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36강 진노로 규정된 인간 (환상 깨짐 당할 인간)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구/대구101122피p127진노로규정된인간.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구/대구101122피p127진노로규정된인간.avi

대구101122피p127진노로규정된인간.hwp


대구101122피p127진노로규정된인간

피36강 진노로 규정된 인간 (환상 깨짐 당할 인간)

[10 대구강의 18] - [피 36] - 진노로 규정된 인간
                                                                                
                                                   10,11,2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수고와 슬픔 뿐이요 !!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교재 126페이지의 '(1)복음에서의 상대성 원리'를 계속해서 하겠는데, 먼저 교재를 한번 살펴보자.

** 인생이란 짧다. 길지 못하다. 그것은 다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다.

(시 90: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시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여기 10절에 보면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이 세상을 살면서 즐겁고 행복했던, 그리고 지금도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수고와 슬픔 뿐이요" 라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말인데, 물론 그런 수고와 슬픔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이 극복이 되어질 때는 환희와 행복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인생을 의도적이고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당연히 성경적인 답변이 있어야 하는데, 그 답변이 교재 그 다음 번에 나온다는 것이다.

*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짧은 자기 인생을 길고 긴 것처럼 여기며 산다. 이는 마치 짧은 사다리로 긴 건물 꼭대기까지 도달하려는 무모한 시도와 같다. 1층에서 2층까지만 닿는 짧은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가 봤자 2층이 전부이다. 3층까지 올라가지 못한다. 2층에서 그 짧은 사다리를 걷어올려서 2층을 기초로 새로 시작해서 3층에 닿은 방식으로 걸쳐야 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는 이미 1층과의 연속성이 끊어져버린 이후이다.

◈ 짧은 단층 사다리로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의 몸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건물을 올라갈 때, 이렇게 1층, 2층, 3층, 4층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런데 1층에 있는 몸을 2층에 걸치게 되면, 1층은 이미 지나간 것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3층에 가면 2층은 이미 지나간 것이 되고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성경은 우리 인생전체를 보고 있는데,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 전체를 보지 못하고 순간 순간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런 순간 순간에서 즐거움과 쾌락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순간 순간에서 말이다.

성경에서 "수고와 슬픔 뿐이요" 라고 하는 것은 인생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또한 성경말씀은 인생전체만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즉 천국에서 삶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의 삶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라고, 즉 "영원한 안식은 이 땅에서 찾을 수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인생의 즐거움을 찾아서 !!

이러한 성경의 입장에 대해서, 그렇게 "수고와 슬픔 뿐이요" 라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반발하는 것은, 인생 전체보다도 순간 순간 무엇이 자기를 즐겁게 해줄 것인지, 즉 자기에게 순간 순간 그 어떤 쾌락을 줄 것인지, 그런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그들의 솔직한 고백은 무엇인고 하니, 인생이 즐겁다기보다는, 인생의 즐거움을 찾아 나선다고,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TV드라마와 같은 경우에는 일시적인 인기 위주인데, 하지만 한 때 인기가 있었던 가수라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하면서 다 잊어버리게 되면, 즉 그 사람은 자기 인기가 길게 간다고 보았는데, 대중들이 자기를 금방 잊어버릴 때, 자기는 그만 깊은 허무와 허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목사도 마찬가지인데, 한 때 자기 설교가 좋다고 그렇게 듣고 난리를 치던 사람들이, 그래서 우르르 몰려왔던 사람들이 그만 다른 교회로 다 떠나버리고 말 때는, 그야말로 목회를 하는 재미고 뭐고 간에 그만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는 더 심하고 말이다.

◈ 한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 ??

교회에는 그런 것을 익히 다 알고, 그래서 교회사를 보면 그런 것에 대해서 어떻게 대책을 세우는고 하니까, '노회' 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 사람에게서 더 이상의 말씀이 나오지 않고 복음이 없더라도, "한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다" 라고 해서 로테이션으로 돌리는데, 즉 이쪽 교회에서 밑천이 떨어지면 저쪽 교회로 바꿔치기를 하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그야말로 교인들을 우롱하게 되는데, 그것을 실제로 천주교나 감리교에서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는 장로교에서도 그렇게 하고 말이다.

그러니 에스겔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양을 위한 목자가 아니라 목자를 위한 양이 되어서, 양을 그런 식으로, 소위 교인들을 목사의 밥으로, 즉 생계수단으로 대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훨씬 더 정직한데, 가게는 손님이 떨어지면 인테리어라도 새로 하는데, 그런데 교회는 그만 바꿔치기를 해서,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겔 34:8)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의 무리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음이라 내 목자들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 섬김이 아닌, 지배하는 교회 ??

여기에 이렇게 교회가 있으면, 이런 교회들보다 더 상위집단을 만드는데, 그것이 곧 노회이고, 이런 노회의 상위집단을 총회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교회보다 더 높은 것이 있다는 것이 바로 천주교인데, 아니 교회에 무슨 본점이 있고 지점이 있느냐는 것이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것이 옳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소위 '장로교' 라서 해서 말이다.

그러니 섬기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지배하는 것인데, 즉 지배계층을 따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그렇게 욕을 하는 국회의원보다 더 못한데, 그래도 국회의원은 4년에 한번씩 뽑기라도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목사는 한번 뽑히게 되면, 그만 자기들끼리 메이저리그를 만들어서, 거기서 제 아무리 바른 소리를 해도 다 잘라버리는데, 즉 "우리 단단한 마피아 조직을 건드리는 놈들은 다 죽인다"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 복음 - '세상을 이겨라' !!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복음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복음은 여기에 대해서 한 마디로 '이겨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기는데 그 앞에 무엇을 이기라고 하는고 하니, "세상을 이겨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세상을 이기라고 할 때, 이 세상을 만만하게 만들어서 그러한 만만한 세상을 이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과거에 우리의 육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그런 사건이나 사태를 하나님께서는 자꾸만 들어내면서 '이겨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힘으로, 즉 육으로 이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주님과 함께 있다고 하면, 그 조건이 그러한데, 즉 정말로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이긴다" 라고 하는 것을, 어렵지만 조금 더 깊이 풀이해보면, 여기에 우리 인간이 있으면, 그 인간은 자기 중심의 세상을 만드는데, 그러니 이 세상을 이기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환상을 이기라는 의미인데, 즉 자기가 임의대로 만들어낸, 즉 "세상은 이렇게 되어야 내가 행복하겠어" 라고, 그렇게 자기 임의로 만든 세상관을, 즉 자기 계획을 본인이 이겨야 한다는 말이다.

◈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도 좋다 !!

그렇게 이기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도 좋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그 어떤 사건이 와도 능히 이길 수가 있는데, 그런데 "이 정도는 되어야 나답다" 라고 하는 환상을 만들어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그러한 환상에 위협을 주는 사건들을 그 주변에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내가 세상을 이기려고 했는데, 이번 사건만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굴복했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그러니 아직도 자기 환상을 전혀 포기하기 못하겠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에 의하면, 그런 환상은 어디서 만들어졌는고 하니까, 바로 자기 자존심인데, 즉 스스로 높이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 자기 자존심은 자기 긍정에서 나왔고, 자기 긍정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나왔고,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약속의 노선과 대비가 되고 대치가 되고 대립이 되는데, 바로 그런 노선에서 튀어나온 되먹지 못한 못된 성질이 아직도 우리 속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즉 '자아'에서 나온 "내가 있다" 라고 자기 자존심이라는 것이다. 

