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40강 육과 영

피/피 2012. 8. 29. 10:06

피40강 육과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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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10131피p138육과영

피40강 육과 영
 
[11 대구강의 2] - [피 40] - 육과 영
                                                                                
                                                   11,01,3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육(肉)에서 영(靈)으로 !!

오늘은 교재 138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2)육에서 영으로 - 낙뢰는 나의 허락 없이 일어난다. 인간의 마음 껍질 안이 어떤 식으로 내장 공사가 되었든지 상관없이 영적 낙뢰에 다 뚫리게 된다. 이것은 부딪침이다.

◈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 !!

여기 교재의 소제목이 '육에서 영으로' 라고 되어있는데, 그 의미를 알려고 하면 먼저 육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육에서 영으로 옮겼다고 하는 의미도 알게 되는데, 그런데 육을 모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는 육에서 영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막상 누군가가 "육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나는 영으로 옮겼어" 라고 우긴다고 해서 옮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에 보면 육에서 영으로 옮겨진 대표적인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사도바울이라는 말이다. 그는 분명히 육에서 영으로 옮긴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렇다고 하면 그가 이야기하는 육의 세계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는 비종교적이고 세속적인 행동을 두고서 육이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는 그 누구보다도 여호와를 잘 섬겼는데, 바로 그러한 자체를 두고서 육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잘 섬겼던 자기 자신을 말이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사도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여호와로 성경을 해석해왔는데, 그런데 이것이 어디를 가는고 하니, 그만 십자가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옛날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 십자가 사건만이 '영', 그 나머지는 '육' !!
 
그러니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라고 하는, 그 십자가 사건이 과거에 예수님께서 강도 두 명 사이에서 죽은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건으로서 보고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십자가 사건 안에 들어와서, 그 십자가 사건만을 '영' 이라고 하고, 그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육'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 육에서는 '죄'가 나오고, 반면에 영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온다고 했는데, 그러면 이런 십자가 사건이 오기 이전에는 사도바울은 죄를 무엇이라고 규정했는지가 중요한데, 즉 사도바울은 무엇을 죄라고 했는지가 말이다. 방금 이야기했듯이, 십자가 안에서 있었던 이 영으로, 즉 의의 세계에서 볼 때, 나머지는 다 죄가 된다는 것이다.

◈ '의(義)' - 오직 예수님만이 일으킬 수 있는 사건들 !!

예를 들어서, "죄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때, 그것은 바로 "의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가 아닌 것은 다 죄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의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건들' 인데, 어떤 사건들인고 하니, 오직 예수님만이 일으킬 수 있는 사건들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일으키지 못하는, 즉 우리가 일으킬 수 없는 사건들이란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사건들이 곧 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는 어떤 사건들이 있는가? 예를 들어서, 우리가 전혀 해낼 수 없는 사건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는 말이다.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다시 설명을 드리면, 우리가 해낼 수 없는 사건들은 의가 되고, 반면에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사건들은 죄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건에는 재림이 있을 수 있는데, 물론 십자가 지심과 부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하심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리고 이삭을 살리기 위해서 수양을 수풀 속에 감추는 것도 누구만이 할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홍해를 가르는 것은 누가 할 수 있는가? 물론 홍해를 건너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는데, 하지만 그 홍해를 가른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여리고 성에 들어가서 그들을 함락시킨 것은 여호수아 장군과 그 밑에 있는 이스라엘이지만, 그러나 여리고 성 자체를 함락시킨 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다.

◈ 우리를 죽이시는 작업,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 !!

사도바울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방금 창조함을 하나님의 의라고 했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우리가 죽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신다는 것이다. 물론 죽는 우리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시는 그 작업이 곧 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당했다는 것은, 그것이 스데반 집사의 개인적인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해서 설교를 했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사도바울 이전의 사울에게 조치해서 스데반을 죽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사도바울이 말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말이다.

물론 대표적인 것이 재림, 부활, 십자가, 그리고 창조와 같은 것인데, 오직 그런 것만이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 하는 것을, 사도바울은 그것을 어디에서 알게 되었는가? 육에서 영으로 넘어오면서, 즉 십자가 사건 안으로 들어오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사도바울은 이렇게 십자가로 오기 이전의 전부를 다 무엇으로 보았는고 하니까, 그것을 육으로 보았고, 그 육은 죄가 다스리고 있는, 죄가 가두고 발산되고 있는 공간으로, 즉 장소가 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인데, 즉 의가 아닌 것이 곧 죄가 된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십자가 이전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러면 십자가 이전에는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자기가 행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의가 나오고, 또한 죄가 나온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안에 들어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엄청나게 오해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 철학과 초등학문은 육의 산물 !!

그래서 골로새서 2장에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러한 육에서 나온 것을 초등학문, 혹은 다른 말로 '철학' 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여러 가지 철학들이 많이 있었는데, 즉 스토아 학파나 에피큐로스 학파 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골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런데 사도바울이 십자가 안에 들어오고 난 다음에 보니, 그런 철학들이 무엇을 의미한다는 말인가? 바로 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에 속한 사람은 죄도 알고, 의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즉 철학과 같은 것을 다 죄라는 관점에서, 즉 "그것이 왜 죄인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런 죄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면, 영에 대해서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즉 자기가 정말이지 육에서 영으로 옮겼는지, 그것이 모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를 하면 !!

지금 교재 138페이지의 '육에서 영으로' 라는 대목을 하고 있는데, 다시 정리를 해보자면, 재림, 부활, 십자가, 창조가 하나님의 의가 되고, 그것이 곧 영의 세계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재림, 부활, 십자가, 창조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홀로 다 하신 것인데, 그러면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누구와 같이 하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일을 다 하셨는데, 물론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성령께서도 여기에 개입하셨고 말이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다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재림, 부활, 십자가, 그리고 창조의 사건을 말이다.

◈ 인간은 그냥 혜택만 입을 뿐 !!

이런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방금 제가 그것을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만이 아시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것을 과연 인간들이 알아낼 수가 있는가? 결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알아내지도 못하면서 그 혜택만 입었는데, 우리가 지금 이렇게 창조의 혜택을 입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혜택을 입으니, 인간들은 육을 가지고 나름대로 이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설명하고자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십자가 안에 들어오기 이전에 생각했던 '종교성' 이라는 말이다. 즉 인간의 육으로 만들어낸 종교성이란 것이다.

◈ 영에 속한 자는, 인간의 종교성을 규명해야 !!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점을 철저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는데, 즉 십자가 안에 들어오기 전의 하나님의 모든 사건이 들어있는 성경말씀을 육으로 풀어내는 모습들이, 그것이 어떤 모습들인지 철저하게 밝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밝힐 수가 있고 말이다. 왜 그것을 밝혀야 하는고 하니, 그렇게 밝힐 때 비로소 자기가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겪어지고 확인이 되기 때문에 말이다.

흔히 "나는 영적이다. 십자가를 안다" 라고 하는 자들이, 그들에게서 나오는 열매들이 과연 모든 것을 예수님의 공로로 돌리는지, 아니면 육에서 나온 것을 마치 영에서 나온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아닌지 검토해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열매가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지기 이전에 생각했던, 그런 성경해석이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죄가 되고 또한 육이 된다는 말이다.

◈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는?

잊어버렸지 싶어서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사도바울이 십자가 안에 들어오기 이전에 성경을 해석할 때 죄와 의의 구분이 어떠했는고 하니, 인간이 할 수 있으면 의가 되고, 인간이 정신을 제대로 차리리 못하면 죄가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신을 제대로 차리리 못한 인간을 무엇으로 바꾸면 의가 되겠는가? 교육을 시키고, 양육하고, 훈계하고, 잔소리를 하고, 윽박지르면, 거기에서 의가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십자가 안에 들어오고 난 뒤에 뭐라고 했는가? '의' 라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 즉 자기와 함께 계시는 그분이 자기의 모든 것을 죄라고 지적하면서 나올 수 있는 열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정과 욕심을 자기 힘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즉 자기가 "이것은 정과 욕심이다" 라고 하면서 회개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즉 그렇게 한다고 열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과 욕심을 어디에 집어넣어야 하는가?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일으키신 사건, 즉 십자가 사건에 못박음으로 말미암아서, 그것은 못박을 내용이(?)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못박게 되는 행위가 우리에게 덮어지게 되면, 그게 성령의 열매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열매가 아니고 말이다. 성령의 열매이니 영적인 열매라고 할 수 있고 말이다.

◈ 나는 십자가를 믿습니다 ??

지금 이 이야기가 상당히 복잡하게 여겨지는데,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 개입되니까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십자가가 덮쳤다" 라는 입장에서 보게 되니, 상당히 복잡하게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흔히들 교회에서는 어떠한가? 십자가가 덮친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자기가 그만 믿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믿게 되면, 이 십자가는 자기가 여전히 해낼 수 있는 행위 가운데 하나로 포함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즉 "나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니 "믿는다, 믿는다, 믿는다" 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은 어떠한가?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만나기 이전의 사고방식, 즉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육이고, 또 할 수 있는 것이 의인데, 그런데 왜 그것을 하지 않을까?" 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 잠시, 이근호 철학 교수님을 모시고 !!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적인 것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많이 있는데, 그래서 그 당시 철학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당시 철학이 어떠했기에 그것을 초등학문이라고 하고, 그것이 죄이며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없다고 규정을 했는지, 지금부터 그 당시 철학과 현대의 철학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도바울 이전에 이미 유명했던 철학자인데, 그의 철학이 그 당시의 스토아 철학 등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철학의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행복' 이란 말이다. 즉 "인간은 행복하면 '짱'이다" 라는 것이다. 참으로 육적이고, 또한 솔직하기까지도 한데, 즉 누가 뭐라고 해도 행복하면 그것이 최고이고, 바로 그런 행복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개나 고양이나 돼지를 봐라. 그것들이 왜 오뉴월에 자빠져서 자는가? 그것이 행복하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물어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짐승도 행복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는데, 우리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나와도 결국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제 아무리 은밀하게 감추고 있어도, 그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행복이 곧 최고선 !!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행복을 어떻게 보았는고 하니까, '합산(合算)'으로 보았는데, 쉽게 말해서 '더하기' 라는 말이다. 무엇을 더하는고 하니, 경건함과 육체의 건강, 또한 예의바름과 욕심을 부리지 않는 절제, 그리고 균형과 감각 등을 합산을 하게 되면, 그것이 곧 행복이 되는데, 즉 '최고선(最高善)' 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합산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이 세상을 제대로 관찰하면 다 나올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어떤 가정의 경우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3개인 사람도 있고, 또한 4개인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합쳐서 보면 말이다.

학교에 가면 보통 각 반마다 '급훈'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서너 개씩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저 몸은 건강해야 되고, 또한 성격은 온화해야 되고 말이다. 물론 부모에게는 효도해야되고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것들이 합쳐져서 행복이 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 칸트 - 거기서 '감정'을 빼야지 !!

이러한 흐름은 중세신학에 들어와도 변하지 않는데, 즉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의해서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언제 이것이 "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라고 하게 되는고 하니까, 드디어 '칸트' 라는 철학자에 의해서 깨어진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 합산에서 더하기가 아닌 그만 빼기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을 빼는고 하니, 정념적인 것을, 쉽게 말해서 감정적인 것을 뺀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감정적인 것을 말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사람이 너무 행복해서도 안 된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너무 행복하게 되면 사람이 오버하게 되니 말이다. 사람과 사회를 세세하게 관찰하게 되면, 이러한 것은 굳이 공부를 많이 하지 않더라도, 즉 오래 살아다보면 느끼는 것들이 다 있다는 것이다.

