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04 피17강 인간의 행함 (현실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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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104피p073인간의행함과현실만들기

피 17강 인간의 행함과 현실 만들기

[10 대구강의 1] - [피 17] - 인간의 행함과 현실 만들기
                                                                                
                                                          10,01,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믿음과 행함 !!

오늘은 교재 73페이지의 ‘(4)인간의 행함’부터 살펴보겠는데, 이렇게 ‘인간의 행함’ 이라고 하면 우리는 야고보서가 생각이 나는데, 그리고 로마서가 생각나고 말이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고, 로마서에서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 맞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에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러한 행함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로마서에서 하는 말은, 인간의 행함은 반드시 있는데, 즉 행함이 없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살아있는 한 반드시 행함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경우라도 행함이 있는데, 그것은 죽은 체로 있는 것이 행함이고 말이다. 그러니 로마서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 인간은 무조건 행함이 있는데,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행함으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야고보서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믿음을 두 가지로 나누는데,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말이다. 그러니 행함이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러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말이다. 그러나 로마서의 경우는, 우리 인간에게 행함이 없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 당신은 행함이 있는가? 없는가?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 “행함이 있는가? 없는가?” 라는 것은 무엇으로 결정하는고 하니, 야고보서와 로마서를 이어보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야고보서의 “행함이 있다, 혹은 없다” 라는 것은, 로마서에서 말하는 구원을 받는 믿음이 무엇을 결정하는고 하니까, “행함이 있는 믿음인가? 아니면 행함이 없는 믿음인가?” 라는 것을 결정하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제가 이렇게 말은 복잡하게 했지만, 그러나 사실은 알고 보면 매우 쉽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구원이 되는 믿음, 그것이 바로 “믿음에 합한 행함인가? 아닌가?” 라는 것을, 거기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야고보서에 말하는 구원이 되는 믿음이 말이다. 

그러니 자기 행함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밀어 부치면 안 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억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모든 인간은 그런 속성이 다 있는데, 즉 자기가 행해놓고는 그것을 믿음으로 행했다고 우긴다는 말이다.

◈ 구원받는 믿음이 결정권을 !!

그러므로 이런 “행함이 있는가? 없는가?”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두고서 자기가 행한 것을 가지고, 즉 자기의 행함으로 주장하지 말고, 구원받는 믿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그것을 두고서 “아하, 그것은 믿음에 합한 행함이구나”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즉 구원받는 믿음이 그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 야고보서 -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 !!

그래서 야고보서에는 어떤 예를 들었는고 하니,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두 가지의 예를 들었는데, 먼저 하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것을 가지고 그 예로 들었는데, 구제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기생 라합의 예를 들었다는 것이다.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 2:23)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약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로마서나 야고보서나, SAME SAME !!

먼저 아브라함의 경우에, 그가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는데, 그런데 그것을 로마서에는 무엇으로 보았는고 하니, 그것을 바로 ‘믿음’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로마서 4장에 분명히 나오는데, 즉 아브라함은 믿음으로서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믿음이 없어지지 않고 믿음이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디에서 나왔는고 하니까,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나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나왔다는 것을 더 설명하기를, 그것은 율법의 노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에 분명히 그렇게 나와있다는 말이다.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롬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 아브라함의 노선은, 은혜의 노선 !!

그러니 이렇게 분명한 노선이 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노선은 무엇인고 하니까, 경건치도 않은데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고, 즉 행한 것도 없이 경건함을 받는, 즉 아무 것도 한 것도 없는데 의로움을 받는다는 말이다. 즉 죄 사함을, 죄의 가리움을 당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분명히 죄를 지었는데, 그런데 난데없이 그것이 그만 모두 가려져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은혜의 노선에 아브라함이 속해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아브라함이 이렇게 있고, 또한 이 죄 사함을 받는 은혜의 노선이 추상적이라고 하면, 그런데 그것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을 보통 사람들은 ‘행함’으로 보지만, 그러나 그것을 행함으로 보지 말고 믿음으로 보자는 것이다.

◈ 은혜를 받은 자에게만 나타나는 행함은, 곧 믿음 !!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을 행함으로 보면 누구든지 모두가 다 할 수가 있는 것인데, 즉 은혜가 없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 증거, 즉 은혜를 받은 자에게만 나타나는 행함을, 그것을 행함이라고 하지 말고, 그것을 ‘믿음’ 이라고 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로마서에서 하는 것이나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것이나, 그 내용이 똑같다는 말이다. 물론 같은 성경이니 당연히 같아야만 하고 말이다.

◈ 집사님은 성품이 참 좋습니다 !!

예를 들어서, 그 교회 목사가 “집사님은 성품이 참 좋습니다” 라고 하면, 그 집사님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하는고 하니, “목사님, 그것은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똑같은 행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물론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행했다고 주장하겠지만,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속에서 일을 하셨기에 그런 일이 생겼다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러니 그런 자기 성품은 누가 뭐라고 그런 하나님의 일하심의 열매, 즉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다.

◈ 주시고, 회수하시는 하나님 !!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식으로 나오는데, 그러니 하나님의 입장에서 손해를 보았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다. 은혜를 주시기는 분명히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런데 그것을 회수하는 것도 역시 누가 하는가? 그 영광과 그 보람과 그 찬송을 누가 회수하는고 하니, 아브라함이 아니라, 또한 이삭도 아니고, 역시 하나님이 다시 가지고 가신다는 것이다.

누가 가지고 간다구요? 하나님이 가지고 가시는데 “야, 이제는 실컷 맛보았지? 재미있었지? 신났지? 그러면 이제 내가 다시 가지고 간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고는 다시금 회수를 해서 가는데, 그런데 그렇게 가는 고리에 무엇이 걸려있는고 하니까, 고맙게도 아브라함이 걸려들어 있고, 또한 이삭이 걸려들어 있다는 것이다. 

◈ 창세기 22장의 경우에 !!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창 22: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 22: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이 창세기 22장에 있어서 흔히 아브라함을 두고 많이 칭찬을 하는데, 물론 칭찬을 받아도 당연하고 말이다. 하지만 거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들 이삭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그 당시 아브라함이 자기를 제물로 바칠 때 이삭이 결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성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삭이 뭔가 이상하고 모순이 된 점들이 있으니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질문을 했는데, “아버지, 불쏘시개는 이렇게 있는데, 그런데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참으로 대답을 잘 했는데, 그가 뭐라고 했는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것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물론 그 다음에 “그것은 바로 너다” 라는 것인데, 물론 그 부분은 말로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 아버지,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 이    삭 : 아버지요?
* 아브라함 : 왜?
* 이    삭 : 불쏘시개는 이렇게 있는데, 그런데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 아브라함 :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것이 있을 것이다.
* 이    삭 : (어디요?)
* 아브라함 : (바로 너다!)