◈ 김성수 목사와 박영선 목사의 경우에 !!

참 저에게 이메일이 하나 왔는데, 미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그 동안 김성수 목사에 대해서 추종했던 양반인데 말이다. 그 양반이 김성수 목사를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박영선 목사를 존경하고 따른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는 것인데, 김성수 목사가 말이다. 그러니 그 박영선 목사의 설교의 맥을 그대로 이어서 미국의 서머나 교회에서 목회를 하니, 그것이 진리라고 여겨서 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김성수 목사가 개혁주의의 성화론을 맹렬하게 비판을 하니, 그만 화가 나서 김성수 목사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즉 "당신은 이근호 목사의 글을 읽고 있지?"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저에게 전화도 하고 메일도 보내면서 김성수 목사에게 대해서 비난을 하는데, 그가 비겁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이근호 목사의 영향을 받았으면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데, 박영선 목사를 따른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니 말이다.

그러면서 자기들끼리는 어떤 말까지도 유포가 되었는고 하니, 김성수 목사가 이근호 목사에게 메일을 보내고 해서 서로 이러쿵저러쿵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분명히 말했는데, 그런 메일을 받은 적이 전혀 없다고 말이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받은 분이 있나요? (ㅋㅋ)

아무튼 그 양반에 저에게 메일을 보내서, 박영선 목사의 2005년도의 '성화의 비밀' 이란 설교를 보내면서, 저에게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성수 목사가 박영선 목사에게도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식으로 메일을 보냈다는 말이다.

◈ 박영선 목사는 인간의 '주체'를 건드리지 않아 !!

그래서 제가 즉각적으로 답변을 해주었는데, 박영선 목사의 설교를 오랜만에 듣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박영선 목사의 설교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했는데, 즉 박영선 목사는 인간의 '주체'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박영선 목사는 이렇게 여기에 하나님과 인간이 있다고 하면, 그 인간을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인간을 전적으로 죄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알고 있는 괜찮은 의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이 전적으로 죄인이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 자기가 알아서 파악하고 견지하는, 즉 죄인지 아닌지 그 기준을 알고 있는 자기는 아직 유효하다고, 즉 "이것이 죄이다. 이것이 의이다" 라는 것에 대해서 아직도 오류나 실수가 없다고, 그것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 하나님을 본받자 ??

그렇게 되니, 그만 무엇이 빠져버렸는고 하니, 십자가 복음이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 복음은 자기 낮춤과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전부가 다 자기가 죄인이 아닌 상태에서, 언제든지 잘 나가면 잘 나갈 수 있는 입장에서 자기 낮춤과 자기 부인을 이야기하니,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는 없는데, 그냥 "하나님을 본받자!" 라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자기가 자기 환상을 본받는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러니 제가 답변하기를, 박영선 목사는 주체가 잘못되었고, 그래서 사람을 위선자로 만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끝임 없는 위선자로 만드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평소에 한국교회는 썩었다고 하다가 박영선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니, 인간의 위선의 폭을 너무 얇게 보고 있는데, 즉 "이 정도만 다 되었겠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자기 딴에는 순수하다고 여겼는데, 하지만 한번 치게 되면 대번에 달려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는 순수하고 나발이고, 그런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아침에 눈을 뜨면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항상, 기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건 !!

그래서 "오늘도 내가 뭔가 한번 되어볼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기다라는 것은 바로 역시 하나님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태들을 '좍' 일으키시고 기다리고 계시는데, 그러니 모든 것이 다 감사로 다가와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에게 사건을 만들어주시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의미인데, 그러니 정말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자라고 하면, 항상 감사로 다가와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잠시 잊어버리는 것을 잠시 이해해주세요" 라고 하고는 그만 자기 일에 매진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세상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고 싶다는 것인데, 즉 자기가 행복해지고 싶은 조건을 자기 쪽에서 힘써서 만들어내겠다는 말이다. 주신대로 살고, 주신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렇게 "주신대로 산다" 라고 하니, 마치 가만히 있는 것으로 여기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신대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그런 조작된 세상관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 하나님 - '본래 니 자리로 돌아가' !!

그러니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함께 한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지 않는데, 즉 "그렇게 니가 환상적인 세상을 만들고, 또한 니 마음대로 되는지 한번 보자" 라고 해서, 이 세상을 전혀 그렇게 자기 뜻대로 되지 않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너는 원래부터 아무 것도 아니야" 라는 것인데, 즉 "저는 아무 것도 아니라도 좋습니다" 라고 하는, 본래 인간의 자리로 찾아가라고 그렇게 사건들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돌아갈 우리 인간이 아닌데, 하지만 정말로 막다른 골목에서 제대로 절망을 하게 될 때는, 그때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항상 농땡이들이 한 반에 몇 명씩이 있는데, 그런 놈들은 꼭 수업시간에 자기 자리가 아닌 남의 자리에 가서 폼을 잡고 앉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선생님이 "야, 빨리 니 자리에 찾아가" 라고 하는데, 저도 교사를 할 때 그런 경험이 제법 많았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교사의 경우에는 학생들이 자기 자리에 앉아주어야 질문의 수준을 정할 수가 있는데, 즉 "아하, 저 놈은 조금 낮은 수준의 질문이 적당해"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만 자기 자리가 아닌 엉뚱한 자리에 앉게 되면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리에 앉도록 한다는 말이다.

◈ 오직 '십자가의 자리' 만이 !!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우리 자리를 정해주시는데, 그 자리가 곧 '십자가의 자리'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는 어떠한가? 복이 오지 말라고 해도 그냥 마구 굴러 들어온다는 말이다. 즉 감사가 마구 터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감사가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그런 감사가 전혀 나오지 않는 자리를 일부러 찾아가는데, 마치 평소에 불평을 하고 싶어서 환장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감사가 전혀 없는 자리를 찾아가서는 "여기는 내 자리다" 라고 하면서 차지하고 앉아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회사가 부도가 났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러니 부도가 나든 말든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정작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도 부도가 났다고 삐쳐서 계속해서 앉아있다는 말이다.

또한 이혼해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겠다고 하고 말이다.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러니 그동안 결혼해서 산 것에 대해서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도가 나던, 이혼을 하던, 그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든지 간에, 자기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는데, 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환상의 가면을 겹겹으로 뒤집어쓰고 있으니, 그러니 정작 자기 내부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런데 가면을 쓰고 있으니, 자기가 그렇게 꾸민 가면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정작 자기는 살아갈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교회에 나오니, 목사는 그야말로 십자가 복음만을 전할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김성수 목사나 박영선 목사와 같이 유식하고 고상한 이야기들을 하게 되면, 그것이 사람들의 내부에 꽂히는 것이 아니라 위선적인 가면에 꽂히게 되는데, 그러니 계속해서 고상한 색칠만을 하게 되는데, 물론 겉에 있는 가면에다 말이다. 그러니 더욱 더 위선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나는 이제 죽었다 !!

