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34강 의를 빼앗는 예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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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1025피p120의를빼앗는예수안

피34강 의를 빼앗는 예수 안

[10 대구강의 16] - [피 34] - 의를 빼앗는 ‘예수 안’
                                                                                
                                                          10,10,2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예수’ 안과 ‘우리 안’ !!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120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성화론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는, ‘예수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성도가 자기 것으로 전환한 의를 늘 빼앗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의로 대체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에 보면, “성도가 자기 것으로 전환한 의를 늘 빼앗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의로 대체시키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이 ‘나’ 라는 육체가 할 일이 무엇이 있는가?” 라는 점인데, ‘나’ 라는 육체가 말이다.

강의초반부터 그만 어려운 난제에 부딪치고 말았는데, 즉 성화론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인데, 어렵지만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보자는 것이다. 먼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무엇은 아니라는 말인가? 일단 ‘우리 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요?

성경말씀은 분명히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분명히 ‘예수 안’이 동그라미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 안’을 계속해서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 안’ 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는 식으로, 자꾸만 ‘우리 안’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 ‘예수 안’은 너무 밋밋해 !!

왜 그렇게 하는가? 우리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손으로 만져지는데, 즉 꼬집으면 곧 바로 아프다는 반응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는 것도 그렇게 티가 나야 한다는 말이다. 즉 ‘우리 안’에 있으면 이렇게 근육과 지방이 있듯이, 그렇게 ‘예수 안’에 있다고 하면, 만져지는 것이 있고 보이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뭔가가 있어야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안’에 있으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제가 어제 독감예방주사를 맞았는데, 그때 엄청 아팠는데 말이다. 그렇게 아프듯이 뭔가가 느껴지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는 그런 독감예방주사도 맞지 못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게 과연 실체이냐는 말이다. 참으로 허황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을 만나본 자들에게는 허황된 것이 아닌데, 사도바울이나 오백여 명의 형제의 경우에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오늘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허황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고전 15: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전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고전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분들은 돌아가세요 ??

예를 들어서, 교회를 세워서 개척을 하는데 사람들이 오니까, 목사가 하는 말이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분들은 집으로 돌아가세요” 라고 한다면, 그냥 다 돌아가 버리지 누가 남겠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무슨 교회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여러분, 우리는 잘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포섭을 해야 남든지 말든지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여기서 예수 안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다 나가세요” 라고 하면 누가 남아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하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손에 잡히는 것처럼, ‘예수 안’에 있는 것도 잡혀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잡혀야 하니, ‘예수 안’이 성경에 나온다고 해도, 그것은 도외시하면서 ‘우리 안’ 만을 고집해서, 즉 “내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것을 고집한다고 하면, 그것을 성경전체로 확신시켜서 파급시킨다고 하면,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우리 안’으로 시작해서 ‘우리 안’으로 또 다시 돌아와 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 ‘예수 안’에서는 늘 빼앗기는 현상이 !!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안’ 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방금 제가 교재 120페이지에 있는 것을 이야기했는데 말이다. 즉 예수 안에서는 예수 안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를 남기기 위해서 우리의 의를 어떻게 하는가? 여기 교재에 보면, ‘늘 빼앗고’ 라고 표현되어있는데, 즉 우리의 의를 빼앗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의를 대체하기 때문에, 그래서 성화론은 있을 수가 없다고, 여기 교재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우리 육체와 언약과의 관계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여기서 근본적으로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해야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즉 “하나님의 언약은 육체로서 종결된 사항인가?” 그게 아니라면, “육체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기 위한 임시방편의 실체인가?” 라는 것이다. 굉장히 어려운 문제인데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언약 안에서는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체가, 독감예방주사를 맞으면 눈에 눈물이 핑 돌도록 아픈 이 육체가,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이 육체가, 과연 육체로서 인정을 받느냐는 것이다. 언약 안에서 말이다.

더 쉽게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엄청나게 귀한데, 그래서 아프면 병원에도 가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과연 하나님도 그렇게 귀하게 보느냐는 것이다. 과연 볼까요? 보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게 보지 않는데, 하나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귀하게 보는 것처럼 말이다.

◈ 성화론자들은, 주객전도자들 ??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귀하게 보시는가? 우리 육체는 하나님의 언약을 구성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동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출발점이 다른데, 성화론자들과는 말이다. 즉 “하나님, 우리가 천당에 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하는 질문자체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육체를 주셨는데, 그런데 그만 주객이 전도되어서,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동원된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모이면 축구를 합니까? 아니라면 축구를 하기 위해서 모이는 겁니까? 축구를 하기 위해서 모인다는 말이다. 아닌가요? 일단 모이면 축구부터 하는가요? 월드컵을 하니 남아공에 가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멀리 왜 가느냐는 말이다.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모이니까 투표를 하는 것이 아니라, 투표를 하기 위해서 모이는데, 그렇게 모이면 얼굴도 잘 모르면 이웃도 알게 되고 말이다. 도장과 주민증을 들고 투표장이 가는데, 가서 보니 서로 옆집에 사는 것을 알게 되어서 인사를 하고 난리라는 것이다. “저는 201동 505호에 삽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평소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모르다가, 투표를 하기 위해서 모였다는 것이다.

◈ 우리는, 인간의 원천에는 관심이 없고 !!

그렇다면 여기에서 성경말씀인 창세기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이나 선지자나 예수님이나, 그렇게 모든 언약에 속한 사람은 이 창세기의 원리를 전혀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인간의 원천이기에 말이다. 물론 요즘은 돈 벌기에 바빠서 원천이고 온천이고 간에,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말이다.

◈ 선방불패와 가을전어 ??

사자성어 가운데서 ‘선방불패’ 라는 것이 있는데, 너무 심각하기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고, 먼저 때린 놈은 반드시 이기게 되어있다는 것이다(ㅋㅋ). 그런데 다음과 같은 사자성어도 있는데, 즉 ‘가을전어’ 라고 말이다(ㅋㅋ). 왜 그것이 의미가 있는고 하니, 가을만 되면 전어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즉 가을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10월 31일만 되면 수십 년을 변치 않고 늘 나오는 노래가 하나 있는데, 이용의 ‘10월의 마지막 밤을♪’ 이라고 말이다. 어느 방송국 조사에 의하면, 그 날에 평균적으로 300번이나 그 ‘잊혀진 계절’ 이라는 노래가 전국적으로 방송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동기가 불렀던 ‘10월의 어느 날’ 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항상 그때가 되면 잊었던 원천을 다시 생각한다는 것이다.

◈ 인간의 잊어버렸던 원천을 품고 !!

아브라함이나 선지자나 예수님이나, 그런 분들은 무엇을 몰고 다니는고 하니, 우리 인간의 잊어버렸던 원천을 품으면서 몰고 다니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품고 다니면 ‘창조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조하셨다’ 라는 것인데, 즉 “누가 창조했는가?” 라는 것과,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과정’ 이라는 말이다.

광주에서도 그런 강의를 했지만, 우리에게는 성과가, 즉 결과가 중요하고 그것에 따라서 자기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하는데, 하지만 주님께서는 무엇을 보시는가? 우리의 성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원천을 뽑아낸다면,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써먹을 대로 다 써먹었다는 것이다.

◈ 언약 - 참기름을 짜듯이 !!

마치 아주까리나 참깨에서 기름을 뽑아내고 마면, 그것들은 그것으로 자기 역할을 다 하듯이 말이다. 우리가 대게를 먹을 때, 그 대게에서 속살을 빼먹으면 껍질은 그냥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공장에서는 또 키토산을 만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되면 자기 역할을 제대로 다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뭔가 빼먹기 위해서 있는데, 그게 바로 ‘언약’ 이라는 것이다. 즉 주체가 이미 우리가 아니라 넘어갔다는 말이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존재의 기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으로 깔려있다는 것이다.

◈ 철학자, 폴 틸리히 !!

이것을 폴 틸리히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그동안 위에서 쳐다보던 신을 그만 아래로 내려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위로만 쳐다보는 신이라고 하면, 신을 보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그들에게는 복음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예 위에 있는 신을 보지 말라고 하면서, 믿던 믿지 않던 간에, 불교의 신이라도 상관이 없이, 일단 우리 인간이 태어났으면 다 신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간주해서 성경해석을 다시 새롭게 해보자는 것이 곧 폴 틸리히의 ‘상관론적 신학’ 이란 말이다. 그러니 오늘 이야기하는 것과 조금 유사하기는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학의 범주에 머무는 것으로서, 즉 철학에서 시작해서 철학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 성도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날마다 강탈당함을 !!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방금 제가 언약이라고 말을 했는데, 그것을 ‘언약’ 이라고 하지 말고, 지금 성화론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의’ 라고 하면,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예수 안에서 우리의 의는 주님에게 강탈을 당하고, 주님에 의해서 대체가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말이다.

◈ 출발을, 하나님에게서? 예수님에게서?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의도가 무엇인고 하니, 과연 “출발을 하나님에게서 할 것인가? 그게 아니면 예수님에게서 할 것인가?” 라는, 그것을 구분하자는 말이다. 그렇게 구분을 하게 되면, 방금 폴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에서 출발해버리면, 즉 “인간의 존재는 신에서 나왔다” 라고 되어버리면, 여기서 무엇이 사라지는고 하니,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여기서는 하나의 에피소드로만 개입이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 에피소드가 무슨 뜻인지 알지요? 내용상 굳이 없어도 괜찮은데, 있으면 더욱 좋다는 말이다. 즉 그런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하나님 됨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다는 것인데, 바로 그런 식으로 신으로부터 나와서 그냥 신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면 그렇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이 있다” 라고 하면서, 신에게서 그만 신으로 가버리고 마는데, 하지만 예수님이 개입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게 축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이 있다. 예수님은 있다” 라는 것으로 출발하게 되면, 그것은 복음에서 논의할 사항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슨 의미인고 하니, “조물주가 계신다. 인간이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은, 반드시 교회에 나온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굳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안다는 것이다.

한국을 여행을 하는 다큐 프로그램을 보면, 울진에 가면 흥부장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흥부장으로부터 봉화의 춘향장까지 가려고 하면 장똘뱅이들이 태백산맥의 그 험한 12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옛날에 말이다. 그 다큐에서 그것을 그대도 재현을 하는데, 그때 그 모습을 하고 말이다. 소금, 조기, 고등어, 미역 등을 지게에 지고 간다는 것이다.

◈ 야속하다. 조물주가 야속하다 ♬

그렇게 해서 12고개를 넘어가면서 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에 무슨 내용이 있는고 하니, “야속하다. 야속하다. 조물주가 야속하다. 왜 이리 힘드는가?” 라고 하는데,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이 이렇게 12고개를 넘듯이 힘든 인생을 살게 하느냐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한다는 말인가? 조물주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축복과 저주를 생각하게 될 때, 그들은 자동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기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어떻게 여긴다는 말인가? 물론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즉 인간은 존재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축복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데, 그러니 그들이 노래하기를, 힘이 든다고 하면서 조물주를 야속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만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즉 예수님 중심으로 하게 되면, 축복은 누구만 받는다는 것인가? 오직 예수님만이 받는 것인데, 그런데 이것을 교인들조차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만 축복, 곧 번성해야 !!

이렇게 “축복은 예수님만이 받는다” 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즉 창세기의 원리대로 하면,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만 번성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에서 축복이라는 개념은 ‘번성’ 개념이기에 말이다. 즉 비어있는 공간을 채우는 개념이 복 개념이란 말이다. 그리고 있는 것도 소멸하는 것이 저주개념이고 말이다.

