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19강 은닉된 선택

피/피 2010. 10. 6. 09:02

100201 피19강 은닉된 선택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구/대구100201피p076은닉된선택.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구/대구100201피p076은닉된선택.avi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구/대구100201피p076은닉된선택.hwp

대구100201피p076은닉된선택

피 19강 은닉된 선택

[10 대구강의 3] - [피 19] - 은닉된 선택
                                                                                
                                                          10,02,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먼저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

미처 동영상이 준비되지 못해서 처음에 들어온 질문에 대해서 다시 답변을 해드리겠는데, 첫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까, “어떤 것이 성령의 열매인가?” 라는 것인데,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온유와 화평과 자비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러한 것을 맺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것은 다음 번 누가복음 설교시간에 나오지 싶은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기존 교회에서는 성령을 인간과 바로 연결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을 요단강에서 누가 제일 먼저 받았는가? 바로 예수님인데, 그렇다면 이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데, 그러니 성령은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을 주선해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번 수련회에서 요한복음을 강의하면서 했는데, 즉 항상 성령은 성령으로 직접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데, 그것이 곧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의 목적인데, 바로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열매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는 그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런데 우리가 포도나무의 열매를 무슨 수로 맺겠는가? 그냥 포도나 따먹을 줄만 알았지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뒤에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그 포도나무에 붙임 바가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에게서 성령이 영이 오게 되면, 우리가 성령님과 같이 노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젖붙임을 하려고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 성령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주선해 !!

그러므로 우리가 교인들에게 그런 질문을 받더라도,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도록 했을 때, 바로 여기에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그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로 인하여 우리에게,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형제우애가 우리에게 도착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택배로 오듯이 그렇게 도착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우리 자신의 양선과 우리의 온유가 아니라, 그것은 오직 주님의 온유이고 양선이고 자비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온유와 양선과 자비가 놀랍게도 우리 안에서 발견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두 사람이 싸운다고 했을 때, 그렇게 되면 성령의 열매는 어떻게 되는가? 서로 싸우다가 화해를 하는 것이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이 오시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곧 예수님이 개입을 하시게 되는데, 그러면 이쪽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게 되고, 저쪽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화평을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 음매, 기죽어 ??

바로 그렇게 설명을 해야되는데, 그런데 자기가 인간성이 좋아서 먼저 화해를 하고 용서를 하고 형제우애를 한다고 하면, 그러면 상대방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야말로 기가 죽고 만다는 것이다. 상대방은 미처 그렇게 하지를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화해인가? 상대방을 그야말로 완전히 먼저 화해도 할 줄 모르는, 그런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지 말이다.

아무튼 기존교회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 무슨 짓을 하더라도 예수님을 쏙 빼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이미 한물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고, 지금은 인간과 영이 서로 대면을 한번 붙어서 해보겠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이고, 곧 ‘기(氣) 사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김용옥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을 하지만 말이다. 즉 뭔가 활성화가 되고 뜨겁고 박수를 쳐서 감정이 흥분이 되면,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을 받은 것인 줄로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아세라와 바알 선지자들이 한 것과 똑같은 짓인데, 그렇지 않은가?

성령의 열매는 그 정도로 하고 이제 교재를 하겠는데, 76페이지를 살펴보자.

** 어쨌든 인간은 도덕과 양심으로 사태를 파악하는 본성이 작동한다. 선과 악에 관한 이미지가 먼저 자기 내부에 틀이 잡혀있다. 외부에서 그 어떤 새로운 사건이나 경험이 들어오게 되면 기존의 선한 이미지나 악한 이미지의 검열을 거쳐서 자리 잡게 된다.

◈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 !!

이렇게 우리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즉 착색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로 구분이 되는 것은 깡패 세계이든 그 세계이든 다 마찬가지인데, 그리고 모든 종교를 다 불문하고도 그렇다는 말이다. 즉 그 어떤 종교라도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가 대립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 그러면 나는 과연 어디에 속해 있는가?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이렇게 우리 안에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가 다 들어있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해 있겠는가?” 라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이렇게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가 있는데, 그러면 이 ‘나’ 라고 하는, 혹은 ‘주체’나 ‘자아’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그 ‘나’ 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속해 있느냐는 말이다.

선한 이미지인가? 아니면 악한 이미지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 둘을 쳐다보고 있는 제3의 세계에 있는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쳐다보고 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 장소는 또한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를 쳐다보고 있다고 하면, 도대체 그곳은 선한 곳인가? 아니면 악한 곳인가?

◈ 신의 자리 !!

그것이 바로 ‘신의 자리’ 라고 할 수 있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철학자들이 이것을 밝혀내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말고 따로 있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서 조사를 해보니, 신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펼쳐지면 그 펼쳐진 모든 공간이 바로 신의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식당에 가면 내프킨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 얇은 종이가 접혀져서 눌러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그 자아를 한 장, 두 장 펼치게 되면, 즉 주름을 펼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다 펼치게 되면 이렇게 길다랗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바로 그렇게 펼쳐진 영역을 두고서 ‘신’ 이라고, 즉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 내가 모르는 하나님 ??

왜 그런고 하니까, “내가 모르는 하나님이 과연 ‘하나님’ 이란 의미가 있는가?”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게 참으로 어려운 질문인데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만약에 자기가 모른다고 하면 그것을 두고서 신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무슨 용어든지 간에 명칭을 붙이고 호칭을 붙이게 되면, 일단 그렇게 되면 그것이 제 아무리 위대하고 무한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가 안다고 하는 범위 내에서, 그런 영역에 한에서 자기의 생각이 미칠 수 있는 개념이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주가 무한하다고 했을 때, 제 아무리 이 우주가 무한하고 지구보다 크다고 해도, 저쪽 안드로메다에 아바타가 어떻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안다고 하면, 그것을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 범위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기 생각의 범위를 벗어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두고 신이라고 하는 것조차도 그야말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냥 ‘무(無)’ 라고 하는데, 즉 그것은 없는 영역이지 결코 신은 아니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 신과 함께 겸손히 !!

다시 정리하면, ‘신’ 이라는 것은 이렇게 펼쳐져 있고, 그 안에서 ‘나’ 라고 하는 것은 아주 겸손하게 작게 보는데, 그렇게 자기 자신의 모든 영역 안에서 자기가 겸손하게 걸어가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물론 신과 함께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신의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그것은 결코 악마가 실수를 한 것이 아닌데, 즉 악마는 “신처럼 되리라” 라는 것을 신에게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부여함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신의 행세를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아는 것인데,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선과 악을 초월하는 다른 자리가 있어서, 즉 바로 그러한 자리에서 “이것은 선한 것이고, 저것은 악한 것이다” 라고 판별할 수 있는 자리가 곧 신의 자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이 우리 인간 안에 있다고 하면,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그런 자기의 모습은 결코 하나님께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본인이 마음에 들어하는 자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 인간의 기도에는 반드시 목표가 !!

그런데 우리 인간이 기도를 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어떻게 하는가? 반드시 거기에는 목표가 있는데, 그런데 그 목표는 항상 자기와 관련된 목표를 가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티에 지진이 그만 일어나게 해주세요” 라고 했다면, 그것은 아이티에 지진을 일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아이티에 지진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서 그 착한(?) 사람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여기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그 어떤 기도라고 해도, 그것은 항상 자기가 마음에 드는 상황과 그러한 미래를 염두에 두고서 하게 되는데,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인가?” 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게 그것을 자기가 알 바가 아닌데, 자기가 원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면, 그것으로 만족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여, 지금 제가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조차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싫다고 해도 자기가 그런 하나님의 말을 들을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 본인의 생각이고,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는데, 자기는 자기가 고대하는 그것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 자아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

그러니 사람들은 제 아무리 자기가 열심히 기도를 하고 말씀을 보아도, 자기가 원하는 그 자아상에서 벗어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결코 그런 일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이렇게 모여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해도 말이다. 그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자아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아상을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그것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바가 아니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자기 모습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지금 자기 모습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니, 하나님을 빙자해서 뭔가 새로운 것으로 바꾸게 되면, 뭔가 더 나아질까 싶어서 말이다.

◈ 인간이 묵시를 원한다 ??

