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37강 종말의 폭풍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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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37강 종말의 폭풍 속에서

[10 대구강의 19] - [피 37] - 종말의 폭풍 속에서
                                                                                
                                                   10,12,1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나는 날마다 죽는다 !!

오늘은 교재 131페이지를 살펴보자.

**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폭풍이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폭풍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 폭풍 속에서 자아는 파괴된다. 산산조각이 난다.

우리는 이런 폭풍이 부는 현상을, 즉 여리고 성의 무너짐과 같은 것을 설명할 때, 우리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면 무엇에 관심이 있는고 하니, 구약에서의 홍해가 갈리진 것이나 애굽군대의 수장됨, 광야에서 힘든 생활 등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구약의 그러한 자연적이거나 기적적인 파멸, 깨어짐, 혼돈과 같은 것들을 통해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이다. 자아가 말이다. 구약에서는 우리가 자연을 구경하는 식으로 되는데, 그런데 신약에서는 자아가 파괴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아가 파괴되는 것을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나는 날마다 십자가 안에서 죽는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십자가 사건은 결국 우리를 겨냥해서 우리를 죽인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를 죽이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우리가 구약 사람들이 경험했던 그 경험을, 마치 자연세계를 관찰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그 입장이 되었을 때, "나는 나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에이, 그때 그 맛이 아냐 !!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서울의 경복궁에 있는 경회루를 5년 전에 본 적이 있다고 하면, 5년 뒤에는 그것을 본 느낌이 기억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20년 뒤에 그 동일한 경회루에 가게 되면, 그때는 20년 전의 그런 느낌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경회루 이야기가 어려우면 치킨을 예로 들겠는데, 어떤 사람이 7살 때 치킨을 먹었다면 그때 '맛있다' 라는 느낌을 가지는데, 즉 자아가 맛있다는 느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20년 뒤에 그 집에 가니 그 집이 여전히 치킨 장사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주인도 같고 소스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20년 전의 맛이 나는지 먹어보니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아마 그런 다들 경험이 있지 싶은데 말이다.

◈ 그게 곧 '자아 절대성' !!

여기 7살 때를 'P1' 이라고 하고, 27살 때를 'P2' 라고 한다면, 그 치킨 집은 소스도 바꾸지 않고 동일하게 맛을 유지했는데, 그런데 7살 때의 그 맛이 27살 때는 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맛있다' 라고 했는데, 지금은 앞에 무엇을 하니 더 붙여서 '안 맛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안 맛있다' 라고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이겠는가? 7살 때의 그 맛이 기준이 되니, 지금은 맛이 있지 않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러니 여기서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나이가 27살이 되어도 7살 때의 경험을 절대적으로 양보도 없이 유지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유지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유지가 되니 그런 맛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즉 7살 때의 그 경험이 절대적인 경험이 되어서 27살이 되어도 유지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유지하던 경험의 맛을 다시금 맛보기 위해서 그 집에 다시 가도 그 맛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치킨집 사장님만 억울한데, 자기는 20년 동안 한결같은 방법으로, 똑같은 소스로, 똑같은 맛을 내고 있는데, 그런데도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아저씨, 20년 전의 그 맛이 아닙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치킨집 사장은 그 맛을 어떻게 만들어내겠는가? 전혀 만들어낼 수가 없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 절대성' 이라는 말이다.

◈ 결국, '나는 나다' !!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경험한 것은 아무리 외부에서 그 사람의 심정과 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해도, 본인이 경험한 그 경험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라도 침투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7살 때의 치킨집 맛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자아의 절대성인데, 즉 "나는 나다" 라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 고생을 하다가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 와서 고생을 해도, 그래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절대라는 것이다. "나는 홍해를 건넜어. 광야에서 만나를 맛보았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절대적인 말이다.

◈ 모세의 경우에도 !!

모세의 경우에도, 그가 처음에는 반석을 쳐서 물을 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하나님의 지시가 무엇인고 하니, 반석을 치는 것이 아니라 가리키라는 것인데, 그런데 모세의 첫 번째 절대적 경험이 반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치는 것이었기에, 그래서 모세는 그런 자기만의 방식, 즉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두 번이나 반석을 치고 말았는데, 물론 물은 나왔지만 그러나 무엇이 제거가 되었는가? 모세는 그 사건으로 인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다는 말인가? 그것은 물을 요구한 백성의 탓도 아니고, 결국 모세의 여전히 "나는 나다" 라고 하는 절대적인 자기 우선적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영광을 자연스럽게 훼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로마서 - 육(肉) !!

그런데 이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단 하나의 글자로 '육(肉)'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육' 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육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십자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로마군인이 동원되고, 거기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구레네 시몬이 나와서 로마군인에게 뺨을 맞고 하는 것이 구성이 되어서 십자가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런데 그 십자가가 사도바울의 서신에 들어가게 되면, 구레네 시몬이나 강도는 더 이상 필요가 없고, 오직 '나' 라는 존재만 있으면 십자가는 충분하게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 이제 '나'만 있으면 십자가는 충분히 설명돼 !!

왜 그런가? '나' 라는 것이 십자가 앞에서 무엇이 되기 때문인고 하니, 바로 자기 자신은 육이고, 또한 십자가는 이 육을 영으로 만들기 위해서 코스를, 그 코스는 우리가 정한 코스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즉 태어나시고 성장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그 모든 과정이, 즉 성령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는 모든 과정이, 현재 육에서 영으로 바뀌는 '나'의 과정에 투입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사도바울은 "나는 의(義)의 종이다" 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육으로 영으로 바뀌는 모든 관계, 즉 예수님을 투입해서 이렇게 바꾸는 관계를 두고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의의 관계'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신학함 - '나는 살아있다' !!

그러니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이 얼마나 엉터리냐는 말이다. 왜냐하면, 현재 개혁주의 신학은 무엇밖에 없는가? "나는 나다" 라는 것을 감추고 온갖 신학으로 다 집어넣는데, 그러니 결국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바로 '나의 절대성' 인데,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곧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살아있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왜 자꾸만 십자가 마을 사람들은 죽었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이렇게 엄연히 살아있는데 말이다. 왜 그들이 그런 소리를 하는고 하니, 예수님이 계시는 이유도 바로 자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나는 결코 육이 되기 싫다" 라는 것인데,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는 나의 절대성을 포기할 마음이 추호도 없다" 라는 것인데, 즉 때려죽여도 자기를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에라도 말이다.

그것은 비단 개혁주의뿐만이 아니라 모든 신학이 다 그러한데, 제가 교회사에 등장하는 여러 신학자들의 책들을 보게 되면, 그들이 항상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우선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인간을 우선적으로 해서 신학을 하는고 하니, 그렇게 해야 기존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고, 서로 공통점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들은 자기가 신이 되지를 못해서, 즉 "나는 내가 절대적인 존재가 되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는데, 성경은 나에게 그런 멋진 아이디어를 제공하는구나" 라고 하는,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 그게 바로 죄야 !!

그러니 결국 육에서 나온 신학이니 육일뿐이고, 거기서 제아무리 삼위일체를 뒤범벅을 해도 구원을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란 것이다. 물론 남들에게는 그것을 들키지 않는데, 하나님 주권사상, 예정론, 십자가, 언약 등등을 모두 다 이야기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육인지 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데, 하지만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데, 즉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라고 하면서 옆구리를 '팍' 하고 쑤셔보면 말이다.

