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5월 3일 피24강 성화론의 허구성 vs 기르심

100503 피24강 성화론의 등장 vs 기르심
____________  (나는 신이다 vs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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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503피p097성화론등장과기르심

24강 성화론의 허구성, 등장(나는 신이다) vs 기르심(십자가)

[10 대구강의 6] - [피 24] - 성화론의 등장과 기르심
                                                                                
                                                          10,05,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신학의 하이라이트, ‘성화론’!!

오늘은 교재 97페이지에 나오는 ‘성화론’에 대해서 살펴보자.

** 신학의 하이라이트는 ‘성화론’에 있다. 자아가 생각해도 참으로 흠모할만한 자아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줄 수 있는 핵심분야로서 각 시대마다 맞춤 신학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전혀 흠모할만한 것이 없는 메시야를 증거하는 신학은 아니었다(사53:2).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신학에서 말하는 모든 진리는 상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데, 즉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이 머리로서 상상할 수 있는데, 하지만 그것이 상상에 가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현실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손에 만져지는 우리의 몸이나, 혹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같은 것이 바뀌게 되면, “아하,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와주시는구나” 라고 파악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바뀌지 않으면 하나님도 역시 없는 것인데, 즉 자기가 느끼지 않으면 하나님도 없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 인간은 ‘나’의 죽음이 느껴질 때, 비로소 !!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그게 언제 들통이 나는고 하니, 자기가 죽게 될 때, 즉 아직은 죽기 싫은데 죽는다든지, 혹은 죽기 이전이라도, 왠지 알 수는 없지만 자기도 모르게 죽는다는 것이 두려워질 때, 그렇게 자기가 그만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 겁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중심의 세계관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교재 97페이지를 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읽어보자.

**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는 성화론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마셨던 그 쓴잔을 같이 들이켜야 한다. 곧 자신을 죽이고 부인하는 십자가의 잔이다(막 10:38).

(막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 예수님曰, ‘너희의 기도 엉터리야’ !!

여기 인간의 기도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기도를 어떻게 보았는고 하니, 우리 인간들은 잘못된 내용의 기도를 하고 있음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즉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즉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기도하는 그런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왜 이런 지적을 받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그 기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인간의 기도는 모두 엉터리다” 라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가 있고, 우리 인간들은 전혀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 신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진리나 계시나 신이나 천국과 같은 것은 모두 추상적인 개념들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추상적’ 이라는 것은, “있으나 없으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그런 것들은 없어져도 괜찮은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그만 자기 자신이 없어지면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그만 사라진다고 하면, 즉 자기가 죽는다는 것은 겁을 내지만, 그러나 진리가 없어진다는 것이 대해서는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이 죽어도 별로 겁을 내지 않는데, 자기가 죽어야 비로소 겁을 내지 말이다. 

◈ 그러나, 자기 집에 불이 나면 !!

예를 들어서, 우리는 남의 집에 불이 나면 어떻게 하는가? 그냥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던지, 아니면 평소에 하던 대로 술이나 한 잔 걸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집에 불이 나면 어떻게 하는가? 당장에 술집에서 나와서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역시 ‘나’ 자신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진리나 계시나 천국이나 신과 같은 추상적인 것들이 자기와 관련이 있을 경우에만, 그제야 비로소 신경을 조금이라도 쓰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와 관련이 없다고 한다면,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냥 무덤덤하게 여기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 말로는 신경을 쓰는 척을 하겠지만, “아이쿠, 참으로 안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해도, 그런 “하나님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은 자기 몸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경우에만, 즉 자기의 몸에 자기가 기대한 어떤 변화가 있을 때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조차도 없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하나님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서, 그렇게 아무튼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기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 인간은 죽음 앞에서 공포심을 !!

그런데 어느 날 자기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갑자기 거기서 공포심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고 하니, 물론 신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자기는 죽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 생각, 그것이 어떻게 해서 현실이 되느냐는 말이다. 즉 공포심이 왜 생기느냐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왜 내가 겁을 내는가?” 라는 말이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죽으면 안 되니까 그러한데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이렇게 “내가 죽으면 안 돼!” 라는 말과, “결국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 라는 말이 서로 있다고 하면, 이것은 둘이서 서로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즉 한 쪽에서는 “나는 죽을 수밖에 없어!” 라고 하면, 다른 쪽에서는 “나는 죽으면 안 돼!” 라고 말이다. 이것을 두고 철학자들은 ‘모순(矛盾)’ 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쉽게 말해서 그냥 ‘억지’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지요?

여기서 다음의 대화를 한번 들어보자.

* A : 하나님을 믿으세요.
* B : 나는 믿지 않습니다.
* A : 그러면 당신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 B : 죽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 A : 지금 죽여버린다 !!
* B : 싫어 !!

◈ 나는, 지금 당장은 죽기 싫어 !!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은 인정한다고 하면서, 하지만 정작 자기를 죽여버린다고 하니, 그것을 싫다고 하면,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은 내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그러니 강도가 “지금 당장 돈 내놔. 그렇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라고 했을 때, 누구든지 돈을 꺼내서 주었으면 주었지, 자기가 죽으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도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즉 그런 상황에서 “나는 어차피 죽는데, 그러니 지금 당장 죽여!” 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더라도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죽는 것은 몰라도, 등산을 하다가 미끄러져서 죽는 것은 좀 억울하다는 말이다. 즉 죽더라도 제법 폼 나게 죽고 싶지, 그렇게 시시하게 죽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마음대로 하겠느냐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잔디도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라고 했는데, 그것을 헤겔철학에서는 ‘차이’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차이가 나는 이 세상에서 자기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억지를 부리고 우기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나는 한결같은 사람이야”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말로 안 되는 소리인데, 사람은 상황이 바뀌게 되면 변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 인간의 욕망이 종교를 낳았기에 !!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연구하게 시작했는데, 그것을 연구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종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종교는 한 마디로 기도로 묶을 수가 있고, 이 기도는 또한 욕망으로 묶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욕망이 종교를 낳았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종교의 핵심은 기도에 있는데, 그래서 성경말씀은 아무리 보라고 해도 안 보지만, 그러나 기도는 누구나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무리 무식하든지 똑똑하든지 간에 말이다. 똑똑한 사람도 답답하면 기도하게 되어있고, 자기는 무식해서 성경을 봐도 모른다고 하는 사람도 역시 답답하면 기도는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기도의 보편성 앞에서 !!

그러니 이러한 기도의 보편성 앞에서 만약 자기가 신을 믿는다고 하면,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기도를 해도 다 정당한 기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은 바로 “너는 니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라고, 즉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잘못된 기도를 한다고 지적하신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자기의 욕망이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을 믿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게 되면, 그 하나님은 자기 기도에 대해서 응답할 책임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하나님이 자기가 기도한 것 말고 다른 것을 간섭하게 되면, 자기는 다른 신을 찾아서 섬기겠다고 한다는 말이다.

◈ 일본에는, 신이 약 600만개 ??

일본에는 신이 약 600만여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물론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데 말이다. 왜 그렇게 신이 많은가? 그것은 바로 골라잡으라는 것이다. 즉 상품이 다양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잡으면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먹는 라면의 경우에, 종류가 왜 그렇게 많은가? 그렇게 되면, 소비자는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무슨 선택이 폭이 있겠는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하는데 말이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선택의 폭이 넓으냐는 것이다.

◈ 이방종교는, 선택의 폭이 넓어 !!

이방종교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신도 얼마든지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더 여유를 부리는데, 즉 “우리가 믿는 신만 좋은 신이 아니라, 남들이 믿는 신도 좋으니 똑같이 존중해주겠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도대체 무슨 신이냐는 말이다. 나이키보다도 더 못한 신인데 말이다. (나이키도 승리의 여신인데? ㅋㅋ)

다시 말해서, 남의 신을 존경해주는, 즉 남의 종교를 존중해주는 것이 어떻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고 사상이란 말이다. 즉 “나는 남의 사상을 존경한다” 라고 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왜냐하면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말이다. 즉 부잣집 아들이 시장에 가서 씨레국을 먹지 못한다고 하면 얼마든지 이해가 되는데, 매일 스테이크에 칼질만 했으니 말이다.

