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6월 7일 피26강 성화론(언어술=속임수=집중력)을 초월한 성령

100607 피26강 성화론(언어술)의 반대인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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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607피p100언어술을초월한성령

피26강 성화론(언어술=속임수=집중력)을 초월한 성령, 성화론(언어술)의 반대인 성령

[10 대구강의 8] - [피 26] - 언어술을 초월한 성령
                                                                                
                                                          10,06,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죽은 자는 일거리가 없다 !!

오늘은 교재 100페이지를 살펴보겠는데, 우리가 지난 시간에 ‘성화론의 허구성’을 공부하면서, 그러한 성화론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과연 추가하는 인간의 행위가 더 있어야만 하는지, 바로 그것에 대해서 다루었다는 것이다. 즉 “추가가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는가?” 라는 문제라는 말이다.

만약에 더 이상 추가가 필요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로서는 구원되지 않고, 인간의 행위를 추가해야 되는지, 바로 그 문제에 있어서 성화론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더 이상 추가할 필요가 없고 예수님을 믿으면 합당한 행함이 나오는 것으로서, 그렇게 이 추가함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합당한 행위가 성도에게서 나온다고 할 때, 과연 그것이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이 계셔서 예수님의 행위로 나오는지, 아니면 그것이 그 사람의 행위로 나오는지, 바로 그러한 문제가 남는다는 것이다.

◈ 사르트르의 단편소설 ‘벽’ !!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칠판에 한번 적어보면, “죽은 자는 일거리가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유명한 사르트르의 단편소설인 ‘벽’ 이란 작품에서 이야기한 것인데, 스페인 내란을 다룬 소설인데 말이다. 이 양반은 철학자이면서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을 살펴보면, 사형수가 3명이 나오고 그들을 돌보는 벨기에 의사가 1명 등장하는데, 거기에서 사형수는 가만히 그냥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을 사람이기에 일할 거리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의사는 국가에서 시키는 대로 그 사형수들을 진찰하는데, 즉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말이다. 그것을 두고 사르트르는 “죽은 자는 일거리가 없지만, 반대로 산 자는 일거리가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소위 성화론자들이 십자가 마을을 보고 뭐라고 공격하는가? 즉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는 말이다. 즉 일거리가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미 예수 안에서 죽었는데, 무슨 헌금이 필요하고 봉사가 필요하냐는 말이다. 누구(?) 이름을 거론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죽은 자는 일거리가 없으니, 즉 십자가 마을의 주장대로 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성화론자들이 그러한 주장을 할 때, 그들의 주장을 분석해보면 어떠한가? 물론 자기가 혼자 있다고 하면 그 말이 틀림없이 맞는데, 즉 “죽은 자는 일거리가 없다” 라는 것이 말이다. 굳이 사르트르의 말까지 인용하지 않아도 말이다.

◈ 그런데 그 사람 속에 !!

그런데 그 사람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죽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산 자는 일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 속에 있는 예수님은 일거리가 있는가? 없는가? 당연히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2장 29절에도 나오는데,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는 죽고 자기 안에서 예수님이 살아있는 사람은 일거리가 있는가? 없는가? 물론 있다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런데 그런 사람은 본인 자체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일을 하지 않으면 일거리가 없다고 결론을 짓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교회 교인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가 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교회가 되고 마니, 그런 교회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지금 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주장이 옳은가? 우리의 주장이 옳은가?” 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구원하는지, 바로 그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 어서 오세요 ??

(그때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 어서 오세요. 할 수 없이 다시 시작하겠는데(ㅋㅋ),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할 때, 그 구원하는 방침에 대해서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여러분도 인정을 하지요?

저는 이러한 것에 대해서, 우리교회에 나오다가 지금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오 장로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한 자라에게 모이게 해서 이야기를 하게 한다면, 즉 “나는 이래 이래서 우리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서로 토론하게 해서, 그것을 책으로 편집을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책으로 편집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인가? 만약에 그렇게 책으로 만들어낸 그 내용이, 즉 “나는 이래 이래서 우리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 성경과 합치가 된다면, 그렇다면 우리교회는 당연히 비성경적으로 구원을 시도한 엉터리 교회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그들이 카페에 모여서 하루종일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데 그것을 모아 보니까 성경말씀과 맞지 않다고 하면, 즉 그것이 성경에 위배된다면, 그들은 결국 우리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떠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목회자의 설교는?

그래서 저에게 설교하는 방식을 이야기해달라고 하면 매우 간단한데, 그것은 우리교회 교인들을 보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교회에 다니다가 나갔던 사람들이 여기에 앉아있다고 했을 때, 즉 그들이 지금 팔짱을 끼고 “그래서 나는 이 교회에 다니지 못하겠단 말이야!” 라고 하면서 앉아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것이 남의 교회 이야기가 아니니 목사님들도 잘 들어놓으면 좋은데 말이다(ㅋㅋ).

그러면 저의 관심사는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은 오직 말씀대로만 하시니 우리교회가 옳다고 하면 안 되고, 왜냐하면 성경만이 옳으니 말이다. 그러면 성경말씀대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이래서 우리교회는 싫다” 라고 하면서 나갔는데, 그러니 여기서 우리교회 교인들이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교회 교인들은 “우리교회는 옳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우리는 성경말씀을 이렇게 풀이하는데, 그러면 우리교회에 지금 안 나오는 사람들은 이 성경본문을 어떻게 풀이합니까?” 라고, 그렇게 서로 대화를 하면서 말을 주고받는 것이 바로 설교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보는데, 혹시 다른 의견이 있습니까? 이 본문에 대해서”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

예를 들어서, 지난 주일의 설교본문처럼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다” 라고 했을 때, 그래서 제가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은 화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면, 그러면 팔짱을 끼고 있는 그들이 하는 말이 “아니, 교회가 칭찬을 좀 해줘야지. 비난만 한다면 무슨 재미로 교회에 나오겠는가?” 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그런 모임이 하나 만들어졌을 때, 그것이 과연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 그 말씀과 같으냐는 것이다.

(눅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런데 만약에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교회에 칭찬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닌데, 그런데도 이근호 목사는 사람들을 칭찬밖에 할 줄 몰라. 그래서 기분이 나빠서 우리교회에 다니지를 못하고 나갔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누가 옳은가? 당연히 그들이 옳은데, 왜냐하면 성경말씀이 맞기 때문에 그들이 옳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가 설교를 할 때는 반드시 악담과 그 이유를 퍼부을 사람들을 많이 생산하도록 해서, 그들이 나가서 무슨 악담을 하는지, 거기에 귀를 쫑긋 세울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축복을 한다고 복이 오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오히려 그 반대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저주를 받아서 메시야가 되었는데, 즉 주가 되셨다는 것이다. 그와 똑같은 이유로, 우리가 그러한 길을 간다고 하면, 이 세상으로 미움과 저주를 받을만한 이야기를 해주어야만,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과 한 통속이 된다는 말이다.

◈ 과연 누구 영광이고, 누구 자존심인가?

그들이 악담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조사를 해보면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곧 ‘자기 영광’ 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풀이하면 ‘자기 자존심’ 이고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주의 영광’ 이고,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자존심’ 이라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자존심과 인간의 자존심이 충돌을 일으키는 현장이 바로 교회이고, 예배이고, 설교라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교회가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자존심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인간들의 영광과 자존심을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그래서 그들이 도저히 견디다 견디다 참지를 못하고 우리교회를 뛰쳐나갔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우리교회가 이단이고, 그들은 옳고 바른 선택을 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간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과연 주님의 영광과 자존심을 높이지 않는다고 해서 나갔는지, 아니면 자기들의 영광과 자존심을 높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나갔는지, 그것을 살펴보니, 아직까지는(?) 자기들의 자존심을 높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나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아직까지는 우리교회가 건전함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만약에 다같이 인간의 자존심과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 그들이 전혀 나갈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참다가 참다가 나갔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 자존심과 영광의 문제라는 것이다.

