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8월 23일 피31강 대상(술어:목적)이 되어버린 우상예수

100823 피31강 대상(술어:목적)이 되어버린 우상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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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823피p113목적대상이되어버린예수

피31강 대상(술어:목적)이 되어버린 우상예수 

[10 대구강의 13] - [피 31] - 목적대상이 되어버린 예수
                                                                                
                                                          10,08,2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나님의 형상은, 모습이 아닌 ‘기능’ !!

오늘은 교재 113페이지를 살펴보겠는데, 먼저 우리가 112페이지까지 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두 가지인데, 그게 곧 ‘출생’과 ‘죽음’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신다면, 그 증거를 대봐라?” 라고 한다면, “당신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어서 결국에는 죽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나안 농군학교에 있는 어떤 책임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니 거울에다가 사람의 얼굴을 비추는데, 하지만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일종의 ‘기능’ 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모습이 아닌 기능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은, ‘변화됨’ 그 자체 !!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을 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변화됨’ 그 자체라는 말이다. 즉 날마다 달라지고 변화되는 것이 바로 형상이란 것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결혼식장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서약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둘 다 변화가 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비록 가정생활이 파탄되어도 그 책임을 어느 한 쪽으로만 몰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다 변화되는데,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결혼을 하기 이전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몰랐는데,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난 뒤에는 그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알아가는 변화로, 그렇게 주님의 사랑을 더 알아가는 변화로서의 변화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남편 된 자는 아내에게, 아내 된 자는 남편에게” 라고 하면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만약에 “당신은 결혼을 했는가? - 예 - 그렇다면 변화가 되어라. - 아뇨, 저는 변화되기 싫어요” 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 희생과 사랑을 알아 가는 변화 !!

다시 이야기를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다 변화가 되는데, 그런데 변화되는 방향이 어느 쪽인고 하니, 여자는 교회의 역할을 해야되고, 또한 남편은 예수님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쪽은 희생을 하고, 또 다른 쪽은 그러한 희생의 사랑을 알고 말이다. 그렇게 서로가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알아가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면, 바로 그런 변화가 그 가정자체를 어떻게 하는가? 교회로 그만 바뀌게 한다는 것이다. 

◈ 아내들이여 !! 남편들아 !!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엡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 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엡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엡 5: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엡 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엡 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 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 성화론 - ‘남들’ 앞에서 !!

그런데 성화론의 경우에는, 이런 변화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보이는 것을 체면, 혹은 도덕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남들 앞에서 내 행동을 어떻게 보일까?” 라고 하는 말이다. 이것이 곧 위선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즉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희생될 수밖에 없다” 라고 하면서, 희생의 길을 가는 쪽으로 변화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의 자리에 예수님이 아닌 ‘남들’이 그만 들어가고 만다는 것이다.

◈ 남들 때문에 힘들어서 ??

그것이 힘이 드니 혼자 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곤 한다는 말이다. 그 ‘남들’ 때문에 힘들어서 못 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남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너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라고 하시는데, 즉 남들이 있어도, 있으나마나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런 남들이 싫다고 해서 기도원에 들어가서 혼자 기도나 하면서 산다고 하면, 과연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는 변화가 되기 싫어하면서, 남들을 보고는 변화가 되라고 억지를 부리지 말라는 것인데,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남들에게 변화가 되라고, 즉 자기를 힘들게 하지 말라고 하지 말고, 서로 다같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을 문법화를 시키면 - ‘주어+술어’ !!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언어에 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언어는 길게 하면 문장이 되는데, 그런 문장에는 법칙이 있는데, 그게 곧 문법이란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모습이 아닌 기능이다” 라는 것을 문법화를 시키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주어+술어’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벌써 머리가 아파 오는데 말이다(ㅋㅋ).

예를 들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 “비가 온다” 라고 했을 때, 그런데 여기서 ‘온다’ 라는 것을 빼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비, 즉 하늘에서 물방울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온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문장이 비로소 완성이 된다는 말이다.

◈ 인간은 (  ) !!

또한 “그는 (  )” 라고 하면, 그가 도대체 어떠하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 (  )에 ‘남자이다’ 라고 써넣으면, “아하, 그는 남자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역시 “그녀는 (  )” 라고 하게 되면, 그녀가 어떠하다는 말인가? 그래서 (  )에 ‘배가 고프다’ 라고 적어 넣으면, “아, 그녀는 배가 고프구나” 라고 된다는 말이다. 즉 이렇게 뒤에 술어가 따라오게 되면, 그 술어는 주어의 상태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왜 이런 것을 문법적으로 따지는고 하니, “인간은 (  )” 라고 하게 되면, 이 (  )에는 무엇이 들어가겠는가?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것들이 마구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자리를 누가 차지해야 하는가? 방금 하나님의 형상은 뭐라고 했는가? ‘기능’ 이라고 했는데,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다루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이 이 (  )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것이 바로 성경말씀인데, 즉 “성경말씀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복음 앞에서 인간은 이런 존재이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지금 이 자리를 누가 차지하고 있는가? “인간은 (  )” 라고 하면서, 그 (  )에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것들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것도 있고, 또한 자기가 주변 사람들의 욕망을 받아서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을 발작을 해서 자기 임의대로 집어넣는 것도 있다는 말이다.

◈ 엄마, 우리는 언제 양옥집에 살지?

예를 들어서, 가난한 동네에서 자기는 하나밖에 없는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 그야말로 폼이 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60년대에 시골에 보면, 초가집들이 줄줄이 있는데 그 가운데 이층집이 하나 있으면, 그 집은 반드시 이장집이든지(?), 아니면 도시에서 돈 많은 양반이 별장으로 사용하는 집이든지, 아니면 그 동네의 토지를 깡그리 다 가지고 있는 지주의 집이든지,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동네에서 유난히 폼이 나는 집을 ‘이층 슬라브’ 라고 하는데, 60년대에 이층 슬라브가 완전히 히트상품이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갑부집이었는데, 하지만 요즘에는 어떠한가? 재개발 대상이라는 것이다. 콘크리트에 퍼런 이끼가 끼어서 그야말로 동네 분위기를 다 망치는데, 전혀 단열도 안 되고, 그러니 겨울에 얼마나 추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빌라촌 앞에도 보면 이층 슬라브 집들이 죽 늘어서 있는데, 그만 동네 분위기를 다 망쳐놓는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아무튼 우리 인간은 주변 상황에 비해서 자기가 돋보이게 되면 얼마나 흐뭇해하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다시 60년대로 돌아가서, 마을에 그렇게 멋있는 이층 슬라브 집이 있으면, 초가집에 사는 아이들이 뭐라고 하는가? “엄마, 우리는 언제 저런 집에 살지?” 라고 하는데, 참 그런 집을 양옥집이라고도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런 아이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즉 (  )에, 즉 술어에 무엇이 들어가겠는가? “나는 결혼해서 양옥집에 살래” 라고 된다는 것이다.

◈ 주어가 그만 술어에 종속이 되어서 !!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술어에 의해서 주어가 목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즉 주어는 그만 술어에 종속이 되고 마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곧  일중독??)

그것은 지금도 전혀 예외가 아닌데, 즉 촌에 사는 사람은 대구로 오고 싶고, 또한 대구에 사는 사람은 서울에 가서 살고 싶다는 것이다. 대구는 도시도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서울에 사는 사람의 경우도, 강남과 비강남이 차이가 나는데, 그러면 강남에 사는 사람은 어떠한가? 그들도 역시 뉴욕이나 파리로 이민을 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술어’의 문제인데, 이것을 가지고 ‘문법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술어에 역사가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게 개혁주의 신학의 모토라는 것이다. 그러니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것은, “내가 되고 싶어하는 하는데, 거기에 신이 도와준다” 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착하게 살고 싶어요? 주께서 도와주십니다” 라고, 즉 “착하게 살아서 구원을 받고 싶습니까? 여러분이 착하게 말씀대로 살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성화론이고 말이다. 이런 개혁주의 신학의 뿌리가 어디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신학인데, 즉 십자가 언저리에 있는 말이다.

