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42강 주님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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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42강 주님과의 만남

[11 대구강의 4] - [피 42] - 주님과의 만남
                                                                                
                                                   11,03,1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가상 현실과 진짜 현실 !!

오늘은 교재 142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사울은 바울이 되고, 복음의 광채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나 누구에게도 한 점 부끄럽지 않은 것은, 빛의 광채에서 나오는 사랑에 넋이 나가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랑으로 미쳐버린 것이다. 복음의 광채로 인해서 이 세상이라는 모든 껍질이 뜯겨나가는 그 광경을 사도바울은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 '복음의 광채' 라는 말이 나오는데, 즉 일종의 눈부심인데, 그렇게 눈이 부시니 어떻게 되는가? 그동안 자기가 이 세상에 의존해서 살아가던, 즉 "이 세상이 없으면 나는 죽어. 어찌 되었던 이 세상에서 버티고 살아야만 돼" 라고 하는 것이 복음의 광채 앞에서, 즉 새로운 현실 앞에서 그것은 가상 현실로, 또한 하나의 일부로서 전환이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경험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은 그 자체가 곧 복음인데 말이다. 즉 예수님 자체가 하늘나라에서 살다가 이 땅에 왔을 때는 예수님은 양쪽을 다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얼마나 지옥이고 또한 엉터리라는 것은 하늘나라에 사셨기 때문에 아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그런 하늘나라에 살았던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면, 모세의 경우에 그가 애굽에서 살다가 언제 말씀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고 하니,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왔을 때, 그때 양쪽을 다 바라본다는 말이다. 그렇게 양쪽을 다 보지 않으면,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만부림을 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 종교는, 이 세상에 올인 !!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결코 불교의 스님들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들은 하늘나라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복음의 광채를 보고 알아야 인정하든지 말든지 할텐데 말이다. 그들은 이 땅을 전부라고 여기는데, 정말이지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모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것 말고 뭔가 희미하게 점선으로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것이 곧 불교, 즉 종교라는 말이다.

사도바울도 자신이 사도가 되기 이전에 마찬가지였는데, 즉 그도 "이 세상이 확실한 현실이고, 이것 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을 것이다" 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점선으로 된 세계가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세계에 접근하려고 애를 썼던 사울이란 사람이, 그만 이 세상에 살았던 예수님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 하지만 사도바울에게 이 세상은 무엇인가?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이렇게 점선으로 있던 부분이 점선이 아니라, 이 점선부분이 그만 실선이, 즉 실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렇게 점선 부분이 그만 실상이 되고 마니까, 사울이란 사람이 그동안 실상이라고 여겼던 이 세상은 도대체 무엇이 되는가? 이 실상이 하늘나라의 일부가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자기 눈에 보이던 세계가 전부였는데, 다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즉 "아마 여호와의 나라가 있을 것이야" 라고 점선 부분으로 다가갔던 것이, 그만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복음의 광채를 알고 난 뒤에는 오히려 점선으로 된 부분이 실선이 되고, 즉 실제의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3장에서 자기 생명이 어디에 있다고 했는가? 이 세상나라인가? 아니라면 예수님의 세계에 있다고 했는가? 하나님 안에 있다고 했는데, 고이 모셔서 감추어져 있다고 말이다. 마치 납골당에 유골이 모셔지듯이 말이다. 그렇게 이 땅에서는 생명이 없으니 오직 위를 바라보자고 했는데, 왜냐하면 거기에 생명이 간직되어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늘나라가 실상이고 이 세상 나라는 허구이며, 동시에 이 세상은 실상에 부딪치는 그림자와도 같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 자체가 그림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실상은 엄연히 따로 있기에 말이다.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 모세의 경우에도 !!

그것은 바로 애굽에서 살던 모세가 아무리 말씀을 지키려고 해도 소용이 없던 것과 같은데, 그래서 애굽의 것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다가 막상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게 되니까 어떻게 되는가? 그 이전에는 이쪽 세계만을 알다가 저쪽 세계도 알게 되는데, 즉 양쪽 세계를 모두 다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양쪽 세계를 다 보게 되니, 즉 두 가지 시선을 다 가지게 되니까, 밑에 있는 백성들의 여호와 섬김이 무엇이 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노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양쪽 세계를 다 아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 예수님도 역시 마찬가지 !!

그것은 예수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이미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살다가 오셨기 때문에 이 세상이 그야말로 허당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두 가지 안목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했던 어떤 존재가 있었는데, 그게 누구인가? 광야에서 말이다.

그게 무엇인가?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한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 그냥 "이 세상 사람이 좀 되어다오" 라는 것인데, 즉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제발 이 세상 사람으로 좀 살아다오" 라고, 그렇게 애걸복걸을 하듯이 유혹을 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를 떠나서 어디를 가는가?" 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 라는 것인데, 그것도 잠시 동안 말이다. 어차피 다시 돌아가야 되니 말이다. 즉 예수님은 이 땅에서 그것 외에 다른 볼일은 없는 분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동사무소에 가서 그냥 주민등록 등본을 떼고 나오면 되는 것이지, 굳이 거기서 텐트를 치고 살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거기서 데모를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냥 필요한 서류를 떼고 집으로 가면 된다는 것이다.

◈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만들기 !!

그렇다면 예수님의 집은 어디인가? 예수님의 나라에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데,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라고 하셨는데,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기도를 하시면서 말이다.

(요 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을 찾아온 목적인 이미 정해졌는데, 그게 무엇인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아나함같이, 우리도 역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만들기인데, 아주 간단하다는 말이다. 즉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만들기"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그러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만드는 것인데, 즉 이 세상과는 그야말로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왜 악마를 붙여주시는가?

예수님의 목적이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은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는가? 물론 우리의 힘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으니, 여기에 누가 등장해서 유혹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속한 힘, 즉 이 세상에 속한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악마를 우리 곁에 붙여주신다는 것이다. 방법으로 참으로 희한한데 말이다. 

예수님에게 마귀가 시험했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과제이고 숙제라고 하면, 똑같은 방법으로 예수님은 마귀를 동원해서, 혹은 이단들을, 적그리스도를 동원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이유를, 그 이유를 우리 속에서 생산해내신다는 것이다.

◈ 세상 속으로, 세상 속으로 !!

그렇게 해서 "아하, 이래서 내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구나" 라고 깨닫게 하는데,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그냥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 속한 유혹과 자꾸만 부딪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기 혼자서 초연하게 산다고 하면서 기도원에서 기도만 하고, 또한 교회에서만 살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직장을 가지고서 직장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이가 70이 넘어서 전혀 일거리가 없으면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어떤 아르바이트라도 하게 되면 누구를 만나는고 하니, 일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즉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을 만나게 됨으로 말미암아서, "내가 왜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가?" 라는 것을, 바로 그것을 파악하게 되는 계기를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다는 것이다.

◈ 이게 피한다고 될 문제인가?

그런데 이러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무섭고 두려운 사람은 어떤 경우에 해당이 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기 힘으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자가 되려고 애를 쓰는 경우라는 것이다. 마치 천주교나 불교에서 도를 닦는 자들이 그러한데 말이다. 수도원의 수도승이나 절에 있는 중들의 경우에 말이다.

그런 자들의 경우에는, 자꾸만 사람들을 피하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같이 섞여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즉 그렇게 사람들과 말을 섞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유혹을 받아서, 그러한 유혹을 본인이 떨쳐내기가 너무나도 힘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반대로 성도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유혹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유혹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좀 이상한가요? 물론 마귀 속에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라, 유혹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유혹 속에서 더욱 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는 이유가 나온다는 말이다.

◈ 나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고 말거야 !!