그래서 제가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인간이 묵시를 원한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 그것은 자기가 역사 속에 있는 것이 답답해서 묵시를 원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래서 묵시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묵시의 세계는 어떠한가? 묵시는 분명히 축복과 저주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사람들이 묵시는 원할 때는 무엇인가?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저주를 생각하지 않고, 축복을 받는 자기를 염두에 두고서 “아이쿠, 이 답답한 역사 속에서 벗어나고 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이런 괴로운 세상에서 죽어서 편하게 살고 싶다는 말이다. 그렇게 역사세계에서 자살해서 묵시의 세계로 들어가면 편하지 않겠느냐고 했을 때, 그것은 묵시세계에서 축복을 받아서 편하기를 원하는 것이지, 저주를 받는 것을, 즉 “아이쿠, 이 더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묵시세계에서 저주를 받아야지”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 인간 비록 이 역사세계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즉 자기가 새로운 탈바꿈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그것은 기존의 저주보다도 축복을 선호한다고 하는 그것 자체가 바로, 이미 우리 인간은 본인이 원하는 자아를 포기한 적이 결단코 없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단 한 순간도 말이다.
 
◈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그것은 이미 결정이 나고 말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인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고 말이다. 어제 심방을 가서 그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말이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다시 말해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으로 결정이 나고 말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이라고 여기고 일을 집중할 때는,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즉 ‘나’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수님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도 명확한데,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에 하나님이 있고, 예수님이 있고, 또 인간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복을 주고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건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것이 에베소서 1장 10절의 말씀인데, 즉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이다.

(엡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이 저에게 해준 것이 뭡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우리 자신이 직접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하는데, 혹은 흥정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자기가 직접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거래를 하려고 하면서 뭐라고 하는가? “지금까지 하나님이 저에게 해준 것이 뭡니까?” 라고 하는데, 마치 시집 장가를 간 자식이 늙은 부모에게 함부로 하듯이 말이다. 물론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가?” 라는 말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하나님이 저에게 해준 것이 뭡니까?” 라고 한다는 것은, 결국 천국은 하찮게 여긴다는 것인데, 즉 “에이, 이 더러운(?) 천국!” 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미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을 조사해보니, 인간에게는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가 있는데, 그래서 자기는 신의 자리에서 무엇을 배척하는고 하니까, “악한 이미지는 나에게서 없어져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무엇은 남으라고 하는가? 즉 자기는 신인 동시에, 그냥 신이 아니라 선하기 짝이 없는 신이 되기를 원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런가? 그것은 마귀가 우리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귀 들린 사람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예수님과 인간의 대비 !!

그렇게 신의 자리에 앉아서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를 언급하면서 노닥거리고 있는 인간이, 그런 인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수님으로 간다든지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데,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데, 그렇게 예수님이 다가오시게 되면 무엇과 무엇이 대비가 되겠는가?

다시 말해서, ‘나’ 라는 인간은 이러이러한 구조이고, 또한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곧 대비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주여, 저는 망하게 되었군요.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실 이렇게 성경 전체가 쉬운데, 즉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초점을 모으고, 인간은 자기가 신의 자리에 앉아서 이유 없이 무조건 자기를 선한 신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우상 덩어리 !!

구약에서는 바로 그러한 전체 이미지를 두고 우상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 후반부에 가면 그 우상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처음에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다가, 특히 이사야서와 같은 경우에는 “애시당초 우상이라는 것은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우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들은 계속해서 우상을 발산하고 생산하고 있는데, 그러니 결국 우상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물론 그런 우상은 없지만 그러나 우상을 만들어내는 누구는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누구’가 누구인가?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인데,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으니,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불러도, 하지만 바로 본인들이 우상 덩어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인들이 우상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악한 이미지를 제거하고 선한 이미지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근거로 해서 이 세상 전부를 다 자기 중심으로 해서, 그렇게 한번 장악을 해보겠다는 것인데, 그것을 두고서 소위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곧 자기 자리를 넓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자기 자리를 말이다.

◈ ‘선택’에 대해서 !!

그렇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선택’ 이라는 것인데, 이 선택이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선택이 언뜻 들으면 쉬워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참 어려운 용어라는 말이다.

일단 교재 76페이지를 다시 보자.

** 어쨌든 인간은 도덕과 양심으로 사태를 파악하는 본성이 작동한다. 선과 악에 관한 이미지가 먼저 자기 내부에 틀이 잡혀있다. 외부에서 그 어떤 새로운 사건이나 경험이 들어오게 되면 기존의 선한 이미지나 악한 이미지의 검열을 거쳐서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은 아까 읽었던 부분인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우리 인간에게는 그 어떤 것이 들어오게 되어도, 마치 광화문에 있는 우체국에 가게 되면, “이것은 부산 우편물, 저것은 광주 우편물” 이라고 나누게 되듯이 말이다. 그렇게 분류를 누가 하는고 하니, 선과 악을 초월한 자아가 “이것은 나에게 선한 것, 저것은 나에게 해로운 것” 이라고 하면서 빼돌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분류하는 그 판정기준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자아가 그 말씀으로 그렇게 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자아가 하는 것은 “이것이 과연 내 몸에 유리한가? 아니면 불리한가?" 라는 것으로, 바로 그러한 기준으로 계속해서 판정해나간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기만 있으면 되니까, 자기에게 유리하면 무조건 동지가 되고, 불리하면 무조건 원수가 된다는 말이다.

◈ 그런데 예수님은 선한 이미지로 오셨는가?

그렇다고 하면 과연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선한 이미지로 오셨는가? 아니면 악한 이미지로 오셨는가? 이것이 재미있는데(?), 예수님은 악한 이미지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7장에 나오는데, 즉 “세상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이 세상이 자기를 악하다고 할 이유가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먼저 입을 열어서 이 세상을 두고 악하다고 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자기를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악한 이미지로 오셨는데, 왜 그런고 하니, 예수님은 기존의 세상을 공격하고 파괴를 시키니 말이다.

(요 7: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 정석훈 - 십자가의 공격을 받지 않으면 성도가 아니야 !!

십자가 마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던데, 즉 “십자가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으면 성도가 아니다” 라고 말이다. 정석훈 목사님이 올렸지 싶은데, 오직 십자가로부터 공격을 받은 자들만이 성도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모양이 교차로가 되어서 모서리가 뾰족하게 되어있는데, 이것을 믿지 말고 바로 그 뾰족한 모서리로 뒤통수를 마구 두들겨 맞고 찔림을 당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그 십자가를 믿으려고만 하는데, 즉 “저는 다른 것도 믿지만, 이 십자가도 믿습니다. 그러니 저를 구원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얻어맞아야 하는데, 즉 “이런 못된 놈이 있나? 이리와” 라고 해서, 마구 찔림을 당할 때, 바로 그런 자들이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 정적 속의 파열 ??

그것을 두고 ‘정적 속의 파열’ 이라고 하는데, 즉 고요함 속에서 마구 찢어진다는 말이다. 일본의 어느 시인이 쓴 것 중에서 “고요한 연못 속에 청개구리가 뛰어들 때” 라는 것이 있는데, 혹은 “매미 소리가 바위에 쓰며들 때” 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가을에 귀뚜라미가 우는데, 그런데 울다가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느낌이 전에 울기 이전보다도 더 고요하다는 것이다. 갑자가 고요해지면 말이다.

그것이 바로 ‘파열’ 이라는 것인데, 왜 시인이 그런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기억이 계속해서 연속되면, 고요함은 없고 항상 복잡하다는 것이다. 집에서 놀아도 복잡하고, 일을 해도 복잡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자꾸만 과거의 기억들이 누적이 되어가니, 고요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 저능아는 암에 걸리지 않아 !!

그런데 만약에 가끔씩 우리의 기억들을 쓰레기통을 비우듯이 비우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순간은 고요하게 되는데, 마치 차에 바쳐서 기억 상실증에 걸리듯이 말이다. 그것을 저는 ‘아이큐 25’ 라고 보는데, 그 정도가 되면 그 사람이 이 세상일에 대해서 골치가 아프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저능아들은 암이 없다고 하는데, 무슨 일이 생겨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살기가 너무 힘들다” 라고 외치는 사람은 아직도 저능아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과거에는 잘 살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느냐고, 그렇게 따지는 것이니 말이다.

