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43강 환상과 현실

피/피 2012. 8. 29. 10:12

피43강 환상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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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10328피p143환상과현실

피43강 환상과 현실
        
[11 대구강의 5] - [피 43] - 환상과 현실
                                                                                
                                                   11,03,2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와 태어났노 ??

오늘은 교재 143페이지부터 살펴보겠는데, 먼저 어제 제가 설교를 하면서 욥기 초반부를 언급했는데 말이다. 욥이 말하기를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나를 태어나지 말게 하지요? 왜 하나님께서 관여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했는데, 즉 "엄마 뱃속에서 지워버리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이다.

욥에게서 그런 고백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것은 평소에 살아가면서 나오는 고백이 아니라, 뭔가 외부에서 강한 충격이 왔을 때, 그것을 '딥 임팩트'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 이전까지는 무엇인가? 자기가 여기고 있고, 또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고 하는, 그런 주고받고 주고받는 관계 속에 자기가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임팩트가 더욱 더 강하게 오게 되니, 즉 "제가 하나님을 잘 믿겠습니다.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즉 '나' 라고 하는 것이 이미 구축되어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 쪽에서 날아오는 말씀을 어떻게 잘 지켜서 순종하고 영광을 돌릴까?" 라고 하는, 그러한 구조자체를 주님께서 더 강하게 치게 되니 용납이 되지 않고 그만 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자기는 견딜 만하고 든든하다고 여겼는데, 그래서 "주여, 무슨 말씀을 지키면 됩니까?" 라고 나서지만, 그러나 진짜로 강하게 오게 되면 결국은 어떻게 되고 마는가? "주여, 왜 저를 이렇게 만들어놓았습니까?"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말씀을 잘 지켜드리면 되는데, 그런데 왜 저에게 이런 압박을 가합니까?" 라고 말이다.

◈ 구원의 자리는, '내 안'에 !!

그런데 이러한 고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구원의 자리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구원의 자리가 자기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원망하고 하소연하는, 즉 죄를 양산하고 생산하는 그 지점이 곧 우리가 구원이 되는 지점이란 말이다. 놀랍게도 말이다.

물론 우리는 구원의 지점을 '내' 바깥에 두고 찾아가는 식인데, 즉 교회라는 어떤 장소에 가면 구원이 되는 줄로, 그렇게 안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도원에도 가고 말이다. 하지만 구원은 '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신약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이 어려운 이야기를 아주 간단하게 말한다는 것이다. 항상 신약성경은 너무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하도록 하는데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몸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주 간단하다는 말이다.

그 안에는 분명히 욥의 자기 생일저주가 포함되어있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빠진다는 것이다. 즉 "이제 우리 몸을 깨끗하게 하면 성전이 되는구나" 라고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모든 것을 오해하게 되는데, 앞의 구약적인 흐름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신약성경으로 곧 바로 들어가서, "이제는 내가 술 담배도 끊고 깨끗하게 하면, 주님이 함께 계시는 성전이 되는구나. 그러니 이제는 거룩한 행실을 보이자" 라고 말이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 '거룩한 행실' 이란 무엇인가?

참고로 이런 것은 알아놓으면 좋은데, 거룩한 행실은 무엇인고 하니, 즉 거룩한 행위는 어디에서 피어나는고 하니,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동행하실 때,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에게 받은 계명이 있는데, 그게 곧 율법인데 말이다. 그 율법 안에는 제사법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한 행실과 성전이라는 것은 어느 지점인고 하니, 성소, 혹은 성막이 있는 바로 그 지점에서만 비로소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성소가 있는 곳에서 말이다. 여기 바깥에 있는 백성들이 거하는 천막들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중국에 같이 가신 분은 이 그림을 알지 싶은데, 제가 중국에 가서 강의를 하면서 성막과 성소를 설명하면서, 백성들이 사는 모든 텐트의 입구가 어디로 향하고 있다고 했는고 하니까, 동서남북 어디인가? 오직 성소가 있는 쪽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번제를 드리는, 즉 연기가 피어오르는 쪽으로 구멍이 나있어서, 백성들은 눈만 뜨면 그쪽으로 바라보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룩한 행실은 죽으면 나오는 것인데, 하지만 자기가 살아서 나오는 행실은 어디로 귀속되는고 하니, 자기 잘남으로 다시 되돌아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자기 잘남으로 말이다.

