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32강 흙 형상

피/피 2010. 10. 6. 09:24

100927 피32강 흙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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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0927피p115흙형상

피32강 흙 형상 

[10 대구강의 14] - [피 32] - 흙 형상
                                                                                
                                                          10,09,2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형상은, 대상(對象)이 될 수 없어 !!

오늘은 교재 115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물과 불과 바람, 사람, 천사, 그 어떤 형상을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타날 수는 있으나, 물과 불과 바람과 사람과 천사에 관해서 인간들은 기존 이미지가 이미 마련되어 있기에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미지를 덧대기로 새로운 이미지를 낳는다. 이로 인해 그 형상의 숨어있는 의미를 알지 못하고 기껏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우상으로 변질시키는 동기가 된다.

이 세상이 있는 모든 것을 우리 인간들은 다 대상으로 보는데, 여기에서 이 ‘대상(對象)’은 쳐다볼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렇게 모든 것을 대상으로 바라볼 때는 그냥 보는 법은 없고, 자기를 알기 위해서 분석하면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과연 하나님의 형상을 대상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인데,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대상거부라는 말이다. 이런 하나님의 형상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예수님도 하나님의 형상이고, 또한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에 합세함으로서, “너희 인간들의 형상은 형상이 아니야!” 라고 하게 되는데, 즉 우리는 그만 복제본이 되고, 예수님이 원본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말이다.  

요즘 십자가 마을에서 이준 씨와 박윤진 씨의 논쟁이 있는데, 그게 뭔고 하니, 원판과 복제판끼리의 문제인데, 그것을 ‘상동(相同, 같음)’ 이라고 하지 않고, ‘상사(相似, 비슷함)’ 라고 표현하는데 말이다. 즉 원판이 없는 가운데 복제판끼리의 관계 속에서, 과연 그 원판을 도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인간은 흙이 되어서 탈락을 !!

아무튼 하나님의 형상은 대상이 될 수 없는데,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형상은 원래는 예수님이고, 바로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지음을 받았는데, 그런데 인간은 여기서 그만 탈락을 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탈락하는가? 그만 ‘흙’이 되어서, 마치 ‘아담’ 이라는 자기 이름처럼 말이다. 그렇게 흙이 되어서 탈락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탈락한다고 해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탈락을 통해서 “예수님만이 참된 인간이다” 라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진행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

그런데 이렇게 탈락한 인간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서 합세하는 자들이 등장하는데, 즉 “주의 형상을 입으리라!” 라고 말이다. 그게 고린도전서 15장 49절에 있는데, 즉 흙에 속한 형상이 있는 것처럼,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게 곧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이 있는 것처럼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도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고전 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들은 뭐라고 하는가? “에이, 우리와 같은 인간 말고, 또 무슨 별난 인간이 있겠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들이 ‘에이’ 라고 조롱할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은 하늘에 속한 형상을 위하여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야 될 존재이고, 원래 하나님의 형상은 따로 계신다”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대상이 아니다” 라는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대상으로 여겼던 쪽에서 우리 인간들 쪽으로 다가선다는 말이다. 즉 판단주체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우리가 대상으로 여겼던 것으로부터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대상을 바라본다” 라고 하던 것이, 오히려 그 대상이 그만 주체가 되어버리고, 우리는 판단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당신을 판단하겠어!” 라고 외치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내가 너희들을 판단할게!”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하나님이란 분은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상화를 하시면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시고 말씀을 주시는 분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가? 어디까지나 우리 앞에 놓인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가짜이고 결국 허망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허망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이다.

◈ 잠시 ‘르네상스 예술’에 대해서 !!

이번에 제가 유럽을 여행하면서 비잔틴 예술을, 다른 말로 하면 중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그 다음에 르네상스 예술이 나오고 말이다. 로마전체가 그런 비잔틴 예술로 가득한데, 그런데 비잔틴 예술이 무엇인고 하니, 신을 바라보면서, 즉 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여겨서 자체 내에서 신적인 나라를 만든다는 것이다. 즉 신의 나라를 말이다.

바로 그 신의 나라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규격화가 되어야 하고, 정면으로 바라봐야 되고, 즉 모든 구조가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심으로 잡아서 양쪽이 서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질서, 균형, 체제 등등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을 위한 나라이니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 성당이나 모든 예술작품들은,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이성적인 모든 것은 다 끄집어내는데, 결코 혼란이나 무질서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균형과 질서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여기에 천재적 소질을 발휘한 사람들이 미켈란젤로나 다빈치와 같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작품을 보면, 분명히 몸을 비틀었음에도 불구하고 균형이 잡혀있다는 것이다. 물론 완벽하게 좌우대칭을 이루는데, 한 쪽이 기울어지면 균형이 잡히지 않으니 말이다. 그 다음에는 장식을 예쁘게 하는 바로크와 로코코 등이 나온다는 것이다.

◈ ‘진선미(眞善美)’의 완벽함 속에서 !!

아무튼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종교적인 질서와 균형과 대칭에서 그들을 무엇을 찾았는고 하니, 아름다움, 즉 ‘미(美)’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 미에다가 진리와 선함을 보태는데, 그래서 ‘진선미’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진선미가 비잔틴 예술을 발달시켰는데, 이것을 통해서 신에게 영광이 되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이것을 ‘거룩’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종교, 즉 신학이나 신앙심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규격화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수녀들인데, 제가 이 수녀들의 복장을 살펴보았는데, 신부들은 각각 나라마다 다 비슷한데 말이다. 이 수녀들은 각 나라마다 복장이 다들 다른데, 하지만 그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일반 세속인들과는 항상 차별이 난다는 것이다. 즉 성녀(聖女)인데, ‘거룩한 여인’ 이라는 말이다.

구약성경인 예레미야나 이사야, 호세아 등에 보면, ‘카도쉬(?)’ 라고 이방종교를 섬기는 여자들이 나오는데, 왜 여성들의 패션에 보면 여신 스타일이 있는데, 어깨를 약간 보여주면서 밑으로 좍 내려오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들의 모습인데, 그것이 발달하면 그것이 곧 질서미, 균형미, 대칭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선미 속에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없는데, 그렇게 인간을 숨기고,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진선미적인 질서를 밖으로 내뿜게 되면, 비록 인간은 왜소하지만, 이렇게 꾸며진 이 진선미적인 예술을 통해서 누구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말인가?

◈ 르네상스 - 인간이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 !!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신에게, 이러한 고상한 예술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비잔틴 예술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약간의 인간을 가미한 것이 르네상스 예술인데, 그러니 그 르네상스를 ‘문예부흥’ 이라고 하면서, 인간이 막 주체로 등장하려는 시점이란 말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보면 전부가 종교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하지만 그 안에는 어떤 요소들이 있는고 하니, 약간 인간이 나서도 되는, 즉 진선미에 인간을 가미해도 될 정도로 이제는 인간도 점점 더 성숙해졌고 완숙해졌음을 살짝 드러내면서, 드디어 인간도 하나님의 그 질서에, 비록 왜소하지만 등장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드디어 이때부터는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면이 가미가 되기 시작하는데, 기존의 신적인 질서가 아니고 말이다. 바로 이러한 시기를 르네상스 예술의 새로운 변화의 특징이라고,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르네상스라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한 이런 모든 것은 신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에는 누구를 대상으로 보았는가? 인간이 대자연을 통해서, 그런 대자연 가운데서 질서적인 면만 뽑아내어서, 그것을 가지고서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데 충분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곧 이게 바로 자연계시인데, 그런 자연계시를 통해서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것을 두고, 후대에 신앙심이 없는 철학자들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르네상스 시대에 그만 그리스 로마문화로 회귀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역사에 회귀는 없어 !!

하지만 역사에 있어서 되돌아가는 것은 없는데, 사람들이 하는 일은 항상 신기한 것을 찾아서, 또한 호기심을 쫓아서, 새로운 것을 향해서 나아가기 때문에, 되돌아간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구닥다리이고 꼴보기 싫으니 말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한번 경험을 하게 되면 시들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언어의 인기(?)’ 라는 것이 그러한데, 처음에 들을 때는 멋있다가도, 복음도 한번 듣고 나면 “그것은 이미 다 아는 것인데” 라고 하는데,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고민인데, 사람들이 그만 식상해하니 말이다.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 교황제도 - 예술과 권력의 결탁 !!