제가 언젠가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지 싶은데, 2500명이 모이는 교회가 2년 뒤에 25명이 남았다고 하면, 그 교회 교인들은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2500명이 되는 것을 교회의 완료라고 보고, 또 25명을 교회의 미완료라고 보고, 그러니 회개를 하게 되면 하나님은 완료된 숫자를 채워준다는 것이다.

어제 오후에도 이런 비슷한 설교를 했는데, 지금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옛날에는 교회가 웅성웅성하면서 부흥이 되었는데, 그런데 요즘은 장사가 되지 않으니, 이제는 회개할 때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빛과 소금의 제대로 하면 사람들이 다시 모인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과거에 웅성웅성할 때를 완료로 보고, 지금의 상태를 미완료로 본다는 것이다.

◈ 교회는 3명만 남아도 완료 !!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교회는 나중에 3명이 남아도 그것 자체가 완료라는 것이다. 즉 교회라고 하는 것은 항상 기존의 것을 어떻게 하는가? 사실 2500명이라는 것은 기억인데, 물론 지금 25명도 하나의 순간적 기억이 되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기억과 기억을 비교해서 과거의 기억이 더 나아지니, 그래서 미완료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아이큐가 낮은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는 것인데, 즉 차라리 과거의 기억이 없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의 25명에 대해서 감사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아이쿠, 이 개척교회에 25명이나 모이다니”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는고 하니까, 참된 인간이신 예수님이 이 밑바닥에서 기다리시는데, 우리로 하여금 여기 밑바닥에 도달되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즉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그런 웅덩이를 만들어서, 가끔은 푹푹 빠지게 하신다는 것이다. 고속도로에 불이 나게 한다든지(?), 그동안 고속도로에 불도 나지 않고 다닌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라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쪽으로 일을 진행시키신다는 것이다.

◈ 시시하기 짝이 없는 내 인생 !!

어제 오후시간에 그러한 설교를 했는데, 즉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예상외로 시시하다” 라고 말이다. 자기가 죽을 때는 뭔가 거창하게 죽을 것 같은데, 그런데 막상 죽을 때가 되면 너무나도 시시한데, “이렇게 죽을 것을 가지고 그동안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었나?” 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자기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자식들도 야구경기에 더 정신이 팔려있고 말이다. 여자들은 곗돈 이야기나 하고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사람이 죽는 것이 시시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평소에 자기가 살았던 것이 자기에게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 자기가 사는 것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물론 자기에게는 심각하지만 말이다.

◈ 도대체 누가 선택을 하는가?

이러한 것이 전부 다 기억 속에 있는 선한 이미지 때문에 그러한데, 바로 그런 것들이 내려앉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내려앉을 때,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어려운데 말이다. 도대체 누가 선택을 하느냐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하나님의 선택은 창세 전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라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분명히 에베소서는 창세 전에 이미 택함을 받았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유명한 신학자가 하는 말이, 선택이라는 것은 선택에서 배제가 되는 것도 있어야 그 의미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그냥 하나를 달랑 뽑는 것은 채택이지 선택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선택은 “이것이 아니고 저것이다” 라고 할 때 비로소 사용할 수가 있는데, 그래서 에베소서 창세 전에 이미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구라를 쳤다는 것이다. 즉 창세 전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즉 인간도 없는데 무슨 선택을 하고 말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도, 이미 야곱은 택하시고 에서는 버렸다고 하는 것도 역시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러나 선택은 ‘은닉’ 된 것 !!

과연 이러한 주장이 맞는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왜 그런고 하니, 지금 이 선택을 설명하려고 하니 무진장 어려운데 말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이미 창세 전에 된 것이기에 은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은닉, 혹은 감추어진 것인데, 왜 그렇게 감추어질 수밖에 없는고 하니,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부지런히 선택을 하는데, 아까 그 신학자의 주장대로 선택은 둘 이상의 것에서 하나를 택하는데, 그것을 두고 ‘좋은 것’ 이라고, 즉 다른 말로 ‘선한 것’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누구에게 선한 것인가? 당연히 자기에게 선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동네에 대형마트가 들어오면 그 동네 구멍가게에서는 반대를 하고 난리가 나는데, 그래서 “대형마트는 물러가라. 동네의 상권을 살리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형마트의 사장이 자기 동창생이라서 자기에게 총무 자리를 준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는 데모를 하다가 슬그머니 빠지는데, 왜냐하면 갑자기 자기의 선택이 바뀌었으니 말이다.

◈ 하나님은, 선택 자체를 좋아하시는데 !!

그러므로 선택이라는 것은, 항상 먼저 그렇게 선택을 해놓고 그렇게 선택한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가 좋은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우에는, 그 선택 자체가 좋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반대하는데, 즉 주님의 예정을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 좋은 것을 선택해야지 왜 나쁜 것을 선택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만 말이다.

◈ ‘예수 안’에서의 선택 !!

* 하나님 : 나는 선택 그 자체가 좋아.
* 인  간 : 하나님, 좋은 것을 선택해야지 왜 나쁜 것을 선택합니까?
* 하나님 : 뭐가 좋은데?
* 인  간 : 제가 좋지 않습니까?
* 하나님 : 웃기고 있네. 니가 뭐가 좋노? 니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손에 불과한데 말이다.
* 인  간 : 그래도?
* 하나님 : 도대체 인간에게 선한 것이 뭐가 있노?
* 인  간 : 저는 평소에 저 자신에게 선한 것만 선택하는데요?
* 하나님 : 그것은 만구(?) 니 생각이고, 나는 니 같은 인간이 아니라 아닌 예수님이 좋아.
* 인  간 : ? ? ?
* 하나님 : 그래서는 나는 ‘예수 안’에서 선택을 해.
* 인  간 : ? ? ?

그렇게 하나님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오직 예수 안에서 선택을 하시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벌리시는 선택에 대해서 하나님 아버지는 전적으로 동의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보면 잘 나오는데, 즉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말이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 인간의 선택과 예수님의 선택 !!

그렇다면 선택이라는 것은, 즉 창세 전의 선택이 아닌 역사 속의 선택은 누구와 누구를 비교하는가? 그 선택은 항상 인간들이 벌리는 선택을 따라 부치면서,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주님의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감추어진 것이니 말이다. 그냥 다 드러내면 우리는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의 선택이 우리 인간의 전혀 선택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선택하기를 기다렸다가 뭐라고 하시는가? “그래, 너희들이 한 그 선택은 잘못된 것이야” 라고 하면서, 그렇게 항상 우리의 뒤통수를 치면서 오신다는 말이다. 

◈ 인간의 선택은, 자기 몸뚱아리를 위한 선택 !!

예를 들어서, 스포츠 중계방송을 할 때 보면, 즉 박태환을 수영을 하면 카메라가 같이 병행해서 따라가는데, 또한 우사인 볼트가 100미터를 뛰어도 카메라가 따라가서 붙듯이, 그렇게 우리가 선택을 하면 누가 와서 따라붙는가? 주님의 선택이 마치 카메라처럼 따라붙는데, 그러면서 계속해서 뭐라고 지적하는고 하니, “니 선택은 니 몸뚱아리를 위한 선택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열을 받아서 “그러면 누구의 선택이 옳다는 말입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오직 나의 선택만이 옳은 것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만 그런 동행이 보이는데, 최성수의 동행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행이 진짜 동행이라는 말이다. 최성수가 “누가 나와 함께 동행해줄까?”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이 동행을 해주신다는 것이다.

◈ 얘들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

누가복음 끝에 보면 두 사람이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아이쿠, 이제 예수님도 죽고 우리는 그만 우리의 길을 가자”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엠마오로 내려가는데, 그런데 주님이 동행을 해서 그들이 어떻게 되는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선택하게 되면, 예수님은 선택을 하기 싫은 분으로 점점 더 다가오게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예수님을 믿어도 누구 좋아라고 믿는가? 자기 집안이 잘 되고, 또 자기 가정이 잘 되기 위해서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선택만을 주장하게 되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우리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것만을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즉 인간이 신의 자리에 있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것은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우상은 말고 진짜 신의 자리에는 누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 위주가 아니라 예수님 위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그렇게 선택을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을 앞장 세워서 일을 하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앞장 세워서 신을 언급하는데, 그렇게 해서 신에게 접근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말이다.