그러니 축복개념을 존재의 개념으로, 즉 “축복이란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복을 받아야만 돼. 역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맞아” 라는 인식자체에, 그만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 자신은 축복이 아니라 당연히 저주자리에 있고, 그러한 저주의 자리에서 “진짜 복을 받을 분은 나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밖에 없다” 라고 하는, 즉 예수님만이 복을 받아야 되고, 바로 그 복의 여파로 인해서 우리는 초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을 받을 때는 그냥 받는 것이 아니라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킨 사람에게만 복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신명기 28장에 의하면 말이다. 즉 모든 말씀을 지키면 복이 오고, 반면에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가 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 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신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신 28: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런데 예수님 중심으로 오게 되면, “우리는 복을 받을 수가 없고, 오직 주님만이 복을 받는다” 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과연 그것에 대해서 “동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라는 것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복이 없고, 오직 예수님만 복을 받는 것에 대해서, 피조물인 우리가 동의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말이다.

◈ 하지만, 인간은 아무도 동의하지 못해 !!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동의할 인간들은 아무도 없는데, 바로 그렇게 단 한 사람도 없음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로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피’와 ‘살’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이다. (아멘!)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봐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누가 동의를 하겠는가? 그러니 너거들의 애비는 마귀다” 라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들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동의를 하지 않고, 자기가 받을 축복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우리를 만들었으니, 우리에게 천당을 보장하라” 라고, 그렇게 매일같이 데모나 했지, 언제 인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나 있었느냐는 것이다.

◈ ‘예수 안’으로 초대함으로서 !!

바로 그렇게 되는데, 그래서 성령께서는 강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즉 “나는 복을 받아야 돼” 라는 사고방식과 “주님이 복을 받으셔야 당연합니다” 라는 사고방식을 바꾸는 작업을 ‘우리 안’에서 실시하는데, 물론 그것을 ‘우리 안’이 아닌 ‘예수 안’에서 하시는데, 바로 그 ‘예수 안’에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말이다.

그 초대하는 방법이 교재 121페이지에 나오는데, 그것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제가 읽도록 하겠는데, 모두 다 중요하기 때문에 붕붕 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가 읽고 난 뒤에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는데, 왜냐하면 기존의 구원론에 나오는 여러 난제들을 여기에서 설명을 다 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것들이 기존의 구원론에서 잘못된 질문으로 등장했는지 알기 위해서, 제가 질문을 다시 하겠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120페이지를 읽어보자.

** 예수님의 십자가는 참으로 ‘죄로 죽은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 보여준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여기서 말씀하시는 ‘죄의 몸’이란 예수님을 몸을 두고 말한다. 곧 ‘죄 있는 육신’을 의미한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예수님의 몸에는 죄가 있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의 몸에 죄가 있는 것은, 인간들이 예수님의 몸을 제대로 해석한 덕분이 아니다. 인간은 예수님의 몸을 해석할 능력이 아예 없다. 왜냐하면, 죄가 왕 노릇한 상태이기에 뭔들 제대로 해석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예수님의 몸에 죄가 있게 하신 능력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언약하신 언약 그대로 실시하셨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몸에는 죄가 있었다 !!

지금 제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죄가 없는데, 그런데 우리에게는 죄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예수님 덕분에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지금 이 논리의 문제점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제가 참 어렵다고 했는데, 지금 이 대목이 개혁주의의 구원론과 싸우는 부분인데 말이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수님의 몸을 구태여 죄인의 몸으로 해서, 그렇게 해서 우리를 구원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의 몸이 죄가 없는 몸이 될 때 구원이 더욱 확실하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 장로님은 죄가 없지요? 그런데 저는 많습니다 !!

오늘도 서 장로님께서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참석을 하셨는데, 만약에 서 장로님께서 죄가 하나도 없다고 하면, 그리고 이근호는 죄가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님에게 가서 슬쩍 대면서 스치고 지나가니 갑자기 저의 죄가 없어졌다고 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구원받는, 그런 훨씬 더 효율적인 경로가 아니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장로님, 장로님은 죄가 없지요? 그런데 저는 죄가 많습니다. 그러니 한번 만져봅시다” 라고 해서, 저의 죄가 없어졌다고 하면, 그게 얼마나 편리하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장로님, 죄가 없지요? 한번 만져봅시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만 장로님이 “저도 죄가 있습니다” 라고 해버린다면,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어디서 구원을, 즉 어떻게 죄의 몸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인간의 종교적 욕구인, ‘영웅’을 통해서 !!

이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 인간의 종교적인 욕구가 무엇인고 하니,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한데 말이다. 모든 시대를 초월해서 인간의 종교적인 욕구가 무엇인고 하니, ‘영웅’을 통해서, 즉 그 영웅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혜택을 입어보겠다는 사고방식인데, 그것을 우리 인간들이 누구나 다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는 비록 못하지만, 자기보다 더 뛰어난 영웅이 해내게 되면, 그 영웅을 왕으로 추대해서 기대고 의지하게 되면, 그 영웅이 가지고 있던 속성이 자기에게 와서, 그 영웅의 혜택을 입어서, 영웅 덕분에 구원을 받고, 그분을 주(主)라고 인정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종교적인 노림수가 우리 모든 인간들이 타고난 것인데,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고 기뻐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게 뭔가 수상하다고 여겨지지 않은지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은가요?

분명하게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여기고, 그래서 예수님을 만지면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는 죄가 있거든!”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죄가 없는 분이 누구냐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혜택을 입을 영웅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모두가 다 죄인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개혁주의뿐만이 아니라, 어거스틴의 신학부터 시작해서 2000년 동안의 구원론은 모두 다 깨진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감히 모두가 다 거짓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인간의 종교적 욕구를 기독교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피’ 라는 책을 보면서 이러한 점을 여러분은 찾아냈는지 모르겠는데, 물론 수필이라고 여기고 그냥 가볍게 읽는다는 분도 계시는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저는 그런 점을 일일이 다 생각해서 이런 내용들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즉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구원론을 의식해서 말이다.

◈ 구원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문제 !!

그래서 제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죄가 없는 몸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몸으로 하시는 것은,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욕구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우리의 구원욕구가 컨닝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데, 우리는 전혀 그럴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너무 중요해서 다시 해보겠는데, 즉 우리는 구원을 받고 싶은데, 물론 죄가 있다는 것도 알고 말이다. 그래서 죄가 없는 분을 찾다가, “아하, 죄가 없는 분인 예수님이 여기 계시는구나” 라고 해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다가서는데, 그러면 이렇게 예수님에게 다가서는, 즉 그러한 ‘다가섬’을 하나님께서 허용을 했느냐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전혀 허용하지 않았는데, 그러니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의논해서, 즉 주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선물을 주심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더라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는 구원을 받고 싶어서 환장을 했는데, 그래서 적당한 분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옳지 여기에 있구나. 괜찮은 분을 하나님이 보내셨네. 그러면 당장에 붙잡아야지”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구원이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되어버리면, 창세기 3장에 인간을 일방적으로 추방시킨 하나님의 의도가 전혀 의미가 없어지는데, 하나님이 전혀 쓸데없는 일을 하신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앞뒤가 서로 모순이 되는데, 즉 쫓아낼 때는 언제이고, 그리고 다시 구원은 왜 하느냐는 말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쫓아내려면 끝까지 쫓아내어야 하지 말이다.

◈ 굳이 ‘예수 안’ 이란 특정장소가 왜 필요한가?

그런데 개혁주의에서는 뭐라고 주장하는가? 쫓아내고도 건질 수 있다고 하는데, 사랑의 하나님이니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굳이 ‘예수 안’ 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는데, 그냥 ‘우리 안’에 우리가 있으면 주님이 우리를 건져내면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찾아오셔서 건져내면 그만인데, 그런데 굳이 ‘예수 안’ 이라는 것이 왜 필요하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를 건져내면 되는 것이지, 굳이 ‘예수 안’ 이라는 특정 장소에 우리를 들리게 하실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강의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모르는데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지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머물게 만들어버리는데, 그것이 곧 구원이란 말이다. 어린양의 보좌를 향해서 면류관을 다시 반납하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가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생각과 권한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우리와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칼바르트는 이러한 점에 대해서 그 근처까지는 어느 정도 접근을 했는데,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 안에서 구원하신다” 라고 해놓았는데, 그런데 정작 ‘예수 안’ 이라는 의미에 대해서는 본인이 풀다가 그냥 방치를 해놓은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죄의 몸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죄의 몸이 되게 하신 것은, 그것은 바로 여기서 인간은 완전히 배제된 상태임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죄의 몸이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즉 하나님과 죄의 몸 사이에서 일어난 그 계약을, 즉 죄의 몸으로 되게 하신 그 일이 그대로 어디로 주어지는고 하니까, 물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그대로 담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나오는 그 주되심의 주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있는 인간을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경우에만, 그런 경우에만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고 하니까,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이루어진 그 모든 계약으로 인한 혜택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일방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 덕분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의미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우리를 배제하고 전적으로 주님의 공로로만 전달이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 라는 것은 아주 크게 쓰고, ‘예수님 덕분으로’ 라는 것을 조그마하게 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 구원을 위해서, 즉 “역시 나는 구원을 받아도 마땅해” 라고 하는, 또 다시 이 ‘나’ 라는 것으로 되돌아오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안’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나’ 라고 하면서 크게 폼을 잡고서 들어갔다가, 하지만 그 안에서는 “이렇게 큰 ‘나’는 그야말로 하나님은 전혀 관심도 없었구나. 처음부터 오직 예수님에게만 관심이 있었구나” 라고 해서, 그 안에는 누구만 크게 되는가? ‘나’ 라는 것은 생각조차도 못하고, 전적으로 ‘주 예수’만 크지는, 바로 그런 현상이 ‘예수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몸은 그만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 몰트만의 경우에는 !!

그렇게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몰트만의 경우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이란 대목을 가지고 여기에 대해서 풀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하나님을 죽어야 하는지, 굳이 죽이지 않아도 구원이 되는, 충분히 그만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말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죽어야만 하는지, 그게 참으로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몰트만이 궁리 끝이 생각해낸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감정을 부추기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그러한 사랑을, 우리도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있기에, 그것과 일치를 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사랑의 감정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지, 마귀도 그 정도는 생각한다는 것이다(ㅋㅋ).

◈ 죄가 아닌, 십자가가 곧 원천 !!

전혀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죄의 몸으로 만드신 것은 자기 아들을 죽이기 위함인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죽이시는가? “죄인은 이렇게 죽어야만 한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은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것을 가지고 원인과 결과를 생각할 때, 즉 십자가를 하나의 원천이 아닌 결과로 본다고 하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는데, 즉 “예수님이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그 죄는 어디서 나왔는가?”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창세기 3장에서 우리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죄를 짓고 말았네. 너거들 힘으로는 해결이 안 되지? 그러면 나중에 십자가에 가서 내가 해결해줄게” 라고, 그렇게 죄를 짓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서 해결해주셨다고, 즉 “우리 인간의 죄가 먼저 있고, 후차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로 우리 죄를 해결했다”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만 예수님의 묵시가 그만 시간보다 뒤에 오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로마서 5장 14절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 즉 상징이다” 라는 것이 그만 완전히 헛소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니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죄의 몸으로 죽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인간의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가 그 원형이고, 그 결과로서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봐서 인간의 죄가 먼저이고 십자가가 나중에 나온 아이디어라고 하면, 그렇게 되면 성경전체가 그만 엉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귀를 만난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의 주장이 무엇인고 하니까, 십자가는 아무리 인간이 생각해도 인간의 아이디어로는 십자가가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인데, 그것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모르는데 말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영을 받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알 수 없다고 말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 사도바울 - 십자가는 아무도 몰라 !!

그렇다면 십자가에 도대체 무엇이 그리 기발하고 대단하기에, 무슨 엄청난 지식이 들어있기에, 우리 인간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다. 도대체 십자가가 왜 그렇다는 말인가? 사도바울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자체가 우상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말이다.