지금까지는 제가 이러한 질서를 예술적인 측면에서만 이야기를 했는데, 이러한 예술이 실제의 권력과 결탁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노회, 총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노회와 총회의 극단적인 모습이 바로 ‘교황제도’ 라는 것인데, 이러한 진선미적인 질서에서 교황제도는 무슨 힘을 발휘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전통’ 이라는 것이다.

부천개혁교회의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거기에 뭐라고 적어놓았는고 하니, “우리는 개혁주의의 전통을 쫓아서”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 문장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날마다 개혁한다는 의미인데, 그런데 그 뒤에 그 전통을 쫓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냐는 말이다. 

◈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없어 !!

그러니까 이렇게 큰 깰 수 없는 전통은 이미 확보가 되어있는데, 그 안에서 조물락 조물락 거리겠다는 것이다. 깰 수 없는 전통이 무엇인고 하니, 방금 이야기한 ‘질서’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없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것은 전통에 포함이 되는데, 그렇게 은혜를 받게 되면 신은 여전히 하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대상’이 된다는 것은, 여기 이쪽에서 맛있는 음식이나 무엇을 만들어서 가져다주면 신은 엄청 좋아하는데, 그리고 그쪽에서는 절대로 이쪽을 부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부수게 되면 개혁주의에서는 가짜 신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이번에 폼페이 유적지를 가보았는데, 거기에는 무엇을 하던 곳인고 하니까, 선원들이 그곳을 돌면서 제우스와 아폴로 신에게 항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베스비오 산인지 뭔지가 폭발하면서, 원래는 해안바람으로 저 건너편 나폴리만 지역이 불바다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바람이 그만 반대로 불어서 자기들이 사는 지역이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신을 버렸는가? 그게 아니라, 더욱 더 신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다. 

◈ 인간들이 언제부터 신을 믿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인간들이 언제부터 신을 믿지 않게 되었는가? 바로 이 지점인데, 즉 르네상스 시대까지는, 인간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모든 대자연을 극대화를 시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때, 그때 신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그때는 신에 대해서 언급만 해도 모두 다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지나고 16세기에 들어와서 과학이 발달하게 되면 자꾸만 누구의 위치가 점점 더 강해지는가? 인간의 위치가 더 확고해지는데, 뉴턴이란 과학자가 무엇을 발견했는가? 이 세상의 모든 자연질서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즉 만유인력의 법칙을 말이다.

그때부터 꿈틀거리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아하, 이제는 신을 우리가 직접 상대해도 되겠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교회라는 신의 나라가 있어서 거기에서 파견을 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너거는 너거끼리 놀아라. 이제 우리는 우리끼리 놀란다” 라고 해서, 그렇게 과학적으로 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 신은 하나의 대상이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게 무엇인고 하니, 이제는 신이나 교회가 아니라, 이 ‘나’ 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즉 개별자가 되어서, 요즘 이준 씨가 자주 사용하는데 용어인데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개별자로서, 즉 단독적으로 신에게 영광을 돌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전에 이런 비잔틴 예술에서 드디어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무엇을 노리게 되었는가? 지금까지 왜소했던 ‘나’ 라는 인간이 계속해서 왜소할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게 기가 죽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잠시 ‘칸트철학’에 대해서 !!

그러니 ‘나’ 라는 것이 이렇게 중심이 되어서 신을 직접 섬기려고 하면, 옛날에는 바깥에 있는 대자연을 통해서 갔는데, 그 대자연은 이제 우리 인간들이 과학으로 규명을 했으니, 그 대자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가 안다는 것인가? 인간의 두뇌가 안다는 말이다. 그러니 대자연의 해석권한은 누가 가지는가? ‘나’ 라는 인간이 갖는데, 즉 과학과 사회와 국가가 말이다.

그러면 대자연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나가떨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과학을 통해서 다루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나’ 라는 인간이 직접 신을 대상으로 여겨서 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인간에게서 무엇만 끄집어내면 되는가? 신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해서, 신에 속한 것만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칸트철학이란 말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경건주의인데, 즉 “내가 경건해지면 된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의 경건주의는 무엇인가? 의외로 간단한데, “내가 작아지면 된다” 라는 것이다. 중세 당시에는 대자연속에는 국가의 권력과 교회의 권력이 모두 포함이 되는데, 그러니 교회가 있고, 그 주위에 있는 사회조직이나 모든 것이 들이 다 신의 뜻이기 때문에, 그러니 그냥 자기는 왜소해지면 된다는 것이다.

중세시대 당시에는 모든 것이 다 계급제도인데, 칼빈시대도 그렇고 말이다. 즉 왕이 있고, 그 밑에는 영주가 있고, 또한 그 밑에는 농노가 있고 말이다. 그렇게 질서가 잡혀있다는 것이다. 대칭구조인데, 즉 균형이 잡혀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질서가 잡힌 대로 간다는 것이다.

제가 아우스투스부르그(?) 성(城) 이야기를 할 때 개 이야기를 했는데, 개의 경우에 처음에는 일일이 가르치고 시키지만, 나중에는 자기가 다 알아서 대소변을 가린다고 말이다. 그러니 권력이라는 것이, 그 당시에는 합치된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세이후로 지나가게 되면, 이런 질서는 인간들이 만들기 나름이라고 여겨서 왕 제도와 귀족 제도를 부수어 버린다는 것이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말이다. 즉 우리끼리, 우리 내부에서 질서를 만들게 되면 신에게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 칸트의 ‘도덕’ - 인간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 존재 !!

그렇게 나오다가, 그것도 성에 차지를 않아서 어떻게 했는고 하니, 신에게 영광을 돌릴 때 자기에게 있는 선한 것은 살리고 악한 것은 죽이면 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칸트의 ‘도덕’ 이라는 것인데, 그것을 다시 이야기해보면, 우리 인간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무조건 해야만 한다” 라는, 그런 존재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법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데, 그런 자기 안에 있는 선한 법을 위해서 자기가 했다는 말이다. 물론 칸트는 법이란 말은 하지 않았는데, 법보다도 선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을 지킨다고 해서 선이 아님을 칸트가 너무나 잘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법보다 더 근원적인 선함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법이 없어도 선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즉 법을 뛰어넘어서, 초월하는 숭고함의 미, 바로 그것을 쫓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칸트 이후에 !!

그런데 칸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내가 선하다고 여기는 것이 하나님도 선하다고 여긴다” 라고 하다가, 여기에서 더 나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꼴리고 하고 싶은 데로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라고 하고, 또 여기에서 나아가면 “나의 욕망대로 하는 것이 곧 신이 원하는 것이다” 라고 되는데, 또 여기에서 나아가면 “내가 하고 싶은 그것은 신이 주신 것이다” 라고 하고, 또 여기에서 나아가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곧 신의 뜻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누가 신이 된다는 말인가? “더 이상 신은 필요 없고, 내가 곧 신이다” 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경제구조인 자본주의의 돈을 좋아하는 추세와 같이 병행을 하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가 하고 싶은 데로 해라. 교사는 너를 인도할 뿐이지, 너를 가르치는 자가 아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그렇지가 않았는데, 교사는 어디까지나 가르치는 자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무엇인고 하니, 소비자가 학생이라는 것이다. 즉 소비자가 왕이니 교사는 당연히 학생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교회도 그렇고, 부모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니, 뭐가 묵고 싶노?” 라고 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추석 때 보면 따로 음식이 정해져서 나왔는데, 그런데 요즘은 서로 의논을 한다는 것이다. “야야, 이번에는 무슨 음식을 하면 좋겠노? 짜장면으로 하자고? 알았다. 이번 추석에는 짜장면이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제사음식에 짜장면이 들어가고 탕수육이 들어가는데, 그렇게 국적불명의 음식이 마구 들어간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 차린 음식을 귀신이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먹기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 라는 것이 전혀 없어 !!

(좋다는 지우개가 안 보이는데, 어디에 있지요? 아, 저기에 있네요) 그러니 결국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 라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 그게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대상이 되고 말았는데, 중세 때는 그것을 차단시켰다는 것이다. 즉 “너는 대자연의 일부이니 꼼짝하지 마라. 이 대자연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 라고 말이다. 그것이 곧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그냥 자기 팔자대로 살아가면 된다” 라는 것인데, 너무 까불거나 설치지를 말고 말이다. 이 세상은 자기들이 다 알아서 하겠다는 것인데, 즉 더 똑똑한 자기들이 말이다. 그들이 곧 귀족이고, 왕이라는 말이다.