갑자기 어렵게 되고 말았는데, 이것을 조금 더 쉽게 해보면, 첫째로 자기 힘으로 이 세상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은, 마귀를 피하든 유혹을 피하든 이 세상을 피하든, 아무튼 피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즉 안 만나고, 안 보고, 안 듣고 하면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 극단적으로 나가서, 안 마시고 안 먹고 하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면 이런 방법이 최고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자기 힘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하면, 자기 힘으로 이 세상을 벗어나려고 하는, 그것이 곧 마귀의 유혹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힘이 동원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이 세상에서 벗어난 자임을 확인하게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고 하니, 그건 바로 마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 니들이 술맛을 알어?

 예를 들어서, 자기가 술집에 갔다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술 마시는 재미에 빠져서 자기가 술을 마시는지, 아니면 술이 자기를 마시는지 모르고 마구 마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도 한 잔을 마셔보는데, 하지만 개뿔이 맛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 인간들이 이렇게 쓴 것을 왜 마시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냥 오미자차나 마시지 말이다.

그것도 술에 취하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으니,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면서 걸어주어야, 그리고는 집에 가서는 자는 아이들을 다 깨워서 잔소리를 해야 가장답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아하, 이제야 살 맛이 나는구만. 스트레스가 다 풀리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성도의 경우에, 자기가 성도임을 날마다 자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서, 즉 "내가 성도이다. 할렐루야,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믿는 것은, 그것은 바로 자기 힘으로 이 세상 사람을 만드는 작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에서 '교인' 이라는 이름으로 양육을 한답시고 하는 짓거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믿음도 없으면서 자꾸만 믿는 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믿음도 없으면서 말이다. 즉 온 교인을 그만 모두 다 신자화를 시켜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서 신자는 단 한 명도 없지만 말이다.

바로 이러한 마귀의 유혹이 있을 때는, 물론 우리가 그러한 것을 찾아간다는 표현은 조금은 어폐가 있는데, 사실 나중에는 재미가 없어서 찾아갈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나이트클럽에서 마누라를 만났다고 하던데, 또 채팅을 하다가 만나고 말이다. 하필이면 그렇게 해서 만나는지 말이다(ㅋㅋ).

그러니 일부러 그렇게 이상한 곳에 찾아서 가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도, 성도에게는 마귀가 성도인 줄 알고 찾아와서는 유혹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가만히 있어도 매일같이 유혹이 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힘으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즉 자기 힘으로 하늘나라의 사람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유혹이 일상적으로 온다는 말이다.

◈ '예수님'을 믿는가? '나'를 믿는가?

바로 그러한 유혹들이 교회, 신학, 혹은 성경공부라는 이름으로 오게 되어있는데, 그런 기존의 모든 유혹들이 도대체 어떤 식으로 와서, 사람들이 그런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이 제일 헛갈리는 대목이 무엇인고 하니, 첫 번째로 예수님을 믿는 것과,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님을 믿는 자기를 믿는 것을 서로 구분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제가 이러한 강의를 지금까지 수십 년을 넘게 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서로 분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어느 정도 넘어가는데, 제일 마지막에 딱 걸리는 것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 목사님, 동일하게 봐 주세요 ??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자기를 믿는 것을 서로 구분하지 못하더라는 말이다. 본인이 그렇게 구분되지 않으니 나중에 자꾸 어떻게 우기는고 하니, 이 둘을 서로 동일한 것으로 여겨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자기를 믿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자기를 믿는 것도 역시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인정해달라고 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데, 자꾸만 그런 눈치를 보낸다는 말이다. 물론 그 안타까운 시선과 그 마음을 제가 모를 리가 없지만, 하지만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제가 용납하고 말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는 예수님에게 과연 그게 통하겠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제가 고집이 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 자체가 십자가의 의미를 이미 확정을 시켜놓았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말이다.

◈ 귀신 들림이 사도바울의 신학에서는 '보편화'가 !!

여기서 잠시 어제 아침에 설교한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혹시 기억이 나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물론 다 까먹었겠지만 말이다(ㅋㅋ).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일곱 귀신이 쳐들어오는 것인데, 즉 귀신이 나갔는데 다시 들어왔다고 하면, 이러한 귀신 체험이 바로 사도바울의 신학에서는 보편화가 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귀신 이야기가 말이다.

(마 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마 12: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마 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갑자기 멍해지는 분위기인데(ㅋㅋ),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저는 전혀 귀신을 만나본 적이 없는데요?" 라고 하는데, 즉 그런 귀신체험은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이것을 어떻게 했는고 하니, 보편화, 즉 확장을 시켜놓았다는 것이다. 즉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악마에 대해서, 그렇게 모든 인간들이 다 마귀가 들렸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 당시에 보면 귀신이 들린 자들은 간질병에 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난리를 치는데, 돼지 떼에도 들어가고 말이다. 또한 "예수여, 당신이 벌써 오십니까?" 라고 하는데, 남에게는 해꼬질도 해대면서 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아니, 저 사람이 미쳤나? 왜 저러지?" 라는 소리를 듣는, 그렇게 특수한 정신적인 질환이고 병으로 간주되는 것으로서, 그렇게 뚜렷하게 귀신을 보여준다고 하면,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러한 것을 그만 보편화를 시켜버렸다는 것이다. 보편화를 말이다.

어떻게 말인가? 즉 "죄가 왕 노릇을 한다. 율법에 속했다. 육에 속했다. 너는 저주를 벗어날 수 없다. 심판을 받는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결국 마지막에는 무엇인가? "너는 너의 행함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구나. 그것이 곧 사단의 하수인이 하는 짓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도바울에 의해서 보편화가 되었다는 말이다.

◈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이다 !!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자기를 믿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어제 설교본문에 보면 나오는데, 즉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이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해치는 자라는 말이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마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이게 무슨 의미인가? 절에도 가지 않고 교회에도 가지 않으면 되는데, 그러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꼭 교회에 가서 예수쟁이라고 욕을 해야 만이 마귀인가? 그런 곳에는 가지를 않고, 그냥 평생동안 착한 마음으로 버티면 그것도 역시 귀신들린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자기와 함께 하지 않으면 조용한 사람이라고 하셨는가? 즉 자기와 함께 하지 않으면 공자라고 하셨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그런 자는 자기를 해치는 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해치는 자가 되는가? 그 사람은 교회에도 나가지 않고 절에도 가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냥 집구석에 틀어박혀서 매일같이 텔레비와 신문만 보는데 말이다. 그래서 일본에 지진이 났다고 하니, "참으로 안 되었구만" 라고 하면서 안타까워하는데 말이다.

아니, 그런 사람이 무슨 예수님을 해치는 자가 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너무 오바를 하신 것인가? 아내는 교회에 나가고, 남편은 그것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하게 혼자서 등산을 한다면, 그런 남편도 과연 예수님을 해치는 자가 되느냐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오케이, 그렇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남편이 결코 아내가 교회에 간다고 핍박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오히려 "여보, 잘 갔다와" 라고 하면서, 자기 혼자서 등산을 가도 된다고 하면서 부담도 들어주고, 또한 설거지도 잘 해주는데 말이다.

사실 요즘 그런 착한 남편을 만나는 것도 드문데, "당신이 천국에 간다면 내 자리도 뒤에 하나 잡아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같이 가자" 라고 하면서, 그러한 전략으로 나오는데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순진무구하고 착하냐는 것이다(ㅋㅋ).