다시 정리해보면, "세상을 이긴다" 라는 것은, 이 세상을 꾸며낸 자기 자신을, 즉 자기에 대한 환상을 부수고 찢어버리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지난 주일에도 이야기했지만, 십자가를 지고 그냥 맹숭맹숭하게 따라오지 말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인가? "나는 이제 죽었다" 라고 여기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제 십자가는 되었으니까, 예수님의 영광이나 맛볼까?" 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영광이 어떻고 저떻고 하지 말고, 전혀 그것이 아니라 "도대체 예수님은 왜 죽었을까?" 라고 하면서, 즉 십자가와 십자가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개혁주의 신학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와 영광인데, 혹은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는 주님과 우리가 다같이 졌는데, 그런데 그것을 모두 벗어버리고, "예수님은 멋있어. 예수님은 부활했어. 승천했어"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꿈에도 그리던, 그런 자기 환상 속의 예수님을, 마치 큰바위의 얼굴처럼, 바로 그렇게 예수님을 자기의 영웅으로 믿고 있으니,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방식에 불과하냐는 말이다. 그러니 지난 주일에 한 설교가 굉장히 어려운 설교였다는 것이다.

교재 127페이지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 진노의 입장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노리면서 손가락질을 하면서 다가옴을 느껴야 한다는 말이다. "너, 바로 네가 문제란 말이야!" 라는 질책 앞에 세워져야 한다. 전신이 따가워야 한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성도는, 항상 질책을 !!

우리는 항상 질책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니 그런 질책을 받는 관계에 대해서 또 다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주님이 아니면 누가 그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주님이 살아계시고, 저와 동행을 해주니 잔소리를 하시지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질책을 받는 기간을 모세 때는 40년으로 잡았는데, 그것이 곧 광야생활 40년이란 것이다. 심지어 그 광야 길을 인도했던 지도자인 모세마저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를 못했는데, 그러니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모세도 아니고 여호수아나 갈렙도 아니고, 바로 언약궤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 누구라도 언약궤보다 앞장서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즉 언약궤를 앞장세우니 요단강이 갈라졌다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칼을 들고 설치고, 갈렙이 나서서 요단강이 갈라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약속이 우선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 !!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약속이 우선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이지, 괜찮은 영웅이 우선이 되는 땅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동네가 천국이고 말이다. 그러니 언약궤가 있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찬양과를 존귀를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위 믿음이 좋다고 하는 모세나 여호수아나 갈렙은 전혀 찬양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마리아까지도 거론하고 있으니, 언약을 전혀 모르니까 그런 오류들이 생긴다는 말이다.

◈ 박영선 목사는 언약을 몰라 !!

참 제가 그분에게 답변을 한 가지 더 했는데, 박영선 목사는 언약을 모른다고 말이다.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이렇게 이렇게 꾸미면 됩니다" 라는 식으로, 그런 마치 인형 꾸미는 방법만을 이야기하게 되니, 그것이 또 위선을 자아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박영선 목사에 대해서 지적을 하게 되면,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오해를 하는고 하니, 실력이 딸려서 질투심에서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김성수 목사의 설교만 들어도 그것이 아님이 다 드러나는데, 실력이 더 낫다는 말이다.

박영선 목사는 자기의 취미생활을 즐긴다고 바빠서 공부할 시간도 없는 양반인데, 테니스와 당구가 거의 프로수준이라고 하니 말이다. 총신이나 합신 출신들이 박영선 목사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곧 그렇게 놀고 즐기면서 설교를 해도 교인들에게 먹혀들더라는 것인데, 그렇게 등산을 즐기고 농띠를 쳐도 말이다.

그런데 소주를 3병 까고 이불을 뒤집어쓰면 설교가 나오는가? 물론 나올 수 있는데, 차라리 대마초를 피우면 더 낫다는 것이다. 들국화의 전인권 씨가 그런 말을 했는데, 자기에게 그런 대마초를 피우도록 허용해주면 훨씬 더 나은 음악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마약과 같은 것을 하게 되면 환상 중에 계시를 받아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즉 꿈으로 계시를 받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렘 27:9) 너희는 너희 선지자나 너희 복술이나 너희 꿈꾸는 자나 너희 술사나 너희 요술객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 하여도 듣지 말라

◈ 인간은, 오늘 하루를 염려할 자격도 없어 !!

그러니 성도는 항상 아침에 눈만 뜨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큐티를 하는 것은 좋은데, 늘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아무 것도 아닌 존재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살도록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인간은 오늘 하루를 염려하고 말고 할 자격조차도 없는데, 그런 존재로서 하루일과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을 당연히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게 되어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야 우리가 약속의 말씀에 관심을 두게 되는데, 그러니 당연히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의 마음대로 되게 된다면, 그렇게 자기 뜻대로 되는 것에, 바로 그런 세상이 곧 우상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즉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더 원하느냐는 말이다. 그게 하나님의 약속인데 말이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여기는가? "그것은 기본이야" 라고 하면서, 그것부터 챙기고 나서, 슬슬 자기 환상이 요구하는 것을, 그러한 것을 얻고자 눈을 이 세상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슨 가치가 죽게 되는가?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는, 그러한 놀라운 주님의 피가 묻어있는, 그런 천하보다도 더 귀한 가치가 우리가 노리고 있는 이 세상의 노림수보다도 더 밑에 있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가 바로 주님의 복음을 훼방하는 자들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가 노리는 것에 의해서 그만 덫에 !!

여기서 제가 하나님의 법칙을 하나 알려드리겠는데, 즉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요령(?)을 말이다. 물론 성경말씀에 있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즉 "우리는 우리가 노리는 바에 의해서 우리가 덫에 걸리는 식으로 하나님은 일을 하신다" 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노리는 것이 있으면, 바로 그 노리는 것으로 인해서 그만 덫에 걸리고 만다는 것이다. 마치 쥐가 맛있는 고구마를 먹는 순간에 쥐덫에 걸리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렇게 우리가 노리는 것에 의해서 우리가 덫에 걸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노리는 것이 없어지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가만히 있으면 무엇이든지 주께서 가져다주신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욕심으로 무엇을 하려고 설치지 말라는 것이다.

◈ 직장생활의 경우에도 !!

예를 들어서, 어떤 아가씨가 직장생활을 할 때, 굳이 직장에서 승진을 노리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주께서 알아서 주시는 업무가 있는데, 바로 그 업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다보면 대리가 되고, 과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장이란 노림수를 가지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자기 업무에 대한 것보다는 오히려 직장동료에 대한 경쟁과 모함과 권모술수, 즉 뇌물과 아부와 같이 추한 것들이 들끓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밑에 있을 때의 일인데, 하지만 드디어 임원진으로 올라가려고 한다면 본격적으로 정치작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니 굳이 그런 더러운 짓까지 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냥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에 따라서 하면 되는데, 즉 사장이 될 능력도 없으면서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란 말이다.

