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19 피23강 죄악된 시간관과 70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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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419피p094죄악된시간관과70이레

피23강 죄악된 시간관과 70 이레

[10 대구강의 5] - [피 23] - 죄악된 시간관과 70이레
                                                                                
                                                          10,04,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아니, 시간이 죄악이라고요 ??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93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모든 인간들의 시간적 의미마저 죄악된 시간관으로 드러나게 하는, 그러한 종말된 상태로 드러났다. 인간의 시간 다룸을 통해서도 죄가 나오는 시기이다. 

여기에 보면 ‘죄악된 시간관’ 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들은 시간이 무슨 죄악된 것이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즉 사람들은 시간을 두고 죄악이라고 하면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과 서로 시간은 서로 따로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말이다. 즉 인간이 이렇게 있다고 한다면, 시간은 시간대로 따로 흘러간다고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 이라는 것은, 인간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는 것이 칸트 이후에 분명하게 밝혀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시간도 인간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하는데, 즉 시간을 인간의식으로 흐름으로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각자의 시간이 다 다른데, 어떤 사람은 같은 시간이라도 해도 길게 느껴지고, 또 어떤 사람은 아주 짧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선을 봐도,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그 시간이 짧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길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도 그렇고 말이다. 재미있는 영화는 두 시간이라도 금방 지나가고 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우리가 각자 각자가 보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 정도는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것도 모르고서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 개혁주의 신학을 절대적인 것으로, 그렇게 오해를 한다는 말이다.

◈ 개혁주의 신학은 칸트철학의 아류 !!

제가 보기에 개혁주의 신학은 칸트철학의 아류에 불과한데, 즉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공간에 의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살펴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그만 시간과 공간 속에 가두어두는 꼴이 되고 마는데, 그렇지 않은가?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모눈종이로 볼 수 있는데,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다가 말이다. 이렇게 공간이 있는 것을 3차원이라고 하는데, 즉 넓이가 있고 또 높이가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시간을 더하면 4차원이 되는데, 그런 4차원의 틀에 하나님의 일을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그것이 곧 죄입니다 !!

그렇게 4차원으로 이 세상을 보는 것, 그 자체가 곧 우리 인간들의 죄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개혁주의자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면 죄가 아닌 것이 무엇인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지요?

하지만 죄가 아닌 것은 이러한 것 말고, 즉 죄가 아닌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죄입니다” 라고 지적하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묵시적 사건이, 즉 성령의 일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이 오신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죄로 드러내기 위함이란 것이다. 

바로 이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예수님이 심판을, 즉 재판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생각한다고 하지만, 정작 인간들 앞에 등장한 예수님을, 이런 자기들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예수님을 재판했고, 또한 예수님은 그러한 인간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지적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의 이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예수님을 재판을 해버렸는데, 그렇게 되니 인간들의 죄와 의와 심판이, 즉 그 모든 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를 전부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6장 8절에 보면, 성령이 오시게 되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다시 말해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모든 것에 대해서, 즉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그냥 인간이 가만히 있으면 모르는데, 즉 그냥 벚꽃을 구경하고 있으면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예수님 앞 어떻게 죄를 정립하고, 어떻게 의를 정립하고, 어떻게 심판을 정립하는지, 즉 예수님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인간을 심판할 때, 어떤 기준으로 심판을 하는지 말이다. 바로 그런 심판의 기준을 보게 되면, 비로소 거기에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 모두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심판한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법’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죄’, ‘의’, ‘심판’과 같은 것은 모두가 다 율법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즉 이렇게 인간들이 생각하는 율법은, 자기들의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해석하는 율법이라는 것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성경을 해석할 때, 즉 창세기나 잠언이나 전도서와 같은 지혜서나, 요한계시록 등등, 그 모든 성경을 해석할 때, 즉 인간은 그냥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과 공간성을 가지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해석이 바로 예수님 앞에서는 죄가 된다는 말이다.

◈ 천년을 하루같이 !!

그러니 예수님에게 있어서 시간은 무엇인고 하니, 즉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같이” 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 동안 왕 노릇하리라” 라는 것에 대입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 요한계시록은 전혀 인간들의 시간론과 공간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해석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현재 멕시코의 고대문명이 ‘마야문명’ 인데, 거기서 2012년 12월 23일에 이 세상이 멸망한다고 예언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얼마 남지를 않았는데, 그때 이 세상이 멸망을 당하는데, 그렇게 해서 정화가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고 하니, 인간이 만든 기계에 의해서 말이다.

인간들은 고대에서나 현대에서나 그렇게 자꾸만 계산을 하는데, 그러면 이렇게 숫자를 가지고서 계산한다는 것은 어디에 기인하는고 하니, 태양과 달과 별의 움직임을 가지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엇인고 하니까, 즉 천년이 하루와 같은 시간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 거기서는 기존의 해와 달과 별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기존 시간과 공간의 충돌을 통해서 !!

그것은 어디까지나 옛 하늘과 옛 땅에 관한 것인데, 그렇게 옛 하늘과 옛 땅에 준해서 나온 시간관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시간관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런 기존의 시간관은 죄로 규정을 받는, 저주받은 시간관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기존의 공간관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말씀한 모든 것을 인간들이 해석할 때는, 그렇게 해석을 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하면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해한 해석과 진짜 제대로 된 해석의 차이점은 무엇인고 하니, 항상 예수님의 영으로부터 우리가 지적을 받는 가운데서, 그런 가운데 무엇이 참된 성경해석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지적을 받을 때, 성경에 대해서 올바른 해석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그것이 궁금하지 싶은데, 그것이 교재 93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 모든 역사는 예수님이 하신 일 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십자가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제대로 된 시간이 방출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공간과 시간은 십자가 사건이 장악한다.

◈ 역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잡아당겨서 !!

여기에 보면 “모든 역사는 예수님이 하신 일 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모든 역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잡아당기는 식이라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인류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랐는데, 그런데 그야말로 아주 희한하고도 독특한 나라가 하나 등장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 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 이스라엘이 왜 중요한고 하니까, 이스라엘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말이다. 그분이 바로 모세를 배후에서 조종하시는 분인데,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언약의 하나님 말이다.

그런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줌으로 말미암아서, 이 율법은 무릇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즉 이 세상의 시작부터 끝 날까지의 그 모든 원리원칙을 다 제공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율법이 이 세상의 중심인 십자가로 끌려 들어가게 되는데, 모든 과거와 미래가 다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되니, 그래서 모든 역사는 십자가에게로 당겨져서 들어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세상은 말씀으로 되어있고, 그 말씀을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물론 사도바울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렇게 십자가에서 모두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그 나머지 세상도 다 십자가에게도 빨려 들어간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일종의 소용돌이나 와류처럼 말이다. 바로 그것이 사도바울의 주장인데, 즉 “세상 만물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때문에, 말미암아서 창조되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에서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하는데, 물론 골로새서 1장도 역시나 그러하고 말이다.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런 가운데 예수님이 등장하시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그냥 등장하시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등장하신다는 말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몸으로 등장하는 것을 이 세상의 모든 중심으로 보고, 바로 그것을 두고 ‘교회’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교회는, 예수님의 피묻은 음성에 호출된 자들 !!

오늘 아침에 제가 십자가 마을에서 댓글을 하나 달았는데, 거기에서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교회는 예수님의 피묻은 음성에 의해서 호출을 당한 사람들이라고 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현재 시간과 공간이 아닌 묵시세계에 계시는데, 그렇게 묵시의 세계에서 역사에 있는 자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시는데, 물론 그렇게 부름을 받은 자들은, 물론 이 세상에서는 죄를 짓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세계에 들어가면 그만 의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인데 말이다. 왜 그런고 하면, 끌어당기니까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그냥 평범한 사람이 구름 속에 들어가면, 마치 신선들이 바둑을 두는 것처럼(?), 그렇게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의 껍질이 벗겨지게 되면, 우리의 속은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하게 되는데, 즉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변해버린다는 것이다. 즉 안에는 이렇게 속살이 있고 바깥에 옷을 입고 있는데, 그러니 옷을 벗게 되면 새로운 속살이 그 안에서 나와서,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V?)
 
