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05 피22강 성경의 시간관과 불가능한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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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405피p090불가능한사명

피 22강 성경의 시간관과 불가능한 행함 (불가능한 사명)

[10 대구강의 6] - [피 22] - 불가능한 사명
                                                                                
                                                          10,04,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완료와 미완료 !!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교재 90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여기에 보면 ‘시간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성경의 시간관은 무엇인고 하니까, 즉 성경자체가 시간을 둘로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 때는 약속을 미래의 약속으로, 그렇게 미래적으로 제시하는 반면에, 하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알파와 오메가’ 라고, 즉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처음이고 나중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칼바르트의 경우에도, 이것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리델보스와 같은 사람은 어떻게 주장했는고 하니까, 구약은 역사로 보고, 신약에 오면 마치 컨테이너 박스와 같은 것을 만들어서, 즉 창세기부터 십자가까지는 역사이고, 그리고 십자가에서부터 재림(파루시아)까지는, 그 밑에 역사가 있고 위에는 묵시의 내용이 있어서, 그렇게 역사와 묵시, 둘로 되어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 ALREADY NOT YET !!

다시 말해서, 십자가부터 재림 때까지는 ‘이미’ 종말에 들어섰는데, 하지만 ‘아직’ 종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미와 아직’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소위 ‘ALREADY NOT YET’ 라는 것인데, 즉 “이미 시행된 그것이 아직 다 이루지 않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직 다 이루지 않았다” 라는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고린도후서 1장에 나오는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라는 구절이고, 또 빌립보서 3장의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라는 구절이고, 그리고 에베소서 4장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라는 구절 등을 든다는 것이다.

(고후 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성경에 이렇게 미래적인 요소들이 남아있으니, 이러한 미래적 요소들을 여기에 가미를 해야 온전한 신학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이미’ 라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온전치 않은 반쪽 짜리라고 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만을 주장하면 안 되고, ‘아직’ 이라는 것을 집어넣어야만 제대로 된 신학이 된다고, 그렇게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예수님이 “이미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완료가 아니라, 그것은 미완료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미완료의 리델보스와 같은 개혁주의자의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목회를 하면서 어디에 관심을 두겠는가? 당연히 완료가 아니라, 미완료에 관심을 두게 된다는 것이다. ‘미완료’ 라는 것에다 말이다.

◈ 미완료에서 목회의 근거가 !!

왜 그런고 하니, 이렇게 미완료에서 완료로 들어가게 되면, 그 마지막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여기에 사람이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들어갈 것인지, 그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다. 즉 미완료에서 완료를 당기는데, 여기서 사람이 이 미완료를 가지고 완료를 스스로 만들어나게 되면, 드디어 목회의 근거가 마련이 된다는 것이다. 즉 목회자로서 교인들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말이다. 소위 ‘하라’ 라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완료에서 완료로 가는 것에 가담을 해버리면, 인간이 하는 것과 하나님이 하는 것 사이에 그만 경쟁이 발생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람이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지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 사람이 할 것인가? 하나님이 하실 것인가?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하실 것인가?” 라는 문제인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어떻게 보는고 하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라. 주께서 다 하신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신다고 본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닌데,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것을 일종의 ‘방종’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그냥 방치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니 교회가 엉망진창이 되어도 다 주께서 알아서 하시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놔두어도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교회의 꼬락서니가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교인들이 헌금도 하지 않고 봉사도 전혀 모르고 말이다. 주께서 모두 하신다고 주장을 하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되어버린다면, “사람이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하실 것인가?” 라는 것 자체에서 그만 경쟁이 생기게 되니까, 즉 하나님께서 모두 다 하신다고 해버리면, 그것은 인간은 전혀 개입을 하면 안 되니, 그렇게 되면 방금 말한 것처럼 그만 엉망이 되고 말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교회이든, 목회이든 말이다.

◈ 당신은 왜 아직 술을 끊지 않았지?

그러니 여기서 “인간이 한다” 라는 쪽에서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를 들어서, 두 사람이 이렇게 있는데, 한 사람은 술을 마시고 다른 한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는 말이 “너는 왜 아직 술을 끊지 않았어?” 라고 하면, 상대방이 하는 말이, “나둬라. 그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애주가 : 어, 취한다. 기분 좋다.
* 금주가 : 너는 왜 아직 술을 끊지 않았어?
* 애주가 : 왜,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잖아.
* 금주가 : 하나님이 다 하신다고?
* 애주가 :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데, 그런데 너는 왜 니가 술을 끊었지?
* 금주가 : 내 의지로 끊은 것이 아니고, 니 말대로 하나님이 하셔서 끊었지.
* 애주가 : 그런가?
* 금주가 : 아닌가?

이렇게 되어버리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하시는데, 그런데 결과가 그만 상반되게 나온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술을 끊고, 다른 사람은 끊지 않은 말이다. 그러면 과연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만히 두어라.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 라고 하게 되면, 이것은 둘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는 좋은데,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이들이 무슨 짓을 해도, 즉 “하나님이 하신다” 라는 말만 집어넣게 되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개혁주의 - 사람을 통해서 !!

여기에 대해서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이러한 논리적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이 개입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개입을 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 라고 해놓고, 그 밑에 뭔가를 하나 더 깔게 되는데, 즉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혹은 ‘사람 안에서(?)’ 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데, 그들은 칼빈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실 때,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지시만 하고 그만 빠진다는 말이다. 명령만 내리고 말이다.

왜 그렇게 주장하는고 하니, 만약에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해버리면, 그것은 조금 전의 경우와 똑같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술을 끊은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전부가 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되니,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반박할 여지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일단 하나님은 지시만 하고 손을 떼야 되는데, 그리고 그 나머지 모든 일을 다 사람이 알아서 하는 것으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다수가 곧 하나님의 일 ??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알아서 하면, 문제는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중에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것을 어떻게 뽑아내는고 하면, 사람들이 하는 일들 중에서 공통적인 것을 골라낸다는 것이다. 서로가 공감을 하고 동의가 되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따로 뽑아 내는데, 그러면 그것이 당연히 다수의 의견을 차지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반면에 그것이 소수가 되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악마의 일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교회에서 한 달에 한번씩 하는 ‘제직회’ 라는 말이다.

◈ ‘다수결’과 ‘전통’과 ‘힘’ !!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성찬식을 꼭 목사가 거행해야 됩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전통’ 이라는 것은 다수가 다수를 만들어나갈 때 생기는 것인데, 그런데 이러한 다수의 뜻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 다음에 다수로서 밀어 부치게 되면, 그것을 전통이라는 말로 하면서, 여기에는 ‘힘’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힘이 말이다.

그러면 그 다음의 다수는 앞에 있는 다수, 즉 전통을 받아들임으로서, 그렇게 되면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누가 우세한지, 즉 현재 이 교회조직에서 어느 파가 힘이 센지, 그것을 믿게 된다는 말이다. 즉 힘이 센 파가 해왔던 관례를 ‘전통’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수한 전통 말이다.

그러니 처음에 그런 전통을 만들 때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게 되는데, 물론 여기는 반드시 기적을 집어넣게 되는데, 즉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적인 역사로 이런 짜임새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짜임새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기적이 힘이 되어서 거기에 담겨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 ‘전통’이란 껍데기 !!

그러므로 전통이란 그 형태만, 즉 껍데기만 가지고 오게 되면, 그런 하나님의 은혜 덩어리를 그대로 그 다음 세대도 이어받게 되니까, 자동적으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 흘러 넘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이게 이번 주 토요일 경주에서 할 강의내용인데, 벌써 다 누설이 되고 말았는데 말이다(ㅋㅋ).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함에는 반드시 그 형식을 가지고 오는데, 즉 인간이 행동을 하면서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짜임새를 만들어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짜임새를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힘을 가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의 행함이라는 것은, 움직이는 동사에다 힘을 가해서, “이것은 나만의 전통, 즉 내가 받은 기적의 증거이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해서 잡아버리면, 그것이 곧 ‘행함’ 이라고 하는 일종의 형식이 되어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참 어려운데, 사실은 우리 몸의 세포가 움직이면 그것도 일종의 행함인데, 즉 숨을 쉬는 것도, 코를 푸는 것도 다 행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행함이라고 하지 않는데, 하지만 코를 풀면서 고아원을 한 달에 한번이라도 방문을 하면, 그렇게 한 달에 한번 고아원을 방문하는 형식을 갖추게 되면, 그것이 행함이 된다는 말이다. 그때 숨쉬고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은 행함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인간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없어 !!

그러므로 여러 가지 움직임 가운데서 “저것은 행함에 속하고, 이것은 행함에서 누락을 시킨다” 라고 하는 것을, 그런 것을 누가 하는가? 바로 본인이 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있을 수가 없는데, 즉 행함은 일종의 결과이고 그 결과를 추적해보면, 그 원인이 인간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말이다. 바로 그것을 인간의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행함이 없는 믿음은 결코 없는데, 하지만 야고보서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믿음이 없는 행함이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행함과,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야고보서의 행함과 믿음을 이야기하려면 그것부터 먼저 시작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 ‘집단’은 어디에 쓰는 물건?

