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15강 경제 그물망

피/피 2010. 10. 6. 08:52

091207 피15강 경제 그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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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091207피p049경제그물망

피15강 경제 그물망

[09 대구강의 19] - [피 15] - 경제 그물망
                                                                                
                                                          09,12,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물고기와 그물 !!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교재 49페이지에 나오는 ‘(3)경제 그물망’ 라는 부분부터 살펴보겠는데, 여러분은 ‘경제 그물망’ 이라고 하니 무엇이 연상되는가? 물고기를 잡는 그런 그물이 연상이 되는데, 즉 물고기를 잡을 때 그 고기가 그물 안에 들어오면, 고기는 그 그물 안에 있는 존재가 되고, 그러면 그 고기의 자립심은 날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기가 그물 안에 들어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얽혀있는 그물 안으로 고기가 들어오게 되면, 그 고기는 이 그물에 대해서 “나는 그물을 몰라” 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물 밖에 있을 때와 그물 안에 있을 때는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일단 고기가 그물 안에 들어오게 되면, 고기가 움직일 때마다 무엇도 같이 움직이는고 하니, 그물도 같이 움직여서, 즉 고기는 그물의 저촉의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태양과 지구와 달도 역시 !!

여러분이 보기에 지구가 자유롭고, 달이 자유롭고, 또한 저 태양이 자유로운 것 같아 보이는가? 전혀 그렇지가 못한데, 누가 태양 중심으로 지구가 움직인다고 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것은 전혀 잘못된 주장이이라는 것이다.

‘아인쉬타인’ 이라는 과학자는 이 우주를 설명하면서 그물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는데, 즉 ‘중력의 그물’ 이라고 해서, 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힘인데, 그런 힘의 그물 구조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즉 여기에 이렇게 태양이 있고 또 지구가 있다고 하면, 태양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데, 자기가 지구를 당기고 싶어서 당기는 것이 아니라, 이 그물 구조에 의해서 그렇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왜 가끔 시장이 들어서면, 이렇게 커다랗게 둥근 판을 만들어놓고는 그 위에서 아이들이 마구 뛰어 노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물론 옆에는 할아버지가 30분에 얼마씩 받고 말이다. 스카이 퐁퐁 말고, 그냥 아이들이 그 천으로 된 울렁울렁 거리는 판 위에서 맨발로 뛰어 논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태양이나 지구나 퉁퉁 뛰는 것인데, 중력에 의해서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공간이, 이것을 수학에서는 ‘위상(位相, phase)’ 이라고 하는데, 즉 공간의 힘에 의해서 서로 같이 짝을 이루어서 돌아야 한다는 것이다. 태양과 지구가 서로 같이 말이다.

이렇게 공간의 구부러짐, 그것을 ‘만곡(彎曲)’ 이라고 하는데, 이런 만곡에 의해서 나온 힘에 의해서 태양과 지구가 돌 듯이 이 세상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즉 이 세상도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진리만 자유로운 것이지, 다른 것들은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흔히 우리가 말하는 ‘독자적’ 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어디까지나 ‘상호 의존적’ 인데, 제가 전에도 이러한 이야기를 여러 번 했는데, 그렇게 우리 인간들은 서로 서로 의존한다는 말이다.

◈ 아, 영감이 보고 싶어 !!

오늘 아침에 TV를 보니, 우리나라에서 제일 시설이 좋은 노인 요양소를 보여주는데, 거기에 보니까 어떤 80이 넘은 할머니가 나와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아나운서가 “할머니, 자녀들이 종종 찾아옵니까?” 라고 하니, “나는 자식이고 뭐고 간에 나는 영감이 보고싶다” 라고 하면서, 죽은 자기 영감에게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미 죽어서 헤어져버린 자기 남편을 그리워하는 그물구조인데, 그러니 이 그물구조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그렇게 상호의존적인 말이다. 즉 남편이 없으면 자기는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할머니에게 살 이유는 자기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결혼을 함으로서, 즉 결혼이라는 관계, 즉 결혼이라는 그물 안에서 자기는 비로소 살아갈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여성은 어떻게 되는가? 오늘 결석은 한 것 같은데(ㅋㅋ), 그런 독신여성의 경우에는 자기는 그런 할머니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에게는 다른 그물이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다른 그물에 걸려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서로 그물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보고 “너는 자유가 있다”, 혹은 “자유가 없다” 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나는 돈 때문에 산다. 왜?

이렇게 세상은 그물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오늘 우리가 공부할 것은 바로 그런 그물 중에서도 ‘경제 그물’ 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은 경제로 짜여진 그러한 그물 속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인간이 왜 사는가?” 라고 물으면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경제 그물 안에 갇혀있는 물고기와 같은데, 이 물 속에 있는 고기는 물 속에서 산소와 영양분을 흡수해서 살아가듯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을 보고 ‘고귀하다’, 혹은 ‘존엄하다’ 라고 하면, 그것은 말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인간이 경제 그물망에 갇혀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때는 그런 이야기가 가능할지 몰라도, 그런데 인간이 경제 그물 속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이 왜 사는가?” 라고 물으면, 당연히 “돈 때문에 산다” 라고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돈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데, 즉 우리 인간은 돈과 상호의존적이고, 그 돈이라는 그물 속에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친구나 동창을 만나면 뭐라고 하는가? 다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먼저 “너는 한 달 수입이 얼마지?”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목사의 경우에는 “교인이 얼마나 되는기?”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정수기를 하나 팔아도” 라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만나지 않으려고 하고 말이다.

◈ 인간은, ‘돈’ 이라는 그물 속에서 상대방을 !!

그러므로 우리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어디 침만 튀기고 소리만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라는 그물 속에서 상대방을 본다는 것이다. 마치 지구와 달 사이가, 중력을 통해서 서로 떨어지지도 않고 매일같이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 빙글빙글 돌 듯이 말이다. 그러니 달을 보고는 “야, 이제 그만 떨어져 나가서 독립을 해라” 라고 해도 달은 독립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두 개의 공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 싫든 좋든 간에 다같이 돌아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돈’의 관계라는 것이다. 심지어 부부관계의 경우에도 돈이 떨어지면 이혼을 할 수밖에 없고 말이다.

◈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조선시대에는 이런 것을 모르고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인간 속에는 ‘성(誠?)’ 이라는 것이 있는데, 즉 ‘성실도’ 라고, 흔히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하는 것인데 말이다. 즉 “우리 인간에게는 ‘성(誠)’이 있고 그 성은 ‘이(理)’에서 나온다” 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는 자연의 이치인데, 잠언서에 의하면 ‘지혜’, 혹은 ‘말씀’ 이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誠’이 아니라 ‘性’이 아닌가요?)