◈ 십자가 - 언덕 중앙에 있는 블랙홀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에 이렇게 양쪽에 언덕이 있으면 그 가운데 블랙홀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신학은 이렇게 언덕을 기어올라오는데, 십자가의 블랙홀이 있는 그 근처까지 말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의로움을 다 쌓아가면서 그렇게 언덕을 계단을 올라오듯이 올라오는데, 거기까지 올라오는 것이 완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홀에 빠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물론 그런 성화주의자들도 주님의 발길로 얼마든지 빠트릴 수가 있는데, 그것이 곧 은혜이고 말이다. 즉 성령께서 집어던지면 지금까지 자기들이 주장한 모든 성화론, 그게 곧 술어인데 말이다. 즉 악마가 원했던 술어에 자기가 놀아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하, 내가 착해지려고 하는 거기에 내가 놀아났구나” 라고 말이다. 

이것을 두고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그런 것이 아니라, 조금 전에 말했지만 출생과 죽음,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착해지려고 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형상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착해지려고 하는 거기에 베드로전서를 비롯해서 온갖 성경구절을 다 동원해서 짬뽕을 만들고 마는데, 하지만 중국음식에 짬뽕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짜장면도 있고, 또 탕수육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짬뽕만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 ‘언어’와 ‘형상’을 다시 설명하면 !!

이제 언어와 형상 사이의 관계를 알았지 싶은데, 그래도 다시 한번 설명하면, 인간의 언어, 즉 문장이라고 하는 것은, 즉 신학이나 철학이라는 것은,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언어이고 문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의롭다” 라고 했을 때, 여기서 ‘나는’ 이라는 것은 주어이고, ‘의롭다’ 라는 술어가 되는데, 물론 그 사이에 들어가는 것들은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다. “나는 조금 의롭다”, 혹은 “나는 매우 의롭다” 라고 하는 말이다. 뼈대가 되는 것은 ‘주어+술어’ 인데, 그러니 여기서는 술어가 주어를 지배하고 통치하는데, 즉 ‘나’의 욕망이 ‘나’ 라는 인간마저도 집어삼키면서 매일같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구조에서 무엇을 보셨는고 하니, 우리 인간들은 여기 이 술어에다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라는 것들을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그런 것들을 넣지 말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는 것을 넣으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나라와 의를 집어넣게 되면, 그러면 ‘나’ 라는 것은 어디에 소속이 되는가? 그 나라와 의에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방인이 아닌 참된 성도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산상설교인데, 그러니 이런 구조로 산상설교를 보게 되면 된다는 것이다. ‘주어+술어’로 말이다.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는가? 그 나라와 의를 몰고 오신 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란 것이다. 그러니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한다고 해서 하늘만 쳐다보라는 게 아니라,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하는 말씀을 남기신 그분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그렇게 구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성화론자들이 하는 주장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무슨 뜻인가? 그것은 곧, 그러한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즉 “내가 너희들에게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도록 해주겠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술어부분에 새언약이 들어감으로 !!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이렇게 ‘주어+술어’에 있어서, 주어 부분의 ‘나’ 라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여긴 것이 다 거짓말이었고, 여기 술어 부분에 진짜 하나님의 형상이 오게 되면, 주어 부분의 가짜 하나님의 형상은 진짜 형상인 예수님에 종속이 된다는 것이다. 

이 술어 부분인 예수님의 자리에 구약에서는 노아언약이나 모세언약 등을 넣게 되는데, 그리고 신약에서는 새언약을 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새언약이 기능화가 되어서, 주어 부분의 ‘나’ 라는 존재는 새언약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성령을 받은 성도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하지만 기존의 신학에서 앞서 살펴본 대로 술어가 우선이 아니라 누가 우선이고 주인공인가? 주어가 우선인데, 즉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어가 우선이 되니, 그러면 무엇을 감추는고 하니, “내가 최고이다” 라는 것인데, 즉 “나는 무조건 의로워야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어가 아닌가요? ㅋㅋ)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내가 착하다는 것이고, 또한 나는 인생에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 라고 말이다. 그런 것을 자꾸만 술어 부분에다 집어넣는데, 그러면 누가 배척을 받는가? 실제로 우리 인간을 탄생시키고 또한 죽이시는, 진짜 주인공이 되시는, 즉 술어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배척의 증거가 곧 십자가이고 말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바깥에 있는 실제적인 모든 움직임이 어떻게 언어 속에 고착화가 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문장이 아주 길지만, 그것을 간추리고 간추려보면 철골 구조물이 나오는데, 그것이 곧 ‘주어+술어’ 라는 것이다.

◈ 성경의 ‘주어+술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경의 ‘주어+술어’는 무엇인가?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은 그 어떤 형태로 있어도, “예수님인 내가 너희들에게 이런 일을 하게 한다” 라는 것이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곧 길이요, 나는 곧 진리요, 나는 곧 생명이다” 라는 것인데, 즉 ‘나’ 라는 주어가, 술부인 길이 되게 하고, 진리가 되게 하고, 생명이 되게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기능으로, 즉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경의 주제이고 말이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런데 우리 인간은 성경말씀을 보면서 뭐라고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할까요? 나는 무엇을 할까요?” 라고 하면서, 꼭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자기 욕망이 원하는 대로 술어 부분에 집어넣어서, 자기 욕망에 자기가 놀아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바보등신 같은 짓을 하고 있는데, 즉 자기가 자기 욕망의 화신이 되는 동시에 노예가 된다는 말이다.

◈ 박영선 목사가 본 출애굽기 3장의 ‘떨기나무’ !!

출애굽기를 설교하면서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서울남포교회의 박영선 목사가 출애굽기 3장의 ‘떨기나무’에 관해서 설교를 했는데, 그게 ‘하나님의 열심’ 이란 책에 있었지 싶은데 말이다. 물론 그 양반이 주어와 술어를 가지고 설교한 것은 아니고, 제가 거기서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었는데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제가 하나 물어보겠는데, 이게 원래 불이 붙기 전에 무슨 나무인가? 그냥 평범한 한 그루의 나무에 불과한데, 그런데 불이 붙으면 어떻게 되는가? 불이 붙은 떨기나무가 되는데,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이런 이런 하나님이다” 라고 하면서 나타날 때, 그렇게 불이 붙은 떨기나무를 가지고 설명을 하셨느냐는 것이다.

(출 3: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출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 3: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출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박영선 목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는데, 보통 나무들은 불이 붙으면 그 시간만큼 안에서 타들어가는데, 그러니 그만큼은 숯이 되어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즉 불이 맹렬하게 타면 탈수록 그 재료가 되는 나무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 2절인가에 보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다”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즉 불길이 분명히 타고 있는데, 그런데 왜 연료가 소모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성경은 그것으로 끝났는데, 그런데 그것을 박영선 목사는 무엇으로 보았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자기 것을 소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그냥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으로, 즉 하나님 자체의 발광에 의해서 자기는 전혀 소모되는 것이 없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즉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만 일을 하신다고, 그렇게 그 성경말씀을 해석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발하고 제대로 한 성경해석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지 않은가요? 그야말로 스마트하고 똑똑한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주어+술어’ 라는 부분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 모세인가? 하나님인가?

박영선 목사는 그것을 모세와 관련을 시키는데, 모세는 “나는 못합니다” 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모세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즉 “모세는 앞으로 이러 이러하게 일한다”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아니라,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은 “모세 너는 앞으로 이렇게 일한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나는 앞으로 이 땅에서 이러 이렇게 일한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들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이 소모가 되어야만 불이 붙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주어와 술어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즉 그렇게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언약을 스스로 이루어나가시는 업무를 발산시키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임을 이 떨기나무 사건이 보여준다는 것이다.