제가 지금 ‘미완료’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렇게 미완료에서 완료로 갈 때, 거기에 인간을 집어넣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미완료가 무엇이고, 완료가 무엇인지, 그것을 누가 결정하는고 하니까, 미완료를 완료로 끄집어당기는 사람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미완료나 완료라는 것을 각 사람마다 다 각자 본인이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게 되는데, 그런데 자기가 결정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맞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고 하니까, 그것은 자기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의견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이 ‘집단’ 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고 하니, 집단은 개인이 행동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모를 때는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집단의 힘을 빌려서, 즉 자기는 어느 특정 집단에 속했다는 이유 때문에, 즉 어떤 특정 집단의 전통과 역사 속에 있기 때문에 안심을 한다는 것이다. 즉 이단이 아닌 정통적인 조직에 속했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 영혼은 구원받을 소지가 크다는 식으로, 그렇게 형식화시키는 작업을 한다는 말이다. 

◈ 왜 아직도 루터이고 칼빈인가?

결국 개혁주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 시대가 2010년인데, 여러분 몰랐지요? 아무튼 지금 2010년이나 되었는데, 그런데 아직도 16세기의 루터와 칼빈을 들먹인다는 것은, 아직도 그런 세력이 이 세상에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또한 힘이 있다고 하는 것은, 거기에서 나온 신학적인 전통에 대해서 누구나 동의를 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카톨릭인데, 그런데 무슨 종교개혁을 했다고 하면서 난리를 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다 하나님을 집어넣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미완료에서 완료로 가는데 있어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해놓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오류가 발생되기 때문에, 그러니 거기에 하나님을 넣지 말고, 성경에서 ‘아직’ 이라는 것이 남아있으니, 하나님은 그냥 명령만 하시고, 거기에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집어넣어서 한번 해보자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즉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구원이 남아있다든지, 혹은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묵시와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역사를, 강의 처음에 말한 컨테이너 박스가 어떻고 하는 것은, 리델보스나 게르할더스 보스 등이 주장했는데, 총신에 가면 다 배우는데 말이다.

◈ 주님께서, ‘이미’ 다 이루었기에 !!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은데,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오해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구약에 있는 역사마저도 신약에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역사라는 것도 전부 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다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신약의 십자가만 그렇게 이룬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주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점을 칼바르트가 상당히 모호하게 언급을 했는데, 즉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럴 것이라고 하는 수준에서 말이다. 아무튼 이런 점이 참 어려운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인데, 즉 신약 때부터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 때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다가 신약에서 나왔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단 첫째로 “성경은 성경대로 풀자” 라고 했을 때, 여러분이 그것은 인정을 하지요? 그러면 둘째로 “신약성경에는 무엇이 나오는가?” 라고 했을 때에,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것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말씀을 구약에는 적용을 시키지 말고, 신약에만 하나님의 묵시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 성경말씀을 분해하는 인간들 !!

그렇다면 방금 제가 한 말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이러한 점을 알아차리면 참 좋겠는데, 일단 성경대로 하자고 해놓고, 둘째로 성경에 의하면, 구약에는 미래를 내다보는 역사가 있는데, 신약에 오면 역사는 끊어지는데, 왜냐하면 알파와 오메가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묵시를 신약의 시작부터 마지막 재림 때까지로 보자고 하는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성경대로가 아니냐는 말이다.

여러분 가운에서 이러한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할 사람이 없나요? 지금 뜰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 말이다.(ㅋㅋ), 이들이 무엇을 하나 빠트린 점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역사와 묵시를 가늠하는, 즉 역사와 묵시를 구분하겠다고 하는 인간자체가 성경내용을 분해하고 분석하는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 오히려, 성경말씀이 인간을 덮쳐야 !!

다시 말해서, 성경은 우리 인간의 분석대상이 전혀 아닌데, 오히려 성경이 우리를 덮쳐야만 한다는 말이다. 즉 신약성경이 구약을 보고 역사라고 여기는 그러한 인식을 완전히 덮쳐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칼바르트의 주장이 맞다는 것이다. 즉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가 전부가 다 이미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 칠판 뒤에 숨은 놈, 튀어나와 !!

그런데 신학자와 같은 인간들은 소위 성경말씀을 풀겠다고 하면, 비겁하게도 자기 자신은 뒤로 그만 빼돌리고, 즉 칠판 뒤에 숨는다는 것이다. 제가 뒤에 숨어보겠는데, 이렇게 하면 제가 안 보이지요? 그렇게 숨어서 남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데, 그러면서 “이것은 맞지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영한 교수와 같은 양반의 주장이 먹혀든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저는 지금도 성경말씀이 살아있다고 보는데, 그런데 이 양반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성경은 문자로서 그대로 있는데, 거기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빼내어서 문법적으로 가르치면, 그제야 비로소 성경말씀으로서 효과를 본다고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차이점인데, 신학자들은 왜 그런 주장을 하는고 하니, 그렇게 가르치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자기들의 위치가 보장이 되지 말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어이, 칠판 뒤에 숨어있는 놈, 어서 이리 나와! 너도 빨리 나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두 다 불러내는데, 그렇게 되면 뒤에 숨어서 말씀을 가르치겠다고 하는 인간들은 졸지에 죄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죄가 된다는 말이다.

◈ 어제 오후 설교시간에 !!

어제 오후설교를 하고 나서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굉장히 어려운 내용을 설교했다 싶었는데, 무슨 말을 했는고 하니, 즉 “몸에서 병이 나는 것이 아니라, 병이 몸에서 발현된다” 라고 했고, 그리고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가 인간의 몸을 만든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어려운 것은 무엇인고 하니, 다윗의 딸인 ‘다말’ 이라는 처녀는 ‘암논’ 이라는 배다른 오빠가 자기를 겁탈하기 이전까지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즉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상태 같은데,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는 선과 악을 알게 되는, 즉 다말은 사랑과 미움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를 통해서 사랑과 미움을 알고 난 뒤에는, 그것이 사랑과 미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랑과 미움은 결국 인간의 “죽느냐? 사느냐?” 라는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라는 지식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진무구한 인간이 성경을 알게 되면, 그 순간부터 “야, 나는 죽으면 지옥에 가겠다. 혹은 천국에 가겠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느냐? 사느냐?” 라는 문제로 다가오게 된다는 말이다.

◈ 성경말씀은 훌륭한 교양서적 ??

그러니 성경말씀 자체가 우리를 덮치지 않으면, 우리에게 성경은 그냥 하나의 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여러 가지 교양서적 가운데서 하나의 훌륭한 참고도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기 생명이 걸린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누가 책에서 목숨을 걸겠느냐는 것이다. 필요하면 더 사면 되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녀도, 말씀의 능력을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은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말씀의 구조 속에 들어가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 말씀의 구조 안에 있어야 !!

이번에 제가 ‘잠언 안의 그리스도’ 라는 책을 다시 쓰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인간이 말씀구조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데 말씀 구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구조 속에 있으면서 말씀을 분석하고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즉 말씀과는 적당한 거리를 자꾸 두면서 자꾸만 분석을 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창세기는 어떻고, 출애굽기는 어떻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의 구조 속에 들어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즉 살아있는 말씀이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깨부수어버린 사람은, 성경을 1독하고, 2독하고, 3독을 하는,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구절의 말씀 속에 모든 성경말씀이 다 들어있으니 말이다. 마치 깔때기처럼 해서, 거기에 모두 다 쏟아져 있다는 것이다.

국민일보에 보면 하루에 성경을 일독한다고 자랑하는 놈들이 있는데, 여호와의 증인들도 성경을 달달 외우고 말이다. 하지만 말씀자체의 구조 속에 들어가 버리면, 우리 몸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즉 우리 몸이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말씀이 우리 몸을 말씀성취에 이용을 한다는 것이다.

◈ 구약의 등장인물은 ‘바비인형’ !!

제가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구약성경을 보자는 말인데, 신약은 그렇게 본다는 사람들이 그래도 좀 있는데, 그러면 구약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것이다. 즉 구약을 지금까지 본 것처럼 역사로 보지 말고, 구약에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지금 신약의 이 시대에서 우리가 말씀에 당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자체가 만들어낸 하나의 ‘바비인형’ 이라고 보자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예레미야가 이해되고, 이사야가 이해되고, 에스겔이 이해가 되는데, 물론 모세도 이해가 되고 말이다. 그런데 모세와 함께 광야에 갔던 사람들은, 모세와 하나님이 같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꾸 모세에게 따진다는 것이다. 즉 “모세야, 물이 없다. 빵이 없다. 그래도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모세에게만 닦달을 내는데, 하지만 모세는 자기가 지팡이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팡이가 모세를 데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밑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리 보아도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다는 것이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인데, 하지만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끄집어낼 때부터 모세 본인은 아는데, 지팡이가 자기를 쥐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지팡이가 떨면 자기도 같이 떨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주도권이 자기에게 없다는 말이다.