이러한 ‘이’에서 나온 ‘성’에서 인간 본성에서 나오고, 그 인간 본성에서 나온 것이 바로 5가지로서, 즉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그리고 붕우유신(朋友有信)” 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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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오륜 [三綱五倫]  - 유교(儒敎)의 도덕사상에서 기본이 되는 3가지의 강령(綱領)과 5가지의 인륜(人倫).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며 이것은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오륜은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한다. 이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5가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親愛)에 있으며,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삼강오륜은 원래 중국 전한(前漢) 때의 거유(巨儒) 동중서(董仲舒)가 공맹(孔孟)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논한 데서 유래되어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과거 오랫동안 사회의 기본적 윤리로 존중되어 왔으며, 지금도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가 박혀 있는 윤리 도덕이다.  - 두산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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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쉽게 말하면 무슨 뜻인고 하니, 인간은 우정과 정의로움과 공의로움과 같은 것으로 살아가는데, 여기서 더 나가면 ‘사단칠정’ 이라고,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그리고 시비지심(是非之心)” 이라고 말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인간이 짐승과는 다른 점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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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칠정 [四端七情] - 성리학(性理學)의 철학적 개념 가운데 하나. 사단(四端)은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 즉 선천적이며 도덕적 능력을 말하며, 칠정(七情)은 인간의 본성이 사물을 접하면서 표현되는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을 말한다. 사단은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 상편에 나오는 말로 실천도덕의 근거로 삼았다.
- 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을 불쌍히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
- 수오지심(羞惡之心):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 사양지심(辭讓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 시비지심(是非之心): 잘잘못을 분별하여 가리는 마음
사단은 위 네 가지 도덕적 감정을 말한다. 그리고 칠정은 《예기(禮記)》의 〈예운(禮運)〉과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로서, 기쁨(희 喜), 노여움(노 怒), 슬픔(애 哀), 두려움(구 懼), 사랑(애 愛), 미움(오 惡), 욕망(욕 欲), 일곱 가지 인간의 자연적 감정을 가리킨다.  - 두산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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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은 왜 가는가?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들이 거짓임이 드러나고 말았는데, 바로 이러한 경제 그물구조 앞에서 말이다. 과거에는 ‘군신유의(君臣有義)’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인간들은 나라가 못살게 되면 이민을 가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찌질이도 가나한 나라인 아프리카나 아프가니스탄에 가는 것이 아니라, 꼭 뉴질랜드나 호주나 미국 등으로 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영국은 잘 가지 않는데, 물가가 너무 비싸서 말이다. 그리고 일본은 자기들끼리 너무 단결을 잘해서 왕따를 당할까 싶어서 잘 가지 않고 말이다. 그런 곳에서는 잘 해봐야 하류층에서 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로 어디로 가는고 하니, 경제적으로 자유를 보장해주는 곳으로 찾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즉 경제적 자유가 보장되는 곳으로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제 아무리 동양에서는 부부유별(夫婦有別)이나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외친다고 해도, 즉 인간에게 신이 주신, 동양철학에서는 신이 없으니 자연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자연이 주신 원리들에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는 말이다.

◈ 결국은, ‘돈’ !!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무엇인가? 인간은 돈에 의해서 그 모든 관계들이 다 형성이 된다는 것이다. 부부관계이든, 부자관계이든 말이다. 지금은 유흥비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 아버지를 불에 태워서 죽이는 세상인데, 이 ‘유흥비’ 라고 할 때 그 ‘비’가 무엇인가? 가수 ‘비’를 말하는가? 그것이 아니라 ‘비(費)’, 즉 ‘돈’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경제를 모르면서 어떻게 진리를 이야기하느냐는 것인데, 즉 우리 자신이 돈의 구조 속에 놓여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것을 우리 인간들도 알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가 있느냐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인간이 어디에 빠져있는지, 그것을 모르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즉 만약에 어느 한 쪽을 사랑하면, 다른 한 쪽은 반드시 미워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면 돈을 미워하게 되어있는데, 물론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지만 말이다(ㅋㅋ). 그리고 돈을 사랑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런 의미에서 우리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자기 재산은 절에 다 바치고 돈이 없으니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은 자기 명예와 관련이 되어있는데, 그래서 기존 교회에서는 그런 인간의 명예와 위신을 옹호해주니 돈을 마구 뿌리면서 기분을 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복음을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우리교회에 나오는데, 물론 때마침 돈도 다 떨어지고 말이다. 또 우리교회는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사실 우리교회에 다니려고 해도 돈이 만만찮게 드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은 헛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ㅋㅋ). 

◈ 구원 - 애굽을 잊지마 !!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쉽게 구약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애굽이라는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즉 하나님의 언약생활로 돌아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는 전혀 나오지를 못하니 하나님께서 언약의 힘으로 끄집어내는데, 즉 어린양의 희생으로 애굽에서 끄집어내게 되는데,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은 이렇게 끄집어낸 것만 생각하지, 과거의 애굽이 무엇인지를 그만 잊어버려도 되는 줄로 안다는 것이다.

◈ 그런데, 가나안이나 애굽이나 모두 함 족속의 땅 !!

그러므로 결국 그들이 도착했던 가나안 땅이나 애굽도 어느 족속의 땅이었는가? 노아의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인데, 이들 중에서 어느 족속인가? 애굽 땅이나 가나안 땅이나 둘 다 함 족속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분명히 빠져 나왔는데, 다시 빠져 나왔던 곳으로 다시 가게 되는데, 바로 그렇게 가는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두 개의 계층을 형성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이라는 나라에서 빠져 나왔는데, 즉 이렇게 애굽을 지나면 홍해가 나오고, 그 홍해를 건너면 광야가 나오고, 그리고 이 광야 다음에 나오는 곳이 그들이 가야되는 가나안 땅, 즉 약속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방금 뭐라고 했는고 하니, 애굽이나 가나안 땅이나 둘 다 저주를 받아야 하는 함 족속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애굽에서 살 때는 다같이 뒤섞여서 “얼씨구나, 지화자” 라고 하면서 애굽이 좋다고 하면서 살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치게 되니 그들은 분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분리가 되면서 다른 곳에 가는 게 아니라, 여전히 함의 땅, 즉 가나안 땅으로 간다는 말이다.

◈ 두 개의 층으로 !!

그러므로 이것을 위에서 보면 서로가 다같이 섞여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옆에서 바라보면 아래층과 위층으로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아래층은 함 족속이고, 그리고 위층은 아브라함 자손, 즉 언약의 백성, 곧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위에서 보면 섞여있는데,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가나안 백성들이나 모두가 같이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러나 옆에서 보면 층이 그만 나누어지는데, 즉 이쪽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의 백성이니 축복이고, 다른 쪽인 가나안 백성들 비언약이니 저주가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살아가도록 했는데,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되는가? 축복을 받은 언약의 백성들이 어디에 동조가 되고 말았는고 하니, 즉 건성으로는 여호와의 백성인데, 그런데 그 알맹이는 과거의 애굽의 백성들과 그만 똑같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그만 동조(同調)를 !!

여기 ‘동조(同調)’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요? 서로 차이가 있더라도 같은 공간에 있다가 보면, 어느 사이인가 모든 속성들이 그만 하나로 뭉쳐진 것을 동조라고 하는데, 마치 바이올린을 두 개를 같이 켜다가 보면 하나의 음을 내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귀뚜라미가 두 마리가 있으면 결국 그들도 시간을 맞추어서 같이 울게 되는데, 그것을 분위기에 적응을 한다고 하는데 말이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 인간의 세포라고 하는 것은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개방이 되어있어서, 외부에서 오는 에너지와 진동이 우리 세포 속에 스며들게 되면, 우리도 같이 본(本)을 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비스무리하게(?)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의사가 환자를 오래 동안 진료하다가 보면 마치 환자처럼 되듯이 말이다. 그러니 특히 정신과 의사들은 조심해야 된다는 말이다(ㅋㅋ). 그래서 검사나 경찰관도 나중에 보면, 나주에는 도둑놈처럼 되는데, 매일같이 그런 인간들만 만나니 말이다. 물론 자기들은 모르겠지만, 일반인들은 경찰서에 가면 그런 분위기를 확 느낀다는 것이다.

◈ 유대인들의 경우에 !!

그것이 바로 유대인의 교육인데, 즉 개인을 존중하지 않고 전체에 동조하는 개인으로 만들어서, 물론 개인으로 있을 때는 자기 몸이 편안한 대로 행동을 하지만, 그러나 전체 속에 있게 되면 자기 삶의 목적이 생기게 되고, 즉 사명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세계 인구의 0.2퍼센트밖에 되지 않지만, 무려 노벨상의 24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땅이 없는 민족이기 때문에 집중할 곳은 오직 변호사나 과학자와 같이 학문적이고 머리를 쓰는 쪽에 관여하고 비축하다가 보니, 그런 세계를 자식들에게 그대로 물려주게 된다는 것이다. 즉 집단자체를 중요시하게 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기독교의 경우에, 기독교 집안에서는 왜 기독교 교육을 시키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육체가 가지는 연약함을, 즉 육체의 본성인 방종이나 방탕을 억제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과 그 살아가는 이유를, 즉 사명을 제공함으로 말미암아서 어떻게 되는가? 그런 목적과 이유에 집착하게 될 때, 바로 그 순간만큼은 자기가 술을 마시고 도박하는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육체적인 본능은 그만 사라지게 만들 수가 있다는 말이다.