그런데 여기서 이삭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그 준비를 누가 했는가? 물론 아브라함이 했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은 자기가 한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것으로 보았는데, 그것은 바로 이미 아브라함 자신은 “나는 은혜에 사로잡혀서 은혜로서 살아간다” 라는 것을, 즉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이미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믿음으로 행함을 점검할 때, 진짜 믿음과 합한 행함과 그렇지 못한 행함이 서로 구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다 교회에서 자기 행함을 해놓고는, 그것을 머리를 들이밀면서 밀어 부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믿음에 합한 행함이냐고 하는 것은, 그것은 야고보서가 아니라 로마서에서 결정하자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될 때, 이 야고보서도 서로 앞뒤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 기생 라합의 경우에 !!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두 가지의 예를 들었는데, 먼저 하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인데, 그것은 방금 말했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기생 라합의 예인데, 거기서 기생 라합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집에 이스라엘의 스파이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았다고 극구 우기고 우겼는데, 그런데 그런 경우에 그것이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이라고 하면 우리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데, 물론 우리도 매일같이 하는 것이고 말이다. 즉 자기의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왔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즉 이스라엘 쪽의 스파이를 숨겨주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천사를 숨겨주는 일과 같이, 그렇게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하면, 그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거짓말로 보이겠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그것이 진짜 믿음에 합한 행함이 된다는 것이다.

◈ 바로 그런 행함이 여러분에게 있는가?

그래서 지금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행함이 여러분에게 있는가?” 라는 것이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사람이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려면, 자기가 반드시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사태가 왔을 때, 그 원망을 누구에게다 하겠는가? 분명히 하나님에게 퍼부을 것인데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의로움을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하면 “하나님, 제가 이렇게 착한 놈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억지로 이런 거짓말을 하게 하는 수모를 당하게 하십니까? 그러니 저는 싫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 그런 깨끗한 심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라고, 그렇게 얼마든지 우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베드로의 경우에 !!

사도행전에 보면 그렇게 우긴 인물이 등장하는데, 즉 자기의 착함을 계속해서 견지하려고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누구인가? 이것이 오늘의 퀴즈인데, 그가 바로 고낼료와 만난 ‘베드로’였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다 알고 있지만, 너무나 겸손해서 대답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ㅋㅋ).

(행 10: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행 10: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행 10: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행 10: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행 10: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행 10: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0: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이 베드로의 경우에, 위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런데 그 안에는 구약율법에 의해서 먹지 못하는 것들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자기를 시험하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 다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같은 선수끼리 말입니다. 저도 율법대로 살아가는, 그래도 한 율법을 하는 놈입니다. 저의 아이디가 ‘율법 베드로’ 인데, 아직 그것을 몰랐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법 -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것 !!

그러자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바로 이 베드로에게 한 방 쥐어박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이게 어디서 말이 많노? 내가 먹으라고 하면 그냥 먹는 것이지”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것이 바로 법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자기가 법을 만들어서, 그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규칙’과 ‘규칙성’ !!

지난 시간에 했지 싶은데, 제가 ‘규칙’과 ‘규칙성’의 차이점을 이야기했지 싶은데, 혹시 기억이 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규칙대로 지키는데, 그러니 우리는 어떠한고 하니, 그렇게 규칙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뭔가를 해놓고는, 과연 자기가 한 것이 성경말씀의 어느 대목과 일치하는지, 즉 일단 자기가 해놓고는, 그것을 뒤에 성경말씀을 찾아서 일치시키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규칙성’ 인데,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나중에 인간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설명하겠는데,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이 시키는 것이 바로 법인데, 그런데 하나님이 시키는 그 법은 전혀 우리가 예상을 하지 못한, 우리의 예상문제집에는 전혀 없는 것들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 일간신문처럼 매일같이 우리에게 !!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억수로 중요한 문제인데, 예를 들어서, 자기가 선교사로서 이제 한국을 떠나 인도에 갔다고 하면, 그런데 그 인도에서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꾸만 자기에게 한국에서 있을 때는 성경에 위배된다고 여겼던 것들을 강요할 때, 과연 그것을 해야될지 아니면 하지 말아야 될지, 그리고 아프리카에 가서도 도저히 자기로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데, 그것을 그 나라에서 시킬 때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주여, 제가 선교를 못하는 한이 있어도 이런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선교를 위해서 그렇게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는 것이 옳은지, 사실 그런 갈등은 누구에게나 매일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일간신문처럼 매일같이 우리에게 배달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매일신문인데, 사실 신문은 일주일에 하루라도 빠지지만, 그러나 이런 문제는 단 하루도 빠지지를 않고 매일같이 배달이 된다는 것이다.

◈ ‘나’를 위한 ‘복음’ 인가? ‘복음’을 위한 ‘나’ 인가?

거기에 대한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흙인데, 그런데 그런 흙에 복음이 덮어씌우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래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흙덩어리가 아닌 덮어씌워져 있는 바로 그 복음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흙인 존재가 복음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앞에서 말한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이 되는데, 즉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흙에 불과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복음을 위한 것인지, 그것을 구별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의 몸은 복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복음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이 법칙만 알면 되는데, 즉 우리 인간들이 복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결단코 복음이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비록 자기 신앙을 지킨다고 하는 것도 그만 비복음이 되고 마는데, 즉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곧 죄가 된다는 말이다.

◈ 니 마음대로 하세요 !!

그래서 제가 만든 어록 중에서 아주 유명한 것이 있는데, “니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정말로 복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복음을 지키면 의롭고, 그렇지 않으면 의롭지 않다고 하는, 그런 것조차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여, 오늘도 복음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라고 하시는군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순종한다는 말이다.

마치 기생 라합의 경우처럼, 비록 스파이가 왔다고 해도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들을 숨겨주는 것, 바로 그것이 자기 자신을 주께서 복음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경우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22장에서 기생 라합은, 조금이라도 주저하거나 꺼리는 마음도 없이 스파이들을 자기 집에다 숨겨주었다는 말이다. 

◈ 자기 생각 안 하기 !!

그러므로 이 야고보서에서의 믿음이 있는 행함의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생각을 하지 않음” 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를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복음을 위한 것인데, 그런데 복음을 거론하면서도 자기를 생각한다고 하면, 아무리 자기가 의로운 행위를 했다고 치더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되는 그 공로를 누가 가로챈 것이 되는고 하니, 자기가 그만 중간에서 가로채서는, 그 복음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동요에 보면,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라고 시작하는 것이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오빡생각’만 하면 나쁘다는 것이다. 누구 생각을 해야 하는가? 그런데 비단구두를 사주는 것이 단지 여동생을 위해서 사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사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빚을 내서라도 사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자기 누이동생이 아니라 복음을 생각하다가보니, 누이동생도 혜택을 받게 된다고,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복음을 거쳐서, 즉 복음이 주인공이고, 그 다음에 그러한 복음의 혜택을 입는 것은 우리 자신이고 말이다. 그러니 항상 복음은 먼저 중심에 두고 자기를 생각한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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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생각(최순애)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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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제가 일방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말았는데, 그러니 그 어떤 것을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목사님, 제사 음식을 만들도 됩니까? 제사를 드리는데 절을 해도 됩니까?” 라는 문제, 또 “일요일에 남편이 등산을 가지고 하는데 따라가도 됩니까?” 라고 하는 문제 등등 말이다.

바로 그러한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그 정답은 “니 마음대로 하세요” 라는 것인데, 다만 거기에서 ‘니’ 라는 자리에 ‘복음’을 집어넣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 마음대로 하세요” 라는 것인데, 즉 복음 마음대로 자기가 움직여나가면 된다는 말이다.

