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는 것이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러면 신학공부를 하지 말란 말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투정을 부리는지 모르겠는데, 사실 투정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신학박사인 신학교 교수가 목사에게 투정을 하는 것도 오랜만인데,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를 들면, 젊었을 때 훌륭한 요리사이든, 명망이 있던 판사님이든, 한 때 명망이 높은 목사님이라고 해도, 은퇴를 하면 증권 객장에서 종일 죽치고 있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삶이요, 합리적인 삶이 된다. 왜냐하면 지금 도움이 안 되는 과거는 사정없이 삭제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 노년엔 역시 주식투자가 최고 !!

어느 젊은 사람이 건강해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묻기를 “할아버지, 장수의 비결이 뭡니까?” 라고 하니, 그 대답이 바로 “응, 주식투자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멋있지 않는가? 제가 듣기에는 최고의 답변인데 말이다. 장수하는 비결이 주식투자라는 것인데, 즉 아직도 힘을 모으는 재미로 살아가는데, 그것이 자기를 잡아당긴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판을 키우는 재미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노인네들이 경로당에서 고스톱을 칠 때에 매일같이 10원 내기를 하면 재미가 없는데, 그 다음에는 100원으로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판을 키우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들이 왜 교회부흥을 부르짖는고 하니까, 그것도 역시 판을 키우는 재미인데, 물론 거기에 교인들은 말려들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결국 과학이란, 각자 ‘자기만의 절대적 영역확보’를 주장해주고 정당화해주는 보편적 상호체계로 자리를 잡았다. 그 안을 깨트려보면 ‘실용적 방안에 대한 당연함이다. 이처럼 과학이 창조를 표방하지만, 실은 실용적 이유 때문에 탄생된 것이다.

조금 어려운 말이기에 그냥 지나가겠는데, 이게 교재 82페이지에 또 나온다는 것이다.

** 과연 선한 일이냐 악한 일이냐를 규정을 지을 가치는 과학에 담겨있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선택하는 것을 이미 선한 쪽이라고 단정을 짓게 된다.

◈ 과학은 선도 악도 아닌데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과학에는 선하다, 혹은 악하다” 라는 것이 있는가?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다.  금메달을 따는 것이 선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악도 선도 아니고, 그냥 이긴 놈이 전부를 다 가지고 간다는 말이다. 물론 이번에는 이긴 놈이 아닌 년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갔지만 말이다. 지금은 바로 그런 세상인데, 그렇지 않은가? 2등은 필요가 없는, 오직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인간이 힘을 모은다는 것 그 자체가, 즉 힘을 모으는 그 자체가 바로 진리가 되고 또한 선이 되고 말았는데, 바로 그러한 선과 진리가 악마가 노리던 것이란 말이다. 즉 악마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지혜를 다 끊어버리려고 하는데, 그래서 “니가 생존하는 것이 너에게 유일한 진리이고 선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살아남은 자가 승자가 되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는 것이 말이다.

◈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 !!

그렇다고 하면 우리아와 다윗 사이에 누가 승자인가? 즉 누가 살아남느냐는 말이다. 다윗이 살아남고 우리아가 죽었는데, 그러니 주님은 멋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는데 그것보다 더 멋진 이벤트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은 솔로몬을 다윗의 아들이 아니라 죽은 우리아의 아들로 해서, 여기서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 라고 하는 법칙을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살아있는 자는 자기를 승자로 여기겠지만, 그러나 사실은 저주를 받은 패배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자를 섬겨야 하는데, 이것을 더욱 정확하게 표현을 하면, 죽었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사흘만에 살아나신 분을 믿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교회는 살아있는 목사를 믿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죽은 분을 믿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분명히 죽었는데 그런데 우리를 이렇게 모이게 하신, 즉 죽었는데 보이지 않는 그분을 섬기는 자들이 있음으로 인해서, 그렇게 해서 모든 인간의 권세와 권력으로부터 해방이 될 수 있는 결과가 양산이 된다는 것이다. 죽은 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흔히 교인들은 뭐라고 생각하는고 하니, 목사와 같은 그런 목회자들이 있으면 자기들의 신앙생활을 잘 도와줄 것이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예수님 당시나 그 이전의 구약시대나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목사들이 오히려 그런 신앙생활을 막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을 막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가까이 한다는 인간들이 오히려 말씀을 훼방했다는 것이다.

◈ 만약에 ‘70이레’가 최악의 늪지라고 하면?

그것이 제가 발표한 논문의 초록에 보면 나와있는데, 즉 말씀을 연구한다는 인간들이 말씀을 훼방하는데, 그래서 과연 그들이 어떤 식으로 말씀을 훼방하고 있는지, 제가 그것을 한번 살펴보자고 하면서 ‘70이레’를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70이레를 김진수 교수가 평가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다니엘의 70이레는 구약 주해의 역사에서 ‘최악의 늪지’로 알려진 부분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만약에 그 70이레가 최악의 늪지라고 한다면,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끝까지 늪지가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한 쪽을 알고 다른 한 쪽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거짓말인데, 왜냐하면 70이레를 모른다고 하면 모두 모른다는 말이다. 70이레 말고 다른 것은 그래도 좀 안다는 의미인데,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70이레 말고 다른 것을 세피하게(쉽게?) 보았다는 것은, 결국은 70이레를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기 스스로 드러내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는 70이레는 잘 몰라도 다른 것들은 안다고 여기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오류라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보았는데, 즉 70이레를 모르고 다른 것을 안다는 것이 바로, 다른 것도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도대체 성경말씀에 있어서 만만한 구절이 어디 있는가? 모든 구절이 다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있는데 말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이니, 결코 쉬운 구절은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의 선과 악에 의해서 예수님이 !!

그러니 여기 교재 82페이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지금의 선과 악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힘으로 결정하는 선과 악에 우리 주님께서 합류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 주님은 그들이 아는 바로 그 선과 악의 기준 때문에, 즉 논문형식을 따르지 않았다고 하는 그들의 기준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모세의 법을 지키지 않는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82페이지를 보자.

** 새로운 선택에만 새 가치를 부여해주기에 과학은, 늘 하나의 모델을 선택해서 특화를 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즉 내가 선택했기에 내 모델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마치 ‘완벽한 지도’와 ‘좋은 지도’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 보면 ‘완벽한 지도’와 ‘좋은 지도’가 나오는데, 그렇다면 그 차이점이 무엇인가? 물론 완벽한 지도는 신의 영역이라고 보고,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여기는데 말이다. 그러니 좋은 지도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들이 보기에 편리한 지도인데, 그렇게 한시적으로 진리노릇을 하는 지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에 나오는데, 계속해서 살펴보자.

** 과학이란 완벽한 지도를 대신하여서 좋은 지도를 특화해서 그것을 선하다고 우기면서 등장한다. 편리한 것이 한시적으로 진리노릇을 하는 것이다. 생물학에서 주장하는 진화론도 마찬가지다. 그것 자체가 자연 선택의 결과이다.

◈ 창조론도 과학의 산물에 불과 !!