그때 바로 반박을 하면서 튀어나오면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어떻게 신학이 죄인가?" 라고, 즉 "어떻게 모든 것이 다 죄가 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만 가지고서 쑤셔보면 아주 간단하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반발을 하는가? 예정론이든 삼위일체이든 간에 다 누구를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고 하니, 바로 자기의 정당성, 의로움, 절대성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을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기 밑바탕에 깔고서, 그 위에다가 신학을 냅다 퍼부어 놓으니, 그것을 쑤시게 되면 그 바탕이 자극을 받아서 바로 튀어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떠한고 하니, '팍' 쑤시게 되면 "예, 그렇습니다. 그것마저도 죄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과의 의의 관계로 인해서 받습니다" 라고 하면서 전적으로 예수님만을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은 자기들이 한 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애를 선다는 것이다. 즉 자아 절대성을 말이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신구약 성경해석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것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았으면 교재를 다시 살펴보자.

**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폭풍이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폭풍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 폭풍 속에서 자아는 파괴된다. 산산조각이 난다. 그리고 하나님이 펼치시는 성령의 회오리바람을 통해서 다시 되모아지는데, 이때 자아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자아로 버틸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를 추스를 여유도 없고 자기 신세타령을 할 처지도 못되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잘리면서 새롭게 !!

이렇게 자아가 부수어지고 다시금 되모아지는데, 그것을 구약 때는 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단자체를 상대로 하신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갈라지고, 그렇게 잘리면서 이스라엘은 새롭게 다시 구성이 된다는 말이다.

민수기에서 12지파의 숫자를 왜 헤아리는가? 그것은 바로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까불던지, 아니면 늙어서 죽든지 간에 아무튼 광야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그 숫자는 새롭게 태어난 아이들에 의해서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에게 있는데, 각각의 개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하면, 우리는 각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단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짜 이스라엘 집단을 우리에게 들이대게 되면, 우리는 이 안에 들어오면서 우리 개인의 절대성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스라엘 집단 안에 들어와서 언약의 저촉을 받고, 이스라엘 전체 속의 일원이 되는 것이지, '나'를 지키기 위한 어떤 단체의 도움은 전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아들' 이라고 한 것이지, 개인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언약은 '일대다수' !!

그렇다면 언약은 무엇인가? '일대일'이 아니라, '일대다수'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일'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고, '다수'는 바로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즉 언약은 '일대다수' 라는 말이다. (언약이 예수님과 이스라엘 ??)

그런데 그것이 신약에 오게 되면, '일대다수' 라는 것이 그만  '일대일'로 변하게 되는데, 그러면 여기서 등장하는 '일'은 무엇인고 하니, 바로 '그리스도의 몸' 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그리스도의 몸에는 수많은 지체가 있는데, 그러니 언약은 여전히 구약과 신약이 동일하다는 말이다. '일대다수' 라는 차원에서는 말이다. 즉 신약에서는 그 '다수'를 '일'로 본다는 것이다.

◈ 혼인잔치는, 한 명과 신랑과 한 명의 신부 !!

그러니 여기 전체에서는 신부가 몇 명인고 하니, 바로 한 명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신랑은 누구인가? 물론 예수님이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혼인잔치가 이루어지는데, 그 장소는 바로 예루살렘 성이 되고 말이다. 그러면 그 예루살렘 성이 몇 개인가?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역시 하나인데, 그런데 문은 몇 개인고 하니, 12개라는 것이다. 즉 12지파가 하나의 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것은 에스겔서 끝부분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자아 절대성' 이라는 것은 마귀가 심어준 것이기 때문에, 일체 거기에 대해서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희'와 '너희'를 구분하시는데,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다수를 말하는 것인데, 즉 불신자의 다수와 성도의 다수라는 것이다. 

(마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니 '하나'에 해당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오직 예수님인데, 그런 예수님의 하나에 '너희'가 합류하게 되면,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원리를 사도바울이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상당히 복잡한 것 같지만, 그러나 우리의 인식만 바꾸게 되면, 전혀 복잡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 구원을 받은 우리가 다수를 ??

그렇다면 목사들은 설교를 할 때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과 다수를, 즉 언약의 하나님 이름인 한 분과 다수의 관계를 지금 제가 말한 것과 같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근대주체사상에 의해서, 고상한 말로 근대주체사상이지 쉽게 말해 이기주의에 의해서, 즉 이기주의에 입각해서 자기만 구원을 받겠다고 오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이름과 다수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은 이렇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서는 어떻게 설교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언약대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이렇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무슨 작업을 하는고 하니,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다수를 이룹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수를 이루면 교회가 된다는 것인데, 즉 "하나가 구원을 받아서 다수를 이룹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에서 '다수'로 이루어나가는 것은 성경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에 없으니 어디서 가지고 오는고 하니, 그것은 곧 '사회학'에서 나오는데, 즉 단결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단결력의 과시라고 할 수 있는데, 일종의 집단의식이고 말이다.

그것은 한나라당이나 민주당과 같은 정치집단이 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다수를 모르려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하게 하나의 사업체가 되고 친목단체가 되는데, 즉 의사 집결체가 되는데, 쉽게 말해서 일종의 '사회단체(SOCIETY)'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권력이 생기고, 그 권력을 유지하게 위해서 법이 동원된다는 말이다.

◈ 그러나, 언약에는 사랑밖에 없어 !!

하지만 언약에서의 여기 다수에서는 오직 하나, 즉 사랑밖에 없는데, 그 사랑은 다수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하나이신 분의 희생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의 희생, 그것이 곧 어린양의 희생이고 예수님의 희생인데, 그런 예수님의 희생으로 사랑을 주게 되면, 다수는 예수님의 신부로서 계속해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인데, 그렇다면 이 사랑은 어디로부터 벗어난 것인가? 법으로부터 벗어나고, 동시에 법을 완성하게 되는데, 즉 그냥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완성하고 벗어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 말이다. 즉 완성했기 때문에 더 이상 법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렇게 사랑에는 단계가 있는데, 그 사랑의 핵심은 바로 희생이라는 것이다. 물론 희생에는 반드시 그 값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용서와 긍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니가 용서를 받을 태도를 취하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셔서, 자기가 희생한 그 값을 찾으신다는 말이다. 바로 그 값이 용서이고 말이다.

◈ 용서는, 그 용서하시는 분의 자존심 !!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기가 택한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하시는 것은, 그것은 전혀 그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용서를 하시는 분, 즉 주님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희생의 가치를, 십자가의 가치를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는 그냥 용서를 해주시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은 아무리 회개를 해도 잘리고, 반면에 다윗은 회개를 하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께서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심지어 다윗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백성들의 숫자를 헤아려도,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용서해주신다는 말이다. (마귀가 아닌 하나님의 유혹이 아닌가요?)

(삼하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바로 언약의 가치가 그 정도로 인간의 행동보다 훨씬 더 월등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나쁜 짓보다는 예수님의 용서가 더욱 더 크고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언약에 속한 사람을 그렇게 다루신다는 말이다.

◈ 언약의 영을 받지 못하면?

그런데 이런 언약의 영을 받지 못한 자들은 무엇인고 하니까, "내 편이 몇 명이지?" 라고 하면서 자기편을 헤아리게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권력을, 다른 말로 하면 일종의 권위, 즉 카리스마를 동원하게 되는데, 그 카리스마를 유지하게 위해서는 반드시 법을 만들어서, 그런 법을 위반하게 되면 벌칙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법을 지키면 보상이 주어지고 말이다.