◈ 저는 복음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만약에 그것이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되어버리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는고 하니, “나는 잘했어, 아니냐 내가 못했어”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가 잘했는지 못했는지, 바로 그러한 은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오히려 로마서에서 제일 지적하고 있는 ‘행함’으로 그만 다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즉 “주여, 제가 잘했습니까? 못했습니까?” 라고, 그렇게 자기의 행함이 잘했는지 못했는지, 그렇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저는 그런 것을 보면 그야말로 정말이지 돌아버리는데(ㅋㅋ), 실컷 목소리를 높여서 복음을 이야기했더니만 그만 자기 행함으로 돌아가니 말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는 그만 중간에 어디론가 다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자기를 생각하지 말고, “저는 복음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렇게 되면 신랑이 등산을 가자고 할 때 등산을 가면 되고, 그런데 등산을 가지 싫으면 “어휴, 내가 등산을 같이 안 가면 남편이 삐칠텐데” 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오늘 등산은 가지 싫고, 교회에 가야 돼” 라고 하면서 자기 생각에 끌리는 대로 교회에 가면 된다는 것이다.

◈ 복음이 주는 자유로움을 !!

그것은 자기가 잘하고 잘못하는 차원이 아니라, “나는 복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 라는 ‘자유로움’ 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저는 오늘도 등산을 가지 않고 교회에 왔으니 잘했지요”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도 역시 자기 행함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럴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주어진 사태가 이미 전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입에서 그렇게 “여보, 등산을 가자” 라고 말이 나온 것조차도 누가 시킨 것인고 하니, 복음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시킨 것이니, 그러니 거기에 복음적으로 응답을 하는지, 우리는 그것만 살펴보면 된다는 것이다.

◈ 성도는, 팔자가 늘어진 자들의 모임 ??

그러므로 우리는 전혀 내일 일은 모를뿐더러, 사실은 거기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내일은 내일이 되면 또 다시 일간신문이 배달이 되어오듯이, 그렇게 되어진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살면 사실상 팔자가 늘어졌다고도 할 수 있는데,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든지 성도는 팔자가 늘어진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행함의 노선과 믿음의 노선 !!

아무튼 여기 교재 73페이지에 나오는 ‘인간의 행함’ 이라고 하는 것은, 그 노선이 두 가지가 있는데, 즉 행함의 노선이 따로 있고, 또한 믿음의 노선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제가 결정한 것이 아니니 저보고 따지면 곤란한데, 성경말씀에 그대로 나온다는 말이다.

이렇게 행함의 노선이 있는데, 여기에는 율법이 따라 부치고, 그런데 믿음의 노선에는 율법이 아니라, 이 율법의 반대말이 은혜인데, 즉 은혜가 따라 부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표정이 조금 그러한데(ㅋㅋ), 그래서 성경을 한번 찾아보겠는데, 로마서 4장 13절을 한번 살펴보자.

(롬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 율법에 속한 자들이 이미 분명히 !!

여기에 보면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라고 하는데, 그러므로 이미 이렇게 율법에 속한 자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즉 믿음의 노선과 율법의 노선은 전혀 다른 노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율법을 잘 지켜서 믿음생활을 잘하려고 우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믿음생활은 성경말씀 그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런 것을 가지고 얼마나 잘 우기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믿음을 준 것은 율법을 지키기 위함이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뭐라고 하는가? “옛날의 구약시대 사람들은 성령이 없어서 율법을 지키지 못했는데, 그러나 이제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성령이 왔으니, 그 성령을 받아서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우리 성도의 사명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과연 맞는 말인가? 전혀 아닌데, 분명한 것은 서로 노선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믿음과 율법은 서로 노선이 말이다. 그 수많은 율법을 언제 다 지킨다는 것인가? 그들의 말대로 하면, 지키다가 지키다가 다 지키지를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지옥에 간다는 말이다. 

◈ 광주행은 광주로, 대구행은 대구로 !!

그러므로 그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서로 노선이 다른데, 율법에 속한 노선이 따로 있고, 믿음에 속한 노선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즉 같은 노선에서 미흡함을 채우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이미 다른 노선에서 저쪽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마치 대전에서 이쪽으로 가면 광주로 가고, 저쪽으로 가면 대구로 가듯이 나우어 지듯이 말이다. 그렇게 이미 기차선로가 구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차를 타고 가는데, 그런데 저쪽을 보니 율법노선이라는 것이다. (어디가 율법이지? 광주? 대구? ㅋㅋ)

◈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한다 !!

그런데 여기 로마서 4장 15절에 보면, 이 율법은 무엇을 이룬다고 하는가?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진노를 말이다. 그러니 저쪽으로 가는 기차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싣고 있는데, 완전히 일명 ‘저주 화물기차’ 라는 것이다.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는니라
(롬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는가? 그런 저주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성품이니 직업을 가지고 서로 비교한다는 것이다. 즉 “저 집안은 불도가 너무 심한데, 그런데 사람은 하나는 참 착하다고 하더라. 직업도 의사이고 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자기를 바라보면 어떠한가? “나는 꼬라지가 이게 뭐꼬? 가진 돈도 없고, 직업도 제대로 없고 말이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저쪽은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엄청 좋은 직업에 부자이고, 그런데 자기는 교회는 다니지만 돈도 없고 직업도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교는 하나님의 저주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태도인데, 목사의 경우에도 어떠한가? “우리교회는 몇 명도 되지 않는데, 저쪽은 수 천명이나 모이고 말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지옥에 갈 인간들을 수 천명, 수 만명을 모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

하지만 로마서 4장은 뭐라고 하는가? 그 노선의 율법노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이룬다고 하는데, 그래서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이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율법이 아닌 은혜의 노선에 속하기 위해서, 너는 은혜에 속한 노선인가? 아니면 율법에 속한 노선인가?” 라는 것을, 즉 “너는 저주의 노선인가? 축복의 노선인가?” 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래서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가?” 라는 것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 믿음 - 아하, 행함으로 구원이 안 되는구나 !!

그러니 여기 말하는 ‘믿음’ 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코 너의 행함으로 구원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너는 고백하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즉 “니가 교회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또한 사회에서 그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그것으로 인해서 니가 구원될 수 없음을 니가 고백하는가?”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이렇게 믿음 안에 있는 이 행함은 도대체 누구의 행함이겠는가? 저쪽은 자기 행함이라고 하면, 그 반대편인 이쪽은 예수님의 행함인데, 그러니 여기 믿음에 속한 사람들은 참으로 뻔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이라는 남이 행한 행함을 가지고 마치 자기가 행한 행함이라고 우기면 어디에 가는가? 천국으로 가는데, 그래서 그것을 두고서 두 글자로 공짜로 받은 ‘은혜’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뻔뻔함의 극치 !!

다시 말해서, 자기는 전혀 행하지도 않고 남이 덜렁 행해놓은 것을 가지고, 즉 남이 십자가에서 모두 다 이루어놓은 것을 가지고, 마치 십자가 근처에 가지도 않은 자기가 모두 다 한 것처럼, 그렇게 뻔뻔하게도 십자가의 강도처럼 “오늘밤에 저를 좀 생각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뭐라고 하시는가? “니가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남이 다 해놓은 것을 가지고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그렇게 자기 의로 여겨서 구원을 받는데, 바로 이러한 계략, 혹은 이러한 책략은 누구 솜씨인가? 제갈공명의 솜씨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솜씨인데, 그러니 인간인 입장에서 우리가 그것을 좋고 나쁘게 볼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노선을 갈라지게 하셨는데,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즐거워하고 기뻐하시는데, 그런데 감히 피조물의 입장에서 그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믿음의 노선이 등장해야 하나님의 본심이 !!