그러니 언제나 "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 오늘도 이런 일거리를 주셨구나"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니 어떤 직책이나 업무를 맡게 되더라도 언제나 감사가 나오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것으로 만족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천국에 남자가 들어가고 여자는 전혀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그렇다고 하면 말이다. 어디까지나 만약에 말이다(ㅋㅋ). 그렇다면 여자가 아무리 몸을 근육질로 만들고 수염을 기른다고 한들, 그러면 남자가 되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래도 전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말이 안 되는 비유도 아닌 비유를 하는고 하니, 오직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에 의해서만 갈 수 있다면, 아무리 교회가 몸집을 늘린다고 한들, 그것은 마치 여자가 남자처럼 보이려고 몸집을 늘이는 것과 같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 당연히, 복음에 맞추어야 !!

복음이 왜 중요한고 하니까, "천국은 이렇게 해서 들어간다" 라고 결정이 되어있으면, 당연히 교회가 거기에 맞추어야 하는데, 그런 성경말씀을 배제하게 되면, 교회는 자기 몸집 늘이기에 주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 가르쳐준 왜곡된 천국에 가는 방식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정말로 가슴이 아픈데, 교회가 아닌데도 교회라고 자꾸만 우기면서, 즉 "너거 교회만 교회인가? 너거 교회만 복이 있는가?"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약속에 의해서 아닌데, 그래서 복음을 아는 자가 "기준이 그게 아니고 성경말씀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라고 하면, 그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런 성경말씀을 그만 치워버리려고 하는데, 즉 "그러면 한국에는 교회가 없다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자기들의 기준을 자꾸만 내세우려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더욱 더 복음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128페이지를 살펴보자.

** 도대체 내가 무엇인가? 태양의 예를 들어보자. 태양의 실체는 오직 공중에 떠있는 그 태양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태양을 아는 것은, 태양이 보내주는 빛과 열과 에너지로 인하여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시신경의 화학적 변화를 통해서 안다. 뿐만 아니라, 안개로 인하여 흐릿하게 가려졌지만 그 분산된 햇살을 통해서 배후에 태양이 있음을 알고, 또한 저녁에 서쪽 하늘을 벌겋게 달아오르게 한 것도 막 산 너머 가버린 태양 때문임을 안다.

◈ 저 태양의 경우에 !!

이것이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여기서 "태양이 보내주는 빛과 열과 에너지로 인하여" 라는 것을 가리우고,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시신경의 화학적 변화를 통해서 안다" 라고 하면, 즉 사람들이 태양을 안다는 것은 누가 아는 것인가? 자기가 아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즉 태양이 있던, 달이 있던, 별이 있던 간에, 그것을 아는 주체는 누구라는 말인가? 바로 '나' 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더 따져보면, 그렇게 '나'로 하여금 태양이 있음을 알게 하는 그 모든 에너지와 힘은 어디서 주어지는가? 태양이 없으면 '나' 라는 것이 살지 못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우리의 머리카락이 자라고 시신경이 자라는 것이 바로 태양과 거기서 나오는 빛에너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태양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곳에 두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눈을 떠도 보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평소에 태양이 적응을 하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그 태양을 하나님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렇게 바꾸면 이해가 되지 싶은데, 즉 제 아무리 하나님이 있다고 해도 자기 두뇌에서 나오는 변화에 의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 그러면 그런 힘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보자는 것이다.

◈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 !!

요즘 '뇌(腦) 과학'이 엄청 발달했는데, 그쪽에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신은 없다" 라고, 아니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도킨스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신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신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신이 있다, 없다" 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철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인데, 왜냐하면 신이 없다는 증거를 대려고 하면 천 년을 해도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면 "신이 필요하지 않다" 라는 것인데, 신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신 개념을 에너지 개념으로 바꾸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스티브 호킹 박사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 아니면 우리는 이 땅에서 그런 발언조차도 할 수 있는 입장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가?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1층, 2층, 3층으로 길게 보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기껏해야 자기가 사는 90년의 짧은 인생으로 버티니까, 2층에 올라가면 1층을 잊어버리고, 3층이 올라가면 1층과 2층을 다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말이다.

교회의 경우에도, 교인이 100명이 되면 50명 시절의 재미나던 기억을 다 잊어버리는데, 그래서 교인이 200명이 되게 해달라고 철야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이 기럭지(?)가 짧기 때문에, 즉 몸만 짧은 것이 아니라 기억도 짧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선별해서 기억을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선별해서 기억하는 것도 자기가 선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다윗의 경우에 !!

그것이 성경말씀에 나오는데, 즉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3가지 벌을 주셨는데, 7년 기근과, 3달 동안 도망치는 것과, 그리고 3일 동안의 온역인데 말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그냥 벌을 주시는 게 아니라, 이렇게 3가지의 경우를 제시하셔서 다윗에게 선택하도록 하셨느냐는 말이다.

(삼하 24:11)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삼하 24:12)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삼하 24:13)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 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는데, 즉 그냥 하나님께서 "다윗아, 니가 사고를 쳤기 때문에 3년 동안에 온 나라에 전염병이 퍼진다" 라고 하시면 되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3가지를 주셔서 그 중에서 하나를 뽑으라고 하셨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벌을 받는 것조차도, 즉 "나는 벌을 받아도 마땅합니다" 라는 것조차도 인간은 항상 자기 의사를 거기에 또 개입을 시킨다는 것이다. 어떤 개입인고 하니, "이제 이 벌만 받으면 나는 의인이 되겠지" 라고 하는, 그렇게 또 다시 자기의 의로움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벌을 받을 때도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라고 하면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이제 벌만 받으면 예전처럼 다시금 근사한 존재가 되겠지" 라고 하면서, 그러한 환상을 자꾸만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 너는 이미 아무 것도 아니야 !!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자리는 무엇인고 하니까, "너는 이미 아무 것도 아니야" 라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자리를 우리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일부러 선택권을 주심으로 말미암아서 어떻게 하시는가?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가 벌을 받고 난 다음에 조금이라도 더 근사한 상황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을, 바로 그런 우리의 본색을 숨기지 않고 들통나도록 만드시는데, 즉 그러한 것을 측정하고 테스트하는 필드로서 우리 인생을 '좍' 깔아놓으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니가 아무리 복음을 이야기해도 니가 노리는 것이 따로 있지? 그렇게 따로 챙겨놓았음을 순순히 자백해. 그럼 그렇지, 진작에 그렇게 나오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라고, 그렇게 우리 인생을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 말이 없는 갓바위 ??

우리(?) 갓바위도 좀 그러했으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갓바위를 그렇게 추상적으로 다루지를 말고, 이렇게 3가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도록 해서, 즉 갓바위 미륵보살의 입을 열도록 해서 "야, 여기 3가지 중에서 하나를 골라라" 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갓바위가 너무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침묵만 지키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너는 아이의 성적을 올릴래? 남편의 승진을 원하나? 아니면 너의 건강을 원하나?"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말을 하지 않으니, 인간들이 문제도 자기들이 내고 답도 자기들이 제시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러한 수능시험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 벌을 받는 것조차도, 죄가 들어있음을 !!

