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35강 피로 만든 복음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구/대구101108피p125피로만든복음.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구/대구101108피p125피로만든복음.avi

 대구101108피p125피로만든복음.hwp


대구101108피p125피로만든복음
 
피35강 피로 만든 복음
 
10 대구강의 17] - [피 35] - 피로 만든 복음
                                                                                
                                                   10,11,0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아… !!

오늘은 교재 125페이지에 있는 '피로 만든 복음'을 하겠는데, 그런데 124페이지 끝에 보면 무엇으로 끝나는고 하니, "아…!" 라는 감탄사로 끝난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어떻게 언어로는 설명하기가 곤란하다는 말이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이렇게 감탄사로 끝나게 되면 우리 인간은 무엇을 잊어버리는고 하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즉 감탄사가 넘쳐날 때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우리 인간 입을 통해서 "아!" 라는 감탄사가 흘러나올 때, 그런 감탄이 인간 바깥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도 가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안에 감탄과 감사가 있다는 말은,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 것은 없는 순간'이 되는데, 즉 자기 것은 남아있지 않는, 그야말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라고 하는, 바로 그럴 때 감탄과 감사가 넘쳐 나온다는 말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런 감탄과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 아무리 자기 앞에 예수님이 계시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곧 자기 안에 여전히 자기 것이 남아있을 경우인데, 그런 경우에는 그런 감탄과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는 "아!" 라는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에이, 씨!"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즉 감탄과 감사 대신에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감탄이 늘 나오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우리 안에 뭔가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육체가 살아있으니, 그 육체의 것이 나오는데, 즉 자기 것이 말이다. 그런 육은 곧장 자아로 전환이 되고, 그런 자아가 되면 자기만의 영역이 구축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만의 세계가 말이다. 그렇게 자아로 전환이 되고,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 곧 육의 특징이란 말이다.

◈ 어떻게 감탄사가 나올 수 있는가?

그런데 여기서 감탄사가 나온다고 하는 것은, 물론 육은 그대로 있는데, 그 육보다 더 센 영이 오셔서 이 자아의 영역을 깨트리게 되는데, 그것이 고마워서 "아!" 라는 감탄사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말씀이 수시로 우리 공격해야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매일같이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왔는데, 그렇게 늘 수시로 말씀에 의해서 우리의 자아가 허물어지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만을 자랑하는데 자기 자랑이 같이 섞여서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놀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만을 자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가 강도이었거나, 소경이었거나, 그렇게 죄인이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의 경우에 !!

요한복음 5장에 보면 38년 된 병자가 나오는데, 그리고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실로암 연못가의 소경이 나오고 말이다. 그 소경은 예수님에 의해서 분명히 눈을 떴는데, 예수님이 직접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다가 바르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말이다.

(요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하지만 그렇게 눈을 떴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서 예수님을 본다고 간주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그냥 눈을 뜬 것이고, 예수님을 본다고 하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을 믿을 경우에만 성립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눈을 뜨나 뜨지 못하나,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전적으로 예수님과 관련이 되었다는 말이다.

◈ '본다' - 예수님과 같은 안목을 가지고 !!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예수님과 관련이 되어서 예수님이 보고 있는 식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을 두고서 비로소 '본다' 라고 하는 것이고, 반면에 예수님과 같은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어둡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보는 식으로 이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이 세상을 예수님 식으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오니, '육' 이라고 하는 자아의 영역은 예수님에 의해서 교체가 되는데, 즉 예수님의 자아로 말이다. 그것이 지난 시간 마지막에 한 것인데, 즉 "아…!" 라는 감탄사로 나온다는 것이다.

◈ '피'로 만든 복음 !!

이제 125페이지를 살펴보겠는데, 그 제목이 '피로 만든 복음' 이라고 되어있는데, 그 앞에 있는 장의 제목은 '세상도안' 이고 말이다. 즉 "이 세상은 인간의 자아로 이렇게 만들어졌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피로 만든 복음' 이라고 해서, 즉 "이 세상은 사람이 만들지만, 복음은 예수님의 피로 만든다" 라는 것이다.

제가 글을 쓰면서 이런 식으로 배치를 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마치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을 먼저 하고 예수님을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먼저 세상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의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서 그만 수긍을 하자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은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 인간의 자아 절대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즉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전부임을 인정하자는 말이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우리 인간에게 복음이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아가 형성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복음이 그냥 들어오게 되면, 그 복음은 인간의 자기 영역에서 무엇으로 바뀌는고 하니까, 그만 '지정의(知情意)'로 바뀌게 되는데, 즉 지식으로 바뀌고, 감정으로 바뀌고, 또한 의지로 바뀌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누구의 것인고 하니, 자기 자신이 마중을 나가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지식이고, 또한 자기의 감정을 풀어내기 위한 감정이고, 또한 자기의 잘남을 보여주기 위한 의지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실컷 폼을 잡다가 자기 집구석으로 되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 복음은 왜 '피'로 오는가?

그러니 복음이 올 때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피'로 오게 되는데, 그러한 피로서 오게 됨으로 말미암아서, 즉 예수님께서 "내가 너의 육 때문에 죽었다" 라고 하는, 예수님의 죽음을 매개로 해서 오게 되면, 우리 인간은 자기 잘남이 아니라 그 죽음으로 인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고, 또한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데, 그러니 곧 '죽음' 이란 매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책에서 그냥 복음이 아니라 '피로 만든 복음' 이라고 표현을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냥 복음이라고 해버리면, 인간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점점 더 구축이 되고 보다 더 확고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가문일 수도 있고, 국가일 수도 있고, 특히 교회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우리 가문은 복음적인 가문이고, 복음적인 국가이고, 또한 복음적인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가문과 국가와 교회가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피로 구원을 시켜버리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 피는 우리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이기 때문에, 그러한 예수님의 피로 오게 되면, 가문과 국가와 교회가 우리 쪽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쪽으로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복음은 우리를 위한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위한 복음이 되는데, 즉 주님의 주되심을 이야기하기 위한 복음이라는 말이다.

◈ 그런데 인간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

만약에 이런 예수님의 '피 흘림'이 없다고 하면, 우리 인간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특히 이런 의지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자기 희생, 자기 봉사, 자기 기도, 자기 낙타무릎과 같은 것이 가득히 있는데, 즉 자기 피라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매개가 되어버리면,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가 이만큼 희생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영광으로 다시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 앞에는 반드시 피가 필요한데, 이 피는 결코 우리 인간의 피가 아니라는 말이다.

◈ 나도 복음을 안다 ??

제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대부분이 지식과 감정과 의지로서 복음을 이해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말고,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서 살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 즉 성령을 받지도 않고 자기 피를 가지고 복음을 안다고 우기는 자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 것이 엄연히 버티고 있는데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도 복음을 안다" 라고 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복음을 빼면, "나도 무엇을 안다" 라는 것으로서, 즉 여전히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복음이 되니까, 그런 복음이 있으나마나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은 반드시 예수님의 피로 시작해야 되는데, 그러면 그런 자들은 또 뭐라고 하는가? 자기들도 그 피의 복음을 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 피는 누구의 피입니까?" 라고 하면, 물론 예수님이 흘린 피라고 정답을 이야기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그 다음에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 라고 하면 입을 다물고 만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예수님이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그 죄는 아담의 죄에서 나온 것인데, 그런 아담의 죄를 이야기하려고 하면, 그 아담의 죄 속에 자기가 포함이 되니, 그렇게 되면 자기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죄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복음을 안다" 라는 것이 한 글자로 무엇이 되는고 하니, 그만 '죄' 라는 것이다.

◈ 예수님 덕분입니다 !!