그러니 성도의 죽음이라는 것은, 몸을 벗어버리는 것인데, 아까 집사님이 10년만 살고 싶다고 했는데, 생각을 제대로 잘하셨다는 것이다. 귀찮은 옷을 오래 입을 필요가 없이, 때가 되면 그냥 벗어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짧은 옷을 말이다. 왜냐하면, 키가 작으니 옷도 짧다는 것이다(ㅋㅋ).

사도바울의 소망이 무이었는가? 자기의 지금 무거운 옷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만나서 사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지금 자기에게는 사명이 남아있어서, 즉 “너희들 때문에 내가 죽지 못하고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조금 더 증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 우리 칼빈주의는 옳다 ??

그런데 이러한 것도 모르고 아직까지도 역사 속에서 성경을 해석했다고 폼을 잡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사를 보면 ‘신학’ 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사에서 모든 신학들이 바로 이러한 자들의 교권과 공동체의 자존심과 관련이 되어서 신학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 중심의 그런 신학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공동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즉 “우리 칼빈주의는 옳다”, “우리 루터주의는 옳다”, 혹은 “우리 카톨릭은 정통하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기들 조직의 정통성을 위해서 역사가 쓰여지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나오는 신학과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을 가지고 결코 마귀를 결코 대적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댓글에도 그런 내용이 있는데, 무슨 마귀가 개혁주의 신학에게 지는, 그러한 마귀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바르트 신학에게 마귀가 두 손을 들겠는가? 마귀는 결코 신학에 지지 않는데, 마귀가 노리는 것은 ‘새 언약’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 오로지 그것만을 노린다는 말이다. 인간들의 그러한 신학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학은 움직이는 동사를 명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백 날을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개혁신학회 발표 ‘70이레 비역사적 해석’, 참조)

◈ 왜 나를 공격하지?

그런데 사람들은 신학을 공격하면 그렇게 싫어하는데, 마치를 자기가 공격을 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주로 목사들이 싫어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이 ‘목사’ 라는 주체가 신학을 마치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그 신학을 마치 자기의 석고상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굳어져서, 그 신학을 치면 마치 자기를 치는 것으로 여겨서 화를 낸다는 말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의 경우에, 엄마가 울게 되면 같이 따라서 울듯이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나는 날마다 나를 버린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 신학을 꼭 쥐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을 공격하면 자기를 공격하는 것으로 여기는데, 하지만 인간은 사실상 칠 가치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십자가 사건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즉 십자가 사건의 되풀이란, 모든 현실이 종말이라는 하나의 시간적 공간으로 다 모아졌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실은 처음부터 종말이었는데, 즉 역사의 시작부터가 말이다. 여기서 ‘종말’ 이란 것은, 항상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남아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이러한 방식의 종말적 시간관은 구약에도 징후가 있었다. 다니엘 선지자는 처음에 단순히 기존의 역사관에 입각해서, 징벌의 기간인 70년이 지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원래의 고향으로 되돌아갈 것을 위해서 기도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려준 계시는 70년이 아니라, ‘70이레’였다. 즉 ‘70이레+62이레+1이레’로 구성된 역사를 제시하셨다(‘이레’ 라는 말은 1주간=7일).

◈ 70년만 지나면 고향에 돌아간다 ??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어떻게 생각했는고 하니까, 자기들은 “70년만 지나면 고향에 돌아간다” 라고 여겼는데, 즉 묵시적 시간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금 어려운데, 그들은 기존의 시간개념에 준해서 땅을 해석했다는 말이다.

그들에게는 땅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 땅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면 이 성전이 왜 중요한가? 성전이 없으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곳이, 즉 ‘만남의 장소’가 그만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자칫 잘못해서 그렇게 되면, 영영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여겼다는 말이다.

◈ 성전은, 다윗언약의 구체화 !!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한 것은 다윗언약을 구체화한 것인데, 즉 다윗언약이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여기 이 공간에서 언제나 늘 되풀이가 되어서, 그렇게 해서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다윗언약의 자비와 은총이 주어지기를 소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한 장소, 즉 거룩한 장소에 묶여놓기를 원해서, 그래서 다윗이 성전을 지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윗이 지은 성전은 무엇인가? 당연히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다윗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은 “나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는 있지 않겠다”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이 ‘다윗가문’ 이란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까, 다윗가문이 혈육적인 가문이 아니라 영적인 가문을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다윗의 혈통이라고 하면, 즉 다윗의 DNA를 받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시는 가문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 다윗의 가문에 대한 충돌이 !!

그러니 이 둘 사이에는 자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나면서, 무엇이 쇠퇴하는고 하니, 인간의 가문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악마가 지배하는 이스라엘로 바뀌고 만다는 것이다. 악마가 지배하는 말이다. 그것이 곧 유대나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스스로 무엇이라고 여기는고 하니, 자기들은 곧 다윗의 자손인데, 즉 마태복음 1장 1절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세계(世系)’는 족보를 의미하는데 말이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육적인 족보가 어떻게 영적인 다윗가문에 속하는지, 그것을 마태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기는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오히려 이방인인 로마의 백부장이 천국을 차지하고 그들은 쫓겨난다는 것이다.

◈ 누구세요? 나가주세요 !!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사스러운(부끄러운?) 일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리도 아닌데 앉아 있다가, 그만 원래의 주인이 와서 “누구세요? 나가주세요” 라고 할 때라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바로 그런 꼴인데, 천국의 주인은 전혀 마음이 없는데 자기들은 천국에 갈 것이라고 폼을 잡고 앉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가 와서는, 자기 자리가 아닌데 앉아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다 내보낸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교회에는 자기 자리가 아닌 줄로 알고 교회에 오지도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말이다. 친목위주로 교회에 다녀야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니 교회에 다니는 것이 무섭다는 것이다. 즉 사람을 사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고 하면 그 교회에는 가기가 두렵다는 것이다. 사귈 줄도 모르는, 무슨 귀신들이 모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ㅋㅋ).

◈ 그분들이 왜 무서운가?

제가 왜 “무섭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고 하니, 자기는 계속해서 친목을 도모하면서 사람을 사귀기 위해서 오는데, 그런데 그런 것이 다니다가 보면 결국에는 들키고 만다는 것이다. 주님이 아닌 그런 것에 마음이 가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행여나 누군가가 자기의 속마음을 지적하게 되면 그만 덜컥 겁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당하기 먹기 전에 미리 나가고 만다는 것이다.

지금 역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한 마디로 말해서 무엇인고 하니, ‘분리작업’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분리작업 말이다. 물론 하나님은 일을 완벽하게 하시는데, 그런데 이런 분리작업에 있어서 우리 인간은 개입하지 못하고, 성도는 오직 복음만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복음만을 전하게 되면, 그 분리작업은 주님께서 철저하고 완벽하게 해내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 복음을 들으려고 오는 것도 기적이지만, 그 복음에 대해서 배척하는 것도 역시 놀라운 기적이라는 것이다. 복음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반박을 하라고 하면 물론 반박은 하지 않는데, 하지만 왠지 듣기 싫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기독교 방송을 보면 속이 마구 울렁거리듯이 말이다. 30분만 보라고 해도 아마 다들 뛰쳐나가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 목적이 이끄는 삶 ??

