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15 피21강 법적인간 vs 설레임(십자가의 율법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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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315피p085법적인간

피21강 법적인간 vs 설레임 (십자가의 율법기능)

[10 대구강의 5] - [피 21] - 법적 인간
                                                                                
                                                          10,03,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먼저 ‘공간’에 대해서 !!

오늘은 교재 86페이지부터 하겠는데, 먼저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살펴보면, 85페이지에서 낙엽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제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 사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데로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공간과 시간 속인데 말이다. 지금 우리가 진도를 나가는 것이 이 공간에 대한 부분인데, 즉 우리 인간은 ‘나’ 라는 것을, 자기 안에 있는(그리고 자기가 속해 있는?) 공간을 통해서 발견한다는 것이다.

◈ 시몬, 낙엽이 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예를 들어서, 낙엽이 떨어져서 슬프다고 한다면, 그러면 낙엽이 웃는다는 것이다. 낙엽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내가 떨어지는데, 왜 당신이 슬프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바깥에 있는 공간과 주고받으면서 자기를 규정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낙엽을 치우는 환경미화원은 짜증이 나는데, 그래서 “낙엽야, 니는 왜 내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떨어지는 낙엽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는데, 하지만 그 환경미화원은 그 낙엽을 쓸어서 치워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환경미화원이 낙엽을 치우지 않으면, 자기는 자기가 속해있는 직장에서, 그것이 대부분 비정규직 공무원인데, 거기서 그만 잘리기 때문에, 그러면 자기 가족들이 굶어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즉 공간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몸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그러니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즉 이 공간은 자기를 위한, 즉 ‘나만을 위한 공간’ 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지난 시간에 설명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 교재 86페이지를 보면, 한번 살펴보자.

** 그러나 사도바울은 다르다. 사도바울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사도바울은 자기를 찔러 자기 내부를 공개한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결코 이런 고백을 할 수 없었다.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사도바울 속에 이미 선악적 의식구조 말고 또 다른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 뭔가 기존의 것을 철폐하고 정죄하고자 하는 낯선 원리가 작용한다. 

여기에서 이렇게 사도바울이 놀라운 주장을 하는데, 인간 내부의 공간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내부를 찔러서 공개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우리 인간에게는 각자 자기 내부에 공간이 있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그만 과학과 충돌이 된다는 것이다.

◈ 과학 - 이 세상은 에너지장(場) !!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보면 인간 내부에 무엇만 있는고 하니, 세포만 있는데, 그 세포는 핵과 세포질로 되어있고 말이다. 그것이 인간 내부의 공간인데 말이다. 물론 그 핵 안에는 DNA와 여러 가지가 있고, 그리고 그 안에는 분자로 되어있는데, 그 분자 안에는 원자로 되어있고, 또 그 원자 안에는 원자핵이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원자핵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러니 결국 남는 것은 에너지, 즉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에너지장, 즉 영역(필드)라는 말이다. 그러니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에너지로 되어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칼을 가지고 공기를 찌르면 쉽게 들어가는데, 그런데 우리 배는(?) 잘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는 더 안 들어가는데, 그래서 이 칠판을 찌르면 들어가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칠판의 에너지가 아주 강렬하기 때문에, 즉 이 매직의 뾰족한 힘보다 더 세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공기는 에너지가 느슨하기 때문에, 찌르면 쉽게 움직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학은 이렇게 모든 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공간으로 하는데, 그 공간이 바로 에너지에 의해서, 즉 에너지의 농밀함, 즉 에너지가 강렬한 곳과 에너지가 허술하게 놓여있는 것과의 차이를 가지고서 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에너지, 즉 힘이 농밀하게 뭉쳐져 있으면 그것이 구체화가 되고 하나의 물질이 되는데, 하지만 힘이 느슨하게 되어있으면 그것을 두고 진공상태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막(膜)으로서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보게 되면 죽음이라는 것은, 이 막이 너무 허술해서 그것이 터져 버리면, 안에 있는 농밀한 것이 바깥으로 나와서, 그만 밖에 있는 에너지와 혼합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동양에서는 어떻게 보는고 하니, 내부의 기와 외부의 기가 만나서 모든 것이 다 해소가 되어버린다고, 그런 식으로 본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이런 과학시대에 살아가고 있는데, 여러분은 과연 이런 과학을 믿는가요?

그런데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얼마나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데, 그것이 바로 내부공간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방금 이야기한, 즉 인간은 세포로 되어있고, 그 세포는 분자와 원자로 되어있고, 그 원자는 에너지, 즉 힘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은 에너지장으로 가득하게 차있다는 것이다.

◈ 그러면 사도바울은 과연 인간내부를 어떻게?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내부공간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아까 읽은 교재 86페이지에 나오는데, 거기에 로마서 7장 22절에서 23절의 말씀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과연 에너지인가? 사도바울은 자기 내부공간을 설명하면서 에너지로 이야기했는가?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 프로이드가 말하는 의식과 무의식 !!

이러한 내부공간을 이미 사도바울이 2000년 전에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을 최근에 들어와서 철학에서 누가 말했는고 하니, ‘프로이드’가 그렇게 언급을 했다는 것이다. 프로이드가 말하기를, 인간은 의식 말고 무엇이 있다고 했는고 하니, 그는 우리 인간 내부에는 의식 말고도 또한 무의식이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무의식이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내부에 무의식이 있다고 하니, 여기에 강렬하게 반발한 자들이 바로 과학자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두뇌를 다루는 정신 과학자들이 그렇게 반대를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현대 정신과학에서는 이 프로이드를 싫어하는데, 물론 라캉도 싫어하고 말이다. 심지어 그런 부류의 대부분 의사들을 두고 사이비라고 했다는 것이다. 의사는 치료만 하면 되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방금도 이야기했지만 과학은 모든 것을 에너지로 다 설명을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에너지로 설명해야 되는 과학자가, 에너지가 아닌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설명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칙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프로이드와 라캉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너희들이 말하는 에너지라는 것은, 그 에너지가 뭉쳐지게 되면 의식이 되는데, 그러니 너희들은 무의식은 모르고 의식으로 알아차리는 에너지만 상대하는 것이지, 그래서 인간 속에 의식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무의식이 있다는 것은 설명하지 못하지 않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두뇌 속의 에너지의 흐름으로 설명할 것이 아닌데, 만약에 과학자들처럼 그렇게 되면 무의식으로 피어오르는 것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말하는 에너지와 정신 분석학자들이 주장하는 무의식을 통합해서, 그런 두 가지를 다 수용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물질적 의미론(?)’ 이라는 것이다.

들뢰즈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 즉 인간은 물질에 의해서 움직이면서, 거기에서 어떤 이미지가 나오게 되면, 그 이미지가 곧 무의식이 된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과학도 배척하지 않고, 또한 무의식도 받아들이는 식으로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과학과 무의식이 대립이 된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 - 인간내부에는 선과 악이 !!

그런데 사도바울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 인간 내부에는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은 무엇과 무엇이 싸우는 공간인고 하니, 로마서 7장 23정을 보면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선과 악이 싸우는 내부공간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과학적으로 한다고 해서 보이는가? 즉 현미경을 가지고서 그 인간내부를 들여다보면 선이 보이고 악이 보이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가 칼을 가지고 배를 째고, 또 그 안을 들여다보면 선이 보이고 또 악이 보이느냐는 말이다.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 선과 악은 어디에 있니? 어서 나와라 !!

그러면 이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식을 가지고, 즉 인간의 눈을 가지고서, 그렇게 눈이 있으니 안과적인 요소이고, 또한 귀가 있으니 청각적인 요소인데, 그런 감각적인 요소를 가지고서 인간을 제 아무리 해부하고 또 해부를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전혀 선과 악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사도바울을 보고 “여보세요? 그만 당신이 틀렸소!”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아예 성경자체를 접근하지 못한 경우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냥 과학책이나 혹은 동양 의학책을 들고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요즘 박기삼 씨가 동양의학에 푹 빠졌다고 하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아니, 어떻게 복음을 전하다가 동양의학에 빠지게 되었는지, 도저히 그 이유를 모르겠다” 라고 했는데, 인터넷에 보면 그런 내용이 들이 올라와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 4체질 설에 빠지게 되었는지, 왜 음과 양에 빠지는지 말이다. 그런데도 그 양반은 동양의학적으로 설명을 해야 성경이 보인다고 하고 말이다.

◈  ‘선악과’를 해부하면 !!

그건 그렇고, 우리가 설령 ‘선악과’ 라는 나무를 가져다가 현미경으로 제 아무리 살피고 또 살펴본다고 해도, 거기에서 “인간들은 이것을 따먹으면 죽는다” 라는 것이 나오겠는가? 선악과 나쁜 호르몬이 있고 나쁜 물질이 있는가? 그 나무가 방사선에 오염이 되었는가? 그러니 과학은 제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또 해도, 거기에서 천국이 나오지 않고 지옥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선도 나오지 않고 악도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과학적인 사고방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사고방식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을 하기에 앞서서 먼저 프로이드를 조금 더 이야기하면, 프로이트는 의식 밑에 무의식이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프로이드를 공격하면서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프로이드가 말한 그 무의식은 의식 밑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은 미처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의식의 일부라고 한다는 것이다. 보통 정신과 의사들이 프로이드를 그렇게 설명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 이렇게 의식이 있다고 하면, 기존에는 의식을 이 정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프로이드가 나와서 여기에 있는 이 의식도 만들었다(발견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왜 그런 주장을 하는고 하니, 만약에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이 단절이 되었다고 한다면, 무의식이 있다는 말을 의식적으로 할 수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참 어려운데,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요?