그런데 다윗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문제를 내고 답은 다윗이 3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셨는데, 그렇게 해서 채택을 하지 않은 두 가지와 채택을 한 한 가지의 차이점을 살펴보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다윗은 자기가 벌을 받는 것까지도 자기의 죄가 거기에 가미가 되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벌을 받는 것조차도 죄가 들어있다고 하는 것은, 평소에 했던 그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는 것을, 즉 "아하, 전적으로 나는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아리우나 타작마당에다 제단이 쌓아지게 되는데, 즉 "아무 것도 아닌 존재 위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된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무엘하가 끝이 나게 되는데, 사무엘하를 미리 말씀을 드리자면 말이다.

(삼하 24: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삼하 24:25)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생각을 반대로 해야한다. 태양이 나서서 도리어 그러한 인간을 이용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태양이 인간을 그런 식으로 변모시켰고, 태양이 서쪽 하늘의 구름을 붉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태양이 인간의 시신경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켰다고 봐야한다.

여기서 태양을 하나님이라고 보면, 하나님이 나서서 그런 식으로 인간을 변모시켰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런데 왜 자꾸만 그런 생각의 중심지를 자기 자신으로 삼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 삼으로 삼으니까 "신이 있니, 없니?"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다" 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내가 생각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은, 그러한 나의 생각과 행동은 전혀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나 사이에 맺은 언약의 결과이다" 라는 것이다. 즉 언약으로 의논한 결과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인간들은 어떠한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혀 모르는데, 그러니 전체적으로 그런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하나님이 되는고 하니, 감추어진 하나님이 되는데, 즉 '감추어진 하나님' 이란 말이다.

◈ 안개 저 너머에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우리 인간 주변에는 자욱한 안개가 끼었다고 할 수가 있는데, 10미터 전방도 보이지 않는 말이다. 바로 그 안개 너머에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의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안개를 우리 인간이 도저히 뚫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안개' 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배호의 '안개 낀 장춘단 공원' 이라고 말이다. 혹시 아세요? (ㅋㅋ) 그렇게 마치 안개가 낀 장춘단 공원처럼, 그 공원이 한강변에 있어서 자주 끼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게 자욱하게 안개가 끼어있다는 것이다.

◈ 끊임없는 인간의 '자기 투시' !!

그런데 여기에다가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 이것을 '자기 투시', 혹은 '자기 투사'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눈만 뜨면 이러한 시공간에게다가 자기를 투사해서, 이 세상을 자기 꿈을 달성하는 영화 스크린으로 삼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큐티를 하는데, 즉 "하나님, 오늘은 이렇게 일이 되어야만 하고, 또한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저는 불평을 할 것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침부터 주님에게 시비를 걸 각오를 단단히 하면서 하루일과를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밤늦게 잘 때까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 주여, 지난 밤 꿈에 ??

제가 꿈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데, 지난 토요일 밤에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박사교회에서 장로를 뽑는 꿈이었는데, 그런데 전기톱까지 등장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꿈이었는지,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부흥이 되어서 교인수가 약 250명 정도가 되었는데, 그래서 장로를 더 뽑아야 된다고 결정을 해놓았는데, 그런데 기존 있던 장로님들이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는 대판 싸움을 벌렸다는 것이다. 그 꿈이 얼마나 생생하고 올 칼라로 중계가 되던지 말이다(ㅋㅋ).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이러한 자기가 투시된 스크린이, 즉 자욱한 안개가 여기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언약, 즉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는 코스를 자욱한 안개가 가리우게 되니까 어떻게 되는가?

자기 자존심을 투사해서 다시 자기 자존심으로 되돌아오는 방식으로 이 세상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우기는 군상들의 집합체가 곧 교회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꿈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깨고 나니 온 몸에 식은땀이 다 흘러있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제가 박사교회의 꿈을 자주 꾸는데 말이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태양이 인간을 그런 식으로 변모를 시켰고, 태양이 서쪽 하늘의 구름을 붉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태양이 인간의 시신경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켰다고 봐야한다. 안개가 햇살을 차단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서쪽 산이 태양을 넘어가게 했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 두뇌 안에 있는 시신경이 태양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변모시켰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태양에 비해서 아무 것도 아닌 게 된다. 태양의 모든 활동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없다. 인간의 독자적 판단은 거부를 당한다. 인간은 아무 것도 모른다. 그저 당하는 대로 당할 뿐이다.

◈ 인간은, 그저 당할 뿐 !!

이것이 조금 어려운 내용인데, 여기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은 태양에 비해서 아무 것도 아니고, 태양의 모든 활동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고 하니까, 소위 과학이란 이름으로 신이 필요 없다고 하는 말 자체가 이미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로서 모든 것을 받으니 말이다.

어제 중고등부 설교를 하면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햇빛과 공기와 물과 땅과 조상과 같은 것은 수동적으로 그냥 받는 것인데, 그런 기본적인 것들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존재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 하필이면 왜 '조상' 인가?

이런 것들 중에서 하나가 바로 '조상' 인데, 초창기에 이 지구상에 있는 민족들이 왜 신을 섬겼겠는가?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그들은 왜 모두가 다 신을 섬겼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햇빛과 공기와 물과 땅과, 그리고 조상 배후에는 바로 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신이 그런 것들을 주셨다고 여겼다는 말이다.

특히 여기에서 '조상'을 주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것이 아브라함의 언약과도 연결이 되는데(?), 즉 '혈육적인 것' 이란 말이다. 이것이 곧 종교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즉 죽은 조상들을 모아놓은 장소를 신께서 마련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왜 조상을 신이 주었다고 보았는가? 햇빛과 공기와 물과 땅과 같은 것들은 제 아무리 주어도, 그런 것들은 살아있을 때만 유효한 것이지, 죽고 나면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물론 자기가 살아있을 때는 "고맙습니다" 라고 할 수 있지만, 하지만 죽고 나면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죽은 '나'는 누가 살려줄 것인가? 그 아이디어는 바로 죽은 조상들이 있는 장소에 들어가면 되는데, 그러면 햇빛과 공기와 물과 땅과 같은 것은 어디서 오는가? 그 당시는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신이 주셨다고 보았는데, 그러니 조상도 역시 신으로부터 왔다고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도 죽으면 조상들처럼 드디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살아있을 때도 햇빛과 공기와 물과 땅과 같은 것을 받음으로서 신의 혜택을 받고, 죽어서도 조상들이 있는 곳에 감으로서 영원히 신의 품에 안길 수 있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심지어 유대교에도 이런 것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말이다. 그렇게 조상 품에 안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혜택이라고 보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것들을 인정하셨는가? 즉 "누가 너희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는가? 나를 믿는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조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시켜버렸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로마의 중대장을, 백부장을 천국에 가는 백성으로, 즉 아브라함의 진짜 백성으로 여겼는데,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예수님에게 들었다면, 아브라함과 로마인과의 혈통적인 족보연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유대인이고 로마인은 다른 족속이라는 말이다.