그러니까 바로 이러한 믿음의 노선이 등장해야 진짜로 하나님의 본심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나의 계시로서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러한 십자가의 은혜 노선이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다음과 오해를 하는데, 즉 “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법을 주셨다. 그러니 우리는 지키라고 주신 이 법을 잘 지켜서 구원을 받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은 어떻게 하는가? 자기 마음대로 조직을 만들어서, 법을 많이 지키면 상을 많이 받고, 적게 지키면 상을 적게 받는다고 하는, 소위 ‘상급 차등론’이 등장을 한다는 것이다. 자기들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는 교인들을 완전히 자기 노예처럼 부려먹고, 가지고 있는 돈을 다 긁어내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교인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간다면 모르겠는데, 하지만 몽땅 다 지옥으로 끌고 간다는 것이다. 자기 혼자만 지옥에 가면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데, 정말이지 웃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인간의 행함은?

그런데 여기 교재 73페이지에 나오는 ‘인간의 행함’ 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행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이 교재 중간쯤에 가면 예수님의 행함이 나오는데 말이다. 거기에서는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되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 교재 73페이지에서는 거기에 앞서서 먼저 우리 인간의 행함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그런고 하면 먼저 율법을 주고는, 그 다음에 이 율법이 인간의 저주를 이룬다고 하는 것을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 교재도 그런 순서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먼저 주고는 “그 율법은 아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율법을 먼저 준 것은 오히려 저주를 키우기 위해서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 4장의 말씀인데, 그래서 저도 이 교재에서 율법을 먼저 언급하고 예수님의 행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 인간은 왜 행동하는가?

그렇다고 하면, 인간의 행함에 있어서, “과연 우리 인간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 행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이 이 교재에도 나오지만, 먼저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데 말이다. 우리 인간은 하루하루 매일같이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왜 그렇게 행동을 하느냐는 것이다. 즉 “인간은 왜 행동하는가?” 라는 것이다.

◈ 후설 - 인간은 노림수가 없으면 행동하지 않는다 !!

여기에 대해서 ‘후설’ 이라는 철학자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것을 두고서 ‘지향성’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은 노림수가 없으면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노림수, 그것을 훗설은 현상학에서 주장했는데, 노에말을 보는 노예시스라고, 그렇게 아주 어려운 용어를 사용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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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에시스 [Noesis]  - E.후설의 현상학에서 의식의 기능적 ?작용적 측면. 노에시스적 계기라고도 한다. 그리스어 누스(정신 ?이성) 및 그와 동계인 노에인(사유한다 ?지각한다 ?직관한다)으로부터 파생된 no?sis에 유래한다. 노에시스는 의식을 구성하는 심적(心的)인 실재적 요소이며 그 구조에서 두 가지 요소로 구별된다. 첫째 요소는 일정한 정립성격(定立性格)을 가지고 대상을 지향하여 대상의 노에마적 의미에 대응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또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한편으로 표상(表象) ?판단 ?감정 ?의욕과 같은 작용성격을 정립하는 것, 다른 한편으로는 확신 ?의혹 ?물음 ?개연(蓋然) ?부정(否定)과 같은 신빙성격(信憑性格)을 정립하는 것이다. 둘째 요소는 그러한 정립성격을 가진 노에시스적 요소가 단순한 지향작용으로서가 아닌 의미부여(意味附與)의 작용을 할 때 당연히 그 기초로서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질료적(質料的)인 것, 충실한 노에시스적 또는 실유적(實有的) 기저(基底)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노에마적 의미는 이 기저 위에 각기의 성격화를 가지고 나타난다. 노에시스에서의 이 두 요소의 통일은 실재적 결합을 가진다. - 두산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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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위한 현실 만들기 !!

이런 “인간은 왜 행동하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여기 교재 73페이지에 보면 ‘(가) 현실 만들기’ 라고 나오는데, 이것도 어려운 말인데, 사실 여기에 빠진 것이 있는데, 그것이 누구를 위한 현실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한 현실 만들기” 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남을 위한 현실을 만들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를 위한 현실을 만들기 위해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만의 세계, 자기만의 킹덤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왕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못된 버릇은 어디에서 배웠는가? 창세기 11장에 보면 인간이 바벨탑을 쌓는데, 며칠 뒤에 두바이에서 세계에서 제일 높은 800M짜리 건물을, 2등과의 격차가 무려 200M 이상이나 차이가 나는 160층짜리 건물이 오픈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삼성물산에서 건설했다고 하는데 말이다. 아래층에는 백화점도 있고, 위에는 아파트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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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즈 두바이 [burj dubai]  -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 건설되는 세계 최고층 건물이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 구조물이다. 삼성물산이 시공사로 참여하여 연면적 49만 5867㎡의 160층, 전체 높이 810m로 건설한다. 아랍어로 ‘두바이의 탑’ 이라는 뜻이며, 영어식으로 ‘버즈 두바이’ 라고 읽기도 한다.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신도심 지역에 건설되는 초고층 건물로서 전체 높이 810m로 설계되었다. 2004년 9월 21일 착공하여 38개월만인 2008년 4월 8일 전체 지상 높이 630m에 도달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 구조물이 되었다. 종전까지 가장 높은 인공 구조물은 미국 노스다코타주의 방송 송신탑으로 높이 628.8m이다. 2007년 7월 141층까지 건설되어 높이 512.1m를 넘어섬으로써 높이 509m인 타이베이금융센터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되었다. 마지막 층인 160층은 2008년 3월 이미 마무리되었으며, 나머지 부분은 첨탑이다. 시행사는 두바이의 에마르이고, 한국의 삼성물산 건설부문이 시공사로 참여하여 3일에 1층씩 올리는 최단 공기(工期) 수행으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총 공사비 40억 달러 이상이 소요되어 2009년 9월 완공된다. 건축 자재는 콘크리트 33만㎥, 철근 3만 9000t, 유리 14만 2000㎡ 등이 투입되고, 고속 엘리베이터 56기가 설치된다. 연면적이 49만 5867㎡에 이르는데, 이는 한국의 잠실종합운동장 연면적의 56배에 달하는 규모이다. 상업 시설과 주거 시설, 오락 시설 등을 포함한 대규모 복합 시설로 이용된다. - 두산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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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간들은 왜 그런 높은 건물을 짓는가? 두바이에 땅에 모자라서 그러한가?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땅 속으로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데, 왜 우리 인간은 그렇게 높고 높은 건물을 계속해서 지으려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바벨탑이 지향하는 곳이 어디인고 하니까, 즉 바벨탑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 !!

창세기 11장 3절에 보면, “우리 이름을” 라고 한 앞에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땅에 닿자” 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닿게 하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바벨탑을 인간들이 쌓기 이전에 무슨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노아홍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노아의 홍수사건은 위에서 비가 내려왔는데, 그러니 홍수를 일으켰던 하늘과 땅의 갭을 인간들이 메워버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남진이 불렀던 유명한 노래가 있는데, “바다가 육지라면” 이라고 말이다. 혹시 아시는지? 그런데 바다이기 때문에, 즉 물이 있어서 건너가지를 못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하면 건너갈 수가 있는가? 당연히 다리를 놓으면 된다는 말이다.

지난번에 인천에 엄청난 다리를 놓았다고 하는데, 송도 신도시와 인천공항 사이를 가로지르는 말이다. 전라도에도 소록도에 다리를 놓는다고 하고 말이다. 그렇게 브릿지를 건설하게 되면, 과거에는 건너갈 수 없는 곳을 가뿐하게 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잠시 ‘4영리’에 대해서 !!