그러니 그들은 진화론을 가지고 창세기의 창조론은 틀렸다고 하는데, 즉 이 세상을 7일만에 창조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지혜를 모르고 오직 지식만 움켜쥐고, 그것을 가지고 거룩한 분을 찾으려고 하니, 도대체 그런 무모한 짓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뒤에 나오는 창조론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진화론을 반대해서 창조론이란 모델이 나왔는데, 그러나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기어이 과학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과학은 선하지 않다는 말이다. 주님은 그런 선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진리라고 간주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로마서 3장에도 나오듯이, 인간이 제 아무리 선하게 무엇을 하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악하기만 한데, 그런데 그렇게 악하기만 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선하게 사용하신다고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그 무엇을 끄집어내더라도 다 악하다는 말이다.

(롬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주여, 저는 악한 놈입니다 !!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주여, 저는 악한 놈입니다” 라고 하면서 십자가 앞에 엎드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한 것인데, 우리 인간에게 그것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그때 서울에서 옆에 옆에 있는 인간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근호 목사는 자기만 훌륭하고 다른 사람은 다 악하다” 라고 주장했는데, 왜 그런 소리를 하겠는가? 그런 자들은 자기가 엎드릴 대상이 없는데, 그러니 저를 보고 자기들에게 엎드리라고 하는 것이다.

저는 지금 십자가 앞에 엎드려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증거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들은 무엇인가? 오히려 그런 제가 부러워 보일 수가 있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엎드릴 대상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자기의 신학 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신학교 교수들을 보고 ‘불신자’ 라고 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83페이지를 살펴보자.
 

** 사실 인간의 과학행위는 모두 이 창조에 대해 수동적으로 보여준 적응행위이다.

◈ 인간은 ‘수동적’ !!

여기에 ‘수동적’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 우주밖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데, 그러니 인간이 우주를 논하는 것 자체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수동적’ 이란 말이 무엇인고 하니, 누군가가 뭔가를 자기에게 주어야만 “아하, 여기에 있구나” 라고 알게 되는 신세, 바로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요즘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능동적 사고방식이 어떻고 적극적 사고방식이 어떻고 하는데, 그런 것을 전부가 다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범위에 한해서만, 그것도 전부가 아니라 자기가 과거에 알고 있던 버릇이나 습관에 한해만 취급한다는 것이다. 

◈ 인간의 과거의 습관에 의해서 !!

지금 말이 조금 어려운데, 이것을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겠는데, 즉 인간이 여기에 이렇게 서 있으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어진 것을 모두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일부만 포착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일부만 포착하는 것도 과거에서 주어진 버릇, 혹은 습관에 의해서 한다는 것이다. 습관에 의해서 말이다. 

그래서 아침에 항상 7시에 일어나는 사람은, 새벽 5시에 번개시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7시에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러면 7시에 왜 일어나는가? 그것은 습관에 의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교수들이 논문형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곧 습관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그런 논문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은 모르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은 그 바닥에서 그런 식으로 습관이 되어서 따라야 밥이라도 먹으면서 살아가니 말이다.

그래서 제가 논문 마지막에서 ‘거취’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그래도 말씀을 연구한답시고 자기 거취문제만 생각하는 인간들, 얼마나 더러우냐는 것이다. 그래서 쓰레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가? 논문을 발표하면서도, “이번 논문을 잘하게 되면 어느 신학교에서 좋은 대우로 청빙이 들어올까?” 라고 하면서 살아가니 말이다. 그러니 저의 발표를 듣고 오히려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비정상이라는 것이다. 

◈ 존듀이 - 교육은, 좋은 습관을 키우는 것이다 !!

아무튼 과거의 이러한 버릇이나 습관이 가정교육이나 외부의 환경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데, 그것을 ‘존듀이’ 라는 유명한 교육학자가 집중적으로 여기에 대해서 연구를 했는데, 그래서 그는 “교육이라는 것은 좋은 습관을 키우는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양반을 두고 실용주의자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교육이 진리이라는 것이 찾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훌륭한 인격자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냥 좋은 습관을 키우는 것인데, 그런데 이 좋은 습관이 무엇인고 하니, 시민사회에 필요한 것인데, 왜냐하면 시민사회가 있어주어야 밥을 먹고 살아가니 말이다. 즉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고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남에게 도움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재 있는 기존의 시민사회에서 “너는 참 좋은 습관을 가졌구나” 라는 소리를 들어야 밥이라도 먹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 행동주의적 교육심리 - 사람은 줘 패면 말을 들어 !!

그것이 바로 교육인데, 그러니 다른 진리는 찾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그 이전에 나온 사상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동물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동물의 특징은 무엇인가? 동물은 길들이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옛 선인의 말씀에 “명태와 여자는 삼일에 한 번씩 패라” 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자를 그렇게 해야 친정 쪽에서 농사를 짓던 방법을 가지고, 새롭게 시집을 온 농경사회에 훌륭한 일군이 된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왜 훈련시키는가? 매일같이 밤새도록 술이나 마시고 자기 마음대로 마구 까불면서 놀던 아이들이, 이제는 매일 아침마다 깔끔하게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하는데, 왜 그렇게 하는가? 모든 것이 그 사회에서 길들이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배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진급도 안 될뿐더러, 그 회사에서 자기는 도태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술을 못 먹는 사람이라도 이제는 술잔도 돌릴 줄 알아야 하고, 가끔은 폭탄주도 마셔야 하고 말이다. 그렇게 상사에게 아부를 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자기에게 습관화가 되면, 그것을 후배들에게 자기의 습관화가 된 것을 그대로 인수 인계하게 된다는 말이다.

옛날에 시어머니가 며느리들을 그렇게 구박을 했는데, 왜 시어머니들이 그렇게 독하게 했는고 하니까, 그것이 자기에게 이미 습관화되어서 그러한데, 왜냐하면 인간은 동물이기 때문에 말이다. 즉 인간은 환경에 따라서 길들이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행동주의적 교육심리’ 라고 하는데, 그렇게 표현하니 제법 고상해 보이는데, 쉽게 말해서 사람은 줘 패면 말을 듣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로버트 박아, 북한을 열어라 ??

얼마 전에 ‘로버트 박’ 이라는 사람이 북한에 들어갔을 때 제가 예언 아닌 예언을 했는데, 그 양반이 북한에 들어가면서 뭐라고 했는가? 자기가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그래서 자기가 들어가면 북한이 열린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강의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북한에서 저 인간을 그냥 두드려 패버리면 바로 잘못했다고, 즉 “제가 너무 오해를 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싹싹 빌면서 결국 쫓겨날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예언이 아닌 예언을 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한 달이 지나고 난 다음에 그대로 되고 말았는데, 그냥 두드려 패는데 하나님이고 뭐고 없다는 것이다. 거기서 그 얼마나 얻어터졌는지 말로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렇게 맞을 짓을 했고 말이다. 세상에 성경말씀 그 어디에 “북한에 들어가서 북한을 열어라” 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로버트 박은 북한에 갈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있는 자리나 제대로 간수하고 복음을 전했으면, 물론 그러면 북한의 인민군이 때리는 것이 아니라 미국 사람이 때렸지 싶은데, 아마 목사안수도 주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니 선교사가 되지도 않아서 아예 북한에 갈 기회도 없었지 싶은데 말이다.

자기는 미국의 습관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런 미국습관이 북한에서도 통하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미국의 습관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북한에 갔으니 얻어터지더라도 살아서 나왔지, 아마 탈레반에 들어갔으면 뼈도 못 추렸지 싶은데 말이다.