◈ 다시, 죽은 자는 일거리가 없다 !!

이제 다시 한번 살펴보면, “죽은 자는 일거리가 없다” 라고 했을 때, 따라서 찬양이나 예배나 기도나 헌금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을 때,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십자가 마을을 공격하는 자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즉 “누구누구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어. 왜냐하면, 죽은 자는 일거리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은 자이기에 아무 것도 할 게 없다” 라는 것은 인간이 자기 홀로 있을 때의 일이고, 만약에 자기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면, 물론 죽은 자는 일거리가 없겠지만, 그러나 산 자는 일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사람 속에서는 무엇이 튀어나오는가?

그러한 사람은 자기 자존심과 자기 영광을 위한 일거리는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자존심을 위한 그 주님을 살아서, 주님의 영광과 자존심을 위한 일거리는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성화론은 인간이 무엇을 추가해서, 즉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때문에, 그래서 성화론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우리는 죽고 예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면, 그래서 주님의 일거리가 나온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일하심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거룩이 된다는 말이다. 

◈ 어이, 같이 일을 좀 하자 ??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는 그냥 맹탕 빈손으로 들어오시는 게 아니라, 즉 “어이, 너는 나하고 같이 일을 좀 하자. 그래야 일이 완성된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룩을 홀로 완성한 채로 우리 안에 오셔서, 그렇게 해서 죄 많은 우리를 통해서 그 주님의 완성하심이 어떠한지, 즉 그 완성태의 면면을 보여주는, 그렇게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초의 경우에 어떻게 빛을 내는가? 그냥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몸통을 이루는 파라핀이 녹아야만 비로소 불꽃을 낸다는 것이다. 물론 심지도 같이 타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야 빛을 내면서 그 주위가 밝아진다는 것이다.

◈ 어, 왜 타지를 않지?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에 있어서 떨기나무가 등장하는데, 그런데 그 떨기나무에 계속해서 불이 붙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계속해서 타는 떨기나무 속에 계신다고 하는 것은 모세로 하여금 “어,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방식이 다르네” 라고,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출 3: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출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 3: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출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 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러니 모세는 “왜 타지를 않지?” 라고 하면서 그것이 궁금한데, 아무튼 그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세 자신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면 그냥 쉽게 타버리고 마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세는 당연히 그것이 궁금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세는 그때부터 타지 않는 분의 종이 되고 마는데, 그러니 모세는 그 이후부터는 살아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저히 못하는 일을 주께서 내 안에서 이루시는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말이다.

바로 그 모세언약과 더불어 연이어지는 것이 여호수아였고, 그 여호수아에게 이어지는 모세의 모든 신기한 일을 왕의 입장에서 해야될 것이 곧 다윗언약이고, 바로 그 다윗언약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다 해내시려고 오신다는 것이다.

◈ 또 다시, 죽은 자는 일거리가 없다 !!

오늘 강의에서 중요한 것을 다시 강조하자면, “죽은 자는 일거리가 없다” 라는 것인데, 즉 죽은 자는 일할 필요도 없고, 일거리도 없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사르트르의 스페인 내란을 다룬 ‘벽’ 이라는 소설을 보면, 내일이면 죽을 사형수는 그냥 멍청하게 가만히 있는데, 그런데 의사는 너무나도 분주하다는 것이다. 그 사형수의 몸에 이상이 없는지를 진찰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이제 죽는 자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인데, 다만 살아있는 자만 일을 하지 말이다. 바로 그러한 산 자만 일을 한다는 원리를 이 사르트르가 제대로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으로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알고 보면 너무나 간단한 원리인데 말이다. 그러니 노벨상을 타기가 너무나 쉽다는 것이다(ㅋㅋ).

그렇게 죽은 자는 일거리가 없다는 것인데, 여기서 사르트르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죽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살아남아야 그것이 인류문화에 보탬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인간의 자존심, 즉 자기 자신의 영광과 자존심이 항상 문제라는 말이다. 

◈ 인간은 언제 ‘나’를 느끼는가?

여기서 진도를 좀더 나가보겠는데, 즉 성화론의 문제점을 계속 이야기해보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 인간이 자기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 그러면 이 ‘자기’ 라는 것은 언제의 자기인가? 즉 인간은 언제 자기를 느끼느냐는 말이다.

우리 인간이 평소에 몸이 아프다든지 어떤 일에 몰두하게 되면 이 ‘자기’ 라는 것이 생각나지 않는데, 그런데 누군가가 와서 “계십니까? 요즘 몸이 좀 괜찮습니까?” 라고 하게 되면, 아픈 몸이지만 옷을 주섬주섬 입게 되는데,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니 우리 인간은 언제 자기 자신을 느끼는고 하니, 누가 등장할 때인가? 바로 ‘타인’이 등장할 때, 즉 타인의 시선, 타인의 얼굴, 타인의 눈, 타인의 안목 등이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자기’ 라는 것이 굳혀진다는 말이다. 타인이 등장할 때 말이다.

이것을 좀 섬뜩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데, 인간은 마치 허물허물한 연기와도 같은데, 그렇게 연기와도 같은 것이 몰려있으면 굳이 ‘나’ 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즉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갑자기 타인이 등장하게 되면 이 연기가 하나로 묶어지는데, 그렇게 묶어지면서 자아가 된다는 것이다.

◈ 하나로 묶어지면서 ‘방항성’이 발생 !!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하나로 묶어지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방항성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러면 이 방향성은 어디로 향하는가? 타인을 의식하면서, 즉 남을 의식하면서 이 방향성이 만들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방향성이 말이다.

그래서 여자들이 집에 있을 때는 그냥 맨 얼굴에 속살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가도, 어디 외출을 하게 되면 얼굴에 찍어 바르고 옷을 입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타인 속에 자기가 들어갈 때, “아, ‘나’ 라는 것이 이 정도입니다” 라고, 그렇게 어느 정도 자기를 추스리고 간추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지러웠던 자기를 말이다. 바로 그렇게 자기를 추스리는 것이 방향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 방향성 - 오른쪽이 아니면 왼쪽 !!

그런데 이 ‘방향성’ 이라는 말이 상당히 어려운 용어인데, 이 ‘방향성’ 이란 말은 어떤 지점을, 즉 어떤 장소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수학에서는 이 방향성을 ‘벡터’ 라고 하는데, 양(量)을 주고는 ‘스칼라’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 방향성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어떤 지점에 있다고 하더라도,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리지 않고 왼쪽으로 얼굴을 돌리게 되면, 비록 그 사람은 왼쪽으로 이동을 하지 않더라도 자기의 방향성은 무엇인고 하니, 이미 왼쪽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무엇을 하고 말고를 떠나서, 고개를 어느 쪽으로 돌리느냐에 따라서, 즉 고개를 주님 쪽으로 돌리면 천국이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이 고개를 중앙으로 향하는 법은 없는데, 만약에 주님이 오른 쪽에 계신다고 하면, 그 사람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지 않는다면 이미 세상 쪽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타인이 있는데, 즉 남들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천국에는 누가 있는가?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연기와 같은 것이 하나로 묶어지게 될 때, 즉 우리 자아가 타인을 통해서 하나로 묶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철학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인간은 남이 오면 흩어졌다가 갑자가 하나로 모아진다고 한다는 것이다. 

◈ 아이쿠, 목사님 !!

예를 들어서, 흩어진 장작을 시장에 내다 팔려고 하면 그것을 하나로 묶어서 지게에 지듯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평소에는 마구 널부러져 있다가도 손님이 오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 후다닥 자기 몸을 추스린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하나로 묶는다는 말이다.

