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1월 2일 보편성(색출당함인가?) vs 일방성(하나되기)

091102 피13강 [자아경배]의 절대적 보편화 :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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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091102피p045자아경배의보편화

피13강 보편성(색출당함인가?) vs 일방성(하나되기)
             - [자아경배]의 절대적 보편화 : 짐승 

[09 대구강의 18] - [피 13] - 자아경배의 보편화
                                                                                
                                                          09,11,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나(1)’에 대해서 !!

오늘은 교재 45페이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 이렇게 ‘하나’ 라는 것이 있는데, 만약에 높은 산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그 ‘하나’는 산 정상에는 있고, 또한 산의 중간쯤에는 이렇게 구름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산밑에 있는데, 그러니 밑에 있는 자들에게는 산 정상에 있는 ‘하나’가 구름에 가리워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더욱 놀라운 사실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하나를 보려고 하다가 구름에 반사가 되어버리면, 각자 각자가 그만 하나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하나와 ‘너’의 하나를 비교해보면 서로가 다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둘 중에서 하나가 엉터리든지, 아니면 둘 다 엉터리든지, 아니면 그와는 반대이든지,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세 개의 십자가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하나를 향해서 가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한 편의 강도는 예수님의 그 하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이야기할 때 도로 자기에게 와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강도는 뭐라고 했는가? 예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했다는 말이다.

◈ 성령님도 ‘하나’ 됨의 의미를 !!

그것은 바로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자기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문제를 꺾어버리고, 자기 하나를 예수님의 하나에 그만 흡수를 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례인데, 이런 하나됨의 의미를 성령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성령은 그렇게 하나됨을 뜻하는데, 그것이 에베소서 4장에 나오고 말이다.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 ‘나’를 위한 하나가 반드시 포기되어야 !!

그렇게 성령으로 하나가 되는데, 하지만 그 하나는 결코 우리를 위한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무엇이 있어야 하는고 하니, 먼저 ‘나’를 위한 하나가 반드시 포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의 하나를 포기하게 만드는 작용이, 그것이 반드시 바깥에서, 즉 구름 위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구름 위에서 나오게 되면, 우리 각자의 하나 하나가 모두가 다 거부를 당하고, 즉 ‘너’와 ‘나’의 하나가 아닌, 우리 속에 섞여있는 다른 하나에 올라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우리 속에 섞여있는 다른 하나에 말이다.

◈ 출애굽기 3장,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

이것을 조금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출애굽기 3장을 보겠는데, 방금 제가 상당히 어렵게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아무리 천국에 가고 싶다고 해도, 그것이 자기의 주장이기 때문에 구름에 반사가 되어서 튕겨서 나온다는 말이다. 즉 구름을 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고 싶은 나라가 천국이라고 자꾸만 우기는데, 구름을 뚫지 못해서 말이다. 그러니 진짜 하나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거기서 뭐라고 하는가? 모세가 양을 치면서 호렙산에 이르렀는데, 거기에 떨기나무가 이렇게 한 그루 있는데, 거기서 불이 붙고 있다는 것이다. 나무에 불은 얼마든지 붙을 수 있는데, 그런데 그 불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분명히 불인데 나무가 타지 않는다는 말이다. 불이라고 하면 당연히 그 재료가 타서 불이 붙어야 하는데, 그런데 떨기나무는 전혀 타지도 않으면서 불꽃은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어떤 경우에 여기에 속하겠는가? 떨기나무에 불꽃이 가운데 있는데, 그래서 3절에 보면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라고 하는데 말이다. 즉 떨기나무는 타서 사라지지 않는데, 그런데 거기서 불은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출 3: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출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 3: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 박영선 목사의 경우에 !!

이것을 남포교회의 박영선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부터 20년 정도는 되었지 싶은데 말이다. 인간이 이렇게 있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영이, 즉 성령이 임하게 되면 인간의 것을 타는 재료로 삼아서, 그것을 소실시키면서 불이 되어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욕과 의지가, 그것이 바깥에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에너지의 재료로 소실이 되면서, 그렇게 밖으로 나온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현실’ 이라고 했고, 또한 ‘희생’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횃불에 기름을 부으면, 기름이 소비가 되는 만큼 불꽃이 더 나오듯이, 그렇게 성도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더욱 더 많이 희생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즉 성도들이 소비한 그 양이 에너지원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주장이 과연 맞는가? 여기서 박영선 목사를 어떤 점에서 상당히 좋게 이야기할 수가 있는고 하니, 박영선 목사가 이런 소리를 할 때는, 그 이전에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의 것은 가만히 있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물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희생인데, 즉 다른 사람의 희생과 봉사의 덕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쪽으로, 그렇게 교인들이 자기 희생은 하지 않는 쪽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 ‘나’ 자신이 에너지원 ??

하지만 박영선 목사는 그것이 아니라, 적어도 교회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본인이 소진되어야 하는데,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말이다. 그렇게 본인의 것이 소진되고 달아 없어지는, 그렇게 본인의 것을 내놓아야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에너지원으로 사용이 된다고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박영선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서, 그 당시에 한국교회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고 하니, 이렇게 되면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희생을 하지 않고,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그리고 희생은 예수님이 하세요. 그러면 저는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즉 봉사하는 한 분이 따로 있고, 자기는 그 앞에서 그것을 관람하겠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봉사하는 하나가 있고, 그것을 구경하는 하나가 또 있게 되니, 그러면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둘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박영선 목사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한국교회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했는데, 아무튼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우리가 그분의 희생에 끼어 들면, 하나님이 재료를 누구의 것을 사용하는고 하니, ‘나’의 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인들이 그런 말을 곧이 듣게 되면 “아하, 이제는 교회에 쇼를 관람하려고 오면 안 되는구나. 이제는 교회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 나의 것을 내놓아야 하는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오병이어’로 시작되는 ‘돈 라인(?)’을 살펴보면 !!

그런데 이렇게 되면, 여기에서 응용적인 논리로 따지고 들어가게 되면 부흥사들이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5개의 떡과 2마리의 물고기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도시락’ 이라는 말이다.

그 도시락을 두 글자로 줄이면 ‘푼돈’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교회에 푼돈이라도 내면 주님께서는 그 푼돈도 적은 돈이라고 여기기 않고 크게 들어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교회에 푼돈을 내라는 소리가 아니라, 푼돈이라도 다 긁어서 내라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 푼돈에는 목돈도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부의 두 렙돈이 부자가 내는 많은 돈보다 더 귀하다고, 그렇게 헌금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단 동전 두 개라도 집에 두지를 말고 다 교회에 바치라고 하니, 세상에 그런 날강도들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이 나오는데, 즉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땅에다 두면 그것을 갉아먹는 몇 가지 요인들이 발생하는데, 그 첫째가 도적이 들고, 둘째가 녹이 슨다는 것인데, 그러니 도적이 없고 녹이 슬지 않는 하늘에 쌓아두게 되면, 그래서 나중에 하늘나라에 오게 되면 더 많은 액수로 찾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하늘나라에 정기적금으로 들어있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파생이 되어서 또 하나를 더 붙이면 그것이 소위 ‘달란트 비유’ 라는 인데, 지금 파생상품까지 나오는데 말이다. 즉 열심히 이 땅에서 교회에 봉사하면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이 일종의 라인인데, 무슨 라인이고 하니, 저는 것을 일명 ‘돈 라인(?)’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S 라인’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 아예, 너의 몸을 불살라라 !!

그렇게 교회에서 헌금을 강조할 때마다 돌아다니는 성경구절들이 있는데, 그 시작이 되는 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박영선 목사는 여기에서 한 수 더 떠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만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버렸다는 것이다. 즉 “아예, 너의 몸을 불살라 버려라” 라고 말이다.

이렇게 출애굽기 3장의 ‘떨기나무 불꽃 비유(?)’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너의 몸을 에너지원으로 해서 사용하면 너의 몸은 없어지지만, 없어진 너를 통해서 불꽃을 피우리라” 라고 하는데, 윤시내의 노래가 저절로 생각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꽃을 피우리라 ♬” 라고 말이다(ㅋㅋ).

◈ 이근호 목사의 ‘서편제’ !!

그런데 만약에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저는 다음과 같은 것을 더해서 이야기했지 싶은데, 그것이 곧 ‘서편제’ 라는 것인데, 즉 “이년아, 한이 없으면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자기 딸에게 약을 먹여서 그만 장님을 만들고 말았는데, 그렇게 눈이 멀면 장애자로서 한이 맺히게 되니 득음(得音)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요즘 같으면 경찰에 잡혀가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한이 맺혀있어야, 즉 하나님의 일은 한이 맺혀있어야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박영선 목사는 이것을 두고서 ‘자기 부인’ 이라고 하겠지만, 하지만 과연 그의 주장이 맞느냐는 것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 박 목사님, 혹시 죄인을 아세요?

그런데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분명히 떨기나무가 타지 않았는데, 그러니 그것이 에너지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에너지원이라면 당연히 에너지로 삼아서 타야만 하는데 말이다. 다만 박영선 목사의 주장이 중요한 점이 무엇인고 하니,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우리 바깥에서 일하시는데,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박수를 치는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마치 떨기나무처럼 같이 계셔서,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신다고 박영선 목사가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반이 모르는 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소비시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임을 드러나도록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인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죄인이 하나님을 일을 하면 말이 안 되는데, 그러면 죄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 죄인이 되게 드러나는 것이 곧 ‘하나’ !!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이렇게 죄인이 죄인이 되게 드러나는 그것을 바로 ‘하나’ 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찾아오셔서 하나가 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미쳐 자기도 몰랐던 자기의 죄가 자기 안에 들어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그것을 계속해서 자기 바깥으로 자꾸만 드러낸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됨으로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게 되고 말이다.