◈ 망개떡을 아십니까?

오늘 아침에 TV를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즉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40년 동안 망개떡을 팔고 있는 아저씨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 망개떡은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전혀 하지 않는데, 집에서 직접 만들고 해야하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이 양반은 오직 이 망개떡을 3대째 만들고 있는데, 그러니 존경스럽다는 것이다. 70이 넘은 그 나이에 다른 사람들은 주식을 한다면서 객장에서 폼을 잡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20kg이 넘는 밀가루 부대를 두 개나 나르면서 망개떡을 팔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존경스럽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망개떡 장사를 할 용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사회에서 존경이란 말은 무슨 뜻인고 하니, "당신의 자체적인 노력에 대해서 인정해주겠습니다" 라는 의미인데,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을 모두 포기하고 당신의 삶에 종속시키겠습니다" 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존경합니다. 대단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내 삶을 다 때려치우고 당신을 따라갈래" 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하, 저렇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구나. 그러면 나도 저런 사람을 본 받아서 성실하게 살아야지" 라고 하지 말이다.

◈ 인간들은, 예수님을 타인으로 !!

여기서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끄집어내었는고 하니, 우리가 예수님을 항상 무엇으로 여기는고 하니, 그만 '타인'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앞에 무엇인가를 붙인다면, 그것도 어떤 타인인고 하니, 존경스러운 타인으로 말이다. 그런 존경스러운 분으로 여기니,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의 타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몸이 성전이다" 라는 것이 거짓말이 되고 마는데, 신약성경이 그래서 어렵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뚝 떼어서 펼쳐놓고 "아이쿠, 존경스러워라" 라고 하는 책이 아닌데, 이미 구약시대에 여호와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다가 실패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일반 사람들이, 즉 이방인들이 신을 섬기듯이 그렇게 했는데, 즉 "훌륭하신 하나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복을 주옵소서" 라고 말이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을 가지고 어디로 오시는고 하니, 자꾸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개인이 있던, 즉 죄가 있던 그 자기까지 계속해서 접근해가니, 그들이 비록 이스라엘 사람들이지만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 거리를 두고서 자기들이 드리는 제사를 받고 흠량해서 복을 주고 하면 참 좋은데, 그렇게 하면 자기 것도 다치지 않고 주님께 드릴 것은 드리고, 그런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주님은 계속해서 죄를 지적하면서 파고 들어오니,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받지 않고,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요구하실 때,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거기에 대해서 언약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덤벼드신다는 말이다.

◈ 아브라함 언약과 노아언약 !!

언약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연과의 관계가 아니고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말이다. 그게 곧 '아브라함 언약' 이라는 것이다. 자연과의 맺은 언약은 무엇인고 하니, 사람은 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제외시켰는데, 그래서 사람이 아닌 자연과 상대해서 맺은 언약이 곧 '노아언약' 이라는 말이다.

물론 잘 알고 있겠지만 이 노아언약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노아언약은 사람이 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과 상대해서, 그 자연에다가 무지개 정표를 세워서, 즉 심고 거두고 하는, 그런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라는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그것은 이제 사람이 아닌 자연세계와 맺은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연과 관계의 맺은 언약을 통해서, 즉 "이제 두 번 다시는 물로서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 라고 약속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 언약이 어디에 걸치게 되는가? 자연 속에, 즉 자연의 공간 안에다 걸치게 되는데, 그러면 무엇으로 그렇게 된다는 말인가? 그것이 바로 '무지개' 라는 것이다.

◈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

하지만 아브라함의 언약은 그 언약의 정표가 어디 있는가? 인간의 신체에다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할례언약' 인데, 그 할례언약이 어깨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니면 귓바퀴나 팔꿈치 같은데 말이다. 그런 곳에 있어도 별로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남자의 생식기 끝자락에 있다는 것이다. 언약의 정표가 말이다.

우리가 수치스러워서 가리우고 싶은 그 생식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곳에다 정표를 새겼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인데, 즉 이삭은 아브라함의 생식능력에 의해서 나온 자식이 맞다는 말인가? 아니라는 말인가? 전혀 아니라는 것인데, 그러니 할례가 언약이 아니라 이삭이 곧 언약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머리가 '띵' 합니까?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에서 있어서 자기 자식은 결단코 혈육적인 관계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리고 이런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도래했기 때문에 생긴 놀라운 기적적인 것이지, 결코 아브라함이 솜씨를 부려서, 즉 늙은 자기 와이프인 사라를 붙들고 어떻게 재주를 부려서 낳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라는 이미 그때 태가 죽었고, 또한 아브라함의 생식기는 이미 할례가 되어있다고 할 수 있는데, 물론 할례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이니, 아브라함이 직접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지만 말이다.