◈ 인간은, 하나의 '빈 껍데기' !!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곧 자기를 해치는 자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그 의미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것은 곧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의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제가 무슨 예를 들었는고 하니,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양손으로 하트모양을 그리고 하는데, 하트가 심장을 의미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과연 심장 어디에 사랑이 들어있느냐는 것이다. 좌심방인가? 아니면 우심실인가? 도대체 어디에 사랑이 들어있느냐는 말이다. 없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간에 사랑이 들어있는가? 두뇌에 들어있는가? 신경전달 물질만 나오는데 말이다. 아니면 발바닥에 들어있는가? 사랑은 어디에 있고, 또한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인간을 해부해보면 그냥 돼지 껍데기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같은 세포로서 구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창자도 보면 껍질로 되어있는데, 안에 빈 공간이 있고 말이다. 그곳으로 배설이 되고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도대체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냥 칸막이들인데, 즉 공간만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를 하면서, "그러한 돼지 껍데기 속에서 과연 '나' 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나' 라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이다. 그야말로 우리 인간은 껍데기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 종이로 집을 만들게 되면 !!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종이접기를 하면, 점선으로 이렇게 종이에 표시를 해놓고 집을 만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은가?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잘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편평한 종이가 있으면, 이것을 점선으로 된 부분을 설명서에 있는 대로 접으면 모형집이 되는데, 그런데 막상 집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냥 펼쳐보면 종이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종이를 접어서, 즉 특정 형태를 갖춘 공간을 접어서, 그것을 우리는 뭐라고 부르는가? 차후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이것은 집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과 똑같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과 말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그것을 집이라고 부르는데, 그런데 이런 종이를 가지고 만든 집과 인간과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데, 이왕 어려운 것 계속해서 어렵게 해보자는 것이다(ㅋㅋ). 이런 모형집의 경우에, 그것을 집이라고 부르는 누군가가 있는데, 그게 누구인가? 인간이 있는데, 즉 그것을 만든 'I'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돼지 껍데기와도 똑같은 수십 조의 세포로 되어있는 '나'를 접고 접어서, 그렇게 계속해서 접고 접어서 인간이라고 부르는 '나' 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아이가 이렇게 종이를 접어서 집을 만들어서 "야, 집이 참 이쁘게 나왔다. 이것은 나의 집이다. 나중에 결혼하면 진짜로 이런 집을 지어야지" 라고 하면서 좋아한다는 것이다. 

◈ 접고 접은 '나' 라고 하는 몸뚱아리 !!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나'를 접어서, 즉 껍데기를 접고 접어서 간을 만들고 쓸개를 만들어서, 그렇게 해놓고 그것을 '나' 라고 부르는 그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갑자기 '나' 라는 것이 몇 개가 되었는가? 왜 두 개가 되고 말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분열' 이라고 하는데, 그게 심하면 정신분열증이 되고 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열이 모든 인간들이 다 가지고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정작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접고 접은 이 '나' 라고 하는 이 몸뚱아리의 경우에, 그러면 그게 20살 때가 '나' 인가? 아니면 40살 때가 '나' 인가? 60살 때가 '나' 인가? 도대체 어느 것을 딱 잡아서 '나' 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답변을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42살 때 5월의 그 '나'가 바로 '나' 인가? 아니면 47살 때 7월의 그 '나'가 바로 '나' 인가? 아니면 아플 때가 '나' 인가? 아니면 건강할 때가 '나' 인가? 도대체 어느 쪽이 '나' 인가? 건강할 때의 '나'가 '나' 라고 하면, 그러면 아플 때의 '나'는 남이란 말인가? 왜 우리는 아픈 '나'는 '나'가 아니고 건강한 '나'가 '나' 라고 우기는 '나'는 도대체 어디서 튀오나온 '나'이냐는 말이다.

◈ 모든 것이 몸이 만들어낸 환상 !!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한번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러한 것은 전부가 다 몸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나'를 믿는 것이 환상이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여기에는 예수는 없고 단지 예수라는 지식을 이미지화를 시켜서, 그렇게 이미지화를 시킨 곳에 '나' 라는 것이 있고, 그 '나' 라는 것 속에 예수가 일부 삽입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전부가 아니고 누가 전부인가? 물론 예수님도 있기는 있는데, 거기에는 예수님을 믿는 '나'도 있고, 음식을 만드는 '나'도 있고,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나'도 있고, 또한 돈벌이를 하는 '나'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전체를 두고서 '나' 라고 본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게 몸인데, 몸이라고 할 수는 없고, '나' 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라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몸을 분석하고 해부를 해보니, 그 안에는 돼지 껍데기밖에 다른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창자 껍데기, 간 껍데기, 위 껍데기, 그리고 두뇌에 있는 물컹물컹한 시냅스라고 하는 조직뿐이라는 것이다.

◈ '나'를 '나' 라고 이야기하는 어떤 분이 다가와야만 !!

그런 것을 제 아무리 자르고 잘라봐야 아무 것도 아닌데, 그냥 우리가 보고 있는 이러한 손톱과 발톱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우리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 '나'를 '나' 라고 이야기하는 어떤 분이 다가와야 한다는 것이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누구를 만났는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인가?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근거가 무엇인가? 그 이전까지는 그렇게 잘나가던 자가, 심지어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려고 하던 그 인간이 갑자기 자기 자신을 달리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 자기는 의인이고 율법에 흠이 없고, 또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여호와에 대해서 열심을 가졌던 자인데, 천하에 자기보다 잘난 사람이 없다고 여겼는데, 그런 자가 왜 갑자기 자기를 두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나'를 지칭하고, '내'가 '나'를 해석하고,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을 멈추었기 때문에, 즉 환상의 시절을 떠났다는 것이다.

◈ 아저씨, 누구세요?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해서 "누구십니까?" 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즉 아담이 자기 죄를 깨달았을 때가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웠을 때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찾아왔을 때인가? 찾아왔을 때인데, 그러니까 이유 있는 결핍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결핍을 안다고 해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불교의 경우에, 우리 인간을 어떻게 분석하는고 하니까, 즉 '생로병사(生老病死)' 라는 것이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데, 그러한 것을 종합해서 "아하, 우리 인간은 허무하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판정한다는 말인가? 천상천하유아독존, 즉 천하에 자기밖에 없으니, '나' 말고 '나'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현상들을 모아서 인간, 즉 인생이라고 하는데, 그게 끝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누가 찾아오는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가 판단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20대가 '나' 이었는지, 30대가 '나' 이었는지, 아니라면 40대가 '나' 이었는지, 그러한 정신분열이 심하게 되면 60대가 되어도 여전히 자기는 27살 먹은 여자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환갑이 훨씬 더 지난 할머니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또한 입술에 빨간 루즈고 바르는데, 물론 머리에는 꽃도 하나 꽂고 말이다(ㅋㅋ).

마치 '마더' 라는 영화에 나오는 김혜자 씨처럼 춤을 추는데, 아들을 잊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정신착란이 오게 되는데, 즉 "나는 아직도 20대이다" 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생기면 좀 곤란하겠지만 말이다(ㅋㅋ). 누구든지 신경조직에 이상이 생기게 되면 '치매' 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되는데, 그래서 아들을 보고 "아저씨, 누구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두뇌에서 나오는 신경조직의 회로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그것이 연결되는 것만 같이 모여서 이미지를 만들게 되니까, 자기 아들이 와도 "아저씨는 누구세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라도 곡성에 가면 실제로 그런 분이 있는데 말이다. 그분은 아직 나이가 80도 되지 않았는데, 희한하게도 아들만 기억하고, 또 며느리만 기억한다는 것이다.

◈ 야야, 니가 근식이가? 근호가?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시냅스' 라는 신경조직이 모여서, 자기 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것만, 그게 누구인지, 거기에만 집착을 하다보니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만, 혹은 며느리만, 혹은 딸만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누가 마지막으로 밥상을 차려줄지, 그게 아들이면 아들만, 며느리면 며느리만, 또한 딸이면 딸만을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경이 그런 식으로 뭉치게 되니, 본의 아니게 그들이 아닌 다른 외부인들은 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경우에도,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자식의 경우에도, 열 명이면 열 명을 모두 다 좋아하는 것이니 아닌데, 사랑하지 않는 자식은 이름도 모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야야, 니가 누고? 니가 근식이가? 아니면 근호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곧 무의식 가운데서 언어적인 착란이 일어나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그런 착란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본능적으로 기피하고 싶다는 것이다. 즉 '나' 라고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은 그만 제거하고 싶다는 말이다.