◈ 그러면, 과연 ‘교육’이 옳은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좋은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오늘 강의내용에 나오는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야, 정말 맞는 말이다. 멋진 교육이고, 방법이다.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이구나” 라고 할 수 있는지, 사실 그것이 그렇게 만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경제 그물구조에서 그 부호를 바꾼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애굽적인 사고에서, 즉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재물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재물에 갇혀있는 그물구조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 수동성 - 하나님의 언약이 나를 살려준다 !!

다시 말해서, 돈의 경제구조 아래에서는 산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여기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이제 무엇으로 산다는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중요하니 잘 들어야 하는데, 즉 이제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으니까 살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언약으로 산다” 라고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나를 살려준다” 라는 의미인데, 그렇게 되면 이제는 ‘수동성’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수동성이 말이다. 즉 “이제 나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살림을 당한다” 라고 하는,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이쪽은 무엇인가? 자기가 돈을 벌어야, 즉 “내가 한 행위로 말미암아서 내가 산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누구의 소유로 살아가는 것인가? 어디까지나 자기 소유의 삶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반대쪽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산다” 라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 그것은 곧 계시의 비밀 !!

그렇다고 하면, 구원받은 사람의 경우에, 이렇게 하나님의 살아있음과 자기의 삶 사이가 서로 관련이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그 사이에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까 제가 그것을 ‘언약’ 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에베소서 3장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한번 찾아보겠는데, 3절 말씀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엡 3: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여기에 살펴보면,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라고 하는데,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알게 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비밀’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설교를 하면서 ‘쉿’ 이라고 했는데, 즉 이방인들에게는 가르쳐주지 않는 비밀이라는 말이다.

◈ 성도 - 이미 산 존재로서 !!

그렇게 비밀이 되어버리면, “나는 살아야지” 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살았네” 라고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이미 산 존재로서 산다는 말이다. 점점 더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되는데,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도대체 우리 안에 있는 계시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도대체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가 된다는 말이냐는 것이다. 그것에 에베소서 3장 9절에 나오는데, 이번 말씀은 다른 분이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엡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어디서 이런 천상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들리는지 모르겠는데(ㅋㅋ), 당신 누구세요? 그건 그렇고, 하나님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그렇다면 계속해서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의 능력이 비밀의 내용이 되고, 그 비밀의 내용이 계시로서 우리 안에 들어있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 영적 존재란?

그렇게 되면, 제가 지금까지 말한 인간이 만들어낸 이 모든 구조로부터 탈피하여서,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그 창조의 능력이 우리 속에서 활성화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두고 ‘영적 존재’ 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을 저주받은 세상으로 보게 되는데, 그래서 저주를 받은 함의 족속의 땅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성도가 이 세상을 저주받을 세상으로 보게 되면, 그 다음에는 도대체 이 세상이 무엇 때문에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 바로 그런 이유에 대해서 점점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이 저주를 받은 이유를 알게 되면, 즉 그들이 저주받은 이유를 알게 되면 그들과 함께 섞여서 살아도 그들에게 먹히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을 두고 “삼킴을 당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저주를 받은 것을 뻔히 다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을 두고 로마서 6장 2절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그런데 성화론자들의 경우에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말하는 죄는 구조의 관계인데, 즉 아래층과 위층의 문제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죄를 개혁주의자들은 뭐라고 하는가? 여기에 성화론을 집어넣어서, 스스로 자기들이 위선자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들이 지은 죄는 그만 입을 닦아버린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경에 보니 한번 죽은 자는 두 번 다시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으니 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해놓고는 성경을 다시는 보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성경을 펼치면 모든 말씀이 다 자기들의 죄를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 제가 잠시 흥분하겠습니다 ??

저는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했는데, 성화론을 주장하는 인간들 치고, 백 보를 양보해서 그야말로 인간적인 면에서조차도 제대로 하는 인간들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성화론이고 뭐고 간에, 그런 것은 다 때려치우더라도 인간적인 면을 보더라도 장부는 내놓아야 하는데, 하다못해 컴퓨터 값인 300만원이라도 십자가 마을에 반납하고 가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과연 살림살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졌느냐는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성화론을 주장하는 인간들마다 모두가 다 경제 그물에 걸려서 자빠지고 뒤집어지는데, 갑자기 흥분을 해서 좀 민망스러운데, 물론 우리들은 인간적으로도 이미 안 된다고 내놓은 사람들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미 그런 것을 인정하고 개구멍을 찾는 인간들인데, 그런데 그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러면 안 돼. 말씀대로 살아야해” 라고 주장을 하면서도, 그런데 인간적으로 전혀 말씀과 어긋나게 살아가고 있더라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떼어놓고, 인간적으로 말하는 것이 말이 안 되지만 말이다.

아무튼 창조의 비밀을 살려주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가 착한 일을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또 다시 과거의 애굽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인데, 즉 “내가 잘해서 내가 살아간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비밀에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창조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경제 그물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왜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지, 그 저주를 받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경제그물의 구조가 도대체 어떻게 짜여져 있기 때문인지, 그것을 살펴봄으로서 우리 인간이 저주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는 말이다. 

◈ G(자본) → W(상품) → G´(추가된 자본) !!

여기서 제가 공식을 하나 써보겠는데, [G → W → G´] 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G는 ‘자본’이고, W는 ‘상품’, 혹은 ‘화폐’이고, 그리고 G´는 ‘추가된 자본’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보면 나오는 것인데, 그는 현재 자본주의를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마르크스라는 경제학자가 주장한, 즉 “자본은 상품의 교환을 통해서 추가된 자본을 끌어 모은다” 라는 했는데, 그러면 그 이전에는 뭐라고 했는가? 그 이전에는 [W → G → W´] 라고 해서, 즉 “상품은 자본(화폐, 돈)을 교환매체로 해서 추가된 상품으로 나아간다고, 그렇게 보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들어서 의자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돈을 좀 더 보태서 의자를 3개를 사서 의자가 없는 곳에 가지고 가서 팔아서 이윤을 남기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에 드는 이 자본, 즉 돈을 가지고 ‘상업자본’ 이라고 하고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두 가지의 주장이 있는데, 서로가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거의 주장이나 마르크스의 주장이 공통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고 하니, 인간을 구성하는 경제 그물망이, 즉 경제구조가 어떻게 짜여져 있는지, 그것을 간단하게 조망할 수 있는 공식이 없는지, 바로 그것을 탐구해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굳이 경제학을 전공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나’ 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에 의해서 동기유발이 되어서, 그런 ‘나’의 행동이 나오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를 한번 살펴보겠는데, 49페이지를 보자.

** (3) 경제 그물망 - 사람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잠잘 때도 의식은 살아있고, 심장은 뛰고 있으며, 주변의 상황에 따라서 깨기도 하면서, 인간의 행함은 잠시라도 멈추지를 않는다. 이것은 곧 ‘행함이 없는 순간’이 인간에게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인간은 무엇을 겨냥해서 행동하는가?

우리 인간에게 행함이 없는 순간은 없는데, 반드시 어느 쪽으로 행동하느냐가 그 행위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 “나는 아무 것도 안 하면 되겠네” 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데, 그래서 성경은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는 도대체 무엇을 겨냥해서 행동하는가?” 라는 것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잠을 잘 때도 행동을 하니,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자신의 행함의 대열 속에서 스스로 사열을 한다. “이런 행함은 생존에 유리한 긍정적 행함이요, 저런 행함은 불리한 실수다” 라고 판정을 내린다. 물론 판정의 기준은 수시로 변한다. 실수라고 여긴 것이 생존에 큰 행운일 수 있는 반면에, 자기 딴에는 잘했다고 여긴 것이 도리어 자기 이름에 먹칠을 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핵심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에 있어서 자기에게 유리하고 불리한 그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중간에 두 글자가 있는데, 그것이 곧 ‘생존’ 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 생존에 유리하면 긍정적인 행위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 그것은 나의 실수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생존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까 이것을 ‘산다(LIVE)’ 라고 했는데, 그런데 지구와 태양은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 역시 돈이 있어야 !!

