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719 피29강 거룩을 생산하는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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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719피p106거룩을생산하는기계

피29강 거룩을 생산하는 기계 
 
[10 대구강의 11] - [피 29] - 거룩을 생산하는 기계
                                                                                
                                                          10,07,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나는 옳고 !!

이제 시작을 하겠는데, 오늘은 먼저 교재 106페이지를 살펴보자.

** 어린아이가 말하는 법을 배울 때에, 어린아이는 명령으로 된 원초적 형식을 배우게 된다.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것은 설명이 아닌 훈육이다. 그 명령을 통해서 어른들은 “나는 옳고, 너는 나의 명령을 순종할 때만, 너는 나에게 인정받은 자가 될 수 있다” 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만약 어른과 아이가 대화를 한다고 하면, 그런데 그것은 그냥 대화가 아니라 명령을 통해서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명령을 할 때 그 마음가짐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옳고, 너는 나의 옳은 명령에 순종할 때만 대화의 자격이 있다” 라는 것이 깔려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칠판에 한번 적어보면 다음과 같은데 말이다.

① 나는 옳고,
② 나는 너에게 명령하고,
③ 너는 나에게 그 명령에 순종할 때만,
④ 너는 나와 대화가 성사된다.

그렇게 해서 대화가 성사되면 자기 영역은 확대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혹은 교사가 학생에게, 혹은 목사가 교인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모든 경우가 다 이렇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이런 언어습관을 하나님께서 알겠는가? 모르겠는가? 당연히 아신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인간을 만나려고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 이근호 - 신이 인간을 모방했다 !!

그래서 제가 어느 글에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는데, “인간이 신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모방했다” 라고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런 태도를 그대로 모방해서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들어오면, 인간들은 그분이 하나님인 줄도 모르고 평소에 자기가 하던 행세대로 언어습관을 그대로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옳고, 나의 너에게 명령하고, 너는 나에게 순종할 때만, 대화의 자격이 있다” 라고 말이다.

이것을 인간이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하는 행세 그대로 예수님에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지 않았으면 그런 일이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인간에게 그렇게 시비를 걸었다는 말이다. 즉 요한복음 7장에서 유대인들에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 샘요, 질문이 있는데요?

이러한 것 자체를 두고 미셀푸코는 ‘권력작용’ 이라고 했는데, 권력, 즉 힘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제자들이 스승에게 물을 때, 즉 “샘요, 질문이 있는데요?” 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학생의 경우에, “나는 옳고, 나의 선생님에게 명령하고, 선생님은 나에게 순종할 때만, 그래야만 대화의 자격이 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랫사람이고 윗사람이고 없는데, 인간이 인간에게 대화를 할 때는 다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심지어 어린아이가 강아지에게 이야기할 때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이러한 언어습관을 익히 다 아시고, “너거들, 때릴라면 한번 때려봐라” 라고 해서,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에게 얻어맞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 선악과에 의해서 생명나무가 얻어맞는다 !!

이것을 간추려보자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선악과에 의해서 생명나무가 얻어맞는다” 라고 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가 신이 되었는데, 바로 그 신에 의해서 신이 얻어맞는다는 것이다. 신에 의해서 신이 말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마 여러분은 “아하, 나는 저런 것을 피해가야지”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이것을 피해갈 인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이런 언어습관을 전혀 피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 미셀푸코 - 권력은 언어(명령)를 통해서 발휘가 !!

이러한 힘, 즉 권력이라는 것이 미셀푸코에 의하면 무엇인고 하니까, 권력은 반드시 언어,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명령을 통해서 발휘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자기에게 명령을 받는 자가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목사의 경우에 그 목사는 목회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목사가 명령을 할 대상이 없으면 자기 힘이 발산되지 않으니 말이다. 자기 말을 듣고 수족처럼 움직이는 자들이 있어야만 목회가 자미난다는 것이다. 이런 목회자들은 주로 어디로 가는고 하니, 선교사로 간다는 것이다. 꼭 무식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명령을 들을, 즉 자기 힘이 확장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선지자의 경우에 !!

이게 인간이라고 하면, 우리 인간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면, 그러면 성경에서 이렇게 되지 않는 자들이 있는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고 하니, 구약의 선지자들이란 말이다. 선지자들은 무엇에 휘둘린 자들인고 하니, 앞에서 말한 그런 명령이 본인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고, 어떤 더 강한 권력자가 선지자들에게 주어지게 될 때, 그것을 두고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직 강의시간 초반이라서 힘이 남아있지 싶어서 성경을 한 구절 찾아보도록 하겠는데(ㅋㅋ). 역대하 18장 7인데,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씀이라서 괜히 찾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대하 18:7)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 미기야 선지자의 경우에 !!

여기에 보면 ‘미기야’ 라는 유명한 선지자가 나오는데, 그런데 그에 대해서 왕이 뭐라고 평가하는가? 그 양반은 좋은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흉한 일만 예언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선지자를 굳이 찾을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것을 현대적 용어로 ‘부정적 사고를 지닌 자’ 라고 할 수 있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가 아닌가요? 즉 매사가 모두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꼭 십자가 마을 사람들과 같은데 말이다(ㅋㅋ). 그런데 역대하 12장 1절과 2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대하 15:1) 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대하 15:2)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하나님의 신이 아사랴에게 임해서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끝까지 ‘나는 옳고 !!’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나는 옳고, 나는 너에게 명령하고, 너는 나에게 순종해야 되고, 그래야 대화가 된다” 라는 우리 인간들의 규칙을 누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부분을 정신을 차리고 잘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평소의 이러한 습관을 평생 버릴 수가 있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버리든 못 버리든 간에 하나님은 이것을 인정한다는 것인가? 못 한다는 것인가?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우리가 잘 구별할 줄 알아야 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은 것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되지. 버려야지” 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을 살아도 “나는 옳고, 나는 너에게 명령하고, 너는 나에게 순종해야 되고, 그래야 대화가 된다” 라는 사고방식을 평생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언제나 “그것은 아니거든!” 이라고 이야기하신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한 평생을 하지 못하는 우리는 인간도 이렇게 있고, 거기에 대해서 “그것은 아니야!”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도 또한 계신다는 것이다.

◈ 불신자가 곧 신자 ??

그래서 제가 어제 오전예배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우리는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불신자가 됩니다” 라고 했는데, 즉 믿지 않는 불신자가 신자라는 말이다. 지금 다른 사람들이 이 부분을 들으면 이것이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지 싶은데, “불신자가 곧 신자이다” 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것을 평생 버릴 수가 없는데,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오히려 그런 것을 버리겠다는 놈이 수상한데, 사기꾼이 아닌지 말이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되면, 선지자가 그러한데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권력으로 꽉 차 있는데, 이러한 권력보다 더 센 분이, 즉 하나님의 신이 더 세게 들어오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그런 하나님의 신을 신약의 표현대로 하면 그것이 곧 예수님의 마음인데, 즉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이고, 고통을 안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권력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인간들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고통을 받고 있는 말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더욱 더 큰 권력으로 작용을 해서 우리에게 지적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적한 것이 바로 ‘형상’ 이란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십자가 마을에도 아시는 분들이 많이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여기서 교재 89페이지를 한번 살펴보자.

** 구약의 성전은 아무나 무단으로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거룩’이 제시하는 조건 안에서 움직이게 됨으로, 그것 자체가 ‘거룩’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게 한다.
 
◈ 성전은, 거룩을 생산하는 공장 !!

