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39강 부활과 자아

피/피 2012. 8. 29. 10:04

피39강 부활과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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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39강 부활과 자아

[11 대구강의 1] - [피 39] - 부활과 자아
                                                                                
                                                   11,01,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안개, 안개, 안개 !!

오늘은 교재 135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따라서 성도는 자신을 안개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봐야하고 하나님을 대해야 한다.

이렇게 자신을 안개로 본다는 것은 남을 무엇으로 본다는 말인가? 남도 또한 자기와 더불어서 안개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안개와 같은 타인들의 주장이나 시선에 대해서 기가 죽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모두가 같은 안개이니 말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안개로 본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니나 내나 똑같은 안개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상대방으로부터 "나도 안개입니다" 라는 소리를 들어야, 그때부터 대화가 된다는 것이다.

◈ 여보, 나는 안개야 !!

그러니 부부의 경우에, "여보, 나는 안개야" 라고 하면, 아내도 "저도 역시 안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라고 하면, 그 부부사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안개' 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소멸되는 주체' 라는 의미인데, 즉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편이 아내에게, 또 아내가 남편에게,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안개라고, 즉 서로가 소멸될 주체라고 한다면, 둘 다 자기의 주체는 소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우리 가정을 안개가 되게 하신 관점, 바로 그것이 누구의 관점인가? 즉 하나님의 관점밖에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남편이 말하기를 "여보, 나는 안개야" 라고 하니까, 아내가 "나는 안개가 아니야. 당신 혼자서 안개라고 해" 라고 한다면, 결국 그 작은 차이가 부부의 모든 것의 차이로 구성이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말씀의 구조 안에서 '안개' !!

그래서 이렇게 어떤 사람이 안개라고 하면, 여기서 "나는 안개다" 라는 의미에서 점(·)을 하나 찍어보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안개가 되게 하신 분이 누구라는 말인가? 그게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렇게 말씀이 되면 이 전체가 무엇이 되는고 하니, 이번 수련회에서 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바로 '구조 안'에 놓이게 되는데, 즉 인간은 말씀의 구조 안에서 안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안개라고 하는 것은, 인간 자체로서는 안개이니 허무하기 짝이 없고, 또한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인간을 안개라고 하는 그 지점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말씀전체가 피어나고 살아난다는 것이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그러면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 의로운 관계 !!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안개라고 말함으로 말미암아서, 자기를 안개로 규정시켜주는 그 구조가 살아난다고 하면, 그것으로 피조물은 자기 도리를 다 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 되었다는 것이다. 말씀대로 말이다. 즉 인간의 육체는 소멸되지만 무엇은 영원한가? 즉 "말씀은 영원하다" 라는 점을 부각시켰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그 이상 더 무엇을 원하느냐는 말이다.

제 아무리 불교나 철학에서 뭐라고 해도, 말씀자체가 드러나는 식의 철학은 펼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 말씀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안개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하는, 그런 '관계성'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두고 '의로운 관계'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잠시, 수련회 시간으로 !!

이번 수련회 때에 한 것을 다시 잠깐만 해보면,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었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관계가 바로 '하나님의 의' 인데, 즉 그래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아브람은 죄이고, 아브라함은 의가 되는데, 이렇게 들어간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다.

그것을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하는데, 갈라디아서에서는 의의 실체가 예수님으로 되어있고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약속으로서 의의 관계로 들어오게 되면 죄인이 의인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람이나 아브라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의인되게 하신 그분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분의 구조로 인해서 이 말씀 전체가 잘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도 결국 '의' 하나를 집어넣기 위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계속해서 안개로 남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들도 본인이 안개라고 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가 다 안개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와 더불어서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안개이면서도 안개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무슨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인가?

그것은 의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인데, 예수님에게는 의의 관계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는 공의도 있지만 처벌도 있다는 것이다. 즉 그런 처벌받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안개인 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처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을 '결정론' 이라고 하는데, 즉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있다는 것이다.

◈ 주권이 아닌 결정론 !!

그러니 이런 '결정론' 이란 용어가 '하나님의 주권' 이란 표현보다 더 합당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뉘앙스가 있는고 하니, 하나님의 주권은 저 하늘에 있는 붙박이 별처럼, "저 위에서 알아서 다 하시네요" 라고 하면서 쳐다보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결정론' 이란 것은, 마치 붙박이 별과 같은 예수님이 하늘에만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일에 있어서 말씀을 가지고 자신의 할 일에 적용시키는 형태인데, 그런 것이 이미 다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가 강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은 "주여!" 라고 쳐다보는 성격이 강하다고 하면, 결정론은 이렇게 내부적으로(?) 결정이 되어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 입장에 아니라, 예수님의 입장에서의 결정론이라는 말이다. 즉 주권은 하나님이 신으로 등장하는 반면에, 결정론은 그 중심성이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굳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정론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136페이지를 보자.

** 인간은 쉬지도 않고 자아 재정립에 나서고 성도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쉬지도 않고 성도가 꿈꾸는 자아 재정립을 해체시켜 이미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립되었음을 통보해주신다.

◈ '자아'가 해체되면?

지금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그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글의 흐름을, 즉 주제를 알아야만 하는데 말이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자아가 해체되면 자아가 없지 않는가?"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주체를 해체하면 그만 주체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논리인데, 즉 주체가 없으면 나중에 지옥에 가서도 아파하는 것도 없고, 또한 천국에 가서도 주님과 함께 즐길 수 없으면 곤란하지 않으냐는 것이다. 주체가 사라지면 말이다. 즉 불교처럼 보든 주체가 다 찢어져버리면, 고통을 받을 주체도 없고, 안식을 누릴 주체도 없다고 하면, 그러면 죽고 난 뒤에 주와 거하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 질문하는 니는 누구십니까?

'코헨' 이라는 유명한 교수 밑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어떤 학생이 자기 담당 교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는데, 자기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말이다. 그 학생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교수님, 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자 코헨 교수가 뭐라고 답변을 했는고 하니까, "그렇게 질문하는 니는 누구십니까?" 라고 했는데, "그렇게 질문하는 니는 누구십니까?" 라고 말이다.

* 학생 : 교수님, 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 교수 : 그렇게 질문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바로 이 간단한 질문과 답변 속에 데리다와 푸코의 모든 철학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뭐냐 하면, "주체는 언어 속에서 해체된다" 라는 것인데, 즉 물음과 답변 속에서 주체는 비로소 살아난다는 말이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자기가 누구인지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즉 농부가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어서 빨리 이 고랑을 다 갈고, 집에 가서 쉬어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기를 불러주었을 때는 달라지는데, 즉 자기에게 질문을 했을 때, "실례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말이다. 그렇게 질문을 받았다고 하면 답변을 해야하는데, 그런 답변을 하는 와중 속에서 주체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 주체는 언어 구조 속에서 반짝반짝 !!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주체는 언어 구조 속에서 반짝반짝 점멸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연말연시가 되면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말이다. 그러니 질문과 답변이 없게 되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아는 것이 하나 있는데, 우리 인간은 몸이 있기 때문에, 즉 신체, 다른 말로 하면, 살이고 말이다. 이렇게 몸, 신체, 살이 있기 때문에, '나' 라고 하는 주체, 즉 자아는 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재구성하는 것이지, 결코 자아를 재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죽게 되면 이 흙과 같은 존재는 사라지고,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고 우리의 몸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의 몸이 있고, 신체가 있고, 살이 있는데, 하지만 그것이 기존에 있던 이 자아는 아니라는 것이다. (어서 오세요??)