선교단체의 ‘4영리’ 라는 전도교재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사랑이라” 라고 하면서 하트를 그려놓고는, 그 다음에는 이렇게 우리 인간이 있고, 저쪽에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서, 그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가 없는 깊은 계곡이 놓여있고, 그 사이에는 다리가 하나 놓여있다는 것이다. “라이커 브릿지 오브 츠라블 더 워러” 라고 갑자기 팝송이 생각나는데(ㅋㅋ), 그런 다리를 십자가로 그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청년들은 그것을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그것은 사실 일종의 바벨탑인데, 그렇게 다리가 있으니, 원래는 건너가지 못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다리가 있으니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맞는가? 설령 그렇게 해서 건너가도 천국이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다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건너갈 수 있는 그런 십자가는 없으니 말이다.

여기서는 이 십자가가 인간과 이렇게 연결되어있는데,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는 거꾸로 되어서 우리 인간과 서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 간격이 서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성령이 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아무리 십자가를 믿는다고 해도, 결코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육으로 난 것은 육에 불과하지, 결코 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선교단체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육으로 난 우리 인간들에게, 그 누구든지 제대로 가르치기만 하면 모두가 다 믿는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고난인데, 레비나스의 경우에는 타인의 아픔이고, 헤겔의 경우에는 이성의 완성, 혹은 이성의 간지(?) 라는 말이다. 그렇게 고통받는 이웃의 의미가 어떻고 하면서, 철학까지도 모두 다 동원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천주교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 정도라면 우리 인간의 양심으로도 할 수 있다고 해서, 문둥병 환자 촌에 가서 같이 얼굴을 비비면서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테레사 수녀의 경우에는 평생을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면서 살았는데, 그것이 예수의 길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는 일명 사랑의 원자탄이고, 자기 아들을 죽인 자들은 양자로 받아들이고 말이다. 또한 한경직 목사는 고아원을 차려서 성자 흉내를 내고 말이다. 마치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인 것처럼 호도를 하는데, 하지만 모두가 다 엉터리라는 것이다.

◈ 진짜 성도는, 강도와 창녀의 모습으로 !!

그렇다면 진짜 성도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강도가 되고, 또한 창녀의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도저히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런 소리가 전혀 나오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이웃을 돌보고, 구제하고, 헌금하고, 봉사를 해도, 아무리 그렇게 해도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십자가, 바로 그런 입장에 있는 탕자가 될 때, 비로소 그동안 자기가 한 모든 착함과 의로움들이 다 무당짓이었다고 하는 것을, 그래서 그러한 모든 것을 다 버릴 때, 그래서 “주여, 정말이지 부끄럽습니다. 저를 그냥 발로 차도 좋고, 침을 뱉어도 좋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때, 그것이 바로 신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주님, 제 안에 누구를 섬겨야 한다는 생각은 없고, 오직 자기의 위신과 자존심으로 살았습니다” 라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는, 마치 부산에서 빨래를 널다가 잡힌 신창원처럼,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범인들이 잡히면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는데, 아마 TV에서 보고 배운 것 같은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성도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 생명의 면류관마저도 반납을 하고는, “지금 제가 이렇게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단지 죄인의 괴수일 뿐입니다” 라고 하는, 바로 그런 자들에게만 십자가가 닥쳐온다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가 덮치니 그렇게 되었지만 말이다. 즉 십자가에 올라탈(?) 경우에만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믿음에 합한 행함 !!

그것이 바로 “믿음에 합한 행함”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런데 선교단체에서는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꼬드기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가? “니가 과거에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두 다 토해내어라” 라고 하는데, 사실 아이들에게 토하게 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한데, 술만 먹이면 모두 다 토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ㅋㅋ).

아무튼 그렇게 울고불고 하도록 만들어서, 그것이 마치 십자가를 올라탄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세례를 주고 잔치를 벌린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취직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십자가고 뭐고 다 없다는 것이다. 취직을 해서 결혼을 하면, 자기 마누라가 최고이고, 그리고 자식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교회에도 나오지 않고,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라는 것이다.

◈ ‘바벨탑’ 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 이 ‘바벨탑’ 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현실인데, 그런데 그런 현실을 자기 욕망이 만든 현실 속에서 누구를 끄집어당기는고 하니, 하나님도 끄집어당기고, 예수님도 성령님도, 그리고 성경에 있는 모든 구절을 다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 다 끄집어당겨서 자기가 꿈꾸던 현실을 구체화시키는 야심만만함인데, 즉 자기는 할 수 있다고 하는 그 투철한 의지력, 그것이 곧 인간의 행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셀 푸코가 이야기했지 싶은데, 아니 일본의 어느 철학자가 말했는가? 아무튼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겸손과 절약정신은 스쿠루지 영감보다도 더 나쁘다고 했다는 것이다. 챨스 디킨스 원작인데, 이 구두쇠 스쿠루지가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에 자기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삶을 후회해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 칼빈주의의 겸손과 절약은?

아무튼 그러한 구두쇠는 상품을 절약하는 나쁜 놈에 불과하지만, 그런데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상품을 사기 위한 돈을 축적하는 것이기에 더 악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겸손이 겸손이 아니고, 절약이 절약이 아니라는 말이다. 미래에 다른 사람의 뒤통수를 치려고 하는 일종의 자기 인내인데, 즉 노림수라는 것이다.

그러니 쓸 것을 쓰지 않고 먹을 것을 먹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그렇게 악착같이 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남의 영혼까지도 마구 빼앗아가겠다고 하는, 바로 그런 노림수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이 바로 남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도록, 그런 기회마저도 차단시켜버리고 만다는 말이다.

◈ 행함 - 자기가 꿈꾸어오던 현실을 구체화하는 것 !!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행함’ 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꿈꾸어오던 그 현실을 구체화해서 실현을 시키면서, 거기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바로 ‘법’이 나오는데, 법이 말이다. 칸트철학에서는 이것을 ‘입법’ 이라고 하는데, 즉 법을 세운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내부에서 법을 세우는데, 그런데 이러한 법, 즉 규칙은 무슨 용도인고 하니까,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법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에 대한 규칙이라는 말이다.

◈ 블로흐 -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폭을 줄이는 방향으로 행동을 !!

이것을 ‘블로흐’ 라는 철학자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인간이 이렇게 ‘A’ 라는 지점에 있다고 하면,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머무는 순간에 ‘B’ 라는 포인트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A’와 ‘B’ 라는 지점 사이에서는 미흡함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인간은 무작정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기가 상상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상상한 것의 폭을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회에서는 ‘비전’, 혹은 ‘꿈’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에는 꿈이 없으면 행함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큰 꿈을 꾸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자기의 법을 보다 더 엄격하게 가지고 가기 때문에 절제를 많이 할 것이고, 반면에 꿈을 작게 가지게 되면 그냥 대충해도 이루어진다고 여기게 되니, 절제를 적게 하면서 대충 대충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꿈을 크게 가지게 되면 막상 나중에는 그것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작은 것은 건진다고 하는 계산은 깔려있다는 것이다. 목사들은 그것을 가지고서 시편 18편을 인용하면서 어떻게 설교하는가? 입의 각도를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즉 입을 크게 벌리면 어지간한 것은 다 채운다고 한다는 말이다. 100% 다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시 81:10)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

하지만 시편에 있는 그 본문은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새로운 것을 입에 담아주겠다고 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즉 천국의 법칙과 애굽은 법칙은 그렇게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입을 벌리면 너희들이 꿈도 꾸지 못한 것을 주겠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야망을 이루는 식으로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야망을 이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원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러니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뜻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차이남, 즉 그런 새로움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성도는 누린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원래 이름이 없지만 !!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뜻을 지금 잠시 이야기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하는 것은 누구를 의식하는고 하니까, 사실은 하나님은 원래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름을 지어주시는 분이지 그 이름을 자기가 받아야 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빠, 아빠의 이름이 뭐지?” 라고 하면서 자식이 물으면, 아빠는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아빠는 자기의 이름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임마, 너는 그냥 아빠를 아빠라고만 불러. 니가 아빠의 이름은 알아서 뭘 할건데? 알았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이름이 있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사람의 이름을 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이름을 쳐서, 거기에 빈 공터를 만들어서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집어넣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이제부터 나는 너희들과 상대하지 않고, 내가 이름을 준 내 아들과 상대를 하겠다” 라는 것이다.