◈ 모세 - 아하, 하나님은 이런 분이구나 !!

다시 말해서, “모세 니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인 내가 스스로 알아서 주어가 되고 술어가 되어서, 그렇게 하나가 되어서 내가 한다” 라고, 그렇게 해석을 해야만 옳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되어야 여호와 하나님과 장차 오신 예수님과 일치되는 맥락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세는 그냥 “아하, 하나님은 이런 분이구나!” 라고 하면서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런 하나님이 모세를 덮치게 되면, 모세는 자기 자신을 소모하면서 이루어지는 인간적인 일과, 떨기나무에 나타난 소모되지 않으면서 일을 하는 그런 하나님의 일을 서로 대비하면서, “나는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다” 라고 백성들에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또한 그 당시 바로 왕에게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누가 너를 보냈어?

모세가 바로 왕을 만났을 때 바로 왕이 뭐라고 하는가? “너는 누구야? 누가 너를 보냈어?” 라고 하는데, 참으로 요즘은 듣기 힘든 발언인데 말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요즘은 어떤 목사가 복음을 전하면 상대방이 뭐라고 하는가? “어떤 신학교 출신이야?” 라고 하는데, 즉 라이센스를 따지는데, 프랜차이즈를 묻고 말이다. 즉 “이 햄버그는 맥도널드야? 롯데리아야?” 라는 식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애굽의 바로 왕은 뭐라고 하는가? “어느 신이 너를 보냈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바로 왕처럼 한다면, 요즘은 어떻게 물어야 한다는 말인가? “주님께서 당신은 보내셨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질문을 교인들이 목사에게 하는가? 청빙을 하던, 초빙을 하던 간에 말이다. “당신은 누구의 소개로 왔습니까?” 라고 하지, “당신을 주님이 보내셨나요?”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교인들이나 목사는 이제는 서로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자고, 즉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서로가 믿음이 없음을 자인하고, 이제는 그런 것을 서로 묻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모두 동의를 하고, 약속을 한 상태라는 것이다.

◈ 잠시 ‘계몽주의’에 대해서 !!

그것을 두고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이런 것을 상식이니 알아두면 좋은데 말이다. 바로 ‘계몽주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계몽주의를 조금만 설명하고 지나가겠는데, 이 계몽주의는 19세기에 유럽에서 등장한 철학인데, 그 동안 중세철학에서 신이 지배하던 자리가 있었는데, 그 신의 자리를 그만 들어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그 자리에 인간이성을 집어넣었는데, 즉 깨우침, 인간의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이성을 집어넣어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그런 소리는 모두 집어치우고,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도 이제는 믿을 사람도 없지만 것이다. 그러면서도 종교는 필요한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겸손하게 살아야 하니 말이다. 도를 닦는, 즉 자기를 비우고 마음을 낮추는 설교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로 양보하고 희생이 넘치는 이상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산상설교도 어떠한가? 천국복음도 인간들의 힘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만 유럽에서 대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제가 이번에 어떻게 독일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것은 독일교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사실상 안 가봐도 뻔하지만 말이다. 계몽주의는 이렇게 기존 신의 자리를 모두 다 끄집어내는 것인데, 즉 계몽주의의 출발이 바로, 그 신의 자리에 똑똑한 인간의 이성을 집어넣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신의 자리에 말이다.

그렇게 이성을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신이 있는 것은 좋은데, 그 신의 대행자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루이 14세, 15세, 16세 때인데 말이다. 프랑스에는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짐이 곧 국가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왕이 곧 국가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왕이 곧 신이라는 말과도 같다는 것이다. 물론 보이지 않는 신은 하늘에 따로 있지만, 하지만 보이는 신은 바로 짐, 즉 왕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짐이 곧 국가이고, 법이고, 신이다” 라고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 몽테스키외와 루소 !!

그러니 계몽주의 사상가인 ‘몽테스키외’ 라는 양반이 최초로 무엇을 주장했는고 하니, 그 당시 왕이 몽땅 지배하고 있던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분리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마치 요즘처럼 국회, 법원, 대통령을 분리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권력을 쪼개서, 어느 인간이라도 자기가 돗대가 되어서 혼자서 권력을 다 쥐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것이 곧 계몽주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삼권분립을 주장했는데, 거기에다가 ‘루소’ 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니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데, 그런데 이렇게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동안 왕이 빼앗아 갔다는 것이다. 자기가 신의 아들이라고 군림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런 신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다시 빼앗아서 나누어 가지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누어 가지는데 왕이, 즉 대통령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단 계약을 하자는 말이다. 그게 무슨 계약인고 하니, 국민을 평등하게 법으로만 통치하는, 즉 나쁜 놈에게는 벌을 주고 착한 놈에게는 상을 주는, 그런 식으로만 계약을 하자는 것이다.

만약에 그 계약에 왕이라도 위배하게 되면 처단을 하는, 그런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고 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국가가 해야될 의무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태어날 때 누구나 다 평등하게 태어났기에, 그렇게 살아가도록 봉사하는 기능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루소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1789년에 드디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서 나라가 뒤집어지는데, 그때 루이 16세가 왕이었는데, 그만 목이 날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때부터는 유럽에서 왕의 목을 날리는 것이 유행이 되다시피 했다는 말이다.

물론 루소가 이런 ‘사회계약론’을 주장했을 때, 처음에 그는 지명 수배자가 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왕이나 귀족의 입장에서 볼 때는, 루소의 주장에 의하면 그야말로 자기들의 목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말이다. 후에 실제로도 그런 일어났지만 말이다.

◈ 여기에서 ‘민주주의’가 !!

이것이 바로 전 세계에서 최초로 일어난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하니 역사가 오래된 줄로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민주주의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주위에 그만한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마치 화초에는 그것을 감싸주는 화분이 있듯이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것이 등장하게 되면 정말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분위기는 먼저 “왕이 최고다” 라는 것이 자리잡아야 하고, 그 다음은 거기에 대한 계몽의식이 싹터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뒤집어져야만 민주주의가 되는데,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기에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절차가 없었는데, 그러니 껍데기는 민주주의인데, 그 속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고 하니, “아무튼 전두환도 같은 자가 나타나서 백성들을 조져야 나라꼴이 돼!” 라고 하는, 그런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뭐라고 하는가? “아, 박정희가 그립구나. 그리고 국모는 누가 뭐라고 해도 육영수 여사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산책을 하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하지만 지금 실제로 육영수 여사가 등장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청문회에 세워서 가지고는, 육영재단의 비리를 비롯해서 그야말로 완전히 발가벗긴다는 말이다.

◈ 계몽주의 - 나도 왕을 하고 싶어 !!

아무튼 계몽주의라고 하는 것은, 신의 뜻을 묻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무엇을 놓는고 하니, 아까 말한 ‘주어+술어’에 있어서, 평소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즉 “에이씨, 나는 왕을 하고 귀족을 하면 안 되나? 왜 니만 귀족이고?” 라는 욕망이 술어 자리에 들어가는 국가체제가 바로 ‘민주주의’ 라는 것이다. 즉 “나는 하나님을 하면 안 되나? 한번 해보자” 라고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라는 것이 민주주의인데, 그런데 목사들은 민주주의가 이런 것인 줄도 모르고 뭐라고 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웃기는 짬뽕이고 짜장면이라는 말이다(ㅋㅋ).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고 ‘왕 제도’ 인데, 그것도 보이지 않는 여호와를 왕으로 한다는 말이다. 신약시대는 예수님을 왕으로, 주로 섬기게 되는데, 그래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초대교회인데, 여기에 무슨 민주주의가 있느냐는 말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반드시 계몽주의가 앞서서 자각을 하게 되는데, 즉 “내가 신인데, 누가 또 신이라고 한다는 말인가? 신이 있다면 나를 신으로 만들어주면 된다는 말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자각성, 그것이 민주주의를 형성한다는 말이다. 다수결로 하고, 또한 투표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왕인 것을 뒤집어엎는 것이 민주주의인데, 그러니 이제는 교회도 주님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인간들의 복지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계몽주의 이후의 유럽의 교회였다는 말이다. 이런 것을 보면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데 말이다.