그러니 이것을 그들이 전혀 받아들이지를 못하는데, 즉 자기가 복음은 안다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되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복음은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그런 지정의로 구축되는 것이 아닌데, 그냥 "모든 것이 예수님 덕분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즉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했을 때, 그게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는, 이런 아담의 죄 때문에 희생을 했다는 것인데, 그렇게 예수님이 희생을 했다는 것은, 우리는 무엇이 된다는 말인가?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즉 스스로 구원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 피로 그 죄에서 우리를 구원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 죄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희생이 우리의 전부를 위한 희생인지, 아니면 70프로만을 위한 희생인지, 즉 우리가 하는 것 중에서 좋은 것은 빼놓고 나쁜 짓만 골라서, 그런 나쁜 짓에만 일대일로 대응이 되어서 희생한 그러한 희생인지, 그것을 보다 분명히 하자는 말이다.

◈ 어제의 죄, 오늘의 죄, 내일의 죄 !!

흔히 부흥사들이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어제의 죄와 오늘의 죄와 내일의 죄에서 모두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목요일에 작정헌금을 할 때쯤이 되면 뭐라고 하는가? "구원을 받아놓고 두 번 다시 죄를 지으면 이제는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라고 하는데, 월요일에는 분명히 자기가 복음을 좀 알고 정통적인 것을 폼 내기 위해서 미래의 죄고 다 용서함을 받았다고 해놓고는 말이다. 그런데 목요일에 와서는 용서를 받고 죄를 지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개가 토한 것을 마시는 식이라고, 그러한 성경구절들을 인용하고, 또한 히브리서 6장에 나오는 구절을 동원하고 말이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말한, 투기하고 술 취한 자들은 하늘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구절들과 균형을 맞추려고 하다가보니, 자기 스스로 모순된 이야기들이 툭툭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히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히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모두 다 용서함을 받았다고 했을 때, 그런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누가 짓는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내'가 짓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용서함을 받았다고 하면, 부흥사는 여기서 무엇을 빠트렸는가?

예수 안에서 용서함을 받는다고 사실을 빠트리고 그냥 용서함을 받는다고 했을 때,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나'는 무엇이 되는고 하니, 현재의 '나'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현재가 되고 마니, 그것이 월요일의 일이라고 하면, 그러니 목요일이 되면 그런 모든 것을 다 알아버린 그 '나' 라는 것이 다시 죄를 지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그렇게 부흥사가 우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미래의 죄는 어디에 해당이 되는가? 미래의 자기 모습에는 해당이 되지 않고, 바로 그것을 아는 월요일까지의 그 '나' 자신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즉 목요일의 '나' 자신에는 그만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다. 목요일에는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누구 안에 있다는 말인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안에 있으니, 그러니 그것은 지식으로, 감정으로, 의지로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이 그것밖에 모르고, 그렇게 장사를 해먹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이렇게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용서받은 '나' 자신이, 그냥 그대로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어줘야만, 즉 그렇게 예수 안의 '나'로 있어줘야만, 월요일의 '나'나, 화요일의 '나'나, 수요일의 나나 목요일의 나나, 다 누구 안에 있다는 말인가? 여전히 예수 안에서의 '나' 라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이란 시간의 흐름은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 물론 자기 안에 있을 때는 의미가 있겠지만, 예수 안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시간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시는 분이 아닌데, 즉 예수님 안에서 시간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십자가에서만 다 이룬 것이 아니라, 즉 십자가를 지고 2시간 이후에는, "내가 2시간 전에는 다 이루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고 조금 남아있다" 라고 하게 되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다 이루심' !!

제가 '성경신학의 세계' 라는 것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을 써놓았는데, 상당히 함축된 내용이 담겨있는데 글인데 말이다. 그게 무슨 내용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곧바로 성경말씀과 연결시키지 말고, 먼저 성경말씀과 예수님을 연결시키고, 그 다음에 인간에 비추게 되면 정답이 된다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즉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시고 나서 다음에 부활을 하시고 "아직 남아있다" 라고 하셨는가? 그러면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그 '다 이루심'은, 부활과 재림에서도 모두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죄에 참여하기 위해서 물세례를 !!

그리고 거기에 보면 또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죄에 참여하기 위해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데, 그렇게 되면 그 받으시는 물세례에는 인간들의 모든 죄가 있는 물인데, 그러니 그러한 죄의 물 아래로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님의 죄 있는 육신의 몸이 되셨다는 것이다. 즉 그런 육신의 몸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확인??)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서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온갖 범죄를 모두 다 일부러 행하셨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요한의 세례 안에 있을 때, 그때 이미 인간의 육 안에 들어온 것이 되어서, 즉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서 죄를 짓지 않아도 죄를 짊어지게 되는 입장이란 말이다.

◈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의와 용서의 혜택을 받기 때문에, 마치 천주교에서 하는 것처럼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매일같이 고해성사를 되풀이하지 않아도, 예수님 안에서 계속해서 용서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있기에 말이다.

그런 용서가 주어진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주님은 매일같이 우리에게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사건들을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뜻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대한 열망, 성공에 대한 기대, 자기 존재의 가치를 높이는 것 등등인데, 바로 그러한 것들을 주께서는 일일이 손가락을 자르듯이(?) 금지해버리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감탄사가 아닌 불만이 터져 나오게 되는데, 바로 그렇게 불만이 터져 나옴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믿은 예수님을 다시 한번 더 되돌아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동안 자기가 예수님을 알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건성으로, 즉 흔적으로만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는, 새삼스럽게 주님의 다 이루심을 깨닫고, 거기에 대한 감탄사가 터져 나오게 된다는 말이다. 

◈ 유월절의 경우에 !!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반복하는 것도 역시 같은 의미인데, 울산에서 여기에 대해서 상당히 어려운 내용을 강의했는데 말이다. 유월절을 지키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먼저 그 하나는 애굽식으로 지키는 것이 있고, 그리고 두 번째는 주님과 동행하면서 지키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굽식은 시간적으로 지키는 것인데, 어떻게 지키는고 하니, 유월절이 1월 15일이니, 마치 요즘 교인들이 주일을 지키듯이 하는 것과 같은데, 즉 토요일이 아니고 월요일이 아닌, 그 사이를 주일이라고 정해서 지킨다는 것이다. 즉 금요일이 아니고 일요일이 아닌, 그 사이를 안식일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그 날을 위해서, 그 날이 아닌 과거의 날과 미래의 날, 그 사이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날을 정해서 지키는 사고방식이 바로 애굽식으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매일같이 반환해서 돌아오는 "1, 2, 3, 4, 5, 6, 7", "1, 2, 3, 4, 5, 6, 7" 이라는 것을, 그렇게 해서 6과 8이 되는 그 사이에 있는 날을 기억하고, 그 날에 노동하지 않고 지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애굽식인데, 하지만 주님의 방식은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의 방식으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곧 주님과 동행하는 것인데, 그렇게 주님과 동행하게 되면, 자기가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다음 유월절까지 그냥 빈 공간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유월절이 담고 있는 그 깊은 용서의 의미를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들에게는 이번 유월절과 그 다음 유월절 사이에서 죄를 깨닫는 사건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 유월절에는 어떻게 되는가? "아, 내가 지난번에 그런 죄를 지었구나. 나는 유월절을 지켰다고 해서 복을 받는다고 좋아했는데, 그렇게 까불다가 이런 매를 맞는구나" 라고, 그렇게 온갖 것들을 다 기억해서, 그 이전의 유월절보다도 더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더욱 더 깊고 넓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 신약 - 보라, 희년의 날이 왔다 !!

그것은 안식일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즉 애굽에서 지키는 것과 주님과 동행하시는 식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달랐다는 말이다. 구약의 안식일은 신약에는 없는데, 즉 구약의 동행했을 때의 안식일은 "안식일, 안식일, 안식일", 그런 식으로 해서 점점 더 죄가 증가하게 되니, 그렇게 해서 안식일에서 어디로 더 나가는고 하니, '안식년'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안식년에서 더 나가게 되면 '희년'으로 가고 말이다.

