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705 피28강 진보적인 시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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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705피p105진보적인시간관

피28강 진보적인 시간관 

[10 대구강의 10] - [피 28] - 진보적인 시간관
                                                                                
                                                          10,07,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인간은 급반전을 할 수 있어 !!

이제 시작을 하겠는데, 먼저 교재 105페이지를 살펴보자.

** 인간이 죄책감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서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결국 무제한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은 자기의 과거가 아무리 개같이 살았다고 하더라도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는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과거가 나쁘다고 해서 계속해서 악한 일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나쁜 일을 하면 할수록 어떤 경우도 생기는고 하니, 자기가 죄책감에, 즉 양심에 나쁘다고 하는 것을 한꺼번에 급반전을 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한 것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쁜 짓을 많이 하게 되면 그렇게 나쁜 짓을 많이 한 것에 대해서 충분히 보상할 수 있는 힘도 같이 겸하여 쌓여져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는 이렇게 나빴으니, 이제는 급반전을 해서 나는 남보다 더 뛰어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힘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악을 많이 저지르다가 보면 말이다. 상당히 어렵지요?

예를 들어서,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가 나쁜 짓을 많이 했다면, 왜냐하면 그녀의 직업이 창녀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정신을 차려서 언젠가는 “내가 용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더욱 더 남보다 많이 사랑을 베풀어야지” 라고 급반전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예수님께서 마련해주실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 용서를 해주면 언젠가는?

원래 성경에서는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닌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특히 성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말이다. 그러니 그들의 주장은 용서를 해주면 언젠가는 인간이 된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냐는 말이다. 과연 용서를 해주면 사람이 되는가? 아니면 용서를 해주면 구원을 받는 것인가? 도대체 어느 것이냐는 말이다.

무슨 뜻인고 하니, 용서를 해주고 난 뒤에 그 용서함을 받은 자가 이제는 인간답게 살 때, 즉 “그는 과거에는 개판이었는데 이제는 인간답게 사는구나” 라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용서하심 그 자체로 구원을 하시느냐는 말이다. 당연히 후자인데,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그 사람이 예수님의 피를 믿어서 인간성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래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모든 성경해석을 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그 십자가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것은 하나의 모범을 보여서, 즉 “야 임마, 이제는 정신을 좀 차려. 이제는 사람답게 살아야지. 봐라, 십자가에 너 대신에 죽은 분이 있잖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가?”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이미 칸트의 철학에 보면 !!

그렇게 해서 정신을 차리면, 즉 옛날 그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새 사람이 되었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즉 새 사람이 된 자기의 선한 행위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런 식의 주장은, 그것은 여기 교재 105페이지 중간에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칸트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즉 이미 칸트가 다 이야기한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이런 칸트의 윤리를 공부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설령 공부를 한다고 해도 너무나도 무식해서 용어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즉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함축이 되어있는지 전혀 감도 잡지를 못하는데, 그러니 그 함축된 의미를 전혀 풀어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철학을 모르다보니, “맞아. 사도바울은 철학은 배설물이라고 있어” 라고 하면서, 자기가 모르는 것을 정당화를 시키는데, 그래서 “나는 오직 성경말씀만 붙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성경말씀을 붙든다고 할 때, 그렇게 성경을 붙든다고 하는 그 견해가 이미 철학에서 다 나온 것이란 말이다.

자기는 아무리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원에서 은혜를 받아서, 그러한 마음으로 성경을 본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런 순수한 마음이 이미 철학에 다 있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순수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즉 무슨 순수한 마음으로 성경을 본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노회를 하면 반드시 등장하는 말이 “자, 은혜로 합시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굉장히 복음적으로 들리는데, 마치 새언약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은혜로 한다는 것이 방금 말한 그것인데, 즉 언젠가는 개과천선해서 새로운 인간이 되니, 그때를 기약해서 봐주자는 것이다.

◈ ‘진보적 시간관’에 대해서 !!

바로 이러한 윤리적인 문제를 좀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진보적인 시간관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여기에 대해서 강의를 하고자 하는데, 진보적인 시간관, 혹은 진보적인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언제부터 “더욱 더 나아진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고 하니, 그러한 개념이 옛날의 노자 사상 등에는 없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바알종교가 있듯이, 거기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인간이 눈이 있으면 아는데, 인간은 대자연 속에서 묻혀서 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자연이 돌면, 인간도 같이 돈다는 것이다.

대자연은 무엇인고 하니, ‘봄, 여름, 가을, 겨울’ 인데, 그리고 ‘낮과 밤’이고 말이다. 그러니 순환하는 것인데, 즉 ‘서클(CYCLE)’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조영남이 노래한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인데,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 라고 말이다.

◈ 고대의 자연신학 - 신 자체가 곧 자연이다 !!

그러한 사상이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나오는데, 즉 이 세상은 옛날부터 있는 그대로 돌고 돈다는 것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그러니 있는 그대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이 그렇게 흘러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 인간들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서, 자연과 보조를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말 그대로 ‘자연스럽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벧후 3: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벧후 3: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그것이 언제인고 하니, 과학이 등장하기 이전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 이 세상에는 ‘자연신학’ 이라고 해서, 즉 “신 자체가 곧 자연이다” 라는 것이다. 성경에도 우상에 대해서 나오니, 그런 옛날의 사상인 우상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는 말이다.

이렇게 신이 있고 인간이 있으면, 그 신을 인간이 바라보면 죽는다는 생각을 옛날부터 했다는 것이다. 물론 불신자들도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 인간은 이 자연을 누가 만들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무슨 문제로 이어지는고 하니, “도대체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것과 결부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은근히(?) 생각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나’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내가 중요하고, 자연은 나중이다” 라는 개념은 옛날에는 없었는데, 그때는 “인간은 자연보다 작다” 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작고 우주는 크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무엇으로 표현했는고 하니, “신은 크고 나는 작다” 라고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옛날에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 그러니 가문과 혈통으로 !!

예를 들어서, 어떤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그 아이는 “자연은 크고 나는 작다” 라는 것을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게 되는데, 여기에는 중간 매개가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은 크고, 나는 작다” 라고, 그렇게 “대자연은 크다” 라고 교육을 받게 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보조를 맞추어서 신에게 나아가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가문이고 혈족, 혹은 혈통이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누구 하나 예외가 없이 모두가 다 그러한데, 즉 그것이 곧 혈족이고 혈통이란 말이다.

그러니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그 아이는 “대자연은 크고, 나는 작다” 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게 때문에, 그 중간에 무엇이 하나 끼워 넣는데, 즉 “우리 가문은 크고 너는 작다” 라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아버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됩니까” 라는 것을 궁금해하니 말이다.

사람이란 꿈이 없으면 죽는데, 즉 자기가 사는 이유가 없으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곧 죽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꿈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가는데, 즉 우리 인간은 자기가 사는 이유와 목적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목적이 제대로 달성되지 않을 때는 자살을 하게 되고 말이다. 

◈ 가롯유다가 자살한 이유는?

어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가롯유다가 자살한 이유는 자기의 꿈이 없어졌기 때문라고 말이다. 가롯유다은 꿈을 접어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는데, 그렇게 인간은 꿈을 접는 동시에 그만 자기를 접는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생각에는, 가롯유다가 자기 꿈을 접지 말고 끝까지 자기 몸을 누구에게 넘겨주면 되지 싶은데, 예수님에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육으로 난 자와 영으로 난 자의 특징이니 말이다. 육으로 난 자는 하나님을 동원하고, 교회를 동원하고, 개혁주의 신학을 다 동원해도, 그런 것은 다 자기 꿈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수고 뭐고 간에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 교회를 위해서 봉사한다 ??

흔히들 “나는 교회를 위해서 봉사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교회를 위해서 봉사한다는 것이 왜 나쁜고 하니, 왜 그것이 죄이고 악마의 생각인고 하니, 인간은 교회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꿈을 접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교회와 자기를 그만 잘라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예 교회와 엮지 말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교회는 눈에 보이니 말이다. 즉 교회는 힘의 단체라는 것이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힘이 모인다는 것이고, 그런 힘이 있는 곳에서 그만 대장 짓을 하고 싶고, 또한 그런 대장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아무튼 사랑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과 자기를 자꾸만 엮어버리면, 그런 가시적인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끊어버린다는 것이다. 깊은 산 속으로 숨어버린다든지 말이다. “이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 나도 세상을 버린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라고 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하나의 권력이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도, 또한 교회도 하나의 권력이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나 하나님은 다 껍데기라는 것이다. 아니 보이지도 않는 예수를 왜 찾는가? 그들의 속마음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를 찾는 사람들이 귀한 것이지, 원래 예수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혹시 권사님은 예수님을 보셨어요?