◈ 순교는, 그냥 삶 가운데 주어지는 것 !!

구약의 우리아 장군이 순교한 것이 아닌데, 즉 그가 특검의 자격으로서 다윗의 잘못을 수사한 것이 아니라, 자기는 그냥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섬겼는데, 외부에서 순교를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이 바로 순교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순교를 하겠다고 날뛰는 것은 너무나도 수상하다는 말이다. 결코 좋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디 스데반 집사가 자기가 순교를 하려고 했는가? 자기는 사랑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그런데 날아온 것은 사랑이 아니라 돌맹이가 되어서,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돌맹이에 얻어맞고서 죽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주의 뜻이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평소에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것도 하나의 순교가 되는데, 즉 평소에 조용히 주님을 믿으면서 그냥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이미 순교에 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부산 지하철역에서 전도를 하고, 또 객차 안에서도 간증을 하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오히려 자기 습관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집에서 조용히 살면 되는데, 그러면 사건이 터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동대구역은 그런 것이 없나요?)

◈ 인간은 영원한 수동적 존재 !!

아무튼 제가 이러한 모든 것을 두고서 ‘수동적’ 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영원한 수동적인 존재인데, 왜냐하면 피조물이기에 말이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진, 영원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이 수동적인 것을 두고 “그냥 성깔대로 사세요” 라고 하는데, 즉 그렇게 수동적으로 살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능동적인 분은 따로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말이다.

그것이 교재 38페이지에 나오는데, 재미있는 내용들이 있어서 계속해서 살펴보자.

** 두뇌세포가 우주로부터 산소와 영양분과 에너지를 공급받지 아니하면 인간은 현미경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부부사이가 좋지 않은 날에는 연구할 마음도 싹 가시게 마련이다. 신체의 컨디션뿐만이 아니라 대인관계까지 과학탐구에 영향을 끼친다. 

◈ ‘어떻게’, ‘왜’가 아닌, “누구십니까?”

인간이 우주를 바라보기 위해서 천체 망원경을 들이대면 우리 안구 뒤에 있는 뇌신경이 작용하는데, 그런데 그 뇌신경이 작동을 하려면 산소가 있어야 하는데, 즉 영양분이 공급되어서 산소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산소는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우주에서 나오는데, 그러니 우주에서 나온 산소를 가지고 우주를 들여다본다고 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폐쇄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은 지식인데, 그런데 지혜는 무엇인고 하니, 보이지 않는 분이 우리에게 살도록 하는, 즉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라는 것이 아니라, 또한 ‘왜’ 라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누구’ 라는 것인데, 즉 “누구십니까? 저로 하여금 망원경을 통해서 이 우주를 바라보게 하신 분이”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같은 우주를 바라보더라도 어떠한가? 즉 욥이 보는 것과 불신자인 천문학자가 보는 것이 뭐가 다르냐는 말이다.

욥이 보게 되면, “이 천지를 만드신 분은, 저에게 고난을 주신 바로 그분이 이 천지우주를, 밤하늘의 저 수많은 별들을 만드셨군요” 라고 하는 고백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계시라는 것은 없는데, 항상 우리 속에 십자가 계시가 주어질 때만,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계시가 확산이 되면 자연적으로 온 우주까지 적용이 되어서 이해가 되어진다는 것이다.

◈ 칼 바르트의 경우에도 !!

바로 이것을 칼 바르트가 주장했는데, 물론 바르트는 이런 주장을 하면서 엄청 욕을 들었는데, 거기에 비하면 지금 제가 듣는 욕은 욕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박사학위도 없는, 시골에서 그냥 목회나 하는 인간이 어디 감히 박사를 가르치려고 하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의 책이(로마서 강해?) 히트를 쳤으니 망정이지 말이다. 하지만 그의 책이 인기를 끌고, 그렇게 해서 힘을 모으게 되니 조금 이상해졌는데 말이다.

그래서 제가 욥 친구의 3가지 신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끝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칼빈이 주장한 ‘하나님의 주권’은 주권이 아니라, 참된 주권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면 십자가 앞에서, 즉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오신 하나님, 즉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주권사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 주여, 너무나 위대하십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주여,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창기와 세리가 된 입장에 서있는 것이, 그것이 곧 진정한 주권사상이 아니냐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더구나 과학탐구에 열중하는 자들은 자신이 왜 그런 연구를 하는지 대(對) 우주적 연관성 속에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하고 싶고 즐길 뿐이다.

◈ 전도서 - 인생은 즐기는 것 !!

여기에 “그냥 하고 싶고 즐길 뿐이다” 라고 하는데, 사실은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그냥 즐긴다” 라는 것이 구약 어디의 주제인고 하니, ‘전도서’의 주제가 된다는 말이다. 즉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 다음의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그러므로 즐겨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
(전 2:25)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전 2:26)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아있을 동안에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것을 우리 자신이 알아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아있을 동안에 어떻게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악한 일을 한다고 해서 저주를 받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단지 구원을 받는 것은 누구의 손에 달려있는고 하니, 그것은 전혀 우리의 알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전도서 7장인가에 보면 나오는데(?), 즉 사람의 미래는 결코 우리 인간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즐기는 것이 바로 지혜에 순종하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 즐기는 것이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 !!

오늘도 어록이 하나 여기서 탄생을 하는데(ㅋㅋ), 즉 “즐기는 것이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즐기는 것, 즉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대해서, 물론 예수님은 여기에 통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라는 것이 여기에 이렇게 들어가게 된다면, 즐기지 않는 것이 그만 순종을 안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즐기지 않는다는 것은 짜증을 낸다는 말인데, 즉 “하나님, 내 인생을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오늘은 돈줄인 배달용 오토바이를 그만 잊어버렸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주님의 즐김에 동참해야 !!

그렇게 우리는 즐기지 못하면서 하나님께 그만 마구 닥달을 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즐겼는데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했는데, 그것이 곧 주님의 즐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또 다시 지혜에 어긋난 삶들을 산다는 말이다.

전도서 1장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5번이나 헛되다고 했는데, 그러니 강시 영화에 보면 부적이 나오는데, 아예 그 부적을 5장이나 이마에 붙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마에 그냥 박아버리는데, 그것은 바로 “나머지는 니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니 그냥 즐겨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골프나 치고 요트나 타면서 마구 돌아다니라는 것이 아닌데, 그쪽에 가면 그쪽의 룰이 다 있다는 것이다. 그런 룰을 지키지 않으면 요트를 빌려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요트를 타지 않으면 되고, 물론 스키장에 가면 또 그 나름대로의 룰이 있고 말이다. 그러니 집에서 그냥 눈이 왔을 때 판대기를 밑에 대고 내려가면 되는데, 그런데 꼭 폼을 잡고 그렇게 높은 곳에서 마구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기부스를 하고 난리를 피운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는 즐기기는 즐기는데, 그런데 그것이 주님이 즐기신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꼭 남이 즐긴 것을 즐겨야만, 그것이 뭔가 성공한 젊음이 되는 줄로 알고, 즉 그렇게 해야만 이 세상에서 성공한 티를 내는 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남이 즐기는 룰을 따르는 것이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즐김의 모습인가? 그런 곳에 가면 1등이 즐기는 것이 있고, 또 2등이 즐기는 것이 따로 있는데 말이다.