그 당시에는 언어를 알고 해석하는 자들이 제한적이었는데, 그런데 언어를 모르게 되면 무식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식하면 누군가가 시켜주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언어가 발달하지 않으면 대뇌피질이 발달하지 않아서 개돼지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꼭 누군가가 시켜주어야만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당시에는 귀족이나 왕으로 이루어지는 계급질서가 정당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는 말이다.

◈ ‘신’은 최후의 보루로서 !!

더 나아가서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말하는 그 ‘신’ 이라는 것 속에는 어떤 것이 있는고 하니, 로마나 유럽식 종교, 혹은 중세종교, 혹은 개혁주의라는 새로운 전통을 자랑하는 종교가 있을 때, 물론 유럽 사람들은 교회에는 나가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 마음속에는 신은 최후의 보루로, 그런 대상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신을 믿는다. 그리고 그 신을 모독해서는 안 되는데, 그러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 라고 말이다. 그러한 것은 그들의 문화가 되어서, 즉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배워왔기 때문에 그들의 머릿속에 박혀있다는 것이다.  

◈ 르네상스 - 고난받는 예수님, 비천한 예수님 ??

아무튼 이런 전체가 다 복음을 훼방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되면 예수님은 거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지로 온 예수님은 또한 무엇이 되는가? 역시 하나의 대상이 되는데, 그것이 르네상스시대 예술에 보면 나오는데, 즉 고난받는 예수님, 비천한 예수님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예수님을 아무리 고난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쇼윈도우에 진열된 예수님인데, 그런데 그 고난의 예수님이 우리 안에 쳐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자체가 신을 대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신으로부터 대상이 된다는 것까지 쳐들어왔을 때는, 주님은 단순하게 거지나 가난한 자로 온 것도 아니고, 그 주님의 고난이 바로 우리의 교만함을 쳐부수는 접촉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접촉까지 가는 게 아니라, 항상 낮아지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즉 낮아지신 하나님을 또 다시 대상으로 삼아서 숭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제 아무리 낮아졌다고 하고, 십자가를 졌다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의 위력이 닥쳐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전처럼 하나의 대상이 되었을 경우에는, 이것을 철학자들이 밝혀내었는데 말이다. 그런 대상은 자기 욕망이 원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다른 대상으로 자꾸만 바뀌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그런 욕망을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하면, 거기에 따라서 신의 모습도 자꾸만 바뀌기 때문에, 즉 요동치고 변화하는 신이기 때문에, 그만 신의 가치가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 ‘니체’부터는 신을 버리기 시작하는데 !!

그래서 니체부터는 신을 버리기 시작하는데, 즉 무신론의 시대가 된다는 말이다. 물론 신은 있는데, 다만 언어로만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이 있어야만 그 신 가운데서, 우리 인간들이 신을 통해서 소통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언어로서 신이 있기는 하지만, 하지만 아무도 그런 신의 실체를 다룬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과학자도 그 실체를 확인한 적이 없기에 말이다.

‘이기적 유전자’ 라는 책을 쓴 ‘도킨스’ 라는 과학자는 노골적으로 신은 없다고 했는데, 즉 ‘신’ 이라는 언어는 있지만, “신은 이런 분이다” 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으니, 대상은 대상으로서 전락해버리고, 인간은 항상 타인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 레비나스 - 신은 타인으로 왔다 !!

그렇게 타인을 대상으로 삼으니, ‘레비나스’ 라는 철학자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신은 타인으로 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신은 하나의 타인이 되어서, 즉 궁금한 타인, ‘나’에게 어려움을 당하고 욕을 듣는 타인, 그렇게 타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러자 현대의 신학자나 철학자들이 대환영을 했는데, “야, 바로 이것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오늘날 종교를 해부할 수 있는 것은 말이다. 그래서 신부들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는데, 즉 레비나스의 유대교적인 타인으로 온, 그러한 어려움을 당하는 신이 진짜 예수님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 헤겔 - 신의 완성은 성육신(成肉身) !!

하지만 레비나스의 이러한 주장은 이미 누가 했는고 하니, 헤겔이 다 했다는 것이다. 즉 “신의 완성은 성육신이다” 라고 말이다. 헤겔은 물론 철학자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신학자라는 것이다. 헤겔이 출발점으로 보는 것은, 신은 그냥 모호한 대상이 아니라, 즉 대자연의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이 사람이 되어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모든 역사라는 것은 이미 신이 인간이 되는 그 순간 모든 것은 완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십자가는 죽어도 이야기하지 않는데, 그냥 “신이 인간이 되었다” 라고, 그렇게만 주장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모르고, 계속해서 신과 인간의 그 관계만을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누군가가 이야기하기를 “그 뒤에 나오는 모든 철학은 이 헤겔철학의 해석에 불과하다” 라고 했는데, 제기 보기에도 사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타인’ 이라는 것도, 이 헤겔의 성육신 이론을 잡아당겨서 나왔다는 말이다.

◈ 신이, 대상에서 형상으로 바뀌면 !!

아무튼 그렇게 신이 대상이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무엇인가? 그 자체가 대상이 아니면 형상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 개념이 십자가를 통해서 어떻게 바뀌는고 하니, 본질이 되는데, 무슨 본질인고 하니, “우주의 본질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말씀과 모든 것이 형상 중심이란 말이다.

그렇게 형상 중심으로 바뀌게 되면, 그 이전까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던 그 형상이 자리를 양보하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즉 그 새로운 형상이 이야기하는 말씀의 계시에 의해서 기존의 형상은 흙에 속한 형상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반드시 죽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로마서 5장에 의하면, 그동안은 아담에 속한 자들이 어떻게 했는가? 죄가 임함으로 죽음이 왕 노릇을 했는데, 하지만 로마서 5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는, “인간은 누구나 죽지만, 왜 보편적으로 다 죽어야 하는가?” 라는, 그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은 여기에 답이 되는 계시를 내려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이스라엘은 망한다.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셨는데, 몽땅 다 말이다. 즉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 인간은 왜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가?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지만 에스겔서는 그런 식으로 되어있지 않은데,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의인이라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또한 창세기 6장을 봐도, “노아의 당대의 의인이라. 하나님과 동행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에녹의 경우도 그렇고 말이다.

(겔 14: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지만 로마서 3장에 들어가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전혀 그것이 아닌데,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라고 하고, 또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예수님의 주(主)되심에 동참 !!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형상의 완성이라고 하면, 이 완성에 의해서 인간의 존재는 ‘기여(寄與)’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이 “나는 소용이 없어. 무엇을 해도 필요가 없어” 라고 하지 말고, 인간은 그때부터 “나는 왜 죽어야 마땅한가?” 라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에 동참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를 말이다.

과거의 중세철학은 신의 문제였는데, 그런데 그것이 틀려 버렸다는 것이다. 이제는 신이 그만 대상이 되어버렸는데, 즉 신은 이 땅에서 그만 뭉개져버리고 인간 전체가 “나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그 앞에 ‘신을 믿는’ 라는 것을 넣어서, 즉 “신을 믿는 나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은 왜 죽어야만 하는가?

그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나도 신을 믿었다” 라는 것이다. 즉 “예수인 나도 하나님 아버지를 믿었다. 그런데 왜 죽어야만 하는가?” 라고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는가? 우리가 신을 제대로 못 믿었기 때문에 그 벌로, 죄 값으로 죽는다고 하면, 그것은 중세에도 통하고 모두 통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잘 믿는 예수님은 왜 죽어야만 하는가?” 라는 것에 누가 합세되는고 하니, 성도가 합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왜 고생을 하고 죽어야만 하는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신을 위함’이 아니라, ‘십자가를 위함’ 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세상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 중심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에서 주장하기를, “나는 이제 예수님을 믿고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섬겨야지” 라고 하는 것은 성경말씀이 전하는 현실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 중심, 즉 십자가 중심의 현실이 아니라, 또 다시 중세시대로 되돌아가는, 즉 자기를 낮추고 왜소하게 여기는, 김성수 목사와도 같은데 말이다. 그렇게 자기를 낮추고 복종시키면 상대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착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 이 시대에는 성도가 어디에 휘말려있는고 하니까, 물론 과거에도 그랬지만 말이다. 즉 “하나님은 잘 믿는 예수님이 왜 죽어야만 하는가?” 라고 하는 시대에, 본의 아니게 태어나서 본의 아니게, 지금 마구 휘둘리고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밖에 없는데, 바로 ‘대신 죽으심’ 이란 말이다. 이 대신 죽으심이 ‘속죄’를 성사시킨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강도가 구원을 받을 때 “신을 믿습니다” 라고 하지 않았는데, 바로 주님의 대신 죽으심 속에 휘말려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을 믿는 나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라고 한다면, 거기에 “기타를 잘치는 나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혹은 “수영을 잘하는 나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자기는 모른다는 것이다. 이번에 피파 17세 이하 여자축구 선수들이 우승하고 베컴하고 악수를 했는데, “베컴과 악수를 한 나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여민지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라고 말이다.

