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621 피27강 강요된 선택(언어)과 권력인 자아 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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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621피p102강요된선택과자아깨기

피27강 강요된 선택(언어)과 권력인 자아 깨기 

[10 대구강의 9] - [피 27] - 강요된 선택과 자아 깨기
                                                                                
                                                          10,06,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언어규칙’에 대해서 !!

2010년도 6월 21일 강의를 시작하겠는데, 먼저 교재 102페이지를 살펴보자.

** 언어는 규칙과 구조에 의존하는데, 자기만의 언어규칙을 따로 실행하고 있는 게 된다. 과연 자기만의 의미규칙이 일반적인 언어규칙에 종속될 수 있을까?

이 문장을 읽어보면, 문장이 약간 길기도 하지만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감이 잘 오지 않지 싶은데, 그렇지요? 함축된 의미를 한번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은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의미규칙과 언어규칙이라는 것이 말이다.

먼저 이 ‘언어규칙’ 이란 것은, 한국사람이라면 한국말을 사용해야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즉 통한다는 것은 서로 규칙이 맞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이것을 ‘선풍기’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을 ‘팬’ 이라고 하면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풍기’ 라는 소리와 ‘팬’ 이라는 소리가 다르니,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 근호야, 밥과 김치를 먹어야지 !!

그런데 이 ‘언어규칙’ 이란 것은, 자기가 만든 게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부모가 강요한 것인데, 그래서 아이가 나이가 5살이 되어도 밥을 먹지 않고 김치를 먹지 않으면 엄마에게 얻어맞는다는 것이다. 즉 엄마가 밥을 먹고 엄마가 김치를 먹으니, 그것을 자식에게 강요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언어규칙은 강요를 하게 되는데, 그것을 수용하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순종’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라” 라는 의미는, 후발자는 선발자에게 복종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 선발자가 가지고 있는 언어규칙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쉽게 쉽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무튼 이렇게 엄마가 “김치를 먹어라!” 라고 했을 때, 그런데 만약에 한국 엄마가 미국 아이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했다면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먹어라’ 라는 말은 분명히 영어로 ‘eat’ 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먹어라’ 라고 했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규칙’ 이라는 것은, 이미 부모가 가지고 있는 질서에 후발자가 되는 자식을 강요하는 것인데, 즉 부모의 세계에다 자식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너는 나의 경험상, 죽이 아닌 밥과 김치를 먹어야만 건강하게 살 수 있어!” 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강요를 한다는 말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말이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동시에 언어규칙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모는 자기 아이가 자기 언어규칙 속에 들어왔다고 생긋생긋(?) 웃는데, “아이쿠, 우리 아니는 말도 참 들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이라는 것이다.

◈ 소시지와 계란 후라이의 추억 !!

40대 중반을 넘은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 어떠했는가? 가난한 학생들은 도시락에 반찬으로 김치만 들어있는데, 그래서 만원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다가보면 김칫국물이 다 흘러서 엉망이 되고 말이다. 교과서에도 김칫국물이 빼어있고 말이다. 물론 대부분이 다 그러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부잣집 아이들은 어떠한가? 반찬에 소시지와 계란 후라이를 밥에 깔아서 온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될 때 그 아이는 어떠하겠는가? 자기는 “김치를 먹으면 순종한다” 라고 여겨서, 그래서 반찬으로 김치를 넣어서 학교를 갔는데, 그런데 옆에 있는 자기 짝쿵은 소시지를 가지고 오더라는 것이다. 또한 계란 후라이를 밥에 덮어서 오고 말이다.

그럴 때 그 아이는 어떤 좌절감을 느끼는고 하니까, “나도 저것을 한번 먹어봤으면!” 라는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아이는 언어규칙 속에서 그 언어를 사용해서 엄마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엄마, 나도 소시지!” 라고 하다가 그만 된통 혼 줄이 난다는 것이다. 즉 “이 놈아, 우리 형편에 무슨 소시지란 말인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 아이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물론 계속 순종은 하는데, 하지만 그 언어규칙에서 나온 엄마의 세계가 아닌 소시지를 먹을 수 있는 자기의 세계가 그리워진다는 말이다. 즉 “왜 우리 부모는 가난해서 내가 소시지를 먹을 수 없는가?” 라고 하는, 거기에 대한 자기만의 새로운 의미규칙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수종은 잘 하면서도, “예, 예, 예”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의연 중에 무엇인고 하니, “나도 빨리 독립을 해서 소시지만 마음껏 먹을 수 있다면, 그 이상 내 인생의 행복은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소시지를 쳐다보지도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 시절에는 도시락 반찬에 소시지가 들어가고 계란 후라이가 들어가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만의 의미규칙을 !!

그것이 의미규칙이 되는데,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부모의 일방적인 세계에서 따로 자기만의 살림을 차리면서 나오는 것이, 그것이 부모에게는 수종을 하면서도 그 안에는 자기 꿍꿍이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만의 의미규칙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서로 말을 주고받고 주고받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따로 따로 각자의 꿍꿍이속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남북전쟁이 일어났다고 했을 때, 그래서 이제 북으로 진격을 하는데, 거기에 대학에서 식물학을 가르치다가 온 교수도 있고, 고고학을 공부한 사람도 있고, 부동산 투기를 하다가 온 사람도 있고, 또한 북에 친척이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각자가 다 생각이 다른데, 식물학자는 북한의 식물을 궁금해 할 것이고, 또한 고고학을 공부한 사람은 주몽의 유적지를 보고 싶을 것이고, 부동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땅을 두리번거린다는 말이다. 그리고 북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 사람은 자기 혈육이 그리울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북으로 진격을 하면서도, 자기만의 꿍꿍이 속마음은 다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과연 우리 인간이 포기할 수 있을까? 물론 묻혀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결코 포기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요?

◈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 !!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살펴볼 것은, 이렇게 같은 형과 동생이 있다고 하면, 성경에 보면 에서와 야곱이 나오고 말이다. 그들에게는 같은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갔던 길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같은 길이 아닌,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삭과 리브가가 외치는 그 하나님의 언약을, 그것을 ‘이삭언약’ 이라고 하는데, 그 언약에 매달릴 때 무엇을 놓치게 되는가? ‘이삭언약’ 이란 언어를 해석하면 자기도 이삭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여기지만, 하지만 여기서 야곱언약으로 인해서 야곱의 갈 길과 에서의 갈 길이 그만 갈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즉 이삭언약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야곱언약으로 그만 갈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둘로 말이다.

(이때 울산 팀이 늦게 도착한 듯) 어서 오세요. 더운데 오신다고 고생했습니다. 아무튼 이 이삭언약이 야곱언약으로 그렇게 갈라지게 되는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해석을 할 때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는데, 첫째로, 이삭이 받은 언약을 이삭의 그 레벨에서 해석을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삭언약은 언어이니 말이다. 그러면 이것이 맞는가?

이삭의 수준에서 이삭과 같이 해석을 했다면 말이다. 물론 틀렸는데, 그러면 이삭언약이 무엇으로 갈라졌는가?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이, 같은 자식이라면 부모에게 순종하면 되겠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야곱에게서 야곱과 에서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야곱언약인데, 그러면 이삭언약을 언어적으로 해석한 그것이 과연 옳으냐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 구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옳은가?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면, 구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히 틀렸는데, 그런데 목사들은 자꾸만 구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자고 하는데, 즉 ‘순종해라’ 라고 했으니, 그냥 순종을 하면 되는데, 십계명을 지키라고 했으면 지키면 되고 말이다. 그러니 그게 무엇이 잘못이냐는 것이다. 문자를 문자로, 즉 언어체계를 언어체계로 해석하는데 말이다. 그들이 매일 주장하는 게 그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삭이 알고 있던 이삭의 문자적 해석은 어떻게 되는가? 나중에 야곱과 에서에게 가게 되면 그것이 틀린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틀린 것으로 말이다. 즉 “이삭언약은 틀렸습니다” 라고 하면서 야곱언약으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 이삭언약은 틀렸습니다 !!

그렇다면 한다면, 굳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 야곱 언약이라고, 그렇게 하지를 말고 처음부터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되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언약을 자꾸만 주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을 주어서 그만 헛갈리게 하는데, 그 헛갈린 대표적인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란 말이다. 즉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어디로 간다고 했는가? “뭐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웃기지 마라. 너희들은 지옥이 간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들은 뭐라고 하는가? “성경을 보고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데, 하라고 하면 하면 되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되지 않는가?” 라고 주장한다는 말이다. 자기 속에 꿍꿍이는 다 따로 있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남들이 보기에는, 자기는 문자적으로 해석을 했으니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성경대로 했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런 자들에게는 저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설교를 하지 말고, 아예 성경을 그냥 읽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어서, 듣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도록 말이다. 차라리 그것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 인간이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

그러니 여기 이삭언약에서 야곱언약으로 내려올 때 여기는 무엇이 끼어드는고 하니, 그만 ‘죄’ 문제가 끼어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 문제가 끼어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은 이삭언약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냥 맹탕으로(?) 해석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어떤 해석을 하게 되면, 미처 본인도 몰랐던 죄가 가미되어서 이삭언약을 해석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석하면서 “어어, 그것이 아닌데”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니 야곱언약이 내려오면서, 여기서 무엇을 느끼게 되는고 하니, “아하, 나의 해석이 죄악되고 잘못된 해석이로구나” 라고 하면서, 그렇게 그런 해석한 사람을 들통을 내고 고발하면서, 이삭과 더불어 야곱언약으로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식이 부모를 살려주는데, 즉 야곱이 아버지를 살린다는 말이다.