◈ 목사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그러니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처음에는 어떻게 조금 믿을지 몰라도, 그러나 자기 집안에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또한 좋지 않은 일들이 자꾸 생기게 되면 그만 믿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혹은 “목사님,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서 꽁무니를 뺀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은닉, 즉 ‘감추어졌다’ 라고 할 때는 사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임해야만 이해가 되기에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흔히 목사들이 “우리교회가 부흥이 되어야 합니다” 라고 주장하는데,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성경에 우리교회가 어디에 나옵니까?” 라고 하면, 성경에 보면 고린도 교회나 에베소 교회 등이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회인데, 자기 교회가 아니고 말이다. 그런 목사에게, “당신 교회는 망하고 옆에 있는 교회가 잘 되면,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라고 하면, 물론 그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러한 것이 바로 엉터리이고, 말씀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 정낙원 -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면 누구든지 !!

정낙원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기존의 다른 목사들이 들으면 상당히 도발적인 내용인데 말이다. 지금 정 목사님을 욕하는 것이 아닌데,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데, 칭찬을 하니 하는 것인데 말이다(ㅋㅋ). 무슨 말을 했는고 하니, “아니 교회가 잘 되겠다고 하는데, 그 어떤 목사가 와도 괜찮지 않은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몸이 잘 되겠다고 하는데, 그러니 복음을 아는 목사라고 하면, 그 어떤 목사가 와도 괜찮다는 것이다. 즉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면 누구든지 되는 것이지, 왜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느냐고 했다는 말이다. 기존 목사들에게는 충격적 내용인데 말이다. 왜 정 목사님이 그러한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까,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왜 내 교회만을 키우려고 하는 복음이어야만 하는가?” 라는 것이다. 정 목사님이 지적한 것이 말이다.

◈ 이제 진짜 어려운 선택을 !!

이제 진도를 조금 더 나가보겠는데, 지금까지 한 것은 쉽다고 여기고(?), 이제는 제대로 어려운 것을 한번 해보자는 말이다. 신약에 있어서,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했는데, 물론 예수님 안에서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관심이 누구에 있는고 하니, 애초부터 예수님에게만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부터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러한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는 좋은 그릇으로, 다른 하나는 나쁜 그릇으로 만들었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그릇을 만든 것이지, 인간이 자기가 알아서 좋은 그릇이 되는 법은 결코 없다는 말이다.

◈ 요셉과 야곱의 관계에 있어서 !!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점이 무엇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요셉과 야곱의 관계에 있어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는데, 그런데 야곱은 가뭄이 든 가나안 땅에 그대로 있고 말이다. 그러니 요셉은 애굽에 있고 야곱은 가나안에 있는데, 그런데 이 사이를 3번이나 왔다갔다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들이 애굽에 왔다가 시므온이 볼모로 잡히게 되는데, 두 번째로는 베냐민을 오라고 하고, 그리고 세 번째로 아버지 야곱이 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창세기의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왜 요셉이 자기의 신분을 곧 바로 드러내어서, 즉 “저는 요셉입니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아버지는 잘 계시지요” 라고 해서, 단 번에 자기 가족을 다 애굽으로 그냥 데리고 오면 되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그것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무슨 약을 올릴 일이 있는가? 왜 그렇게 하지를 않고, 동생 베냐민을 볼모로 잡고 잡고 일을 그렇게 복잡하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냥 간단하게 “제가 당신들이 판 요셉입니다. 지금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옷을 화려하게 입어서 그렇지, 요셉이 맞는지 안 맞는지 한번 보세요. 제 DNA 검사라도 한번 해드릴까요?” 라고 하면, 대번에 그들이 다 알아볼 것인데 말이다.

◈ 베냐민이 볼모로 잡히는 것을 통해서 !!

그러니 여기서 우리가 이것을 해석할 때, 이것을 그 자체적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마치 박태환이가 수영을 할 때 카메라가 따라가듯이, 그렇다면 창세 전에 예정한 것이 신약에 와서 드러날 때까지는, 즉 이것을 역사 속에서 창세 전에 택한 자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여기에 이러한 절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볼모로 잡히는 절차가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이렇게 베냐민이 볼모로 잡히는 것을 통해서 인간에 있어서, 이런 점이 참 어려운데, 잘 들어보라는 것이다. 요셉은 ‘잃어버린 자’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창세 전에 예수님 안에서 너희를 택했다” 라는 것은 간단한 문제인데, 그런데 실질적으로 죄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슨 요소가 필요하겠는가? 잃어버린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와서 양식을 사겠다고 하는 것은 잃어버림을 위함인가? 아니면 양식을 구입해서 자기 아버지와 함께 더 잘먹고 잘살기 위함인가? 도대체 어느 쪽이냐는 것이다. 당연하게 자기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자기들이 잘먹고 잘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자기들이 더 잘먹고 잘사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요셉이 그렇게 출세를 했다고 하면, 요셉을 자기들의 구조에, 즉 잃어버림이 없는 그런 구조에다 집어넣게 되는데, 즉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하는, 즉 자기들만이 살겠다고 하는 그런 자기들의 구조에 요셉을 그냥 집어넣는 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버리면 전혀 창세 전의 예정과는 결합이 되지 않는 것인데, 그러니 구조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요셉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그 잃어버린 구조 속에, 아버지를 비롯해서 그 형제들이 모두 다 흡수가 되고 통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없어져야 하는 것은 곧 ‘자기 의’ !!

그러니 요셉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느껴야 하는고 하니, 자기들이 밥을 먹고서 살겠다고 하는 그 자체도 하늘나라, 즉 창세 전의 선택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그것도 역시나 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래서 자기들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에게 강탈을 당해야 되고 빼앗겨야만 한다는 것을, 그렇게 해서 ‘나’ 라고 하는 자체가 다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없어져야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의’ 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 라는 나무에 달려서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니켈이나 아연도금이 된 것이 아닌, 그냥 나무에 달려서 말이다. 그것을 어제 설교했는데, 그래서 신명기 21장 23절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신 21: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렇게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매달려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지 못할 정도로 저주를 받은 자라는 것이다. 즉 그렇게 저주를 받았으니 전혀 자기 의가 없다는 것이다.

◈ 선하고 악한 이미지를 아는 것 자체가 곧 ‘저주’ !!

그렇다고 하면,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가 둘 다 알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제3의 자리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뭐로 보았는가? 선하다고 보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원초적으로 돌려버리면, 즉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를 안다고 하는 것 자체가, 그것이 바로 더 위에 있는 주님 안에서는 저주를 받을 짓이라는 것이다.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를 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말이다.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의 구원을 보려고 하면, 그냥 관람자가 되어서 세상이 망하는 것을 보고서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뭐, 아이티에 지진이 났으니 나와는 상관이 없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안에 일어난 지진이 되어야 하는데, 즉 주님의 구원을 보려고 하면 자기 안의 의가 와장창 깨어져야만 할뿐만이 아니라, 자기 안에 의가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아예 저주를 부른다는 것이다. 지옥을 통채로 말이다.

◈ 사도바울의 경우에 !!

바로 그렇게 자기 의에 대해서 잃어버린 자가 된 자가 누구인가? 그가 바로 과거에는 사울이었다가 바울이 된, 즉 사도바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설교를 제대로 해석하고자 한다면, 바로 본인이 사도바울처럼 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인가?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뭐라고 했는가? “나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또 율법의 의에 대해서는 흠이 없는 자이다” 라고 했는데, 바로 그렇게 사도바울처럼 자기 의가 저주를 받을 짓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그리고 나서 사도바울의 전한 것을 한번 해석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사도바울의 말씀이 해석이 되지 않을 것이 없는데,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한 세례의 경우에는 뭐라고 하면 되겠는가? 그것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에서 오는 효과이고, 또한 열매라는 것이다. 즉 주님 때문에 주신 것인데, 전혀 자기의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관리자
   쪽지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IP:124.♡.86.6) 10-03-19 19:41  
◈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게 !!