사도바울 자신도 역시 바리새인인데, 그런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모든 사고방식은, 즉 그들의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을 가리우기 위한 마귀의 전략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악한 영들의 권모술수로 말이다. 그러니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고방식 아래에서는, 메시야가 나오든, 구약의 선지자가 나오든 간에,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밖에 없는 악한 짓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당신은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극단적인 소리를 하게 되었는가? 당신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데 말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내가 만약에 옛날의 너희들과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더욱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라고 하는데, 즉 과거의 이론에 의하면 그것이 맞는 말인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아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 왜 하나님만 믿으면 안 되는가?

그러니 오늘날 교회에서도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굳이 예수님을 왜 믿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을 하나님보다 앞장세우는 것은, 그것은 마치 아버지를 아들보다 더 위대하다고 보는 것과 같은데, 그것은 이단이니 잡아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단이라는 말이다.

삼위일체 이론이 바로 그것인데, 아들보다 아버지가 더 위대하다는 것이 삼위일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주장과 똑같다는 말이다. 재벌 2세보다도 재벌이 더 나은 것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재벌 2세는 매일같이 사고나 치지 말이다. 술집에서 난동이나 부리고, 그래서 아버지가 와서 해결해준다는 것이다(ㅋㅋ). 또한 촌에서 올라온 순진한 아기씨와 연애나 하고 말이다. 그게 드라마의 주된 내용이고 말이다.

◈ 그것은 어디까지나 ‘니’ 생각이고 !!

아무튼 우리 인생이 주장하는 것은, “아들보다 아버지가 더욱 위대하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성경은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니 생각이고” 라는 것인데, 즉 ‘인간 안’에서 나오는 생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 그런 생각은 바로 마귀적인 사고방식이고, 또한 반(反) 복음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정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그런 사고방식이 바로 어떻게 했다는 말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못박아서 죽게 한 죄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그러한 아들보다 아버지가 더 위하다하고 여기는 사고방식이 말이다.

◈ 하나님은, 자기 이름 뒤에 숨어 계시기에 !!

그러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이름 뒤에 하나님이 숨어있는 식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 자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나타나야 알 수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나타나는 게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반드시 이 땅에서 사건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이름에 의한 사건이 주어져야 비로소 하나님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이름 뒤에 계시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사건은 우리가 만든 사건이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이름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이름이란 것이다. 그런 인간의 이름, 즉 ‘내 이름’으로 찾아가는 하나님은, 거기에는 허상과 우상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제가 생각해도 참 어려운데 말이다.

시편 132편을 찾아보겠는데, 누가 132편 5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시 132:4) 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아니하기를
(시 132:5)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

여기에 보면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라고 되어있는데, 4절에선 "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아니하기를' 라고 하면서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한다는 말인가? 지금 시편에서 중심지를 찾고자 하는데, 도대체 하나님께서, 물론 현재 있는 하나님은 가짜이고 말이다. 그러니 진짜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나타나는 지점이 어디냐는 것이다. 그게 바로 처소가 되고 성전이 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그 처소와 성전은 어디인가? 예루살렘인가? 시온성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시편 끝 부분에 가면 시온이고 예루살렘이고 간에 불타버리고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없는데, 그런데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찾을 수 없지만, 하지만 주께서 사건을 가지고 오시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비행접시처럼 말이다.

우리가 비행접시를 찾으려고 한다고 해서 찾을 수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비행접시가 나타나면, “아하, 거기에 있구나” 라고 하면서 알 듯이 말이다. 그렇게 나타나면 안다는 것인데, 그래서 5절에 ‘발견하기까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되기 이전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다메섹’ 이란 동네를 돌아다녔는가? 전혀 그런 적이 없는데, 그냥 자기는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주부가 설거지를 하고 고추를 다듬듯이 말이다. 그렇게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으면 그냥 오는데, 사건으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와버리면 그것이 선물이 되는데, 그런데 그 선물을 기다린다고 밖에 나가서 기다릴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택배기사가 전화까지 하면서 다 알아서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 아무도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

그것을 이 교재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무도 몰랐다” 라고 하는데, 즉 우리 인간은 죄가 무엇인지조차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율법으로 먼저 자기 죄를 알고, 그 죄를 해결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찾아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그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율법으로 죄를 알았다고 하는 그 죄는, 그야말로 죄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율법으로 아는 죄가 어떤 죄인고 하니, “나는 축복을 받을 만하다” 라고 하는 ‘자기 인정’ 인데, 즉 자기를 저주 편에 세우지 않고 항상 축복의 편에 세워놓고 시작하는 죄의 문제인데, 그러니 그 죄는 어디서 나온 죄인가? 선악과에서 나온 죄라는 것이다. “아하, 율법에 보니 바로 이것이 잘못이구나” 라고 말이다.

사도바울은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볼 때 율법이 몽학선생이지, 예수님도 모르고 율법을 보면, 율법은 전혀 몽학선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혹시 안개선생이라고 하면 모를까 말이다(ㅋㅋ). 자기를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말이다.
 
 
◈ 죄인은, 자기 죄를 규정하지 말라 !!

어제도 낮 설교시간에 어려운 이야기를 잠시 했는데, 즉 “우리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의 죄를 규정하지 말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하, 이것은 죄이구나” 라고 하는데, 왜 그것을 규정하느냐는 말이다. 모든 것이 다 죄인데, 굳이 따로 죄를 규정하고 말고 할 것이 무엇이 있냐는 말이다. 그러면 자기가 규정하는 그것이 죄라고 하면, 그 나머지는 의가 된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의’ 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의와 죄를 논하던 것은, ‘아담 안’에서, 즉 ‘내 이름’ 안에서 이루어지던 것이고, 하지만 ‘예수 안’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옛 모습 전부가 다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그 모든 것이 다 의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의 존재가 아닌 바로 교체작업 때문인데, 즉 주님의 교체기능으로 인해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안’에서 매일같이 교체를 해주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율법을 지켜라” 라고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러면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저주가 온다” 라고 하는 율법은 왜 지키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역시 율법인데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율법을 십자가에서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왜 지키지 않느냐는 말이다. 즉 “십자가를 믿는다” 라는 것은,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완료된 상태에서 지키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저주가 온다” 라고 하는 것을 지키지 못하는고 하니까, 자기를 저주 편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일방적으로 누구의 허락도 없이 축복 편에다 세워놓으니, 모든 성경해석을 다 자기가 축복을 받는 방향으로 해버린다는 것이다. 즉 “비록 나는 죄인이지만, 예수를 믿으니 복을 받을 만해” 라고 말이다.

우리 인간은 매일같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니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1장에서 “창세 전에 예정했다” 라고 하는 것도 역시나 자기 구원위주로 생각해서, 자칫 잘못하면 칼빈주의 예정론으로 그만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리스도 안’ 이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칼빈과 루터는 건드리지 말라 ??

개혁주의 신학의 분위기가 무엇인고 하니, 다른 것은 다 건드려도 칼빈과 루터는 제발 건드리지 말라는 것인데, 그러니 도대체 그들이 성경말씀의 그 살아있는 능력을 믿는 자들인지, 아니면 신학을 밀납인형으로 만들 듯이, 즉 “우리 집에는 유명한 신학자들이 열 명이나 있다” 라고 하는 자들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빈과 루터는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성경말씀 어디에 있는가? 전혀 없는데, 그래서 제가 서울의 개혁주의 신학협회에 가서 다니엘서의 ’70이레’ 논문을 발표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어서 운동력이 있다” 라고 일부러 넣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들 말하는 로마서 3장 10절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는 구절을 일부러 빼버렸는데,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모르는 3장 4절의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라는 구절을 일부러 넣어놓았는데,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이 구절을 잘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롬 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렇게 되면, 신학논문이나 설교자체가 처음부터 오류가 생기기 때문에, 그래서 3장 10절만을 자꾸만 거론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저는 그 논문을 쓸 때 일부러 바꿔치기를 했는데, 모두가 다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그냥 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오잉, ‘나는 거짓되다’ 라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참되다” 라고 하는 것만 믿지 말고, “인간이 거짓되다” 라는 것도 역시 믿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이 자기가 거짓되다는 것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건 자기 스스로에게 모순이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거짓되다” 라고 고백한 그것도 역시 거짓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판단할 기준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마치 헤어 디자이너가 자기 머리를 어떻게 하지 못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레데 사람은 모두 거짓되다” 라고 했을 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그레데 사람이라고 하면, 그것도 역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딛 1: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여기 이렇게 대야가 있는데, 거기에 물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 대야를 전체집합이라고 하고, 이 물은 부분집합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물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 부분집합의 집합이 대야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마치 여기 물이 부글부글 끓듯이 되어서 대야보다 더 커진다는 말이다.

◈ ‘BELONGING’과 ‘CONTAINING’ !!

이 부분집합을 ‘BELONGING’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물이 대야에 종속이 되면, 즉 ‘BELONGING’이 되면 대야가 더 큰데, 왜냐하면 물이 대야 안에 들어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물이 대야에 포함이 되면, 즉 ‘CONTAINING’이 되면, 부분집합의 집합이 대야보다 더 크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오우, 노!)

이것이 바로 사건이 되는데, 즉 인간의 몸에 주님의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인간은 그 주어진 사건을 자기 몸의 범위 안에서만 조작하고 꾸미려고 하는데, 하지만 실제로 그 사건은 주님의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보다도 훨씬 더 크게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지만, 오히려 자기를 비어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껏해야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 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핏줄이 더 큰가? 예수님이 더 큰가? 사람들이 보기에는 당연히 핏줄이 큰데, 그러니 예수님은 그 핏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종속이 된다는 것이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 속에 종속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하나님인데 어떻게 종속이 되겠는가?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포함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포함이 되었는데, 그런데 그 포함된 것이 무엇보다 더 강한고 하니까, 우리 인간의 시공간보다 더욱 더 커져버렸다는 것이다. 즉 만유의 주가 되셨다는 말이다.

(행 10:36)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시공간의 세계보다 더 크다고 하면,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이 알고 있는 의, 죄, 땅, 율법, 하늘 등등, 그런 모든 개념들이 우리가 생각하던 기존의 개념들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던 언약개념보다도 말이다.

◈ 주여, 누구십니까?

그렇게 모든 것이 더욱 더 큰데, 그런 큰 것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에게는 우리를 작게 만드는 사건으로만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질문형태’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즉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니 ‘주여!’ 라고 한 다음에,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여!’ 라고 한 다음에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질문을 함으로, 사도바울은 이제부터 자기가 주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에 의해서 새롭게 이해를 당해야만 하는 존재로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주님, 저는 무엇을 해야됩니까? 주님은 저에게 어떤 것을 맡겼습니까?” 라고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서, 그 지식을 자기 소유로 삼아서 천국에 가면, 그것은 자기 것이 된다고 여기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천국은 이미 우리보다 더욱 커서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즉 ‘예수 안’에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 전혀 새로운 개념이 !!

우리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죄의 개념, 의의 개념, 심판의 개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말이다. 그렇게 우리를 책망하시는 그 능력에 우리가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령의 객관적 사역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물론 신학이라는 것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런데 그 신학이 그만 고형화가 되고 굳어져버리는데, 신학이 사건화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신학에서 능력이 나오지는 않는데, 물론 능력의 결과로서 주어졌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능력의 결과를 붙들고 있으면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작년에 은혜를 받고, 어제 은혜를 받은 것은, 오늘이 되면 다시 우리 자신의 주체로 인해서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예수 안’에 들어감으로, 비로소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님은 죄의 몸이 되셨는데, 예수님이 그러한 죄의 몸이 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막상 ‘예수 안’에 들어가니, 우리 자신이 애초부터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아서 마땅한 죄의 몸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깥에선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강제로 우리를 자기 안에 넣어주시는데, 그렇게 일단 들어가고 보니, 이전에 자기가 바깥에서 생각했던 죄의 개념은 죄가 아니고, 일종의 겸손이나 자기 잘남, 즉 “저는 부족합니다” 라고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겸손이라기보다는 교만인데 말이다.

◈ 성령을 받지 않으면, 끝까지 !!