◈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것이 교회라고 하는데, 그러니 민주주의가 아니라, “너거들, 내 피를 마셨나? 나의 찢긴 살을 먹었나?” 라는 것을 묻는 것이 곧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그 흘리신 피를, 즉 십자가를 쳐다보는 것이 교회라는 말이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들은 그만 쫓아내어 버리고, 우리끼리만 하자고 하는, 돈도 우리가 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종의 친목단체인데, 그래서 예배는 폼으로 얼른 해치우고 나서, 밥이나 먹고 축구나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즘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교회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엉터리 교회를 보고 입을 다물자니 속이 그만 터질 것 같고,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입을 열자니 부정적으로 본다고 시비를 걸고 마구 욕을 해대니, 자주 할 수도 없고 말이다(ㅋㅋ).

아무튼 민주주의는 권력을 분산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삼권분립을 해도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계몽주의를 조금만 더 해보자면, 이 계몽주의는 인간 개인의 행복인데, 즉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오직 자기의 행복뿐인데, 그래서 국가도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개인이 국가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 하지만 ‘영웅’의 등장으로 !!

그런데 유럽의 이런 사고방식이 나중에 어디서 깨어지는고 하니, 영웅의 등장으로 박살이 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런 영웅의 등장을 찬양하는 작곡가도 생기고 말이다. 그 이전에는 찬양을 해도 누구를 찬양했는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찬양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헨델의 ‘메시야’ 인데, 예수님의 오심을 찬양하는 말이다. 물론 바하도 그렇고 말이다.

그런데 그 뒤에 나타나는 베토벤이나 바그너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웅을 찬양했는데, 즉 나폴레옹을 말이다. 그것이 곧 영웅 교향곡이라는 것이다. 히틀러는 이 바그너에게 반해서 난리를 피우고 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 바그너의 음악을 가지고 자기를 영웅시한 것이 곧 ‘지옥의 묵시록’ 이라는 영화인데, 월남전 출신의 퇴역대령이 캄보디아에 가서 왕 짓거리를 하는 말이다.

이 영웅이라는 것은 바벨탑인데, 그러니 그들은 민주주의로 갔지만, 하지만 껍데기만 그렇고 알맹이는 다시 창세기 10장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니므롯, 즉 영웅을 절대시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폴레옹 3세 정도가 되면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나는데, 물론 나라가 좋을 때는 “우싸, 우싸” 라고 좋아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니면 “에라이, 니도 그만 나가라” 라고 하면서 밀어내고, 그리고는 또 다른 영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창 10: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러니 국가라고 하는 것은, 껍데기는 민주주의인데, 사실은 그 속은 무엇인고 하니, “누구 하나 뜨는 놈이 나타나서 우리의 영웅이 되어달라”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영웅이 되면 계속해서 밀어주고 그게 아니면 다시 끌어내린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 ‘주어+술어’에 있어서, 주어인 ‘내’가 하지 못한 것을 영웅이 와서 ‘나’의 자리를 채워주면 존경할 것이고, 채워주지 못하면 다시 또 다른 영웅을 찾겠다는 것이다.

◈ ‘쇼핑’하는 세대 !!

이것이 오늘날 이 세상의 모습인데, 그러니 그야말로 개판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개판인 세대를 어떤 사람이 한 마디로 요약을 하던데, ‘쇼핑하는 세대’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냥 쇼핑만 하면 되지, 그것도 주로 홈쇼핑을 말이다. (그래서 홈쇼핑의 주식이 인기가 있는가? ㅋㅋ)

그렇게 TV를 보면서 전화기를 들고 쇼핑을 하면 그야말로 말로 자기가 영웅인데, 즉 양적으로 끌어 모은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가 영웅이 되는데, 달리 영웅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아쉬울 때는 찾지만 말이다.

◈ 그대 이름은 ‘양아치’ !!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서도 요런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니까, 교회에서도 헌금을 많이 하면 그 사람이 영웅이 되는데, 하지만 이런 영웅은 결국 무엇인가? 요즘 제가 자주 언급하는데, 바로 ‘양아치’ 라는 것이다. 조폭도 수준이 낮다고 싫어하는 말이다.

그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가? 포장마차에 가서 자기들에게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행패를 부리고 때려부수는, 그런 놈들이라는 말이다. 양아치가 그렇게 많은데, 그리고 이것을 두 글자로 표현하면 ‘목사’ 라고 한다는 것이다. 교인들에게 돈을 안 낸다고 행패를 부리는 말이다.

◈ 노회에 우글거리는 것은?

전부가 이러한 양아치가 되고 싶어서 신학교에 가는데, 만약에 한국에서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선교를 한답시고 외국에 나가서 그런 짓을 또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양아치를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양아치끼리 모인 단체가 바로 노회이고 말이다.

이렇게 ‘주어+술어’가 역사와 다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술어 부분은 아직도 영웅을 찾는, 우리 가정의 영웅, 우리 교회의 영웅, 우리 나라의 영웅을 말이다. 그런 영웅이 등장하면, 그것을 두고서 그들은 ‘영적 사람’ 이라고 하는데, 그게 교재 113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일단 교재 113페이지를 보자.

** 육의 세계에서 짐작하고 있는 영이란, 육과 물리적인 제한을 훌쩍훌쩍 뛰어넘는 ‘자유로운 유동적 지성’ 인 것처럼 상상하지만, 영의 세계에서 알려주는 진정한 영은 도리어 죄로 인한 저주를 육신의 아픔으로 다 담아내는 처절함으로 나타났다.

◈ 자유로운 유동적 지성 !!

여기서 그들이 ‘영적 사람’ 이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저는 ‘자유로운 유동적 지성’ 이라고 표현했는데, 제가 쓰고 봐도 참 어려운데 말이다. 여기서 ‘지성’ 이라는 것은, 물론 박지성은 아니고(ㅋㅋ), 이성적이고 참으로 똑똑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똑똑한지, 우리 손에 전혀 붙잡히지 않을 정도로 똑똑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김성수 목사와도 같은데, 그분의 설교를 들어보면 얼마나 지성적이지, 비판할 요소를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뛰어나게 공부를 많이 한 양반이라서, 어줍잖게 비판을 하다가는 무식한 놈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다는 것이다.

마치 피터팬처럼 날아다니는데, 온 천지를 말이다. 예수든, 과학이든 그렇게 성경전체를 날아다니는데, 그야말로 자유로운 유동적 지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피가 아니고, 지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회개하는지는 앞으로 두고 볼 문제라는 말이다.

◈ 무엇이 ‘영적 인간’ 인가?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영적, 즉 성령의 역사라고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그것이 아닌데, “나는 태어났고, 그 순간부터 늙어가며, 결국에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라는 것, 그것이 곧 영적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참된 하나님의 지혜인데, 남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을지 몰라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래, 나는 죽어야 한다. 아담의 죄에서 태어났고, 저주를 받아 당연하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자기가 아무리 고생을 해도 뭐라고 하겠는가? “제가 고생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라고 하면서 주님께 박수를 치면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영적 인간인데,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십자가 앞에서 살 때, 그 지혜가 눈에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육신을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못박는 작업을 누가 하는가? 마치 쟁기를 가지고 땅을 파듯이, 그렇게 주님께서는 작업을 하셔서 날마다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분이 진짜 영웅인데, 그러면 그분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있었는지 한번 살펴보자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육의 세계에서 짐작하고 있는 영이란, 육과 물리적인 제한을 훌쩍훌쩍 뛰어넘는 ‘자유로운 유동적 지성’ 인 것처럼 상상하지만, 영의 세계에서 알려주는 진정한 영은 도리어 죄로 인한 저주를 육신의 아픔으로 다 담아내는 처절함으로 나타났다. 그분이 하나님의 형상의 구체화이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진짜 영웅의 모습은?