◈ 너희는 저희의 말을 들어라 !!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래서 마태복음 17장 5절에 보면, “너희는 저희의 말을 들어라” 라고 했는데, 여기서 ‘저희’가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예수님하고만, 즉 예수님 안에서만 상대를 하시겠다는 것이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 하나님께 영광 -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

그러니 효도를 해도 예수님하고만, 즉 예수님 안에서만 하는 것이고, 또한 부부간에 서로 사랑을 해도 당연히 예수님 안에서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남편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양육할 때도 당연히 예수님 안에서 해야하는 것이고, 또한 자식도 부모님을 대할 때 예수님 안에서 해야하고 말이다. 그리고 회사에 있어서도, 노동자들은 사장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예수 안에서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것들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것이 다 예수님 안에서, 그렇게 진행이 될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있을 때 말이다. 인간들의 자기 이름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그 이름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어떻게 하는고 하니, 매일같이 일간신문이 배달되듯이, 그렇게 매일 매일 우리 인간의 이름을 지운다는 것이다. 갑자기 매일신문이 그리워지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을 친다는 것이다.

◈ 바벨탑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

그렇다고 하면 이 바벨탑에 있어서 인간들이 뭐라고 했는가? “우리의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 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 인간의 이름을 누가 쳤는가? 즉 바벨탑이 무너지고 그 현장에 누가 등장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실 하나님은 이름이 없고, 그냥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의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무엇으로 바뀌는고 하니까, 그것이 나중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이 되게 하는 기능이 있는데, 바로 그런 기능을 실제로 추진하는 주인공이 누구인고 하니, 그분이 곧 하나님의 이름인데, 그분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리가 들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한 명이라고 해도, 그러한 이스라엘의 기능을 하는 분은 누구인가? 이삭도 아니고 야곱도 아니고 누구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속에 계시는 분,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제사를 지낼 때 누구의 이름을 의지해서 지내는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제사를 지내는데, 즉 “이것은 우리가 해도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하셨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은혜를 주고, 또한 저주도 주고 !!

바로 이 이름이 하시는 일이 두 가지인데, 먼저 하나는 자기 백성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는 일이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자기 언약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이름을 경배하는 자들에게는 축복을 해주시고,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고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이다.

어제 우리교회에 오랜만에 나오신 분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자기가 지금까지 성경을 대충 보면서 신앙생활을 할 때는 하나님이 축복의 하나님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 하나님이 지옥의 하나님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 지옥의 하나님 !!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여러분은 과연 언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지옥의 하나님인 줄 실감이 나던가? 아직까지 그런 실감이 나지 않던가? 그러면 곤란한데 말이다. 그러한 지옥의 하나님을 모르면서 우리가 무슨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지옥도 모르는 자가 사랑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다 거짓말인데, 그것은 자기 현실을 키우려고 하는 인간의 야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박탈을 당하고 그만 무장해체가 되어서, 그렇게 해서 그야말로 지옥의 무서운 맛을 보고 나서는 말이다. 자기는 사우나에도 5분을 견디지 못하는데, 그런데 이 지옥은 한번 들어갔다면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우나는 참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문을 박차고 나가면 되는데, 그런데 지옥은 그것이 안 된다는 말이다. 

흔히들 살을 빼기 위해서 지옥훈련을 한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훈련이지만, 그러나 지옥은 아예 그런 훈련도 없다는 것이다. 즉 훈련할 기회도 전혀 없이 그냥 가면 바로 간다는 것이다.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천국에 넣어주지 않아서 지옥에 !!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도대체 왜 지옥에 가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밖에 없는데, 우리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지옥에 가도록 되어있기에, 그래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할 말이 있을 수가 없는데, 즉 쉽게 말해서, 왜 지옥에 가는고 하니, 천국에 넣어주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제가 목회를 30년이 넘게 한다고 이렇게 폼을 잡고 있는데, 그런데 그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왜 우리 인간들이 지옥에 가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천국의 주인이 넣어주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 이유뿐인데, 그 사람이 더 나쁘고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람을 피우고 원조교제를 하고 말이다. 천국에 넣어주지 않으니 갈 곳은 지옥밖에 다른 곳은 없다는 것이다.

◈ 지옥은 기본이고, 천국이 보너스 !!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간다고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운(?)이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보너스로 주어지는 축복인데, 물론 저주는 우리 인간에게 기본이고 필수이고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전도하면서 지옥에 가라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오라고 전도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그냥 가만히 두어도 지옥에 가는 것이니, 굳이 지옥에 가라고 전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만큼 하나님의 축복이 엄청나고 좋은데,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가족과 돈밖에 모르니 기가 찰 노릇인데, 그래서 주일 아침에 설교를 하려고 강단에 서면 기가 찬다는 것이다. 마치 앉자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무엇인고 하니까, 굳이 설교를 할 필요가 없는데 왜 하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전해도 어차피 자기 가족들을 찾아 떠날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저도 어떤 생각이 드는고 하니, 정말로 설교를 해야하는지 망설여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또 생각해보면, 이렇게 주께서 만나게 하시는 것도 무엇인가?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 라는 노래도 있듯이, 저는 그것을 믿는데 말이다. 그러니 “과연 그렇다.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고, 저 양반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러니 서로가 살아있을 때 복음을 전하라고 주께서 이렇게 하셨구나” 라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 성전 - 하나님의 전쟁 기념관 !!

아무튼 하나님의 이름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을 공격하게 되는데, 그렇게 인간의 이름을 부수고, 그 자리에 인간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즉 부수어진 전쟁터의 기념관에 하나님 자신이 좌정을 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신의 성소, 즉 성전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구약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날마다 인간의 이름을 부수어 버리신다는 것이다.

◈ 아브람과 아브라함 !!

그래서 ‘아브람’ 이란 이름은 누구에게 당해야 하는고 하니, ‘아브라함’에게 당해야 하는데, 즉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나오지만, 그러나 아브람에게서는 이삭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이스마엘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브람과 이스마엘의 계통은 율법계통이라고 보고,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계통은 하나님의 은혜계통이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이 두 가지 계열이 나란히 갈라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이렇게 했을 때, 만약에 이것을 믿지 않는 자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목사님, 그 말은 그럴듯한데,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진짜라고 하는 증거를 대보세요?” 라고 한다면, 저는 분명히 말씀을 드릴 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라는 것이다.