◈ 외계인을 보았습니까?

예를 들어서, “당신은 외계인을 보았습니까?” 라고 하면, 우리는 아무도 아직 외계인을 보지 못했는데, 그런데 만약 진짜 외계인을 보았다고 한다면, 자기가 외계인을 보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고 하니, 외계인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납득이 되게 할 때,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아하, 외계인이 있구나” 라고 모두가 수긍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외계인이 있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그냥(?) 납득이 되어버린다면, 그것은 외계인을 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지구에 있었는데 그동안 몰랐던 것에 불과하지 말이다. 이해가 됩니까? 예를 든다고 하는 것이 더 어렵게 되었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동안 몰랐던 것을 하나 더 알았던 것을 가지고서, 마치 그것을 애초부터 단절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그렇게 알면 그것은 연결이 되는 것이지, 결코 단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단절이 되려고 하면, 아예 있고 없고 하는 것 자체가 완전히 없어야만, 즉 그렇게 말을 하지 말아야만 단절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못 믿어 !!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했을 때, 특히 여기서 믿음을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을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성령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믿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오해서 뭐라고 하는가? “아하, 여기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세계를 우리가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표현을 하는구나”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힘이, 보이는 세계에 이미 있는 식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납득이 될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논리로서 증명을 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증거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즉 증인으로서 목격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이, 그냥 논리로서 설명해서 누구든지 믿을 수가 있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다. 말을 하다가 보니 또 다시 어렵게 되고 말았는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 신학은, 구원의 능력이 아닌 인간들의 장난감 !!

바로 그렇게 논리로서 설명해서 누구든지 믿을 수가 있다는 것이 곧 신학인데, 그래서 신학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코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냥 지식만 자꾸 쌓이고 또 쌓이지 말이다. 그렇게 구원의 능력도 되지 않는 신학을 지금도 신학생들이 배우고 있는데 말이다. 물론 신학이 좋아서 배우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진짜 신학을 제대로 공부했다면, 그런 신학을 배우고 나서 뭐라고 해야만 하겠는가? “여러분, 이것은 전혀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이것은 인간들의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신학교 교수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개척교회가 고생스럽고 하기 싫어서 외국으로 도피한 자들인데, 물론 자기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말이다. 그들은 도피하면서 뭐라고 구라를 치는고 하니, “가르치는 것도 은사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무슨 그런 성령의 은사가 있는가? 인간을 책망하는 것이 성령의 은사이지, 가르치는 솜씨를 발휘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은 은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 사도바울 - 말씀이 인간 내부를 !!

아무튼 사도바울은 인간의 자기 공간내부를 이야기할 때 선과 악을 언급했는데,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율법이 우리 내부를 모두 다 들추어낸다는 것인데, 즉 하나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말이다.

예를 들어서, “탐내지 마라” 라는 말씀이 오게 되면, 말씀 자체가 그것을 우리가 지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역사하게 되면, 우리 자신도 몰랐던 우리의 내부공간이 갈라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그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순간에, 말씀이 그만 우리 자신을 해부해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말씀이 그만 우리를 푹 찔러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은 잠자고 있던 우리 속에 있던 악이 그만 발작을 일으키게 되면서, 즉 “탐내지 말라” 라고 했으면, 그렇게 “하지 말라” 라고 한 것은 더 하고 싶고, 또 “하라‘ 라고 하는 것은 그만 하기 싫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룩함과 반대가 되는 더러움이 아예 처음부터 우리 내부에 상주해 있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와서 들추어내니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율법이 올 때 우리 내부가 공개된다는 것은, 그것은 사도바울 자체가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데, 즉 성령에서 의해서 율법을 사용하고 성령에 의해서 그 성도를 다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만약에 성령이 오지 않았다면, 즉 인간내부가 공개되지 않은 한, 우리 인간은 자기 껍데기만, ‘율법 지킴’ 이라는 자기 의로움만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 도덕은 개인적인 윤리 !!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관계인고 하니 계속해서 ‘의식관계’ 라는 인데, 즉 의식의 표층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도덕인데, 도덕과 윤리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도덕은 쉽게 생각해서 ‘도’ 라는 글자를 떼면 되는데, 그러면 ‘덕’만 남는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마음씨가 좋은 것을 두고서 ‘덕스럽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도덕이라는 것이다. 즉 도덕은 개인적인 윤리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반해서 윤리는 무엇인고 하니까,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라는 것이다. 즉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법으로, 즉 서로 예의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는 오줌을 누지 않는다든지 말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무엇을 발견했는고 하니, 이 ‘덕’ 이라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양심’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양심이나 덕은 내부적으로 스스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오는고 하니까, 바깥에 있는 윤리가 세뇌를 시켜서, 즉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외부에서 이미 있던 법적인 체제가 인간 내부에서 작용한다는 말이다. 즉 외부에서 있는 것이 그대로 내부로 주어져서 들어온다는 말이다.

◈ 잠시 ‘프로이드’를 !!

그렇게 그대로 외부에서 들어온다고 본 것이 바로 프로이드의 이론인데, 그런데 그 다음에 ‘라캉’ 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외부에서 그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걸러낼 것은 걸러낸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그렇게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챙긴다고 했는데, 지금은 거기까지 나아갔다는 말이다.

다시 정리해서 이야기를 하면, 옛날부터 있었던 이론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데, 그러니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서, 우리 인간은 내부적으로 선한 것이 있다는 것이고 말이다. 그것은 동서양이 다 마찬가지로 주장했다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소위 ‘4단7정’ 이라는 것이 있어서, 즉 인간은 내부적으로 착하다는 것인데, 소위 성선설이라고 해서 순자가 아닌 맹자이지 싶은데, 아무튼 인간은 착하다는 것이다. 화를 내는 것은 그 순간뿐이고, 다시 착함으로 되돌아온다는 말이다. 물론 그런 착함이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교육이라는 것이 가능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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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칠정 [四端七情] - 성리학(性理學)의 철학적 개념 가운데 하나.
사단(四端)은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 즉 선천적이며 도덕적 능력을 말하며, 칠정(七情)은 인간의 본성이 사물을 접하면서 표현되는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을 말한다. 사단은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 상편에 나오는 말로 실천도덕의 근거로 삼았다.
* 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을 불쌍히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
* 수오지심(羞惡之心):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 사양지심(辭讓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 시비지심(是非之心): 잘잘못을 분별하여 가리는 마음
사단은 위 네 가지 도덕적 감정을 말한다. 그리고 칠정은 《예기(禮記)》의 〈예운(禮運)〉과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로, 기쁨(희 喜), 노여움(노 怒), 슬픔(애 哀), 두려움(구 懼), 사랑(애 愛), 미움(오 惡), 욕망(욕 欲)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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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동양의 주장인데, 즉 착함이 있어야 그 착함의 속성을 자꾸만 개발을 해낼 때, 이 사회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착하다, 착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사형제도도 없애고, 교도소는 말 그대로 교화를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사회에 나와서도, 사회에 이바지를 하고 또 공헌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야 사회발전의 정당성이 보장되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던 그 시절에서 프로이드가 무엇을 발견했는고 하니까, 인간의 의식은 무의식에서 생긴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무의식에는 착한 양심이 있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프로이드가 인간의 내부를 살펴보니 그 안에는 3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 이드(리비도), 슈퍼에고(초자아), 에고(자아) !!

먼저 하나는 ‘리비도’ 라고 하는, 즉 성질이 아주 고약한 동물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개돼지와 같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 다음에는 ‘초자아’ 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프로이드는 외부에서 오는, 즉 부모로부터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은, 그런 외부의 법이 ‘초자아’ 라는 양심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리비도와 초자아 둘 사이에 에너지가 있어서 서로 흥정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흥정하는 주체를 ‘에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앞에 말한 리비도는 ‘이드’ 라고 하고 말이다.

다시 정리를 하면, 인간에게는 ‘이드’ 라는 동물적인 요소가 있고, 또한 ‘에고’ 라는 흥정하는 요소가 있고, 그리고 ‘초자아’ 라고 하는 자아보다 뛰어난 것으로서, 즉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들었던 잔소리 같은 것으로서, 그러니 부모는 평소에 자식에게 잔소리를 많이 해야 결정적인 순간에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세계가 의식이 없는 무의식의 세계인데, 의식의 세계는 여기서 흥정된 에고가 튀어나올 때, 그것이 의식의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드와 초자아가 평소에는 그냥 잠잠히 있다가 언제 들통이 나는고 하니, 밤에 잠잘 때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꿈속에서는 그야말로 괴물과 같은 놈이 설쳐대는데, 즉 자기가 평소에 꺼려했던 살인이나 강간과 같은,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이 다 모여서 꿈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 신자는 꿈이 아닌 기도할 때도 드러나지만 말이다(ㅋㅋ).