여기 성전에 관해서 나오는데, 즉 “성전은 거룩이 제시하는 조건 안에서 움직인다” 라고 한는 것이다. 성전은 거룩을 생산하는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오늘 강의와 연결을 해보면, 쉽게 하도록 하겠는데 말이다.

우리는 “내가 어떻게 거룩한 인간이 되는가?” 라고, 즉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라는 것에 관심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라고, 즉 자기가 자기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떠한가? 그러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생산’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산을 하니 공장이고, 우리는 그 공장의 기계라는 말이다. 왜 공장에 가면 기계가 많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 성도는, 죄를 생산하는 기계 !!

그러니 우리는 공장의 기계인데, 그러면 어떤 기계인가? 죄를 생산하는 기계라는 것이다. 또한 죄와 더불어 은혜와 용서를 새롭게 생산하는데, 그것을 합쳐서 예수님의 형상을, 그것이 예수님의 속성인데, 즉 공의와 사랑의 속성을 생산하는 공장의 기계로서 우리를 가동시켜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이, 즉 성령이 임하게 되면 말이다. 그렇게 성도는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하겠는데, 우리의 목적은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고, 죽어서 좋은데 가는가?” 라는 것에 있다고 하면, 주님은 그것을 묵살해버리고,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고 까불 까불거리고 촐랑거리는 우리는 주님께서 찾아오시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나는 괜찮아” 라고 하면서, 그렇게 ‘나’, ‘나’, ‘나’를 생각하게 하는 것을 싸그리 가시게 만들고,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는 것을 드러내는 기계로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중풍병자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우리 관심은 그 중풍병자를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 중풍병자가 지붕을 뚫고 들어올 때 모든 성경을 읽은 독자들의 눈초리를 어디에 가는가? 그 중풍병자가 어떻게 들어갔다가 어떻게 나오는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멀쩡하게 걸어나오는지 아닌지에 말이다.

(마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마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마 9: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마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마 9: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마 9: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하지만 사실은 그 중풍병자라는 기계를 하나 들여놓은 것인데, 어느 공장에 말인가? 예수님 공장에 새로운 기계가 하나 들어와서, 거기서 생산된 것이 무엇인가? 즉 중풍병자가 들어왔다가 나가는 과정에서 말이다. 예수님을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즉 아까 말한 그 권력인데 말이다. 그런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권력은 어디서 나온다고 했는가?

아까 했는데, 중요하니 다시 복습해보면, 권력은 언어로 나온다는 것이다. 즉 말씀이란 말이다. 그러니 중풍병자가 지붕을 뚫고 들어오는 과정을 통해서, 물론 사람들은 거기에 주목해서 “내가 만약에 중풍병자라면 나도 나아야지” 라고 하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따라가다가, 그런데 뭔가 빠지면서 주님의 권세가 나오는데, 그게 바로 “나는 세상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 라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말씀을 다 이루는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고 말이다.  

◈ ‘사마리아 여인’ 이라는 기계 !!

또 한가지 예를 들어본다면,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예수님께서 만나는데,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사마리아 여인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결혼을 5번인가 6번을 했고, 그것이 부끄러워 낮에 물을 길러왔고 말이다. 하지만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이 사마리아 여인은 기계가 되고 마는데, 이 사마리아 여인 기계를 통해서 생산된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곧 메시야이며, 그분이 장차 어떤 것을 생산하는고 하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주체자가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기계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그야말로 성경박사가 될 수밖에 없는데, 더 이상 성경해석을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 더 해볼까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이나 된 병자가 있는데, 그 병자의 관심사가 무엇인가? 자기가 병이 나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래서 저 연못가에 누군가가 자기를 데려다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연못에서 물이 움직일 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항상 관심사가 자기 자신인데, 그러니 우리도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따라서 “야, 저 사람이 어떻게 제대로 나을까?” 라는 것에 있는데, 그런데 그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이나 된 병자를 예수님이 스치고 지나가니 어떻게 되는가?

◈ 율법의 완성태인 ‘사랑’ !!

거기에서 생산된 것이 바로, 율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인데, 즉 율법으로 축복을 받고 저주를 받던 그 기준이, 율법의 완성태로 인해서  축복을 받던고 저주를 받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러면 율법의 완성태가 무엇인가?

요한복음에서 그것은 두 글자로 ‘사랑’ 이란 것인데, 그러면 그 사랑은 누구만 독점하고 있는가? 오직 예수님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사랑을 주고 싶은 자에게 사랑을 주게 되면, 그것은 율법의 완성태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사랑을 받은 순간부터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겼느니라” 라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인데,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겼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가 너에게 지옥에 간다고 하더냐?” 라는 것이다.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 사랑의 출처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란 말이다. 그러니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그래서 그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이다.

제가 20년 전부터 늘 생각했던 성경구절이 하나 있는데, 요즘 유행하는 말로서 “이것이 참 중요한데, 설명할 길이 없네” 라는 것이다(ㅋㅋ). 이 구절을 교인들에게 설명을 해주어도 제가 느낀 만큼의 그러한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 36절이라는 말이다. 34절부터 26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요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사법고시에 10번이나 낙방한 이유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곤 했는데, 그것을 여기서 다시 한번 더 해보면, 어떤 30대 중반의 사람이 바닷가를 찾아왔는데, 그 사람은 무려 사법고시에 10번이나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당한 곳을 찾아서 자살을 하려고 왔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뭐만 있겠는가? 빨리 사법고시에 붙는 것밖에 없는데, 그러니 그 사람에게 있어서 사법고시에 빨리 붙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떨어지는 것은 저주인데, 그러니 자기는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이 ‘나’ 라고 한다면, 그래서 사법고시에 10번이나 준비하다가 계속해서 떨어졌다고 한다면, 도대체 뭐라고 하겠는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신이시여, 이런 나를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이용할 것입니까?” 라고 나올 것이 아냐는 말이다.

저는 그런 상황을 일부러 설정해서 상상을 해보는데, 그렇게 해놓고 이 요한복음 3장 36절의 말씀을 다시 본다는 것이다. 즉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라고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사법고시가 무엇을 가로막고 있는고 하니, 아들이 주는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성령을 한량없이 주셔서 어떻게 하는가? 사법고시에 계속해서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게 해서, 그렇게 해서 “니가 원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 즉 지옥에 가는 코스였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 아들의 소중함, 참 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어 !!

제가 20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여기에 대해서 엄청나게 고민을 했는데, “어떻게 하면 이것을 교인들에게 설명을 제대로 해줄까?” 라고 말이다. 여러분은 저에게서 그런 안타까움을 전혀 느끼지를 못했습니까? 정말로 몰랐습니까 (ㅋㅋ) 요한복음 3장 36절에 그런 내용이 없으면 말을 안 하는데, 하지만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성경말씀이 그만 모두 다 날아가 버리고 이 36절의 말씀만 달랑 남았다고 하면, 그래도 구원을 받는데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예수님이 생명과 저주를 결정짓는 분이라는 것이 나오고, 또한 그러한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면 그것은 진노의 먹구름이 덮쳐졌다는 것이 분명히 나오니까 말이다.

그러니 목사라고 하면 그것을 교회에 그대로 알려주면 되는데, 즉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노와 영생을 결정하는 분임을 보여주는, 과연 그것을 생산하는 기계입니까? 아닙니까” 라고, 그렇게 묻는 투로 이야기하면, 그것이 곧 설교가 된다는 말이다. 

◈ 주님의 속성을 생산해내는 기계로서의 성도 !!