그러면 이런 벌칙과 보상은 무슨 방식인가? 생명나무 방식인가? 아니라면 선악과 방식인가? 당연히 선악과에서 나온 것인데, 그러니 여기에는 선악과의 나무가 아주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매일같이 선악과를 만나처럼 먹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선악과를 먹을 때마다 그 선악과의 법칙이, 즉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것이 주어지는데, 그러니 저주라는 매를 자기에게 마구 퍼붓고 있다는 것이다.

◈ 알 수 없는 공포심 !!

이러한 선악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통해서 알려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알 수 없는 공포심' 이라는 말이다. 그런 알 수 없는 공포심과 두려움이 몰려드는데, 물론 자기는 매일같이 의를 지키기 위해서 새 생명 가운데서 바르게 산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자기 주변에 들이닥치는 것은 바로 어두움의 권세, 즉 알 수 없는 공포심이라는 것이다. 즉 "아직도 모자라. 더 해야지. 이번 일이 꼬인 것은 아직도 성화가 덜 되어서 그런 거야" 라고 하면서 뭔가 알 수 없는 공포심, 즉 죽기를 무서워해서 벌벌 떠는 공포심이란 말이다.

그러면 이런 공포심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감사와 감격인데, 즉 "주여, 제가 이런 혜택을 받나니 무슨 은혜인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야말로 '싱글벙글 쇼' 라는 말이다. 물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쇼' 라고 하면 표현이 좀 그렇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반해서 이쪽은 버팀인데, 혹은 고수함, 살핌인데, 즉 들키지 않기 위해서 동정을 살핀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의 죄를 들추어낼까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사수, 긴장, 대듬, 공격성향, 숨어 들어감 등등, 그런 더러운 육의 열매는 여기서 다 피어난다는 것이다.

◈ 결국, 막장 드라마 !!

이러한 것들도 잘 되지 않으면, 결국 마지막에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야말로 '막장' 인데, 쉽게 말해서 '막가자' 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이런 집단의 특징이 바로 '막가자' 라는 것인데, 전혀 감사와 고마움과 사랑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니가 잘났는지 내가 잘났는지, 갈 때까지 한번 가보자" 라는 것이다.

그러니 매일같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나오는 것은 '막장' 이란 말이다. 그래서 사수, 즉 "내 일에 간섭하지 말라" 라는 것인데, 왜 그런가? 자기의 절대성이니 말이다. 물론 불안과 공포와 초조함도 여기에 다 해당이 되고 말이다. 즉 살아가면서 감사함이 없다는 것은 뭔가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를 하면 !!

다시 정리해보면, 신약은 폭풍 속에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성령의 폭풍 속에서, 즉 십자가 안에서 성도는 다 깨어지는데, 그러면 그렇게 깨어지면 자아가 없는가?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아(無我)인가? 전혀 그게 아니라, 언약의 상대자로서 새롭게 자아가 만들어지는데, 그 자아는 홀로 있는 자아가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 있는 자아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회원등록을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즉 성령께서 어느 사이에 이스라엘과 한 통속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한국에 있으나, 미국에 있으나 전혀 상관이 없이 말이다. 즉 복음 안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영인 성령 안에서 말이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오는데, 아마 제가 이야기를 하면 "아하, 그것이구나!" 라고 하지 싶은데 말이다. 지금 4장인지 5장인지 조금 헛갈리는데, 5장이 맞지요? 5장 3절 이하를 한번 살펴보자.

(고전 5: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고전 5: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고전 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

여기 3절에 보면,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라고 되어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 내부 안에 들어있을 때만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들은 "너 따로, 나 따로" 라고, 그렇게 알고 있지만,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즉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을 때는 "니 몸, 내 몸"이 아니라, 모두가 그리스도께 속한 '한 영'으로 있다는 말이다. 물론 육이 될 육체는 따로 떨어져있지만, 그러나 영은 하나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현재 지리적으로 미국이나 필리핀 등에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역시, 즉 모세나 예레미야나 엘리야 등과도 하나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서 뒤에 보면 나오는데, 즉 하늘의 총회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의할 점은 무엇인고 하니, 그런 하나가 되기 위해서 개인이 노력할 것은 없고, 그것은 이미 '하나됨'이 우리에게 주는 능력에 의해서 복속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가입을 하고 뚫으려고 노력하고 애를 쓰는 게 아니고 말이다. 오직 하나됨이 주시는 능력에 의해서 말이다.

◈ 콩나물(?)의 잘남이 아니라 !!

다음과 같은 예가 맞는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콩나물인 정자가 난자의 벽을 뚫을 때, 그것을 정자의 힘으로 뚫는다고 할 수 있지만, 하지만 난자가 어떤 특정 정자를 당기는 경우에만 난자가 자기 경계막을 열어준다고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난자가 정한 그 특정한 정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말이다. 수억 개의 정자 중에서 말이다. 즉 그것은 돌진하는 정자의 힘이 아니라, 정자와 정자끼리의 경쟁이 아니라, 난자가 가진 취사선택의 능력에 의해서 특정 정자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인데, 즉 십자가를 지신 자신의 능력이 허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 영을, 그 희생의 능력을 누구에게 주는고 하니, 이미 창세 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만 허락하신다는 말이다. 십자가의 영을 말이다.

그것을 몽땅 다 유업, 즉 기업으로 인수인계하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게 되면, 그것이 자유자이든, 종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그러한 것에 전혀 관계없이 그들은 그리스도의 유업을 함께 받는다는 것이다. 그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 구약을 십자가로 해석하면, 끝 !!

그러니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게 되면, 이미 신구약 성경의 해답이 다 나와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온 해답을 가지고 구약을 소급해서 해석하게 되면, 구약의 역사적 문맥으로는 미처 알 수 없었던 깊은 밑바닥에 있는 내막까지도 파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총괄해서 말하기를, "십자가로 해석하면 정답이 나오게 되어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로 해석하면 말이다.

이렇게 십자가로 해석한다고 하니, 그냥 '십자가' 라는 말만 갖다 부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물론 말로서만 십자가의 피를 강조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구약을 제대로 해석하려고 하면 이 십자가에서 누구를 끄집어내어야 하는데, 바로 예수님이란 말이다.

◈ 피해를 보는 이름과, 피해를 주는 인간 !!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인데, 또 머리가 아프지요? 그 하나님의 이름이 이렇게 희생을 하는데, 그러면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이름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공격했던, 거기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지난 주일에 했는데, 즉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는데, 그 당시에는 아직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았으니, 즉 피해를 보는 하나님의 이름과 피해를 주는 인간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지시를 받는 자가 누구인가? 선지자인데,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이 선지자들이 누구에게 핍박을 받는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자들에게 말이다.

이것을 그대로 구약으로 가져가면 되는데, 그렇게 하면 구약성경이 십자가로서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희생을 당한 것이 말이다. 그런데 선지자는 그 뒤에 밧줄이 있는데, 선지자는 누구의 지시를 받는가?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예수님의 지시를 미리 받는데, 성령 안에서 말이다. 그것이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는데, 즉 성령에서 의해서 그들은 장차 오실 분의 고난과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벧전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선지자의 배후에는 성령의 지시를 받는데, 반면에 이들을 핍박하는 인간들의 배후에는 세상 신, 즉 악마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단의 영을 받고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게 에베소서 2장 2절에 나오는데 말이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구약은 '인간 대 인간' !!

그런데 구약에서는 그 뒤의 것이 보이지 않는데, 즉 있기는 분명히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단의 영도 보이지 않고, 또한 성령도 보이지 않고 말이다. 구약인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나는 것은 달랑 선지자라는 인간과 그리고 보통 대다수의 인간들이란 말이다.