◈ 현숙 - 자기들끼리 노는데 메달을 주더라 !!

제 아내인 현숙씨께서 동계 올림픽을 보고 딱 한 줄의 평가를 내렸는데, “자기들끼리 노는데 메달을 주더라” 라고 말이다. 아니, 자기들끼리 노는데 메달을 왜 주느냐는 것이다. 집에서 딩구는 것도 추운 겨울을 보내는 아주 훌륭한 레저인데, 그런데 왜 거기서 스틱을 들고 왜 설치느냐는 말이다. 그러다가 한 골을 넣었다고 좋다고 난리를 치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연아가 참 불쌍한데, 전혀 즐길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만 남의 즐김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능동성을 이야기한다면, 그런 인간의 능동성은 수동성에서 나온 능동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수동적 자발성’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 딴에는 능동적으로 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한계가 바로 수동적으로 주어졌던 경험, 즉 그것이 바로 아까 말한 ‘습관’ 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다 자기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런 습관을 가지고 계속해서 나가다가 그만 지혜와 부딪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그러한 지혜마저도, 자기의 습관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그만 핍박을 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84페이지를 살펴보자.

** 인간은 나름대로의 절대 신조가 신체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흘러 들어오는 모든 감각과 경험들을 쪼개고, 칸막이 치고, 구분하고, 분류하고, 선별하고, 선택해서, 현재 자기 신체가 가장 편하고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데 필요한 질서들로 배치시켜, ‘편함’의 효능을 극대화한다.

◈ 편하게 살자 !!

여기에서 감각과 경험들을 쪼개고, 칸막이 치고, 구분하는, 그렇게 하는 것은 칸트의 선이해를 말하는 것이고, 그리고 자기 신체가 가장 편한 컨디션을 유지하는 질서로 배치하는 것은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인데,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는가? 자기 몸의 편함의 효능을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즉 편함의 균형을 맞춘다는 말이다. 

이 편함이 바로 불교의 최고 지향점인데, 즉 “편하게 살자” 라는 것인데, 그것은 불교뿐만이 아니라 장자의 사상이고, 또 노자의 사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누가 때리면 “아야!” 라고 하는데, 즉 아프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불교 신자들은 무엇까지도 추구하는고 하니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떠한 누가 때리면 아프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 것조차도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 없느냐고 해서, 소위 ‘요가’ 라는 것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 불교와 요가 !!

그런데 요가와 불교철학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불교는 육체를 잊고 내팽개침으로 말미암아서 정신적인 편안함을 추구하는 반면에, 요가는 육체를 적극적으로 다룸으로서 그 육체가 요구하는 가장 좋은 자세를 추구함으로서, 그렇게 해서 좋은 습관을 줌으로서 평소에 늘 어떤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편안함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요가와 불교가 합쳐진 것이 바로 ‘참선’ 이라는 것인데, 혹은 ‘마음 다스리기’ 라고 말이다. 그래서 요즘은 교회나 천주교에서도 이것을 도입해서 기도하는 자세도 가르쳐주고 하는데, 즉 “이렇게 기도하시면 참 편안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편안한 것을 가지고서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은혜를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은혜를 받고 못 받고 하는 것은 몸의 자세 문제가 되는데, 즉 몸의 자세가 좋으면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다.

◈ 몸 자세를 제대로 취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

하지만 과연 그것이 복음인가? 사도바울이 그렇게 전했는가? 로마서 1장 16절에 어디 “몸의 제대로 된 자세를 취하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했느냐는 말이다. 장사가 안 되니 교회가 별 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듣는 교인들이 복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편안한 대로, 즉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 바치면 튕겨 나가고 마는데, 그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으면, 물론 나가고 말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이니, 그렇게 해서 교회를 나가더라도 나갈 때는 예수님에 대해서, 즉 “저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라고 하면서 나가면 좋겠는데,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서, 즉 자기 몸 이야기나 하면서 나가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평소에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믿었다는 소리밖에 더 되느냐는 말이다.  

◈ 과학자 - 내가 무엇을 만들어낼 수가 있는가?

아무튼 과학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묻지 않는데, “내가 무엇을 만들어낼 수가 있는가?” 라는 것을 묻지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은, 그것은 항상 미지의 ‘X’로 남게 되는데, 이렇게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이 남아있다는 것은 약간은 비어있다는 의미인데, 그렇게 비어있으니 자기가 만약에 세탁기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는가? 세탁기 발명자가 되는데, 그리고 자기가 영어를 잘하면 영어도사가 되고 말이다.

그러니 자아는, 즉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은 모르고, 항상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라는 것을 가지고 채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그러면 여기서 좀 더 나아가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것을 자기가 지어내는가? 아니면 이미 남들이 해놓은 짓을 보고 흉내를 내는 것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흉내를 내는 것이란 말이다.

요즘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의 희망이 무엇인가? 선생님이 되는 것이고 그것을 부러워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타인이니 말이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 라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을 두고서, 즉 쇼핑을 해서 “나는 저것이 되고 싶어” 라고 하는데, 그렇게 남이 먼저 선점을 한 것을 가지고 탐을 낸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탐심이 없으면 일이 안 되는데, 그런데 야고보서 1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죄가 아닌 것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하필이면 선악과가 왜 그곳에?

그러니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의도한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면 선악과를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곳에 두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었는데, 그것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만들어서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것을 첫날에 따먹었는지는 모르겠는데, 3달 이후에 따먹었다고 치더라도, 3달 동안 이 선악과나무가 얼마나 아담의 애간장을 다 녹였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마침 뱀이 와서 유혹을 하니 넘어가고 말았는데, 그것도 아담과 하와가 같이 있을 때가 아니라, 여자 혼자 있을 때 말이다.

◈ 여자에겐 언제나 ‘빈자리’가 !!

왜 그렇게 되었는고 하니, ‘여자’ 라는 것은 항상 옆에 빈자리가 있기 때문에, 바로 그 빈자리에 뱀이 오던지,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인을 두고서 ‘연약한 자’ 라고 하는데, 물론 요즘 아줌마들은 예외겠지만 말이다(ㅋㅋ).

아무튼 여인에게 이러한 빈자리가 있는데, 이 빈자리에 주님이 오셔서 그 빈자리를 대신해서 채우게 되면, 그 여인을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여인’ 이라는 것은, 모든 우리 인간들이 이 여인의 후손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와 같은 인간들에게도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으니, 그렇게 해서 이 빈자리를 그리스도께서 차지한 것인데, 그렇지 않고 자기가 신학을 공부한 그 노동을 가지고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오늘 신학교 교수들은 그렇게 해서 채우려고 하지만 말이다.

스포츠 게임에서 일등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끝나는데, 그래서 일본의 아사다 마오는 다음 동계 올림픽에 또 나온다는 것인데, 왜 그런가? 금메달에 대한 빈자리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아사다 마오에게 “거룩한 하나님을 아십니까?” 라고 한다는 것은, 마치 “도를 아십니까?” 라고 하는 것과도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 빈자리만 채우게 되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즉 자아를 구축하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이런 강의를 하면서도, 혹시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이런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이 있는지, 혹시 있으면 그것을 저에게 좀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 인간은 환경을 모방하면서 빈자리를 채워 !!