◈ 다윗언약 - 다윗의 자손이 다윗을 살려 !!

다시 말해서, 다윗의 자손이 다윗을 살리는데, 그게 바로 다윗언약의 핵심이란 것이다. 그러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주님인데, 즉 주님께서 거꾸로 자기 조상 다윗을, 즉 다윗언약을 해석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다음과 같은데, 즉 우리 인간은 과거 자기들이 일던 가락으로 현재를 해석하고, 그렇게 해서 뭉쳐진 그 해석이 미래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과거를 거쳐서 현재로 해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들이 하는 해석방법인데 말이다.

◈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를 해석 !!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그것이 인간의 죄임을 아시고는 반대로 해석하신다는 것이다. 즉 미래에서 거꾸로 해석이 날아와서 현재를 해석하고, 또한 과거를 해석하신다는 말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왜 내가 9살 때 우리 부모님은 이혼을 했을까? 그때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내가 공부를 잘했을 텐데!”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과거에서 해석해서 현재와 미래로 잡아당기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현재에서 과거로 되돌아가게 되면, “아하, 그때 우리 부모가 이혼한 것은 지금 나를 있게 하기 위함이구나” 라고 하면서, 반갑고 감사한 마음으로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지금 현재의 ‘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있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은혜로 생각하게 되면,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로 해석하는 것이 되지만, 그러나 은혜가 없이 불퉁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항상 과거 탓을 하게 되는데, 즉 “그때 내가 이랬었는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성도의 미래는 천국으로 확정 !!

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천국인데, 즉 이미 확정된 해석이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천국에서 누구를 섬기는가? 어린양을 섬긴다는 말이다. 이것을 설명하면 또한 굉장히 복잡한데, 왜냐하면 어린양의 보좌를 둘러싸서 섬기는 흉내를 누가 내는고 하니, 바로 악마가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악마는 자기 종인 귀신들을 보내서 보좌를 둘러싸게 되고, 그런 귀신의 영이 임한 인간들이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이다. 즉 악마의 어린양의 보좌의 구조를 알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흉내내어서 지상에 그대로 심어버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주변에는 ‘권력’ 이라는 것이 둘러싸고 있는데, 우리 인간은 항상 이 권력이 깨어져야만 본인의 진면목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 권력에 둘러싸이면, 그 권력을 믿고 자기가 잘났다고 한다는 말이다.

◈ 이근호 - 인간의 모든 선택은 강요된 선택이다 !!

그러니 이삭언약에서 야곱언약으로 내려갈 때, 이삭이 가지고 있던 죄악된 권력이 깨어지면서 “아하, 내 선택이 잘못되었구나”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이삭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저는 무엇이라고 표현하는고 하니, “인간의 모든 선택은 강요된 선택이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우리 인간에게 선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언제나 선택을 하는데, 하지만 그것을 자기가 자유롭게 하는 선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강요된 선택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기존의 권력에서, 그 권력이 곧 악마의 구조인데, 즉 죽기를 무서워하는, 즉 자기가 불멸되지 못할까, 그것을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그러한 것을 과거부터 계속해서 해오고 있는데, 그런데 미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천국에 가서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면류관을 반납하고 그 어린양을 섬기는 것인데, 즉 이미 확정된 의미체계라는 말이다.

◈ 권력이 사라지면 주체가 없어 !!

하지만 우리 인간은 자기 권력을 포기하게 되면 자기 주체가 없어지는데, 어려운 이야기라서 생략하고 싶은데 말이다. 즉 권력이 사라지게 되면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양파껍질을 다 벗기고 나면 양파가 없듯이 말이다. 왜냐하면, 양파 자체가 껍질로만 되어있으니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 주체는 권력으로만 되어있는데, 계속해서 권력으로만 되어있다는 말이다. 발꿈치에 보면 각질이 있는데, 그런데 그 각질을 계속해서 벗겨내면 어떻게 되는가? 나중에는 발꿈치 자체가 날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발꿈치와 같은 모든 근육은 층으로만 되어있는데, 그 층을 자꾸 벗겨내면 사라지고 만다는 말이다.

◈ ‘피’ 인가? ‘권력’ 인가?

하지만 천국에서 어린양을 섬기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거기에 대한 것은 누구의 안목인가? 곧 예수님의 안목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피를 흘려주셨는데, 그러면 여기에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말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의 피가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가?

분명히 피를 증거하라고 성도가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권력을 끌어다 모으는 더러운 버릇이 있어서, 좋다고 하는 것은 다 끌어 모은다는 것이다. 복분자도 끌어 모르고, 또 산수유도 끌어 모으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좋다고 하는 것은 다 모으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피도 끌어 모은다는 말이다.

권력이 깨어지고 벗겨져야, 주께서 피로 만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즉 권력이 아닌 피로 만들어진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하는가? “나는 십자가도 알고 복음도 안다” 라고 해놓고는, 그런데 나중에 보면 “나는 힘이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나보다 힘이 센 놈은 나와봐 !!

그렇게 피를 내놓아야 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피가 아닌 자기 힘을 내놓는다는 말이다. 교회에서도 뭐라고 하는가? “나보다 힘이 센 놈은 나와봐” 라고 하는데, 그러니 교회자체가 그만 권력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 교회에는 힘을 줘봐야 똥밖에 안 되는데 말이다.

아무튼 미래는 이미 결정이 난 것인데, 그런데 문제는 권력에 둘러 쌓여져 있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둘러 쌓인 인간으로 바뀔 것인지, 그것이 관건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겠는가? 안 되는데, 그러니 깨어지면 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권력이라는 체계를 깨어버린다는 말이다.

◈ 인간들의 기도 레퍼토리 !!

여기에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요약해보면 간단한데, 우리 인간이 언어규칙을 핑계삼아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교회에 순종하고, 또한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뿐이라는 것이다. 즉 “주여, 믿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 인간들의 기도는 그 레퍼토리가 항상 정해져있는데, 즉 인간들마다 하는 기도의 내용이 다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기도의 레퍼토리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이 권력에서 다 나온다는 것이다. 권력에서 말이다.

◈ 엄마는 왜 숙주나물을 선택했는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딸이 무작정 상경을 해서 힘들게 구로공단에 취직을 했는데, 그러면 시골에 있는 부모는 어떻게 하는가? 딸에게 가려고 자기 딸이 좋아하는 숙주나물을 비롯해서 음식을 장만해서 보따리에 바리바리 싼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부모는 왜 콩나물이 아닌 숙주나물을 선택했는가? 그것은 자기의 선택이 아니라 딸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인데, 그러니 그것은 강요된 선택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남의 딸이라면 관심도 없겠지만, 그것은 자기 딸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상황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 때, 그 상황이 요구하는, 그런 강요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 딸이 취직을 해서 그만 사고로 죽었다고 하면, 그러면 바리바리 음식을 준비할 필요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기숙사에서 연탄가스 사고로 그만 죽었다면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선택을 하고 의지를 발휘하면서, 그렇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주어지게 될지,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모르고 말이다. 즉 우리 인간은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모르는데, 그래서 반성이라는 것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도 뭔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성립되는 것이지, 그런데 그냥 앉아서 “나는 부족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당신은 왜 부족하지요?” 라고 하면 그 사람은 뭐라고 하겠는가? “나도 몰라. 내가 미쳤어” 라고 하겠는가?

◈ 반성된 주체는 없다 !!

그렇게 사람은 주어진 상황 속에 적응하고 맞추어 나가려고, 그 상황에 맞는 주체가 새롭게 정립되고 조작되어서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평생을 살아도 모르는데, 그것을 어려운 말로 “반성된 주체는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러 이러한 인간이니, 그래서 나는 반성합니다” 라고 해야 되는데, 그런데 정작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도 모르면서 무슨 반성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모든 모든 것이 과거에 아는 것이란 말이다. 즉 “나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무작정 상경을 해서 취직을 했는데, 그만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과거에서 출발해서, 의미를 끄집어내어서, 현재에서 출발해서, 그래서 딸을 위해서 바리바리 싸주는 것, 바로 그런 행동을 우리 인간은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또한 현재에서 미래로 가버리게 되면, 그러면 딸이 죽는다든지, 자기 몸이 아프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인간은 딸이고 뭐고 간에, 그만 자기 몸 하나도 간수하기가 힘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성경은 확정된 미래에 대해서 !!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어린양을 섬기는데 있어서 피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으로 섬긴다는 것이 확정된 이상, 과거에서 차고 올라오는 것과 미래에서 주어지는 것과 충돌되는 그 현장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즉 “아하, 이것이 바로 주제파악도 되지 않는 죄인의 모습이고, 또한 저것이 바로 주께서 마련하신 의인의 모습이구나”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악마의 권력과 주님의 피의 은혜의 권력이 마주치는 그 현장에서, 주님께서는 “왜 너는 피의 증인인가?” 라는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의 도움이 없이는 주님은 일을 할 수 없는데, 즉 권력의 힘이 없이 주님은 일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 첫째부활과 둘째부활 !!