◈ 없는 예수를 왜 찾는가?

그러니 그들이 하는 말이, “없는 예수를 왜 찾는가?” 라는 것인데, 즉 “있는 교회를 찾아야지” 라는 것이다. 그들이 개혁주의를 왜 주장하는가? 없는 예수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있기 때문인데, 그러니 그 교회가 개혁주의를 원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개혁주의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칸트의 철학 때문인데, 즉 “비록 나는 세상에서 돈을 번다고 이 꼴로 살아가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회개를 하면 주께서 나를 성경말씀대로 새 사람이 되었다고 구원을 하시겠지” 라는 것이다. 그것이 칸트철학이고 바로 개혁주의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이, “왜 십자가 마을은 자꾸만 우리를 보고 죄인이냐고 하는가?” 라는 것인데, “물론 우리가 죄인이 맞지만, 하지만 이제 십자가를 믿고 인간이 되었잖아. 그렇게 인간이 되었으니 올바른 공동체, 이상적인 공동체를 세우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그런데 왜 자꾸만 십자가 마을을 우리를 보고 죄인이라고 하고, 또한 교회는 왜 무교회주의로 나가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말씀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도 하기 싫은 모양인데, 그래서 “말씀중심으로 가자” 라고 하면 그들은 “교회가 없이 어떻게 되겠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저에게는 어떻게 쟁쟁하게 들리는고 하니, “사람들이 권력을 사모해서, 그런 권력이 주는 사랑을 그리워해서 초신자들이 교회에 나오는데, 교회가 그런 권력과 사랑을 포기하면 그들이 무슨 재미로 교회에 오겠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십자가 마을에서는 “예수를 믿도록 해야지요” 라고 하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데, 물론 겉으로 말은 못하지만 말이다. 즉 “없는 예수를 왜 찾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면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사람들이 교회에 예수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닌데, 아직 그것도 모르는가? 이 순진한(?) 십자가 마을의 인간들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당신은 지금 21세기의 세계가 16세기, 17세기, 18세기 등등 중에서, 도대체 어디에서 도출되었는지 아는가?” 라고 물어보라는 것이다. 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자본주의의 힘에 의해서 지금의 21세기가 되었는데, 그리고 어릴 때부터 그것을 교육받았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게 환상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현실이라고 본다는 말이다.

◈ 진보적인 시간론 - 인간의 꿈을 현실로 !!

그러니 ‘현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자기가 머릿속에서 조작하기 나름대로 인데, 그것이 현실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기가 만든 꿈을 현실로 만드는데, 거기에 동원된 것이 곧 ‘진보적인 시간론’ 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진보적인 시간론은 항상 미래에 무엇을 남겨두는고 하니, 아직 못다 이룬 꿈을 남겨둔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그런 꿈이 있으면 자살을 하지 않는데, 그런데 만약에 자기 꿈을 접어야 한다면 그만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인간 속에는 놀랍게도(?) 이미 뱀이 들어있는데, 그게 무슨 뱀인가? ‘너의 꿈은 미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진보적인 시간관인데, 그러니 뱀이 한 마리가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만 해도 징그러운데, 자기 머릿속에 뱀이 들어 있으니 말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우리 인간은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니 뱀이 달려드는데, 만약은 죽은 흙이라고 하면 뱀이 아무리 자리를 잡고 폼을 잡아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니 그런 유혹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인간은 왜 진보적인 시간관인고 하니, “나는 과거보다 더 착해질 수 있고 거룩해질 수 있다” 라는 것을 자신의 꿈으로 삼을 때만, 그때 비로소 종교가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런 힘을 말이다. 즉 “여러분, 아직도 술과 담배를 하십니까? 우리 교회에 오시면 술과 담배를 끊고, 더 질이 월등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라고 하기 위해서, 그런 진보적 시간관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 과학 - 질(質)에서 양(量)으로 !!

방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까, 더 나은 질(質)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런데 이 질이 과학이 되어버리면 그만 양(量)으로 바뀌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질에서 양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질이 없어지는가? 그게 아니라 양으로 따진 새로운 질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제가 여러 번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여러분이 자꾸만 잊어버려서 주지를 시키는 의미에서 다시 하겠는데 말이다. 과학은 무엇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이렇게 선풍기와 매직이 있는데, 분명히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학에 들어가게 되면 서로가 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선풍기와 매직이 전혀 다른데 말이다.

어떻게 서로 같은고 하니, 그것을 숫자로 셈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선풍기도 하나이고 매직도 역시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1’ 이라는 것으로 같다는 말이다. 전혀 반응이 없는데(ㅋㅋ), 서로 같지 않은가요? 선풍기를 2대씩 더하면 몇 대인가? 4대인데, 즉 ‘4’ 라는 것이다. 매직도 역시 2개에 2개를 더하면 ‘4’ 라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똑같다는 말이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면, 만약에 이 선풍기가 있는 자리가 지구상에서 ‘위도 37도, 경도 108도’ 라고 했을 때, 물론 제가 지어낸 말인데 말이다(ㅋㅋ). 그런데 거기에다가 매직을 집어넣으면, 매직도 역시 ‘위도 37도, 경도 108도’ 라는 곳에 놓여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가 똑같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선풍기와 매직은 높이도 같고, 아래위의 지점도 같고, 또한 숫자도 같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똑같이 취급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지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들인데 말이다(ㅋㅋ).

다시 예를 들어보면, 여기 이렇게 공장에서 빵을 만드는데, 공장이니 대량으로 똑같이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빵을 하나 만들어내는데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데, 그런데 그만 빵 하나가 문제가 있어서 끄집어내어서 손질한다고, 다른 빵들보다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빵이 출고가 되었는데, 그러면 소비자는 그 빵과 다른 빵을 구분하겠는가? 그냥 똑같다는 것이다.

◈ 너거 교회는 몇 명이나 모이노?

또 하나 예를 더 들어보면, 이렇게 수능시험을 치는데, 이쪽에는 장관 아들이 시험을 치고, 또 저쪽에는 9급 공무원 아들이 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험관이 장관 아들과 9급 공무원 아들의 시험점수에 대해서 차이가 나겠는가? 나지 않겠는가? 예? 차이가 난다구요?(ㅋㅋ) 차이가 나지를 않는데, 만약에 두 명이 다 점수가 250점이 나오면 둘 다 똑같은 대학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점수가 같으니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결국 무엇으로 구별을 하는가? 점수인데, 여기서 점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결국에는 ‘수(數)’ 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하는가? “너거 교회는 복음을 어떻게 전하노?” 라고 하는가? 그것이 아니라, “너거 교회는 몇 명이나 모이노?” 라고, 그렇게 숫자로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교회는 5명이다” 라고 하면, “에이!” 라고 반응을 하고, “5천명이다” 라고 하면, “어허!”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진주야, 그 사람 수입이 얼마고?

그러므로 질(質)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데, 그 질을 무엇으로 판정하는가? 숫자로 판정하는 새로운 질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한 달 수입이 5백만원인 사람과 5천만원인 사람은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딸이 누군가와 사귄다고 하면, 먼저 그 사람을 보기 전에 한 달 수입이 얼마인지 묻는다는 것이다. 믿음이 좋고 말고 하는 것은 그 다음이고 말이다.

그렇게 숫자를 가지고 묻는데, 즉 그 어떤 인간이라도 숫자 안에서, 숫자라는 점에서는 똑같이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숫자가 같은 레벨끼리는 살고, 숫자가 떨어지는 놈들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 질이 무엇으로 변하는가? 숫자로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가격에 따라서 반응이 다르다는 것이다.

* A : 사장님, 여기 이 포도는 얼마입니까?
* B : 예, 2만원입니다.
* A : 옆집에서는 25,000원이던데, 그러면 포도가 다른 겁니까?
* B :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 집에서 싸게 받는 겁니다.
* A : 야, 그 놈의 가격이 참 착하네.
* B : 예, 착하지요.