그렇게 되면, 그런 사람은 무엇까지도 거부하게 되는고 하니, 결국에는 성경말씀까지도 인정하지 않게 되는데, 즉 “성경은 그냥 옛날 책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같은 인간들끼리 모여서 친목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런 흘러간 책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구닥다리 책보다는 오히려 “목적이 이끄는 삶”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여기 밑에 있는 교회에서 그런 짓을 지난주에 했는데, 목사는 한복을 입고 설치면서 돌아다니고, 버스를 대절하고 거창하게 행사는 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친목이 될 때, 사랑이 넘치고 아주 이상적인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현대인들은 외로워서 그러한데, 그러니 교회가 그런 외로움을 달래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외로움을 달래주면서 희생적으로 하게 되면, 그런 희생이 그리워서 외로워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철새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아주 단단하게 응집력을 가지는, 더 이상은 헤어지지도 않고 외로움도 타지 않는, 그런 집결력을 가진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목사들의 희망사항인데, 성경은 이미 신학교를 다닐 때부터 버렸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랑이 넘치는 교회는 만드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재미나고도 집결력이 있고, 또한 힘이 되는 교회, 그래서 이 사회에 대해서 빛과 소금이 되면, 그러면 또 외로운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고 말이다.

◈ 결국, 악마가 지배하는 유대나라로 !!

하지만 바로 그런 것이 무엇인고 하니, ‘유대나라’ 라는 것이다. 악마가 지배하는 말이다. 그러한 유대나라에 있어서 집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즉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고, 모세이고, 다윗인데, 따라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그 말씀이 오늘날의 우리를 낳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들을 그렇게 집결하게 했다는 말이다.

‘회복’ 이라는 영화에도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말이다. 그런 것이 바로 혈육적인 유대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영적인 유대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그런 육에게 성령을 주어서 바꾸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니고데모는 울고 싶어라 !!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곧 그것인데, 이 니고데모는 이미 깊숙히 유대나라에 관여된 사람인데, 즉 회당장이라는 것이다. 요즘말로 하자면 국회의원인데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니가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니고데모는 혈육적으로 이미 확고한 유대인인데, 그러면 다 된 것이지, 그 이상 어떻게 다시 태어나고 말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니고데모나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미 인간으로서 자기는 할 도리는 모두 다 했는데, 그래도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시키는 것을 다 했는데, 그러니 누가 보더라도 흠 잡을 것도 없이 바르게 산다고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이상 더 어떻게 무엇을 하라는 말이냐는 것이다.

육적인 사람에게 십자가의 복음이 들어가면 짜증을 내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데, 즉 “더 이상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뭐라고 하면 됩니까? “아니, 누가 하라고 했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면 상대방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러면 예배에 참석하지 말까? 또 헌금도 하지 말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물론 그때는 “하지 말란 말이야”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행함” 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은 믿음도 행함에 속하고 만다는 것이다. 즉 믿는 것도 자기가 알아서 믿고, 또한 행하는 것도 자기가 알아서 행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를 도통 이해를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주님 쪽에서 우리를 구원합니다” 라는 것도 못 알아듣고 말이다.

◈ 너는 이미 구원을 받았어 !!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한 중풍병자를 고쳐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죄 사함을 받았다” 라는 완료와, “너의 침상을 들고서 일어나라” 라는, 즉 그렇게 아직도 행함을 주장하는 것이 비교가 되는데, 그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쉬우냐는 말이다.

물론 우리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로 간다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무엇 무엇을 하라” 라는 것이 더욱 쉬운데, 하지만 예수님 쪽에서, 그렇게 장악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아니라, “너는 어디를 가도 죄 사함을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이 더 쉽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더 쉬운 것을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관람객인 인간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어제 설교내용이었는데, 그렇게 예수님은 아주 쉽게 이야기를 하신다는 것이다. 즉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이다.

◈ 예수님, 지붕을 뚫을까요?

하지만 그들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쪽에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죄 사함을 받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지붕을 뚫을까요?” 라고 했는데,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지붕을 뚫는다고 해서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지붕 뚫고 하이킥을 봐도 죄 용서가 되지 않고 말이다(ㅋㅋ).

하지만 기존 교회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하는가? 지붕을 뚫는 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구라를 치는데, 즉 “니 재산을 다 바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꼭 그렇게 돈 문제로 나가는데, 그러니 결국은 돈이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 지붕 뚫는 일을 하는, 그런 집 철거를 전문으로 하는 노가다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구원을 받지 싶은데, 즉 직업도 잘 골라야만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ㅋㅋ).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날마다 주님이 자기를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지는 것인데, 즉 “아하, 날마다 주님은 나를 잡아당기고 있구나” 라고 말이다.

(눅 5: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눅 5: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눅 5: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눅 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 5: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눅 5: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눅 5: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눅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눅 5: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눅 5: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 예수님과 십자가 !!

아무튼 이 다윗가문에 있어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즉 주님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육에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 쪽에서 오셔야만 되는데, 즉 주님의 영을, 성령을 보내야 이 육이 영으로 변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아기 예수로만 오면 안 되는데, 즉 아기 예수로 와서는 성령을 보내지 못한다는 말이다. 적어도 죄인이 의인이 되려고 하면, 그만한 율법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뭔가를 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뭔가를 하셔서, 그 하신 일을 근거로 해서 육이 의인이 된다는 말이다. 놀랍게도 말이다.

그렇게 할 때,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먼저 죄인이 의인이 되려고 하면, 죄인이 하나님의 법을 모두 다 지킬 수 있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되려고 하면 모든 율법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지켰다고 하는, 그런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근거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영이 나오면,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영이기 때문에, 그런 십자가의 영이 임한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즉 자기가 행한 것도 전혀 없이 의인이 되는 복을 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인데, 모든 것이 십자가에게로 달려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물위를 걸었으니, 너도 걸어라” 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또한 “내가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으니 다 지켜라. 내가 오병이어를 기적을 했으니, 너도 해라. 내가 문병을 고쳤으니, 너도 고쳐라” 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 것은 이초석이나 그 똘마니들이 하는 짓인데, 조용기도 그렇고 말이다. 즉 예수님은 그렇게 무엇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인간의 육으로는, 그 무엇을 행해도 ‘죄’ !!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온다는 것은, 인간의 육으로는 그 무엇을 행해도 죄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는 식인데, 바로 그렇게 십자가의 영인 성령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이다. 즉 성령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는데, 그 십자가가 지적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무엇을 해도 어리석은 우리 자신의 지혜에 근거해서 행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죄가 된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과거 우리의 육의 입장에서 봐서는,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고 바보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십자가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이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도바울이 자기가 사도가 되기 이전에, 율법도 지켰고 할례도 행했고, 또한 십일조도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다 해보았지만, 그러나 그때는 육으로 예수를 알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자기는 그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면서도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십자가의 영이 오게 되니, 그동안 자기가 행한 모든 것이 다 죄였고,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제 자기가 자랑할 것은 오로지 십자가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것이 더 중요한데(?) 말이다.

◈ 전적으로 주님이 택하셨기 때문에 !!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님을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택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집안이 별 볼일이 없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해도, 그러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보라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잘난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그 주님의 택하심으로 인해서, 그런 주님의 택하심만을 자랑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라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다시 정리하면, 다윗성전(다윗가문?)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인간은 자기 혈육을 중요시하고, 그리고 공간, 즉 땅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그 땅에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있으니 말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보아서, 모든 선지자의 말을 여기 땅 중심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즉 팔레스탄인의 그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봐서,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만에 다시 돌아온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 ‘70이레’와 ‘70년’ !!

그런데 정작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70이레의 의미와 70년의 의미를 나누어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가지의 의미를 말이다. 즉 70이레 안에 70년이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70이레는 인간의 역사적 안목을 공격하는 묵시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70이레는 그냥 70이레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70년이라고 하는 역사적 의미를 죄로 규정하면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처음에는 7이레로 나타나는데, 즉 7이레 속에는 인간들이 다시 성전을 지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처음은 ‘7이레’, 그 다음은 ‘62이레’, 그리고 마지막으로 ‘1이레’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70이레’가 된다는 것이다.

◈ 70이레 = 7이레+62이레+1이레 !!

