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517 피25강 방향성으로서의 거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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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517피p099방향성으로서의거룩

피25강 방향성으로서의 거룩 

[10 대구강의 7] - [피 25] - ‘방향성’으로서의 거룩
                                                                                
                                                          10,05,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십계명과 피의 만남 !!

오늘은 ‘성화론의 허구성’에 대해서 계속해서 살펴보겠는데, 먼저 교재 99페이지를 보자.

** 첫째, 인간의 행위가 추가로 바르게 실천되지 아니하면 결코 거룩이라는 것이 유지될 수 없음.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는 명령만 했을 뿐이고, 그 명령에 대해서 자기가 실천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만 구원이 되겠는가? 실천할 수 있는 사람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말씀만 주셨는데,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면 구원이 없고, 실천할 경우에만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옳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무엇을 주셨는가? 십계명을 주셨는데, 그러면 십계명만 주셨는가? 십계명이 모세율법의 전부였는가? 십계명을 오고 난 다음에 무엇이 따라왔는가? 이 땅에 피를 뿌릴 때, 그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위해서 임재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과 무엇의 만남인가? 십계명과 피의 만남인데, 그런 만남 가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축복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축복은 무엇과 대비가 되어야 하는가? 그 주위에 저주를 받는 백성들이 있을 때, 축복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교인들끼리 있으면 이렇게 화상을 입는 일도 생기고 하지만,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고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그들은 어디에 가는가? 결국에는 지옥에 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지옥에 가는 자들이 있어줘야, 즉 저주를 받는 인간들이 있어야만, 그것이 축복과 대비가 되면서 축복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 제사 제물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율법을 지키지 못한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을 바로 제사의 제물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제물을 그냥 살아있는 채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죽여서 피를 낸다는 말이다. 그것도 그냥 피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이전에 제물에 안수를 하도록 되어있는데, 물론 제사장이 말이다. 이런 하나 하나의 제도가 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 어느 하나라도 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중에서 단 하나라도 빼버리게 되면,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의 경로와 근거를 우리가 온전하게 받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 대충 말씀만 해주신다면, 우리가 잘 알아듣겠습니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는 하나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 아, 십자가만은 피하고 싶어 !!

흔히들 교회에서 뭐라고 하는가? 즉 “인간과 하나님이 있는데, 하나님이 인간에 말씀을 주셨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옳다고 하면, 그러면 그 가운데 십자가는 왜 있느냐는 말이다. 십자가도 없이 성경의 권면이나 명령을 듣고 올라간다고 하면, 그것을 무엇을 피하는 것인가? 그만 십자가를 피해서 간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고 하니, 자기 자신의 존재가치를, 즉 자기가 자기에게 가치가 있는 그 가치성에 대해서 하나님도 그대로 동의해주기 바란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제가 보기에 제가 참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 뜻에 동의만 해주세요. 다른 이야기는 하지 말고 말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성은아, 여기서 뭐하노?

예를 들어서, 나이트 클럽에서 젊은 학생들이 모여서 춤을 추는데, 거기서 누가 인기가 있는가? 물론 춤을 잘 추는 아이가 인기가 있는데, 하지만 그 나이트 클럽 바깥에 있는 부모는 자기 아이가 거기서 춤을 잘 추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학교에서 공부를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더욱이 ‘고3’ 이라고 하면 말이다. 그러니 춤을 잘 추고 인기가 있고, 여자 친구가 많다고 해서 칭찬을 받을 것이 아니라, 부모는 오히려 몽둥이를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트 클럽에서 춤을 추는 그 학생은, 자기의 존재 가치가 무엇인고 하니까, “아버지도 내가 춤을 잘 추는 것에 대해서 인정을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여기면서, 그러면서 자기 마음대로 밤새도록 춤을 마구 춘다는 것이다.

◈ 결국, 나의 존재가치 !!

그러니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빼버리면 남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자기의 존재가치인데, 그래서 다음과 같은 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여, 지금 내가 나에게는 소중하고, 인생을 가치 있게 살아갑니다. 그러니 아무 소리도 하지 말고,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는 그만큼이라도 하나님은 동의를 해주시고, 축복을 좀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만 빼버리면, 그 이외의 모든 것이 다 절이 되고 불교가 되는 것인데, 즉 예배가 아니고 공양이 되고, 헌금이 아닌 시주가 되고 말이다. 절에 시주를 할 때는 누구의 가치인가? 시주를 하면 누가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하는가? “부처님, 내가 돈을 내는 것을 봤지요? 이 정도면 제법 쓸 만하지요?” 라고, 그렇게 자기를 뽐내기 위해서 한다는 것이다.

◈ 복음의 비밀 !!

하지만 그것을 십자가로 가로막아버리면, 기도하고 헌금하는 그 모든 것이 다 무가치해지고,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은, 십자가에서 주신 주님의 자비와 용서가 그대로 우리 안에 남게 되는 것, 바로 그것만이 가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체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자비와 용서를 받는 그릇이 될 때, 즉 자기 안에 들어있는 복음의 보배로 인해서 말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복음의 보배보다 ‘복음의 비밀’ 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그건 아무도 모르니 말이다. 창세 전의 그 비밀을 우리가 우리 안에 담고 있으면 우리는 하늘나라의 비밀요원인데, 즉 하늘나라의 ‘007’ 이란 말이다. 우리나라의 국정원 소속의 요원들이, 자기들이 비밀요원이라고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는데, 그들은 음지에서 일한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햇빛이 그리워서 가끔 양지로 나와서 문제가 되는데(ㅋㅋ),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비밀이니까 보배스러운 것인데, 예를 들어서, 집에 보물이 있으면 아무런 곳에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겨두는데, 함부로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렇게 비밀이기 때문에 보배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보배라서 보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것은 아무에게도 안 가르쳐주지” 라고 해서, 하나님 속사정의 비밀스러운 것, 바로 그것이 십자가인데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깊은 속사정, 즉 이 보시기에 너무나 비밀스러워서 비밀인데, 바로 그것을 드러내니 우리에게 그것이 보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약에서는 ‘십자가’이고, 구약에서는 ‘제사법’ 이라는 말이다.

◈ 잠시, 2010 여름 수련회 - '제사법‘에 대해서 !!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는 이 제사법의 비밀에 대해서 강의를 하려고 하는데 말이다. 여기서 잠시 맛만 보면, 이 제사법이 기록되어있는 레위기는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첫째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 제사법이 방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즉 ‘방향성’ 이란 말이다.

제가 오늘 강의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방향’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거실에 두는 그런 방향제가 아니고 말이다(ㅋㅋ). 즉 동서남북, 도대체 어느 방향이냐는 말이다. 특히 목회자들이 이런 강의를 좀 들어주어야 하는데, 또한 제가 이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참 많이 하기도 했고 말이다.

목회자가 되어서, 자기가 목회를 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 그렇게 방향을 목회자 자신에게 두어버리면, 그러면 모든 성경말씀은 다 왜곡되고 만다는 것이다. “저는 목회를 하지 않아도 좋으니,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하면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하는데, 즉 방향성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이것을 공부해서 어디에 써먹을까? 어떻게 하면 나의 목회의 도움이 될까?” 라고 하면서 나가버리면, 그렇게 방향성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십자가의 복음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위로 향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라고 하면서, 말씀자체에 대해서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정말로 복음을 알고 그 방향성이 주님에게 가있다고 하면, 본인이 더 말씀의 더 깊은 것을 끄집어내어서 발표를 하면서, 즉 “나는 이렇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내놔야 할텐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 정도는 나도 다 안다” 라고 하면서 챙겨버린다는 것이다. 비밀창고가 따로 있는지 몰라도, 그렇게 챙긴다는 것이다. 즉 그것을 소유해서 써먹으려고 하는 것인데, 그러니 방향성이 틀렸다는 말이다.

◈ 이제 하늘만 쳐다봐 !!