그런데 그 희년이 무엇인고 하니, "보라, 희년의 날이 왔다" 라고 해서, 그것이 신약성경 전체라는 것이다. 즉 희년의 때에 옥에 갇힌 자를 풀어주고, 가난한 자를 그냥 보내지 않고 말이다. 그것이 구약 이사야서에 나오는데(61장?), 바로 그런 희년의 때가 왔다는 것이다. 즉 이제 모든 것을 마감할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 이것은 결국에는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율법으로 죄를 지었다고 여겼던 소소한(?) 것들이 나중에 신약에 오게 되니, 죄 자체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희년, 즉 안식의 의미였음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켰는가? 물론 잘 지켰다는 것이다. 유월절이란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죄가 나온다는 사실을, 그것을 너무나 잘 지켰는데, 하지만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 본인들이 잘 지킨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행하는 주님께서 그들의 죄가 죄가 되도록, 그렇게 완벽하게 잘 지켰다는 말이다.

◈ 우리는, 율법으로는 전혀 하자가 없어 !!

그래서 우리는 율법으로는 전혀 하자가 없는데, 왜냐하면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죄인임이 드러났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것이다. 율법으로 의인이라고 하면 몰라도 말이다. 그렇게 율법으로는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일을 하셨는데,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무슨 하자가 있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분명히 죄인이니 말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사도바울은 무엇이라고 주장하는가? "누가 정죄를 하겠는가? 우리는 원래가 그런 존재인데, 아무리 그렇게 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말이다.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러한 모든 성경해석의 근원은 무엇인고 하니, 그냥 복음이 아니라 피로 만든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앞에 피가 들어가야 만이, 육에서 나온 우리 인간의 자아가, 예수님의 몸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주체성, 즉 예수님의 자아와의 관계성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 오직 '주의 이름'으로 !!

제가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렇게 육에서 나온 자아를, 즉 그렇게 자아라고 마감을 시키는 것을 두고 '이름'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기억이 납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몸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주체성은 누구의 이름이 되겠는가?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 즉 '주의 이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의 이름을 믿어라"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포기하라는 것인가? 우리의 이름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것인데, 우리는 이름으로는, 심지어 우리가 자살을 하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육에서 나온 것은 어디까지나 육인데, 그러니 오직 영에서 나온 것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요한복음과 로마서가 하나로 다 연결이 되는데, 이름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 요한복음에서도 이름을 굉장히 강조하고, 사도바울의 서신에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름을 통해서 강조가 되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그 이름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니, 계속해서 인간의 주체만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진도를 나가겠는데, 교재 125페이지를 살펴보자.

** 민수기 35장에 보면, '도피성' 이라는 공간에 관한 희한안 내용이 나온다. 고의가 아닌 상태에서 사람을 죽여 피를 땅에 젖게 한 사람을 대제사장이 함께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는 제도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뭔가 낯선 구원장치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이 도피성 한 가운데로 두 가지 원칙이 흘러와서 만난다. 하나는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다' 라는 원칙이다.

(민 35:33)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 참으로 희한안 '도피성' !!

여기에 '도피성' 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즉 똑같은 바탕이고 똑같은 구역인데, 그 구역에 들어가기만 하면, 참 희한하게도 살인자라고 해도 죽여서는 안 되는 원칙이 흐르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특별한 기가 흐르는지 방사능 탐지기를 가지고 조사를 해볼까요?

요즘 사람들이 귀신의 사진을 찍으려고 많은 시도를 하는데, 아까 제가 요한복음 9장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했듯이, 보고 믿는 것은 봐도 소경이고 보지 않아도 소경인데, 그러니 소경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보지 않고 믿을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 귀신의 경우에 !!

성경에 귀신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꼭 눈으로 봐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마치 김기동이처럼 말이다. 그렇게 눈으로 보여주고 사람들 앞에서 간증을 시켜서 사람을 한 두 명이라도 더 꼬드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어느 병원이 용하다고 하면, 그 병원에서는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을 내세워서 사람들을 더 많이 끌어드리고 하는 장사수법과도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귀신을 사진으로 찍으려고 하면, 그 귀신이란 그 개념자체가 진짜 귀신인지, 그것부터 규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동물원에 원숭이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데 자기는 그 동물원의 원숭이가 아니고 정글에 있는 원숭이를 보고 싶다고 하면, 그건 말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동물원에서 뛰어 놀고 있는 원숭이를 보고 있으니 말이다. 즉 그렇게 생긴 원숭이를 정글 속에서 찾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귀신의 경우에는, 우리가 그 모델을 어디에 가두고 있는가? 즉 도대체 어느 생물백과사전에 "이것은 귀신이다" 라고 하는 것이 있느냐는 말이다. 즉 "이런 것이 나오면 귀신인 줄 아세요" 라고, 그렇게 귀신의 모델을 누가 잡았느냐는 것이다. 아무도 잡은 사람이 없는데, 그것을 두고서 'U.F.O.' 라고 하는데, 즉 '미확인물체' 라는 것이다.

이 '미확인물체' 라는 이름 자체가 참으로 재미가 있는데, 즉 '미확인물체' 라는 것은 말 그대로 확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름은 누가 짓는가?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마이크'가 있는데, 이렇게 확인이 될 때만 이름을 짓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확인이 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물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름을 붙을 수가 없는, 즉 'U.F.O.' 라는 것을 이름으로 하자는 말이다. 

◈ 귀신의 참 모습은 바로 예수님 ??

성경에 나오는 귀신의 참 모습은 바로 예수님인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의 모습이 바로 귀신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을 닫아놓았는데도 찾아왔으니 말이다. 그러니 만약에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데 들어오는 것이 귀신이라고 하면, 예수님은 바로 귀신의 대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귀신 중에서 예수님이 아닌 것과 맞는 것을 구분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물론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자신의 형태를 특별하게 규정짓지를 않았는데, 필요에 따라서 자신의 모습을 바꾸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경우에, 예수님이 그들과 같이 걸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하지만 떡을 나눌 때 잠시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키니 그들이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도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확인을 하고 말고 하는 것은 전혀 인간의 몫이 아닌데, 그러니 주도권이 인간에게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 인간은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데, 즉 우리 인간은 어떤 대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상을 확인할 수 없다면, 그러니 예수님이 보시기에 우리 인간의 이름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미확인물체' 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이 바로 'U.F.O.'이고,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 되신 예수님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비진리라는 말이다.

◈ 진리는 진리이신 분이 이야기해야 !!

이렇게 진리가 되시는 분이 "과연 진리인가? 아닌가?" 라는 것을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지, 전혀 진리도 아닌 것이 "당신은 진리가 아니야"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인가?" 라고 물었는데,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해줘도, 그것을 확인한다고 분주할 따름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스티브 호킹 박사가 "신은 없다" 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에게 한 마디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왜 죽는가?" 라고 말이다. 정작 자기 자신은 난치병에 걸려서 그렇게 뒤틀린 몸으로 있는데, 그러니 그 사람에게 "당신이 이렇게 난치병에 걸린 것은 누구의 뜻인가? 당신의 뜻인가?" 라고 물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할 말이 없는데, 아마 그 양반은 우주의 뜻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면 도대체 이 우주는 누가 만들었다는 말인가?

사실 이러한 우주도 일종의 'U.F.O.' 인데, 왜 그런고 하니, 이 우주는 지금도 자기의 모습을 고정적이 아니라 날마다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 바꾸는 것을 두고 우주라고 하는데, 그러니 'U.F.O.'와 똑같다는 말이다. 바꾸어지는 것을 우주라고 하니 말이다. 즉 '우주' 라는 것은 어떻게 확정짓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누구나 다 미확인물체가 !!