◈ 목사님, 죽고 난 뒤에 부부는 어떻게 됩니까?

흔히 교인들이 하는 목사들이 골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중요한 질문들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목사님, 죽고 난 뒤에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죽고 난 뒤에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또한 죽고 난 뒤의 내 부모는 어떤 모습이며, 내 아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내 아들과 내가 맞먹습니까? 죽고 난 뒤에도 여전히 부부사이입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그런 호기심이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답변을 해보면, 즉 "살아있는 때도 부부라면 죽고 나서도 부부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러면 살아있을 때 서로가 아내와 남편인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자기와 혼인을 해주었기 때문에 남편이고 아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혼인했다는 것을 모른다면, 서로가 남편이고 아내인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이큐가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 그래도 주위에서 시켜서 합궁을 해서 아이도 낳고 했는데, 그런데 지능이 너무 낮아서 저기 아내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줌마는 누구세요?" 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 여자가 말하기를, "저는 당신과 결혼해서 한 평생을 살아갈 아내입니다" 라고 해도, 그 사람은 정박아가 되어서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그 사람에게는 아내가 있는가? 그 사람의 자아에게는 말이다. 아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내가 있다는 말은, 자기가 먼저 "나는 아내를 얻을 수 있는 남편감이 맞다" 라고 하는 '자아 의식'이 먼저 형성될 때 아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남편과 아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우선적인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아라는 것이 먼저 구축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남편과 아내라는 말이다.

◈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의 경우에 !!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는가?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지만 사두개인들은 믿지 않는데 말이다. "어떤 남자가 7명의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러면 천국에 가면 어느 여자가 본 아내인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반대인데, ㅋㅋ)

혹은 "그 전부가 다 본래 아내가 될 수 있는가?" 라고, 혹은 "그 여자가 천국에서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고 하면, 계속해서 자기와 혼인관계가 이루어지는가?" 라고, 그렇게 여러 가지 문제를 들어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들은 부활의 출처가 달라 !!

그럴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씰데 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ㅋㅋ).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는 조건하에서 그런 질문을 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만약에 부활이 있으면 하늘나라에 가면 이런 혼란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은 없는 게 합리적이라고 보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슨 뜻인고 하니까, "지금 너희들이 생각하는 부활은 너희들 자아에서 형성된 부활인데, 그러나 그것은 내 몸에서 나온 부활과는 다르다" 라는 것이다. 즉 부활의 출처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마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마 22: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마 22: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마 22: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마 22: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마 22: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마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마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 22: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 '나' 라는 것은, '몸'을 근거로 !!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설명을 하겠는데(ㅋㅋ), 지금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말이다. 우리 몸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여기서 우리의 '자아'는 어떠한고 하니, 자아를 쉽게 말하면 '나' 라는 것이고, 어렵게 말하면 '주체' 인데 말이다. 즉 '나' 라는 것은 우리 몸을 근거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은 누구의 몸인가? 분명히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의 몸인데, 그러면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구약의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 언약의 하나님께서 몸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 몸은 어디에 필요한 몸인고 하니까, 언약성취에 필요한 몸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언약의 중심이 우리인가? 예수님인가? 새언약의 중심이 말이다. 당연히 예수님인데, 그러면 우리의 몸은 결국 누구를 증거하기 위한 몸이란 말인가? 새언약의 중심인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몸이란 것이다. 우리의 이 몸이 말이다. 

그런데 우리 몸은 아담에게서 왔기 때문에, 이것을 지난 수련회에서 이야기했는데 말이다. 우리 몸은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매개체라고 했다는 말이다. 즉 우리의 몸은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께서 만나는 매개의 장(場)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 언약이 없는 자아가, 언약이 있는 몸을 가지고 살아가기에 !!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언약이 관여해서 해석되어야만 하는 몸인데, 그런데 우리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서 그만 그 언약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했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약속 같은 소리하고 있네" 라고 하면서 그만 찢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 언약이 없는 몸이, 즉 언약이 없는 자아가 언약이 있는 몸을 가지고 평생 살아가고 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앞뒤가 맞는가?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욕망은 "내 몸이 무엇이 되고 싶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몸은 누구의 지시를 받고 누구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가? 언약의 원칙을 따르는데, 그러면 그 원칙은 무엇인가? "죄 있는 자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 원칙은 누가 정했는가? 우리 스스로가 정했는가? 그게 아니라면 현재 우리는 어떠한가? 자아의 근거가 되는 몸의 원리 원칙은 다른 곳에서 온다는 말이다. 즉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는 것에는 전혀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자면 씨에게(?)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그 자체가 나중에 흙이 되면 무엇이 사라지는가? 어디 잘난 사람은 그 흙의 땟깔이 좋은가? "잘 살더니만 역시나 흙이 부드럽구만" 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잘 섞어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를 구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이다.

◈ 기준 - 몸이 어떤 식으로 언약을 발현시켰는가?

그러니 하늘에서의 몸의 구분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 동안 몸이 어떤 식으로 언약을 발현시켰는가?" 라는 것에 따라서, 그 기준에 따라서 몸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즉 하나는 저주받은 형상으로,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영광된 형상으로 말이다.

그렇게 저주받은 형상과 영광된 형상으로의 구분은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몸을 구분하는 그 기준이 "니가 얼마나 착하고 성화가 되었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우리는 기껏 성화가 되어봐야 여전히 흙이니 말이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성화가 되었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성화가 되려고 하는 나를 왜 포기해야만 했는가?" 라는, 곧 그것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성화가 될 가치조차도 없음을 아는 것을, 물론 그것을 우리의 원리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고, 그것은 바로 우리 외부에서 주님의 새언약이 작용했을 때, 즉 십자가가 들어왔을 때, "나는 전혀 성화가 될 가능성이 없고, 오히려 주님이 나를 죽이는 것이 곧 성화이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의(義), 즉 관계성에 의해서 !!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 우리 자신을 죽이시는 그 놀라운 사랑의 능력이, 즉 죽여주시는 사랑의 능력이 왔다고 하는 사실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의 개입인데 말이다. 바로 그러한 의(義), 즉 관계성에 의해서 저쪽과 이쪽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저주받은 형상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영광된 축복받은 형상으로 말이다.

바로 그렇게 구분되는 원리에 합당하게, 즉 그런 원리를 발현할 수 있는, 마치 꽃봉오리를 꽃 피울 수 있게 하는 성질에 맞도록, 그렇게 형상이 그 성질에 맞추어서 따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좀 어려운가요?

◈ 니 몸이 누구의 몸인가?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무엇인가? 그들의 부활이란 개념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들은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 몸이 어떻게 사는가?" 라는 것에서 나왔는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니 몸이 누구의 몸인가?" 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즉 "부활이 있다" 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물음이란 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선언만이 아니고 그들의 반응을 독촉하신다는 것이다. 즉 "여기에 부활이 있다. 니가 이것을 거부할 거야? 아니면 수용할 거야? 빨리빨리 반응을 드러내" 라고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사두개인들은 뭐라고 했는가? 부활은 없다고 답변이 나왔는데, 그러면 그 물었던 몸은 예수님의 몸이고, 답변은 죄를 지은 썩은 아담의 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몸의 경우에도, 답변하는 본인들은 사실은 아담의 몸이라고 우겨도 누가 창조한, 누구를 위한 몸인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문하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너희들은 부활에 대해서 오해했다" 라고 하셨는데, 즉 "니 몸 중심이 아니라 내 몸 중심이다" 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몸과 너의 몸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모르면, 그것은 저주받는 부활이 되는 것이고, 반면에 나의 너의 몸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있는지를 인정한다고 하면, 그것은 영광스런 부활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 주님 몸 중심의 부활 !!