물론 그것을 제가 여러 번 테스트를 해봤는데, 그런데 교인들이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는 경험을 못해서, 즉 모든 것이 다 자기 계획대로 인생이 진행되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그런 설교를 다 듣고는 “목사님, 언젠가는 성경을 한번 보겠습니다” 라고 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성경이 있어서 보겠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그런 식으로 주님의 영생을 가리우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목회를 해도 안 되고, 해도 안 되고, 해도 안 된다고 하면, 그것을 축복으로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목회를 어떻게 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영생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그러한 예수님의 영생이 주어지지 않으면 진노가 계속해서 머물러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동안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라는 것에 관심을 두다가, 졸지에 “아하, 나는 기계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즉 예수님의 영생과 진노를 보여주는 기계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속성이 되는데, 죄와 용서를 아울러서 보여주는 말이다. 바로 그런 것을 생산해내는 기계로서의 성도인데, 물론 교회가 공장이 되고 말이다. 오늘 기계가 몇 분이 보이지를 않는데, 주께서 달리 생산하시는 것 같은데 말이다. (ㅋㅋ)

아무튼 이렇게 되면 성경해석이 정말이지 쉬워지는데, 특히 논리적으로 말이다. 즉 “나의 구원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들이닥쳤다” 라는 것인데, 마치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더 힘이 센 권세가 들이닥치게 되면, 선지자는 이런 힘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 왕은 ‘나는 아니야!’

아까 역대하 15장을 보았는데, 거기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되니 어떻게 되는가? 비록 왕이라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원래 이스라엘의 왕은 무엇인고 하니, “왕이 잘 되면 나라가 잘 되고, 왕이 못되면 왕이 못된다” 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러니 모든 사람의 초점이 왕에게 가 있다는 것이다. “니가 잘해라. 니가 잘해라” 라고 말이다. 그것은 왕이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잘해야 자기들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취지가 아니라, 왕이 잘하면 나라가 복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 것은, 그것은 바로 그렇게 왕을 주무르고 있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왕은 사실 왕이 아니라는 말인데, 즉 왕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꾸만 이렇게 힘과 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왕 앞에서 자꾸만 자기가 왕이라고 하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인간 왕이 “나는 왕이 아닙니다. 진짜 왕인 하나님이 나를 다룹니다” 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모든 것이 다 잘되게 해주시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순종하니 나라가 잘 되었잖아” 라고 나온다면, 그러면 나라꼴이 그만 개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장기계인 주제에 주인노릇을 한다면 그 공장은 가동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의 속성이 가려지니 그것을 주님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래, 나는 기계야!” 라고 하면서 비켜난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 기계를 통해서 성령이 한량없이 쏟아지는데, 그렇게 해서 주님의 속성을 그대로 다 드러낸다는 말이다. 그렇게 신구약성경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나는 옳고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금 정리해보면, 인간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그 기초에 “나는 옳고, 나는 너에게 명령하고, 너는 나에게 그 명령에 순종할 때만, 너는 나와 대화가 성사된다” 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누가 오셨는가? 예수님이 등장하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했는가?

* 바리새인 : 나는 옳고,
* 예 수 님 : 아니거든.
* 바리새인 : 나는 너에게 명령하고,
* 예 수 님 : 내가 너에게 명령해.
* 바리새인 : 너는 나에게 순종하고,
* 예 수 님 : 너가 나에게 순종해.
* 바리새인 : 그러면 너는 나와 대화가 되는데,
* 예 수 님 : 나는 너와 대화하기 싫어.
* 바리새인 : 그러면 너는 죽어라.
* 예 수 님 : 니가 나를 죽여? 그러면 나는 다시 살지롱.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한 세트인데, 십자가를 끊어버리고 부활만 쥐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활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한 세트가 되어서, 즉 인간은 그를 죽였는데, 하지만 그렇게 죽은 분을 하나님이 살림으로서 어떻게 되는가? 사실은 죽인 놈들이 죽어야 될 인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은 십자가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부활은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을 새삼 설명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메시야를 죽였고, 하나님은 그 죽은 메시야를 살림으로서, 그 모든 책임을 인간에게 묻는, 그런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부활의 능력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그런 부활의 능력이 성령으로 왔다고 하면, 성령이 임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당연히 그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맞습니다. 저는 죄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게 아니라면 결코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된 상태 !!

아까 제가 설명을 하면서 그냥 슬쩍 지나갔는데, 십자가와 율법이 무슨 관계가 있는고 하니,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된 상태라는 것이다. 왜 제가 여기서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된 상태임을 강조하는고 하니, 저쪽(?) 개혁주의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율법이라는 것은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믿어도 율법은 율법대로 지켜야만 한다고,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 자체가 완성이 아니라, 먼저 십자가를 믿고 그 다음에 율법을 한번 제대로 계속해서 지켜보자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 안에 보면, 그 안에 율법이 완성된 상태로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이미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을 더 보태고(더하고?) 말고 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엇을 더 추가하겠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가 미흡하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만으로는 되지 않고, 우리가 더 지켜야만 되는 거야” 라고 하는 소리라는 말이다. 물론 그런 십자가 마을이 있기는 있는데, 즉 십자가만으로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십자가 마을이 말이다(ㅋㅋ).

다시 한번 정리하면,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한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예수님은 요따구 인간들에게 찾아와서는, 십자가를 그 앞에서 내세워서 “니가 나에게 복종하란 말이야. 니가 내 힘에 굴복해” 라고 하는데, 성령을 주셔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굴복하면 우리는 “제가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 맞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무조건 옳고, 나는 명령을 하는 자이고, 그 사람이 나에게 복종할 때만 그 사람과 대화를 할 정도로 선악과를 따먹은, 그런 나밖에 모르는 자로서, 지금도 자칭 신으로 군림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날마다 지적을 당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발췌를 당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기계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우리 자체가 재료가 되어서, 나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란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이제 교재 107페이지를 살펴보자.

** 인간의 언어활동이란 단순한 의사소통용이 아니라, 강하게 자신의 영향력을 타인에게 주입시키고 강요하는 행위를 통해서, 여전히 자신이 옳게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매개로 소용된다.

◈ 촘스키 - 인간의 언어구조는 타고난 것 !!

지금 이 내용은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아주 어렵게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시 ‘촘스키’ 라고 아는지 모르겠는데, 유명한 언어학자로서 전 세계에서 학자들이 두 번째로 많이 언급한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면 첫 번째는 누구?)

이 양반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 속에 언어구조가 있는데, 그런 언어구조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흔히들 이런 촘스키의 주장이 언어학자가 이야기한 것이니 복음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 우리가 공부한 것과 관련시켜보면 얼마든지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까 우리 인간의 구조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다고 했는가? “나는 옳다!” 라고 하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무조건 옳다는 말이다. 지금 여러 차례 강조를 하는데, 즉 우리가 이러한 언어구조를 가지고 언어를 구사할 때, 그런데 언제나 뒤에서 내 품는 그 꾸리한 방귀냄새는 무엇이냐는 말이다. “무조건 내가 옳아” 라고 하면서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다.

◈ 요새 선생은 선생도 아니야 !!