그렇다고 하면, 아까 제가 ‘경제 그물망’을 이야기하면서 물고기를 그 예로서 들었는데, 그 물고기는 어디에 의존해서 살아가는가? 그 물고기는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물에 의존해서 살아가듯이, 우리도 역시 돈에 의존을 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돈이 있으면 살기에 유리하고, 돈이 없으면 살기에 불리하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경제를 공부하든 말든 간에, 시골에서 농사만 짓고 밭만 매는 할머니도 다 아는 사실인데, 그래서 그런 할머니에게 “할머니, 이렇게 날씨도 추운데 왜 나와 계십니까?” 라고 한다면, “이놈아, 꺼져!”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말은 하나마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아까 말한 에베소서 3장에 나오는, 즉 감추어진 계시의 비밀, 즉 그리스도의 경륜에 의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 누구에게 유리하고 불리하고 하는 것, 그것이 이미 우리 선에서는 완전히 떠났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문제인데, 그러니 기존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밤을 세워서 기도를 열심히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자기 생존에 불리한 것을 유리한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행함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으니 말이다. 즉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을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의 경륜에 의하면, 그런 유리하고 불리한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논을 하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성부와 성자만의 문제라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다 알아서 의논해서 처리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의논해서 결론이 난 사항을 성령에게 지시를 해서, 자기 백성을 그냥 살려내신다는 것이다. 전혀 우리에게 유리하고 불리한 것을 고려해서 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믿음이 있는 행함 !!

그렇게 해서 믿음이 있는 행함과 믿음이 없는 행함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즉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들어오면, 마치 아브라함이나 기생 라합처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주신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믿음이 있는 행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행함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보여주는 행함을 보여주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야고보서 2장의 말씀인데, 만약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보여주는 행함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귀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행함이라는 것이다.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
(약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

이렇게 강의를 하니 제가 속이 엄청 타는데, 이렇게 간단한 것을 가지고 기독교 2000년 역사 동안에 교권을 가진 신부나 목사들이 그렇게 교인들을 속여먹었는데,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라고 해서 얼마나 돈을 뜯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서 2장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합당한 믿음이 없는 행함은 행함은 없는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는 행함은 말이다. 그러한 것은 마귀의 행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행함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성질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이 야고보서 2장에서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이 등장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흔히 말하는 윤리나 도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즉 자기에게 유리하고 불리하고 하는 것을 초월하는 믿음이 있느냐는 묻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과 경륜에 의해서 그물망에 갇혀있고, 그것을 두고 ‘자유’ 라고 하는데, 즉 애굽에서 빠져 나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애굽에서 빠져 나왔지만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데, 즉 언약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약과 함께 있다” 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준 축복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언약의 백성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축복이라고 하는데, 상대적으로 이 세상의 죄에, 즉 율법에 속해 있지 않다는 말이다.

◈ 리카르도 - 상품은 인간의 노동에서 나온다 !!

그런데 여기서 아까 말한 그 자본주의의 경제원리에 있어서, 이 ‘상품’ 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리카르도’ 라는 경제학자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아담 스미스도 이런 부류에 속하는데 말이다. 즉 “상품은 인간의 노동에서 나온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마을에 감나무가 한 그루 심겨져 있는데, 그런데 일주일 뒤에 시장에 가보니 어떤 청년이 감을 따서 팔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청년을 보고 그 마을에 사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물었다는 것이다.

* 청    년 :  여기 감이 있습니다. 감을 사세요?
* 마을사람 : 어이, 청년? 이 감이 어디서 났지?
* 청    년 : 저기 마을에 있는 감나무에서 땄지요.
* 마을사람 : 아니 그것이 당신의 나무인가?
* 청    년 : 물론 제 감나무는 아니지만, 그런데 만약에 아무리 감나무가 있어도 제가 노동을 해서 이렇게 감을 따서 시장에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사람들이 사서 먹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 마을사람 : ? ? ?

그러니 그렇게 청년이 그렇게 감나무에서 감을 딴 그 노동력을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가격’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 가격은 어디서 나오는가? 가격은 가치에서 나오고, 그 가치는 바로 인간의 노동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 아저씨, 너무 비싸요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사람이 샴푸가 하나 필요한데 그런데 그 사람이 공장까지 가서 살려고 하면 시간도 들고 기름값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옆에 슈퍼에 보니 그 샴푸를 살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슈퍼에서 파는 샴푸의 가격이 공장에서 파는 가격보다도 비싸다고 하면, 그렇다고 해서 슈퍼주인을 보고 왜 이 샴푸의 값이 공장에서 파는 것보다 비싸냐고 따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왜 공장에서 파는 것보다 비싼고 하니, 그것은 자기가 직접 시간과 다름을 들여서 공장에 가서 사는 것을 그 슈퍼에서 대신해서 구입을 해서, 그렇게 해서 그 비용으로 10%를 더 붙여서 판다는 것이다. 바로 이 ‘10%’를 이윤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 공장도 가격보다는 약간 더 비싸게 사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인데, 즉 슈퍼주인의 노동의 대가를 붙여서 말이다. 

요즘 배추 한 포기에 배추밭에서는 500원을 한다고 하는데, 그런데 지금 우리가 김장을 하려고 동네에서 사면 3000원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소금으로 잘 져려서 주기는 하는데, 그런데 비닐봉지는 왜 안 주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 그러나 마르크스의 경우에 !!

아무튼 경제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수고하고 애쓴 것을 가치로 해서, 그 가치의 상품을 돈을 주고 사면 또 하나의 추가적인 상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존의 경제이론이고, 또한 그것이 상식적으로 맞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그것이 틀렸다고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런 노동력에는 노동시간이 들어가야 하고, 그 노동시간을 돈으로 환산해서 돈을 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아주 정당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즉 그렇게 해서 돈을 벌면, 그것은 정당한 자기 노동의 대가이고 이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그렇게 보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돈(자본)으로 상품을 사는데, 즉 샴푸나 감을 사는데 있어서, 샴푸는 머리를 깨끗하게 감는데 사용하고, 감은 맛있게 먹는다는 것인데, 그것을 두고 상품의 기능, 즉 ‘사용가치’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 사용가치가 가격과 맞을 때 우리는 그 상품을 구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맞느냐는 것이다.

◈ 샴푸를 하나 팔고 사는 경우에도 !!

예를 들어서, 샴푸를 만드는 공장이 대구에 하나가 아니라 천 군데에 있다고 하면, 한 군데에 있을 때는 샴푸가 만원을 하다가 천 군데에 생가면 2000원밖에 안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기존의 알고 있는 가격은 그 사람의 사용가치와 노동가치가 만날 때 형성이 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 가격이 2000원이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분명히 샴푸를 만들어서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고생을 만원 어치나 했는데 그런데 정작 가격은 2000원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8000원은 그냥 공중으로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말았는데, 제가 지금 마술을 하는 것이 아닌데, 분명히 그렇다는 말이다.

방금 전까지는 우리가 그렇게 동의를 하고 상식적으로 그렇게 가격이 형성되는 것이 맞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공장이 그만 한 군데에서 천 군데나 생기고 나니, 가격이 마구 내려간다는 것이다. 슈퍼에서 그 전에는 만원에 팔던 것이 이제는 2000원을 하고, 그것도 아울렛에서 ‘땡’ 처리를 하게 되면 1000원에도 팔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도대체 이 ‘가격’ 이란 무엇인가? 즉 샴푸의 가격은 도대체 어디에서 결정을 하느냐는 말이다. 자기가 애를 많이 썼다고, 즉 노동시간을 많이 들였다고 해서 가격에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사용가치가 있다고, 즉 샴푸의 질이 좋다고 해서 무조건 가격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 상품의 가치는 ‘교환가치’에서 !!