그렇게 선지자와 인간들, 그렇게 둘만 바라보고는 뒤의 것과 연결을 지어서 해석하지 않으니, 즉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그렇게 '인간 대 인간'으로 구약성경을 쳐다보게 되니까, 그렇게 인간으로 보게 되면, 자기들이 평소에 보았던 자기의 모습으로 구약을 대하게 되니까, 전혀 구약성경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바르게 살자. 다윗처럼 열심히 하자. 아브라함처럼 섬기자"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자기들이 평소에 했던 종교적인 심리를 그대로 집어넣으니, 전혀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야만 하는데, 즉 영으로 해석을 해야 되는데 육으로만 하니 해석이 될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교인들에게는 먹혀드는데, 왜냐하면 교인들도 성령을 받지 않았기에 말이다. 그래서 그런 육적인 설교가 먹혀 들어간다는 말이다. "아하, 행하면 되는 거구나!" 라고 말이다. 물론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해석하는데, 하지만 이런 바리새인들 전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는데, 그러니 이런 해석을 하는 것 자체가 결국은 복음을 훼방하는 사단의 종들이 하는 전형적이고 전면적인 전매특허의 해석이라는 말이다.

◈ 하지만, 언약을 끄집어내어야 !!

방금 제가 말한 이러한 해석에 관한 것들을 물론 그렇게 보아도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평소에 제가 이야기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구약의 이런 두 사람의 관계를 그냥 두 사람만의 관계로만 보지 말고 거기에서 언약을 끄집어내자는 것이다. 그러면 노아시대는 노아언약, 모세시대는 모세언약, 다윗시대에는 다윗언약, 또한 에스겔이나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새언약의 예언이고 말이다.

이러한 언약을 가지고 이렇게 곧바로 가지 말고, 그 언약의 완성자가 누구인지,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되고, 그 십자가에서 채택되는 지는데, 그렇게 곧바로 구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이리로 간다는 말이다(??). (동영상이 없어서 각자의 상상에 맡김, ㅋㅋ)

◈ 십일조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구약의 말라기서에서 "십일조를 하면 창고에 넘치도록 채워주겠다" 라고 했다면, 그러한 법이 있는데, 그러면 그것을 곧바로 가지고 가면 안 되고 여기 언약을 거치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것이 모세언약이니 말이다.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이 되게 되면, 축복으로 가득히 채워주시는데, 그러니 그것은 십일조라는 노동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는 십일조대로 하는데, 주어지는 것은 십일조와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엄청난 준비된 축복이란 말이다. 마치 화장실에서 끈을 댕기면 물이 쏟아지듯이 말이다. 

그렇게 준비된 축복이 주어지게 되면, 여기 신약에서 예수님이 당기는데, 예수님이 새언약이니 말이다. 그러니 십일조라는 법은 누가 지켰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는데, 그러니 그것은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준비된 축복이 있는데, 즉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 축복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 계속해서 채워지는 '십일조' !!

구약에서는 한 번 채워주면 끝인데, 그런데 예수님에게서는 영원히 채워주신다는 말이다. 퍼도 퍼도 또 나오는데, 그렇게 계속해서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십일조인데, 즉 의와 인과 신을 주셔서 영원토록 복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우리가 복을 챙기지만 그러나 신약에서는 우리 자체가 아예 '복' 이라는 풀장 속에 풍덩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을 해야 언약적으로 하는 것이란 말이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것은 십일조뿐만이 아니라 십계명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하지만 구약을 주석하면서 이런 식으로 하는 책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십계명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그따위 소리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십계명을 지키느냐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자기가 십계명을 지켰다고 하던 부자청년은 가버리고 말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율법을, 즉 "십계명을 준 것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저주 아래에 있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분명히 그렇게 나와있는데, 그런데도 아직도 "다른 법은 아니라도 도덕법인 십계명은 지켜야만 한다" 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살고 !!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성령의 폭풍 속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과거에는 자기 자신을 위한 '나' 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어떤 허리케인인고 하니, 자기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새로운 자아로서, 그런 새로운 몸으로서 제대로 된 우리의 본질이 밝혀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살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영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는 육으로 버틸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 영은 육이 죽고 난 뒤에 있는 것으로, 육이 죽지 않고서 영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자체가 곧 영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십자가 자체가 영이기 때문에, 그러한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다가보니, 즉 십자가에서 죽고 난 뒤에 부활하는 원칙이 오다가보니,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날마다 살고 또한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왜 죽었는가?" 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는 '죽음에 넘기움은' 라고 하는 것을 성경말씀에서 지워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리고 하나님이 펼치시는 성령의 회오리바람을 통해서 다시 되모아지는데, 이때 자아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자아로 버틸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를 추스를 여유도 없고 자기 신세타령을 할 처지도 못되는 것이다. 물론 성령을 내 소유로 삼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버티도록, 그러한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자기가 그렇게 유지하려고 한다면, 성도라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에 일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 기도의 경우에도 !!

제가 안산강의에서 그런 말을 했지 싶은데, 즉 "기도를 할 때는 솔직하게 감추지 말고 기도를 하되, 반드시 응답을 받고 끝내야 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갓바위에게 하는 기도는 굳이 응답이 필요하지 않는데, 하지만 살아계신 주님께 할 때는 솔직하게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은 것인데, 즉 "주님, 제가 이렇게 기도를 해도 들어주지 않는데, 그래도 기도를 해야 합니까?" 라고 말이다. 그렇게 묻는 기도를 해야 하는데, 즉 "기도를 해봐야 그것은 육을 위하는 기도이다. 그런 기도를 왜 하는가?" 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런 기도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러한 것은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그런 내용까지도 기도하면서 다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응답은 성경말씀으로 하시는데, 즉 "기도를 하지 않을 때는 일이 잘 풀리는데, 기도를 하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도 기도를 해야만 됩니까?" 라고 물어보면, 주님은 어떻게 말씀으로 응답하시는고 하니, "유황불이 쏟아질 때 롯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라는 것이다.

◈ 유황불이 쏟아질 때 롯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때 롯이 "주여, 제가 기도를 몇 시간을 해야 됩니까?" 라는 생각을 했겠는가? 전혀 그것이 아니라 "아하,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황불이 쏟아지는군요" 라고 하면서, 주님이 하시는 일에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기도가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것은 잊어버리고 "주여, 제가 기도를 어떻게 얼마나 해야 됩니까? 이런 것은 하지 않으면 안 됩니까?" 라고, 그렇게 자기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응답이 유황불이 쏟아지는 것으로, 그렇게 이 세상에서의 인간관계 등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자기가 기도를 처음 했을 때의 그런 생각들이 왜 부질없는 것들인지, 바로 그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결국 감사가 나오게 되는데, 즉 주님의 일에 대해서 언제나 감사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고민을 하는 것은 왜 그런고 하니까, 기도를 하지 않으니 끙끙거리면 끌고 가는데, 그러니 고민거리가 있으면 솔직하게 탁 터놓고 "주님, 저에게 이런 이런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 사랑은 아무나 하나 ♬

그래서 제가 성 집사님의 입장이라고 하면, "내가 재수에 옴이 붙었지.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노? 설교말씀을 듣기 위해서 교회에 왔는데, 그런데 이것은 무슨 주보복사부터 시작해서 무슨 할 일이 이렇게 많은지, 내가 아니면 우리교회는 어떻게 될 뻔 했노? 다른 사람들은 팔짱만 끼고 있고, 나는 완전히 이용만 당했네. 자기들은 하지도 않으면서, 그래놓고는 '잘했니, 못했니?' 군소리만 하고, 그러니 내가 그런 심보에 이용당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에라, 모르겠다. 나도 안 할거야"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을 기도를 하면서 그대로 다 해본다는 말이다.