그것을 믿어주지 않으면 술집에 가지고 가는데, 그래서 직장에서 회식할 때, 특히 교장과 같은 경우에는 뭐라고 하는가? 괜히 취한 척을 하면서 주정을 하는데 “요새 선생은 선생도 아니야. 교장을 우습게 알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나는 무조건 옳아. 너거들이 잘못되었어”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남자들이 술을 처먹고 집에 와서 무슨 행패를 부리는가? 아이들을 다 깨워놓고는,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무엇인가? “내가 오늘 술을 먹은 것은 정당하다” 라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가? 전체를 보면 그것도 하나의 기계인데, 즉 “아하, 너는 지옥에 가는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게 기계로 다루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따라서 자신만이 참으로 영원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옳은 존재임을 확정짓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명령자를 자신의 상관으로 두어야 한다. 명령은 신이 내리고, 실천은 무제한적으로 내부에서 올라오는 본인의 자유를 사용하게 되고, 그 결과로 인간도 역시 절대자의 세계에 합류하게 되고, 사람들이 성경을 대하면서 명령어로 접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신은, 반드시 ‘나’를 거쳐야 !!

그러니 자기가 옳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그 다음에 신은 무엇인고 하니, 신은 일단 자기를 거쳐야 하는 것이지, 자기가 아닌 남을 거치든지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현재 자기가 옳은데, 그러면 그렇게 자기가 옳은 것을 누가 증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증명하면 좀 머쓱하고 심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위에 누구를 두는고 하니, 자기 상관자로 하나님을 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자기가 만든 하나님으로서, 그렇게 무조건 자기가 옳다고 박수를 쳐주는 상관자로 하나님을 두게 될 때, 그런 하나님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에서 교인들이 찾는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혹은 “그것이 알고 싶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신은 무엇인고 하니, 이유도 없이 무조건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을, 즉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만큼은 사랑해줄 수 있는 신이 될 때, 그 신은 그야말로 참한 신이 된다는 것이다.

◈ 다시, 공장 이야기를 !!

여기 공장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 본다고 했는가? 하나의 기계로 보는데, 그러니 우리는 공장에 속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활동은 무슨 활동인가? 생산활동인데, 물론 이런 생산활동에 사랑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가 다 아는데,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라고 우기니 말이다.

그러면 이 사랑 맞은 편에는 무엇이 있는가? 미움인데, 우리 인간은 과연 자기를 미워하는 신을 계속 믿을 용의가 있는가? 없는가? 그리 멀리 갈 필요가 없는데, 요한일서에서 뭐라고 하는가? 즉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이것을 그대로 적용하면, “형제 중에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내가 끝까지 사랑할 이유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끝까지 미워하는 그 놈을 말이다. 인간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조건 미움을 받기 싫어하는데, 그래서 자기를 미워하는 모든 노선은 다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 가인은 동생을 왜 죽였는가?

아담 이후의 최초 인간이 누구인가? 가인인데, 그 가인이 죽여나가는데, 그 마지막 노선이 어디인고 하니, 그가 처음에 누구를 죽였는가? 아벨을 죽였는데, 멀쩡한 동생을 왜 죽였는가? 평소 소꿉놀이를 하면서 자기에게 달려든다고 해서 죽였는가?

그게 아닌데, 그러면 아벨 뒤에 누가 있는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속성은 제사를 드려봐야 안다는 것이다. 즉 어떤 인간이라도 교회에 끌고 나와봐야만,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전도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즉 복음을 열심히 전해서, 물론 절에 가든 상관이 없는데 말이다. 아무튼 자기들이 믿는 신이 자기를 미워할 수 있는 신인지, 아니면 무조건 자기를 사랑해주는 신인지를, 그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게 해보지 않아도 거의 100%가 무엇인가? 사람은 사랑을 받고 싶어서 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신이 계시기 때문에,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의 제사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분이 살아있는 하나님임을, 그렇게 믿고 싶어서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자기를 예쁘게 해준다는 조건 아래에서, 그런 가운데 자기가 만든 신을 믿는다는 것이다.

◈ 예수님 안에서 선택 !!

그런데 ‘선택’ 이라고 하는 것은, 신과 인간 사이에 이렇게 선택이 들어가는데, 이 선택은 일종의 캡슐이라는 것이다. 선택은 누구 안에서 되는데, 과연 누구 안에서 되는 것인가? 예수님 안에서 선택이 되는데, 그렇게 예수님이 끼어 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선택하는 신에 이미 복속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알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예수님만이 알지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그 아버지로 인해서 자기가 구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나오미의 경우에 !!

조금 더 쉽게 가겠는데, 룻기를 보면 무슨 내용이 나오는가? 롯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조카이고, 남자인데 말이다. 그리고 룻은 다윗언약 계통에 나오는 여자라는 것이다. 룻기에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나오는데, 그 여자가 자기 고향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나오미, 즉 ‘기쁨’ 이라는 것이다.

그 나오미가 자기 살던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서 그만 모압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요즘 말로 하면 교회를 다니다가 다니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식이 둘 다 죽고 남편도 죽고, 그야말로 생생생 과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나오미가 자기 이름을 ‘기쁨’에서 ‘슬픔’으로 바꾸고 마는데, ‘마라’ 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기쁨에서 슬픔으로 바꾸게 하셨다고 한다는 것이다. 슬픈 여자로 말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자기는 지금까지 무조건 하나님이 자기편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만 자기를 그만 생생생 과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기뻐하던 것을 모두 제거해버렸다는 말인데, 하지만 그리고 난 뒤에 나오미가 뭐라고 하는가? 그제야 자기가 진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이 선택한 하나님은 무조건 우상 !!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우리 인간들이 선택하는 하나님은 무조건 이단이고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소개하는 예수님의 아버지가 오면, 바로 그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신 일 속에 그렇게 철딱서니가 없는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음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철딱서니가 없는 인간아! 니는 니가 만든 하나님을 쥐고 진짜 하나님인 줄로 알았지. 하지만 너는 예수 안에서 창세 전에 선택이 되었어. 너는 원래 미움을 받게 되어있는데, 그렇게 미움을 받을 인간이 사랑을 받은 거야. 저주를 받아도 당연한데 사랑을 받았어. 그러니 이제부터 내 사랑만 증거해!” 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소개하는데, 그러니 전혀 우리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피는 오직 아버지와 아들의 아이디어인데, 우리 인간들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물론 제자들도 몰랐고 말이다. 만약에 그것을 알았다면 그들이 그렇게 했겠는가?

◈ 사단아, 물러가라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고 하니, 베드로가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 뭐라고 하시는가?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구나. 어디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도 모르고 말이야. 저리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어디 베드로만 그러하겠는가?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아무튼 이런 미움을 받은 자만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우리를 미워할 수 있는 분임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 미움을 모르는 자가 무슨 사랑을?

박영선 목사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성경에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는데 있는 것이지, 우리를 버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사람이 곱게 늙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교인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하는 소리인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성령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꾸만 자기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고수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미움을 모르는 자가 무슨 사랑을 알겠는가?

제빵왕 탁구가 왜 성공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과거에 미움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리고 그집 아들인 마준이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어릴 때부터 예쁘다고 하면서 사랑만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탁구를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것이다. 물론 제가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데, 어쩌다가 한번 보면 다 안다는 것이다(ㅋㅋ).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고생을 해보면, 사시 그 고생이 우리에게 적합하기에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것이란 말이다. 즉 아담의 자손은 고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적당해서 저주를 했는데, 그런데 우리는 저주를 받았다고 짜증을 내고, 이마에 땀이 난다고 불평을 한다는 말이다. 왜 자기를 이렇게 힘들게 살도록 하느냐고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니가 선악과를 따먹었잖아. 그러니 그게 니 행세에 딱 맞아. 그게 제대로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가시침대에서 자더라도 !!