왜 목사가 심방을 오게 되면 교인들이 왜 힘이 드는가? 어질러진 집안을 청소하는 것이 피곤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밖에 있는 식당에서 만나서 밥이나 한끼 먹고 봉투나 하나를 건네주면서, 그것으로 그냥 때운다는 것이다(ㅋㅋ).

◈ 그러면 누가 하나로 묶어주는가?

아무튼 이렇게 묶을 때, 이 방향성 때문에 이것을 누가 하나로 묶어주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악마가 이것을 묶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악마가 묶어주면, 인간은 반드시 타인 앞에서 먼저 자기 자존심을 생각하게 되어있고 말이다.

하지만 성령이 오셔서 묶어주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의 자존심과 예수님의 안목을 가지고 그 타인이 형제인지 아닌지를 분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분석하게 되면, 그 타인이 자기를 욕한다고 해도 개의치를 않고, “저 사람이 과연 성령이 임한 사람인가?” 라고, 그렇게 분석하면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은 말이다.

하지만 악마에 의해서 하나로 묶어진 사람은 뭐라고 하는가? “저 사람과 내가 원수가 되면 안 되지” 라고, 즉 “나와 한 통속이 되어야지. 나와 같은 이런 모습이라면 나를 받아주겠지” 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방향성은 오른쪽이 아니면 왼쪽이고, 왼쪽이 아니라면 오른쪽이란 것이다. 즉 주님이 계신 쪽이 아니라면 세상이라는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결국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이 의하면, 타인의 시선과 얼굴, 눈, 안목 등에 의해서 인간은 비로소 ‘나’ 라는 것이 발견이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이 ‘자기’ 라는 것이 발견되기 이전에 어떠한고 하니, 그렇게 되기 이전에 우리 인간에겐 각종 욕망이 있는데, 즉 “자고 싶다, 놀고 싶다, 하고 싶다” 등등, 그렇게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들뢰즈의 이론인데, 잘 한번 들어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자기 방에서 마음껏 기타도 실컷 치고, 그리고 나서 컴퓨터 게임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등장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후다닥 자기를 하나로 묶으면서 “엄마, 지금 나는 공부를 잘하고 있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공부를 열심히 잘하는 자기로 그만 묶어버린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는 어릴 때부터 양육과 교육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물론 커서도 변하지 않고 말이다.

◈ 주여, 제가 어떻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이 타인에 예수님이 계시면 어떻게 되겠는가? 여기에서 성화론의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는데 말이다. 우리 인간은 긴장을 풀고 늘부러지게 있다가 예수님의 말씀이 등장하게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주여, 제가 어떻습니까?” 라고 하면서 하나로 묶게 되는데,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말이다. 바로 그렇게 묶는 것이 자기 자신의 자존심과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묶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타인으로 등장함으로서 자기 자신이 더욱 더 돋보이고 살아나는 계기가 된다는 말이다. 즉 평소에는 성경말씀을 보지 않고 널부러지게 있다가, 교회에 와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하나로 묶는 것, 바로 그것 자체는 우리 인간이 평소에 하던 버릇이 그대로 나온 것이란 말이다.

◈ 복음 - 원래 내가 하던 행색대로 !!

그런데 여기서 복음이 나오고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그렇게 하나로 묶었던 줄기를 가위로 그만 다 잘라버리고 버리고 마는데, 그러면 “원래 니가 하던 행색대로 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원래의 모습대로 그만 흩트려놓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인간이 흩으려진 자기의 욕망들을 묶을 때는 그것이 주님의 영광과 자존심으로 묶어진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즉 그것은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자존심으로 묶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타인의 시선과 타인의 자존심을 의식하면서 일시적으로나마 묶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묶었다가 집에 가서는 ‘확’ 하고 풀어버린다는 말이다. 즉 “아이쿠, 오늘도 교회에 갔다오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몰라. 목사는 설교를 하면서 자기 혼자 은혜를 받았는지, 자기만 아멘을 하고 말이다” 라고 불평을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 성화론의 문제점은?

바로 그렇게 우리 인간은 평소에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 영광을 중심으로 해서 묶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악마가 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즉 주님 앞에서 위장된 자아를 악마가 조종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성화론의 문제점이란 것이다.

우리만 죽게 되면 살아계신 주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그러니 사실은 너무나도 간단한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 자기가 죽으면 일을 하지 않는 놈이 되어서, 그렇게 일을 하지 않으면, 즉 교회에서 맹탕 놀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농땡이를 치게 되면, 사람들에게 매일같이 야단이나 맞고 쿠사리를 듣게 되는데, 그러면 자기 자존심이 손상되는 자기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교인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믿는 자의 행세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절에서 그렇게 하면 모르겠는데, 그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교회에 하는 버릇과 습관, 그것이 과연 주님에게 통하겠는가? 전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성화론의 문제점이라는 말이다.

십자가 마을의 경우에도, 여기 목사님들이 무엇을 하지 말라는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그냥 “여러분, 모든 것이 다 죄입니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듣는 인간들은 뭐라고 하는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자기 영광과 자기 자존심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고 하니, 그러니 “그러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역으로 반박을 하면서 자기를 숨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마귀가 했던 그 더러운 행색이 그대로 다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 ‘성화론’의 반대는 ‘성령론’ !!

그러니 이러한 ‘성화론’의 반대는 바로 ‘성령론’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면 이 성령론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하신 십자가의 일을, 즉 산 자가 곧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겠다고 하는 그 사명을 기어이 성도로 하여금 감당하도록, 즉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시키고야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무엇이 되라고 하는가?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이 말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것이 바로 사로잡힌 자의 특징인데,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즉 사명을 가진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산 자이기 때문에, 즉 주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계신 분이 일을 하지 않을 리가 있느냐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아버지도 일을 하시고, 예수님 자신도 일을 하신다고 하는데 말이다.

(요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한윤범 - 나는 종의 종이 되겠다 !!

그러니 ‘그리스도의 종’ 이라는 사도바울이 사용한 표현은, 이것을 한윤범 목사님이 참 잘 사용하셨는데 말이다. 목사가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용어를 가지고 설교를 할 때는 굉장히 신경을 써서 하는데, 혹시 비성경적인 것이 아닌지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 따지고 따져서 그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 때 사용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나는 종의 종이 되겠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 목사님이 그런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고백이 그러한데, 즉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종이고, 그러니 사도바울은 종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니, 그러면 성도는 종의 종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즉 할 일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사명감인데, 그래서 한윤범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종은 걱정을 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데, 종은 주인이 시킨 일이 있으니 말이다.

◈ 여자들은 교회에 잠잠하라 ??

디모데전서에 보면(?) 난해구절이 하나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자들은 교회에 잠잠하라” 라는 것인데, 그것은 전혀 교회에서 놀아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의 종으로서 표현이 되는데, 그러므로 사업을 하더라도 남자의 사업을 도와주면 되는 것이지, 여자가 굳이 자기가 자기 사업을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고전 14: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그러면 의미에서 배울 것이 있으면 남자에게 배우라는 것이다. 마치 그리스도가 남자의 머리이듯이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것이다. 물론 결혼을 한 사람에게만 해당이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맞벌이를 하지 말고 여자는 집에 있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맞벌이를 하든 집에서 놀던 그것이 남자가 하는 일, 즉 복음을 전하는 것과 다 관련성이 있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본인이 그것을 의도하던 말던 말이다.

◈ 남편에게 물어봐 !!