그러니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나' 라는 것은 빼버리고, 주님에 대해서, 즉 "주님은 어떻게 부활이 되셨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그 주님의 지체이기 때문에 같이 부활이 되겠네요.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고, 그 다음 차례는 우리가 되겠네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감람나무에 열매가 하나 맺히면, 그 다음에 나오는 다른 가지에도 연이어 열매가 맺히듯이 말이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몸 중심의 부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몸도 아니면서 자기 중심의 언약과 원리를 고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중심의 언약의 원리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평소에 아담의 더러운 속성이 이 세상의 환경과 맞지 않아서 성질이 나서 그냥 외치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발악을 하는 것인데, "신이시여, 왜 나를!" 라고, 다른 말로 하면 "WHY ME!" 인데 말이다.

◈ 교회에는 매일같이 비명소리가 ??

과연 그러한 발악이 믿음이 좋은 것인가? 발악을 하면 언약이 오는가? 발악은 언약이 아니라, 그냥 죽어 가는 아담의 외마디 비명소리라는 것이다. 오늘날 그런 비명소리를 모아서 큰 교회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런 비명소리도 지르는 없이 무슨 재미로 교회에 다니느냐는 말이다. "왜 제 남편은 이렇게!, 제 아들은 이렇게!" 라고 하는 말이다. 교회에는 매일같이 그런 비명소리가 왕왕 울리는데, 그러니 거기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조목조목 따질 것은 모두 다 따지겠다는 것인데, 마치 예수님을 불러놓고 청문회를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것도 교회에서 말이다. 즉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제 뜻대로 되지 않습니까?" 라고, 자기 몸을 기준으로 해서 주의 몸에 대해서 청문회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이 일종의 재판장이란 말이다.

◈ 다시 사두개인들의 질문을 !!

여기서 다시 사두개인들의 질문을 살펴보겠는데, 즉 "이 땅에서는 아내가 7명이었는데, 그러면 천국에서는 누구의 남편이 됩니까?" 라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그때는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고, 마치 엔젤과, 즉 천사와 같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듣고 천국에 가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이 참 많이 있는데(ㅋㅋ), 전반전을 뛰면서 짝을 잘못 골랐다고 하는 사람들은 빨리 천국에 가서 제대로 된 여자와 한번 살아보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분위기 파악도 전혀 못하고 뭐라고 하시는가?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간다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천국이 너무나 심심하고 재미가 없어서 가지 못하겠다고 불평을 늘어놓곤 하는데, 차라리 지옥에 가더라도 뭔가 변화무쌍한 것을 원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 몸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 '자아 중심성'의 구조가 !!

이런 우리 인간의 몸 중심은 무엇인고 하니, 아담이 가지고 왔던 죄가 그대로 안착이 되고 장착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담의 죄는 무엇인가? 아까 이야기했는데, 아담의 죄는 '언약 없음' 이라는 말이다. 설령 있더라도 그 언약을 거부하는데, 그렇게 언약이 거부되니 나중에 어떻게 되는가? 독립적이고 독자적이 되는데, 이것을 두고 '자아 중심성'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본인은 그렇게 자아 중심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것은 오해이고, 아담의 배후에 무슨 구조가 있다고 했는가? 이번 수련회 때 했는데 말이다. 악마가 예수님의 가치를 모독하는, 그러한 속성으로 구성된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 'BOX' 구조를 아십니까?

수련회 때 그 구조를 그림으로 설명을 했는데, 모든 지점에서, 즉 꼭지점에서 말이다. 그것을 영어로 'BOX' 라고 했는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표정들인데 말이다. 즉 그 어느 꼭지점을 가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해서 반발을 해주어야 무엇이 산다고 했는가? 자기 중심성이 계속해서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어느 지점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만 '나' 중심성이 공격받게 되는데, 누구에게서 공격을 받는가? 즉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라는 구조에 의해서 우리가 공격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무엇인고 하니, '나를 위하여', '나 때문에'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OF THE PEOPLE,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

아브라함의 후손인(?) 아브라함 링컨이 뭐라고 했는가? 놀라운 말을 했는데, 즉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구조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그 말은 맞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망할 때 같이 망하니 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브라함 링컨이니 당연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ㅋㅋ).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미국에게만 해당이 되겠는가? 그것은 자기가 미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는데, 자아 중심성이니 말이다. 그가 만약에 북한에 태어났다고 하면, 당연히 "우리 김일성은 영원하리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인민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자기 집에 가면 "우리 집안은 영원하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브라함 링컨을 굳이 욕할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아브라함 링컨이니 말이다. 매일같이 눈만 뜨면 우리는 무슨 짓을 하는가? 큐티를 하던지 기도를 하던지 간에, "포 더 피플, 오버 더 피플, 바이 더 피플"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 중심성인데, 즉 아담에게 물려받은 구조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조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너는 예수님에 대해서 얼굴을 돌리고 살아야만, 너의 것을 챙기게 된다" 라고, 자꾸만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유도 없이 자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가 부담이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살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믿음이 좋다는 자아로서 용접을 해서 덧붙여놓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어떤 예리한(?) 사건이 터지게 되면 결국에는 자아 중심성으로 돌아서게 된다는 것이다.

◈ 아,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안개가 되어야만, 그러한 것이 낱낱이 부서지게 되는데, 그렇게 낱낱이 부서져야, 오히려 그것이 정상이란 말이다. 인간이 자아 중심성은 얼마나 강력한지, 사형수가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코털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즉 코털이 나오면 보기에 흉한데, 자기가 죽을 때 예쁘게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두고 습관화, 혹은 버릇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한 버릇의 경우에는, 새로운 종교적인 형태를 통해서, 즉 아무리 교회에서 교육과 양육을 통해서 종교적인 폼과 모사(模寫)를 해도, 나중에 그것이 두세 번 반복이 되고 나면, 종교적인 행태 속에서 옛날에 가지고 있던 자아 중심성의 속성으로 달라져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처음에 교회에 나와서 목사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해서 그렇게 하면, 그게 참으로 감격스러운데, 그런데 계속해서 교회를 다니면서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 것이 그만 습관화가 되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찬송을 불러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러니 예배시간에 참석해도 그냥 무덤덤하다는 말이다.

◈ '마르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마르다의 문제인데, 마리아는 자기가 음식을 준비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 듣기를 소원했는데, 즉 자기에게 덮칠 말씀의 구조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다는 그냥 예수님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며 어떻게 대접할지, 그런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하고야 마는데(ㅋㅋ), 컵라면 데이(?)가 되어서, 지금 예배가 중요한데 뒤에서 '지지직' 하면서 마구 냄새를 피워댄다는 말이다. 왜 그런 짓을 하는가? 그것은 바로 "나는 독자적인 가치를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겠다" 라는 것인데, 즉 성경에서는 아무리 안개라고 이야기해도 자기는 때려죽여도 그런 의미 없는 안개로는 살기 싫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강력한 반발심, 그것이 모든 구조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강력한 반발심이 말이다. 날씨가 이렇게 추워도 따끈따끈하게 피어오른다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다 성령께서는 무엇을 집어넣는고 하니, 그것을 두고 '업로드' 라고 했는데, 저도 컴퓨터를 다루면서 배웠는데 말이다(ㅋㅋ). 아래에 있는 것을 위로 복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조로서, 아담의 구조로 있는 우리에게 업로드를 하다가보니, 현재 우리 살은 아담의 것과 주님의 것으로서 같이 섞여있고 같이 대치하고 충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몸은 바로 그런 매개체라는 말이다.