또한 계속해서 “설교를 잘하는 나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개척교회를 성공한 나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목사인 나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을 알려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 도사님, 고린도후서에 대해서 한 말씀을?

제가 오늘 아침에 십자가 마을 게시판에 올린 글이 하나 있는데, 고관규 씨가 고린도후서에 대해서 한 마디 해달라고 해서 말이다. 질문을 하려면 좀 구체적으로 하든지 하지 않고, 그렇게 물으면 제가 무슨 갓바위 도사도 아니고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막막한데, 본의 아니게 욕을 들을 수 있는 여지를 그만 준다는 것이다(ㅋㅋ).

거기 글에 보면, “사도바울에 대해서 동정하지 말라”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감정이입을 하게 되면 사도바울을 오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바울 주위에 성령께서 돌고 있는데, 그러니 우리가 사도바울에 바로 접근하면 안 되고, 십자가를 통해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모든 사실은 우리가 전혀 동정할 사실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사도바울이나 성도가 모두 그 길에 함께 동참해서 가고 있음을 보인다면,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능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이 곧 바울서신의 핵심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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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후서(이근호) - 우리가 곧바로 사도 바울에게 다가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과해서 십자가 안에서 사도 바울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냥 사도 바울에게 다가가 버리면 사도 바울과 우리들하고의 접촉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감정이입을 시도해서 마치 공통점이 있는 한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접근하게 되면 사도 바울을 감싸고 있는 성령님께서 오로지 십자가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도 바울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감상적인 안목으로 사도 바울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태도 자체가 '자기 삶'이라는 것이 따로 챙겨 가질 수 있다고 여기는 '건방짐과 너긋함'의 발각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를 비롯해 모든 사도의 글들은 십자가로 나아갔던 예수님만의 특이한 인생 길의 재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해했기에 나서는 길이 아니라 도저히 매일같이 이해될 수 없는 쪽으로 끌려가는 양상의 십자가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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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상’을 ‘대상’과 반대개념으로 쓰니, ‘단절’이 없어 !!

이제 교재 116페이지를 살펴보겠는데, 아무튼 이렇게 형상을 대상이란 말과 반대개념으로 사용하니 그 장점이 무엇인고 하니, 서로 ‘단절’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은 어떻게 설명을 하는가? 세상적인 지식은 단절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성령을 통해서 되기 때문에, 그래서 육적인 것은 모른다고 단절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쪽에서 보면 단절이 맞는데, 하지만 하나님 쪽에서는 대상을 바꾸어버리는데, 즉 “형상은 너희들의 대상의 대상이 아니라, 너희들의 존재는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너희들은 만들어져야 한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게 되면, 형상 안에서는 단절과 같은 것은 사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체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좋은 장점이 된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116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것은 곧 각기 단절된 개인들이 ‘한 아담’, 혹은 ‘아담의 형상’ 이라는 단일성 안으로 모아져서 하나님 앞에 나서게 된다는 말이다.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 잠시, 이준과 박윤진의 논쟁을 살펴보면 !!

여기에 보면, 이번에 이준 씨와 박윤진 씨가 논쟁한 것이 다 나오는데 말이다. 즉 “각기 단절된 개인들이 ‘한 아담’, 혹은 ‘아담의 형상’ 이란 단일성 안으로 모아져서 하나님 앞에 나서게 된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이준 씨는 물론 여기에 동의를 하기는 하는데, 즉 차별이 없는 것으로 두리뭉실하게 하나의 뭉쳐진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고, 그러면 박윤진 씨는 무엇인고 하니, 꼭 그렇게 하나의 단일성으로 굳이 끄집어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그 긴 글을 요약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아담의 형상이라는 단일성 안으로 모아져서”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을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근거는 없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형상’ 이라는 틀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즉 “형상이니, 우리 이제 하나로 뭉치자” 라는 논리적 근거가 그만 없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냥 그대로 두어도 거기에서 형상이 공통적으로 피어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냥 놔두어도 말이다. 제가 굳이 이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괜히 이준 씨의 글에 댓글을 하면서 그냥 푼수를 떨어서 말이다(ㅋㅋ).

◈ 막내아들은 한 가족이 아닌가?

예를 들어서, 추석 때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서울에서 왔는데, 막내 아들이 그만 오지 못했다고 하면, 그렇다면 막내 아들은 한 가족인가? 아닌가? 당연히 한 가족이란 것이다. 비록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말이다. 그러면 그렇게 한 가족으로 뭉치게 된 요인이 무엇인가? 지역이 멀리 떨어져서 같이 만나지를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한 점을 생각해보면, 어떻게 보면 이준 씨의 말이 맞을 수가 있는데,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은 시골에 모였고, 셋째 아들은 서울에 그대로 있는데, 그렇게 큰 그림으로 보면 첫째와 둘째는 같이 있고, 셋째는 그만 떨어져있으니 한 가족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데 첫째와 둘째가 그만 싸우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즉 부부가 서로 매일같이 몸을 맞대도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의 경유하게 되면 !!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는가? 결혼을 하면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람 대 사람은 제 아무리 합쳐봐야 한 몸이 되지 않는데, 그러니 뭔가 경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 형상을 경유하게 되면 아담과 하와는 비로소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몸이 말이다.

그런데도 한 몸이 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경유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만 마귀의 형상을 경유하게 되면, 서로가 핑계를 하게 되는데, 즉 “저 여자 때문에 제가 따먹었습니다” 라고 말이다. 마귀의 형상을 경유하게 되면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일단 하나님의 형상이란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즉 인간적인 시선에서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여지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말씀이 들어와서, 그 말씀이 사역을 하게 되면, 즉 우리가 한 성령을 마시게 되면, 우리 모두는 지체는 달라도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한 성령이 오게 되면 말이다. 그러므로 그 성령은 반드시 예수님의 하나됨을 경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을 십자가로서 그 벽을 허물어 버렸다고 했는데, 그것이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즉 옛날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서로 원수였는데, 그런데 이제 그 원수를 십자가를 가지고 허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서로가 막 먹어도 되고 이방인은 이방인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게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의 형상을 경유해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박윤진 씨의 주장은?

여기서 조금 더 논쟁을 살펴보면, 박윤진 씨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모든 성경적인 개념이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그 안에서 다 해소되기 때문에 개념이 따로 생성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 안에서 모두 깨어지는데, 그렇게 깨어져서 십자가에서 새롭게 개념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박윤진 씨가 보기에, 이준 씨의 주장은 어떠한고 하니, “당신은 왜 자꾸만 십자가 안에서 개념이 살아있다고 하는가?” 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로서 그런 개념을 부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그야말로 십자가는 그런 모든 것들을 다 산산조각을 내는데 말이다. 

이렇게 박윤진 씨가 그것을 깨자고 하는 것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는 것인데, 그런 개념들은 어디서 소통이 되던 것인고 하니, 인간사회에서 소통이 되던 것들이란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에서는 아담이 사용하던 그런 개념들은 다 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언어가 깨어진다는 것이 아니고, 즉 말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 말에 담겨있던, 즉 십자가 이전에 인간들이 사용하던 개념들은 십자가 안에서 다 부정을 당해야만 하는데, 죄로 인해서 말이다.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야 한다는 것이다. 

◈ 신학은 전부가 삼위일체에서 !!

그런데 그런 개념들을 서로 얽히게 해서 신학을 만들면, 그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신학들이 왜 나오는가? 신학은 전부가 삼위일체에서 나왔는데, 이 삼위일체가 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론이고 뭐고 거기에서 다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삼위일체가 말도 안 되는 이론인데, 왜냐하면 인간이 사용하던 개념을 가지고 신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런 반칙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를 자꾸 부각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냥 믿는 척을 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말이다. 마치 삼위일체를 받아드리면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누구에게 고백할 필요도 전혀 없는데, 본인이 안다는 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깨어지는지 말이다.