그러므로 현재 우리의 이 모습이 맞다는 것이다. 잠을 자더라도 마구 가시에 찔리면서 자는 것이 맞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러한 가시침대가 사라지고 푹신푹신하고 아늑한 침대가 놓여져 있다면, 그때 무엇을 느끼는가? 비로소 사랑을 느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불순종에 가두어두심은, 즉 진노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하나님의 긍휼을 생산하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그 긍휼을 인해서 우리가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 들뢰즈 - ‘변태(變態)’가 아닌, ‘변형(變形)’ !!

그러니 이것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의미하는데, 양적으로 축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것을 들뢰즈는 ‘변태(變態)’가 아니라, 즉 상태가 변한 것이 아니라, ‘변형(變形)’ 이라고 했는데, 완전히 질 자체가 바뀌어 졌다는 것이다. 베르고송도 그런 이야기를 했고 말이다. (‘변태’에 대해서 오해가 없기를, ㅋㅋ)

그래서 들뢰즈와 같은 사람은 진화론을 비판하는데, 다윈의 진화론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발달이 어떻고 퇴행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질(質) 안에서, 즉 동질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엉터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종(種)이 다양화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질이 나와야 하는 것이지, 기존의 있는 질이 하나는 퇴화가 되고 하나는 발달하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많이 쓰면 발달하고, 그렇지 않으면 퇴화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는 질이 바뀌지 않는데, 그러니 진화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개체, 즉 종에 있어서 하나의 질이란 것은, 형태가 바뀐다고 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흉내를 낸다고 신자가 아니라 !!

그것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인데, 흉내를 낸다고 해서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움을 받는, 그러니 십자가를 통해서 미움을 알아야 하는데, 즉 십자가가 무엇인가? 아들의 입을 통해서 아버지에 대해서 무엇이 나오는가?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미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만을 볼 것이 아니라, 버림을 받는 그 미움을 십자가를 통해서 같이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주님과 함께 버림을 받고, 또한 주님 때문에 다시 살아날 때, 바로 그렇게 될 때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나는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 !!

계속해서 진도를 나겠는데, 그러니 우리는 성경말씀을 보면서 항상 그 기초를 어디에다 두어야 하겠는가? “나는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어야 하는데, 그 다음에 “그런데 사랑으로 바뀌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랑과 미움을 주님이 주신다고 보지 않고, 자기가 사랑을 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사람은 그 사랑이 무엇으로 바뀌는고 하니까, “그건 사랑이 아니거든. 그게 바로 미움이야. 니가 미워!” 라고 하면서 미움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의 비췸을 얻은 경우인데, 그렇게 미움으로 바뀐다는 말이다. 주님에게 그런 권한은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07페이지를 보자.

** 우주의 최고 명령자를 ‘신’ 이라고 규정을 지어놓고서 명령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을 보기 이전부터 이미 신의 심중을 자신이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신을 안다. 왜냐하면, 내가 옳은 것을 신이 증명해줄 테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줄 신을 상정해놓고, 그런 신에게 백 날을 기도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쉽게 말해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신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뭐라고 새로운 비밀을 명령으로 알려주시려나 어디 슬슬 뚜껑을 열어 볼까나” 라는 자세로 성경을 대하게 된다. ‘명령’이라는 방식으로 교류가 가능하도록 인간 내부에 하나님께서 미리 인식 장치를 해놓았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인간이 신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신의 속성이 아예 없다면 설마 신께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그렇게 심하게 추궁하지 않았으리라 여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신학생들이 신학교에 가면 이러한 문장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나 칼빈이나 루터의 책들을 보면 이러한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옛날에 어거스틴도 이런 문장을 사용했는데, 물론 도서관과는 담을 쌓고 농땡이를 치는 놈들은 모르고 말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신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은, 그 촘스키의 주장처럼, 우리 내부에 신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안테나와 같은 것이 장착이 되어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신께서 말씀을 주실 때는, 다른 것은 다 고장나도 신의 말씀을 알아듣는 안테나는 고장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천주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 !!

이것을 가지고 그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그 유명한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과 연결해준다는 그 안테나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안테나가 제대로 잘 가동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서 보기를 들면, “(1)고장이 났다 (2)흔적만 남았다 (3)없다” 라는 것인데, 이 가운데서 도대체 몇 번인가?

여기서 2번인 “흔적은 남아있다” 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곧 천주교인데, 그런데 루터와 칼빈이 이것을 그만 뒤집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그래도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주장하는 천주교의 주장을 말이다.

◈ 눈 속에 파묻혀 있는 무전기 !!

쉽게 하게 위해서 예를 하나 들어보면, 이렇게 무전기가 하나 있다고 하면, 6.25 때의 일인데, 겨울에 북으로 진격을 하는데 중공군들이 그만 쳐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전기가 눈 속에 묻혀있는데, 그러니 거기에 있는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을 치우게 되면 무전기가 나오고, 그 무전기를 얼마든지 사용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천주교는 무엇인고 하니, 이 무전기가 인간의 죄와 오만과 더러움 등에 의해서 묻혀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것을 걷어내게 되면, 온전한 무전기가 등장해서 제대로 작동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된다는 말인가?

그 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고 이 세상에서 돈벌이에 정신이 없던 것을, 즉 죄와 오만과 더러움 등에 파묻혀 있던 것을 신부가 영세를 주면, 즉 성당에 나와서 6개월 동안 공부를 하게 되면, 그렇게 해서 그런 것을 하나씩 걷어내게 되면,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는 무전기가 손에 잡히고, 그것을 가동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천주교인데, 여러분은 듣고 보니 어떤가요? “아무리 세상적이라고 해도 나는 여전히 옳다. 다만 내가 세상적이었음을 몰랐을 뿐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고상한 말로 표현하면, “나는 그동안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나는 그동안 내가 귀한 존재인 줄을 몰랐다” 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이것이 어디서 많이 듣던 멘트가 아니던가요? 여러분은 이런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나요? 요즘은 교회에서 다 이런 것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혹시 교회에 나가지 않나요? 그들은 말하기를,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소위 축복송이라고, 교회에 처음으로 나오면 그렇게 노래를 불러준다는 것이다.

천주교나 교회에서 하는 말이 “나는 그동안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귀한 존재인 줄 몰랐습니다” 라고 하는데, 학교의 교목들이 하는 말도 역시나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학생들을 끌어 모아서 왕창 세례를 주고 말이다.

◈ 어느 군목과 300 용사 ??

군대의 군목이 출세하는 비결이 무엇인고 하니까, 세례를 많이 주는 것인데, 즉 세례를 받는 군인들의 숫자가 많아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부산에 있는 이창섭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어떤 군목이 더 이상 승진을 못해서 할 수 없이 제대를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세례를 많이 주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다른 군목은 300명을 주었는데, 자기는 골랑 3명을 주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옷을 벗고는, 그 뒤에 냉면 배달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듣고 제가 느낀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제 주께서 그 사람에게 머물러 있던 진노를 거두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천만다행인데, 왜냐하면 군목으로 계속 있었으면 그 양반은 지옥에 갔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 아, 천주교 !!