◈ Too much is as bad as too little !!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中庸)' 이라고 했고, 이것은 또한 공자의 사상인데, 즉 동서양이 똑같다는 것이다. 논어(論語) '선진편'에 보면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라고, 즉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라는 의미인데, 공자의 주장이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사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중용과 같은 삶의 지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이큐가 아주 낮은 저능아가 아닌 어느 정도의 평균적인 상식만 있다고 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인데, 바로 그렇게 누구든지 다 알 수가 있는 행복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 대해서 어느 누구라도 감히 시비를 걸고 수정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수정은커녕 새로운 것을 하나라도 더 보태려고 했으면 했지 말이다. 그러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고 하는 것도 다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 칸트 - 그게 과연 최고선, 즉 '진리' 인가?

바로 여기서 칸트의 천재성이 발휘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거기서 감정적인 요소를 다 뺀다는 말이다. 그렇게 빼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칸트는 뭐라고 하는가? 행복이 최고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합산을 하면 우리 인간이 행복한 것은 인정하겠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동물이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칸트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고선은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최고선은 무엇인고 하니,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곧 '진리' 라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니 칸트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그 최고선이 곧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진리는 무엇인가? 진리는 경험 밖에서 나오면 안 되는데, 진리는 언제나 경험에서 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곧 과학적 인식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모든 감정을 다 빼버린다면, 즉 행복하고 싶어하는 감정을 모두 다 말이다. 왜냐하면, 행복이 곧 최고선이 아니니 말이다. 그렇게 모든 감정을 다 빼버리면 도대체 남는 것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 결국, '선한 의지'만 남는데, 이유는 몰라 !!

그것은 바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양심적으로 옳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선한 의지, 바로 그런 선한 의지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남은 선한 의지가 무엇을 추구하는고 하니, 여기에 대해서 칸트는 그것은 모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비록 자기가 힘이 들어도, 무조건 선해야 되고 착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누군가가 우리의 양심에게 명령하는 자가 있다는 것인데, 즉 그분이 "너는 무조건 살인하지 말라" 라고 명령을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즉 'MUST' 라고 말이다.

그렇게 "나쁜 짓을 하지 말라" 라고 하는, 그러한 명령은 어떠한가? 천하에 악한 강도라고 할지라도 역시 마찬가지로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비록 자기 부모를 죽인 놈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마치 영화 '공공의 적'에 나오는 그 악한 놈처럼 말이다.

비록 그런 놈이라고 해도, 그 속에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 한 가지 남아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 동물이 아닌 이상에는 "인간은 무조건 선해야 한다" 라는 것, 바로 그것만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바로 그것을 두고 '최고선' 이라고 했는데, 물론 그러면서도 그는 그 최고선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칸트의 최고선도 '육' 이라면 !!

그런데 사도바울의 주장처럼, 이러한 것마저도 모든 것이 다 '육' 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평소에 교회에서 들었던 영과 육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칸트의 아주 고상하고 훌륭한 선한 의지마저도 사도바울이 보기에는 육이라고 한다면, 즉 그것마저도 죄가 된다고 한다면, 무조건 선해야만 되고 착해야만 된다는 것마저도 죄가 된다고 하면, 그렇다면 진짜 의는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칸트가 그런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 우리는 "그래, 너무 행복하면 안 돼. 우리는 진리를 추구해야 돼" 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만큼은 하나님의 의일 것이다" 라고 하면서 안심을 놓고 있었던 이 모든 것이 철학으로서 규명이 되어버리니,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알기 이전에 알았던 자기의 본성과 일치가 된다는 말이다.

◈ 종교 - 나를 무시하지 마 !!

종교라는 것, 즉 사람들이 교회에 나온다는 것, 바로 그러한 의도, 즉 진리를 추구하게 되면, 그렇게 진리를 추구한다는 그 끈 뒤에는 도대체 누가 있는가? 바로 자기 자신이 버티고 있는데, 그렇게 자기 자신이 열심을 다해서 진리를 추구하니,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시하지 마!" 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무엇인가? 누가 누구를 무시했는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무시한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저주하고 버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버림을 당했는가? 그분은 죄가 없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버림을 당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버림을 당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버림을 당하면 무엇이라고 하는가? "나를 무시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나는 최고선을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지옥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아 !!

어제 오후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악마가 그렇게 우리 인간을 호락호락하게 내어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제 아무리 도를 닦고 몸부림을 쳐도, 절대로 지옥은 우리가 빠져 나오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가 찾아온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십자가라는 최고선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그 뒤에 무엇이 남아있는가? "나를 무시하지 마!" 라는 것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즉 그런 십자가를 추구하는 '나'를 무시하면 깨물어버리겠다는 것이다. (???)

그러니 사람들이 교회에 왜 모이는가? 자기도 하나님을 추구하니 각자를 다 무시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끼리 모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모두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현철의 말이 맞는데,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다는 것이다(ㅋㅋ). 즉 손만 대면 터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건이 곧 '의' 인데, 그런데 의의 사건 중에서 무엇이 포함되어있는고 하니, 죄인도 있고, 또 십자가 사건도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은 도대체 누구를 손댄 것인가? 주님께서는 "나를 무시하지 마!" 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손댄 이유가 무엇인가?

대전강의에서도 그런 말을 했지만, 주님은 우리를 보고 손댄 것이 아닌데, 그것을 사도바울이 알았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악마를 보고 그렇게 했는데, 그런데 우리는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서, "나를 무시하지 마!" 라고 하면서 나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제발 좀 비켜라. 지금 내가 너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너를 꼼짝도 못하게 하는 악마와 싸우려고 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너무나 과격한 하나님의 나라 !!

그게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데, 가재도구는 누구에게 소속이 되어있는가? 당연히 집주인에게 소속되어있는데, 그래서 다른 사람이 와서 냉장고를 보고 "야, 같이 나가자" 라고 하면, 그 냉장고가 뭐라고 하겠는가? "저는 여기 집주인에게 소속이 되어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가만히 있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누군가가 이끌어줄 때만 집밖으로 나올 수가 있는데, 그것을 두고 여섯 글자로 '하나님의 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곧 하나님의 나라인데, 즉 하나님의 나라는 존재하고 있는 나라가 아니고, 지금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것도 과격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런 활동성으로 현재 이 지상에서 보여주고 말이다. 제가 어제 그것을 "나는 너를 안다" 라고 했는데 말이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그러니 교회는 앉아서 도를 닦는 곳이 아닌데, 우리가 아무리 도를 닦아도 칸트만큼이나 하겠는가? 천재적인 칸트가 기껏 생각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모든 인간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악을 버리고 선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는데,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 사다이즘과 매조키즘 !!

그런데 칸트가 이런 주장을 하고 난 다음에, 약 6년(8년?) 뒤인 1795년에 '규방철학(閨房哲學)' 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누가 썼는고 하니, '사드(Sade)' 라는 작가라는 것이다. 그의 이름에도 나타나듯이 그가 '사다이즘(사디즘, sadism?)'의 원조인데, 아마 권사님은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지 싶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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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방철학(閨房哲學) - 1795년에 프랑스에서 익명으로 출판된 사드의 작품. '사디즘' 이란 용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는데, 물론 가학적인 성묘사로 인해서 그에 대한 평가는 논란이 일지만, 자크라캉은 평가하기를,  "여기서 사드는 전복을 시작하는 지점이며 칸트는 그 전환점이다. '규방철학'은 '실천이성비판'보다 8년 뒤에 나온다. 이 책은 '실천이성비판'의 진리를 제공한다" 라고 했다. - 녹취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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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대말이 '매조키즘(Mazochism)' 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 많이 나타나는 현상들인데, 즉 교인들이 부흥사나 목사에게 얻어맞으면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더 때려주세요. 더 때려주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11장에도 나오는데, 즉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한다" 라고 말이다. 한국교회는 뭐라고 하는가? 뺨을 얻어맞더라도 주의 종에게 얻어맞는 것은 은혜가 된다고 하는데, 즉 카리스마에 의해서 굴복을 당할 때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고후 11: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그 반대말이 '사다이즘' 이라는 것인데, 즉 때리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인데, 마치 박정희나 전두환의 역할을 하는 것인데, 마구 때린다는 것이다. 옛날에 부부는 어떻게 살았는가? 남편은 때리는 즐거움, 또한 아내는 얻어맞는 즐거움인데, 그래서 여자들이 그렇게 맞으면서도 어떤 쾌감을 느끼는고 하니, 남편이 자기를 때리니 남편은 당연히 악마이고, 자기는 졸지에 천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즐거움이 있는데, 즉 얻어맞을수록 천사가 된다는 것이다.

◈ 칸트 - 고통 없이는 최고선은 주어지지 않아 !!

그래서 칸트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뭔가 알 수 없는 최고의 선은 행복과 다르기 때문에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최고선으로 갈 때는 무엇이 주어지는고 하니, 반드시 '고통'이 주어진다고 했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칸트의 천재성인데 말이다.

이렇게 고통이 주어진다고 하니, 로마서 5장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에서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고난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것이다.

칸트는 요즘 말로 하면 그야말로 신학박사인데, 즉 그는 성경의 내용을 훤히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문화가 그러했는데, 즉 어떤 것을 하려고 하면 성경을 모르면 전혀 안 되는 시대였으니 말이다. 특히 칸트의 경우처럼 철학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성경내용을 모두 다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칸트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최고선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무엇을 스스로 포기해야 하는지 아는가? 행복을 포기하면 비로소 최고선이 보인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모든 민족에게 흐르고 있는 전설, 즉 창조설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심청전, 춘향전 등등, 이러한 것이 무엇인가? 마녀의 성(?), 즉 역경과 고난을 이긴 자에게, 혹은 눈물 묻은 빵은 먹지 아니하면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상식선에서 알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을, 철학에서는 이렇게 아주 철저히 체계를 갖추어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방금 이야기한 로마서 5장을 다시 살펴보면, 1절 말씀부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은?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전혀 이 세상의 소망이 아닌데, 즉 하늘나라 자체를 두고서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육적으로 해석해보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하늘나라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되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도바울이 십자가 사건을 만나기 이전에 자기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그리고 왜 그것을 육이라고 하는지,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잘 들어야 하는데, 즉 "지금의 나보다 더 나를 향상시키고, 개조를 시키고, 자기를 더 우수하고 가치가 있는 존재로 탈바꿈을 하기 위해서, 나는 나에게 어떤 행동을 투자할 수 있느냐고 하는, 바로 거기에 대한 연구", 바로 그것이 죄이고 육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무서운 이야기냐는 말이다.

◈ 내가 받는 고난이 곧 십자가 ??

그러니 이것은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따로 뽑아내는 것인데, 그래서 십자가는 이제 가져다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고난만을 남기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에게 고난을 가하는 그 모든 것들은 무엇이 되는가? 그러한 고난이 곧 자기가 구원받는 십자가가 된다고 하는, 바로 그런 해석으로 돌변해버린다는 것이다.

지금 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목사에게 지금까지 배워왔던 모든 것이, 바로 이런 철학적인 해석의 아류였다는 것이다. 철학이나 그 모든 것이 무엇인지 몰랐는고 하니, 육적인 줄 몰랐다는 것이다. 오히려 영적인 것으로 이해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들어보면 '뽕' 간다는 것이다. 자기가 평소에 궁금해서 여겼던 것을 다 이야기해주니 말이다. 