예를 들어서, 아내가 교사라고 하면 그 교사의 수입은 남편이 복음을 전하는데 쓰면 된다는 것이다. 서 목사님의 경우도 그러한데,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아내에게 그런 일을 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 되는 일은 없는데, 여기서 하나님을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어떤 일도 복음과 무관한 일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남편이 복음을 위해서 일을 하면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보, 나는 복음을 위해서 무엇을 하면 되지요?” 라고 하면서, 자기 집에 가서 남편에게 배우면 된다는 것이다. 굳이 교회에 나와서 떠벌리지 말고 말이다.

사실 성경에서 난해구절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데, 본인이 그것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느 것인지 제대로 찾지 못해서 어렵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즉 성도로서 살아가면 그것이 성경에 다 나와있는 것이지, 결코 난해구절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교재 100페이지를 살펴보자.

** 즉 ‘신앙 있음’ = ‘구원 완성’ = ‘거룩 달성’으로 충족됨을 감사하고 만족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화론자들은 사도서신의 명령과 권면과 예수님의 산상교훈을 신앙과 따로 분리시켜 모아두게 된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런데 만약에 자신의 행위를 자신이 측정하는 식으로 신앙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들이나 말씀들은 무엇을 믿느냐 하는 신앙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앙이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추궁하는 말씀이 될 것이 뻔하다.

◈ 명령이 아니라 ‘규범’ !!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고 어려운 내용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이 우리 자신을 작품으로 만들어놓았으면, 즉 종의 종의 종이라고 하면, 그것을 풀어보면 하나님의 종이신 그리스도, 또한 그리스도의 종인 사도바울인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명령하고 지시하는 것은 자기를 빼고 그 나머지를 하는 것이 아닌데, 그 지시와 명령 안에 반드시 자기 자신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목사님, 사도바울의 명령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라는 것은 목사에게 물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명령을 한 사도바울 본인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을 살펴보면 된다는 말이다.

그럴 때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규범인데, 이것을 지난 시간에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말이다. 규범을 쉬운 말로 하면 착착 끊은 것을 의미하는데, 즉 “이렇게 이렇게 끊으면 이 안에 있는 것은 내 것이다” 이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규범은 끊어주는 작업인데, 즉 “니는 지옥에 갈 놈이니 나가. 또 너는 천국에 갈 놈이니 들어와” 라고 말이다. 마치 콩으로 두부를 만들 때 틀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아래위를 착착 끊듯이 말이다. 시루떡이나 강정을 만들 때도 그렇게 자르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저에게 와서 따질 문제가 아니라, 사도바울 본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명령과 지시가 무엇인고 하니, 즉 사도바울의 명령은 무슨 의미하는고 하니까, “그래서 너는 성도이고, 너는 성도가 아니야” 라고 구별짓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두부를 자르듯이 말이다.

◈ 예수님의 행함과 인간의 행함이 부딪치면 !!

그런데 여기 교재에 살펴보면 “신앙이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지속으로 추궁하는 말씀이 될 것이 뻔하다”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더 이상 자기 자신에 의해서 믿을 것은 없고, 오직 잣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데, 즉 예수님을 하신 일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그런 예수님의 행함을 믿지 아니하고, “내가 어떻게 행하면 됩니까?” 라는 것을 믿을 때, 거기에 잣대가 동원되어버리면, 그 잣대에 부합되는 믿음을 과연 인간이 내어놓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기준에 말이다.

지금 저를 보고 “왜 목사님을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합니까?” 라고 따진다고 하면, 그렇게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람이 외부에서 오는 것을 자꾸만 해석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성령의 해석은 십자가로 우리를 회수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인간의 육적인 해석은 무엇인고 하니, 그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자기 안에 누적이 되고 축적이 되는 해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아, 나는 이 정도가 되는구나” 라고 말이다.

◈ 성경해석이 아닌, 예수님의 공로 !!

그래서 제가 울산에서 강의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성경을 해석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이 된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것을 모르는데, 그들은 성경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그런 해석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석하는 자신의 행위가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든 거기에 상관없이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한다고 하는 것을, 그런 진짜로 믿고 싶은 신앙과, 자기 육에게서 나오는, 즉 “내가 이만큼 해내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믿고 싶은 그런 그 두 가지의 격차 가운데서 주님의 공로를, 즉 주님의 자존심과 명예를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주장한 모든 신약성경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에는 무엇이 없는가? 예수님에 의한 해석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구약은 계속해서 말씀을 주시고 해석하고, 또 말씀을 주시고 해석하고 하는, 매일같이 그것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하나교회에서 강의를 하면서 두 번 타는 보일러 이야기를 했는데, 오 목사님도 그것을 다시 한번 강조했고 말이다.

◈ 두 번 타는 보일러 !!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먼저 이렇게 십자가에서 올라가고,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해석하는 가운데 무엇이 개입되는고 하니, 자기의 해석을 믿는, 즉 말씀을 해석하는 기능을 가진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이렇게 있을 때, 그것을 부정하고 다시 십자가로 내려오게 된다는 것이다.

오 목사님은 여기에다가 하나를 더 추가를 했는데, 이렇게 바다에 배가 떠있으면, 그 바다 밑에 있는 다 이루심이 그냥 배를 바다 밑으로 당기는 것이 아니라, 그 배에 그만 커다란 구멍을 내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게 곧 천안함인데 말이다.

그렇게 구멍을 ‘뻥’ 하고 냄으로서, 자기가 자기의 해석을 믿다가 실망을 하고 좌초를 당하는 그 순간, 그것이 바로 밑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으로 당기는 과정인 줄 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성경해석은 주께로부터 시작해서 주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즉 항상 모든 것이 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 ‘충만’에 대해서 !!

서울의 하나교회에서 강의를 하면서 제가 은혜를 받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에베소서 1장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여기 ‘충만’ 이라는 것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여기에서 ‘충만’ 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모든 것들이 그 충만을 보여주기 위해서 움직이고 배치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다는 것은 모자람이 없다는 의미인데, 즉 ‘다 이루심’ 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다 이루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밑에는 여러 가지 지시와 명령들이 깔려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머리가 되시는 분의 충만인데, 여기서 ‘머리’ 라는 것은 유난히도 돋보이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지체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크다는 것인데, 즉 지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지체는 머리를 위해서 존재하고, 그 머리는 이 세상을 충만하게 다 뒤덮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강원도 산골짜기에 1미터의 폭설이 내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어디라도 눈이 덮이지 않는 곳이 없는데, 즉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든지 간에, 전부가 다 예수님의 사랑의 충만, 용서의 충만, 십자가 공로의 충만으로 덮여있는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충만인데, 그것을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눈을 떠서 그러한 충만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령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인간 자기 나름대로의 성화론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규범’ 인데, 즉 신약시대에 통하는 규범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렇다면 성화론의 초점은 의외로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하게 된다 “내가 만족하는 거룩을 내가 과연 더 이상 미흡함이나 모자람이 없이 완전히 생산하고, 또한 그 이상의 상승할 그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고 거룩으로 꽉꽉 채워진 그 완전한 상태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 그러면 한나라당이 잘못이라는 말입니까?

지금 이 말이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실제 있었던 예를 들어보면, 어제 늘푸른 교회의 이장우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무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까, 어떤 목사님이 대구에 있는 큰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기를, 물론 본인은 아니고 말이다. 아무튼 그 목사님이 “우리는 국가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쩌고”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을 듣고 있는 집사님이 한 분 일어나서 하는 말이 “그러면 한나라당이 잘못이라는 말입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이 있는데, 그 집사님의 말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어떤 마음에 여호와 증인이 살고 있고, 안식교 교인이 살고 있고, 통일교 교인이 살고 있다고 하면, 그리고 합동, 개혁측의 교인들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을에 비가 많이 와서 댐이 붕괴되기 일보직전에 있다고 하면, 그들이 힘을 합쳐야 되는가? 그렇지 않아도 되는가? 당연히 합쳐야 한다는 말이다.