아무튼 자기는 그동안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는데, 그런데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가? 혹시 ‘피정’이 뭔지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말이다. 여기서 ‘정’은 초코파이의 ‘정(情)’인데, 즉 정을 피한다는 것이다. (‘피(避)’ 앤드 ‘정(靜)’ 인데, ㅋㅋ)

그러면 어디에서 피하는가? 산 속에서 피한다는 말인데, 쉽게 말해서 부흥회, 혹은 수련회라고 보면 되는데 말이다. 즉 이 세상의 정을 모두 끊어버리고 산 속에서 수련회를 해서, 무전기 위에 있던 죄와 오만과 더러움을 모두 걷어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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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정(避靜) -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 가서 장시간 동안 조용히 자신을 살피며 기도하는 일(한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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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렇게 걷어내어도, 완벽하게 보존하기 위해서는 신부들 중에서도 어떤 신부인고 하니 도를 닦는 신부, 즉 수도사, 혹은 수녀원에 소속된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일곱 귀신이 나가고 난 뒤에 더 이상 귀신은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평소에 어떻게 사는고 하니, 따로 집을 지어서 유니폼을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밭에서 고추를 따면서, 그렇게 도를 닦으면서 것이다. 물론 TV 방송국에서 가끔 특집프로를 방영할 때는 나오는데, 그 나머지는 문을 꽝 닫아버린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모 방송국에서 수녀원을 특집으로 내보냈는데, 즉 무전기를 찾아서 보존한다는 말이다.

그들에게는 하루 일정이 있는데, 소위 ‘성무일도’ 라고 해서 말이다. 총각들이나 처자들은 이게 꿈인데, 즉 정결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처자’ 라고 하니 갑자기 나훈아가 생각나는데 말이다(ㅋㅋ). 그래야 무엇이 유지되는가? “나는 무조건 옳다” 라는 것이 말이다. 즉 “아, 나는 옳은데, 이것을 설명할 길이 없네!” 라는 것이다. 아무튼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는 옳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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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무일도(聖務日禱, Divine Office) - 가톨릭 교회의 매일매일의 공적(公的) 기도. ‘성무일과’ 라고도 한다. 성직자?수도자의 의무로서 8개의 정시과(定時課:時禱)로 되어 있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개편에 따라 일시경(一時經)이 폐지되어 현재는 7개의 정시과를 포함하고 있다. 1568년 교황 비오 5세가 공포한 《로마 성무일도서》에 의하여 라틴교회의 공적 기도의 통일성을 이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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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인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우리도 다같이 버림을 받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자꾸 자기가 옳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죄를 걷어내는 것이 곧 천주교라는 말이다. 물론 이것이 이미 기독교로 다 번지고 말았는데, 그래서 “나는 내가 이렇게 귀한 줄도 모르고 자살을 생각했을까?” 라고 하는데, 즉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바로 행복해지는 비결이라는 것인데, 소위 ‘행복방법 10가지’ 라는 것이 있는데,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항상 초반에는 “나는 귀하다. 나는 소중하다” 라고 하면, 아예 티셔츠에다 그것을 새겨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국토순례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소중한 사람이다” 라고 새긴 티셔츠를 입고 말이다.

여러분은 전혀 생소하다는 표정인데, 이런 것을 들어보지 못했나요? 아무튼 그렇게 “나는 신의 일을 해야만 될 소중한 사람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젊은 아이들은 그것을 듣고는 그야말로 ‘뽕’ 간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은 없는데, 물론 “나는 지옥에 가도 당연합니다” 라는 것도 없고 말이다.

◈ 개혁주의 - 무전기가 고장났다 !!

그렇게 매일같이 하는 말이 “나는 소중하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곧 천주교이고, 그 다음 두 번째가 루터와 칼빈인데, 즉 개혁주의인데,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무전기가 고장났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성령이 오게 되면 그만 무전기가 가동된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고장난 무전기가 자기가 고장이 났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논리상 그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고장난 인간이 도대체 자기가 고장이 났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돌맹이가 “나는 돌맹이다” 라고 하는가? 그러한 돌맹이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돌맹이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다.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바짝 마른 뼈다귀들이 등장을 하는데, 그런데 그 마른 뼈다귀들과 대화를 하는 분이 있는데, 바로 ‘인자’ 라고 불리는 에스겔이라는 것이다. 이 에스겔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인데, 그 인자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인자야, 저 뼈다귀들이 어떻게 살겠는가?” 라고 하니, “주님께서 말씀으로 알아서 하시겠지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으로 하신다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무엇인가? 기계인데, 하지만 기계는 생산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기계를 다루시는 분이 오셔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기계가 고장이 났는지 나지 않았는지, 그것을 기계인 주제에 우리 자신이 알 수 있는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 이근호 - 하나님의 형상은 ‘없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까 보기에서 3번인 “없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예 형상이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고장이 났으니 고쳐달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고쳐졌으면 굳이 고장이 났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가동이 되니 말이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형상을 받았다고 하면,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린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언약’ 이라는 것인데, 그 언약이 가져다줄 때 형상이 형상답게 된다는 말이다. 언약이 와서 형상을 줄 때는, 없는 형상이 새로 생기고 죽은 형상을 새로 살리는 것인데, 고장난 형상을 고치고 말고 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

그러니 언약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것은 없고 누구의 형상인가? 예수님의 형상이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오는데, 즉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말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란 말인가? 우리의 고장난 형상, 즉 아담의 형상이란 말인가? 그게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들의 형상, 즉 맏아들이 되신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아담의 형상을 예수님의 형상으로 바꾸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아담의 형상은 그런 생각을 전혀 못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아담의 형상은 기껏해야 한다는 소리가 “제발이지 내 형상을 좀 고쳐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담의 형상이 가지는 수준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집에서 사용하던 선풍기가 고장이 나면 AS센터에 가서 뭐라고 하는가? “여기에 선풍기가 고장이 났으니 좀 고쳐주세요” 라고 하지, “이 선풍기를 박살내고, 저 집을 좀 고쳐주세요”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아무튼 아담의 형상은 아담에게서 아담으로 가기 때문에, 그러니 아무리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해도, 그것은 다 누구 좋아라고 하는 것인가? 모두 다 자기 좋아라고, 즉 “나는 옳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노선에서 벗어나면 되는데, 우리는 기계이기 때문에 누구만 좋아라고 하면 된다는 말인가? 오직 예수님만 좋으면 된다는 것이다.

◈ 오잉, 유체이탈 ??

제가 어제 오전에 뭐라고 설교했는가? 종의 경우에, 그 종은 자기가 좋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좋으면 그것이 곧 종인 자신이 좋은 것이란 말이다. 제가 그때 오죽했으면 ‘유체이탈’ 이라는 희한한 용어를 사용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데, 의도적으로 그런 용어를 사용한 것은, 제발 자기 자신에게서 좀 떠나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육체에서 자기를 좀 쫓아내어 버리자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꾸만 자기 육신의 주인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데, 제발 그런 인간을 발로 차든지 해서, 자기 자신을 자기의 육체에서 쫓아내어 버리라는 것이다. 즉 ‘나’를 ‘나’에게서 말이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에게서 목이 졸리는 자들인데, 고맙게도 말이다. 왜 그런가? 좀 나가달라는 것이다. 썩어질 육신에서 머물지 말고 빨리 빠져 나오라고 말이다. 사도바울의 소원이 바로 그것이었데, 어떻게 하든지 이 육신의 옷을 다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을 입고 싶다고 말이다.

◈ 60대도 탱탱한 줄 알아야 !!

나이가 60대가 되어서 20대를 보면 참으로 부러운데, “나도 그때는 참으로 탱탱했는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옆에 80대 할매가 있으면 한 대 얻어맞는데, 즉 “나이 60도 고마운 줄 알라. 니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때가 참 좋은 시절이다. 나이 80이 되어봐라. 그런 말도 안 나온다.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탱탱한 줄 알아라. 어디서 탱탱을 말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80세가 된 장로님도 계시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 장로님!)