◈ 차별화 -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

하지만 이 ‘종교’ 라는 것은 그런 것이 전혀 아닌데, 그런데 종교도 마치 잔디밭이 제 아무리 넓어도 잔디가 모두 다르듯이, 그렇게 종교도 잔디처럼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취미생활이나 오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래서 진짜 여호와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해서, 그만 차별화를 시키는데, 즉 모든 종교를 일절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물론 우리가 다 알지만 반복을 해야 되는데,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언약’이 나온다는 것이다.

◈ 깨어진 두 돌판의 등장으로서 !!

물론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의 이성, 즉 인간의 지식에 주어지는 것은 언약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이 언약이 눈에 보이는 방식인데, 즉 ‘두 돌판’ 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이 돌판이 깨어지고 마는데, 왜 그렇게 깨어졌는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깨어지지 않은 돌판과 깨어진 돌판의 차이점을 너희들이 알아라”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돌판이 깨어졌다는 것은 언약이 깨어졌다는 것이고, 그렇게 언약이 깨어지면 당연히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 인간은 “내가 왜 죽을까? 죄를 지을까? 저주를 받을까?” 라는 것을 몰랐는데, 그런데 우리 앞에 등장한 두 개의 돌판이 그만 깨어짐으로 인해서, “아하, 아무런 죄도 없는 거룩한 이 돌판이 깨어진 것을 보니, 사실은 내가 깨어질 인간이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이 등장함으로 무엇을 알게 되는고 하니, 그 이전에는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그런데 그 깨어진 두 돌판의 등장으로서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인간에게 이야기하고자하는 내용이란 것이다. 즉 “너희들이 알고 있는 때문에, 진짜 하나님이 너희들과 언약을 성사시킬 수가 없다” 라는 것인데, 인간들이 이미 알고 있는 기존의 잘못된 하나님 때문에 말이다.

◈ 인간은 ‘법’적 요소 때문에 !!

어제 오후에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는데, 우리 인간에겐 법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이 가려진다고 말이다. 즉 인간의 선악적 요소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 가려진다는 것이다. 그런 요소가 깨어져야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꾸만 법으로 나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가리워 진다는 말이다. 

◈ 왜 인간은, 자기 기도를 알지 못하는가?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는 기도를 너희가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근원적인 인간의 욕망 자체에서 신이나 진리, 천국과 같은 것은 허구가 되고, 실제로 느끼게 되는 것은 자기 몸뚱아리였는데, 그런데 그러한 자기 몸뚱아리만 현실로서 간주되는 의식에서, 이제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우리의 몸도 날마다 변한다고 하는, 그런 자의식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신이나 진리, 천국과 같은 것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변하고 말이다. 그렇게 기존의 우리는 입장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잘못된 기도에 대해서 지적을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나서,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데, 그 진리의 내용이 교재 98페이지에 보면 나온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는 성화론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마셨던 그 쓴 잔을 같이 들이켜야 한다. 곧 자신을 죽이고 부인하는 십자가의 잔이다(막 10:38). 이것은 곧 자아의 포기이다.

(막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 주의 쓴 잔을 마시게 하옵소서 !!

여기에 보면, 물론 이 부분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는데, 여기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나서, 즉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거기에 대해서 말씀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가 기도할 변하지 않는 내용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그 잔을 저도 마시게 하옵소서” 라고 말이다. 그러니 예배당에 굳이 뭔가 쓰려고 하면 “하면 된다!” 라고, 그런 쓸데없는 글을 걸지 말고, “주의 쓴 잔을 마시게 하옵소서!” 라고 써놓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더 적합하다는 말이다. 즉 “이 교회에는 평생동안 주님의 쓴 잔을 마시겠다는 사람만이 들어오세요” 라는 의미인데, 그러면 아마 천 명이 모인 교회라면, 많아봐야 3명 정도가 남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 그러면 과연 어떤 인간이 쓴 잔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되는가? 이 세상에서 쓴 잔을 마시기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하지만 쓴 잔을 마시게 해달라고 기도함으로 말미암아서,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쓴 잔을 마시지 않던 인간에서 즐겨(?) 쓴 잔을 마시는 인간으로 달라지도록 해주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찾아오신 목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서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를 보면 참 재미가 있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나. 성화론의 허구성] - 성화론의 초점은 이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거룩한 구원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에 해당되는 항목은 강렬한 ‘주체의식’으로 대변된다. ‘내가’, 혹은 ‘우리가’, 혹은 것은 ‘자아가’ 라는 의식으로부터 출발하겠다는 것은, ‘우리’가 해내지 못할 거룩이라면 애초에 거룩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는 의중을 드러내는 것이다.

계속해서 살펴보자.

** 이렇게 되면, 인간이 성취해내지 못할 거룩은 거룩으로 간주하지 않고, 인간을 살려내지 못할 진리는 진리가 아니며, 인간이 믿지 못할 복음은 복음이 아니며, 인간이 순종하지 못할 말씀은 말씀이 아니며,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메시야는 메시야로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 ‘거룩’의 판정문제는 과연 누가?

그러니 결국 성화론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거룩’의 판정문제를 인간 차원에서 머물러있겠다는 것이 곧 성화론자이고, 반면의 그 거룩의 문제를, 즉 무엇이 거룩인지 아닌지를 예수님에게 물어보자는 것이 곧 복음이라는 말이다.

지금 성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해야지!” 라고 하는데, 그런데 막상 그 거룩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룩을 이야기하면서도 말이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들이 거룩을 안다고 나서니 말이다. 그야말로 웃기는 짜장면인데(짬뽕?), 자기들이 거룩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거룩은 거룩이 아니라는 말인데, 꼭 바리새인들과 같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우리는 메시야가 누구인지 알아본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메시야는 구름을 타고 와야 되고 어떻고 하면서, 즉 자기들은 성경을 좀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거룩도 모르고, 또 메시야도 모르는데, 즉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니가 나를 알겠는가?” 라는 심오한 노랫말도 있지만(ㅋㅋ), 무슨 노래인지 알지요? 아무튼 인간은 그렇게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을 안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선한 선생님이여 ??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보고 “선한 선생님이여!” 라고 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얼마나 깨어졌는지 모르는데, 즉 “이 건방진 놈아! 니가 어떻게 선을 알아?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뿐인데,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내느냐?” 라고 쿠사리만 실컷 얻어먹었다는 말이다.

그래도 그 청년은 “저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하자, 예수님은 “그렇다면 니가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 오너라” 라고 하니, 그만 근심하면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때 갑자기 음악소리가 들리는데) 아이쿠, 죄송합니다. 녹음기가 그만 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네요. (‘타타타’ 인가? ㅋㅋ)

(막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막 10: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막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 이건 자신 있으니, 거룩이야 ??

그러니 여기서 ‘거룩’ 이라는 것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즉 우리 인간들은 성령께서 아직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룩을 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거룩함과 거룩하지 않음을, 쉽게 말해서 더러움인데 말이다. 아무튼 그것을 자기들이 알아서 판정하겠다는 것이다. 즉 거룩과 비거룩의 문제를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것을 인간이 그냥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다 자기가 거룩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자기가 할만하다고 여기는 것은 거룩으로 그만 포함을 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에게 부담스러운 것은 비거룩에 포함을 시켜버리고 말이다.

◈ 예수님으로부터, 거룩을 다시 규정해야 !!

이러한 차원에서 거룩과 비거룩을 보게 되면, 이런 인간들이 누구를 죽였는가? 결국은 거룩한 분을 죽이고 말았는데, 그러니 거룩이라는 판정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고 하니, 인간이 알고 있는 최고의 경지를 밟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그들에게서 거룩하지 않다고 비난을 받은 그분, 즉 예수님으로부터 거룩을 다시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렇게 사람들이 있고, 또한 예수님이 계신다고 하면,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떠밀림을 당하신 분으로부터 거룩을 시작하려고 하면, 여기에는 반드시 무엇이 들어있어야 하는고 하니까, 왜 인간은 거룩한 분을 거룩하다고 알아보지를 못하고, 비거룩이라고 하면서 비난을 해야하는지, 그것도 포함이 된 채로 거룩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참된 거룩 - 야, 인간의 거룩은 더러워 !!