그렇다면 그 가격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을 두고서 ‘교환가치’ 라고 하는데, 즉 서로의 경쟁적인 교환가치에 의해서 가격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쉽게 말해서, 돈을 가지 자가 자기 마음대로 상품가치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싫으면 말고!” 라는 식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제 아무리 질이 좋은 물건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그 상품의 가치는 그만 ‘제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경제공황’ 이라고 하는데, 보통 이러한 경제공황은 10년만에 한번씩 온다고 하는데 말이다. 지금 일본은 그것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데 말이다.

이런 경제공황에도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는데, 그런데 마르크스에 의하면 왜 이런 경제공황이 오는고 하니, 그의 이론에 의하면 경제공황이 무엇인고 하니까, [G(자본) → W(상품) → G´(추가된 자본)] 라는 공식에 의해서 설명을 해보면, 이렇게 돈을 주고 상품을 샀는데, 그 상품의 사용가치가 탐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품을 팔면 또 다시 돈이 생긴다는 것이 그만 탐이 난다는 것이다.

◈ 마르크스 - 생산이 아닌 유통과 소비 !!

다시 말해서, [G(자본) → W(상품)]으로 넘어가는 것은, 즉 생산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W(상품)→ G´(추가된 자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즉 유통과 소비에 있어서 가격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 마르크스가 알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물건을 만들 때, 정말이지 그것이 필요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필요하지 않는 상품이라고 해도 사람들을 살살 꼬드겨서 필요하도록 만들어서, 그렇게 먼저 소비자를 만들어서 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상품을 만든다는 것이다.

◈ 삼성전자 지펠아삭 ZRS201UPD ??

예를 들어서, 김치냉장고의 경우에, 과거에 이 김치냉장고가 없을 때 그것 때문에 자살한 주부가 있었던가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죽고 사는 문제가 이 경제 그물망의 구조 속에서 그렇게 위신과 결부가 되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단칠정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것은 일종의 구라에 불과하고 말이다. 남들이 가지지 않았을 때는 자기도 가지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 남들이 다 가졌는데 자기 혼자서 가지지 않았다고 하면 자기는 그만 죽고 싶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귀신에 홀렸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도착증(페티시즘)’ 이라고 하는데, 정작 여자와 동침하는 것보다도 여자의 속옷 등에 미쳐서 냄새를 맡고 돌아다니는 인간들이 있는데, 흔히 ‘변태’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집착증’ 이라고 하는데, 즉 집착해야 될 것은 집착하지를 않고, 거기에서 파생된 그와 유사한 것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조금 어렵게 말하면, 실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실재에 집착하는 것을 두고서 정신분석학에서는 도착증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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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적 도착증 [性的倒錯症, sexual perversion] - 성적도착?이상성욕?변태성욕(erotopathy)?성적이상?색정도착증이라고도 한다. 성애(性愛)의 대상에 관한 도착과, 사정(射精) 또는 유사한 생리적 현상을 동반하는 성적 쾌감(오르가슴)을 얻기 위한 성행위에 관한 이상이 있다. 성애의 대상에 관한 도착에는 동성자를 성애의 대상으로 구하는 동성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소아애(페도필리아), 늙은 여자를 대상으로 하는 노인애,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동물애, 시체를 대상으로 하는 사체애(死體愛:네크로필리아) 등이 있다. 성행위에 관한 이상으로는 사디즘?마조히즘을 비롯하여 노출증?절시증(竊視症:몰래 들여다보는 이상성격)?트랜스베스티즘(이성의 의상을 걸쳐 입고 성적 만족을 얻는 것) 등 여러 가지이다. 이성이 몸에 걸치거나 입었던 것을 애무하며 만족하는 것은 페티시즘이라고 하고, 남성 또는 여성 중 성적 욕구가 이상항진되어 있는 것(음란증)은 각각 사티리어시스 및 님포마니아라고도 한다. 성적도착은 정상적인 성의 대상을 얻지 못하는 경우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일시적?환경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항구적인 것도 있다. 정신병자?신경증자에서 볼 수 있으나 이것은 성적도착, 즉 정신장애가 아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성애의 발달과정에 있어서의 정체 또는 고착(固着)으로서 성적도착이 설명되고 있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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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가 자기의 첫사랑이 그리워서, 이미 자기는 그 여자와 결혼을 해서 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이미 그 여자와 결혼을 해서 잘살고 있는데, 그런데 아직도 과거의 그 여자를 잊지 못해서 사진을 서랍에다 숨겨놓고는 한번씩 꺼내본다는 말이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의 첫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도착증인데, 그 여자가 바로 이 여자인데 말이다.

◈ 자본주의는 도착증의 한 모습 !!

그렇게 맹목적으로 허구에 매달려서 집착하면서 자기의 모든 에너지와 정신을 다 쏟아 부으면서 매진을 하는데, 그것이 곧 도착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 자본주의에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아이들이 딱지놀이에 빠지면 온종일 공부도 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듯이, 그렇게 인간들은 ‘화폐’ 라는 딱지에 무조건 집중하게 되는데, 사회전체가 말이다. 이것은 아까 말한 김치냉장고의 경우처럼, 처음에 김치냉장고가 전부다 없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데 자기에게 없을 때는 사고를 치게 되듯이 말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다같이 정신병자처럼 돈에 집착하는데, 자기만은 그런 돈이 없을 때는, 그렇게 자기만 돈을 사랑하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은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전체가 이 돈에 매진하게 될 때, 자기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거기에 다같이 따라가야만 하는데, 그것이 곧 ‘동조’ 라는 것인데, 그렇게 모두가 다같이 몰두해야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고, 우리의 자식들이고, 손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교육도 그렇게 받고 말이다.

◈ 귀신들린 자, 육에 속한 자, 애굽에 속한 자 !!

그러니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조건 살아가는데, 그저 타인을 흉내내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 타인이 도착증에, 즉 정신병에 걸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다같이 정신병자들인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귀신들린 자’ 라고 하는데, 혹은 ‘육에 속한 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애굽에 속한 자’ 라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전혀 이유가 없는데, 왜 인터넷 쇼핑에 중독이 되어서 하루종일 하는가? 물건에 집에 도착하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곧 바로 창고로 가는데, 그러다가 그런 창고가 비좁으면 다시 집을 넓히려고 하고 말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냥 그게 재미있다는 것이다. 집에는 계속해서 쓰레기만 쌓이고 말이다.

◈ 한옥의 경우에 !!

옛날 조선시대의 우리나라의 한옥을 보게 되면 이러한 도착증세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동양사상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과 자연이 하나이기 때문에, 즉 인간과 자연이 서로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있어서 유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동양이라도 일본은 조금 다른데, 왜 일본은 정원을 만들지 않는가? 일본식 정원이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정원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밖에 그렇게 넓고 멋있고 좋은 정원이 만들어져 있는데, 왜 굳이 자기 앞마당에다 정원을 다시 만드느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분재(盆栽)의 경우에도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에서 나온 것인데, 우리나라 산에 가면 아주 크고 멋있는 분재가 많이 널려있다는 것이다. 물론 작은 것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왜 수고스럽게 자기 집에다가 옮기느냐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일제시대의 그것이 그대로 남아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 초가집은, 밖에서 살기 위한 집 !!

초가집의 경우에, 그 모양새가 어떠한가? 그냥 ‘막(幕)’ 이라는 것이다. 그냥 경계만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경계의 표시만을 의미하는 것이지, 폐쇄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과거의 집은 사람들이 밖에서 살기 위해서 집을 만든 것인데, 그런데 오늘날의 아파트는 어떠한가? 안에 살기 위해서 집을 만든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러니 밖에 나가 있으면 한시라도 빨리 집구석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날이 밝으면 밖에 일을 하고, 어두우면 집에 들어오는데, 그러니 시계라는 것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집에서는 호롱불을 켜서 바느질을 하다가 그냥 자고 말이다. 그러다가 신랑이 집적거리면 그냥 아이를 만들고 말이다. 그러다가 해가 뜨면 밖으로 나가서 일을 하고 말이다. 그러니 섬머타임제와 같은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즉 시계를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서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집이라는 것이 어떤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 전체공간의 일부로서 초가집을 만들었고, 울타리도 그냥 나뭇가지를 가지고 대충해서 만들고 말이다. 물론 요즘에는 그러한 과거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유기농 음식들이, 즉 보리밥이나 자연 친화적인 음식들이 등장하곤 하는데, 하지만 그런 음식을 먹으려고 해도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돈 - 남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권한 !!