그러니 자기가 스스로 알았던 죄의 개념은 따지고 보면, 그런 죄의 개념을 알았다고 하는 것이 의가 되는 밑천으로서의 약간의 요령이나 수완과도 같다는 것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와도 같은 말이다. 이 법정은 끝까지 주님의 영을 받지 못했는데, 참으로 불쌍한 인간인데 말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지독한지 모르는데, 끝까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라는 고백을 끝까지 하지 못했는데, 물론 오늘날 목사도 역시나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끝까지 주님께서 성령을 허락하지 않으니, 입으로 고백이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입은 째져있는데도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 121페이지를 보자.

** 따라서 예수님의 몸에 죄가 있게 하신 능력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언약하신 언약 그대로 실시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 상황에 순종할 수 있었다. 사람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죄 있는 육신의 몸은 인간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벌어진 일의 참된 의미를 우리 성도에게 알려주시게 되면, 성도는 비로소 그 십자가에 이미 자신의 죄 있는 육신도 예수님과 더불어서 함께 달려 죽은 것으로 알고 믿게 된다.

◈ 예수님의 몸에 ‘죄가 있게’ 하신 능력은?

예수님의 죄 있는 육신의 몸은 인간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인간은 자꾸 관련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인데, 그런데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벌어진 일의 참된 의미를 성도에게 알려주면, 비로소 자신의 죄 있는 육신도 예수님과 함께 매달려 죽은 것으로 알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들어가 보니까, 우리에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미 주님께서 해결을 다 해버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몸 안에서 누가 죽었는고 하니까, 자기는 이미 죽은 자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이전에 살아있다고 여기면서 까불거리던 것도 역시 십자가에서 보니 어떠하다는 말인가? 이미 죽은 놈이 까불었다는 말이다. 이미 죽은 놈이 말이다.

◈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초청을 해주니, 비로소 자기가 과거에 살았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죽은 자로서 살아있는 ‘척’을 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데, 즉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산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데, 사실 이제는 그렇게 자기를 위해서 살 건더기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죽었고 지금도 죽었으니, 그런 죽은 놈을 위해서 살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직 산 자는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그것을 두고 ‘새로운 피조물’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어떠한고 하니,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 것이 남아있지를 않다는 말이다. 자기를 위해서 살 것이 말이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렇다면 이때 성도가 자신의 ‘죄 있는 육신’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어디까지나 십자가에서 나온 성령의 사역이지, 결코 인간이 알아채거나 눈치를 챈 것은 전혀 없다. 이제 성령을 통해서 하나 둘씩 그 내막이 성도에게 알려질 것이다. 왜 자신이 ‘죄 있는 육신’인가를 말이다.

그렇게 바르게 살고 의롭게 살려고 했던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왜 자기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는지를, 바로 그 내막을 성령께서 ‘예수 안’으로 초대받은 자들에게 하나 하나씩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물론 사도바울도 성령께서 알려주셔서 알았고 말이다.

이제 교재 122페이지를 살펴보자.

** 먼저 성도 자신의 ‘죄 있는 육신’에 대한 기존의 자기 해석이 거부당할 해석임을 고백하게 된다. 내가 내 자신을 죄 있다고 규정한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진정한 ‘죄 있는 육신’으로서의 ‘나’에 대한 해석은, 어디까지나 연속적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언약을 통해서만 규명된다. 인간은 처음부터 ‘죄 있는 육신’이었기에 죄만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시51).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여기서 나오는 ‘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자꾸만 십자가 외에 다른 근거에 의해서 자신의 죄를 해석하고자 하는 그 경향성을 뜻한다. 십자가와 결부시키지 않고 단독적으로 자신의 죄를 논하고자 하는 이 성질이 곧 ‘죄 있는 육신’이기에 나올 수밖에 없는 성질이다.

그러니 십자가 말고, 자기가 간음하고 살인하는 것들이 무엇인고 하니, 부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즉 우리 인간이 무슨 그렇게 큰 죄를 지었느냐는 것이다. 기껏해야 겨우 50명 정도를 죽이고, 100번 정도 간통을 하고, 그리고 횡령을 150억 정도 했는데 말이다. 그게 무슨 그렇게 죄냐는 것이다. 성폭행을 해도 겨우 15명 정도에게 하는, 그 정도의 작은 죄라는 말이다.

◈ 인간의 행함으로는 죄를 지을 수가 없어 !!

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온전한 죄를 모르니까, 여기서 그냥 죄를 추론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함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말을 하고 보니 참으로 희한한 가설이 되고 말았는데, 즉 우리는 아무리 해도 인간의 행함으로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죄는 누가 짓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죄는 누가 보여주는가?” 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고마워하는데,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행하든 행하지 않든, 죄라고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결정된 사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죄를 짓지 못하는 죄인 !!

그렇게 이미 결정된 사항을 우리의 행함으로는 아무리 해도, 우리는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는가? 우리는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즉 죄도 짓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말이다. 오늘 정말 별 희한한 이야기가 다 나오는데, 즉 “죄를 짓지 못하는 죄인” 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법에 전혀 맞지를 않는데, 어법이라고 하니 옛날 생각이 나는데 말이다(ㅋㅋ). 죄도 제대로 짓지 못하면서 어디서 감히 죄인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왜 죄도 제대로 짓지를 못하는가?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다윗의 잘못이 무엇인고 하니, 죄도 짓지 못하는 죄인인 주제에 밧세바와 간음을 함으로 말미암아서, 그 밧세바와 간음한 것 외에 다른 것들은 죄가 아닌 것으로 여겼던, 바로 그것이 다윗의 죄였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말이다.

그러니 인간의 선악적인 바닥은, 그런 우물은 누군가가 외부에서 찾아와야만 되는데, 그래서 나단이, 즉 주님이 찾아오셔야만, 우리는 죄를 짓는 것과 짓지 않는 것을 구분할 위치에 전혀 놓여있지 않다는 것을, 그것을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성령을 받아봐야만, 비로소 자기가 죄도 제대로 짓지 못하는 죄인임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우리가 얼마나 마음이 편안한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태어났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CONGREGATION!’ 인데, 왜냐하면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으니 말이다. 그런 편안함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 오직 주님의 십자가뿐입니다 !!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무엇만 이야기하게 되는고 하니까, 자기가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하라는 것이다. 즉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십자가뿐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면, 또 다시 자기의 개인적 욕심이 되고 마는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관심사는, 자기가 십자가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를 증거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루어진 그 언약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란 말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십자가를 입에 침을 튀어가면서 말해도 자기 구원을 자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과연 성령을 받았는지 수상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다. 지금 자꾸 전화가 오는데, 오늘 강의에 대해서 항의하는 전화인가? 아니면 찬성하는 전화인가?(ㅋㅋ)

이제 교재 123페이지를 살펴보자.

** 성도가 여전히 ‘죄 있는 육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이 정작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십자가의 의의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있는 육신’이 된 것에 대해서 너무나 서러워하면 안 되고, 오히려 우리는 항상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가지고 있던 그 육신의 몸에 늘 동참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동참을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시간의 저촉을 받지 않는데, 왜냐하면 묵시적 차원에 들어섰기 때문에 말이다. 즉 언제나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있으면서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묵시세계의 법칙을 우리가 적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 역사는, 묵시를 드러내기 위해서 !!

물론 역사적인 차원에서는, 우리가 죄인이 되고 나서 의인이 되면 다시 죄인이 될 수가 없는데, 물론 그 대목도 성경에 있지만 말이다. 즉 역사적 차원에서는 아직 우리의 구원이 남아있지만, 하지만 이런 역사적 차원은 역사적 차원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묵시가 역사와는 다르다는 것은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차원에서의 구원이 남아있다는 것을 증거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에서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시는 그것을 능가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역사적 차원이, 즉 아직도 구원이 남아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역사 그 자체로서 맞잖아?”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너는 왜 머리카락이 노란색이지?

예를 들어서, 어느 초등학생을 보고 “너는 왜 머리카락이 노란색이지?” 라고 한다면, 그 학생이 대답하기를, “저의 머리카락은 빛의 노란색만 반사하고 나머지는 모두 흡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차라리 “우리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노란색입니다” 라고 하든지 해야하는데, 그것을 자체 내에서 설명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체 내에서 설명하는 것은, 즉 “저의 머리카락은 노란색만 반사하고 나머지는 모두 다 흡수하고 어쩌고저쩌고”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자기 구원으로 되돌아오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린도후서 1장에서처럼, 왜 우리에게 구원이 남아있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구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아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묵시세계를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후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 1: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후 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따라서 성도에게서 지속적으로 ‘죄 있는 육신’의 성향이 계속 나오도록 하신다. 이것도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새 언약의 연속적인 적용방침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피’로만 구원됨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도에게서 자꾸만 피 이외의 다른 방식을 동원해서 구원되어 보려는 성향이 지속적으로 터져 나오게 되어있는 것이 언약적 원리이다.

◈ ‘피’ 앞에서, 부정되고, 또 부정되어야 !!

그러니 언약은 피 자체를 증거하기 위해서, 피가 인간의 구원에 의해서 소멸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구원은 사라지고, 피만 자꾸 남아서 증거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피는 묵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말이다. 인간의 역사, 즉 인간의 시공간을 배제하고 말이다.

바로 그러한 묵시적 차원에서의 피이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 흘렀던 역사 속의 피가 어떻게 묵시와 연결이 되는지,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의 구원론적 주장은 피 앞에서 제거가 되고, 또한 부정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새 언약이란 피와 살이기에, 그 피와 살이 나와야만 하는 죄악 된 바탕까지를 포함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도는 새삼스럽게 은혜를 더 받기 위해서 죄를 더 지을 필요도 없이, 평생에 걸쳐서 ‘죄 있는 육신’의 행세를 하게 된다.

◈ 십자가에서 말하는 ‘죄’란?

왜 그런고 하니, 이것이 포함되었기 때문인데, 어디에 포함이 되었는가? 새 언약을 증거하는 바탕으로서의 기능을 해야되기 때문에, 계속 우리는 죄 있는 육신의 행세를 해야되는데, 즉 십자가에서 죽었던 그 죄가 계속해서 우리에게서 나와야 된다는 말이다. 십자가에서 죽었던 그 차원의 죄가 말이다.

그러면 그런 차원의 죄가 무엇인가? 인간은 자기 구원만 챙기고, 주님의 십자가에게는 관심이 없는, 그런 죄가 계속해서 우리에게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은혜를 받고, 돌아서면 곧 바로 그 십자가를 우상화시키는데, 즉 “나는 십자가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이 매일같이 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때문에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가 동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만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십자가를 위해서 동원이 되었으니 나는 구원을 받은 것이 맞지?” 라고 또 다시 자기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 ‘알랭 바디우’에 의하면 !!

그래서 ‘알랭 바디우’ 라는 철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일단 사건이 터지게 되면 그 사건 주변에 우리 인간의 주체가 형성이 되는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건이 터진 그 공백을 우리 주체가 그만 점령해서 메워버린다는 것이다. “나는 사건의 주인공이었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주인공이 되는데, 하지만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셈’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 둘, 셋, 넷, 그렇게 셈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알랭 바디우가 참 어려운 말을 했는데, 그렇게 셈이 가능하다는 것은, 즉 여기에 난로 하나, 의자 둘, 그렇게 셈이 가능하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러게 난로와 의자가 각각 주체가 될 때만 셈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그렇게 말이다.

◈ 나는 사건의 목격자이다 !!