그러므로 이 7이레가 포함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들은 역사적 의미의 땅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그들은 그것이 죄인 줄을 전혀 모른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62이레를 통해서 보여주는데, 즉 인간들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이 박살날 때까지가 곧 62이레라는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제대로 지켜서 한다고 했는데, 말씀을 제대로 해석을 해서 말이다. 그런 기간이 7이레라고 하면,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것이 완전히 다 묵사발이 되어버리고, 그야말로 나라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 곧 62이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무’로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즉 모든 역사가 끝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 한 때, 두 때, 반 때 !!

그렇게 끝나면서 마지막 1이레에 어떻게 되는고 하니, 예수님은 그런 죄를 품으셨는데,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로 품으셔서, 죄로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서 새로운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한 때, 두 때, 반 때” 라고 하는데, 예수님에 의한 예수님의 공생애(?), 즉 ‘3년 반’ 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마지막에는 “한 때, 두 때, 반 때” 라고 해서, 시간자체가, 즉 역사자체가 어떤 사건에 의해서 그만 토막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때, 두 때, 반 때” 라는 토막이 난 사건들이 일어날 때, 그 사건이 어떤 묵시적 사건에 의해서 토막이 나는지 유심히 살펴보라는 것이다.

◈ 기존 시간은, 해와 달과 별 !!

이 ‘시간’ 이라는 것은 항상 무엇과 관련이 있는고 하니, 창세기 1장을 보면, 해와 달과 별인데, 그런 해와 달과 별이 그냥 고요하게 있으면, 시간은 토막이 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시간은 해와 달과 별이 주기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그리고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돌고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주기적으로 돌기 때문에, 그래서 시간을 토막낸다고 하는 것은, 저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토막낼 때, 그때야 비로소 토막이 난다는 것이다.

◈ 아, 섬진강 벚꽃이 그리워 !!

예를 들어서, 벚꽃이 피는 것을 보고 1년을 정한다고 하면, 그런데 벚꽃은 온도에 의해서 피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1년이 그만 들쭉날쭉 한다는 것이다. 온도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조절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즉 해와 달과 별은 사람 손이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 우주선을 타고 가서 태양을 정복해서, 편리하게 인간들 마음대로 달 옆에다가 붙여놓을지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아무튼 지금은 해와 달과 별에 대해서 전혀 손대지 못하는데, 그러니 인간은 어디까지나 시간 밑에 논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 인간이 태양을 조절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인간의 수명도 엄청 늘어나지 싶은데, 왜냐하면 시간을 따라서 말이다. 그리고 해는 져야하는데, 그런데 그대로 있다고 하면 아마 엄청나게 불안해하지 싶다는 것이다. 물론 북극에 가면 백야현상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 태양아 멈추어라 !!

그런데 여호수아서에 보면 무슨 장면이 나오는가? 태양이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시간은 무엇인고 하니, 즉 구약의 그 여호수아가 하는 전쟁이 보면, 적들과 여호수아 사이에, 적들은 해가 질 것을 예상했는데, 그러나 여호수아 쪽에 의하면 해가 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저들이 보기에는 어떠한가? 자기들이 알고 있던 기존의 시간관은 이스라엘이 등장함으로서 한 순간에 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분명히 해가 져야만 하는데, 그런데 해가 지지를 않으니 적들은 계속해서 당하고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심으로, 즉 하나님은 언약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 모든 자연체계도 언약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모든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말이다.

◈ 십자가 사건으로, 새로운 시간대가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만 해가 깜깜해지고 말았는데, 즉 태양이 그만 빛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일식차원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새로운 시간대가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이 땅에 개입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눅 23:44)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눅 23: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 사건’ 이란 것은, 어느 일개 정치범을 재판한 결과로서 일어난 사형집행의 사건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을 해서 일으켰던 일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니 예수님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것은 인간이 관여할 문제가 아닌데, 즉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 사이의 둘 만의 주고받는 대화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 인간들이 감히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왜 버려야만 하는지, 즉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말이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런데 예수님이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왜 자기를 버리느냐고 하시다가, 나중에 다 이루었다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영혼을 받아달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이미 예수님은 무엇을 알고 있는고 하니까, 인자가 고난을 받고 사흘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런데 십자가에서는 예수님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시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는 말이다.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고, 각본대로 무슨 시나리오를 읽고 있느냐는 것이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 전적으로, 성부와 성자만이 !!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가운데, 그렇게 절망감을 표시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 인간이 관여해서 해석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성부와 성자만의, 즉 그분들만의 문제라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만의 말이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논리적으로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즉 절망을 했으면 아예 절망을 하든지 말이다. 그러니 그런 절망조차도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그것의 하나의 과정으로서 포함되는 절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희망을 염두에 둔 절망이기에 온전한 절망이라고 볼 수 없는데, 물론 인간적인 안목으로 보면 말이다. 그것은 절망인척 하는 절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십자가는 인간의 지식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데, 그래서 이 세상은 주님의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 - 십자가의 흔적을 보여주는 남은 역사 !!

아무튼 다니엘서의 ‘1이레’ 라는 것이 “한 때, 두 때, 반 때”로 끝이 남으로서, 이제 나머지의 그 모든 역사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흔적을 보여주는 남은 역사가 된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난 것을 보여주기 위한, 바로 그런 남은 역사가 요한계시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그것이 곧 “한 때, 두 때, 반 때”의 모습이란 말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이런 “한 때, 두 때, 반 때”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모르면, 전혀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물론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 다시, ‘70이레’에 대해서 !!

다니엘서의 ‘70이레’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면, “7+62+1” 이라고 되는데, 즉 7이레 동안에는 역사적 요소로서, 인간들이 직접 성전을 지어야 되고, 그때 동원되는 선지자가 학개, 느헤미야, 그리고 에스라 라는 것이다. “너거 집은 좋은데, 왜 하나님의 집은 개판이고?” 라고 부흥사들이 써먹는 것이 바로 학개서인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62이레에서는 무엇이 없어지는고 하니까, B.C 433년의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어지는데, 그 이후에는 계시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예를 들어서, 우리가 방앗간에 가서 고추를 빻는다고 하면, 일단 고추를 넣었으면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 기계 앞에서 가서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기다릴 필요가 없이 말이다.

◈ 고추는, 고춧가루가 되려면 반드시 빻아져야 !!

그러므로 모든 계시는 성전중심인데, 왜냐하면 그 성전이 다윗언약과 관련이 되어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 다윗언약 다음이 바로 새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성전이 깨어지는, 마치 고추가 부수어지는, 그런 시기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굳이 계시가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그냥 부수어지면, 즉 그냥 망하면 된다는 것이다. 참 쉽죠잉?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망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고추가 고춧가루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고추가 다시 퍼렇게 되려고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일이냐는 것이다. 물론 풋고추 매니아도 있겠지만(ㅋㅋ), 하지만 그러한 것은 계시를 거스리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데(?), 그러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망해야 한다는 계시라고 하면 그냥 망하면 되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여야 우리가 부활이 되는데,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죽으면 된다는 것이다. 접시물이 빠져 죽든지, 아니면 조금 더 넓은 접시인 서해안에 빠져 죽든지 말이다. 그렇게 죽는 인생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살려달라고 교회에 와서 빌면, 그것은 반칙이란 것이다. 그냥 우리는 지켜볼 뿐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죽이시는지 말이다.

제가 이번에 울산에서 강의를 할 때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우리가 죽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아하, 나와 같은 인간도 구원이 되는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죽이신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 때문에 이러한 인간도 구원된다” 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렇게 하면서 우리를 죽이신다는 말이다.

◈ 부활 - 성도의 몸에도 십자가의 흔적이 !!

아무튼 여기 70이레에서, 그 마지막 1이레가 끝나게 되면 예수님의 몸이 부활하게 되는데, 바로 그런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뿐만이 아니라 우리 성도의 몸도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의 역사적 흔적으로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 - ①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 
                ②성도의 몸은 이렇게 사용되어진다 !!