사람의 경우에도 어떠한가? 남자가 이혼하고 30년 뒤에 과거의 자기 마누라였던 여자를 길에서 만나게 되면 알아보지를 못하는데, 물론 얼굴에다 견적을 내서 몇 번 대공사를 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ㅋㅋ). 아무튼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도 변형이 되면, 그만 미확인물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혼을 하지 않고 같이 사는 부부라고 해도 그런 경우가 있는데, 남자가 술을 먹고 집에 왔을 때 말이다. 그리고 '욱' 하는 성질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런 성질이 나오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아마 이 말을 들으면 뜨끔하는 분들이 있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심지어는 자기 자식이라도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뭐라고 하는가? "나는 저런 놈을 낳지 않았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 속에 귀신이 들어있으면, 그 귀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만 미확인물체가 되고 마는데, 그래서 벌벌 떤다는 것이다. 지금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데(?), 하루아침에 이상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마치 사이코패스처럼 말이다. 갑자기 자존심에 열을 받아버리면 그만 돌변하고 만다는 것이다.

◈ 도피성은, 우리 인간이 확인할 수 없어 !!

그건 그렇고, 아무튼 이 '도피성' 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쪽에서 그렇게 확인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상하다. 왜 저리로 가면 죄가 용서되지?" 라고 말이다. 그것을 두고서 '약속' 이라고 하는데, 방사선 탐지기를 가지고 아무리 도피성에 가서 죄를 용서해주는 무엇이 있는지 찾아봐야 소용이 없는데, 그것은 약속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유월절의 밤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그냥 지나간다" 라고 했을 때, 바로 그 어린양의 피에 대해서 아무리 성분분석을 해도 특별한 것이 나오지 않는데, 그냥 다른 것과 동일한 어린양의 피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조사해도 똑같은데, 지금 우리들의 피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쪽에서 확인하려고 한다는 것은, 점점 더 주님을 미확인물체로 남겨두고 우리만 뚜렷해지는, 그렇게 약속을 거부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창조과학회' 라는 집단이 있어서, 그런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그야말로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약속이라는 것은 반드시 성령을 통해서,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는 능력까지도 포함하게 될 때 어떻게 되는가? 그때 약속은 비로소 우리보다 더욱 더 신실하고, 우리보다 더욱 더 성실하고, 그리고 우리보다 더욱 더 진실하다는 말이다.

물론 거기에 비해서 우리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믿는다고 우기면서 아침저녁으로 믿음이 바뀌면서, 그렇게 매일매일 바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 자신의 믿음을 의지하면 안 되는데, 아침저녁으로 믿음이 바뀌고, 또한 치매에 걸리면 다 바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주님의 약속이란 것이다.

◈ 이스라엘은 특수한 민족으로 주님과 동행을 !!

아무튼 이렇게 도피성이란 경계선에 들어가면 죄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온 이스라엘에 다 퍼뜨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들은 특수한 조직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어떤 특수한 조직인고 하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정의를 의지하지 말아야 하는, 그런 특수한 민족으로서 주님과 통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과의 동행이라는 것은, 사실은 이웃집 웬수와의 동행이라고 볼 수 있는데(ㅋㅋ), 그야말로 우리는 원수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와 원수인, 즉 우리와는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분과의 동행인데, 그런데 그렇게 전혀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시는가? 그것을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약속에 의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 이스라엘은 태어날 때부터 목이 곧은 백성이고 악한 백성이다. 그런데 그런 너희들을 앞장세워서 이 약속의 땅을 준 것은, 너희들이 의롭기 때문에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너희들의 부실함과 항상 대조해봐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죄라고 하는 것은, 그런 죄를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대조해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업적인지, 아니면 신실하지 못한 우리 인간들이, 마치 소 뒷걸음을 치다가 어떻게 한 것인지, 그것을 대조해보라는 말이다. 즉 주님의 공로인지, 우리 인간의 공로인지를 비교해보라는 말이다. 

◈ 홍해와 요단강 !!

지난 번 울산강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야 될 두 개의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왜 두 개인지 말이다. 즉 앞에 있는 것을 홍해라고 하고, 뒤의 것을 요단강이라고 하면, 왜 그들이 건너야만 하는 것이 두 개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홍해를 바라보게 되면, 그 홍해를 건너게 되면 곧 그것이 약속의 땅이 된다고 보았는데, 그래서 그들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찬양을 하고 얼마나 좋아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용사시니"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애굽적인 사고방식으로, 애굽의 영역을 벗어났으니 약속의 땅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약속의 영역에서 보게 되면, 여기에서는 약속과 비약속의 구분은 아직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애굽은 비약속이고 자기들은 약속이라는 것을 충실하게 알지 못할 때라는 말이다.

그러니 홍해가 아닌 요단강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요단강의 건너가지를 못하면 전부가 다 애굽적이란 말이다. 육적인, 즉 홍해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애굽만 넘어가게 되면 애굽을 벗어나는 것이지만, 그러나 약속의 입장, 즉 요단강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면 다 애굽적인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이전에 40년 동안을 왜 광야에서 뺑뺑이를 돌았는가? 애굽에서 나왔던 자들을 다 죽이기 위함인데, 그러니 이것을 복음으로 이야기하면, 즉 "망하면 복음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망하지 않으려고 복음을 믿는다든지 하는, 그런 복음만 있으면 망하지 않는다고 하는 노림수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여전히 애굽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복음은 무엇인가? 망해야 비로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 망하지 않으려고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해서 망한다는 말이다. 지금 주님은 우리가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데 정작 우리는 어떠한가? "나는 망하면 안 돼. 복음을 들었지만 망하면 안 돼" 라고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망해도 되는 쓰레기를 계속해서 쥐고 놓지 않는다는 말이다.

◈ 나쁜 하나님과 좋으신 하나님 !!

이것은 다음 주일에 설교할 내용인데, 아무튼 우리는 그런 쓰레기를 손에 움켜쥐고 놓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모두 다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그들의 속내를 그냥 마구 다 뒤집어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하는가? "애굽에서는 부추도 있었고, 맛있는 수박도 있었다. 짜릿한 청양고추에 마늘도 있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그런 맛있는 향신료가 얼마나 생각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 세상에, 매운탕에 청양고추와 마늘이 들어가지 않으면 무슨 맛으로 먹느냐는 것이다.

바로 그런 육신의 미각이 자극을 해오는데, 그렇게 청양고추와 마늘의 맛있는 맛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될 때 자아가 뭐라고 하는가? '굿'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좋은 것을 광야에서는 허락을 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좋은 것이 없으니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가? 전부가 다 나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 되고 마는가? 당연히 나쁜 하나님인데,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애굽에서 길들여진 그런 맛있는 음식을 주지 않으니 몸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가? 이미 몸은 애굽에서의 모든 습관에 다 길들여져 있는데, 그러니 당연히 애굽적인 것이 주어져야 우리 몸은 좋아한다는 것이다.

◈ 광야, 그것은 곧 슬픈 여정 ??

하지만 그런 애굽적인 것이 광야에서는 전혀 동원이 되지 않으니, 그것은 곧 슬픈 여정이고, 하나님은 곧 나쁜 하나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나쁜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인 줄을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치 나쁜 남자가 자기의 배우자가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처럼 말이다.

남자들이 여자들을 꼬드길 때, 그 여자의 심리를 파악해서 나쁜 남자 아닌 좋은 남자로 접근해서는,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는 완전히 바뀌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해서 결혼을 하고서 여자에게는 뭐라고 하는가? "당신 때문에 이렇게 희생했다" 라고 하면서, 혼인신고를 하고는 그야말로 오리발을 내민다는 것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인데 말이다. (??)

◈ 다시 '도피성'의 경우에 !!