그러니 결국 에너지원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소비가 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그렇게 그렇게 가만히 있는 우리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 소관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즉 죄인 하나를 들어서 사용하심으로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오는 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방식의 ‘하나’ 라는 것이다.

◈ 그런데 ‘죄인’이 아닌, ‘의인’ 이라고 한다면?

그런데 이러한 것을, 즉 죄인과 그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하나’로 보지 않고, 죄인을 그만 의인으로 바꾸어버린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박영선 목사의 주장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義)’를 소비한다고 말이다. 즉 “주님이 우리의 의를 사용하시니, 우리는 더욱 더 의인이 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거기서 하나가 된다고 하면 자기가 곧 신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문제가 도대체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나는 비록 한 때는 죄인이었지만,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의인이 되었다” 라고, 그렇게 자기 스스로 의인이 되었다고 주장을 하게 되면 문제가 반드시 발생하게 된다는 말이다. 

◈ 제가 이번에 한국개혁신학연구소 세미나에서 !!

지금 우리가 교재 45페이지에 있는 바벨탑의 하나됨을 살펴보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여러분이 모두 아는 쉬운 것을 했지만, 이제부터는 조금 어려운 것을 강의하도록 하겠는데 말이다. 어떻게 어려운고 하니,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하나됨을 아는데 있어서, 그만 그 앞에 구름이 있어서 사람들마다 각자 하나를 추구하지만, 진짜 하나를 뚫지 못하고 어느 선에 가면 구름에 반사가 되어서 그만 튕겨나온다는 것이다.

제가 내년 1월에 한국개혁신학연구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는데, 지난 번 십자가 마을 여름 수련회에서 한 ‘70이레’에 관한 논문을 가지고 말이다. 물론 그대로가 아니고 이번에 발표하기 위해서 논문에 새로이 다시 추가를 했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유다 공동체’를 어떻게 평가하셨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를 기준으로 해서 보면, 사실 구약의 말라기 이후부터 선지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가 BC 374년인데, 물론 다니엘은 그 이전에 활동했고 말이다. 아무튼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없었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러한 말라기 이후부터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까지의 시기 동안에는 유다 공동체가 그냥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그들이 어떤 식으로 메시야를 기다렸으며, 또한 그 중간과정에서 활동했던 유다 공동체에 대해서 예수님은 과연 어떤 식으로 그들을 평가를 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긍정적으로 보았는지, 아니면 부정적으로 보았는지 말이다.

제가 그러한 내용을 관주로 해서 길게 삽입을 시켜놓았다는 것이다. 현재 신학자들은 거의 100%가 다 여기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는데, 이 유다 공동체를 말이다. 왜 긍정적으로 보는고 하니까,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족보가 나오는데, 그리고 누가복음 3장에도 나오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족보가 이렇게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냥 오신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자기 백성들을 마치 기차 레일처럼 깔아놓고, 그러한 약속을 따라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이미 깔아놓은 그 레일도 인정을 해야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이 유다 공동체를 긍정적으로 보는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제가 반박을 하고 뒤엎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고 하니, 이 유다 공동체에 대해서 예수님은 죽음을 요구하셨는데, 저는 이것을 ‘공동체의 죽음’ 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말이다. 예수님은 공동체의 죽음을 요구하셨는데, 바로 그 공동체의 대표적인 자들이 곧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고 말이다. 

◈ 과연 누가 ‘남은 자’ 인가?

아무튼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는 선지자의 계시가 다 끊어지고, 예수님 당시에 세례요한이 선지자로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이에 있었던 그 시대의 유다 공동체에 대해서 예수님이 죽음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들이 무엇을 주장했는고 하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남은 자’ 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때에 그 모든 것이 다 끊어져도 이 마지막에는 반드시 남은 자들이 있는데, 바로 그러한 남은 자들 속에서 메시야가 온다는 말이다. 그것을 오늘날의 기독교 신학자들도 주장을 했고,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각도 역시 그러했다는 것이다.

어떻든 간에 그들은 자기들은 ‘남은 자’ 라고 여겼는데, 이러한 남은 자들 가운데 뭐가 나오는고 하니, 묵시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묵시문학’ 이라고 하는데, 즉 그들은 생각하기를, 비록 지금은 계시는 끊어졌지만 자기들은 여전히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오실 메시야가 어떤 식으로 이 세상을 끝장내는지, 그것을 고대하면서 기다린다는 말이다.

◈ 유다 공동체가 주장하는 ‘종말론’ !!

그러면서 그들이 묵시만 말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니 자칭 이러한 남은 자들이 끄집어낸 신학이 무엇인고 하니, 역사가 있고 묵시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역사’ 라고 하는 것은, 스가랴서에 보면 이렇게 성전을 지어놓으면 언젠가는 감람산에 메시야가 임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역사적으로도 노선을 밟아서 온다는 것이다.

(슥 14: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리고 ‘묵시’ 라는 것은, 다니엘서에 예언이 되어있는 것처럼 인자가 되시는 분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오시는데, 그러니 땅에서도 오시고 하늘에서도 오시니, 그렇게 해서 주님은 이 땅에 지으신 성전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역사와 묵시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이것을 ‘종말론’으로 본다는 말이다.

(단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 하지만, 예수님은 단칼에 !!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가? 그들이 주장하는 이런 종말론을 죽이라고, 즉 거짓된 종말론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들의 종말론 자체를 한 방에 엉터리라고 보는데, 그런데 유대인들은 왜 자신들을 스스로 남은 자들이라고 여기면서, 이러한 엉터리 종말론을 주장하게 되었느냐는 말이다.

물론 자기들에게는 성전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자기들은 이제 제사중심이라기보다는 말씀중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언중심’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유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룰 것이라고 하면서 철저히 연구하고 다 파헤쳤는데, 그렇게 해서 “메시야는 반드시 이렇게 온다” 라고 확정을 지어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땅에서도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또한 하늘에서도 묵시가 역사의 발자국을 밟아서 온다고, 즉 인자가 그렇게 해서 온다고, 그렇게 땅과 하늘이 만나데 된다고, 그렇게 자기들의 종말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 역사의 마지막에는 반드시 ‘징조’가 ??

오늘날 요한계시록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것을 연구하는데, 즉 메시야가 다시 재림을 하지만, 그러나 그 재림만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이 오실 때가 되면 반드시 역사적으로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징조’ 라는 것인데, 즉 메시야가 오실 때가 되면 역사적으로 반드시 어떤 기이한 징조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관주에 뭐라고 적어놓았는고 하니, 유대인들의 종말론에 보면 역사의 끝머리에서 변동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즉 역사의 끝머리에 묵시가 묻혀서 말이다. 이렇게 묵시가 묻혀서, 세상 정치적 변화에 따라서 요동이 일어나서 그때그때마다 해석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 막대사탕만 빨고 있으면 OK ??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아이들이 먹는 막대사탕을 보면, 그 막대기 끝에 사탕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것을 빨아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라고 하는 막대기에다가 묵시라는 달콤한 사탕을 입어서, 교회의 목사들은 무엇만 이야기하면 되는고 하니, 교인들에게 “주께서 오십니다” 라고 하면서, 그냥 그렇게 막대사탕만 물려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인들은 사탕만 빨고 있으면, 이것이 곧 ‘이미 아직’이 된다는 말이다. 즉 “이미 왔지만, 아직 오지 않았어” 라고 말이다.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이 이미 유다 공동체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인간이 천국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미 끄집어내어 놓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보고 일거에 뭐라고 하셨는가? 단칼에 그것을 거짓말로 여겨서 그만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의 종말론을 잘랐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 신학자들이 만든 모든 종말론도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것도 다 사기이고, 얼마든지 주님에 의해서 자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장림만 사기꾼이 아니고 말이다.

◈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

여기서 마태복음 8장을 보겠는데, 예수님이 백부장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의 믿음에 대해서 하신 말씀인데, 그런데 여기 12절에 보면,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기 ‘본 자손들’이 누구인가? 그러니 예수님을 만난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만이 아니라, 그 단체 전체가 바로 유다 공동체인데, 그들은 이것을 ‘남은 자들’ 이라고 보았는데, 하지만 여기에 보면 ‘본 자손들’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하시는고 하니, 유다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그런 생각 자체가 사기이고 엉터리라는 것을, 그것이 인간의 한계에서 나오는데, 나중에 왜 그런 것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도 이야기를 하겠는데 말이다. 아무튼 예수님은 인간의 한계에서 그런 종말론이 나왔다고 하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주장한 종말론에 의해서 쫓겨나야만 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그들에게 추방을 당함으로서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서 이단이라고, 즉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는데, 그런데 바로 그렇게 예수님을 추방시킨 그 집단에서 예수님을 무엇을 하시는가? 그들에게 약을 올리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발생시켜서, 소위 “천하가 없어도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라는 쪽을 그만 부끄럽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묵시적 존재로 보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하늘을 쳐다보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인들을 데려다가 그만 하늘을 쳐다보는 그들의 옆구리를 쳐버리신다는 것이다. “어이, 자네들 어디를 쳐다보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예 수 님 : 어이, 자네들 어디를 쳐다보는가?
* 유대인들 : 왜요?
* 예 수 님 : 내가 이미 왔어.
* 유대인들 : 당신은 누구세요?
* 예 수 님 : 내가 바로 그 메시야지.
* 유대인들 : 뭐라구요?
* 예 수 님 : 내가 너희들 곁에 이렇게 왔다니까.
* 유대인들 : ? ?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은 그들의 신학에 맞지 않다고 해서 쫓겨났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에게 예수님이 쫓겨남으로서 이미 그들 속에 천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방식으로 천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존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천국은 엉터리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이 천국이 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까 이야기한 출애굽기 3장의 그 떨기나무처럼, 즉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입장에서 하나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남은 자’를 거부하셨다 !!