그렇게 다하게 되면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사랑은 아무나 하나" 라는 것인데, 즉 사랑은 학문적으로 따진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자기가 붕괴될 때, 자기가 미처 모르고 스치고 지나갔던, 바로 거기에 대해서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김장을 하게 되면, 일단 김장을 해봤으니 무엇을 깨닫는가? 우리교회 교인들이 모여서 김장을 했는데, 그러면 김장하는데 동참하지 못한 다른 교인들이 느끼지 못하는, 즉 그때 아이들이 김치를 넣어놓은 냉장고를 만지는 것이 얼마나 신경이 쓰였는지 모르는데, 바로 그러한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주님은 날마다 감사만 건지시는데, 마치 우리를 마치 녹즙기에서 녹즙을 뽑아내듯이 그렇게 갈아버리는 모습이란 것이다. 그런 감사의 노선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스데반 집사나 사도들의 특징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래도 나는 기도를 안 합니다" 라고 할 때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하지 말고 날마다 기도하면서 "주여, 저는 그래도 못 하겠습니다" 라고 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주님께서는 기도거리를, 즉 기도내용을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러면 그렇게 기도하면서 '동행'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폭풍'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131페이지를 보자.

** 오히려 날마다 되풀이 하셔서 종말의 상황이 내 자신에게 덮쳐버린다. 하나님께서는 종말을 그런 식으로 보내기로 작심하셨다. 종말이란 마무리 된 사건의 위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흐르기를 멈춰야 하는 시간으로 작용한다.

◈ '종말' 이란?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오는데, 그것이 곧 '종말' 이라는 것인데, 저는 이 종말만 생각하면 과거에 했던 드라마 '서울의 달'이 생각나는데, 여자 주인공 '종말이' 라고 말이다(ㅋㅋ). 이 종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모든 것을 이사를 할 테니, 과거에 니가 이사를 가기 이전에 생각했던 추억과 낭만과 로망을 잊어버려야 한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삿짐을 꾸리는데 "엄마, 그것은 버리면 안 돼. 그것은 내가 7살 때부터 가지고 놀던 것이야" 라고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삿짐을 살 때는 꼭 필요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다 불태워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지구상에서 우리가 등산을 갈 때 보았던 팻말도, 힘들게 벌은 돈을 바쳐서 지은 예배당도 말이다.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종말' 이란 의미 앞에서, '끝' 이라는 의미 앞에서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할 것이 아니라, 아프간의 테러 수장인 빈 라덴에게 맡기면 되는데 말이다(ㅋㅋ). 뉴욕의 무역센터를 처리하는 것을 보면,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애를 쓰지 않아도 빈 라덴에 알아서 해준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교회를 무너뜨리게 할 빈 라덴은 또 어디서 준비되고 있는지,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바로 종말이란 말이다. 평소에는 예수님만 믿는다고 해놓고, 그런데 왜 다른 것에 그렇게 애착을 가지고 신경을 썼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거기에 자기 자신의 노동이 들어있기 때문이란 말이다. 자기의 애씀 말이다.

그러므로 종말은 예상외로 자기의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가버리는데, 즉 우리는 "그것만 가지고 가시고, 이것은 저의 낭만의 로망이 있는 것이니 안 됩니다" 라고 하지만,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그런 낭만조차도 다 가지고 가버리신다는 것이다.

◈ 전 목사와 성추행 사건 !!

이번에 성추행 사건으로 시끄러웠던 목사가 있었는데, 전 아무개라고 말이다. 이 양반이 이번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한국의 젊은 목사들에게는 로망이고 희망이었는데 말이다. 설교내용이나 모든 것이 말이다. 기존의 한국교회와는 달리 "야, 이게 진짜 설교이고, 복음이다" 라고, 그렇게 모든 꿈과 희망을 제공했었는데, 그러니 이 양반의 입장에서는 들키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하나의 꿈으로서 찬란하게 자기의 가치와 명예를 더 높일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성추행 사건으로 인해서 잘렸다고 하면, 자기의 그런 바탕이 되었던 낭만과 로망은 하루아침에 다 무너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축복인데, 왜냐하면 날마다 죽으면서 이것도 진작 버려야만 하는 것인데, 말로는 자기도 날마다 죽는다고 해놓고 그 수많은 젊은이들을 감동시켰던 그 설교를 본인이 어떻게 잊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인간이 무슨 힘으로 자기의 과거를 잊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전 아무개 목사가 정말로 성도라고 하면, 물론 제가 보기에는 아니지 싶은데 말이다. 주님께서 이런 종말을 주실 때는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감사' 하나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이렇게 멋드러지게 설교를 하게 해놓고는 성추행을 들통나게 하셔서, 정 아무개라는 존재는 아예 애초부터 없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즉 이스라엘 안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한 하나의 이름으로서만 특이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개성 있는(?) 행동을 말이다.

마치 눈이 하는 것을 발이 어떻게 하지 못하듯이, 이 양반은 눈으로 한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발로 할 것이고 말이다. 물론 이 양반이 성도라고 하면 말이다. 성도가 아니라면 그러한 것도 전혀 없고, 자기 변명만 나오겠지만 말이다. 자기가 깨어지지 않으니 주께서 대신해서 깨어지게 하신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까지도 말이다.

그러면 그 양반은 20년 동안 목회를 했으면 "아하, 이런 것이 감사구나" 라고 하면서 종말을 느낀다는 것이다. 만약에 성도라고 하면 말이다. 이미 온 종말을 그 동안 자기만의 영역으로 인해서 밖에 그냥 세워두었는데, 그런 밖에 있던 종말의 회오리바람이 자기 영역 안으로 들어와서, 그야말로 선선한(?) 사랑의 바람으로서, 즉 자기를 재구성하게 해주는 축복의 바람이라는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 그 양반에게 처음이지 싶은데, 물론 돌아서면 그런 감사를 밑천으로 목회에 성공하려고 하겠지만 말이다.

◈ 종말은, 마무리 된 사건의 위력 !!

그러니 '종말' 이란 말이 그 만큼 무섭다는 것인데, 즉 자기가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런 종말을 맞이하게 되면 그 어떤 두려움도 없게 되는데, 청와대이든 김정일이든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를 망하게 하겠다고 나서는데, 그렇게 되면 사단이 더 이상 공격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단아, 너는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준 천사이구나. 제발이지 나를 망하게 해다오. 니가 나를 망하게 하려고 왔으면 얼른 그 작업을 실시해다오" 라고 하는데, 도대체 사단이 무슨 짓을 더 이상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 인간은 자기가 살고자 무서워하기 때문에 마귀의 종이 되었는데, 그런데 이제 본인이 죽겠다고 하는데, 과거의 아름다음과 모든 명예를 모두 포기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더 이상 마귀가 무슨 짓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곧 종말이란 것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런 종말의 내용을 주시기에 집어넣어서 우리에게 쑤시는 것과도 같은데, 즉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의 영을 받게 되면 드디어 우리 안에 종말의 효력이 퍼지게 되어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 잘라내지 못한 자기의 아름다운 꿈들이, 즉 안개와 같은 허망한 이상들이, 자기가 상상했던 오아시스와 같은 것들이, 그 짧은 2초나 3초 동안에 종말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보이고 다른 것은 보이지를 않는 말이다. 그것이 곧 하늘나라인데, 즉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하는, 그게 곧 종말이란 것이다. 그래서 여기 교재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종말이란, 마무리 된 사건의 위력이다"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야말로 마무리, 즉 "끝!" 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종말이란 마무리 된 사건의 위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흐르기를 멈춰야 하는 시간으로 작용한다. 이것이 시간으로 표현된 완성이다. 시간의 완성은 천국이라는 공간의 완성 속으로 흡수되면서 새로운 자아가 출현하는데, '완성된 종말'이 기념으로 새롭게 창조해낸 '자아'이다. 더 이상 시간에 밀리지 않는 여유 있는 자아이다.