◈ 죄 있는 곳에 은혜가 더 넘치는 방식으로 !!

그것을 두고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이라고 했고, 신약에서는 '성전' 이라고 하는데, 즉 '성도의 몸'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아주 깨끗하고 죄가 없는 것이 아닌데, 즉 구약 이스라엘은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같이 있어서, 즉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 넘치게 하는 방식으로 언약이 우리를 통해서 증거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언약이 말이다. 

물론 우리가 이러한 죄를 일부러 지을 필요는 없는데, 사건이 팍팍 터지면 그냥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사건이, 그런 사태가 벌어지고 일어난다는 말이다.

다시 정리하면, 성령께서 업로드, 즉 예수님의 몸을 중심으로 한 구조를 우리게 복사하고 교체를 시키게 되면, 그것이 계속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재 136페이지의 상단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사도 바울은 이 원칙을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게 적용한다. 사도 바울은 죽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이는 더 이상 신체라는 비본질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체와 되모음이 되풀이되지 않는 순간을 고대한 것이다.

사도바울은 죽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하는데, 아니 살아서 복음을 전하면 되는데 왜 죽기를 원했을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사도바울을 찾아와서 "사도님, 복을 받아서 일찍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그렇게 심방기도를 했다면,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겠는가? 화를 내겠는가? 그것이 아니라, 서로가 안개임을 공감하니, 서로 얼싸 앉고 기뻐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마음씨 착한 교인들은 저에게 오래 살라고, 음식을 가려서 먹으라고 하면서 없는 돈을 모아서 건강식품을 사주고 하는데, 하지만 만약에 사도바울에게 그렇게 했다면 아마 사도바울에게 무슨 소리를 들어도 들었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사도 바울은 죽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이는 더 이상 신체라는 비본질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체와 되모음이 되풀이되지 않는 순간을 고대한 것이다. 그 순간은 바로 자기 자신의 육체를 벗는 순간이다.

(고후 5: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고후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고후 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 사도바울 -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 !!

여기 7절에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믿음은 보는 것과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없다는 것이다. 즉 믿음은 보이는 것을 규합해서 믿음을 유발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조금만 더 설명하면, 보이는 것을 그대로 가지고 오면, 그것은 전혀 소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가지고 오면 안 되는데, 즉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다" 라는 말씀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로마서 8장 24절에 나오는데 말이다.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사도바울은 자기 몸을 두고 뭐라고 했는가? 보이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부분이 중요하니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몸이 보이는 것이라고 하면, 그러면 현재 자기 몸을 보다 잘 살려보려고 하는 것은 보이는 것에 해당되는 것인가? 되지 않는 것인가? 당연히 보이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자기 몸을 편하기 하기 위해서, 또한 남에게 으스대기 위해서, 그래서 돈을 많이 벌고 출세를 하고 권력을 가지려고 한다면, 그렇게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기도하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이러한 몸을 가지고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주와 함께 거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보이는 것을 가지고 어디에 활용하는고 하니, 보이는 것을 유지하는데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하여 폐기처분하는 것, 그것이 곧 사도바울의 소원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짜 소망은 보이지 않는 소망이다" 라는 의미이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를 한번 보라는 것이다. 서울의 대형교회에 가면 죽으려고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하지만 그들이 과연 죽으려고 왔겠는가? 새벽에도 수 천명이 모이는데, 그들이 과연 죽으려고 온 자들인가? 모두가 다 살려고 온 자들인데, 즉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살리는 것이 곧 자기를 살리는 것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자기 몸이 불편하니, 즉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니 그렇다는 말이다.

◈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무엇인가?

여기서 잠시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는데, 과연 그 불행의 기준은 무엇인가? 즉 어떤 것을 불행이라고 하는가? MBC에서 '아프리카' 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서 방영했는데, 거기에 보면 아줌마들이 무슨 물을 마시는가? 심지어 어린아이도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웅덩이인데, 만약에 우리 같으면 그것을 피해간다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 신발이 거기에 빠지면 신발이 더러워질까 싶어서 말이다. 그 정도로 더러운 물이라는 것이다. 물 색깔이 그야말로 회색인데, 그래도 떠서 마신다는 것이다. 또한 수 킬로가 떨어진 집으로 들고 가고 말이다.

그러면 그 아프리카에 사는 아줌마들의 '불행 끝, 행복 시작'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자기 집에, 아니 자기 마을에 단 한 군데라도 깨끗한 물이 콸콸 쏟아질 때, 그때 비로소 그들은 무엇인고 하니, "아하, 바로 이것이 행복이구나" 라고 하면서, 그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 과연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우리나라에는 그런 더러운 물을 마시는 사람이 없는데, 그러니 과연 집에 가서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콸콸 쏟아져도 그게 행복이라고 여기겠는가? 그러한 자들에게 수돗물이 나온다고 해서, "지금 여러분은 과연 행복들 하신가요?" 라고 하면,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연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가? 특히 성경에서는 불행의 기준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즉 불행이라고 여겼던 그 자리까지 하나님께서는 언약이 임한 언약맨을, 그러한 불행의 자리에다 그만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흔히 우리 인간들이 불행이라고 여겼던 것을 제대로 지적하기 위해서 말이다.

◈ 욥의 경우에 !!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름도 단 한 글자인데, 즉 '욥' 이라는 것이다. 욥의 불행의 시작은 자기 자식이 10명이나 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말이다. "소유나? 관계냐?" 라는 것인데, 즉 "10명의 자식이 너의 소유인가? 아니면 10명의 자식 자체가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있다는 관계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뒤의 밧줄에 매여있는 존재인가?" 라는 것을 묻는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10명이 되는 자식이 다 죽고, 그리고 그 많던 재물도 다 날아간다는 말이다. 그래도 욥이 뭐라고 하는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바로 욥 뒤에는 밧줄이 있다는 것이다.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택배의 경우에는 주고 나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런 택배기사가 아닌데, 주님은 주시는 것은 그것이 밧줄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속' 주었다가, 밧줄을 당겨서 다시 회수해 가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이제 남은 것은 튼튼한 욥의 몸밖에는 없는데, 그러자 마귀가 또 다시 시비를 건다는 말이다.

◈ 마귀는 너무나 철학적 ??

하나님께서 "마귀야, 욥을 봤냐? 믿음이 참 좋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라고 하는 것을 들었지?" 라고 하니, 마귀가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도 뭔가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이 세상에서 어떤 인간도 자기 몸을, 즉 자기의 살을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가 참 철학적인데(ㅋㅋ), 방금 자아는 어디에서 나온다고 했는가? 즉 자아는 무엇을 근거로 해서 나오는고 하니, 자기의 살이란 말이다.

다시 복습을 해보면, 우리 인간의 살은 육이니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인데, 그러니 살을 물려받으면서 그 원리도 함께 받았는데, 그 원리는 '언약 없음'이고, 그렇게 언약이 없기 때문에 독자성을 발휘하는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살이 건장하면, 즉 "이만하면 살만하다" 라고 하는 고집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말이다.