◈ 그런데 라캉은 주장하기를 !!

아무튼 프로이드는 이렇게 보았는데, 그런데 프로이트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라캉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이런 프로이드의 이론에 기초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외부에서 오는 초자아, 즉 양심이라고 하는 것조차 인간의 내부에서 우리 인간이 조절한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양심을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 양심을 조사해보면, 전부가 다 같은 양심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양심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범죄자의 양심이 다르고, 그렇게 사람마다 각자 각자의 그 환경에 따라서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구조자체를 아예 없애버리고, 이것을 유보시키자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텅 빔’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항상 텅 빔인데, 그런데 이렇게 텅 빈다고 하는 것은 뭔가 채워졌다가 며칠이 지나고 나면 나가버리는, 또 나가버린 그 빈자를 채웠다가 다시 나가버리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파도가 이렇게 치고 많이 있는데 거기에 양동이가 놓여있다고 하면, 그 양동이에 물이 담겼다가 빠졌다가 하는데, 그러면서도 파도는 계속해서 치고 있고 말이다. 그러니 이 양동이에 물이 언제나 있기는 하지만, 같은 것이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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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크 라캉 [Jacques Lacan, 1901. 4. 13~1981. 9. 9] - 프랑스의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언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정립하여 ??프로이트의 계승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901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처음에는 철학을 배웠으나 후에 의학 ?정신병리학을 배웠다. 1932년 프로이트의 지도를 받았으며 《개성에 비추어본 망상증》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평생을 정신과의사 및 정신분석학자로 지냈다.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탈퇴하여 1953년 프랑스정신분석학회를 창설하였다. 1966년 논집 《에크리 Ecrits》의 간행으로 갑자기 유명해졌으며, M.푸코 등과 함께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라캉은 말년까지 무려 4백만 명이 넘는 환자를 상담하고, 언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정립하여 ??프로이트의 계승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인간의 욕망, 또는 무의식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는 것이다. 말이란 틀 속에 억눌린 인간의 내면세계를 해부한다고 하여 정신분석학계는 물론 언어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이것은 환자를 치료하는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그의 가장 큰 업적이 되었다. 그의 사후 E.루디네스코가 쓴 《자크 라캉:삶의 개요, 철학체계의 역사》(파야르 간행)가 방대한 분량(700면)으로 출간되었다. 저자는 라캉의 학문적인 업적은 인정하나 그의 거칠고 차가운 성격에다 여성편력이 심했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이론에 집착하여 독선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하였다.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그를 ??프랑스 인텔리겐치아의 마지막 거장??이라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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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텅 빈 주체 -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

그래서 이것을 두고 ‘텅빈 주체’ 라고 하는데, 즉 인간은 항상 텅 비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고 하니, 과거에는 그 주체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고 보았는데, 그런데 라캉과 지젝이 나타나서 뭐라고 주장했는고 하니,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데, 옛날에는 자기 주체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이 ‘나’는 그만 내놓은 자식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도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만 주변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그 영향을 받아서, 즉 자기 양동이에 무엇이 담기는지 자기도 모른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기를, 술을 많이 마시면 필름이 끊어진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거짓말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끊어진다고 하니 일단 그렇다고 보고, 그렇게 인간은 술을 마시면 자기가 누구인지, 즉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 사도바울 - 인간내부에는 선악과가 가득해 !!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인간이 제 아무리 자기를 연구해도 이 ‘나’ 라는 것을 선악과로 채우기 때문에 말이다. 어제도 그런 말을 했지만, 사실 우리 인간에게는 죽음은 없고 저주만 있는데, 그것이 둘째 사망인데 말이다. 그런데 둘째 사망이 보통 말하는 죽음이 첫째 사망을 지배하는데, 그래서 결국에는 둘째 사망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인간이 저주를 받았는고 하니, 선악과가 누구의 소유인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이다. 물론 생명나무도 하나님 소유이고 말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소유의 선악과를 누가 따먹었는가? 배후에서 뱀이 조종해서 인간이 따먹었다는 것이다.

◈ 아니, 선악과를 누가 따먹었지?

그런데 여기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는 입을 다물고 계시지 않는데, 즉 끝까지 책임추궁을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선악과를 누가 따먹었지?” 라고 책임추궁을 하는 것이 바로 저주가 되는데, 즉 둘째 사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자아는 사실상 처음부터 저주를 가득히 차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으니 말이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니 제 아무리 “헤헤, 나는 살았네” 라고 돌아다녀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주가 가득하게 차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 저주가 어디에 가득히 차 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내부공간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저주가 우리 내부공간을 차지하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외부에서 무엇이 오는고 하니, 거룩한 율법이 들어오게 된다는 말이다.

◈ 그런데 율법이 오게 되면 !!

그렇게 율법이 오게 되니, 평소는 자기는 자기를 괜찮은 인간으로 보았는데, 그런데 자기 내부에 가득하게 들어 있는 저주로 인해서, 그 율법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는 식으로 나아갈 때, “아하, 우리 인간은 흙이 되고, 또한 흙뿐만이 아니라 심판을 받는 것도 타고난 것이구나. 아하, 이것이 바로 아담의 형상이구나. 그것이 ‘아담’ 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운명이고 팔자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주장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을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그렇게 십자가만을 주장하니 ‘십자가’ 라는 대목만 찾아내면, 사도바울의 주장을 모두 다 아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 십자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십자가 주변에 있는 수많은 것을 마구 포진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마치 이것이 어떤 형태인고 하니,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하는 놀이 가운데 가운데 막대기를 하나 세워놓고 그 주위에는 모래를 쌓아서, 그렇게 해서 점점 모래를 치우는데 결국은 그 막대기를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벌칙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세우는데, 그런데 이 십자가를 무엇으로 세우는고 하니,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율법으로 세운다는 것이다. 즉 사도바울은 율법에서 나온 것이 곧 십자가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몽학선생이라는 것이다.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그런데 이것을 수평적인 시간으로 봐서, 율법 다음에 십자가가 아니라, 그것이 수직적으로 되어서, 즉 율법을 거쳐서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의 율법적인 기능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서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 법은 법으로만 통하는데 !!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나아가면, 이렇게 율법이 주어지게 되어서 인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왕 어려운 것 더 어렵게 하자는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인간 내부에는 선악과가 있는데, 그것이 곧 또 하나의 법이고 말이다.

그런데 법은 법끼리 서로 통하게 되는데,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으로만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 인간에 있어서 어떤 것을 해석하는 구조가 바로 법의 구조이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그 어떤 변화라도 법으로서 이해를 한다는 것이다.

◈ 오잉, to 부정사 ??

그것을 이번 서울 개혁주의 세미나에서 동사를 붙들면 명사가 된다고, 그렇게 날아가는 화살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는데, 그렇게 붙들게 되면 동사는 그만 날아버리고 명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을 영어에서는 ‘to 부정사’ 라고 하는데, 즉 동사이면서도 명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동사이지만 그 동사에서 움직임을 떼어버리면 명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날아가는 새가 있는데 그 새를 손으로 잡게 되는 순간에 어떻게 되는가? 날아간다는 것은 그만 사라지고 손에 잡힌 새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동사에 대한 모든 규정을 법적인 ‘내’가 하는데, 그러한 법 중의 하나가 바로 ‘문법’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문법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성경 스스로 움직이는 동사의 기능을 다 잘라버리고, 자기가 이해가 되는, 즉 자기의 법적인 속성이 맞는 해석만 내어놓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모인 인간들은 그런 것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

여기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을 보겠는데,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라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의 말로 듣지 않는다고 하는가? 사람의 말로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모세가 이야기해도 모세의 말로, 예레미야가 이야기해도 예레미야의 말로, 또한 이사야가 이야기해도 이사야의 말로 듣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사람의 말로 듣지 않는가? 그것이 그 뒤에 나오는데, 즉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말씀이 알아서 스스로 역사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말씀을 누가 이야기했는지, 그렇게 이야기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그냥 떼어버린다는 말이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 말씀을 감당할 인간은 아무도 없어 !!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말이라도 예레미야의 말과 분리를 시켜서, 그러니 예레미야가 한 말이 아니라 말씀이 스스로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비록 예레미야가 이야기를 했더라도, 그 예레미야가 잘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레미야를 지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니엘의 경우에도, 다니엘이 받은 계시가 다니엘을 지적한다는 말이다. 또한 요나가 본국에 있을 때 받은 그 말씀이 누구를 지적했는가? 요나 자신을 지적하니까, 요나가 그것을 알고서 자살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민수기 1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을 주니 모세가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 그럴 것 같으면 제가 죽을 랍니다. 그냥 저를 죽여주세요”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말씀을 받은 선지자의 경우에, 그 말씀을 받았다고 해서 자기가 감당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 말씀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말씀을 받게 되면 우리는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말씀을 함부로 쥐려고 하다가는 그 손목이 잘리고 만다는 것이다.

◈ 율법이 법으로 작용하게 되면 !!