이 권력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주님은 죽기가 무서워 귀신의 종이 된 우리는 건져내려고 오셨는데, 우리는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그런데 성도의 미래상에는 죽음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천국에서 어린양을 섬기는 것을 두고 ‘둘째 부활’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죽여도 또 살아나고, 죽여도 또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자기의 피로서 그런 인간을 만들려고 하신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목사님, 피에게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물론 피에는 그런 능력이 있는데, 물론 우리는 인정하기 싫지만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피에 그러한 능력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과거 경험상, 우리의 피로는 그런 일이 되지 않으니, 우리가 안 되면 주님도 안 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거기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라는 것이다.모세와 엘리야는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과거에 모두 다 죽었던 자들인데, 그런데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첫째 부활인데 말이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마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 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 여보, 설교가 왜 그래요?

제가 어제 오전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 제 아내가 저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는데, 설교에 어려운 것이 있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설교를 마치면서 왜 갑자기 음부와 천국이 나오느냐는 것이다. 본문과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어려운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것이다. 아마도 어제 설교를 문제점을 지적한다고 한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설교 마지막에는 고바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왜냐하면 교인들이 그냥 다 알았다고 하면서 집으로 가버리면 안 되니 말이다. 그러니 뭔가 “아, 이것은 알겠는데, 그것은 모르겠다” 라는 식으로, 그런 숙제를 하나씩 가지고 가야 된다고 말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는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그리고 음부와 같은 것은,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은, 즉 모세와 엘리야는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고 하니, 하나의 스크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일을 하실 때, 바로 이런 이런 식으로 일을 해서 끝난다” 라고 하는 정보가 담기는 하나의 그릇, 혹은 바구니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 파리 바게트 !!

왜 프랑스 빵을 ‘바게트’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빵이 길기 때문에 홈을 내는데, 그래서 여기는 다진 고기를 넣고, 또 채소를 넣고, 또한 크림을 넣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것을 성도라고 한다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정보가 여기에 다 입력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자기의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시고 무엇을 하시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일들이 있는데, 그것을 마치 파리 바게트에 고기를 다져서 넣듯이, 또한 채소를 넣고 크림을 발라서 넣듯이, 그렇게 일일이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무슨 일을 하는가? “주여, 언제 별세를 하십니까?” 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별세’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니 “나는 구원을 받았다. 앞으로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든지 나는 몰라!” 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 성령을 받은 성도는 교회에 와서 뭐라고 하겠는가? “주여, 그 다음 차례는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그러면 “주께서 다시 오신단다” 라고 되는 것이지, 그게 아니라 “나는 이제 구원을 받았다. 앞으로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든지 나는 몰라!” 라고 한다면, 그것은 파리 바게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빵은 예수님이 만든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언제나 우리 인생의 모든 과정이 바로 주께서 그렇게 조성하시고 만드신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는 무엇인고 하니, 미래에 우리가 천국에 가서 어린양을 섬길 수밖에 없는, 그렇게 이미 확정된 미래가 우리에게 앞당겨서, 그렇게 해서 우리의 속을 채운다는 것이다. 마치 빵에 고기도 다지고, 채소도 넣고, 크림도 넣듯이 말이다.

◈ 어린양만 섬기게 하옵소서 !!

그러면 거기에서 나온 기도의 레퍼토리는 무엇이겠는가? “하나님 아버지, 제 딸이 서울에 돈을 벌려고 갔는데, 하지만 서울에 가나 촌에 있으나 어린양만 섬기게 하옵소서. 그런 어린양을 섬기는 능력이, 그 아이가 있는 구로공단에도 임하게 하옵소서”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가 진행이 되는데, 물론 기도뿐만이 아니라 평소에 자식들을 그런 언어체계로서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딸이 그런 언어체계를 이해하겠는가?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데, 자기 꿍꿍이속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제 엄마 품에서 해방이다. 고생을 하더라도 이 지긋지긋한 촌에서 벗어난 것도 해도 너무 좋아. 만세,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탈출을 해서 좋다고 서울로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까 말한 의미체계가 다르니 말이다.

◈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자기 죄만 가려 !!

이제는 의미체계와 언어체계의 의미를 알겠지요? 성경을 제 아무리 천독만독을 하고 해석을 한다고 해도,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그것은 누구 좋아라고 하는 것인가? 자기 죄를 가리는 역할밖에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자기 의미체계를 옹호하는 것에 불과한데, 그렇게 옹호하는 것이 악마의 권력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왕창 다 벗겨져야 하는데, 그래서 모든 것이 죄이고 죄인임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런데 오히려 자기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신학으로 포장을 하고, 또한 목사라는 직책으로 교회에서 그것을 힘으로, 권력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 권력을 부러워하는 백성들 !!

그것이 미가서나 예레미야서에 보면 나오는데, 즉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이 주는 것을 가지고 권력으로 삼는다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것을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부러우니 말이다. 자기들도 평소에 권력을 좋아하는데, 그래서 그런 지도자가 있으니 엄청 좋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 나와있는 왕이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일군인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복음이 살아있고 주님이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워진 일종의 공직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그만 우상시하게 되면, 그건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짐승의 하수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거짓 선지자, 짐승, 그리고 왕들 !!

요한계시록에 보면 짐승의 하수인이 3명이 등장하는데, 먼저 순한 양처럼 등장하는, 사실은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짐승이 나오고, 그리고 정치꾼들, 즉 왕이라는 것이다. 지금 좀 헛갈리는데, 요한계시록 19장 19절을 한번 살펴보자.

(계 19: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계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 그들은 권력을 가지고 !!

여기에 보면, 10절에 짐승과 땅의 임금들이 나오고, 그리고 20절에 거짓 선지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순한 양처럼 굴던 말이다. 그런데 이 3가지 부류들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권력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 권력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땅의 임금들에게 권력을 나누어주는데, 그 권력을 가지고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력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힘으로서 권력이 작용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권력을 가지고 힘으로 삼는 것이 곧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여기 이 근처에는 가기는 가는데, 그런데 확실하게 “바로 이것이다!” 라고 주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린양의 피를 믿지 않기 때문에, 즉 십자가를 모르니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세상은 바로 이렇다!” 라고 꼭 집어서 말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왕들은 경제권을 쥐고 있기에 !!

여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땅의 임금들이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들이 정치만 하는 게 아니라, 경제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힘이 의해서 이 경제가 돌아가는데, 그게 곧 자본주의사회인데 말이다. 그렇게 경제권을 쥐고 있으니 어떻게 되는가? “앞으로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물건을 사고 팔지 못해!” 라고 되니, 그러니 그야말로 “꼼짝마!”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전체가 어느 쪽으로 힘이 쏠리는지, 이번에는 어느 쪽에서 힘을 가지는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아무리 정권이 바꿔도, 그런 것은 인물이 바뀌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이 어느 쪽으로 쏠리는지, 그런 쪽으로 전환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어린양이 배치되면 죄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 성도인가? 아닌가?

다시 말해서, 자기가 살아가면서 평소에 예수님을 섬기고 싶은 사람은 성령이 임한 사람이고, 그것이 아니라 평소에 예수님보다 힘을 더 섬기고 싶은 사람은 어떠한가? 성령이 임한 사람이 아니라, 힘이 임한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정보, 즉 하나님의 일하심이 담긴 그 정보를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성도이지만, 반면에 자기가 끌어 모은 힘을 자랑하면 성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굉장히 쉬운데, 그러니 넘어가도록 하자는 말이다(ㅋㅋ).

이제 교재 102페이지 중간을 보자.

** 사람들의 주관적 경험은 신체가 느끼는 감각운동과 관련이 있다.

◈ 나는 살아야만 돼 !!

사람들의 주관이든 객관이든 간에 사람들이 노리는 것은 불멸(不滅)인데, 그것을 주관적 불멸, 또한 객관적 불멸이라고 하는데, 즉 영원히 멸망을 당하지 않는 말이다. 그것을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원래 미래의 모습을 보게 되면 인간은 죽지 않게 되어있는데, 즉 죽어도 또 살고 죽어도 또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목숨을 끊는 것을 사망이라고 보지 않고, ‘둘째 사망’ 이라고 하는 것은 저주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차피 우리의 몸은 기계가 되어서 평생을 살다보면 진흙으로 만든 것이기에, 그냥 진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에 신경을 쓰면 안 된다는 말이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고 했는데, 그러니 그런 것에 신경을 써서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는 것이다. 