어제 야외예배를 드리면서 제가 그런 말을 했는데, 사도행전 1장 11절에 보면 얼마나 간단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거기에 보면 무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까, 평소에 자기들과 함께 계시던 주님을, 그만 구름이 몰려와서는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하늘에 ‘뻥’ 하고 구멍이 뚫리고 말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마치 반상회를 하다가 그만 둔 사람들처럼, 그렇게 위만 쳐다보고 있다는 말이다. 하늘을 향해 말이다. 그렇게 위를 쳐다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를 쳐다볼 방향성이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즉 자기를 쳐다볼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위만 쳐다보고 있는데, 그때 두 명의 천사가 나타나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행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

스데반 집사의 경우에도, 그는 웃으면서 죽었는데, 물론 웃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행복하게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방향성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가 하늘을 보니,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두 분이 다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방향성이 하늘로 향하니, 짱돌이 나아오던 쇳덩어리가 날아오던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그런데 그 방향성을 자기에게로 향하니까, “나는 소중한 존재, 나는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 나는 귀한 존재, 그러니 이런 나의 가치를 누가 알아주지? 나는 그런 교회를 찾아갈 거야. 우리교회는 나를 너무 무시해서 안 되겠어. 맨 날 나보고 죄인이라고 하고 말이야. 나를 알아주는 곳으로 가고 싶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 찬양대가 너무나 좋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십자가가 없는 곳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절간인데, 그러니 우리가 방향을 제대로 잡아서, 즉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만 기다리면, 우리가 상처를 입을 일도 없다는 말이다. 방향을 자기에게 두니 상처를 입고 비틀 비틀거리는데, 위를 쳐다보고 있으니 상처를 입을 일이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멍청하게 위만 바라보고 있는데 말이다. (하수구에 빠지면? ㅋㅋ)

◈ 멍청하게 사세요 !!

어제 설교를 하고 나서 생각하니, “너무 오늘 설교가 너무 심했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제가 설교시간에 이상한 말을 하나 했는데, “멍청하게 사세요!” 라고 말이다. 혹시라도 기억이 납니까? 젊은 사람들은 화를 낼지 몰라도, 아마도 나이가 든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 싶은데 말이다. 그러니 멍청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실천한다고 하면서 정신을 놓고 멍청하게 차를 몰다가 과속을 해서, 멍청하게 그만 5만원을 내면 조금은 억울하겠지만(ㅋㅋ), 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그게 별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과속 단속에 걸리든지, 그렇지 않고 요리조리 잘 달리든지 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방향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 방향성과 성화론 !!

그러니 성화론의 해결점이 무엇인고 하니, “성화가 있다” 혹은 “성화가 없다” 라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추구하는 인생의 방향이 도대체 어느 쪽입니까?” 라는 것으로 성화론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노출시킬 수가 있다는 말이다. 즉 “어디에 관심을 두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면 목사들은 왜 성화론에 관심을 두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교인들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빼먹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즉 “구원을 받았다고 까불지 말고, 바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방향성 자체가 자기존재, 즉 자기 목회의 의미에다가 그 방향을 틀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성화론이 도입된다는 말이다. 즉 “여러분이 가난한 것은 성화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성화가 되면 반드시 잘살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모집하게 되면, 그 교회는 그야말로 십자가가 없는 자들만 모이게 되는데, 그런데 잘못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십자가가 없는 자들이 모이게 되면, 그들이 주동세력이 되어서, 목사의 설교나 교회의 모든 행정들이 십자가를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하게 십자가를 제거하는데 앞장서는 교회가 되고 말이다.

◈ 대속죄일을 중심으로 방향성을 !!

그래서 레위기를 보면 이 제사법이 어디로 방향을 틀게 되는고 하니,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즉 7월 10일 대속죄일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레위기를 보면, 레위기가 그냥 평면이 아니라 이렇게 산 형태가 되는데, 마치 시내산처럼 말이다. 물론 그 정점에는 대속죄일이 놓여있고 말이다.

그러니 제사법으로 시작해서 대속죄일로 올라가는데, 이 대속죄일의 거룩이 어디에 적용되는고 하니, 바로 ‘씨’와 ‘땅’의 거룩으로, 그렇게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씨’와 ‘땅’의 거룩으로 적용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말이 아닌데, 여기에 너무 많은 것이 함축이 되어있어서 조금은 풀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데 말이다.

◈ ‘씨’와 ‘땅’의 거룩으로 !!

쉽게 말해서, “땅이 가난해서 그 땅을 관리하지 못하겠거든 반드시 그 기업을 무를 자를, 즉 내 땅을 받아줄 사람을 찾되, 그것은 가까운 가족에게서 찾아야 한다” 라는 게 있다는 말이다. 쉽게 풀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려운데, 이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땅 자체에는 손대지 말라” 라는 것이다. 즉 땅 자체를 두고 자기 소유라고 우기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땅의 거룩에 위배가 된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 땅에서 거룩하지 않은 인간을 제거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레위기를 보면서 우리가 성화론을 공격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인간이 아닌 땅이 중요하다고 하시니 말이다.

우리가 이런 생각은 하지 않는데, 땅위에 집을 지으면서 누가 그 땅 자체에 의미를 두느냐는 것이다. 그 땅에 집을 지어서 사는 사람이 중요하지 말이다. 땅은 아무리 파도 흙밖에 나오지 않는데, 그러니 땅이 무엇이 중요하냐는 것이다. 그게 보통 우리들의 생각이란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 풍수지리도 당연히 땅이 아닌 사람 중심이라고 봐야 되겠지요?)

◈ 하나님 - 나는 땅의 거룩을 유지할거야 !!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그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비록 집주인을 제거하더라도 땅의 거룩만큼은 유지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바로 십자가가 개입되지 않으면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는 부분들이라는 말이다. 사실은 성경전체가 다 그러한데 말이다.

그런데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사람들은 이 레위기를 잘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나 지루하고 그야말로 짜증이 나서라도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전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니 말이다. 그것도 지금부터 너무나 까마득한 옛날 옛적의 이야기이고 말이다. 지금 이 시대와는 전혀 동떨어진 말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레위기를 현대의 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는데, 즉 그때 그 당시의 이야기를 짜증나서 듣지 않겠다고 하는 자들에게,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로 말이다. 그러니 설교자는 그렇게 바꾸어줄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물론 그 짜증이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씨’와 ‘땅’이 있는데, 여기에서 ‘씨’ 라고 하는 것은, 땅의 거룩함의 혜택을 입어서 나온 ‘씨’ 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씨’ 라는 것은 ‘씨앗’ 이라기보다는 ‘혈통’을 의미하는데 말이다. (서로 같은 의미가 아닌가요?)

◈ 망측한(?) 레위기 18장 !!

레위기 전체 이야기는 8월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몇 가지 중요한 것만 이야기하겠는데, 레위기 16장을 지나서 18장에 보면, 적용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아비와 어미와 성 관계를 하지 말고, 또 고모와 이모와도 하지 말고, 형제와도 하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는데, ‘19금’을 해야할 정도로 말이다.

뭔가 우리 인간이 감추고 감추고 감추어야 될 것들을, 이 사회에서 예비군 훈련을 받으면서도 할 수 없고, 심지어 술집에서도 하기 힘든, 물론 교회에서는 두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소위 ‘성경읽기’를 하는 교회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 너무나 감추고 싶은 이야기들 !!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들이 노출하기 싫어하는 근원적인 것들인데, 즉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 인간을 동물보다 더 못한 수준으로 보았을 때나 나올 법한 그런, 인간의 본능에 관한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이 레위기는 거침없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 레위기에 접근하기 싫어하니, 그런 내용이 있느냐고 도리어 반문을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나 분명하게 있다는 것이다. 같은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성 관계를 하지 말고, 심지어 짐승과 교합하지 말라고 한다는 말이다.

참으로 망측스러운 이야기인데, 그런데 그것이 이 거룩한 성경책에 모두 다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홀리 바이블’에 말이다. 아마도 사람에게 거룩한 책을 쓰라고 하면, 당연히 이러한 내용들은 다 빼지 싶은데, 왜냐하면 책의 품위를 위해서 도저히 넣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레 18:6)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 18:7)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너는 범치 말지니라
(레 18:8)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
(레 18:9)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비의 딸이나 네 어미의 딸이나 집에서나 타처에서 출생하였음을 물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레 18:10) 너는 손녀나 외손녀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너의 하체니라
(레 18:11) 네 계모가 네 아비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레 18:12) 너는 고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비의 골육지친이니라
(레 18:13) 너는 이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의 골육지친이니라
(레 18:14) 너는 네 아비 형제의 아내를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백숙모니라
(레 18:15) 너는 자부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들의 아내니 그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레 18:16) 너는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
(레 18:17)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치 말며 또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취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들은 그의 골육지친이니 이는 악행이니라

◈ 말씀이 지나가면, 시커먼 어둠이 깔려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비밀이 막을 그만 뚫고서 나오게 되면, 이 세상은 어둠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직 터지지 않고 있으니, 자기가 어둠이면서도 빛인 것처럼 우긴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고상하고 품위가 있는 나를 보고 누가 어둠이라 하는가? 나는 빛이야”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우기는 자들을 향해서 말씀이 지나가면서 터트리게 되면, 그 말씀이 가는 곳마다 그것들은 다 어둠이 되는데, 마치 맑은 물에다 검은 잉크를 타버리듯이 말이다. 물론 율법 자체는 더러운 것이 전혀 아니고 깨끗한데, 이것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이 오늘 정말 잘 오셨는데 말이다(ㅋㅋ).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은 깨끗한데, 그런데 그것을 이 세상이라는 물에 타게 되면 그만 시커멓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율법 자체가 시커멓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이 가게 되면, 율법이 가는 그곳마다 그만 시커먼 흙탕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인간들은, 깨끗함과 깨끗함의 만남으로 !!