아무튼 이렇게 법은 법으로 엮이게 되는데, 그래서 말씀이란 율법이 법으로 작용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반드시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저주로 작용하고, 또한 은혜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내부의 선악과의 법과 바깥에서 오는 율법이 만나게 되면, 그 율법은 그만 저주로 바뀌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 아래에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즉 저주 아래에 있게 하려고 하신다는 말이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런데 이 율법이 예수님과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게 되면, 거기에서 사랑이 나오고, 은혜가 나오고, 또한 자비가 나온다는 것이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속성, 즉 공의와 자비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런데 인간 자체가 이미 선악과 따먹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다 썩어버렸다는 것이다.

◈ 우리를 죽이시는 예수님 !!

그래서 우리 인간이 그 말씀을 선악적인 관점에서 붙잡게 되면, 그 말씀이 그 어떤 말씀이라고 해도, 심지어 십자가조차도 우리 인간은 그 십자가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마치 날아가는 새를 붙잡아서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고 하듯이 말이다. 바로 그런 식으로 자기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면, 그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저주하는, 즉 우리를 죽여버리는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슨 역사적이고 문법적인 것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말씀을 받을 때, 항상 그 주님의 말씀이 날마다 자기를 죽인다고 했는데, 자기는 그렇게 죽음에 넘기우고 자기 안에는 말씀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산다고 했는데, 그렇게 말씀의 완성자로서 예수님이 자기에게 용서와 자비와 은혜를 베푸는 방식으로 역사한다는 것이다.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자기는 날마다 죽으면서 날마다 살고, 또한 죄인이면서도 의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의 행함, 즉 자기의 의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예수님의 의 때문에 그러한데, 그래서 자기는 남에게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증거함에 있어서 이것 말고 다른 방식은 없는데, 그러니 우리에게 자살하라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되 은혜로 살아있음을 외부에 증거하면서 계속해서 살라는 것이다. 물론 주님이 죽일 때까지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살할 자격도 권한도 없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를 해보면 !!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보면, 우리 내부에 이미 선악과가 있는데, 그런데 그 선악과는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인데, 그런 하나님의 것을 따먹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 배후에는 악마가 있기 때문에, 그 선악과 자체가 우리에게 저주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둘째 사망인데, 즉 하나님의 것을 따먹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저주를 받는데, 물론 우리는 모르고 말이다.

그런데 바깥에서 선한 율법이 오게 되니,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순간에 우리 속에 잠재되어있던 악마의 본성이 드러나서 그야말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하게 되는데, 즉 “내가 나를 구원할 가능성이 전혀 없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전혀 자기는 불가능한 자임을 알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이고 말이다. 그러니 교회는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구원받을 가능성이 일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 성령을 받지 않은 육적인 내부공간은?

그러니 말씀을 전함에 있어서 무엇이든지 법적으로는 전하지 말라는 것인데, 사도바울은 바로 이런 내부공간을 성령을 통해서 소개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성령을 통해서 내부공간이 소개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것만 더하고 진도를 나가겠는데 말이다. 우리 인간이 성령을 받지 않은 육적인 상태에서의 내부공간이 어떠한지 다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벌써 잊어버렸지 싶은데 말이다.

아까 말한 낙엽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우리 인간은 낙엽이 떨어지면 왠지 슬퍼지지만, 하지만 자기 직업이 환경미화원이라고 하면 ‘슬프다’ 라는 것이 갑자기 무엇으로 바뀌는가? ‘귀찮다’ 라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낙엽이 마냥 귀찮다는 말이다.

어릴 때나 눈이 오는 것이 좋지, 나이 60이 넘어서 눈이 오면 걷기도 불편하고 귀찮다는 것이다. 신발이나 다 버리고, 낭만이고 뭐고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도 나이 65세에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퇴원을 해서, 다시 스키장에 가게 되면 그때는 또 눈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 에라, 모르겠다. 그냥 내 욕망대로 살란다 !!

그러니 도대체 이 ‘나’ 라는 인간이 어떻게 되는가? 정답이 무엇인고 하니, 프로이드이나 라캉의 주장처럼, “모르겠다” 라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모르겠다” 라고 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바로 “에라” 라는 것인데,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내 욕망대로 그냥 살란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인데,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고 같이 봉사하는 마음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아무리 성경을 보고 신학을 하고 세미나에 참석을 해도, 결국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까, “에라, 모르겠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살아가고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곧 “그냥 내비둬!” 라는 것인데, 지난번에 레비나스 이야기할 때 했지 싶은데 말이다. 그냥 자기 편안한 대로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것이고, 또한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말이다.

◈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

하지만 로마서 1장 20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라고 하는데, 무엇에 대해서 핑계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준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경말씀을 다 끊어버리는데, 목사든 장로든 간에 말이다.

그렇게 모두가 다 끊어버리는데, 그냥 자기가 편안한 대로 살아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만 되면 등산을 하고 난리를 피우는데, 그냥 자기 편안한 대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물론 “모르겠다” 라고, 그렇게 나름대로의 정답을 외쳐가면서 말이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 성도는, 신부의 설레임으로 !!

정말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모르겠다” 라는 것이 아니라, ‘설레임’으로 살게 되어있는데, 아이스크림 이름이 아니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설레임’ 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영생을 주신 분이 가까이 오고, 그분을 만나는 것이 너무 좋아서 밤잠도 설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의 목적이 있는데, 즉 “하루 빨리 죽어서 주님을 만나야지” 라고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닌 경우에는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에라, 모르겠다” 라고 한다면, 즉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모르겠다” 라고 나오는데, 그런데 은혜를 받은 사람은 주님을 만나고 싶어서, 그러한 설레임에 밤잠도 설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 나 같은 인간을 다 구원해주시다니, 주님의 그 귀한 생명을 인간 같지도 않은 나에게 주시다니, 하나님의 그 귀한 생명을 나를 위해서 허비를(?) 하다니, 세상에 그렇게 큰사랑이 어디 있는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주님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첫 날밤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설레이는 마음으로, 그야말로 정결한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심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결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자의 내부공간이고, 또한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진도를 나가겠는데, 그러니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자기 생활환경을 탓하고 하는 것이 저는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지금 자기를 구원하신 주님을 만난다는 그 설레임에 콩닥콩닥 가슴이 뛰는 판인데, 그런데 자기 외부환경이니 생활고가 왜 문제가 되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원망할 요소가 되느냐는 것이다. 정말로 미스테리하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86페이지를 살펴보자.

** 성경은 이 세상이 공간으로 갇혀있는 상태라고 보고 있다. 사람들이 뭘 해도 폐쇄된 공간 속에서 잠시 피어올랐다가 결국에는 제 풀에 꺼지고 사그라지는 모닥불과 같은 것이기에, 갇혀있는 신세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 이 세상은 폐쇄된 공간 !!

여기서 “성경이 이 세상을 폐쇄된 공간으로 본다” 라고 하는 것은, 제가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여러 번 언급을 했지 싶은데,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게 되는데, 그 순간에 이미 이 세상은 갇혀있다는 것이 확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갇혀있기 때문에 하늘이 열린다고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여기서 ‘열린다’ 라는 것의 원어상 뜻은 ‘찢어진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열리나 찢어지나 둘 다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찢어진다는 것은, 기존의 것이 어떤 보자기 같은 것에 쌓여있다는 의미인데, 그런데 어느 부분이 찢어지면서 거기서 성령이 흘러 내려와서 누구에게 임하는가? 바로 예수님에게 임하게 된다는 말이다.

◈ 예수님에게는 안 통하지, 메롱 ??

그렇게 되니 기다렸다는 듯이 그 주위에 잠재되어있던 악마가 예수님에게 와라락 달려드는데, 그렇게 달려드는 수법이 바로 그동안 인간들을 꼼짝 못하게 했던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즉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을 다루는 그 방식으로 예수님에게 덤볐다는 것이다. 즉 “예수여, 돈이 좋지? 예수여, 인기는 어때? 예수여, 세상 영광이 부럽지?” 라고 하면서, 마치 벌 때처럼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하늘의 원리를 그대로 이야기하는데, 즉 “니는 산다는 의미도 모르지? 사람은 말씀은 산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어. 섬기려고 하면 마귀가 아닌 하나님을 섬겨야지” 라고 말이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았던 원리를 그대로 이야기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부터 이 하늘의 찢어짐이 지상의 찢어짐으로 갈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 모세는 ‘보편적 단독자’로서 !!

원래 이스라엘은 모세의 시내산과 연관이 되어 있는데, 시내산에 있던 모세를 ‘보편적 단독자’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모세의 운명이 어떠한가? 먼저 모세는 보편적이니, 단독자가 이렇게 산에서 내려오게 되면 그 기능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내산의 거룩이 ‘성막’ 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 안에 장착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 라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을 하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그러한가? 성막 안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출 33: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그렇다고 하면 이 시내산에서의 거룩이 땅 아래로 내려올 때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을 ‘피의 거룩’ 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즉 피와 기름과 물이라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피를 바름으로서 같이 동행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어서 보편적 단독자의 기능이 이스라엘 내부에 흐르게 된다는 것이다.

◈ 사람이 법을 가지면 일시적으로 편평해짐 !!