그런데 마르크스에 의하면 이 ‘돈’ 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남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자기가 차지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유명한 막스베버가 주장한 것으로, 그것이 곧 칼빈주의인데, 이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열심히 일하고 근면하게 살아서 절약하면서 모든 돈은 탐욕이 아니라고 했는데,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마르크스는 그것을 두고 ‘탐욕’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까 유대인들의 교육관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그것을 우리는 제법 긍정적으로 살펴보았는데, 하지만 마르크스는 같은 유대인이면서 그것을 탐욕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수전노’ 라는 것은 구씨 집안의 두쇠를 말하는데, 소위 ‘구두쇠’ 라고 말이다(ㅋㅋ). 그 대표적인 사람이 크리스마스 때마다 등장하는 ‘스쿠루지’ 라는 양반인데, 그런데 이 스쿠루지는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모은다는 것이다.

그렇게 상품을 모으는 것을 ‘상업이윤’ 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어떤 물건을 구입해서 그 물건이 없는 곳에 가서 파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해서 생기는 돈을 ‘상업자본’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 상업자본의 경우에 !!

이것을 우리 어머니들이 다들 그렇게 살았는데, 부산 국제시장에서 짝퉁 외제화장품을 구입해서 대구 비산동의 염색공장에 가서, 거기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15,6세를 막 넘긴 소녀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팔아서 이윤을 남겼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경우에, 그것은 아주 순수한(?) 상업자본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아담 스미스의 경우에, 이런 것을 시장에서는 아주 정당한 것이라고 했는데, 또한 사도바울의 직업이 무엇이었는가? 천막 장사를 했는데, 결코 자기 집에다가 천막을 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천막이 많은 곳이 아니라 없는 곳에 판다는 것이다.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도 그런 것인데, 동방에서 나는 향신료를 구입해서 보다 비싸게 팔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을 ‘무역상’ 이라고 하는데,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도, 필리핀이나 인도에서 만든 것을 영국 등지에 팔기 위해서 만든 것인데, 그렇게 해서 네덜란드가 떴다는 말이다. 그 이전까지는 전혀 이름도 없었는데, 우리나라의 장보고도 그런 경우이고 말이다. 

◈ 부르동 - 자본가들은 다 도둑놈 !!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이윤을 정당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부르동(?)’ 이라는 사회학자는 그것을 도적질로 보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업과 유통을 가지고서 마진을 챙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고, 자기가 대장간에서 열심히 일을 해서, 그렇게 노동력을 제공해서 만들어서 파는 것은 정당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남이 만들어놓은 것을 가지고 다른 곳에 가서 팔아서 이윤을 챙기는 것은 도둑놈들이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즉 그런 의미에서 모든 자본은 다 도둑질이라고 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내용인데, 소유와 소재를 또 구분해야 하고 말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그것을 두고 도둑질이라고, 즉 착취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그의 공식을 보게 되면, [G(자본) → W(상품) → G´(추가된 자본)] 인데, 여기서 G는 자본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자본가가 상품을 만들 때, 여기서 W, 즉 상품은 생산수단(Pm)과 노동력(A)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산수단은 기계인데, 그러니 기계가 이렇게 있고 또 노동력, 즉 일군이 있다는 말이다.

◈ 그런데 노동력이 그만 상품이 되면 !!

제가 여기로 오기 이전에 있던 곳에 보면 장갑공장이 있었는데, 아침부터 하루종일 음악을 틀어놓고 아주머니들이 수다를 마구 떨어가면서 그렇게 재미있게 일을 하는데, 힘이 들어도 짜증을 내지 않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생산수단+노동력’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자본주의의 [G → W → G´] 라는 원리에 의하면, 이 노동력이 그만 노동력이 아니라 상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노동력이 상품이 된다는 말은, 그것을 바꾸어서 이야기하면 무엇인가? 일군이 그만 많을 때는 똑같은 노동력을 투입해도 그만 단가가 뚝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노동자들이 일을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닌데, 놀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지 말이다. 그러니 전에는 하루에 10시간을 일해도 노는 날에는 임금을 받아서 등산이나 낚시도 다니고 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10시간에 아니라 12시간을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일요일에도 교회에도 나가지 못하고 맞교대를 하면서 열심히 일을 해야, 그렇게 잔업도 해야만 아이들의 과외비라도 번다는 말이다.

◈ 인간은 왜 사는가?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그렇게 죽으라고 일만 한다면 도대체 “인간은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지 싶은데, 하지만 사실은 그런 질문자체는 처음부터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왜 사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살려주시니까 산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신자들의 경우에는, 이렇게 살려준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데, 왜냐하면 살려주시는 분이 없으니 그들은 매일같이 “내가 산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갑자기 경제가 어려워지니 묻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식으로 살려고 하면 살 필요가 없지 않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니 술을 마시고는 한강에 마구 뛰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그 이전에 사실은 살만해도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죽을 여지가 남아있는 채로 살아가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죽은 놈’ 이라는 말이다. 경제만 어려우면 그렇게 되니 말이다.

◈ 드디어 자본주의가 앵벌이 체제로 !!

그러니 자본주의에서 노동력 자체가 상품이 되어버리면, 자본가는 무슨 생각을 하는고 하니, 이 자본가가 만들어낸 생산물을 누가 사는고 하니, 그 소비자는 이미 상품화가 된 노동자가 그 물건을 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서 남는 차이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두고 바로 ‘잉여가치’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자본자가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자본가는 더욱 새로운 건물을 구입하고 자동차를 비싼 것으로 구입하게 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이렇게 똘만들을 앵벌이를 시키면 시킬수록 왕초는 더욱 더 돈을 많이 챙기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노동단가가 떨어진 돈을 월급으로 받아서, 다시 그 돈을 가지고서 자기들이 만든 물건을 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형마트에 가면 누가 득실거리는가? 다들 그 물건을 만든 노동자들인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본가들은 더욱 더 많은 이윤을 챙기게 되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구조라고, 마르크스가 이미 1867년에 ‘자본론’ 이라는 책을 통해서 주장했다는 것이다.

여기 마지막에 등장한 것이 바로 ‘산업자본’ 인데, 공장에서 떨어진 임금으로 물건을 만드는 말이다. 그 이전에는 ‘상업자본’ 이고, 그리고 그 이전 봉건시대에서는 영주의 사유물이 되어서 강탈을 하는데, 물론 너무 많이 빼앗으면 나올 것이 없어서 안 되니 다시 나누어주었는데, 그렇게 강탈과 재분배가 봉건사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 원시사회의 증여와 답례 !!

그리고 그 이전의 원시사회에서는 증여와 답례인데, 즉 높은 자리에 있는 왕이 나누어주게 되면, 백성들은 그것을 받아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돌려준다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답례를 한다고 난리인데, 어떤 사람은 12월에 나가는 부조만 해도 수십 만원이 훌쩍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증여와 답례는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그리고 강탈과 재분배는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상업자본도 물론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옛날에는 이쪽의 김씨 집안과 저쪽의 이씨 집안은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무슨 일이 있어서 떡을 한 광주리를 보내게 되면 다시 돌아오고 말이다. 그렇게 하는 답례 중에서 최고의 답례가 바로 서로 사돈지간이 되는 것인데, 즉 “내 아들을 줄게, 니 딸을 다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교회에도 그런 식의 답례가 좀 오고가야 하는데 말이다(ㅋㅋ).