◈ 그러나, 진짜 십자가를 알게 되면 !!

하지만 제가 분명하게 말씀을 드리지만, 십자가를 알게 되면 죄와 의에 대한 규명자체가 달라지는데, 즉 이제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두고 죄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과거에 옳다고 여겼던 그것마저도 죄가 된다고 하는, 그런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탈퇴시키려고, 즉 자기가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했던 그 모든 것이 무엇이 된다는 말인가? 그게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이다. 즉 "제가 이것을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목사가 되면 구원을 받습니까? 설교를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복음을 전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죄라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가 복음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인데,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목사짓 자체가 죄임을 수용하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런 사람은 앞으로 목사짓에 의미를 두지 않는데, 왜 그런가? 그것이 죄임을 아니까 말이다. 장로, 집사, 권사 등등, 그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여기서 왜 '사드' 이야기를 하는가?

여기에서 제가 '사드'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었는고 하니까, 우리 인간이 최고선을 추구할 때는 고통이 있는데, 바로 그 고통을 사드는 쾌락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은근히 고통을 즐기는 모습, 그것이 곧 숨겨져 있던 것으로서, 그것이 곧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 때문에 쓰레기통에 가져다가 버린 것이란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행복을 추구하다보니 나중에는 허전하게 되는데, 그래서 이제는 무엇을 뒤적거리는가?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다시 끄집어내어서, 그러면 당연히 역겹고 구역질나는데, 그런 구역질이 나는데서 오는 새로운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도 새롭다고 하면서 말이다. 즉 스스로 괴로움과 어려움과 희생과 봉사를 하는데서 오는 괴로움이란 새로운 즐거움, 바로 그것을 탐닉한다는 것이다.

◈ 오, 나를 때려다오 !!

그래서 사드의 규방철학을 보게 되면, "나를 때려다오" 라고 하는데, 특히 연약한 여인에게 얻어맞음으로 말미암아서 쾌감을 느끼게 되는데, 즉 "그동안 내가 남자로서 살아오면서 도저히 찾지 못했던 엄청난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강함이 아닌, 연약한 여자에게 얻어맞음으로서 말이다.

◈ 중요한 것은, '누가 명령하는가?'

그러니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진리가 어디 있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누가 명령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면 누가 명령을 한다는 말인가? 이전에는 "이성적으로 살아야해" 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명령을 했는데, 또한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악마가 명령해서 그렇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이제 이런 새로운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면, 그 악마가 자기의 적이 아니라, 곧 자기 자신이 바로 악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악마가 등장할 때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진짜 악마는 숨겨놓고서, 그것이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나오는데, 즉 악마는 반드시 나타날 때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양의 탈을 뒤집어쓰고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런 마스크를 쓰고 말이다.

(고후 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

그런데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은 그것을 완전히 뒤바꿔버리는데, 즉 자기는 천사와 같은 마스크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무엇이 있다고 했는가? 자기에게는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두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무슨 뜻인가? 자기 스스로 어떻게 도저히 정리정돈이 되지 않는, 그래서 자기도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즉 "악이 나로 하여금 나의 모든 선함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안에서 나오는 성도의 모습인데, 성도라고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탄식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은 '나' 라고 하면, 당연히 자기는 하늘의 법을 따라야 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해서 자기는 악의 법을 따르고 있느냐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떤 해답을 구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렇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고백하기를 "나를 구원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라는 것을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언뜻 들으면 구원을 받기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것이 아니라 해답을 쥐고 있는 상태에서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양쪽을 다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은 경계선에 있기에 !!

그것을 어제 오후시간에 설교하면서 "사도바울은 경계선에 있다" 라고 했는데, 그는 경계선에 있다는 말이다. 어제 그 설교가 상당히 어려웠는데, 그게 무슨 뜻인고 하니까, 우리는 자기가 땡기는 사람만 사랑하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랑을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왕이면 다홍치마인데, 얼굴도 더 예뻤으면 하고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이미 해답을 쥐고서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마음놓고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경계선에서 양쪽을 다 보여주는데, 결국 십자가 안에 서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취소하게 되면 십자가 시절은 잊어야 하는데 말이다.

◈ 비로소 알게 된 죄, 비로소 알게 된 의 !!

그러니 그게 아니라, 십자가 안은 계속해서 십자가 안이기 때문에,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도록 했는지, 그 이유가 항상 남아있고, 또한 남아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십자가 안에서 그것이 십자가의 은혜로서 해소가 되었음을, 그렇게 양쪽을 다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예수님뿐만이 아니라 성도도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양쪽을 모두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로소 알게 된 죄, 비로소 알게 된 의,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서 로마서 4장을 살펴보겠는데, 24절과 25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롬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

이게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인데, 여기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즉 "예수는 (     )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라는 것에서, (   )속에 들어갈 말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범죄함' 인데, 그렇다면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사도바울은 이 범죄함에 대해서 침묵을 하는가? 아니면 까발리고 있는가? 즉 무엇이 범죄함인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다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다 잊어버리자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의 범죄함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범죄함을, 그것이 부끄럽다고 숨긴다든지, 혹은 없다고 여기고 넘어가자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철학이나 초등학문을 제대로 밝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육이 되니 말이다. 즉 범죄함이 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종교의 이름으로, 신학의 이름으로, 그런 이름으로 나온 철학들이 있는데, 즉 "어떻게 우리의 행동으로 한번 해보자" 라고 하는 모든 시도들이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

그리고 그 다음에 보면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또한 (        )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라고 한다면, 도대체 그 (    ) 안에는 무엇이 들어가야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의롭다 하심' 인데, 그러면 우리는 이미 의롭게 되었는가? 아니면 의롭게 되고 있는 중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제 의롭게 되려고 시작하고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이미 종결된 상태라는 것이다. 요즘 그런 것을 두고 '종결자' 라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이미 그렇게 종결된 상태인데, 여기서 사도바울은 자기의 그러한 종결된 상태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종결된 상태임을 말해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전혀 우리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님을 말이다.

그런데도 자기가 잘나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직도 십자가 이전에. 즉 육의 상태에서 알았던 죄와 의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죄와 의에 대한 개념을 말이다.

◈ 인간은, 악마가 없으면 못살아 !!

지금 설명하려고 하니 참으로 힘드는데, 물론 이게 말로 설명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도대체 누가 명령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이미지화가 된 악한 육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은 악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악마가 명령을 해주고, 자기는 그 악마에 대해서 악마라고 규정을 함으로서 자기가 의인이 되고자 하는 것, 그것이 곧 육적인 시절에 항상 하던 버릇이었는데, 즉 철학이란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라는 것인데(ㅋㅋ), 즉 사람들이 악마를 만들어서 "왜 악마지?" 라고 하면서 치는데서 오는 재미로서, 즉 "나는 악마를 악마라고 규정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고도 선한 의지를 가졌다" 라고, 그렇게 자기 도취에 빠지는 재미로 사는 것이 곧 육적인 인간들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십자가 바깥에 있는 말이다.

◈ 한국교회를 개혁해야 ??

흔히들 "한국교회는 개혁을 해야한다" 라고 하는데, 왜 개혁을 해야하는가? 즐겁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가 개혁되어야만 함을 안다" 라는 것이 말이다. 그리고 "나를 무시하지 말라"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 주인이 악마이기 때문에,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악마인 나를 무시하지 말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또 달리 이야기하면, 이 세상에서 육의 최고정점에서는 누가 주인노릇을 한다는 말인가? 곧 악마가 주인노릇을 하는데, 거기에 우리가 악마의 쫄병으로 합세하면서 마음껏 의롭게 선한 의지를 밝히면서,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고자, 즉 이 세상을 보다 더 살기 좋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그렇게 지금도 인류의 문명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곧 악마의 세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과학이 발전하고, 또한 문명이 발전하는 그 모든 것이 악마의 세계이니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개혁주의 신학이고 말이다. 범인류적으로 그렇게 표현할 수가 있는데, 그 범위를 좁혀보면, "우리 가정은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 라고 하는 것, 그리고 교회로 좁혀보면 "우리 교회는 이전보다 더 훌륭해졌다" 라고 하는, 그렇게 시간적인 요소가 개입이 된다는 것이다.

◈ 목사님, 70이레가 무엇입니까?

김성환 목사님의 글에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는데, 즉 "십자가에 시간이 있다?" 라고 말이다. 십자가마을에 있는 성도의 칼럼을 읽어보면 되는데, 즉 김성환 목사가 말하기를 "도대체 십자가에 무슨 시간이 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것을 좀 설명을 해보겠는데, 아까 장로님이 질문한 것과도 유사한데, "70이레가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다. 그렇게 단독 직입적으로 질문을 하는데, 물론 궁금하면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70이레' 라는 것에는 3가지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먼저 첫째 "성전을 지어라", 둘째 "성전이 부수어진다", 그리고 셋째로 "새로운 성전이 만들어지면 영원히 속죄된다" 라는 것인데, 그게 곧 3가지 사건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 '70이레' 라고 하는 것은 다니엘 시대의 사건으로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은 그 어느 시대이든 간에, 즉 2010년이 되던 2020년이 되던 말이다. 언제나 이 사건이 발생되면, 그 어느 시대라도 70이레가 된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70이레에 복속이 되고 또한 포함이 되는데, 그것이 70이레의 취지라는 말이다.

하지만 기존 신학자들은 이 70이레를 시간적으로 지나간 하나의 사건으로만 국한을 시켜서 보는데, 그런 식으로 보게 되면 지금은 70이레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성경을 묵시적으로 해석을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만 역사적으로 해석하니 그런 오류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과연 십자가에 시간이 있는가?

그래서 김성환 목사님은 십자가에 무슨 시간이 있느냐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요즘은 이렇게 인터넷이 있는데, 물론 인터넷 전화도 있고 말이다. 요즘 외국에 계시는 어떤 분이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하는데, 물론 낮에는 집에 없으니 전화를 할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공간적으로 어디에 있는가? 공간적으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하지만 그것이 의미가 있는가? 즉 공간이란 것이 왜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공간적으로 멀어지면 왜 섭섭한가? 이야기를 자주 못하니 그러한데, 하지만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자주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공간적 갭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공간적 한계가 깨어진다는 것인데, 인터넷 속에서는 말이다.

그러면 시간은 어떠한가? 어제 있었던 시간의 사건이 지금도 일어난다고 하면, 즉 인터넷상에서 같은 종류의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시간의 경우에, 흘러간 사건이 따로 있어야 하고, 또한 미래의 사건이 따로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미래가 되어봐야 과거의 사건이 계속 반복이 된다고 하면, 그렇게 되면 시간적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인터넷상에서 말이다.

◈ 주체의 함몰 !!

결국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주체의 함몰'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주체가 무너져 내려앉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라는 것은 없고, 그냥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정보에 묻혀서 살아가는데, 그것이 곧 현대사회의 특징이란 말이다.

그러니 "왜 사는지? 내가 누구인지?" 라는 것은 전혀 묻지도 않는데, 왜냐하면 주체가 함몰되었으니 자기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 즉 "내 속에 있는 악마는 무슨 새로운 쇼핑을 원하는가?" 라는 것이다. 실제로 인터넷 쇼핑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 내 속에 있는 악마는 무슨 새로운 쇼핑을 원하는가?