다시 말해서, 인간은 외부에 있는 것들 중에서 자기 마음에는 드는 것만을 골라서 모방하는 식으로 자기 빈자리를 채워나가는데,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 수시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가 주장하는 것인데, 이것 말고 다른 식으로 자아가 구축되는 방법이 있으면 이야기를 좀 해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육은 모방인데, 그래서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고 하니, 아이들에게 자기의 상상력을 유발하도록 하는 것이란 말이다.

요즘 인기가 있는 다큐멘터리 중에서 MBC에서 만든 ‘아마존의 눈물’ 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아마존의 눈물이지만, 하지만 그들이 5년 정도가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빠라바바 바라바” 라고 하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젊은 아이들이 말이다. 처음에는 발가벗고 있었지만, 그러나 나중이 되면 ‘보그’ 라는 패션잡지를 옆에 끼고 다닌다는 것이다. 10년 안에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갇혀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인간은 이미 이 세상 모두에게 갇혀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세상 환경이 이렇게 되어있는 이상 우리는 자력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데, 그러니 예수님을 한번 믿었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매일같이 십자가의 은혜를 주셔야 주님의 그 피 흘린 자국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 장로님, 만원씩 나누어줄까요?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증거해야 될 목사가 무엇을 하는가? 교회를 걱정하고 있는데, 그것도 자기가 교회를 지어놓고 그 교회를 채우려고 하니까, 물론 그 교회가 하나밖에 없다고 하면 또 모르겠는데, 그것이 아니라 교회가 여러 군데에 있으니 그것을 또 하나의 다른 교회를 모방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대구의 어떤 교회는 교회에 온 교인들에게 봉투에 돈을 넣어서 나누어준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3천원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니 이웃 교회에서는 5천원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교회는 얼마나 주어야 하겠는가? 장소도 외지고 하니 만원 정도는 주어야 되지 싶은데, 장로님에게 한번 물어보아야 하겠는데 말이다.

그렇게 하지 말고 아예 5만원을 주어서 여기 있는 이 보성1차 아파트에, 10년 동안 한 명도 우리교회에 안 나오는 이 아파트에 말이다. 그래도 명색이 아파트 상가에 교회가 있는데, 그 아파트에서 나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놀라운 사살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나온 가정도 있지만, 그냥 바로 나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5만원을 넣어서 주면 아마 저기 밑에 있는 교회에서 비상이 걸리지 싶은데, 혹시 10만원을 넣어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토요일마다 노방전도를 하고 플랜카드를 걸고 할 필요가 없는데, 그냥 돈 봉투만 나누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돈 봉투를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고, 꽃꽂이를 가르쳐준다든지, 아니면 드럼이나 기타를 치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나 이것이나 모두가 다 마찬가지인데,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것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주님은 그 얼마나 바쁘겠는가?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인먼트가 되어야 하는데,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눈물이 날 이야기인데 말이다.

이제 교재 85페이지를 살펴보자.

** 예를 들어서, 노동자가 밤새 작업장 안에서 볼트를 조이는데 열중할 때도 밖에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는 바깥 공간과 자신의 작업장이라는 공간은 전혀 상관없다. 낙엽을 바스락거리면서 밟는 즐거움은 퇴근길에나 누릴 여유이다. 그러나 그 시간에 환경미화원은 죽을 지경이다. 그 많은 낙엽을 내일 아침이 될 때까지 다 치워놔야 하기 때문이다.

◈ 낙엽은 왜 떨어지는가?

이게 무슨 의미인가? 낙엽은 왜 떨어지는가? 그렇게 말하니까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라고, 금발의 ‘Skeeter Davis’ 라는 여가수가 부른 올드팝송이 생각나는데, “나는 사랑을 잃어버렸는데 왜 아침에 태양은 빛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혹시 이 노래를 아십니까? 아주 얌전하게 노래를 곱게 부르는데, 마치 인형처럼 해서 말이다. 결국은 자기 사랑타령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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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 Of The World
                          Skeeter Davis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왜 태양은 빛이 나는가?
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
왜 바다는 해안가로 들어오는가?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그들은 세상의 그것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Cause you don't love me anymore
왜냐면 당신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Why do the birds go on singing?
왜 새들은 노래를 부르냐?
Why do yhe stars glow above?
왜 별들은 위에서 반짝이는가?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그들은 그것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It ended when I lost your love
내가 당신의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끝이 났다..

I wake up in the morning and I wonder
아침에 일어나서 궁금해한다.
Why everything's the same as iy was
왜 모든 것들은 예전그대로 일까?
I can't understand
이해할 수 없다.
No I can't understand
정말 이해할 수 없다.
How life goes on the way it does
어떻게 그 방식대로 인생이 가는 지를...

Why  does my heart go on bearing?
왜 내 심장은  있는가?
why do these eyes of mine cry?
왜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나는가?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그들은 그것을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는가?
It ended when you said good-bye.
그것은 당신이 이별을 이야기했을 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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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불행은, 즐기지 못함에 !!

아무튼 우리 인간은 그렇게 열심히 자기 신체를 가지고 주체를 만드는데, 하지만 거기에 주님은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마가 만들어준 습관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자기는 공장에서 밤을 새워서 볼트를 조이고 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더라도, 그러나 낙엽은 여전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몸 자체가 주님의 몸인데,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가? 자기가 원하는 자기 몸이 되기를 원하고, 그것을 우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고집은, 그것은 습관화가 되어서 평생을 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스트레스는 자기가 사서 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냥 즐기면 될텐데 즐기지를 못하고 말이다. 자기가 원하는 자기가 되지 않는다고 매일같이 철야를 하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철야가 오히려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낙엽이 떨어지면, 청춘남녀들은 손을 붙잡고 뛰어다니고 마구 뒹굴고 하는데, 바바리 깃도 한껏 세우면서 말이다. 하지만 환경미화원은 어떠한가? 그 낙엽을 욕을 바가지로 하면서, 그렇게 씩씩거리면서 모두 다 쓸어서 치운다는 것이다.

◈ 눈과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서술해보세요 ??

전방부대에서 겨울에 할 일이 무엇인고 하니, 눈을 치우는 것밖에 없는데, 평소에는 그렇게 좋던 눈도 그렇게 겨울마다 치우려고 하면 지긋지긋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맞선을 보러 가는데, 그만 눈이 와서 정동진에 갇혀서 가지를 못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얼마나 화를 내는지, 그것이 SBS 방송에 나왔다는 것이다. 여자인데, 자기는 눈이 이렇게 싫은 적은 없었다고 하면서 울먹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돌아가도록, 그렇게 모든 권세를 다 주님에게 일임을 했는데, 그러니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는 것은,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대해서, 즉 “눈과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서술해보세요” 라고 강도사 고시에 시험문제를 내면 아무도 통과하지 못하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 왜 ‘다니엘 70이레의 비역사적’ 인가?

어제 서울 세미나에서 논평한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근호 목사는 70이레를 이야기하면서 요나를 왜 거론하는지 모르겠다”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제가 요나의 자살에 대해서 언급을 했기에 말이다. 거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요나가 당신들보다 못한 것이 아니다” 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즉 요나가 현재 신학교 교수들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히 뒤범벅을 한 사람인데, 그런데 그 계시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것은 바로 평소에 이 계시가 문제가 아니라, 그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하는 자기 주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나가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니 참 좋겠네요. 하지만 저는 죽을 랍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로 이러한 주체의 갈등, 즉 주님이 주신 은혜를 주체가 감당하지 못해서 생기는 갈등, 그런 주체의 갈등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성경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생기는 우리 주체의 갈등과 동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요나의 자살시도를 거론해야 !!