◈ 오직 십자가와 부활만이 증거 !!

그것은 일종의 논리도 아니고 또 철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머리가 좋아서 지어낸 소설도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모든 것을 다 증거하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누가 유혹을 하드냐는 말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우리 가정에서 자식들이 속을 섞이고 남편과 아내가 애를 먹여도,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힘이 들어도, 그러면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생각한다면, 그러면 “아하, 내가 또 다시 나의 또 하나의 현실을 만들려고 했구나” 라고, 즉 자기가 즐거운 자기의 현실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 눈이 많이 와서 마음이 급한데, 다시 교재를 살펴보자.

** (가) 현실 만들기 - 새집과 새장이 어떻게 다른가? 새는 자기 보금자리를 만들 줄 안다. 그것이 새집이다. 그것은 새집이다. 그러나 새장은 가두어놓기 위해서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새는 새장을 만들지 않는다.

◈ 새집과 새장의 차이점은?

무슨 의미인가? 새가 스스로 만드는 것은 새집이고, 반면에 우리 인간이 만들어주는 것은 새집이라는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골든벨에 나와도 무방한 문제가 되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들은 무엇을 만드는가? 새장이 아닌 새집을 만드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새장을 만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열심히 새집을 만들어놓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새장으로 만들어서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인간들아 많이 들었는가? 열심히 만들어서 니가 만든 것에 니가 갇히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들이 만든 것이 그만 우리 인간들의 올무가 되어서, 우리 인간들이 그 안에 갇히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집을 짓고 나면, 그 집의 온 벽에다 무엇을 붙이는가? 자기 사진이나 가족의 사진들을 여기 저기에 마구 걸게 되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여기는 누가 뭐라고 해도 바로 내 집이다” 라는 것인데, 물론 자기 사진만 마구 걸면 미안하니 거기에다 마리아나 예수님 사진도 걸고 말이다. 그야말로 악세사리로 말이다.

◈ 예수님의 모습은?

물론 예수님의 사진이 없으니, 누군가가 중국에서 눈이 오는 날에 우연히 눈을 보고 찍었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하면서, 그런 것을 걸어놓는다는 것이다. 혹시 그 사진을 보셨는지? 제가 보니 아무리 봐도 록 허드슨을 닮았던데 말이다(ㅋㅋ). 그리고는 식탁에다 밥그릇을 하나 더 떠놓고는 그것을 주님의 자리라고 하면서, 주님의 자기 가정에 함께 하신다고 하면서, 우리 인간들이 그런 생쇼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사진이고 마귀의 밥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진에 보면 수염이 나있는데, 하지만 성경 그 어디에도 예수님에게 수염이 나있다는 대목이 없다는 것이다. AD300년경부터 예수님 그림에 수염이 등장하는데, 그 이전에는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CSI에서 조사를 하든지 해야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말이다.

물론 제가 보기에는 둘 다 거짓말인데, 성경에서의 예수님 모습은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나오는데, 그 모습이 어떠한가?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과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데, 즉 무서움을 더 능가하는 무서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의 모습이 이 지상에서의 모습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말이다.

(계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계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 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 너무나도 낯선 예수님 !!

그리고 요한복음 20장에 봐도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가?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닫혀있는 문을 그냥 통과하고 들어오시는데, 그러니 전혀 엉뚱한 모습의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낯선 모습으로 오셨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자기의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여주니 비로소 그들이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3년이나 동고동락을 했는데 말이다. 또 요한복음 21장에서도 보면 어떠한가? 베드로도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 있을 때는 몰랐고, 먼저 말을 거시니 비로소 알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24장을 보아도,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어떤 아저씨와 같이 동반해서 갔는데, 그런데 나중에 밥을 먹을 때 그분이 눈을 뜨게 해주니 비로소 그분이 예수님인 줄로 알았지, 그 이전에는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즉 “당신은 누구세요?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장돌뱅이인가요?” 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지, 평소에 자기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 나의 죄를 지적할 때, 비로소 ‘아하, 예수님’ !!

그러니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어떤 기능을 하시는 분인데, 그렇다면 그 기능이 무엇인가? 꿈에 웃는 모습으로 멋있는 분이 수염을 달고 나타나면 그러한 분은 예수님이 아닌 줄로 알고, 오히려 마귀라는 말이다. 다만 우리의 죄를 지적할 때, 그때는 예수님인 줄로 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만든 우리의 현실을 부수는, 그렇게 우리의 현실을 부정하고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 때, 그때 비로소 주님이 다녀가신 줄로 알라는 것이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나 물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다녀간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지 않고 자기를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사진이나 걸어놓고 믿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들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접근해서 나아가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가? 자기 자신을 비추고 투사한 하나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가 주장했던?)

계속해서 교재 37페이지를 살펴보자.

** ‘하나님의 현실’을 ‘나의 현실’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인간들이 진력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활동은 ‘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영글어 내느냐와 관련이 있다. 즉 대자연이 곧 현실은 아니란다. 이 대자연 안에서 자기를 위한 세계를 자기 손으로 만들고 다듬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새삼 현실이 조성이 된다고 사람들은 보고 있다.

◈ 대자연은 현실이 아니다 !!

여기에 보면 “대자연은 현실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여기에 이렇게 커다란 대자연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가운데 눈을 동그랗게 해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별을 보고 달을 보면서 대자연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해와 달과 별아, 그대로 거기에 있어라. 내가 파악해줄 게”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 대자연을 객체라고 하고 인간을 주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 객체와 주체를 이을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 자신 자체가 이 대자연의 일부로서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 야, 똑바로 서야 사진을 제대로 찍지 !!

예를 들어서, 우리가 배를 타고 파도가 출렁거리는 바다 한 가운데 있다고 놓여있다고 한다면, 그런데 우리는 그 흔들리는 배 위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서 뭐라고 하는가? 파도치는 바다로 인해서 배가 흔들리는 줄은 모르고, 자꾸만 사람을 보고 바로 서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진을 찍기 어렵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현실은 어떠한가? 정작 사진을 찍으려는 자기 자신도 흔들리고, 그 대상도 흔들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배도 흔들리고, 바다도 흔들리고 말이다. 그리고 거기서 바라보는 하늘도 역시 흔들리는데, 즉 흔들리는 배 위에서 하늘을 쳐다보면, 하늘의 해도 흔들리고, 달과 별들도 역시 흔들린다는 것이다.

◈ 인간은 하나로 전체를 보려고 하는 습관이 !!

훗설의 현상학을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여기에 이렇게 사과가 하나 있는데, 그런데 뒷부분이 그만 썩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과를 앞에서 본다고 하면, 그 사과는 멀쩡해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과는 멀쩡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썩어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사물을 볼 때 전면을 보면서 그 전체를 한꺼번에 다 생각한다는 것이다. 뒷면은 보지도 않고 말이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전면을 보고 그 전체의 통일성을 끄집어내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는 그것이 옳다고 마구 우긴다는 것이다. 즉 보지도 않고 대략난감으로(?) 그냥 그렇다고 넘겨집기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볼 때 어떻게 하는가? 그 사람의 행동을 하나를 보고는 그 사람 전체를 다 안다고 한다는 말이다. 즉 “너는 이제 나에게 찍혔어. 이제 변명을 해도 안 통해. 나는 이제 너를 안 믿어” 라고, 그렇게 하나를 보고는 결정하고 만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자기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참으로 희귀한데(?), 모든 사람들이 다 봐도 예수님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9장 24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유대인들은 우리 인간들의 행태를 대표하고 있고 말이다.