자기가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부서지고 박살이 나고 있는지, 그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부순 그 십자가를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끄집어내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해서, 기존의 자기들이 알고 있던 십자가를 가지고 자꾸만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 말도 표현이 안 되네. 참 좋은데 !!

그러므로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 라는 개념을 붙들고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마치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간 것처럼, 그렇게 도저히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언어개념으로는 말이다.

그렇게 표현이 안 되는데, 그래도 기존의 인간들이 사용하던 용어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오직 십자가뿐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하였노라” 라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반복해서 흉내를 낸다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성경을 달달 외워도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고 말이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다시 논쟁으로 돌아와서 !!

그러니 박윤진 씨는 무엇에 어려움을 이야기하는고 하니, 인간들이 세상에서 사용하던 모든 개념들이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여기서는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고 하니,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박윤진 씨는 그런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예수님에게 주도권이 있어버리면, 십자가 이전까지는 누가 대상이었는가? 예수님도 대상이고, 아버지도 대상이고, 성령님도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전부가 다 대상이 되는데, 그런데 십자가 안에 들어가면 주객이 그만 전도되어서 누가 대상이 되는가? 무엇을 하려고 하기만 하면 마구 깨어지는데, 주식만 사면 떨어지고 말이다. 그렇게 매일같이 주님께서 우리를 다루고 계신다는 것이다. 기도만 하면 응답이 안 되고 말이다(ㅋㅋ). 그렇게 완전히 꼼짝도 못하게 우리를 계속해서 다루어 나가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짜증이 나고 화가 나서 “그러면 제가 죽어야 좋단 말입니까?” 라고 하니, 그때는 주님이 ‘짝짝짝’ 하면서 박수를 치신다는 것이다. “그래, 진작 그렇게 나오지. 무슨 니가 목회를 한다고 설쳐. 넌 죽어도 마땅해!”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런 느낌이 약 2초나 3초 동안 들지만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 그러면 저는 그만 이제 죽을 랍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래. 죽어라, 죽어라, 죽어!” 라고, 그렇게 나오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그 순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이다. 

◈ 너무 아파요 !!

예를 들어서, 걸레를 쥐어짜면 어떻게 되는가? 그 순간 걸레는 그야말로 죽을 맛인데,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는 그 주변이 깨끗하게 청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대신 죽으심’ 인데, 물론 우리는 것이 너무 싫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하나의 대상으로 해서 믿고 싶은데, 그런데 그 십자가가 자기에게 덮쳐서, 자기를 마치 걸레처럼 쥐어짠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아프다는 것이다. 

사실상 굉장히 아픈데, 이번에 우승한 17세 이하 여자축구를 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잘했다고 박수나 치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선수들은 어떠한가? 결승전을 치르면서, 전후반전을 모두 다 뛰고 또 연장전을 뛰는데, 그런데 공이 바로 앞에 와도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나 지치고 힘이 들어서 말이다.

저도 그것을 보면서 참 안타까웠는데, 차라리 그럴 바에는 준우승이 더 낫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게 힘이 들고 차라리 주저앉고 싶은데,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어떠했는가? “참 잘했어요!” 라고 하면서 박수를 쳤다는 것이다. 잘 싸워서 대한민국이 우승을 했으니 말이다.

이처럼 복음으로 가는 사람들이 다 그러한데, 만약에 영광을 받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다가는 영광이고 뭐고 다 깡그리 날아가고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광이고 뭐고 다 싫어요. 제발 좀 살려주세요” 라는 소리가 나도록 쥐어짜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제 복음을 알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한다는 것이다.

본인은 그야말로 죽을 맛인데, 그런데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좋아한다는 말이다. 당사자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까 겁이 나는데 말이다. 즉 자기도 차라리 다른 사람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박수나 치고 싶은 심정인데, 그것이 훨씬 더 편하다는 것이다. 회비만 만원 내고 말이다. 물론 회비가 만원이라고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 주님과의 관계를 규격화를 시키게 되면?

아무튼 주님과의 그런 관계는 본인만이 아는데, 하지만 그것을 규격화를 시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규격화를 시키고 모델화를 시키는 것을 두고 박윤진 씨는 겁을 낸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럴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규격화와 모델화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준 씨는 어떠한가? 그렇게 규격화가 되지 않고 모델화가 되지 않으면 증거하는 것이 ‘동어반복’ 이라고, 그분이 여러 번 사용했는데, 눈치를 못 차리도록 말이다. 즉 복음의 깊이 있는 새로운 사실이 나오지 않고, 매일같이 똑같은 소리를 십자가 마을 사이트에서 해대는, 그렇게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밖에 되지 않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몽둥이를 맞을 요량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다. 동어반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박윤진 씨가 하는 말이, 바로 그게 수상하다는 것이다. 그런 규격화가 되지 않는데, 그런 되지 않는 일을 하겠다는 것은 뭔가 그 이전의 논리에 문제가 있던지, 그것이 아니면 십자가 자체에 대한 이해부족이 있던지 말이다. 아니면 십자가의 근처에는 갔지만, 그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던지 말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으니, 자기라도 그것을 한번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조금 감정싸움이 되고 자존심 싸움이 말았지만, 아무튼 처음에는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논쟁을 하다가 보면 나중에는 무슨 싸움이 되는고 하니, “누가 더 겸손한가?” 라는 싸움이 되고 마는데, 즉 “나는 개돼지입니다” 라고 하면, 저쪽 상대방에서는 “저는 개돼지보다도 더욱 못한 똥돼지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 이제 고만 !!

하지만 이런 감정싸움은 어떠한가? 고린도후서에 대한 답글을 달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이런 감정적인 것은 사도바울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성경말씀을 인용하더라도 말이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고상한 말을 해도 뭐라구요?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논쟁은 그 정도에서 그만 했으면 하는데, ‘이제 고만’ 이라고, 텔레토비에 나오는 말인데 말이다.

계속해서 이야기해보면, 십자가에서 이렇게 할 때, 여기 있는 십자가 이전의 개념이 살아서 십자가를 넘어서 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에 기존의 개념이 죽고, 예수님의 성령에서 새로운 개념이 나온다고 하면, 이 개념 속에는 반드시 무엇이 포함되는고 하니, “이러 이러한 개념은 십자가 안에서 죽은 개념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첨부가 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첨부를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이것은 성령 안에서 새롭게 안 개념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헛소리에 불과한데, 왜냐하면 그런 것은 누구나 다 알고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러니 반드시 “이러 이러한 개념은 잘못된 개념입니다” 라고 하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첨부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반드시 첨부서류가 있어야 !!

서류 중에서 ‘첨부서류’ 라는 것이 있는데, 원본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즉 ‘원본1’과 ‘원본2’가 이렇게 있다고 하면, 각각의 원본에 다 첨부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 첨부되어있는 것을 펼쳐보면, “이러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개념들은 깨지게 하는 능력이 십자가에서 나왔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로 그런 식의 선입관을 와장창 다 깨어버린 능력이 곧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라는 것인데, 왜 그런 것인가? 누군가가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신 주님인데, 이 동행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같이 있는 자들 중에서 어느 누구 한 분은, 즉 주님께서 주도권을 쥐고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주도권을 쥐고있다는 것은, 그냥 가만히 쥐고있는 것이 아니라, “이게 어디서 까불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니가 뭘 알어?” 라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계속해서 쥐어짜면서 때리는데, 바로 그 때리는 장면을 여기 첨부서류에 첨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이렇게 이렇게 마구 얻어맞았습니다” 라는 것을 말이다.

◈ 개혁주의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단입니다 ??

그러니 개혁주의를 표방한다면, “개혁주의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단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첨부가 된다면, 그 개혁주의를 인정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개혁주의가 어디 있던가요? 당장에 때려치우지 말이다. 그래서 무슨 소리는 나올 수가 없는고 하니, ‘전통’ 이라고 하는 말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통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그 주변에 추종하는 자들을, 즉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그 수많은 고기들을 포섭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다보고 전통이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쁜 전통을 의식한 것인데, 즉 “개혁주의를 벗어나면 나쁜 전통을 따라가면 이단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 개혁주의 전통 안에 들어오면 안심을 하셔도 좋습니다” 라고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무엇인고 하니, 아까도 말했지만, 하나의 질서화가 된 권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부천개혁교회에 왜 그러한 표시가 있는고 하니, 그것은 개혁주의자들이 그렇게 사용했던 것을 그냥 그렇게 써 붙여놓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혁주의의 전통을 존중한다” 라고 말이다.