그렇게 되면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두 가지가 되는데, 하나는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라는 것이 되고, 다른 또 하나는 “성도의 몸은 이렇게 사용되어진다” 라는 것이다. 즉 성도의 몸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이 들어가서, 성도의 일생도 그렇게 십자가의 일생이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 성도의 몸이 모여서 일곱 교회가 되는데, 그러니 그 일곱 교회의 움직임이 예수님의 십자가부터 이 세상 끝 날까지의 모든 과정을 다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요한의 몸은 교회가 되고, 그 교회는 세상이 되는데, 그런데 이 교회가 바로 일곱 교회이니, 이 세상도 역시 일곱 교회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맞추어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서, 이 세상은 그렇게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교회도 그렇게 끝나고 말이다. 아무튼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마지막에는 다 그렇게 최후의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는 것이다.

◈ 그러면 목 베인 영혼은?

하지만 산 사람은, 즉 목 베인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하늘에 따로 준비가 된 처소가 있어서, 이 땅에서 바로 직접 거기 처소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목 베인 영혼, 즉 순교자들은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올라가서 새로운 시간 속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천 년 동안 왕 노릇을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 잠시 ‘천년’에 대해서 !!

그런데 그것을 밑에서 역사적으로 보게 되면, 마치 천년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서 천년은 시간을 초월했다는 의미인데 말이다. 이 ‘천년’ 이라는 것이 십계명에 보면 나오는데, 제2계명을 보면 뭐라고 하는가? 벌을 받는 것은 삼 사대에까지 받는데, 그런데 복을 받는 것은 천대에까지 받는다는 것이다. 즉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라고 한다 말이다.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말씀도 인간적으로 보면 역시 해석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천 대까지 복을 받을 짓을 해놓고는, 또 다시 저주받을 짓을 한다면 천 대가 취소가 되는가?” 라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삼 사대까지 저주를 받아야 되는데, 그런데 2대 째에 복 받을 짓을 했다면 나머지 한 대는 취소가 되는가?” 라는 문제도 생기고 말이다. 즉 인간적으로는 성경말씀의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

아무튼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이렇게 함으로서, 이것이 결국에는 다니엘서에 있는 7이레 속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그러면서도 이 전체가 다 하나님의 창조까지도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70이레가 되는데, 그러니 예수님께서 직접 손을 대어서 이런 과정대로, 즉 그렇게 이미 확정된 각본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즉 “7이레, 62이레, 1이레” 라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레’이기 때문에, 결코 인간의 시간개념이 아닌 묵시적 개념인데, 즉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이 들어있는, 즉 창조의 완료성에서 나온 시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완료된 시간관이 바로 이 ‘70이레’에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진도를 나가겠는데, 교재 94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 수직 층은 거룩과 세속 됨의 구별을 나타낸다. 원래 이레(7일)란 제사장이 세속적인 것들을 거룩한 것으로 전환시키는 직무의 단계를 나타내는 단위였다. 더러운 문둥병 환자가 거룩한 공동체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서 완치되고 난 뒤에도 7일을 대기해야 했다(레 14:2-9).

(레 14:2)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레 14:3)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 …
(레 14:9) 칠 일만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여기에서 하필이면 왜 7일인고 하니, 하나님이 일을 하셨지 인간이 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즉 “하나님이 일을 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시간적으로 표현할 때, 그것을 두고 ‘7일’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는 ‘7’ 이라는 숫자가 들어가는데, 즉 ‘7일 창조’, ‘7교회’, ‘70이레’, 또한 ‘이레(7)’ 자체도 그렇고 말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더러움에서 거룩, 곧 죽음에서 생명의 전환이란 반드시 거룩한 피가 필요하고, 이 피를 생산하는 시간대가 ‘거룩한 시간’이다.

이렇게 더러움에서 거룩으로, 즉 사도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육에서 영으로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려면 반드시 거룩한 시간이 덮쳐야 하는데, 하지만 거룩한 시간은 반드시 거룩한 몸이 되신 예수님의 손에 장악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 더러움에서 거룩으로 !!

그 안에 거룩한 시간이 함께 따라오게 되어서, 그야말로 문둥병자와 같은 우리가 고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 안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간은 주님의 몸을 보여주기 위해서 흘러가고, 배치가 되어있고, 그리고 배정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이야기가 육적으로 보게 되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즉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것을 풀어서 헤쳐보니, 그렇게 성경전체가 다 들어있더라는 말이다.

그 입구가 무엇인고 하니, 그냥 십자가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십자가외에는 자기는 알기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십자가 사건 외에는 자기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안에 들어가면 다 보이는데, 그런데 그 들어가는 구멍이 너무나도 작으니,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러니 항상 십자가 바깥에서 놀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무슨 짓을 하든지 다른 동네인데, 즉 저주의 우박이 떨어지는, 유황불이 떨어지는 받는, 그런 심판의 자리에서 매일같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가끔은 그 십자가 입구에 가서 기웃거리기는 하지만, 들어가지는 않고 바깥에서 구멍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들어갈 수도 없고 말이다.

◈ 향수병과 술병의 공통점은?

혹시나 향수병과 술병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같이 둘 다 병마개로 틀어막았다는 것인데, 그것도 전혀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코르크 마개로 막아놓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알콜 성분이 전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말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십자가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강력한 그 마개 때문인데, 그래서 사람들이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깥에서 “뭐, 이런 것이 다 있지?” 라고 하면서 그냥 가버린다는 말이다. 매일같이 그 근처에서 교회놀이를 하고 종교놀이를 하지만, 하지만 결코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 병 안에 든 편지 ??

지금 제가 이렇게 병을 멋있게 그리고 보니, “병 안에 든 편지” 라는 것이 생각나는데, 즉 누군가가 태평양에다 병을 하나 던져놓았는데, 그것이 둥둥 떠다니다가 나중에 일본에 도착했는데, 그 안에는 편지가 하나 들어있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이 ‘십자가’ 라고 하는 사랑의 편지가 둥실둥실 전세계를 떠다닌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마개가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활짝 열려서,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그 안으로 마구 빨려서 들어가겠지만, 그런데 이 마개가 열리지 않고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매일같이 구경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복음적인 교회는 어떻게 운영이 되는지 구경이나 해볼까?” 라는 식으로 말이다.

심지어 십자가 마을의 경우에도, 십자가 안의 이야기를 하면 조회수가 적어지는데, 그런데 그게 아닌 십자가 바깥의 이야기를 하면 조회수가 엄청 늘어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회계보고’와 같은 것을 올리게 되면 조회수가 제법 많다는 것이다. 정작 구원하고는 상관도 없는데 말이다. 십자가의 내용을 이야기하면 반응이 영 시원찮고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성전이 다시 중건되어야 하고, 그 중건된 성전이 다시 깨어져야 하고, 그 다음에 성전이나 제사가 없이 세워지는 언약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 시대의 세 가지 색깔의 시간층이 모두 십자가 사건에서 미리 표출된 시간의 긴 그림자였던 것이다.
 
◈ 세 가지 색깔의 시간층이 !!

여기에 “세 가지 색깔의 시간층” 이라고 나오는데, 우리가 빵을 보면 어떠한가? 색깔을 따라서 맛이 차이가 나는 빵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햄버그를 보면 층이 나누어져 있는데, 제일 아래층이 7이레, 그 다음 층이 62이레, 제일 위층이 1이레라는 것이다. (3층 짜리 ‘빅맥’?)

그 아래층은 역사의 표면과 같이 되어있는데, 바로 이 7이레가 역사의 표면이라고도 할 수가 있는데, 즉 성전이 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62이레도 성전이 깨어지는데, 그래서 그것을 합쳐버리면 결국에 남는 것은 7이레와 1이레만이 남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 십자가가 그만 인간의 해석을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정말이지 복 받은 사람인데, 즉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라는 통을 그야말로 향수병처럼 막아버린다는 말이다.