다시 도피성 이야기를 하면, 이 도피성에서 약속이 구체화되는데, 물론 이 도피성은 땅인데 말이다. 이 도피성이 이스라엘에 몇 군데 있었는고 하니, 6군데라는 것이다. 레위지파가 있다고 해서 다 있는 것은 아니고, 특별히 6군데만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도피성이 6군데만 있고, 그 나머지 땅은 그냥 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도피성은 무엇인고 하니, 약속과 연관된 수직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어나는 희안한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약속의 땅은 죽음의 의미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오늘 교재의 제목이 '피로 만든 복음' 인데, 바로 이 피가 무엇인고 하니,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음은 아무나 죽는 그런 죽음이 아니라, 진짜로 죽지 않아도 되는 거룩한 분의 죽음인데, 바로 그 하늘에서 오신 분의 죽음이 그 피 안에 담겨있다는 것이다.

저는 그 죽음이 도피성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데, 그래서 지금 그런 제목 아래에서 도피성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약속은 죽음의 의미를 보여준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죽음의 효과인데, 바로 그 대제사장의 죽음의 효력을 보여주는 것이 곧 도피성이라는 말이다.

물론 여기 6군데의 땅만 그러하고 다른 땅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도피성과 도피성이 아닌 곳의 차이점을 명백하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도피성이 있는 땅과 도피성이 없는 땅 중에서, 물론 도피성이 없는 땅은 그냥 개간해서 농사짓는 평범한 땅이라는 말이다.

◈ 고대사회는, 제사와 전투와 생산계급으로 !!

'데미지(?)' 라는 신화학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모든 신화에는 3가지 종류의 계급이 있다는 것이다. 제사계급과 전투계급과 생산계급으로 말이다. 이 생산계급을 주인과 종으로 나누어서, 그렇게 4가지 계급으로 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 모든 고대국가의 계급이 다 이렇게 3가지가 아니면 4가지라는 말이다. 즉 제사기능과 전투기능과 생산기능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 제사기능에는 왕과 제사장이 있는데, 그리고 전투기능은 군인들이 하고 말이다. 물론 왕은 전투기능에 포함되기도 하고 말이다. 이스라엘의 사울 왕의 경우에는 제사기능이 아니라 전투기능에 포함이 되는데, 제사기능은 사무엘이 담당하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구약은 고대사회이니, 그 고대사회는 이런 계급으로 되어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이 생산기능이 둘로 나누어지면, 그것이 곧 '카스트' 제도인데, 그러니 접촉해서는 안 되는데, 접촉하면 아주 더러워진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카스트 제도가 인도의 것이라고 여기지만, 사실 이렇게 고대사회에 보면 다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 당시의 신약시대도 그러했는데, 유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계급을 3개도 4개도 아닌 7개로 나누었는데, 그렇게 나누는 중심에는 "성전의 영역에 들어갈 것인가? 들어가지 말 것인가?" 라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나누었다는 것이다.

◈ 도피성이 있는 땅과 없는 땅의 차이점을 !!

그렇다면 이런 제사장의 죽음의 의미를 보여주는 도피성의 경우에도, 도피성이 있는 그 땅과 그것이 없는 자기 땅의 차이점을 본다는 말이다. 즉 "아하, 우리의 땅이 거룩해지는 이유는 도피성이나 성막으로 인해서 그렇구나. 우리가 잘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막이나 제사장이나 도피성 제도를 다 합쳐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그것을 곧 '모세율법'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모세율법에는 '지켜라' 라는 것만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율법이 될 수 있는 장치조차도 우리 인간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쪽에서 만들어서 주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만 달랑 주셔서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씀을 지키기 위한 장치까지도 이미 주님께서 다 만들어서 마련해주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는고 하니, "우리는 더러운 죄인이고, 저쪽은 거룩한 의인이다" 라고 하는 그 차이점을 뚜렷하게 발견해서, 즉 "아하, 우리와 같은 죄인이라고 해도 그 거룩에서 흘러나오는 효과를 입고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곧 이스라엘의 체제라는 것이다. 

◈ 히브리서의 경우에 !!

그렇다고 하면, 이것이 그대로 히브리서로 옮겨진다고 하면, 그러면 히브리서는 무엇인가? 히브리서에서는 율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여전히 있는데, 그러면 히브리서에 있는 율법체제가 무엇인가? 성전제도인가? 양인가? 염소인가? 도대체 누구였는가? 그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누구입니까?" 라고 해야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율법을 위해서 천사를 부려야 하는데, 즉 "어이 천사, 너는 저리로 가서 율법을 선포해. 그리고 너는 이리로 가서 선포해" 라고 해야하는데, 구약의 스가랴서나 에스겔서 끝에 보면 천사가 나오는데 말이다. 그런 천사들은 율법시행을 위해서 동원된 일군들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일군이 높은가? 그 일군을 부리는 주인이 높은가? 당연히 주인이 높은데, 그런데 히브리서 2장에 보면, 그러한 천사를 부려야 되는 주인이 되신 분이 어떻게 하시는가? 오히려 그 천사보다 더 낮게 오셨다는 말이다. 그런 천사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것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인간인데, 즉 죄인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들이 고생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히 2:7)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히브리서에서는 그런 자들 중에서 택한 자들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형제'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고난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게 아니라 형제를 위한 고난인데, 이 형제는 다른 말로 하면, 천사는 율법을 주는 일을 하는데, 율법이 천사를 통해서 왔으니 말이다. 그러니 천사 아래에 있는 인간으로, 즉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말이다.

그렇게 율법 아래에 있다는 말은, 율법에 치이고 또 치이고 있다는 것인데, 그러한 형제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대신 고난을 받아서 형제들을 건지는데, 그것이 바로 새언약에 합한 율법의 성취됨의 장치가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 장치를 우리가 설치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설치를 하셨는데, 양의 피 대신에, 소의 피 대신에, 주님께서 자기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히브리서에서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분을 바라보자는 것인데,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그런 믿음까지도 이제는 예수님 자신이 곧 주체로 등장하셔서, 즉 "내가 곧 주이고, 온전히 하는 분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온전케 하시는 분을 바라보자 !!

그러니 여기서 "온전케 하시는 분을 바라보자"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에서 "온전케 하시는 분을 바라보자" 라고 했을 때, 온전케 하시는 분을 바라보는 것과, 또한 바라보면 온전케 되는 것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온전케 하시는 분을 바라본다는 것은 "너는 이미 온전케 되었다" 라는 의미인데, 하지만 바라보면 온전케 된다는 것은 일종의 흥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온전케 되신 분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온전한 신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믿었다' 라는 것은 "이미 온전해졌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다른 게 아니라, '온전해졌음', '온전해졌음', '온전해졌음', 바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생활이란 말이다.

◈ 재벌2세인 모세의 경우에 !!

모세의 경우에 재벌2세로서 자기 집에 엄청 많이 있었지만, 하지만 그런 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온전하려면 구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모세는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로서 수많은 보화가 있었지만, 그것을 마다하고 온전한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난이 왜 오는고 하니, 그런 고난이 오면 올수록 온전함이 더 티가 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즉 "이렇게 고난을 받아도 상관없이 온전하다" 라는 것을, 즉 그러한 가운데서 온전함을, 심지어 돌에 맞아서 목숨을 잃어도, 우리의 온전함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렇게 죽는 순간에 더욱 더 확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모든 율법의 장치는 오직 예수님의 피밖에 없는데, 그러니 바로 그 피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를 증거하지 않는 교회라고 하면, 문을 열고 들어가서 헌금한 것을 도로 찾아가라는 말이다. 피를 증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런 피를 증거하지 않는 교회에 있는 재산을 다 바치고, 돈이 떨어지고 나면 피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피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마다, 주께서 교회를 의지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피를 전하는 복음을 가지고 괜찮은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그런 것을 더 온전치 못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다.

◈ 주님은, 평범함을 허락하지 않아 !!