아까 강의를 하면서 중요한 것은 빠트린 것이 지금 생각이 나는데, 그것부터 먼저 해보면, 아까 법을 이야기하면서 법은 법으로 통한다고, 즉 “법은 법으로 만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법을 가지게 되면 일시적으로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일시적으로 편평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들뢰즈는 ‘매끈함’ 이라고 말했는데, 즉 일시적으로 매끈하게 되어진다는 말이다. 인간이 법을 만들게 되면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꾸불꾸불한 것에다가 여기에 법을 가하게 되면, 그 꾸불꾸불하던 표면이 일시적으로 매끈하게 되는데, 즉 정리정돈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인간의 모든 개념의 의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인간이 어떤 단어를 하나 선택하게 되면, 꾸불꾸불하던 그 단어의 앞뒤가 다 날아가고 매끈하게 된다는 말이다. 골짜기는 높아지고 산은 낮아져서 편평하게 되듯이 말이다.

◈ 야야, 집에 한번 데리고 온나 !!

이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만약에 어떤 총각이 아가씨와 사귄다고 한다면, 그래서 총각 집에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 아가씨가 어떠한데?” 라고 하면, 총각은 “예, 예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소리를 들은 모든 가족들은 당장에 그 아가씨를 보기를 원하는데, 왜냐하면 “내 아들의 애인은 예쁘다” 라고, 그렇게 매끈하게 여기니 말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 뭐라고 하겠는가? 부모가 “야야, 이번 주말에 아가씨를 집에 한번 데리고 오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지금 그 총각의 가족들은 그 아가씨에 대해서 예쁘다고, 그렇게 일시적으로 매끈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두고 ‘고름판’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이것도 역시 들뢰즈가 사용한 용어인데 말이다. (예쁜 것이 곧 고름판??)

그런데 문제는 부모가 그 아가씨를 보고 나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야야, 그것도 인물이라고 하나? 이놈이 완전히 그 아가씨에게 퐁당 빠지고 말았네. 나는 물고기가(?) 들어오는 줄 알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동생이 뭐라고 하는가? “나는 형님이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는 줄로 알았네. 그 넓은 어깨하며, 한방 치는 줄 알았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름판이 갑자기 그만 울퉁불퉁하게 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매끈함이 깨어지면서 말이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모든 사물을 볼 때 다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가 대리점에 가서 TV를 살 때 그 직원에게 물어보면, “이 TV는 잘 나옵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TV가 잘 나온다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던 매끈함, 즉 고름판이라는 것이다.

◈ 들뢰즈 - 변화란, 고름판에 홈을 파는 것 !!

그러니 어떤 변화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들뢰즈는 주장하기를, 변화라고 하는 것은 고름판에 홈을 파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천 개의 고원’ 이라는 책에 나오는데, 즉 인간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그 고름판에 마구 흠집을 내는 것과도 같다고 했다는 것이다.

왜 아이들이 장난감이나 어떤 물건을 가지고 놀면 어떻게 되는가? 제 아무리 새것이라고 해도 금방 기스가 나고 마는데, 그것을 상처나 생체기라고도 할 수가 있고 말이다. 그렇게 기스가 나서 긁히거나, 홈이 여러 군데 패이고 만다는 것이다. 

◈ 절을 산에 세우든, 동네에 세우든 !!

어떤 사람이 살다가 보니 이 세상이 더러워서 산으로 도피를 했는데, 그렇게 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하게 되는데, 즉 고름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이 그렇게 하다가 마을에 내려와서 홀을 얻어서 절을 세운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가게세를 내어야 하고, 이웃에서 시끄럽다고 민원을 넣으면 해결을 해야되고, 그리고 전기세, 물세 등등 신경을 쓸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편평하던 고름판에 상처가 생긴다는 것이다. 즉 고름판에 홈이 파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견디지를 못하고 산으로 다시 도망을 치게 되는데, 그러면 또 고름판이 되고 말이다. 그렇게 되어서 다시 산 속에 절을 세우게 되면,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용하다고 하면서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주지 자리를 탐내는 중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러면 다시 길상사를 버리고는(?) 더욱 깊은 산 속을 찾아서, 즉 강원도의 화전민들이 사는 산골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마지막에는 폐암에 걸려서, 담배를 피웠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마지막을 맞아하게 된다는 것이다.

◈ 오직 자기만을 위한 고름판 !!

그렇게 우리 인간은 법적으로, 항상 자기가 가지고 있는 법을 고름판으로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즉 자기는 그래도 십자가를 안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어떤 상처가 생기게 되니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 십자가를 가지고도 통하지 않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날아가는 동사를 손으로 쥐게 되면, 그것이 자기화가 되는데, 즉 오직 자기만을 위한 것이 되는데, 그러니 그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만 잘되기 위한, 즉 자기가 편안하기 위한 고름판을 작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그렇게 그냥 두지 않고 또 다시 새롭게 역사하는 말씀을 가지고 상처를 내어버리는데, 그러면 성도는 다시 한번 “아이쿠,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내가 가진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했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사랑으로서 기쁨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인가를 가졌다는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오류를 또 범하고 만다는 것이다.

◈ 앞으로 2등을 하면 혼낼 거야 !!

제가 어느 강의시간인가 했지 싶은데,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이상화’ 라는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는 앞으로 2등을 하게 되면 혼난다는 것이다. 1등을 했으면 그 1등이 고름판이 되고 마는데, 그러니 그 다음에 2등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용서를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연아의 경우에도 이번에 금메달을 땄는데, 물론 김연아는 워낙 유명해서 앞으로 2등을 하더라도 감히 누가 시비를 걸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사람은 이렇게 누군가가 한번 잘하게 되면 그것을 고름판으로 삼아서, 그 사람의 성적이 떨어지면 농땡이를 쳤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박지성이나 그런 운동선수나 연예인들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매일 매일 컨디션을 잘 유지해서 골을 넣어야 하고, 또 야구선수는 타율을 유지해야 되고 말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99살을 먹은 노인이 그렇게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욕정은(?) 주식투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 자기 고름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힘을 !!

이제 교재로 돌아가서, 지금 폐쇄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러한 육적인 공간은 항상 자기 자신을 고름판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외부의 환경을 일방적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끌어당기는고 하니, 힘으로 끌어당긴다는 말이다. 그렇게 힘으로 당길 때는 법적으로 끌어당기는데, 그런데 그 ‘법’ 앞에 하나를 넣으면 ‘방법’ 이라고, 혹은 다른 말로는 ‘원리’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이 뭐라고 하는가? 축복을 받는 비결, 구원을 받는 비결, 저주를 피하는 비결이라고들 하는데, 그런 것들이 자기의 고름판을 유지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법적으로 봐서 “이것을 지키면 반드시 복을 받습니까?” 라고, 그렇게 교인들이 목사에게 항상 묻는데, 어떤 비결이나 방법을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현재 있는 고름판을 더욱 더 확장시키기 위한 힘을 모으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힘을 모은다는 것은 법적으로 오게 되어있고 말이다.   

◈ 묵시의 커튼을 열어제치니 !!

이제 교재 88페이지를 살펴보겠는데, 여기서도 계속해서 폐쇄공간에 대해서 나오는데, 아까 예수님께 성령이 임함으로 이 세상이 폐쇄공간이었음이 드러났다고 했는데, 계시, 혹은 묵시, 그것이 커튼이라는 의미인데, 그렇게 커튼을 열어제치니까 내세와 현세가 교류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교류가 되니까, 원래 인간은 죽는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여전히 살아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살아있는 공간인데 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 땅에서는 ‘세상’ 이라는 하나밖에 없는 공간이지만, 그러나 그 커튼 뒤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한 쪽은 지옥이고, 다른 쪽은 천국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지면서 죽지는 않는데, 선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자는 악한 자의 부활로 나오기 때문에 말이다.

이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인데, 인간이 그렇게 일단 만들어졌으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절대로 없애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인간을 소멸시킨다고 하는데, 물론 거짓말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계속해서 교재 88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처럼 인간들의 공간은 살아있으나 죽어있으나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는 점에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처소’를 따로 마련하셨다고 한다.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우리 인간들의 공간은 살아있으나 죽어있으나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있고 헤매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니 개방이 되어도 여전히 주님 안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처소’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은 다음에 나오니 그때 하기로 하고 말이다.

이제 교재 89페이지를 살펴보자.

** 구약의 성전은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거룩’이 제시하는 조건 안에서 움직이게 됨으로 그것 자체가 ‘거룩’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게 한다.

◈ 잠시 ‘성전’에 대해서 !!

여기에 보면 구약의 성전이 나오는데, 성전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성전을 생각할 때는 항상 그 중앙이 비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비어있는 것을 채울 때는 어떤 식인고 하니, 항상 ‘우발적’ 이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우발적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은 뭔가 채워져 있으면 그것을 우상화시키고 신전화를 시키려고 하는데, 그래서 우발적으로 출현이 되는데, 즉 그렇게 해서 채워진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채워지는가? (목사님, 우발적인데 이런 질문이 가능한가요?) 그것이 참 어려운데, 여기 성전이 있고 백성들이 있다고 하면, 백성들은 뭐라고 생각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언약대로 살면 항상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라고 여겼는데, 그러나 그것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인간들은 언약을 무엇으로 인식하는고 하니까, 법적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그렇게 법을 아는 순간에 그것이 고름판이 된다는 것이다. 즉 동사에서 명사로 바뀌는데, 그렇게 명사가 되면 자기 소유가 되는데, 그런 소유가 되면 자기 의(義)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이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무엇을 느끼겠는가? “오늘도 나는 착하고 의로워!”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다윗도, 모세언약대로 고름판을 유지했는데 !!