태안반도의 어느 마을에 방화범에 의해서 산불이 마구 일어난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불교 신자든지 기독교 신자든 간에 누구든지 간에 힘을 합쳐서 밤마다 보초를 서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마을입구의 진입로가 홍수에 유실되었다고 하면, 서로 이단이든 삼단이든 간에 힘을 합쳐서 복구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네슈퍼에 라면도 하나 없게 되니 말이다.

◈ 반드시 전체를 조율하는 사람이 있어야 !!

그러니 당연히 힘을 합쳐야만 하는데, 그때는 개인적으로 삽을 들고 가면 일이 되지 않고, 한 사람은 전체 일의 진척에 대해서 조율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 제대로 치우지도 못했는데 레미콘 차량이 들어오고, 그만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나 그 일을 하는가? 투표를 하든지 해서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반드시 그런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한데, 통일교 교인이든 안식교 교인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모임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좀더 넓은 눈으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안식교 교인이 나서서, 자기가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서 마구 삽질을 해대면 어떻게 되겠는가? 잘못하다가는 수도관도 터트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수도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나서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기분이 나쁘다고 “통일교 교인이 뭔데, 감히 안식교 교인에게 명령을 하는가?” 라고 한다면, 그러면 되겠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북한이 쳐들어오고 있는데, 군승과 군목이 종교적인 문제로 싸우면 되겠는가?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까 그 집사가 벌떡 일어나서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아니, 한나라 당으로 뭉치지 않으면 북한이 쳐들어오면 힘이 분산되어서, 그러면 나중에는 교회도 없고 절도 없게 되는데, 그러면 그때 가서도 나라가 중요하지 않고 하겠는가? 이 어리석은 목사야!” 라는 것이다.
 
 
 김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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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220.♡.41.203) 10-08-29 10:54  
◈ 성화론자 - 그러면 교회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성화론을 내세우는 목사들의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교회라는 것이 하나의 질서 덩어리로 뭉치려고 하면 어느 정도의 체계가 있어야 하고, 각각의 주장들에 대해서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그런 주장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각 주장들에게 대해서는 우선 순위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교인들이 그런 것이 대해서 “목사면 다가? 니가 뭔데 명령을 하노?” 라고 한다면, 그러면 교회 꼴이 뭐가 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의 지도자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역시 성화가 많이 되고, 성경도 많이 알고, 헌금도 많이 하는, 여기에서 헌금을 많이 한다는 것은 그 교회를 떠날 가능성이 적은 사람인데, 왜냐하면 투자를 많이 했으니 말이다. 그런 발목을 잡힌 사람들에게 이런 지위를 주어서 교회를 책임지게 할 때, 그렇게 성화가 많이 되고 내신성적이 좋은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교회에 말썽이 생길 소지가 줄어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아직 교회에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초보자들을 장로나 집사로 세우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목회가 잘 되겠는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성화론이 교회에서 필요한데, 그런데 십자가 마을은 그런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것은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반발에 대해서 뭐라고 해야 하겠는가?

◈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는 반드시 ‘죄’를 통과 !!

지금부터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하도록 하겠는데, 명령과 지시가 어디에서 내려왔는가? 물론 하나님에게서 내려왔는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주의할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렇게 하늘에서 명령과 지시가 내려와도, 그것이 지상에 우두둑 떨어질 때는 반드시 죄를 통과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죄를 말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보면 되는데, “하나님의 명령과 규범이 이 지상에 내려올 때는, 죄를 통과해서 온다” 라고 하는,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공로를 이야기하는 성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죄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그냥 그대로 내려오는데, 우리가 하다가 보니 인간인지라 죄를 짓는다. 물론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지만 말이다” 라고 하는 사람은 어떠한가? 그렇게 죄를 먹구름을 제거한 사람은 바로 성화론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화론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즉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가 이 지상에 떨어질 때는 두꺼운 죄 층을 뚫고 오게 되니 우리는 무엇을 해도 죄다” 라고 인정하면 성화론에 빠지지 않는데, 하지만 두꺼운 죄 층을 그만 철거해버리고, 즉 “하나님이 지시한 명령을 어지간한 것은 다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사람인지라,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죄를 짓는다” 라고 한다면, 그런 자는 성화론에 빠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 그들은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교회운영에 도움이 되겠는가?” 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이 층을 통과해서 오셨기에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는가? 라는 식으로 접근해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두고 건축자의 버림받은 돌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왜 버림을 받았는가? 결코 말씀에 어긋나서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이 두꺼운 죄의 층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딴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거추장스럽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서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데, 굳이 이렇게 와서 피곤하게 끼어 들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아까 질문한 것에 대해서, 즉 “우리에게 질서와 규칙이 필요하고 그러니 성화가 많이 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고, 덜 된 사람은 밑에 있어서, 높은 사람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것이 합당한 성경해석이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죄를 통해서 오시게 되면 !!

예수님께서 죄를 통해서 이렇게 오시게 되면,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내가 왜 죄인인데?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 라는 것과, 둘째는 “하면 할수록 내 죄가 더 깊어진다” 라고 하는 말이다. 바로 이런 두 번째의 사람에게는 온유와 화평과 자비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죄인인데?” 라고 하면서 버티는 자들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아닌 육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데, 즉 파당, 패싸움, 시기, 질투 등등이 말이다.

그런데 교회라는 것은 무엇인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고 말이다. 그래서 당연히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데, 그러면 자비와 온유와 화평과 같은 것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러니 교회에서 자기가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본인의 자질이라고 여기면 그것은 성화론이 되는데, 하지만 높다고 여기는 그 자리가 남들보다 죄를 더 많이 알기 때문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자기가 아는 죄의 깊이를 자기에게만 써먹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죄를 모르고서 잘난 체를 하는 자들에게 주님을 증거하는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안식교 지도자를 통해서 !!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도로가 붕괴되고 산불이 났을 때, 거기에는 어떤 종교를 가진 자들이든지 다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불신자든 신자든 다 참석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신자의 경우에,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나는 복음을 알아. 십자가를 안다고!” 라고, 즉 자기가 그렇게 훌륭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께서 그런 사건의 배치를 통해서, 그러한 충만한 가운데 일들이 벌어지면, 물론 처음에는 “아이, 저 안식교 교인하고는 같이 일하기가 싫은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그 안식교 교인이 자기가 토목공사를 좀 할 줄 안다고 하면서 그만 투표를 해서 뽑혀서 지도자 노릇을 한다고 하면, 그러면 “아이, 더러워라. 이게 무슨 짓이고? 그래도 복구공사를 하려면 말을 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지도자가 아니라, 안식교 교인으로 하여금 지도자가 되게 하신 분이 누구라는 말인가? 바로 주님인데, 그러면 그 주님이 왜 일을 그렇게 만드셨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산 속에서 도를 닦을 때는 자기가 천하의 의인인데, 즉 자기가 죄인이라고 우기면서 바로 그것이 근거가 되어서 의인 중의 의인이라고 여겼던, 그렇게 자기 내면에 들어있던 그것이 어떻게 되는가?

막상 그들과 다같이 도로공사를 하게 되니, 시기와 질투는 오히려 자기가 더욱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온갖 불평을 다 하니 말이다. 그러면 그것은 바로 주님이 배치한 장소에서, 자기가 봉사할 것은 봉사하게 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 오직 인자의 섬김과 대속물로 !!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일이 되기 위해서 권력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태복음 20장에서 뭐라고 하시는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 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 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인간들이 권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 내면에는 권력을 탐하고 있는, 즉 권력자가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핑계삼아서 말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 안에 죽을 때까지 응축되어있음을, 그것을 주님이 친히 이야기해주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말씀을 해석했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주님의 공로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 목사님, 이번 기도순서를 좀 ??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저쪽에서 항상 하는 말이 “그러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아무 것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오직 주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쪽에서는 “어이쿠, 잘도 가르친다. 그렇게 하니 교인들이 아무 것도 안 하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교회 교인들은 서로가 오후예배 시간에 기도를 빼달라고 난리인데 말이다. 왜냐하면, 오후예배시간에 기도를 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ㅋㅋ). 아무튼 그런 방식으로 사도바울이 주님의 지시와 명령을 자기 안에서 삶으로 드러내었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곧 ‘충만’이고 말이다.