제가 관주에서 이런 내용을 다 쓰면서, “예수님은 남은 자를 거부하셨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거부를 하시고 그 남은 자를 무엇으로 바꾸었는고 하니까, 오직 ‘하나’, 즉 예수님 본인으로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이 말라기 이후에 비어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서, 즉 예수님에서부터 거꾸로 해서 그 내용을 다 채워나간다는 것이다. 말라기와 예수님 사이에 비어있는 그 모든 것을 말이다. 

그러니 말라기와 예수님 사이에 있는 그 유다 공동체를 두고서 ‘남은 자’ 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예수님에 의하면 다 사기이고, 진짜 남은 자는 바로 오직 예수님만이 ‘남은 자’로서, 그렇게 남은 자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중간에 있는 이 긴 역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로 시작된다는 말이다.

◈ 인간 속에 어떤 것이 들어있기에 그런 종말론이?

이것은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은 무엇부터 하는고 하니, 이 유다 공동체에 있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서 역사와 묵시를 끄집어내었는데,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종말론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인간 속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있기에 그러한 종말론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말이다.

◈ 인간은 ‘주체’를 느끼는데 !!

인간은 주체를 느끼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을 거울에 비추게 되면 거기서는 주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나오게 되는데, 이 신체는 머리, 몸통, 그리고 팔다리 등으로 외부에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수술을 해서 배를 가르면 간도 보이고 위도 보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자아나 주체 등과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배가 나온 아저씨는 보이고, 또 아줌마는 보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 ‘주체’ 라고 하는 것은, 거울에 비친 어떤 신체를 가지고, “저것은 남은 아니고 나이다” 라고, 그렇게 자기가 일방적으로 해석을 했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을 줄 이미 알았는데(ㅋㅋ), 아무튼 사람들은 자기가 부모로부터 받은 이 신체를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나’ 라고 자기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 이 영감탱이가 누구지?

쉽게 예를 들어보면, 연세가 많은 분들은 사진을 찍는 것을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그 사진에 나오는 모습은 자기가 ‘나’ 라고 생각한 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웬 영감탱이가 들어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데, 그래서 “안 돼, 찍지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봐도 자기의 모습이 아닌데, 자기가 원하는 ‘나’는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신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좋은 매너나 점잖은 걸음걸이 등도 들어있는데, 그런데 자기가 만약에 빨리 걸었다고 하면, “야, 그때는 내가 왜 그렇게 빨리 걸었지?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했는지 몰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원래 천천히 점잖케 걷는 것이 자기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만 자기가 원하지 않는 ‘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주체란, 변화를 고정화시킬 때 !!

다시 말해서, 이 ‘나’ 라고 하는 것은 하나로 규정이 되고 고정이 될 수 없는데, 그런데 그것을 수시로 “이것은 나다” 라고 고정을 시키려고 하는, 바로 그러한 중심이 되는 정신적인 상황을 두고서 ‘주체’ 라고 한다는 말이다. 조금(?) 어렵지요?

어차피 이해가 안 되는 것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보면, 이렇게 변화를 고정으로 만들 때,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바로 주체라는 것이다. 어떤 변화를 고정화시킬 때 말이다. 이 고정이 곧 하나인데, 만약에 사람이 열 명이 있으면, 이렇게 하나, 둘, 셋, 넷으로 계속해서 헤아리는데, 바로 그 하나라는 것이다.

◈ 러셀 -  ‘하나’, ‘하나+하나’, ‘하나+하나+하나’ !!

그런데 ‘러셀’ 이라는 양반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철학자이자 수학자인데 말이다. 하나, 둘, 셋, 넷으로 헤아리지 말고, 다음과 같이, 즉 ‘하나’, ‘하나+하나’, ‘하나+하나+하나’, ‘하나+하나+하나+하나’ 라는 식으로 헤아리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 둘, 셋, 넷으로 해버리면 서로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차이가 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 ‘하나+하나’, ‘하나+하나+하나’ 라는 식으로 헤아리자는 것이다. 그러면 전부가 똑같은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앞의 방식대로 하면 열 명이 되지만, 뒤의 방식으로 하면 하나, 즉 ‘1' 이라는 것이 10개가 모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ㅋㅋ),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즉 ‘하나(1)’ 이라는 것이 10개가 모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10명이 있어버리면, 이 10명은 1명이 되고, 그것을 10명이라고 보는 ‘나’는 또 하나가 되기 때문에, 결국 두 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1’, ‘1+1’, ‘1+1+1’ 라는 방식으로 보게 된다면, ‘나’도 거기에 들어가게 되니까, ‘나’도 역시나 ‘하나(1)’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상당히 민주적(?)인데, 왜냐하면 “아휴, 여기에 동물이 10마리나 있네” 라고 하면 자기는 동물이 아니라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왜 이렇게 ‘1’, ‘1+1’, ‘1+1+1’ 라고 보라고 하는고 하니, 그런데 그렇게 보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가 1이 되고 2가 되고 3이 되고 4가 되는데, 그러니 이 세상을 아무리 보아도 결국에는 자기가 역시 돗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 명이 있고 만 명이 있어도 그 사람들의 사정은 모르겠고, 자기 몸 하나만 편하면 최고라는 것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자기 주체만 확립하게 되면 이 세상이 온통 불바다가 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 아니, 수학에서도 윤리학이?

그것이 바로 수학에서 나오는 윤리학이라는 것인데, 아마 여러분은 수학에서 윤리학이 나온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지 싶은데 말이다. 수학에서 나온 윤리가 무엇인고 하니까, 흔히들 수학에서는 윤리가 없는 줄 알지만, 그러나 수학을 하면 할수록 타인에 대한 배려, 즉 타자에 대한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수학에서 그냥 일방적으로 ‘나' 하나만 고집하게 된다면, 남이야 죽던지 말던지 간에 자기와는 상관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만 하나가 아니라 상대방도 자기와 역시 동일한 하나라고 한다면, 바로 상대방의 하나를 염두에 두면서 자기는 왜 살아야 하는지 생각한다는 말이다. 즉 “저 사람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라고, 거기에 대한 윤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런데 자기 주체를 확립해버리면 인간은 고정되어있으니, 그렇게 ‘나’ 하나에 고정되어있으면, 즉 자기가 자기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 놈은 나에게 어떤 유용한 가치가 있지?” 라고 해서, 자기에게 도움이 되면 그냥 두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없애 버리려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저 인간은 내 자존심을 건드리니 없애버릴까? 저 인간은 없어져야 내가 하나가 되는데 흠집이 조금이라도 덜 생기겠지” 라고 하게 되는데, 우리 인간은 그런 것을 매일같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 어느 농민 운동가 부부의 이야기 !!

오늘 아침에 오랜만 TV를 보는데, 어떤 부부가 나와서 자기들이 살아온 것을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제가 그냥 TV를 본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 강의와 관련이 있는 내용인데, 아무튼 두 사람이 다 농민 운동가로서 만났는데, 그래서 부부가 되어서 농민운동을 한번 열심히 잘해보자고 말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살다가 그만 둘 사람에게 다 우울증과 같은 것이 와서, 그래서 정신을 차려서 도대체 자기들 내부에 무엇이 있기에 그런 현상이 생겼는지 참선인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그것을 살펴보니까, 남편은 가정중심으로 이미 그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 가정 하나!” 라는 것인데, 농민운동이 아니고 말이다. 즉 자기 가정을 위해서 외부적으로 농민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괜찮은(?) 타이틀을 통해서, 자기가 어릴 때부터 맛보지 못한 부모의 사랑을 자기 자식에게만 주겠다고 하는, 그런 자기만의 행복한 가정을 꾸미겠다고 하는 것이, 그 내면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을 정신분석을 통해서 나중에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의 경우에는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가정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농민운동에만 전념을 했는데, 자식은 자기가 낳고도 말이다. 오히려 아기를 낳지 않은 남편은 가정위주이고 말이다. 이 여자의 내면은 나중에 알고 보니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것인데, 그러니 두 사람이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둘 다 밖으로는 농민운동을 하자고 했지만, 그러나 그 내부적으로는 다르다는 말이다.

이 여자의 경우에는 밖으로 튀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자기 주체가 펄펄 사는데, 다른 한 쪽은 가정중심이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을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결국에는 표면화가 되는데, 그것을 두고 ‘결절’ 이라고 하는데, 왜 발뒤꿈치에 보면 각질이 점점 더 붙어서 굳어지는 현상이 있는데, 바로 그와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부부이면서도 서로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 복음이 나의 주체성 확립에 무슨 도움이?

그러니 교회 안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복음이 들어있는 사람과 복음이 들어있다고 우기는 사람 사이에는 결국에는 결절이 되고 마는데, 복음이 없는 사람은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나’ 라는 것을 고집하는 주체가 들어있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렇게 복음을 아는 것이 자기 주체의 확립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를 따지는데, 그렇게 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면 그냥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버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안에 복음 말고 다른 것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지금 제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이 곧 ‘주체’ 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주체는 ‘하나(1)’ 라고 하는 고정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아도 그것은 제2인자가 될 뿐인데, 전부가 다 자기보다는 덜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성령님이고 간에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자기 안에 가득히 들어있으면서도, 겉으로 “오직 예수!” 라고 아무리 외쳐도, 물론 남들은 속을지 몰라도,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제발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건드리지 말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이제 십자가 이야기는 그만 하라는 것이다.

◈ 하나님, 우리는 바벨탑을 싫어합니다 ??