여기 나오는 히브리서 5장 7절과 8절의 말씀이 바로 진짜 영웅의 모습인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육신을 입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물론 예수님은 자기가 약속대로 고난을 받고 사흘만에 부활될 것을 다 알고 계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이 땅을 살아가는 그 과정에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즉 육신이 내뿜는 허약성으로 인해서 눈물과 간구와 심한 통곡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허약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쉽게 말해서, “힘이 드는 것은 힘이 드는 것이다” 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그래도 힘이 드는 것은 힘이 든다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그런 힘든 것조차도 다 힘이 들지 않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로또에 당첨이 되면 기분이 엄청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가 아픈 것은 아픈 것이란 말이다. 물론 잠시 심리적으로 통증이 사라질 수는 있지만, 그래도 아픈 것은 아프다는 말이다. 그때는 치과에서 이를 뽑으면 되지,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힘든 것은 힘든 것이고 !!

그러니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받은 것이고, 날씨가 더운 것은 더운 것이란 말이다. 성도라고 해서 땀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닌데,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더워서 왕짜증이 나는데, 거기서 무슨 온유가 나오고 이웃사랑이 나오느냐는 것이다. 말 그대로 불쾌지수가 높은데 말이다.

마누라가 아무리 자기 남편을 사랑해도, 그 남편이 나무에 올라가서 떨어지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 어른이 되어서 말도 듣지 않고 나무에 올라가는지(누구? ㅋㅋ), 그것도 거룩한 안식일에 말이다. 신명기에 보면 안식일에는 나무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모양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그런 아픔을 왜 주시는가? 그것은 바로 주님도 그런 육체를 가지고 있음을, 그래서 여름에는 짜증도 나고 더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거기서 빠져 나왔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믿고 따라라. 내가 곧 길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식’과 ‘생존’과 ‘죽음’이 어우러져 있는 우리 육체의 모습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러한 형상을 두고서 축복을 이야기하는데, 즉 ‘번식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번식의 축복을 말이다. 

그게 교재 113페이지에 나오는데, 일단 찾아보자.

** 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예수님은, 모든 인간은 생식과 죽음의 연속성에서 벗어날 길이 없음을 보여주는 일을 하신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부여받은 형상적 속성, 즉 생식능력, 다른 말로 해서 ‘번식의 축복’을 받았고, 그것이 인간으로 단일 성격을 유지하게 했다.

◈ 번식의 축복 !!

‘하나님, 하나님’ 이라고 하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약에 보면 실제로 번식의 축복을 주시는데, 즉 야곱에게 축복을 주었을 때, 그 번식도 번식이지만 야곱이 했던 산업이 무엇인고 하니, 그가 목축업을 했는데, 즉 양을 키웠다는 것이다.

야곱에 나무껍질을 가지고 어떻게 하니 유전자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갑자가 양 떼가 어떻게 되었는가? 얼룩덜룩한 자기 양 떼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식의 번창, 즉 번식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런데 이 생식의 번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해 생식은 곧장 죽음으로 가게 되는 것이 원리인데, 그런데 복을 받으니 죽음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 죽음보다도 오히려 번식하고 번창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약에 있어서, 생명나무에서 주어지는 생명을 이야기할 때는, 이러한 번식을 통해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양이 번식하고, 떡반죽이 늘어나고, 또한 남의 머리가 되지 꼬리가 되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죽음과 대비가 되는 생명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육신과, 그것을 둘러싼 생존환경을 가지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박국에 보면 뭐라고 하고 하는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밭에 식물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 그런데 신약에 들어오면 !!

그러니 이 하박국에 들어오면, 그동안 구약성경에서 설명하던 그 환경들을 시효가 모두 지나버리고, 즉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소 등등이 말이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들어오면, 먹고 마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늘에게 그냥 생명수가 줄줄 쏟아지게 주께서 해주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마치 마린보이 박태환처럼 마구 헤엄치고 돌아다니도록(ㅋㅋ), 그렇게 새하늘과 새땅을 두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성도는 구약의 성도보다도 더 많이 아는데, 즉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우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땅에서 죽었고, 생명은 하늘에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신약에서 “살았다, 죽었다” 라는 것이 구약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잠언의 경우에 “우측에는 장수이고, 좌측에는 부귀이다” 라고 표현하지만, 그런데 신약에서는 무엇인가? “이제 죽어도 괜찮다. 원래 우리는 죽게 되었는데, 이제는 새생명이 주어진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감춰져있는데, 하나님의 금고에 말이다” 라고, 그렇게 신약에선 설명한다는 것이다.

◈ 성경해석은, 예수님의 위치에 따라서 !!

왜 그런고 하니까, 모든 성경말씀의 해석은, 해석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위치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거기에 따라서 해석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의 위치가 하늘에 있으면, 그 하늘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해주어야 ‘빙고!’ 라는 것이다. 그러니 언약의 중심이 지상에 있었던 구약 때는, 구약언약의 가족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리고 그 자손인 이스라엘의 삶을 통해서 해석을 해주어야 성경해석이 맞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방인들은 저주를 받았고” 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이방인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듣는 이방인들은 기분이 나쁜데, 그래서 유대인들은 보고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함부로 우리를 욕하면 되겠나? 우리 이방인들은 인간이 아니가? 왜 너희들 중심으로만 해석해” 라고 하는데, 그러면 유대인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 중심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신약은 어떠한가? “왜 자꾸만 위에서 보는가?” 라고 했을 때, 지금은 언약의 중심이 되는 예수님이 위에 가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위에서 해석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리고 메시야도 그리스도께서 생각하는 메시야를 이야기해야지, 이 땅에 있는 죄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항상 죄인의 구원을 긍정하는 메시야로, 그런 왜곡된 메시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죄인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엉터리이고, 오직 그리스도가 생각하는 메시야만이 진짜 메시야라는 것이다. 물론 성령을 받아야 가능하고 말이다.

이제 교재 114페이지를 보자.

** 따라서 아담처럼 자신이 번식하신(창조) 자는, 자신의 운명 안으로 하나가 되어 집결시킬 수 있는 자격이나 권리를 갖고 계신다.

마치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을 때,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왔을 때, 그것은 바깥에 있는 아담의 저주받은 형상과, 나중에 부활에 되어서 하늘의 형성을 입는 그 형상과 대비가 되면서, 예수님 자신이 새롭게 구원할, 즉 창세 전에 예비된 자들을 자기 형상으로 끌어당기는 그 능력을 예수님 쪽에서 제시하게 된다는 말이다.

◈ 잠시 ‘씨 뿌리는 비유’를 !!

다음 주의 설교내용인데, 미리 앞당겨서 조금만 해보면,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 있어서, 흔히 이것을 어떻게 설교하는가? 씨가 밭에 떨어져서 어쩌고 그렇게 하는데, 하지만 그러한 종류의 밭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씨가 떨어지게 되면, 그 씨가 어떤 밭은 적합하지 않고, 또한 어떤 밭은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4종류의 밭을 씨가 새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인간들이 씨를 뿌리고 갈고 하는 그 밭은 밭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그러니 ‘씨 뿌리는 비유’를 설교함에 있어서, 거기서 씨와 밭이라는 것도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개념을 결정해서 해석을 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우리는 좋은 밭이 되어야지” 라는 것도 틀렸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이 밭이라는 것도 자기들 생각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좋은 밭인지 나쁜 밭인지, 그 결정권은 우리에게는 전혀 없고, 다만 그 씨가 되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시는데, 즉 자기도 좀 안다고 하는 인간들에게 감추시고, 듣지 못하게 하시고, 또한 물리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항상 새로운 형상인, 즉 예수님 중심으로 끌어당기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끌어당기면 우리는 좋다고 천당에 간다고 여기고 가는데, 그러면 어디에 가 있는가? 주님이 가신 그 노선으로 가게 되면, 그 예수님의 노선은 죽음의 길인데,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떠한가?