그것을 '주이상스(Jouissance)' 라고 하는데, 즉 욕구, 혹은 쾌락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무슨 상품을 쇼핑해서 구입하면 쾌락을 얻겠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까 상품을 사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고 하니, "그래도 옆집에서는 인터넷 쇼핑을 해서 10개를 샀는데, 나는 2개만 샀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옆집은 나쁜 놈이고, 자기는 착한 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칸트가 말하는 인간의 모든 선한 의지는 어디에 조정을 받는가? "무엇이 즐거운가?" 라고 하는, 즉 "나를 즐겁게 하라" 라는 것이란 말이다. 주체가 함몰된 상황에서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나를 즐겁게 하라" 라는 명령만 남게 되는데, 그러한 명령을 모든 점에서 균등하게 하는 것을 두고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4글자로 그 유명한 '민주주의'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바탕 가운데서 !!

그런데 이 민주주의는 그 바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도 역시 4글자로 '자본주의' 인데, 그러한 자본주의가 바탕이 된 가운데서 '너'의 즐거움과 '나'의 즐거움이 돈을 주고 서로 교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는고 하니, '너'의 즐거움과 '나'의 즐거움이 서로 교환이 가능한, 즉 균등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됩니까? 예를 들어서, "니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면, 내가 너에게 옷을 줄게" 라는 것이다. 그렇게 가치가 균등해진다는 것은 화폐라는 숫자로 교환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어느 국무총리가 가지고 있던 유명한 그림 값이 9천 만원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값을 누가 결정한 것인가? 그림 밑에 9천 만원이라고 가격이 붙어 있는가?

그런 것은 없는데, 하지만 그 그림의 그런 가치가 있다는 것은 어디서 하는 것인가? 그것은 9천 만의 돈과 그림을 서로 바꾸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 9천 만원과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최고급 자동차를 살 수가 있는데, 그러면 결국 자동차를 만드는 그 사람의 기술과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솜씨가 서로 같은 성질로 교환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가능하지 않다는 말인가?

물론 가능하다는 것이다. 왜 가능한고 하니까, 9천 만원 짜리 자동차의 쾌락과 9천 만원 짜리 그림이 주는 쾌락이 같은 것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인간은 마귀가 물려준 같은 쾌락 속에서 같이 헤엄치고 있고 놀고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풀장에서 말이다.

◈ 5만원 짜리 예수, 10만원 짜리 예수 !!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인가? "얼마를 주면 예수를 믿을 수 있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인데, 교회에 나온 노인네들에게 차비를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즉 예수님이 5만원 짜리라고 하면 5만원을 줄 것이고, 10만원 짜리라고 하면 10만원을 준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수입이 허용되면 예수를 버릴 용의가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예수는 그 정도의 돈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말이다. 즉 예수는 이제 용도폐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마저도 자본주의의 돌고 도는 교환 속에 그만 들어와 버리는데, 하나님마저도 모두 다 그렇게 동원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돌리는 자가 누구이냐는 것이다. 그렇게 명령하는 자가 말이다. 즉 "쾌락을 위하여 살아라" 라고, 그렇게 명령하는 자가 곧 악마인데, 보이지 않는 자가 말이다. 악마가 그렇게 자본주의를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돈보다 명예를 구하라" 라는 것은 자본주의에서는 소용이 없는데, 왜냐하면 돈을 버렸다고 해서 명예가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명예도 결국 무엇으로 환산이 되는가? "니 이름을 팔아줄게. 돈을 내놔" 라고 하는, 그렇게 돈으로 환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 세상에서 누가 구원을?

이러한 곳에서 도대체 누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가? 구원이 아니라는 것인데, 즐거운데 왜 구원을 받고 말고 하느냐는 것이다. 굳이 구원될 이유가 없는데, 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지금 돌아다닌다고 재미가 넘쳐나고 참 좋은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돈이 좀 생기면 교회에 가서 구원을 받고, 그러니 이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다. 즉 교회에 갔다가,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또 다시 교회에 갔다가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회전목마에서 굳이 왜 내리느냐는 것이다.

물론 내릴 수도 없지만, 설령 내린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되는가? 즉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고 해봐야, 그것도 역시 하나의 쾌락이라는 것이다. 어떤 쾌락인가? "감히 너희들이 추구하지 못하는 최고선을 얻기 위해서 나는 이 정도의 고통을 감수한다" 라는, 즉 그렇게 고통을 감수하는데서 오는 즐거움인데, 바로 그런 모든 것이 다 육이고, 죄가 된다는 것이다.

◈ 우리가 감사해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니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십자가 안에서 볼 때, 오직 우리가 감사해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안 되는데, 즉 우리는 회전목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7살 때부터 유치원에 가야만 되고, 아니 4살 때부터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등등, 그렇게 계속해서 돌리게 되면 그야말로 정신없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물레를 돌리듯이 돌리면 말이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면 회사에 취직해서 승진을 해야하는데, 물론 그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무조건 승진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타인의 욕망의 자기로 하여금 새로운 인간으로 정립을 시키니까, 즉 남들이 없으면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남들의 뒤꽁무니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아니 넒은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좁은 길로 가느냐는 말이다. 미치지 않은 이상 말이다. 그러니 이런 자본주의에서 넓은 길로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돌고 도는 세상에서 "나는 죽으면 그만이다" 라고 할지 몰라도, 하지만 죽어서도 걱정이라는 것이다. 어느 화장터에 갈지 말이다. 그런 것을 죽는 놈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 모든 말씀은, 우리 속에 있는 마귀를 그 대상으로 !!

그래서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사람은 이런 죽음 판에서 도는 것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는 지하 1층이 아니라 지하 2층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그것을 악마는 알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보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은 우리 속에 있는 마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즉 "이제 좀 놔줘라. 내가 왔다. 나는 이 사람의 존재에게 창조의 원리를 발휘해야만 하겠다" 라고 하시는데, 그 창조의 원리가 곧 십자가라는 것이다. 죽은데서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는, 그런 능력을 발휘하신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구원을 받고 난 뒤에 이런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것이 이 모두에 의해서 같이 돌아다니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나타내게 하는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란 말이다.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어제 오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즉 우리는 죄의 종이기 때문에, 그 죄가 받는 저주를 종도 같이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전혀 빠져 나올 수가 없는데, 그런데 간음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시는데, 바로 그것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게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렇게 비로소 진리가 등장하는데, 그러니 그 이전에는 우리에게 진리가 과연 있었는가? 없었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있던, 즉 우리가 추구하던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악마가 조작해낸 유사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했을 때, 그 결과로서 죄의 용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졸지에 의인이 되었다는 말인데, 우리가 전혀 원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의인이 되었는데, 자기의 잘남을 챙기기 위해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예수님의 잘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조금 전에 이야기한 로마서 4장 25절에 나오는데, 즉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이전에는 죄의 종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의의 종인데, 바로 이 의의 종을 두고서 '자유'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육과 영을 나눌 때는, 사도바울의 실존이 아니라 !!

오늘 강의제목이 '육에서 영으로' 라고 되어있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러한 육과 영을 나눌 때는,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의 실존이나 사고방식 등을 분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보는 것이지, 사도바울의 주장을 해명하고 그의 실존의 끄집어내기 위해서 성경을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전혀 재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9살 때 무슨 일을 했는지 우리가 아는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을 재구성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도바울 본인도 그때 그때마다 주님이 다루시기 나름인데, 즉 사도바울에게서 십자가 사건만을 끄집어내면 되는 것이지, 굳이 사도바울의 사건을 끄집어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성도에게서 오직 십자가 사건만 끄집어내면 된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138페이지를 살펴보자.

** (2)육에서 영으로 - 낙뢰는 나의 허락 없이 일어난다. 인간의 마음 껍질 안이 어떤 식으로 내장 공사가 되었든지 상관없이 영적 낙뢰에 다 뚫리게 된다. 이것은 부딪침이다.

◈ 영적 낙뢰 !!

여기에 "낙뢰는 나의 허락 없이 일어난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 말이 맞다는 것이다. 지금 불교에서 무엇을 하는고 하니, 제발 이제는 구제역이 그만 발생하라고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데, 제가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그러면 과연 불교이론에 그런 것이 있느냐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런 것이 있는데, 불교가 우리나라의 무속신앙과 결합이 되어서 말이다. 즉 이 세상에는 죽은 인간과 죽은 짐승의 영혼들이 떠돌아다니는데, 그런 영혼을 달래줌으로서 후대 세대에 일어나는 재앙을 막아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천주교에도 있고, 물론 조금만 더 있으면 기독교에도 도입이 되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을 '결정론'으로 하게 되는데, 즉 나름대로의 예정론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죽은 사람의 귀신과 산 사람의 교류를 통해서 이 세상은 정답게 잘 굴러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인 우리가 안 되면 죽은 귀신에게 부탁하면 된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여러분에게는 허황되게 들리는가요? 하지만 실제로 여러분이 난데없이 어려운 일을 한번 당해보라는 것이다. 방금 제가 말한 것이, 자기가 당한 사건에 대해서 설명이 될 것 같아서 믿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초가 되면 사주팔자와 같은 것을 보는데, 물론 말로는 심심풀이 땅콩으로 본다고들 하지만, 그러나 해명되지 않은 뭔가 미흡한 것은 채워야지 마음에 편안함을, 아까 말한 그런 행복을 얻는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 인간은 절대로 악마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사도바울이 만난 예수님은?

그리고 여기 교재에 보면 '영적 낙뢰' 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난데없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미리 약속한 것인가? 전혀 예고하고 나타난 것이 아닌데, 예수님은 그야말로 갑자기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물론 사도바울은, 아니 사울은 여전히 자기가 가던 길을 그대로 가고 있는데 말이다. 또한 예수님도 예수님대로의 길을 가시는데, 그렇게 하다가 예수님의 가시는 길에 사도바울은 창세 전에 이미 예정이 되었기 때문에, 때가 되어서 그만 포착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창세 전에 예정이 되었다는 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에베소서 1장에 있는데, 즉 창세 전에 이미 택함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아들이 되도록 했는데, 그것은 바로 그저주신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가 창세 전에 구원을 받은 것은, 사도바울이 그 이전부터 알고 있던 사항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언제인가? 영적 낙뢰를 만났을 때, 바로 그때 완전히 '구조판'이 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구조판이 말이다. 즉 틀 자체가 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 '나'보다 넓고 깊은 붕어빵 틀 !!

어제 오전시간에 붕어빵 틀 이야기를 했는데, 돌려가면서 붕어빵을 굽어내는 음각으로 조각된 붕어빵 틀을 말이다. 그 틀에 밀가루를 부으면 붕어빵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틀을 보지 않고 밀가루를 보는데, 즉 밀가루가 자기를 조립해서 그렇게 붕어빵이 되려고 애를 쓴다는 말이다. 성령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그렇게 좋은 것들은 다 갖다 부쳐서 붕어빵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냥 턱턱 찍어내면 되는데 말이다.