◈ 완성된 종말 - 새롭게 창조해낸 '자아' !!

여기서 "완성된 종말이 기념으로 새롭게 창조해낸 자아이다"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종말이란 작업으로 인해서 새로운 부산물, 즉 생산물로 등장한 것이 곧 자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자아 말이다. 그러니 자아가 없다고 하는 불교의 무아사상이 아니고, 자아를 깨고 깨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자아는 우리 힘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말의 위력으로 인해서 새롭게 펼쳐지는 종말의 자아상이 여기에 새롭게 펼쳐진다는 말이다.

이러한 자아상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성도만 자아상이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 이러한 종말의 회오리바람은 인간을 둘로 쪼갠다는 것이다. 진노를 받을 그릇과 사랑을 받을 그릇으로 말이다. 즉 성도에게는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자아상이 만들어진다고 하면, 언약에 의해서 저쪽에도 새로운 자아상이 만들어지는데, 진노의 그릇으로 말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죽고 난 뒤에 무덤에 머물러 있으면 누가 불러 주는가? 무덤에서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그렇게 해서 "너는 양이었어. 너는 염소였어" 라고 하면서 분류작업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나쁜 물고기와 좋은 물고기로 말이다.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렇게 분류작업에 들어가서 자아상이 만들어지는데, 그런 자아상이 만들어져야 얼마나 지옥이라는 것이 뜨겁고 갈증이 나고,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를 못하고 절망으로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혹독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예수님의 영광은 더욱 더 빛난다는 것이다. 심판주의 심판행위가 얼마나 정당했는지를, 즉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덮친다는 말이다. 

◈ 무너지는 것이 곧, 피조물의 운명 !!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너무 참혹한데, 하지만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피조물의 운명이란 말이다. 우리는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수동적으로 당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싫어서 자기들이 창조자라고 나서는 것이 곧 현대과학인데, 그래서 신을 없애고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을 자기들의 힘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편에 보면 사람의 세워진 것을 하나님께서 다 헐어버리시는데, 즉 "내가 세우지 않은 것은 뿌리 채 뽑아버리겠다" 라는 것이다. 그게 마태복음에도 나오는데, 즉 하나님께서 세우지 않은 것은 다 무너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서 하신 말씀인데, 예수님 자신의 공로가 아닌 그들이 성경을 해석해서 만들어낸 신학체제는 다 무너진다는 것이다.
 
(시 52:5)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

그러니 정작 자기들은 천국에 가지도 못하면서 천국에 가는 사람들을 막는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세상은 예수님의 십자가 입장에서 보면 어떻다는 말인가? 이 세상이 어떠한지, 그 정답이 보인다는 말이다. 십자가에서 보면 말이다.

여기 교재가 어려우니 다시 살펴보자.

** 시간의 완성은 천국이라는 공간의 완성 속으로 흡수되면서 새로운 자아가 출현을 하는데, '완성된 종말'이 기념으로 새롭게 창조해낸 '자아'이다. 더 이상 시간에 밀리지 않는 여유 있는 자이다.

◈ 성도의 새로운 자아가 곧 성전 !!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하셔서 이루신 그 결과물을, 즉 여호와 전쟁의 기념물을 두고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두 글자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성전' 인데,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성전은 누구를 이야기하는가? 성도의 자아를 두고서 성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제가 하는 이 말이 맞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에 계시는 성도를 두고 성전이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의 영적 전쟁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용사가 되셔서 홀로 전쟁을 하셔서 이룬 그 결과물을, 구약의 다윗 때는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신약에서는 오늘날 성도의 몸이 곧 종말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새로운 자아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자아는 더 이상 시간에 밀리지 않는 여유 있는 자아라는 것이다. 시간에 밀리지 않는다는 것은, 50년을 살았던 60년을 살았던 간에, 그것에 상관없이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과 상관이 없이 말이다.

예수님은 33년만 살아도 모든 것을 느끈하게 다 이루셨는데, 그러니 우리가 오래 산다고 해서 천국이 더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인간의 수명과 상관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로부터 현혹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기가 무서워서 아둥바둥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어떻게 하면 더 살 것인가?" 라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132페이지를 보자.

** 곧 도덕적인 갈등으로 인해서 자꾸만 내일의 더 나아짐을 기약하는 것으로서, 자아의 정체성을 미래의 책임으로 지연시켜 나가는 그런 미완료적 자아가 아니라, 예수님의 완성에서 제공되는 안도감 속에서의 자아이다.

◈ '도덕적인 갈등'으로 인해서 !!

여기에 "도덕적인 갈등으로 인해서 자꾸만 내일의 더 나아짐을 기약하는 것"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짧은 문장 하나가 전 세계의 모든 철학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즉 도덕적인 갈등, 바로 여기에 모든 철학과 신학이 다 있다는 말이다. 

리델보스나 게르할더스 보스와 같은 유명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오스카 쿨만은 좀 다르는데, 그들은 신약성경을 '이미와 아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즉 "이미 구원을 받았다. 아직 구원을 받지 않았다" 라는 것으로 말이다. 그것을 가지고 신약성경을 설명했는데, 여기에 이렇게 십자가가 있고 파루시아(재림)이 있는데, 그 중간에는 시각형으로, 그것을 천국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 이 안에서, 즉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그것을 '긴장'과 '갈등' 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하나님 나라' 라는 리델보스 책에 보면 나오는데, 그래서 제가 이것을 개혁주의를 비판하면서 지적했는데, 이런 긴장과 갈등은 신학에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철학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내부적인 시간의 속성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인간의 주체적인 시간관을 현상학적으로 설명하면 이러한 것들이 다 나온다는 것이다. 긴장과 갈등이 말이다.

그러니 이런 것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에도 있는 것인데, 즉 "모든 것이 다 되었다. 아니야, 아직도 남았을 거야" 라고 하는 것은, 종교나 철학을 몰라도 인간이라면 다 아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이 무슨 성령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새로운 진리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제가 그렇게 개혁주의를 비판했는데, 우리 인간은 도덕적인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는고 하니까, "내가 내일 잘하면 되지" 라는 식으로 시간을 지연하고 미루는 방식이 바로 오늘날 모든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이다. 즉 신학이고 철학이란 것이다. 자꾸만 더 나아지는 내일을 기약한다는 말이다.

◈ 고도(Godot)를 기다리며 !!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라는 연극이 있는데, 이것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말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고도(Godot)' 라는 사람(신?) 기다리는데 그런데 연극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냥 기다림 그 자체가 인간적인 본성이란 말이다. 그러니 고도가 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인도의 유명한 영적 지도자가 신약성경을 보면서 뭐라고 평가를 했는고 하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인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중요한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내가 바로 그 메시야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메시야가 오게 되면, 무엇이 사라지고 마는가? 기다림 자체가 그만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이 싫다는 말이다.

우리가 왜 첫 사랑의 여인을 만나면 안 되는가? 왜냐하면, 그 당시 첫 사랑의 그 예쁨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하는데, 그것이 자기의 절대적 감각이고 경험인데, 마치 7살 때 처음 먹은 치킨의 맛을 잊지 못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40년이 지나서 할매가 되어서 오면 감당이 되겠는가? 그것도 병에 걸려서 옆에 오줌통이라도 하나 달고 오면 말이다.