지금 제가 왜 이런 긴긴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아까 말한 구름 이야기인데, 즉 인간이 아무리 자기가 천국에 가고 싶어도, 즉 “하나님, 천국에 넣어주세요. 우리는 바벨탑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나라가 너무 너무 좋아요” 라고 해도,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다 구름에 반사가 되어서 튕겨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이유가 자기 안에서 잡아당기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를 잡아당기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의인이 되는 것은 싫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이고, 중요한 것은 ‘나’ 라고 하는 주체가 영원토록 의인으로 남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나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니 건드리지마. 만약에 건드리면 너를 죽여버릴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예수님의 천국조차도 자기의 하나를 위해서 !!

그러니 우리 인간은 자기의 그 ‘하나’를 도저히 깰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의 천국조차도 자기의 하나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즉 더욱 더 자기의 ‘하나’를 보다 더 확고히 하기 위한, 즉 기초를 다지기 위한 용도로서 그냥 끌어당길 뿐이란 말이다. 그렇게 각자가 다 하나가 되어서 올라가니, 결국에는 다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아시고 그 유다 공동체를 사기꾼의 집단으로 보시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이 어디를 간다고? 뭐, 천국에 간다고? 어디 말씀을 연구했다고? 역사가 어떻고 묵시가 어떻다고? 메시야를 기다릴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고? 더 이상의 완벽함은 없을 정도의 신학을 만들었다고? 묵시가 아니라 묵사발이 되려고 아예 쇼를 해라 해”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아브라함의 본 자손들이라고 우겼던 모든 것이 다 헛방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그만 그 ‘하나’에 균열이 !!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나가보면, 이렇게 인간은 각자가 다 고정이 되는데,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 고정된 하나 하나가 다 균열이 생기는데, 즉 갈라진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갈라지는고 하니, 이렇게 하나로 묶었던 것에 대해서 자족하고 만족을 하면 되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여기에서 그만 미흡함이 생기고 결핍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나는 이것 하나로서 만족을 한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주위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라캉은 ‘법’ 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법이 오게 되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 그런데 ‘법’이 오게 되면?

지금 우리가 로마서 7장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렇게 법이 오게 되면 이 하나가 그만 법을 둘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자기 속에 있던 마음과, 또한 하나라고 우겼던 자기 바깥에 있던 마음을 그만 갈라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깥에 있는 이 ‘나’ 라는 것은 법을 지켜서 완벽한 의인으로서 고정되기를 원하는데, 하지만 또 자기 속에 있는 ‘나’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법이 ‘하라’ 라고 하면 하지 않으려고 하고, 오히려 ‘하지마’ 라고 하면 그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법이 욕망을 불러 !!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 라고 하는 법이 오게 되면, 자기 속에 있는 것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간음이 무엇인지 알고서나 안 하든지 말든지 하지” 라고 하는데, 즉 간음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자기가 피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경험을 해보고 난 뒤에 자기가 알아서 결정하겠다고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그것을 두고 “법이 욕망을 부른다” 라고 하는데, 즉 사람들은 금지를 시켜야 비로소 소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안 돼. 하지마” 라고 하는 것에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은 겉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계속해서 속에서만 맴돌게 되는데, 왜냐하면 속에 있는 것은 겉으로 나오는 것을 싫어하니 말이다.

그래서 이 속에 있는 것은 항상 몰래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과도 몰래 먹는 것이 맛있다고 말이다. 이것을 가지고서 가수 김지애는 ‘몰래 한 사랑’ 이라고 하는 노래를 열심히 불렀다는 거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은 이렇게 몰래 한 것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냥 죽고 만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비밀이 없으면 죽는다는 말이다.

◈ 이 세상에 비밀이 없는 사람은 없어 !!

이 세상에 비밀이 없는 사람은 단 두 종류밖에 없는데, 정신 박약아와 정신 분열증에 걸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큐가 너무 낮은 사람과, 그리고 자기도 자기를 어떻게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전혀 감당이 안 되는 사람, 즉 정신 분열증에 걸린 사람 외에는 전부가 다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두 종류만 빼놓고는 모든 사람은 다 비밀이 있는데, 그래서 자꾸만 눌려서 “너는 이 속에서만 살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비밀은 잠을 자다가도 꿈속에서도 튀어나오는데, 그래서 꿈을 꾸다가 자기가 놀라서 깨어서는 옆에 자는 마누라는 쳐다본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자꾸만 발로 마구 밟는데, 심지어 교회에 와서도 “너는 튀어나오지 마. 알겠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목사는 다 알고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남을 속이고 자기도 속는, 그렇게 속이는 것이 자기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이 좀 이상한가요? 그것이 바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옷을 입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어제 오전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사람이 옷을 입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옷을 입는 것이 수치라는 말이다. 창세기 3장에 분명히 그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을 저만 본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야말로 수천 수억 명의 사람들이 다 보았을 텐데, 거기에는 분명히 옷을 벗고 다니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옷을 입은 것이 수치이고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옷을 입고 다니면서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지금 이렇게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전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보아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오히려 옷을 벗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미친놈이라고 하고 말이다. 물론 지금 저도 이렇게 옷을 입고 있지만, 아무튼 인간은 그렇다는 말이다.

◈ ‘균열’에서 역사적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이 !!

이것이 바로 균열인데, 이러한 균열에서 역사적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이 생긴다는 것이다. 역사적 종말론은 자기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인데, 즉 “하나님이여, 저를 만들기 위해서 역사가 이렇게 움직였군요.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당겨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고름판’으로, 고르고 또 고르고 !!

이것을 가지고 ‘고름판(?)’ 이라고 하는데, 왜 씨름을 할 때 보면 한 판 씨름을 하고 나서 흩어진 모래판을 골고루 밀어서 편평하게 고르는데, 인간은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편평하게 고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변화는 어떠한가? 결코 그렇게 편평하게 고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울퉁불퉁하다는 말이다. (‘고름판’은 사전에 없는데?)

하지만 우리는 일기장에 어떻게 써는가? 물론 대부분은 일기도 쓰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일기를 쓰면 어떻게 쓰겠는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당겨서, 즉 “오늘도 참으로 좋은 날이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남들은 불이 나서 타죽던 말던 간에 자기는 무조건 고름판이라는 것이다. 마치 모래를 그냥 ‘좌악’ 밀어서 편평하게 하듯이 그렇게 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방식으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에게는 반드시 고름판을 만드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균열을 고름판으로 그렇게 만들어주어야, 즉 변화에 대해서 고정화를 시켜주어야 자기는 자기로 인해서 살아가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가 말이다.

◈ 아무리 고르게 해도, 안과 밖이 서로 맞지를 않아 !!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렇게 자기가 아무리 내부적으로 고름판을 해도 어떠한가? 그것이 자기 속에 감추고 있던 것과 맞지를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맞지 않으니 어떻게 하는고 하니, 그것을 제대로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이 말하는 ‘기도’ 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하는가? “하나님이여, 내일은 제발 제가 하는 기도의 응답대로 행운이 떨어지게 해주세요. 저는 주님이 없으면 안 됩니다. 오늘은 저의 인간성이 좋아서 일단은 고르게 해놓았는데, 하지만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제 자식이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니까, 주님께서는 제가 이렇게 고생해서 매끈하게 만들어놓은 고름판에 너무 상처가 되지 않도록 새로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제발 이러한 힘든 고난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인간의 기도가 곧 행운이 들어있는 ‘묵시’로 !!

알다시피 그것이 바로 그들의 묵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묵시는 반드시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행운을 두고서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제가 왜 이 묵시를 행운이라고 하는고 하니,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묵시는 행운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도 같이 오는가? 축복만 오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함께 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모든 인간들이 생각하는 묵시는 무엇인고 하니, 남에게는 유황불이 떨어지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아닌 남과는 자기는 하나가 아니기에 말이다. 하지만 하나인 ‘나’에게 대해서는 어떠한가? 그저 내일도 축복에 축복만 오기를 소망한다는 것이다.

◈ 유다 공동체에 떨어진 예수님의 군화발 !!

다시 말해서, 축복과 저주 가운데서, 저주는 그만 삭제시키고 축복만 주어지는 묵시를 유다 공동체가 품으면서 그 사회를 고름판으로, 즉 역사를 깨끗하게, 즉 아주 매끈한 표면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들뢰는 ‘코드화’ 라고 했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즉 구조화를 시켜서 아주 깨끗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말이다.

이렇게 인간들이 열심히 열심히 만들고 만들어놓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하셨는가? 그렇게 매끈하게 만든 유다 공동체의 정성한 다한 종말론을, 그들의 그 고름판을 예수님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군화발로 마구 짓밟아놓았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만의 특유의 군화발을 가지고 말이다.

◈ 세례요한의 경우에 !!

물론 예수님보다 한 발 앞서 간 사람도 있었는데, 그가 곧 세례요한이란 것이다. 그가 뭐라고 했는가? “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면서 그들의 마구 고름판을 흩트려 놓았다는 말이다. 즉 “뭐? 너희들의 고름판이 어떻다고? 너희들이 천국에 간다고? 에라이 이놈들아, 회개나 해라” 라고 하면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결국 목이 잘려서 죽고 말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유다 공동체는 행운이 찾아오는 묵시를 기다렸는데, 물론 묵시는 오기는 오겠지만, 그러나 그런 행운이 함께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주어지는데, 그래서 이 세상을 타작마당으로 만들어서 그야말로 불의 세례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심판해버리는 묵시가 마구 쏟아진다는 말이다.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

그래서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때는 천국의 열매가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말이다. 천국의 열매는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는 이야기이고, 지금 이 세례요한의 경우에는 천국의 열매, 즉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 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다시 말해서, “우리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라는, 혹은 우리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라는 열매를 말하는데,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이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말이다.

◈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말론을 부정함으로서 ‘참 종말적’ !!