◈ 아담아, 니가 어디에 있느냐?

이러한 것은 일종의 흐름인데, 즉 인간이라는 것은 몸이 어디서부터 어디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물론 죽음으로 말이다. 그렇게 죽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힘이 있기 때문인데, 그 힘을 성경에서는 언약의 힘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 보면, "죄의 값은 사망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뒤에 사망이 왕 노릇을 했는데, 즉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와서 "아담아, 니가 어디에 있느냐?" 라고 하실 때는 결코 좋은 의미로서 오신 게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제부터 사망이 너에게서 왕 노릇을 하도록 모든 조치를 내가 다 해놓았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사망이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음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있다는 것인데, 즉 쉽게 말해서, 우리 인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죽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고 하니, 이 모든 것이 언약대로 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한 '나', 바로 그런 '나'가 것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즉 말씀대로 이 세상이 되어 간다는 것을 증거하고 증인이 되는 용도로서, 그런 피조물로서의 '나' 라는 것이다.

◈ 나는 '인애'를 원하고 !!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나'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언약이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내'가 '나'를 장악해서 "하나님, 무엇을 드릴까요? 번제를 드릴까요? 제사를 드릴까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호세아서 6장 6절에 보면 '인애' 라고 나오는데, 곧 '사랑' 이라는 말이다. 번제도, 제사도 아니고 말이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자꾸만 번제와 제사를 이야기하는가? 그러한 것은 자기가 정신을 차려서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요즘 말로 하면, 번제는 헌금이고 또한 제사는 예배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교회에 와서 돈을 내고 예배에 참석해서 축도를 받는 것은, 그런 것은 얼마든지 자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설교시간에는 졸고 말이다(ㅋㅋ).

◈ 무엇을, 누구를 위하여 !!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즉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일체의 하나님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전혀 할 수 없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합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무엇을 위해서 있어야 됩니다" 라는 것인데, 즉 "무엇을, 누구를 위하여!"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를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 말고 다른, 즉 예수님을 위하여, 혹은 언약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라고 하는, 자기는 피조물이라는 말이다.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만드신 분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피조물 자체의 자기 정당성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내가 의로울 수 있는가?" 라는 것은 피조물이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데, 그분이 의롭게 해줄 때만 의롭다는 것이다. 자기가 의롭게 되고 싶어서 의롭게 된다면, 그러면 마귀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말인데,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 안에 가두어두신 것은, 그 어떤 인간이 교회에 와서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전혀 그게 의로운 것이 아니라, 진짜 의로운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과의 그 관계성을 증거할 때, 오직 그것만이 의롭다는 것이다.

◈ 우리 몸은, 귀신이 머무는 처소 !!

바로 그러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껍데기여야하고, 그런 껍데기는 전혀 우리의 허락도 없이 귀신이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한다는 것이다. 들락날락을 말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 몸이 우리 것 같으면 당연히 우리의 허락을 맡고 귀신이 들어와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전혀 그렇지를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귀신이 들어가는 것도, 또한 나가는 것도 역시 예수님에 의해서 그렇게 하는데, 그래서 어디 갈 곳이 없어서 친구 일곱 명을 데리고 와서 계모임을 벌린다는 것이다. 전혀 우리의 허락도 받지를 않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몸을 처소로 보는데, 무슨 처소인가? 바로 귀신이 머무는 처소로 말이다.

마치 아주 한적한 호숫가의 별장이나 카페와도 같다고 할 수가 있는데, 아줌마들이 계모임을 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 한적한 모임인데, 즉 귀신이 회의하고 회합하는 모임의 장소 제공자가 곧 우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이 모였다고 하는 증거가 무엇인가? 어제 그것을 설교했는데, 즉 귀신이 모였다고 하면 우리는 반드시 복음에 대해서 아주 극렬한 저항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전 국민의 귀신화 ??

그것이 곧 예수님이 의도한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러한 말을 듣고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귀신이 들락거리는 자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귀신이 들린 사람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나는 그냥 가만히 집에 있는데, 그것이 무슨 예수님을 해치는 자인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극렬하게 저항하고 반발한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곧 귀신이 들린 자라는 것이다. 귀신의 보편화인데, 즉 '전 국민의 귀신화' 라는 것이다(ㅋㅋ).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만 하면 모두가 다 반대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인간을 잘못 본 것이다" 라고 말이다. 즉 "예수님, 그것은 너무 오바하신 겁니다. 심하시네요" 라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거부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누구 중심으로 이야기하는고 하니, 예수님은 본인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그리고 우리는 누구 중심으로 살아가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 중심으로 살아가는데, 물론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그냥 같이 살아가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즉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바로 껍데기이고, 그 안에 누가 들었는고 하니, 귀신들이 모여서 계모임을 하고 있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귀신들이 계모임을 말이다. 그러니 듣는 귀신이 기분이 나빠서 어떻게 되는가? 극렬하게 반발을 하면서 귀신이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우리는 '옛 그릇' !!

그런데 어제 제가 설교를 하면서 마지막에 '그릇'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것도 옛 그릇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옛 그릇은 그냥 가만히 있는 그릇이 아니라, 우리의 옛 그릇은 죄가 있기 때문에, 즉 선악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매일같이 자체적으로 "나는 착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아이들의 숙제노트에다가 선생님이 "참 잘했어요" 라고 도장을 찍어주듯이 말이다. 혹은 도살장에 끌려온 돼지에게 '합격' 이리고 도장을 찍어주듯이,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물론 불합격이 되면 다시 위생검사를 받아야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 자신에게 '합격' 이라는 도장을 찍는 재미로 살아가는데, 그러니 그것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 중심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너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고, 너를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결국 '자기 변명' !!

사도바울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우리는 제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주님의 영을 받지 않은 사람은 뭔가 자꾸만 자기 쪽에서 접근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접근하면 제 아무리 10년을 믿었다고 해도 어느 한 순간에 그만 도로 어디로 떨어지는가? 자기의 정당성으로 도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20년을 믿어도 도로 떨어지고, 30년을 믿어도 도로 떨어지고, 물론 목사가 되어도 도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 자기 자신 외에는 달리 살아본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 외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변명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평생동안 하는 말들을 모두 모으면 딱 4글자로 '자기 변명'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자기를 정당화하는 말을 제외하고는, 제 아무리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칭찬한다고 해도, 결국은 모든 것이 어디로 다시 떨어지는고 하니, "그러니까 나는 잘났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양쪽 세계를 다 보지를 못하고,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접근하려고 그렇게 아둥바둥 애를 쓰는 자들의 공통점이란 말이다. 즉 우리 인간은 율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의 마지막에서 "너희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사도바울이 이상한 말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지금 제가 사용하는 경상도 사투리라든지 말이다(ㅋㅋ). 사도바울이 그 당시에 사용하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도바울의 모든 말을 자기 정당성으로, 즉 "나는 이렇게 올바르다" 라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다" 라고 보지 않고 말이다.

(행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 예수님, 나를 키워주세요 !!

다시 말해서, "나는 죄인이 아니라 훌륭하고 옳다" 라고 하는, 그런 자기 정당성의 재료로서 끌어당기기 때문에, 아무리 보기는 보아도 결국 나오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나는 잘났다" 라고 하는 것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키워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어제 설교시간에, 그렇게 자기를 키워달라는 것을 두 글자로 '확장'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곧 광야에서의 3번째 시험이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여, 당신의 세력을 넓혀라" 라는 것이다. 물론 2번째 시험도 마찬가지인데, 즉 "예수여, 당신이 뛰어내리면 추종자가 생기고 팬클럽이 만들어지는데, 그러면 당신의 이름이 온 천지에 날릴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교회부흥인데, 그런 유혹을 마귀가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유혹 속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었을 때 "아하, 이것은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러한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다" 라고 판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서 하는 짓이 더럽다고 하면서 혼자 기도원에 가지 말고, 그런 세계를 직접 부딪쳐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도원도 역시 그렇지만 말이다. 그렇게 부딪쳐서 "성경적으로 아닌 것 같은데, 기분이 매우 좋구나" 라는 것을 몸소 느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마귀에게 스펀지와도 같이 푹 젖은 옛 그릇이기 때문에 말이다. 즉 "성경적으로는 틀린 것 같은데, 효과는 만점이야"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 넓은 길과 좁은 길 !!