그런데 인간들은 이 율법을 깨끗한 알약으로 만들어서, 깨끗함과 깨끗함의 만남으로 해석을 하고자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만 자기가 성화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즉 “주여, 저의 이 깨끗한 심령에다가 또 깨끗한 말씀까지 주셨군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왕 더러운데, 여기서 그런 예를 하나 더 들어보면, 목욕을 하고 난 깨끗한 몸에다가 새로 산 속옷을 입게 되면, 몸도 깨끗한데 속옷도 깨끗하니, 그러니 기분도 한결 깨끗해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바로 그런 식으로 성화론을 시작한다는 말이다. 즉 “주여, 이제 회개할 것은 어지간이(많이) 했습니다. 이번 부흥회 때 대수술을 해서 다 드러내었습니다” 라고 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제는 자기는 새로운 깨끗한 몸이 되었으니, 이제 새로운 깨끗한 말씀만 주시면, 그렇게 되면 깨끗한 몸에 실천력까지 더해지게 되게 되니, 그러면 자기는 얼마나 깨끗한 사람이 되겠느냐고 하면서, 그렇게 가운데 말씀을 대하게 된다는 말이다.

◈ 잠시,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

그러나 정말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말씀이 접근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소위 깨끗하게 되었다는 그 인간이 말씀을 접하면 그냥 시커멓게 되는데, 그것이 곧 로마서 7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이근호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말이다.

(롬 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왜 그렇게 시커멓게 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율법의 기능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언젠가 다음과 같은 강의를 한 적이 있었지 싶은데, ‘율법의 극상’ 이라고, 즉 율법이 최고조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쭈욱’ 올라가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적당한 표현이 당장 기억나지 않는데, 마치 게이지가 올라가듯이 율법의 수치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율법의 수치를 올리면 십자가가 되고 말이다. 

율법은 이렇게 죄에 대해서 죄가 되도록 드러나는데, 하지만 부자청년을 비롯한 바리새인들은 뭐라고 하는가? 어릴 때부터 율법을 지켰다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도바울도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자기를 뭐라고 했는가?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했다는 말이다.

◈ 산상설교의 등장은?

그런데 율법의 수치를 올려버리면 그것이 곧 십자가가 되면서, 즉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들은 다 죄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율법의 게이지를 극상으로 올리기 전, 즉 끝까지 가기 직전이 바로 산상설교인데, 즉 여자를 보고 마음속으로 엉큼한 생각을 하면 이미 그것이 간음죄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고 하니, 여기에 이렇게 나름대로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포진해있다는 것이다. 그런 바리새인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바리새인의 의(義)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리새인들 바로 위에 천국이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율법의 일점 일획까지 다 이루면 갈 수 있는 천국이고 말이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니 바리새인들은 인간들 중에서 여기에 근접해 있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근접한 인간들을 향해서 집중포화를 퍼부어 버리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산상설교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산상설교의 모든 내용은 바리새인들의 틀에 맞추었는데, 하지만 바리새인들도 전혀 지키지 못하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극단의 지점에 와있는데, 그런 최고의 선두에 서있는 바리새인들조차도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말씀을 듣고는 그만 나가떨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건 인간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니,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 원수를 사랑하라 !!

예를 들어서, “원수를 미워하고 동료를 사랑하라” 라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전부였는데, 하지만 예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 원수를 사랑하면 원수는 사라지니 말이다. 원수임을 유지한 채로 사랑을, 즉 원수임이 분명히 드러났는데도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을 해서 원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했을 거두어내기 위함인데, 즉 이쪽에서 가져오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원수를 사랑한다고 해서 원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되는데 말이다. 원수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 원수가 개과천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면 그 원수는 원수 값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에이, 이것이 어디서 까불어. 한 대 맞아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당한 것을 가지고 오는데, 즉 원수를 사랑했던 그 결과만 받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인간이 이 말씀을 지킬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 다 이루었다 !!

그런데 바로 그 원수 중의 원수가 누구인고 하니까, 원수된 자를 위해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서, 주께서 화목제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서, 원수 된 자가, 경건치 않은 자가, 죄인 된 우리가, 그 피로 말미암아 바리새인들도 들어가지 못한 천국의 문을 통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즉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에는 이 레위기가 모두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개인의 거룩이 합쳐져서, 전체의 거룩이 !!

민망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면, 한 가족 안에서, “아버지의 아내를 범하지 말고, 이모를 범하지 말고, 숙모를 범하지 말고”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개인의 거룩이 합쳐서 가족의 거룩이 되고, 가족의 거룩이 가문의 거룩이 되고, 가문의 거룩이 지파의 거룩이 되고, 이 지파의 거룩이 이스라엘 전체의 거룩이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을 점령할 때 누구 때문에 전쟁에서 지고 말았는가? ‘아간’ 이라는 인간이 사고를 쳤는데, 그런데 그 아간을 어떻게 찾아내는가? “아간, 이리 나와” 라고 하는가? 그게 아니고, “어느 지파 나와. 어느 가족 나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의 거룩이 될 경우에만,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전체가 말이다.

◈ 주님의 하이 킥 !!

이런 면에서 성경이 굉장히 어려운데, 자꾸만 기본적인 우리의 예상, 우리의 틀을 피해간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비밀이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그것을 자기의 논리박스로 둘러싸고 집어넣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는 “주여, 제가 이만큼 넣었으니 참 착하지요? 저 사람보다 더 훌륭하지요?” 라고 말이다. 남들보다 자기가 더 낫다고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꾸만 그 박스를 발로 차버리는데, 즉 우리 인간의 논리로서 성경말씀을 그렇게 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 주의 말씀을 담아서 넣는 것을 말이다. 즉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을 지향하는 것이지,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즉 너를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 박스로 포장하고 그릇에 담으려고 하는데, 즉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요” 라고, 그러면 주님은 또 발로 차버리는데,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너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 “제가 예수님을 믿는데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또 계속해서 발길로 차고 말이다.

◈ 대속죄일 - 이스라엘 전체가 용서함을 !!

아무튼 대속죄일, 즉 7월 10일에 전체 이스라엘을 위해서 속죄소의 동쪽과 앞쪽에다 피를 뿌리는데, 그것은 기존의 속죄와는 다른 것인데, 기존의 속죄제는 휘장에 피를 뿌리는데 비해서 말이다. 그렇게 대속죄일은 조금 다른데, 그것은 바로 제사의 모든 방향이 대속죄일에 규명이 되면서 내려오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 대속죄일에 용서함을 받은 자가 누구인고 하니, 이스라엘 전체가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내가 이스라엘에 속했기 때문에, 내가 용서함을 받았다”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 맞잖아요?” 라고 나오면 안 되고,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 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이스라엘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죽음, 도외시, 자녀 없음 !!

그러니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는 작업은, 이렇게 내려가는 가운데 ‘씨’와 ‘땅’을 이야기해서, 분류작업 및 제거작업에 들어가신다는 것이다. 이 제거작업에는 3가지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죽이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도외시하는 것인데, 즉 “이제 나가!” 라고 말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자녀가 없는 것인데, 즉 혈통을 끊어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죽음’, ‘도외시’, ‘자녀 없음’의 3가지의 방법으로 율법을 어긴 자들을 처단하는데, 즉 그렇게 해서 자신의 거룩을 유지하신다는 말이다. 즉 “십자가를 믿는 않은 인간들은 나가!” 라고 하시는데, 그 뒤에는 “에시 씨!” 라는 것을 붙여서 말이다.
 
◈ 성령께서 마음을 뒤집어 놓기에 !!