하지만 사건은 무엇을 깨는고 하니, 셈을 허용하지 않는데, 즉 셈을 할 수 있는 주체를 그만 폭발을 시켜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없애버리면 주체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즉 사건이 터지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무슨 일이 있었지?” 라고 하면서 들여다보는 순간 어떻게 되겠는가? 그 순간만큼은 관심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즉 방금 터진 사건을 기웃거리면서 들여다보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주체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에, 그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건을 목격한 그 구멍이 난 자리에 자기 주체를 가지고 그만 메워버린다는 것이다. 즉 “나는 사건의 목격자이다” 라고 하면서 주체를 가지고서 메우게 되면, 그만 주체가 형성이 되면서, 자기는 또 하나의 셈이, 즉 하나의 헤아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인데, “나는 어제 이랬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헤아림의 대상이 되는 것이 위로 올라가서는 일자(一者), 즉 신(神)과 연관이 된다는 것이 바로 알랭 바디우의 주장이란 말이다.

◈ 그러나, ‘들뢰즈’의 경우에는 !!

그런데 ‘들뢰즈’ 라는 철학자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일자(一者), 즉 온 천지를 다 통합하는 하나의 주체로서 신이 있다고, 그렇게 들뢰즈는 신이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랭 바디우는 그것이 아니고, 일자(一者), 즉 신은 없고, 그렇게 신을 일자(一者), 즉 하나로 보는 것은 인간이 하나의 주체로서 형성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오는 일종의 그림자이고 결과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알랭 바디우와 들뢰즈의 철학에 대해서는 이번 2011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때 강의할 예정인데, 아마도 겨울이라서 얼마 참석을 하지 못하지 싶은데 말이다. 그러니 약 20명이나 30명 정도 속딱하니 모여서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ㅋㅋ).

◈ 알랭 바디우의 ‘셈’에 대해서 !!

그건 그렇고, 아무튼 사람이 헤아림을 할 때, 먼저 자기부터 헤아리는가? 아니면 남부터 헤아리는가? 무슨 말인고 하니, “1, 2, 3, 4” 라고 그렇게 헤아릴 때, 그 모델을 누구로 잡는가? 자기를 모델로 해서 헤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우리에게 뿔이 있다고 하면, 뿔이 없는 자들을 보고서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니, 저게 무슨 인간인가? 뿔도 없는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하’ 라는 철학자가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원숭이 신을 믿는 자는 꼭 원숭이를 닮았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랭 바디우가 알았는데, 즉 ‘신’ 이라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모델로 해서 시작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게 되면, 실제로 그것이 공집합인데, 즉 아무 것도 없는 것이 기준이 되어서, 하나, 둘, 셋, 그렇게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1은{φ}인데, 즉 아무 것도 없는 것을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고, 2는{φ,1}라고, 그렇게 설명하는 게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다시 설명을 하겠는데, 아무튼 하나, 둘, 셋, 그렇게 셈을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모델로 해서 보았다는 것이다.

◈ 상대방을 존중해줄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를 !!

그러니 사건이 터지게 되면 일단 공백이 생기고, 일단 그 공백에서 1, 즉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어떤 사건에 의해서 ‘내’가 되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을 자기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어떤 사건에 의해서 저렇게 되었을까?” 라고 하면서, 상대방을 존중해줄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의 밑바탕에 말이다.

그러므로 윤리도덕은 다른 게 아니라, 자기 입장에서 보게 되면 그런 윤리와 도덕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그 어떤 사랑이든, 그 어떤 진리이든 간에, 자기 입장에서 보게 되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 예뻐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은 천대할 것이 뻔하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윤리이고 도덕이냐는 것이다.

그러니 윤리와 도덕이 되려면 먼저 자기에게 무슨 사건이 벌어져야 하는가? 자기는 개뿔도 아니라고 하는 사건이 터진 상태에서 바라보게 되면, 즉 자기가 기준이 아니라, 자기에게 터진 것이, 즉 그렇게 터져서 ‘나’ 라는 것도 제거되고 사라져버린 그 사건을 기준으로 해서 상대방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상대방이 하는 것도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도 보이지 않는 어떤 사건의 연발성이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그 사람의 운명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진정한 윤리이고 도덕이 아니냐는 것이다.

◈ 왜 라면도 끓이지 못하는 사건 속에?

그러니 “마누라가 되어서 라면도 하나 끓이지 못하나?” 라고 하지 말고, “내 아내는 왜 라면도 끓이지 못하는 사건 속에 휘말려 왔을까?” 라고 하면서, 그렇게 이해해주는 것이 얼마나 상대방을 배려해주는 것이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나는 라면을 끓이는데, 너는 왜 끓이지 못해?”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라면도 끓이지 못한다고 구박을 받는 여자라도, 만약에 그 여자가 다른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에게 시집을 갔더라면, 그 여자는 그런 설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남편이 뭐라고 하겠는가? “나는 팔다리가 없는데, 당신은 나에게 없는 팔다리가 있네. 라면과 같은 것은 끓이지 못해도 괜찮아. 당신에 나에게 시집을 온 것만 해도 나는 너무 감사해” 라는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팔다리가 없는 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자는 것이다. 자기 것이 없다고 하는 것, 그것을 두고 ‘결핍’ 이라고 하는데, 즉 뭔가 자기에게 그만큼 있다고 다가서지 말고, 자기는 그 정도로 없는 인간이라고 하면서 다가설 때에, 그렇게 그 빈칸과 빈칸이 모아질 때, 거기서 바로 ‘사랑’ 이라는 공동영역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 현숙씨, 못해줘서 미안해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있음’을 가지고 내세우게 되면 부부사기에도 경쟁이 형성되는데, 다음 주에 할 주례사 내용이 지금 막 튀어나오는데 말이다(ㅋㅋ). 즉 “나는 이만큼 해왔는데, 너는 무엇을 해왔노?” 라고 한다면,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요? 다들 별로 해준 게 없어서 대답이 없는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못해줘서 미안해” 라고 한다면, 그러면 상대방에서도 “저도 그렇게 못해주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만날 때, 그러면 ‘너와 나’가 삭제된, ‘너와 나’가 개입하지 않는 공동의 공집합, 즉 ‘여백’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비어있는 그 속에서 새로운 사건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 ‘여백’을 통해서 !!

지금까지 제가 굉장히 어렵게 설명을 했는데,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 이렇게 그림을 그릴 때, 자기는 사람을 그린다고 그리는데, 그런데 그것이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보통은 그냥 이렇게 사람 그림이 있으니 사람인 줄 알지만,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여백이 있음으로서, 그 여백과의 차이를 통해서 사람을 그린 줄 안다는 것이다. 만약 여백이 전혀 없이 꽉 찼다고 하면, 그게 사람을 그린 줄 어떻게 알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여백, 즉 ‘비어있음’을 통해서 그 안에 새롭게 부각된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동양화의 기법인데, 즉 비워둠으로 말미암아서 가득 차 있는 것보다 비어있는 것에 의미를 더 주자는 것이다. 명절 때 사용하는 동양화 말고 말이다(ㅋㅋ).

지금 강의가 별로 어렵지 않지요? 사건이 터지지 않아서 그러한데(ㅋㅋ), 그러니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무엇인고 하니, 기독교에서 윤리와 도덕을 이야기하지만, 그런데 철학을 공부해보면 어떠한고 하니, 소위 자기 딴에는 목사랍시고 고상하게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데, 하지만 철학에서도 그 정도는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방금 말한 알랭 바디우처럼, 그런 사랑의 공동체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 아무리 도를 닦아도, ‘죄’는 몰라 !!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사실 그것마저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기존의 개혁주의에서 주장하는 윤리와 도덕이 얼마나 무식한 주장이냐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나 다른 종교에서 도를 닦는 인간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것을 한번 공부해보면, “야, 기독교에서 말하는 윤리와 도덕은 그들 근처에도 가지 못하네. 정말이지 초월적인 모습을 보여주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제 아무리 산 속에서 도를 닦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더라도, 그렇게 자기들이 생각한 그것이 바로 ‘죄’ 라고, 즉 ‘죄 있는 육신’에게서 나왔음을 인정하겠는가? 당연히 하지 않는데, 사실상 때려죽여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이만큼 똑똑한데, 그게 무엇이 죄란 말인가? 오히려 진리에 가깝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주님은, 날마다 교체시키는 작업을 !!

하지만 우리는 이유고 뭐고 간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것도 역시 죄가 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즉 ‘죄 있는 육신’으로 태어났으니 말이다. 그런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정도로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날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의를 교체시키는 작업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12년 동안을 하혈하던 여인이 자기의 부끄러움을 알면서도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을 만졌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는 그런 부끄러움을 당해도 마땅하다는 것이다. 아마 다른 여자들 같으면, 예수님에게 달려들어서 옷을 다 찢고 했지 싶은데,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자기 인생을 그렇게 망쳐놓았느냐고 말이다. 마치 김수현 작가처럼 말이다.

그 할머니는 자기 마음에 조금만 들지 않으면 그냥 달려들어서 다 박살을 내고 마는데, 이번에 자기 드라마의 동성애 장면을 촬영하는데 성당에서 약속을 어기고 쫓아내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실제 방송에서도 삭제를 당하고 말이다. 아무튼 성질은 자기가 실컷 부려놓고는, 마치 걸레로 자기 얼굴을 닦은 것 같다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김수현 작가가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은 왜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느냐는 것이다.

(마 9: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마 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 도대체 누구에게 감사하자는 것인가?

알랭 바디우는 그것을 그냥 ‘비어있음’ 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그것이 죄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대상 앞에서 죄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다만 “인간은 부족하다. 인간은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새로움에 대해서 대처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냥 누리는 것으로 감사하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에게 감사하자는 것인가? 그것은 모르는데, 아무튼 그냥 감사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은 결국 누구에게 감사하는 것이 되는고 하니, 그런 것도 다 아는, 그렇게 똑똑한 자기에게 감사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에게 감사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스티브 호킹 박사가 주장한 것과 동일한 것인데, 그가 최근에 “우주는 신이 창조하지 않았다” 라고 했는데, 즉 우주에는 신이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이만큼 똑똑한데 굳이 신이 왜 필요하냐는 것이다.

◈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123페이지 마지막 부분에 보면 성경구절이 하나 나오는데, 히브리서 9장 22절 말씀인데 말이다. 거기서 뭐라고 하는가?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라고 하는데, 즉 물건에 피를 바르면 정결케 된다는 것이다.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 물건에 희생양의 피를 바르면 왜 거룩한가?

그렇다고 하면, 여기에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물건에 희생양의 피를 바르면 왜 거룩한가?” 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지금까지 공부를 했으니까 이제 여러분이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앞에 정답이 나와있는데, 무엇을 쫓아서 그렇다는 말인가? ‘율법을 따라’ 라는 것이다. 즉 율법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 율법의 끈이 어디까지 연결이 되어있는지 한번 따라가 보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따지면 율법이 먼저인가? 십자가가 먼저인가? 분명히 율법이 먼저인데, 나중 신약시대에 가서 비로소 십자가가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먼저 율법으로 죄를 알고, 나중에 십자가로 그 죄를 용서받으면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 율법이 먼저인가? 십자가가 먼저인가?

그런데 그게 아니라, 율법의 끈을 따라가 보면, 율법보다 십자가의 계획(?)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러니 율법은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그림자이고 상징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게 제 말이 아니고 히브리서에 나오는데, 즉 율법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 죄를 십자가에서 씻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제대로 드러나 줘야,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아하, 십자가를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구나” 라는 것을,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 차원이 아니고 말이다. 즉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가, 과연 그럴까?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매일같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즉 “내가 지금 예수님을 헛되이 믿는 것이 아닌가? 전혀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을 왜 믿는다고 하고 있지?” 라는 점인데, 물론 그러면서도 신은 인정을 하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보이지 않는 것이 정상이니 말이다.

그래서 “신이시여! 신이시여!” 라고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그런 점은 편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과연 그럴까?” 라는 것인데, 그런 생각은 매일같이 든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말이다.

◈ 십자가의 사건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기준 !!