(창 17: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창 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 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 언약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튼 이렇게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아서 언약의 자식인 이삭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닌데, 즉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언약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주님께서는 아담의 능력으로, 즉 인간의 재주로 가능한 것은 구원의 근거로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받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시는데,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힘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는 힘이 우리 속에서 나와야, 그것이 곧 하나님이 이끄시는 힘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론적으로, 지식적으로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하지만 어떤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총동원을 시킨다는 것이다.

◈ 교만한 에브라임 !!

어제 오후에 호세아서를 설교했는데,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을 보고 교만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들이 앗수르와 애굽을 돌아보았다는 것이다. 사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강대국을 의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두 글자로 '교만' 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녹취자 - 남쪽나라가 유다이니, 북쪽은 이스라엘, 혹은 에브라임이라고 함)

아무튼 하나님은 할 수 없는 것을 내놓으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뭐라고 하는가? "아니, 할 수 없는 것을 내놓으라고 하시면,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니, 한우 맛이 나지 않는데, 그걸 한우라고 하면 어떻게 하는가?" 라는 말이다.

◈ 그 맛이 나는데 어찌 !!

그것이 대장금 내용을 패러디한 CF에 나오는 대사인데, 여러분은 처음 듣는다는 분위기인데 말이다. 왜 수랏간에서 음식을 배우는 아이가가 어떤 음식을 맛보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데, 즉 "그런 맛이 나기에 난다고 했는데, 아니라고 하면 어찌합니까?" 라고 말이다. 여러분도 먼 말인지 알지요? (ㅋㅋ)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은사로 나오는 것은, 그것은 자기에게 전혀 귀속이 되지 않기 때문에, 봉사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전혀 자기 자랑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신약성경인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헌금에 대해서 나오는데 말이다.

◈ 헌금의 경우에 !!

구약에서는 헌금을 하게 되면, 즉 제물을 바치게 되면 복을 받게 되는데, 그런데 신약은 어떠한가?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기에, 즉 하나님께서 재촉해서, 시켜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헌금에 대한 반대급부는 그 돌아올 장소가 제가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곧 고린도후서 8장의 헌금 이야기라는 말이다. 즉 "헌금은 제가 했지만, 그 혜택은 저쪽으로 돌아가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까, "나를 보고 헌금을 하라고 하시는 분도 주님이고, 또한 헌금을 할 수 있는 돈도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 그것을 쓰시는 것도 역시 주님 마음대로 입니다" 라고, 그렇게 헌금을 해야 만이 제대로 된 헌금이란 것이 사도바울의 고린도후서 8장의 주장이라는 말이다.

(고후 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 8: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고후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후 8: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 과연 예수님은 누가 인정해주었는가?

물론 요즘 교회에서 그렇게 헌금을 하라고 하면 아무도 하지 않지 싶은데, 봉사를 해도 알아주지 않으면 삐치고 말이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게 무슨 은사인가? 자기가 사업한 것이지 말이다. 그렇게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삐쳤다고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겠는가? "나도 역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데, 십자가를 졌는데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 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그렇게 알아주지 않으니 성령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가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그렇게 해놓고 알아주지 않는 것을 가지고,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는 성전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의 능력으로 되겠는가?