여기서 가격이 뭐하다는 것인가? 착하다는 것인데, 즉 가격이 선하고 거룩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착하고 선하고 거룩한 것이 무엇으로 판정을 받는가? 가격, 즉 숫자라는 말이다. 아무리 참하고 예쁜 며느리라고 해도 시집을 오면서 빈손으로 오면 시댁에서는 뭐라고 하겠는가? 착한 며느리라고 하겠는가?

그야말로 시건이 없는 며느리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철이 없는 말이다. 그 며느리는 시댁에서 “너는 올 때 숟가락도 가지고 올 필요가 없다. 그냥 오너라” 라고 하니, 그것을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왔다면, 시어머니는 그 며느리를 그만 쥐어박고 싶다는 것이다(ㅋㅋ).

◈ 옛날에는 그야말로 물레방아 인생 !!

하지만 옛날 고대에서는 그렇게 인간을 숫자화시킬 필요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대자연의 숫자만 있어도 살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4계절이 있고, 또한 음력만 있어도, 그들은 자연의 혜택을 입고 살아간다고 여겼는데, 바로 그 자연의 혜택이 신의 은총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물론 그 누구라도 신을 본 사람은 없는데, 그렇게 없지만 그러나 인간은 신이 없이는 살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언젠가는 죽는데, 그러면 누가 죽이는가? 대자연의 수레바퀴가 죽이는데, 그러니 이 세상은 그냥 돌고 도는 그야말로 물레방아 인생이라는 말이다. 즉 아이는 태어나고, 늙은이는 죽고 말이다.

그렇다면 신은 무엇인가? 죽어도 없어지지를 않는 것인데, 즉 그렇게 죽어도 남겨지는 것을 가지고서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것이 바로 혈통이고 가문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혈통과 우리 가문은 신과 함께 한 가문이다” 라고 한다면, 그런 가문에서 태어난 것조차도 이미 구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이삭 혈통인가? 아니면 이스마엘 혈통인가?” 라는 것으로 구원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새로운 혈통을 주셔서 구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존의 인간들이 이미 혈통 중심으로 굳어있음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옛날에는 개인보다 혈통이 우선이었는데, 요즘과 같이 개인이 우선이라고 하는 것은 18세기, 19세기에 와서 비로소 생긴 변종이고 돌연변이라는 말이다. 개인을 혈통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말이다. 그러면서도 현대인들은 뭐라고 하는가? 자기 마음대로 산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가 자기 부모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새끼가 참으로 중요한데, 그러니 옛날이니 지금이니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제가 여러 번 강조했는데, 아무리 21세기라고 해도 TV에서 조선시대 사극을 보면서 놀란 것은 다른 점이 아니라, 그 사극에 등장하는 개와 지금의 개가 똑같더라는 것이다(ㅋㅋ). 물론 요즘에는 개에게 옷을 입히고 파마를 하고 예방주사를 놓기는 하지만 말이다.

◈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어 !!

아무튼 똑같은데, 그것은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이 제 아무리 문화라는 옷을 입어도 똑같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는데, 그때 그 시절의 그 몸에서 말이다. 즉 옛날 아담의 몸과 지금 우리의 몸이 똑같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명의 옷을 벗기게 되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나 그때의 아담과 하와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몸이 똑같다고 하는 것은,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촉을 받고 있다는 의미인데, 언약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니 이 진보적인 시간관이 무엇인고 하니까, 진보적인 시간관은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이, 인간은 결단코 악하지 않다는 것인데, 즉 “인간은 선할 수 있다” 라는 것을 보장해주기 위해서 시간을 끊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져간다는 것이다. 즉 진보해나간다는 말이다.

◈ ‘다니엘과 70이레’의 경우에 !!

하지만 이런 진보적인 시간관은 반칙인데, 왜 그런고 하면, 그것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튼 계속해서 이어져야 하니까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옛날 사람들 같으면, 즉 1592년도 같으면, 그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말이다. 그때 살던 사람들과 B.C 400년경에 살던 사람들이, 그때는 다니엘이 살았고 말이다.

이렇게 되면 ‘다니엘과 70이레’에 관한 논문 이야기가 또 나오게 되는데, 제가 그 논문을 썼던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면, 70이레를 이해했던 그때 그 당시 사람들이 있는데, 즉 다니엘이 이 70이레를 이야기했는데, 그때 이 70이레를 들었던 그들이 해석한 70이레와,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해석한 70이레가 과연 같은지 다른지, 바로 그것을 따지는 것이 그 논문의 취지라는 것이다.

그때 그들이 결코 다음과 같이 이해하지는 않았는데, 즉 “우리는 절대로 해석하지를 못해. 나중 사람들이 해석할거야” 라고 말이다. 그런 생각은 그 어떤 사람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자기 시대에는 자기가 옳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 그 어떤 시대이든, 자기 시대가 해석의 마감 !!

오늘이 2010년 7월 5일인데,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지금 해석하지 말고, 20년 뒤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맞기십니다” 라고 하겠는가?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렇게 되어버리면 우리는 믿을 것이 없는데, 그 사이에 죽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진리도 모르고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냐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그 어떤 시대든지 자기 시대가 해석의 마감인데, 내일은 없는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 자기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70이레 해석을 그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했는지, 그것을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70이레가 나오는 이 다니엘서의 묵시를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여겼는가? 묵시를 해석하려고 하면, 하지만 자기들은 땅에 살고 있는데, 그 땅에 역사, 즉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묵시를 무엇으로 해석하겠는가? 자기 시대에 합당하게, 즉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를, 즉 “나는 이렇게 바르고 살고 있다” 라는 것을 변명하기 위한 방향으로, 그렇게 자기 믿음이 옳다고 하는 방향으로, 그렇게 70이레를 누구 좋아라고 해석을 하겠는가? 당연히 자기 좋아라고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년 뒤의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아하, 20년 전에 70이레를 해석한 사람들은 잘못되었어. 그들은 역사를 몰랐어. 바로 지금 우리가 해석하는 것이 옳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100년 뒤에 가면 어떻겠는가? “아하, 100년 전에 70이레를 해석한 사람들은 잘못되었어. 120년 전에도 잘못되었고, 100년 전에도 잘못되었어. 지금 우리가 맞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식으로 하면서 유대나라가 진행이 되었는데, 즉 “지금 비록 우리는 로마에게 나라를 잃었지만, 하지만 우리는 다니엘의 70이레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 메시야가 구름을 타고 오시면, 그렇게 되면 그 70이레는 우리를 향한 해석이다” 라는, 그러한 해석을 품고 유대나라가 성전이 깨어진 상태에서,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말씀중심으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 너희들이 곧 마귀가 아닌가?

그래서 그 ‘다니엘과 70이레’ 라는 논문의 포인트는 무엇인고 하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었는데, 즉 그들이 한 해석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해석인데, 그러면 오늘날 소위 개혁주의라고 하는 너희들은 그들의 해석과 무엇이 차이가 나는지, 만약에 있다면 그것을 한번 내놓아봐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당시 그들이나 지금 개혁주의자들이나 똑같다는 말인데, 왜냐하면 둘 다 묵시를 무엇으로 해석했는가? 자기들 신학의 정당함을 보장하기 위한 역사적 해석으로 변형을 시켜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제가 주장한 것은 “바로 지금 이 논문을 듣고 있는 너희들이 곧 마귀가 아니냐?” 라는 것이다.

그때 방청석에서 그런 저의 취지를 알아들은 양반이 몇 명이 있었는데, 저를 보고 계룡산에서 하산했느냐고 시비를 거는 양반부터 해서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 그들이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는 없었는데, 즉 그들도 나름대로는 도를 닦은 자들이기에 말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로 말귀를 알아들었는데, 명색이 박사들인데 말이다. 물론 자기들이 다 아는 소리를 했을 것 같으면 그렇게까지는 나오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자기들이 모르는 소리를 하면서도 그것이 자기들을 치고 들어온다는 것은 안다는 말이다.

◈ 박사학위도 죄에 불과합니다 !!

그러니 박사학위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다가, “이 박사학위도 주님의 십자가에 욕을 보이는 죄에 불과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박사학위의 결론에 들어가 버리면, 그러한 박사학위를 줄 교수가 누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박사학위에 그런 것이 빠지고 없다는 것은 결국 무엇인고 하니, “현재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지금 이것이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해 주는 멋진 신학입니다” 라고 제시한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어떻게 십자가 앞에 선 죄인의 자세냐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도 죄고, 모두가 다 죄인인데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죄가 아닙니다” 라고 하는 게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또 하나의 과거에 했던 오류인데 말이다.