그러므로 참된 거룩은, “여기에 거룩이 있다. 받아라” 라고 하면서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래서 너희들이 생각한 거룩이란 판정은 도리어 더러운 것이다” 라는 지적을 하면서,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6장 8절을 보면 뭐라고 하는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 즉 “성령이 오게 되면,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신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즉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우리는 “아하, 내가 바로 아담의 죄로 인해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지금부터 조금 어려운 논리를 전개하려고 하니까, 긴장을 조금만 더 하시고,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먼저 1절에서, 즉 “눈앞에 십자가가 있는데 누가 너희를 꿰더냐?” 라고 하면서, 그 뒤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 십자가는, 율법의 행위와 믿음을 모두 다 !!

거기에서 사도바울이 둘로 나누고 있는데, 즉 “아브라함이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었다” 라고 하면, 그 앞서서 5절인가에 보면, “너희가 믿은 것은, 성령의 일하심인가? 아니면 율법의 행위인가?”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목사님, 물론 의미는 같지만, 문장의 구조가 좀 다른데요? “성령의 일하심은, 율법의 행위인가? 아니면 믿음인가?”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 왜 그렇게 둘로 나누는가? 그냥 합치치 않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 십자가 사건은 이렇게 둘을 모두 다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해명이 되고, 그렇게 해서 그 내용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한 쪽을 빼버리면 왜곡된 십자가의 내용이 나온다는 말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갈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 야, 십자가 덕분에 내가 살았다 ??

사도바울은 이렇게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면서 두 가지를 다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만약에 인간이 그것을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옛날에는 율법으로 행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성령으로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자꾸만 옛날 이야기라고 하면서, 그것을 없애버리는 쪽으로 나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니 나는 구원을 받았잖아” 라고, 그렇게 우기려고 말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십자가에 있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그런 십자가에는 관심이 없고, “야, 십자가 덕분에 내가 살았다” 라고, 그렇게 최종적인 도착지점을 자기 구원에 두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이 툭 튀어나오면서 소리가 “하여튼 구원을 받으면 안 됩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십자가는 ‘간이역’ ??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십자가이지 인간의 구원이 아닌데, 그런데 인간들은 그 액센트를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구원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인간에게 이 십자가는 무엇인가? 자기가 처음 교회에 나와서 의례적으로 스쳐서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지, 그 과정을 통과하고 나면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나만 좋으면 되지 않는가?” 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고, 또한 욕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이 하는 기도는 무엇이겠는가? 쓴 잔을 마시는 것이 아닌데, 그런 쓴 잔은 구원받을 그때까지만 마시면 그만이고, 일단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는, 새 생명의 달콤한 풍성한 열매를 달라고, 그런 것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말이다.

◈ 율법의 행위와 성령의 일을 비교하면 !!

여기서 율법의 행위와 성령의 일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의 일은 그 주체가 당연히 성령인데, 즉 하나님이 주체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의 행위는 그 주체자가 누구인가? 그게 율법의 행위이니, 그것은 곧 ‘나’ 라는 말이다.

물론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 12절에서, 율법 그 자체는 선하다고 하는데, 즉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을 이루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율법을 성령께서 이루시면 그야말로 율법은 선이고 거룩이 된다는 말이다.

(롬 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사도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인간이 주체가 되는가? 아니면 성령이 주체가 되는가?” 라고 하는 두 가지를 서로 비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아닌 성령님께서 주체가 되어서 율법을 이루게 되면, 그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고 하니까, 믿음을 주게 된다는 말이다. 믿음을 말이다.

◈ 성령께서 일을 하시면, 곧 ‘믿음’ !!

왜 그런고 하니, 조금 전에 살펴본 갈라디아서 3장 5절을 보면 뭐라고 하는가? 즉 성령께서 우리에게 일을 하게 되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들음에서 나온 믿음이란 말이다. 그런데 성령이 없는 사람이 하게 되면 무엇인가? 그것이 곧 율법의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6절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한다는 말이다.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율법을 행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두 가지의 결과가 나오게 되는데, 물론 율법은 제대로 행하게 되면 축복인데, 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가? 저주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명기 28장에 줄줄이 나오는데 말이다.

◈ 율법에는, 축복과 저주가 모두 다 !!

그러므로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축복만 받은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도 함께 주어졌다는 것이다. 즉 축복과 저주가 모두 다 율법 속에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저주를 받게 되는데, 왜 그러한가? 우리 인간은 율법을 전혀 지키지를 못하니까 말이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래서 그 사람에게 전도를 하는데, 즉 “당신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라는 것도 반드시 이야기를 해야된다는 것이다. 축복만 이야기하고 저주를 빼먹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 아줌마, 선지국이 너무 비싸요 !!

그러니 교회는 음식을 파는 식당이 아닌데, 무슨 말인고 하니, 배가 고파서 식당에 갔는데 선지국이 그만 한 그릇에 6000원이나 한다는 것이다. 선지국은 싼 맛에 먹는데 말이다. 그래서 비싸다고 여기면, 그러면 그냥 그 식당에서 나오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의 교회는 그게 아니라, 들어갔다가 그냥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의 특징인데, 즉 천국은 자기가 가지 않으면 그만이 아닌데, 반드시 지옥으로 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식당의 경우에도, 음식값이 비싸다고 먹지 않고 그냥 나오면 주인이 뒤에서 소금을 뿌리면서 저주를 할지 몰라도 말이다(ㅋㅋ).

사도바울은 자기가 하고 싶다든지 답답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닌데,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축복과 저주의 종으로서 한다는 것이다. 옛날 구약 때는, 즉 모세는 율법을 통해서 축복과 저주를 전했는데, 이제는 그 율법의 완성이 되는 십자가를 가지고 축복과 저주를 전한다는 말이다. 

◈ 인간외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구조화가 !!

그렇게 십자가로서 증거할 때, 사도바울의 모습은 무엇인고 하니까, “너희들은 이미 저주를 받았다” 라는 것인데, 마치 세례요한이 하는 소리와도 같은데,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말이다. 즉 “이런 꼴통들아, 너희들도 구원을 받으려고 왔느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도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똑같은 소리를 했는데, 즉 “개 같은 여자야!” 라고 말이다.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것은 인간이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인간외부에 하나님의 말씀이 구조화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을 ‘구조’ 라는 말 외에 다르게 설명할 길이 없는데, 즉 우리 인간 속에 그런 구조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러한 구조에서 우리 인간은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태생이 그렇다는 말이다.

◈ ‘기르심’에 대해서 !!

공중의 참새를 누가 기르는가?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되어있는데, 또한 들풀도 역시 하나님이 기르시고 말이다. 그러면 참새와 들풀은 구조화가 되어있는데, 즉 그들은 자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냥 기르시는 분 앞에서 기르심을 당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구조화’ 라고 말할 수 있는데, 즉 덮어 씌어져 있다는 것이다. 혹은 다른 체제 속에 갇혀있다는 것이고 말이다.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참새와 들풀을 이야기하시면 우리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정작 우리는 무엇인가?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 인데, 또한 ‘무소유’이고 말이다. 또한 봉은사의 스님이고 말이다. 그리고 청와대의 비서실장이란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는데,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인간다우냐는 것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말이다.

◈ 예수님을 믿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 !!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정말 신기한 일이다” 라고 하는데,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는 말이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구조를 뒤집어씌우면 당연히 답답하다고 하면서 벗어버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인간의 참모습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어야 교회가 부흥이 되고, 화목하고 재미난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라도 자기에게는 그 무엇이라도 뒤집어씌우지 말라는 것이다. 즉 식당에 가서도 자기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테니, 즉 선지국이든 육개장이든 말이다. 그런데 “너는 이것을 먹어야 돼” 라고 구조적으로 뒤집어씌우지 말라는 것이다.