하지만 구조가 '나'보다 더 크고 넓고 깊은데, 즉 주님의 사랑이 더욱 넓고 깊고 풍부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기도해야 하는데, 그런 주님의 넓고 깊고 풍부한 사랑을 더욱 더 깨닫기 위해서 말이다. 그 사랑의 충만함을 말이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기도인데, 바로 그런 사랑의 구조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엡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 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물론 우리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의 손이나 손톱일 수도 있는데, 즉 예수님이 짜시는 카페트에 있어서 하나의 날실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모자이크처럼 조각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가 즐겁지 않은가요? 사실은 즐거운 정도가 아니라 이미 끝난 것인데, 즉 우리의 인생문제가 모두 다 해결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성도는, 예수님 앞에서 길게 늘어뜨려진 그림자 !!

마치 삼층천에 올라간 기분인데, 그래서 "아하, 이미 이렇게 끝난 것인데, 그동안 내가 엉뚱한 것에다 신경을 썼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또한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던 것을 성경말씀은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그림자인데, 즉 석양에 길게 늘어뜨린 시커먼 그림자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있다는 말이다. 물론 살아있을 때도 그렇지만, 죽어서도 역시 그리스도의 것임이 중요한데,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는 즐겁다는 말이다.

우리가 죽고 난 뒤에 우리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것을 미리 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르는데, 우리는 죽고 난 뒤에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살아있을 때 조바심을 내면서 안절부절한다는 것이다.

마치 주님의 화장실에서 한 조각의 타일처럼 박혀있는 것이 곧 우리의 모습인데, 바로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발일 수도 있고, 그리고 코일 수도 있고, 그렇게 다양성은 있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목사가 개척교회를 하는데 교인이 없어서 고민이라고 하면, 물론 그렇게 고민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지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구원이지 자기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기가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그것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교인이 몇 명이나 나오는지, 그런 것은 주님이 주신 감사함을 훼손하고 흠집을 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느냐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물이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서, 앞에 아무 것도 없다고 자신 있게 나가려고 하다가 '퍽' 하고 부딪치는 경험을 누구나 하게 된다. 

◈ 퍽, 퍽, 퍽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주님은 주님대로 자신의 길을 가시고, 또 사도바울은 바울대로 자기의 길을 가는데, 그런데 모퉁에서 '퍽' 하고 부딪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사도바울은 맛이 가고 말았는데, 눈도 시력을 잃어버리고 말이다. 그렇게 사도바울이 얻어맞고 나서 하는 말이 무엇인가?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사도바울이 누구에게 말한 것인가? 자기 자신에게 한 것이 아닌데, 그런데 프로이트와 같은 심리학자들은 사도바울이 자기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즉 예수님의 현존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과거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일단 죽여놓고 시작하는데, 그렇게 죽여놓고 시작하면 그것을 두 글자로 '사물'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예수님이 그만 사물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죽여놓고 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죽여놓고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까, 바로 이제부터 자기들이 한번 예수님을 다루어보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횟집에서 주방장이 고기를 무엇을 보는가? 하나의 사물로 본다는 것이다. 즉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고기가 아니라 도마 위의 고기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을 들고 어디에서부터 칠 것인지, 그것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즉 "고기야, 너는 내가 다루는 대로 잘라지는 거야" 라고 한다는 말이다.

◈ 당신은 누구십니까?

인간들은 예수님도 이와 마찬가지로 다루려고 하는데, 즉 "예수님, 어느 부분부터 믿어줄까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인간의 본성이란 말이다. 바로 그렇게 살던 자가 곧 사도바울 이전의 사울, 즉 육이었는데, 그러면 영은 무엇인가? 그만 낙뢰를 얻어맞아서 부딪치면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렇게 부딪침으로 말미암아서, 자기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둠 속에서 자기보다 더 생생하고 월등하게 살아있는 분을 만나게 되는데, 그래서 묻는다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말이다. 사울의 인생은 그렇게 해서 끝나고 말았는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것으로 말이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아, 어디 있느냐?" 라고 묻는 것과도 똑같은데, 즉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그게 곧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오전시간에 설교하면서 "사람만 상대하지 말라" 라고 했는데, 그렇게 사람만을 상대하게 되면 본인만 피곤해진다는 것이다. 사람을 붙들고 닥달을 내고 시비를 걸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만약 이 세상에 이미 누군가가 와서 자리를 잡고 있다면 이런 꼴이 난다. 불교에서는 주역과 같은 동양철학에서는, 이 세상은 인간들끼리 노니는 세상이다. 인간 외는 없다. 귀신이 있더라도 함부로 인간의 영역에 넘어오지 못한다.

◈ 인간 이외는 없어 !!

그러니 사람만 있다는 것인데, 즉 인간 이외는 없다는 말이다. 귀신이 있어도, 그것은 사람이 다루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춤을 춰서 다루고, 그것이 굿이고, 또한 뇌물을 주어서 다루는데, 그게 곧 교회라는 말이다. 십일조를 줘서 보내면 그만인데, 그것이 교회라는 이름의 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도 누가 다룬다는 말인가? 자기가 알아서 다루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우상은 사람이 다루기 나름인데, 왜냐하면 신들은 뇌물을 좋아하니 말이다. 이런 종류의 뇌물보다 더 강도가 센 것이 마야 민족을 보면 나오는데,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인신공양' 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즉 사람의 몸을 바친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제물 중에서도 최고의 제물인데, 특히 처녀의 심장을 도려내어서 바치면 비가 온다든지 하는 말이다. 이런 풍습이 요나서에도 나오는데, 바다에 파도가 치니 누구를 던지려고 하는가? 마치 심청전을 보는 것 같은데, 요나를 그만 던져 넣는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악마의 틀을 버리지 않아 !!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세상에서의 이러한 악마의 틀을 버리지 않는데, 그런 악마의 구조 속에서 새로운 사건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낙타를 타지 않고 무슨 다른 특별한 것을 타고 가다가 만났는가? 주님은 우리 인간들이 그냥 평소에 하는 그대로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낙타를 타든 말을 타든 말이다.

그러니 주님은 이 세상의 더러운 판을 그대로 사용하시는데, 즉 악마의 판을 그대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고, 저주 가운데서 뛰쳐나온다는 말이다. 어디 유행가를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부르는 가운데서도 구원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사건' 이라는 것은, 그 자체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규명하는 것인데, 즉 "이것은 악마에게서 나왔다" 라는 것을 새롭게 규명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찬송가를 부른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인간들이 알아서 애를 쓰고 도를 닦으면, 그 애쓴 만큼 진리는 손에 잡힌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 되시는 분의 존재와 활동을 고려하지 않은 발상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란 그분의 가능성으로만 유지되는 세상이다. 

◈ 이 세상은 가능성(POSSIBILITY) !!

여기에 '가능성'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만 더하고 오늘강의는 마치도록 하겠는데 말이다. 여기서 "세상은 가능성이다" 라고 하는데, 이 말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세상은 확실히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있을 수도 있다" 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확실히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없을 수도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일으켰고, 또한 여리고 성 사건을 일으켰고, 그리고 노아홍수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한 때 있었단다" 라는 것이다.

◈ 하나님은, 이미 심판도 창조하셨기에 !!

물론 불판을 갈아치우는 것은 갈비집 주인이 알아서 하는데, 여자는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불판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누구 손에 있다는 말인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창조 안에 무엇이 들어있다는 것인가? 이미 심판은 들어있는데, 그런데 이렇게 창조 안에 심판이 들어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심판까지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심판에는 무엇이 부여되는가?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게 되는데, 그러니 하나님은 무엇을 창조하셨는가? 천국과 지옥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천국과 지옥은 현재 보이지를 않는데, 물론 심판도 보이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보이지 않는 것이 실존하는 세상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심판 이전의 세상이기 때문에, 그냥 존재하기로 가능하다는 말이다. 즉 '가능성(POSSIBILITY)' 라는 말이다.

◈ 우리 몸을, 창조와 심판의 선반 위에 제물로서 !!

그렇다면 우리 몸은 어디에 속하겠는가? 역시 우리의 몸도 있을 수도 있는 몸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은, 오늘밤에 주님이 우리의 영혼을 데리고 가면 언제든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몸을 어디에 놓아야 하겠는가?

하나의 가능성을 가지고 마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면서 살아가면 안 되고, 즉 우리 몸을 전부인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의 행복과 자랑거리가 전부가 아니기에, 우리는 이 몸을 어느 길다란 선반에 뉘어야 하는가? 창조와 심판의 선반 위에 제물로 갖다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산 제물로 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장로님도 연세가 많은데, 그래서 가능성이 희박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누운 자리가 자기 몸 위에 누운 것이 아니라, 창조와 심판의 선반 위에 누운 것이라고 하면, 반대로 장로님의 몸은 결국은 창조와 마지막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늘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늘어진 것이 취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의 타일 조각으로 말이다.

◈ 성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귀한 존재' !!

우리 몸은 비록 작지만, 곧 소멸되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몸 안에 모든 묵시가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교재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귀한 존재' 라고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우리 교재인 이 '피' 라는 책을 읽어보고는 "야, 너무나 부정적이고 너무 소극적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제대로 읽어보고서 그런 소리를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도를 귀한 존재라고 하는데, 물론 우리가 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성도는 귀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나서 귀한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서 귀한 존재가 되었기에, 이제는 우리 자신의 귀함으로 자랑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그 모든 은혜를 귀하다고 소개하는 예수님의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2,20 오후 11시 20분에 마침.

                        목사님, 사드의 '규방철학'이 제대로 완역이 되었다고 하는데, 읽어봐도 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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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Immanuel Kant) - 1724~1804 독일의 철학자

“사고를 위한 이마는 침착한 유쾌함과 기쁨의 자리였다. 말에는 풍부한 사상이 넘쳐흘렀고 농담과 재치가 장기였다. 알만한 가치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어떠한 음모나 편견 그리고 명성에 대한 욕망도, 진리를 빛나게 하는 것에서 그가 조금이라도 벗어나도록 유혹하지 못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도록 부드럽게 강요했다. 내가 최고의 감사와 존경을 다해 부르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칸트이다.” (칸트의 제자 요한 헤르더의 말)

가정교사, 시간강사,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철학을 연구하다

칸트는 마구(馬具) 장인인 아버지 요한 게오르그 칸트와 경건주의 기독교인 어머니 안나 레기나 도로테아 로이터 사이의 11 자녀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칸트를 포함해 4명이었다. 칸트의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동(東)프러시아로 이주한 사람이어서, 칸트의 아버지는 영어식 발음과 억양이 섞인 독일어를 구사했다. 칸트는 ‘엠마누엘’이란 이름으로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나중에 히브리어를 배운 뒤 스스로 ‘임마누엘’로 바꾸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150킬로미터 이상 벗어난 적이 없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경건주의 기독교가 득세한 곳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비교적 자유로운 도시였다. 칸트는 ‘경건주의자들의 합숙소’라는 별칭이 붙은 콜레기움 프리데리치아눔에 입학하여 라틴어를 비롯한 교양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13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1737) 17살 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해 6년간 공부했다. 일종의 졸업논문으로 힘을 측정할 수 있는 원리를 논하는 [활력의 올바른 측정술에 관한 사상]을 제출했는데, 당시만 해도 과학과 철학은 완전히 분리되어있지 않았다. 부유하지 못한 대부분의 학자들처럼, 칸트는 1747년부터 1754년까지 가정교사로 일했다. 1755년 31살 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논문 [보편적 자연사와 천체이론]을 발표하고 학위논문 [불에 관한 몇 가지 고찰에 관한 간략한 서술], 오늘날의 교수자격논문에 해당하는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원리에 관한 새로운 해명]을 1755년에 썼다. 1756년 공석이 된 논리학, 형이상학 원외 교수직에 응모했지만 임용되지 못했고 1758년에도 실패했다. 원외 교수는 정년을 보장받지 못하고 다른 대학에서도 강의할 수 있는 직위였다. 1764년 프로이센 교육 당국이 칸트에게 문학부 교수직을 제의했지만, 칸트는 자신에게 합당한 자리가 아니라며 거절했다. 오직 철학만이 그의 관심사였고 분야를 달리하면서까지 교수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57살 때부터 철학적 성찰의 결과를 쏟아내기 시작

 칸트는 32살 때인 1756년부터 46살인 1770년까지 사(私)강사로 지냈다. 사강사는 오늘날 대학의 시간 강사와 비슷하지만 대학에서 강사료를 받지 않고 수강생들에게 강의료를 받았다. 사강사 수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칸트는 왕립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수입을 보충했다. 그리고 1770년 46살 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논리학, 형이상학 강좌 담당 정식 교수로 임용됐다. 1781년 57살 때 [순수이성비판]을 내놓았지만 ‘해괴망측한 나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글’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고 내용에 대한 오해도 많이 받았다.