하지만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해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을 신의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고, 또한 실제로 부활했다고 하는, 십자가의 사건을 가지고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임했기에 그것이 가능한데, 그러니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자기가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십자가라는 말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오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운명을 쥐고 계신 분께서 오셔서, 우리가 죄의 몸의 몸인 것을, 그렇게 우리의 정체를 드러내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깨달았사오니, 이제는 매일같이 주님의 의가 어떤 식으로 우리의 의를 갈아치우는지, 그것이 날마다 증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10,31 오후 11시 15분에 마침.

                                                                            원천은 십자가 !!
                                                     그런데 왜 삼팔선을 넘나드는 기분이 들지?
 
 
 
[알랭 바디우의 철학] 1
                                                                   2006-11-27 이근호
 

??왜 그 무엇이 도대체 없지 아니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존재를 중심으로 해서 계속 있어왔다. 있음에 대해서는 있음보다 더 상위의 근거란 있을 수 없으며 있음 그 자체가 있음의 이유 또는 근거임을 지시한다. 말하자면 이유 없는 있음에 이유를 부여하는 것을 넘어서 있음 그 자체가 있음의 이유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있음이 있음 자체의 근거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있음이 있음으로 읽히게 되는 계기에 주목하자는 것인데 이 계기란 바로 ??있었다고 없어지는 사건?? 즉 ??없어짐의 체험??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만일 ??없어짐??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있음은 경계지어질 것이 없는 전체여서 결코 ??있음??으로 드러나거나 새삼 체험될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없어짐은 있음에서 없음으로의 이동으로서 있음과 없음을 서로 구별하게 하고 또한 서로 연관시키는 기제가 된다. 생명선의 견지에서 보자면, 있음의 이유가 있음 자체라는 것은 ??없음이 있음을 삼켜버림??이라는 사건/체험, 즉 죽음의 도전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며, 따라서 없음이야말로 있음이 비로소 소중한 ??있음??으로 읽히게 하는 결정적 계기이다.

무릇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러하지만 우리가 관심하려는 인간도 결국 ??없어질 있음??을 잠시 영위할 뿐인데, 실상 ??없어질 있음??만이 아니라 ??없었던 적도 있는 있음??이기도 해서 결국 ??잠시의 있음??의 앞 뒤로 없음이 철저히 에워싸고 있는 바 ??없음??에 둘러싸인 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있음이 없음에 둘러싸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있음만큼은 확실히 있음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불가피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있음은 그 바깥에 없음으로 둘러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없음을 싸안고 있는 있음이기 때문이다.

즉 비록 있음이 진행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는 죽음의 가능성을 그 삶 안에 품고 있는 있음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없음??에 둘러싸여 있을 뿐 아니라 없음이 그 안에 드리워져 있는 있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디우에 따르면, 이러한 ??있음의 존재론??은 있음을 없음과 대비시켜서 사유하기 때문에, 결코 존재로부터 존재와 다른 것을 연역해 낼 수 없다. 계속 존재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존재조차 없음을 낳기에 결국 ??있음의 존재론??은 치명적으로 주체의 소멸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있음의 존재론에서는 주체의 모든 형태가 모든 존재자에게도 속하지만, 이와 동시에 자신을 과제로 삼고서 풀어 내야 할 그 숨겨짐도 없음에 의해서 애매하게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디우에 의하면 수학적인 존재론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왜냐하면 수학적인 존재론은 우선적으로 있음의 존재론이 제시하는 존재의 개념을 포기하게 만들고, 그에 못지 않게 주체의 실재적인 면이 드러나는 차원으로서의 사건의 가치를 드높이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수학적인 존재론을 따라서 형식적인 언어로 구성된 진술들로 질서 있게 말해질 수 있다면, 자체적인 수학적 논리에 의해서 실재적인 존재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 즉, 주체적인 개입이 동반된 사건에 의해서 없음에 빨려들어가지 않는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있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느껴진다든지 또는 감지된다든지 하는 등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말하자면, 어떤 것이 자기 자신에 해당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구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흔히 있다고 고려되는 하나(1)란 무엇인가? 바디우에 따르면, 하나가 있다는 것은 아주 엄격하게 말해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즉 하나라는 것은 애초부터 있는 근원적인 현존이 아니라 그 어떤 작용의 결과일 뿐이다. 그 어떤 것도 결코 스스로를 하나로서 나타내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고 해석되고 있을 뿐이다. 또는 하나라는 것은 불안정한 다수를 안정적이게 하는 하나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있다고 고려되는 하나를 하나의 존재자로 취할 경우에는 그 하나의 실재성이 곧 구성상의 다수성이자 안정적인 다수성으로 나타나지만, 실재적인 존재의 관점에서 하나를 취할 경우에는 그것이 곧 불안정한 다수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는 그 자신이 다수가 아니기 때문에 다수를 안정적이게 하는 법칙일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진 대상 바로 그 자체 속에서 하나가 배제된 연속성을 직관할 수 있는 바, 이 직관은 곧 존재의 불안전성에 대한 직관, 즉 다수는 스스로를 다수화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하여 다수는 다수들의 다수이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 사실에 대한 직관과 다른 것이 아니다. 세계에 드리운 하나의 그 묵중한 현존이란 한마디로 말해 순수 다수성의 현시 위에 가해진 작용이요 법칙일 뿐이다.

따라서 바디우는 우리가 하나(1)라는 함정 안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황과 작용 간의 구분을 행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우선 다수로서 현시된 존재는 그 자체가 불안정적이다. 반면에 상황은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진 다수, 따라서 언제나 안정적인 다수를 말하며, 이때 작용은 상황을 자신의 안정성 안에서 현시되도록 하는 셈, 즉 ??하나-로-셈하기??를 말한다.

따라서 만약 존재가 하나라는 가능성 안에서 현시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 하나-로- 셈하기라는 작용 덕분이다. 바디우가 상황 안에서 안정성을 누리는 합치는 그 어떤 작용에 따른 결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 또는 합치는 그 어떤 구조 작용에 따른 결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 또는 합치는 타성의 다수성을 불러오는 법칙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렇게 볼 때, 바디우는 이로부터 얻게 되는 존재론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자명해진다. 그것은 곧 존재와 다수의 등가화라는 가르침. 따라서 존재론은 그 모습 그대로인 한에 있어서는 불안정한 다수성들에 대한 이론일 수만 있다는 가르침이다. 존재는 그 어떤 기초도 그 어떤 의미도 지나지 않는 순수 다수성이다. 또는 오로지 다수성들로만 이루어진 평면만이 존재한다. 존재와 다수의 이 같은 등가화는 구체적으로 다음의 사실을 함축한다.

첫째, 존재에게 있어서 하나 또는 일자란 없다. 존재는 그 어떤 전체도, 그 어떤 전체성도 인내하지를 못한다. 달리 말하자면, 순수 다수성은 통합적인 다수성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정확하게 말해 상황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의 수준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다수가 어떤 조건들을 거쳐서 스스로를 다수로서 인지되도록 한다고 할 때의 바로 그 조건들의 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하나는 다수로 하여금 그의 순수한 현시를 포기하게끔 하는 작용이다. 하나는 다수로 불안정한 다수의 타자를 위한 존재인 것이다.

둘째, 공백으로서의 존재를 사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순수 다수 또는 불안정한 다수에게는 결코 그 어떤 원자적인 실재성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는 존재라는 어휘를 빌려 표현하자만 존재는 차라리 존재자의 모든 현존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존재로서의 존재를 사유함에 있어서 하나 또는 일자의 실존을 긍정함으로부터 출발하는 일, 따라서 존재의 안정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일은 애초부터 배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존재에게 있어서 하나 또는 일자란 없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공백 또는 공집합으로서의 존재를 긍정해야만 하고, 따라서 존재의 불안정성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존재는 자신의 실존함이 실존치 않는 것, 즉 공백이요 공집합이기 때문에, 존재로서의 존재를 사유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그 어떤 실존함도 자신에게 속한다고 말해질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실존한다는 사실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것이다.

??존재와 사건??이 지니는 가장 큰 힘은 존재를 공백으로서 또는 무한하며 불안정한 순수 다수로서 사유해야 함을 주장한 데 있다기보다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바로 이 공백으로서의 존재를 보다 깊이 있게 사유했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결코 간단할 수 없는 이 작업을 바디우는 ??어떻게 풀어 나가는 것일까???

말 그대로 공백으로 정의된 존재를 또는 그냥 간단하게는 공백을 과연 그는 ??어떻게?? 보다 더 깊이 있게 사유해 나가는 것일까? 바디우에 따르면 존재는 무한하며 불안정한 순수 다수이지 공백이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사유는 반드시 모든 강도나 질을 배제한 상태에서 오로지 다수만을 고려하는 사유이어야만 한다.

상황 그 자체는 ??존재는 그 어떤 전체성도 용납하지 않는 무한하며 불안정한 순수 다수이다??라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다수가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무엇인가??? 또는 ??어떤 다수의 존재함이 우리에게 확인된다는 것을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경우, 우리는 이에 대한 답변을 결코 순수 다수로서의 존재 안에서는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순수 다수로서의 존재는 그 어떤 전체도, 그 어떤 일자도, 그 어떤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의 불안정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우리는 순수 다수로서의 존재에 의거하여서는 그의 존재함이 실질적으로 확인된 어떤 다수의 위치를 결코 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디우에 따르면 존재함이란 곧 ??거기에 있음??, ??거기에 위치 지정 되어 있음??을 말한다. 또는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존재는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거기에 있는 존재??, 즉 현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난 어떤 다수의 위치지 지정을 위해 그 어떤 공간을 반드시 필요로 하게 되며,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위치 지정의 공간?? 즉 상황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존재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공정된 공간 또는 장소란 없으며 또 존재 그 자체는 모든 관계를 벗어난다. 이 점을 상황의 필연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디우가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황에 귀속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이것을 집합이론의 형식주의에 의거하여 거ε∈S 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ε는 존재함이 확인된 어떤 다수를, 그리고 S는 상황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공백으로서의 존재로부터 그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집합들을 끄집어낼 수 있으며 이때 이 집합들은 ??공백의 양상들로서의 상황들??을 이룬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을 말해 준다. 즉 우리가 앞에서 존재의 사유 방식으로 제시한 명령(공백으로서의 존재를 긍정해야만 하고 또 공백으로서의 존재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은 오로지 공백 안에 머물면서 오로지 공백만을 거론하자는 말이 아니다. 차라리 이 말은, 마치 앞에서 우리가 하나 또는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그에 맞물려 공백으로서의 존재를 이야기하였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상황과 더불어서 존재를 이야기하되 언제나 공백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가야만 함을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를 공백으로 고려하는 한에 있어서 상황은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공백에 대한 사유를 오로지 공백만을 가지고서 어떻게 진전시켜 나갈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공백의 양상으로서의 상황이란 무엇인가?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상황에 귀속하는 다수란 무엇인가?

또는 존재함이 확인된 다수, 그러면서도 모든 질과 강도 등이 배제된 다른 다수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수학적인 의미의 집합??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바디우가 수학적인 숙고 방식 중 특히 집합론에 의거하여서 공백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사유를 전개시켜 나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바디우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무한한 다수로서의 존재의 본래 모습은 ??초과??인 것이다.

수학적으로 볼 때 하나의 집합에는 두 개의 관계들이 공존한다. 원소와 집합의 관계에 해당되는 귀속과 부분들 또는 부분 집합들의 관계에 해당하는 포함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집합 a의 모든 부분집합들로 이루어진 집합 p(a)는 본래의 집합 a와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또 다른 하나의 집합임을 보게 된다.

귀속들 또는 원소들을 하나의 고려 아래 세는 집합 a와 포함들 또는 부분집합들을 하나의 고려 아래 세는 집합 p(a) 사이의 이런 ??간격??을 바디우는 ??존재의 막다른 골목이 자리 잡고 있는 점??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현시된 하나의 다수가 주어질 경우, 그의 부분집합들이 구성하는 하나- 다수는 최초의 다수보다 언제나 본질적으로 더 크다.