그것이 바로 다윗의 시편 51편인데, 거기서 다윗이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라고 하는 것은, 다윗이 그 이전에는 뭐라고 생각했는고 하니까, 하나님은 번제와 제사를 원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언약대로 고름판을 유지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다는 말이다.

(시 51: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우발적으로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하나님의 언약은 명사가 아닌 동사적으로 움직이는 언약인데, 그래서 난데없이 벌거벗은 여인이 눈앞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다윗은 그 여인을 데리고 오면서 하는 말이, “저 여자가 월경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하혈을 하는 여자를 만지면 안 되니 말이다. 그래서 다윗이 그 여자와 합궁을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레 15:19)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 유출이 피면 칠 일 동안 불결하니 무릇 그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 인간이, 법적으로 고름판이 되어버리면 !!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법적으로 고름판이 되어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법에 저촉이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을 누가 결정하는가?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자기 의가 그만 기준이 되어서, 바로 그 기준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기를 치는 인간들이 법을 많이 알고 들먹이는데, 법에서 빠질 구멍을, 즉 법을 지키면서도 법에서 놓쳐버린 것을 찾아서, 거기서 마음껏 자기의 죄악을 저질러놓고는, 그러나 실제로 법적으로는 저촉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들의 삶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이런 방식이 인간들끼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거룩은 거룩한 대로 다 하고 나쁜 짓은 나쁜 짓대로 다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모순된 일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지요?

◈ 성도는 언제나 죄인이 되어야 !!

그래서 오늘날 신약시대의 성도는 이 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즉 성도는 항상 죄인이 되어야만 하지, 의인의 구석이 따로 있고 죄인의 구석이 따로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칼빈인데, 이 칼빈은 자기 윤리학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착한 일이 있고 아주 착한 일이 있는데, 그리고 악한 일이 있고 아주 악한 일이 있으며, 또한 그 중간에는 착한 일도 아니고 악한 일도 아닌 중립적인 일이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칼빈의 그런 주장이나 천주교의 연옥설이 똑같은 말인데, 도대체 세상에 중립적이 일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칼빈이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가 신자가 맞는지를 의심이 들게 하는 부분인데, 참으로 희한한 주장을 다 했다는 것이다.

◈ 성전은 은닉 된 것 !!

그건 그렇고, 성전은 무엇인고 하니, 성전은 그 원리가 은닉 된 것인데, 그러니 항상 외부에 감추어진 원칙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모여있는 이스라엘은 이미 선악과 법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뭔가를 주면 항상 편평하게 만들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화론인데, 즉 “주여, 이것도 지켰습니다. 저것도 지켰습니다” 라고, 그렇게 꼭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자기 사랑하는 자에게 죄를 짓게 하는데, 즉 자기의 법으로 자기 죄를 감추었다고 하는 사실이 드러나는 사건을 만드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죄인임을 감추기 위해서 시도했던 모든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 다윗은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어 !!

다윗이 이러한 사태를 알고 나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자기에게 그러한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고 하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와 번제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상한 심령을 원하기 때문에, 그러니 그러한 상한 심령은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나서는데, “제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시원한지 모르는데, 마치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게 밥상 위에 음식이 있으니까, “모두 다 치워라” 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우리가 의롭다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 나가면 뭐라고 하시는가? 하나님이 한 잔을 하신 것 같은데, 사실은 성령에 취한 것인데 말이다. “이런 것 모두 다 치워라” 라고 하면서 발로 걷어차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 !!

그러므로 그렇게 하나님께 당한 사람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데, 씨잘데기 없는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기쁨, 즉 더 이상 자기 의를 가리우는 짓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니 그냥 노출이 되면 된다는 것이다. 그냥 주님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죄인으로 살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즉 바로 그것이 진짜 제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다윗은 너무 좋아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지 싶다는 말이다. 그것도 밤새도록 막춤을 마구 추면서 말이다. (이때 이근호 목사님의 댄스 등장, ㅋㅋ) 그야말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죄도 용서해주시는 주님을 보고 싶어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말인데, 도대체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 더 있느냐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그냥 빈손을 들고 나가면 되는데 말이다. 물론 우리 인간도 처음에는 빈손을 들고 나가기는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나가다가 도중에 미안해서 손톱을 다듬고 나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야, 그래도 너거들이 나에게 나올 때에 손톱 정도는 좀 다듬고 오너라” 라고 하신 적이 결코 없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그냥 빈손만 들고 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빈손으로 말이다. 물론 ‘할렐루야’ 라고 적은 플랜카드도 필요가 없고 말이다.

◈ 자기 의(義) - 성령이 아니면 끊을 수 없는 강력한 악마의 힘 !!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왜 그런 짓을 하려고 하는지, 그것이 바로 고름판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내부에는 법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 평생동안을 자기 고름판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즉 자기도 남에게 빠지지 않고 잘났다고 하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러한 것을 과시하는 용도로서, 우리 인간은 자꾸만 방향이 주님 쪽이 아니라 자기 쪽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도 괜찮은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아니면 끊을 수 없는 강력한 악마의 힘인데, 곧 ‘자기 의’ 라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서울에서 열린 개혁주의신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바리새인들은 십자가에 가장 근접한 인간들인데, 바로 그런 바리새인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 애비는 마귀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역사적으로 해석한 그들이, 즉 주님에게 가장 근접한 인간들이 바로 주님 앞에서 마귀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비역사적 해석’ 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서울에서 모인 그 인간들이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는 말이다.

◈ 성도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새로운 공간을 !!

그런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전혀 남의 모습이 아닌데, 그러니 바로 우리 내부공간이 바깥공간과 만나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 주님의 말씀의 세계가 새로운 공간을 형성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과학적인 공간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이제는 ‘시간’에 대해서 해보자는 말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성전은 항상 비어있는데, 그런데 그 성전에 우발적인 사건에 의해서 새로운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그들은 항상 회개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90페이지를 살펴보자.

** 공간뿐만이 아니라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기를 세우고, 자기를 정리하고, 자기 자신을 즐기기 위해서 헤아리고 측정하는 시간외에 달리 다른 시간관을 갖지 못한다.

◈ 이제는 ‘시간’에 대해서 !!

지금부터 시간에 대해서 강의를 하겠는데, 이 시간에 비하면 앞에서 이야기한 공간은 엄청 쉬웠는데, 이 시간은 정말로 동영상 강의가 아니면 이해하기가 힘든다는 말이다. 이 시간은 그림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는 딱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생각해볼 것은 선(線)으로 보는 시간관이 하나 있는데, 즉 이렇게 수평적으로 해서 ‘과거, 현재, 미래’ 라는 것을 보는 것인데, 즉 과거에서 현재로, 또 현재에서 미래로, 그렇게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흔히 우리가 말하는 시간관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하나이고, 두 번째로는 무엇인고 하니까, 수직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과거, 현재, 미래’ 라는 것이, 그 위에는 아무 것도 없고, 밑에 과거가 우르르 떼로 몰려있는데, 그런데 그것도 순서가 있어서, 즉 형님과 아우가 있는데, 그래서 제일 오래된 과거는 제일로 밑으로 가는데, 그것을 ‘과거5’ 라고 하면, 이렇게 밑에서부터 ‘과거5’, ‘과거4’, ‘과거3’, ‘과거2’로 쌓이게 되는데, 단지 ‘과거1’만 표면에서 과거가 된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밑에 그대로 있고 말이다.

그것이 그대로 밀려와서 지금의 ‘현재’ 라는 것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 ‘현재’는 곧 바로 ‘현재1’으로 바뀌고, 거기에서 ‘과거1’은 ‘과거2’가 되고, ‘과거2’는 ‘과거3’가 되고, ‘과거3’는 ‘과거4’로, 그런 식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렇게 사선으로 진행이 되는데, 그것을 ‘현상학적 시간론’ 이라 하는데 말이다.

그러면 ‘미래’ 라는 것에 가면 어떻게 되는가? 이 미래에 오게 되면, 그 현재가 과거1이 되고, 과거1은 서열상 더욱 밑으로 눌려서 ‘과거2’가 되는데, 그러니 과거에서의 ‘과거5’는 현재에서 ‘과거6’가 되고, 그리고 미래에서 그 ‘과거6’는 ‘과거7’이 된다는 것이다.

◈ 시간은, 선(線)이 아니라 기억의 누적 !!

그러므로 시간은 선이 아니라 기억의 누적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자꾸만 누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6’가 되었던 그 첫 사랑의 여인을 오늘 우연히 만났다고 하면, 그 ‘과거6’는 갑자기 ‘과거7’으로 바뀌면서 이 ‘과거6’는 변형된 형태로 ‘과거1’으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즉 그 여자를 만난 경험이 두 번이 되니, 그 여자에 대한 과거도 두 개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흔히들 첫 사랑을 만나고 나서 뭐라고 하는가? “야, 사람이 달라졌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달라졌다고 하는 것은 차이가 난다는 것인데, 차이는 두 개가 있을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즉 “옛날에 이근호 목사는 복음만 전하더니만, 그런데 요즘은 맛이 갔어.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강의시간에 춤도 추고 말이다” 라고 한다면, 그러니 아무튼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기억 때문에 목사들이 설교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데, 만약에 교인들이 지난주에 한 설교를 다 잊어버렸다고 하면, 그러면 목사는 설교하기가 엄청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시간에 그렇게 졸면서 듣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사람이라도, 목사가 다음에 그와 비슷한 설교를 하게 되면, “어, 참 이상하다. 어디서 들었던 같은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사람 속에는 본인이 전혀 의도하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옛날에 들었던 설교는 ‘과거60’으로, 또 ‘과거70’으로 그렇게 다 눌려져 있다가 다시 한번 올라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도 역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성경말씀이, 마치 깔대기 방식으로 !!