칸트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순수이성비판] 입문서에 해당하는 [형이상학 서설](1783)을 내놓았고, 1784년에는 역사철학 [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1785년 [도덕형이상학 원론], 1786년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내놓았다. 그리고 1788년 [실천이성비판], 1790년 [판단력 비판]을 내놓음으로써 칸트의 이른바 삼대 비판철학서가 완결되었다.

계몽군주로도 유명한 프리드리히 2세 치하에서 프로이센의 종교 정책은 비교적 관용적이었지만, 그 후계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그렇지 않았다. 프로이센 검열 당국은 칸트가 종교철학 논문을 발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칸트는 [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1793)를 내놓았다. 이듬해에도 종교철학 논문인 [만물의 종말]을 내놓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칙령이 내려졌다. 사실상 칸트를 협박하는 내용이었다. 칸트는 앞으로 종교철학 논저를 내놓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판하며 종합해내다

근대 서양 철학의 합리론은 인간의 이성이 태어날 때부터 지식(본유 관념)을 갖고 있으며, 경험의 역할은 이성이 본래부터 갖고 있던 지식을 일깨우는 데 머무른다고 본다. 반면 경험론은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는 것이라 본다. 경험론은 상식에 부합되지만 끝까지 밀고 나가면 보편적 진리를 부정하는 회의주의로 흐르기 쉽다. 같은 것을 놓고서도 나의 경험과 너의 경험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같은 것에 대한 나의 경험이라는 것도 때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를 가리켜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판하고 종합한 철학자라 일컫는 것은, 그가 인식의 형식(또는 능력)은 본래부터 갖고 있지만 인식의 내용(또는 재료)은 경험으로 얻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경험을 재료(내용)로 삼되, 경험과는 상관없이 타고난 인식 능력(형식)을 통해 보편적 진리를 알 수 있다.

인간은 인식에서나 행위에서나 처음부터 끝까지 능동적 존재

칸트에게 인식의 형식 또는 능력이란 시간과 공간(직관형식 또는 감성형식), 그리고 지성의 능동적인 작용에 바탕을 둔 범주(개념형식)다. 시간과 공간은 경험을 통해 인식 대상을 담는 틀이고, 범주는 개념을 통해 지성이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틀이다. 직관은 수동적, 수용적이고 개념은 능동적, 자발적, 구성적이다.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말에서 직관은 쉽게 말해 경험에 해당한다. 요컨대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유는 내용이 없어 공허하고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개념이 없는 경험은 틀과 형식이 없어 맹목적이라는 것.

‘과거의 철학은 인간에게 전혀 올바르지 못한 자리를 부여하여 인간을 세계 또는 외부 사물과 상황에 완전히 의존하는 기계가 되게끔 했다. 과거의 철학은 인간을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이제 이성비판이 등장하여 세계 속의 인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능동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인간은 그 자신이 근원적으로 그의 표상과 개념의 창조자이며, 그의 모든 행위의 창시자여야 한다.’ ([학부 간의 다툼](1798) 중에서)

칸트 철학을 흔히 비판철학이라 일컫는데, 여기에서 비판이란 가능 근거를 따져 묻는 것, 즉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되묻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의 문제의식은 ‘인간은 보편적인 진리를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가?’였다. 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위와 같이 경험을 재료 삼아 인간 지성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능력 또는 형식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식 주체의 능동적, 자발적 능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칸트 철학은 그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감히 스스로 생각하는’(Sapere Aude) 계몽주의적 주체의 철학적 완성이다.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선한 삶을 위해 요청되는 신(神)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문제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 이성에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며,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위와 같이 스스로는 대답할 수 없는 문제를 끈질기게 던진다. 예컨대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질문인 신(神)의 존재, 영혼의 존재에 관한 질문이 있다. 신이나 영혼의 존재 여부는 경험을 통해 알 수 없기 때문에 칸트의 비판철학에 따른다면 학문의 주제나 지식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다. 요컨대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형식의 틀에 들어오지 않는다.

학문과 지식의 영역에서 신과 영혼의 문제를 추방해버린 칸트지만, 앎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희망과 행복의 영역에서 신과 영혼을 부활시킨다. 악한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선한 사람이 고통 속에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도덕적 행위를 통해 최고선의 이념을 추구해야 하는가?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은 선하게 통치하는 신의 존재와 내세의 삶을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신은 선한 삶을 위해 ‘요청되는’ 신이다.

칸트를 위한 조종(弔鐘). ‘지식을 통한 인간 해방을 가르친 스승’

 칸트는 어려서부터 허약체질이었지만 규칙적인 생활과 건강관리로 강의, 연구, 저술 활동을 별 어려움 없이 이어갈 수 있었다. 그가 하루도 어김없이 정해진 시각에 산책에 나섰기 때문에,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의 산책하는 칸트를 보고 시계의 시각을 맞췄다는 얘기, 그런데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읽느라 단 한 번 산책 시간을 어겼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1799년부터 크게 쇠약해진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늙은 하인 람페에게 포도주 한 잔을 청해 마시고 “좋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뒤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 날 쾨니히스베르크 시 전체가 휴무에 들어갔고 운구 행렬에 수천 명이 뒤따랐으며 시내 모든 교회가 같은 시간에 조종(弔鐘)을 울렸다. 철학자 칼 포퍼는 이에 관해 [추측과 반박]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804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절대왕정 치하에서 칸트의 죽음을 애도한 그 많은 교회의 종소리는 미국 혁명(1776)과 프랑스 혁명(1789)의 이념이 남긴 메아리였다. 칸트는 고향 사람들에게 그 이념의 화신이었다. 인간의 권리와 법 앞의 평등, 세계 시민권과 지상의 평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식을 통한 인간 해방을 가르친 스승에게 고향 사람들은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몰려왔다.”

* 글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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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드의 '규방철학(閨房哲學)'

규방철학 - 바리에테 신서 4 D.A.F. 사드 지음, 이충훈 옮김, 2005/08/25 발행

1. 이 책에 대하여

▶사드의 '규방철학' 완역판 출간

사디즘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사드의 '규방철학'은 너무나 유명한 책이지만 그동안 한국에서는 풍문으로만 혹은 부분적으로 누락된 번역서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기왕에 <안방철학>이라는 제목으로 한 차례 한국어로 번역이 된 바 있다. 그러나 그 번역의 단점은 무엇보다 이 책의 한 부분을 생략했다는 점이다. 확실히 당시에 잔혹하고 부도덕한 장면을 그리고 있는 이 책의 결말 부분을 번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히 완역만이 번역의 미덕은 아니지만, 모든 책의 운명이 그러하다. 말하자면 늘 이해되는 만큼 소개되고, 필요한 만큼만 읽히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새로운 번역과 소개가 필요하게 되는 이유이며, ‘비평판’의 형식으로 이 책을 새롭게 출간하게 된 동기였다.

▶전공자의 상세한 주석을 곁들인 본격 비평판

특히 이 책은 현재 프랑스 파리 제4대학 박사과정으로 18세기 프랑스문학 전공자가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이 책이 단순히 기괴한 성담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책으로만 읽히게 되는 것을 넘어 혁명적 분위기가 넘쳐나던 18세기 프랑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 그리고 사드의 이론과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세하고 꼼꼼하게 주석을 곁들여 옮겨 놓고 있다.

▶사드의 이론 혹은 자연 개념에 대하여

사드의 이론은 그라는 존재의 절대적 고독, 완전한 우연성을 ‘유類’(=‘자연’)의 필연성과 연결지으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대의 여러 ‘자연’주의자로부터 사드를 구별 짓는 것은 이 점에서다. 개체에게 ‘유類’는 금지로서 나타난다. 거기에 있는 심연은 단지 침범으로서밖에 넘어설 수 없다. 침범에 의해서만 개체는 ‘유類’를 향해 초월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類’와 분리된 앞서의 개체는 우연성과 고독에 처하게 되어 생기 없이 존재할 수밖에 없? 사드에게 ‘침범’은 파스칼의 ‘신앙’과 같은 실존적 비약을 의미한다.
요컨대, 사드의 ‘자연’ 개념은 체계적으로 제시되었을 때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마 그것은 고래古來로부터의 존재론을 바꿔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부패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사드가 완전히 우연적인 고독한 실존의 측면에 몸을 두었을 때, 그런 객관적 존재론(자연론)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사드의 주장은 주장으로서 제출되었을 때 허위이다. 사드는 이론가처럼 말할 때, 단지 궤변을 농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의 이론적 주체를 체계화할 수 없으며, 또 할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은 사드에게 불명예가 되지는 않는다. 침범(신앙)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본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가라타니 고진의 [작품해설]에서

▶사드에게 쾌락이란 무엇인가

(이 작품의 주인공) 돌망세에 의하면 ‘자연의 목소리’는 욕망 안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따른다면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돌망세는 미르벨 기사가 미덕에도 쾌락이 있다는 것을 단호히 부정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칸트주의의 뒤집기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칸트는 실러가 야유한 것처럼 과장해서 말한다면, 개인은 의무로서만 미덕을 행해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쾌快의 감정이 섞여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돌망세는 역으로 “쾌락 이외의 것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자연’의 지상명령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하다. 순수쾌락은 악덕 이외에는 없으며, 그리고 그것은 이미 감성적 쾌락과는 이질적인 것이다.
무감동에서 생겨난 쾌락 쪽이 감수성에서 생겨난 쾌락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후자는 겨우 마음의 한 면을 다루는 것에 불과하지만, 전자는 모든 부분을 자극하고 모든 부분을 변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요약하자면, 보통 이상의 강렬한 매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속박의 파기와 법률의 전면적 침범이라는 절대적 매력조차 가지고 있는 쾌락이 왜 세상일반에서 인정받는 빈약한 쾌락에 비교되어야 할까?
돌망세는 이렇게 쾌락을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초超감성적 지고성으로 높인다. 속된 쾌락은 경멸해야만 하고, 침범만이 성성聖性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퓨리턴적인 세계도 없다. 끊임없이 침범적이기를 그치지 않는 것, 이것은 때로는 사드 소설의 인물들을 헐떡이게 한다. 조지 스타이너가 탄식하고 있는 것처럼, 침범의 형태는 유한한 순열조합의 문제이고, 따분할 정도로 단순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사드는 침범의 매너리즘과 그로부터 오는 의욕의 감퇴를 어떻게 벗어났을까? 루터의 다음과 같은 말은 시사적이다. “마음이 식어서 생각처럼 기도를 할 수 없을 때, 나는 교황이나 그의 공범자나 세상의 해충인 나의 적이나, 츠빙글리의 불경과 망은의 사상으로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 결과 나의 마음은 정의의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게 되고, 온정과 격한 열의를 가지고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하다.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처럼. 나라가 임하시는 것처럼.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내가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기도도 더더욱 열렬하게 된다.”
루터는 기도가 가지는 엑스터시의 비밀을 무심결에 고백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드 또한 유폐와 억압이 불가결했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단지 귀족적 에피쿠로스주의자, 단지 성적 도착자로 끝났을 것이다. 실제 사드보다도 훨씬 지독한 무리조차 형벌을 면했다. 사드는 침범의 현실적 가능성을 박탈당했다. 쓴다는 행위만이 유일한 침범행위였다. - 가라타니 고진의 [작품해설]에서