그러니 반드시 그 주체를 거론해야만, 즉 요나의 자살시도를 이야기를 해야만 다니엘이 그 ‘70이레’ 라는 계시의 주체가 될 수 없고, 하나님과의 단독적인, 즉 하나님과 보편적 단독성인 느부갓네살 왕과 대비해서, 또한 하나님과 짐승을 대비해서 일곱 때를, 즉 그렇게 해야만 7년 동안 짐승이 된다는 것이다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짐승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의 단위가 되어서, 그렇게 해서 이 모든 세상을 짐승화를 만들고,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근접했던 그 바리새인들까지 짐승화를 만듦으로 말미암아서, 바로 그러한 작업이 말라기와 세례요한 이전, 즉 계시가 없던 시절에 짐승이 얼마나 대용계시(?)로서 ‘남은 자’를 역사적 해석을 가지고 끼워서 맞추려고 애를 썼던지, 그것이 바로 그날 발표한 ‘다니엘 70이레의 비역사적 해석’ 이란 논문의 주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들이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물론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닌데, 하지만 분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감히 목사가 신학교 교수들 앞에서 자기들이 모르는 소리를 왜 하느냐는 말이다. 박사보다 낮은 목사가 말이다. 그것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넘버3’처럼(영화?) 그 자리에 재떨이가 있었으면 그냥 날아가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 아하, 오늘은 낙엽컨셉이구나 !!

아무튼 비록 자기가 환경미화원의 입장이라고 해도 그것을 그냥 즐기면 되는데, “아하, 오늘 컨셉은 낙엽컨셉이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즉 “아하, 하나님은 자기 세계를 낙엽으로 장식하는구나. 어제는 지진으로 장식하셨는데, 그렇게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는 것을 보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것도 역시나 말씀대로 된 것이구나” 라고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믿게 되는 것도 전혀 자기 뜻이 아니라, 이미 창세 전에 사랑을 받기로 택함을 받았기에, 즉 이미 구원을 받아야만 할 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께서 말씀대로 오셔서 그렇게 모든 일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다 완벽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 그러니 칸트는, 바리새인이 아닌가?

그런데 인간들은 무엇인고 하니, 자꾸만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고집하게 되는데, 그러한 시공간은 바로 칸트의 주장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 내부에 있는 선 경험, 즉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주변을 이성(오성)적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영위하려고 한다. 그런데 물(物)자체, 즉 진리는 우리와 멀어져 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칸트가 신의 주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즉 인간은 기껏해야 자기밖에 모르니까, 그러니 신의 영역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남아있는 영역을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명령으로 채우게 되는데, 그러면 그 명령은 무엇인가? “무조건 착해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런 칸트의 주장은 완전히 율법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칸트는 바리새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철학이라는 말이다.

◈ 아, 신은 숭고합니다 ??

다시 말해서, 다른 것은 몰라도 ‘도덕’ 이라는 법률은 무조건 해야만 하는 법률로, 그렇게 채우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는 그것도 안 되니 ‘숭고함’을 이야기했는데, 즉 그냥 숭고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죄가 안 되는데, 즉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 “아, 신은 숭고합니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여튼 성령이 오지 않으니 도무지 십자가를 알 수가 없는데, 그냥 상상해서 신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저히 “내 대신에 누군가가 죽었구나” 라는 것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라고 하면, 바로 그러한 가운데서 ‘나’ 라고 하는 주체는 죽고, 이렇게 ‘나’의 죽은 주체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주체로서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밖에 모르는 죄인인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니 이제 모든 일에 주신 것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심지어 죽을 때도 주님을 만나는 기쁨으로 즐거워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마음가짐이 다 하나님께 맡기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3,15 오후 6시에 마침.

                                                             마누라 덕분에 오늘 하루 잘 쉬었다 !!
 
 


[다니엘서 ‘70이레’ 비역사적 해석 (서울 개혁신학회 강의후기)]

                                       10,03,01 (대구강의를 마치고)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김대식 : 목사님, 이것도 동영상으로 녹화를 할까요?
* 이근호 : 이번 강의는 동영상은 필요 없고, 이제 시작합니다. (그냥 동영상도 좀 하시지. ㅋㅋ)


◈ 느부갓네살 왕의 의미 !!

느부갓네살 왕이 우상을 만들 때, 이 느부갓네살이 바벨론 왕인 것은 알지요? 그런데 이 바벨론 왕 밑에 누가 있는고 하니까, 다니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다에서 잡혀온 사람들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힘은 누가 가지고 있는고 하니, 느부갓네살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누누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겠다고 했는데, 그런데 이스라엘과 함께 있겠다고 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 안에다 집어넣어서,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이란 제국 밑으로 들어가게 해서, 그만 그들의 지배를 받게 하셨다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했는고 하니, 분명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성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아서 멸망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회복이 된다. 내가 너희들을 지켜줄게. 너희들은 내 아들이다” 라고 하셨는데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을 우상을 섬기는 느부갓네살 밑에 들어가도록 함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는 이 느부갓네살을 직접 다루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한 제국의 왕이지만 끽 소리도 못하고서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다루시는데, 그런데 이 느부갓네살 왕이 어느 날 갑자기 꿈을 꾸게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 꿈 내용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심지어 다니엘도 모른다는 말이다.

◈ 이것은 개꿈이다 ??

물론 우리들 같으면 거기에 대해서 “이것은 개꿈이다” 라고 하면서 잊어버리면 되는데, 그런데 막상 느부갓네살 왕 본인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심정을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는데, 자기는 그 꿈의 내용을 반드시 알아야만 하겠다는 것이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신하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이 내 꿈을 해석하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왕이 평소에  그렇게 폭군이 아닌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느부갓네살 왕을 다루었음을 보여주는데,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무엇은 알았는고 하니, 자기가 꾼 꿈이 온 우주의 미래까지도 그 전체를 해석하고 다스릴 수 있는 그런 것이 자기에게 꿈으로 왔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즉 미래에 대한 모든 것들은 자기가 꾼 꿈에 의해서 절단이 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 금신상인데, 왜 전체가 모두 금이 아닌가?

그 꿈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느부갓네살 왕이 짐승이 되는 것인데, 짐승이 말이다. 그것이 몇 년 동안인가? 실제로 7때(7년?) 동안 그는 짐승이 되었는데, 여기서 느부갓네살은 금신상을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그 신상의 순서가 어떠한고 하니, 제일 꼭대기는 금이고, 그 다음이 은, 놋, 철, 그리고 마지막에는 철과 진흙이 함께 섞여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금신상인데 왜 전체가 모두 금이 아닌가? 물론 꼭대기 부분은 금이 맞지만, 그러나 이 느부갓네살의 시대가 금으로 끝이 나고, 그 뒤에 나타나는 후배 왕들의 제국이 그렇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금신상 안에서 따로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즉 하나 두나 세나가 아니라, 그 전체가 금신상 안에 다 함께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 이유가 있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마지막에 보면 어디선가 돌맹이가 날아와서 그만 밑에 있는 발을 차버린다는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발을 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 금신상이 그만 ‘꽈당’  넘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 바벨론 제국이라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역사적으로 분명히 한 시대인데, 그래서 제가 서울에서 이것을 역사적 해석을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끝에 보면 ‘큰 성 바벨론’ 이라고 해서 이 바벨론은 세상 끝까지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역사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어, 이제 바벨론은 지나갔으니 나와는 상관이 없네” 라고 나오게 되는데, 그러니 저는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고, 그것을 묵시적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때 금신상이 꽈당 넘어져서, 즉 그 당시의 시점에서 시작해서 모든 시점이 다 포함하는, 그렇게 해서 마지막 시대까지 다 커버해주어야 하는데, 그래야 금신상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이란 말이다.