이제 이 대목은 마치겠는데, 아무튼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본 자손들을 부정함으로서 이스라엘이 만든 종말론도, 즉 그들이 말하는 역사적이고 묵시적인 종말론은 인간들의 그들 나름대로의 ‘하나’를 고집하는, 철저한 자기들의 구원위주의 종말론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것을 군화발로 밟아서 차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제가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말론을 부정함으로서 참 종말적이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종말적’ 이라는 말도 있고, 그 앞에 ‘종말론’ 이라는 단어도 있다는 것이다. 결코 쉬운 말이 아닌데 말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보통 사람들은 종말론을 알면 종말에서 구원이 되는 줄로 알지만,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즉 요한계시록 강의를 잘하면 그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종말론을 강의를 잘 하고, 또한 거기에 가서 배우면 과연 마지막에 다가오는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이렇게 종말론을 붙들고 있는데, 누구를 위해서인가? 자기 속에 있는 주체의 균열, 즉 속마음과 겉마음이 다른 말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기 위주의 구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해서 예수님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종말론을 부정함으로 말미암아서 그야말로 참으로 종말적인데, 즉 진짜로 종말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이 색출을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오시면 “야, 이제는 정말 끝났구나” 라는 것인데, 그러면 구원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 구원은 이렇게 실시하시는 분이 먼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속에 있는 이런 것들이 들어있다고 하는 것을 까밝히게 되면, 그것을 ‘색출’ 이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이 그렇게 색출을 하시게 되면, 그런데 이 ‘색출’ 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물론 우리 인간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숨고 숨으면서 피해 다니는데, 즉 “하나님, 이제는 예수님을 잘 믿을게요. 교회에 잘 다닐게요. 복음을 연구할게요” 라고 하면서 피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서 계속해서 숨는데, 바로 그렇게 숨어대면서 간첩행위를 하는 우리들을 예수님이 오셔서 털썩 잡아낸다는 것이다. “야, 여기에 숨어있었네” 라고 하면서 말이다.

◈ 내 새끼, 여기에 숨어있었네 !!

이것을 박윤진 씨의 표현대로 하자면, “제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까요?” 라는 것은 생각하지를 말고, 그냥 주님께서 오셔서, “어이쿠, 내 새끼 여기에 숨어있었네” 라고 하게 되면, 그렇게 예수님이 색출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천국의 본 자손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마태복음 8장의 이야기인데, 참 쉽죠잉? 그러니 역사적이고 묵시적인 종말론이 필요 없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들이 만든 역사의 고름판을 그야말로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마구 짓밟고 구멍을 숭숭 뚫어서 내다버리는데, 이것을 다른 말고 하면, 종말의 힘으로서 몰아 내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어버린 다음에 무엇이 주어지는가?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종말이 색출을 당한 우리들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까 박영선 목사의 주장처럼 우리들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떨기나무처럼 전혀 타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데, 그 불은 성령께서 붙이신다는 것이다.

◈ 봐라. 대식이도 구원을 받잖아 !!

그렇게 되면, 물론 우리는 매일같이 어떻게 되는가? 우리 자신밖에 모르는 죄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은 누가 하시는고 하니까, 우리 머리와 어깻죽지에 성령의 불이 붙어서 “봐라. 사도바울도 구원을 받잖아” 라는 식으로, 성령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색출한 자라고 하면 그 누구라도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봐라. 대식이도 구원을 받잖아” 라고, 아무튼 그냥 그렇게 주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가이오’에게 편지한다고 하는데,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성령의 세례가 불같이 임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해서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임한다는 말이다. 그들이 에너지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냥 그렇게 산다는 것이다. 어떻게 특별히 용을 쓸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색출을 당한 것이 부끄럽기는 한데,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그냥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원래 원숭이는 그렇게 고개를 숙이지 않지만, 그런데 왜 이번에 신창원이 수갑에 채워져서 붙잡혀 나오니 그 옆에 있는 원숭이도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못 보셨나요? 바로 그러한 장면이 성령의 열매인데, 즉 우리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말이다.

◈ 혹시 ‘아우라’ 라고?

혹시 ‘아우라(Aura)’ 라고 들어보셨나요? ‘마우라’ 말고 말이다(ㅋㅋ). 우리말로 하자면 ‘후광’ 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것인데, 즉 누군가가 서 있으면 그 뒤에서 밖으로 뭔가 빛 같은 것이 퍼지는 현상인데, 그렇게 퍼짐으로서 이 떨기나무는 갈수록 죄인이 되는데, 사실은 이 모습이 곧 이스라엘의 모습인데, 우리 자신이 바로 아담의 후손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멸망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그러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꼭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몸부림을 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자기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나서 그렇다는 말이다. 즉 갈라진 주체를 하나로 만들어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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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라 [Aura] - 예술 작품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 독일의 철학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예술 이론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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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에 대해서 조금만 더 !!

그것을 조금만 더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은데, ‘주체’가 이렇게 겉과 속이 나누어져 있으니 틈이 생기는데, 이 틈을 공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공백이니 마치 뭔가 ‘뻥’하고 뚫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시원하기 뚫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헛기침이나 헛배가 부른 것처럼 더부룩하게 뚫린다는 것이다.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들으면 그래도 뭔가 조금 있다 싶은데, 그런데 교회 문만 나서게 되면 뚫리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시원하게 뚫리는 것이 아니라 더부룩하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뚫리니 일단은 메워야 하는데, 여러 가지 취미생활 등을 가지고 메워나가는데, 그런데 그렇게 메우는데 타인의 욕망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의 욕망으로 메워지면 인간은 희열을 느끼면서 그 타인의 욕망을 붙잡으려고 하지만, 그러나 타인의 욕망은 붙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도망을 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메우려고 해도 메워지지를 않고, 메워졌다고 생각하면 어느 새인가 뚫려있는데, 즉 타인의 욕망을 자기가 그만 차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데, 누군가가 아른거리면 그 사람이 되고 싶어하든지, 아니면 되고 싶지 않다든지, 아무튼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복권에 당첨이 되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신혼부부가 교통사고가 나서 그만 죽었다고 하면, 그런 것은 전혀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 구멍이 뚫려있으니 일단 채워야 !!

그러니 이렇게 항상 구멍이 뚫려있다는 것인데, 아무튼 그렇게 죽을 때까지 구멍이 뚫려있으니 어떻게 하는가? 교인들은 여기에다가 말씀을 집어넣는데, 바로 그렇게 말씀을 넣을 때는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역사적인 것과 묵시적인 것으로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역사’ 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곳을 빈틈이 없다고 하면서 합리화를 시키는 것이고, 그리고 ‘묵시’ 라고 하는 것은, 저주는 그만 빼버리고, “하나님이여, 이제는 이런 생활이 너무 지겹습니다. 뭔가 획기적인 행운이 찾아와서 여기서 탈피하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그런 행운을 고대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묵시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 구약의 이스라엘이 항상 우리 내부에 !!

그렇게 역사와 묵시를 가지고 메우는데, 하지만 그 다음에 또 다시 벌어지고 뚫리는데, 바로 그러한 것이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그러한 것이 항상 우리 내부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성도의 어깨에는 언제나 아우라가 펼쳐지는데, 만약 사람들이 그것을 고치려고 한다면, 그것은 더욱 더 악마의 노림 수에 그만 말려들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치려고 한다면 계속해서 법이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게 법이 들어오면 역시 선악적인 사고방식으로 메워져야 하니 말이다.

바로 거기에서 성화론이 등장하는데, 그러면서도 우리 인간은 그것이 너무 답답하니까, 자기 내부는 계속해서 감추려고 하고, 그리고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은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것이 다 타인의 욕망인데 말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는 성경말씀대로 삽니다” 라고 한다면, “당신이 성경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는 그 기준이 되는 분을 제시할 수가 있습니까?” 라고 반문을 해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이 모델로 삼는 사람이 있는지를 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과연 누구를 모델로 제시하겠는가? 전혀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누군가를 제시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언젠가 박영선 목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는데, 자기는 한국교회의 몇몇 분을 훌륭한 모델로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런 분을 따라가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들은 모두가 다 지옥으로 모두 그만 빠져버리고, 그래서 결국 남는 것은 자기 혼자였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다.

◈ 너새니얼 호손의 ‘큰 바위의 얼굴’ !!

거기에 대한 단편소설이 바로 미국의 너새니얼 호손의 ‘큰 바위의 얼굴’ 인데, 저 산 위의 큰 바위에 새겨진 얼굴의 사람이 오게 되면 자기 마을에 평화가 온다는 것인데, 그것을 오늘 배웠는데, 그것을 응용해보면, 그것을 묵시라고 할 수 있는데, 맞지요? 그렇게 묵시가 있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내부가 균열이 되어있다는 것인데, 주체가 갈라져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자기들 힘으로는 되지 않지만 어떤 영웅이 찾아와서 메워주었으면 참 좋겠다고 하는 희망사항인데, 즉 그런 각자 각자의 여망이 어떤 영웅이 오는 것을 소망하는 식으로 요청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묵시적 인물이 왔다고 여기고 같이 10년을 같이 사귀다가 보니 엇길로 간다는 것이다. 이근호 목사도 한 10년을 같이 지내다가보니 별 볼이 없고 말이다.

◈ 이근호 목사도 이제 다 되었다 ??