그래서 ‘다니엘과 70이레’ 라는 논문의 끝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역사에서 나오는 모든 신학은 다 죄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니 제 옆에 옆에 앉아있던 교수가 그게 무슨 소리인지를 알아듣고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물론 저에게 직접 이야기하지는 못하고 말이다. “그래도 나는 역사적 성경해석법을 고수하겠다” 라고 했는데, 그게 자기가 논평한 글에도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 개혁주의는 곧 천주교 !!

그것이 바로 천주교라는 것이다. 이 천주교는 역사적 전통을 선(善)으로 간주하는데, 그게 곧 진보적 시간관이라는 말이다. 즉 자기들은 이만큼 산 위에 올라왔다는 것인데, 그러니 저기 아래에 있는 자들은 무식하지만, 자기들은 이만큼 진보했다는 말이다. 자기들은 그렇게 진보가 된 만큼 질적으로 선하고 거룩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것은 칸트철학에 불과한데 말이다. 지금까지 이 칸트철학을 제가 어렵게 설명했지 싶은데, 그런데 이 칸트에 대해서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아주 쉽게 설명을 하자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칸트철학 - 저는 남을 해친 적이 없습니다 !!

칸트철학은 무엇인고 하니, “진짜 하나님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데, 그것을 물(物) 자체라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 속에는 하나님이 집어 넣어준 동물과는 다른 하나님의 속성과 형상이 들어있는데, 그것은 무형적인, 즉 양심적인 호소로 나오는데,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 라는 것은 무식한 놈이나 배운 놈이나 모두 아는 것인데, 즉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형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이나 철학을 몰라도 진짜 양심의 호소대로 살면, 그것이 바로 물론 우리가 신을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신의 흔적은 가지고 있기에, 신에게 접근하는 이상적인 나라가 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라는 이름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주 쉽게 요약해서 이야기한 칸트철학이라는 말이다. 여러분은 들어보니 어떤가요? 교회에서 많이 듣던 이야기가 아닌가요? 물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상식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이고 말이다. 즉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남에게 해꼬지를 한 적은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불교는 무엇인고 하니까, 불교는 “신마저도 없다고 치자” 라는 것이고, 칸트철학은 무엇인고 하니, “신은 있는데 다만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지 다는 모른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 있는 모든 교회는 무슨 철학인가? 복음이 아니라, 칸트철학, 즉 칸트의 이성적 철학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 프로이트 - 아싸리 깨놓고 살자 !!

그런데 나중에 철학자들이 이것을 가지고 빈정거리면서 얼마나 놀리는지 모르는데, 즉 “당신이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것은 너의 속이 더럽기 때문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주장을 한 자가 곧 프로이트인데 말이다. 즉 속이 얼마나 더러웠으면, 자기 속에 있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그렇게 자기 속에 있는 겹겹이를 선을 추구한다는 그 말로서 감추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돈을 벌려고 그렇게 더러운 짓을 하는 것을, 계속해서 두 겹, 세 겹 감추려고 하니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감추려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말하기를 “어이, 우리 그러한 이성적인 것을 하지 말고 무의식적으로 들어가 보자. 그렇게 들어가면 그 안에는 온갖 것들이 다 있는데, 즉 ‘하고 싶다, 즐기고 싶다, 마시고 싶다, 때리고 싶다, 죽이고 싶다’ 라는 것들이 말이다. 그러니 이제 서로 그만 감추고 아싸리 깨놓고 살자. 그렇지 않으면 피곤해서 살지 못하는데, 서로가 서로를 속인다고 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포로이트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고 하니, 인간을 보고 너무 양심적으로 어쩌고 저쩌고 하면 정신병에 걸린다는 것이다. 주거환경이 나빠서 아토피에 걸리고, 또 ‘무엇 무엇인 척’을 하니 우울증에 걸리고, 그러니 그냥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아까 교회가 무슨 철학을 주장한다고 했는가? ‘무엇 무엇인 척’을 하는 칸트철학을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에 가봐야 모두가 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것이다. 즉 모두가 ‘척’을 하면서 있는 똑같은 놈들이라는 말이다.

◈ 아빠, 교회가 곧 문을 닫아요 !!

어제 독일에 있는 어여쁜 진주와 통화를 했는데, 독일교회를 가니 거기 목사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3주가 지나면 이 교회는 문을 닫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필이면 3주 뒤에 문을 닫는 교회에 갔다는 말이다. 그 교회가 왜 문을 닫는고 하니, 예배당은 200명이 들어갈 정도로 크게 지어놓았는데, 그런데 모이는 사람은 10명도 안 된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독일교회의 부동산은 다 국가의 소유인데, 목사도 국가에서 월급을 받고 말이다. 사찰집사나 성가대도 월급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러니 정부에게 볼 때 어느 정도는 헌금으로 교회유지를 하는데 받쳐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문을 닫기로 했는데, 즉 일종의 공기업 구조조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것이 지금 독일교회의 모습인데, 그러면 젊은 사람들이 왜 교회에 가지 않는가? 교회에서 말하는 철학은 이미 학교에서 다 배웠다는 것이다. 구제, 봉사 등등은 말이다. 물론 나이가 많은 사람은 이제 곧 죽을 몸이기에 계속해서 ‘인 척’을 해주어야 하지만, 그러나 젊은이들은 ‘인 척’을 하는 것보다는 감각적이고 적극적이고 즉흥적인 것이 더 뜨겁다는 말이다. 

◈ 왜 동창회를 가는가?

다시 말해서, 친구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면서 노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교회에 나오는 것보다 말이다. 젊은이들이 친구를 왜 만나는가? 친구가 좋아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술을 먹고 싶어서 그 핑계를 댄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사람들이 왜 동창회를 빠지지 않고 가는가? 술을 혼자 마시면 재미가 없으니까, 같이 어울려서 마실 놈들을 찾다보니 동창회를 가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모여서 술만 마시면 조용하게 되는데, 그 다음에 2차 순서로 사고를 치니 문제가 되지만 말이다. (ㅋㅋ)

그렇게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이 힘이 드니, 즉 돈을 번다는 것은 ‘~척’을 해야되니 말이다.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서는, 이제는 그것을 깨어버리는 분위기가 그립고, 즐기고 싶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이명박을 욕하고 정운찬을 욕하고 말이다. 그렇게 풀고 싶어서 만난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는 왜 오는가? 축구를 하기 위해서 모이고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주님이 누구십니까?” 라고 하면 안 되는데, 그런 복음은 안 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지금이 어떤 시절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말이다.

◈ 다시, 없는 예수를 왜 찾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은 “없는 예수를 왜 찾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런 예수를 찾는 게 아니라, 같이 즐길 친구를 찾기 위해서 교회에 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노래방 시설도 잘 갖추어놔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를 하나의 쇼인데, 그러니 빨리 끝내고 재미있는 2부 순서로 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순진하게 옛날 가락들을 가지고 “그저 사람은 갈고 닦아야 한다” 라고 한다면, 과거에 도를 닦던 버릇이 있어서 말이다. 그렇게 교회에서 윤리와 도덕적인 것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젊은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답답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서 그렇게 도덕적으로 말하던 우리 엄마가, 우리 집구석에서 하는 것들을 보면 더러워서 말이야. 집에서는 돈밖에 모르면서, 교회에서는 권사라고 거룩한 척을 하고 말이야. 회개는 무슨 회개를 한다는 거야. 그냥 말뿐이지. 그러니 차라리 내가 더 솔직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비아냥거리면서 교회에 오는데, 물론 가끔 오다가 나중에는 오지도 않지만 말이다. 그러면 왜 안 나오는가? 그런 인간들끼리 모이는 것보다, 차라리 그 시간에 친구들을 만나서 노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회개한다고 하는 것보다도 말이다.

◈ 영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문 !!

아무튼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교회에서 성화주의를 통해서 말이다. 다시 설명을 해보면, 이렇게 신과 인간이 있는데, 그 매체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가문이고 혈통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집안이 잘 되는 것인데, 여기서 잘 된다는 것은, 착하고, 선하고, 거룩하다는 의미인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집안이 훌륭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렇게 훌륭하다는 것이 나중에는 권력과 관련이 되는데, 즉 영웅을 배출하면 훌륭한 집안이 되고 가문이 된다는 말이다. 또한 그렇게 영웅을 배출하면, 영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문의 시작이 되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이율곡이 괜찮다고 하면 계속해서 이율곡인데, 하지만 그 이율곡 이전에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율곡이란 영웅이 등장하게 되니, 그를 낳은 아버지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보면 그와 비슷한데, 2세가 등장하기는 해도 별로 중요하지 않고 뜨는 것은 오로지 다윗이라는 말이다.