◈ 그를 위하여 고난도 함께 !!

빌립보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가 무엇이라는 말인가? 구원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고, 그래서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영인 성령을 받게 되면 이제 우리 노선은 그만 날아가 버리고,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을 우리도 따라서 밟아나간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으면, 바로 그런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게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나오는데 말이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 !!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이 무슨 길인가? 십자가의 길인데, 그러니 우리가 십자가의 터널을 통과하게 되면, 그 주위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그야말로 양 사방에 피가 여기 저기 튀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피를 이야기하니 개혁주의학회에서 그렇게 욕을 한다는 것이다. “왜 이근호 목사는 피밖에 모르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얼마 전에 ‘순종’ 이라는 양반의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얼마나 여기에 욕을 해놓았는지, 즉 “순종하면 되는데 왜 피를 이야기하는가?” 라고 말이다. 그 사람은 터널이 없는데,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 돗대라는 것이다. 십자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잠시 스치고 밖으로 그만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훤한지 모르는데, 과연 그것이 천국인가?

그 양반뿐만 아니라, 수많은 목사들이 왜 피만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김성수 목사의 경우에도, 이런 피가 퍼부어져야 하는데, 그래서 오직 피만 이야기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깥에 있는 개혁주의 신학이 있어도 여기 피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성령께서 넣어주셔야만 하는데, 그렇게 들어와 보면 피만 가득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신 길이 바로 그 길이기 때문에 말이다.

조금 지저분한 내용이지만, 우리 인간이 음식을 먹게 되면 그 음식이 위를 통과해서 소장과 대장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러면 소화액이 나와서 계속해서 주물러주는데, 즉 피가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의 내장 속을 통과하는 음식물과도 같은데, 물론 나중에는 똥으로 나오던지 알아서 되겠지만 말이다(ㅋㅋ).

◈ 그 피만 있으면 모자람이 없어 !!

그런데 그게 아니라, 창자 바깥에서 신을 찾으면서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게 곧 자기 낮춤이고, 자기 비움이고, 그렇게 도를 닦고 수양한다고 정말이지 바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피만 있으면 수양이고 뭐고 다 필요가 없는데, 그냥 피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면, 피를 증거함에 있어서는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다.

왜 비행기를 타면 기내식은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요금에 다 포함이 되어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이 이 ‘피’ 라는 것도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그렇게 두 분만이 아시는 이미 완성된 내용이기 때문에, 즉 우리의 모든 요금은 그 피 속에 다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거기서 폼을 잡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

그것을 여기 교재에서는 “자신의 운명 안으로 하나가 되어” 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즉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잡아당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혼자 힘으로 죽게 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베드로가 그렇게 하려다가 예수님에게 쿠사리를 들었는데, 즉 "죽어서라도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하다가 말이다.

우리 인간은 자살을 하든 무엇을 하든 자기가 알아서 죽으면 안 되는데, 주께서 죽여주셔야 비로소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 죽이시는가? 돌에 맞아 죽이는가? 차에 깔려 죽이는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이 그냥 살면 되는데, 그것도 이미 죽음이란 말이다.

그러니 집에 와서 빵을 먹는 것도, 또 게임을 하는 것도, 그런 것도 모두가 다 죽음이란 말이다. 그런 죽음의 방법을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냥 숨을 쉬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물론 나무에 올라가다가 떨어져서 죽을 수도 있고 말이다(ㅋㅋ).

그러니 우리는 죽는 방법을 고를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냥 살면 된다는 것이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또한 강의를 하고, 강의를 듣고, 녹취나 하고, 그렇게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서 살다가 죽으면, 그것이 곧 순교라는 것이다. 물론 남편의 똥오줌을 받아내면서 사는 것도 순교이고 말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예수님을 우리가 결코 붙잡을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주인이 아니니 말이다. 예수님이 주인에 해당되는 주어이고, 우리는 술어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께서 우리를 붙잡는데, 그 붙잡은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자기가 태어난 것부터 해서 죽을 때까지도,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깨닫게 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은, 이미 우리의 자리는 이 비행기 안에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피 안에 있음을 보이게 하는 것을 믿어지게 한다는 말이다. 성령께서 말이다. 그러니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는데, 여기에서 욕심을 내어서 화끈한 것, 눈에 보이는 기적과 같은 것을 찾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조용하게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면서, 그렇게 조용하게 살다가 죽어도, 그것이 십자가 안에서 죽는 것임이 믿어진다면, 그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는 말이다. 괜히 “예수님이 보고 싶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하면서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새벽부터 설치지 말라는 것이다.

◈ 다시 봐도 양아치 !!

주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도대체 우리가 그것을 알아서 무엇을 하겠는가? 왜 그것을 알면, 거기에다 새끼줄을 쳐서 돈을 받아먹는, 그런 양아치 짓을 하려고 알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우리교회는 주님을 만난 교회입니다” 라고 선전해서, 돈이나 긁어모으려고 말이다.

그러니 부흥사가 간증할 내용은 하나밖에 없는데, “여러분, 우리가 태어난 것도 주님의 뜻이고, 또한 죽는 것도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조용히 살다가 죽읍시다” 라고 말이다. 그것이 진짜 증거해야 될 내용인데, 성령을 받는 부흥사라고 하면 말이다. 물론 성령을 받으면, 자기가 부흥사라고 설칠 리가 만무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6.25 때 폭탄이 터지고, 암에 걸렸다가 낫고, 왜 그런 짓거리는 하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어떤 특정한 공식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호도하는데, 그러니 제가 그런 놈들을 보고 양아치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러한 능력들, 곧 형상이 지닌 축복된 속성 발휘로 인하여 자기가 만들어낸 새 피조물들은 모두 예수님과 같이 영적 사람이 된다. 그 안에서는 홀로 죽음을 이겨내신 부활의 능력을 영원토록 받아 누리게 된다.

◈ 오직 예수님 ‘홀로’ !!

여기에 보면 “홀로 죽음을 이겨내신 부활의 능력을” 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활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다고 했는가? ‘홀로’ 라는 것이다. 부활은 죽음을 이기는가? 그것이 아니라, 홀로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부활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다시 산 것은 부활이 아닌데, 왜 그런가? 무엇이 빠졌다는 말인가? ‘예수님 홀로’ 라는 것이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사로가 나흘만에 살아나도, 그것은 부활이 아닌 소생이라는 것이다. 물론 부활의 앞당겨진 결과로 볼 수 있는데, 하지만 진짜 부활은 반드시 ‘나’의 부활이 들어가면 안 되는데, 물론 ‘너’의 부활도 안 되고 말이다. 오직 ‘홀로’ 부활되신 분이란 말이다.

그러면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부활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말이다. 우리는 죽어야 하는데, 즉 ‘나’ 라는 주어노릇을 하던 것은 죽고, 그러면 어디에 가서 배치가 되는고 하니까, 술어 부분에 배치가 되어있고, 다만 주어가 되는 분이 홀로 부활될 때, 바로 그분의 지체라는 이유로, 즉 술어부분이 주어에 끌려서 부활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8장 10절과 11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즉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영이지, 우리의 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그의 영이 거하면, 그의 영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독일교회의 경우에 !!