옛날에는 목사들이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할 것인지 매장을 할 것인지, 거기에 고민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장을 하게 되면 주님께서 재림할 때 부활이 안 된다고 여겼기에 말이다. 반면에 매장을 하게 되면 무덤의 문이 열리기 때문에 부활이 되고 말이다. 단 매장을 할 때 시신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팔다리가 떨어진 채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그것이 고민이 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목사에게 그런 것을 따지고 물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 죽는 것이 관심사이고 말이다. 그렇게 교인들도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에 관심이 있지, 어린양을 섬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교인들이 자꾸만 묻는데, 즉 “목사님, 부활을 하는데 만약에 팔 다리가 하나라도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목사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는데, 즉 “팔다리가 없으면 안 되고, 의족이라고 해야 합니다” 라고 말이다(ㅋㅋ).

◈ 나는 지금 저주? 아니면 축복?

하지만 음부가 열린다고 하는 것은, 여기서 둘째 부활에 있어서 사망이라는 것이 어떤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이 저주에 대해서는 입을 꼭 다물고서, 자꾸만 “니 몸이 죽는다. 그렇게 죽으면 흙이 된다” 라고 협박을 가하는데, 하지만 인간은 원래 흙이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중요한 것은, “흙이 되는가? 안 되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저주를 받고 있는가? 축복을 받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오래 살고 말고 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겨우 33년을 살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얼마나 잘 살고 계시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이 전혀 축복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들은 언어체계에 있어서 추상적으로 자꾸만 생각하는데, 그렇게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여기 교재에 보면 “언어를 통해서 영상이 떠오르고, 그 영상을 다시 언어로 이야기한다” 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어와 자기 생각이 일치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즉 똑같은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은 각자가 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影像)도식(圖式)은 인간의 신체적 활동을 통해서 직접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인식이란, 이 영상도식이 은유적 투사를 통해 점차 추상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어간 것이다. 예를 들면, ‘수직성’ 이라는 도식은 사람이 평소에 경험이 있는 구조를 선택할 때, ‘위-아래’ 지향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이 ‘수직성’은 하나의 추상이고 은유이지, 실제로 그런 수직성을 내어놓아 보라고 하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 이라는 개념도, 즉 “아이쿠, 내 새끼. 참 예뻐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사랑이란 개념은 부모가 있어서 자기를 예쁘다고 해줄 때, 그것을 사랑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 십자가가 과연 사랑인가?

하지만 여기에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그것이 사랑인가? 예수님께서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을 왜 하셨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평소에 우리 인간들이 항상 누구 위주로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것인가? 언제나 자기 위주로 하니, 그래서 예수님은 그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바꾸어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렇게 예수님은 어둠의 세계에서 통하는 언어를 사용하셨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그 반대로 생각하면 다 맞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가 바로 예수님의 생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을 받아라!” 라고 하시면, 그것은 “아하, 고난을 받으라는 의미이구나!”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참 우스운 일이 있다!” 라고 하면, 우리는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웃는 자여, 너에게 화가 임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눅 6:25)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 예수님은 청개구리 ??

그렇게 예수님은 반대로 자꾸만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반대로 하시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는데, 즉 “너, 자꾸만 그렇게 하면 죽는다” 라고 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죽음을 반대로 이야기하면 또한 무엇인가? 즉 그 죽음에 합세한 강도가 어디로 가는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기존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방향으로 가야한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 라고 하신 것은, 대부분의 이 세상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간다는 것은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제 교재 103페이지를 보자.

** 남자가 넥타이를 매고 여자가 치마를 입는 것은,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던 없던 간에, 그 관심이나 실행, 또는 규칙을 구현하는 행위가 된다.

◈ 남자는 넥타이를 매어야 !!

여기에 법에 관한 것이 나오는데, 이게 참 중요하다는 것이다. 칸 영화제를 가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는데, 감독들이 평소에는 자유롭게 청바지에 티 셔츠를 입고, 또한 개량한복을 입고 돌아다녀도, 그런데 그 시상식에 오면 아무리 답답해도 턱시도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취재하는 기자들도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이 바로 칸 영화제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닫힌 사회’ 라는 것이다. 즉 그렇게 해서 하나의 폐쇄된 사회를 이룬다는 말이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흩어져 있는 것을 하나로 모을 때 힘이 되는데, 그게 곧 폐쇄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폐쇄된 사회에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작용해서, 자기가 소속된 사회는 무조건 이유도 없이 존재해야 되고, 또한 번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사회법’ 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김길태’ 라는 인간이 성폭행을 했는데, 제가 만약에 판사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사형집행을 시키지 싶은데 말이다.

◈ 왜 안식일에 나무를 하면 죽이는가?

우리가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을 해보아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란 사회에 왜 사형제도가 있느냐는 것이다. 왜 안식일에 나무를 하면 죽이는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는 땅에 피를 흘리지 말라고 했는데,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창세기 9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 모릅니까?

(창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까, 노아홍수 이후에 하나님의 새로운 법이 주어지는데, 즉 지금 이 땅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땅이기 때문에, 사람의 피를 흘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에 나무를 하면 돌로 쳐죽이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말하는 은혜는 누구에게 좋아라는 은혜인고 하니, 하나님에게 좋아라는 은혜이지 결코 사람에게 좋아라는 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깨어져야 !!

오늘 여기서 중요한 것을 해보겠는데,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의 출생자체가 레위지파라고 하면, 그러면 당연히 이스라엘에 속하는데, 그러니 이렇게 여기 이스라엘의 언어체계에 속하게 되고, 그 언어체계가 발전하면 사회체계가 되는데, 즉 사회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회법 안에 누가 있는가? ‘나’ 라는 것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누구의 나라인가? ‘나’의 나라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을 하면 어떻게 한다고 하셨는가? 남의 나라 백성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죽인다는 것이다. 즉 ‘나’를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존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이냐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깨어야 진짜 이스라엘의 본색이 제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깨어져야 교회가 보인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의 특징이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은 자기가 소속되어버리면 자기 중심의 사회가 되고 마는데, 즉 ‘나’만의 사회가 되고, 그러니 ‘나’는 무조건 죽지 않아야 하고, ‘나’는 무조건 번성하고 번창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여, 왕을 주소서 !!

당연히 힘은 하나님을 위한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누구에게 놓아라고 있는 힘이 되는고 하니까, 현재 있는 이스라엘의 구성원들을 위한 이스라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에게 무엇을 구하는가? 왕을 구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에게는 왕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삼상 8: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삼상 8: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삼상 8: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삼상 8: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그러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아니, 왕이 있는데 왜 왕을 달라고 하는가?” 라는 것인데, 즉 그렇게 왕을 달라고 하는 사고방식 자체를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다른 이방 나라들은 일종의 폐쇄사회인데, 즉 왕을 중심으로 한 권력으로 구성되어있다는 말이다. 자기들도 그런 이방나라가 되고 말이다.

◈ 하나님은, 일단 왕을 주면서 깨부수고 !!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잘했다고 하시는가? 그러한 사고방식은 바로 진짜 이스라엘을 버린 것인데, 그렇게 기존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방나라와 똑같은 레벨로서, 그렇게 이스라엘은 그만 뚝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런 이스라엘을 깨부수는 방식이 무엇인가?

그들이 좋아하도록 왕을 주시는데, 그렇게 일단 왕을 주시고 난 다음에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고 하니, 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나라들이 침략을 한다는 것이다. 왕이 없을 때는 그들이 침략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왕을 주고 난 다음에, 이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의 왕들에게 박살이 날 때, 비로소 그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 아하, 우리가 구상한 이스라엘은 아니었구나 !!

그들에게 “아하, 우리가 구상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데, 그러니 그들은 처음부터 자기들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구상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었다. 그러니 너희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살펴보아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아하, 내가 태어났다고 해서 내가 소속된 단체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단체가 아니구나. 오히려 나를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구성된 단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자기들 중심의 법과, 즉 하나님 중심의 진짜 법 정신인 율법의 완성과 마주칠 때에, 바로 그렇게 될 때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짜 이스라엘의 모습인데,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주변에 이방나라라고 하는 적들을 주어서, 그러한 적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시는가? 가짜 이스라엘에서 진짜 이스라엘을 뽑아내는 작업을 벌리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하신 일이라는 말이다.

◈ 누가 왕이신 예수님을 반대했는가?

그리고 결국은 보이지 않는 하늘의 왕이 보이는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누구인가? ‘그리스도’ 라는 분이 오셨는데, 왕은 그리스도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오셨는데, 누가 반대하고 누가 옹호했는가? 반대는 기존의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고, 그리고 옹호는 성령을 받은 자들만 했다는 것이다. 즉 오직 성령이 임한 자들만이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감히 이방인인 주제에 말이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어느 로마군인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하는가? “당신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이스라엘에 너와 같은 믿음이 있는 자를 보지 못했다. 니가 최고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방인 가운데 그런 놀라운 믿음이 있느냐는 말이다.

◈ 백부장, 니가 최고다 !!

(마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지금도 항상 자기가 소속된 그것이 깨어지도록 작용하시는 그분이 바로 진짜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에 있으면서 그것을 느끼게 되는데,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사회법을 언급했고 말이다. 괜히 어려운 내용을 유식한 척을 하려고 집어넣은 것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즉 성경에 나오는 이런 내용들이 현재 사회에서 말하는 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게 교재 103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 이미 기존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를 보았고,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소통되는 법 체제가 있기 때문이다.