◈ 포이에르바하 - 신은, 인간이 확장된 것이다 !!

그렇게 인간은 자기가 조작해낸 대자연의 신에게서 잘된다고 하는 것은, 그 대자연의 신이 만들어낸 영웅들을 많이 배출해내면 잘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자연의 혜택을 입지 못하면,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15세기부터 과학이 발달하면서, “자연은 우리 인간 손안에 있어. 자연은 우리가 주물럭거리기 나름이야”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자연과 더불어서 무엇도 주물럭거리게 되는가? 자연이 신이고 또한 신이 자연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과학의 발달로 자연을 다스리게 된다는 말은, 곧 신도 누구 손에 있다는 것인가? 우리 인간들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하는 말하기를, “신은 인간이 확장된 것이다” 라고 했는데, 즉 신은 인간이 인간에게로 돌아오기 위해서 경유하는 절차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인간은 신을 통해서 경유하게 되면, 자기보다 더 큰 자아상의 꿈을 남길 수 있다는 말이다. 신을 닮은 말이다. 그냥 “내가 나 된다” 라고 하면 힘이 드니, 뭔가 모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과 같은 나” 라는 말이다.

◈ 성경은, 인간 자체가 열매 !!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인간이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인간자체가 열매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것은 성화론이나 개혁주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것이고,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인간자체가 열매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성경에서 “니가 열매다” 라는 것은, 열매가 열매를 맺을 수는 있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열매가 어떤 운명을 가지느냐는 것은, 열매 자체가 아니라 과연 어디에 소속이 되어있느냐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처음부터 소속이 어디인가? 선악과 소속인데, 그러니 당연히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무엇으로 끝났는가?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라고, 그렇게 비참하게 저주로 끝났는데, 그렇게 이스라엘이 저주로 끝난다는 것은 나머지 다른 민족들도 역시 다같은 저주로 끝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열매를 맺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 열매의 소속이 어디인가?

그렇게 저주를 받은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저주를 받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열매를 내놔 봐라. 이 나쁜 썩은 무화과나무야!” 라고 저주를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그 다음의 선한 열매라고 하는 것은, 열매 자체를 보고서 닥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소속이 어디이냐는 것인데, 새로운 소속이 된다는 말이다.

(마 21: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다시 말해서, 생명나무에서 온 열매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 아버지는 농부이고, 나는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이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선한 열매를 맺게 되면, 이제부터는 열매가 된 자들은 누구를 증거하겠는가?

열매는 열매 자체가 아니라 “나는 누구누구 덕분에 포도나무의 열매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혈통이고 새로운 나라라는 말이다. 즉 천국이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말이다.
 
 
◈ 성령의 열매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꽂아야 !!

그래서 어제 설교시간에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육적 열매와 성령의 열매가 따로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설교제목도 우리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 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 성령이 어디에 꽂혔는가? 우리에게 꽂힌 것이 아니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린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 성령을 꽂았다는 것이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렇게 되니, 그 꽂힌 대롱으로 십자가의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데, 그것이 곧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어떻게 살았는지,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는 것이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선악과 - 선과 악이 함께 !!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즉 죄인이 죄를 만들어내면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죄를 만들어내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런 것이 참으로 어려운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주유소에서 카드로 결제할 때를 생각하면 되는데 말이다. 우리가 기름을 다 넣고 나서 결제할 때 사인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 전표가 3장인데, 마지막 한 장만 우리가 가지고 그 나머지는 주유소 주인이 가져간다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그 다음에는 인간이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그 여분의 양심이, 즉 선이 분리가 되어서 비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은 선이 없는 상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악을 행하면 행할수록 “이것은 아니잖아!” 라고 하는 생각이 자기 양심에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둑질을 하고 나서 미안하니 지하철에 엎드려있는 걸인에게 만 원짜리 한 장을 적선한다는 말이다. 그런 짓을 하는 인간들은, 자기가 남의 돈을 훔쳤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주유소에서 카드를 긁었다는 것인데, 너무 미안하니 기마이I(?)를 쓴다는 말이다.

◈ 아니, 감사헌금을 백 만원이나 ??

예를 들어서, 회사에서 아주 큰돈을 횡령한 인간이 술집에 가서 천 원짜리를 아가씨에게 팁으로 주겠는가? 만 원짜리나 수표를 마구 뿌리는데, 자기가 그만큼 도둑질을 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서 갑자기 목돈을 헌금하는 것도 굉장하게 수상한데(ㅋㅋ), 분명히 뭔가 자기가 생각해도 구린 돈이 들어왔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선악과인데, 그러니 선악과는 악만 저지른 것이 아니라, 악을 저지른 그 비율만큼의 “아하, 이것은 나쁜 것이야” 라는 생각이 증가한다는 말이다. 항상 말이다. 그래서 어떤 인간이 회개를 하게 되면, 즉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순간에, 그 반대편에는 무엇이 생기겠는가? “이래서는 안 된다” 라고 선을 비축한 순간에 의로움의 방으로 넘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악과이니 말이다.

◈ 성령을 받은 자와 착각하는 자 !!

그런데 진짜로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그렇게 성령을 받은 인간에게는 죄의 방밖에 없기 때문에 따로 넘어가고 말고 할 성령의 방이 없다는 것이다. 그 방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방이지, 자기의 방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지 않고 회개를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을 조금 더 길게 설명해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데, 즉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을 받았다고 착각을 해서 회개를 하게 되면, 그런 사람은 곧장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장이 길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다시 설명하면,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을 받았다고 착각해서 회개를 하게 되면, 주로 기도원과 같은 곳에 가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데 말이다. 혹시나 그런 경험들이 없나요? (ㅋㅋ)

◈ 성령을 받은 사람은, ‘처분’을 기다려 !!

그 사람은 그 시간부터 곧 바로 착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데, 하지만 성령을 받아서 진짜 회개를 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때부터 그 사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해도 죄인의 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처분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처분을 말이다.

여기서 ‘처분’ 이라는 말은, 주님께서 관여해주기를 바란다는 의미인데, 그런데 그때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관여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신과 인간 사이에는 대자연이나 혈통이라는 것이 사라져버리고, 그야말로 난데없이 낯선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앞에서 이미 십자가를 졌다고 하는 사실이, 그것이 말씀을 통해서 제시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어라. 구원을 받는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의 모든 선과 악을 모두 다 포기하는 게 되는데, 즉 선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악조차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를 믿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로마서 10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

로마서 10장 13절이 바로 그런 의미인데, 그러니 그런 사람은 이미 자기 생각이 다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어차피 자기는 죄인인데, 즉 무엇을 해도 죄가 되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주님만을 믿는다는 말이다.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는 성령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떠한고 하니까, 일단 자기가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 즉 “내가 주를 믿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착한 일을 해서 살아가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 전에 언급한 포이에르바하의 말이 맞는데, 즉 “인간은 ‘나’에게서 출발해서, ‘신’을 경유에서, 또 다시 ‘나’에게로 돌아간다” 라는 것이다. 즉 “나는 이제 착한 사람이다. 과거를 묻지마” 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나는 새 사람이다” 라는 것이고 말이다.

◈ 하지만, 인간은 죄를 만들 수 없어 !!

아무튼 죄를 우리 인간이 만들어낼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만들어내면 항상 선한 의를 뒤에다 비축해놓고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진짜 죄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나타나야만 죄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화론자들은 극구 예수님의 십자가를 밀어내려고 하는데, “나도 다 안다, 십자가를 다 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자꾸만 십자가를 밀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자기 중간에 십자가가 턱하니 버티고 서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떠한가?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갑자기 십자가가 커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가 커지니 자기가 믿던 신도 가짜였음이 드러나고, 그러니 그러한 가짜 신을 믿는 자기 자신도, 자기가 오해한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즉 ‘나’ 라는 것도 제대로 모르면서 우겼던, 바로 그 ‘나’ 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도 역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마치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간 것처럼, 그래서 자기를 보고는 “저 사람이 사람이 누구지?” 라고 할 정도로, 오직 십자가를 지신 주님만이 보인다는 것이다. 자기는 사라지고 말이다. 도마가 고백한 것처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한 것처럼, 그렇게 주님만 보인다는 것이다.   
(요 20:28, 개역)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러니 성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을 따라붙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데 따라서 붙이기는 무엇을 따라 붙이느냐는 말이냐는 것이다. 한 집안에 같이 있는데 말이다.