(요 9:24)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이렇게 유대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죄인으로 보았는데, 그런데 만약에 그런 예수님을 우리는 의인으로 본다고 하면, 우리도 역시 다른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취급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려고 하니, 그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사람들의 눈에는, 물론 사람들은 단면만을 보고 그 사람을 결정을 내리는데, 즉 모든 사람들이 이미 예수님을 죄인으로 규정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남들이 다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그분을 오히려 우리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의인으로 믿겠다고 나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현상은 성령이 아니고는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 나도 예수님과 함께 죽을 거야 !!

그러니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래, 너희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그분과 나는 죽을 게” 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죄인이기 때문에 죽으라고 한다면, 나도 역시 예수님과 같이 죽을 거야”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바로 그런 마음가짐이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예수님과 하나가 된 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는 개인적으로 믿는 게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지 않게 여긴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감수해야 될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9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하는고 하니,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했는지, 거기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 때문에 죄인으로 이야기를 했고, 거기에 반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제대로 잘 모르기 때문에 겁도 없이 한번 믿어보겠다고 설친다는 것이다.

◈ 성령이 아니면 !!

그러니 누가 더 똑똑하고 현명한가? 당연히 예수님을 죄인으로 간주했던 그들인데, 그러니 쓸모 짝이 없다고 여겼던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날 이 시대보다 예수님을 더 확실하게 제대로 알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제대로 예수님을 알았다고 하면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을까? 당연히 믿지 않을 자들인데, 그런데 무엇 때문에 믿는가? 조금 전에도 언급했지만, 예수님의 영, 즉 성령이 오니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이렇게 진행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뭐라고 하는가?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이런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면, 그렇게 되면 제대로 된 예수님을 누가 믿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그런 좋으신(?) 예수님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 교인들은 당연히 가짜 예수를 !!

지금 제가 말하는 논리가 틀린 것이 아닌데, 성경과는 너무나 다른 예수가 설치다보니 진짜 예수는 그만 믿을 가치도 없는, 그런 예수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엉터리 예수는 다 걷어내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수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특정한 일면만을 보고, 즉 “나는 예수님을 믿어서 병이 나았다, 사업이 잘 된 적이 있다, 우리 아이가 공부를 잘 하더라” 라는 등등, 그런 단면만을 보고서 그것이 예수님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왜 죽었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면, 그때는 예수님의 전체가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서 성경적으로 예수님을 가르치게 되면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왜냐하면 교인들이 다른 가짜 예수를 찾아왔지 진짜 예수를 찾아온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즉 자기의 현실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도움을 주는 예수를 원하는 것이지, 자기가 굳이 예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주는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왜 진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인가? 다만 자기가 아쉬울 때만 잠시 찾아와서는 그 뒤에는 헤어지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갓바위의 예수처럼 말이다. 자식을 수능시험을 친다든지, 아니면 남편이 승진시험이 있을 때만 잠시 만나주면 된다는 것이다.

◈ 목회는 아슬아슬함 그 자체 !!

그런 면에서 목회라고 하는 것을 참으로 아슬아슬한데, 저는 토요일 밤이 되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분명히 지난번까지는 우리교회에 교인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우리교회 교인들이 일요일 아침에 생각하기를, “내가 교회에 왜 가야하지? 안 가면 안 되나?” 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오늘은 교회에 안 갈란다. 이제는 좀 쉬었다가 믿고 싶어” 라고 한다면, 사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데, 사실 제가 목회를 하지 않고 그냥 평신도로 다닌다고 해서 그렇게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생각을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고, 만약에 그렇게 해서 그 누구도 교회에 오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면 저는 무슨 생각을 하는고 하니, “그러면 복음을 도대체 누구에게 전하지?” 라고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 말이다.

◈ 장로님, 왜 또 오셨지요?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 교회에 오는데, 그러면 서 장로님부터 먼저 교회에 나오시는데, 그러면 얼마나 감사한 마음이 드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하, 주님이 또 보내셨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속으로 말이다. 즉 “장로님, 이제는 안 오셔도 되는데, 그동안 많이 믿지 않았습니까? 인간적으로 그렇게 많이 믿었으니 하나님도 인간적으로 구원하시지 싶은데, 그런데 또 오셨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목사님, 일요일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교회에 갑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자기에게 무슨 할 일이 있으면 당연히 교회에는 가지 않겠다는 소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튼 저도 이런 생각이 드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한가? 오는 사람까지도 다 내보내는 사람들이라고 여기고 거두어주시니, 사실상 예수님은 얼마나 외로우냐는 것이다. 고독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와도 갈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현실에 유리할 경우에만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이다.

◈ 다시 대자연 속으로 ??

아까 교제에 나오는 대자연을 설명하다가 말았는데, 이 대자연 속에 우리 인간이 있다고 하면, 우리 인간은 이 대자연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상상해서 만들어낸 추상적인 자기 현실에다 여러 가지 일어난 사태들을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헤헤, 나는 하나 건졌다” 라고 하는 식으로, 이런 대자연 속에서 자기만의 현실을 따로 꾸며내기 위해서, 바로 그러한 짓을 하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행위, 공부를 하는 행위 등등, 그렇게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계속해서 통하겠는가? 히브리서 9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칼자루는 누가 쥐고 있는가? 우리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 쥐고 있는데,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니가 현실을 제대로 알기는 알아서 그렇게 까부나? 니는 니 현실밖에 모르지? 이 대자연을 바로 나의 현실이야” 라고 하면서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그때는 아무리 살려달라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말이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지금 바깥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74페이지를 보자.

** 현실은 그냥 현실이 아니라 나를 위한 현실이며, 동시에 다음 세대를 위한 현실이어야 현실답다는 것이다.

◈ ‘다음 세대’를 위한 현실이어야 !!

여기에 보면 “다음 세대를 위한 현실이어야 현실답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식, 자기 가문, 자기 혈통인데, 즉 “나는 죽어도 제사는 지내야 한다” 라고 하는, 그렇게 기껏해야 자기의 혈통을 유지하는 것을 가지고 영원성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겨우 그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심판을 받아서 멸망하고 만다면 우리 인간들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내일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오늘 자식을 낳겠다” 라고 하는데, 그것과 비슷하게 스피노자가 뭐라고 했는가? 차마 자식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자기는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스피노자는 왜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는가? 어디 사과주스 공장을 차릴 일이 있는가? 자기는 사과열매를 따먹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신이 영원하다면, 나도 영원하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기독교가 아니고 유대교 신자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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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노자 [Baruch de Spinoza, 1632.11.24~1677.2.21] - 네덜란드의 철학자. 데카르트 철학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 ??모든 것이 신이다??라고 하는 범신론(汎神論)의 사상을 역설하면서도 유물론자이며 무신론자였다. 그의 신이란 그리스도교적인 인격의 신이 아니고, 신은 즉 자연이었기 때문이다. - 두산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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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인간의 현실은 어디까지나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과거와 무수한 미래도 펼쳐 가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인간들이 이해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이름으로 만든 현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주님의 현실로 바꾸어버리시는데, 바로 그러한 눈을 뜨게 할 때, 그 사람이 곧 성도, 즉 주의 이름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진짜 현실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1,23 오후 10시 55분에 마침.
                                                                            니들이 예수님을 알어?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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