◈ ‘폰 라드’가 복음을 알았다면 !!

그런데 이러한 것을, 외부인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공통점을 찾고 전통을 만들어서, 그렇게 쑥덕쑥덕 한다고 해서, 즉 “여기에 동의하시면 ‘예’ 하시오”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어떻게 계시가 만들어지느냐는 것이다. ‘폰 라드’ 라는 유명한 구약학자는 주장하기를, 모든 구약의 계시는 그 당시의 공동체가 다수의 의견에 동의해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는데,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고, 신학자의 한계라고 할 수가 있는데, 만약에 폰 라드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런 신학자 노릇을 하지 않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시시해서, 즉 그런 장난감은 유치해서 가지고 놀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을 하겠는가?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하면서 복음을 들고 개척교회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개척교회를 한다고 해서 다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 외국으로 도망간 인간들이 !!

그러니 신학교 교수나 학자노릇을 하겠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말씀을 모르니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이미’ 나오는데 말이다(ㅋㅋ). 개척교회를 하기 싫어서 외국으로 도망을 치고는, 그리고는 뭐라고 하는가? 박사학위를 하나 달랑 받아와서는, 그것도 좀 안다고 자랑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신학교에다 취직을 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신학교에는 이미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힘에 굴복을 당해야 취직이 되는데, 사실 그 힘은 예수님도 감당하지 못한 힘인데(?), 그러니 그 앞에서 벌벌 떤다는 것이다. 선수들끼리는 다 아는 사실인데, 사실 너무나도 뻔한 스토리이고 말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사명’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 앞에 무엇이 붙는고 하니, ‘불가능’ 이라는 말이 붙는데, 즉 ‘불가능한 사명’ 이라는 말이다. 영화제목도 이와 똑같은 게 있는데, “미션 임파스블” 이라고, 물론 제목만 ‘임파스블’이고,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실제로도 가능했고 말이다.

◈ 성도는, 사명이 덮쳐진 자 !!

그것이 고린도후서에 보면 나오는데(?), 바로 이런 사명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이미 다 끝났다” 라고 하는 현실을 증거하는 사명이 말이다. 아직도 그것이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굳이 ‘아직’ 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아직’ 이라는 말이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것은 사도나 목사에게 뿐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다 해당이 되는데, 즉 성도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성도가 아닌데, 사명이 덮친 사람이 곧 성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나 죽으니 주의 것이다” 라고 했는데 말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라는 말씀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롬 14:8, 개역)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왜 불가능한 사명인가?

바로 이러한 불가능한 사명이, 그것이 왜 불가능한 사명이 되어야 하는고 하니까, 그럴 때만 이것이 완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한 사명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아까 말한 미완료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목사가 간섭을 하지 않으면, 교회가 안 돼”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목사가 따로 있고 교인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다 동일하게 완료된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가 해야될 일이 따로 있고, 또 교인들이 해야될 일이 따로 있더라도 말이다. 비로 일이 다르다 하더라도 완료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는 교인들을 어떻게 보는고 하니, 그들은 미완료이기 때문에, 물론 자기도 완료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들보다는 더 완료에 가까우니, 목사인 자기가 저들을 완료 쪽으로 끌어당겨 주어야만, 그것이 곧 목자의 할 일을 다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교회는 여전히 미완료로 남게 된다는 말이다.
 
◈ 오잉, 미완료적 성전개념 ??

신약의 성전개념은 완료개념인데, 그런데 구약은 미완료적 성전개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미완료적 성전개념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완료된 사명, 즉 불가능한 사명과 가능한 사명 틈 사이에서 계속해서 완료가 자꾸만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방금 제가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 솔로몬 성전과 다윗가문, 그 틈에서 !!

일전에 권사님들에게 ‘70이레’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성전이 있다고 하면 진짜 성전은 감추어져 있는데, 물론 눈에 보이는 성전은 다윗이 먼저 제안을 해서 솔로몬이 지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제시한 ‘다윗가문’ 이라는 성전이 있는데, 바로 양쪽의 성전의 틈바구니에서 계속해서 뭔가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쪽이 다 깨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즉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다윗가문이 성전이라고 하니, 또 인간들이 어떻게 하는고 하니, 다윗가문을 조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불가능한 사명을 자꾸만 가능한 사명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이 찢어지면서 그 사이에는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불가능한 사명이 나오고, 그런 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자식을 통해서 예언하게 되는 ‘임마누엘’ 이라는 것이다.

◈ 신약성경은, 완료와 미완료의 싸움터 !!

다시 말해서, 불가능한 사명 속에는 완료가 들어있지만, 인간들이 자기들이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는 가능한 사명이 되면, 거기에서는 미완료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완료와 미완료가 계속해서 싸우는 현장을 신약성경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이러한 것에 무지하게 때문에, 신약성경을 두고 ‘이미와 아직’ 이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완료와 미완료가 같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결과적으로 미완료라는 소리인데, 그러니 그렇게 완료와 미완료를 보는 시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말이 좋아서 미완료이지, 그런 주장을 하게 되면 이단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다 이루심을 믿지 않는 것이 말이다. 물론 완료가 있기 때문에 이단이 계속해서 발생되는데, 그러니 이단이 발생하는 형태는, 항상 모든 것을 먼저 역사적인 토대를 가지고 나서, 그 여분에, 즉 나머지 공백을 묵시로 채운다는 것이다.

◈ 꿈은, 보상차원에서 !!

여기서 꿈 이야기를 잠시 해보면, 이러한 것은 상식적으로도 알아놓으면 좋은데 말이다. 꿈의 해석은 바로 ‘보상’ 인데, 즉 꿈은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의식의 세계에서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 보상차원에서 주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상하는 이유는 심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항상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꿈은 놀랍게도 예고의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꾸 미친 듯이 산에 가는 사람은, 어떤 꿈을 꾸게 되는고 하니, 산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평소에 산에 가더라도 조심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인간 자체 내에 그런 기능이 있다는 말이다.

◈ 교회는 마귀가 만든다 ??

그러니 신기하게도 우리 인간의 몸은 누가 보호해주는고 하니, 마귀가 보호해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아직도 인간의 몸을 더 써먹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이 너무 설치고 까불지 않도록 인간의 몸을 보호해준다는 말이다.

여러분이 믿을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교회는 마귀가 만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균형이 있게,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도록 잘 만든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다 무엇인고 하니, 즉 “내가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가능성이 여기서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몸이 두 개인데, 하나의 예수님의 몸이고, 물론 그 몸은 부활하셔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자기 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몸은 항상 몸을 주인공으로 삼기 때문에, 계속해서 몸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해석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불가능하다고 하면, 몸이 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만 자기 자신이 소외가 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말은 불가능하다고 할지 몰라도, 아무리 불가능한 사명이라고 해도, 그것을 왜곡을 시키든지 어떻게 하든지 해서 가능한 사명으로 해석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 성경전체는 불가능한 사명, 완료 !!

하지만 성경전체는 불가능한 사명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즉 전부가 다 완료차원인데, 다른 말로 하면 묵시차원이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성경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나도 저것은 할 수 있겠다” 라고, 그렇게 전부를 가능한 차원에서 해주어야만, 이 ‘나’ 라고 하는 가치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여기 틈에서, 하나님께서 불가능성을, 즉 기적과 같은 것을 통해서 이쪽을 치게 되면, 그렇게 치는 새로운 사건으로 인해서 인간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 여기의 ‘나’ 라는 가능성에서 이쪽, 즉 새롭게 친 쪽으로 옮겨 타게 되는데, 하지만 그렇게 새롭게 옮겨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옮겨도 그것도 역시 ‘나’만의 딱딱한 전통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인간, 굳히기, 행함 !!

그러니까 움직이고 있는 말씀을, 즉 말씀이 일방적으로 움직여서 우리를 치게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 움직이는 말씀을 자꾸만 잡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잡아서 전부를 다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즉 “야, 이건 이렇게 써먹어야지. 저건 저렇게 써먹어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잡아서 전부를 자기에게로 다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종의 ‘굳히기’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동사를 명사로 만든다는 것이다. 즉 성경말씀을 자기를 구원하는 정보, 밑천, 혹은 개념으로 만드는데, 바로 그것이 형식화가 되어서, 그것을 곧 ‘행함’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행함이라는 것이다.

◈ 야고보서 - 우발적 행함 !!