◈ ‘법 안’에서 서로 소통이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즉 기존의 법 체제는 무엇인고 하니, 아까 말하기를, 언어 체제에서 각자의 의미 체제가 되었다고 했는데, 그 의미 체제는 사회에 나가면 법 체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법 안에서 서로가 소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한민국에서 성폭행을 하면 사형이다!” 라고 했을 때, 거기에 동의하면 남고 그렇지 않으면 이민을 가던지 하라는 것이다. 제가 판사라면 그런 놈은 당연히 사형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가 그만 나라의 분위기가 바뀌어서, “성폭행에 대해서 사형을 구형한 판사는 이리 나와봐!” 라고 하면, 그러면 이번에는 그 판사가 이민을 가던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알튀세르 - 그때그때 달라요 !!

이런 이야기를 아주 정교하게 주장한 사람이 바로 ‘알튀세르’ 라는 양반인데, 이전에도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다시 한번 해보자는 말이다. 이렇게 군데군데 개마고원처럼 고원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주 어려운 용어로 ‘신급(?)’ 이라고 하는데, 저는 가능한 한 이런 어려운 용어는 피하려고 하는데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소를 키우면 그것이 어디에 속하는가? 축산업 협회에 속하는데, 그런데 그 사람이 또 교회에 다니면 어떻게 되는가? 만약에 그 교회에 장로하고 하면 장로 협의회에 속하는데, 그러니 축산업 협회에도 속하고, 또한 장로 협의회에도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또 어느 초등학교를 나왔으면 그 학교 동창회에도 속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알튀세르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인간은 이렇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축산업에 대해서 세금을 매기는 곳과는 서로 원수인데, 소 값이 떨어져도 마구 세금을 독촉하니 말이다. 그것도 과하게 매겨서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세무서 직원과는 또 이질관계가 되어서, 서로 또 좋게 지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알튀세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인간의 주체는 그 어떤 사회와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때 그때마다 처신과 행동이 다르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바꾸어 말하면, “주체는 없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체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예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항상 임시적이고 순간적이라는 것이다. 즉 “그때그때 달라요!” 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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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1918,10,16~1990,10,23)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다. 알제리 출신으로,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그 곳에서 철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을 선도하는 이론가였으며 그의 주된 논쟁들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근거에 대한 여러 위협들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 위협에는 맑스주의 사회학과 경제학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경험주의와 유럽의 공산당들을 분열시키기 시작한 휴머니즘 사회주의 및 민주-사회주의가 포함된다. 그는 반인간주의, 반경제주의, 반경험주의와 반주체주의를 주장했다. 프랑스 구조주의의 다른 부류와 결코 간단히 얽히는 우호적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알뛰쎄르는 흔히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린다. 그의 저작에는 ‘자본을 읽자’, ‘마르크스를 위하여’ 등이 있다. - 위키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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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쿠, 아제 오셨습니까?

아까 그 사람의 경우에, 축산업자들에게 세금을 너무 많이 매긴다고 해서 세무서에 항의를 하기 위해서 씩씩거리면서 방문을 했는데, 그런데 가서 담당자를 만나보니 “아이쿠, 아제 오셨습니까? - 니가 여기 웬 일이고? - 제가 여기 근무합니다” 라고 되어서, 서로 또 좋게 지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에서 ‘후기 구조주의’ 라고 하는데, 그러니 모든 관계에 있어서 주체는 힘과 힘이 만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힘이 없는 동창생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런 동창회에는 나가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모임은 힘이 없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동창회에는 나갈 필요가 없는데, 그래서 그 사람에게는 이런 신급이 없어지는데, 즉 “나에게 대명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지 마라. 나는 이제 그런 학교는 잊었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주체는 그만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안동 권씨라고 하면, 그런데 이제 그 집안 모임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자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서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저를 찾지 마세요” 라고 큰 소리를 치고 나왔는데, 그런데 조금 있다가 보니 신문에 광고가 하나 났는데, “문중에 지금 땅이 50만평이 생겼습니다. 서로 나누려고 하니 연락을 바랍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대번에 다시 연락을 하는데, 왜냐하면 힘을 모아서, 즉 힘이 되니 말이다.

◈ 동양과 서양의 제국은 달라 !!

그러니 이 사회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불쑥 불쑥 튀어나온 것인데, 즉 동양에서 말하는 왕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기존 동양의 제국과 서양의 제국은 다른데, 동양에서는 왕이 혼자인데, 즉 ‘천자(天子)’ 라고 해서, 자기 땅을 자기가 지배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서양에서의 왕은 무엇인고 하니, 군데군데 자기 패거리가 있어서, 그런 자기 백성들에게 호응을 받으면 왕이 되고, 그렇게 못하면 다른 호족이 왕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서양에서의 제국인데, 그러니 서로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 바벨론은 악마의 제국의 표상으로 !!

다니엘서를 보면 제국이 자꾸만 바뀌는데, 그렇게 서양식으로 바뀌어도 동양식으로 보면 여전히 바벨론이라는 것이다. 이게 상당히 어려운데, 분명히 바벨론은 망하고, 그 다음에 메데와 바사가 나오고, 또한 로마로 진행이 되는데,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여전히 바벨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금신상은 여전히 존재하는데, 그것은 곧 동양식의 표현으로, 그래서 바벨론은 악마제국의 표상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제국은 촐랑거리면서 까부는 반면에 동양의 제국은 점잖한데, 물론 현재는 중국이 그러한 동양제국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국에서는 서양식으로 민주주의를 하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전부가 다 자기가 잘랐다고 하니 말이다. ‘공산주의’ 라는 것으로 잡아주어야 하나의 제국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 흐르는 주체 !!

다시 정리하면, 언어규칙에서 의미규칙으로, 그리고 의미규칙에서 법 규칙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런 법 규칙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 어떤 권력과도 타협을 했다가, 그리고 배신을 했다가 하는데, 그러다가 다시 타협을 하고 말이다.

그것을 ‘흐르는 주체’ 라고 하는데, 즉 인간은 힘이 있는 곳에 붙었다가 힘이 빠지면 다른 힘이 있는 곳에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흘러가다가 보니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게 되는데,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증에 걸린다는 말이다. 즉 안정됨이 없이 정착할 때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인간은 밑에 기반에 뭔가가 빠져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과거에서 현재, 또한 현재에서 미래를 내다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미래가 확정되어있다고 한다면, 그 확정된 힘에 의해서 살아간다고 하면, 우리는 천국 사람으로 바뀌어지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태는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어린양을 섬기기 위한, 즉 그런 사람을 만들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란 것이다. 마치 길다란 파리 바케트에 다진 고기를 넣고, 채소를 넣듯이 말이다. 그렇게 군데군데 우리에게 사건을 새겨 넣어주시는데, 주님이 일으키신 사건을 말이다.

그것이 곧 새로운 피조물인데, 그런 새로운 피조물을 개혁주의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인간이 되는 것으로 아는데, 하지만 이렇게 살펴보니 새로운 피조물은 어떠한가? 자기 것을 다 빠지고 누구 것만 남았는가? 주께서 우리를 죄인이 되게 만드는 사건들만 줄줄이 있을 때, 바로 그럴 때 그것이 곧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이다. 즉 자기가 한 것은 다 죄로 남고, 주님이 하신 것은 모두 다 은혜로 남는다고 하는 말이다.

◈ 로마서 5장에 보면 !!

로마서 5장에 보면, 두 종류의 왕이 나오는데, 즉 하나는 사망의 왕이 나오고 또 하나는 은혜의 왕이 나온다는 것이다. 아담에게는 사망이 왕 노릇을 하는데, 그런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은혜가 우리에게 왕 노릇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그런 말을 했을 때, 이렇게 따져보면 얼마나 깊이가 있고 어려운 말이냐는 것이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런데 그 말씀이 우리에게 체험이 되려고 하면 어떻게 되어야만 하는가? ‘나’ 라는 것은 없어지고, 그것이 아담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지금 제가 강의를 너무 어렵게 하는 것 같은데, 사실 이 로마서 5장이 무진장 어려운데 말이다.

지금 여기에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까, 한 사람인 아담이 죄를 지어서 죄의 지배를 받는데, 그 말씀이 실현되려고 하면 우리 자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나’의 것은 없고, 전부다 다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것들이 계속해서 터져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죄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죄가 나오는 것을 억지로 막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게 우리의 죄가 아니라 아담의 죄인데, 그 아담의 죄를 우리가 왜 막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의 새끼이고 똘마니인데 말이다. 그러니 왜 막느냐는 것이다. 물론 막을 수도 없지만 말이다. 마치 아담이 음식을 먹었다고 하면, 우리는 똥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똥이 어떻게 음식을 먹은 사람을 보고 따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음식을 먹으면 똥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아담에게 소속이 되었다는 것을 체험하면 할수록, 바로 그렇게 체험케 하시는 그 능력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은혜가 왕 노릇을 하고 의가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아담에게 속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능력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의 입에서 두 번 다시 “아담은 아담이고, 나는 나다” 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나는 선악과를 보지도 못했고, 그런 것은 따먹지도 않았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그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침으로 말미암아서 그분의 종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그것을 본인이 고백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이 따먹었지 내가 따먹었습니까? 왜 나를 보고 그렇게 합니까? 내가 무슨 책임이 있다고, 나보고 죽으라고 합니까?” 라고, 그렇게 따진다고 하는 것을 바꾸어 말하면, “주님이 십자가를 졌는데 내가 왜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잠시 ‘집합론’에 대해서 !!