◈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만 ‘벌겋게 된 채로’ !!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자기 입맛에 당기는 국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십자가’ 라는 그야말로 뜨거운 국밥이 그만 자기에게 왕창 쏟아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 머리부터 해서 모두 데이고 말았는데, 얼굴은 벌겋게 되어있고 말이다. 그렇게 십자가가 뒤집어 씌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깨닫는고 하니까, “아하, 내가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 뜨거운 십자가 앞에서 말이다. 그러니 그 동안 화장을 하면서 꾸미고 한 것도 그만 모두 다 날아가 버리고, 그냥 벌겋게 데인 채로, 즉 죄인으로서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가 그만 삼계탕으로 만들고 말았는데, 속속들이 말이다(ㅋㅋ). 또한 그것이 구조화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런 놀라운 믿음이 생긴 것은 아브라함이 골라잡은 것이 전혀 아닌데, 즉 “우리 돼지국밥을 먹을까? 아니면 짜장면이나 돈까스를 먹을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런데 목사가 교회에서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야만 믿음이 생깁니다” 라는 말을 말이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설교시간에그만 버럭 화를 낼까 싶어서 말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정말 착하지요? 그러니 알라서 골라잡으세요” 라고 해야 교인들이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선택도 자기가 해야만 흐뭇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짜장면이든 돈까스든 간에 말이다.

◈ 야그가, 그만 못쓰게 !!

하지만 성도는 그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뜨거운 물을 홀랑당 뒤집어쓰고 말았기에, 그야말로 벌겋게 되어서, 그만 다 익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으로부터 “야, 너는 교회에 한번 갖다오더니만 어떻게 그렇게 되고 말았지?” 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뒤집어 씌어버리니 그 모양 그 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들어올 때는 멀쩡했는데, 그런데 나갈 때는 그만 십자가의 종이 되어서, 즉 그야말로 십자가에 미친 사람이 되어서 나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사건이라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아주 극렬하게 반발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성령이 역사하니 율법의 행위를 포기하게 되는데, 그렇게 모든 법의 행위에 대해서 포기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는데, 즉 우리 인간에게는 주체가 살아있어서 무엇이든지 지키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키면 지키려고 할 수록 율법은 이룰 수가 없고, 자기에게 저주만 주어진다는 사실까지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구조화 -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에 !!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그 뒤 10절에서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즉 “율법에 속한 사람들은,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에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구조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에 있다는 것이 말이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알지 말아야 할 것까지 알아버린, 인간 !!

이러한 십자가를 지실 분이 제자들에게, 또한 지셨던 분이 사도바울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밝히면서 다가오게 되면, 드디어 우리 인간들의 행함의 구조가 노출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행함의 구조가 무엇인고 하니, 즉 “알지 말아야 할 것까지 알았다” 라는 것인데, 즉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것은 우리 피조물인 인간은 몰랐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모르고, 오직 들풀이나 참새처럼 “주께서 기르시나니” 라고 하는, 그 구조에 그대로 만족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께서 길러주시고 주께서 살려주시는 그 위에 있는 구조, 그것이 곧 선악의 구조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칸막이를 치시고, “그것은 따먹지 말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선을 넘어가면 안 되는데, 넘어가면 곧 저주이고 죽임이란 말이다.  

◈ 같은 피조물인 뱀의 말을 들으면 안 돼 !!

그리고 인간은 뱀의 말을 들으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스린다는 것은, 피조물을 말을 듣지 말라는 것이다. 다스려야 될 피조물인 뱀의 말을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만 피조물에 불과한 뱀의 말을 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것은 창조주의 말씀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 창조주의 말씀을 듣지 않고, 피조물의 말을 들었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창조주의 말씀보다 같은 피조물의 말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서 1장에 나오는,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라고 하는, 오늘날 이 세상의 모습과도 너무나 똑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말씀을 백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말을 듣는 것을 더욱 더 좋아하니 말이다. 즉 성철이나 법정이 하는 말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예수님 - 들을 말씀만 듣겠다 !!

알다시피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는데, 즉 “천하의 모든 것을 다 주겠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천하를 모두 받고 말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 마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그것만 구분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면 마귀가 믿지 말라고 해도 믿을 것이고, 하지만 그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마귀가 그 무엇을 다 제공해준다고 해도, 전혀 들을 필요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알지 말아야 될 것을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 하지만, 악마가 피조물 속으로 들어옴으로서 !!

그런데 천상에서 전쟁을 일으켜서 패배한 악마와 그 하수인들이, 그만 이 땅으로 쫓겨나서 이제 우리 피조물 속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사실상 뱀은 아무런 죄도 없는데, 전쟁을 일으킨 악마나 그 잔당도 아니고 그냥 주께서 기르시던 뱀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그 뱀 속에 악마가 들어가는 바람에, 그 뱀이 인간에게 악마의 음성으로 속삭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찾아오셔서 인간과 뱀을 ‘꽈당’하고 서로 박치기를 시키고 말았는데, 마치 선생님이 청소도 안 하고 농땡이를 치는 학생을 둘 다 불러서 박치기를 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남과 여와 뱀이 그만 서로 ‘꽈당’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바로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몰았어야 되는데, 그런데 왜 알았는가?” 라는 것인데, 즉 구조가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생명나무를 철수시킴으로서 !!

십자가 마을에 김성환 목사님이 ‘빛’에 대해서 글을 올려놓았는데, 참 좋은 글인데,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글이 점점 더 많이 올라왔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제가 거기에 댓글을 달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서 생명나무를 철수시킴으로 말미암아서, 즉 비록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할지라도 생명나무만 보존하게 되면, 하나님의 안식과 완성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고 하니, 인간을 일을 저지르게 되니, 그 다음부터는 어떤 마음이 드는고 하니, 그만 자존심이 생기게 되어서, 즉 “우리가 저지른 일은 우리가 해결하자.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자” 라고 하는, 그야말로 되도 못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생명나무를 철수시켰다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거기에서 무슨 몸부림 만부림을 치고 발악을 해도, 결코 이미 알게 된 사실을 잊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우리 인간에게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

그러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산이든 바다든, 그 어디든 가서 이야기를 해야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즉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안 되는데, 그렇게 인간은 뭔가 알고 있는 것은 나팔을 불어야만, 그렇게 해야만 스트레스가 풀리든지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이 더 이상 그 위에는 아무런 구조도 없이, 즉 “나는 이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산다” 라는 것에, 그것에 한번 맛을 보게 되면, 즉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맛을 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미 맛을 본 것을 그만 쏙 빼버리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구조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을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순종을 하는 척을 해도, 역시 사람이 사는 맛은 무엇인고 하니, 그런 드라마도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이 사는 맛은, 신이 부처이고 간에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최고라는 것이다.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말이다. 이미 그것이 몸에 완전히 박혀있기 때문에, 그것이 평생을 두고 죽기 이전까지는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 나는, 장동건의 결혼소식이 더 좋아 !!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잔소리로 들리고, 같은 인간의 이야기는 아주 다정 다감하게 들리는데, 쉽게 말해서, “성경말씀을 들을래? 장동건과 고소영의 결혼 이야기를 들을래?” 라고 하면 무슨 이야기를 듣겠느냐는 말이다. 당연히 장동건의 결혼소식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성경말씀은 위의 구조에서 눌리는 명령처럼 들려서 골치가 아픈 것이고, 하지만 결혼 이야기는 자기도 어느 정도 비판할 수 있는, 즉 그렇게 비판을 한다는 것은 결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만큼은 안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남을 심판하겠다는 것인데, 즉 그런 것을 통해서 인간은 곧 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누구보다 더 뛰어나고 누구보다 더 월등한 영웅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 라는 책도 있는데 말이다. 즉 우리 인간은 최고의 자리를 그리워하고, 또한 사모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이 에베레스트에 처음 올라갔을 때는 대단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이미 7번이나 올라간 사람이 있는데, 그러니 이제는 시시하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14좌를 모두 등정하고, 그러면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모르겠는데(ㅋㅋ), 그래도 뭔가를 좀 남겨놔야 하는데 말이다.

◈ 이미 맛본 것은 유혹거리가 될 수 없어 !!