이런 것이 계몽주의 영향 아래에 있던 독일교회에서 나오겠는가?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독일에 있는 제 딸의 말에 의하면, 독일교회는 요즘 노인네들만 열 서너 명만이 모인다고 하는데, 그렇게 큰 교회당에 말이다. 그러니 자기들이 봐도 참 처량하고 부끄러운데, 그러니 결국은 교회당을 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금요일 오후부터 노는 날인데, 그러면 어디에 가는가? 유럽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햇볕이 아쉬워서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그래서 프랑스 해변이나 아니면 멀리 태국 등지로 휴기를 간다는 것이다. 놀려주면 교회에 나올 줄 알았지만,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아예 2박 3일 코스로 여행을 가버린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한국 교회사를 보면 가장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나올 때가 언제인고 하니, 일요일도 놀려주지를 않고 마구 돌릴 때인데, 그때는 그들이 야무지게도 교회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요일을 이제 놀게 해주니 그때부터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참으로 희한하지 않는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 교회에 오는 것이 구원이 아님을 깨닫도록 해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는 그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환경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즉 인간의 권력과는 상관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은 그렇게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것에 전혀 상관이 없이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이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형상이 곧 예수님이다. 따라서 성도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어있다(롬8:29).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여기 13절을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권세가 흑암의 권세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해석할 때, 땅에서는 그것을 극복할 권세를 파악할 수 없는데, 그러면 어디로 올라가면 되는가? 하늘에 계신 주님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이 흑암의 권세에 놓여있음이 보인다는 것이다.

◈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복음을 멸시하고 조롱했던 먹구름이 지상에 깔려있다는 말이다. 장맛비나 폭우를 쏟아내는 그런 먹구름이 말이다. 그렇다면 위로 얼마나 올라가야 하겠는가? 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로만 가면 그 위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여기 14절에 보면, “그 아들 안에서”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아들 안에 있음을 어떻게 판정할 수가 있는가? 아까 말한 것처럼,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그 가운데서 새로운 형상이 되신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심으로서, 그렇게 해서 주님 쪽으로 왔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 바로 그렇게 성령 안에 있는 것이 아들 안에 있는 것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확인하려고 한다면, 즉 “내가 어떤 기적을 받아야 아들의 나라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한다면, 그렇게 자기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서 찾으려고 한다면 시험에 들고 만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즉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된다. ‘형상’이란 ‘대상’이 아니다.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의 범주를 도리어 임의로 조절하는 ‘숨어있는 대상’이다.

◈ 형상이란, 대상이 아니다 !!

여기에 “형상이란 대상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됩니까? 그러면 이것을 또한 언급하고 지나가야 하는데 말이다. 이것이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쉬운 말로 설명을 해야하는데, 일단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두부가 한 모가 놓여있다고 하면, 그 속에 콩가루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콩가루는 두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겠는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안에 들어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두부의 어느 한 쪽 면에 붙어있는 콩가루의 경우에, 그 콩가루는 과연 두부의 생김새를 알겠는가? 역시 모른다는 것이다. 그냥 그 한 쪽 면에 붙어서만 그 두부를 생각할 뿐이라는 말이다. “아하, 두부는 사각형이구나”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그 두부의 모양을 알겠는가? 두부와 떨어져 있을 때, 즉 두부가 하나의 대상이 되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떨어져서 눈으로 바라보는데, 그래서 “아하, 두부는 네모지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떨어져 있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떨어져서 “아하,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구나” 라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따로 떨어져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주님과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본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

그러면 ‘주어+술어’에 있어서, “나는 예수님을 본다”, 혹은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라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전히 누가 살아있는가? 자기 자신이 살아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살아있으면, 그러한 ‘나’ 라고 하는 죄인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는 엉터리인데, 즉 바리새인들이란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예수님은 얼마든지 차단해 버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콩가루 이렇게 있는데 두부가 와서 덮쳐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 두부 안에 흡수통합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부 안에 속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우리는 그만 양 사방이 콩가루로(두부로?) 뒤집어 씌게 되는데, 왜냐하면 여기 안에 쌓여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는 것인데,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용서와 혜택이 날마다 우리를 쏘아댄다는 것이다. 즉 날마다 은혜를 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에게서는 날마다 나오는 죄가 나오는데, 이 두부 안에서 말이다. 주님에게는 십자가의 용서가 나오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세계’ 인데, 그러니 말씀을 대상으로 해서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안에 들어가게 되면, 발걸음 하나, 머리카락 하나, 말씀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날씨가 더워서 에어컨을 켜는 것도 주의 뜻이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든 만물이 주님을 위해서 있다는 것이, 또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이 저절로 고백이 된다는 것이다. 두부 안의 콩가루라면 말이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귀납적 해석과 연역적 해석 !!

하지만 우리는 말씀을 하나의 대상으로 여겨서 관찰을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이러한 관찰은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 베이컨에 의하면 무엇인고 하니, 일종의 과학의 귀납적 해석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귀납’ 이라는 것은 증거를 주워 모아서 어떤 일치점을 찾는다는 말이다.

그 반대가 ‘연역적 해석법’ 인데, 그것은 합리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것으로, 영국이 반대편인 프랑스나 독일의 대륙 쪽에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데카르트이고, 그의 합리론인데 말이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일단 먼저 생각하고 그 증거는 차후에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학을 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미 이론을 정해놓고서 증거를 찾는 연역적 방법이 있고, 그것이 곧 주류인데 말이다. 그 다음에는 귀납법적 방법으로서, 즉 “이러 이렇게 증거가 있으니 그렇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귀납적인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연역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즉 수학적으로도 “아마 있을걸? 있을걸? 아하, 있구나. 맞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미리 가설을 세워놓고, 그 가설에 맞추어서 증거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우리 생활에서도 쉽게 일어나는데, 예를 들어서, 아이가 집에 늦도록 오지 않으면, “이 놈이 오늘 피시방에 갔을까? 아니지. 지난번에 그렇게 해서 야단을 엄청 맞아서 안 간다고 했는데, 그러면 이번에는 친구 집에 갔을 거야” 라고, 그렇게 가보지 않아도 미리 생각해보는 것, 그것이 바로 연역법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언제나 ‘주어+술어’ 인데, 이 공식이 오늘 여러 차례 나오는데 말이다. 즉 자기가 먼저 짐작을 하고(주어 부분), 그 다음에는 증거를 찾는다는 것이다(술어 부분). 바로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오해인데, 가족이나 친척끼리의 오해도 그렇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오해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 여보, 오해야 !!

TV 드라마를 보면, 거기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오해가 무엇인고 하니, 대부분이 이 연역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즉 “당신, 오늘 누구를 만났지?” 라고 말이다. 잠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진주 극본, 이근호 권현숙 주연’ 인데 말이다(ㅋㅋ).

* 마누라 : 당신, 오늘 누구를 만났지?
* 신  랑 : 만나기는 누구를 만났다고 그래. 잔업이 있었어.
* 마누라 : 전화를 해도 안 받던데?
* 신  랑 : 밧데리가 떨어졌잖아.
* 마누라 : 웃기고 있네.
* 신  랑 : 당신은 왜 그렇게 오해를 하지?
* 마누라 : 안 하게 되었나? 지난번에도 그랬잖아.
* 신  랑 : ? ? ?

이것이 바로 연역법인데, 지금 제가 인간이 생각하는 사고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연역이고, 귀납이고, 나발이고 없다는 것이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성경말씀이 믿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콩가루를 두부가 덮쳤기 때문에, 그렇게 두부에 쌓여 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피로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믿어진다는 것이다. 자기 도대체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목사든 장로든 별 의미가 없는데, 그냥 좋아서 죽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들고 온 물동이는 내버려두고 “나는 심봤다!” 라고 소리를 치면서 돌아다닌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그 십자가 피가 자기를 구원했음을 말이다.

그런데 그 앞에서 개혁주의 신학이 무슨 의미가 있고, 계룡산이 왜 나오고, 또 역사적 문법적 해석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역사적 해석법을 믿는다” 라는 소리가 왜 튀어나오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목사이고 신학교 교수라고 한다면, “나는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 라고 해야지 말이다. 정말이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따라서 사람들이 ‘형상’을 ‘대상’으로 간주해서 이해하면, 필히 우상(偶像)으로 이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은 이미지로부터 시작해서 이미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신이 곧 우상 !!