그래서 로마서 4장 5절에서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하는데, 그것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즉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 도저히 자기의 행함을 주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성경은 예수님의 행함과 연결이 !!

다시 말해서, 성경은 그 모든 말씀이 인간의 행함과 연결을 시키지 않는데, 예수님의 행함, 즉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관련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예수님의 호주머니이고 뒤통수이고, 무릎이라는 것이다. 즉 말씀자체가 예수님의 몸 덩어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말씀 어디를 이야기하더라도 예수님의 몸을 건드린다는 말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몸을 말이다.

그러니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는 것도 예수님의 눈썹이고,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것도 예수님의 발목이라는 말이다. 즉 그 어떤 말씀을 이야기하더라도 예수님의 몸 자체를 건드리는 것인데, 문자가 아니고 말이다. 모든 말씀은 그렇게 해야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아주 간단하다는 것이다. 실컷 사도바울의 편지를 다 읽고 난 뒤에 누군가가 “당신은 무엇을 느꼈습니까?” 라고 하면,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저는 저 자신의 의를 누적하거나 축적해야 될 하등의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라고 말이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그렇게 담대하게 답변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잃어버림’에 있는데, 그러면 왜 잃어버려야 하는가? 그것은 창세 전에 택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실 때가 바로 잃어버린 자의 모습이기 때문인데,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생명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가족이고, 제자들이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그야말로 잃어버린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예수님은 마지막에 십자가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까지도 잃어버렸는데, 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참 인간 - 말씀이 살려주어야 !!

그러니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살려주시면 사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참된 인간의 모습인데,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인간이 말이다. 물론 예수님은 이것을 십자가 이전에 알았는데, 그래서 “인자는 고난을 받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그 말씀을 자기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이 자기를 덮치게 되면, 자기는 그냥 죽어있는데 그 말씀에 의해서 사흘만에 살아난다는 것이다. 즉 말씀이 살려주신다는 말이다.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그러니 말씀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은 그야말로 연약할 때로 연약해져서 아무 것도 없어야 하는데,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그것에 의해서, 그렇게 예수님에게는 전혀 아무 것도 없으니 마귀가 와서 이리 저리 쑤셔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마귀가 아무리 돌이 떡이 되고 어쩌고 하면서 예수님을 유혹해도, 정작 예수님에게는 아무 것도 없으니 유혹거리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될 뿐이지 말이다.

◈ 인간은, 선택할 권한도 없으면서 선택을 !!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자기 것이 없는데,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사람에게 자기 것이 있게 되면, 그러면 성경말씀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씀이 이렇게 가까이 왔다가 그냥 튕겨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튕기는가?

그것을 두고 제가 여기 교재에서 이렇게 ‘선택’ 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즉 인간은 자기가 선택할 권한도 없으면서 선택을 하는데, 그리고 마지막 선택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선택과 자기의 선택 중에서 자기가 선택한 것을 선택한다는 말이다. 말이 조금 헛갈립니까?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의 선택을 선택하면서 주님의 선택을 차버리는데,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성경말씀은 농담이고, 오락이고, 장난인데, 물론 예수님이 죽었다는 소식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도 취미생활로 다니고 말이다. 즉 성경말씀은 하나의 신화이고 전설이지 전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한 때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영화 ‘스타워즈’를 보면 에피소드 1,2,3,4가 있는데, 그런 에피소드를 기다라는 바보 같은 인간이 어디 있는가? 있다고요? (ㅋㅋ) 또한 ‘아바타’ 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나비족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올라오는 것을 보려고 한다는 것은, 아이들이나 하는 행동인데, “야, 어디에 붕 뜨는 산이 없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뜨고 말고 하는 산은 없는데, 그 영화촬영을 중국에서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중국에 가도 그 산이 붕 뜨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그대로 눌러앉아 있지 말이다.

◈ 오잉,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

그런 것들을 고대한다는 것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처럼, 현재 자기의 선택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이 그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트만이 뭐라고 했는가? 그런 것은 신화라고 했는데, 즉 사람이 휴거가 되고 불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허망한 소리라는 것이다. 앞으로는 우리 인간이 은하철도 999를 타고 전 우주로 날아갈 판인데 말이다.

그래서 그런 부류의 신학자들이 기껏해야 주장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웃을 사랑하자” 라고 하는 수준인데, 그냥 “WE ARE THE WORD” 라고 하는 말이다. 정말이지 그런 것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양반들의 글을 보면, 처음에는 조금 거창하게 시작하는 것 같지만, 항상 결론은 그렇게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 이근호 목사의 파열음 ??

(이 목사님이 녹차를 마시다가 그만 옷에 흘림) 이것도 일종의 고요함 속의 파열음인데(ㅋㅋ), 아무튼 인간은 고요하지를 않다는 것이다. 주식을 사든지 펀드를 가입할 때 어떻게 하는가? 요즘 중국펀드가 완전히 깡통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다 자기가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4조원(?)인가, 아무튼 엄청난 다단계 사기가 발각이 되었는데, 하지만 거기에 가입한 사람도 문제라는 것이다. 세상에 이익금을 35프로나 주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주는데, 하지만 세상에 어느 회사가 무려 35프로 이익을 보느냐는 말이다. 그런 공장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100원을 투자해서 50원의 순이익이 남아야, 투자가들에게 35원을 돌려줄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런 곳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마치 “내 돈을 떼먹어도 됩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해 그렇지, 어떻게 그러한 무모한 짓을 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도대체 그런 것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 마귀는, 욕심을 계속해서 유발하도록 !!

그러므로 인간은 제 아무리 똑똑한 선택을 한다고 해도, 마귀는 자꾸만 그런 인간의 욕심을 일구어내는데, 그런데 인간이 욕심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소비충동(?)이라고 하는데, 즉 소비사회에서는 없는 욕심을 계속해서 유발해낼 수 있도록, 그런 욕심을 또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의사가 되어서 낙도에 가서 선교 차원에서 진료를 한다고 하면, 물론 자기는 그냥 가면 되겠지만 그러나 마누라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식들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당장에 보따리를 싸들고는 강남으로 이사를 온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과거에는 중학교에 가서 영어를 해도 괜찮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들뢰즈 - 인간은 욕망이 시키는 대로 !!

그렇게 마귀가 계속해서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기 때문에, 사실은 인간의 자기 선택도 마귀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들뢰즈는 그것을 ‘욕망의 선택’ 라고 했는데, 즉 자기 속에 욕망이라는 어르신이 살고 있어서, 그 어르신이 부추기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제 우리교회에서 점심시간에 홍게를 먹었는데, 그런데 걱정이 되는 것은, 과거에는 짜장면도 아주 맛있게 먹었는데, 이제는 어지간하게 맛있는 것을 해줘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덕대게 정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어제 참석하지 못한 분들은 조금은 억울하지 싶은데, 홍게도 조금 남았는데 말이다.

이제 교재 77페이지를 보자.

** 여기서 인간의 ‘선택’이 발휘된다.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함으로서 계속해서 선이 자기 내부에서 우세하기를 원한다. 여기서 선이란, ‘옳게 행했다’ 라는 말이 아니라, ‘잘했다’는 뜻이다.

◈ 인간은,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함으로서 !!

이렇게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 게임을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게임을 할 때, 자기가 지는 게임은 처음부터 짜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 어떤 영화라고 해도 주인공이 지는 영화는 거의 없는데, 그렇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런 영화는 관객이 외면하니 말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영화는 있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서, 춘향이가 변 사또에게 몸을 허락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이 도령은 과거시험에 낙방하는 것은 말이다. 또한 ‘놀부전’ 이라고 해서, 놀부가 출세하고 흥부가 망하는 것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은 무엇인고 하니까, 주인공이 언제나 승리하는데, 왜냐하면 게임 자체가 주인공이, 즉 자기가 게임을 만들었기 때문인데, 즉 인간은 자기가 패배하는 그런 드라마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얼마나 일방적이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는, 그것을 채워달라고 밤을 새워서 기도하니,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라는 것이다.

◈ 기도는, 자기 고발 !!