제가 언젠가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즉 사람이 태어나면 소망이 무엇인고 하니, 남들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도 같은 인간인지라 어찌 그런 소망이 없겠느냐는 말이다. 폼 나게 골프도 치고 싶고, 노래방에서 도우미와 노래도 부르고 싶고, 비싼 술집에서 술도 쳐묵고 싶고, 담배도 하고 싶고 말이다. 그리고 여자 복이 많아서 같이 어울려서 즐기고 싶고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평범함을 허락하지 않는데, 여기 이 대제사장의 경우에, 요즘은 성도라고 보면 되는데 말이다. 성도에게는 약속의 추가 있기 때문에, 석유를 시추하는 그 추가 말이다. 즉 성도가 있는 곳 자체가 바로 도피성이 되기 때문에, 성도는 자기의 개인적인 소망보다도 죽음을, 특별히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우리의 팔자인 줄로 알아야 하는데,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 도피성에는, 주님의 사건에 휘말린 자들이 !!

이 '도피성' 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고의가 아님에도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이, 즉 원한이 없는데도 그만 원한이 유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의 기능이 무엇인고 하니, 없는 원한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 일으킨 사건에 그야말로 재수도 없이 휘말린 사람이라는 말이다. 물론 재수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나중의 문제이고, 아무튼 주님의 사건에 휘말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의가 아니게 휘말려서 타인들로 하여금 원수취급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본의 아니게 원수취급을 말이다. 꼭 예수님 같은데, 그러니 그러한 원한으로 인해서 복수를 당해서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도피성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 형식의 제도가 곧 도피성 제도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율법' 이라는 장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러니 약속의 땅은 사람들을 위한 땅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 보이는 땅이라는 말이다. 거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거룩을 훼손하면 가차없는 저주가 주어진다.

(민 35:17)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 그런데 '고살자'의 경우에 !!

여기에 '고살자' 라는 것이 나오는데, 바로 이 도피성에 들어올 수 없는 자가 곧 '고살자' 라는 것이다. 즉 고의로 살인을 한 자인데, 즉 고의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것과, 또한 고의로 죽이지 않은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살인사건이 났던 시점에서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의식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라는 것인데, 만약에 의식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고의가 아닌 것이 되고,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의식을 했다고 하면, 그것은 고살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내가 이렇게 믿으면 구원을 받겠다" 라고 하는, 즉 자기를 의식해서 믿게 된다면, 그것은 백 날을 믿어도 예수님의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복음의 영역에, 즉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 천국에는, 왜 로켓을 타고 가면 안 되는가?

어제 오후설교시간에 천국에 가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1번은 계단, 2번은 엘리베이터, 3번은 로켓트, 4번은 위에서 덮쳐서, 즉 천국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상에서 이루어진다고, 그렇게 4가지를 이야기했다는 말이다.

물론 정답이 4번인 것은 우리가 아는데, 그런데 2번과 3이 조금 애매하다는 것이다. 2번은 모든 것이 다 준비가 되어도 자기가 가고 싶은 층의 버튼을 눌려야만 하는데,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자기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3번은, 본의 아니게 타고 있으면 발사가 되어서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뜻 들어보면 복음처럼 들리는데, 그런데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방금 이야기한 도피성과도 관련이 있는데 말이다. 즉 복음은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주되심인데, 그런데 로켓트 안에 들어있으면 그 관심사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현재 구원받고 있다" 라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원도 하나의 '고의'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3번은 정답이 될 수 없는데, 정답은 위에서 그냥 덮치는 것이지, 자기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어떤 요령을 피워야 하는지, 즉 로켓트 안에 있으면서 주께서 점화하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나', 바로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물론 그런 인식을 하지 않아야 된다고 다짐하는 '나'도 역시 문제가 되고 말이다.

◈ 잠시 '무한(無限)'에 대해서 !!

그렇게 무한대로 계속해서 '나' 라는 것이 번지게 되는데, 언제가 때가 되면 이 '무한(無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드리겠는데, 집합론의 창시자인 '칸토르'의 집합론에 보면 그 무한개념이 나오는데, 아주 심오한 내용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이 '무한' 이라는 것은, 제 아무리 숫자를 채워도 그 뒤에는 여분의 것이 또 남아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의 철학자들은 이 무한에 대해서 그만 다들 손을 털어 버렸는데, 즉 모르겠다는 것이다. 칸트의 경우에도, 이 무한은 신의 영역이니 손을 대지 말라고 하면서 발을 빼고 말았는데, 하지만 이 양반은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 자기 주장을 펼쳤는데, 그러니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무한이 상당히 어려운 개념인데,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약만 올리지 말고 조금 맛보기를 보여주면(ㅋㅋ), 이렇게 1cm, 2cm, 3cm, 4cm, 그렇게 계속해서 나가면 무한(∞)cm가 있는데, 그러면 그 무한이 끝인가? 그게 아니고, 아무리 무한으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는 반드시 '+1'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무한은 끝이 없어서 잡을 수 없는 무한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3cm과 4cm 사이는 어떠한가? 그것을 계속해서 쪼개보면, 역시 무한대로 쪼갤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힘은 아니지만 아무튼 무한대로 쪼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사이에도 역시 무한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무한을 숫자로 보내면 무한대(∞)가 되는 줄로 알지만, 그러나 여기에 있는 무한대로 쪼개지는 이 무한은 재어보니 몇cm인가? 정확하게 1cm라는 것이다. 그러니 1cm로 나오는 무한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말장난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그러한데, 즉 1cm로 나오는 무한이 아닌 유한이 되는 무한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유한 안에 무한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무한하신 그분이 유한한 우리 인간에 들어오는 것이 말이다. 우리는 성전인데, 보통 성전이라고 하면 거룩하고 고상한 것만 생각하지만, 하지만 우리와 같이 더러운 것에, 즉 거룩하신 주님께서 더러운 우리 인간에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있다는 말이다. 마치 그 1cm 안에 무한대가 들어오듯이 말이다.

우리는 무한이라고 하면 보통 무슨 무한만을 생각하는가? 1cm, 2cm, 3cm, 4cm, 그렇게 계속 나가는 무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한은 우리의 능력 밖의 문제이다. 우리 인간은 어쩔 수가 없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좁은 우리 안에 주님께서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꼬라지는 지금 요 모양 요 꼴이라도 얼마든지 주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히 주의 일을 말이다.

물론 주의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통해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이렇게 너저분한 우리를 통해서 그 귀한 복음을 얼마든지 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편지에 나오는데, 즉 "우리는 다 쓰레기와 같지만, 이런 쓰레기를 통해서 너희들을 부하게 만든다. 즉 우리는 가난하게 만들고, 너희들은 부하게 만들고, 그것이 곧 거부할 수 없는 성령의 능력이다" 라고 말이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 성령의 능력은, 유한 안에 있는 무한을 퍼트리는 것인데,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다. 다윗의 돌팔매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골리앗 앞에서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이 되어지니, 이스라엘의 대군도 이기지 못하는 그 골리앗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26페이지를 살펴보자.

** 대제사장의 존재의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사람을 죽여 땅에 피를 젖게 해야만 하는 자가 필요했다. 그 자의 운명은 대제사장이 대신해서 가져간다. 즉 대제사장과 같이 세월을 보내게 된다. 대제사장과 무관하게 살 수 없다.

◈ '동행자'가 누구인가?

제가 이렇게 도피성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 '피' 복음은 우리의 인식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의 모습으로 대제사장을 바라보게 될 때, 절대로 자기 힘으로 산다고 보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동행자가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 동행자가 누구인가? 우리 대신에 죽이신 분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바깥에 나가면 맞아죽는데, 즉 정죄함을 받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간음한 자이고 살인한 자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누가 동행을 하시는가?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뻔뻔하지만 그 안에서 의인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도피성에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대제사장을 잠시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즉 "주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지금 제가 조금 바빠서 잠시 헤어여야 하겠습니다. 제가 죽을 때 교회에서 다시 만납시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은 계속해서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혜택을 이용하고 나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우리는 날마다 복음을 이용하지만, 그러나 !!