하지만 이미 맛본 것은 유혹거리가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유혹거리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최고의 자리를 향해서 자꾸 채찍질을 당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 보면, “누구든지 순종하면 그 사람의 종이 된다” 라는 말씀이 있다는 말이다. 즉 악마가 시키는 대로, 그러한 악마의 꾐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전혀 그런 악마의 유혹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아무튼 우리 인간은 몰라야 되는데, 그런데 그만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서 그 선을 넘어버렸다는 것이다. 신이란 것은 자기 마음대로, 즉 자기 원하는 것은 다 선이고 거룩이란 말이다. 자기가 하는 것을 다 옳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바로 그런 신의 맛을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 이 버릇을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누가 그런 인간을 길들이겠는가? 아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는데, 이미 악마가 더 좋다고 하는 인간을 말이다. 하나님은 잔소리를 하기에 싫고, 악마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해주니, 그런 악마가 훨씬 더 좋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 복음은 어떤 것인가? “신에게 경배하라” 라고 했을 때 “나도 신이다” 라고 나오는, 그것보다 더 좋고 기쁜 소식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즉 믿고 싶으면 믿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것을 자기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선택하고 말이다.

◈ 칼빈주의 ‘5대교리’ - 인간이 자기에게 던지는 메시지 !!

칼빈주의에 ‘5대교리’ 라는 것이 있는데, 소위 ‘TULIP' 이라고 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에게 관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에게 하는 소리라는 말이다. 즉 자기가 자기에게 말해서, “나도 신이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렇게 되어버리는데,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그런 5대교리가 모두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섬긴다는 것은, 그것을 고신측에서는 ‘코람데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하나님은 바로 자기 모습이란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섬기는 방식이 곧 5대교리라는 것이다. 즉 ‘무조건적인 선택’은, 자기가 자기를 선택한다는 말이다. 또한 ‘저항할 수 없는 은총’도  자기가 자기에게 은총을 쏟으니 당연히 저항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하나님인가? 예수님인가?” 라는, 그 둘 중에서 하나인데,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도 잘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차이가 난다고 하는 것을, 그것을 십자가 안에 모두 다 담아놓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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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주의 5대교리 - 영어의 첫 머릿글을 따서 일명 ‘튜울립(TULIP)’ 이라고 하는데, 칼빈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5대교리가 아니고, 칼빈은 이미 1564년에 사망했고, 화란의 라이덴 대학의 교수였던 알미니우스(Arminius)에 의해 주장된 5가지에 대해서, 도르트 회의(1618년)에서 칼빈주의자 고마루스(Gomarus)의 활약에 의해서 결정된 내용. 공교롭게도 고마루스가 알미니우스에게 신학박사를 학위를 수여함. 그리고 이 알미니우스 주장을 따르는 자들을 알미니안이라고 하고, 전통적으로는 존 웨슬레의 감리교가 여기에 속함. (녹취자 정리, ㅋㅋ)

1. T (Total depravity - 전적타락, 전적무능)         ↔ 부분적인 타락
2. U (Unconditional election - 무조건적 선택)        ↔ 조건적인 선택
3. L (Limited atonement - 제한된 속죄)             ↔ 우주적 속죄
4. I (Irresistible grace - 불가항력적인 은혜)        ↔ 항거할 수 있는 은혜
5. P (Perseverance of saints - 성도의 견인)        ↔ 은혜의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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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를 아십니까? - 뭔 말 ??

그래서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믿느냐고 하면 상당히 기분 나빠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을 믿느냐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도 옛날에 주일학교를 다녔다” 라고 하면서 나온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지금도 하나님은 믿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고 하면, 그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도 자기가 부정되는 것이 느껴지니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선택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뜨거운 물이, 아니 용광로의 쇳물이 위에서 쏟아지듯이 그렇게 덮어져야, 즉 성령께서 우리에게 일을 하셔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이 임한 사람은 믿음이 나오고, 그것이 아닌 사람은 행함이 나온다는 말이다.

◈ 사도바울의 권면도 율법인가?

그러므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 과한 수많은 질문을 종합해보면, 결국은 “사도바울의 권면도 율법인가?” 라는 것인데, 물론 사도바울의 권면은 선한 것인데, 즉 거룩하 의로운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계시이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율법도 악한 것이 아니고 선한 것인데, 그런데 문제는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이, 그것을 자기들의 행함으로 지키기 때문에, 그것이 저주가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 6장에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라고 했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당연히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레벨이 다 같은데, 아니 오히려 신약에서의 사도바울의 권면이 구약의 율법보다 더욱 깊이가 있기 때문에, 수준이 더 높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약의 사도이니 말이다.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 율법의 완성으로 덮쳐온 것이 곧 ‘십자가’ !!

그러니 율법을 버리는 것이 아닌데, 율법의 완성으로서 덮쳐온 것이 곧 십자가인데,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율법을 다 지킨 것이란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 십자가 안에서는 우리가 죄인으로서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하는 것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게 드러난다는 것 자체가 곧 율법의 완성이란 말이다. 

우리 인간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어디서 알겠는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즉 “아하, 이래서 내가 저주를 받아 마땅하구나” 라는 상태가 곧, “율법의 행함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 라고 하는 십자가의 취지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 되고, 그것이 의가 된다는 말이다.  

◈ 성화론 - 나를 영원히 섬기기 위해서 !!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가 자기를 증거하기 위한 종이 되니, 그런 자신의 종이 되니,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고생스럽고, 결국은 죽어서 지옥에 갈까 겁이 난다는 것이다. 즉 ‘나’를 위해서 ‘내’가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지키니, 결국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영원히 영생을 얻는 ‘나’를 섬기기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성화론’ 인데, 즉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잘 되기 위한 ‘나’는, 바로 선악을 알고 있는 ‘나’ 라는 말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것이 뭐가 잘못인가?” 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니가 알지 말아야 하는 것을 왜 알았어?”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몰라도 되는데 왜 알았느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구조적으로 하나님이 ‘기르시는’ 그 곳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왜 그 울타리를 넘어서 선악의 구조를, 즉 하나님만이 알아야 되는 그 구조를 왜 알았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좀 알면 왜 안 됩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알지 못해야 하는 것을 알면 안 되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이미 알아버린 상태에서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안 것을 “저는 모릅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인데, 즉 “나는 교회고 뭐고, 나 혼자 있는 것이 제일 편하다” 라고 하는 사고방식, 그래서 사람들이 나이가 많아지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 여러모로 냄새가 나는데, 물론 겉으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가 냄새나면 남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피해준다” 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냄새가 나면 남들에게 꿀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하고 싶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 서 장로님은 아직까지 청춘이지만 말이다(ㅋㅋ). 

그러니 우리 사람이 얼마나 자존심이 센지 모르는데, 남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이다. 즉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나’,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자기를 섬기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할 줄 모르는 ‘나’, 바로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섬기는데 있어서, 그게 제대로 되지 않으니 그야말로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데, 밤새도록 까탈을 부리고 말이다. 즉 “하나님, 당신이 뭔데 내가 나를 섬기는데 훼방을 놓는가?” 라고 하면서 새벽마다 항의를 한다는 것이다. 소위 그것이 인간의 기도인데,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당연히 기도할 줄 모른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냥 내비둬 !!

인간이 알고 있는 거룩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 정답이 바로 “그냥 내비둬!” 라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생각이 나는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우리 인간은 거룩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그것을 자기가 측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즉 “이근호 목사는 성화론을 거부해서 이단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거룩해한다” 라고 말이다.

* 성화자 : 이근호 목사는 성화론을 거부해서 이단이다.
* 이근호 : 성화론?
* 성화자 : 성화론을 몰라? 사람은 거룩해야지.
* 이근호 : 그러면 그 거룩을 누가 측정하는데?
* 성화자 : 물론 내가 하지.
* 이근호 : 그러면 니가 이단이구만.

◈ 인간에게, 이미 거룩은 땡, 땡, 땡 !!

자기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인간이라고 하면, 자기가 무엇을 행해서 자기에게서 거룩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은 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알아서 안 되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는 거룩이 일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그것은 자기가 행동을 나쁘게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몰라야 되는데 이미 알아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거룩이 아닌데, 즉 뭔가를 알고 행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거룩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도저히 거룩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이 거룩해지는 방법은 단 하나 !!