처음의 그 첫 사랑은 얼굴에 주름살도 없었고 병에 걸리지도 않은 상태였는데, 그냥 그렇게 예쁘고 예쁘고 또한 예쁘고,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예쁘지 않고, 병에 걸렸고, 돈도 없다는 것이다. 얼굴에는 주름만 가득하고, 머리카락도 별로 없고 말이다. 남자는 없어도 그게 로망이지만(?), 하지만 여자는 도대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가발을 쓰고 있는데, 그만 바람이 불어서 날아가 버리면, 그 실망감과 허무함을 어떻게 달래겠느냐는 말이다.

◈ 나를 무시하지 말라 !!

그러니 기다림 그 자체인데, 즉 우리 인간은 "내가 기다린다고 하는 것을 무시하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문장에서 중간을 그만 지우게 되면, "나를 무시하지 말라" 라는 것인데, 결국 우리 인간은 교회에 나오든지 기도를 하든지 헌금을 하나 예수를 믿으나, 그 밑바닥에 깔린 것은 무엇인고 하니, 결국 "나를 무시하지 말라" 라는 것이다.

대중가요의 가사내용이나, 드라마의 내용이나, 문학, 신학, 철학 등등, 그 모든 것에 다 깔려있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시하지 말라" 라는 것이다. 그것을 다르게 말하면, "나는 마귀인데, 나를 무시하지 말라"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마귀를 무시하신 분이 누구인가? 예수님인데, 그래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귀와 한편이고 마귀의 얼굴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를 무시하지 말라" 라는 것을 누구에게 배웠는고 하니, 바로 마귀에게 배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예수님이 당연히 싫은데, 지금 이 시간에 예수님 이야기가 아닌 건강상담과 같은 것을 하면 아마 올 사람들이 더 있지 싶은데, 하지만 예수님을 이야기하니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절염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자기를 무시하는 것이 전혀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이야기하면 자기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무시하지 않는 교회를 찾아다니게 되는데, 그런 교회가 부흥이 되는데, 하지만 종말이 되면 그런 교회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아 앤 모아' 라고, 쓰레기에 쓰레기를 더하고, 또 쓰레기에 쓰레기를 더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쓰레기끼리 모으게 되는데, 그러니 좁은문은 찾는 이가 적다는 것이다.

다시 교재 132페이지를 살펴보자.

** 곧 도덕적인 갈등으로 인해서 자꾸만 내일의 더 나아짐을 기약하는 것으로서, 자아의 정체성을 미래의 책임으로 지연시켜 나가는 그런 미완료적 자아가 아니라, 예수님의 완성에서 제공되는 안도감 속에서의 자아이다.

◈ 미래의 더 나은 '나'의 모습으로 !!

여기서 "자아의 정체성을 미래의 책임으로 지연시켜 나간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비록 지금의 나는 허접스럽지만 내일이 되면 더 나은 나가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모자란 나를 탓하지 말고, 내일의 더 나은 나를 보고, 그때 그 모습을 보고 지금의 나를 평가해다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지금의 자기 자신을 무시하거나 괄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남들에게 보여주는 자기의 모습인데, 즉 "지금은 비록 이렇게 가난하지만, 나중에는 부자가 될 거야"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미래의 자기를 미리 앞당겨서, 현재의 자기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심보라는 것이다. 목사의 경우에는 "지금은 비록 교인수가 얼마 되지 않지만, 앞으로 10년 뒤에 나는 큰 교회의 목사가 될 소질이 있기 때문에 나를 무시하지 말라" 라는 것인데,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 신학이 전부가 아닙니다 !!

십자가 마을에 이준 성도가 참 귀한 글을 올려주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목사의 경우에는 그런 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는데 말이다. 소위 제대로 신학을 공부해서, 신학이 최고라고 여기는 분이 이준 씨를 만났던 것 같은데, 그래서 "신학이 전부가 아닙니다" 라고 하는 짧은 멘트가 하나 나오는 것이, 거기에 얼마나 많은 수모와 설움과 자기 자신의 기대에 대한 실망이 들어있는지 모르는데, 그것을 목사들은 보면 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지금은 내가 큰 교회에서 쫓겨났지만, 하지만 앞으로 그러한 큰 교회에 못지 않게 더 큰 교회를 이루겠다" 라고 하는, 즉 자기에게 그런 기대감과 비전이 있으니 자기에게 투자를 해달라고 하는, 그런 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있었던 교회의 교인들에게 하는 말이, "지금 내 실력이 쫓아낸 저 목사보다도 나으니, 그러면 더 많은 교인들에 자기에게 올 수 있으니, 그 미래를 보고 내가 개척교회를 하는데 도와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그 글을 보니 약 30명 정도밖에 되지 않은 같은데, 거기에서 나올 때 많이 훌쳐서(?) 데리고 나오지 못했지 싶은데, 물론 30명도 과분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 샘숭을 고발합니다 ??

물론 이러한 현상은 비단 교회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삼성그룹의 비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제대로 지적했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상당히 정의감이 있는 사람인데,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면, 그러한 하나님은 불의의 하나님이 아닌 정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를 도와줄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삼성의 비리를 고발하니, 사회에서는 정의감이 있다고 하면서 호응을 받았는데, 그런데 막상 회사 내에서는 배신자가 되어서 쫓겨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당시에 같이 회사의 비리를 고발하자고 하면서 다짐을 했던 동료들이 함께 따라나올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막상 나오고 보니 자기 혼자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자기 집에 아이가 3명이나 있다고 하고, 자기 마누라가 아프다고 하고, 자기는 아직 전세방에 산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핑계를 대면서 삼성과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하는 말이 "그래, 너의 뜻이 좋으니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면 너를 도와줄 거야" 라고, 그러한 멘트를 하면서 그만 관계를 끊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 감히 권력에 도전을 해? 그러면 니만 박살이 나고, 손해야" 라는 것이다. 그러한 설움이 닥쳐올 때, 그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겠는가? 그야말로 혀 잘린 하나님이고, 귀머거리 하나님이고, 벙어리 하나님이란 것이다. 그러니 전혀 있으나마나한 하나님인데, 그런 하나님을 믿은 자기 자신이 바보이고, 부끄럽다는 것이다.

◈ 가롯유다의 경우에 !!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 누구였는가? 바로 가롯유다인데, 그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예수님만을 믿었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시도하다가 그만 실패하게 되었는데, 그러니 그는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말이다. 아마 삼성의 비리를 고발한 그 양반도 그러한 충동을 받았지 싶은데 말이다.

우리는 흔히 가롯유다를 나쁘게 보는데, 하지만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 가운데서 착한 사람에 속한다는 것이다. 특히 도덕적인 갈등이 심한 사람이란 말이다. 이 가롯유다가 어디 미성년자 성추행을 했는가? 도대체 그가 무엇을 했는가? 국가에 충성하기 위해서, 국가의 질서를 문란시키는 자기 스승을 용감하게 국가의 입장에서 고발해서, 국가적 안녕을 취하려고 하는 자가 가롯유다인데 말이다. 도대체 그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굳이 사단까지 들어가야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분명히 마귀가 들어가서 가롯유다가 그런 일을 했는데, 그러면 이런 가롯유다가 잘못이 없다는 말은 무슨 말과 같은가? "아니, 마귀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라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마귀와 우리는 아모레(?), 다정한 친구사이였는데, 배신은 누가 했는가? 오히려 기생 라합이 자기 민족을 배신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오히려 가롯유다를 두고 배신자라고 하고, 그 기생 라합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즉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니, 사랑을 받으면 모두가 다 배신을 하는가? 자기 혈육을, 자기 민족을, 자기 국가를 말이다. 바로 그렇게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성령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감각으로는 도저히 이 성경말씀을 해석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가롯유다의 결정적 잘못은 무엇인고 하니, 여전히 자아의 명성과 자아의 위신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인데, 심지어 자살까지 하면서 자기 위신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얽매여 있는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즉 아직도 폭풍의 위력을 모르는 자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자아의 완전함을 자아가 새삼 확인하고 해석해낼 수 있다고 해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주로서의 활동이 여전함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이다. 성도가 '자아 분석'에 있어서 완전한 지식을 가졌음이 아니라, 완료된 기준을 성도에게 적용시키는 그 부활 활동이 완전하다는 말이다.