그렇게 우리 인간의 마음은 매일 매일 다른데, 뭔가 자꾸만 매일같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다는 것이다. 자꾸 후쳐내고(쫓아내고?) 쫓겨나가는 말이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미련도 두지 말라고, 저쪽 세계로 자꾸만 떠미는 것 같다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걱정이 되어서 “주님, 그러면 우리 육체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뭐라고 하시겠는가? “그런 것은 맡겨 놔. 내가 재림할 때 무덤에 있어도 끄집어내어 줄게. 지금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상태로 말이야. 하늘에 속한 영광스런 몸으로 바꾸어놓을 텐데, 그것은 니가 담당할 몫이 아니야. 그러니 너의 몸은 나에게 맡기고 그냥 나에게 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고, 날마다 그쪽으로 끌려간다” 라고 말이다. 즉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그쪽으로 달려간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러니 지금 여기에 머물지 말라는 것인데, 다 이루었다고도 하지 말고 말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다 이루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다 이루었다고 하지 말고, 즉 지금 이 자리가 전부가 아니라 뭔가 계속해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라는 것인데, 즉 이 세상은 흔적도 없이 빨리 지나가고 말이다.

이제 교재 108페이지를 보겠는데, 지금 문장 하나 하나가 다 어렵다는 것이다.

** 결국 인간이라면, 신의 명령을 듣고 반응을 나타낼 가능성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다.

◈ 새로운 형상인 예수님의 형상으로 !!

이러한 ‘가능성’을 아담의 형상이라고 했는데, 즉 고장난 아담의 형상을 괜찮은 아담의 형상으로 바꾸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인데,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라 아예 아담의 형상은 저주받은 형상으로 남겨두고 새로운 형상으로 만드는데, 즉 누구의 형상인가?

마지막 아담의 형상인 예수님의 형상을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 없는 것인데, 하지만 없는데서 언약을 통해서 주시는데, 즉 죽은데서 살리시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예수님의 형상을 생산해낸다는 것이다.

◈ ‘가능성’에 환장하는 목사들 !!

그런데 이 세상 신학은 왜 이렇게 “인간이라면 신의 명령을 듣고서 반응을 나타낼 가능성을 지녔다” 라는 주장을 하는가? 목사들이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명령하는 재미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명령을 하고 교인들이 순종할 때, 바로 거기에서 목회의 재미를 느낀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자미나는 목회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교인들의 숫자가 적으면 목회를 할 맛이 나지 않는데, 하지만 교인들이 수 천명이 들어오면 목사는 그야말로 미쳐버린다는 것이다. “저 양반은 오늘 교회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여겼는데, 제일 앞에 앉아있으면 설교가 얼마나 잘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잃었다가 얻었기 때문에 말이다(ㅋㅋ).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나요? 토요일 저녁에 “목사님, 이번 주일은 힘들겠습니다” 라고 전화가 왔는데, 그런데 주일날 얼굴이 보이면 그야말로 기분이 ‘엎’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가 되면 그만 낙담이 되어서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또 사모도 옆에서 “여보, 이제는 목회는 그만하고 우리 장사나 합시다” 라고 하고 말이다(ㅋㅋ). 

아무튼 이러한 명령의 반응을 자기가 결정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게 교재 108페이지에 연이어 나오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렇다면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데 별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 그러면 과연 신앙이 필요한가?

여기에 보면,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데 별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라고 하는데, 사실상 이 말이 맞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저쪽 신학자들의 이론에 의하면, 이미 신앙이 없어도 하나님을 알았는데, 그런데 신앙이 더 이상 왜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인간이 신을 안다고 하면, 그러니 그 다음에는 신의 말씀을 듣고, 왜냐하면 안테나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말씀을 듣고 실천에 옮기면, 그렇게 행함으로 보여주면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신앙이 들어갈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 굳이 이삭이 왜 등장해야 하는가?

아브라함이 분명히 신을 아는데, 그러면 그 약속이 무엇이었는가?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래서 아브라함은 누구를 낳았는가? 이스마엘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으로 그냥 끝인데, 그런데 왜 굳이 이삭이 새롭게 등장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지금 이렇게 신을 안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신을 안다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 항상 “나는 옳다” 라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신앙이 온다는 것이다. 즉 “나는 옳아! 나는 옳아!” 라고 하는데, 그런데 신앙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아이쿠, 나는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이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동안 자기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는 말이다. 십자가도 전혀 모르면서 십자가를 운운하고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즉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이 자기에게 너무나도 적합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 너무나도 합당한 하나님의 조치 !!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의 경우에, 모압 땅에 가서 남편도 죽고, 아들도 두 명이나 다 죽어도 말이다. 그리고 그곳의 부동산을 모두 다 포기하고 본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오미에게는 너무나도 합당한 하나님의 조치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욥의 경우에도, 자기 자식이 10명이나 모두 다 죽고, 재산을 다 날리고, 또 마누라도 도망가고, 그리고 온 몸에 헌데가 나서 기왓장으로 피가 나도록 긁었지만, 그러나 욥은 그것에 자기에게는 너무나도 합당한 하나님의 조치였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주신 자도 여호와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이니”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욥은, 그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가지고 가신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자기가 어떻게 원망을 하겠느냐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 아니 줘놓고는 왜 빼앗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엉뚱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 로마서 - 믿음에서 믿음으로 !!

로마서 12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라고 하는데, 즉 모든 인간이 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신앙이냐는 말이다. “신을 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는 것이 아니었구나” 라고 할 때는, 그것은 오직 믿음이 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다시 말해서, “신을 안다. 말씀이 있구나. 이제 실천에 옮기자” 라고 하게 되면, 거기서 행함이 나오게 되지만, 하지만 “아하, 신을 안다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믿음에서 행함이 아니라, 믿음에서 믿음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음에서 믿음이 나오면, 우리의 주체는 곧 죄인이고, 우리의 행함은 죄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율법 앞에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이 모든 말씀을 실천에 옮겼고, 예수님께서 모든 행함을 다 이루셔서, 그것을 값없이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의로움을 받았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로마서의 내용이란 말이다. 이것이 “믿음에서 믿음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믿음에서 행함이 아니고 말이다.

여기에 비해서 야고보서는 무엇인고 하니,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그 앞의 모든 행함을 치는 것인데, 즉 “그 행함이 아니야. 바로 이 행함이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로마서와 같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믿음이 아닌 행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기존의 아담의 속성으로만 유발된 정신적 안테나를 차분하게 신 쪽으로 방향을 맞추어놓으면, 얼마든지 신의 메시지와 접선이 가능한 바가 된다. 계시란 신 쪽에서 뭔가 인간 쪽으로 표현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MBC가 제대로 나오지를 않다가 ‘조영남과 최유라의 여성시대’ 라고 하면서 방송이 나온다면, 그건 안테나를 통한 신호가 맞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신의 메시지와 접선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UFO 연구회’ 라는 모임이 있는데, 그들이 무엇이라고 주장하는가? UFO와 맞는 채널은 따로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말이다.

◈ 신의 메시지와 접선이 가능 ??

주로 이런 것을 기도원에서 많이 주장하는데, 즉 산밑에 있는 교회보다 여기 높은 기도원에서 기도하는 것이 더 영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사무엘상에 보면 사울이 나귀를 찾으려고 갔다가 사무엘과 합세해서 성신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기 집에 있을 때는 받지를 못했는데 말이다. 바로 그 자리가 기도원 자리인데, 즉 ‘터’가 중요하단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풍수지리인데, 그러니 아무 곳에나 기도원을 세우면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기를, 창세기에 보면 무슨 내용이 나오는가? 야곱이 꿈을 꾸고 나서 자기가 베고 잔 그 돌맹이 베개에 기름을 붓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로 먹고사는 것이 쉬운데, 어떻게 하면 되는가? 돌 베개를 하나 가져다가 생수를 발라다가 새로운 ‘베개교’ 라는 종교를 하나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말을 아주 그럴싸하게 해서, 포장을 잘 깔아야 하는데 말이다.