아참, 아까 한나라당 이야기가 나왔는데, 우리가 한나라당을 찍든지 말든지, 그런 자기의 개인 행위를 통해서 이 세상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그렇게 설교한 그 목사님에 성경에 대해서 본인이 오해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불쑥 일어나서 “한나라당을 찍은 것이 죄입니까?” 라고 한 그 집사님이 오히려 더 깊이가 있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야기가 옳다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한나라당이 옳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말이다. 하지만 서로 깊이 있는 말의 내용을 알게 되면, 그렇게 통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들이 시도하는 모든 진리와 거짓, 참과 오류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항상 언어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빌미로 이루어진다.

지금 이 ‘피’ 라는 교재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쉽게 쉽게 넘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교재를 쓴 취지가 없어지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 이 문장을 또 분석해보아야 하는데, 무슨 의미가 들어있는지 말이다.

◈ 미셀 푸코 - 인간내부의 권력이 밖으로 나올 때는 항상 ‘언어’로 !!

그것을 위해서 아주 적당한 사람이 바로 ‘미셀 푸코’ 라는 철학자인데, 그가 정곡을 아주 잘 찔렀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를 해보면, 인간의 내부에는 권력이 있는데, 그 권력이 밖으로 나올 때는 항상 ‘언어’로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푸코만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했는데, 슐라이에러마허나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자들이 말이다.

아무튼 권력은 언어로 나오는데, 그런데 그렇게 권력에서 언어가 나올 때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라캉은 이것을 상징계라고 했는데, 즉 기존에 있는 구조, 다른 말로는 조직, 혹은 세계인데 말이다. 그런 기존의 구조와 세계에서 회원을 하나 모집하는 식으로 자식을 다룬다는 것이다. 즉 ‘우리 집안’ 이라는 구조에 합당한 새로운 신입회원을 하나 모집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어떤 단체에서 신입회원을 모집할 때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존의 구축되어있는 사상에 동의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따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런 사상에 동의할 때만 자기 자식으로 여기고,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하면 호적을 파내겠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 어느 단체에서라도 말이다.

◈ 미셀 푸코 - 집중력 !!

라캉이 이와 같은 주장을 했는데, 하지만 미셀푸코는 여기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서 “왜 그렇게 하는가?” 라는 것까지 따졌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왜 그렇게 하는고 하니, 권력이라는 것은, 이 양반이 이 단어를 하나 쓰는 것이 그만 제 머리 속에 콱 박히고 말았는데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바로 ‘집중력’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나무를 벌목해서 한 곳에 모으지 아니하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도록 하는 것은 권력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전도서에도 보면 그런 말씀이 있는데, 즉 그냥 두면 안 되고 삼겹줄처럼 묶여져 있어야 힘이 된다는 것이다.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아무튼 그렇게 흩어지면 안 되는데, 하지만 흩어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흩어진 우리를 한 곳으로 모으는 집중력을 바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했고, 그런 짐승을 모방한 것이 바로 유대사회이고, 그 유대사회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짐승의 특징은 집중력에 있다는 말이다.

◈ 가인 - 짐승의 특징인 ‘집중력’을 !!

그러한 짐승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이라고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이 가인을 하나님께서 왜 죽이지 않는가? 가인은 일종의 뺏지, 혹은 마크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인(印), 즉 도장이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서 가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이 나서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 도장이 무엇인고 하니, 즉 가인은 자기가 자기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의 일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도장을 찍어서 나섬으로서, 그것이 일종의 무엇이 되게 하는고 하니, 악이 이 세상을 하나의 중심을 잡아서 집중하도록 할 수 있는, 즉 권력이 될 수 있는 집중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라멕인데, 그래서 그는 가인의 후손이면서도 가인의 하는 그 행색을 자기 중심으로 모은다는 것이다.

창세기 4장에서는 그러한 가인의 노선을 셋의 노선과 뚜렷하게 대비하게 위해서, 이 가인이 어떻게 자라게 되는지를, 즉 “요즘 너 많이 컸네?” 라고 하듯이, 그렇게 그들이 어떻게 크게 되었는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고집마저 꺾어버리는 우리의 고집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의 집중력으로서 작용하게 되고 말이다.

◈ 교회도 권력의 일종 !!

미셀 푸코가 이것을 아주 깊은 단계에서 발견했는데, 그래서 그는 종교든 교회든 간에 그것을 권력의 일종으로 보았는데, 그래서 자기 앞에서는 까불지 말고 입을 닥치라고 했다는 것이다. 권력의 일종이니 말이다. 즉 권력이 없이 무슨 교회가 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신부야, 이 목사야, 너희들이 권력도 없이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권력 없이 어떻게 사도바울을 이야기하는가?” 라는 것이다. 즉 신부나 목사들이 예수나 사도바울을 핑계대면서 노리는 것은 집중력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가 어떤 조직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둘 다 더러운 권력의 집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즉 센 놈이 약한 놈을 지배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보다 더 센 집단이 무엇인가? 국가와 민족인데,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 국가와 민족보다 더욱 센 것이 무엇인가? 저 중국의 사회주의마저도 박살낸 집단이 바로 ‘돈’ 이라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는 곧 돈이라는 말이다. 

◈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

어제 낮에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는데, “고마워라 임마누엘, 재물만 섬기는 우리집 ♬” 이라는 찬송가에 대해서 말이다(ㅋㅋ). 사실 “예수만 섬긴다” 라는 것이 너무나 추상적인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인가? 그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가정예배를 매일 드린다는 말인가? 물론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만 섬긴다” 라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대조적으로 평소에 우리가 섬기는 재물과 주식과 펀드와 한번 대조를 해보자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는가? 재물은 바로 우리의 명예와 자존심인데, 즉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만을 섬긴다는 것은, 자기 영광과 자기 자존심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찬송가 가사가 상당히 겁나는 내용이란 말이다.

아무튼 미셀 푸코는 그 모든 것이 다 집중력인데, 그러니 사람은 자기 혼자 있으면 외로워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어디가 집중력이 더 세지?” 라고 하면서 교회도 큰 곳을 찾아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집중력이 있으니 말이다. 자식에게도 그렇게 교육을 시키는데, 즉 취직을 하더라도 중소기업이 아닌 대기업에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집중력으니 말이다. 물론 학원을 가도 큰 학원을 가야하고 말이다.

◈ 하이, 히틀러 !!

김대식 집사님이 저에게 ‘히틀러’ 라는 좋은 영화를 보여주셔서 고맙게 생각하는데, 제가 그 영화를 심사숙고하는 마음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 영화가 왜 중요한고 하니, 히틀러가 자본주의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히틀러가 일관되게 외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러분, 유대인들이 우리의 돈을 가지고 가니 조집시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적이 생기게 되니 이쪽에는 무엇이 생기는가? 즉 공동의 적이 있다고 하면, 우리 이쪽은 서로 싸우면 되겠는가? 공동의 적이 있으니 서로 싸우면 안 되고, 그렇게 이합집산이 되면 안 되고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 “하이, 히틀러!” 라는 것이 나왔다는 말이다. 그래서 붉은 나찌마크를 만들어서, 불교의 ‘만(卍)’ 이라는 글자와 비슷한 말이다.