요즘 제가 “이근호 목사도 이제 다 되었다” 라는 소리를 종종 듣는데, 아무튼 그렇게 엇길로 가고 만다는 것이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것은 이근호를 좋아하든지 싫어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 ‘이근호’ 라는 타인은 하나가 아니기에 전혀 중요하지 않는데, 다만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를, 그런 자기 자신을 갈라지게 하면 안 되고 하나로 만들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해야만 스트레스도 덜 받고 안심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그럴 필요가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아니, 예수님에게 색출을 당해서 구원을 받는 주제에, 그런 주제에 무슨 자기의 완전함이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왜 자기가 소망하는 자기의 하나된 완전한 모습을 그리고 필요로 하느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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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바위 얼굴] -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1804~1864)의 작품.
너새니얼 호손이 만년에 쓴 단편소설로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재를 통해 여러 가지 인간상을 보여주면서 이상적인 인간상을 추구한 작품이다. 남북전쟁 직후, 어니스트란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바위 언덕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전설(傳說)을 듣는다. 어니스트는 커서 그런 사람을 만나보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자신도 어떻게 살아야 큰 바위 얼굴처럼 될까 생각하면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간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돈 많은 부자, 싸움 잘하는 장군, 말을 잘하는 정치인, 글을 잘 쓰는 시인들을 만났으나 큰 바위 얼굴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니스트의 설교를 듣던 시인이 어니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이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할 말을 다 마친 어니스트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나은 사람이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바란다. 작가인 너새니얼 호손은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대표작 《주홍글씨》(1850)를 비롯하여 교훈적 경향이 강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이 작품 또한 그러한 경향의 작품이다. 즉, 위대한 인간의 가치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 등의 세속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탐구를 거쳐 얻어진 말과 사상과 생활의 일치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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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경배의 대상은, ‘나’ 자신 !!

그런데 인간은 그것이 아닌데, ‘큰 바위의 얼굴’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는가? 결국에는 다 빠져버리고 누가 신이 되는가? 그것은 바로 노력하고 있는 ‘나’ 자신, 즉 그렇게 자기 자신이 바로 자기의 믿음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불러도, 그런 것은 다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데, 남을 속이고 또한 자기를 속이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경배의 대상은 곧 자기 자신인데, 그래서 인간은 “나를 건드리면 죽여!”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45페이지를 살펴보자.

** 비단 교회뿐만이 아니다. 가문이나 자선사업체나 협회나 관공서나 세상 모두가 다 그 안에서 자기 생명을 키우고 싶어한다. 바벨탑은 절대적 ‘하나(1)’를 구체화하기 위한 시도였고, 이 탑에 참여했던 인류의 선조들이 전 지구상에 퍼졌다. 이 탑에 참여했던 인류의 선조들이 전 지구상에 퍼졌다. 바벨탑이 허물어진 것이 아니라 바벨탑은 흩어졌다. 불똥이 튄 것이다. 이제는 한 곳에만 바벨탑이 아니라 인류가 머무는 곳에서 바벨탑은 일어선다.

◈ 바벨탑은 절대적 ‘하나(1)’를 구체화하기 위한 시도 !!

그렇게 바벨탑은 절대적 ‘하나(1)’를 구체화하기 위한 시도였는데, 그렇다면 이 하나는 여러 사람들이 만든 하나인가? 아니면 개인이 만든 하나인가? 개인이 생각해서 만든 하나인데, 바벨탑을 만드는데 십만 명을 동원하고 천만 명을 동원해도, 그 바벨탑은 옆에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일군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동원된, 그런 각자의 것이라는 말이다. 가수 ‘비’에게 있어서 제이 무서운 대상은 팬클럽 회장이지 싶은데, 그렇지요?

그러니 사람들은 여러 명이 한 쪽을 봐도, 사실은 여러 명이 합세를 한다는 것이 안 되는데, 즉 인간은 협동이 안 된다는 것이다. 서로 같이 모여서 일하는 것은 협동이 아니라 분업이라고 하는데, 물론 그렇게 분업은 되지만, 그러나 협력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협동이라는 말은 거짓말인데, 그냥 자기가 자기에게 봉사한다는 말이다.

물론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인데, 이전에도 몇 번이나 했지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맞다 싶어서 다시 한번 더 이야기를 해보면, 부부가 결혼을 해서 살다가 그만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자, 물론 처음에는 아내가 위로도 위주고 격려도 해주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6개월만에 이혼을 하고 마는데, 그러니 온전하게 남을 도와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 바벨탑은 오직 자기만을 위한 ‘탑’ !!

그러니 이 바벨탑은 무엇인고 하니, 오직 자기만을 위한 탑인데, 그런데 그것을 여러 사람들이 만들기 위해서 동원된 것이 바로 ‘언어’ 라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인데, 라캉도 주장했고 말이다. 여기 ‘언어’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타인의 욕망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합리화시키는 것, 그것을 언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언어, 합리화, 유사성, 일관성, 보편성 !!

그런데 여기서 ‘합리화’ 라는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아까 그린 그림의 경우에, 이렇게 하나가 산 정상에 있고, 그 중간에는 구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니 어려워도 좀 참고 들어야 하는데, 그런데 여기 산 밑에서는 아무리 위로 하나를 향해서 가려고 해도 구름으로 인해서 다 튕겨서 도로 내려오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튕겨서 나오게 되면, 우리끼리는 보편적인 진리가 없다는 것인데, 즉 “누구의 이론은 진리이고 나머지는 진리가 아니다” 라는 것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서로 서로 비슷한 것끼리, 이것을 비트겐쉬타인이 주장한 바에 의하면 ‘유사성’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유사한 것끼리 모으자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두고 ‘합리화’ 라고 한다는 말이다. 또한 이것을 가지고 ‘일관성’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일관성은 보편성과는 다른 것인데, 보편성은 진리를 말하는 반면에, 이 일관성은 서로 서로 같은 유사성이 있으면 서로 통하자고 하는데, 굳이 진리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바로 그런 유사성, 즉 일관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언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언어를?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깰 때 무엇을 흩어버리시는가? 언어를 그냥 작살을 내는데, 참으로 가슴 아프게 말이다. 그런 일만 없으면 외국어 공부에 그렇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흩어버리신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이 인간들의 일관성을 깬다는 것이다.

그렇게 깨니까 각자 각자가 추구하는 진리성은 그 하나 하나가 다 흩어진 바벨탑이 되어서, 그러니 이제는 바벨탑이 하나가 아니라 전 세계에 그만 흩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치 한 군데 있는 숯불을 깨면 그것이 양 사방에 날려서 흩어지듯이 말이다.

◈ 이제는 전 세계에 바벨탑이 !!

그러니 이제는 바벨탑이 인간들이 가는 곳마다, 즉 모든 민족마다 다 세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그야말로 숯불을 온 천지에 날리듯이 그렇게 해버리셨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불티가 튀는 곳마다 바벨탑에 세워지게 되는데, 즉 전 세계가 그야말로 바벨탑화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전 세계에서 오직 하나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예가 바로 교회, 가문, 자선단체 등등인데, 혹시 소록도를 아세요? 전라남도 고흥군에 있는 조그마한 섬인데, 과거에 나환자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말이다. 그 섬에 가보니 교회가 5군데나 있는데, 그러면 그 교회들이 협동을 잘 하겠는가? 협동이 아니라 그냥 분업이라는 것이다. 각자 각자의 교회마다 오직 자기 교회만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전라남도 고흥군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시골구석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가서 감동을 받은 것이 있는데, 이번에 미사일을 발사하다가 실패한 나로섬도 그곳에 있는데 말이다. 집들도 거의가 없는데, 설령 있다고 해도 연세가 많은 할머니들만 살고 계신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 떠나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젊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대도시로 모두 몰려나오게 되면, 그러면 그들이 하나가 되는가? 물론 살아가는데 편리할 수는 있겠지만, 즉 일관화는 가능하겠지만 무엇이 안 되는가? 보편적 진리는 여전히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부가 자기 주먹을 자기가 흔들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자기 주먹을 자기가 흔들면서 말이다.

◈ 초장 끗발은 개끗발 ??

노름판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고사성어가 있는데, 즉 “초장 끗발은 개끗발이다” 라고 말이다. 처음에 딴 사람은 계속해서 따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꼴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초반에 그렇게 돈을 따서 나가면 되는데, 그것이 안 된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자기가 초반에 돈을 따면, 그것을 어디까지나 일관성인데, 그런데 그 사람은 그것을 보편성으로 바꾸어서 본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 예를 들어놓고도 참 잘했다 싶은데(ㅋㅋ), 다시 이야기를 하면, “초장 끗발은 개끗발이다” 라는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노름을 하는데 처음에 자기가 노름을 해서 돈을 따니 그것을 계속해서 앞으로도 판을 돌리면 돈을 딸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현재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인 속성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 다음 판은 그 사람이 먹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먹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왜 노름판을 떠나지 못하는가? 그 사람은 그 일관적인 판을 언젠가는 자기 중심의 보편적인 판이 될 것을 희망하게 되는데, 그런데 만약에 그것이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기도라는 말이다. 즉 “주여, 다음 판은 저의 판이 되도록 하옵소서” 라고 말이다.  

◈ 성도는 불판을 바꾸어야 !!

그러므로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 이 세상 판을 저의 판으로 만들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지난 지난주이지 싶은데, 그때 뭐라고 설교를 했는고 하니, “성도는 불판을 바꾸어야 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무엇을 바꾸어야 한다구요? 판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판을 말이다.