이것은 당회장이나 장로나 집사가 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성령께서 나가야 될 사람들의 마음을 그렇게 뒤집어 놓는다는 것이다. “아니, 목사님은 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우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가?” 라고 하면서 자기가 삐쳐서 나가버린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당회로 모여서 치리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는 것과도 같은데, 그런 짓을 하라고 교회에 남겨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인들에게 서로 복음만 전하게 되면, 그것이 듣기 싫어서 나가는 자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다.

◈ 왜 교회에 나오는가?

사람들이 왜 교회에 나오는가? 그것은 자기를 인정해달라는 것인데, 자기의 자존심을 말이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자기가 자기를 귀하게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기를 좀 알아달라는 것인데, 자기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말이다. 자기는 그런 이유로 해서 교회에 나왔고, 그런 재미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존재가 귀하다는 것을 날마다 확인하는 재미로 이 험한 인생을 버티고 있다는 말이다. 바로 거기에 동의를 해달라고 교회에 나왔고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봉사도 하고 하는데,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러니 이제는 오후예배를 마치고 나면 다 집에 가버리고, 청소할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 이제, 집으로 !!

그렇다면 교회에 구경하려고 왔는가? 그런 것은 전혀 섬김도 아닌데, 즉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말이다. 즉 방향성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만하면 나도 믿음이 좀 되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의 믿음을 확인하고 집으로 곧장 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씨’와 ‘땅’은 자기가 신학을 하고 성경을 배워서 챙겨 넣는 게 아닌데, 그것이 바로 방금 말한 목회자들의 잘못인데, 즉 방향성을 목회를 통해서 자기의 밥벌이를 하려고 하는 것으로 하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주님과의 비밀스러운 만남이 되지 않는데, 즉 거룩에서 이탈된다는 것이다.

◈ 인간의 혈통 자체가 시커먼스 !!

그렇다고 하면, 레위기 18장에 왜 그런 입에 담기도 민망스럽고 망측한 것들이 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혈통 자체에 무엇이 살아있는고 하니, 시커먼 죄가 그대로 살아있는데, 그런데 그게 보이지 않으니 잠재가 되어있는 것이지, 그런데 눈에 띄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게 자기의 본능이 되고, 본심이 된다는 말이다. 즉 본능도 반복하면 본심이라는 말이다.

지금 이야기하면서도 참 재미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물론 처음에 할 때는 미안한데, 자꾸 반복을 하다가 보면 “이게 내 본심인데 왜?” 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다니는 학생이 술을 마시면 처음에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즉 “주여, 잘못했습니다. 제가 마귀의 뀜에 빠졌습니다” 라고 하다가, 그런데 자꾸만 마시다보면, “주님이 주신 몸의 본능인데 어쩌란 말인가?” 라고 하면서 그만 정당화를 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은 죄를 더욱 더 죄가 되도록 드러나게 한다는 말이다. “제가 죄인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라고, 즉 그것이 자기의 본심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하, 이래서 나는 저주를 받는 것이 합당하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조치가 합당하고 하는, 거기에 대한 동의함이 나온다는 말이다. “주님, 참 잘하셨습니다. 저는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어디 이게 하나님 책임이지 내 책임입니까? 이미 선악과도 하나님이 만들어 놓았고, 그리고 내 몸도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엄마 아빠가 만들 때 나는 옆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내 몸에 대해서 나에게 책임을 지라고 합니까? 음욕을 품기를 좋아하는 성질과 몸을 물려받았으면, 당연히 그렇게 살아갈 뿐인데 말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방향성을 주님의 조치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만 방향성을 자기에게 두니 나타나는 현상이란 말이다. 즉 “나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물론 나는 고칠 수도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이고 말이다.
 
◈ 잘 가라. 지옥으로 !!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아니, 누가 뭐라고 해? 그래서 내가 지옥에 보내는 거야. 그런 너희들을 위해서 내가 지옥을 만들어놓았다. 니가 방금 말했지? 죄를 지었다고, 그러니 지옥에 가는 것이 맞잖아. 잘 가라. 지옥으로!”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그러면 저들을 왜 지옥에 가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건 내 마음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화론에 있어서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조치를 순수하게 십자가의 조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개시키는데, 즉 성경해석을 자기 중심으로 바꾸어서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가 없는 성경해석이 되고 마는데, 즉 “나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기도 큰 소리를 칠만한 요소를 만들어놓고, 그런 식으로 성경해석을 한다는 말이다.

◈ 사도바울 - 나는 율법에 흠이 없다 ??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그런 짓을 했는데, 즉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옷을 그 증인들의 옷을 맡고 했는데, 바로 그런 육으로 예수님을 알 때의 심정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잘난 척을 했는지 모르는데, 그러면서 자기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기는 분명히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일조를 했는데, 그런데도 율법에 흠이 없다고 하면, 도대체 그 율법을 어떻게 해석했느냐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는, 그런 율법의 해석 어떻게 나올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중심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중심으로 해서 해석을 하다보니, 그렇게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화론인데, 바로 방향성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 총 맞은 것처럼, 뻥 뚫린 내 가슴 ♬ !!

그런데 이런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가?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그야말로 백지영의 노래처럼, 총 맞은 것처럼 구멍이 뻥하고 뚫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도바울의 가슴에는 구멍이 뚫렸는데, 그 구멍을 결코 자기의 자존심으로 메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구멍을 땜질을 하면 안 되고 그대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구멍이 있어야 비밀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 구멍을 자기의 자존심이나 자기 신학으로 메우려고 하면 안 되는데, 그냥 ‘뻥’하고 구멍이 뚫린 채로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구멍을 또 이렇게 조그마하게 뚫지를 말고, 그야말로 바람이 마음대로 통과하도록 뻥하고 뚫어놓으라는 것이다. 그런 구멍이 얼마나 제대로 뚫렸으면 멍청하게 살겠느냐는 말이다.

◈ 통과, 통과, 통과 !!

이런 것은 그림으로 그려야 하는데, 즉 사람이 이렇게 있는데, 여기에 뚫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주 크게 말이다. 그러니 바람이 마구 그냥 통과하는데, 욕한 것도 통과하고, 또한 벌금을 낸 것도 그냥 통과하고 말이다. 자식이 반에서 30명 가운데 29등을 한 것도 통과하고, 그냥 무엇이든지 다 통과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을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학을 가지고 이 구멍을 메우려고 하는데, 즉 칼빈주의를 가지고 막고, 개혁주의를 가지고 막고, 또 성화론을 가지고 막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방향성이 그만 자기에게로 향하게 되어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목사가 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즉 “나도 십자가를 안다. 나도 복음을 안다” 라고 하면서, 그만 이 구멍을 다 틀어막아 버렸다는 것이다.

◈ 무서워서 목회를 할 수 없어 ??

오늘 아침에 글을 하나 써서 십자가 마을과 우리교회 사이트에다 올려놓았는데, 내용인즉 “무서워서 목회를 할 수 없다” 라는 것인데 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꼭 먼저 “내 존재부터 인정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니 복음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위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너와 나, 이렇게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하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아직 구멍이 뚫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 어느 간증맨의 비애 !!

제가 왜 그런 글을 올렸는고 하니, 어제 우리교회에 대전에서 오신 분이 계셨는데, 제가 그분이 다니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모두 다 잘라버리고 말이다. 그것도 만 명이나 모이는 교회에서 말이다.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복음을 몰랐을 때는 기존의 그 교회를 위해서 여러 교회에 다니면서 간증을 했다는 것이다. 즉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업도 이렇게 잘 되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는 그 교회의 간증맨이 되어서 간증을 했는데, 마치 선거운동을 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주님의 선거운동을 했는데, 그것도 여러 교회에 순회를 하면서, “여러분, 나처럼 하면 여러분도 복을 받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 교회에서 그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그 사람으로 인해서 자꾸만 교인들이 늘어나니 말이다. 즉 “아하, 저 교회에 가면 저 사람처럼 복을 받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러던 사람이 그만 가슴에 뻥하고 구멍이 뚫리고 나니, 즉 그렇게 위대했던 자기 자존심의 자리가 그만 복음의 폭탄으로 인해서 구멍이 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제는 그 구멍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증거되고 복음이 증거되니, 목사가 종용히 불러서 다 잘라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개인적으로 가슴이 아프겠느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목사는 결국 무엇을 하는 목사인가? 방향을 자기에게로 잡아서, 그런 사람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교회를 키우는데 이용해먹은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사유화된 자기 제국을 키우는 데만 매진했다는 말이다.

◈ 다시 ‘씨’와 ‘땅’에 대해서 !!