그러므로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함’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우발적으로 발생시킨 사건에서 나오는 우발적 행함인데, 하지만 인간들은 이 야고보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 행함을 당연히 자기의 구원용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언제 거짓말을 하려고 연습을 한 적이 있었는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인 이삭을 불 때마다 “저놈을 언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지?” 라고 했느냐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사건은 하나님이 발생시킨, 그야말로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 모든 것은 무엇인고 하니, 말씀이 이 땅에 오게 되면, 그것이 곧 불가능한 사명으로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공로와 영광과 주체는 당연히 어디로 향하는고 하니, 오직 말씀의 몫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불가능이 아니라, 이미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놓아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남에게 줄 것도 없고 전부를 다 자기가 한 것으로, 즉 행함으로 전환을 시켜버린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일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고 말이다.

◈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관’ !!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보겠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물론 기존의 역사 속에는 “인간들이 이러 이러해서 가능했다”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무엇 무엇을 한다” 라고 하면서, 항상 ‘나’ 라는 것을 주어로 집어넣는데, 그리고 술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채워서, ‘나’로 하여금 역사적인 존재로 계속 굳히려는, 즉 그렇게 형식화를 시키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는데, 그래서 말씀이 오게 되면, 말씀성취는 오직 주님께서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주께서 나에게 발생시켰다” 라고, 그래서 이 ‘나’ 라는 것이 주어가 아니고 간접 목적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나에게’ 라고 말이다.

◈ 성도는, 주님의 말씀을 담는 수레 !!

그러니 성도는 주님의 말씀을 담고 가는 일종의 수레가 되는데, 하지만 이 수레는 늘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거기에 합당한 수레가 따라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빨간 말씀이 오면 빨간 수레, 파란 말씀이 오면 파란 수레, 그렇게 짝이 맞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말씀을 담는 수레라고 하면, 그때 그때마다 달라져야 하는데, 그러니 한번 정해진 전통이나 제도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법에 얽매이는 것인데, 물론 마귀에게 당하는 것이고 말이다.

◈ 주님이 가신 좁은 길에는 법이 없어 !!

어제 오후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주님이 걸어가신 좁은 길에는 법이 없다” 라고 했는데, 즉 법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그렇게 법이 사라지니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너무 너무 좋은데,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너무나 황당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자기를 지탱해주던 것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니, 법도 없이 무엇을 하라는 말입니까?” 라고 하는데, 즉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 그런 것을 이야기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법이 없으니, 자기는 그만 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할 것이 없으면 거기에서 두 종류의 수레가 생기는데, 즉 주님의 말씀을 담는 수레는, 자기가 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알아서 설치는 것이 아니라, 위쪽에서 그냥 채워주시는 대로만 하게 되는데, 즉 옷을 담으면 옷수레가 되고, 꽃을 담으면 꽃수레가 되고, 또한 똥을 담으면 똥수레가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위에서 담아주는 사명감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그냥 빈 수레만 끌고 간다는 것이다. 소위 그것을 ‘방종’ 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욕구대로, 즉 자기가 꼴리는 대로 말이다.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하고, 또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즉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했다면서,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 빈 수레가 요란하다 ??

속담에 “빈 수레가 요란하다” 라는 말이 있는데, 가끔은 속담도 맞는 것이 있는데 말이다(ㅋㅋ) 그런 사람에게 사명을 보여달라고 하면,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까, “나는 자유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게 무슨 볼 것이 있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복음을 담은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자기 수레에 복음을 담아서, “어제는 복음이 저를 이렇게 때렸습니다. 저를 낮추기 위해서 말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뭔가 말씀이 다가와서 날마다 자기를 개조시키고, 새롭게 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그저 빈 수레만 끌고 다니면서 매일같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그렇게 덜커덩거리는 소리만 요란스럽게 낸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법정에 가는 것이 휠씬 더 낫는데, 아니면 법정스님에게 가든지 말이다(ㅋㅋ).

◈ 서울 의존교회에서 !!

이것을 서울에 있는 의존교회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는데, 즉 개혁주의의 성화론에서는 인간이 예수님을 점점 더 닮아간다고 하는데, 마치 씨앗이 자라서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그렇게 열매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점점 닮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여기에서 미완료가 남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라서 계속 반복해서 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쁜 것은, 이런 미완료에서 완료로 갈 때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이것이 미완료이며, 저것은 완료이다” 라고, 그렇게 누가 결정하는고 하니까,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가 너무나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위험해 보이니, 즉 “이것이 미완료이며, 저것은 완료이다” 라고 하는 것이 말이다. 그때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다수의 의견을 따르게 되는데, 그 다수가 모인 집단이 정통적인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정통 진리가 있을 확률이 높다고 본다는 것이다. 

◈ 순복음은 이제 이단이 아니야 ??

순복음 교단이 처음 나왔을 때는 다들 이단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역사가 오래되니 뭐라고 하는가? 그만 정통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숫자가 많으니, 즉 다수가 모이게 되니 그만 정통이 되고 말이다.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국민일보라는 신문까지 찍어내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순복음’ 이라는 것이 ‘순 엉터리 복음’의 준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ㅋㅋ).

그것은 구원파인 박옥수 집단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처음에 얼마 모이지 않을 때는 이단 소리를 많이 듣다가, 그런데 세력이 점점 커지니까 요즘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구원파를 새롭게 평가하자” 라는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근호 목사의 ‘십자가 마을’은?)

아무튼 완료와 미완료를 이렇게 정하게 되는데, 일반 사회학이나 철학에서 다들 그렇게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사회학이나 철학에 의해서?) 그러면 대법원의 판결은 어떠한가? 역시 그것도 다수결인데, 왜 다수결인고 하니, 개인의 경우에는 위험하지만, 그러나 다수의 의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하느냐는 말이다. 

◈ 하지만, 예수님도 다수결로 처형을 !!

예수님은 어떻게 처형을 당했는가? 십자가 형벌은 어느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분명히 다수결이었다는 것이다. 즉 소수의 의견만 반영된 재판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빌라도가 “예수님인가? 바라바인가?” 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구를 선택했는가? 그들의 선택은,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처형하라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다. 내가 곧 진리이다” 라고 항의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그들의 가능성을 그대로 마치 스펀지처럼 자기 몸으로 빨아 당겨서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죄를 있는 그대로 모두 다 받아들여서, 그 모습 그대로 오늘날 우리가 나가는 앞길을 가로막고 서있다는 것이다. 즉 “지금 니가 하고 있는 짓거리가, 2000년 전에 그들이 나에게 한 짓과 똑같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아하, 죄가 나를 만들었군요 !!

그렇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아하, 죄가 나를 만들었군요”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주님, 제가 이런 죄를 지었고, 저런 죄를 지었습니다. 간음을 했고, 또 살인을 했습니다” 라고 하면, 그런 것은 부흥사들이 하는 짓이고 말이다.

그렇게 개인적인 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것이 참으로 무서운 말인데, 즉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가 나를 죄인으로 만들도록 주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창세기 때부터 이미 십자가의 묵시가 덮쳤다는 것이다.

◈ 파도소리 하나도 제대로 듣지 못하면서 !!

그러므로 “완료-미완료-완료-미완료” 라는 관계에서, 이렇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전에 안산강의를 할 때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제가 “여러분, 물방울이 바다에 속합니까? 속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물론 물방울은 바다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해변가에 서있다면 무슨 소리를 듣겠는가? 그것이 파도소리인가? 아니면 바다소리인가?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물론 둘 다 같은 말인데 말이다(ㅋㅋ),

하지만 우리가 막상 듣는 것은, 바다소리 전체를 모두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듣기는 듣는데 그만 한계가 있어서 그 중에서 일부의 바다소리만 듣는다는 것이다. 즉 일부의 물방울이 부딪치면서 운동하는 소리만을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분명히 일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된다” 라는 말이 성립이 되는가? 즉 “내가 바다소리를 다 들었다” 라는 것이 성립이 되느냐는 것이다.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개보다도 듣는 것이 더 못한데 말이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전체를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주제에 말이다. 바다소리도 겨우 일부만 듣고서 그것을 바다소리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물론 귀가 크고 청각이 뛰어난 사람은 조금 억울할지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 인간은, 바닷속의 물방울 !!

그러니 인간은 자기 자신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반칙인데, 그야말로 개뿔도 모르고 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그런 주제에 무엇이 완료이고 미완료인지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바닷속의 물방울인데, 그렇게 물방울이니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 옆에서 다른 물방울이 밀어주게 되면, 자기는 잠시 위로 올라가서 바다 전체를 보게 되는데, 즉 주의 은혜를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만 내려가면 어떻게 되는가? 무엇밖에 모르는가? 그런 바다 전체가 보이지 않으니 자기가 그만 돗대(최고?)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사건을 일으켜서 “너는 죄인이야” 라고 하면서 발로 차버리는데, 그렇게 주님의 발에 촛대뼈를 까이게 되면 십자가가 보이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짓을 평생을 하게 되는데, 성장이나 성화가 아니라, 매일같이 그 자리에서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자리가 바다에 예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은 퉁겨나오는 것이 있는데, 그러한 움직임이 아직도 미완료로서 남아있다는 것이다. 즉 사명을 느꼈다가, 말았다가, 느꼈다가, 말았다가, 그렇게 반복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세상은 종말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누가 시키는고 하니, 주께서 시킨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바로 그것은, 어린양의 인을 받은 사람들은 그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운데서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짐승의 인을 받은 사람이 같이 있으면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 사명은, 죄인이 감당 !!