◈ 그녀는 왜 향수병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울면서 향수병을 깨었는데, 왜 그녀가 향수병을 깨트렸는고 하니, 자기가 그동안 모았던 향수병은 향수병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바로 진짜 향수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주님 앞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향수는 그냥 던져져서 깨어져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주님에게 모두 흡수가 되어야지, 자기가 따로 챙기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의 그러한 행동을 어떻게 보셨는고 하니, 자신의 죽음을 위해서 장사를 지내는 것으로 보았는데, 마치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를 만들 듯이 말이다. 그런 미라를 만들 때 70일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는데, 염을 하는데 40일이 걸리고 말이다.

창세기에서 요셉의 경우에도 미라를 만드는데, 그래서 나중에 약속의 땅에 해골이라도 매고 가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40일 동안 애곡을 했다는 것이 바로 그 말인데, 물론 지금 서해안에 배가 가라앉아서 한 달 동안 애곡기간인데, 물론 개콘도 같이 한 달을 쉬고 있고 말이다.

(창 50:26) 요셉이 일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 인간의 능동성 - 우상 만들기 !!

아무튼 그렇게 해서 막아버리면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막으면 그 앞에서 기웃거리는 인간의 능동성이 나오게 되는데, 이 인간의 능동성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인데, 왜 그런고 하니, 이런 인간의 능동성은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그만 인간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능동성에 무엇이 포함이 되는고 하니, 하나님 만들기, 즉 인간의 우상 만들기가 들어있는데, 그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하나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인데 말이다.

◈ 피조물의 형상대로 신을 만들어서 !!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드러내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든 하나님과의 대결구도, 그것이 바로 “나 외에 다른 신”으로서, 즉 인간이 만든 신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데, 그 인간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까, 로마서 1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인간의 모든 신 개념은, 기존의 피조물의 형상을 본받는다고 한다는 말이다.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물론 로마서 1장에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지만, 이것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데, 즉 “피조물의 형상대로 신을 만든다” 라고 했을 때, 이 피조물 자체의 형상을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피조물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신의 형상을 본받아서 피조물을 만든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주고받고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신은 인간을 닮았고 인간은 인간을 닮은 신을 닮았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나’로부터 말미암아서, ‘나’를 통해서, ‘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말하는 신은, 모두 다 피조물의 형상을 닮았는데, 물론 어떤 것은 동물을 닮은 것도 있고 말이다.

◈ 아니, 하나님께서도 피조물의 형상을 !!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방법을 누가 사용하는고 하니, 참된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에스겔 1장에 보면, 성전을 보위하고 있는 천사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천사의 모습은 “~같다” 라고 되어있는데, 즉 그 생김새가 어떠한고 하니, 독수리 얼굴, 사자 얼굴, 소 얼굴, 또한 사람 얼굴을 닮았다는 것이다.

(겔 1:4)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겔 1: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겔 1:6)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겔 1:7)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겔 1:8)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겔 1:9)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겔 1: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 신인동형설(神人同形說) !!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실 때는 인간과 유사한 모습으로 다가오시는데, 이것은 신학적으로 규명하게 되면 굉장하게 복잡한 논리가 동원되는데, 즉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는데, 그런데 하나님도 인간을 닮았다” 라고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닮은 신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무엇으로 규정하는고 하니, 지금 인간이 신이라고 하는 것이 곧 죄에서 나왔음을 고발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존의 신학은 이것을 어떻게 보는고 하니, 소위 ‘신인동형설(神人同形說)’ 이라고 해서,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을 닮아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닮으셨는데, 그러니 서로 사이좋게 지내려고 오셨구나”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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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인동형설(anthropomorphism) - 신에게 인간의 본질이나 속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주장이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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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히려,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

여기서 저는 그 부분을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인간의 죄를 들추어낸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오죽했으면, 신을 닮았다고 하는 그 인간의 모습을 모방해서 오셨을까?” 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는 그대로 하시면서, 그렇게 하시면서 그 안에서 폭파를 시켜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인간을 닮은 신이 오니까, 인간들은 “얼씨구나!” 라고 하면서, 그렇게 다가온 신을 너무나도 싶게 자기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줄로 알고, 즉 자기들에게 호감을 가진 줄 알고, 마치 인간이 인간을 대하듯이 그렇게 쉽게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마치 천사가 나그네처럼 오니, 그들을 낯선 손님을 대하듯이 해버리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인간이 인간을 대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만큼 낮아져야, 그래서 우리 얼마나 인간이 신을 얼마나 얕보고 있는지, 그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기회가 된다는 말이다.

◈ 인간의 능동성은, 곧 악마의 능동성 !!

아무튼 인간은 이런 능동성을 발휘하는데, 그런데 여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인간의 능동성이 아니라 악마의 능동성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능동성은 곧 뱀의 후손의 능동성이란 말이다. 그렇게 보면, 인간에게 능동성은 없고, 결국은 무엇인가?

먼저 차지한 놈이 임자인데, 즉 마귀가 먼저 인간을 먹고 난 뒤에는, 우리 인간 속에는 마귀의 능동성만 나올 뿐이지, 그래서 우리 인간은 마귀가 시키는 대로 꼼짝도 못하는, 그러한 일종의 가재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안에 필요한 도구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2장에서 강도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이다. 즉 “강한 자를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라고 말이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 인간의 ‘자율성’과 ‘자유의지’ !!

그렇게 인간은 자기는 나름대로 능동적이라고 그렇게 까불고 설치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자율성’과 ‘자유의지’ 라는 것이다. 그것이 모두 교회권력을 위해서 나온 신학적인 개념들인데 말이다. 그러니 이런 자율성과 자유의지는, 바로 인간 속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악마의 자율성과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악마는 타락한 천사인데, 천사가 무엇을 주장하다가 그렇게 되었는가? 즉 천사가 하나님과 싸웠던 이슈가 무엇인고 하니, 즉 “우리가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도 어느 정도는 알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자유를 주세요” 라고 해서, 일종의 자유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피조물인 천사 주제에 말이다.

◈ 악마의 성질과 성격이 그대로 인간에게 !!

그렇게 천사가 피조물인 주제에 하나님에게 대들면서, 마치 하나님처럼 굴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성질과 성격이 그대로 우리 인간에게 주어졌는데, 그래서 이제는 우리 인간이 그만 일종의 대리자가 되어서 앞장을 서서 선동을 하는데, 물론 그 배후에는 악마가 있고 말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무엇인고 하니, 그 배후 조종자를 끄집어내기 위한 더 깊은 저주의 층과 층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뒤에서 조종하는 놈들은 빨리 나와! 내가 다 알아” 라고 하는데, 그래서 마지막에 누가 나오는가? 바다에서 뱀이 기어 나온다는 것이다. 짐승이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럼, 진작에 나오지”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 앞에 있는 놈들은 그야말로 악마에게 도장을 마구 찍힌 놈들인데, 이렇게 도장이 찍혔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예속’ 이란 것인데, 그러니 완전히 그들은 노예라는 말이다.

◈ 김정일과 그 일당의 경우에 !!

그러므로 우리 인간을 김정일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번에 서해안에서 군함이 침몰하고 난 다음에 한나라당에서 뭐라고 지껄이는고 하니, “김대중과 노무현이 마구 퍼주었는데, 그런데 돌아온 것은 어뢰였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다 똑같은 놈들과 년들이 하는 헛소리인데 말이다. 

북한은 하나의 정치집단이 아니고 종교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두 한국의 무속신앙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특히 조용기의 순복음 교회가 그것을 잘 보여주는데, 그들은 그야말로 종교집단이란 말이다. 아직도 조용기가 그 배후에 버티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덩치가 큰 순복음 교회가 무너지지 않고 지탱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조용기가 미쳐버린다고 하면, 물론 지금도 미쳐있지만 말이다(ㅋㅋ). 그런 교회도 순식간에 무너지고 마는데, 물론 돈이 되는 쪽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조용기와 자기 마누라, 그리고 아들이 어느 정도 틀어쥐고 있으니 저렇게 버티고 있지만 말이다.