◈ 여기서 시칠리까지 2km입니다 !!

‘귀신은 있다' 라는 영화를 보면, “여기서 시칠리까지 2km입니다” 라고 하는 의미에서 “시칠리까지 2km→” 라는 장면이 나오는데, ‘→’를 사용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 ‘→’를 사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게 전통이 맞기는 맞는데, 그냥 사용했다는 것이다. 사용하지 않아도 그만인데 말이다.

그러니 부천개혁교회도 그냥 사용했다고 볼 수 있는데, 즉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러한 ‘전통’ 이란 말을 썼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도 무엇이든지 조금은 생각을 하면서 사용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도 역시 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보고 계시고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러면 전통이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물론 그 말이 맞는데, 전통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 이후에는 주의해야 할 개념들이 있는데, 즉 전통이나 자연계시와 같은 개념들을 말이다. 그런 것을 긍정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준 씨는 바로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러한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냥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지 말고 말이다. 그래서 자기는 욕을 들을 각오를 하고 끄집어내는 일에 용감하게 나서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박윤진 씨는, 그것이 좀 어설프다고 보았고 말이다. 물론 저는 지금 이 논쟁에 대해서 상당히 좋게 보고 싶다는 것이다.

◈ 결론 - 그냥 성질대로 외쳐라 !!

지금까지 한 것을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은데, 본인에게 뜨거운 마음이 있으면 그냥 내뱉으라는 것이다. 욕을 들어서 쥐어짜는 것은 나중의 문제이고 말이다. 물론 “나는 이렇게 해서 깨어졌습니다” 라는 것을 반드시 첨부해서, 그냥 외쳐버리라는 것이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말이다. 어떻게 외치더라도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완전한 것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잘라내고 깎아내고, 그렇게 해서 “야, 이것은 누가 봐도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복음이다” 라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이렇게 우리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아예 그런 기대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냥 자기 성질대로 내질러버리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뒤의 수습은 “제가 부족합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교인들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된다고 하지만, 하지만 백이면 백에게 다 상처를 주지 않고 설교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누가 시비를 걸어도 반드시 시비를 거는데, 그러니 사랑으로 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는 말이다.

◈ 성도는 주어진 여정(旅程)을 갈 뿐 !!

그러니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님이 쥐어짜는 대로 죄도 터져 나오고, 욕심도 터져 나오는데, 자기의 기대감이나 더 살고 싶은 욕망도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일은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분 마음대로 쥐어짜면서 제대로 다 정리해주신다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것들이 되풀이가 되면서, 날마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아 가는 여정을 우리가 지금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교재를 보겠는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담의 형상이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반드시 어떤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 인간적으로 아담의 형상을 하나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서 전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16페이지를 보자.

** 이 대치, 한 아담(인간)과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들이 자기 표현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표현은 인간 삶의 전부이다. 표현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 ‘표현’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

시체도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데, 하물며 살아있는 인간이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것은 저의 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입니다” 라고, 그렇게 건방지게 말을 할 수 없는데, 주님의 뜻이든 뭐든 간에 그것은 자기 표현이라는 말이다. 물론 자기 표현이 들어간다고 해서 그렇게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는데, 왜냐하면 주님이 그렇게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의인이 아닌 죄인들을 사용해서 주님 자신의 의인됨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식으로 주님은 우리 죄인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대해서 너무 주눅이 들지 말라는 것이다. 즉 너무 조심스럽게 살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어차피 그냥 가만히 있어도 그게 하나의 표현이니 말이다.

흔히들 뭐라고 하는가? “사람은 역시 입이 무거워야만 돼?”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입이 무거운 것도 하나의 표현이란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성질대로, 그렇게 돼지 멱따는 소리라도 내어 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꽤엑~ 꽤엑~)

그리고 그 뒤에 주어지는 모든 비난은 우리 자신이 받는 것도 너무나 마땅하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인간이 덜 되어서 그렇구나” 라고 여기라는 말이다. 그것이 또한 사실이고, 그러니 우리는 사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성질대로 산 것을 잘했다고 우긴다면, 그것도 역시 곤란하다는 말이다.

◈ 아니, 저런 복음적인 표현이 !!

어제 올라온 글 중에서 재미있는 표현을 하나 발견했는데, 이번 집중호우 때에 하나교회에 물난리가 그만 났는데, 그것을 두고 한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하나 교회에 집착하지 말고 복음을 위해서 살라고 주님께서 하신 줄 압니다” 라고 하니, 거기에 대해서 박온정 씨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세상에 저렇게 복음적인 표현이 어디 있는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십자가 마을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어, 그것은 이미 20년 전에 우리가 다 했던 것인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20년 전에 이미 그런 경험을 다 했더라도, 그리고 나서 이제는 복음적인 삶을 산다고 여기는데, 그런데 막상 집에 물난리가 나보라는 것이다. 그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그때는 표현을 곱빼기로 해야 하는가?

그러니 성질은 성질대로 분명히 나겠지만, 그래도 하나교회의 한 목사님처럼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을 복음을 아는 자는 마땅한 도리인 줄 알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 하나라도 우리는 주님의 뜻으로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가운데서도 모두가 그런 표현을 할 수가 있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표정이 영 이상한데 말이다(ㅋㅋ).

물론 우리 생각에는 그런 물난리가 나지 않고, 그런 표현을 하지 않으면 좋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고, 아무튼 우리는 속으로 그냥 삭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얼마든지 우리에게 들이닥칠 일이고, 아니 매일같이 들이닥친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것이 바로 ‘표현’ 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람들은 말한다. “열심히 나름대로 순종했다. 어쩔래?”

◈ 어쩔래? 어쩔래? 어쩔래?

인간들은 이렇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나면, 그 뒤에 ‘어쩔래?’ 라는 것이 붙는다는 것이다. 빠지면 되는데 말이다. 인간은 이렇게 뭔가 하나님께 일을 하나 했다 싶으면, 그 뒤에 반드시 ‘어쩔래?’ 라는 자기 표현을 빠트리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집사님이 목돈을 교회에 헌금을 했다고 하면, 그렇게 헌금을 하면 되는데, 그런데 반드시 자기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 “주여, 제가 헌금을 했심더. 헌금을 했단 말임더” 라고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런데, 내보고 우짜라고?” 라고 하시고 말이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자기가 뭔가 괜찮은 것을 하나 했다고 여기면, 거기에 대한 표현을, 즉 자기가 했음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라고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데, 그러한 것을 하든 말든 간에, 인간은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기 성깔을 그대로 보여주는 표현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가 “성깔대로 사세요!”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우리 인간은 자기 성깔대로 살아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제가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해서 비난하는 분들도 가끔 있는데, 인간은 살아있는 한 아무튼 표현을 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두고 ‘실천’ 이라고 하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117페이지를 보자.

** 따라서 생존과 보존 본능에 의한 인간들의 자기 표현에는 금지도 없고 중단도 모른다. 죽음만이 이런 전개를 멈추게 한다.

◈ 성도에게 죽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

가끔은 쉬었다가 하면 참 좋은데,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그런 멈춤이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고속도로를 질주하는데, 그런데 죽음만이 여기에 대해서 강제적으로 멈추기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는데, 그러니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그때 죽이지를 않았으면 또 다시 강도 짓을 할 놈이라는 것이다. 신정환이도 그런 경우인데, 3천만이 문제가 아니라 계속해서 또 날리고 날린다는 것이다. 도박을 누가 말리겠는가? 말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란 것이 이렇게 고마운데, 그러니 우리는 죽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알고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자기 표현을 이제 멈추고, 죽음 이후에는 누구 표현을 한다는 말인가? 주님의 표현만 한다는 것이다.

거지 나사로는 그것을 약간 앞당겨서 했는데, 즉 살아있을 때 그는 박살이 났다는 것이다. 개가 와서 사귀자고 하면서 자기 헌데를 핥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가 거지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가 죽고 나니 어떻게 되었는가? 이제 나사로는 입을 다물고, 놀랍게도 아브라함이 나사로의 표현을 대변해주는데, 그러니 그것이 곧 천국이란 말이다. 그러니 ‘대신 죽으심’이 계속해서 유지가 되면서, 그 기능이 제대로 작동을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이 죽으면, 주님의 심장은 비로소 !!