◈ 육적인 신학의 파이프를 다 잘라야 !!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자기를 믿는 로마인 중대장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새로운 신학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새로운 신학이 들어가려고 하면 기존의 육적인 것과 통할 수 있다고 하는 신학의 모든 파이프를 톱으로 다 잘라내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유대인들이 용납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 본인이 성령으로 태어났기 때문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누구든지 영으로 태어나야만 자기 자손인데, 즉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복을 받지 않은 육의 자손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말이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육(肉)'에서 '육(肉)'으로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자꾸만 계룡산 출신이라는 소리를 듣는데(ㅋㅋ), 아무튼 이것을 조금만 더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이런 육에서, 이 육 뒤에는 신이 있는데, 그러니 육은 육을 따라간다는 말이다. 즉 육에서 육으로 가는데, 그렇다면 이 앞에 있는 육, 즉 조상과 뒤에 있는 육의 연결점은 무엇인고 하니, 반드시 역사와 전통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역사와 전통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그것은 바로 양육과 교육으로 된다는 말이다.

현재 심리학에 있어서 강력한 두 가지의 대치되는 이론이 있는데, 즉 인간이 교육을 받는 것이 양육으로 되는지, 아니면 유전자의 결정으로 되는지, 그것을 '유전자 결정론'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앞의 것을 '양육론' 이라고 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삐아제' 라는 것이다. 즉 양육을 하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유전자 결정론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의 모든 되는 것은 유전자의 결정된 본성으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는 '도킨스' 라는 과학자가 대표적인데, 그러니 이 두 가지 이론은 당연히 서로가 대립이 된다는 말이다. 즉 사람은 가르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유전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뇨병의 경우에도, 조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유전자를 타고났다면 당뇨병에 걸리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집안내력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평생을 담배를 피워도 건강하게 백 살을 살고, 또 어떤 사람은 담배 근처에 가지 않아도 폐암에 걸려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유전자라는 말이다.

◈ 우리는 개혁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

방금 이렇게 육에서 육으로 난 것에는 역사가 있고 또한 전통이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이런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양육을 해서 새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하는, 바로 그런 유명한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른 개혁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라고, 아직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만약에 천국에 남자만 들어간다고 하면 당연히 여자는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래서 여자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몸을 근육질로 만든다고 해서 남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요? 이와 같이 천국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만 갈 수 있는데, 그런데 그 복음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이 우리를 덮쳐야 한다는 말이다.

◈ 십자가의 피가 아니라면 !!

왜냐하면, 천국은 주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들만 부르기 때문에 그러한데, 미리 정하시고 부르실 때는 그냥 "야, 이근호!" 라고, 그렇게 이름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새언약이 거기에 관통해서, 즉 새언약이 주사바늘처럼 우리에게 꽂혀서, 즉 십자가의 피가 우리에게 꽂혀서, 그래서 그 피가 우리에게 들어와서는 그 피의 능력으로 날마다 우리를 살려내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은 무엇인가? 꽂힌 것이 없으니, 육이 할 수 있는 것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육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곧 양육이고 교육인데, 그러니 이왕 교육을 받는 것이니, 보다 더 건전한 것을 교육받으면 되는데, 하지만 그렇게 건전한 것을 교육받는다고 해서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건전한 것만 고르고 골라서 신학을 만들어서, 물론 이단인 것은 다 배제를 하고 말이다. 그렇게 정통적이고 성경적인 것만 골라서 제대로 양육을 받으면, 하지만 그러한 작업을 한다고 해서 과연 하나님께서 천국에 넣어주시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넣어주지 않는데, 그러면 천국에 넣어주지도 않는데 교회는 왜 왔느냐는 말이다. 즉 천국에도 가지 못하는 교회가 무슨 교회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나는 가르칠게, 너희는 배워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 그들에게 교회는 일종의 학원이고 가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기의 생계유지를 위한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교회를 이용해서 장사하는 것밖에 더 되느냐는 말이다.

◈ 신학교를 가더라도 !!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김대형 씨가 질문하기를, 자기가 신학교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하기에,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서지 않으면 공부를 하면 할수록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본인이 천국에 가게 되면, 이런 세상적인 육에서 나오는 전통과 역사는 자동적으로 쓰레기통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배설물로 여긴 사도바울처럼 말이다.

그런 것을 배우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배워서 알면서도 "아하, 이것은 아니구나" 라는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신학공부를 하던 무엇을 하던 간에 "아하, 나와 같은 인간은 십자가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모든 것은 자연적으로 그러한 것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그것이 곧 목회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자기 중심이라는, 그런 자기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어서 오세요) 처음부터 다시 하겠는데(ㅋㅋ), 교재 129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인간을 규정한다고 하면, 인간은 그저 당하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 어떤 반항이나 반발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인간이 생겼지, 결코 인간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의 진노가 인간을 규정 !!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인간을 규정하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보통 인간들은 맛볼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를 제대로 최초로 맛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런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어리석음이 된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대신해서 예수님이 진노를 받으셨는데, 그러니 우리가 깝죽거리고 나서는 모든 지식은 모두가 다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다시, 박영선 목사의 경우에 !!

미국 LA에 사시는 분이 보내준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테잎을 들어보니, 박영선 목사가 성화론을 주장하면서 빌립보서 2장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즉 12절에 나오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라는 것을 가지고 말이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물론 이것은 우리가 수백 번을 들었던 이야기인데, 그래서 제가 그분에 메일을 쓰면서 누가 맞는지 공개적인 장소에서 토론을 하자고 했는데, 박영선 목사가 설교를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국어시간과도 같다는 것이다. 국어시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문장이 있으면 이쪽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반대편에 인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이런 문장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인데, 즉 빌립보서를 문법적으로 해석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 13절에서 "너희로 소원을 두고" 라고 하니, 박영선 목사의 설교내용대로 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러한 존재 속에서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고, 아무튼 박영선 목사는 그렇게 주장한다는 것이다.

◈ 하지만, 사도바울의 편지들은?

하지만 사도바울의 편지를 한번 보라는 것이다. 여기에 이렇게 창세기가 있고 또한 십자가가 있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다 겪고 난 다음에 나온 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편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도바울은 12제자에 포함이 되는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12제자의 역할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께서는 왜 홀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주는, 즉 우리 인간들은 왜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십자가는 오직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언약으로서 다른 인간들은 여기에 껴들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게 되는데, 하지만 결국 주님이 나중에 이 베드로를 찾아가심으로 베드로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님의 틀이 '주'가 되신 상태에서 그대로 사도바울에게 주어지게 되면, 여기 앞에 있는 예수님과 12제자 사이에서의 서로 주고받는, 즉 국어시간에 문법을 해석하듯이 푸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 이미 다 드러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그런 것은 이미 예수님과 12제자 사이에 다 해보았다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는 해서는 도저히 우리 인간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납득이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데, 즉 12제자 전부가 예수님의 말씀을 제 아무리 정교한 문법으로 해석을 하더라도, 자기들은 진노를 받아야 마땅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정작 본인들이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말씀을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이 바로 진노를 받아야만 될 죄라는 것을 제자들도 모르고, 박영선 목사와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역시 모른다는 말이다. 즉 여기 13절의 "너희로 소원을 두고" 라는 구절을 아무리 돋보기를 가지고 살펴봐도, 그 자체가 바로 진노를 받아야 될 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 '주의 자리'에서 온 편지 !!

그런데 이 사도바울의 서신서에 오게 되면, 인간은 그냥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는, 즉 예수님의 영을 받은 인간에게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편지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의 자리에서 온 편지라는 말이다.