다시 이렇게 다시 산을 그려보면, 여기서 ‘씨’와 ‘땅’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여기에서 조금만 더 깊이 나가보자는 것이다. 이 땅에 주께서 임재를 하시는데, 그러니까 이 땅이 보통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온전한 거룩이 아니면 임재를 하지 않는데, 그러니 임재를 했다고 한다면 완벽한 거룩만이 허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완벽한 거룩이 되기 위해서 분류작업을 하시는데, 즉 어줍잖은 거룩은 다 나가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땅이니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임재하는 땅에서 생명이 나오고, 생명력이 나오는데, 그러한 생명에 의해서 새롭게 새롭게 조성되는 혈육을 두고서 ‘씨’ 라고 하는데, 그것을 바로 ‘아브라함의 씨’, 즉 ‘언약의 씨’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들을 두고 곧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네 글자로 ‘이스라엘’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

그러니 결국 레위기가 말하는 것은, 기존 인간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그러한 이스라엘은 제거를 해버리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답다는 것이다. 이것이 출애굽기 4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즉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라고 말이다.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 ‘땅’을 미리 그 밑바닥에 !!

하나님께서는 아들다운 이스라엘을 손수 빚어내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는가? 그 밑바닥에 ‘땅’ 이라는 것을 미리 깔아놓았다는 것이다. 흙을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언약대로 거룩하지 않으면 흙에서 그만 저주가 나와서 죽이고, 쫓아내고, 자녀가 없게 만들어서, 그렇게 박살을 내버린다는 것이다. 그 땅에서 저주가 나와서 말이다.

바로 이러한 저주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아까는 가족 내의 성 관계만 이야기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몰렉에게 희생제사를 드린다든지, 부모를 저주한다든지, 혹은 무당을 찾아가서 점을 치는 것도 모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 왜 개인적 성화는 용납되지 않는가?

이러한 관계를 다시 살펴보면, 이것이 조금 어려운데 말이다. 여기에서 개인적인 성화는 전혀 용납이 되지 않는데, 개인성화는 가족성화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것을 개인에서, 즉 제일 밑바닥인 하위계층에서 올라가는데, 그 개인은 한 명인가? 두 명인가? 수많은 개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을 점령할 때 아간 한 사람이 잘못해서 몽땅 다 무너졌는데,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러니 각 개인의 거룩은 가족의 거룩을 위해서 이바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만 편한 대로 살자!” 라는 것이 말이 안 되는데, 그러면 가족의 거룩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가족의 거룩이 성사되지 않으면, 개인이 잘못해도 이스라엘 전체가 그만 탈락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체가 다 말이다.

◈ 사사기의 베냐민 지파의 몰락은?

사사기 마지막에 보면 지파 하나가 무너지는데, 그게 무슨 지파인고 하니, 베나민 지파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사기를 해석함에 있어서 이 베냐민 지파를 무너지게 한 원인이 어디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 베냐민 지파 전체가 다 하나님을 믿지 말자고 했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냐민 지파 중에서도 기브아 성읍에 사는 소위 노는 놈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거리에 침을 뱉으면서 깔랑 거리며 노는 놈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놈들이 우연히, 자기 동네가 아닌 다른 동네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게 레위인의 첩인데 말이다. “어이, 그림이 참 좋네” 라고 해서, 밤새도록 가지고 놀다가 그만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삿 19: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삿 19:26) 동틀 때에 여인이 그 주인의 우거한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누웠더라

그런데 사람들이 보통 이 본문말씀을 보고는, “아, 나는 저렇게 나쁜 짓을 하지 말아야지. 저렇게 하면 안 되지. 아무렴 안 되고 말고”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것은 그런 개인적인 성화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냐민 지파의 일부 노는 놈들이 잘못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해서 지파 하나가 왕창 다 무너졌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여기에 대해서, “지파가 하나가 무너졌지, 그래도 이스라엘은 끄덕 없잖아”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파가 다 제대로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파 하나가 무너지니 이스라엘 전체가 그만 와장창 허물어질 판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나중에는 수습이 안 되는데,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처녀보쌈을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자기들에게 여자를 주지 않기로 맹세를 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포도밭에 몰래 숨어 있다가 실로의 딸들이 놀러 나왔을 때, 그만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보쌈을 해온다는 것이다.

이왕 어려운 것 조금 더 어렵게 해보면, 개인이 무너지면 가족이 무너지고, 가족이 무너지면 가문이 무너지고, 가문이 무너지면 지파가 무너지고, 지파가 무너지면 이스라엘이 무너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요한계시록 1장과 2장과 3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교회에서 강의할 것인데, 미리 당겨서 해보자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보여주는 것은?

거기에 보면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이 일곱 교회를 주고 사람들이 뭐라고 해석하는고 하니까, “우리교회는 일곱 교회처럼 악한 짓을 하지 말고 좋은 일만 합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정반대로 해석하는 것인데, 왜 그런고 하니까, 이 일곱 교회의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소멸에 있다는 것이다. 즉 일곱 교회는 소멸이 되어야 하나의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이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거기에 보면 이 일곱 교회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일곱 촛대를 가진 성전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는 것이다. 이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을 뭐라고 하는가? 성전 안에서 거니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구약대로 말하면 여호와의 임재라는 것이다. 

(계 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멜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계 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계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
(계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은 완벽하게 거룩해야 !!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무런 곳에나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임재할 만한 곳에만 하시는데, 즉 완벽하게 거룩한 곳에 말이다. 그러니 거룩한 성전 안에 임재하신다는 것은, 즉 예수님이 거할 정도가 된다면 그 성전은 온전한, 즉 이미 완성된 성전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당연히 그 성전에 있는 기구도 온전한 기구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기구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일곱 금 촛대’ 라는 것인데, 그 일곱 금 촛대가 어떻게 생겼는고 하니, 촛대가 일곱 개가 아니라, 일곱 개의 초를 곱게 되어있지만, 결국은 밑에서 하나로 모이는, 즉 하나의 촛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금 촛대를 주님이 오른손에 쥐고 있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오른손은, 창조의 완벽함이 !!

그런데 왼손이 아닌 오른손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오른손에서는 완성품만 나오는데, 즉 완성을 시키는 힘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오른손, 혹은 오른쪽으로 나올 때는 완성을, 즉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하는, 즉 모든 창조의 완성이 이 오른쪽 계통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여호와의 오른손으로 애굽을 쳐버린다는 것이다.

◈ 출애굽 - 애굽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야 !!

서울에서 출애굽을 강의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오는데, 그것을 보통 ‘출애굽’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애굽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애굽 땅만 벗어나면 애굽에서 벗어난 것인가? 하나님께서 왜 홍해를 만들어놓았는고 하니까, 애굽 땅만 벗어난다고 해서 애굽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애굽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야, 그래야 애굽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홍해까지 누가 따라왔는가? 애굽군대가 뒤따라왔는데, 그런데 이 홍해에서 비로소 이 애굽의 권세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들이 완전히 바다에 수장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애굽의 권세가 사라지면 누구의 권세에 예속이 되는가? 애굽군대를 쳤던 그 권세에 속해야만,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스라엘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애굽군대를 두려워하고, 새로 주어진 하나님의 권세, 언약의 권세, 거룩의 권세에 속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분류작업과 제거작업에 들어가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광야 40년의 생활이고 말이다. 즉 죄와 율법과 마귀로부터 벗어나는 권세가 주어져야 진정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스라엘의 방향성은 여전히 !!

아무튼 그렇게 일이 진행되는데,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방향성이 여전히 자기에게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애굽에 있을 때도 역시 그들은 전부 자기 중심이었는데, 물론 애굽인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바로 그것이 여기 가족력에 보면 모두 다 나온다는 것이다.

첫 번째(?) 출애굽 때 이스라엘의 장자는 살았지만, 각 가정의 애굽 장자는 모두가 죽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애굽왕궁의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의 집구석에 있는 맏아들도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국가’ 라는 상위 이미지를 ‘가족’ 이라는 이미지로 낮추어서 분해를 시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너거들이 아무리 국가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너거 가족이 더 좋고 너거 아들이 더 좋지? 너거들이 아무리 대한민국이 어떻고 하지만, 그보다는 자식새끼가 더 좋지?”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분류작업은, ‘개인’부터 !!