◈ 귀신아, 그만 그 입 다물라 !!

그런데 이런 사실을 누가 아는가? 마귀가 너무나 잘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귀가 진짜 지혜로운데, 즉 마귀는 '영적 세계'에 속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제일 먼저 예수님을 누가 알아봤는가? 귀신이 들린 청년이었는데, 그때 그 당시의 데가볼리(?) 주민들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귀신에 들린 청년만이 뭐라고 하는가? "예수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제가 너무 부드럽게 표현한 것 같은데, "예수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라고 했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이 귀신아, 그만 그 입 다물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내가 십자가를 질 때까지 잠잠하라" 라고 하셨고 말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전체를 죄 가운데 두기 위함이란 것이다.

(눅 4: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눅 4: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눅 4: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 욥은 하나의 '과정'을 보여주기에 !!

아무튼 욥의 경우에, 욥이 살아있을 때 악마가 욥의 살을 건드리게 되니, 그러면 욥이 과연 하나님을 원망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물론 원망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과정' 이란 말이다. 그래서 욥기 마지막에는,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게 되는데, 그러니 그 과정은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래서 욥기의 주제가 결코 욥의 구원문제가 아니라는 말인데, 그러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가?"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욥을 언약적인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나 욥의 가는 길은, 소위 우리 인간이 어떤 지점에 발을 들어놓는지, 그것을 평소에 싫어하는 모습으로, 즉 행복과 불행을 그렇게 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행복과 불행을 논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호된 맛을 봤다는 말인가? 보지를 못했다는 말인가? 아직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호된 맛을 보게 되면, "하나님, 차라리 저를 엄마 뱃속에 있을 때 그냥 죽이시지,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습니까?" 라고, 그러한 원망이 나오게 될 때, 그것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라는 말이다.
 
사실 욥이 원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차리리 자살을 선택하도록 허용해주었으면 하는 것인데, 그래서 "주여, 제가 알아서 죽겠습니다" 라고 하니, 하나님은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욥이 죽을 수가 없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다른 것은 다 허락을 했지만, 그의 목숨만은 손대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 목숨과 몸은 관련이 있는가?

그러면 목숨과 몸은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관련이 없다는 것인데, 즉 목숨은 하나님에게 달려있고, 몸이 아픈 것은 마귀가 얼마든지 다룰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실체의 밑바닥이 이 욥을 통해서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아직까지 배때기(배?)가 부르다는 것이다. 그렇게 배때기가 부르기 때문에, 마귀가 실실 웃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물조차도 마시지 않는 아무 것도 먹지 않는 상태에 들어가셨는데, 마치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모세는 하늘나라의 기쁨을 맛보고 희희낙낙 거렸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무엇인가? 이 죄 많은 땅에서 먹고 마시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은, 이미 영혼을 마귀에게 넘겨준 상태에서 !!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상태를 만들어놓고 예수님을 사단과 맞닺뜨리게 하는데, 그러니 거기서 하는 사단의 3가지 유혹은 무엇인고 하니, 결국 인간은 평소에 이미 본인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단과 거래를 하면서, 즉 행복을 빼앗지 않겠다는 조건하에서, 우리의 영혼을 이미 넘겨준 상태에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또한 목사가 되어도, 그리고 이런 강의를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새언약의 효과로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피로 되는 것이지,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까지 배가 부르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불쌍해서 그런 몰라도 마귀에게 덜 건드리게 했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의 본질은 어떠한고 하니, 자기 자신이 죽기 5초 전에도 엄청난 고집을 보이는데, 즉 의사가 와서는 "이제 준비하세요. 끝났습니다" 라고 하는데도, 그래도 아직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고집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인간은, 나이가 80이 넘어도 !!

이것은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노인네가 허리가 아프다고 해서 수술을 하겠다고 얼마나 고집을 피우는지, 나이가 87인데 말이다. 그래서 가족들이 얼마나 말렸는지 모른다고 하는데, 즉 "아버지요, 지금 수술을 하면 병간호를 누가 할 것이며, 그 비용은 어떻게 할 겁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수술을 해도 하지 않는 것 못지 않게 그 후유증이 심한데 말이다.

사실 그런 고집은 나름대로 이해가 되는 고집이지만, 나이가 80이 넘어서 새장가를 가겠다고 하면서 생떼를 쓴다는 것이다. 좋은 여자가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결혼을 하면 돈만 수천 만원을 그냥 떼먹고 도망갈 여자인데 말이다. 그렇게 심심하면 그냥 경로당에서 참한 할매하고 고스톱이나 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나는 외롭다. 너거 엄마가 죽고 난 뒤에 심심해서 못 살겠다" 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이란 말이다.

이러한 우리의 사정을 마귀도 잘 알고 있는데, 하물며 주님이 모르시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로서만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어린양을 상징으로 해서 말이다. 그러니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아무리 절제하면서 우리 자신을 다듬는다고 해도, 우리가 만든 작품은 마귀를 결코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은, 갈수록 자신에 대한 애착이 강렬해져 !!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람이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애를 쓰고 지탱하면 할수록 자기 애착이 더욱 더 굳어진다는 것이다. 어설프지 않고 더욱 더 예민하고 정교하게, 그렇게 점점 더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이 강렬해진다는 것이다.

장희열 집사님이 여기에 대해서 글을 참 잘 쓰셨는데, 바로 이런 의미라는 말이다. 자기를 지탱하면 지탱할수록 더욱 더 굳어진다는 것이다. 그냥 맡기면 되는데, 그런데 우수한 존재가 되려고 시도하는 그것이 바로 마귀의 시험이고 노림수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이 독자적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이다.

◈ 부활은, 주님과 우리 몸과의 '관련성' !!

이렇게 되면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지 싶은데, 즉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에 우리가 딸려서 가는 것이지, 우리의 독자적인 몸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로지 주님과 우리 몸과의 관련성만이 부활 때 살아남는 것이지, 인간의 자기 중심의 부활이나 천국개념은 천국에 가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천국에 가지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지금의 아내와 남편은 천국에 가면 어떻게 되는가? 즉 "지금 우리가 이렇게 부부인데, 천국에서도 여전히 부부입니까?" 라고 물으면, "지금의 아내와 남편 사이가 과연 지체 사이입니까? 그렇다면 그 지체는 부활을 해서라도 같이 면류관을 반납하는 지체가 됩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한 쪽은 지체가 아니라고 하면, 저 멀리 지옥에서 "여보, 여기에 물 좀 주소" 라고 하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이 양반아, 내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갈라설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배우자가 복음에 대해서 모르면, 거기에 대해서 얽매이지 말고 서로 갈라서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갈라서고 싶어서, 일부로 그것을 핑계로 해서 복음을 아느냐고 하면서 들이대지 말고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 또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다(ㅋㅋ).