◈ 이삭이 아브라함을 데리고 !!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인가? 그것은 바로 "줘놓고 빼앗습니까?" 라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거두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라고 하는, 즉 "이것은 하나님의 자식이 맞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쓰시는 그 현장에 아브라함은 졸졸 따라갈 뿐인데,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삭이 가는 그 곳에 누가 있는가?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지시를 하셨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지시하신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렇게 계신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빼앗는 식으로 유도하고 이끄시기 때문에,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자기 아들인 이삭을 따라서 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가는 도중에 이삭이 묻는데, 즉 "아버지여, 땔감도 있고 다 있는데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직언적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즉 "이끄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무리도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여호와 이레'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주께서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가? "이삭아, 지금 우리가 동행하는 이 길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마련하신 길이다" 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마련하신 고속도로이고 활주로인데, 천국으로 통하는 말이다. 바로 거기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죽는데, 그런데 죽기 일보직전에 보니 수풀에 양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이전에 이런 사실을 귀뜸해주지 않는가? "아브라함아, 걱정하지 마라. 니 아들은 죽지 않는다. 내가 미리 수풀에 양 한 마리를 미리 꼬불쳐놓았다" 라고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아브라함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겠는가? 그야말로 아들과 함께 가는 즐거운 소풍길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창 22: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 22: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창 22: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창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 질문 - 목사님, 신약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릴 줄을 알았다고 했는데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살릴지, 그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바로 그 '어떻게' 라는 것을 말이다. 만약에 그 '어떻게' 라는 방법을 아브라함 쪽에서 끄집어내게 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만들어놓은 그 활주로에 자기 방식을 다시 까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전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그것을 안 것이 아니라 믿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 4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은혜, 혹은 하나님의 개입인데, 즉 은혜에서 나온 약속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이런 것이 어려운데, 그러니 그 은혜 속에 우리의 행위를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행위는 차단시킨다는 것이다. 은혜 앞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인데, 그런 약속의 능력이 아브라함을 거쳐서 은혜를 은혜답게 증거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말이다. 논리가 그런 논리인데, 그러니 외부인인 인간들이 그것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은 것인데, 오늘 아침에도 십자가마을 사이트에 그런 댓글을 올렸지만 말이다. 김대형 씨가 뭐라고 질문을 했는고 하니까, 즉 "144,000명에 들어가면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런 방법이 없습니까?" 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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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김대형) - 저 계시록의 십사만 사천명과 구원의 확신의 관계에 대하여 !!
안녕하십니까? 우리 근호 목사님, 오늘 문득 생각난 게 과연 계시록의 십사만 사천명이 택함을 받은 자만 천국에 간다는 거잖아요. 그것이 진짜라면 구원의 확신을 믿어도 되는 건지요. 계시록의 십사만 사천명의 진실은 정확히 무엇인지도 알고 싶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

* 답변(이근호) - 성경에서 144,000을 12 중심으로 다시 분석을 해놓았습니다. 즉 '12,000×12=144,000' 입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언약단체로서 선택해놓은 나라, 즉 '이스라엘'의 구성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을 진행해 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을 통해서 제시된 12아들이 곧 12지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12지파는 오직 한 분(1)이 행하신 거룩한 일하심의 결과물로 생겨나게 되어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한 분(1)이 144,000명에서 같은 인(도장) 찍어서 자기 소유로 삼았습니다. 그분이 바로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의 도장을 받은 자만이 예수님의 소유가 되어서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은 성립되지를 못하고, 어린양의 가치만을 노출하기 위해서 지상의 생을 보내게 됩니다.
 
* 질문(김대형) - 계시록의 십사만 사천명에 포함이 되려면 !!
안녕하십니까? 예전에 어떤 감리교 목사님 설교 중에도 인간은 모두다 구원될 수 없다란 설교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 설교가 아무래도 계시록의 십사만 사천명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요. 십사만 사천명이 천국에 들어가고, 구원받을 수 있는 택함 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인가요. 조금은 알듯 말듯 헷갈리옵나이다. 또한 십사만 사천명은 진짜 아무나 못 들어가는 숫자인지요. 숫자에 포함되려면 방법이 있습니까? 알려주옵소서. 아멘, 할렐루야 !

* 답변(이근호) - 144,000은 구원받을 수 있는 택함받은 성도들을 가르칩니다. 이 숫자가 주어진 것은 야곱의 12아들에게 내려준 특별한 축복 때문입니다. 축복이란 축복을 내려준 분에게 결정권이 완전히 넘어가 있기에 예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그 고유 권한이 행사하게 되면, 성도는 축복의 가치에 마음이 빼앗겨서 예수님과의 교제에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외부에서 보면, 축복을 달라해서 축복이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축복의 가치를 알아보는 믿음도 예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복음의 광채를 가리고 우습게 보는 악마의 방해하는 힘에서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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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은, 복의 결정권자에게 !!