사람의 기본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바로 이런 혈통 중심인데, 이 혈통이 무엇인가? 곧 자기 가족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새끼는 아프지 않고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혈통이 인간의 기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류작업은, 언제나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점점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어린양은 국가보다도 더 위에 있는데, 즉 하늘나라에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애굽나라도 그 밑에 있는 하위개념에 속한다는 것이다. 국가보다 더 위에 있는 하늘나라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어떻게 계획을 하셨는고 하니, 어린양의 피로서 구원하겠다는 것이 창세 전에 이미 세워져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계획이 때가 되어서 애굽나라에 덮쳤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는지, 그 원칙이 여기에 임재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 임재는 무엇인고 하니, 심지어 애굽인이라고 해도 어린양의 피만 있으면 용서함을 받는다는 말이다. 구원을 말이다.

그러니 애굽이고 이스라엘고, 혈통이고 나발이고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생명이 되는 원리원칙이 새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국가별이 아니고, 즉 “바로 왕이여, 우리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묻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은 살가운 자기 가족의 문제는 자기가 해결하지, 그것을 대통령에게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 나는 대한민국이 싫어 !!

이것은 하나의 예인데, 과거에 전라도인가 충청도에서 아이들이 수련회를 갔다가 컨테이너에서 그만 자다가 불이 나서 죽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죽은 아이들의 부모 중에서 핸드볼 국가대표 선수가 있었는데, 훈장까지 받은 유명한 선수였는데, 그런데 그만 거기에 충격을 받아서 훈장도 반납하고 이민을 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나라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국가를 이용할 뿐이지, 결코 국가에 충성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장 살갑고 가장 와닿는 것은 결국은 자기 새끼밖에 없다는 말이다. 자기 가족밖에 말이다. 바로 왕의 궁정에 있는 바로 왕의 맏이도 죽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국가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밑바닥에 있는 혈통 수준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 장자는, 가족이 아닌 하나님의 소유로서 !!

바로 그럴 때, 자기 가족 중에서 장자가 살았다고 하면, 그 장자가 누구의 소유가 되겠는가? 이제는 그 장자는 가족의 소유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시 살아났으니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가족으로부터 장자를 빼앗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빼앗김을 당해야만, 그 장자와 장자, 즉 새로운 씨의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무엇이 담겨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서 생명을 얻었다” 라고 하는 그 정보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아까 말한 그 비밀이, 즉 보물이 장자 중심으로 계속 이어지면서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맏아들을 바치기 전에, 먼저 맏아들을 데리고 가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맏아들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가? 그것이 원래 인간의 본성인데, 즉 살가운 자기 새끼를 좋아하는 것이 말이다. 인간은 그렇게 육적인데, 즉 가족중심이라는 것이다. 둘째, 셋째는 자식도 아닌데, 항상 맏이 중심으로 간다는 말이다. 즉 맏이가 혈통을 이어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각 집안마다 큰아들은 큰아들대로 티를 내는데, 즉 장자의 티를 말이다. 그래서 부모가 아프면 그래도 장남이 달려오지, 둘째는 관심도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 지금은 좀 괜찮습니까?” 라고 하면서 장남이 티를 내면서 달려온다는 것이다.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맏이는 맏이 값을 한다는 말이다. 둘째, 셋째는 그것이 보기 싫어서 인상을 쓰고 말이다.

◈ 죽임 당한 어린양 !!

아무튼 여기 이 밑바닥에 있는 수준에서 올라가면서 최종적으로는, 참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어떤 법칙으로 연결을 시키는데, 그러면 이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촛대를 쥐고 오시는 분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놀랍게도 ‘어린양’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어린양이 아니고 그 앞에 뭐가 하나 붙어있는데, 즉 ‘죽임 당한 어린양’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찬송가에도 그런 가사가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어린양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흠이 없는데,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요한계시록 1장 17절에서는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계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다시 오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전설의 고향의 그 유명한 ‘덕대골 전설’에 나오는, “내 다리, 내놔라” 라는 식이란 말이다. 즉 “니가 바로 나를 죽였잖아” 라는 것이다.

◈ ‘하나’로 모으는 하나님의 분류작업 !!

바로 그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제일 위층에 놓이게 되는데, 그러면 여기서 마치 유월절의 법칙처럼,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도 누가 쥐고 있는고 하니,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쥐고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밑에 있는 일곱 교회가 각자 흩어져 있더라도 그것들은 어디로 모여져야 하겠는가? 

마치 일곱 촛대가 하나로 모이듯이, 그렇게 일곱 교회는 하나의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원칙에 해당이 되는 사람들만 말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분류작업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분류작업을 하시기 때문에, 각각의 교회는 자기들의 생존과 유지를 위한 모든 법칙은 당연히 철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하면 우리교회가 산다” 라고 하는, 즉 자기 교회가 산다고 하는 것은 점차 옅어져야 하고 희석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 교회는 다 부셔지고 오직 죽임을 당한 어린양만을 쳐다볼 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즉 하나밖에 없는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일곱 교회에는 오고 오는 모든 교회가 다 해당되는데, 그러니 모든 교회는 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요한계시록의 해석이란 말이다. 

◈ 기쁜 소식 - 모든 교회는 망한다 !!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모든 교회가 다 망할 때, 즉 커튼을 찢어질 때, 커튼 안에 계시는 분이 비로소 드러나는데, 그것을 ‘계시’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요한이 본 계시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일종의 실루엣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마치 무대 위의 그림자처럼 항상 상대방에게 준 계시는 아른 아른거리는데, 즉 커튼 뒤에서 폼만 잡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말인가?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만 그 커튼을 찢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분은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심판주로 오시기 때문에, 그때는 왕이든 종이든 간에 누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피할 자가 있느냐고 하면서, 산으로 굴로 그냥 다 피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마치 벌이 자기 집에 꼭꼭 숨어도 그 위로 탱크가 지나가면 그만 박살나듯이 말이다. 벌집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도저히 탱크를 견딜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내용이 성경에 있는지 찾아보겠는데, 약간 신화적인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ㅋㅋ). 여기서 요한계시록 6장 15절에서 17절 말씀을 한번 살펴보자.

(계 6: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계 6: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계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 교회는, 어린양의 진노하심을 미리 !!

그러니 교회는 숨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되고, 어린양의 진노하심과 바로 통해서, 그것을 미리 맛보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만 쳐다보고 “아이쿠, 내 몸을 어디에 숨기지?”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그 방향성에서, 어린양의 진노를 미리 맛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당연히 그 안에서 죽은 자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 어린양의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진노의 날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여기 17절에 보면, “누가 능히 서리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스데반 집사는 놀랍게도 능히 섰다는 것이다.
 
◈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

여기서 ‘부활’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겠는데, 그 의미를 뒤바꾸어서(?) 말이다. 지금 제가 질문을 던지면 답변을 해주면 좋겠는데, 물론 어렵겠지만 말이다. 부활은 우리가 알다시피, 죽음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세계로 가는 것이 곧 부활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 밑의 세계에서는 무엇이 성립이 되겠는가? 거기서는 죽음이 성립되어야 위의 세계에서 생명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요?

◈ 하늘나라와 이 세상을 바꿔보면 !!

그렇다면 지금 이것을 한번 바꾸어보자는 것이다. 즉 하늘나라를 ‘A’ 라고 하고, 이 세상을 ‘B’ 라고 한다면, 바꾸어서 이제는 ‘B’가 위로 올라가고 부활의 세계인 ‘A’가 밑에 있다고 하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즉 기존의 ‘B’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그런데 이것이 그만 위로 올라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죽었던 세계에서 예수님은 여기에서는 그만 산 자가 된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 말장난을 하는 것이 아닌데, 지금 ‘B’가 땅이고 ‘A’가 하늘나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땅의 사람들은 무슨 짓을 했는가? 지금 자기들은 살아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까부니 그만 십자가에 매달아서 그만 죽여버렸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즉 살아있는 자를 죽였으니 죽은 자가 되었고, 그리고 예수님은 죽은 데서 부활하셔서 ‘A’의 세계인 생명의 세계로 가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위치를 서로 한번 바꾸어 보자는 말이다. ‘A’와 ‘B’의 위치를 서로 말이다. 

◈ ‘산 자’에서 ‘산 자’로 !!