달리 말해서, “사람이 죽으면, 주님의 심장은 비로소 뛰기 시작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그 이전에도 뛰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 숨어있던 주님의 심장박동이 죽은 성도의 심장에 본격적으로 작동을 해서, 산 자는, 즉 성도는 의인의 생명과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것이고, 그리고 불신자는 지옥의 심장이 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심장은 원래 지옥에 가서 뛸 심장인데, 그래서 지금 모두들 뛰고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다음 다음 주에 거라샤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하려고 하는데, 그때 여기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다루려고 한다는 것이다.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죽게 하시는데, 그것도 십자가에서 함께 죽게 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멈추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에 합세하여 그 죽음으로 인해서 인간의 자기 표현의 무의미함과 죄악성을 공개하시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이준 씨가 시비를 걸었는데, 즉 “우리 인간은 죽을 때 죽는 것이 아니라, 지금 벌써 죽여진다” 라고 말이다. 이러한 논지를 이준 씨가 계속해서 펼치는데, 땅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즉 ‘땅’ 이라는 것은, 기존의 십자가 이전의 개념으로는 되지 않고, 십자가 이후의 땅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박윤진 씨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그런 땅 개념은 이미 다 깨어졌는데, 왜 또 다시 그런 개념을 끄집어내는가?” 라고 하면서 받아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준 씨는 “아니, 내가 끄집어내겠다는, 당신이 왜?” 라고 하고 말이다. (역시 불구경은 재미가 짱, 그런데 다음은 누구 차례이지?)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리하여 하나님의 창조란 흙에 속한 존재를 하늘에 속한 존재로 전환하는 것이다.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 주님의 일하심은?

여기 21절에 보면 ‘역사(役事)’ 라는 말이 나오는데, 즉 ‘일하심’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일하심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들을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그 형체를 변하게 하는 일을 지금도 그렇게 일을 벌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벌리는 작업이, 곧 현재 우리의 몸을 후패하게 하는 능력에 해당되는 일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렇게 주님께서 다 알아서 후패하도록 하는데, 그런데 왜 그런 썩어가고 있는 자기 몸에다 온갖 투자를 다하고, 온 정력과 정신을 다 쏟아 붓느냐는 것이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자는 그 형상이 예수님인데 말이다. 그런데 왜 과거의 자기 흙의 형상에다가 안절부절을 못하면서 정성을 다 하느냐는 것이다.

◈ 무엇에든지, 무엇에든지, 무엇에든지 !!

이준 씨가 빌립보서 4장 8절을 언급했는데, 그런데 그것을 말하려면 반드시 3장을 거쳐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라는, 그 주체가 무엇인고 하니, 즉 정신이 어디에 팔려있다는 말인가? 하늘에 정신이 팔려있고, 자기 몸은 포기했다는 것이다.

(빌 4: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왜 그런고 하니까, 하늘의 형상, 즉 예수님의 몸의 형상에 정신이 팔리게 되면, 현재 썩어지고 있는 자기 몸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자체가 무엇이 되는가? 그래서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 몸이라고 하면 자기가 다 가려서 할텐데, 즉 “이것은 정결하고, 저것은 정결하지 못해” 라고 말이다. 하지만 하늘에 속해버리니 어떻게 되는가? ‘무엇에든지’ 라는 것이다. 비타민을 먹든, 바이타민을 먹든 말이다. 무엇이든지 사랑할 만하다는 것이다.

◈ ‘주체’가 어디에 놓여있는가?

그러니 주체가 어디에 있는지, 그 주체개념을 언급하고 난 다음에 해석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그냥 “이렇게 해야 합니다” 라고 하면, 다시 행함으로 가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개혁주의자들처럼, 그렇게 성화론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섬길 몸이 그만 사라졌는데, 그러니 사라질 몸을 섬길 이유는 더 이상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다가 올 몸에 대해서 기대를 하게 되면, 그것이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라는 것이다. ‘무엇에든지’ 말이다. 그러므로 ‘살았다’ 라는 개념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118페이지를 살펴보자.

** ‘그리스도의 구속하심, 안(IN)’ 외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살았다’ 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형편에 놓인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의 피조적 존재성을 기초로 해서 신을 규명하겠다는 시도와, 십자가로 인해서 이미 그 피조성은 ‘죽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초로 하나님을 규명하는 시도가 첨예하게 대랍하게 된다.

◈ ‘피조성’이 아닌, 문제는 ‘피조적 존재성’ !!

상당히 어려운 내용인데, 여기서는 인간의 ‘피조성’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피조적 존재성’을 문제로 삼는다는 것이다. 피조적 존재성이라고 하면, 그 맞은 편에 누가 등장해야 하는가? 반드시 창조적인 존재성이 등장하는데, 그렇게 존재성이 두 개가 등장하게 되면, 처음에 말한 것처럼 그 존재는 자기가 섬길 하나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을 통해서 합세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하니라 하나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면, 그것은 계속해서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 긴 역사가 곧 아까 말한 서양역사인데, 그렇게 서양역사처럼 변화가 된다는 말이다.

◈ 서양역사의 변화를 살펴보면 !!

그 서양역사를 살펴보면, 처음에 법을 가지고 하다가 안 되니 법을 없애버리기도 했다가, 그렇게 법을 없애고 숭고미를 쫓다가, 그 숭고미를 끄집어내는 자기의 기본적인 감정에 더 치중하는데, 이성보다도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이 감정은 자기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욕망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의식보다도 무의식 속에서 그 내용이 더 풍부하다는 것을 알고, 그러니 이제는 현실보다 꿈을 쫓아가는, 아니 쫓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기의 꿈을 정당화해버리는데, 즉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고, 결국에는 자기의 죄까지도 정당화하는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현대인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자기는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도 “저는 주님의 뜻대로 삽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과도 똑같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고 하니, 피조적 존재성 때문에 그러한데, 그러니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즉 “니가 알고 있던 피조적 존재성은 십자가 이전의 문제이고, 이제 십자가 안에서의 피조성은 무엇인고 하니, 이제 너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피조되어야 하는 새로운 피조성이 등장한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존재성에 의한 피조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즉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보여주기 위한 피조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이 세상은 본인이 인정하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죽은 세상이 된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본인의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

본인의 인정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미 죽은 세상이 된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이미 죽은 세상이라는 것은 누구의 관점인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관점이기 때문에, 그 예수님 안에 있는 본인의 인정여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죽은 거야” 라는 말을 구태여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죽은 세상과 더불어서 그 세상을 좋아하는 ‘나’는, 즉 주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이 죽은 세상이라고 하면 그 세상을 좋아하는 ‘나’는 무엇인가? 그 죽은 세상과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노릇을 실컷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말이다. 그저 죽은 세상이 좋아서, 그 죽은 세상에서 출세하지 못했다고 한이 맺히고, 그 죽은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죽으려고 하고 말이다.

◈ 이 바보야, 뭐가 그렇게 좋아?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이 죽은 세상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으로부터 미련과 애착을 끊지 못하는데, 왜 그런가? 우리의 피조성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는 말인가? 방금 이야기했는데, 그게 죽음, 즉 ‘죄’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면 이 세상이 죽은 세상이라는 것은 누구의 관점인가? 그게 예수님의 관점이라고 하면, 십자가 안에서 우리를, 이 세상이 왜 죽은 세상인지를 그렇게 우리를 다루어주신다는 것이다. 즉 “이러니까 너는 죽어야 당연해” 라고 다루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쫓아가노? 바보야. 나는 이 세상에서 추방을 당했는데, 니는 왜 이 세상에서 출세를 하려고 하노?” 라고, 그렇게 다루어주시는 작업을 하신다는 것이다. 아까 그것을 ‘역사(役事)’ 이라고 했는데, 즉 ‘주님의 일하심’ 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것이 근원적인 변화이다. 이 근원적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자는 거듭나지 못한 자이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근원적인 변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이 이미 주님께서 약속을 통해서 이미 죽은 세상이라고, 그것은 우리 입장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자신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그 십자가 지심을 가지고 “이 세상은 죽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마저도 저주받게 한 세상 !!

지난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었는데, 예수님마저도 저주받게 하는 세상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죄가 없는 분도 세상을 통과했다는 이유 때문에 어떻게 되는가?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전혀 만만하지 않은데, 대단하게 저주를 받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죄가 없는 예수님마저도 저주를 받는다면, 하물며 우리는 어떠하겠는가? 두 번 말하면 입만 아프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여러 번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이다(ㅋㅋ).