▶사드에 대한 추천사들

유기체에 대한 메카닉한 양상을 발견하는 것이 사디스트의 완고한 경향이다. 사디스트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라 유기체(인체)에 기계의 이미지를 집어넣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드는 자동기계에 매료된 시대의 아들이다. 라 메트리의 '인간 기계론'은 길로틴을 가져왔고, 길로틴은 ?인간 기계론?의 주장의 정당함에 대한 초보적인 검증을 보여주고 있다. 보들레르의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 권위였던 드 메스트로는 그 피비린내 나는 상상력에서 사드의 근친자이다. - 발터 벤야민

카프카가 사드를 알았는지는 미지수지만, 그에 대한 관계는 좀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사드의 경우에 죄 없는 자가 그렇듯이 카프카적 주체, 특히 집을 떠난 카를 로스만은 출구 없는 하나의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면 그 다음의 절망적 상황으로 빠져든다. 서사적 모험의 국면들이 수난사의 국면으로 변하는 것이다. 완결된 내재적 연관관계는 그 감옥들로부터의 탈주과정으로서 구체화된다. 무엇과도 대조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이 무반성적 모험소설과는 반대로 사드의 경우처럼 전체 세계로 혹은 규범으로 변한다. 무반성적 모험소설은 언제나 비범한 사건들을 겨냥하면서도 일상적 질서를 보증한다. 하지만 사드와 카프카의 경우에는 망상의 양식적 원칙을 통해 객관적 망상을 드러내는 이성이 작동한다. - 테오도르 W. 아도르노

사드의 책에 등장하는 인물은 고전주의가 퇴색해 가던 시기의 돈 키호테에 해당된다. 사드는 고전주의 시대의 언설과 사고의 종말에 도달해 있다. 사드 이후에 폭력이라든가, 삶이나 죽음이라든가, 욕망이나 성격 같은 것들은 표상의 하부에 거대한 그림자 층을 형성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언설과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사고 속에서 최선을 다해 벗겨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그림자 층이다. - 미셸 푸코

“어쩌면 나는 사드를 제대로 읽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게 사드를 읽어야 할지 누가 안단 말입니까? 나는 사드를 아주 소설적인 방식으로 읽습니다. 나는 그가 아주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주 경이로운 소설들을 만들었습니다. 사드에게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점이지, 그 위반적 양상은 별로 아닙니다. 비록 그것의 중요성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프루스트를 좋아하듯이, 나는 사드를 작가로서 좋아합니다.” - 롤랑 바르트

“여기서 사드는 전복을 시작하는 지점이며 칸트는 그 전환점이다. '규방철학'은 '실천이성비판'보다 8년 뒤에 나온다. 이 책은 '실천이성비판'의 진리를 제공한다.” - 자크 라캉

“칸트가 은밀한 사디스트였던 것이 아니다. 은밀한 칸트주의자였던 것이 사드다.” - 슬라보예 지젝

누구나 내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신체를 즐길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물리도록 충족시키고 싶은 그 변덕스러운 강요에 대한 그 어떤 제약도 없이 그 권리를 행사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가장 훌륭한 사드가 칸트처럼 되려는 시도에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자크 알랭 밀레

2. 이 책의 차례

일러두기 4
옮긴이의 말 7
리베르땡들에게 29
규방철학 혹은 부도덕한 선생들.
젊은 처녀들의 교육을 위한 대화 31
첫 번째 대화 - 생땅쥬, 기사 33
두 번째 대화 - 생땅쥬, 으제니 45
세 번째 대화 - 생땅쥬, 으제니, 돌망세 47
네 번째 대화 - 생땅쥬, 으제니, 돌망세, 기사 141
다섯 번째 대화 - 돌망세, 기사, 오귀스땡, 으제니, 생땅쥬 151
‘프랑스인이여, 공화국의 시민이 되기 위해 조금만 더 노력을.’ 190
여섯 번째 대화 - 생땅쥬, 으제니, 기사 273
마지막 일곱 번째 대화 - 생땅쥬, 으제니, 기사, 오귀스땡, 돌망세, 미스티발 277
[작품해설] 사드의 자연 개념에 관한 노트 / 가라타니 고진 294
사드 연보 300

3. 이 책의 저자 소개

■ 지은이
도나티앙 알퐁소 프랑소와 드 사드 D.A.F. Sade(1740~1824): 일명 사드후작 혹은 성(性)후작. 파리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결혼 후 곧 남색과 성적문란 등의 이유로 벵센 성의 지하감옥에 갇혔다. 1778년에 체포되어 12년간 감옥생활을 하면서 일개 방종한 귀족에서 반항적 작가로 거듭났다. 대표작 '규방철학'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이 시기에 몰래 썼다. 석방된 후 가족에게 버림받고 재산도 차압당하는 개인적 불행을 겪는 한편 사회적으로도 반항적인 도피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도덕질서를 바로 세우겠다'는 집정정부 의지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1801년 사드는 다시 감옥에 갇힌다. 감옥과 정신병원을 떠돌면서도 계속 소설을 썼으나 사드가 죽은 후 그의 맏아들이 사드의 모든 원고와 사진을 불태워버렸다. 사드가 '내 흔적을 지상에 남기지 말라'고 유언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시대를 앞서간 성적 혁명가'라는 숭상에서부터 '타락한 귀족'이라는 혹평까지 다양하다. 저서로 '소돔 120일', '플로르벨의 나날', '사랑의 죄악', '쥐스틴' 등이 있다. 그의 이름은 '음란성 가학증'을 의미하는 '사디즘'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 옮긴이 - 이충훈: 서강대학교 불문학과 졸업. 현재 프랑스 파리 제4대학 박사과정에 있으며 18세기 프랑스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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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드 <규방철학>

사드를 생각하면,  그의 <소돔 120일>을 읽기가 참 어려웠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호러 무비나, 컬트 무비를 보는 것에서는 그리 힘들어하지 않는데... 읽기 괴로웠던 책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사드의 <소돔 120일>이 단연 선두에 설 것이다. 왜 그렇게 괴로웠을까? ... 이에 대한 해답을 사드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가지고 읽는 읽기의 방법, 즉 새디즘-매저키즘차원으로서의 읽기 방법에서 찾아본다. 

잠깐 그 읽기 어려웠던 <소돔 120일>(1785년 초고완성)에 대해서 얘기하고 넘어가본다.   1785년 10월 22일에 착수하여 37일만에 집필이 완성한 작품이지만, 그의 생전 정식 출간되지는 못한다. 1789년 바스티유 점령 이후, 그의 초고본과 복사본도 사드에 손에 돌아오지 않게 된다. 그후 많은 시간이 흘러, 1904년 이반 블로흐라는 베를린 정신과 의사에 의해 의젠느 뒤르헨이라는 가명으로 심하게 변질되고 왜곡되어서 발표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31-1935년 사이에 마침내 3권으로 출간된 작품이다.  <소돔 120일>에는 타락한 귀족 블랑지스 공작,  그의 동생 주교,  블랑지스의 친구이자 징세 청부인인 뒤르세, 그리고 퀴르발 판사등이 잔혹한 악인들로 나온다. 그와 함께 이들이 데려오거나 모집한 4명의 뚜쟁이, 색골, 유고와 납치된 소년, 소녀가 바로 등장인물들이다. 그들을 통해, 그들의 말/몸이 벌이는 120일간의 향연이 바로 <소돔 120일>이다.  120일은 초로의 뚜쟁이 이야꾼들이 각기 150여가지 이야기를 1달동안 준비하고 거기에 모인 이들이 그 얘기와 같이 재현한다. 그 말과 행위에는  종교에 대한 모욕, 가혹한 고문,  살인, 다양한 방식의 섹스 행태등이 있다. 

먹고 배설하는 게 그들의 일이다. 배설에 대해 유독 심취한 사드이다. 사드에게 있어 문학이란 기존의 제도권에 똥칠하기/똥싸기 아닐까? 배설로서의 글쓰기, 배설로서의 성교, 배설로서의 배변이 거의 일직선상에 놓인다. 쓰고 읽고, 싸고 받고. 지우고 탈락되고.

내가 왜 <소돔 120일>이 읽기 어려웠을까를 <규방철학>을 읽으며 또 생각해보게 됐다. 이는 <규방철학>을 읽는 초반부가 어이없게도, 지루하지 않고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들의 젊은 처녀(들)의 교육에 대한 심취에서 웃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어이없어하며 희희낙낙하며 읽었다. 그러나 역시 후반부로 갈수록 못말리는 사드로 인해, 망연자실에 가까워진다. 또 읽기가 괴로워진다. 어쩌자고?  이렇듯 까부수어, 뭘 어쩌자고를 의문하게 된다. 여전히 끝으로 갈수록 읽지 않았어야 했을까를 의문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번 <규방철학>을 통해 사드문학의 주요 특징인 '장광설'을 감지하고 실감하게 된다. 장광설이야말로 사드 문학의 진면목이지 않을까? 발기, 삽입, 사정,  엉덩이 치기, 꼬집기등이 난무하는 듯한 사드의 작품에서 감상 포인트는 행위와 재현이 아닌,  '말'에 있는 듯하다.  사드에게 있어 글쓰기란 배설로서의 글쓰기이다. 그리하여 <규방철학>을 금언과도 같은 꿰매기가 등장하여, 금서를 조롱한다. 세상을 향한 조롱, 엉덩이 차기로서,  2세를 출산할 성스러운 음문을 바늘로 꿰매는 과정, 배설을 못하게 항문을 꿰는 그 과정이란 읽는 동안 역겹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온다. 음경과 항문과 인조음경에 의해 염주처럼 이어진 그들의 모습에 이어,  음문과 항문이 바늘이 통과하며 꿰매고 있는 모습을 통해 기존 사회를 조롱하는 <규방철학>을 보고 웃지 않을 자 누구일까?

사드의 소설은 똥칠하기, 욕하기, 배설하기, 자극하기의 특징을 지닌 것 같다고 앞서 말했다.   요즘 문화로 보면 락, 랩, 펑키의 음악 흐름에서 찾을 수 있는 '재미와 저항'이란 기조음이다. 그런데도 흔히 사드 하면, 새디즘-메조키즘으로만 연계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게 오류일거라는 것을 <규방철학>을 읽으며 알게 된다.  선입견에 어지간히도 지배되는 독자이다.