◈ 금신상을 누가 넘어뜨리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과연 이 금신상을 누가 넘어뜨리는가?” 라는 것인데, 우리는 이스라엘이 있어야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고 보았는데,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포로로 잡혀와서 완전히 기가 죽어있고, 그래서 하나님만 남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자기 약속대로 일을 하지 않겠는가? 분명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직접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인 느부갓네살을 다루시는데, 그래서 그를 넘어뜨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넘어뜨리고 나서 등장한 나라가 바로 ‘인자의 나라’ 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돌맹이는 어디서 날아왔는가?

물론 인자의 나라에서 왔는데, 그것이 인자의 나라에서 와서 발을 치니 그만 금신상이 자빠뜨려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금신상이 넘어진 자리에 인자의 나라가 자기 성도와 함께 영원히 번영하는데, 바로 그것이 다니엘서 2장부터 예언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 70년이 지나면 돌아오리라 ??

우리가 그렇게 본다고 하면, 여기서 다시 해석을 해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별 볼이 없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직 그것도 모르고 예레미야에게 약속한, 즉 “70년이 지나면 돌아오리라” 라는 것에 대해서, 즉 그렇게 해서 자기 나라에 돌아와서 다시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해석하는고 하니, 자기들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가서 성전을 짓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문자적으로 해석하니 그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소위 신학교 교수들이 주장하는, 그런 역사적이고 문법적인 것으로 말이다.

◈ 70년이 아닌, 70이레 !!

그렇게 해서 그들은 70년 동안 기다렸는데, 그래서 다니엘도 70년이 지나면 자기도 돌아간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천사가 와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70년이 아니라 70이레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레’ 라는 것은 7년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천사가 다니엘에게 계시를 이야기하는 것이 9장에 나오는데, 그런데 그 이전에 2장이나 3장에 보면, 이 7년이라는 것이 어디에 해당되는 시간인고 하니, 느부갓네살이 짐승으로 있는 기간이 7때, 즉 7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느부갓네살이란 왕을 짐승이 되게 했는가?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그렇다면 인간을 7년 동안 짐승이 되게 하는 일을 하시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니, 그것을 묵시라고 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가 아니니 말이다.

◈ 느부갓네살을 7년 동안 짐승으로 !!

다시 말해서, 묵시적 존재가 되시는 인자라는 분이 느부갓네살을 7년 동안 짐승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런데 7년은 뭐라고 했는가? 그것이 곧 ‘이레’ 라는 것인데, 그러니 앞으로 ‘이레’ 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그것은 모조리 하나님께서 주체로서 직접 나서서 이 세상을 끝장내는 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도 모르고서 이스라엘은 뭐라고 하는가? “아, 70년!” 라고 하면서, 그것을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레가 아닌 70년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이제 70년이 지나면 우리는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성전을 다시 지어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다니엘도 처음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다니엘은 이 이레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제가 서울에서 주장을 했는데, 그런데 논평을 한 교수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것을 두고 ‘추측’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평이 아닌 일종의 비난인데 말이다.

◈ 먼저 이 ‘70’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건 그렇고, 이렇게 70년이 아니라 70이레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이레가 주체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 다음부터는, 이것이 중요한데 말이다. 먼저 이 ‘70’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이것이 논리적으로 어려운데 말이다.

예레미야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70년만에 돌아간다” 라는 것인데, 즉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죄로 인해서 망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서, 그래서 70년 동안 교도소에서 복역을 마치고 나오면, 즉 70년이 지나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그런 기간이 70년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70이레는 왜 등장하는가? 이 70이레는 ‘7이레+62이레1+이레’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 이레에 보면 무엇인고 하니, ‘영원한 속죄’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 70년이 뭐라고 말했는가? 하나님께서 70년 동안 복역을 하면 영원히 죄를 속죄해주겠다고 하는 것이 곧 70년인데, 그런데 정작 주께서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 70년이 아니라 70이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용서는 해주겠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식으로 역사적으로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땅, 즉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용서가 되려고 하면, 지금 현재 짐승을 이레로 만든 그 주체가 직접 메시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7이레+62이레1+이레’ 라고 한다는 말이다. 

◈ ‘7이레’는 성전을 짓게 하는 기간 !!

그렇다면 여기서 왜 ‘7이레’ 인고 하니, 이 7이레는 성전을 짓게 하는 기간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이 제일 어렵지 싶은데, 지금 하나님께서 이렇게 바다에서 온 짐승을 만들었는데, 즉 느부갓네살은 이제 짐승이라는 말이다. 그건 그렇게 보면 되는데, 그러면 이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은 어떠해야만 하는지, 그것을 이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기 죄를 알아야만 하나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알게 되는데, 그렇다면 70년은 무슨 기간인가? “왜 우리가 포로로 잡혀왔어야 했는가?” 라고, 즉 자기들의 죄를 아는 기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직접 성전을 짓게 하신다는 것이다.

◈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부서져야만 !!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자기들이 직접 지은 성전, 즉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이 ‘와장창’ 부서짐으로 말미암아서, “아하, 우리들이 지은 성전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부서져야만 하는구나” 라는 것을, 그것을 깨닫게 하는 기간을 이 70이레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죄가 무엇이지 드러나는데, 즉 “주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는 계시지 않는구나” 라고 말이다.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많이 들어본 내용이라고 느낄 것인데,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 나온다는 것이다. 

(행 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 바사와 헬라 나라의 등장으로 !!

그러니 일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자기들의 손으로 한번 지어본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7이레’ 인데, 그런데 그 다음의 ‘62이레’가 끝나고 나서 나중 ‘1이레’가 될 때, 그것이 와장창 다 깨어진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짓게 하고 또 깨는 것을 위해서 짐승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짐승의 나라인 ‘바사+헬라’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다니엘서에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은 이 바사 나라 덕분에 성전을 다시 짓게 되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즉 묵시적으로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 덕분에 성전을 짓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다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바사 나라 덕분에 성전이 지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성전이 헬라 나라에서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스라엘을 두고서 서로 남북으로 톨레미와 셀루크스 왕조가 있었는데, 이들이 서로 싸움을 하다가 보니, 그 중간에 있는 성전이 그만 박살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무려 8차례나 그렇게 진행되는데, 전쟁에 이겨서 기분이 좋다고 성전을 부수고, 또 전쟁에 패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부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성전이 다 깨어지고 마는데, 그것까지 다니엘서에 다 나와있다는 것이다.