그러면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이 노옴!" 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십자가가 없는 곳으로, 즉 넓은 길로 접어들었음을 안다는 것이다. 그런 넓은 길에게는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멀리 있는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데, 즉 십자가가 줌렌즈로서 끌어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십자가가 멀어져서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가 없어지고 나면, 힘이 있고 권력이 있는 인간들만 그리워하고 사모하게 되고, 그것을 선망하게 되는데, 그것을 소망, 혹은 비전이니 하면서 "나도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살면서 칼을 한번 뽑았으면, 그래도 무라도 하나 배자" 라는 식으로, 자기 존재감을 알리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쟁체제에서 패배자가 되지 않고 기가 죽지 않으려고 하는데, 즉 넓은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보이는 좁은 길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를 본다고 하면서 깊은 산 속에 들어가지 말고, 아무리 그렇게 해도 십자가를 보는 자기 자신만이 더 크게 보인다는 말이다.

◈ 존재가 잘려서 사건이 !!

쉽게 말해서, 십자가는 자기 자신이 와장창 깨어지는 순간에만 보이게 되는데, 그것을 제가 오후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존재를 찢어버리고 잘라버리면 사건이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즉 언약은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은 사건으로 만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존재와 존재로 만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구약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건조치이기 때문에,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를 존재로서 밀어 부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그 사건이 무엇인가? '7' 이라는 창조의 숫자로, 즉 원래 언약으로 다가섰을 때 상대는 비언약이기 때문에, 언약 앞에서 비언약이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잘라내어야 하는데, 여기서 자른다는 것은 과거와 단절시킨다는 말인데, 그렇게 해서 매일같이 새로운 일이 필요하게 되면서 우리 자신을 사건화를 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손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자기가 힘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는 나실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힘이 자기 자신을 죽인다고 하는, 즉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을 죽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십자가라는 말이다.

◈ 예수님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 아들의 힘을 가지고 마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그 힘이 예수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데, 바로 거기에 다 쏟아버렸다는 것이다. 즉 '피' 라는 것인데, 바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서 말이다.

그렇게 해놓고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엉뚱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즉 "다 이루었다!" 라고 말이다. 우리 인간들이 보면 너무나 엉뚱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살을 하셨는데, 그것이 어떻게 다 이루었느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님은 자살하셨다는 것이다.

◈ 존재로서는 십자가를 알 수 없어 !!

사도바울은 그것을 두고 '걸림돌' 이라고 했는데, 즉 십자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십자가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존재로서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십자가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로 그런 십자가가 사건이 사건으로 다가와서 다같이 사건화를 시킨 사건이, 그것이 곧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는 성경말씀인데, 거기에서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니 사도바울은 존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자기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해서 계속 발생하는 사건으로서의 '나' 라는 것이다. 즉 사건의 결과물이 곧 '나' 라는 것이다. 매일같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하는데, 그렇게 죽고 다시금 살고 하는, 그런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 왕년에 나도 어마어마했다 !!

개그콘서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오는데, 즉 "왕년에 나도 어마어마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존재적이냐는 말이다. 그러면서 "니가 기차를 한번 웃겨봤어? 내가 말을 한번 했더니만 기차가 우습다고 난리였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왕년에 자기가 어마어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왕년이라는 것은 지금 현재의 시간으로 뭉치게 되면, 즉 사건을 뭉치게 되면 면적이 되고, 그 면적이 그만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20대에 참 예뻤거든" 이라고 하는데, 우리 권사님의 경우에는 젊었을 때 얼마나 빼어났는지 모르는데, 물론 지금도 보통 미모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니 "왕년에 나도 미인이었어" 라고 하는데, 지금 전부가 토하고 싶어하는 분위기인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왕년에 나도 어마어마했다" 라고 하는데, 시집을 조금만 늦게 더 갔으면 의사와 결혼을 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왜 군인과 결혼을 했는가? 그것은 바로 존재를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까, 그만 사건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원하지 않는 길로, 그것을 "눈까풀에 무엇이 끼었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인생이라는 것은 본인이 원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살게 된다는 것이다. 환경이 그렇게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집어넣게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뒤에 가서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선택했다고 잘난 척을 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도대체 무엇을 선택했다는 말인가? 남자를 얼마나 세워놓고 선택했는가? 기껏해야 서너 명인데 말이다. 그것도 선택인가? 적어도 만 명은 되어야만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 수동적 선택, 강요된 선택 !!

그렇게 인간이 자기가 존재하는 주변의 환경에 의해서 기껏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두고 '수동적 선택' 이라고 하는데, 즉 강요된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강요된 선택이 무슨 선택이냐는 말이다. 사실은 선택이 아닌데, 그렇게 사람은 강요된 상황 속에서 기껏 선택한다는 것이 그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강도를 만났을 때, 강도가 "당신 목숨을 내놓을래? 돈을 내놓을래?" 라고 했다면, 그것이 무슨 선택이냐는 것이다. 자기가 돈을 내놓지 못한다고 하면 자기 목숨이 없어지는데, 그러니 그것은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돈을 내놓아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 목숨이냐? 돈이냐?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경우에는, 우리가 길에서 만나는 강도만이 강도가 아닌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두고 강도라고 하는데, 즉 "니 회사에서 나갈래? 아니면 내 말을 들을래?" 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직장인들에게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상이 아니냐는 말이다. 회사의 사장이 "니가 이것을 하지 않으면 사직서를 써라" 라고 하면, 그게 곧 강도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건 방금 말한 강도가 하는, 즉 "당신 목숨을 내놓을래? 돈을 내놓을래?" 라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선택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즉 강요된 선택인데, 그러니 우리보다 더 높고 큰 어떤 힘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힘을 좋아하게 되는데, 그 힘이 무엇인가? 바로 돈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우리는 돈보다 하나님을 더 높은 층으로 바라보는데, 그러니 교회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돈보다 밑에 있는 층에서 믿는 것인데, 즉 '하급신' 이란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뭐라고 하셨는가? "참새를 봐라. 새가 언제 창고를 지은 적이 있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새는 무엇이 없는가? 돈도 없고 창고도 없는데, 그러면 새와 바로 연결된 위층은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라고 하는데, 즉 그것이 곧 '잡초' 라는 말이다.

이러한 잡초는 위층의 누구와 연결되어있는가? 그것은 곧 하나님인데, 그래서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잡초도 오늘까지는 누가 기르신다는 말인가? 주께서 기르시는데,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마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이방인과는 다른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내용이 바로 그러하다는 말이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 성경에 응하게 하심이라 !!

이제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겠는데, 여기 교재 142페이지에 보면 아주 중요한 대목이 나오는데, 밑에서 세 번째 줄에 보면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는지, 그런 원리 중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하나 나온다는 것이다.

교재를 한번 살펴보자.

** '이렇게 해서 성경에 응하게 하심이라' 라는 것이 신약성경에 반복해서 나온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렇게 해서 성경에 응하게 하심이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의논할 의사가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오는데, 즉 "예수님의 메시야 됨은 사람들의 증거에 의탁하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나를 좀 알아다오" 라는 것이 없는데, 즉 예수님은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간에,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해서만 일을 하는 것이지, 사람들의 견해를 물어보고 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요 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요 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 2: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이전에 한나라당의 윤리위원장을 했던 인명진 목사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명박 대통령과 그렇게 소통이 되지 않을 줄은 몰랐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소통' 이라는 것은 양쪽이 모두 동등 된 위치에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인데, 그러니 이명박 대통령과 소통이 된다고 하면 자기가 곧 대통령이란 말이다. 아니면 그 위에 있던지 말이다. (???)