하지만 그와 반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하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담의 죄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도 같이 고백을 해주어야, 그것이 하나의 세트가 된다는 것이다. 이 세트를 한국말로 표현하면 ‘집합’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이 집합론에 대해서 강의를 할 계획인데 말이다.

인간들끼리 모아놓은 집합 속에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즉 죄인들만 모아놓은 그 죄인들 집합 속에,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죄인이 아닌 분이 그만 가담이 되어버리면, 그 집합은 죄인들의 집합이면서도 무슨 집합이 되는고 하니, 의인의 집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신학자들은 파악하지 못하는데,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죄인인지 의인인지,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집합, 즉 세트를 몰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죄인 속에 의인이 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 의인을 중심으로 죄인들이 다시 편성이 되는데, 그러면 그 죄인은 의인을 보여주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 집합 전체가 의인의 집합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다는 말이다.

그 집합은 방금 말한 로마서 5장에 의해 나온 것인데, 즉 한 아담으로 말미암아서, 그 아담이 아무리 새끼를 까도 그 전체가 아담으로 인해서 죄인의 집합이 되듯이, 그 아담 속에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이 들어오게 되면, 그렇게 새로운 왕으로 바뀌어서 왕 노릇을 함으로 말미암아 의가 된다는 것이다.

◈ 칼바르트의 오해 !!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칼바르트가 오해한 것이 있는데, 즉 이전에는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예수님 때문에 의인이 되었는데, 그러니 모두가 다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양반이 집합론을 제대로 몰라서 그러한데, 즉 부분집합과 전체집합을 말이다.

이 부분집합의 집합을 ‘먹집합’ 이라고 하는데, 이런 관계에 들어가게 되면 그만 칼바르트가 헛갈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아하, 전에는 우리가 죄인이었는데, 그런 죄인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대신 지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죄인이 하나도 없고 구원받은 자들만 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칼바르트가 십자가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그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인류를 대표해서 선택을 받은 것이 되어서, 그러면 모든 인간은 예수님 때문에 선택을 받은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단 한 명도 지옥에 갈 사람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왜 굳이 지옥을 만들어놓으셨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지옥은 있고 또한 갈 사람도 있는데, 그러니 칼바르트에 의하면 왜 지옥에 갈 사람이 있는지, 그것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칼 바르트 : 모든 인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때문에 선택을 받았어.
* 이 바르트 :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가?
* 칼 바르트 : 그건 아니야.
* 이 바르트 : 그러면 뭐야?
* 칼 바르트 : 나도 몰라.
* 이 바르트 : 뭐 모른다고?
* 칼 바르트 : 자꾸 묻지마.
* 이 바르트 : ? ? ?


◈ 지옥도, 예수님을 위해서 !!

그러니 여기에서 질문을 반대로 해보면, “우리는 지옥에 가야 하는데, 그런데 천국에는 왜 가는가?” 라고 말이다. 나사로의 경우에 “거지 나사로, 당신은 왜 거기에 앉아있지?” 라는 질문을 해야하는데, 즉 “당신은 교회에 왜 않아 있지?” 라고 말이다. 그러면 거지 나사로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겠는가? “나는 예수님 때문에 여기에 왔지롱!”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옥에 가는 사람이 하는 말이 “나는 지옥에 가는데, 그런데 너는 왜 천국에 가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왜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때문에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가?

만약에 지옥이 텅텅 비어있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감추어진 분인데, 즉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주님은 감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런 감추어진 주님이 드러나게 되면, 비로소 천국과 지옥의 의미가 밝혀진다는 것이다. 즉 왜 천국에 가야될 놈은 천국에 가는지, 또한 지옥에 가야될 놈은 지옥에 가는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애초부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누구를 위해서 만드셨다는 말인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놓았는데, 그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라고 한다는 말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과연 집단의 판단과 개인의 판단이 일치하는가?

이제 교재 104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어느 ‘범주’에 들어갈 때에, 그것을 방금 ‘집합’ 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범주에 속해서 “내가 옳다, 혹은 그르다” 라고, 즉 “이것은 의이다, 죄이다” 라고 판단할 때, 그렇게 개인이 판단한 것이 전체가 판단한 것과 일치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제가 지금 묻고 싶은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어떤 집합에 속했는데, 즉 “내가 교회에 속한 집사로서 나는 옳다, 그르다” 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곧바로 교회전체에서 말하는 옳고 그름과 같이 이어지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어지지 않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니 생각이고” 라고 하게 되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전체 생각으로 “이번에는 이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개인의 옳고 그름으로 판단이 되겠는가? 역시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내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교회에서 그렇게 하니 인간성이 좋아서 따라주기는 한다만, 하지만 다음에는 안 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바깥에서 보면 같은 조직인데 하지만 무엇은 다른가? “옳다, 그르다” 라고 하는 것은, 즉 의와 진리의 문제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그러면서도 하나의 집단으로서 가능하냐는 말이다.

◈ 잠시 ‘국가’의 윤곽에 대해서 !!

지금부터 여기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는데, 이렇게 하나의 국가, 나라, 혹은 교회가 있다고 하면, 이렇게 ‘대한민국’ 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여기에는 4천만의 인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제가 아까 알튀세르 이야기를 하면서 불룩불룩 튀어나왔다고 했는데, 그렇게 각자 각자가 다 있는데,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이 두 개 세 개가 겹친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다 그러한데 말이다. 그렇게 겹치면 여기서 주체가 나오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그렇게 그 어떤 단체에서 버림을 받았다고 하면, 그 사람은 한강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거기 병원이라는 단체에서 고치지 못한다고 하면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직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뭔가 아직까지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나라에서 어떤 결정을 하는데, “이번에 북한을 칩시다. 천안함 사건을 일으킨 나쁜 놈들입니다” 라고 한다면, 분명히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분명히 하나의 한국이었는데, 그 틈이 갈라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국가가 둘로 나누어질 때, 나누어진다고 하는 표현은 좀 어폐가 있는데 말이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지금 이렇게 각자 각자 생각을 하는데, 이 ‘한국’ 이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서, 즉 이 ‘나라’ 라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자기는 전쟁을 반대하고 있는데, 나라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를 하는 사람들과 찬성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곳에 가서 애국가를 부르다가 그만 다같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그럴 때는 갑자기 “아,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한 민족이다” 라는 것이 생각난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나라가 윤곽이 또 잡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집안에서 형과 동생이 매일같이 싸우는데, 물론 옷 문제로는 주로 자매가 싸우고 말이다. “언니는 맞지도 않는 내 옷을 왜 입었어? 내 옷이 다 늘어났잖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집안에서는 싸우다가도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는가? 동생이 맞으면 언니가 달려드는데, 그렇게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 과연 윤곽이 있는가? 없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다들 그러한데, 그렇다면 과연 그럴 때 이 윤곽이 있는지, 없는지, 바로 그것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문제인데, 그러면 이 윤곽이 점선으로 있는지, 아니면 실선으로 있는지 말이다. 어떤 때는 “아, 대한민국!” 이라고 하고, 또 어떨 때는 “정말이지 나라꼴이 이럴 것 같으면 나는 이민을 간다” 라고 하고 말이다.

이것을 두고 윤곽이 없다고 하는데, 분명히 없는데 그런데 그때 그때마다 새롭게 발생된다는 것이다. 즉 윤곽이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의 경우에도, 교회는 없고 사람만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만 있는데, 그런데 그들이 “우리는 한 예수님만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바깥에서 보면, 교회가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이렇게 윤곽이 없는데 있다고 여기는 그것을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즉 진짜 주님의 교회는 그런 울타리를 헐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헐어지게 되어야, 비로소 각 개인마다의 속성이 노출된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엑스레이를 찍을 때 옷을 벗고 찍어야 하듯이 말이다.

바로 그렇게 벗기는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탕자차럼 몽땅 다 버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말씀을 볼 때는 “내가 교회입니다” 라고 하지를 말고, 마치 엑스레이를 찍을 때처럼 벌거벗고 나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나올 때, 말씀이 주는 방사선에 쪼인다는 말이다.

◈ 목사의 설교는, 자신이 먼저 벌거벗어야 !!

그러니 목사의 경우에도, 설교를 하면서 가르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제가 한번은 십자가 마을 말고 다른 사이트에서 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자기 딴에는 성경에 있는 데로 건전하게(?) 설교를 한다고 하는데 말이다.

목사가 먼저 말씀 앞에서 벌거벗고 서서, 그런 벗은 인간으로서 설교를 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내가 목사인데!” 라고 하면서 설교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니 그런 설교가 얼마나 역겨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토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목사야, 너부터 먼저 말씀 앞에서 벌거벗어라” 라는 것인데, 그래서 교인들이 그것을 보고는 “얼래리 꼴래리, 우리 목사님은 벌거벗었다” 라고 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 목사에게서 지식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여러분,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이런 내용이고, 또 이런 내용입니다. 그리고 문법적으로는 이렇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꾸만 교인들을 가르치려고 든다는 것이다.