사실은 우리가 속해있는 판이 이미 다 예수님의 판인데, 초반 판도 그렇고, 중간 판도 그렇고, 또한 마지막 판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왜 그런가? 이미 우리는 색출을 당했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이미 모든 판이 다 예수님 판으로, 즉 천국의 판으로 바뀌어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착각하면서 살아가는가? 예수님의 나라를 자꾸만 자기의 나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성경말씀의 언어는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성경은 이 모든 판이 다 예수님의 판이라고,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예수님 중심으로 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이 판을 자꾸만 자기 판으로 여기고, 돈을 따려고 덤빈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를 해도 어떻게 하는가? “주님, 제가 말씀을 지켰으니 복을 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매일같이 자기 것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 성도는 계속해서 떨기나무로 !!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일종의 떨기나무와 같은데, 그러니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옥으로 가는 사람과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불이 붙어있는 떨기나무라는 말이다. 물론 저쪽은 그냥 떨기나무이고 말이다. 그래서 불이 붙어있지 않으니, 자기들 내부에서 불을 지르고 난리를 피우는데, 우리는 그냥 외부에서 불이 붙어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양쪽이 모두가 다 죄인인데 말이다.

지금까지 한 것이 교재에 나오는데, 다시 한번 읽어보자.

** 이 탑에 참여했던 인류의 선조들이 전 지구상에 퍼졌다. 바벨탑이 허물어진 것이 아니라 바벨탑은 흩어졌다. 불똥이 튄 것이다. 이제는 한 곳에만 바벨탑이 아니라 인류가 머무는 곳에서 바벨탑은 일어선다. 바벨탐의 웅지가 어디에 가겠는가?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요? 이번에 논문을 새로 쓰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다니엘서에 의하면 바벨론에 ‘느부갓네살’ 이라는 우상이 있는데, 거기서 묵시가 어디 있는고 하니, 흔히 사람들은 역사의 끝에 묵시가 온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다니엘서 2장에 의하면, 돌맹이가 날아와서 우상을 발을 쳐서 박살을 내고 그 돌맹이가 태산을 이룬다고 하니 말이다.

(단 2: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 금신상 자체를 뒤에서 미는 힘이 곧 ‘묵시’ !!

보통 그것을 묵시로 보는데,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아니라 그 금신상 자체를 뒤에서 미는 힘이 있는데, 그렇게 미는 힘이 묵시이고, 그리고 돌맹이가 태산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그 묵시가 바로 역사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지점이 말이다. 즉 감추어진 묵시가 역사를 넘어뜨릴 때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지점만이 묵시가 아니라, 그 우상 전체를 넘어뜨리는 자체가 곧 묵시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느부갓네살 우상은 숫자로 말하면 ‘하나(1)’ 인데, 그런데 이 하나가 무너지면 뒤에는 진짜 하나가 또 따로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하나가 하나를 무너뜨림으로 말미암아서, 그러니 이 앞에 있는 하나는 제 아무리 무너지고 해도, 즉 나라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어디에 속하는가? 결국 하나에 속한다는 것이다.

◈ 70이레 - 예수님의 나라로 가는 여정(旅程) !!

그러니 이 인간들의 제국을 ‘하나’로 보고, 이 제국을 넘어뜨리는 새로운 인자의 나라도 역시 ‘하나’로 보고, 그래서 ‘70이레’는 결국에는 하나, 즉 ‘1이레’로 모아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나라로 가는 여정이 바로 이 70이레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다수가 하나가 되기 위한 전쟁과 투쟁은 고을마다 일어난다. 분열이 되었다가도 통합되고, 통합이 되더라도 다시 분열이 되는 흥망성쇠의 부침이 거듭하고 있다.

그러니 선덕여왕과 미실이 함께 있을 수는 없는데, 아무리 시청률이 떨어져도 말이다. 그리고 비담이 아무리 덕만을 좋아해도 유신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사람이 두 명이 되면 곤란한데, 반드시 둘은 하나로 모여야 한다는 말이다. 왜 둘이 되면 안 되는가? 자기에게 있는 주체가 습관이 무엇인고 하니, 겉모습은 하나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물론 숨어있는 것도 있고 말이다.

우리 인간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둘을 용납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도, 결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말이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 어떤 이웃도 자기보다 더 중요한 이웃은 없는데, 즉 자기가 이웃이고, 자기가 이웃을 사랑하는 당사자가 되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 내버려둘 수밖에는 없는데, 평생을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 복음의 조명빨에 의해서 !!

물론 구원을 받는 것은 색출을 당해서 받는데, 즉 “아이쿠, 요놈이 여기에 숨어있었구만” 라고 해서 말이다. 그러니 그 복음의 광채에 의해서 우리가 노출된 것인데, 즉 복음의 조명빨에 의해서 우리는 죄인으로서 완전히 발가벗기고 드러났다는 것이다.

왜 만화에 보면, 사람이 감전이 되면 해골만 드러나면서 그렇게 감전이 되는데, 옛날에 그런 드라마 만화가 있었는데, 혹시 기억이 나세요? 악당이 여자 한 명에 남자가 두 명인데, 마지막에는 악당들이 감전이 되어서 항상 자기 해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도망을 치는데, 우리가 바로 그러한 모습이라는 말이다.

◈ 해골이면 해골답게 !!

그러니 그런 해골에 무슨 남녀노소가 있겠는가?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데, 즉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냥 전기에 감전된 해골인데, 그런 해골을 조사해서 착한 해골, 나쁜 해골을 그렇게 고른다는 말인가? 그냥 다 해골인데 말이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자꾸만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데, 예를 들어서, 여기 이 동네에 교회가 두 개가 있다고 하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데, 즉 저기 밑에 있는 수정교회가 그만 망해서 자기 교회로 하나가 흡수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 주체가 둘을 용납하지 않기에 !!

그렇게 우리 인간은 언제나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주체가 둘을 용납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즉 타인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나쁘고 좋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원래 그렇다는 말이다. 즉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 자신이 바벨탑이고 우상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 경배하지 다른 누구를 경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

그래서 로마서 1장 28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을 마음에 두면 그 하나님이 자기의 시어머니가 되어서 말이다. 어디까지나 자기가 돗대인데, 그러니 시어머니는 오지 말라는 것이다.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 필요한가? 함께 한다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되고, 우리가 기도할 때만 도와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묵시적으로 기도할 때 말이다. 그런 하나님과 함께 산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 부담이 되어서 전혀 싫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잔소리를 할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이라면 결국에는 쫓아내어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46페이지를 살펴보자.

** 권력은 통합을 낳고, 그 통합은 권력의 하나됨을 선포한다. 예로부터 그들은 신이 내린 영웅을 고대했고, 일방적으로 우대했다. 스스로 영웅의 통솔 하에 들어간다. 절대권력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 매니지멘트와 상품 !!

교회에서 당회장이 부교역자를 억압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흔히 ‘협력목회’ 라고 하는데, 세상에 그런 목회는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하나는 고용주고, 다른 하나는 고용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당회장은 부교역자에게 자기 자리를 넘보지 말라고 미리 압력을 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장로교에서는 목사와 장로가 두 축이라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한쪽은 매니지멘트이고 다른 쪽은 상품이라는 것이다. 

◈ 영웅은, 묵시가 역사화가 되면서 !!

그리고 여기 나오는 ‘영웅’이 무엇인고 하니까, 묵시가 구체화된 것인데,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묵시가 역사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이 되면 먼저 나라의 연호를 바꾸는데, 선덕여왕도 연호를 사용했는데, 물론 중국의 영향이지만 말이다. 왜 교회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가? 무슨 무슨 목사 몇 년차,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왜 바꾸는가? 역사를 새로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를 새로이 시작하는데, 그 시작점을 신의 뜻으로 보아서, 그것을 묵시로 본다는 말이다. 즉 “지금까지는 썩은 역사였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신의 뜻에 의해서 왕이 바뀌었고, 그러니 새롭게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니 이 백성들아, 지금부터는 나의 뜻이 하늘의 뜻인 줄로 알고, 나에게 복종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를 새롭게 시작할 때는 그 역사의 기초를 묵시에, 즉 하늘에 두는데, 그것을 두고 ‘영웅’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영웅은 곧 메시야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모든 인간들은 영웅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데, 즉 메시야가 없이는 말이다. 그러니 믿음이 좋아서 메시야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목(木)’씨 성을 가진 귀인이 ??

그래서 절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중이 들어와서 목탁을 ‘탁탁’ 치면서 “어허, 얼마 있지를 않아서 이 집에 귀한 손님이 다녀가겠구먼. ‘목(木)’씨 성을 가진 귀인이 말이야” 라고 하면, 그 집주인은 쌀을 퍼서 동냥을 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중은 또 그런 것을 노리고 들어오고 말이다. 물론 거기서 ‘목(木)’씨 성을 가진 사람은 ‘이(李)’씨를 의미하고 말이다(ㅋㅋ).

과거에는 이렇게 묵시가 집으로 찾아왔는데, 즉 중들이 집으로 일일이 방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중들도 바쁘고 하니, 이 묵시를 한꺼번에 많이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산 위에다가 올려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여기 팔공산의 ‘갓바위’ 라는 것이다.

다시 처음에 그린 그림을 연상하면 되는데, 즉 산 밑에는 사람들이 있고, 그 중간에는 구름이 있고, 그리고 제일 산꼭대기에는 갓바위가 있는데, 이 갓바위가 멀리 울산에서도 보인다고 하는데 말이다. 이 갓바위는 세 개를 기도하면 적어도 하나는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희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이런 희망, 즉 묵시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이 드는데, 물론 역사가 있기는 하지만, 그 역사로는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런 미흡한 주체를 메울 수 있는 것은 묵시밖에 없다는 말이다.