◈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

물론 구약성경에는 지리적 의미가 분명히 있는데, 그런데 이게 신약에 오면 어떻게 되는가? 골로새서 3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건은 십자가이기 때문에, 이 십자가 사건이 땅에서 붕 떠서 어디로 가는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을 하셔서 하늘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가? 땅에 있는가?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어제 오전예배 설교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 그것을 우리 인간들이 가위를 가지고 끊을 재간이 도저히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땅의 것은 가위를 가지고 좀 끊어주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해야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이, 즉 그것은 하늘에서 온 믿음임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게 아니라 땅의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면, 자기가 있던 곳에 거룩한 처소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발 딛는 공간을 거룩한 공간으로 말이다. 그렇게 구약적인 안목을 가지고 계속해서 우기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니가 우리교회를 무시해?

흔히 교회를 지을 때 어떻게 짓는가? 그냥 짓자고 하면 헌금이 나오지 않으니 구라를 치는데, 그렇게 그렇게 짓고 나서 하는 말이, “선친이 되시는 우리 장로님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시작했더니만, 그 다음부터는 땅을 팔지 않겠다든 인간들이 급사를 하고, 그 자식들이 잘못했다고 하면서 자진해서 땅을 바쳐서 지었다, 그런데 그런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를 목사 하나가 어디서 와서 무시하다니, 복음이란 미명하에서 그렇게 하는 게 말이 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그런 식으로 나와주어야 영험한 교회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토속적인 민중종교와 그만 짬뽕이 되어서, 그게 곧 무속신앙인데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서로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나는 ‘사천왕(四天王)’이 무서버 !!

절에 가보면 사천왕(四天王)이 있는데, 입구에는 먼저 일주문이 있고, 그 다음에 그들이 있는 문이 나오는데, 무시무시하게 생긴 4명이 있다는 것이다. 칼, 용과 여의주, 삼지창, 그리고 비파를 들고 있는데, 그런데 아래에는 중을 밟고 있다는 말이다. 아이들은 이것이 무서워서 잘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말이다. 혹시 그런 경험이 없었나요?

그렇다면 이 4천왕이 있는가? 제가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그것은 불법(佛法)을 지키기 위해서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중과 선배(?)를 왜 밟고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한 대목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중을 밟고 있는가? 그것도 절의 입구에 있으면서 말이다.

제가 추측해보기로는, 이들의 복장이 중국에서 온 것인데, 즉 중국에서는 장군복장으로 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런 장군복장이 아니고 인도의 아미산을 지키는 4부류의 장군들인데, 그러니 인도문화에서 온 것 같다는 말이다. 즉 인도문화에서의 밟는 것을 그대로 수용했는데, 보다 자세한 것은 따로 하기로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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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대천왕은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게 있는데 재석천이란든가 사대천왕은 원래 인도의 힌두교 신앙에의 다른 신들이었다. 그런데 인도의 석가의 불교가 종교적 힘을 가지기 위해 이들을 그 아래로 거둔 것이다. 그들은 호법신이기에 절의 문에 위치하며 잡귀를 막고 사람들을 지킨다. 우에는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좌에는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이다. 이들은 보통 검(劍:지국천), 비파(琵琶:다문천), 탑(塔:광목천), 용(龍:증장천)을 들고 있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인도 신화책을 읽어보는 게 좋다. - 네이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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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유치찬란한 한국교회 !!

아무튼 우리나라의 무속종교는 눈에 보이는 특정한 공간과 시간이 거룩함을 붙들지 않으면, 즉 보이는 것을 붙잡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의 기독교는 무엇인가? 사실은 일종의 신당(神堂)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테나를 가동시켜서 그쪽에 맞춘다는 것이다. 마치 이슬람인들이 금요일에 사우디아라비의 메카를 향해서 기도하듯이 말이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짓인가? 이것은 정말로 시건이 없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인데, 양무리 마을의 표현에 의하면 유치찬란한 말이다(ㅋㅋ). 일곱 귀신이 들어야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특정한 장소에 효험이 있다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마다 그런 일곱 귀신을 키우는데, 왜냐하면 교인들을 유치하게 만들어야 목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치 천박한 간증집회나 하고,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것들만 골라서 한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을 소위 ‘안테나 세우기’ 라고 할 수 있는데, 저주받을 인간이 안테나는 세워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그냥 부셔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108페이지를 보자.

** 피조물 안에 있는 신의 능력을 긍정하게 되면, 이제 남은 사항은 인간 본인의 노력에 의해서 얼마나 깊고 넓게 신적인 속성을 파악해내느냐는 정도의 차이뿐이다.

◈ 교회는, 정화수를 떠놓고 빌 공간을 제공하라 !!

이게 무슨 의미인가? 인간이 신을 안다면, 이제 안테나를 세워서 말씀을 잡으면 되는데, 그러면 잡은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온 것은 무엇인가? 질적이 아닌 양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가? 말씀에 대해서 실천을 게을리 하면 저주를 받고, 열심히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게을리 하면 어디에 간다는 것인가? 당연히 지옥으로 가고, 반면에 열심을 내면 천국에 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무속신앙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기 ‘열심히 하고’ 라는 것에다 한 가지 더하면 ‘정결하게 하고’ 라는 것인데, 즉 정화수를 떠놓고 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토속종교이고, 불교이고, 또한 오늘날 교회가 아니냐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신을 아니까 그런 신이 주신 말씀을 게을리 하면 저주를 받는데, 그래서 저주를 받은 가정의 경우에, 즉 아이가 아프고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열심을 내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다. 말씀에 대한 열심을 말이다. 그러니 열심을 내어서 기도하고, 열심을 내어서 헌금하고, 열심을 내어서 봉사하면, 그러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는데, 그리고 요즘은 힘이 되고 돈이 되는 신학이 대세를 이룬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얼마나 열심인지, 새벽기도도 모자라서 수요일과 목요일과 금요일까지 모이는데, 아마도 앞으로는 일주일 내내 모이지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모이는데, 그런데 과연 교인들이 그렇게 모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회는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장소를 제공하라는 것인데, 복을 좀 챙기게 말이다.

◈ 그러나, 신앙은 ‘이미 다 이룬 것’ !!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신앙이라는 것은 이미 다 이룬 것인데, 그리고 우리는 교체가 되어야 하고 말이다. 즉 떠나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 자신의 육신에 대한 기대와 미련은 이제 손을 다 털고 웃으면서 청산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다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마련해놓은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 예루살렘, 즉 우리의 본향을 향해서 가는 나그네의 길을 아주 감사하면서 즐겁게 기쁨으로 가자는 것이다. 그렇게 갈 때 아까 말한 “나는 옳다” 라는 돌아서면 덮치는데, 그러면 성령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그 옳다는 것이 옳지 않아. 그런 너에게 긍휼을 베풀어줄게” 라고 하시는데, 즉 용서와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해주신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어린양의 보좌의 세계로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의 기계인 줄 압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심은 십자가의 공로와 사랑과 긍휼을 생산하기 위해서 오신 줄로 압니다. 내일은 또 내일 치의 생산분량이 있고, 모래는 모래 치의 생산분량이 또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니 오늘 이 시간 이러한 주님을 알게 된 것을, 오늘 이 시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10,19 오후 11시에 마침.

                                                                         여보, 밥 가지고 온나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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