그런데 거기서 그렇게 올라가서 퉁겨나올 때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데, 그때는 주님이 거기에 말씀을 가했기 때문에 자기가 퉁겨서 올라왔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말씀 앞에 죄인이 될 때, 그때는 놀랍게도 불가능한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데, 물론 아주 짧고 짧은 순간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목사의 경우에도, 설교를 하고 나서 교인들이 “아이쿠,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복음적입니다” 라고 하면, 그 목사는 손을 가로 저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당신에게 복음으로 다가와서 은혜가 된다고 하면, 그것은 이 목사가 설교를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설교를 이용하셔서 당신에게 은혜를 베푸신 겁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일들은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것이고, 다만 목사는 죄인으로서 그 불가능한 사명에 수레로서 그냥 동원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것이 곧 목사에게 주어진, 목사로서의 사명이라는 말이다. 즉 “나는 아니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불가능한 사명에 대해서는, 설교나 전도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설거지를 하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즉 모든 공간과 장소에서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다가 퉁겨나오고, 또 자기밖에 모르다가 퉁겨나오고, 그렇게 반복을 한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그렇게 되풀이가 되는데, 그 무엇을 하든지 말이다. 물론 성도의 경우에만 말이다.

◈ 야고보서 - ‘유아 어 안개’ !!

이러한 구조는 바로 말씀이 만드신 구조인데,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인간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너희는 안개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체는 어떻게 보면 완료가 아닌데, 왜냐하면 우리는 안개가 되면 안 되고, 성도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즉 하늘나라에 가있어야 완료인데 말이다.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하지만 야고보서에서 이 ‘안개’ 라고 하는 것은, 마치 안개처럼 말씀이, 즉 “안개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말씀이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나는 신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악마의 몸을, 말씀의 몸으로 주님께서 다루시는 그 작용이 바로 완료의 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야고보서에서는 바로 말씀의 행함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은, 야고보서 전체에서 모두 다 받쳐주어야 하는데, 한 두 구절만 뽑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전체가 다 말이다. 그렇게 되어서, “아하, 이러한 모든 것이 말씀의 바다에서 일어나는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 보면, 사람의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하는데, 여기서 꽃은 진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꽃이 지지 않으려고 애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말씀은 어떠한가? 영원하다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몸으로서, 그렇게 말씀이 우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 성경의 역사관 - 묵시가 역사를 다루고 있다 !!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관인데, 즉 묵시가 역사를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 몸 중심의 역사관이 따로 있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풀이할 때마다 오해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제가 강의한 요지인데 말이다.

이제 교재 91페이지를 살펴보자.

** 인간의 힘으로 살면, 그 인간은 죽은 인간이지만, 매일같이 예수님께서 살려내시는 힘으로 살 때만, 그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산 인간’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 인간의 시간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성도는 자신이 자신의 원천이 아님을 매일같이 알게 된다.

◈ 예수님의 독특한 시간관 !!

이렇게 하나님의 시간이 작동해서, 성도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원천이 아님을 매일같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관을 이야기하면서, 여기 교재 91페이지에서 계속해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즉 예수님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을 왜 함께 이야기하는고 하니, 즉 거기에 보면 “성경은 이런 예수님의 독특한 시간관을 알려준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성경은 예수님의 시간관과 인간의 시간관을 겸해서 알려준다는 것이다. 지난 요한복음 수련회에서 이 부분을 했는데 말이다. 바로 그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아는고 하니, “아하, 그것이 육적인 시간관이구나”, 그리고 “아하, 이것은 영적인 시간관이구나” 라고 깨닫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렇게 양쪽을 다 알려주는데, 이러한 관점으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게 되면 이해가 되는데, 그들은 사명을 받은 동시에,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관이 아니라, 지금 주께서 자기들과 동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단 교재를 살펴보자.

** 성경은 이런 예수님의 독특한 시간관을 알려준다. 어떤 왕의 신하가 예수님에게 나와서 병든 자기 아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살려달라고 요청했다. 이 신하의 시간은 인간적인 시간이며, 자기 입장에서 시작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간은 신하의 입장과 다르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나아가는 시간이다.

(요 4: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요 4: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요 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요 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요 4: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 왕의 신하의 경우에 !!

여기서 신하가 뭐라고 하는가? 4절에서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공간이 있다고 하면, 이런 모임에서나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 다른 곳에는 해주기고 싫고 말이다. 사실 너무 어려워서 이런 이야기까지는 하기 싫었는데, 지난 ‘70이레’의 논문에 보면 에피큐로스 학파의 시간론이 언급되어있다는 것이다.

◈ 에피쿠로스 학파의 시간론 !!

오늘이 기회라고 여기고 한번 해보겠는데, 이왕 시간론이 나왔으니 말이다. ‘이레’를 설명할 때 ‘층’이 있는데, 그런데 시간이라는 것은, 시간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먼저 있고, 이 운동에서 운동 사이가 시간으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그렇게 주장한다는 말이다.

제가 이전에 강의를 할 때 뭐라고 했는고 하니, 사건에서 사건으로 나아갈 때, 즉 ‘사건1’에서 ‘사건2’로 나아갈 때, 거기에서 비로소 시간이 생긴다고 했는데 말이다. 이러한 것을 에피쿠로스와 그 당시의 고대 사람들은 이미 알았다는 것이다.

◈ 성경의 시간론2 !!

성경말씀에 의하면 첫날에 무엇이 창조되었는가? 빛이 창조되었는데, 그리고는 마지막 날에 안식을 하는데, 그러니 첫 째날 창조부터 마지막 날까지가 ‘이레’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7일만에 다 창조를 하시고 기뻐하셨는데, 그러니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 이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은, 물론 그 안에 시간이 있어도, 그것 자체로서 이미 끝났다는 말이다. 즉 시간이 더 이상은 진척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이것이 하나의 세트가 되어서 계속해서 되풀이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켜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그런데 인간이 그만 죄를 지었으니,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하지 못하는데, 그런 안식을 하려고 하면 처음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는 것이 유지가 되어야만 하는데, 그러니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 심히 괴롭다는 것이다. 그러면 안식이 심히 괴로운 것을 공격하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전쟁을 벌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전쟁을 하는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곧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는 것이 되는데,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여기 안식의 주인공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 즉 예수님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과 뱀의 주동자로서 인간의 몸이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과 인간의 몸의 싸움이 이어지면,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즉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도, 위에 있는 하나님의 안식의 입장에의 시간론에서 보면, 그것은 질적으로 안식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것이다.

◈ 인간은, 왜 천년을 넘기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인간들이 아무리 시간을 길게 끌었다고 해도, 즉 900년을 살아도 인간은 여전히 하루살이에 불과한데, 그야말로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는 말이다. 즉 천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년동안 왕 노릇을 한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천년을 넘기면 어떻게 되는가?

만약에 천년을 넘긴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는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제 아무리 이 땅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쓰레기와 같은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레 - 인간의 시간을 심판 !!

그러면 이것을 무엇으로 규정하는고 하니, 시간으로 하게 되는데, 그러니 결국 ‘이레’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의 시간을 심판한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은 내가 만든 세상이 아니었단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이레’ 라는 시간관을 가지고 등장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세트화가 된 그 하나님의 안식에 미치지 못할 것 같으면, 그것은 아무리 시간을 길게 끌어봐야, 하나님의 안식의 시간에서 발길질을 당하고 추방을 당하는, 그런 저주를 받은 시간이라는 말이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런 저주받은 시간을 허용하시는가? 그렇게 허용해야만, 안식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예수님이 숨어있었는데, 그러니 그런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버림을 받아야 하는 인간들이 계속해서 생산이 되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육과 육 가운서 말이다.

그래서 “죽었더라, 죽었더라” 라는 것이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데,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짬짬이, 마치 케익에 쿠키나 초코렛이 군데군데 박혀있듯이, 그렇게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선지자’ 라는 이름으로 여기 저기에 박혀있다는 것이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등등, 그렇게 말이다. 그렇게 박힐 때마다, 주님과 그런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언약이 성립되면서,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안식, 즉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다가, 마지막 신약의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심으로서, 즉 새언약을 통해서 마침표를 찍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모든 역사가 마귀의 역사였고, 불심판을 받아야 하는 역사였음이 온 천하에 공개되고 만다는 것이다.

◈ 에피쿠로스의 시간론2 !!