◈ 10년 뒤에 잘할게요 ??

예를 들어서, 큰방에 있는 아버지에게 가기 위해서 작은 방에 있는 아들이 걱정할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그냥 걸어가면 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잠을 잘 때도 큰방과 작은 방에서 자면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 안’에서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시간적 요소가 들어갈 필요가 없는데, 즉 “10년 뒤에 잘할게요” 라는 것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이다. ‘10년 뒤’ 라는 시간적인 요소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지금 당장에 죽어도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시간적인 요소가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한 편의 강도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하는가? “지금 당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내려오면 내가 믿을게”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또 할 일이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시간적 요소가 또 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적 요소가 아닌데, 즉 예수님이 해야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계시는 분이 현장에서 보란 듯이 ‘짱’ 하고 나타난다는 말이다. 구름을 타시고, 그리고 영광과 더불어서 말이다. 그게 재림이라는 말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해보면, 인간과 신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옛날 사람들은 대자연의 혜택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선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시대에는 그것이 아니라, 즉 선하다고 혜택을 입는 것을 숫자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1,000만원이라는 목돈이 생기면 “아하,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착하다는 증거로 주신 것이구나”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숫자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항상 숫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숫자로 비교를 하니, 인간의 모든 질적인 것은 떨어지고 숫자의 양이 많은 것이, 즉 교인수가 많다든지, 혹은 오래 산다든지 하는 말이다. 물론 장로님께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ㅋㅋ), 그러면 선하고 착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신과 인간 사이를 숫자로 보는데, 그러면 숫자를 키워주는 하나님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교인들은 그런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숫자를 굳이 교회에 오지 않아도, 즉 교회 바깥에서도 키워줄 수 있다면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피로 산 교회 !!

그러면 교회가 진정 보여줄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 모습이 죄인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교회는 반드시 무엇을 증거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피로 산 교회라고 하면, 반드시 그 피를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그렇게 피를 증거하게 되면, 하나님도 떨어져나가 버리고, 인간도 떨어져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로켓을 발사할 때 양쪽의 연료통이 떨어지듯이 말이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십자가만 크게 보일 때, 그게 이미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들의 특징인데, 그것을 같이 유지할 수 있단 것이다.

그것을 ‘예수 안’ 이라고 하는고 하는데, 그 안에서 같은 한 형제가 되어서 주님에게 받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사랑이란 말이다. 서로 포옹하고 쭉쭉 거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 현숙씨, 사랑해 ??

그러니 사랑이란 자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 동안 그 사랑을 막았던 것이 바로 자기 생각, 즉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니 사랑을 막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오직 주님만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사랑이란 말이다.

물론 부부간에도 “여보, 사랑해!” 라고 하지 말고, “나는 죄인이야!” 라고 하는 것이 진짜 최고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가 교인을 사랑하는 것도, 설교시간에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바로 그것이 진짜 사랑이란 말이다.

다시 교재 105페이지를 살펴보자.

** 인간이 죄책감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서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결국 무제한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

이렇게 칸트철학에서는, 인간에게 절대로 간섭하지 말고 자기 양심에 호소할 수 있도록 무한한 자유를 주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무한한 기회와 혜택을 주라는 말이다. 그러면 사형제도는 이런 주장에 의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사형 집행일이 5월 7일 오늘이라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이 내일 회개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사형을 시키면 안 되고 계속해서 교도소에 두어서 저절로 늙어죽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 ‘고엘’ 사상 !!

참고로, 성경에 보면 사형제도는 나라에서 하는 것이 아닌데, 이 사형제도는 피해자가 그 사람을 죽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에 나오는데, 즉 고의가 아닌 경우에는 어디에 가서 사는가? 알다시피 도피성에 가게 되는데, 하지만 고의로 죽인 경우에는 도피성에 가도 보호를 받지 못하고 내침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해를 받은 피해자가, 즉 그 사람이 죽었다면 그 사람을 대신해서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의 원한을 갚아주는데, 그것을 두고 ‘고엘’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번 레위기 강의에도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대속자(代贖者)’ 라는 말이다. 즉 대신해서 죄를 속해준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대속자가 죄를 속해주는데, 그러면 속죄라는 것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값을 치르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말로 ‘무른다’ 라고 하는데, 말을 하고 보니 더 어려운 말이 되고 말았는데(ㅋㅋ), 사실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서 목사님에게 제가 돈을 10억을 빌려서 갚지 않는다고 하면, 즉 “이제 배째라!” 라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서 목사님, 제가 대신해서 이자까지 갚아주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래서 제 아내가 30억을 갚아주었다고 한다면, 제 아내는 저에게 ‘속죄자’가 된다는 것이다. 30억은 좀 많은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 그 대속자가 곧 예수님 !!

그런데 그분이 신약에서 누구라는 말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한다면 그 전제가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나는 나의 죄 값을 내 힘으로 치를 수 없다” 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예 나는, 죄를 짓는 것은 물론이고, 그 죄 값을 나의 착한 행함으로 도저히 치를 수 없다” 라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어떠한가? 자기들이 그만 속죄자가 되어서 설친다는 것이다. 즉 “율법대로 제가 우리 친척의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율법을 지켰으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율법을 지킨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주겠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은 약을 올리셨는데, “나를 죽여봐라” 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만 예수님을 죽였는데,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을 죽은 그 살인에 대한 값을 누가 갚는가? 자기들이 잘났다고 우겨서 그만 하늘에서 오신 메시야를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게 살인죄인데, 그러면 그 살인죄에 대해서 대신 갚아준 분이 누구인가? 바리새인들 중에 있는가? 없는가? 물론 없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경우에 !!

사도바울의 경우에, 자기는 바리새인 중에서 바리새인이었는데, 그런데 그가 알게 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죄 값을 자기의 행위로 갚을 길이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놀란 것은, 자기는 분명히 예수님을 핍박했는데, 즉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는가? “너가 나에게 그렇게 해꼬지를 했는데, 너만 호되게 당한다(?)” 라고 말이다. 사도바울이 그런 소리를 듣고, 그 다음부터 알게 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의인을 위해서 속죄한 것이 아니라, 즉 “잘난 사람인데 인간이기 때문에 약간 실수를 했다. 그러니 그 실수한 것만 모아서 속죄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죄인이 되어야 완전한 속죄의 의미를 안다는 것을 이 사도바울이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곧 죄인 중에 괴수이다” 라고 하며, 또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하는 시편의 말씀이 마구 튀어나오게 되고, 그리고 “인간은 모든 것이 다 악하며, 선하신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밖에 없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성령을 받은 목사라고 하면 !!

그러니 교회에서 목사가 만약에 성령을 받아서 사도바울처럼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고 한다면, 아직도 교인들에게 사랑을 받기 원하고, 또한 교회란 권력을 주장하겠느냐는 것이다. 숫자개념을 사용해서 말이다. 정말이지 사도바울이 받은 그 동일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이 예수님의 열매가 되었음을 알았다고 하면, 자기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곧 열매임을 말이다. 즉 본인이 예수님의 소유임을 알았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복음을 그야말로 주저 없이 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혀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말이다.

그러므로 “저에게 할 일을 주세요”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할 일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우리 자체가 주님의 할 일이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저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죄인이고, 또한 주님은 이렇게 해서 나의 구속자이고 고엘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 바로 그것이 성도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의미를, 그것을 우리 인간이 다 행해서 이룬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었다고 하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또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그 십자가가 가만히 있는 십자가가 아니라, 율법을 적용하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왕림하시고 관여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관여하지 않으면 그 어떤 인간이라도 십자가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런 십자가의 비밀한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라고 말이다.

(고전 12: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성도는, 하늘의 비밀을 간직한 충성된 자 !!