또는 상황이라는 어휘를 빌려 표현하자면, 상황 안에 포함되어 있는 다수이되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는 언제는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 바디우가 ??간격?? 또는 ??존재의 막다른 골목이 자리 잡고 있는 점??이라는 표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 즉 귀속 위에서 보게 되는 포함의 초과??가 바로 이것이다.

집합 a의 모든 부분집합들로 이루어진 집합 p(a)의 원소이되 본래의 집합 a의 원소는 아닌 집합이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는, 또는 상황 안에 포함되어 있는 다수이되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가 언제는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는 초과점의 정리는 철학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의미들을 지닌다.

먼저 초과점의 정리는 일자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재차 확인시켜 준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는 자신에게 포함되어 있되 자신에게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를, 따라서 하나 자신을 초과하는 다수를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다수도 그가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를 행하는 상태 안에 있지 않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다음으로 초과점의 정리는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는 실존하는 것들, 그렇지만 그들이 구성하는 보편적인 것(예를 들어, 계급, 집단, 조직 등 )을 실재적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운 그런 실존하는 것들이 함축하는 역설적인 유형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은 분명히 상황에 귀속하지만, 그 상황에 귀속하는 개인 또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계급(즉 상황의 부분집합으로서의 계급)은 상황에 귀속하지 않는다. 계급은 귀속의 세계를 초과하는 것이다.

상황의 상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상황은 공백의 그 어떤 양상에 불과하다는 사실부터 인지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백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공백으로부터 그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집합들을 끄집어낼 수 있다. (물론 공백들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집합들은 결과적으로 볼 때 공백을 유일한 원소로 지니는 집합, 즉 공집합으로 환원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공백의 유일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공백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존재의 단순하면서도 유일한 이름인 공백으로부터 각각의 복잡한 이름들이 갈라져나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갈라져 나온 이름들에 의해서 상황들이 특징지어지게 된다. (모든 상황이 공백의 그 어떤 양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정확하게 말해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처럼 모든 상황이 공백으로부터 이끌어 내어지면서 새로운 다수들의 무제한적인 생산이 전개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공백과 상황 사이에 놓여 있는 근원적인 차이점을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상황은 자기에게 고유한 그 어떤 구조, 즉 그 어떤 안정성을 향유함에 반해서, 이와는 반대로 공백은 그 자체가 불안정한 다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바디우는 공백과 상황 사이에 놓여 있는 존재론적 차이를 지적하는 바, 지금 여기에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존재론적인 차이가 상황 안에서 공백을 몰아내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지니는 상황의 상태를 필연적으로 도안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상황과 상황의 상태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틀 안에서 귀속과 포함을, 실존과 비실존을, 개인들과 계급을 모두 고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상황의 부분들은 포함이라는 셈의 입장에서 보자면 실존하지만 귀속이라는 셈의 입장에서 보자면 꼭 실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틀의 유형을 따라서 한쪽에서는 실존하는 것이 다른 한쪽에서는 비실존하는 것이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상황에 포함되어 있는 다수이되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가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는 초과점의 정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즉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지만 상황의 상태에 귀속하는 원소들이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

그에 따르면 상황에 귀속하는 항들이 그 상황에 의거하여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상황의 부분들 또는 부분집합들 역시 그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진다. 따라서 상황의 상태는 상황의 구조를 구조 짓는 작용을 하는 하나의 셈이며, 메타 구조라 불릴 수 있다.

특히 상황의 상태에 고유한 이러한 셈을, 바디우는 그것이 상황의 구조를 구조 짓고 있다는 의미에서 재현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하나의 항이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해당되는 상황 안에서 재현된다는 것은 그 항이 상황 안에 포함되어 있거나 또는 상황의 부분집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아울러 그 항이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상황과 상황의 상태를 기준으로 삼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들을 상정할 수 있게 된다. 첫째로, 상황 안에서 현시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상황 안에서 재현되는 항상, 따라서 상황에 귀속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상황에 포함된 항들, 그리하여 상황의 원소임과 동시에 상황의 부분을 이루는 항들이 있다.

바디우가 정규적인 황들이라고 부르는 이 항들은, 존재, 그 중에서도 특히 자연을 사유할 수 있는 한 범주를 이룬다. 둘째로, 상황 안에서 현시되지는 않지만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상황 안에서 재현되는 항들, 따라서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지만 상황에 포함되는 항들, 그리하여 상황의 원소는 아니지만 상황의 부분을 이루는 항들이 있다.

바디우가 돌출들이라고 부르는 이 항들은 우리가 방금 위에서 살펴보았던 항들, 즉 계급, 국가 등의 사회적인 조직들을 사유할 수 있는 한 범주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상황 현시되지만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상황 안에서 재현되지 않는 항들, 그리하여 상황의 원소이지만 상황의 부분을 이루지는 않는 항들이 있다. 바디우가 특이한 항들이라고 부르는 이 항들은, 정규적인 항들과 돌출들에 대립하는 역사적인 것들, 즉 사건을 사유할 수 있는 한 범주를 이룬다.

그렇다면 특이한 항들, 즉 상황의 상태에 의해서 상황에 재현됨이 없이 상황에 현시되는 항들은 무엇에 해당되는가? 본래 다수에 귀속은 하지만 그 다수에 포함되지는 않는 특이한 항들, 또는 상황적 원소이지만 상황 안의 그 많은 부분집합들로 구성된 집합의 원소는 아닌 그 특이한 항들을 바디우는 비정규적인 항들 또는 역사적인 것들이라고 부른다.

비정규적인 항들, 역사적인 것들이라는 명칭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여기에는 특이한 항들은 특히 자연의 정류적인 항들과 대비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실제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역사는 자연과 근본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는 자연적인 의존성 또는 비독립성으로 완전히 벗어난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가 정규성이 전체적으로 나타난 것을 자연으로 사유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제 특이성이 전체적으로 나타난 것을 비정규적이며 비자연적으로 것으로, 즉 역사로 사유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다수 -형식이 정규적인 것의 안정성 안에 머무는 것과는 반대로 역사성이 보여주는 다수-형식은 상대방의 메타 구조에 의해서는 결코 취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다수-형식이 상태가 행하는 셈의 재보장으로부터 벗어나는 점을 가리킨다.

바디우는 이처럼 역사를 특이성의 출현으로 정의한 이후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결과들을 끄집어 낸다. 첫째, 하나의 역사라고 고려되는 역사란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하나 위에 차곡차곡 가해지는 부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전체화도, 원소들과 상광들에 대한 하나-로- 셈하기도 아니다.

차라리 역사는 자신의 특이성들에 의거하여서 전체화로부터 하나의 장소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는 ??기억??으로 고려되는 하나의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것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알랭 바디우의 철학] 2
 
결국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들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고문서가 배제된 역사가 되지 않을까? 역사가들의 지식은 결코 재현되지 않으며 순수하게 벗어나는 사건들의 역사를 과연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바디우의 답변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사성을 유일하게 건설하는 사건의 진리와 오로지 진실성에 의거하여서만 말을 하는 지식을 엄격히 구분해야만 한다.

들째, 특이한 항은 상황의 비정규적인 황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보아 특이성으로서의 사건은 상황에 귀속된 하나의 항이지, 결코 상황을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특이성 자체는 비정규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특이성이 경우나 필요에 따라 하나-로-셈하기 안에서 취해시는 것을 막지는 못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특이성은 정규화될 수 있기까지 하다.

사건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은 종교적인, 특히 기독교적인 전통으로부터 유래되는 바, 이 같은 전통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사유자는 말할 것도 없이 신학자로서의 키에르케고르였다. 왜냐하면 현시되고 재현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유래하는 다양한 형태들에 맞서서, 따라서 전체성에 맞서서, 신앙의, 사랑의, 진리의 사건을 가장 극명하게 대립시킨 이가 바로 키에르케고르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사건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수형적인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단절이자 수직적인 개입을 말한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바디우의 관점은 키에르케고르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바디우에 따르면, 사건은 상황에 대한 단절 또는 수직적인 개입이 아니라 상황에 귀속된 하나의 항이며, 또 궁극적인 의미에서 사건은 상황의 본래 모습에 다가가는 것이지 결코 상황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건은 하나-로-셈하기를 취소시키는 항, 따라서 상황을 그 본래의 다수적인 상황으로 이끄는 항,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그곳에서 실재적인 것을 드러내 보이는 항일 뿐인 것이다. 바디우에게 있어서 사건이 전개되는 것은 결코 케에르케고르적 의미의 신학적 지평 위에 서 있는 개인과 우주 사이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실재적인 것과 법칙 사이에서, 즉 본래의 다수적인 상황으로서의 공백과 상상적이며 상징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로-셈하기 사이에서이다.

결국 바디우는 실재적인 것과 법칙 사이의 간격으로 사유되는 둘의 힘을 가지고서 개인과 우주 사에서 고려되는 키에르케고르적 의미의 둘의 힘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바디우의 사건 개념에는 이처럼 일자의 현존이 아닌 둘(2)의 활짝 만개하는 활동성이 있다. 바디우는 이것을 ??사건의 둘??을 이야기한다.

한편 바디우는 사건의 둘과 더불어서 ??자연의 둘(2)??을 이야기한다. 자연의 둘(2)이란 존재의 유일한 이름인 공백과 이 공백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각각의 복잡한 이름들로 이루어진 쌍,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로와 하나로 이루어진 쌍, 즉 자연적인 다수들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쌍을 말한다.

따라서 사건의 둘(2)과 자연의 둘(2)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연의 둘은 존재를 정규화하지만, 반대로 사건의 둘은 바로 이 정규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바디우에게서 세 가지의 종류의 둘을 보게 된다.

즉 자연의 이원성을 형식화한 자연의 둘, 그리고 사건의 간격을 유형화한 사건의 둘, 마지막으로 자연의 둘과 사건의 둘로 이루어진 쌍을 가리키는 존재와 사건의 둘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바디우는 의외로 간단한 답변을 제시한다. 우리가 충실성의 공정 안에 머문다는 것은 상황의 항들과 그 상황 안에 개입이 유통시킨 사건의 이름과 함께 관찰하는 것, 그리하여 상황의 항들과 사건의 이름 간의 연결 또는 비연결들 각각을 하나의 검열(물론 연결은 긍정적인 검열을 그리고 비연결은 부정적인 검열을 가리킨다)라고 부른다.

우리가 충실성을 공정에 의거하여서 상황의 항들을 사건의 이름과 관련지어 긍정적으로 검열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바로 이 긍정적인 검열을 통해서 얻게 될 모든 항들을 한 곳으로 다시 모은다는 것을 말하는 바, 바디우에 따르면 바로 이렇게 모여진 항들이 곧 하나의 진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란, 그 자체가 곧 상황의 항들 중에서 사건의 이름과 관련하여 모여진 항들을 가리키는 한에 있어서. 상황의 한 부분, 그렇지만 사건의 이름, 충실성, 검열에 의거하여서 미래에 보게 될 한 부분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의된 진리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 것일까?

이 문제는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건에 관련된 자리라는 점을 주목함으로써 풀린다. 즉 사건과 사건의 이름이 지니는 특징으로부터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의 특징을 연역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사건 그 자체는 공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상황과 상황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 또는 초과와 방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사건의 이름 또한, 비록 그가 오로지 개입을 통해서만 상황 안에서 유통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사건과 마찬가지의 특징을 지닌다.

즉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란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을 통해서 사건의 이름에 연결된 항들로서 산출된 사건적 진리이기 때문에, 그 역시 필연적으로 사건 그리고 사건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공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상황과 상황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 초과와 방황을 보여주는 것, 그리하여 언어가 되었든 셈이 되었든 상관없이 기존의 모든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기존의 모든 법칙에게 있어서 분간이 불가능하다. 진리는 결코 상황의 언어에 의해서 분간되고 분류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진리는 그 자체가 존재함의 그 어떤 유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체 상황의 진리이자, 상황의 존재에 대한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구성주의적인 사유에서 진실된 것의 반대가 허위의 것이었다면, 이제 진리로서의 참된 것의 반대는 존재치 않게 된다.