그리고 이 에피쿠로스의 시간론은 그야말로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야, 이것이다!” 라고 하면서 잡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운동이 멈추게 되면, 그 자체로서 완료된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의 시간론은 무엇인고 하니, 새로운 운동이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안식을 완성하고 난 다음의 시간들은, 인간의 죄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있는 이 세상의 시간과 안식의 시간이 서로 도저히 융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인자의 나라와 짐승의 나라 !!

그러니 여기 이레는 7년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완성된 하나의 시간이고, 그런 이레의 시간이 등장해야만, 하루, 이틀, 사흘을 심판할 수 있는데, 그런데 다니엘서에서는 그 이레의 주인공을 ‘인자’ 라고 했고, 그 밑에 있는 인간 시간의 주인공을 ‘짐승’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이레를 설명하면서 인자는 인자의 나라로 등장하고, 짐승은 짐승의 나라로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와서 땅을 적시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나라’, 즉 ‘국가’ 라는 것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인데, 왜냐하면 짐승이 있으니 말이다. 그 짐승은 말씀대로 움직이는데, 원래 천사였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짐승은 말씀이 시키는 대로 자꾸만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면 부수고, 또 만들면 부수고 한다는 말이다.

◈ 언약을 드러내는 토기장이 !!

그것이 예레미야 18장에 나오는데, 즉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 부수듯이, 내가 토기장이가 되어서 국가와 민족을 부술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인간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아니, 부술 것을 왜 만듭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뭐라고 답변을 하는가?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즉 여호와가 누구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부순다는 것이다.

(렘 18: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달리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또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국가는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 부서지도록 되어있어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그렇게 만들어진 국가가 자기에게 다수의 힘과 생활의 안정을 가져다주기를 바라는데, 그 국가의 구성원이 되어서, 즉 자랑스런 국민이 되어서 만족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 국가는, 이미 짐승이 만들어 !!

그런데 로마서 13장에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 말씀은 국가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국가가 만들어지고 깨어지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모든 국가를 누가 만들었는가? 이미 짐승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

지금 서해안에 대한민국 초계함이 그만 두 동강이 나서 빠져있는데, 이것을 보고서 보수주의 진영의 목사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었는데, 왜 대통령은 불교의 말을 듣고, 불교에 대해서 그렇게 유화정책을 펴느냐고 따질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을 연임을 할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리고 로마서 13장에 의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러면 불교와 같은 이단들은 모조리 작살을 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사할 일이 있으면, 아무리 높은 조계종 총무원장의 차라고 해도, 당연히 트렁크를 열어서 조사하는 것이 맞는데, 그런데 장로 대통령이 되어서, 그것을 문책해서 서울 경찰청장을 갈아치우는 것이 과연 맞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주장하는 것은, 결국에는 그야말로 변하는 동사를 변화가 없는 명사로 만드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에는 힘인데, 즉 보수의 힘이라는 말이다. 하여튼 이 마귀라는 놈이 국가 하나는 제대로 잘도 만드는데, 그것도 기독교식으로 말이다. 물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지만 말이다.

◈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여기서 신하가 뭐라고 하는가? 자기 아들이 죽기 전에 제발 와서 살려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 자체가 행동하는 것이 진짜 시간인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가짜 시간에, 즉 멸망을 받을 시간에 얽매여서, 그래서 그 신하가 “주께서 죽기 전에 오셔야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 신하의 아들이 낫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물어보시는데, “언제 그 아이가 나았느냐?” 라고 말이다. 그러니 종들이 뭐라고 하는가? “바로 예수님이 아이에게 말씀하신 그때였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신하에게 “니 아들이 살았다” 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때 신하의 아이가 나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꾸 우리의 몸이 느끼는 시간만을 시간이라고 우기면 안 되는데, 그것 말고 또 다른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저에게 계룡산에서 계시를 받았냐고 하는데(ㅋㅋ), 자기가 믿음이 없고 무식한 줄은 모르고 말이다. 

◈ 인간들은 자기 몸이 느끼는 시간만을 !!

아무튼 인간들은 자기 몸이 느끼는 시간을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이런 기존의 시간관이 있어주어야 미완료와 완료가 되니, 그래서 미완료에서 완료로 나아갈 때는 자기들을 거기에 집어넣어서, 즉 자기들이 가르치고 교육을 해서, 그렇게 해야만이 기독교가 기독교답게 된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마귀가 만드는데,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을 완료를 했는데 더 이상 무엇을 만들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다만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사명을 받아서, 거기서 오르락내리락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이미 바다는 있는데, 우리는 바다의 작은 물방울이 되어서, 위로 올라가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다가, 그렇다가 내려가면 또 자기 고민에 빠져서 방황하는, 그런 인생을 산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같이 제자리 뛰기를 하는데, 하지만 그것 자체가 바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그냥 두 손들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라고 하면서, 십자가만 바라보고 주께로 가면 된다는 말이다. 거지 나사로가 도대체 한 것이 무엇인가? 그가 무슨 전도를 하고, 무슨 헌금을 하고, 무슨 봉사를 했느냐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92페이지를 살펴보자.

** 인간들이 느끼고 있는 ‘과거→현재→미래’ 라는 시간틀은 어디까지나 ‘나, 여기 있음’을 기준으로 해서 고수하게 된다. 즉 ‘과거’에 내가 있어왔고, ‘지금’ 내가 있고, ‘미래’에도 내가 있게 된다는 것을 고려해서 형성된 시간의식이다.

◈ 과거, 현재, 미래 !!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과거는 자기가 판단해서 과거인데, 즉 자기가 아는 것만 과거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현재이고, 또한 자기가 모르는 것은 미래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하지만 하나님에 의하면 그것이 아니라, 과거에 그만 미래가 있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인데 말이다. 즉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미 내가 과거에 있었고, 지금 있고, 앞으로 있을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우리 인간들을 당황하게 하시는가? 그냥 하나님의 일을 일방적으로 외쳐버리면 되는데 말이다. 하나님은 꼭 이렇게 인간에게 약을 올리는데, 즉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서,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속으로 그만 들어와 버리신다는 것이다. 그 안에 말이다.

◈ 성(聖)과 속(俗)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성(聖)과 속(俗)에 있어서, 즉 거룩과 더러움에 있어서, 우리는 거룩하게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하는가? 깊은 산 속에 있는 기도원에 가는데, 즉 속된 이 세상에서 피신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이야기하는데, 즉 거룩함이 속됨 속에 깊숙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들어와서 자꾸만 싸우는데, 즉 영적인 싸움을 한다는 말이다. 도망가면 또 따라오고, 도망가면 또 따라오고 말이다. 그러니 속됨에 대한 시간을 모두 다 이야기하는데,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이 아니거든”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끼리 따로 나가서 개척교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파고 들어오는데, 밀어낼 때까지 말이다. 즉 “형님, 제발 좀 나가주세요” 라고 할 때까지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파고들고, 계속해서 외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속된 인간들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인데, 하지만 주님에게 사명을 받는 자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 장땡과 삼팔 따라지 !!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결국 패를 까게 되는데, 물론 끝나기 전까지는 서로 패를 까지 않는데 말이다. 왜 도리지꾸때이(?)를 할 때는 패를 끝까지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한쪽은 장땡이를 쥐고 있고, 물론 다른 쪽은 삼팔 따라지(한껏?)를 쥐고 폼을 잡는데 말이다.

그렇게 서로 패를 내놓지 않고 버티다가, 드디어 요한계시록에 가면 펼치게 되는데, 한 쪽은 이마에 어린양의 인이 있고, 다른 쪽에는 짐승의 인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갈 때까지 패를 깔지 않는데, 물론 어린양의 인을 받은 쪽은,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이미 패를 깔아놓고 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기독교’ 라는 이름으로 버티고 있는데, 물론 그 뒤에는 짐승이 버티고 있고 말이다.

그러면서 어린양 쪽을 보고 “그렇게 해서 교회가 되겠는가? 기독교는 기독교다워야지” 라는 식으로 매일같이 헛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예수님도 더욱 더 공격을 하시는데, “교회든 뭐든 내가 다 이루었는데, 니가 왜?” 라고, 그렇게 계속해서 복음으로 밀어 부친다는 말이다.

◈ 죄 가운데 있는 거룩 !!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방법을 썼는데, 즉 “내가 너희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너희를 데려감이 아니고, 나는 가고 너희는 이 땅에 두게 함이라” 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렇게 해서 끝까지 거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데, 즉 죄 가운데 있는 거룩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세상에서 복음을 외치는 자는 거룩한 자, 즉 성도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을 피해서 도망간 놈은 무엇인가? 또 하나의 동사를 명사로 만드는, 즉 자기의 세력화를 주도하는 놈이라는 것이다.

◈ ‘회복’과, ‘거룩한 침묵’ !!