◈ 하나님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가 ??

사람에게 있는 악마적 본성이 무엇인고 하니까,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었다" 라고 하면 악마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묻는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해서 물을 수도 있는데, 또한 예수쟁이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물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즉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 하나님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가?" 라는 것이다.

충분히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도대체 무슨 심보인가? 자기가 자기에게 질문할 권리가 있고, 또한 대답도 자기가 선택해서 받아드릴 권리도 있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즉 자기는 누구로부터 질문을 받을 필요는 없고, 반면에 자기는 누구에게든지 질문을 할 권리나 자격은 있음을 기정사실화를 한다는 것이다. 그게 곧 '천상천하유아독존' 인데, 즉 '신' 이라는 말이다.

◈ 욥의 경우에 !!

욥기 마지막에 보면 욥이 뭐라고 하는가? 욥이 고난을 받으면서 계속해서 누구에게 질문을 했는가? 하나님에게 했는데, 즉 "하나님이여, 왜 저에게 고난을 주었습니까? 제가 저 사람보다도 더 의로운데 말입니다. 저 사람은 고난이 없는데, 하지만 더 의로운 저에게는 왜 고난이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욥이 계속해서 그러한 질문을 해대는데, 그것을 따지고 싶다고, 즉 "자기 몸을 떠나서 구속자와 마주 대해서 정말이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따지다가 나중에 하나님과 진짜로 마주치게 되니 어떻게 되었는가? 그런 질문이 나왔는가?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동안 그렇게 나불나불거리다가, 욥의 그런 소리를 듣는다고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애를 먹는지 모르는데, 욥이 하도 길게 이야기를 해서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왜 욥이 입을 닫고 말았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한 가지만 대보라는 것이다.

◈ 너희들이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아는가?

하나님께서 욥을 보고 "욥아, 빗방울이 황무지에 내리는 이유를 아는가?" 라고 하셨는데, 황무지이니 사람이 개간하지 않은 땅을 의미하는데, 즉 사람의 노동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말이다.

(욥 38:12)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욥 38:13) 그것으로 땅끝에 비취게 하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한 일이 있었느냐
(욥 38:14) 땅이 변화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고 만물이 옷 같이 나타나되
(욥 38:15) 악인에게는 그 빛이 금한바 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욥 38:16)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욥 38:17)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욥 38:18)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욥 38:19)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욥 38:20) 네가 능히 그 지경으로 인도할 수 있느냐 그 집의 길을 아느냐
(욥 38:21)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 때에 났었나니 너의 연수가 많음이니라
(욥 38:22)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욥 38:23) 내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저축하였노라
(욥 38:24)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땅에 흩어지느냐
(욥 38:25)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욥 38:26)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욥 38:27)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하지만 사람들은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것은 본능적으로 누구와 관련을 시키는가? 즉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도 누구 때문에 와야한다고 보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곧 '나' 중심으로 보는데, 즉 '나' 때문에, '나'를 위해서 비가 와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하나님은 '나'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아 !!

그러니 자기와 상관이 없는 황무지에, 즉 황무지는 자기 소유의 부동산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전혀 등기소에 등기가 된 적도 전혀 없고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황무지에 비를 내린다는 것은 결국 무엇과의 차단이라는 말인가? '나' 라고 하는 제3의 관람객,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관찰자의 자리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욥아, 너는 하나님의 일에 관람하지 말고, 너를 어디에 집어넣는고 하니, 현재 하나님의 액션, 즉 하나님의 움직임 속에 집어넣어서 하나가 되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액션 속에 말이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그 움직임 속의 하나가 곧 욥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욥이 빗방울이라고 하면, 즉 인생이라는 것은 떨어지는 빗방울과도 같다는 말이다. 일종의 소나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빗방울을 보고 "빗방울아, 너는 왜 떨어지니?" 라고 한다면, 아마도 "너, 미쳤냐?" 라고 하지 싶은데 말이다. 빗방울은 그냥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빗방울이 황무지에 떨어진다는 것은, 도대체 그 목적이 무엇인가? 빗방울 본인들이 알아서 떨어지는 것인가? "야, 여기가 우리의 목적지이다. 다같이 떨어지자" 라고, 일명 '황무지 대작전' 이라고 말이다(ㅋㅋ).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비는 내렸고, 그러니 그 비는 황무지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모든 것이 누구의 뜻인가? 빗방울과 황무지가 만나서 무엇을 구현하고 무엇을 생산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런 모든 일을 유발시켰다는 것을, 즉 "이렇게 해서 성경에 응하게 하심이라" 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고난이 욥을 삼켜버리기에 !!

그런데 욥의 경우에, 본인은 하나의 관람객이 되어서, 즉 자기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제3의 관찰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자기와는 별개인 하나의 관찰대상이 되어서, "하나님이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보자"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나온다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는 것인데, 즉 이미 자기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욥의 자리를 어느 자리로 데리고 가시는가? 욥 자체를 그만 삼켜버리는데, 즉 하나님의 고난이 욥을 삼켜버리는데, 그렇게 되면 욥의 의미는 무엇인가? 욥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당하는 고난을 미리 맛보여주는 실습재료로서 이 땅에 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나 모세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호세아나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물론 신약의 사도바울이나 오늘날의 성도들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이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살펴보면,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말씀인데 말이다. 소위 달란트 비유도 있지만, 거기에 양과 염소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가 수능시험처럼 문제를 내보겠는데 말이다.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25: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 누가 소자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가?

예수님께서 오른 편에 있는 사람에게 마지막 심판 때 뭐라고 하셨는고 하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했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다음 중에서 뭐라고 했겠는가? 구원을 받는, 즉 양에 속한 사람들이 말이다. 다음 보기 중에서 한번 골라보라는 것이다.

1) 우리가 주님이 그렇게 나오실 줄 알았습니다.
2)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그렇게 인정해주시니 감사합니다.
3) 우리가 참으로 힘들었지만, 그렇게 알아주시니 고맙습니다.
4)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지요?

이 중에서 몇 번인가? 4번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느냐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는가? 왜 그런 말을 하느냐는 말이다. "주님이 그렇게 하실 줄 알았습니다" 라고 나와야 정상이 아니냐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이라는 것은 일종의 '액션' 인데, 즉 움직임 자체라는 말이다. 그러니 양에 속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의 경우에, 본인의 움직임 전체가, 즉 자기가 술집에 가든지 그 어디를 가든지 간에 그 움직임 전체가, 결국 예수님의 선택 안에서는 주님을 향한 일로서 판정이 난다는 것이다.

◈ 여러분, 하나님의 일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

그것은 오늘날 교회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인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나님의 일과 세상일을 구분해서, "여러분은 가능한 한 세상일은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것을 알아주십니다. 부족한 이 목사도 아는데 주님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주님이 알아줄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려고 하는데, 즉 주님이 좋아하는 일과 좋아하지 않는 일을 따로 떼어놓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구원받는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주님의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자기 액션, 즉 태어나서 똥 싸고 오줌싸고 밥 먹고, 나중에는 절에도 가면서 온갖 짓들을 다 했는데,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주님의 일로서 누가 판명을 했다는 말인가? 누가 말인가?

본인이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도 놀란다는 것이다. "아니, 제가 언제 주님을 위해서 그런 일을 했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이 소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하시는데, 하지만 그 소자의 경우에도 본인이 판정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지 말이다. 본인은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살았을 뿐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지옥에 가는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즉 주님이 "너희들에게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라고 하면, 그들은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모든 것이 강요된 선택 - '성경에 응하게 하심이라' !!