여기서 144,000명은 아브라함의 12자식에 대한 언약적인 작용을 말하는 것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것이 야곱에게 내려왔고, 그런 야곱의 언약자식인 12지파를 통해서 야곱언약이 전파되는데, 그것을 한 글자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바로 '복'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야곱이 복을 받으면 12지파가 복을 받는 구조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어떻게 복을 받는가?" 라는 것만 남게 되는데, 즉 어떻게 야곱 언약의 복을 받게 되는지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복을 받습니까?" 라는 질문이나,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는 것과는 서로 동일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즉 복을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데, 그러니 "그런 복을 나에게 일임할 수 있는 방법을 내 쪽에서 시도할 수 없습니까?"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하지만 복을 주고 말고 하는 것은 오직 복의 결정권자에게 있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이것이 참으로 신비로운데 말이다. 복이 올 때는, 복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저주를 받을 자도 같이 병행해서 분류차원에서 복이 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옛날에 학교에서 운동회를 할 때, "김철수, 너는 1번이니 청군이야" 라고 하면, 그렇게 홀수가 청군이면 짝수는 자동으로 백군이 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것을 짝패(?)라고 하는데, 왜 장갑도 하나만 파는 것이 아니라 한 짝으로 파는데, 물론 양말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을 아는 것이 곧 '복' !!

아무튼 주님께서는 분류작업을 하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구원받을 쪽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해서 이쪽뿐만이 아니라, 저쪽도 생각하시는데 말이다. 즉 지옥에 갈 저쪽도 말이다. 그러니 주님이 복을 줄 때는 저주를 받는 쪽과 같이 병행을 해서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을 세우는데, 그러니 그런 기준을 아는 것이 곧 복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복만 챙기고 도망치기에 바쁘지만, 즉 "나는 이제 구원을 받았어. 그러면 되었어. 주님, 그럼 이제 바이바이!" 라고 하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라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말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인간 : 주님, 제가 구원을 받았지요?
* 주님 : 그래, 받았다.
* 인간 : 그러면 정말 감사합니다.
* 주님 : 그래, 알았다.
* 인간 : 그러면 이제 안녕히 계셔요.
* 주님 : 어이, 잠시만 기다려.
* 인간 : 복을 받았으니, 그만 되었습니다.
* 주님 : 그게 아니라, 복과 저주의 기준을 니가 알고 있어야 돼.

◈ 기준 -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피 !!

바로 그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일방적인 긍휼에 의해서만 구원이 된다는 것, 그것이 곧 기준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 '긍휼' 이라는 표현은 상당히 추상적인데, 그래서 이것을 실제의 역사 속에서 한 인물과 한 몸을 통해서 보여주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피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긍휼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인데, 즉 33살을 먹은 어떤 나사렛의 예수라는 청년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서 살을 찢기고 피를 흘려서 죽었다고 하는, 그러한 너무나도 구체적인 그것 외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다는 말이다. 홍해가 갈라지고 물위를 걷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베드로는 참 좋겠다 ??

흔히 사람들이 "베드로는 참 좋겠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다고 말이다. 그러니 자기도 베드로처럼 그렇게 한번 해보고 싶다는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을 잘 믿겠고 말이다. 하지만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것은 무엇인가?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이 "물위를 걷는가? 못 걷는가?" 라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을 했는데, 그러니 베드로가 물위를 걷게 하시고 그렇게 모든 일을 하신 것은, 물론 사람들이 그것을 기대한 것은 맞지만,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으로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 여기 영생을 생수를 마셔봐 ??

그렇다면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인가? 아닌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초석이란 목사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초대교회에도 병이 나았는데, 그러니 오늘날 병이 낫지 않는 교회는 교회도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부흥집회를 하면, 아프고 연약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인간은 대장균에 오염된 생수를 비싼 값에 팔아 처먹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돈도 제법 모으고 했데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기 병이 낫는 것을 두고 복을 받았다고 여기는가? 그 기준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언약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에게 아쉬운 것을 구토를 해서 내어놓고는, "이것을 해결해주면 내가 하나님을 믿어줄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기준에다 억지로 하나님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데, 즉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그것을 '우상'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실존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다음과 같은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때 뭐라고 하는가? "내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면, 그때는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본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 결국, 자기 한(限)풀이 !!

특별히 외롭고 쓸쓸할 때, 또한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즉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든지, 자식이 사고를 쳤다든지 말이다. 그러면 의지할 때가 없고 너무나 외로워서, 이 사회 속에서 말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을 비롯해서 우랄 알타이 계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한(限)' 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은 반드시 샤먼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즉 무당과 말이다. 이 무당의 기능은 하나밖에 없는데, 즉 풀어주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요즘 케이블 TV에 보면 그런 내용들이 정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서 방송이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풀어주는 것을 아주 고상하게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회복'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도는 회복되면 안 되는데, 즉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면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회복은 한이 맺어있어서 그런 한을 풀어주는 것이니 말이다.