그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오로지 참된 것의 산출적인 공정에 장애물이 되는 것만을 가리킨다. 바디우가 진리는 분간이 불가능하다는 것, 또는 백과사전 안에서 분류된 그 어떤 부분들 아래에도 놓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진리는 지식 안에 구멍을 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산출적인 사유는 초과와 방황을 제거하려고 모색하는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초과와 방황을 떠맡는 사유이며, 특히 산출적인 사유는 구성주의적인 사유와는 반대로 명명할 수 없거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이 존재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사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출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진리란 곧 언어를 통해서는 결코 분간할 수 없는 어떤 부분(구성주의적 사유에 대항하는 측면), 그러지만 비초월적인 어떤 부분(초월적인 사유에 대항하는 측면)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산출적인 사유는 결국 바로 이 명명이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 안에서 진리의 장소를 발견하고 있다.

즉 ??진리의 모든 공정이 비롯되는 것은 그 어떤 정원외적인 비존재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 안에서??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산출적인 사유는 진리를 지식 안의 구멍으로 사유하고자 시도하는 독트린에 깊이 자리 잡은 존재론적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바디우는 플라톤으로부터 라캉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독트린의 많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이렇게 볼 때, 산출적인 사유의 독창성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곧 벗어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방금 산출적인 사유의 특징으로 제시한 ??초과와 방황을 떠맡는??, ??명명이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을 인정하는??, ??명명이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 안에서 진리를 산출하는?? 등의 언급들은 다름 아닌 탈질서, 즉 질서로부터의 벗어남을 여러 각도에서 표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산출적인 사유의 이러한 독창성은 산출적인 사유란 언제나 벗어나고 있는 사건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사유라는 사실로부터 자연스럽게 연역되어 나오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벗어남과 관련하여 그 어떤 순수하게 분간 가능한 것을 거론 거론하고 있는는 않는가?

즉 질서로부터의 벗어남이란 질서 잡힌 우주로부터 자기를 분간하는 것 또는 질서 잡힌 우주에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것들로부터 자기의 주체를 분간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질서로부터의 벗어남은 필연적으로 사건을 그 어떤 일자의 재림 안으로 물고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바디우의 답변은 간단하면서도 분명하다.

바디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건이란 한 상황을 벗어나서 이러저러한 원소를 분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분간되도록 놔두지 않는 것이다. 사실 분간이라는 것은 상황과 상황의 상태가 보여 주는 셈과 부분들의 과정 아래 놓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건은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의 상황을 이러한 정규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그리하여 그것을 분간 불가능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과를 볼 때, 벗어남이란 상황 또는 질서를 벗어나서 어떤 형식으로든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황 또는 질서의 그 어떤 분간 불가능한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벗어남, 즉 산출적인 사유의 독창성이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산출적인 사유는 우리를 바디우 고유의 주체의 개념으로 안내한다. 왜냐하면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는 산출적인 사유의 측을 이루는 개념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분명하게 말한다. ??오로지 산출적인 공정의 개념만이, 대상이 배제된 후 -사건적 진리의 단순하고 유한한 단편으로서의 주체를 드러나게 하면서 진리의 탈대상화와 주체의 탈대상화를 포섭한다??. 또는 ??주체는 산출적인 공정의 유한한 순간이다.??.

그렇다면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란 무엇인가? 하나의 산출적인 공정이 있을 때, 우리는 이 공정에 의거해서 이러저러한 공정의 생산물인 유한한 국지적인 짜임새 하나하나가 곧 하나의 주체인 것이다. 이것은 ??주체??라는 이름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그 어떤 절차, 말하자면 분간하는, 긁어모으는, 재취합하는 등의 절차, 즉 산출적인 공정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주체는 충실성에 바탕하여 검열을 행하는 공정, 따라서 사건을 보장하며 진리를 고려하는 공정이기도(산출적인 공정) 하지만, 이와 동시에 주체는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에 의거하여서 사건의 이름에 연결된 항들 중 이러저러한 항들로 짜여진 하나의 유한집합, 따라서 진리의 유한한 한 부분(산출적인 공적의 생산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같은 정의와 해석으로부터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의 성격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추출해 낼 수 있다. 첫째 주체는 대상이 배제된 주체이다. 왜냐하면 주체는 검열을 행하는 공정이자 그 공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는 달리 표현하자면 주체는 작용이지 작용의 결과요, 생산이자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둘의 시각에서 보자면 갈라진 간격에 대한 사유의 실행이자 그 실행의 결과인 것, 충실성과 검열의 시각에서 보자면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을 행하는 공정이자 그 공정의 결과인 것, 진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진리의 실존이 매번 동반하는 것으로서 진리의 생산이자 그 생산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바디우의 주체는 주체-대상이라는 상관관계 안에서 거론되는 대상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대상이 배제된 주체인 것이다.

둘째, 주체는 언제나 사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 있는 주체이다. 주체는 미래의 어떤 순간에 그와 더불어서 어떤 사건이나 진리가 있게 된다고 할 때의 바로 그것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주체는 사건 또는 진리의 부분이기도 한 것, 따라서 사건 또는 진리에 의존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체는 결코 홀로 존재하는 그 무엇도, 사건이나 진리에 앞서서 미리 존재하는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사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서만 존재한다. 셋째, 주체는 분간이 불가능하다. 또는 주체는 분간이 불가능한 것을 행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진리는 그 자체가 분간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결국 진리의 유한한 한 부분으로서의 주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 있는 주체 역시 당연히 분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넷째, 주체는 그 정의상 국지적이다. 왜냐하면 주체란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에 의거하여서 사건의 이름에 연결된 항들 중 이러저러한 항들로 짜여진 하나의 ??유한집합??. 따라서 진리의??유한한 한 부분??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주체는 그 자체가 우연하며 희소하다. 바디우에 따르면 라캉은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주체를 우리가 필히 가정해야만 하는 비어 있는 어떤 점으로 사유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라캉에게 있어서의 주체는 보편적으로 가정된 주체가 되고 만다. 하지만 만약 주체가 사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주체 역시 사건 또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우연하며 희소할 수 밖에 없다.

여섯째, 주체는 언제나 전미래적이다. 왜냐하면 주체는 미래의 어떤 순간에 일어날 그 어떤 사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또는 바디우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주체는 하나의 산출적인 공정이 미래에 성취한다는 조건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주체에 대한 약식 정의 안에 있었던 표현 ??후- 사건적??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주체의 성격이 남아 있다. 존재론을 근본적으로 개혁한 이후, 그리고 사건의 가치를 드높인 이후, 이제 마지막으로 사건적 진리가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는 것을 결정하는, 그리하여 사건적 진리를 존재론 안으로 들여오는 산출적인 주체의 이론을 전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존재와 사건 사이의 내재적인 통합을 성취하겠다는 것이다.

분간 불가능한 진리가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는 것을 주체는 과연 어떻게 결정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주체의 일곱 번째 성격이라 할 수 있는 언어적인 성격을 미리 숙지할 필요가 있다. 주체는 이름들을 산출하며 더 나아가 진술들을 산출하는 주체이다. 왜냐하면 주체가 진리를 산출한다고 할 때의 산출은 언제나 개입을 동반한 산출이기 때문이다.

개입이란 사건을 지칭하거나 자격 짓기 위해서 사건적 장소의 현시되지 않는 어떤 원소에 대해 이름을 부여하는 일임을 상기하자. 그리고 주체가 이름들과 진술들을 산출하는 주체라는 사실은 곧 주체는 동시에 언어-주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러한 이유에서 바디우는 주체와 더불어서 언어-주체를 언급한다.

바디우는 우선 비록 사건적 진리는 분간이 불가능하며 질서를 벗어나고 있다 할지라도 어쨌든 그것은 그 정의상 상황의 한 부분에 해당한다는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즉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다(또는 백과사전 안에 등록되어 있는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또는 항들)이 사건적 진리에 (즉, 충실성에 바탕한 긍정적인 검열을 통해서 모여진 항들에) 귀속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런데 바디우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보게 되는 경우가 전자일 경우에는, 주체 사건의 분간 불가능한 진리를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도록 결정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이 애초의 상황과 사건적 진리에 동시에 귀속해 있는 경우에는, 양쪽에 공통적으로 귀속해 있는 이 항이 주체로 하여금 언어-주체의 진술을 위해서 진실성의 결정을 하도록 강제를 행하게 되고, 따라서 이제 그 결과로서 언어-주체의 진술이 새로운 상황 안에서 진실한 것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기 때문이다.

사건의 분간 불가능한 진리가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는 것을 주체가 결정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애초의 상황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성이나 예측이 완전히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주체에게 진실성의 결정을 강제하는 항, 즉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이 애초의 상황에 귀속은 오로지 그 자체가 벗어남을 가리키는 산출적인 공정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주체의 진술이 그 안에서 진실한 것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상황 또는 사건의 분간 불가능한 진리가 그 안에서 자리를 잡게 되는 상황을 애초의 상황과 비교해서 새로운 상황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한편 위의 말을 뒤집어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만약 언어-주체의 진술이 새로운 상황 안에서 진실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이 애초의 상황과 사건적 진리에 동시에 귀속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역으로 재구성된 문장으로부터, 언어-주체의 진술이 진실한 것으로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데 그렇지 아니한가를 미리 판단해 보는 일의 가능성을 주장할 수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을 사건적 진리와 애초의 상황 안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하였다면, 이 확인은 곧 진실성의 결정을 주체에게 강제하는 될 항이 산출적이며 충실한 공정에 의해서 만나지고 검열되었다는 것을, 따라서 언어-주체의 진술이 진실한 것으로 될 수 있는 기회를 이미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이러한 기회 판단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때의 고정 관계, 즉 강압을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우연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오로지 산출적이며 충실한 공정을 통해서 강압이 미리 만나지고 검열된 이후에만 강압을 확인하는 일 자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를 명명, 분간하고 부분들을 분류하며 그들을 하나로 묶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하는 지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무한한 사건들에 의해 떠받쳐지는 무한한 진리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식과 진리를, 진실된 것과 참된 것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산출적인 주체가 지식과 진리를, 진실된 것과 참된 것을 내재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 온다. 왜냐하면 산출적인 주체는 언어-주체의 진술을 새로운 상황 안에서 진실한 것이 되도록 (즉, 지식의 언어로 말해질 수 있도록) 결정하는 주체, 그리하여 사건의 분간불가능한 진리가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도록 결정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의식의 주체나 지식의 주체가 아니라. 그것은 분명 사건적인 진리의 주체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진리의 솟아남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주체. 오로지 사건적인 진리 안에만 머무는 주체가 아님 또한 분명하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해서, 자신의 언어에 의해서 지식과 진리의 교차에 위치하는 주체,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존재와 사건 사이의 내재적인 통합을 성취하는 주체인 것이다.


(평가)

알랭 바우디는, ??자아??라는 주체개념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구출해내려고 한다. 주체를 구출하려면 그동안 주체를 대신해 왔던 신(일자)개념을 대신 부숴야만 했다. 신을 부수는 방식은 존재론을 부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곧 모든 존재자들을 존재케 하는 궁극적인 존재이지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을 다 아는 위대한 존재자??를 제거하고 그 대신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들??끼리 만나서 나름대로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고 느껴졌던 그 의미들을 언어를 통해 상호 소통하는 것으로서 이 사회를 살아나가는 이유로 삼고자 한다.

문제는 알랭 바디우가 바로 그렇듯 상식화된 고요한 세상 한복판에 메시야가 출몰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겨냥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진리와 심판을 오로지 자신의 행하심으로 한데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시다. 알랭 바디우의 주장대로 사건으로 인한 ??초과??로 인한 교회나 국가라는 의미가 새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말씀에 따라 세상의 운명은 결정 나 있는 처지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 16:24-25)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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