◈ 인간은 왜 절대권력을 요구하는가?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인간은 ‘절대권력’을 요구하는데, 그러니 제 아무리 민주주의를 외치고 해도 역시 나라가 되려고 하면 누가 필요한가? 여자와 명태는 패야 맛이 나듯이(??), 그렇게 백성들을 마구 패는 독재자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남 합천에 가면 아직도 전두환을 그리워한다고 하는데, 그 양반의 호가 ‘일해’ 인데, 그래서 거기에 아직도 일해공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절대권력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해야 나라꼴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디서 감히 여자가 설치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모든 인간 속에는 영웅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는데, 소위 민주주의는 골치가 아프고, 그냥 마구 조지면서 다스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곳이 북한인데, 김정일은 곧 교주이고 북한은 종교단체라는 말이다. 통일교나 신천지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해야 커진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의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에, 절대권력만이 절대 보편성을 지니는데, 그러니 일관성은 싫다는 것이다. 즉 민중들은 일관성이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를 원한다는 말이다. 누구나 그 앞에서는 ‘끽’ 소리도 하지 말라고 하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이다. 그런데 무슨 일관성이냐는 것이다. 무슨 소통의 장, 웃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소통의 장은 민중들은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짐승은, 역사를 영적인 것으로 !!

그러니 짐승이 무엇인고 하니, 다니엘서에 의하면 역사를 묵시로 바꾸는 것, 그것을 두고 ‘짐승’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번 논문의 관주에 모두 적어놓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왜 그렇게 교회를 비롯한 모든 종교단체가 짐승의 나라인고 하니까, 역사에다가 보편적인 진리를 개입시켜서 영적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데, 그래서 성경은 바로 그 역사를 심판으로 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인데, 인간들은 자기들이 만든 교회를 자꾸만 묵시의 교회로, 진짜 교회로 바꾼다는 말이다. 그래서 정말 참된 묵시의 교회의 주인이신 인자가 어떻게 하는가? 일곱교회를 그만 박살을 내어서 역사의 잔재로 흩어버린다는 것이다.

오늘 강의가 너무나 어려워서 지금부터는 질문을 던지면서 하겠는데, 물론 시간도 얼마 남지를 않았지만 말이다. 인간들이 절대권력을 요청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묵시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인간들은 왜 묵시를 원하는가?

◈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자기 국가를 !!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를 잘 한번 들어보세요. 만약에 한 국가의 백성이 천 명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 천명을 합치면 하나의 국가가 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 사람 각자 각자가 모두가 다 자기 국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지 않으면, 그만 이민을 떠나가고 만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천 명이 하나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천 명은 천 개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관성 때문에 하나의 나라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지만 그 나라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떠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절대권력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 권력 안에는 낯선 소용돌이가 만들어진다. 큰 덩치 유지에 필요한 생계조직이 작동한다. 마치 생물체가 ‘내부환경’ 이라고 만드는 것과 같다. 세포는 주위를 막으로 덮어서 외부의 온도나 습도, 산이나 알칼리 농도의 변화 등의 세포내부의 조직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을 발전시키게 된다. 그렇게 해서 확보된 내부환경의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서 외부로부터 다른 의지나 성질을 가진 생명체가 들어오기 어렵게 하는 면역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갖추는 것이다. 이로서 생명체는 내면적으로 안정을 갖춘다.

◈ 여기에서 누가 말빨이 더 세지?

이것이 생물학적으로 보면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지만, 그러니 의외로 간단한데, 창세기 4장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받은 벌이 무엇인가? 자기가 구축한 자기 동네가 있는데, 그런데 그런데 자기 동네에서 추방되어버리면, 남의 밑에 들어가야 되는데, 즉 남의 세포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의 세포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대장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졸다구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그것인데, 예수님을 믿으면 그렇게 소신껏(?) 믿으면 되는데, 그런데 슬슬 눈치를 본다는 것이다. 즉 “이 교회에서 누가 말빨이 세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교회의 장로님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등록을 하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알아서 등록을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등록을 하게 되면 “야, 이제는 말빨이 센 사람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라고 하는, 그런 의구심을 가지게 되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본인 자체가 그런 사람을 찾아야만 빠른 속도로 승진할 수 있다는 것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절대권력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에 노출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 와서는 복음만 챙기면 되는데, 즉 자기의 아우라만 걸치면 된다는 말이다. 그냥 자기 어깨에 날개만 달면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룰라’가 그런 노래를 불렀지 싶은데, “날개를 달고서 ♬” 라고 말이다. 그러니 누구의 눈치를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실체적 허구, 실체적 효과 !!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을 조직으로 만들어놓으니, 마치 조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실체적 허구’ 라고 하는데, 분명히 그런 허구인데, 저는 이것을 다른 말로 ‘실체적 효과’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실체가 없는데 자기가 원하니 마치 실체가, 즉 권력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여긴다는 것이다. 저에게도 그런 허구적인 권력이 침투해서(?), 그것을 제거한다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르는데 말이다.

아무튼 국가도 바로 이런 일종의 생명체인데, 그래서 성도는 국가라고 하는 절대적 상징성에 속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허구이니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떠한가? 이 국가에 협조를 하는데, 그래서 그 국가가 망하면 같이 운다는 것이다.

◈ 박정희, 노무현 !!

제가 과거에 제일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고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서 그렇게 많이들 울었다는 것이다. 그 양반이 1979년 10월 26일에 죽었으니, 지금부터 딱 40년 전의 일인데 말이다. 그때 전 인구의 50%가 넘는 2,000만 명이 그 장례식에 동참을 했는데, 그 이전에 육영수 여사가 죽었을 때도 그랬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죽었을 때도 국민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는, 왜 이 나라에서는 ‘한국교회’ 라는 무당집단이 부흥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 즉 인간들은 그렇게 허구를 끊임없이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말이다.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그야말로 허구인데 말이다. 그래서 한경직 목사의 기념탑과 같은 것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이 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게 되는가? “아하, 이러한 것이 바로 죄로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즉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보다도 바깥에 있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어떤 구체화가 된 권력체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들의 허구적인, 즉 자기를 감추려고 하는 허구적 산물임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 인간의 곧 악마의 실체 !!

그래서 악마가 바로 이렇게 허구적인 국가를 사용하게 되는데, 그래서 제가 이번에 발표하는 논문의 각주에 뭐라고 해놓았는고 하니, “실체가 없는 허구의 효과가 곧 짐승인데, 그런데 그 짐승의 실체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 그런 허구를 원하고 노리고 있으니, 우리 인간들이 곧 악마의 실체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이마에 악마의 도장이 찍혀져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와 자아는 언제나 같이 움직이는데, 즉 ‘하나됨’ 이라는 것이다. 사실은 자기 자신의 하나됨인데, 거기에 국가라는 허구를 아우라처럼 둘러친다는 말이다.

그것이 교재에 나오는데, 계속해서 살펴보자.

** 이로서 국가, 즉 자아는 일체가 되어서 움직인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더욱 더 싫어하게 만들뿐이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 자신의 허구에 자기가 속아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지금 마칠 시간인데, 아쉬워서 조금만 더 하고 마치도록 하겠는데, 괜찮겠지요?

계속해서 교재 47페이지를 보자.

** 그러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속한 그 무엇만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에게 고용된 교회(종교)는 국가 안에서 집단화된다. 내부적으로 종교가 여럿이 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 말씀자체가 성도를 색출해서 !!

이렇게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한 그 무엇만을 필요로 하는데, 왜 그런가? 말씀자체가 우리를 색출해서 우리가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면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사실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의 세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는 답답해한다는 말이다. 즉 말씀은 속해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속해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하니 손에 잡히지는 않고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우리는 무엇인가? 말씀에 속해 있는 것보다도, 그것보다는 자기가 속해있고 싶은, 그런 자기가 원하는 나라, 그러니 지금 현재는 대한민국인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축구를 해도 대한민국이 16강에 올라가야 되고, 또 무엇을 해도 일본보다 잘해야 되고, 그렇게 눈에 보이는 이 대한민국에 속해서, 그래서 국가조찬 기도회가 생기고 한다는 것이다.

◈ 대한민국, 아자차 차차 ??

그러니 지금 당장은 중요한 것이 대한민국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보다도 말이다. 즉 손에 잡히는 허구의 효과를 대한민국이 좀 대신해서 담당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대한민국이 잘되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 그대로 애국가가 아니냐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말씀 그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던가? 하나님과 대한민국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다. 저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성경에 그런 내용이 없던데, 혹시 여러분은 아세요? 오히려 요한복음 18장 36절을 보면 뭐라고 하는가? 대한민국은 예수님의 나라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가 이미 확정된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이, 그냥 한 그루의 떨기나무처럼, 그 하나의 아우리가 우리를 덮치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사실 우리가 지금은 아무리 이렇게 대한민국이 어떻고 저떻고 하다가도,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 그냥 미국 사람이 다 되고 마는데, 미국의 시민권을 취득하면 그렇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아메리카 만세”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을 욕하면 난리가 나고 말이다.

◈ 아하, 제가 그런 놈이군요 !!

그러니 그 떨기나무는 하늘나라를 보여주고 있는데, 사실 우리는 지금 그 천국보다 대한민국을 좋아하고 있는데, 바로 그러한 것 자체가 떨기나무라고 하는 것을 안다고 하면, 그것이 곧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보다 천국을 더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 저는 지금 천국보다는 대한민국이 좋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죄가 맞지요? 이것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지요?” 라고, 그렇게 물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러면서 또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 저는 예수님보다 제 식구가 좋습니다. 정말로 제 마누라가 최고인데, 그야말로 내 새끼가 최고인데, 하지만 그것은 천국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살아가면 갈수록 깨닫게 하옵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치매가 들면 비로소 깨달을지 모르겠는데(ㅋㅋ), 그때는 자식들도 소용이 없고, 마누라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이 있으리라” 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야말로 실감나지 싶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저희들이 그야말로 상상치도 못한 죄를 끄집어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저희들이 색출을 당한 것은, 이미 주님의 나라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절차인 줄로 압니다. 성령이 아니고야 어떻게 저희들이 죄인임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임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11,23 오후 11시 50분에 마침.

                                                                  산 할아버지, 구름모자 섰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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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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