◈ 완료된 기준이 완벽하기에 !!

그러니 성도의 모습은 무엇인고 하니, 자아의 완전함을 자아가 새삼 확인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인데, 그게 얼마나 사도바울의 편지에 자주 나오느냐는 말이다.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자는 것인데, 편지문장이 짧으니 중요하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사실 그 문장에 담긴 말씀의 위력은 매일같이 우리에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롬 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또한 성도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자기가 자아분석을 완벽하게 제대로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자기를 분석하는 기준이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서 주어지는 기준의 완전함에 대해서 기뻐하자는 것이다. 즉 자기를 자기를 제대로 측정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자기를 죽은 자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로 보는 기준이 완벽하다는데 대해서 즐거워하자는 말이다.

이것을 어떻게 구분하는고 하니, 남들이 자기를 욕할 때 물론 잠시 우리는 괴로워하게 되는데, 갑자기 저 사람과 자기를 비교에 들어갈 때 말이다. 그러면 그 억울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그대로 기도하는데, 즉 "제가 이렇게 억울함을 당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니가 뭔데? 니가 누구지? 너는 니가 혼자 있다고 여기지 말고, 너 안에 내가 있잖아. 그러니 니가 욕을 얻어먹은 것이 아니라 내가 얻어먹은 것이야. 그런데 너는 왜 니가 욕을 먹었다고 여기지? 예수님이 욕을 먹었다고 여기지 않고 말이야. 그러니 니가 나쁜 놈이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성도는,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은 너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때문에 그러한 것인데, 그렇게 같이 미움을 받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이 놈들아!" 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면, 그것이 곧 영광이라는 것이다. 즉 복음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것이 곧 축복인데, 성도는 바로 예수님과 그런 관계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그런 성경말씀을 기도 가운데 응답을 받을 수가 있다면, 우리는 기도에서 털고(?) 일어날 수 있는데, 물론 그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즉 우리는 다시 한번 "아하, 성경말씀이 맞군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성도는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하여진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기도의 행위자체가 아니라, 응답의 기준이 무엇인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신'의 활동이 하나님의 전체 백성들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셨다.

◈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

이것도 참 중요한 내용인데, 이것이 울산강의의 범위에 들어가는 것인데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그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는데, 그 기둥이 앞에서 전진하면서 당기는데, 그런데 각 개인마다 코앞에서 당기는가? 그게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에게 보이도록 있는가?

당연히 전체인데, 원래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언약궤 위에 있는데, 그래서 백성들이 그 뒤를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백성들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이유가 없는데, 즉 "삼촌, 지금 가야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라고 물어볼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조카가 삼촌에게, 삼촌이 조카에게 묻지 말고, 즉 제 삼자에게 묻지 말고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냥 구름기둥과 불기둥만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뒤에서 애굽군대가 따라온다고 하면, 그러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어디로 가는가? 뒤쪽으로 가서 그 애굽군대를 향하게 되는데, 그러면 백성들은 앞을 보다가 뒤로 돌아야 하는데, 그러면 뒤에서는 애굽군대가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애굽군대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서 무엇을 느끼고 배워야 하는가? 무릇 애굽군대와 자기들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자기들이 제직회를 열어서 결정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구분하셨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전쟁자체가 자기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애굽과 벌리시는 전쟁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거기서 나오는 부산물이고 결과물로서 있다는 것이다. 즉 전쟁의 노획물이고 전리품이란 신분으로서 자기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 군대와 군대 !!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로 묶는 것인데, 즉 과거 자기들이 애굽에 살 때 이웃에 살던 친구와의 일대일의 대결이 아니라, 그렇게 일대일로 묶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은 권투나 격투기를 할 때 하는 것이고 말이다. 장애인은 장애인끼리, 비장애인은 비장애인끼리, 그렇게 올림픽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일괄적으로 이스라엘 전체와 애굽 전체가 붙는데, 그래서 '바로 군대' 라고 하는데, 즉 바로 왕에게 속한 군대이고, 또한 이쪽은 여호와의 이름에 속한 군대라는 말이다.

열왕기하 19장에 보면, 앗수르 군대의 185,000명이 한꺼번에 다 죽었을 때, 그들에게는 개개인의 사정들이 다 있었다는 것이다. 돈에 팔려왔던지, 그게 아니면 억지로 끌려왔던지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히스기야 왕을 대적했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 죽었다는 것이다. 즉 이쪽이 한꺼번이기 때문에, 저쪽도 한꺼번에 다 죽는다는 말이다.

(왕하 19:34)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왕하 19: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그래서 하나님의 성신은, 즉 언약은 하나로 묶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는 개인적인 느낌과 같은 것은 기도를 통해서 개인적인 것으로 머물지 말고, 그리스도의 몸에 속했음을 응답으로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혼자서 움직이는 것은, 즉 자기가 학원을 한다고 하면, 미국에 있는 성도도 역시 빵집을 하던지 무엇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원을 하던, 빵집을 하던, 아이를 돌보던, 아니면 백수라도 상관이 없이 전부가 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하나' 라는 말이다. 마치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나님의 이름이 벌리시는 언약적 작업에 집단화를 시켜서 동원되었다. 사사기나 사무엘상, 사무엘하에서 하나님의 하신 일은 극히 육신적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항상 위대한 하나님의 군대로 변모시켜 적들과 대면시켰다.

그러니 "이스라엘 개개인이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적은 코앞에 있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적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인다고 하면, 이스라엘은 개인적인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을 유지하면 안 되고, 이스라엘도 역시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의 하나된 목적 때문에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것을 이렇게 적을 대면시킴으로서 파악토록 하신다는 말이다.

◈ 성도는, '하나'에서 오는 축복을 !!

그렇다면 적이 사라지면 다시 어떻게 되는가? 그때는 이스라엘끼리 붙게 되는데, 즉 우리들끼리 붙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들끼리 치고 박다가 적이 등장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하나이다" 라고 하면서 뭉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열왕기상하 가운데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의 이스라엘이지, 12개 이스라엘, 25개의 이스라엘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도 당연히 하나밖에 없는데, 즉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요,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다" 라는 말이다. 그렇게 성도는 하나에서 오는 축복을 다같이 분배받고 같이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주신 이 축복이 저희들이 기도를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신 축복이기 때문에, 자기 것으로 여기지 말고 주님의 주신 것으로 여겨서, 아예 우리 전체가 통 채로 주님의 것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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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교재를 읽어보니, 그 문장 하나 하나가 뺄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서 지금 일일 다 읽으면서 하고 있는데, 시간에 되면 집에 가셔서 찬찬히 다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2011,02,05 오후 4시에 마침.
                                                                   근호야, 내가 던진 공 받았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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