문선명의 통일교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가 사라지고 나면 돈이 되는 쪽으로 모두 무너지고 만나는 것이다. 통일교에도 돈이 되는 것들이 제법 있는데, 방산업체도 있고, 또한 일화 프로축구단도 있고 말이다. 그런 것들을 하나씩 들도 다 튀어버린다는 것이다.

◈ 무당이 있어야 나라꼴이 !!

아무튼 한국민족의 경우에는 무당이 꽉 잡아주어야 하는데, 즉 단군의 정신이 무엇인고 하니, 환인과 환웅, 그리고 단군인데, 여기서 환인은 신이고, 환웅은 메시야인데, 그 환웅이 곰과 더불어서 단군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단군이 없을 때, 즉 신과 메시야만 있을 때, 즉 성부와 성자만 있을 때 그 정신이 무엇인고 하니, “모든 생물체를 이롭게 하라”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환웅에서 단군으로 넘어오면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 “모든 인간을 이롭게 하라” 라는, 그것이 바로 소위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라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롭게 한다” 라는 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그것이 곧 주체사상인데, 즉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단군사상인 홍익사상이 곧 주체사상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단군은 무당이란 뜻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정리하면, 즉 “한 민족은 무당이 있어야 나라꼴이 된다” 라는 것이다. 전두환과 같은 무당이 있어서 마구 조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백성들은 누군가가 때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민족성이 그렇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샤머니즘 사상이니 말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북한은 하나의 종교단체인데, 그러니 일종의 통일교 집단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김일성이란 말도 들어도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는 말이다. 그런 종교단체를 정치적으로 접근하면 안 되는데, 쌀이든 옥수수든 퍼주면 다 김일성이 은덕으로, 즉 모든 것을 다 김일성 덕택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북한에는 오직 김일성 종교만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 종교집단은, 파고 들어갈 틈이 없어 !!

제가 북한을 종교집단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은 전혀 파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북한에서 핵을 만들고 하는 것은 같이 죽자는 소리인데, 그런 곳에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물론 남한도 큰소리칠 입장은 전혀 아니고 말이다.

이런 인간의 능동성이 주체사상이고, 그것이 홍인인간에서 나왔는데, 그렇다면 “인간을 스스로 이롭게 한다” 라는 것이, 그것은 바로 ‘신’ 이라고 하는 역시 신 위주가 아니라 인간위주라는 것인데, 그것이 단군신화의 포인트라는 것이다. 즉 단군신화의 모티브가 곧 “인간은 오직 인간을 위해서 있다” 라는 것이란 말이다.

흔히 ‘홍익(弘益)’ 이라고 해서, 널리 이웃을 어쩌고 하는데, 그것은 다 구라이고, “나는 오직 나만을 위해서” 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주체사상인데, 그러니 신도 당연히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비단 단군신화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고대신화의 특징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 역시, 배후에 마귀가 있기 때문에 !!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배후에 마귀가 있기 때문인데, 즉 악마는 날마다 하나님께 도전을 하는데, 그러니 인간의 싸움은 인간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우리 식으로 하는데, 신은 도와줄거야? 말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무엇을 하는가? 매일같이 싸우는데, 즉 “예수님, 내가 하는 일에 도와줄거요? 말거요?” 라고 말이다. 그러한 무속신앙에서 나온 것이 곧 한국교회의 교회론인데, 그러니 당연히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으려고 해도 안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은 백 날을 해도 안 되는데, 일본에는 교회가 왜 저렇게 부흥이 안 되는고 하니, 일본에 처음 신학이 들어올 때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나’ 라는 그 자리를 이제 ‘사회’가 대신하는 것인데, 하지만 한국교회의 신학은 무엇인가? 무속신앙에서 나온 신학이라는 것이다.

◈ 무속신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런 무속신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무속신학은 자기 집안, 자기 새끼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철저하게 육적인데, 모든 것이 다 자기만 잘되면 끝난다는 말이다. 그래도 일본에는 나름대로 명분이라도 있지만, 한국은 그런 것도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나’ 밖에 모르니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인간으로, 그런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자기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데, 그것이 곧 ‘십자가’ 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를 진 자기 자신을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고 따르라는 것이다.

◈ 자유주의는, 인간을 위한 신학 !!

그런데 자유주의는 십자가를 지고, 그런 십자가를 진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신학인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을 위한 신학인데, 인간을 위한 교회이고 말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자기 자신” 이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주의 신학은 일종의 인간선언이고 인간승리인데, 즉 “하나님만 십자가를 지는가? 우리도 진다” 라고 말이다. 즉 예수님이 졌던 그런 십자가를 진 자기 자신에 대한 환호성, 혹은 경배, 그것이 곧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정용섭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데, 즉 인간이 행한, 인간은 그렇게 자기 실적을 보고싶어서 환장을 한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96페이지를 살펴보자.

** 성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하나님의 일이란, 바로 그런 일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성령을 통해서 깨닫는 일뿐이다. 자신이 멸망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자임을 자인하는 것이 곧 그 성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이다. 이것이 바로 말씀자체가 움직인 능동성이다. 과학은 이런 능동성을 발휘할 수가 없다. 오직 그것들은 수동으로만 움직일 뿐이다.

◈ 과학은, 결코 능동적이지 않아 !!

과학은 무엇을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아이디어나 힌트가 있어야 하는데, 즉 연구를 한다고 해서 과학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돌발적인 어떤 것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일단 자기가 할 것은 다 해놓고, 그 다음에는 기다린다는 말이다.

물론 동양에도 그런 것이 있는데, 즉 “인간은 자기가 할 도리는 다해놓고, 그 다음에 신의 뜻의 기다린다” 라고, 그것을 “지천명(知天命)” 이라고 하는 말이다. 물론 서양의 속담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는 돕는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바로 그것이 과학정신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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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명령을 알았다는 뜻으로 사람(선비)의 나이 50살을 뜻함.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로서,
나는 나이 열 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三十而立),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四十而不惑),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五十而知天命),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고(六十而耳順),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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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 ‘과학’ 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을 거론하기는 하기지만, 하나님은 그냥 인간이 벌려놓은 일에 힌트와 아이디어와, 그리고 힘만 제공해주시면, 그렇게만 해주시면 그야말로 아주 참한(?)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십자가의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 잠시, 중세의 신학과 종교개혁을 !!

중세의 신학이 처음에는 복음으로 시작했다가 교회가 생기고 난 다음부터는, 그 교회가 세상 권력에 참여하고 되었는데, 그렇게 되니 교회자체를 키우기 위해서 구제와도 같은 여러 가지 사업을 통해서 권력집중화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말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교회=권력”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국가권력이 되어서 계속해서 나오다가, 루터와 칼빈이 등장하면서 신학 속에 있는 복음이 아닌 헬레니즘 사상이, 즉 히브리 사상이 아닌 헬라사상인데, 즉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 사상이란 말이다. 요즘 국가부도가 어떻고 하면서 시끄러운데 말이다. 즉 로마헬라의 사상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런 사상이 여기 신학에 접목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중세신학에 있어서 로마헬라사상을 뽑아내고, 거기서 원래 복음적인 것만 따로 챙겨서 새롭게 해보겠다는 것인데, 루터와 칼빈이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여기서 무엇을 빠트렸는고 하니, 중세사상에는 헬레니즘만을, 그것을 고대의 로마사상이라 할 수 있는데, 아무튼 이런 것이 어려운데 말이다.

◈ 아하, 그래서 ‘교회=권력’ !!

그러니 중세신학에는 옛날의 그런 그리스나 로마사상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서 로마헬라 사상을 빼내게 되면, 그만 권력만 남게 되는데, 그러니 자연적으로 “교회=권력”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교회가 그만 힘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그러니 헬레니즘만을 뽑아내면 안 되고, 십자가의 복음으로 이 권력도 함께 뽑아서 버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터와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그것도 일종의 쿠데타인데, 그러니 힘이 없으면 제대로 종교개혁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일반 민중들은 어느 것이 복음인지, 그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 새로운 교회가 없는가?” 라고 나오는데, 즉 자기 마음에 드는 참한 새로운 교회를 찾는다는 말이다. 귀족들만 폼을 잡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들과 같은 농민들도 다같이 자미나게 다닐 수 있는 그런 교회를 말이다. 