그때부터 이상하게도 독일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영주를 중심으로 했던 그들이 히틀러를 중심으로 그만 하나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에게는 공동의 적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것을
‘안나 하렌트’ 라는 유명한 여성 철학자가 지적했고, ‘지젝’ 이라는 철학자도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다. 즉 사람은 공동의 적이 있으면 악마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 공공의 적 예수님이 등장하니 !!

예수님의 경우에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유대인들은 파가 몇 개였는가? 사두개파, 바리새파, 열심당원파, 에세네파, 그렇게 대충 4개가 있었는데, 그런데 그렇게 있는데 예수님이 등장하니 어떻게 되는가? 그런 파들이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즉 악마의 하수인이 되면서 누구를 죽이는데 한 마음이 되고 말았는데,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무지 목매한 백성들은 어느 것이 힘이 되는지를 살폈고 말이다.

심지어 가롯유다까지 나자빠졌고, 물론 다른 제자들도 겁이 나서 모두 다 줄행랑을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제라고 하는 베드로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그들의 권력 속에서, 자기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우리 인간의 몸, 즉 자아라고 하는 것은, 평소에는 흩어져 있다가 어떤 큰 권력이 오게 되면, 그 권력에, 즉 악마에 의해서 흩어져있던 나뭇가지들이 한 둥치로 묶어지면서 자아가 되는데, 즉 “지금 내 모습이 이렇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경우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 베드로를 알아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 미셀 푸코 - 인간에게 주체는 없다 !!

그것을 보고 미셀 푸코가 장담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에게 주체는 없다” 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없고, 다만 인간은 어떤 상황 속에서, 즉 권력 속에서 그 권력의 집중력을 위해서 하나의 점으로 그냥 가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회원으로서 그냥 들어가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즉 지금의 자기 ‘자아’ 라고 하는 것은, 지금 주변상황이 만들어준 자아이고, 그러니 다른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거기에 기가 팍 죽어서 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제가 지난번 개혁주의 신학협회에서 ‘70이레’ 주제발표를 하는데, 그때 김영한 씨가 저를 보고 “어디, 계룡산에서 하산했습니까?” 라고 하면서 겁을 팍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양반이 김영한 교수 ??) 쉽게 말해서, “야, 무릎을 꿇어. 이 동네가 무슨 동네인데 당신이 함부로 입을 놀려? 당신 동네에서는 당신이 오야붕인지 몰라도, 여기 우리 동네에서는 나에게 심사를 받아야 돼. 그렇게 않으면 이단으로 잘려. 그렇게 한번 해볼래?”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협박을 해서 겁을 준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교역자들이 아무리 바른 소리를 하고 싶어도, 당회장과 장로들이 모여있는 당회실에 종용히 불려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대부분의 부교역자들은 꼬랑지를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과연 ‘자아’가 있기는 있는가?

아무튼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자아’ 라고 하는 것은, 제 아무리 자기가 자기 자아를 살리고 싶어도, 도대체 자아가 있어야 살리든지 말든지 한다는 것이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살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정작 살아야겠다는 그 자아가 누구냐는 것이다. 즉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도 사실 오해한 것인데, 그러니 사실 자아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주변에서 다같이 산다는 것이 분위기이니, 자기도 덩달아서 그 분위기에 휩쓸리다가 보니 “아하, 밥을 먹고 이렇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이구나” 라고, 그렇게 해서 새롭게 자아가 형성되었다는 말이다. 그만큼 주위 상황의 힘이, 권력의 힘이, 악마의 힘이, 우리의 개인적인 힘보다 훨씬 더 세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미셀 푸코가 권력을 예리하게 분석했는데, 그래서 그는 주장하기를 “인간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살든지 간에 제발 국가라는 게 간섭하지 마라. 나는 이미 국가에 대해서 알아버렸다. 국가가 폼을 잡고 어른 행세를 하는데, 하지만 그런 허풍을 떨지 마라. 나는 국가가 그런 집중력을 보이는 허구임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나는 국가가 전혀 시덥지 않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동성애자였고, 에이즈에 걸렸으며, 또한 죽음도 자살을 선택했지만, 그러나 그는 전혀 남들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들이 아무리 자기를 욕해도, 그것은 그 사람이 그 권력에 속해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는 그 사람의 권력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욕을 들을 이유가 없고,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말이다.

◈ 들뢰즈 - 인간은 욕망에 의해 출현된 이미지에 불과 !!

여기에 들뢰즈 철학이 첨부되면 어떻게 되는가? 들뢰즈가 이 양반을 참 좋아했는데 말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욕망에 의해서 출현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라는 것이다. 이미지란 무엇인가? 만지면 없는 것인데, 즉 ‘나’ 라는 것은 없고 그때 그때마다 자기 욕망에 의해서 조립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은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 커다란 강물에 흘러가는 어떤 물방울이 곧 자아라고 하면, 그 물방울은 주변에 있는 강물이 만들어낸것인데, 즉 자아가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이 성경과도 그대로 통하는데(?), 들뢰즈에게는 욕망이 흐르고 있지만, 성경의 경우에는 말씀이 흐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이 두부나 강정을 만들 때처럼 그렇게 착착 잘라내게 되면, 그러면 그렇게 잘라진 그 하나하나가 성도가 되고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 중세철학 - 나의 육체와 영혼으로 !!

이것을 중세철학에서는 어떻게 보았는가? 인간에게는 육체와 영혼이 있다고 하면서, 즉 자기 소유의 영혼과 육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자기의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와 영혼을 어떻게 잘 유지해서, 그렇게 예수님을 통과해서 하늘나라로 가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중세철학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 당시의 철학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래서 육체와 영혼밖에 이야기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현재 개혁주의의 조직신학도 다 여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개혁주의의 조직신학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아 자체를 건드리지 않고 자기의 육체와 영혼만 관리하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을 공부해서 자기 육체와 영혼에게 어떻게 한번 잘해보겠다는 말인데, 즉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성화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자기가 구원을 받으려고 하니 당연히 자기가 죄를 지으면 안 되고, 그러니 늘 자기가 착해지려고 도를 닦고 또 닦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들이 시도하는 모든 진리와 거짓, 참과 오류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항상 언어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빌미로 이루어진다.

◈ 모든 것은 권력에 의해서 !!

지금 여기 교재에서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것인데, 즉 “언어의 분석과 해석은 권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라고 말할 수 있는데, 무슨 의미인가? 이미 기존의 있는 권력에서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고, 그리고 나쁘다고 하면 나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그냥 거기에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그것을 거부할 수는 있는데,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과거에 자기가 있었던 소속된 그 구조가 새로운 구조에 대해서 거부한다는 것이다. 즉 과거의 구조가 새로운 구조를 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자기의 조국을 버리고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는데, 그것은 결국 무엇과 무엇에 대한 거부인가? 이스라엘 편에 서서 기존의 자기 민족과 자기 가족들을 배신했다는 말이다. 즉 새로운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다는 식으로, 그렇게 새로운 권력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무엇인가? 마치 강도와 같이 남의 집에 담을 타고 몰래 들어가서, 기존에 있는 가구를 공격해서, 거기에 있는 가구를 모두 자기 구조로 해서 데리고 가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나는 지금 바른 행위를 하고 있고, 바르게 살고 있다”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나, “나는 이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고 객관적으로 그 진리성을 제시할 때 언어를 통해서 증거를 대려고 한다. 하지만 언어 배후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 우선 나의 존재란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분석하고, 심판하고, 심판하고, 규정짓는 당연한 자격자로 나서게 된다.

◈ 잠시 ‘거룩’에 대해서 !!