그런 인간이 거룩해지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런 인간을 쓰레기로 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든지 해서 바꿔치기를 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런 바꿔치기는 예수님의 율법 완성에 이미 다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즉 “어린양이 죽어서, 그 어린양을 믿는 자에게만 그 믿음으로 바꿔치기가 가능하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율법 안에만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인간의 몫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희생을 하셔서 감당해야 될 몫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분이 채찍에 맞으셨고, 그래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이다. 즉 오직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죽여버리고, 생명나무에서 따로 지음을 받은 인간으로 새롭게 탄생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 생명나무의 기능이 마귀에게서 피해를 입지 않는 한에는 모든 것이 ‘예’가 되고, 또한 정상이라는 말이다. 즉 생명나무가 정상적으로 가동이 되면 모든 것이 다 정상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나무를 따로 챙기셨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이미 집에 전기가 들어와 있는데, 그래서 전등 스위치만 올리면 되는데, 그런데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촛불을 준비하고 성냥을 준비하면서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가 들어와서 스위치를 올리니 양 사방이 다 훤하다는 것이다.

◈ 한 송이 장미꽃도 생명으로 피어나 !!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하는 책을 보면, 97년도에 십자가 마을 여름 수련회에서 제가 로마서를 강의한 것을 정리한 것인데 말이다. 거기에 보면 “한 송이의 장미꽃을 피우는데, 법이 아닌 생명으로 피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장미 한 송이라도 법을 지키기 위해서 피는 게 아니라, 그냥 생명이 임하니 꽃이 핀다는 말이다.

또한 참새나 들풀도 자기들이 법을 만들고 지켜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키우고 기르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물며 성도는 어떠하겠는가? 성도는 법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생명나무에서 공급되는 그 생명의 힘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생명을 받았다고 하면, 인간적으로(?) 그 생명만 증거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즉 “주님께서 주신 생명나무가 온전해서 저도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이다. 전혀 선악적으로, 즉 율법적으로 말씀을 지켜서 온전한 것이 아니라, 그 생명나무가 온전하기 때문에 우리도 온전하다는 것이다.

◈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받아라. 이것이 내 떡이다. 먹어라. 이것이 내 살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즉 만나만 쳐다보지 말고, 예수님이 주시는 떡이 진짜 영생을 주는 떡이니, 그것을 받아먹으라는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뭐라고 하는가? “아, 어렵도다!” 라고 하는데, 즉 자기들도 그래도 아는 게 조금은 있다고 말이다.

(요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 인간은, 구조적으로 온전하기에 !!

그러므로 처음부터 우리 인간은 인간을 위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한 인간을 창조하셨고 하면, 그 에덴동산에는 두 종류의 나무는 없었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에덴동산은 그냥 만들어진 그 자체로서 온전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면서, 그 에덴동산에 그런 나무들을 다 설치해놓았다는 것은, 인간은 홀로 온전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온전하다는 것이다. 즉 선악과를 따먹지 않으면 온전하고, 또한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온전하다는 말이다. 그럴 때만 온전한데, 그런데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이제 온전한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 할례는, 홀라당 껍데기를 벗겨봐야 !!

제가 대전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즉 할례라는 것은 껍데기인데, 그 껍데기를 벗기니 그 안에 더러운 죄가 있다는 말이다. 말을 하고 보니 표현이 좀 그러한데(ㅋㅋ). 아무튼 우리 인간은 할례를 행해봐야 자기가 죄인임을 안다는 것이다. 바로 그 할례가 신약에서는, 골로새서 2장에 보면 십자가라고, 즉 ‘십자가의 죽으심’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 Why me?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으셔야만, 우리는 비로소 “아하, 내가 저렇게 죽어야 하는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너무 부담스럽다고 해서 자꾸만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니까, “내가 왜 죽어? 내가 왜 당해야 하는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내가 왜?” 라고 말이다.

그래서 해군에 군인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자기 아이가 하필이면 천안함에 타서 비참하게 죽어야만 하느냐고 하늘을 원망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들은 매일같이 “우리 아이가? 왜 우리 아이가?” 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필이면 왜 나인가?” 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늘의 눈송이는 논과 밭을 가지리 않고 내리는데, 그러니 구조적으로 덮치는데는 전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즉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옷인데, 그런데 “나는 이렇게 기도해서 은혜를 받았어” 라는, 그 따위의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가 그 무슨 짓을 하든지, 백설이 밤새도록 내리면 모든 것이 다 하얗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대지가 그만 하얗게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 인간은, 신이 되기 위해서 성경을 !!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성화론을 주장하면서 철학이나 학문을 동원해서,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신학을 만드는데, 그래서 성경을 찾아보고 말이다. 물론 좋게 말하면 그렇고, 그것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자기가 신이 되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자기가 마땅히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위해서 성경을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타고 난 태생이 그러한데, 즉 이미 알았으니 문제가 있는데, 그런데 자꾸만 그 문제를 희석시키려고 한다는 말이다. 즉 “내가 이미 알았지만, 그래도 천당에는 좀 넣어주이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선악과를 따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가야 되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데, 즉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그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십자가가 무엇인지, 즉 예수님은 왜 그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는지, 그런 것이 궁금해서 성경말씀을 보아야만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살 수 있을까?” 라고 하면서 성경을 본다는 것이다.

◈ 니가 누구시지요?

과연 이 세상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맞는가?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는 것이 있는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니가 누구시지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   나   : 주님,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 예수님 : 니가 누구시지요?
*   나   : 아니, 저를 모릅니까?
* 예수님 : 니가 혹시 안개?
*   나   : 예?
* 예수님 : 안개가 맞구나.
*   나   : 안씨가 아닌데?
* 예수님 : 그냥 하나의 점으로 만들어서 확 밀어봐?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니가 누구시지요?” 라고 하는데, 즉 주님은 인간 전체를 그냥 하나의 아담으로 보시는데, 그 아담의 새끼를 일일이 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나도 아담, 너도 아담, 에브리바디 다 아담이다” 라는 것이다. 아담1, 아담2, 아담3 등등, 그런 식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모두 그 나물에 그 밥이니 말이다.

◈ ‘묶어서’ 다스리기에 !!

그것을 두고 어려운 말로 ‘묶는다’ 라고 한데, 마치 우리가 잔디밭의 잔디를 모두가 다 하나의 잔디로 보듯이 말이다. 하지만 잔디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다 다른 잔디라는 것이다. 그리고 새의 종류도 다 다르지만, 그러니 우리는 하나의 새로 보는데, 왜 그런고 하니, 우리 인간이 피조물의 이름을 짓고서 다스릴 때, 그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묶어서’ 다스리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서 어려운 이야기를 해보면, 우리 인간은 마치 잔디를 하나로 묶듯이 그렇게 묶는 행위를 하는데, 그렇게 묶을 때에, 그 묶는 주체와의 ‘동질성’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즉 “내가 너를 이름을 지어서 묶었기 때문에, 너는 나를 위해서 살아야만 한다” 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동질성이 상대를 통해서 다시 동질성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 그러면, 묶는 주체와의 ‘동질성’을 보장받아 !!

다시 말해서, “내가 너를 잔디라고 묶었다” 라고 하면, 그런데 잔디가 하는 말이 “옆의 잔디와 저는 다릅니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야, 다를 게 뭐가 있어? 똑같은 거야. 그러니 가만히 있어. 내가 묵었으면 한 통속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묶은 것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를 묶은 양반이 아담이라고 하고, 우리는 그 아담과 동일한 속성과 구조 속에서 동일한 운명 속에 놓여있게 된다는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아담으로 묶어질 때, ‘내’ 죄와 ‘너’의 죄가 없는데, 즉 우리에게는 하나의 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담으로 하나로 묶어지게 되면, 죄도 역시 하나로 묶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 죄가 바로, “니가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고, 그래서 알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았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죄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 그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다.