제가 하나교회에서 강의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성도는 하늘의 비밀을 간직한 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간직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고 말이다. 주님의 비밀을 간직했다는 것은, “너희들은 몰라. 너희들이 십자가를 알어?” 라고 하는데, 그러니 비밀을 간직한 자들은 항상 싱글벙글인데, 늘 감사하고 말이다. “아하, 값을 대신 치르셨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바로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이 평소에 하신 모든 말씀이 이해가 되는데, 즉 어떤 임금님이 있었는데, 그 신하가 종에게 가서 돈을 갚지 않는다고 감옥에 가둔다는 것이다. 자기는 이미 임금에게 탕감을 다 받아놓고 말이다.

(마 18: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18: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마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마 18: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마 18: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 18: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 18: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마 18: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마 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그런 것이 십자가 안에서 모두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니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 말고 나를 따르라” 라는 것도, 또한 “인자를 거역하는 것은 천국을 거역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도 그렇고, 부자청년에게 “재물을 다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라는 말씀도 그렇고 말이다.

계속해서 106페이지를 교재를 살펴보자.

** 인간 스스로가 모든 것의 원인이 되고 또한 결과가 될 때, 그래서 자체적으로 자존하고 자립할 때, 주체는 비로소 통일된 일체성을 경험하게 되고, 이때만 행복하다. 이 초월적 주체관을 외부에 알리는 방식이 곧 언어생활이다.

◈ 초월적 주체관을 외부에 알리는 방식이 곧 언어생활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쉬운(?) 말을 조금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인간은 새삼스럽게 자기 주변의 것에다 의미를 두고, 그렇게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을 끌어 모을 때 비로소 자기의 정체성을, 즉 “나는 이런 인간이다” 라는 것을 하나의 통일체로 주섬주섬 모으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자기에게 납득이 되지 않으면, 억지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서라도 끌어당기는데, 그렇게 자기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끌어 모아야만, 자기 주체의 통일성을 갖추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통일성을 갖추게 된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조절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 초월적 주체관을 외부에 알리는 방식이 곧 언어생활이다” 라고 하는데, 지금부터 이것이 무슨 말인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조금 힘이 들어도 참고 들어야 하는데, 이런 것을 알아놓으면 나중에 편리하게(?) 다 쓰인다는 말이다.

◈ 헛되지 않은 것을 찾아서 !!

옛날에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 이전에는 플라톤이 있었고 말이다. 이 플라톤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 세상은 허상이고, 진짜 세상은 감추어져 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왜 허상이라고 했는고 하니, 이 세상은 변한다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도 상당히 똑똑했는데, 그러니 지금까지도 그렇게 유명한 철학자로 인정을 받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과거 젊었을 때 사진에 있는 그 아가씨는 지금은 아무리 찾아도 없는데, 경찰서에 신고해도 전혀 찾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이미 그 여자는 변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이렇게 있지만, 내일이 되면 또 다시 변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변하니, 그것을 ‘허상’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변해도 나는 여전히 이렇게 있잖아” 라고 한다면, 그러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죽어도 자기가 죽는데, 그러면 죽고 난 뒤에 25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가? 잊혀진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사실은 처음부처 잊혀진 존재였는데, 약간 시간이 더 걸렸을 뿐이지 말이다.

그러니 옛날 사람들이 참 머리가 좋은데, 죽고 난 뒤에 50년이 지나면 잊혀지는데, 그것을 처음부터 잊혀진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니 안개인데, 어디에서 많이 듣던 말이죠? 그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바로, 변화하니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너무 허탈하고 짜증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 허무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산에 가서 도나 닦든지, 아무튼 살아가려고 하니 맥이 그만 풀리고 만다는 것이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말이다.

이제 다음 주부터는 중고등부 설교를 전도서를 해야되는데, 그러니 골치가 조금은 아프다는 것이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라고 해야되니 말이다. 혹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반발을 하는 학생도 있지 않을까 염려도 되고 말이다(ㅋㅋ).

아무튼 여기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헛되지 않거든!” 라고 나왔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스승의 이야기가 틀린 것은 아닌데, 죽을 때는 헛되니 말이다. 그렇게 변해서 죽는 것은 맞는 말인데, 하지만 살아있을 동안에는 의미를 두자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의미를 둘 때, ‘A〓A’ 라면, ‘A≠B’ 라고, 그리고 ‘A〓B’ 라면, ‘B〓C’이고, 그러면 ‘A〓C’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하나마나한 이야기인데, 왜 이런 소리를 하는고 하니, 찾자는 것인데,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 헛되지 않은 것을 찾아내자는 것이다.

◈ 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

지금부터는 헛되지 않은 것을 찾아보겠는데, 예를 들어서, “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라는 것을 동양에서도 알았고 또 서양에서도 알았는데, 그런데 동양에서는 수력발전소를 만들었는가? 전도사님, 옛날에 동양에서 그런 것을 만들었나요? 

분명히 없는데, 그런데 서양에는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동양에서는 안다고 하면서도 해놓은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이다. 즉 동양은 “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서양에서는 “왜 떨어지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이 위에서 아래로 왜 떨어지는가? 서양에서는 “밑에서 당기니까 떨어진다” 라고 하는데, 반면에 동양에서는 “자연의 이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양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자연에도 이치가 있는데 그 이치를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사과가 왜 떨어지는가? 그것이 곧 중력인데, 그러면 중력을 무엇으로 바꿀 수 있는가? 동양에서는 “자연은 자연이고, 산은 산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서양은 “모든 것은 힘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힘인데, 이렇게 모든 것이 힘이라고 하면 그 힘 속에는 인간도 포함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당연히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도 힘이라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사람이 더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힘을 얻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힘을 ‘뚝’ 떼어서 자기 힘으로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것을 동양은 ‘자연’ 이라고 하고, 서양에서는 ‘힘’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 힘을 이용하자는 말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도 물레방아를 돌리는데, 그때 자석에다 코일을 감아서 돌리면 전기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이다.

◈ E = MC²!!

그 힘을 바로 에너지라, 즉 전기 에너지라는 말이다. 동양에서는 활을 쏠 때 서양에서는 원자폭탄을 만들었는데, 즉 “E=ΔMC2” 이라는 말이다. 즉 질량(M)의 변화(Δ,델타)에다가 광속도의 제곱(C2)이 곧 에너지라는 것이다. 이 물질이 에너지가 되고, 에너지는 곧 물질이 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동양이 아닌 서양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자연에는 이런 이치가 있는데, 그 자연 안에는 누가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 있다는 말인데, 그러니 인간은 착함과 선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개똥같은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힘인데, 그러니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힘을 끌어 모으면 되는데, 즉 누가 뭐라고 해도 힘만 끌어 모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만나도 “당신은 어떤 힘이 있어요? 그 힘을 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니 당연히 힘이 있는 자에게 모이고, 그런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럴 때 그 힘을 두고 ‘명제’ 라고 하는데, 방금 말한 ‘A〓A’ 라고 하는. 즉 “A는 A와 같다” 라고 말이다. 그 명제를 문장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명제’ 라고 하는 것은 ‘진리’ 라는 것이다.

◈ 과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했는가?

그런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과 이런 것들이 무슨 관계가 있는고 하니, 다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지금 21세기까지 살아온 것에 의하면 과학이 진리인데, 왜냐하면 이 과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했는고 하니, 우리가 힘인 것을 알게 해주었고, 또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해주었고, 더 나아가서 그런 필요한 힘을 우리에게 제공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과학을 앞서서 한 자들이 당연히 힘이 있게 되는데, 그러니 서양이 동양을 이겼다는 것이다. 즉 힘이 자연을 이겼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힘이 어떠한고 하니, 인간의 어떤 정답, 그것을 ‘명제’ 라고 해서, 즉 진리가 딱 정해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셀푸코’ 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다는 말이다. 즉 “힘은 어떤 명제가 아니라, 사회의 힘이 명제를 만든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베이컨은 “내가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했는데, 즉 자기가 무엇을 알면 그것은 힘을 곧 소유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회사에 취직을 할 때, “당신은 무엇을 아는가?” 라고 묻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취직을 해야 월급을 받고, 그런 힘이 되는 자기에 돈이 있으면 더욱 더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 이것이 곧 ‘담화(DISCOURSE)’ !!