성경에 나오는 우상이 내막이 이와 같은데, 즉 형상을 대상으로 간주한다면 모조리 다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어인 ‘나’ 라는 것이 바로 연역적으로, 귀납적으로 판단하는 자기가 상상하는 상상의 구상체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그리워서 상상한 것이 하나의 대상이 되니, 그것이 모두 다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상 중의 최고의 우상이 무엇인가? 그것을 한 글자로 ‘신(神)’ 라고 말할 수 있는데, 즉 신이 곧 우상이란 말이다.

어제 낮 시간에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는데, 욥의 친구들은 우상적인 신을 이야기하는데, 하지만 여기에 반해서 욥은 뭐라고 하는가? “이 친구들아 참으로 답답하구나. 지금 하나님이 나를 아프게 하는데 보이지 않나?” 라고, 즉 “너희들의 눈에는 직접 하나님이 나를 치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라고 반박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현대인의 언어로 표현하면, “자꾸만 삼위일체가 어떻고 하지 말고,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봐라. 거기에 하나님이 있지 다른 곳에는 없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어떻고 하다는 것은 바리새인들도 당연히 다 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그것이 일종의 관찰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 연역법과 귀납법 !!

그러한 관찰함에 있어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연역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귀납법이라는 말이다. 관찰을 하는데 당연히 주인공은 ‘나’가 되고, 그 관찰을 한 해석은 술어가 되는데, 그 전체를 합쳐서 두 글자로 ‘우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우상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신이고, 그 신은 누가 관찰했는가? 바로 자기가 관찰했기에, 그러면 “내가 곧 신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하’ 라는 철학자는 “신은 인간의 자기 투시이다” 라고, 즉 “인간들이 자기 상상력이 우회한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회, 즉 돌아서 가는 것인데, 그렇게 돌고 돈 것이 신이란 것은 무슨 뜻인가? ‘나’ 라는 것을 장소를 이동시켜서, 결국에는 하늘나라에 걸쳐놓은 것인데, 그러니 자기가 그렇게 머릿속에서 걸쳐놓은 것이 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누구에게 이야기하는가? 신을 보고 이야기하는데, 하지만 결국은 자기가 자기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새벽마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양반이 얼마나 똑똑한가? 자기가 자기에게 이야기하는데, 한 맺힌 자기 자신에게 말이다.

◈ ‘이미’와 ‘아직’ !!

거기에다가 시간의 요소를 집어넣게 되면 개혁주의 신학이 되고 마는데, 즉 자기가 자기에게 이야기하면서 “어제는 그렇지 않았는데, 오늘은 왜 그러십니까?” 라고 시간요소를 집어넣으면, 그것이 바로 ‘이미, 아직’ 이라고 하는, 즉 ‘아직’이 ‘이미’가 되는데, 그렇다면 ‘아직’은 또 다시 남아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에 도달하면 ‘이미’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이제 조금만 하고 마치겠는데, 저는 조금 더 하고 싶은데 여러분이 너무 힘들어해서 말이다. 즉 “이미 알았는데 아직 남아있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문제는 이런 ‘아직’에 도착하게 되면, 그 ‘아직’은 그만 ‘이미’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익히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이미’에 도착하는 순간에 또 다시 ‘아직’이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왜 ‘아직’ 이라는 것이 튀어나오느냐는 것인데, ‘이미’가 오면 ‘아직’이 나오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왜 튀어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이 ‘이미’ 라는 것이 우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십자가는 어떠한가?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는 어느 장소에서 가든지 떠있는데, 즉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가려고 하니까 어떻게 되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십자가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 다음에 무엇인가가 또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 목사님, 설교가 할 것이 없는데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즉 “지금까지 강의한 목사님의 이야기는 다 알겠는데, 그래서 목사님의 말씀대로 십자가와 피만을 전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설교시간이 짧아지고 별로 설교할 내용이 없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라고 말이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본인이 십자가를 지식으로 전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마치 학원강사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십자가가 매일같이 다가와서 본인의 삶 속에서 일어나면, 그 다음에는 누구를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치 김성수 목사처럼 말이다.

◈ 설교는, 목사 자신을 발가벗기는 시간 !!

그러니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매일같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면, 설교시간 50분이 그야말로 모자란다는 것이다. 즉 “저는 이 말씀을 보고 이렇게 느꼈고, 또한 이 말씀을 보고는 이렇게 이렇게 느꼈습니다” 라고 하면, 그렇게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가 들었던 십자가 이야기를 자꾸만 풀어내려고 하니, 시간이 5분이나 10분이 지나면 그만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주석을 끄집어내곤 하는데, 남은 시간을 메우려고 말이다. 그래서 20분을 메우고, 그러고도 남은 10분은 다른 목사들의 설교집에서 그 시간을 보충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요즘은 교인들이 참으로 똑똑해서, “저기까지는 목사님의 삶에서 나온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삶이 아니라 지식으로 가르치려고 하는구나” 라고, 그렇게 모두 안다는 것이다. 목사들보다 교인들이 주석을 더 많이 보는데 말이다.

◈ 목사의 자기 과시는 용납이 안 돼 !!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니, 제가 없을 때 우리교회에서 설교할 목사님들이 엄청 부담이 되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하지만 삶으로 다 표출할 수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냥 주석이나 베끼는 분들은 우리교회의 강단에 세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주석을 베껴 놓고는, 자기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했다고 하면서 자기 과시를 하는 분들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동안 배웠던 그 개혁주의의 주석들은 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되는데, 모두가 다 엉터리라고 여기고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버리면 설교가 짧아지는데, 얼마든지 짧아져도 괜찮다는 것이다.

◈ 왜 자기 설교가 짧다는 의식이 드는가?

하지만 자기 설교가 짧아진다는 것을 의식한다는 것 자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설교가 짧아지면 교인들이 나를 목사로 취급하지 않을 텐데, 그러면 목사로서 더 이상 밥을 먹고 살아가기가 곤란해지는데, 어떻게 하지?” 라고 하는, 그런 걱정이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남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인데,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잘 증거할까?” 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니 설교를 잘 해서 밥이나 먹고 한번 잘살아보자는 것인데, 그만 그런 감추었던 속마음이 모두 들통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무엇인가? “당신이 아무리 복음, 복음이라고 하지만, 당신의 저 밑 구석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이왕 목사가 된 것이니 설교를 잘해서 밥이나 먹고 살아보자는 것인데, 그러면 그 속마음을 왜 숨기는가?” 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이 없을 수는 없는데, 그런데 왜 숨기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설교는 의외로 간단한데, 설교는 바로 그런 자기의 속마음을 하나씩 하나씩 드러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50분은 그냥 ‘휙’ 지나가는데, 문제는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니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설교하기가 참으로 쉽다는 말이다. 영 반응이 없는데, 그렇지 않은가요?

◈ 성도는, 주어가 아닌 술어자리에서 !!

다시 정리하면,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이전에는 예수님이 자기의 대상이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매일같이 예수님이 누구를 관찰하는가? 예수님께서 주어이고, 우리 자신은 이제 술어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어 자리에서 술어 자리를 날마다 관찰하고, 또한 말씀으로서 지적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어가 되신 예수님이 해내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그 가치와 효능과 은혜성을 드러내는, 바로 그러한 구조가 새언약에 있어서 주님의 머리됨과 우리의 지체됨의 구조라는 것이다. 머리와 지체의 의미가 말이다. 이제 이해가 됩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주어가 아니라, 피의 값을 주고 산, 그러한 주님의 것이 되었사오니, 그러니 이제부터는 비록 힘들고 힘든 육신이지만,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10,02 오전 11시에 마침.

                                                     양아치냐, 바바리맨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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