저는 그것을 보고 “야, 저런 인간은 차리리 좀 게을렀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ㅋㅋ), 그렇게 할 바에는 차라리 발음이 좋은 아나운서를 한 명 세워서 그 성경본문을 그대로 읽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좋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얼마나 있는 그대로 건전하냐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해석에 들어가게 되면, “여러분, 나는 이 성경말씀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벌거벗었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벌거벗은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설교에 담아서 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 목사의 벌거벗은 고백이 바로 설교라는 말이다. 

◈ 여러분, 우리끼리는 다 같은 편입니다 ??

그렇지 않으면 울타리를 치게 되는데, 즉 “여러분, 우리끼리는 다 같은 편입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목사이니, 여러분은 나에게 배워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울타리를 목사가 왜 치느냐는 것이다. 말씀은 오히려 울타리를 깨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런 설교에 대해서 시험을 친다고 하면, 마치 예술학교 시험을 치듯이 말이다. 그런 학교에 가면 커텐을 치고 실기시험을 치르는데, 왜냐하면 누구에게 배웠는지, 그런 것을 전혀 모르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스승들의 입김이 작용하는 것을 막겠다고 하는데, 물론 어설픈 쇼를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목사의 경우에도 그렇게 해서 시험을 보게 하는데, 즉 누가 누구인지 모르게 말이다. 그러면 “자, 이 목사는 말씀 앞에서 철저히 망가지는지 보자” 라고 하게 되는데, 즉 “나는 이렇게 망가졌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자” 라고 말이다.

그러면 “저는 죄인입니다. 그동안 권력을 주장하다가 마치 양파껍질처럼 모두 다 날아갔습니다. 저는 죄인고 껍데기입니다” 라고 하는, 그런 고백을 교인들이 다 같이 듣고 싶어할 때, 그럴 때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결코 목사를 믿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말씀을 주신 예수님이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니 말이다. 

◈ 쳐들어오는 교회 !!

그렇게 될 때, 그것이 바로 그날 새롭게 형성된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즉 쳐들어오는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그것을 ‘보이지 않는 예배당’ 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인간들이 사회법으로 만든 교회가 아니라, 날마다 쳐들어오는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 것이 교재 104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인데 말이다.

일단 교재 104페이지를 살펴보자.

** 그러면 인간은 왜 자신에게 너그러운가? 그것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결국은 자신을 선한 천사 상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곧 “무제한적인 자유의지가 나에게 주어져 있다” 라는 것이고, 이 자유의지에서 이성적인 실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 ‘자유의지’가 나오는데,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강요된 선택에 의한 것이기에 사실 있는 것인가? 없는데, 그런데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힘을 발휘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자유의지에 준해서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다” 라고 하는데, 즉 그렇게 옳고 그르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자기 나름대로의 울타리를 쳤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말씀이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울타리는 다 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옳고 그르다고 하는 것은 모두 니 생각이다” 라는 것인데, 즉 그때 그때마다 새롭게 정립되는 옳고 그른 것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교재 104페이지를 살펴보자.

** 예를 들어서, 쏟아지는 장맛비에 차가 미끄러져 사람을 치게 했다면, 사람은 치게 한 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 장맛비에 있다고 원인을 따로 소급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쏟아지는 장맛비에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사람이 다친 것은 자기가 운전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자기는 운전을 아주 오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는 운전에 대해서 경험이 풍부하다고 하는 것이 기존의 우리나라 법 체제에 먹혀드는가? 들지 않는가?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운전의 경험이 많다고 하면 장맛비가 오면 속도를 줄이고 매우 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왜 여기에 이런 이야기를 적었는고 하니,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라고 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 대해서 그 대처능력을 많이 갖추면 갖출수록 점점 더 의에 가깝고 진리에 가깝다고 하는, 그런 주장을 신학에서, 즉 기존의 교회에서 우기고 있다는 것이다.

◈ 야, 우리끼리 같이 놀자 ??

그것이 바로 울타리가 되는데, 그러니 많이 경험한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건전한 교회를 만들게 되면, 그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는가? 당연히 괜찮은 교회가 되는데, 즉 “수준이 낮은 놈들은 가라. 수준이 높은 우리끼리 모이자” 라고 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괜찮은 울타리가 만들어질 때, 그때 그 교회의 설교자는 뭐라고 하겠는가? “우리 집단은 괜찮은 집단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그 집단을 옹호하는 설교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것이 과연 벌거벗은 것인가? 전혀 아니고, 그것이 오히려 주님을 모독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지금 교재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즉 ‘성화론’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니 성화론은, 수준이 높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야, 우리끼리 같이 놀자” 라는 것인데, 그런 논리가 바로 오늘 여기 나오는 이런 세상적인 논리에 의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제가 지금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왜냐하면, 부단한 훈련과 좋은 장비를 갖추고 다음에는 아무리 많은 비가 쏟아져도 사람을 치는 일을 방비할 수 있는 기회가 그 사람에게 무한히 주어지는 한, 그 사람은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철학인데, 즉 “그 사람이 지금은 나쁘지만, 회개할 기회를 주게 된다면 언젠가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계속해서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의 자유의지를 믿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과거에서 현재로, 또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 강의전체를 정리하면 !!

이제 진짜 마지막으로 오늘 강의전체를 정리하고 마치겠는데, 늦게 오신 분들도 있고 하니까 말이다. 이삭언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맞는가? 틀리는가? 틀리는데, 왜냐하면 이삭언약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즉 이삭언약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멀어진다는 것이다. 이삭언약 다음에 야곱과 에서가 갈라지는 야곱언약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천국에 가는데, 그러면 그 야곱언약으로 끝나는가? 그것이 아니라, 모세언약이 또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미래에서 잡아당기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점은, 이 이삭언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필히 여기서 무엇을 하는고 하니, 이삭언약에 준해서 지금보다 더욱 선해지고 착해지면 자기는 천국에 간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야곱언약 때에 다가와서 나타나는 죄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아는가? 모르는가? 모른다는 것이다. 즉 문자적으로 봐서, “나는 여기까지 살았으니, 여기까지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천국에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삭언약이 아니라 야곱언약까지 나아가서, “아하, 이삭의 판단이 잘못되었구나” 라고, 그렇게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야곱언약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야곱언약이 끝인가? 그게 아니라 마지막에는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다.

◈ 이미 모든 것이 십자가 언약으로 끝 !!

그러니 결국 십자가 앞에 설 때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은 저주를 받을 죄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때는 더 이상의 죄를 알려주는 죄는 없는데, 바로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즉 십자가로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지금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왜 인간의 행함을 주장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율법을 말하고, 인간의 행함을 말한다는 것은, 그것은 아직도 자기가 십자가 앞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긍정을 하고, 자기 자신의 행함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십자가 언약으로 끝이 났는데,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에 십자가 언약으로 재림을 하신다는 것이다. 즉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모든 족속이 통곡하리라” 라고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십자가가 마지막 언약인데, 박태선이고 문선명이고 재림 예수이고 간에, 그런 것은 아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계 1:7, 개역)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 십자가 앞에서 수준 있는 인간은 없어 !!

이제는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끝이 났는데,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그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역사라고 하는 울타리를 친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건드리는 놈들은 다 죽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오용익 목사가 겁도 없이 그런 교회를 건드리다가 험악한 꼴을 당했는데, 이웃에 있는 교회를 비판하다가 그 교회 교인들에게 걸려서 말이다(ㅋㅋ). 즉 “우리 교회를 왜 건드리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들이 아무리 십자가를 안다고 해도, 십자가를 빼고 나니 무엇이 남는가? 자기 교회역사가 남는다는 것이다. 즉 자기 울타리가 말이다.

그것이 바로 개혁주의이고, 성화론인데, 즉 “수준이 있는 우리끼리 모였으니 괜찮은 교회이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수준이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는데, 그래서 옳고 그름은 그 교회에 소속된 집사나 목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직 십자가를 지시고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만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결정에 따라주는 자들이 바로 어린양의 보좌를 섬기는 미래의 확정된 새로운 피조물이고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는 날마다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기준이 분명하게 있는 줄로 압니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그것마저도 죄임을 감사히 인정하는 우리의 모습들이 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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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풀이 ] - ‘음부(陰府, Hades)’에 대해서 !!