그러면 예수님께서 ‘A’에서 ‘B’로 가셨는데, 즉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래에서 살아있기에 위에서 죽은 자가 되는데, 그래서 여기 위에서는 죽은 자가 산 자가 되게 했다는 말이다. 물론 밑에서는 살아있는 예수님을 죽은 자가 되게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 위에서는 예수님은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인데,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자기들처럼 죽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바꾸어보면, 예수님은 위에서도 계속해서 산 자라는 말이다. 즉 위에서 산 자였는데, 그러니 아래에도 역시 산 자로 왔다는 것이다. 산 자에서 산 자로 말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처음부터 산 자가 되어버리면,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예수님이 아기 예수 때부터 이미 산 자였다고 하면, 처음부터 여기 인간들은 아기 예수를 핍박했기에, 이들은 모두가 다 죽은 자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바뀐 안목을 성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 성도 - 산 자로 살게 하소서 !!

그러니 “아무렴 죽어도 살겠지!” 라고 하지 말고, “처음부터 살아있는 자의 행세를 하게 하옵소서!”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을 하고 보니 표현이 조금 이상하기는 한데 말이다. 아무튼 성도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마치 산 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하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다. 이런 새로운 안목의 세계에서 보면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아, 나는 어떻게 하면 죽지? 이 더러운 세상에서 살기 싫어!”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산 자로서 죽은 자를 만나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전혀 부럽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산 자가 죽은 자를 왜 부러워하느냐는 말이다. 이미 산 자가 말이다.

◈ 성도는 죽은 자의 세계에 파견근무를 !!

이것을 이렇게 이어보면, 성도는 창세 전부터 이미 ‘산 자’ 라는 말이다. 그렇게 산 자로서 죽은 자의 세계에 파견근무를 나왔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파견근무가 끝나면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가고 말이다. 그렇게 해야 예수님의 경로와 동일한 경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이 바로 주님이 부활한 이후의 뒤바뀐 인식인데,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즉 “나는 죽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산 자였다” 라는 것이다. 즉 이제 자기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는 말이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 일곱 교회를 통해서 이 땅의 생리를 !!

그러니 ‘하나’의 교회는 여기 예수님의 오른편인 ‘A’ 지점에 있다고 하면, 그러나 일곱 교회는 그 반대편인 ‘B’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곱 교회를 보고 “너희들이 살았다고 하나 사실은 죽은 자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일곱 교회는 땅에서 만들어내었기에, 바로 그 일곱 교회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무엇을 하시는가? 이 땅의 생리가 어떠하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 땅의 생리를 말이다.

(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그래서 일곱 교회가 이 땅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되는데, 그렇게 나타나서 그 일곱 교회가 어떻게 소멸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줌으로 말미암아서, 가리웠던 계시가, 즉 마치 커튼이 열어제쳐지는 것처럼 해서, 그 안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튀어나오는데, 그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손에 보니까 일곱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완성된, 흠도 티도 없는 교회가 말이다.

◈ 부활의 영이 오게 되면 !!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의 영이 오게 되면, 그런데 참 십자가의 영이 성령이라고 하니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성령을 꺼내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말을 바꾸어 부활의 영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그것은 인정하는데, 하지만 그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십자가가 없는데 무슨 부활이 있느냐는 말이다. 즉 죽지도 않았는데 산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의 영이나 부활의 영이나 모두 다 같은 말인데, 모두 예수님의 영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 부활의 영이 오게 되면, 이렇게 뒤바뀐 인식을 우리에게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거지로 살든지 아니면 부자로 살든지 간에, 어떠한 모습으로 살든 간에 이미 산 자가 된다는 말이다.

◈ 목 베임을 받은 자 !!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진짜 살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목 베임을 당해야 하는데, 그것이 20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그렇게 목 베임을 당하면 진짜 산 사람의 티를 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얼마나 죽음이 지배를 했으면 산 자의 목을 베겠느냐는 말이다. 그런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구조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 다시 정리해보면 !!

다시 정리를 해보면, 이 레위기에서는 ‘씨’와 ‘땅’인데,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기대한 씨와 땅이 아니라, 주께서 사로잡힌 바가 되어서 새로 만들어낸 씨와 땅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왜 땅이 중요한가? 바로 그것은 그 땅에 여호와께서 임재하기 때문에 그러한데, 즉 천국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더러운 놈은 다나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당연하게 나가야 되는데, 우리의 본성대로 하면 말이다. 그런데 주께서 은혜를 주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만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물론 처음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것이 모이니 가족이 되고, 가문이 되고, 지파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국가가 되고 말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12지파가 나오고 144,000명이 나오는데, 즉 제일 밑바닥인 개인적인 것으로 시작해서 144,000명의 경로로 올라가는데, 여기에서 어린양에 속한 새로운 수많은 이스라엘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친다는 것이다. 즉 어린양의 피로서 용서함을 받은 자들이 하나의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한다는 말이다.

◈ 그래도 나는 성화론을 주장한다 ??

이제 교재 99페이지를 살펴보겠는데, 우리가 이렇게 공부를 하고 난 다음에 성화론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공부한 이런 내용을 모르고서 성화론에 접근하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17세기에 ‘존 오웬 (John Owen)’ 이라는 청교도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크롬웰과도 아주 친한 사이였는데, 나중에는 배신을 때려서 도망을 갔지만 말이다. 이 사람은 청교도들 중에서 최고의 ‘성화주의자’ 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양반의 성화론이 오늘날 개신교의 모델케이스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이 이런 사람들의 편에 서 있는데, 그래서 이 ‘피’ 라는 책을 보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래도 나는 성화론을 주장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그 방향성이 자기에게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 방향성이 말이다.

이제 교재 99페이지를 살펴보자.

** 둘째, 인간의 행함에 의한 성화가 성사되는 과정이 빠지면 구원에 이를 수 없음. 셋째, 성화과정에 있어서 안간이 주도적으로 행사해야만 함. 만약에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나서면 이것은 인간성화가 성령성화가 되기 때문에, 애초부터 성화를 인간에게 부탁할 사항이 아니라, 성령님에게 부탁할 사항으로 전이되고, 따라서 철저하게 성화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나 능력이 주도권을 쥐고 진행되는 과정이어야지 성령님이 주도권을 쥘 수 없다는 것이다.

** 설사 성령님과 인간이 서로 교제하면서 협력을 한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성령님은 그냥 외부에서 안타깝게 요청하고, 하소연하고, 사정하고, 부탁할 위치에 있기만 하지, 직접 관여해서 대신해서 행동해주는 입장은 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이라는 주체자는 인간이라는 주체자의 그 주체 영역까지는 침범하지 못하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 성화론은, 인간들만의 아주 적절한 복음 !!

성령님이 우리 인간을 대신해서 행동해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성령님이 훌륭하다고 하지 인간이 훌륭하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님은 그냘 지켜봐 주고, 조언해주고, 또 우리가 질문을 하면 그 핵심만 지적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자는 역시 인간이라는 말인데, 심지어 하나님도 그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화론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결국에 누가 주(主)가 되는가? 인간이 주가 되고 마는데, 그러니 이 성화론은 인간들이 너무나도 듣고 싶어하던, 그야말로 그들만의 아주 적절한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선악을 아는 인간에게 생명나무는 없어 !!

하지만 이 성화론이 기본적으로 어디서 문제가 되는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아는 일에 있어서 우리와 함께 되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게 하겠다” 라고 하시는데, 왜냐하면 만약에 인간이 선과 악을 알고 있는데 이 생명나무를 따먹게 되면, 그만 영원한 저주가 임해버린다는 것이다. 선악을 모를 때는 그냥 나무열매인데 말이다.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그러면 여기서 어려운 것을 하나 해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분명한데,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인류가 다 부활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죄인들도 말이다. 그게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즉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다 부활을 한다는 것이다.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저주스러운 운명체로 끝까지 !!

그러니 이제는 아무도 죽지 않는데, 차리리 죽는 게 나은데 말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처럼 차라리 없어지면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밟아도 밟아도 죽지 않는데, 그러니 그만 미친다는 것이다. 즉 생명나무가 관여함으로서, 이제는 저주스러운 운명체로 지옥이 계속 끝까지 이어진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 배경이 다음과 같이 되는데, 즉 이 지상에서는 비록 목숨이 끊어져도, 생명나무가 지상을 떠남으로 말미암아서, 그래서 이 지상이 아닌 더 넓은 영역에서 생명나무가 작용하다가 보니, 비록 이 지상에서는 인간들이 흙이 된다고 해도, 온 우주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야될 판국에 접어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기가 한번 만든 것은 없애지 않는다는 법칙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은 인간부활에 관한 것인데, 동물이나 식물은 아니고 말이다.

◈ 인간은, 이미 선악을 알고 있기에 !!