그러니 앞의 복음서와는 다른데, 주님의 자리에서, 즉 십자가를 지신 분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은 이렇기 때문에 진노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그렇게 모든 것이 이미 규정된 상태에서, 그런 상태에서 편지가 주어졌다는 말이다. 

그런 편지가 주어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편지의 주체는 당연히 우리가 아니라 하나의 세트가 되는데, 즉 죄인인 우리들과, 지금 예수님은 이 편지를 가지고 우리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바로 그러한 것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편지의 내용에 "너희로 소원을 두고" 라는 구절이 있다고 하면, 당연히 여기서 '너희' 라는 것은 우리 내부에서 새로운 소원이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지게 되는데, 그 소원은 바로 육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말이다.

그것을 지난 주일에 했는데, 즉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육적인 시도가 여기 빌립보서에서는 전혀 채워지지 아니하고, 다만 예수님의 소원대로 되어지는 것에 우리는 일종의 장치로서 가담할 뿐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서신에 대해서 이러한 해석이 나오게 되는데, 하지만 박영선 목사는 결코 이러한 해석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보게 되면, 그 누구보다도 박영선 목사가 말씀대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성경말씀의 글자 그대로 하는 것처럼 여겨지니까 말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그렇게 존경하는 박영선 목사를 김성수 목사나 이근호 목사는 왜 폄훼를 하느냐고 하면서 달려든다는 것이다.

◈ 아니, 언약도 모르면서 어떻게 성경말씀을?

그래서 제가 공개적으로 토론을 하자고 했는데, 만약에 그런 토론이 성사된다면 저는 이런 이야기를 모두 다 할 것인데, 즉 성경해석부터가 잘못되었다고 말이다. 도대체 언약도 모르면서 무슨 성경말씀을 해석하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 목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몸집을 키우고 해서 남자가 된다면,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면 저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용의가 있는데, 하지만 천국은 전혀 그런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천국은 찾는 이가 아주 적은데, 그러니 우리교회 교인수가 적어도 괜찮은데,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하나님께 영광이 무엇이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천국에 가서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떠났다고 해서, 자기도 떠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싸움이 바로 매일같이 우리의 환상을 깨는 싸움인데, 그러니 목사의 경우에는 "일단 구원은 되었는데 교회가 적어서 문제야. 이제 교회나 슬슬 키워볼까?" 라는 생각이, 그런 환상이 자꾸만 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그러한 것을 깨부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태양과 인간관계에는 세 가지 요소가 담겨있다. 하나는 태양이요, 또 하나는 인간이요, 또 하나는 태양과 인간 사이에 있는 공간의 증거들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있다. 하나는 하나님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이요, 다른 하나는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이다.

◈ '중보자'가 왜 있어야 하는가?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예수님이 계신데, 그것이 디모데전서 2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여기에 중보자가 왜 있어야 하는고 하니까, 중보자는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달을 받을 만한 인간을 새롭게 생산해낸다는 것이다.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러니 하나님은 자기 뜻을 우리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렇게 해봐야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 이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다 드러난 것이고, 그래서 주님의 뜻을 전달받을 만한 인간을 전달자가 되시는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새롭게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놓고 알려주시는데, 그러니 당연히 만들어진 사람만이 알아듣지,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중보자를 보내셔서 마땅히 나를 설득시켜 보세요" 라고, 그런 인간들은 주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주님은 그냥 비켜가 버리신다는 말이다.

◈ 인간은, 두 종류로 !!

하나님이 이렇게 계시고, 중보자가 계시고, 그리고 여기에 우리 인간이 있다고 하면, 우리가 보기에는 중보자가 한 분이고, 또 하나님도 한 분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중보자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인간은 두 종류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는 진노를 받아야 마땅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받아야 마땅한, 그런 두 가지의 인간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지나서 사도바울의 편지인 로마서 9장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로마서와 같은 사도바울의 편지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의 정답책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11장 25절에 보면,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되었는데, 이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하는고 하니, 이런 마태복음만 들여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야, 어린아이는 구원을 받겠다. 방금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를 설마 하나님이 지옥으로 데리고 가겠는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이 구절을 어린아이의 경우를 두고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그런데 나중에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 이 어린아이가 도대체 누구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니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바로 십자가 복음을 아는 자들은 모두가 다 어린아이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 복음 안에서는 모두가 다 그렇게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자들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복음서에는 문제를 던져놓고, 그 정답은 사도바울의 편지와 같이 서신에 모두 나와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과 모든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러나 중보자의 눈으로 보면 두 종류의 인간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즉 "저에게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세요" 라고 하는 놈들은 당연히 진노를 받아야 하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저는 주님의 뜻을 전혀 몰라야 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라고 하는 자들은, 즉 자기의 행함이 들어가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로 돌리는 자들은, 그런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노선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것을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장에서 보자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즉 십자가의 영을 말이다. 그것을 받지 않으면 전혀 이러한 인간의 갈라짐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성경은 하나님의 활동에 관한 책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상대로 일하셨고, 예수님을 앞장 세워 일하셨다. 사람하고는 상대를 안 하신다는 뜻이다. 여기에 '배제의 원리'가 작용한다. 십자가란 결국 '배제의 원리'를 가동시키신 하나님의 실천의 결과이다. 이 배제의 원리를 구약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배제의 원리 !!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앞장 세우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사람과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것을 '배제의 원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배제' 라는 것은 "너는 저리 나가있어" 라고, 그렇게 밖으로 밀쳐버리는 것을 뜻하는데 말이다.

◈ 축, 십자가 지심 ??

그것을 이사야 53장 6절에서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라고 하는데, 그때 그런 예수님을 보고서는 "축, 십자가 지심" 이라고 플랜카드를 내건 사람들이 있었는가? 아무도 없었는데, 모두가 다 도망을 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떠한가? "축, 고난주일" 이라고 하면서 내건다는 것이다. 그러니 물론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즉 진짜 고난은 그만 감추어버리고, 인간이 지킬 수 있는 고난을 가지고서 주님의 그 고난을 대체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또 사기행각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고난주일로 대체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사람이 필요하니, 결국에는 "교회가 없이는 일이 안 되잖아?" 라는 주장이 계속해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난은 주님이 주시는 것인데, 그런데 인간들이 아예 고난을 만들어서 거기에 주님을 마치 초대가수로 초청하듯이,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이 정도로 고난주일을 기념하는데, 주님이 한번 방문해주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주객이 전도되는 식으로 사람들이 일을 벌린다는 것이다.

◈ 우리는, 언제나 배제된 상태 !!

분명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우리의 길로 갔는데, 그러니 우리가 행동을 반듯하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즉 우리는 배제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책을 다 예수님에게 넘김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미리 거기에 가담하지 않더라도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는 그 능력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는 전혀 하등의 차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놀라운 것을 우리가 배제되었다는 사실인데, 그렇게 배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즉 우리가 스스로 주님의 구원이 가담해서 도움을 준 일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우리에게 그냥 와버리니, 그래서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은 순전히 주님의 공로입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배제를 당함으로서 오히려 주님을 찬양하는 계기가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배제를 당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물론 우리 자신의 환상을 만들고 있는데, 눈만 뜨면 상상을 하는데, 즉 "오늘은 이렇게 일이 되어야 합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 양 같아서 각자의 갈 길을 가는데, 즉 혼자서 소설을 쓰고 드라마를 만들고 말이다.