요즘 두 개의 단편 독립영화가 히트를 치고 있는데, 하나는 ‘회복’ 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침묵’ 이라는 것인데, 이 ‘거룩한 침묵’은 배경이 프랑스의 수도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런 수도사들의 생활을 다룬 2시간 30분 가량의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라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회복’ 이라는 영화는, 물론 아직 이것도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줄거리는 대충 짐작이 가는데, 즉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인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시련과 고난 가운데 있는지, 그러한 내용들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시간을 내어서 두 개의 영화를 다 보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거룩한 침묵’은 절의 중들이 그렇게 많이 본다고 하는데, 물론 “종교는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라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보지 싶은데, 물론 ‘회복’은 기분이 나빠서 보지 않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이 두 개가 모두 마귀가 만든 영화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회복’의 경우에는, 아직도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세대주의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데 말이다. 그러니 성경에 대해서 역사적인 해석을 해서, 즉 미래에 대해서 미완료를 가지고 시나리오를 짜는, 그런 엉터리 해석이 가미가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보지 않아서  확답을 할 수는 없지만, 만약에 보게 되면 줄거리도 소개하고 평가도 할 것인데 말이다. 같이 볼 사람은 회원모집을 해도 좋고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는데, 이제 92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처럼 시간은 일방적으로 자기 위주의 시간관을 만들어냄에도 불구하고, 마치 시간이란 고정된 레일 위에 자신도 지나가고, 남들도 지나가고, 심지어 하나님도 지나가고 있다고 착각한다.

◈ 주님에게서 나오는 시간만이 !!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지만, 시간은 이미 끝이 났는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를 하실 때 말이다. 그러니 주님에게서 솔솔 나오는 시간외에 다른 시간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몸이 느끼는 시간은 모두 다 ‘꽝’ 이라는 것이다. 백년을 살아도 그야말로 안개와 같은 인생이고, 하나의 경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까 인간은 바다 속의 물방울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시간이란 레일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공상한 대로 깔린다. 숱한 기억 속에도 선택을 당하는 기억은 ‘과거’ 라는 이름으로 일단 레일 위에 새겨지는 특권을 누리지만, 내일이 되거나 분주하면 그 자리도 어느 새 사라진다. 이처럼 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동원된 내용들은 항상 일방적이고 임의적이기에, 또 어떤 세트로 시간의 계열이 짜여질지는 본인조차도 알 수 없다.

◈ 어떤 ‘세트’로 !!

여기에 보면 ‘세트’ 라는 말이 나오는데, 즉 “어떤 세트로 시간의 계열이 짜여질지는 본인조차도 알 수 없다” 라고 말이다. 이것이 중요한데, 제가 교재에 미처 이 부분을 제대로 넣지를 못했는데, 즉 사람이 뭔가를 기억할 때는 무엇으로 하는고 하니,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세트’로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해변가에 가서 모래를 쥐면 어떻게 되는가? 사실상 손에 쥐는 것보다는 흘리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래를 흘리지 않으려고 하면 손이 아닌 그릇이나 다른 용기에 담는다는 말이다. 바로 그 그릇이 여기에 나오는 ‘세트’ 라는 것인데, 혹은 조금 더 고상한 말로 하자면 ‘범주(CATEGORY)'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언제나 고향은 아름답다 ??

만약에 우리가 어릴 때 고향의 모습이 상상이 된다면, 그때 고향은 굉장히 아름다웠고, 골목도 길었고 길도 제법 넓었다는 것이다. 그때 그것을 ‘신작로’ 라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고향에 가게 되면, 그 풍경도 그렇게 아름답지 못하고, 길도 좁고, 그러니 미국의 요세미티 국립공원보다도 못하다는 것이다(ㅋㅋ).

왜 그런가? 왜 그렇게 갑자기 시시해졌는가? 그래서 “차라리 오지 말걸. 괜히 왔어. 괜히 봤어”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차리리 보지 않았다고 하면 그 아름다움이 남아있을 텐데, 그런데 막상 그 현장에 가보니 너무 초라하고 시시하더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무엇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러하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 범주가 달라져서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은 하나의 기억을 할 때, 즉 하나의 사고를 할 때는, 그냥 아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범주’ 라고 하는 하나의 형식을 만들어서, 바로 그 속에 담아서 “아하, 고향을 아름다워” 라는 식으로 사고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고향은 아름답다” 라는 말을 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고 말이다.

여기 이렇게 꽃이 화분에 담겨있으니 자그마한 것이 보기에 참 좋은데, 하지만 그 꽃을 키우는 비닐 하우스에 가보면 어떠한가? 거기 전체에 있는 수천 수만 포기의 그 웅장한 꽃들에게 비하면, 이것은 그리 아름다운 것이 아닌 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자기가 꽃을 바라보는 범주가 넓어졌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 자살을 할 때 하더라도 !!

우리 인간이 바다의 파도소리를 다 듣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게 인간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데, 자기 세계가 전부인 줄 여기고 말이다. 그야말로 전체 속의 부분인데, 그런데 그 부분을 전체로 여기고는 폼을 잡으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자살을 하고 말이다. 물론 우리도 자살을 얼마든지 할 수는 있는데, 하지만 자살을 할 때는 주님의 말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성질이 난다고 자살하고, 성적이 떨어진다고 자살을 하니, 그야말로 기가 찬다는 것이다. 도대체 자기가 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자살을 하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살을 하기 직전이라도 이빨이 아프면 치과에 가는데, 그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치통’ 이라는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하면 그만 범주가 달라지는데, 그래서 치과에 가서 치료를 하고 난 뒤에 자살을 하더라도 한다는 것이다.

◈ 아하, ‘아이 엠 어 물방울’ !!

그러니 이 범주, 즉 세트라고 하는 것이, 사실상 우리는 항상 이런 세트인데 말이다. 마치 물방울이 바다 표면으로 올라가면 자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듯이, 그때는 그야말로 자기는 물방울, 즉 안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는 말씀의 세계에서 자기가 말씀의 물방울임을 알게 되는데, 물론 위로 올라가면 말이다. 그래서 “아하, 말씀이 나를 만들었구나” 라고, 혹은 “마귀가 나를 만들었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마귀가 나를 만들었다” 라는 것도 역시 말씀에 속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말씀에 속해서 보니까, 자기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그래서 “아하, 죄가 나를 만들었구나. 하지만 그러한 죄인을 주께서 피로서 건진, 나는 그런 몸이구나. 그렇게 해서 주의 몸이 되게 하셨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 다시 바다 밑으로 내려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주님이든 마귀든 그만 모두 다 잊어버리고 “주여, 제가 좀 살아야 되겠습니다. 자식이 세 놈이나 있는데, 이제는 줄줄이 대학에 가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또 그렇게 경쟁적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이는 곧 인간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어제의 현재와 오늘의 현재가 꾸며내는 자기 자신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허상으로 채워진다는 점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시간이 성도에게 침투하신다.

◈ 시간은 곧 허상 !!

이러한 시간이 왜 나쁜고 하니, 시간은 허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는 항상 허상으로 채워진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두고 사람들은 묵시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와 묵시를 구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난번 서울의 개혁주의 세미나에서 ‘70이레’에 대해서 논문을 발표하면서 지적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듣던지 말던지, 그것이 제가 할 일이고 말이다.

역사를 기초로 한 묵시의 대표적인 신학자가 ‘몰트만’ 인데, ‘판넨베르그’ 라는 양반도 그렇고 말이다. 즉 “역사는 가봐야 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혹은 역사라는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그것이 몰트만의 소위 ‘소망의 신학’ 이라는 것인데, 그런 것이 왜 허망한고 하니까, 백 날을 그런 것을 해봐야, 도대체 그렇게 미래를 채워서 무엇을 하느냐는 것이다. 지금 죽으면 되는데 말이다.

아니, 왜 딸이 시집을 가는 것을 자기가 보고 나서 죽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냥 지금 죽으면 되는데 말이다. 딸을 그렇게 시집을 보내고 나서, 사위가 장인을 찾아와서는 사업자금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집을 담보를 잡혀달라고 하면 그때는 어떻게 할거냐는 말이다(ㅋㅋ).

◈ 괜히 기도했어, 괜히 기도했어 !!

그러니 우리 인간은 미래는 모르는데, 구약의 히스기야 왕이 왜 기도를 했는가? 아마도 히스기야가 천국으로 가서는 다음과 같이 했지 싶은데, “괜히 기도했어, 괜히 기도했어” 라고 말이다(ㅋㅋ). 아니, 이 세상에 조금 더 살아서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느냐는 말이다. 자기가 죽을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 만사는 이미 다 완료가 된 것인데, 즉 이미 주님의 안식의 때라는 말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에 보면, 어떻게 해서든 안식의 때에 들어가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런 안식의 때가 남아있다는 것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으니 말이다.

(히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히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인간들이 정립해놓은 ‘과거→현재→미래’ 라는 틀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예수님의 시간은 거꾸로 쳐올라오신다. ‘미래→현재→과거’ 라는 식이다. 즉 현재 속에 미래가 있고, 과거 속에 미래가 있고, 미래 속에 과거가 있는 식이다.