그런데 미셀푸코가 더 연구를 해보니, 그렇게 회사에 취직하는 것은 자기가 어떤 지식을 제공한다고 해서 취직되는 게 아니라, 그 회사에 아는 사람이 있을 때 취직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말이다. 그것을 ‘담화(DISCOURSE)’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끼리 모였을 때는 명제를 이야기하는데, 즉 누군가가 아주 좋은 안경을 쓰고 있으면, 그 사람을 보고 “그 안경테가 어디서 났습니까? 참 좋아보이네요” 라고 말이다. 그렇게 명제를 이야기하는데, “안경테는 비싸다. 좋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화장실에 가면 뭐라고 하는가? “내가 보기에 그 안경은 짝퉁같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두고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앞에 글자가 하나 더 붙는데, 그래서 ‘뒷담화’ 라고 한다는 말이다(ㅋㅋ). 당사자가 빠진 상태에서, 즉 주체가 빠진 상태에서 주변 사람들이 주고받는 것을 대화, 즉 ‘담화(DISCOURSE)’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회사에 취직을 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취직여부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미셀푸코가 발견했다는 것이다.

◈ 미셀푸코 - 명제도 변한다 !!

미셀푸코는 말하기를, 소위 ‘미쳤다’ 라는 것에 대해서,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그 당시에 이성적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를 두고 미쳤다고 했다는 말이다. 그 말이 맞는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이성적이냐는 것은 누가 판단했는가? 그것이 하나의 명제인데, 즉 진리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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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셸 푸코 (Michel Paul Foucault, 1926.10.15~1984.6.25) - 1926년 10월 15일 프랑스 중서부 프와티에(Poitiers)에서 출생하였다. 포스트구조주의 대표자로 1970년 이래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를 지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정신의학에 흥미를 가지고 이론과 임상을 연구하였다. 인간의 지식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변화하는지 탐구하였고 해답을 모색하였다. 그 과정에서 각 시대의 앎[知]의 기저에는 무의식적 문화의 체계가 있다는 사상에 도달하였다. 또한 업압적인 권력의 구조를 예리한 통찰력으로 파헤쳤으며 정신병의 원인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밝혀내려 하였다. 1961년 정신의학의 역사를 연구한 《광기(狂氣)와 비이성(非理性)―고전시대에서의 광기의 역사》에서 서양문명의 핵심인 합리적 이성에 대한 독단적 논리성을 비판하고 소외된 비이성적 사고, 즉 광기(狂氣)의 진정한 의미와 역사적관계를 파헤쳤다. 이 저술로 푸코는 세계에서 주목받는 철학자로 떠올랐다. 정신병과 사회적 관계를 밝힌《임상의학의 탄생》(1963) 을 저술하였으며 1966년에는 역사를 통해 지식의 발달과정을 분석한 《언어와 사물》을 저술하였다. 서구 지식의 역사는 두 번의 단절된 과정이 있었다고 주장하였고 지식을 연속성을 가진 발달과정으로 보는 기존의 입장을 착각으로 규정하였다. 1969년 《지식의 고고학(考古學)》에서는 전통적인 사상사를 비판하였다. 1970년대에 부르주아 권력과 형벌제도에 대한 분석의 결과물인 《처벌과 감시》(1975)를 저술하였다. 여기서 푸코는 역사적으로 지배계급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한 법률과 억압적 통치구조를 파헤쳤다. 인간의 알고자 하는 의지와 이를 억압하는 권력과의 관계를 주요주제로 삼았다. 푸코는 지식은 권력과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든 지식은 정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1984년 6월 25일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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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누가 결정하는가? 문자해독을 할 수 있는, 소위 배운 자들이, 즉 권력을 쥐고 있는 귀족들이 이성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귀족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것이 되고 마는데, 마치 동키호테처럼 말이다. 즉 귀족에게 대드는 인간, 다른 말로 하면, 비성적 인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 귀족이란 무엇인가? 옛날에는 왕을 귀족들이 돌아가면서 했는데, 물론 동양은 세습제지만 말이다. 물론 서양에도 세습제가 있기는 하지만,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동양에선 왕 자체가 신의 아들이고, 즉 ‘천자(天子)’ 라는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우선인데, 그래서 그들 가운데 뽑아서 왕이 된다는 말이다. 

올해에 나온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혹시 들어보셨나요? 거기에서 대동계를 조직한 ‘정여립’ 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왜 왕을 너희들끼리만 해먹는가? 우리도 할 수 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럴 때 이 정여립은 무슨 놈이 되는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의해서 그만 미친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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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여립(鄭汝立, 1546~1589) - 조선 중기 문신 겸 사상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 라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 라는 하사비군론 등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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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요즘 말하는 미친놈과는 전혀 다른 의미인데, 요즘은 정신분열증이 걸린 사람을 두고 그렇게 부른다는 말이다. 도파민인지 뭐지 하는 것에 이상이 있을 때 생기는 현상으로서, 그래서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20세기 의학이 정립된 상태에서는 그러한 놈이 바로 미친놈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어떠했는가? 의학적으로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들이 아니고, 동키호테나 정여립이 같은 놈들이 미친놈이라는 것이다. 즉 감히 권력에 덤비는 놈들은 모두가 다 미친놈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푸코는 ‘고고학’ 라고 하는데, 즉 “사람에게 명제라는 것도 변화한다” 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이 양반이 발견해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제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시대에 자기들끼리 모여서 의논해서 결정한다는 말이다.

◈ 아니, 콩고에서 무슨 일이?

아까 “E=ΔMC2” 이라고, 아인쉬타인이 그런 상대성 원리를 이야기했을 때, 그때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보고 뭐라고 했는가? 욕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고 사이비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중에 ‘콩고’ 라는 곳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고 하니,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말이다. 이런 것이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ㅋㅋ)

일단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에 이렇게 해가 있고, 달이 있고, 또 별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 사이의 공간들이 텅텅 비어있는데, 그런데 아인쉬타인은 그냥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얹혀져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마치 이렇게 굽어진 큰그릇이 있다면, 해는 여기에 얹혀져 있고, 달은 이렇게 얹혀져 있고, 또한 별도 이렇게 얹혀져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빛이 온다고 하면, 빛도 직선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큰그릇과 같은 굽어진 곡면을 따라서 휘어져서 온다는 것이다. 즉 우주 공간은 텅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커다란 그릇과도 같다고 아인쉬타인이 주장했다는 말이다.

◈ 아니, 빛이 휘어지네 !!

하지만 이런 주장이 어디 그 당시에 말이 되겠는가? 그래서 그의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일식(日蝕)을 조사했다는 것이다. 해가 달에게 잡아먹히는 현상을 일식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 일식이 일어날 때, 그때 무엇을 조사할 수 있는고 하니, 원래 태양 옆에 있는데 빛 때문에 보이지 않는 별이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오는지 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처럼 직선으로 오는지, 아니면 아인쉬타인의 주장처럼 곡선으로 오는지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콩고에서 일식현상이 일어날 때 조사를 했는데, 일식이 되어서 햇빛이 없어지고 시커멓게 되었는데, 그때 놀랍게도 별빛이 휘어져서 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마나 놀랬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아인쉬타인이 노벨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놀랬다고 말이다(ㅋㅋ).

다시 말해서, 아인쉬타인의 주장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알았던 모든 것이 다 무식해지고 말았는데, 이것을 가지고 미셀푸코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진리가 무엇인고 하니, 그 시대의 사람들이 용납하는 것이 곧 진리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여자가 시집을 오는데, 남자는 그 여자를 너무 좋아하지만 그러나 집안에서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여자는 미친 여자가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미모가 출중하고 머리가 뛰어나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 집안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맞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면 그 여자는 그 조직, 즉 그 집안의 며느리로 가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미스코리아 출신이라고 해도 말이다.

◈ 결국 진리는 누가 만드는가?

그러니 이 세상에 진리가 어디 있는가? 결국 진리는 누가 만드는가? 우리가 만드는데, 그러면 누구 좋아라고 만드는가? “현재 나의 존재는 정당하고 의롭다. 그러니 신이라도 나를 건드리면 재미없어” 라고 할 정도로, 그런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과시하는 말이다. 즉 선악과를 따먹은 값을 톡톡히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우리 인간들은 진리라고 주장했고,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십자가를 가지고서 우리를 공박하고 정죄하면서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싸움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십자가에서 눈을 돌려버리면 결국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지옥에 가면 안 돼” 라고 하는, 그런 나에 관한 생각밖에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원망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체가 주님의 열매임을 깨닫고, 이제는 이렇게 된 것, 즉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오직 십자가의 공로이고 능력임을 감사히 여기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9,16 오후 10시 30분에 마침.

                                                    갑자기 정여립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뭐지?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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