그래서 제가 어제 심방을 가서 뭐라고 권면을 했는고 하니,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따질 것은 따지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다 내어놓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인데, 하나님의 응답을 말이다.

그렇게 응답을 받는 가운데, 방금 말한 것처럼, 자기가 뭔가를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을, 즉 이렇게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가 뭔가를 꼬불치고 넣어서, 즉 놓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고 하는, 바로 그러한 것이 기도를 통해서 들통이 나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에는 항상 “주님, 이것만은 안 됩니다. 이것을 손대면 저는 자살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건드려주게 되면, 그 사람의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병이고 뭐고 간에,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마지막 그것, 바로 그것을 하나님에게 압수를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자기 몸이 아프다고 하면, “주여, 지금 제가 몸이 아픈데, 그런데 앞으로는 아프지 않아야 합니다” 라고 하는 그 생각, 바로 그것이 들통이 나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되든지 주님의 뜻대로 하세요. 저는 모릅니다” 라고 하면, 바로 그러한 사람이 병에서 나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 야곱은, 자기의 모든 것이 들통날 때까지 !!

마지막 그것, 바로 그것이 들통이 날 때까지 요셉과 야곱은 서로 몇 번이나 왔다갔다했는가? 3번이나 그렇게 했는데, 그것이 안 되면 4번이고 5번이고 계속해서 왕복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요셉이 꾼 꿈의 세계, 즉 계시의 세계에 야곱이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언약은 야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요셉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야곱은 야곱언약에 어떤 자격으로 가게 되는고 하니, ‘잃어버린 자’의 자격으로, 즉 야곱은 그야말로 몽땅 다 잃어버린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꿈이고, 이상이고, 비전이고, 몽땅 다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야곱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자의 자격으로 야곱언약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야곱언약에 말이다.

물론 야곱은 처음에는 이러한 사실을 몰랐는데, 벧엘에서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는 기분이 엄청 좋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주여, 제가 다시 오게 되면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가 스타가 된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자기가 이렇게 애굽에 가서 빌어먹고 나서 보니, 자기는 그야말로 험한 나그네 인생을 살았다고, 즉 “내 인생은 시시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드디어 팔을 어긋맞게 해서 축복하는 야곱 !!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창세기 48장에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들에게 어떻게 축복을 하는가? 자기의 팔을 어긋맞게 해서, 즉 큰 자는 작아지고, 작은 자는 크게 되도록 말이다. 바로 그렇게 어긋맞게 하는 모습이 곧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짜 우리의 구원자인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야말로 마귀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모습의 메시야인데,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하시고, 그 조금 남아있는 자존심마저 모두 다 박살을 내는, 바로 그런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십자가’ 라는 한 단어로 함축할 수 있고 말이다.

(창 48:12) 요셉이 아비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창 48:13)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창 48:14)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계속해서 교재 77페이지를 보자.

** 이것은 곧 내면의 평화를 모색하는 방식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선과 악 사이에서 평형감각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있다. 과도함을 줄이고 여분의 것은 선과 악의 영역으로 깔끔하게 정돈하는 것으로 조정된다.

◈ 균형, 중용, 의식 !!

여기서 “사람의 마음이란 선과 악 사이에서 평형감각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있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피아제의 심리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균형’은 동양철학에서 공자의 ‘중용’ 이라고도 할 수가 있는데, 그리고 이것은 불교에도 있는데, 즉 의식불교에 주장하는 것인데, 인간은 영혼은 없고 의식만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에는 8개의 절차가 있는데,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마나식(末那識), 아라야식 등으로 해서 8개의 식이 있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보다 초월한 어떤 식인데, 바로 그렇게 우리 인간에게는 의식의 흐름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고 보니 마치 베르그송의 주장 같은데 말이다.

그런 것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균형인데, 이 균형이 의학에 동원된 것이 바로 한의학인데, 물론 서양의학도 그런 면이 있는데, 즉 세포내의 PH(페하)인데, 즉 수소이온 농도를 나타내는 것인데, 즉 그 농도의 균형이 모든 세포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균형이 깨어지면 안 되는데, 그래서 뭔가 모자라면 주사를 놓아서 넣어주면 되고, 많으면 조절해서 줄여주면 되는데, 마치 혈압을 그렇게 해서 조절해주듯이 말이다. 

◈ 사람은 왜 죽는가?

그렇게 모든 세상 만사가 돌아가는 것이 어떤 균형을 맞추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제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 “사람은 왜 죽습니까?” 라고 말이다. 계속해서 균형을 맞추어 나가면 되는데 말이다.

* 이근호 : 사람은 왜 죽습니까?
* 균형자 : 균형이 맞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 이근호 : 계속해서 균형을 맞추어 나가면 되지 않습니까? 
* 균형자 : 균형을 맞추는 기계가 고장나서 그렇습니다.
* 이근호 : 균형을 그렇게 잘 맞추는데 왜 고장이 납니까?
* 균형자 : 힘이 빠져서 그렇습니다.
* 이근호 : 그러면 왜 힘이 빠집니까?
* 균형자 : ? ? ?
* 이근호 : 그것도 몰라요?
* 균형자 : ? ? ?

◈ 로마서 5장 - 죽음의 힘이 인간을 가지고 놀았기에 !!

물론 그들은 여기에 대해서 답변을 할 수 없는데, 그런데 로마서 5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죄의 힘이, 즉 죽음의 힘이 그동안 인간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의 힘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그 죽음의 힘에 대항해서 그렇게 맞서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했지만, 그러나 성경말씀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아이큐가 25가 되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냥 죽는다는 것이다. 250이 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저능아가 군대에 가서 전쟁을 하다가 총탄에 맞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약에 간다면 말이다. “으악!” 이라고 하면서 그냥 죽는다는 것이다. 고향 생각을 하고,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폼을 잡고 말 시간도 없다는 것이다. 하긴 이순신 장군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라고 하면서, 그렇게 남 걱정을 하면서 죽었다고 하는데 말이다.  

◈ 그런데 죽음의 맞은 편에 생명의 힘이 !!

아무튼 인간은 죽음이 오면 그냥 죽는데, 그리고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도 그렇게 그냥 죽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즉 죽음이 지배하면 그냥 주어주면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죽어가는 가운데 예수님을 알고, 생명을 알고, 마치 십자가의 강도처럼 예수님을 믿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죽음이 어쩔 수가 없듯이, 생명도 역시 어쩔 수가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곧 로마서 5장의 말씀인데, 즉 과거에는 죄가 왕 노릇한 것 같이, 이제는 주님의 의가 우리의 왕 노릇을 하게 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천당에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가 자기 세포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듯이 말이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영생에도 짝퉁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영생도 그냥 주어지게 되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그 영생도 자기들의 행함으로 받으려고 하니, 그 영생은 당연히 우상이 제공한 가짜 영생이라는 것이다. 마귀가 우리 인간들이 영생을 받지 못하게 방해하기 위해서 중간에 가짜를 만들어서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가짜 예수, 가짜 메시야,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짝퉁이라는 것이다. 즉 “하면 된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제는 그런 것을 다 말할 수 있는데, 물론 과거부터 이야기해왔지만 말이다. 이것은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도 마찬가지인데, 도대체 “사람이 없다” 라는 소리가 무슨 의미인가? “나는 이제 죽었구나”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가게에 손님이 없으면 망한 것이니 말이다.

◈ 죽음과 영생이 함께 !!

그런데 자기가 정말로 영생을 받았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우리가 이렇게 죽어가는 것처럼, 동시에 영생도 받아간다고 해야하는데, 즉 죽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박태환이 헤엄을 치면 카메라가 따라오듯이, 그렇게 죽음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게 되면 될수록, 생명도 역시 점점 더 강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주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가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목사는 생명의 복음을 과거보다 더욱 더 기쁘게 증거하면 되는데, 그런데 맞은 편에 카메라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런 경우에는 자기가 죽은 것밖에 없기 때문에, 안절부절을 하면서 그야말로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즉 “여러분, 무엇을 원하십니까? 새 생명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그것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사람을 꼬시려고 온갖 수작을 다 벌린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78페이지를 보자.