이제 교재 137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 작업을 사도는 자신이 할 수 없다고 했다. 곧 죽음도 삶도 결코 성도 자신이 개입하거나 관여할 문제가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 나의 죽음도, 내가 관여할 수 없어 !!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입하는 것도 그렇지만,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자기 죽겠다고 하는데, 왜 자기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건 인간의 본능인데 말이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때리려고 하면 "깨갱' 하면서 피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신체성을 사수하고 보호하겠다는 본능을 어떻게 관여하지 못한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힘인 새언약이, 즉 십자가의 살과 피의 효력이 더 세니까, 자기로서는 그것을 해석을(?) 한다는 말이다. 즉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수동적으로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사도바울은 자신이 위협에 쳐했을 때 성에서 바가지를 줄에 매달아서 타고 내려서 탈출한 적이 있었는데, "아니야. 나는 죽겠어. 바가지를 치워라" 라고 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본인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 복음이 관여하게 되면, 복음 때문에 살아야 한다면 살아야 하고, 또한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복음 때문에 죽어야 하는데 산다든지, 반대로 살아야 하는데 죽는다고 하면, 즉 "이 세상을 더러워서 더 못살겠다. 죽을 거야"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의 모든 주도권을 복음의 기능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얼마나 편하고 그렇지 못하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은 결코 자기 생사를 관여할 입장에 놓여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여기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항상 주님의 것으로만 되돌려놓고 유지시키는 솜씨를 말하고 있다. 비록 주를 멀리 떠나있어도 여전히 주님의 것이 되는데, 그 증거로서 자기 속에서 어서 죽어 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빌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빌 1: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 육신의 사는 것이, 곧 주님의 열매 !!

여기 22절에 보면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 육신의 사는 것이 주님의 열매라는 말인데, 즉 주님의 열매로서 육신의 몸을 선물로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몸이라도 자기가 관여할 수는 없고, 자기에게 선물로 주신, 왜냐하면 뒤에 밧줄이 달렸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선물로 주신 주님께서 이 몸을 가지고 복음 전파에 활용을 하겠다면, 자기가 일찍 죽겠다고 하는 욕망도 거기에 대해서 관여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주님이 자기 것을 사용하겠다고 하시는데, 그런데 그릇이고 도구인 주제에 그만 삐쳐서 "저는 안 됩니다" 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주님께서 자기 것을 쓰겠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나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들어야만 될 너희들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같은 지체인 너희들을 돕기 위해서 '나' 라는 지체를 아직도 살게 하셨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라고 하는데, 여기서 심고 물을 주는 것과 자라게 하는 것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지만, 하지만 물을 주게 하신 분이 자라게 하기 위해서 물을 주고 또한 심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 상급에, 다양성은 있지만 차이는 없어 !!

그래서 '상급' 이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다 키웠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만, 그것을 비로소 상급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행함과 노력이 들어가는 것은 상급이 전혀 아니고, 오직 주님께서만 하셨다는 것을 드러내야 그것이 곧 상급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상급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는데, 물론 다양성은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즉 모양은 다를 수 있어도 성과급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급 자체가 성과급이 아니기 때문인데, 오직 모든 상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뿐이란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라고, 사도는 영적 인간을 규정한다. 즉 인간은 영의 입장에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 안에서는 어떤 시간이든 어떤 공간이든 상관없이, 여전히 '주님의 것'으로만 있게 된다.

◈ 성도는, 예수님 중심성 안에서 각자의 기능을 !!

여기 교재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 인간은 구조로 되어있는데, 그 중심성이 누구라고 했는가? 예수님이라고 했는데, 즉 성도는 예수님 중심성 안에서 각각 자기의 기능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기능이 어떤 식으로 되는고 하니,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물론 지금 제가 그린 그림에는 예수님이 바깥에 나와있지만, 사실은 안에 다같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서 '머리' 라고 하고 그 나머지는 '몸' 이라고 지칭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머리와 몸이 합쳐져서 예수님의 몸이 되고 말이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몸을 뭐라고 하는가? 교회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교회에서 무엇이 빠지면 안 되는가? 머리가 빠진 교회는 없다는 것이다. 그 머리를 예수님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도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 당연히 안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인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고 말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분명히 교회가 있는데, 그런데 자꾸만 다른 엉뚱한 교회를 생각한다는 그 취지가 굉장히 수상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이 양반이 당신 아버지를 닮았지요?

예를 들어서, 자기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데 자꾸만 누군가가 와서 말하기를, "이 아저씨가 아버지를 닮았지요?" 라고 해서, 그래서 예, 좀 닮은 것 같습니다" 라고 하니, 상대방이 "야, 닮았대. 아버지래"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닮았다고 했지, 그 사람을 아버지라고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집에 계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뭐라고 하는가? "그래도 닮았으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모방이고 표절이란 말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표절한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가?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제 아무리 표절을 해도 그것은 교회가 아닌데, 오직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이지 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데, 분명히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꾸로 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우기는 저의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아니, 나훈아가 있는데 왜 너훈아가 등장하느냐는 것이다(ㅋㅋ). 물론 비슷한 것은 인정하겠는데 말이다.

◈ 교회이기에 떡을 떼는 것이지 !!

초대교회에 있어서 모든 행사가 일어나는 것이, 즉 떡을 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미 머리인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물론 머리가 보이지 않으면 지체도 보이지 않는데, 그것이 곧 교회라는 말이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 떡을 뗐다고 해서 이렇게 여기서도 같이 떡을 뗀다고 하는 것은, 마치 너훈아를 나훈아라고 표절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교회이기 때문에 서로 떡을 떼는 것은 괜찮은데, 그것이 아니라 떡을 떼기 때문에 교회라고 확인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 저의가 수상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아까 독자적인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런데 눈에 보이는 독자적인 것들을 모으면, 그 전체가 모여서 교회가 되는가?

그것은 아닌데, 그러니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인지 아닌지를 말이다. 그러면 그 심사관이 도대체 누구인가? 즉 자기가 누구냐는 말이다. 누구에게 심사를 받느냐는 것이다. 누구 말대로 인증을 받으면 되는가? 교회는 그렇게 허가를 받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이미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의해서 교회가 되었기에 움직인다는 말이다.

어제 오전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성도는 이미 해답을 쥔 상태에서 예수님의 피가 왜 해답인지를 차후에 경험하는 것, 그것이 곧 성도가 걸어가는 인생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 그 자체가 주님이 계시는 해답이 된다는 말이다.

◈ 영적 인간은, '어떤 구조에' 속해 있음을 !!

그것을 곧 '영(靈)'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영은 구조를 말한다는 것이다. 즉 "단독적으로 나는 성령을 받았다" 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전체에 소속되어있다는 점에서 영적 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영적 인간을 말할 때는,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가?" 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 라고 물어야 하는데, 즉 "당신은 주님의 지체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단독적으로 얼마나 훌륭한가?" 라고 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머리가 훌륭한 것이지, 자기 자신이 훌륭한 것은 아니기에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유일하게 훌륭하신 분이신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훌륭하다고 하면서 증거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기능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렇다면 주님 안에서는 어떤 시간이든 어떤 공간이든 상관없이, 여전히 '주님의 것'으로만 있게 된다.

◈ 예수 안에는, '시간'과 '공간'과 '인물'이 없어 !!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한데, 예수 안에서는 무엇이 없다고 했는고 하니, 시간과 공간과, 그리고 인물, 즉 인간인데, 이 3가지가 예수 안에서는 존재하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즉 예수 안에서는, '내 시간', '내 공간', '내가 선택한 인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시간과 내 공간 속에서 내 인물 속에서 만드는 것은, 그 3가지는 바로 '나' 라는 주체를 만드는 3가지 요소라는 것이다. 즉 "나는 어디서 태어났는가?" 라고 하면 장소인데, 또 "나는 나이가 몇 살인가?" 라고 하면 시간이고, 그리고 "내가 왜 저 사람은 좋아해서 친하게 지내지? 다른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데" 라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골라잡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에서 비추어서 '나' 라는 인간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 잠시 '라캉' 선생님을 모시고 !!