다니엘이 왜 그것을 기억하는고 하니, 그래서 “봐라, 성전이 지어졌던 것이 깨어졌는데, 이제야 그것을 알겠는가? 하나님은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에 있지 않는다. 그리고 성전이 있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고방식도 잘못되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모든 것이 다 엉터리라는 것인데, 그런 것은 인간이 자기 구원에 집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니엘은 7이레 동안 성전을 다시 지을 때 자기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다. 왜 돌아갈 필요가 없는가? 모든 땅의 개념과 성전개념이 사람 손으로 짓지 않는 개념임을 알았기 때문에 말이다.

◈ 학개 성전은, 부수어지기 위한 성전 !!

그래서 B.C 516년에 하나님은 학개에게 성전을 짓게 하시는데, 일단 지어놓고 부수기 위해서 말이다. 아무튼 구약성경에 ‘학개’ 라는 것이 있는데, 목사들이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교인들에게 구라를 칠 때 써먹는 성경인데 말이다. 즉 “당신들 집은 잘 사는데, 교회당은 엉망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성전을 짓게 하는데, 그런데 학개서 다음에 나오는 스가랴서에 보면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전을 짓기는 짓는데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을 짓는다는 말이다.

(슥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 참 성전은 물이 흘러나와야 !!

그렇게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이 되면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자기 손으로 성전을 지어서 무슨 수로 거기에서 물이 나오도록 하겠는가? 어디, 건물 안에다 파이프를 묻어놓으면 되는가? 한일 자동펌프를 달아서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초막절이 되면 유대인들이 헤롯성전에다 물을 길어다 붓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7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에스겔에 나오는 새성전을 흉내내어 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의 논문을 평가하는 교수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여기서 왜 새성전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라고 하는데,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모르겠다고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새성전에서는 물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새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몸이 성전이고, 거기서 성령이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데 우리의 몸이 성전이 되려고 하면, 우리 안에 인자가 되시는 주님이 계셔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자체가 묵시적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성전을 다 지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그만 다 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깨어지는 것이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그것이 곧 ‘1이레’ 인데, 즉 진짜로 물이 나오는 성전, 즉 성령이 나오는 새로운 성전,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짓는 성전으로서, 바로 그분이 ‘1이레’에 이 땅에 등장하신다는 것이다.

◈ 계시가 없었던 중간시대에 !!

그렇게 해서 그분이 나타나게 되면,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인고 하니, 구약성경의 제일 마지막에 ‘말라기’ 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B.C 414년(?) 정도인데, 그리고 그때부터 해서 세례요한의 때까지, 그것을 B.C 7년(?) 정도로 본다면, 그 사이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분명히 계시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시가 없었는데, 그런데 사람들의 느낌은 무엇인고 하니까, 계시가 없다고 해서 사람들마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역사적 주체를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역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즉 계시는 없는데, 자기들이 구원을 받은 티는 내야하고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조작을 하는데, 어떻게 조작을 하는고 하니, 다니엘서에 나오는 70이레를 가지고 계시를 만들어서, “우리가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라고, 그렇게 조작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지금 비록 성전은 없지만 말씀대로 살게 되면 주께서 오셔서 성전을 짓는다” 라고 하는, 그렇게 주장하는 소위 ‘신구약 중간시대’ 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중간시대에 형성된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는 것이다. 

◈ 짐승에게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

그런데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만나고 난 뒤에 그들을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너거들 애비는 마귀다” 라고 하셨는데,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그들이 마귀새끼라고 하면 도대체 그 마귀새끼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바로 느부갓네살의 짐승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짐승에게 학대를 받으면서, 짐승에게 매를 맞으면서 그 짐승을 닮아버렸다는 것이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 아니, 교회가 짐승이라고 ??

저는 그것을 두고서 ‘각질’ 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발뒤꿈치에 있는 그 각질 말이다. 하나를 벗기면 또 나오는데, 그런데 그것을 벗기면 또 나오고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같은 짐승의 노선인데, 그것이 과거에는 이방인이 짐승이었다고 하면,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근접해서 만났던 ‘유대인들’ 이라고 하는 신앙공동체의 새로운 형태의 최고의 짐승이라는 것이다. 가장 성스러워 보이고 거룩해 보이는 공동체, 그것을 저는 오늘날 ‘교회’ 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교회가 왜 짐승인가? 모르겠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면 왜 교회가 짐승인고 하니,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한번 해석해보자는 것이다. 즉 계시가 없는 상태에서 짐승이 되려고 하면, 도대체 이 짐승의 역사적인 해석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그것은 바로 70이레에 대해서 자기 중심의 해석, 즉 역사적 해석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짐승의 이론이 되었다는 말이다.

◈ ‘1이레’는 모든 시대에 다 적용되어야 !!

하지만 이런 짐승의 이론이 생겨져야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매를 맞는데, 즉 십자가가 형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십자가에게 있어서, 즉 70이레의 1이레가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는데,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이룬 십자가가 다니엘 시대만 적용이 되겠는가? 아니면 그 이전에도 다 적용이 되겠는가?

모든 시대에 다 적용이 되면서, 바로 느부갓네살을 짐승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이레’, 원래 이 이레는 시간단위인데, 즉 천지를 창조하신 말이다. 우리가 바이올린을 보면 현이 있는데, 그것을 양손가락으로 집어야만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즉 소리라는 질서가 생긴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 안식일에 마디를 집어버리시는데, 그러면 그 안식일은 밑에 있어도 위로 올라가면서 그만 완성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안식일이 완성이 되어버리면, 그 밑에서는 그렇게 안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게 되는데, 즉 “왜 하나님의 창조에 어긋났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에게는 심판하고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권한이 있기 때문에, 그런 권한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완성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런 권한을 창세기부터 모두 다 적용을 시켜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 7이레의 인간이 1이레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 !!

그런 입장에서 보면, 이 7이레는 인간의 손으로 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이 7이레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커버가 되고, 그 이후에 나오는 1이레도 주님의 묵시적 해석에 의해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커버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62이레는 무엇인고 하니, 7이레와 1이레라고 하는 그 둘 사이의 간격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7이레는 1이레를 지향한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을 시간으로 보지 말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7이레’ 라는 것의 주체는 인간이고, 즉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이고, 그리고 ‘1이레’ 라는 것의 주체는 예수님인데, 그래서 우리 인간은 죄를 지은 상태에서 누구를 바라보고 믿어야만 하는고 하니, 1이레가 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70이레 해석의 전부인데, 곧 이것이 비역사적 해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 대해서 그들은 시비를 걸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오늘날 눈에 보이는 교회는 반드시 인간을 짐승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해야만 한다는 말입니까?

* 답변 - 물론 감당을 해야만 하는데, 그래서 7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7교회가 항상 변동이 일어나는데, 물론 7교회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7교회답지 못하면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렇다면 그렇게 짐승화가 되는 교회 속에서, 주님께서 다루시는 7교회는 인간에게 포착이 되지 않으면서 자꾸만 빠져나가는 방식으로,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 답변 - 물론 그러한데, 아무튼 저의 글에 대해서 반박이 되지 않으니까 논문형식이 어떻고 하면서 시비를 거는데, 즉 자기들이 모르는 소리를 왜 하느냐는 것이다. 

 

                                                                 2010,03,11 오후 5시에 마침.

                          이 도둑놈아, 남의 오토바이는 왜 가져가냐고? 그것도  녹취를 할 때 말이야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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