** 종교라는 것도 내면의 안식을 위한 정보를 얻는 노력이다. 하지만 절대적 경지가 저만치 남아있는 이상, 그 결핍으로 인해서 짜증이 나고 불안하다.

◈ ‘내’ 안의 정보 !!

여기에 ‘정보’ 라는 말이 나오는데, 물론 이 정보는 현실이 아닌데, 그런데 자기 안에서만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는데, 예를 들어서, “안델센이 누구이지?” 라고 하면서 정보를 얻지만, 그러나 그 정보가 옆 사람에게도 상관이 있는가?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INFORMATION’ 이라는 것은 자기 안에서만 정보가 되는 것인데, 그러니 현실은 아니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떡을 먹어서 자기만 배가 부르다고 하면 그것을 현실이 될 수 없는데, 즉 하나의 구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떡을 먹었는데 옆에서 배가 부르다고 하면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그런데 천국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로서 온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하지만 절대적인 경지가 저만치 날아가 있는 이상, 그 결핍으로 인해 짜증이 나고 불안하다. 평정이 얼마가지 않아서 깨어진다. 기존의 내면의 고요함도 이제는 권태롭고 재미도 없다. 따라서 스스로 자기 안정감을 깨어보려는 모험을 의외로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일거리에서 찾는다.

◈ 계속해서 미완료 !!

이렇게 자기 안의 정보이기 때문에, 그러니 자기가 구원받을 정보는 저만치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신학박사를 공부해야 하는지, 또 성경을 달달 외워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것도 해야 되는지, 천당에 가려고 하면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은지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미완료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짜증과 불안이 생기게 되는데, 그러한 것이 극도에 달하게 되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그냥 때려치우자. 열심히 해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섬기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난다는 것이다.

◈ 교회도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나오는데 !!

그것은 바로 일종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교회에 왔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데, 그래서 제빵학원에 나가서 자격증을 따면 더 이상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운전학원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교회에 와서 구원을 받는 정보를 취득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그만 평정이 깨어지고 마는데, 그야말로 한시적인 평정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시험점수가 오르지 않아서 고민을 하다가 과외선생을 하나 붙여서 겨우 해결을 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렸다고 연락이 온다는 것이다.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또 하나가 터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시어머니가 이제 괜찮다 싶으면 또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말이다. 도대체 끝이 없는데, 그러니 평정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튼튼한 주님의 나무라면, 바람조차도 즐거움 !!

저 같은 경우에는 아이가 하나밖에 없어서 그렇지만, 그런데 3명 정도가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큰놈이 조용히 있으면 둘째가 사고를 치고, 또 둘째가 잠잠하면 셋째가 문제를 일으키고 말이다. 그래서 뒷치닥거리를 한다고 정신이 없는데, 그래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아예 나무를 자르라고 하는데, 즉 자기의 나무를 자르고서 주님의 나무를 심으라는 것이다. 주님의 나무는 튼튼한데, 그래서 우리는 그 주님의 나무의 가지가 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그 튼튼한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이기 때문에, 오히려 바람이 부는 것이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또 제 자식놈이 속을 썩힙니다” 라고 하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겠는가? “왜? 재미있지 않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죽음의 세계이니 말이다. 그리고 “남편이 애를 먹입니다” 라고 하면, “오호 그래. 흥미로운데?” 라고 하시고 말이다.

◈ 인생의 롤러코스트에는 !!

놀이동산에 가면 청룡열차가 있는데, 만약에 그것이 편평하다면 누가 타겠는가? 마구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롤러코스트를 타야만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트는 올라갔다가 내려가면 그 다음에 또 올라간다는 기대를 가지게 되지만, 그러나 우리 인생은 내려가게 되면 그것을 끝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즉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고 말이다.

작년에 우리교회가 그야말로 청룡열차를 타고 신나게 내려갔는데, 그냥 쳐 박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치 제 작년에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로 야기된 금융위기 때의 주식시장처럼 말이다. 저는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모이고 있으니 얼마나 신기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여기에 욕망이 관여한다. 결핍이 욕심의 발동을 정당화해준다. 이 욕망은 하나의 격률로 처리되지 않는다. 우리 자신조차 아직 모르는 잠복되어 있는 질문들이 아우성치면서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결핍이 욕심의 발동을 정당화해준다” 라고 하는데, 이게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뭔가 모자란다고 하면, 평소에 욕심이란 것도 욕심이 아니라 정당한 반응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채워주지 않으니 제가 그때 뇌물을 받아먹었지요. 만약 우리 가정에 그런 어려움이 없었으면 제가 그렇게 뇌물을 받고 했겠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 모든 책임은 하나님에게 ??

이번에 어떤 아주머니가 마트에 취직을 해서 8년 동안에 물건을 무려 2억원이나 훔쳤다고 TV에 나왔는데, 그래서 경찰이 왜 훔쳤느냐고 물어보니, 자기 남편이 실직을 해서 신용불량자가 되어서 할 수 없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는 남편이 그렇게 되지만 않았다면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항변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통 인간들이 모두들 그렇게 주장하는데, 즉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책임이라는 것이다. 물론 잘 되면 자기 잘남이고 말이다.

◈ 선한 이미지가 악한 이미지보다 우세하면 복이 온다 ??

그리고 교재에 “욕망은 하나의 격률로 처리되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여기서 ‘격률’은 한 자로 ‘법’을 의미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이렇게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이 곧 법인데 말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어떻게 계산을 하는고 하니, 자기들이 복을 받고 싶은데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선한 이미지가 악한 이미지보다 우세하면 복이 온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 자체가 법이 되는데, 그런데 욥의 경우에는, 욥의 친구들이 와서 뭐라고 하는가? 욥이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것이 아닌데, 욥은 선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왔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법에 전혀 맞지 않은데, 그러니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런 법 자체를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창세 전에 선택을 했다고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의 은혜가 빛이 난다는 말이다.

◈ 그러니, 그런 법 자체를 잃어버려야 !!

그런데 이런 법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에이, 아무리 하나님이 창세 전에 예정을 하시고 선택을 했더라도, 그래도 내가 착한 일을 해야 구원을 받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러한 법 감정이 있는 이상, 우리가 착한 일을 해주어야 주님이 우리를 구원을 시켜주어도, 그렇게 해줄 맛이 난다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가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들보다 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 라고 말씀을 하시면, 우리는 또 다시 “그들은 구원을 받고 나서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않았을 거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곧 죄인데, 도무지 그 어떤 생각을 하던 행동을 하던 간에 죄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러한 인간이 창기 짓을 하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던지, 아니면 뇌물을 받아먹든지 하는데, 그것이 곧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데,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와버렸는데,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도 역시 그렇게 온다는 것이다. 단지 창세 전에 예정이 되었다고 하는 그 이유 때문에 말이다. 그냥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우리 자신조차 아직 모르는 잠복되어 있는 질문들이 아우성치면서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움에 기대를 거는 것은 중독성이 있다. 이 중독성 앞에 자아는 헌신한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부풀면서 욕망을 만족시킬 먹잇감을 찾아 나선다. 이제 새로움을 맞이할 마음에 새로운 손질을 가한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너무 몰라 !!

물론 오늘 강의가 끝난 것은 아닌데(ㅋㅋ), 여기 교재에 보면 “우리 자신조차 아직 모르는 잠복되어 있는 질문들이 아우성치면서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라고 하는 것은 법적으로 선한 이미지만을 주장하는데,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마치 무저갱과 같은 엄청난 악한 이미지가, 자기가 건져낸 선한 이미지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악한 이미지가 파도를 쳐서 덮쳐버리면, 그렇게 착하던 사람이라도 하루아침에 그만 짐승이 되고 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세상 역사라는 것이다.

◈ 너는, 다른 남자 같으면 벌써 !!