◈ 목사님, 저는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

그런데 이것도 모르고 자기의 성화론이 공격을 받게 되면, “그러면 내가 예수님을 믿고, 또 다시 죄를 지어도 되겠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바로 자기가 짓는 죄만 자꾸 죄라고 생각하게 그렇다는 말이다. 즉 죄 자체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 저는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개인적으로 짓는 죄는 죄가 아닌데, 즉 이미 태생 자체가 죄를 지은 상태라는 것인데, 즉 모태로부터 말이다. 바로 그것을 다윗이 언약을 통해서 알았다는 것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

그러니 교도소에 가서 전도를 하면서, “나는 착한데, 당신은 나쁜 놈이야” 라는 입장에서 하게 되면 안 되고,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말이다. 전도연이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삐쳐서 ‘거짓말이야’ 라는 노래를 틀었다는 것이다(ㅋㅋ). 방금 그 내용은 화 ‘밀양’을 알아야 되는데 말이다.  

자기는 전도하기 위해서 교도소에 자기 아들을 유괴해서 죽인 그 범인을 찾아갔는데, 그런데 그 범인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전도를 받고 회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범인이 하는 말이, 자기는 더 이상 죄가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연이 뿔따구가 나서 목사가 설교는 하는데,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라는 노래를 튼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자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말이란 것이다. 그렇게 그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녀는 오로지 자기의 경험만이 진실하다고 우기기 때문이란 말이다. 그래서 자기를 빼놓고 그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동질성 !!

하지만 예수님은 그 어떤 인간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 동질성을 유지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메시야가 메시야로 밝혀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니 말이다. 즉 어린양으로서의 길을 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동질성을 유지하고 계시는데,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뭐라고 하는가? 자기들의 동질성을 주장하니, 두 개의 동질성이 그만 마찰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이 나오는데, 가음한 여인이 예수님이 잡혀왔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경우에, 자기들은 착하고 그 간음한 여인은 나쁘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를 돌로 쳐죽이려고 할 때, 그때 그들은 그 여인을 그만 하나의 항목으로 묶고 말았는데, 즉 “나는 돌로서 침으로서, 이런 돌로 치는 나는 너보다 더 의롭다” 라는, 그런 동질성으로서 자기들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 예수님 앞에서 뽀록이 나고 말았다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죄 없는 먼저 자가 돌로 치라” 라고 함으로서, 그들의 동질성을 묵살해버리시고, 그리고 그 간음한 여인을 용서함으로서, 즉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서할 수가 있는 자격자” 라고 하는, 그 안에서 그만 묶어버리셨다는 것이다.

◈ 거룩이란, ‘십자가의 만개’ !!

그러니 우리도 역시 어떠해야 하는가? 간음한 여인처럼 항상 주님 안에서 죄인으로 모습으로 서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십자가의 동질성이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피어나고 만개하는데, 바로 그것을 두고 두 글자로 ‘거룩’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일하고 있음 표출되고 방출될 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시기에 유일한 거룩이 된다는 말이다.

(요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요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요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요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 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그러므로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 영생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물론 따먹지 않은 상태에서 영생은 생명나무의 하나의 과일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의 영생은, 우리 죄를 대신 희생하신 그 살과 피가 영생의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 십자가 이야기만 듣고 싶어요 !!

그것이 아닌 추상적인 영생은, 모두가 다 인간들이 상상한 것인데, 이슬람이나 불교나, 철학에도 있는 말이다. 그러니 낙원이나 극락은 얼마든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영생나무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비해서 우리가 아는 영생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 모습으로만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에게는 주님의 쓴 잔이 바로 영생의 잔이 된다는 말이다. 

옛날 동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데, 즉 어떤 마을에 가니 늙은 사람은 없고 젊은 자들만 있는데, 알고 보니 마을에 분수가 있어서 그 물을 마시기만 하면 계속해서 젊음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분수의 물이 쓰든 짜든 간에 마시지 않을 수가 없는데, 즉 아주 즐겁게 매일같이 십자가의 잔을 비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오직 십자가만이 영생이 되고, 그런 십자가의 이야기만을 하고 싶고, 또한 듣고 싶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게 십자가의 만개성을 느낄 때, 물론 본인은 십자가가 크게 보이는데, 하지만 상대적으로는 항상 돌발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것을 본인에게 십자가 의식이 만개할 때 의식을 해야됩니까? (김대식 집사?)

* 답변 - 우리는 의식을 할 수밖에 없는데, 왜 그런고 하니, 만약에 어떤 아가씨가 자기는 아주 예쁘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우연히 정말 진짜 미녀를 만났다고 하면, 그 여자는 그 미녀를 보고 또 누구를 보겠는가? 당연히 “이런 나는 예쁜 것이 아니네” 라고 하면서, 양쪽을 다 보게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하면서 상대방을 보았을 때 용서해달라고 했는데, 물론 용서를 하는 상태에서는 선악적인 의식이 없는데, 그런데 상대방을 보고서 판단할 때, 용서라는 것보다는 차이가 났다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습니까?

* 답변 - 당연히 차이가 나야 용서가 되는데, 왜냐하면 용서는 반드시 그 앞에 죄가 있는데, 그러니 자기에게 피해를 입힌 자가 발생이 되어야만,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돌맹이라도 던져야 용서가 된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그 생각이 선악적인 판단이면 어떻게 됩니까?

* 답변 - 그것은 선악적인 판단이 아니라, 생명나무 안에 선악적인 것이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생명나무의 관점에서 선악과를 다시 본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렇다면 그 상대방을 자기와 똑같은 죄인으로 보자는 말입니까?

* 답변 - 그래서 용서가 된다는 것이다. 즉 “나도 당연히 저렇게 되어야 하는데, 웬 은혜인지 그것이 죄임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 덕분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자기도 당연히 돌을 던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을 했듯이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신원해 달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요? (최복희 간사?)

* 답변 - 그러므로 복음을 전해야 피해를 받는데, 즉 복음을 전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피해를 입으면, 거기서 용서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원하는 것도 피해를 본 사람이 하는 것이지, 피해를 보지 않은 자가 신원할 수 없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내가 신이다” 라고 하면서 살아가는데, 그에 반해서 성도는 십자가의 종으로서 살아가니, 그 집단에서 그만 왕따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신이다” 라고 할 때는 ‘나’ 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데, 그런데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구조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나’ 라는 것은 구조적이 아닌데, 왜냐하면 ‘나’는 ‘나’밖에 없으니 말이다. 즉 뭔가 덮어씌우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나’만 최고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십자가는 구조적인데, 즉 죄가 있고 그 앞에 자기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 구조로 되어있으니까, 그 둘 사이에서 한 쪽은 “야, 너도 나처럼 자유롭게 살아라” 라고 나오고, 반면에 다른 쪽은 “나는 그것보다 예수님의 은혜가 더 좋아” 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거기서 상대방이 분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종의 특징이란 말이다.

◈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런데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귀신들린 자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그들이 합창을 한다는 것이다. 즉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하는데, 여기 ‘저희’ 라고 했으니 분명히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고, 또한 뭐라고 외치는가? “아니,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서 이렇게 일찍 와서 우리를 괴롭힙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 8: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그러니 마귀가 인간들과 상대를 할 때는 까불고 설치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상대할 때는 그만 기가 팍 죽어서 들어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하늘에서 있을 곳이 없어서 이 땅에 쫓겨난 자들이기에, 이미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쫓겨온 그 전체가 무엇인고 하니, 생명나무 안에서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마귀가 가는 곳은 다 멸망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저주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 제발 내비둬 !!

아무튼지 마귀와 함께 있으면 무조건 저주가 주어지는데, 그런데 그 마귀가 뭐라고 하는가? “예수여,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왔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줄여서 말하면, “제발 내비둬!” 라는 것인데, 즉 자기들이 그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그냥 있는 그대로 좀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멸망을 당할 때는 당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지금은 아직 자기들이 멸망을 당할 때가 아닌데 왜 미리 오셨느냐고, 그렇게 예수님을 보고 따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직까지는 인간 전체가 아니라 귀신이 들린 그 두 명의 사람에게만 미리 오셨는데, 그래서 그들에게 들어있는 마귀를 다른 곳으로 쫓아내신다는 것이다. 즉 귀신을 장소이동을 시키는데, 그 두 명의 사람에게서 그만 돼지 떼로 옮겨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돼지 구제역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러니 아직 마귀를 멸망시킬 때는 아닌데, 왜냐하면 아직 구원받을 자가 남아있기에 말이다. 그래서 마귀를 이동을 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마귀는 아는데, 하지만 인간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이미 복음에 가리어진 자들이기에 말이다.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귀신은 마귀의 종이고 말이다.