처음에 갓난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자기 것이 아니라 전혀 타인인데, 그런데 6개월 뒤에 거울이 있어서 그 거울을 보고 비로소 전체적으로 자기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남의 것이었는데, 그런데 거울을 보면서 "아하, 저게 나로구나" 라고 하면서 전체적으로 파악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자의식(自意識)' 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라캉의 이론인데 말이다. 그런 자의식이 있은 이후에는, 엄마가 시장에 간다든지 해서 집에 없는 것과 집에 있는 것에 대해서, 아이는 엄마가 집에 없으면 울고, 집에 돌아오면 즐겁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자아 의식은 그냥 자의식이 아니라, 엄마가 무엇을 할 때 자기가 좋아하고, 또한 무엇을 할 때 자기가 싫어하는지, 그렇게 자기가 스스로 좋고 싫음에 대해서 자기가 자체적으로 규정하지를 못하고, 자기가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상대가 있을 때, 그 상대를 보고 점점 더 자기의 윤리와 도덕이 구축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라캉은 '상상계' 라고 했는데, 즉 항상 자기 모습을 반추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란 말이다.

그런데 커가면서 여기에 제3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게 곧 '아버지' 라는 것인데, 이것을 라캉은 남근(男根)이라고 해서, 즉 남자의 생식기를 여기에 집어넣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집어넣게 되면, 그동안 엄마를 통해서 자기를 구축했던 여기에 아버지가 들어오게 되니 어떻게 되겠는가? 아버지는 엄마와 한통속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만 아버지에 대해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 '나' 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으니, 엄마가 '나'를 대신하게 되는데, 물론 여기에 엄마도 좋고 그 누구라도 좋은데, 자기가 호감이 가는, 즉 어릴 때부터 자기를 만들었던 대상인데 말이다. 물론 '집으로' 라는 영화의 경우에는 할머니인데, 즉 할머니가 그 아이의 자아 형성과정에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거기에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합세해서 법적으로 맞는지, 틀리는지, 거기에 대해서 대칭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를 조종하고 확정하게 되는데, 그러니 여기에서는 대립관계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는 법이 들어와서 법적이 관계가 되는데, 법은 질서를 말하고, 또한 이 질서는 제3자가 보기에, 왜냐하면 엄마와 '나'는 하나이니 말이다.

그렇게 제3자에 의해서 "나는 어떤 처벌을 받는가? 어떤 칭찬을 받는가?" 라는 것이, 이 법을 통해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들어오는 법은 학교에서는 교사이고, 또한 교회에서는 목사이며, 그리고 회사에서는 사장이란 말이다. 군에서는 상급 지휘관이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결국 국가적인 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즉 법을 따르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데, 그 처벌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법을 지킨 사람이 법을 지키는 않은 사람 때문에 받는 피해를 보상해주는 보상체계가 있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무엇인고 하니,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을 그 공동체에서 추방시키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 부족사회에서는 추방을 시켰는데, 그런데 근대국가에 들어와서는 보상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즉 피해를 입은 사람의 심리적인 복수심을 위해서 교도소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 교도소에다 피해를 입힌 사람을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자기 대신에 법이 처벌해줌으로서 자기는 상징세계에, 즉 법의 세계 속에 일원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 인간은, '교환체계' 속에서 !!

그렇게 일원으로 남아있을 경우에는, '나' 라는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즉 같은 조직에, 공직에 있는 자들에게, 그들이 '나'에게 뭔가 기대하고 원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는 것을 주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증여(贈與)' 라고 하는데, 바로 이러한 전체를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교환체계'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퍼주면 받을 것은 받아 챙기는, 그런 조직의 일원으로서 주위에서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교회에서 신에게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면, 그만큼 자기에게 뭔가가 돌아온다고 하는 자기 몸 중심의 교회로, 바로 그런 교환체계로서의 교회로 만들어놓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저 주는 것은 없는데, 구원의 경우에도 별미를 갖다바쳐야 하는데, 그래야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치 야곱처럼 말이다.

이러한 체계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상징계' 인데, 바로 그러한 질서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의 몸은 이미 습관화가 되어있는, 그러한 몸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이 세상에서 이미 습관화가 된 몸을 가지고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데, 성경에 보면 그러한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 어느 부자청년의 습관화 된 몸 !!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어떤 부자청년이 나오는데, 그가 어릴 때부터 무엇을 지켰는가? 자기는 십계명을 다 지켰는데, 그런데 거기에다 더해서 무엇을 더 지키면 되겠느냐고 예수님에게 묻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법을 지킨다는 것은, 여기에 있는 제3의 인물이 마음이 든다는 말인가? 들지 않는다는 말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래서 법을 지킨다는 것이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그 사람이 되기를 싫어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싫어하면 처벌이 오니, 법을 지켜줌으로 말미암아서 처벌은 받지 않고, 즉 자기는 그 사람에게 복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성경말씀을 자기가 지키겠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행여 날아올 저주에 대해서 법을 지킴으로서 미리 방지하고자 하는, 그렇게 자기가 평소에 살아가던 습관대로 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은 누가 받는가? 바로 이러한 것이 인간이고, 그러한 식으로 자기 몸을 구축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 법과 사랑은 서로 공유될 수 없어 !!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법적체제가 아닌 무슨 체제인가? 법이 아닌 사랑이라는 말이다. 즉 법과 사랑은 서로 공유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러니 이 '법' 이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즉 상상계에서 '나' 라는 것이 있고, 그런 '나'를 유지한 체로 간직하면서 이 교환체제에서 처벌을 받지 않는 존재로서 법을 지켜주는 입장이라고 하면, 반면에 사랑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은 다음 주일에 호세아서를 설교할 때 할 내용인데 말이다. 물론 미리 이야기를 해도 다음 주일이 되면 다 잊어버리지만 말이다(ㅋㅋ).

이 '사랑' 이라는 것은, 이런 모든 무질서와 혼돈을 거뜬히 능가해서 불쌍히 여겨주는 것이란 말이다. 우리는 허술하고 법도 지키지 못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해도, 그렇게 어설프기가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간격, 즉 갭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천국과 지옥의 갭을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천국에 계시던 분이 지옥과 같은 세상까지 와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지옥에 있는 사람을 건져낼 수 있다고 하는 대상자가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바로 그런 부활의 능력으로 사랑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사랑은 무엇인고 하니, "아하, 내가 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란 말이다.

◈ 사랑은 그냥 '허걱' ??

실제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게 되면, 그러한 경우들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을 보기만 해도 '허걱' 하면서 그만 가버리는데, 진짜 사랑을 한다는 말이다. 일본 아줌마들이 욘사마를 보고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욘사마가 배용준인 것은 알지요? 그 정도는 알아야 하는데 말이다(ㅋㅋ). 그런데 그게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되고, 왜냐하면 까무라치니 말이다. 그래서 멀리서 바라보는데, 아니면 사진을 보든지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 너무나 그리워서 자살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에 !!

아무튼 사랑은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면서 흠모하는 것인데, 그 순간부터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즉 자기 수입이 얼마이고, 몸무게가 몇 키로인지, 얼굴은 어떻게 제대로 붙어있는지, 그런 것을 모두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인데 말이다.