물론 우리가 육을 입고 있는 이상은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다시 성령께서 우리의 자리를 확인시켜주시는데, 즉 "거기는 니 자리가 아니야. 너는 이미 온전한 분의 자리에 있는 거야" 라고, 그렇게 우리에게 믿음을 새롭게 발생시킨다는 말이다. 그러니 바깥에 나가서 사업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온전함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렇게 해서, 거룩함과 피와 대제사장의 죽음과 속죄가 상호 연관이 있음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것이 '도피성' 이라는 공간이다. 이 4가지 요소가 섞여야 복음이 된다.

◈ '육'이 어떻게 '영'과 연결이 되는가?

알고 보면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 언뜻 그냥 보면 쉬워 보이지만 말이다. 이것이 왜 어려운고 하니까, "보이는 육이 어떻게 보이지 않은 영과 연속적으로 연결이 되는가?" 라는,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이다. 육이 영을 보게 되면, 그것은 아까 '찌지직' 하면서 귀신의 사진을 찍듯이, 그렇게 귀신에게서 나오는 에너지를 사진으로 찍어서 그것이 귀신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이 아니라, 육이 죽을 때, 즉 죽음이 육을 덮치게 되면, 그 죽음을 주도하는 분이 곧 영적인 분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육이 영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했는데 말이다.

사실 그것보다는 "나는 날마다 망한다" 라는 것이 더욱 더 실감이 나는 의미인데, 그냥 "나는 죽는다" 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살아가기가 힘들 때 쉽게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망한다" 라고 하는 것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예를 들어서, 노숙자의 경우에, 자기는 죽는다는 소리를 쉽게 하지만,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당신은 망해요" 라고 하면 엄청 화를 낸다는 것이다. 한번은 길을 걸어가는데, 노숙자가 노상방뇨를 하기에 하지 말라고 했더니만 얼마나 화를 내던지 말이다. 사실 노숙자가 노상방뇨를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데, 그래도 꼴에 자기는 의롭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아무리 망하고 망해도, 그렇게 망하는 순간에도 자기 의는 결코 손에서 놓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건 우리 힘으로 그렇게 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의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핑계를 대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여기에 4가지 요소, 즉 거룩함과 피와 대제사장의 죽음과 속죄가 있는데, 물론 죽음과 속죄는 하나로 묶고, 그 다음에 죄인을 포함시키는 것이 더욱 좋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게 되면, 즉 거룩함과 피와 대제사장의 죽음과 죄인됨, 그렇게 4가지 요소가 들어가 있다고 보자는 것이다.

이제 교재 126페이지를 살펴보자.

** (1) 복음에서의 상대성 원리 - 아이스크림이 녹으면 진득진득하게 탁자에 달라붙듯이 아담의 속성이 그 동안 이 세상을 덮어왔다. 자아는 아담의 속성이며, 자아들은 사라져도 아담은 지속되었다.

◈ 복음의 '상대성 원리' !!

여기 제목이 '(1) 복음에서의 상대성 원리' 라고 되어있는데, 먼저 상대성 원리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흔히 이 상대성 원리를 어떻게 이해하는고 하니까, 쉽게 말해서 "니가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것이 서로 다르다. 즉 두 가지의 안목이 있다" 라고, 그렇게 상대성 원리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성 원리가 아닌데, "니가 보고, 내가 본다" 라고 하면, 그것은 절대성의 원리가 두 개라는 것이다.

경찰이나 군인들이 자기 몸을 단련하는데 어떤 기구가 있는고 하니, 막대기의 양쪽에 권투 글러브와 같은 것을 붙여서 단련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개뼉다구를 길게 늘어뜨린 것처럼 생겼는데 말이다. 보통 군대에서 쫄다구들은 이런 것을 사용하지 않는데, 아무튼 그런 게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니는 니대로 보고, 나는 나대로 본다" 라는 것은 절대성의 원리가 두 개이지 상대성 원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이 상대성 원리인고 하니까, "내가 있음은 너 때문에 있고, 너는 또한 나 때문에 있다" 라는, 그것이 곧 상대성 원리란 말이다. 그러니 둘의 관계가 서로 끊어지면 '나' 자체가 누구인지가 성립되지 않는데, 즉 상대방이 없으면 '나'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차이점을 알겠지요?

과거에 저희 할아버지가 참으로 잔소리가 심했는데, 그래서 하루는 손자들이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전부가 다 밖으로 다 나가고 집에 할머니만 혼자 남아있는데, 그래서 저녁에 돌아와서는 할머니에게 물어보았다는 것이다. "오늘 할아버지가 어떻게 하던가요?" 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뭔고 하니, "오늘 그 영감이 입이 심심해서 그야말로 죽을 뻔했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자기가 간섭하고 잔소리를 할 사람들이 모두 나가버렸으니 말이다. 그게 곧 상대성 원리라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매일같이 "이 놈들아, 어서 나가서 죽어라" 라고, 그렇게 고함을 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사실은 자기 말대로 정작 나가서 죽어버리면 잔소리를 할 대상이 없어져서, 자기가 그만 죽게 된다는 것이다.

◈ 목사는, 잔소리하는 재미로 !!

그러한 자들이 바로 교회의 목사들인데, 목사들이 그렇게 재미로 산다는 말이다. 월급은 적어도 매일같이 그런 잔소리하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이 없어지면 목사가 미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만 잔소리할 대상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자기가 잔소리를 할 대상이 말이다. 마치 방금 말한 할아버지처럼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더러운 버릇인데, 그래도 나이가 70정도가 되면 그대로 모르겠는데, 나이가 든 노인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보지만, 새파랗게 젊은 인간들이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이다. "미씹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놈들은 정신병원에다 입원을 시켜야 하는데, 물론 그런 것을 보고 그냥 있는 교인들도 문제이지만 말이다. 교인들은 왜 그런고 하니, 목사에게 그렇게 하다가 벌을 받을 까봐 감히 야단을 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것도 일종의 상대성 원리라고 할 수 있데, 즉 교인들은 뭔가 얻어맞는데서 오는 쾌감을 느낀다는 말이다. 물론 자기에게 잔소리를 해주면 외로움이 조금은 줄어드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 법정 스님의 경우에 !!

그러니 이런 상대성 원리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참으로 놀랍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데, 은둔자, 도피자, 그리고 목숨을 걸고 에베레스트를 등산하는 산악인들, 물론 법정스님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가 있는데, 그야말로 도인들이란 것이다. 상대성 원리를 벗어난 말이다.

그런데 그 양반이 '무소유' 라는 책은 왜 출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너무 심심해서 그랬지 싶은데 말이다. 굳이 무소유를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자기 혼자 그렇게 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상대성 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데, 즉 자기 책을 읽어줄 사람들이 없으면 자기 존재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존재의 이유 !!

김종환이 그러한 심오한(?) 노래를 불렀는데, "니가 있으매, 나의 존재의 의미가 있다" 라고 말이다. 소위 '존재의 이유' 라고, 그게 1집, 2집까지 나왔지 싶은데, 그 가사를 보면 참으로 내용이 기가 찬데, 애절한 그의 음성과 함께 당시에 수많은 백수들의 심금을 그야말로 울리고 울렸다는 것이다. 연애를 해서 사귀는 여자는 있는데, 취직은 전혀 안되고 말이다. 요즘에도 노래방에 가면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말이다. (ㅋㅋ)

◈ 주님과 주님과의 상대성 원리 !!