그러니 우리 인간은 주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만약에 우리 입술에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나온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강요된 선택이라는 말이다. 즉 주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예수님은 나의 주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지만 그것을 인위적으로 시인하게 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주님에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 떨어지는 꼴이 되고 마는데, 즉 예수님을 주라고 믿는 자기 자신을 그만 믿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라고 믿는 자기 자신을 말이다. 그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그런 환상 속에 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 엘리야의 경우도 !!

그렇게 되면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성경말씀이 이해가 되는데,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의 경우도 역시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그리고 엘리야는 자기밖에 남지 않았다고 까불면서, 7000명이 남아있는 줄도 모르고 자살을 하려고 했는데, 아니 주의 종이 되어서 자살을 왜 하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성경에 엘리야 외에도 그런 경우가 많이 나오는데, 주의 종이 되어서 자살을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말이다. 제가 다음 주에는 요나의 자살 이야기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하는데, 요나가 오죽 답답했으면 자살을 다 하려고 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엘리야가 죽던 요나가 죽던 간에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주께서는 그냥 뽑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태어나면 죽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요나나 엘리야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데, 왜 그런가? 자기 인생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가 함부로 다룰 수가 있는 인생이 아닌데, 즉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라는 것이다.

◈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

예수님의 경우에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쓴잔을 마시고 말고 하는 것이 본인에게는 권한이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쓴잔이 넘어가게 하소서" 라고 하신 것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통과하기 때문에, 그런 우리 인간의 죄의 한계를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기껏해야 이것밖에 안 된다" 라고 말이다. 즉 "어떻게 할 수만 있으면 이런 고통이 없이 넘어 가면 안 됩니까?" 라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뒤에 무엇이라고 하는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예수님 외에 다른 인간은 여기에 전혀 성립될 수 없는데, 즉 인간은 아무도 그것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게 되면 소급해서, 즉 "우리가 스스로 선택했다" 라는, 그런 모든 것을 소급해서 그만 주의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경우에, 그 강도는 자기의 입장을 좀 생각해야 할텐데, 자기가 지금 살인강도인 것은 생각하지 않고 뻔뻔하게 뭐라고 하는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강도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태어나서 강도 짓을 한 것은, 그 모든 것은 결국에는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말인가? 그것은 마지막에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것인데, 즉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라는 차원이라는 말이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

또한 삭개오의 경우에도,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삭개오의 집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즉 삭개오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 삶에 예수님이 침범하게 되면, 그 삶에 십자가의 죽음이 지배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자기의 생존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는데, 즉 자기가 살고 죽는 것도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증거용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식당을 운영하면서 돈을 받고 음식을 파는 것도 무엇인가? 결국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그러니 사도바울이나 사도요한의 경우에는 두려움이 생길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두려움이 생기려고 하면 '나' 라는 것을 따로 챙겨서, 그렇게 따로 있는 '나'를 살아보려고 사수를 해야 생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어버렸으니, 죽은 것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고 말이다.

그래서 사도요한의 경우에 "내가 두려워할 것은 좀 다오. 내가 두려움이 없어서 미치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두렵겠는가?" 라는 식인데, 길을 가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튀어나와서 '욱' 하는 두려움은 말고 말이다(ㅋㅋ). 정말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 두려워하게 되는,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는, 즉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라고 하는데, 즉 사랑 안에 있으면 심판이 와도, 쓰나미가 몰려와도, 그런 쓰나미가 우리의 이웃나라에 쳐들어온 것도, 우리가 이 세상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는데, 거기에 동원된 것이란 말이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도대체 무엇이 반석인가?

제가 어제 낮에 설교를 하면서, 홍수가 나서 무너짐이 심하다고 말이다. 즉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을 홍수가 나서 치게 되는데, 세상이 어느 인간이 그 심판의 홍수를 이기느냐는 말이다. 쓰나미도 이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심판을 이길 수 있는 반석을 인간이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반석도 아닌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과연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게 인생의 반석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마지막 심판의 저주를 이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반석이 될만한 것을 가지고 기뻐해야 하는데, 전혀 반석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동산 값이 올라서 무려 2000억 원이 되었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 반석이냐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이지 하나님의 심판을 버틸 수가 있는 반석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든든한 직장, 건강한 육체, 과연 그런 것이 반석인가? 도대체 무엇이 반석이냐는 말이다. 그런 것은 마누라나 좋아하지 말이다(ㅋㅋ).

아무튼 인간은 흐름이기에 모든 것을 다 놓고 가야하는데, 그러니 반석이 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반석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진짜 반석으로서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역시 '성경에 응하게 하심이라' !!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이 모든 것은 "이렇게 해서 성경에 응하게 하심이라" 라는 것인데, 기적을 행한 것도 성경에 응하게 하심이고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만 듣지 다른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데, 우리가 아무리 간청해도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간청하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는 응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니는 니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내가 만든다" 라는 응답을 받을 때, 우리는 갑자기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데, 그게 곧 사랑이라는 말이다. 심판을 이기는, 그래서 심판을 넘어서, 그 너머에서 심판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심판이 면제된 상태에서 말이다.

그렇게 되니 두려움이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는데, 아니 주님께서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목사가 왜 성도를 정죄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피로서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목사가 뭔데 정죄를 하니 마니 하면서 난리를 피우느냐는 말이다.

"목사님, 저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뿐입니다" 라고 하면, 목사는 더 이상 할 말이 필요 없는데, 도대체 거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런데 꼭 자기 잘난 척을 하니,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고 만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에게는 말씀대로, 예언대로 이루어야 할 과업이 있었다. 그것을 십자가상에서 이루어내셨다. 즉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다(요 19:30).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 다 이루었다 !!

김성환 목사님이 십자가마을 사이트에 "다 이루었다" 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는데, 잘 썼다는 것이다. "십자가 안에는 시간이 없다" 라는 글도 잘 썼고 말이다. 목사가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르는데, 그렇게 씹으려고 하는 인간들이 많은데 말이다. 그래도 "그래, 이제 마음대로 씹어라" 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용감하냐는 것이다.  

아무튼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는 말인데, 즉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 양쪽으로, 즉 하나님 쪽과 인간 쪽으로, 그렇게 온 우주로 다 퍼져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딩' 하고 종을 치면 그 종소리가 산 밑에 있는 마을을 비롯해서 온 누리에 퍼져나가듯이 말이다. 그렇게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모두 다 퍼져나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신학에 보면 나오는데, 즉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라고 말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는 말씀과,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는 말씀도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로 이런 모든 내용들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여파로서 발생되고 생산되는 것인데, 그것이 곧 '성도' 라는 말이다. 즉 "다 이루었다" 라는 능력으로만 성도가 생겨난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에게 숱한 난관과 역경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이루어져야 할 것은 이루어졌다" 라고 하셨다(마26:54).

(마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 예수님은 때를 맞추어서 일을 하셨다(마26:45). "때가 가까웠느니라"

(마 26: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 '때'가 가까웠느니라 !!

여기서 "때가 가까웠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 '때' 라고 하는 것은 누구만 아는 때인가? 오직 예수님만 아는 때인데, 그러면 예수님만 아는 때를 우리가 알 수 있는가? 물론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때를 알 수 없고, 그 때가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의 때인데, 그 한 시점에서 무엇이 들어가는고 하니, 역사를 초월한 묵시 덩어리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어제 오후설교시간에 '안흥찐빵' 이야기를 했는데, 즉 큰 다라이에 있는 앙코가 작은 찐빵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것을 찐빵이라고 하는데, 앙코가 없는 찐빵은 찐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앙코가 큰 다라이에, 여기서 다라이는 표준말로 하면 대야인데(ㅋㅋ), 즉 큰 대야에 있는 앙코가 찐빵에 들어가게 되면 비록 작은 양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안흥찐빵' 이라는 상표를 붙여서 팔리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우리 아담의 몸은 죄만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데, 그래서 "나도 왕년에 어마어마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매일같이 지나간 역사 가운데 좋은 것만 골라서 지금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하는데, 자기 존재의 정당함을 말이다.