◈ 저 한국을 이기게 하소서 !!

이렇게 우리는 무엇을 봐도 자기만의 드라마를 쓰는데, 이번 아시안게임 양궁 결승전에서 중국관중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있는가? 마지막 라운드에도 중국이 이기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기도를 했겠는가? "제발 이번 마지막 라운드에 실수를 하지 말고, 저 한국을 이기게 하소서"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만 두 번째 선수가 7점인가 8점을 쏘는 바람에 연장전에 들어가고 말았는데, 그래서 결국 동점이 되어서 연장전에 가서 한국에게 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수들과 관중들이 그 얼마나 속이 상했겠는가? 나름대로는 그렇게 열심히 시나리오를 짰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번에 우리나라 양궁감독이 하는 말이, 그분이 여자인데 말이다. 자기는 양궁 국가대표 감독이 이렇게 힘든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일인데, 그러니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런 감독을 자기가 굳이 왜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우리 인생의 감독을 우리 자신이 하려고 하니 그렇게 힘이 든다는 것이다. 혼자 시나리오를 짰다가, 혼자 절망을 하고, 또한 혼자 좋다고 까불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양도 되고 목자도 되고 말이다. 그것도 성경을 보고 참고로 해서 말이다.

하지만 성경을 참고로 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를 배제하니 말이다. 언제나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또한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주님의 일에 방해를 하는데, 마치 송편을 만드는데 아이가 사고를 치듯이 말이다. 주님께서는 완벽한 송편을 만드는데, 우리는 자꾸만 속을 터트려 놓는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130페이지를 살펴보자.

** 예레미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레미야 40장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포로로 잡혀가는 자기 백성과 더불어서 고난의 벌을 받기 위해서 동행한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예레미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선택을 강요하신다.

(렘 40:4)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해방하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선히 여기거든 오라 내가 너를 선대하리라 만일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거든 그만 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선히 여기는 대로 가하게 여기는 곳으로 갈지니라

계속해서 살펴보자.

** 그렇게 해놓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시 돌아가기를 명령하신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현장에 참여하시되, 선지자에 대해서는 배제시키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이다.

(렘 40:5) 예레미야가 아직 돌이키기 전에 그가 다시 이르되 너는 바벨론 왕이 유다 성읍들의 총독으로 세우신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백성 중에 거하거나 너의 가하게 여기는 곳으로 가거나 할지니라 하고 그 시위대장이 그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내매

◈ 울음의 선지자, 예레미야 !!

예레미야서의 전체내용이 바로 이러한데, 그래서 예레미야를 두고 울음의 선지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구원을 받았는데 자기가 왜 우는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로 죄를 지은 백성들이 어떤 식으로 처참하게 망가지는지 보여주는데, 바로 거기에 자신이 동참한다는 것이다. 마치 광야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말이다.

그렇게 예레미야는 고난의 벌을 받는데 동행하고 있는데, 물론 정작 백성들을 따라가는 것은 에스겔 선지자이지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 남아서 그 징벌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러한 처참한 광경을 예레미야는 모두 다 감내하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 예레미야 40장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다가 다시금 빠꾸해서 돌아오는데, 그러니 장차 오실 메시야는 우리를 배제한 체로 어떻게 고생을 하게 되는지, 그것을 미리 보여준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자가 곧 선지자라는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처럼 모든 하나님의 일은, 최종적으로 중보자가 되시는 하나님 홀로 남아서 일을 하신다. 어디까지나 예수님 안에서 처리되고 종료가 될 뿐이다. 즉 영원히 길고 긴 속성은 오직 예수님의 중보자 직(織)에만 해당된다.

◈ 혼자 마감하시는 예수님 !!

아무리 인간들이 까불고 개판을 만들고 엉망진창이 되어도, 그런 모든 인간들을 다 보내버리고, 주님께서는 혼자 컴퓨터 앞에서 일을 마감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시고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시면서 손을 털고 주님 혼자서 마감을 다 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문을 조금 열고는 그 틈으로 그것을 보아야 하는데, 주님께서 혼자서 컴퓨터 앞에서 일을 하시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는 주께서 "이제 다 이루었어" 라고 하시는, 그런 소리를 우리는 그 열린 문틈으로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물론 문 밖에서 그야말로 개판인데, 부엌에서는 음식이라는 음식은 다 쏟아놓고 말이다. 

하지만 주님이 홀로 계시는 십자가의 방에서는, 주님께서는 너무나 흡족해하시면서 손을 털고 일어나신다는 것이다.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렇게 일어나셔서 문을 열고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두고 성령께서 오셨다고 한다는 것이다. 즉 문을 열고는 그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을, 이 지저분한 세상에 그대로 적용을 시킨다는 말이다.

◈ 성도는, 성령이 거하시는 명품(名品) !!

그렇게 되면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데, 즉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말이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차별해서 들어가시는데, 그것을 두고 '명품'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놀랍게도 명품인데, 몇 개 만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신세계나 롯데 명품관에도 팔지 않는데, 그야말로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말이다. 성령을 받은 말이다.

그러니 명품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모두 다 알아야 하는데, 즉 그들은 배제를 해야될 것은 가지고 계속해서 주의 일에 가담을 하고 있으니, 그래서 혼선이 빚어지고 오히려 그만 죄가 뒤범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것이 명품이 눈에는 보인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선지자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이것은 예수님과 인간관계에서 '상대성 원리'이다. 인간이 자기 주장을 하는 순간 예수님의 가치는 왜곡되고, 예수님을 인정한다면 인간은 마땅히 부인되어야 하는 원리가 곧 상대성 원리이다.

◈ 우리는 죄인으로, 예수님은 의인으로 !!

이 상대성 원리는 지난 시간에 했는데, 물론 잊었겠지만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는 가지고, 또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규정을 받는 것이 상대성 원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말이다. 따로따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생각해서 일을 하시고,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나고, 또한 예수님은 의인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렇게 서로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데, 그러면서 매일같이 우리의 환상을 주께서는 깨트리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절망을 하게 되면서도 우리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자리는 무엇인가? "나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다" 라고 하는데, 즉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이 좋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자기 자리가 고맙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된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현상은 오직 주님께서 손을 잡고 빙빙 돌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데, 바로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감사할 뿐이고, 고마움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교재 131페이지를 보자.

**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폼을 잡을 여유도 없고, 자기 신세타령을 할 입장도 아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폼을 잡을 여유도 없고, 신세타령을 할 입장도 아닌데, 왜 그런가? 이미 폭풍우 속에 들어있기 말이다. 강력한 허리케인 속에 말려들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면 이러한 폭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것을 다음 시간에 살펴보자는 것이다. 물론 폭풍 속에서 산산조각이 나는데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래 자리를 벗어나서, 주님이 싫어하시는 엉뚱한 자리에서 주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처량한 모습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다시 우리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우리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님을,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루어내시는 주님의 일에 감사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1,23 새벽 00시 40분에 마침.

                                                  녹취를 너무 오래 만에 했나? 온 몸이 쑤셔 쑤셔 !!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