◈ 천국은 교회를 통해서 ??

왜 그들이 교회를 고집하는고 하니, 이 교회 위에 천국이 있기 때문인데, 즉 “천국은 교회를 통해서 간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루터는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까, “천국은 교회를 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즉 ‘성경을 통해서’, ‘오직 믿음으로’, ‘만인 제사장으로’, 간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 성경, 믿음, 만인 제사장 !!

하지만 이러한 루터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민중들이 거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신부들이 한 말만을 들었지, 자기들이 직접 성경을 보면서 문자를 해독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 어느 정도 성경이 인쇄가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문자를 해독하는 자들만 값비싼 성경책을 보는 것이지, 무식한 민중들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말씀이 있고, 또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 그리고 만인 제사장설, 즉 모든 사람이 다 제사장이라고 하는, 그러한 세 가지를 가르치는 교회로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라는 것은, 영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인데,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를 빌미로 해서 눈에 보이는 교회를 이야기하게 되면, 그러면 교회가 하나의 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이 루터에게 배운 칼빈인데, 그래서 그가 그야말로 정치적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바로 그때 ‘나라’ 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러니 그 나라가 무엇인고 하니,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끼리 같은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 혹시 ‘보스니아 내전’을 아세요?

혹시나 ‘보스니아 내전’ 이라고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는데, 그것이 참으로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 당시의 43프로가 이슬람(보스니아)이고, 또한 14프로가 그리스 정교회(세르비아)이고, 그리고 나머지 23프로가 카톨릭(크로아티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치는고 하니까, 다수가 아닌 소수가 그만 다수를 포위해서 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그만 이 이슬람을 작살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슬람은 자기들끼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뭉쳐야만 되는데, 그런데 자기들끼리도 그만 분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 복잡하게 되었는데, 보통은 종교전쟁을 하게 되면 같은 종교끼리는 뭉치는 법인데,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얼마나 어설픈지, 자기의 종교가 아니라 현재 자기가 장사하고 있는 가게를 중심으로, 그렇게 자기 땅을 중심으로 해서, 그렇게 해서 세르비아인들은 자기들끼리 또 독립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따지고 들어가 보면 종교가 문제가 아니라, 결론은 “내 땅을 왜 건드리는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같은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종교와 상관이 없이 자기들끼리 또 뭉치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내전이 그만 엄청나게 복잡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기에는 종교에 목숨을 바치는 것이 곧 종교전쟁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막상 전쟁이 일어나게 되니 돈이 종교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종교보다 돈이 말이다. 그러면서도 한쪽에서는 이슬람교도를 다 죽인다고 하면서 종교청소를 해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재판이 걸려있는, 그런 현대사에 있어서 그야말로 끔찍한 사건이라는 말이다.

◈ 인간들은 아무리 종교개혁을 해도 !!

그것이 바로 종교전쟁인데, 그러니 루터와 칼빈이 한 종교개혁은 명분은 그야말로 참 좋아 보이는데, 그런데 실제로 그 내막을 살펴보면 땅 싸움이라는 것이다. 즉 땅을 가진 영주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그래서 힘이 있는 쪽에 붙어야만 밥이라도 빌어먹고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이 제 아무리 종교개혁을 하고 무엇을 한다고 설치고 해도 그 힘만은, 즉 권력만은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그 권력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권력을 인간이 쥐고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악마가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인간의 종교개혁과 같은 것에 지는, 그런 연약한 마귀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재림을 해야만 끝이 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재림 예수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종교개혁을 한다면서 난리를 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루터나 칼빈의 경우도, 자기들이 재림 예수가 아닌 다음에는 그냥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자기들이 한다고 설치지 말고, 모든 것을 주님께서 약속대로 하시도록 말이다. 그냥 복음만 전하다가 죽으면 되는데, 무슨 개혁을 하고 말고 하느냐는 것이다. 구름이라도 탈 실력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ㅋㅋ).

◈ 내가 죽고 난 뒤에 발표해다오 !!

아무튼 과학이라는 것은 수동적인데, 그리고 초창기의 과학은 그냥 과학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권력자의 눈치를 보아야 했는데, 즉 “이런 과학을 해도 됩니까?”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아무리 멋진 과학적인 진리를 발견했더라도, 그것을 발표하는 것은 50년이나 100년 뒤에 하게 된다는 것이다. 발견한 그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말이다.

사실 처음에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할 때는, 사실 자기가 진화론을 그렇게 연구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냥 “아마 그렇게도 볼 수 있겠자” 라고 했지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윈의 진화론이 되었지? 타이밍이 좋았나? ㅋㅋ)

◈ 진리를 안 사람은 양보가 없어야 !!

제가 개혁신학회에서 ‘70이레’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때 옆에 있는 사람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비역사적이라고 하지 말고, 새로운 관점이다” 라고 하자는 것이다.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하는 것인데,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도 일종의 권력이라고 말이다. 그야말로 하는 짓들을 보면 구역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사람은 권력이 전혀 두렵지가 않다는 것이다. 제가 지난 수요일의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진리를 안 사람은 양보가 없다” 라고 말이다. 전혀 양보할 이유가 없는데, 왜 양보를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교재 96페이지를 살펴보자.

**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인간들의 법 해석을 고발하는 설교이다.

그러니 이 산상설교는 수동적이라는 말인데, 즉 산상설교는 무엇을 해서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무엇 무엇을 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 라는, 그러한 법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다음과 같이 되는데, 즉 “너희들은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저렇게 된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즉 “너희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라는 것은, “너희들은 그 선을 벗어날 수 없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리고 97페이지에 본격적으로 ‘성화론’이 나오는데, 그것은 다음시간에 하자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변함없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우리가 능동적으로 무엇을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오직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살려주신다고 하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4,28 오후 4시 10분에 마침.

                                 계속해서 비는 내리고, 장사는 안 되고, 에피밸리는 상한가 치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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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고역사 - 2차대전 이전에는 ‘유고’ 라는 나라는 없었고. 지금처럼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 6개의 소국으로 분리되어있었음. ‘조세프 티토’ 라는 빨치산 지도자가 종전이 되자 발칸의 6개 나라를 통합하여 건국한 것이 유고슬라비아임. 이때 통합을 주도한 나라가 세르비아인데, 원래 이 나라가 1차대전 당시 분쟁의 화근이 된 사라예보 총격사건의 진원지였고,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계였으며, 유고통합과정에 소련의 지원을 받았음. 티토는 유고 건국이후 소련의 위성국가에서 이탈하여 독자적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었고 소련공산당과는 다른 길을 감. 티토는 새로운 방식의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위해서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국가 대통합을 이루었지만, 근원적인 민족, 언어, 종교 등 이질적 문제는 해결 못함. 90년대 티토 사후에 다시 6개 나라로 분리되어, 카토릭권은 유럽으로, 동방정교파는 러시아로, 이슬람파는 미해결상태로 우왕좌왕하다가, 보스니아 사태, 코소보 사태, 세르비아 인종청소라는 비극까지 다달음. 유고는 공산화되는 과정에서도 민중탄압이나 다른 국가들처럼 공산당식 혁명은 없었음. 그래서 서방세계에서도 티토의 위대성을 인정하고 있음. - 네이버지식에서

1. 유고 - 하나의 국가 
2. 두개의 언어 - 슬라브와 이슬람
3. 세 개의 종교 - 카토릭, 이슬람,  동방정교
4. 4개의 인종 - 슬라브족, 세르비아족, 이스람족, 게르만족
5. 5개의 국가연합체 -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6. 6개의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고 해서 ‘123456의 나라’ 라고 함.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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