그런데 이 '복음의 상대성 원리' 라는 것을 기존의 신학자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하나님도 인간이 없으면 심심하니, 그래서 인간을 만들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인간을 상대하는 상대성 원리가 아니고, 주님과 주님과의 상대성 원리라는 말이다. 즉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서, 주로부터 나와서 주께로 돌아간다" 라는 것인데, 그런 주님과 주님의 상대성 원리에 우리 인간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피조물(被造物)' 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인데, 물론 창조주가 그렇게 만든 것은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상대성 원리를 위해서 동원된 가구들인데, 즉 드라마를 찍는 곳의 세트라는 말이다. 꽃이고, 화병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상대성 원리에 필요해서 불러준다고 하면, 즉 꽃을 꽃이라고 불러주면 그때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너는 지옥에 가" 라고 하면, 주님에게는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권능이 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역할만 감당하면 된다는 말이다. 우리 피조물은 말이다. 그렇게 주님에게만 의미를 두기 위해서 우리는 지옥에 가야만 된다는 것이다. 지옥에 왜 가야만 하는고 하니,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는데,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우리의 사랑은 스토커 수준 !!

제가 지난 주일낮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건 스토커 수준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매일같이 아무리 큐티를 하고 그 무엇을 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을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신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 스스로의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자기가 동원되었음을 깨닫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이지 주님의 사랑이 들어온 사람인데, 그렇게 해야 "아하,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함이구나" 라고, 그렇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바로, 주님은 누구를 일방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스크린으로, 그런 용지로 사용되기 위해서, 즉 주님은 사랑의 하트를 그리는데 우리처럼 죄가 많은 죄인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거기에 주님이 자기 피를 확 쏟아놓고는 "아이쿠, 내가 준 사랑이 참 예쁘다" 라고 말이다.  

바로 그렇게 사용하기 위한 스케치북으로서, 그런 식으로 우리를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도 이전에 말이다. 하나는 사랑하기로 하고, 다른 하나는 미워하기로, 주님께서는 그렇게 이미 작정을 하셨다는 것이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약속은, 평화가 아닌 싸움을 !!

그래서 창세기 25장에 보면, 리브가가 임신을 해서 받은 계시가 나오는데, 즉 "두 국민이 서로 나누어진다" 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평화를 원하는데, 종교와 민족을 떠나서 말이다. 아무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위반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평화가 아닌 싸우기를 원하는데, 두 민족이 서로 나뉘어져서 말이다. 즉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이 아닌 민족들이 싸우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 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렇게 싸워줘야만,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지구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과 가족이 싸우고, 교인과 교인이 싸우고, 아버지와 아들이 싸우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싸우고 말이다. 딸이 어미와 싸우고 말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과 싸운다는 것이다. 또한 '내' 안에 계신 주님과 싸우고 말이다.

그렇게 싸우는 것이 정상적인데, 왜냐하면 약속이 들어올 경우에만 생기는 현상이니 말이다. 그렇게 죽도록 싸우다가 죽으면 된다는 것이다. 즉 성도는 평생을 싸워야 하는데, 자기 자신과, 또한 주님과 말이다. 그렇게 싸우다 보면, "아하, 이렇게 싸우는 게 약속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여기 교재 126페이지를 다시 보자.

** (1) 복음에서의 상대성 원리 - 아이스크림이 녹으면 진득진득하게 탁자에 달라붙듯이 아담의 속성이 그 동안 이 세상을 덮어왔다. 자아는 아담의 속성이며, 자아들은 사라져도 아담은 지속되었다.

◈ 여러 명의 아담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우리가 알다시피 탁자 위에 있는 아이스크림이 그대로 녹으면 그냥 탁자 위에 달라붙는데, 그와 같이 아담의 속성이 이 세상에 들어 붙어있다는 것이다. 여기 교재에 '자아' 라는 단수와 '자아들' 이라는 복수가 나오는데, 즉 아담이라는 하나의 동일성과 다수성에 관한 논쟁만 이야기하려고 해도 10시간 이상을 강의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 한 문장만 하려고 해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여러 명의 아담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인데, 물론 로마서 5장에서 사도바울이 이 논리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사도바울의 논쟁은 항상 구약의 언약에 기초해있기 때문인데, 철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구약의 언약이 그러하게 때문에 사도바울이 그런 논리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남자만 몇 명이었는가? 50만(60만?)이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전체를 무엇으로 보셨는가? '50만 아들들' 이라고 하지 않고, 그 전체를 합쳐서 그냥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고 하니, 그것은 50만 명이라는 개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개체를 모두 덮고 있는 하나의 언약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나의 언약으로 말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언약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 교재에 나오는 '복음의 상대성 원리'에서 계속 설명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어떻게 다수가, 즉 지체가 천 개도 넘고 만 개도 넘는데, 그런데 어떻게 한 몸이 되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그러한 논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시간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 속에 우리만 들어있다면 이러한 감사가 나오지 않고 우리의 자존심이 튀어나올텐데, 하지만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줄 압니다. 저희들은 망해도 마땅한데, 아니 망할 수밖에 없는데,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건져주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우리 자신의 것으로 남 앞에서 드러나게 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12,04 오후 10시 30분에 마침.

                                                           목사님, 고구마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

 

 

=====================================


♧ 도피성 존재의 이유 ♧

이스라엘의 요단강을 기점으로 하여 48개의 성읍 중 6곳을 택하였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3곳(베셀, 길르앗라못, 골란) 요단강 서편에 3곳(게데스, 세겜, 헤브론)이었습니다(수20:7-8).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지명의 뜻까지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쪽의 도피성은 골란과 길르앗 라못, 그리고 베셀에 두었고 서쪽에는 게데스와 세겜, 그리고 헤브론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도피성은 이스라엘 지도를 참조하여 보면 이스라엘 전역 어디에서든지 32km 이내에 위치하여 있어서 부득이 도피성으로 피해 가야할 경우 하룻길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성을 향한 도로는 폭을 14m 이상이 되도록 넓게 잘 닦아 놓았으며 또 길을 잃지 않도록 미클라트(도피성)라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해 놓았습니다.

그러면 이 도피성은 무슨 이유로 세워놓은 것일까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살인죄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죄에 대한 형벌은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형벌이 없다면 사회 정의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거기에다 연속적으로 살인에 대한 끝없는 복수가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살인죄가 중할수록 그리고 그 형벌이 엄할수록 의도적인 살인과 과실로 발생하는 사고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은 누명을 쓴 사람이 피살자의 가족들로부터 즉각적인 보복을 당하기 전 까지 자기 결백을 증명할 수 있도록 안전하게 피신할 장소도 필요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다 그 도피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고의로 이웃을 모살하였으면 살인자가 거룩한 단에 있을지라도 끌어내어 죽이라고 명령하신 바 있습니다.(출21:12-14) 따라서 이 도피성은 중한 과실죄를 지었으나 구원을 기다리는 자들의 피난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도피성에도 운영의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살인자가 과실로 죄를 지었다는 것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도피성에 들어가 숨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의도적으로 살인하지 않았음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살인에 대한 도구가 있거나 계획적인 살인을 하였다면 구제 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실로 살인한 자는 도피성에서 얼마든지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받게 됩니다.

둘째, 반드시 도피성으로 스스로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인자는 도피성 안에 있을 때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피하는 도중에 보복을 당하거나 도피성에서만 생활하는 것이 지루하다 하여 밖으로 나와 있다가 죽음을 당하는 일은 도피성에 대한 규정에 따라 보호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스스로 무죄하고 또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생각할지라도 도피성으로 피하지 않으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도록 하는 보수(報酬)의 원칙에 따라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내어준바 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죄 값을 치루게 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피해 있던 자들에게 사면이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어 사면령이 내려지면 보수자가 살인자를 만나도 보수의 원칙에 따라 피를 흘리게 할 수 없습니다.(민35:27,28)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대신 은총이 내려집니다. 왜냐하면 이 도피성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