사드의 소설을 읽다보면, 교육을 받는다가 아닌, 계몽시키려는 지껄임을 듣는 듯하다.  음탕한 자들의 말로를 통해, 또 다른 형태의 권선징악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사드는 어린시절부터 성장기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 성장한 계몽주의 추종자라고 하다. 왜 그토록 사드를 읽기 괴로운가로 인해 도서관에서 찾아서 읽어본 <사랑의 죄악>을 통해서, 그가 미덕/악덕으로서의 덕을 얘기하는 계몽주의자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랑의 죄악>을 통해서 틀을 조롱하는 듯하지만,  권선징악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판단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사드를 만났었다. <소듬 120일>과 <규방철학>과 달리.

이제 규방철학을 살펴보자. 이 책은 사드에 대한 편견을 없애주려는 듯한 역자의 노고가 돋보인다. 볼테르, 루소, 디드로에 버금가는 '사상가로서의 사드', '장광설에 목매는 사드'를 <규방철학>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규방철학>은 사드의 장광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화양식의 소설이라 말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간의 '말'로만 이뤄진 소설이라는 데서, 다른 작품과의 차이점을 발견한다.  연극적인 요소와  소설적인 요소가 함께 섞인 작품이다.  중간에 돌망세가 평등의 궁 앞에서 산 작은 책자[프랑스인이여, 공화국의 시민이 되기 위해 조금만 더 노력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등장인물들의  대화로서 구성된 작품이다. 때론 말이 아니라 글로 느껴질만큼의 장광설이 담겨있다.

<규방철학>은 첫 번째에서 일곱 번째 대화로 구성돼 있다. 그 각각의 대화에는 희대의 리베르땡 돌망세,  쾌락주의자인 타락녀 생땅쥬부인, 열다섯의 학생 으제니, 기사(쌩땅쥬부인의 동생), 거대음경의 소유자 오귀스땡, 굳건한 신자인 미스티발부인등이 참여한다.

주된 내용은 리베르땡인 으제니의 아버지가 리베르땡인 쌩땅쥬부인에게 딸을 교육시킬 것은 부탁하여, 그 딸 으제니가 혼자서 쌩땅쥬 부인을 찾아온 뒤의  얘기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에게 생의 목표란 바로, 자신의 몸의 쾌락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내용이다.  쾌락으로 향하는 길로 그 첫번째 방법이란 게 섹스라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 기존의 가치관들이 하나하나  깡끄리 깨부셔진다. 그들이 깨부시는 가치관이란 백과전서파들에 의해 교화된 계몽주의적 가치관, 역사 이래 기득권을 위해 필요한 가치관, 종교등이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으제니의 어머니인 미스티발의 음문과 항문을 꿰매는 소동을 벌이는 것을 통해 <규방철학>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철저한 금욕주의자인 종교인으로 대표되는 으제니의 어머니의 잘못했다는 "아! 잘못햇어요, 나으리! 백만 번 천만 번 잘못했어요! 저 죽어요!..."(292쪽)를  통해, 굳건한 종교인을 조롱하고 있다.

<규방철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리베르땡이다.   중요한 용어인 리베르티나주와 리베르땡에 대해 역자의 설명을 옮겨본다. 일반적으로 리베르티나주는 난봉질로 리베르땡은 난봉꾼으로 옮겼으나, 그 의미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판단에서 역자는 굳이 원어 발음 리베르땡, 리베르티나주로 옮겼다. 그럼 리베르땡의 뜻을 살펴보자. 저항과 해방의 의미가 강한 단어다.

리베르땡이란 1690년 퓌르티에르 사전에서 “법이나 올바른 삶의 규칙들, 수도원의 규율에 복종하지 않는 자”로 정의됐다고 한다. 원래 해방된 자라는 뜻의 libertinus에서 온 리베르땅은 16세기 프랑스에 들어올 때는 경멸적인 뉘앙스를 지녔다고 한다.  그리하여 리베르땡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로, 새롭게 얻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줄 모르고, 타인의 눈으로 보면 원래 가졌던 흠을 못 버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지나친 자유를 취하고 마련하는 사람으로의 뜻이 덧붙여졌다. 그리하여 반체제 지식 분파 내지는 신앙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이르는 말로 리베르땡은 간주됐다고 한다. 기존의 교리와 신념으로부터 해방된 자로, 구원 대신에 세속의 즉각적인 쾌락에 더 큰 의미를 둔 이들이라는 것이다.  18세기에 들어 리베르땡은 자유 사상가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루이 14세가 죽은 후 리베르땡들은 실천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한다.  1732년 트레부 사전에서 리베르티나주를 보면, 풍속에 있어서 방탕, 방종, 무질서를 리베르땡의 행실이라고 표현돼 있다고 한다.  이후 『백과전서』에서는, 리베르티나주란 “감각의 쾌락에 이르게 하는 본능에 굴복하는 습관”이며 “풍속을 존중하지 않으나, 이에 맞서는 것도 아니다. 섬세함도 없고, 선택을 할 때는 일관성이 없다. 향락과 방종의 중간쯤에 머무른다.”(17쪽)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쾌락을 위하서라면, 어떤 제도적 틀도 없애고, 그 무엇도 할 수 있는 자들로 리베르땡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규방철학>에 주요 등장인물들은 그러한 의미를 내포한  리베르땅들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돌망세이고, 쌩땅주부인이다.  이들에게 있어 생의 원칙이란 ‘섹스하라, 너의 생의 의무인 쾌락을 추구하려면! 제도(법, 종교, 계급)를 경멸하라! 생이 다하는 날까지 .’가 되지 않을까?...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담겨진 소설이기도 하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고, 볼테르가 말하는 이성적인 계몽에 대해서 반기는 드는 리베르땅들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생의 목적은 쾌락이다.  법과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으로 산다해도, 세상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없다는 것이다. 절제하고 참는다는 것은, 가진자들과 달리 갖지 못함으로인해,  참는 자만이 손해라는 입장이다. 인간의 이어짐에 필수적인 생식과 종교에 대한 조롱은 염주와도 같은  성교로 이뤄진 염주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자, 부인 당신 동생에게 들어가세요......자, 오귀스땡의 음경이 당신에게 들어갈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오귀스땡이 당신에게 소홀하지 않도록 책임을 지지요. 아! 자! 우리는 염주처럼 꿰어졌다. 이제는 사정을 할 생각만 하면 돼.”(171쪽)

"생식은 절대로 자연의 목적이 아니라니까.“(124쪽) 라고 말하는 생땅쥬부인이다. 돌망세는 말한다. 자연스런 인간은 결코 선하지 않다고. 잔혹이야말로 자연의 본성이라고. 잔혹성이 주는 즐거움이란 게 있다고. "잔혹성이란 악이기는커녕 자연이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둔 최초의 감정"(132쪽)이고는 것도 역시 말한다.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대화 사이에 들어있는 팜플렛과도 같은 글, [프랑스인이여, 공화국의 시민이 되기 위해 조금만 더 노력을]을 잠깐 살펴보면, 공화국인 되기 위해서라면 종교보다는 덕이 우선해야함을 강조하는 '종교'편과 살인에 대한 장광설이 있는 '풍속'편이 있다. 종교편을 통해서 '왕홀과 교회의 향로'에서 해방되기를 주장하고 있다. 유신론이란 유령에서 해방되는 길은 물질에 내재된 운동능에 의한 존재라는 무신론에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국 종교보다는 덕에 의해 가능한 행복을 주장하고 있다. 다음으로 '풍속'에서는 공화국에 필요한 풍속을 얘기하는데, 선악구분이 없는 자연에서 시작하고 있다. 선악이란게 누구에 의해 규정됐는가를 의문하게 하다. 선악구분이 없는 자연인데, 기존의 범죄라고 부른 것부터 살펴보고 있다. 그 시대의 세가지 의무를 "1. 지고의 존재를 의식하고 믿어야 할 의무/ 2. 동포들과 더불어 완수해야 할 의무/ 3.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과 맺는 의무"(212쪽)로  신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말한다. 그리하여 신의 존재로 발생되는 불경, 신성모독, 무신론들은 사실은 범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사형제도/살인에 관한 사유가 유독 눈에 뜨인다. 파스칼로부터 비롯된 살인자 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살인에 처하게 된 결과를 낳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절도, 수줍음, 가혹한 행위, 남색등의 판명 불가능한 덕성에 대한 장광설이 이어진다. 이는 사례와 역설로서 진행시켜 가는데, 사드의 철학이 썰[說]에 멈추는 한계로 작용하지만, 분명 사유의 단초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그가 말하는 자연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자. 다음 읽다보면, 사드의 철학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은 동물과도 차이가 없다는 것, 고기를 먹는 존재인 인간의 살인과 도축의 차이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다른 초목들이, 인간과 세상의 다른 동물들이 다른 점이 무엇인가? 확실히 어떤 차이도 없다. 동식물들처럼 인간은 우연히 지구상에 자리잡았고 그들과 하나도 다름없이 태어났다. 그들은 짐승처럼 번식하고 자라고 늙는다. 그들처럼 노년에 이르고 그들처럼 자연이 동물에게 종種에 따라 부여한 수명을 다하면 무로 돌아간다. 자연은 동물들의 신체기관을 그렇게 구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틀림없는 것이라 철학자의 엄정한 눈으로 보아 이들 간에 어떤 차이도 발견할 수 없다면, 그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동물을 죽이는 것과 똑같은 것이 되거나 양자간에 거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오만이라는 편견 속에서만 차이가 존재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만의 편견처럼 부조리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서둘러 풀어보자. 사람이건 동물이건 죽이는 것이 똑같은 일이라는 점을 당신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246쪽)

<규방철학>에서 유독 자주 반복하는 단어는 쾌락과 함께 ‘자연’이다. 그리고 너로인해 존재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사드의 말을 무시할 소리로 간과하기에는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의 차이인 듯하다.  분명 사드에게 있어 언어/말은 사회에 대한 조롱으로 선택한 하나의 방편이다.

사드의 작품에는 '개인'의 주절거림은 혼자만이 듣고 생각하는 주절거림이 아니다.  자연과도 같이 연계된, 사획속의 개인이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떠들고 있다.  갇힌 방의 고독한 개인보다는 시끄러운 사회를 선택한 사드이다. 여럿이 보여 웃고 지껄이고 조롱하는 게 그(들)의 할 일이다. 사회를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자연의 인간이 사회를 조롱하고 있다. 그도 포함되어 있는.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사드와 차이를 말하는 이들의 구별점은 무엇일까. 사드의 말대로 가진 자에서 비롯된 오만일까?

사드의 작품에는 이러한 사회 뒤집어 보기로서의 장광설이 보인다. 계몽과 지루함을 가진 장광설로 사드는 차등한 세상을 향해 차이(불평등)란 없어야 한다고 고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오늘날에도 차이와 계급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보니, 까발리고 배설하는 사드의 '말'을 들어야만 되나 보다. 사드의 소설은 이처럼 계급이나 차이에 대한 비판/장광설로 읽어야할 듯하다. 새디즘과 매저키즘, 주인과 노예, 학생과 선생, 얘기꾼과 행위자, 말하는 자와 듣는자, 방탕과 금욕이라는 차이로부터, 동등함으로 가자는 사드의 시끄러운 소리를 한번 들어보시길... (조금은 어이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

도나티앙 알퐁소 프랑소아 드 사드,  <규방철학>, 이충훈옮김, 도서츨판 b, 2005

* 출처 - http://cafe.daum.net/9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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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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