◈ 인간의 미래는 ‘와장창’ !!

그러니 과거에 우리의 미래가 들어있는데, 어떤 식으로 들어있는가? 허망하다는 식으로 들어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꿈꾸던 그 모든 미래를 이미 유대인들이 한번씩 다 꿈을 꾸어보았고, 그래서 그것이 죄로 드러났고, 그래서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고, 그래서 와장창 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길을 우리가 ‘꿈’ 이라는 미명하에 또 간다는 말이다.

부모가 되어서 왜 자식을 가르쳐야 하는고 하니, 자식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이미 부모가 다 겪어보니 다 허망하고 부질없더라는 것이다.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사주면 며칠이 못 가서 때려부수고, 또 바이올린을 사주어도 며칠 ‘끼기깅’ 하다가 그만 때려치우고, 그 다음에는 김연아처럼 피겨를 한다고 해서 스케이트를 사주었더니만, 그것도 한 달을 못 가고, 그 다음은 스피드 스케이팅을 한다고 하다가 때려치우고, 또 그 다음에는 야구를 한다고 하다가 때려치우고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허망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요즘은 부모가 자식들에게 휘둘려서 아빠줏대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가 장담을 하기는,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말씀과 거리가 뚝 떨어져서, 그렇게 자기만의 육적인 세계가 따로 있어서, 바로 그 육이 과거, 현재, 미래를 쥐고 있다는 것이다. “내 자식은 나보다 더 잘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그야말로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 거지 나사로만 되어도, 대성공 !!

그런데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뭐, 너희들이 내일 도시에 가서 돈을 번다는 말인가? 그따위 소리는 하지를 마라. 너희는 그냥 사라지는 안개니라. 그러니 주님의 뜻이라면, 어느 도시를 가던지 시골을 가던지 간에, 또한 돈을 벌던 못 벌던 간에, 주님의 뜻대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세계에서는 생명을 소유하는, 즉 죽고 사는 것이 문제이지, 자기가 얼마나 성공하느냐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말씀으로 인해서 살아있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대성공이란 말이다. 즉 거지 나사로만 되어도 그 이상의 성공은 없다는 것이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역사를 거슬러 역사를 볼 수 있는가를 물었다.

(마 22: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 예수님이 직접 내신 수능퀴즈 !!

제가 알기로는, 성경에서 이 부분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진 유일한 대목이지 싶은데, 즉 다른 성경 다른 곳에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먼저 질문을 한 경우가 없지 싶다는 말이다. 그렇지요? 물론 기억에는 다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지난 부산강의에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지 ‘아들들’은 없다고 했는데, 그런데 에베소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 이라는 표현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뭔가요?)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

여기 마태복음 22장 46절을 보자면,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라고 하는데, 즉 바리새인들은 성경도사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질문에는 답변도 전혀 못하는데, 그런데 주님이 행한 것을 가지고는 뒷다마(?)는 얼마나 잘 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던진 이 질문은, 최고 난이도의 수능시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우리는 수능을 치는 입장에서 여기에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벌써 수능시험이 하나 누설이 되었는데 말이다(ㅋㅋ).

사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인데, 그러니 여기에 답변을 하려고 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시간관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그런 시간관을 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운동이라는 것은 항상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데,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운동론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항상 위에서 소나기가 내리듯이, 그렇게 내려온다는 말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왜 소설제목이 ‘소나기’ 인가?

황순원의 ‘소나기’ 라는 단편소설이 있는데, 왜 소설제목이 소나기인지 아세요? 즉 왜 장마가 아니냐는 것이다. 장마는 비가 늘 오는 것인데, 그래서 장마가 진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소나기는 한번 오고 나면 그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즉 사춘기 시절이나 철없는 젊은 시절의 사랑은 장마가 아니고 한 때의 소나기라는 말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도 역시 그렇지 싶은데, 그리고 아마 모두들 황순원의 이 소나기를 이야기하게 되면, 남의 일이 아닌 마치 자기 일처럼, 그렇게 가슴에 아련한 추억들이 하나 이상은 있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지요? 아무튼 사랑은 그렇게 한 번씩 오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어떠한가? 주님도 사랑도 위에서 내리는 소나기라고 했는데, 즉 우리가 항상 필요에 따라서 바다 위에 올라가서 언제나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악마가 만든 이 ‘육(肉)’ 이라는 몸은, 항상 무엇이든 간에 자기 마음에 든다 싶으면 그것을 그만 자기 주특기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즉 “나는 은혜를 받았다” 라는 것을, 그만 굳혀버린다는 말이다.

◈ 말씀구조 안에 그만 살림집을 !!

그러니 주님께서 오셔서 어떻게 하는가? 말씀구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말씀구조 안에 자기 살림집을 그만 차려버린다는 것이다. 즉 우리 안에다가 자취방을 만들어 버리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다위로 올라온 우리를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애들아, 이제 많이 보았지?” 라고 하면서 그만 다시 푹 잠기게 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밑으로 내려가면 우리는 그야말로 깜깜한데, 주님은 그렇게 올리고 내리고, 올리고 내리고, 즉 세우고 부수고, 세우고 부수고 하신다는 것이다. 식으면 데우고, 또 식으면 또 데우고 말이다. 물론 너무 데웠다 싶으면 또 식혀버리고 말이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요리 굽고 조리 굽고, 그야말로 데리고 노시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씀구조 안에서 다루어진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그래서 이것을 두고서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라고 하는데, 이것이 고린도후서에 보면 나온다는 말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사명을 감당하겠는가? 그러니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니오’가 아니라, ‘예’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보다도 더 확실한 완료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모든 것이 다 ‘예’ 인데 말이다.

(고후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2:16, 개역)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다윗이 왜 먼저 왔는가?

아무튼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답변을 하지 못했는데, 그러면 우리들은 답변을 해야만 되는데, 즉 “주님께서 지금 나를 나되게 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말이다. 바로 그것이 정답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다윗이 왜 먼저 왔는가? 그렇게 다윗을 있게 하신 것은,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다윗을 먼저 앞당겨서 이 땅에 오도록 하셨다는 말이다. 즉 주께서 그렇게 먼저 다윗을 만들어내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다윗언약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을 시키면 어떻게 되는가? “주께서 지금 우리를 만들어내셨습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93페이지를 살펴보자.

**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모든 인간들의 시간적 의미마저도 죄악 된 시간관으로 드러나게 하는, 그런 종말의 상태로 나타났다. 인간의 시간 다룸을 통해서도 죄가 나오는 그러한 시기이다. 모든 역사는 예수님이 하신 일 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되는 제대로 된 시간이 방출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공간과 모든 시간은 십자가 사건이 장악한다.
  
◈ 종말은 곧 심판 !!

여기에 ‘종말’ 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것만 더하고 마치도록 하겠는데, 물론 종말이 결코 쉬운 말은 아닌데, 하지만 간단하게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종말은 아주 간단히 심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이전에는 심판을 미루어서 봐주다가, 그러나 이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이 모델로 등장해서, 그 모델에 합치하지 않는 놈들은 다 어떻게 하는고 하니, 박살을 내어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되지 않는 몸들은 다 부수어 버리고, 부활이 된 몸들만 종말 때 성령을 주셔서 골라낸다는 말이다. 물론 부활의 첫 열매는 주님인데, 그 다음은 성도의 차례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식으로 예수님이 모델이 되어서 나머지를 다 심판을 하신다는 말이다.

◈ 아하, 나는 뱀의 자식이었구나 !!

그러므로 종말 때까지 인간들의 모든 시간관은 무엇인고 하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고 인간이었음을,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오히려 뱀의 자식들이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즉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쳐다보기 위해서, 그래서 지금까지 이렇게 계속해서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여러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지 싶은데, 즉 “목사님, 지금은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고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대답을 하지면 “지금도 주님께서는 묵시적으로 시간을 만들어냅니다” 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결국, 모든 시간은 언약을 증거 !!

그렇게 주님은 계속해서 시간을 만들어내고 계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들의 시간으로, 즉 자기의 미완료로 간주하는, 그런 죄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이 시간을 그렇게 만들어내심으로 죄가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오신다” 라고 하는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간으로서, 그러니 모든 시간은 항상 “주께서 다시 오십니다” 라고 하는, 즉 주님의 언약을 증거하는 시간으로 보면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몸이 나의 몸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살고 죽는 그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손에 달려있는데, 그래서 그것은 증거해야 하는데, 그런데 지금까지 나는 내 힘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으스대면서 증거한 줄 압니다. 다시 한번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만을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가 이러한 죄악 된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능히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용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4,10 오후 10시 13분에 마침.

                                         소설 ‘소나기’는 왜 갑자기 말해 가지고는 - 아, 보고싶어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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