◈ 나는 너를, 나의 의가 되게 했다 !!

아무튼 생명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로 온전한가 하면,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는 완벽한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심한(?) 은혜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너를 나의 의가 되게 했다” 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의가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이러한 것이 참 어려운데 말이다. 즉 “율법을 행위로 지킬까요? 지키지 말까요?” 라고 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율법이 가만히 있지 않고 우리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즉 율법이 우리에게 완성된 형태로 찾아와서, 그렇게 율법이 완성된 형태인 복음, 즉 십자가의 의를 아는 자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바로 그것을 율법이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율법의 주체는 하나님이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가지고, 혹은 복음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작품으로, 즉 하나님의 의로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그것조차도 우리는 믿어야 하는데, “지킬까요? 말까요?”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이미 성도는 그 자체가 전혀 하자가 없이 온전한데, 그 이유는 바로 생명나무 자체가 온전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피와 살이 새언약으로 온전하기 때문이고 말이다.

◈ 십자가를 무마시킬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없어 !!

알다시피 구약의 돌판은 그만 깨어지지만, 그러나 주님의 피는 깨어지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의 죽으심이 곧 깨어짐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하지만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그 십자가를 무마시킬 수 있는 무기는 더 이상 우리 인간세계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마귀에게도 없고 말이다. 물론 마귀가 예수님의 발목을 잡았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 발목을 빼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성환 목사님이 지적한 것처럼, 이 세상은 빛과 어둠의 반복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제가 뭐라고 답글을 달았는고 하니,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면, 즉 빛과 어둠이 반복되어도 그 자체가 어둠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해가 가리어지고 깜깜했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이미 어둠이라고 규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 현대 물리학 - 우주의 구조 !!

우리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제일 난해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성경말씀은 분명하게 언어이고 문자인데, 그런데 그 언어와 문자가 어떻게 실제로 꽃나무가 자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 그것을 서로 연관시키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는 것이다.

‘우주의 구조’ 라고 해서, 제가 어려운 현대 물리학에 관한 책을 읽고 글을 썼는데, 왜 그런 책을 읽고 글도 쓰고 해야되는고 하니까, 선악구조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자연을 분석하면서 지금까지 이룬 것의, 최첨단이고 최고의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그 책의 내용이라는 말이다.

긴긴 인류의 문명과 그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높은 고지에 올라와 있는 것이 바로 현대 물리학인데, 그것을 끄집어 내어보면, 물론 참으로 나름대로는 대단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디로 건너갈 수 없는고 하니, “내가 왜 죽는가?” 라는 것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소설의 실제 인물인 이휘소 박사가, 그렇게 전자기력과 핵력을 통합시키는 것에 연구를 했는데, 거기에는 4가지 힘이 있는데, 그 중에서 2가지를 그 양반이 정리를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연구한 최첨단의 과학자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즉 “왜 죽으며, 무엇 때문에 죽으며, 내 죄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양반은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물론 미국에서 말이다.

◈ 물리학에서 영적 세계로 가는 길이 있는가?

그러므로 인간의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건너가는 길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없다고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아는 입장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복음에서는 현대 물리학까지 건너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복음으로 건너오지 못하지만 말이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아무리 연구해도 영적세계를 전혀 알 수가 없는데, 기껏 한다고 해봐야, “이 우주 옆에는 또 어떤 우주가 있는가?” 라는, 그런 것만 이야기하지 말이다. 차원이 어떻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연구해도 결국 죽는데, 아인슈타인도 죽었고 말이다. 물론 스티븐 호킹 박사도 곧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인슈타인의 두뇌를 아무리 해부해도, 거기에는 영혼이고 뭐고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 하지만, 십자가는 물리학으로 갈 수 있어 !!

그런데 십자가는 현대 물리학으로 건너갈 수 있는데, 즉 물리학을 이야기하는 영혼과 정신에 대해서, 즉 그 주체에 대해서 문제를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학을 하는 인간의 주체 문제도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들은 자연을 보면서, 그들이 어떤 관점에서 자연을 물리학으로 만들어내었는지, 그 모든 경로가 십자가의 복음으로는 다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고 하니, 우주자체의 변화를 ‘나’의 동질성으로, 즉 우주의 변화 중에서 자기가 동질성을 느낄 수 있는 것만 골라서 당기면 된다는 것이다. 그 당기는 방법이 바로 실험과 실습인데, 그것을 벗어나려고 데카르트가 그렇게 애를 썼지만, 그래서 수학까지도 의심을 했는데, 하지만 그렇게 의심하는 자기 자신만은 의심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 양반이 물리학자이고 수학자인데, 그래서 물리학에서 영적세계로 넘어오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둘로 나누어지고 말았는데, 즉 “물질은 물질이고, 나는 나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또 다시 갈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 당신의 죽음은, 바로 당신의 죄 때문에 !!

하지만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즉 “당신이 죽는 것은 바로 당신의 죄 때문이다” 라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물리학이나 신학과 같은 것을 통해서, 인간의 모든 죄가 다채롭게 펼쳐진다는 것이다.

바로 그 죄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하자가 없다. 나는 오류가 없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에게서 나와서, 자기로 말미암아서,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그 따위 행태인데, 즉 자기 동질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도대체 자기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또한 무엇을 몰라야 하는지, 그런 것도 구분하지 못하는, 그런 사고방식이 곧 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끊임없이 알아야 되고, 또 알아야 되고, 또 왜냐고 물어봐야만 되는, 또한 계속해서 그런 호기심이 발동되어야 하고 말이다. 그 자체가 바로 원래 하나님께서 만든 구조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그런 ‘단독자’로서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까뮈의 ‘이방인’ !!

그것이 까뮈의 ‘이방인’ 이란 책에 보면 나오는데, 그는 인간을 우주의 별처럼 그렇게 혼자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전부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여러분 곁에 없습니다. 그러니 엄마가 죽어도 울지 마세요” 라고 하는 내용이 있는데, 왜냐하면 “엄마는 엄마이고 나는 나다” 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는 ‘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말이다.

그렇게 “나만 있으면 된다” 라고 보았는데, 물론 철학자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데, 그러면 ‘나’ 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그 ‘나’는 바로 몸뚱아리인데, 그래서 그 몸을 조사해보니 거기에는 세포의 욕망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생물학자와 같은 과학자들의 몫인데, 그렇게 인간을 분해하니 세포의 욕망만 가득하더라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은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그 세포를 다시 원자와 분자로 나누는데, 그렇게 되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있다고 하면 저기에 있고, 또 저기에 있다고 하면 여기에 있고 말이다. 생물학보다 더 깊이 들어간 것이 물리학인데, 그렇게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인간자체가 없더라는 것이다. 즉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결국은, ‘돈’ !!

그래서 “그냥, 될 대로 되라!” 라고 하는데, 결국 물리학을 지배하는 것은, 즉 물리학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는 말이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돈이 필요한데, 그러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돈 때문에 물리학을 한 것이고, 돈 때문에 신학을 했고, 또한 돈 때문에 목사를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돈 앞에서는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은 아예 묻지도 않는데, 그냥 돈만 생긴다고 하면, 즉 돈의 양에 따라서 자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즉 “돈이 있으면 나답고, 돈이 없으면 나답지 않다” 라는 말이다.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 팔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그렇게 모두 다 팔 수가 있는 인간이 있느냐는 말이다. 아무리 다 팔아도 자기는 여전히 남는데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저희들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것 자체가 생명나무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저희에게 참으로 은혜가 됩니다. 주님 앞에서, 생명나무 앞에서 저희들이 죽어야만 될 죄인임을 깨닫게 된 것이, 또한 그것이 바로 생명나무로 인한 온전한 의인이 된 것을 알게 된 것이고, 그런 기쁨과 은혜를, 즉 주님의 의의 종이 된 것을 기뻐하며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5,18 오후 8시에 마침.

                                                           주님, 저는 돈 때문에 무엇을 버렸습니까?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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