우리는 그런 불순한 옛 그릇인데, 그런데 그런 그릇에 무엇이 담기게 되는가? 주님의 긍휼의 그릇이, 즉 주님의 용서함이 담기는데, 그렇게 주님의 용서가 담기게 되면 우리가 20대이든 50대이든 간에, 즉 맨 그릇은 그 그릇이고 흐름은 그 흐름이라고 해도, 우리는 '안흥찐빵'이 된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종이, 즉 '예수님의 것'이 된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때를 초월한 때가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말이다. 2005년도나 2011년도나 그 인간이 그 인간인데, 하지만 모두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은 이런 '때'를 묵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역사로 보고 때를 잡게 되니, 그만 문제가 커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2005년도에 은혜를 받았는데, 그만 2007년도에 모두 쏟아버리고, 그래서 2010년도에 겨우 채웠는데, 그만 2011년도 3월에 와서 그만 사건이 터져서 다 쏟아버렸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이 재림하게 되면, 자기가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본인이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것은, 그것은 안흥찐빵을 스스로 만드는 꼴이라는 것이다. 물론 괜찮은 것을 골라서 앙코도 만들고 말이다. 하지만 찐빵은 주셔야 하는데 말이다.

◈ 시간을 넘어선 동네 !!

역사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시간을 초월해서 모세와 엘리야가 한 자리에서 같이 이야기한 것을 우리가 아는데, 그들은 시간을 초월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히 성경에 나와있다는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같이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 예수님도 같이 계시고 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고 말이다. 참으로 희한한 동네라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을 묻지 않고 넘어선 동네인데, 즉 언제 어디서나 같은 성질이(?) 개입되는, 그러한 시간대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때'를 예수님은 아시는데, 바로 그 '때'가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사도바울의 경우에, 25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졌던 사건 속에 강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도 함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그런 시간을 초월한 이야기가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이가 50이 되어도 우리 안에 십자가가 살아있으면, 우리는 3살이든 4살이든 간에 언제나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란 말이다. 즉 "내가 나 된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였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그것을 차후적으로 소급해서 모두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7살에 절에 간 것도 주님의 뜻이었다" 라고, 또한 "9살에 성경책을 찢었다" 라고 하면, 그렇게 역시 소급해서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들어있는 앙코는 시간을 초월하니 말이다. 그러니 어느 한 순간도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이 살아온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 내가 진작 예수님을 알았으면 ??

그러니 우리가 '왕년에' 라는 것 때문에 자랑도 하지 말고, '왕년에' 라는 것 때문에 낙담이나 절망도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어떤 분은 "내가 진작 예수님을 알고 믿었으면..." 라고 아쉬워하는데, 하지만 진작 알았어도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강요된 선택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때는 예수님을 모르고 믿지 않도록 주님이 그렇게 말렸다는 말이다. 즉 설령 20대에 복음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그게 복음인지 뽁음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저도 복음을 알기 전에 대구에 있는 대명교회에 나간 적이 있는데, 그렇게 가서는 비판의식만 실컷 생겼는데, "교회에 헌금을 해도 취직도 안 되고 말이야" 라는 식으로 욕을 하고 말이다. 그때는 제가 취직이 되지 않아서 고민하던 때이니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란 것은, 자기 아쉬움을 채워주어야 그게 하나님답다는 것이다. 그게 착한 하나님이고 말이다. 그런 사고방식은 곧 자기 역사를 유지하겠다는 것인데, 즉 "내 역사의 스케줄에 따라서 내가 알아서 만들어내겠다" 라고 말이다. 우리 인간은 바로 그런 생각을 계속해서 해왔다는 것이다. 자기 역사를 유지하겠다고 말이다.

◈ 모든 '때'는 '때'가 있기 마련 !!

하지만 성경말씀에 보면 그것이 아닌데, 즉 모든 '때'는 '때'가 있기 마련이고, 그 '때'는 주님께서 찾아오실 '때'인데, 그렇게 찾아오시게 되면 그 '때'부터는 우리의 '때'는, 즉 우리의 역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그만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 일기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왕년에' 라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크든지 작든지 간에, 그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간증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이냐는 말이다. 굳이 간증을 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지금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곧 본의 아니게 주님을 위한 일인데, 본의 아니게 말이다. 그런데 자꾸만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믿는 시늉을, 즉 믿음도 하나의 권력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말이다. 

그런 이야기 거리를 뽑고 편집해서, 그것을 간증으로 만들어서, 자기 존재감을 알리는 식으로 한다면, 그것은 참 곤란하다는 것이다. 즉 "6.25 때 폭격을 맞았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계시를 받고 부흥사가 되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부흥사들의 그런 단골메뉴가 이제는 식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러니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라는 것인데, "왕년에 나는 어마어마했다" 라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 왕년에 어마어마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설령 그런 왕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러면 또 다시 죄를 짓고 살아가는데, 물론 그 중에서 못난 것은 다 숨기고 잘난 것만 챙겨서 '왕년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죄라는 말인데, 즉 산다는 것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저의 경우에 '왕년에' 우리 집에는 화장실이 하나였는데, 식구는 무려 13명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서 누군가가 설사가 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머지 12명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말이다. 변비가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것은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직장에서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어디서 화풀이를 하는가? 집에 와서 식구들에게 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집에서 화가 나면 어디서 화풀이를 하는가? 직장에서 한다는 것이다. 교사의 경우에 학생들에게 마구 스트레스를 풀고 말이다.

◈ 산다는 것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 !!

그러니 우리 인간은 어떤 욕망의 껍데기가 되다가보니, 이게 그만 분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가 누구인가? 영문도 모르는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란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가 자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남들에게 아픔을 주는 식으로 살아가는데, 과거에도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란 말이다.

아플려고 하면 그냥 자기 혼자 아프면 되는데, 치매에 걸려서 아들을 보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심하면 자식을 위해서 목을 조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싶은데,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떨어져서 보상금이라도 탔으면 하는 바램도 든다는 말이다. 그렇지요?

부모가 되어서 매일같이 하는 말이 "내가 자식을 키우면서 애를 먹었다" 라고 하는데, 그것하고 치매에 걸려서 10년 동안 병 수발을 하는 것과 비교를 해보라는 것이다. 어느 것이 힘이 드는지 말이다. 자식을 키울 때는 예쁘고 키우는 보람이라도 있는데 말이다. 한번 계산을 해보라는 것이다. 어느 쪽이 힘이 많이 드는지 말이다. 

요즘 60대는 눌린 세대가 되어서, 앞뒤로부터 그냥 다 눌림을 당한다고 하는데, 즉 대접을 실컷 해주고는 정작 자기는 그런 대접을 받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50대나 40대에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60대가 되면 그때는 연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중고가 아니라 그만 삼중고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연금도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앞선 세대에서 미리 다 땡겨서 써버렸다는 것이다.

◈ 주님의 '다 이루심'에 감사하면, 굿 !!

하지만 묵시의 때를 보게 되면, 이런 모든 것이 다 무엇인가? 주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조장해놓은 환경이라는 말이다. 즉 주께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신 그 말씀에 다 포함이 되는, 그런 일부가 되는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 하나 하나가 모두 포함이 된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 우리는 소급해서 감사하고, 또한 앞으로도 두고두고 살아가면서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주님, 제가 죄인이니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라고 하는, 그렇게 해서 주님의 은혜가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실제로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셨는데, 우리는 우리의 만족을 몰라서 교회에 와서 데모를 합니다. "주님, 왜 제가 원하는 것을 제 때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얼마나 반발을 하고, 또한 주님을 원망했습니까? 그러니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는 길을 걸어가게 해주시고, 십자가가 사라진 넓은 길은 가지 않도록 인도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3,26 오후 7시에 마침.

                                           손님이 없는 것도 역시 주님의 '다 이루심'의 일부임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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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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