그래서 제가 서울 의존교회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중국집의 턴테이블로 설명을 했다는 것이다. 비싼 요리를 먹어본 사람은 그 테이블을 알지 싶은데(ㅋㅋ), 즉 그 테이블의 중앙에 십자가가 있고, 그 주위에는 아브라함 이야기, 이삭 이야기, 또한 모세 이야기 등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턴테이블 주위에 있는 의자에, 아니 턴테이블 밑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한 바퀴를 돌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에이 목사님, 그것은 우리가 잘 압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5년이 지나고 난 뒤에 다시 돌면 어떻게 되는가? “아니, 아브라함 이야기에 그런 은혜가 있었던가?” 라고 하게 되고, 또 10년 뒤에 돌면, “아니, 아브라함 이야기에 그런 은혜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날마다 들고 돌면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는데,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다 지켰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은 항상 새롭게 들고 도는데, 그렇게 돌 때는 마치 깔대기 방식으로 해서, 그렇게 모든 성경말씀이 다 담겨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심은 돌고 돌면서 어디로 인도하는고 하니, ‘십자가’ 라는 구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밑에 있는 판도 돌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성도들도 모두 다함께 돌고 돌아서, 마치 토네이도에 휘말린 것처럼, 그렇게 해서 성도를 십자가로 가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어제 오후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다윗이 자기 아들이 죽었을 때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하시는, 즉 “니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의 죄 때문에 죽은 그 자리에 갈 것이니 기다려라” 라고 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십자가로 끌고 가신다는 말이다.

(삼하 12:21)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삼하 12:22)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삼하 12:23)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내가 어찌하든지 십자가에 참여해서 부활에 이르게 하려고 한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미 깔대기의 그 구멍은 확정적인데, 즉 모든 것이 이미 다 되었다는 말이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의식하는 시간 - 내 몸이 편안하도록 !!

지금부터 어려운데 그러니 좀 참아야 하는데 말이다. 지금 이 시간론에 있어서, 여기 밑에 있는 시간과 위에 있는 시간을 두고 ‘의식하는 시간’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무엇을 의식한다는 말인가? 이게 누구 위주인고 하니, 현재 자기 몸 위주로, 즉 자기 몸의 편안함 위주로 구성된 시간론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기억하지 싫은 것은 저 밑에다 집어 넣어버리고, 그리고 기억하기 좋은 것은 자기 과거를 대표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야, 나는 그때 광주 5.18때 제일 앞장을 섰지” 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재 자기 몸을 돋보이게 하는데 있어서, 과거의 그 광주 5.18이 지금 현재 자기 몸의 가치를 높이는데 아주 공헌을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 앞에 가서 꼭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도 그때 광주 5.18때 앞장을 서서 깃발을 흔들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 나의 역사인가? 주님의 역사인가?

하지만 그렇게 의식하는 시간은 무엇인고 하니, 현재 자기 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재구성이 된 것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시간론을 두고 ‘나의 역사’ 라고 하는데, 그러니 당연히 우상인데, 왜냐하면 자기 역사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수없이 많은 그 모든 역사는 다 십자가 중심인데, 그런데 인간들은 성경말씀을 보면서 꼭 그런 십자가 중심은 모두 다 잘라버리고, 현재 자기가 이렇게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기만의 역사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역사로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이 여기에 이 위에 있는데, 즉 이런 껍데기에 있는 자기만의 역사를 공격하게 되는데, 그러면 자기가 곱게 숨겨놓았던 자기만의 과거가 들추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러한 과거와 이 말씀이 다 연결이 되어버리면, 졸지에 자기는 자기의 그 훌륭함을 드러내는 몸이 아니라, 결국에는 죄인임을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죄인임이 드러나는 거기에다가 무엇이 플러스가 되는고 하니, 그러한 죄인이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구원되는 역사가 진행될 때, 그렇게 되면 그것은 자기의 역사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주님의 역사를 ‘묵시’ 라고 말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 즉 묵시라는 말이다.

◈ 그러니 ‘70이레’의 경우에 !!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 가운데 70이레가 있다고 하면, 이 70이레는 십자가와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십자가로서 주어지는 70이레가 되니까, 그런 식으로 성경말씀을 해석해야 제대로 된 해석이 아니냐는 것이 이번 서울 세미나에서 발표한 제 논문의 취지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몸이 아닌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는 시간론에 의해서 말이다.

그런데 70이레 당시에, 이 70이레가 ‘7이레, 62이레, 1이레’로 나누어지는데, 바로 그 당시의 역사로서 이 70이레를 해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당시 마카비 시대의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마키비 시대를 모르지 싶은데, B.C 414년에 마지막으로 말라기 선지자가 있었고, 여기서부터 A.D 20년경에 세례요한이 등장하는데, 그런데 이 450년 정도 사이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없었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그것을 무엇을 가지고 매웠는고 하니, 역사로서 매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인가? 아닌가? 당연히 아니라는 말이다. 그냥 일방적인데, 그것도 누구 일방적인고 하니까, 고난을 받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옹호하기 위해서, 즉 자기들을 ‘남은 자’ 라고 간주하기 위한 자기들의 역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 너거 아비는 마귀다 !!

그렇게 역사를 만들 때 그들은 당연히 다니엘서에 나오는 70이레도 역시 차용해서 만들었는데, 하지만 그러한 유대인들의 해석이 주님의 십자가와 만날 때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말로 악마적인 해석이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서 “너거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러니 이러한 ‘70이레’를 해석함에 있어서, 인간은 이미 법적인 것이 있어서 나름대로의 역사를 만들어낸다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지난 강의 때 마치고 나서 조금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유대인들이 공동체의 흉내를 내는데, 즉 느헤미야 8장을 가지고 “우리는 지금 비록 성전은 없지만 말씀을 깨닫게 되면 메시야가 오신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어야 !!

그렇게 해서 이제는 성전이 아닌 말씀 위주의 생활로 바뀌게 된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고, 서기관들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에 신학자들이 한 것을 모으고 모아서, 그렇게 모아진 신학의 축적이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는 확실한 정통적인 신학이라고 우기면서 백성들에게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이 바로 서기관들이고 바리새인들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하신 것은, 그것은 바로 그 당시의 신학이 이미 바리새인들을 정점으로 해서 피라미드식으로 구성이 되어있다는 것을, 그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시면서 “너희들의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신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상태를 만들어줌으로 말미암아서, 우리 인간 속에 있는 더러운 인간들의 계시가 ‘역사’ 라고 하는 이름으로 바깥으로 토해져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런 기회를 주셨다는 말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들이 천국의 백성이라고 여기는 모양인데, 너희들이 아니라 차라리 여기에 있는 이 이방인들이 천국의 백성들이 되고, 오히려 너희들은 쫓겨나갈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대목도 모두 논문에 보면 다 나오는데, “모든 것은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참 되도다” 라는 것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왜 그들이 화를 내는지 모르겠는데(ㅋㅋ), 살펴보면 하나하나 모두 다 나오는데 말이다. 제가 친절한 금자씨처럼, 그렇게 친절하게 다 적어서 설명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마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인간의 시간론은, 자기 몸을 옹호하는데 !!

아무튼 이런 시간론에 있어서, 이렇게 바깥표면에 의식이 나오는데, 그러니 저 밑에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몸은 옹호하고 자기를 잘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감추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그러한 사건과 기억들을 자꾸만 밑으로 보내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과 악 중에서, 선은 위로 올려보내고 악은 그만 아래로 보내버린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악을 밑으로 보낸다고 해서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계속해서 밑으로 내려가서는 쌓이고 또 쌓여있다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왜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라” 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포로수용소에서 나치의 독가스에 500만 명이나 죽임을 당했는데, 그리고 난 뒤에 거기에서 산 사람들이 나오면서 하는 소리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과연 나치를 용서했는가?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희망사항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태가 주어지게 되면, 밑에 있던 증오가 그대로 표면으로 올라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현재 역사를 정당화시키는데, 즉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한 것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자기 행위를 옹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시간론이 왜 필요한고 하니, 자기 행위를 항상 정당한 것으로 변호하는 것에 굉장히 유용하게 설명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이미 다 용서한 줄로만 알았는데, 또 다시 화를 내네” 라고 한다면, 하지만 그것은 이런 시간론으로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보인다는 말이다. 즉 “나는 그 사람이 이미 다 잊은 줄로 알았는데, 그렇게 성질을 낼 줄은 몰랐네” 라는 것도, 이런 시간론으로 살펴보면 다 나온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시간론 - 선취(先取) !!