이렇게 나서는 것이 바로 ‘주체’ 인데, 그런데 지금은 이 주체가 해체되고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때마다 상황이, 즉 흩어진 나뭇가지들을 묶는 상황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보면 베드로전서 1장 16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성화론자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얼마나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지 모르는데 말이다.

(벧전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이제 이 말씀을 한번 살펴보겠는데, 물론 여기서 기록되었다는 것은 구약성경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거룩은 구약의 여러 군데에서 언급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약의 성경말씀과 신약성경의 말씀과 그 차이점이 무엇인가? 구약은 육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은 육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구약은 살아있다고 여기는 육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신약은 이미 죽은 육에 대해서, 즉 “니가 이렇게 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렇지요? 왜냐하면, 중간에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말이다.

사도가 신약성경을 기록할 때는 구약을 그냥 당겨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해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그러면 성령은 언제 오시는가? 오순절날인데, 그러면 그 오순절은 언제인가?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셔서 이미 주가 된 다음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이 주(主)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예수님이 주가 된다는 것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는 것인데, 그러면 하늘에서만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도 역시 주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땅은 하늘의 주님에 의해서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 보좌의 오른편에 계시는 예수님이 왜 주가 되는지를 증명하기 위해서, 땅은 그 모든 움직임이 예수님 중심으로, 즉 예수님이 주가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빨려들기 위해서 대기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착이 된다는 말이다. 산 자와 죽은 자, 즉 하늘과 땅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말이다.

이것은 마치 젤과 같은 것을 당기면 위로 쭈욱 딸려서 올라가는 것과 같은데, 물론 물은 그렇게 되지 않지만 말이다. 놓으면 다시 원위치가 되고 말이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면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점성을 가지게 되는데, 그게 무슨 점성인고 하니,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는 것과 배치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이 세상 모든 것은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느 것 하나 빠져나가는 부속품이 없는데, 마귀가 되었던 그 무엇이 되었던 말이다.

(고전 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전 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심지어 욥이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는 것도 누구의 허락 아래에서 하는 것인가? 전혀 마귀가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결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껄죽하게 점성이 있어서 딸려 올라간다는 것이다.

◈ 거룩 - 인간은 주님 앞에서 죽어야함을 증명하는 용어로서 !!

그러므로 이런 모든 성경해석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즉 신약성경의 모든 계시는 이미 예수님의 주되심을 통과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이런 구약에서처럼 육이 살아있다고 여기는 상태에서 육의 개념 때문에, 그런 인간은 주님 앞에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용어로서 이 ‘거룩’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육으로, 즉 문자로 해석하는 놈들은 지옥으로 갈 놈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신약성경에 구약의 말씀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도 거룩하라” 라고 하는 규범이 또 다시 동원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 우리 안에는 우리 자신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룩 속에 있는 ‘나’ 라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거룩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이 ‘나’를 장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속에는 아직 구약 때의 그 성질이 그대로 들어있는데, 그 성질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이, 즉 주님의 거룩이 어떻게 우리의 거룩을 꺾어버리고, 주님의 거룩이 우리 자신에게 입혀지는지, 바로 그것을 바깥으로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 저는 죄인입니다 !!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하는 그 모든 것이 놀랍게도 거룩이 되는데,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거룩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거룩이 우리들의 허접한 행위를 통해서 주님의 거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인가? 즉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 안식교 교인이 투표를 해서 지도자가 되었기에 기분이 나쁘다고 하면서 진입로 공사를 하는 자기의 모습이 바로, 그것을 통해서 “아하, 이것이 바로 죄이군요. 제가 저 사람과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이 저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다. 즉 온유이고, 화평이고, 자비이고, 양선이라는 말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101페이지를 보자.

** 이렇듯 언어가 존재까지 이어지게 되면, 모든 언어의 의미는 존재의 흔적을 나타내는 ‘은유’로만 활용도를 가질 뿐이다. 진리와 언어가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의 쓰임새와 활용도에 의해서 다시 ‘나는 항상 옳다. 왜? 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까’ 라는 쪽으로 귀착되는 의미일 뿐이다.

◈ 존재의 함성 !!

여기에 보면 “존재의 흔적을 나타내는 ‘은유’로만 활용된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이데거의 철학에 나오는데 말이다. 그에 의하면 존재에 의해서 로고스가 나오는데, 이 로고스는 그냥 쉽게 말하자면 ‘외침’ 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말로서는 표현이 되지 않고, 뭔가 존재의 함성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존재의 함성이 말이다.

이것은 알랭 바디우가 한 표현인데, 그가 들뢰즈 철학을 평가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들뢰즈의 철학은 존재의 함성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즉 “와아!” 하고 외치는 것인데, 마치 월드컵을 할 때 “대한민국, 으자차 자차!!” 라는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함성은 존재의 함성이고 욕망의 함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인위적으로 언어가 동원되면, 그것은 그 조직이 법으로 차단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의 함성을 다 표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흡수통합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진짜 슬픔을 당하게 되면, 그때 울 때는 어떠한가? 울음도 제대로 나오지를 않고, 그냥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끙끙거릴 뿐인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자기 심정을 언어로 다 표현을 하지 못할 때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요?

◈ 어어어어, 어어어어 !!

예를 들어서, 어떤 놈이 자기를 때려서 자기는 거의 실신이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그놈이 와서 “좀 어떻습니까?” 라고 한다면, 마치 자기가 가해자가 아닌 것처럼 해서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고, 그냥 “어어어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친척이 보다가 “아니, 자네 왜 이러나?” 라고 하면, 그래도 손으로 가르키면서 “어어어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저 놈이 나를 쳤어!” 라는 말을 할 수 없는데, 그렇게 “저 놈이!” 라고 하면서 나오면 이미 언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언어보다 존재의 함성이 먼저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어어어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주님의 권력을 성령께서 알려주셔야만 !!

그러니 그냥 부드럽게 “십자가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것과, 아주 강력한 톤으로 “십자가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즉 사형장에서 사형수가 “나는 십자가로 승리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술집에서 한잔을 하면서 “나는 중학교 때 십자가로 승리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같은 언어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성령으로 해석하게 되는데, 그 위에는 주님의 권력이 있는데, 그 권력을 성령께서 알려주셔야, 그때 그때마다 자기만의 언어적 고백과 표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말씀은 제 아무리 퍼고 또 퍼도 주님의 존재의 함성을 다 퍼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설교자는 언제나 죄인의 자리에 !!

하지만 그것을 퍼내는 것이 설교자의 사명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는 자기가 죄인임을 더 깊이 알아서, 그런 깊은 죄인의 자리에, 즉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그 자리에,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그 자리에 설교자는 항상 있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해서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은 것을 설교를 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입니다” 라고 하는 것을, “어어어어!” 라고 하면서 외칠 때, 교회의 권력과 같은 것에서 초월할 수가, 즉 가식적인 그런 권력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 교재에 기록된 것이 바로 그런 내용인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나는 항상 옳다. 왜? 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까” 라는 쪽으로, 그렇게 자기 영광을 위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미 자기는 존재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튼 자기는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 인간은 성경이라는 언어를 언제나 자기 중심으로 채택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놓고는 “오늘 은혜를 받았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제 오늘 강의를 마치고자 하는데, 교재 102페이지는 다음 시간에 하겠지만, “어법(語法)도 법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하지만 성령은 모든 법을 초월하고 문자도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즉 그리스도를 주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자기의 종으로 삼았는데, 바로 그런 원칙대로 이 세상은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태어난 것도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모두 다 택함을 받아서 태어난 줄로 압니다. 그것을 이제야 알았사오니 이제는 예수님의 종의 종의 종이 된다고 해도, 그것조차도 영광스럽게 여기고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8.28 오후 11시 35분에 마침.

                                                         이제 여름 방학을 마치고 존재의 함성을...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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