그런데 여기에서 이 증여와 답례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 소위 ‘잉여가치’ 라는 것이 없는데, 그렇게 잉여가치가 없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까, 은혜를 느낀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욥기의 내용이라고, 오늘 발간된 ‘욥 안의 그리스도’ 라는 책에 보면 나오는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똑같다는 것이다.

◈ 강강수월래인가? 삼각형인가?

그래서 저는 그것을 두고서 ‘강강수월래’ 라고 하는데, 이 강강수월래의 특징이 무엇인가? 그 안에는 그야말로 텅 빈 공간인데, 그런데 그것과 정반대가 되는 것이 바로 안이 높이 솟아 오른 삼각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삼각형은 무엇만 쳐다보는가? 언제나 왕을 쳐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대통령을 쳐다봐야 하고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바뀌면서, 이렇게 한 가운데가 텅 비어있는 강강수월래가 되지 못하고 그만 삼각형으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교회는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여기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강강수월래인데, 즉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 오늘날 교회도 당연히 삼각형 체제로 !!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무엇인가? 바로 삼각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경제구조에 따라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교회를 강강수월래의 형태로 가게 되면 건물도 하나 제대로 짓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투자를 제일 많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삼각형이 되어서, 즉 건축헌금을 5억을 한 사람과 5천 만원을 한 사람과는 당연히 차이가 나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렇게 교회도 하나의 개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자본주의의 경제 그물망의 구조 아래에서는 교회마저도 무엇을 지배를 받겠는가? 당연히 돈을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돈의 지배를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강강수월래가 되지 못하고 삼각형이 되어버리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중간에 누가 들어가는고 하니, 국가가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국가는 일종의 회장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아주 쉬운데, 즉 국가의 총수가 회장님이라고 하는 것은, 그 회장 한 사람의 잘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의 경제를 얼마나 활성화를 시켜주느냐에 따라서, 그러니 바로 그러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

지금부터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는데, 그런 것도 가끔은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관한 것인데, 그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라는 것은 토론이 허락되어서 그런 토론에 의해서 점차 진리(?)에 접근하는 것인데,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를 대변해주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민주주의에는 강강수월래 안에 대통령이 있는데, 즉 대통령은 일반의지를 대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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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소의 일반의지 - 루소는 국민 전체의 공공선(善)(common good)을 ‘일반의지’로 표현을 합니다.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전제하는 홉스, 로크와 달리, 선한 본성을 가진 인간들의 평화로운 상태인데 사유재산이 불평등을 심화시켜 모순을 발생시켰다는 입장입니다. 루소는 국민들이 공공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어떤 하나의 절대적인 善이 있을 것이며, 그것이 곧 일반의지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국가는 국민들이 국가라는 공동체로 묶여서 그 일반의지를 실현하려고 하는 기구입니다. 여기서 국민들은 자신이 계약을 통해 국가를 만들어도, 그 국가에 자신의 주권을 양도한 게 아닙니다. 주권은 언제나 국민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며, 각자의 국민들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양심, 선의에 따라 생각할 때 진정한 일반의지가 가능합니다. - 네이버의 답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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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 비해서 자유주의는 물론 독재는 아니지만, 이 자유주의는 의회, 즉 국회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일반 사람들이 무기명으로 투표를 하게 되면 국회의원들이 생기게 되는데, 그러니 민주주의가 바로 생긴 것이 아니라, 먼저 자유주의가 생기고 그 다음에 민주주의가 생겼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자유주의는 주로 토론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거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만 독재자가 있는 민주주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총통제도인데, 즉 히틀러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무기명으로 투표를 해서 뽑히게 되는데, 그러면 그들이 과연 국민의 대표라고 할 수가 있는가? 즉 국회의원이 과연 국민의 대표냐는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무기명 투표가 되어버리면, 그렇게 투표를 할 때만 민주주의이지만, 그러나 일반 투표가 끝나게 되면 누가 투표를 했는지 모르는 무기명이 되어버리니, 일단 선거가 끝나게 되면 그만 계급이 생기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도 월등한 계급이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참으로 희한한데, 분명히 자기가 뽑았는데도 그것이 그만 계급으로 형성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단 장로를 뽑으면, 그 다음부터는 뭐라고 하는가? “어디서 감히 장로에게 말대답을 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자들끼리 다 해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기명이 아닌 유기명으로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이름을 써서 투표를 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민주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투표를 하나마나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봐라. 내가 너에게 투표를 했으니, 너는 내 말을 들어야 돼”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어도 역시 패가 갈라지고 말이다.

◈ 민주주의가 성경적 ??

그런데도 어떤 정신없는 인간들이 뭐라고 하는가? 이러한 민주주의를 두고서 성경적이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자유주의도 전혀 모르고, 또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몰라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주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목사들이 그런 엉터리 주장을 하는데 말이다.

처음 자유주의에 있어서, 그 당시 의회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고 하니, 자본가들도 있었고, 이들을 ‘부르조아’ 라고 하는데, 그들이 국회의원이 되었고, 또 봉건시대의 귀족들도 부동산이 많아서 이쪽으로 넘어와서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니 그만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푼돈이나 만지던 상업자본주의에서 막대한 거금을 다루는 산업자본주의로 넘어가게 되면, 그렇게 하면 나라가 그만 엉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그런데 왜 민주주의인가?

그렇게 산업자본주의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외국으로 나가서 식민지 개척도 해야하고 말이다. 그렇게 하려면 대통령이라는 황제를 인정하는 민주주의를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폴레옹도 그런 인물인데 말이다. 여기서 국가라는 것이 생기게 되는데, 이렇게 국가가 생기게 되면, 이 강강수월래의 중간에 국가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본가들을, 즉 부르조아들을 도와주어서 그들이 무역을 통하든지 해서 장사를 잘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국가도 살고, 그 밑에 있는 국민들도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이다.

지금 전세계의 220개국의 모든 나라들이 다 채택하고 있는 것이 이 민주주의 제도인데, 그러니 이제 공산주의 국가는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중국이나 북한도 공산주의가 아닌데, 그냥 말로서만 공산주의이니 어떠니 하는 것이지 말이다.

◈ 이제는 국가가 아닌 기업으로 !!

실제로는 이제 국가가 주도적으로 무엇을 장려하는고 하니, 자본주의를 쥐어주어서 이제는 값싼 노동력을, 물론 자국 국민들은 데모가 심하고 해서 중국이나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지의 외국으로 공장이 나가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값싼 노동력을 사용해서 상품의 가격을 낮추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만든 물건을 다시 그들의 나라로 팔아먹는 방식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라 자체가 하나의 기업처럼 움직이게 되는데, 그렇게 하면 ‘G7’이나 ‘G20’과 같은 선진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이제 나라 자체가 하나의 기업처럼 움직이게 되는데, 자기 나라의 경우에는 노동력의 단가가 너무 높아서 중국이나 베트남, 혹은 아프리카와 같이 노동력이 매우 싼 곳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렇게 노동가치가 낮아지게 되면 상품의 가격은 교환가치이기 때문에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해서 베트남에서 안경테를 하나 만들어도, 값싼 노동력으로 인해서 단가가 낮게 되면 세계시장에 내놓으면 이왕이면 같은 물건이라고 하면 가격이 낮은 것이 쉽게 잘 팔린다는 것이다.

◈ 주여,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게 하소서 ??

바로 그렇게 주도적으로 제대로 잘한 국가는 점점 더 자본이 쌓이게 되는데, 그러한 국가를 두고서 ‘선진국’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의 교회들은 금요일에 밤을 새워서 이것을 두고 기도를 하고 있는데, “주여,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게 하소서!”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강강수월래의 중심에서 국가가 주도하려고 하면, 그렇게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군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기업들이 원활하게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나서서 해적이나 테러리스트들과 싸워서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증여’와 ‘답례’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요즘 말로 두 글자로 ‘원조’ 라는 것인데, 얼마 전에 우리나라도 아프리카에 원조를 했는데 말이다. 즉 국가가 선물을 먼저 하나 주고는 그것을 빌미로 그 나라의 산업시설의 개발을 따낸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일본이 동남아에 원조를 엄청나게 했는데, 그러니 기업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국가가 국가에게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 선진국 - ‘잘’ 산다 !!