그런데 여기에 반해서 하나님의 시간론은 무엇인고 하니, 먼저 지금까지 우리가 한 시간론의 특징은 어디까지나 자기 몸 위주인데, 그런 의미에서 시간이 먼저인가? 아니면 몸이 먼저인가? 당연히 몸이 먼저라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은 자기 몸을 옹호하기 위해서 그런 시간적인 것이 여기에 투입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몸과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몸을 성령을 통해서 같이 붙이게 되면, 예수님의 몸에서 새로운 시간론이 나오는데, 즉 미래에서 현재로 다가오는 등장한다는 것이다. 몇몇 철학자들이 이것을 알았는데, 그것을 ‘선취(先取)’ 라고 하는데, 그 대표적인 철학자가 독일의 하이데거이고 말이다. 그래서 몰트만과 불트만도 이런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칼바르트도 그렇고 말이다.

물론 이 ‘선취’ 라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피히테나 셸링과 같은 철학자들이 시간론을 이야기하면서 약간은 짐작을 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고 하니, 이 ‘선취’ 라는 것이 나오게 된 배경이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을 연구해보니 이 인간이 하나의 질점(質點)이 된다는 것이다. 이 질점은 쉽게 말해서 그냥 ‘점(點)’ 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 죄인으로 하나의 질점화를 !!

어제 설교시간에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인간이 저질러놓은 것은 말씀이 오게 되면, 그렇게 해서 전부가 다 모이게 되면 하나의 점으로서 응축이 된다고 말이다. 볼록렌즈를 가지고 신문에 쬐어보면 어떻게 되는가? 그 신문의 활자가 어떻게 되는가? 활자가 “김길태는 드디어 자백을 했다” 라는 식으로 나왔다고 하면, 그런데 거기에 블록렌즈로 햇빛을 쬐게 되면 ‘김길태’ 라는 글자도 없어지고, ‘자백’ 이라는 글자도 없어지고 그냥 시커먼 재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인간의 행위는 하나의 질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이 와서 비추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가 제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전도를 많이 하고, 또한 구제를 많이 했더라도, 그냥 죄인으로서 하나의 질점화를 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하나의 ‘점(?)’으로서 !!

그러니 몸과 몸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그런고 하니, 예수님 자체가 하나의 점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의 조명발(?)이 가는 대로, 즉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뭐라고 하셨는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 자신도 말씀이 시키는 대로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하나의 점이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위한 점이었는가? 그 점 안에 무엇이 다 모이는고 하니까,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즉 모든 성경말씀이 모두 그 점 안에 다 모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모이는 점이 된다는 말이다.

◈ 성령을 받게 되면, 볼펜 촉으로서 !!

그래서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도 역시 하나의 점이 되는데, 그렇게 점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점은 크기와 면적이 없기 때문에, 즉 남과 비교할 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하나의 볼펜 촉처럼, 볼펜 끝의 볼처럼, 그냥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움직여나갈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말씀의 매트리스가 되는데, 침대 밑에 있는 그 매트리스 말이다. 

이 말씀의 매트리스를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모체(母體)’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도 그냥 모체가 아니라 체크무늬의 모체라는 것이다. 그런 체크무늬의 모체에서 우리는 말씀과 말씀이 교차하는 지점에서의 하나의 점이 된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점(?) 말이다. 언제 그러한가? 오직 성령이 임했을 때 그러한데, 즉 2초에서 3초 정도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 점이 그만 커져버리는데, 그렇게 커져버리면 그것은 힘이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점을 더욱 더 키우기 위해서 힘을 모으게 된다는 말이다. 즉 “우리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우리교회는 부흥도 잘되고” 라는 식으로 말이다.

◈ 그런데 점이 그만 크기와 면적을 가지게 되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미 점이 아니라 크기와 면적을 가지게 되는데,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당신의 점은 얼마나 크지? 나의 점은 이렇게 큰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점에 무슨 크기가 있는가? 그러니 거기에 다시 성령이 임하게 되면, 다시 볼펜의 촉과 같이 그렇게 쪼그라들게 되는데, 그래서 “주여, 저는 주님이 보고 싶어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있으나마나한 점이 된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몸과 몸의 만남에서는, 모든 것이 다 우리의 몸과 예수님의 몸이 그만 비교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비교가 되면서, 우리의 몸은 첫째 아담의 몸이 되어버리고, 또한 예수님의 몸은 마지막 아담의 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로마서 5장의 말씀인데, 그렇게 되면 새로운 시간론이 나오게 되는데, 이 새로운 시간론은 기존의 그런 시간론을 다 정죄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정죄를 하는가? “니가 몸이라고 인식하는 그것은 과거가 그냥 밀려와서, 즉 그 과거가 만들어낸, 즉 너의 역사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 성도는, 두 시간의 공존 속에서, 날마다 자기 자신을 부인 !!

그렇게 모든 것이 허상이고 환상에 불과한데, 그렇다고 하면 실제로 ‘나’ 라고 하는 인간은, 미래에서 오신 주님의 재림 앞에서는, 즉 과연 그분의 심판대 앞에서는 과연 어떠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죄인이면서도 구원을 받는 그 모습을, 그것이 바로 현재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이렇게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와 있음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값으로 주고 산 몸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몸으로서, 물론 기존의 법으로 된 자기 자신의 죄악 된 시간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미래에서 오신 분에 의해서, 즉 이미 우리를 구원했다고 하는 확정된 시간이, 그렇게 두 개의 시간이 우리 몸에서 함께 공존하면서 날마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기가 잘나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우리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으로 살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생명나무가 들이닥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들의 생명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주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3,22 오후 10시 50분에 마침.

                                                 형제들이여, 첫 사랑은 잊고 마누라만 생각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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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時間) - 시간 그 자체는 운동하는 물체도 아니고 물체의 운동도 아니며 독립된 존재자(存在者)도 아니다. 시간은 옛날부터 공간(空間)과 관련된 일종의 형식 내지 양(量)으로서 모든 운동적 현실을 포괄하는 지평(地平; horisont)으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지평적 성격과 관련시켜 시간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플로티노스(Plotinos) 이래 일종의 주관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그것을 직관형식(直觀形式)으로 보는 칸트(I. Kant)의 시간론이 나오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시간을 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지 않는 입장, 예를 들면 생멸 유전하는 현실을 넘어선 상주불변(常注不變)한 실재(實在)를 파악하려 하는 형이상학에서도 시간 위에 서 있는 현실세계는 가치 없는 낮은 존재영역으로서 초시간적 영원(永遠)의 존재영역과 구별하였으니 결국 시간은 어떤 의미에서 가현적(假現的)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때 그 영원한 절대적 존재와 우주적-주관적인 시간적 존재와의 관계에 관해서는 신학적 형이상학적으로 구구한 해석이 있다. 시간 자체의 순수한 내용에 관해서는 제논(Zenon) 이래 칸트의 이율배반에 이르기까지 연속(連續)과 비연속적 순간(瞬間)과의 모순(矛盾)이 고찰되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간에 관한 여러 해석은 주관주의적 해석에 있어서까지도 결국 우주론적 해석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근세 초기에 이르러 시간이 공간과 함께 수학화가 되어 자연과학의 기본개념으로 다루어지게 되자 시간은 모든 현상에 객관적 질서를 부여하는 근본원리가 되었다. 칸트에서 예를 들면 그의 <시간의 관념성>은 단지 주관적 현상화(現象化)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규정이 객관적 인식의 기초가 되는 선험적 원리의 하나가 된다는 뜻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객관화된 우주적 시간관념에 대하여 오늘날 많은 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시간론의 주체적인 모티브(motive)를 되살려 직접적인 경험(經驗) 혹은 생(生)에 결부시킨 시간 현상을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보게 되어 이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삶과 결부된 고유한 시간, 예를 들면 직접성(直接性)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 또는 현재와 과거?미래와의 관계, 과거 내지 미래의 자체적인 직접적 현실성과 객관적 의미, 직접적 현재의 지속(持續) 등에 관한 연구가 현저해지는가 하면 삶과 결부된 시간의 무상성(無常性)이 강조되기도 하고 반대로 창조성(創造性)-비약(飛躍) 등이 각각 딜타이(Dilthey)-짐멜(Simmel)-베르그송(Bergson) 등에 의해서 역설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시간은 역사적 생의 계기로서 고찰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간은 후설(E. Husserl)-하이데거(M. Heidegger) 등의 현상학-실존철학에서 종래의 객관적 혹은 주관적 해석을 넘어선 근원적인 시간성으로 심화(深化)되었다. 예를 들면 하이덱거의 기초적 존재론에서는 시간이 모든 존재의미의 현상학적 지평(地平; horizont)이 된다. 이 경우에는 시간성은 곧 역사성으로서 주체적 생과 결부시켜 구체적으로 고찰되는가 하면 그것이 곧 우주적시간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이 입증되기도 한다. 더우기 신학적 입장에서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를 특수하게 다루는 키에르케고오르(Kierkegaard)에서 출발한 바르트(K. Barth)-고오가르텐(F. Gogarten) 일파의 변증법적 신학이 있어 이들에 의해서 종말론적 신앙의 시간구조가 고찰되고 있다. - 세계철학대사전(고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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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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