그녀는 자기가 품행이 바르지 못한 여인이라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다 아는 입장이지만, 하지만 정작 자기는 자기의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야말로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님이시여'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누가 불렀는가? 그러니 자기보다 더 자기를 사랑한 분이 계시는데, 자기가 사랑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고 말이다.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자기를 사랑해주셨다는 것이다.

◈ 모세의 빛나는 얼굴은?

그것이 바로 모세를 자기 궁궐로 초대한 사랑인데, 즉 모세가 40일 동안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피부가 얼마나 고와졌던지, 얼굴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광채가 다 난다는 것이다. 무슨 최고급 한방 화장품을 섰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ㅋㅋ).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모습이라고 말이다. 즉 은혜와 긍휼이 바로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즉 "니가 나를 사랑하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라는 것인데, 그것도 피로서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세는 전혀 먹고 마시지도 않았지만 하늘의 천사와 같이 빛나게 되었는데, 그러한 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까,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말이다. 그 빛나는 사랑을 말이다.

이에 반해서, 우리는 육은 무엇인가? 줄 것은 주는데, 그러면서도 항상 돌려 받을 것을 예상하면서, 즉 서로 교환을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교환의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만약에 이 법이라는 것에 여기에 있는 제3자 말고 또 다른 제3자가 끼어 들게 되면, 가차없이 배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시장은 배신과 배반의 연속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배반의 장미' 라는 말도 있지만, 아무튼 흔해빠진 것이 배신이고 배반이란 말이다.

◈ 이제 마지막으로 !!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왔다고 하면, 그러면 상식적으로 누구를 보고 오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보고 온다고 하는데, 그러면 무엇은 아니라는 말인가? "줄 것은 주고, 또한 받을 것은 받겠다" 라고 하는 것을 노리고 온 것은 아니라는 고백을 하면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복음을 안다고 하면 말이다. 그렇지요?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 남이 자기를 무시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다른 교인이 자기를 말이다. 그렇게 무시해도 상관이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이렇게 교회에서 봉사하면 저쪽에서 봉사하는 자기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노림수를 가지고 봉사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건 아니라고 고백을 하면서 봉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삐치냐는 것이다.

자기가 봉사를 하는 것은 전혀 남들이 알아달라고 한 것이 아닌데, 그런데 왜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삐치고 화를 내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까, 뭔가 사람들은 만나게 되면, "내가 이렇게 줄 테니, 내가 기대한 것을 달란 말이야" 라고 하는, 바로 그럴 때 이 사회는 질서가 잡힌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짜로 떼먹고 하는 놈들을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라고 하는데, 그것이 곧 사적인 복수심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는 공짜로 떼먹은 놈은 교도소에 집어넣는데, 왜 그런가? 법을 어겼기 때문에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파란불에 가는데, 왜 나이가 80이 넘어서 빨간불에 건너다가 차에 치고 하는데, 그러면 그 운전자는 너무나 억울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 노인네는 질서를 어겼다는 것이다. 걸음걸이가 시원치 않아서 파란불에 제대로 건널 자신이 없으면 그냥 집에 있던지 말이다. 

◈ 이태석 신부, 잠시 컴온 !!

어떤 신부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서 다음과 말을 했다고 하는데, 즉 "하나님, 제가 수단에 왔는데, 성당을 짓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학교를 짓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라고 말이다. 대장암에 걸려서 죽었다고 하는 신부인데 말이다. 혹시 누구인지 아세요?

저는 그것을 듣고 기가 차고 코가 차서 그야말로 말문이 막히던데,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라고 거기에 보내었는데, 그런데 그 양반은 거기서 그들 속에서 하나의 타인, 즉 그들이 모르는(?) 하나의 타인으로서 행세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자기가 사랑을 주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남들이 보이에는 굉장히 종교적인 성자와 같은 모습이지만, 하지만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즉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밖에 달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는데,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십자가를 진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런 봉사를 하면서 은근히 기대하는 것이 있는데, 즉 자기 말이 먹혀들고 자기 말에 감동을 받아서 "저는 회개합니다" 라고 하면서 엎드려져서, "이제부터는 신부님을 구원의 주로 모시겠습니다" 라는 말을 은근히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자기도 모르게 노리고 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우리의 모습을, 우리는 또 다시 그게 죄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십니다" 라고 하는 복음의 전체구조를 그들에게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는 이미 아담의 몸으로서 안개와 같은 존재임을 확인할 뿐이라는 말이다.

이제 진짜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를 살펴보자.

** 그렇다면 주님 안에서는 어떤 시간이든 어떤 공간이든 상관없이, 여전히 '주님의 것'으로만 있게 된다. 따라서 '십자가 안과 밖', 혹은 '언약 안과 밖', 혹은 '그리스도 안과 밖'으로만 설명이 될 뿐이지, 결코 시간성이나 공간성으로 이해하거나 분석해낼 수가 없다. 그러니 이 말은, 곧 십자가 사건을 핵심으로 해서 전체 성경이나 세계관을 해석하지 아니하면, 영적인 새로운 피조물의 위상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시간과 공간과 인물이라는 것은 하나의 주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철저하게 짓밟히고 용납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서는 육의 열매가 계속해서 나오는데,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같은 것들이 말이다. 전혀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말이다.

◈ 십자가 사건을 핵심으로 !!

그리고 여기 교재 마지막에 보면 "곧 십자가 사건을 핵심으로 해서 전체성경이나 세계관을 해석하지 아니하면"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십자가 사건이 추상적인 사건이냐? 아니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냐?" 라는 것인데, 분명히 십자가 사건은 어떠한 사건인가? 실제로 이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 일에 실제로 관여한 인물들이 곧 바리새인들이고, 사두개인들이고, 또한 로마 병정과 관원들인데,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을 팔아먹은 자가 가롯유다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십자가도 실제로 무거운 나무였고, 또한 돌로 만든 빈 무덤도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과, 또한 가담한 인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십자가 사건에서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인간들이 가담해서 그냥 기계와 같이 그렇게 멍청하게 움직였는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도대체 어떻게 했는가? 자기들의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즉 온갖 신경을 다 집중해서 재판에 임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빌라도의 경우에는, 자기 아내가 불길한 꿈을 꾸어서 "여보, 오늘 당신 재판이 있지. 그 사람을 건드리면 우리가 화를 입을 것 같아" 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자기 손을 씻는 것으로서 마무리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빌라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기도 한데, 즉 "신이시여, 저는 이제 이 재판과는 무관합니다" 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렇게 빌라도는 찜찜한 자기 기분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주체를 한꺼번에 다 집어넣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박차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 사건은 무엇인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그야말로 유일하게 이 세상을 책망할 수 있는, 즉 심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사건이 된다는 말이다.

◈ 성도는, '그리스도 안' 이라는 구조의 기능만을 !!

그런데 바로 그 사건이 우리를 찾아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 이라는 구조 안에 놓여있는 기능을, 그런 복음을 증거하는 기능을 부여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성도의 삶이란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적인 사랑으로 해석해서 우리가 사랑한 것으로 여겼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그 어떤 짓을 해도 주님의 사랑을 흉내조차 낼 수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주신 그 사랑을 우리가 그 어디에서 찾아볼 수가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피를 우리가 외면하게 되면, 또 우리 자신을 자랑하고, 그래서 사랑이 아닌 미움과 다툼이 일어나게 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언제나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증거하는 그 기능으로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2,17 오후 5시 20분에 마침.

                                                                   사건이 터지니, 없던 열심도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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