이러한 현실적인 면에서는 진리나 복음은 없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을 다 무시하고 선진국가에 도달하게 될 때, 그것을 두고 우리는 뭐라고 부르는고 하니, “남들보다 잘 산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살기는 사는데 어떻게 사는가? 잘 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것이 다 ‘경제 그물망’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이런 것을 모르면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살게 되는데, 물론 그렇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것은 좋은데, 하지만 그렇게 산다고 해서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고 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제가 어제도 그러한 이야기를 했는데, 물론 좁은 범위 안에서는 오류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넓은 범위에서 보면 세상에 거짓이 아닌 것이 없고, 오류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데, 우리가 아무리 착한 척을 하고 바르게 산다고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내부에서는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앞에는 ‘잘 산다’ 라고 하는, 즉 ‘잘’ 이라는 글자가 반드시 붙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뭐라고 기도하는고 하니, “이 경제 그물망 속에서 잘 살게 하옵소서. 그 대신에 제가 하나님께 원조는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우리가 평소에 이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하는 행세를 그대로 하나님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애굽에서 다시 만나는 여호와 하나님 ??

그러니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아예 애굽에다 끌어당겨서, 그만 애굽의 신으로, 즉 우상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우상적인 예수이고, 또한 우상적인 삼위일체인데, 굳이 순복음 교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들이 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경제 그물망 속에 제대로(?)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모르는데, 그래서 십자가는 아예 떼 내어버리고는, 십자가가 아닌 부활의 능력을 이야기하는데, 부활의 능력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하겠는가? 즉 “부활의 능력으로 잘 살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자본주의에서는 노동력 자체가 시장에서는 하나의 상품이 되는데, 그러니 그렇게 같은 상품이라고 해도 질이 높은 상품이 있고 낮은 상품이 있다는 것이다. 질이 높은 상품은 그냥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컴퓨터를 할 줄 알아야 하고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학을 갔다와야만 하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상품화를 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도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하나의 같은 상품이니까, 그렇게 질이 좋은 상품에서 질이 좋은 상품을 만들자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 결혼정보회사의 경우에 !!

현재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보는 곳은 결혼정보회사인데, 이 결혼정보회사는 사람을 두고 점수를 매기는데, 지금부터 이 결혼정보회사에서 좋은 점수를 맞을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드리겠는데, 물론 알아도 그림의 떡이겠지만 말이다(ㅋㅋ).

제일 높은 A급 등급은 무엇인고 하니, 그 조건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①기독교 가정일 것, ②부모님이 다 살아 계실 것, ③학력은 대학은 나올 것, ④소득세는 1000만원 정도는 낼 것, ⑤집은 강남에 거주할 것, ⑥키는 180이상에 인물은 준수할 것, 이 정도가 되면 우리나라에서는 최상급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준이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바다를 건너왔다는 말이다. 즉 더 잘사는 회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더 잘사는 회사인 미국을 통해서 더 잘사는 방법을 배우자는 것인데, 즉 그들은 노동력 관리를 그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그렇게 더 잘사는 회사인 미국을 따라가야 하고, 그러면 그들의 기준을 제대로 잘 배워서 우리도 그런 동일한 노동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바로 하나의 기준이 되고 또한 모델이 되었는데, 그러면 아까 처음에 뭐라고 했는가? 행함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행함은 목적이 없는 것이 없다고” 라고 했는데, 바로 이러한 기준들을 향해서 그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 왜 기독교 가정인가?

그런데 왜 기독교 가정이 그 첫째 조건으로 들어가는고 하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이라고 해도 결국은 술에 취해서 난장판으로 만드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깔끔한 사람이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자기 자식은 개판이라고 해도 며느리나 사위는 그런 사람이 좋은데, 또한 신에게 회개하는 깨끗한 양심을 가진 정상적인(?) 사람이 좋고 말이다. 그런 모든 조건들이 다 갖추어진 사람이, 즉 질이 좋은 상품이 되어야, 결국 나중에 더 좋은 상품이 된다는 것이다.

◈ 마르크스 - 모두가 다 도착증 환자들 !!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러한 전체적인 모든 것을 두고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도착증 환자라고, 즉 정신병자라고 했다는 말이다. 이유 없는 돈 모음, 그들이 바로 수전노나 구두쇠보다 더 지독한 자들인데, 즉 근검절약을 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마치 유대인들과 같은 말이다. 그것이 바로 가장 악독한 이 시대의 탐욕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자본주의는 악마의 얼굴 !!

그래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보면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는 신학을 하다가 경제를 공부한 사람인데, 그러니 성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데,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돈을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아두는 것과 같이, 그렇게 땅에 땅에서의 탐욕을 줄이는 것처럼, 오늘날의 자본가들은 동일하게 돈을 더욱 더 끌어 모으는데, 이 돈을 남을 장악할 수가 있는 권력인데 말이다.

그렇게 가진 자들이 자기의 그 가진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욱 더 아끼고 구두쇠 정신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우리교회의 건물 주인처럼 말이다. 월세를 10만원만 깎아달라고 해도 전혀 깎아주지를 않고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목적하는 것이 바로 무엇인가? 결국에는 남의 영혼을 장악하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즉 “니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신과 같이 되리라” 라고 하는 악마의 얼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런 악마의 얼굴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사모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그것을 신의 축복으로, 하늘의 축복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런데 끝으로 제가 기쁜 소식을(?) 하나 여러분에게 전해드리자면, 우리가 이런 그물에서 전혀 빠져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왜 기쁜 소식인고 하니, 쓸데없이 경제 그물망에서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을 치지 말라는 것이다.

◈ 우리는 ‘경제 그물망’에서 빠져 나올 수는 없지만 !!

왜냐하면, 물고기는 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데, 만약에 물고기가 그물이라고 하면, 그놈들에게 한 대 주먹을 날려서라도 어떻게 해볼 수가 있을 텐데, 그런데 물고기는 결코 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물은 항상 물고기를 잡지만, 그러나 물고기는 그물을 자기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그물은 성령이 오셔서, 그렇다고 해서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그물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물 안에 있으면서, 그렇게 그 계층 안에서 살아가면서 그 나라의 의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를 빡빡 밀고 기도원에 간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도원에 간다고 해서 인터넷을 하지 않고 휴대폰이 울리지 않는가? 겨울에 추우면 기름보일러를 돌려야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 돈들은 다 어디에서 나오는가?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우리가 경제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우리가 이 국가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국가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뭐라고 하셨는가? 주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 교회를 믿으면 교회가 아니기에 !!

그것은 바로 우리의 내부에 층계가 있어서, 즉 지금 이렇게 이 세상에 갇혀있는 우리의 모습은 죽은 자이고, 그렇게 죽은 우리들을 새로운 하늘나라가 와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도록 하셔서 늘 살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를 믿으면 교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제가 지어낸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기존 교회가 왜 교회를 의존하는고 하니, 자본주의의 사회 구조 속에서 그렇게 해야만 경제 그물망 속에서 고기가 잡히니 말이다. 그러니 자본주의에 속하지 않는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몸밖에 없는데, 즉 복음의 능력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눈에 보이는 교회를 교회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함으로서, 비로소 교회가 되었음을 증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제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는데, 지금 우리가 교재 몇 페이지까지 강의를 했는고 하니까, 무려 73페이지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일단 70페이지까지 했다고 하고, 다음 시간에는 70페이지부터 시작을 하겠는데, 그만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날마다 창세 전의 비밀을 가르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 계시를 통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이렇게 경제 그물망 속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는 방식으로, 그렇게 해서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방식으로 날마다 새롭게 창조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그 복음을 언제나 증거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 1, 2 밤 11시 40분에 마침.

                                                              몸부림을 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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