우리가 지금 그 대단한 저주의 세상을 통과하고 있는데, 나이가 30이든 40이든 50이든 간에 말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저주받은 세상을 우리가 통과하면서, 그런데 우리에게 저주가 오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십자가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는 마치 투명한 유리병과도 같은데, 그런 유리병에 우리를 가두어놓고는, 그 유리병을 통해서 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저주받은 이 세상과, 그리고 그 세상과 동일한 우리의 모습을 말이다. 그 유리병 안에서, 또한 바깥에서 말이다. 즉 이 세상은 바깥에서 어떻게 벌을 받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 그것을 십자가 안에서 양쪽을 다 훤하게 조명을 비추어주신다는 것이다.

갑자기 이윤미(?) 권사님이 생각하는데, 힘들고 힘든 이 세상에서 복음을 한번 믿어보겠다고 말이다.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데 말이다. 아무튼 주님께서 그렇게 다루셨는데, 조금은 특별한 방법으로 다루지 않았나 싶은데 말이다.

아무튼 제가 왜 “본인의 인정 여부와는 상관없이” 라는 말을 했는지, 그 이유가 뒤에 보면 나오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만약에 애초부터 십자가에서 출발하지 않은 자라고 하면, 잠시 십자가 안에 자신을 담았다가 다시 빠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것은 여전히 자신을 산 사람이라고 하는 기초를 고수해야, 즉 ‘순종하라’, 혹은 ‘말씀을 지켜라’, 혹은 ‘선한 일을 하라’, 혹은 ‘거룩하라’ 라는 명령에 부응 가능한 조건을 갖추게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 십자가를 빠져 나와서, 이제 부활을 ??

이것이 바로 “이제는 십자가를 빠져 나와서 부활을 바라보자” 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의 특징인데, 자기들 마음대로 십자가 안과 밖을 들락거리는데, 하지만 그게 전혀 자기 마음대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인정하는 이 세상은 더럽다” 라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그것은 “내가 이 세상을 더럽다고 하니, 나는 괜찮은 존재가 아닌가?” 라고 되기에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전혀 주님이 주체가 되어서 다루는 모습이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성경을 보고서 지식으로 이해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즉 “아하, 이 세상은 더럽구나. 그러니 더러운 이 세상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자. 그러면 그렇게 끊은 나는 괜찮지 않겠는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십자가 안에 있는 모습인가? 엉터리 십자가를 하나 만들어놓고, 자기 마음대로 들락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목사님, 십자가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벌을 받습니까? 그러면 다시 들어가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그런 단선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사고방식에 갇혀있게 된다는 것이다.

◈ 참는 하나님, 참지 못하는 하나님 ??

지난 수요일 설교시간에 그것을 ‘1층’ 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러니 성화가 되었다가 말았다가, 그런 식으로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혹시 남해에 인터넷이 되던가요? (누가 멀리서 오셨나? ㅋㅋ) 수요일에 그것을 설교하면서, 그때 나오미와 관련시켜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은 참지 못하는 하나님이다” 라고 하고, 그 뒤에 다시 “하나님은 참으시는 하나님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될지 모르는데, 즉 “하나님은 인내하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내하지 않는 분이시다” 라고 한다면 말이다. 하나님은 인내하지 않은 분이라고 한다면 지옥에 가고, 만약에 인내를 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이 세상에서 좀 더 살다가 와도 괜찮고 말이다. 그러니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냐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춤을 !!

단선적으로 성경을 보면 이러한 오류에 빠지고 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증거하기 위해서 춤을 추라고 하면 같이 춤을 추면 될 입장이지, 자기 구원을 따로 챙겨서 한 몫을 잡으려고 하는 생각은 아예 버리라는 말이다. 그런 것은 성도에게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십자가에서 빠져 나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그 십자가는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서 십자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 무엇인가? “나도 십자가를 안다” 라고 하는데, “나도 신학교를 갈 때 십자가를 믿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십자가가 하나의 대상이 되면, 그것은 마치 중세시대의 예술처럼 ‘낮아지신 하나님’, ‘고난받은 하나님’, ‘비천한 하나님’을 그만 그림으로 형상화를 시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대상이니 말이다. 물론 높으신 하나님도 그리고, 또한 낮아지신 하나님도 그리고 말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균형을 맞춘 신학을 한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양쪽을 모두 다 아니까 말이다. 영광의 하나님도 알고, 고난받는 하나님도 알고, 그리고 삼위일체 이집트 신학도 알고, 또한 안디옥 신학도 알고(ㅋㅋ), 그렇게 골고루 다 갖추어야 그것이 참된 신학이라고, 지금도 신학교 교수들이 그런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썩을 인간들 !!)

◈ 성도는, 흙의 형상으로서 그 여정을 !!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대상에 불과한데,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 즉 예수님이 찾아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위하여 흙의 형상으로 계속해서 우리의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는 자의 특징이란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십자가가 아니라, 아예 십자가가 우리를 주물럭거리고, 쥐어짜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는, 그렇게 우리를 하나의 대상으로 삶았기에, 우리가 더 이상 이 세상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고, 오늘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언제가 감사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10,04 오후 6시에 마침.

                                         강의가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혹시 독일에 갔다온 효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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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페이’에 대해서 ☆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은 엄청난 규모의 폭발을 일으키며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폼페이를 5~6m 두께의 화산재로 덮어버렸다. 이로 인해, 5000여 명에 달하는 폼페이 시민과 도시 전체는 한 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 폼페이는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인기가 높았다. 폼페이 최후의 날에 대해선 오랫동안 미스터리에 싸여 있었지만, 1748년 화산재에 묻힌 도시가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현재까지 약 3분의 2가 발굴되었으며, 광장, 목욕탕, 원형극장, 약국 유적지를 통해 당시 발달된 문명생활을 엿볼 수 있다.

폼페이는 베수비오 산자락에 위치한다. 그러나 베수비오 화산은 1500년 동안 조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화산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서기 79년 8월 24일,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도시 전체에서 약간의 진동이 감지됐지만, 폼페이 시민들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라틴어에는 화산이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폼페이 시민들은 화산의 폭발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폼페이 최후의 날을 기록한 소플리니우스의 삼촌이자 당시 로마 함대 사령관이었던 대(大)플리니우스만이 화산 활동을 연구하고 있었다.

굉장한 폭음과 함께 하늘 높이 기둥처럼 치솟은 화산쇄설물들이 떨어지면서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원래 해안에 부는 바람 때문에 화산쇄설물은 나폴리 만 전체로 퍼져야 하지만, 그 날 불던 바람은 화산쇄설물을 모두 폼페이 쪽으로 밀어버렸다. 햇살이 가득했던 대낮은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 하늘로 높이 치솟았던 뜨거운 돌덩이들이 차가와지면서 더 단단해지더니 폼페이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속 200km의 속도로 떨어지는 돌덩이들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쌓이는 화산쇄설물의 무게를 감당 못해 집들은 힘없이 무너져 내려앉았다. 베수비오 화산은 18시간 동안 100억 톤에 달하는 화산재와 암석파편을 뿜어댔다. 로마에서 구조대를 파견했지만, 화산 폭발의 참상은 너무도 끔찍했다.

그 후 1500년 동안 폼페이는 땅 속에 묻혀 완전히 잊혔다가, 1594년 수로 공사를 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됐다. 그로부터 현재까지 100년 넘게 폼페이 유적지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발굴 작업을 통해 발견된 유물을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 아비규환의 모습이 마치 타임캡슐처럼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리고 있는 모습, 엄마가 아이를 감싸 안은 모습, 죽음의 공포 속에서 발버둥치는 모습 등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순간에도 재물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금붙이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화석이 된 사람의 모습과,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던 듯 보이는 문상객들이 그대로 자신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놀라운 모습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과거 폼페이에는 현대의 그것과 비교해서 절대 뒤지지 않는 훌륭한 문화와 문화재가 있었다. 만 명도 넘게 수용할 수 있는 원형경기장, 시청?체육관 등의 공공건물, 패스트푸드점 등이 있는 카페거리와 공중목욕탕 등의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또 발굴을 통해 발견된 미술품인 ??큐피드 벽화??와 ??춤추는 폰의 동상??은 로마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앞으로 10년 안에 발굴이 끝나면, 로마 제국과 헬레니즘 문화의 눈부신 유산들이 더 많이 공개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어느 학자는 말했다. ??하나의 도시를 완전무결하게 보전하는 방법으로 도시를 화산재로 덮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라고.  - 네이버에서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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