아까 파리 바케트를 이야기했지만, 일단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면, 사람이란 것은 그 사람 자체를 눕혀놓고 그 위에 예수님이 눕는다는 것이다. 인간을 눕혀놓은 것이 아담인데, 그 아담을 길게 잡아당겨 놓으면, 그러면 계속해서 아담이라는 말이다. 몇 대를 지나든 말이다. 그렇게 인류는 계속해서 아담인데,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께서 누워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에게서 두 가지 속성이 나오는데, 하나는 공의로운 속성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속성이라는 말이다. 공의는 사랑을 염두에 두었을 때 공의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사랑은 용서이고 자비라는 것이다. 주님은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다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긍휼도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 이러한 긍휼에서 빠진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두고 창세 전에 택했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택했다’ 라고 하는 것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를 다 택해버리면, 그것은 택함이 아니라는 말이다. 얼마 중에서 얼마를 뽑아내는 것을 택함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택한 백성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택함을 받기 않기 위해서 버림을 받아야 될 자들도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예수님의 사랑의 속성과 공의 속성이 빠져나가서 어디로 가는고 하니, 아담 위에 퍼부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4장에서 두 개의 언약이라고 하는데, 먼저 하나는 율법에 속한 언약이고, 또 다른 언약은 약속에 속한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약속에 속한 언약은 그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데, 즉 하늘에 있는 축복을 받은 계열이 따로 있고, 땅에 있는 저주받은 계열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셨는데, 물론 아브라함은 자기 새끼를 하나 얻었다고 여겼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자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의 계열이 따로 있고, 이삭의 계열이 따로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또한 에서 계열이 따로 있고 야곱의 계열이 따로 있고 말이다. 그렇게 둘을 갈라놓기 위해서 아브라함이란 인간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길게 누워있는 인간들에게 예수님도 누워서 내려오시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은 뭐라고 생각하는고 하니, 우리는 출생에서 사망까지가 전부라고 여기는데,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해인데, 즉 선악과를 따먹어서 생긴 결과라는 말이다. 인간은 출생 이전부터 해서, 죽고 난 다음에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 인간 개개인이 전부가 다 여기에 이렇게 길다랗게 소속이 되면서,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음부에서 어떻게 될 것인지, 거기에까지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의 속성이 스며든다는 것이다. 흔히들 “아이쿠, 내가 죽으면 그만이지” 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죽고 난 다음에도 쓰일 때가 있고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죽고 난 뒤에까지 연장을 시킬 때, 죽은 자들이 그렇게 모이는 그 음부가 무엇이 되는고 하니, 그냥 죽고 난 뒤의 음부가 아니라 말이다. 즉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혜택을 입었는지,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질(質)에 따라서, 음부에 내려가도 공의와 사랑을 입은 자들의 음부가 다르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인간들 세계인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통용된다는 말이다. 즉 ‘살아생전’과 ‘죽고 난 다음의 음부’ 라는 것을 합쳐서, 그것으로서 예수님의 공의의 속성과 사랑의 속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 이전까지는  살아생전과 죽고 난 다음의 음부는 인간들을 향해서 겨냥한 것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게 되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세계, 즉 악마의 세계인 영적인 세계가 그만 첨부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적인 세계가 첨부되면, 천사였던 악마도 역시 피조물인데, 그러면 피조물인 악마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그런 문제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여기에 지옥, 즉 무저갱인데 말이다. 악마가 가야될 지옥에도 언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반대방향인 천사들이 살아야 될 곳인 천국도 같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살아생전+음부” 라는 것으로 마감이 되던 것이, 십자가 이후에는 영적세계도 합류가 되면서 지옥과 천국에까지 이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음부가 무엇으로 갈라지겠는가? 지옥에 갈 자들과 천국에 갈 자들의 모임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지 나사로는 어디까지인고 하니, 그때는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이기에, 기존의“살아생전+음부” 라는 것까지만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한 편에 있던 강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가 간 낙원은 어디인고 하니, 음부 중에서 천국에 갈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인데, 그곳을 낙원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시고 모든 것을 다 끝장을 내게 되면, 천국에 가려고 모여있는 그 음부는 천국이 되어버리고, 즉 새 예루살렘으로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옥으로 갈 자들이 모여있는 것은 무엇이 내려오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불바다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면 천국은 무엇인가? 이 천국은 여기 그림의 뒷부분에(?) 있는 것을 천국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리고 이 음부에 있는 것까지도 합쳐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미래가 현재로 밀려왔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예수님의 사랑이 통치하게 되는 ‘예수 안’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천국에 들어온 것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 있으면 천국이니 말이다. 즉 성령을 받았으면 말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자들은 이미 천국에 들어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자기에게 소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 이 몸을 벗어버리면 새로운 몸을 입는다고 했고 말이다.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고후 5: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를 하면서, 음부에 적당한 몸이 따로 있고, 또 천국에 적당한 몸이 따로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던 그 몸은 음부에서의 적당한 몸이고, 천국에 가면 보석과 같이 빛난 몸으로 다시 바뀐다는 것이다.

이렇게 음부에서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이 구비된다고 하는 것이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사람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지려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만지지 말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아버지에게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은 부활은 했지만, 아직 아버지에게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하는 바로 그 경계선, 바로 그 차이성이 그대로 오늘날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몸이 천국에서는 영광스럽게 변화가 되지만, 음부에서는 음부에 맞는 우리의 몸이 또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제 설교시간에 했는데, 즉 살아있을 때 우리가 나불거리는 이 혀는 장의사가 나중에 처리를 하겠지만, 그런데 음부에서도 부자가 나사로를 보고 입을 놀렸다는 것이다. 나사로를 시켜서 자기에게 물을 좀 찍어달라고 말이다. 그러니 눈이 있어서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면 그때 보는 눈은 무슨 눈알인가? 이미 죽었는데 말이다.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몸인데, 하지만 그 몸이 그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그 몸 같으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같이 걸어가도 도저히 알아보지 못했는가? 그런데 나중에 식사를 하면서 예수님이 눈을 떠주게 해주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체와 제자들이 전에 알고 있던 영체가 또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체와 또 무엇이 다른고 하니,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그 몸과도 또 다르다는 것이다. 그때의 예수님 모습은, 그야말로 눈은 불꽃같고,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또한 음성은 맑은 물소리 같다는 말이다.

(계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 1: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계 1: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계 1: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물론 사도요한이 예수님을 아는데, 즉 부활했던 예수님도 만났고, 물론 그 이전의 예수님도 만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밧모섬에서 만난 예수님은 또 다른 전혀 예상 밖의 예수님인데, 그래서 그는 그 예수님 앞에서 그야말로 죽은 자도 엎드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고 믿는 것보다도, 항상 그 어디에서도 변하지 않는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통해서, “아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구나!” 라고 하는, 그런 분으로 다가오는 올 때,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신 모습이라는 것이다. 몸체가 어떠하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 질문 - ? ? ?

그 ‘장소’ 라고 하는, 즉 시간과 공간개념은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수직성’ 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것인데, 즉 우리가 평소에 ‘위, 아래’ 라고 하는 것을 아니까 수직이란 개념이 나오듯이, 우리의 몸을 어디에 굴리느냐는 것이다. 개미의 경우에 그런 수직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냥 일차원으로서 기어가면 되는데 말이다. 개미는 메뚜기처럼 펄쩍 뛸 일이 없으니, 높이라는 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앞뒤와 옆만 있으면 되지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삼차원적인 몸은, 이 땅에 우리가 살아있을 때 공간이 의미가 있는데, 그런데 지금 이 몸을 벗어버리면 그렇게 벗는 동시에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묵시적이란 말이다. 그러니 음부에서는 새로운 묵시적 공간이 있는데, 천국에 가면 또 다른 묵시적 공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천사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말이다(ㅋㅋ).

* 질문 - ? ? ?

바로 그것이 음부인데, 시간과 공간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노아의 홍수 때, 노아도 음부에 들어갔으니 그리스도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즉 노아도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잡아당겨서 음부에까지 가지고 갔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그 행세, 즉 그 변하지 않는 공간을 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음부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이단인데, 무슨 패자부활전도 아니고 말이다. 성경에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 질문 - 그들이 음부를 알기 때문에 연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것이 아니고, 음부는 이미 결정이 난 속성을 말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음부에서 기회를 한번 더 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인데, 왜냐하면 이 음부는 우리 인간들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이 침대라고 하면, 그야말로 그 위에 예수님이 덮어버리는데, 그러니 먹든지 마시든지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공의의 속성을 베풀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베풀어주신 분이 알아서 하는 것이지 우리 인간들이 선택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오직 주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 인간들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이 정신을 못 차려서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버리면 지옥에 가는 것이고, 아무리 거부를 해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덮쳐오게 되면 천국에 가야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가 현재를 장악하기 때문에 말이다.

다윗의 경우에도, 음부에 가보니 자기가 예수님의 종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물론 살아있을 때도 성신이 임해서 알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다윗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도 그러했고 말이다. 그러니 다윗은 자기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마치 파리 바케트처럼, 채소와 다져진 고기가 담긴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다윗이 증거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오늘날 성도가 할 일은 무엇인가? 성도가 바로 선지자인데, 즉 자기 것이 아닌 주님이 주신 것을 드러내는 말이다. 이것으로 끝 !!

* 질문 - 그러면 가인의 표시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시를 한 것은, “앞으로 이러한 인간들만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라는 것인데, 즉 가인처럼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을 무시한 자만이 이 가인의 어두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법칙이 된다는 것이다. 일종의 권리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어휴, 비가 징글징글 맞게 오네. 하지만 저 비도 주님의 사랑과 공의를 !!

                                       2010,9,11 오후 10시 45분에 마침. - 녹취 ‘구’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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