그러니 우리가 이런 저주스러운 영생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러면 먼저 왜 저주를 받는가? 선악을 아는데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선악을 몰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 율법은 선과 악에 관한 것인데, 그리고 이미 우리 인간은 선악을 알고 있고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에라이, 너에게 줄 것은 율법밖에 없다” 라고 하시는데, 왜냐하면 이미 인간은 선악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거들, 이것을 잘 알지? 에라이, 이것이나 실컷 무라. 이것을 먹고 지키는지 한번 보자”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 : 너거들, 이것을 잘 알지?
* 인간들 : 예, 압니다.
* 하나님 : 에라이, 이거나 실컷 무라.
* 인간들 : 감사합니다.
* 하나님 : 먹고 지키는지 한번 보자.
* 인간들 : 지키라고요?
* 하나님 : 그래, 선악을 안다면서?
* 인간들 : 예, 압니다.
* 하나님 : 그렇게 알면 당연히 지켜야지.
* 인간들 : ? ? ?
* 하나님 :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한번 보자.
* 인간들 : ? ? ?

하지만 막상 하나님께서 나타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여기에는 선이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인간이 행하는 선이 있고, 즉 인간이 행할 수 있다고 여기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인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행하심, 그것이 바로 선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두 가지 선 사이에서 그만 십자가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 가인과 아벨의 사건 !!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선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행했던 선 사이에서 죽음이 발생된다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가인과 아벨의 사건인데, 가인은 자칭 선하다고 하면서 제사를 드렸는데, 즉 “주여, 여기에 선한 것이 있으니 받으소서!” 라고 말이다. 그러니 가인은 이렇게 자기가 선한 제사를 드리면 악이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질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악이 그만 가인의 마음을 다 지배를 해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악이 지배를 하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그 가인의 그 마음이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그래서 “이리와, 동생아!” 라고 해서, 아벨을 그만 때려죽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동일한 마음이라는 말이다. 하나는 선한 마음이고, 하나는 악한 마음이 아니고 말이다.

◈ 같은 나무에서는 같은 열매가 !!

왜냐하면, 같은 나무에서는 같은 열매가 맺히게 되어있는데, 제가 오랜만이 옳은 소리를 한번 하는데 말이다(ㅋㅋ). 즉 동일한 나무에서 토마토가 열리고, 또한 사과가 열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사를 드리는 그 마음에 곧 동생을 때려죽이는 마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가인이 하나님께 뭐라고 하는가?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그러니 가인의 선은 무엇인가?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포함되지 않은 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가인의 선은 무엇인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놓고는, 거기에다가 자기가 일방적으로 선이라고 도배를 해버리는, 즉 ‘선’ 이란 라벨을 자기 마음대로 붙여버리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자기를 위한 선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인은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해놓고 뭐라고 하는가? “내 행동은 무조건 선이라고 좀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인이 말하는 선에는, 자기 아우를 지키는 것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바로 그런 선이라는 것이다.

◈ 만약에, 동생이 형인 나를 죄인으로 규정하면 !!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무엇인고 하니, 물론 아우가 멀쩡하고 자기에게 도움을 줄 때는 아우를 지키고 싶은데, 그런데 그 아우가 그만 자기를 힘들게 하고 심지어 자기를 죄인으로 규정하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과연 아우를 지키고 싶겠는가?

그들도 처음부터 그러한 사이가 아니었는데, 아벨이 제사를 드리기 이전에는 서로가 기타도 치면서 잘 놀았다는 것이다. 서로가 “형님 먼저, 동생 먼저” 라고 하면서, 주고받고 주고받고 했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농심라면인데 말이다(ㅋㅋ).

하지만 그 동생으로 말미암아서 형이 졸지에 죄인으로 발각이 될 때, 과연 그 동생을 예뻐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을 맞추어야 하는데, “내가 예수를 지키는 자이니까?” 라고 말이다. 물론 성도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말이다.

◈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선하심으로 부활하셔서 !!

유일하게 선하심으로 부활하신 분이 누구밖에 없는가? 바로 예수님인데, 그런데 그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누가 죄인으로 드러나는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서기가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지키는 자이니까?” 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나는 내가 할 도리를 선이라고 간주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데, 즉 죄에게 뒤집어쓰고 있는 놈들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싫어한다면, 모두가 다 죄를 뒤집어쓰고 있는 놈과 년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이 혼자 일을 잘하고 있는데, 왜 우리에게 예수님을 지키라고 합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아벨 계통에서 태어나는데, 그것이 창세기 4장 끝에 나오는데 말이다. 즉 죽은 아벨을 대신해서 다른 씨를 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인은 살아있어도 소용이 없는데, 아벨이 죽으면 씨는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주께서 새로운 선을 이루기 위해서 죽은 아벨을 대신해서 새로운 씨가 주어진다는 말이다.

(창 4: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그러므로 주님이 이루시는 선은 무엇인가? 항상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아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행할 수 없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인간이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해야, 그것이 바로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헌금하기, 봉사하기, 기도하기, 교회에 나오기 등등 말이다. 두 달만 기다리면 다 다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ㅋㅋ).

◈ 교회 - 이것은 주님이 행하신 것이 맞지요?

하지만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는 “주님, 저에게서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이런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행하신 것이 맞지요?” 라고 하면서, 그런 것을 끄집어낸다는 말이다. 즉 “나는 이 세상만 좋아하는데, 그런데 주께서는 또 주님을 생각토록 했지요? 그것은 주님이 찾아주신 것이 맞지요?” 라고 하면서 내어놓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밖에 모르고, 또한 내 새끼 밖에 모르고, 그리고 내 가족밖에 모르는 인간인데, 그러한 못난 죄인을 용서하시고 주님을 믿도록 하신 것은 전적으로 성령님께서 하신 일이 맞지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목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그런 성도를 주께서 보내신 줄 알고 섬겨야 하는데, 그래서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 숨겨진 모든 죄를 낱낱이 다 드러내고, 그것이 십자가의 피와 어떻게 만나는지, 그것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 십계명과 피가 어떻게 만나는지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는데, 즉 십계명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십계명과 피가 어떻게 만나는지, 그런 만남 중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할 때, 그때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도 주께서는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것이기에 말이다. 일이 그렇게 진행이 된다는 것이다.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선악과를 따먹고도, 선을 행할 수 없는 인간 !!

오늘 강의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인식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리고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가 전혀 행할 수 있는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죽은 데서 살아나고 없는 데서 있게 하는 선으로서,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은 주제에도 그 선을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자체가 바로 죄인데, 그런 죄인이 주제에 어떻게 성경말씀을 감히 지키겠다는 것인가? 그러니 인간이 성경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우리 자체가 죄인인데 말이다.

그러니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죄가 죄로 드러나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선하심인데, 그런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얼마나 가벼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총 맞은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가슴이 뻥 뻥 뚫려서 이제는 껍데기만을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데, 바로 그러한 은혜도 역시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말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99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렇게 볼 때, 과연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 본인이 납득이 가는 윤리성으로 측정해서, 그때 그때마다 확인하겠다는 의도가 드러난다.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윤리적으로 측정해야 비로소 안심하겠고, 이것을 ‘신앙 있음’으로 삼겠다는 처사이다.

◈ 내 신앙은 나 스스로 측정을 ??

그러니 자기가 자신을 믿으면서 살펴서 자기의 신앙의 있고 없음을 본인이 알아서 결정을 하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 속에 있는 신앙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신앙이 과연 그런 것인가? 그것이 인간의 가능성 속에 있던 신앙인가?

◈ 방향성을 ‘피’에게로 !!

아브라함은 자기는 이미 태가 죽은 놈이라고 했는데, 그런 죽은 놈이 어떻게 천국에 가느냐는 것이다. 죄인인 주제에 어떻게 감히 천당에 가느냐는 말이다. 이근호가 어떻게 천국에 간다는 말인가? 그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우리는 큰 소리를 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 된 자를 위해서, 경건치 못한 자를 위해서, 원수 된 자를 위해서 흘리신 그 피를 저는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피’에 그 방향성을 맞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피에 방향성을 두는 관계를 두고서 ‘하나님의 의인’, 혹은 ‘하나님의 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저희들을 사용하셔서 그냥 두지 않고, 복음을 같이 듣고 보고 생각하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증거할 것이 명확해졌사오니,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깨닫고, 구멍을 메우려고 하지 말고 항상 텅텅 비워놓는 십자가의 피만 흐르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604 오후 11시 20분에 마침.

                                                     6.2 지방선거는 유훈정치의 승리, 아닌가? ㅋㅋ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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