그래서 자기 마누라에게 결혼 기념일에 목걸이를 사주고. 생일에 머플러를 사주고 해도, 그러나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술 한잔 걸치고 왔는데 마누라의 잔소리가 좀 심하다 싶으면 대번에 손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 어떤 남자라고 해도 자기 마누라를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을 단 한 순간이라도 먹지 않은 남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가 장담을 할 수 있는데(??), 즉 “그래도 내가 괜찮은 남자이니 참는 것이지, 다른 남자 같으면 너는 벌써 죽었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내가 자식을 보고 살지. 니 같은 것이 뭐가 좋다고 살겠노? 니가 돈이 많기를 하나? 그렇다고 힘이 세나? 또한 꽃미남이기를 하나? 아이쿠, 내가 눈이 어떻게 되었지 말이야. 그냥 내 눈을 내 손으로 쑤시고 싶어”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때 자기가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때 마침 선택을 하는데 남자가 많은 것이 아니라 서너 명도 안 되어서, 그래서 그 가운데서 고르다가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택의 범위가 너무나 좁아서 말이다. 그래서 선택을 하고 나서 이웃 동네에 가보니 좋은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다. 그래서 안타까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 동네에서만 선택해야하는 줄 알았다는 말이다.

◈ 인간에게 있어서, 악한 이미지는 한도 끝도 없어 !!

물론 그런 어리석은 선택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나이 30을 훌쩍 넘기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말이다(ㅋㅋ). 아무튼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악한 이미지는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는데, 그래서 누가 따라오는고 하니, 자꾸만 악한 이미지와 먹잇감이 제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 성화론은 게 섰거라 !!

계속해서 교재 78페이지를 보겠는데, 지금 이 대목이 성화론을 박살내는 부분인데, 제가 읽어볼 테니 같이 한번 잘 살펴보자는 것이다.

** ‘현실’이라고 간주되었던 세상에서 경험되는 사실들이 늘어나면 날수록 자기에 대해서 급수정에 들어간다. 경험한 경우의 수가 늘어난 만큼 이전에 작은 숫자의 경험으로 이미지 틀을 잡던 것과는 다른 이미지로 현실이 조정된다. 그렇게 조성된 이미지를 가지고 전 기억 속의 윤리적 이미지와 대조해볼 때, 종전과 다른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 “아하, 전에는 그런 짓을 나쁜 짓을 한 것으로 단정을 지었지만, 보다 더 넓게 세상을 경험해보니 나쁜 짓이 아니라 도리어 선한 일을 한 것이구나. 그렇다면 전에 내린 윤리적 판단은 미천한 경험으로 성급하게 내린 판단으로 ‘현실 세상’이라는 실체에서는 상당히 먼 이미지인 반면에, 보다 증가된 경험에 의해서 조성된 이미지는 실체에 보다 접근한 옳은 판단을 가진 이미지구나” 라고 하게 된다.

** 추가되어서 들어오는 모든 경험들로 인하여 자신이 보다 더 선하고 의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마음 내부의 도덕적인 인테리어를 새로 꾸미는 것이다. 모든 자기 점검은 자신의 존재감과 관련이 있다. 계속 의인이라는 의식만 유지되면 당당하게 살 권리가 확보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 자기에게 관대한 인간, 그러나 !!

이렇게 우리 인간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 자꾸만 급수정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렇게 수정을 하는데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즉 옛날에 잘못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는 식으로 완화를 시켜서, 그렇게 자기에게 관대하게 하는 쪽으로 가치를 평가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과거 혹독하게 비판을 했던 것도 뭐라고 하는가? “그때는 나이도 어리고 시건(철)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좋게 좋게 평가를 해서 선한 이미지의 분량을 점점 더 늘려나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악한 이미지도 여기에 못지 않게 솟아오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결국 선한 이미지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데,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에이, 어디 나만 그런가?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하던데. 그러니 하나님이고 뭐고 그냥 취미생활이나 하다가 죽으면 되지 뭐” 라고 하면서 끝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겠는데, 계속해서 79페이지를 보자.
 
** 그래서 게걸스럽게 세상에서 마주쳐 오는 것들을 쓸어 담는다. 이것이 곧 인간 선택의 성격이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현실이 참된 현실이라고 우길 수밖에 없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쉽게 말해서, “열심히 살다보면 내가 생각한 현실이 역시 그 전체 현실과 일치될 날이 오겠지” 라고 일방적으로 우기는 식이다.

이렇게 인간이 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그것은 남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삶이 아니라 그냥 시시한 삶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냥 시시한 삶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지금 당장 옆에 사는 이웃이 꿈꾸고 있는 현실관하고 견주어봐도 이것이 얼마나 일방적인가 하는 점이 드러난다. 매일같이 미국에 이민을 가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에게 남북이산가족 찾기란 그렇게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 하지만 6.25때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남쪽으로 피난을 온 이산가족에게는 그런 현실이 실현되는 날이 올 것으로 확신하며 그 바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미국에 이민을 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볼 때 그 이산가족은 ‘환상 속에 사는 자’가 된다. 이러한 평가를 서로 서로가 서로에게 내릴 수밖에 없다.

** 이와 같이 각자 개인이 품고 있는 현실관이 이처럼 다를진대 어떻게 전체 현실관과 지금 자신의 현실이 일치된다고 확정을 지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미리 자리를 잡고 있는 완성된 현실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의 일방적 기대에서 나온 연장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경험한 게 쌓여서 병이 된다.

** 여기서 수립되는 ‘나’ 라는 존재는 실은 자기 신체가 요구하는 실용성 이외에는 없다. 자기 몸이 요구하는 대로 다듬고, 간추리고, 챙길 것은 제때 챙기면서 자기 규모를 맞추어 나간다. 하지만 이런 작업들도 큰 흐름이 인도하는 대로 휩쓸려 떠내려가는 작은 흐름일 뿐이다. 도무지 ‘나만의 나’ 라는 것을 따로 수립해서 차고 다니는 것이 결국 오기나 객기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 응축 - ‘나’만의 ‘나’

여기에 ‘나만의 나’ 라고 나오는데, 이것을 두 글자로 ‘응축’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만의 나’, 혹은 ‘나만을 위한 나’ 라고 말이다. 그러한 것으로 가면 갈수록 응축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노인네들의 특징인데, 즉 치매 직전의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만 알지, 전혀 남을 배려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건강할 때는 옆 사람도 챙기고 하면서 그렇게 배려를 다 하다가도, 그러나 자기 몸이 아프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몸이 아프면 어디로 응축이 되는고 하니, 응축이 무슨 뜻인지 알지요? 꽉꽉 눌러서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 라는 것은 나중에 신체와 동일시가 되는데, 즉 젊었을 때는 신체를 자기가 지배했는데, 그러나 나이가 들게 되면 신체가 자기를 지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제 몸이 아프니 어쩔 수가 없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두뇌가 터져서 말을 듣지 않으니, 자기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체가 자기를 지배한다는 말이다.

사실상 처음부터 인간에게 있어서 ‘나’ 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고, 이 몸이 바로 ‘나’이니까, 그래서 중요한 것은 몸이 누가 관리하느냐는 것인데, 이 몸은 하나님이 관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인간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이 몸을 가지고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에 몰아넣는데, 즉 우리의 몸은 죄가 지배하는 죽음의 몸임을 일깨워주는 방식으로 몰고 가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우리 자신을 옳다고 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응축이 된다는 것이다.

◈ 성도는, 자기가 죄인 중에서 괴수임을 !!

하지만 여기서 감사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성도의 경우에는 반드시 성령에 의해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응축이 되고 쪼그라드는, 그렇게 자기 몸밖에 모르는, 그래서 자기 손톱에 가시만 하나 박혀도 천하가 다 싫은,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그 맞은 편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는데, 물론 같은 공간인데 말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말이지 저주는 ‘내’가 받아야 하고, 죽어야만 하는 육체인데, 바로 그런 십자가에서의 신체를 우리에게 보이게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이미 영생이 우리에게 작용했기 때문에 ‘나’ 라는 것이 죄인 중에서 괴수임을 깨닫게 하는 은혜를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택한 백성에게만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몸이 아직 살아있어서 이렇게 모여서 책도 보면서 공부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다 끝날 때에, 즉 우리 몸의 응축도 깨어지는 날에, 그때 우리는 한 평생 죄만 짓고 살았음을 고백하게 해주옵소서. 또한 바로 그런 죄인들을 위해서 미리 아셔서 창세 전에 예정하시고, 오직 십자가 안에서 피로서 영생을 주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3,05 오후 11시에 마침.

                                                       이제는 봄도 오고 녹취를 열심히 하게 하소서 !!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