◈ 칠성시장의 한 맺힌 사연 ??

요즘 칠성시장에 있는 상인들이 얼마나 한이 맺혀있는지 모르는데, 대형 마트가 들어서서 30년, 40년 동안 장사하던 것이 다 꽝이 되었으니 말이다. 명색이 대구의 중심시장인데 말이다. 그러니 거기에서 장사하던 서민들이 얼마나 한이 맺혔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가까운 북부교회에 가서 새벽마다 기도할 수밖에는 없는데, 이 마트는 망하고 자기들 장사는 잘되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한을 풀려고 하는 자들에게 언약을 이야기하면 알아듣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한을 풀어주는 샤마니즘적인 요소가 한국에 들어와서 어떻게 되었는가? 불교가 들어오든 기독교가 들어오든 간에, 지금의 요 모양 요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나 문선명의 통일교는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단들은 이러한 것을 두고 "낙원을 회복한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여기 저기 기도원을 세워서 회복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개혁주의나 천주교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 회복이 아닌, 죄와 피의 만남 !!

그러니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도록 하는가? 우리 자신이 의인이라고 여기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까발려 낸다는 것이다. 즉 죄와 피의 만남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융합시키는데, 그래서 하나가 될 때, 그렇게 되면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구성요소(?)로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관심은 우리 구원이 아니라, 자신이 하시는 맹세와 약속이 이렇게 죄인을 건져냄으로 말미암아서, "내가 그 언약을 이룬 주체가 맞잖아?" 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증명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이다. 온 우주를 향하여 말이다.

◈ 하나의 점(·)으로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고 하니,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함으로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보면 되는데, 즉 욥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역사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 인생에 하나님께서 강하게 임팩트를 가하게 되니, 그게 하나의 점(·)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제가 이런 점(點) 이야기를 하니까, 그런 점 이야기를 한다고 그렇게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당들이 점치는 점(占)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매일같이 하는 말이 구조이고 또 점 이야기라고 하면서, 그렇게 씹어댄다는 말이다(ㅋㅋ).

◈ 사도바울의 십자가는 곧 점이고 순간 !!

하지만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그 십자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곧 하나의 점, 즉 순간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의 순간 순간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인데, 그래서 그 십자가 안에서 자기는 날마다 죽고 주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이다. 자기는 죽고 주님은 살고 말이다.

그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게 되면, 즉 십자가를 만나게 되면, 우리의 실타래와도 같은 역사가 어떻게 되는가? 그 기나긴 역사가 한 순간의 이슬처럼 된다는 말이다. 아침이슬 말이다. 아마 소주를 생각하는 분이 있지 싶은데(ㅋㅋ), 사실 그렇다는 말이다. 한 방울의 짜릿한 소주처럼, 그렇게 있다가 그만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점으로 되어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자기 필요에 따라서 다시 역사로 바꾸시는데, 즉 자기의 육적인 역사가 십자가를 만나게 되면 하나의 점이 되었다가, 그러한 점이 다시금 세월이 지나가게 되면, 드디어 새로운 역사가 진행되는데, 그 새로운 역사는 누구의 역사인고 하니까, 바로 십자가가 피어나는, 즉 십자가를 드러내는 역사가 된다는 것이다.

◈ 소급(遡及) - 절에 다닌 것도 복음을 위해서 !!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즉 1957년에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면, 그 순간부터 새로운 역사인가?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점은 역사가 아닌 묵시인데, 즉 역사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교회도 전혀 몰랐던 것까지도 모두 소급해서, 그 모든 것이 다 은혜가 되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소급해서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역사 속에 어떻게 개입하게 되는가? 우리는 죄인으로 개입하는데, 즉 그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십자가 피의 능력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개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역시 소급해서, 우리가 예수님도 모르고 절에 다니던 것까지도 말이다. 그때 교회가 아닌 절간에 간 것도 역시 주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경험을 하게 하셨다는 것을, 그런 것을 모두 다 소급해서 설명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

성도는 그런 소급함에 대해서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다가오셔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돌아서면 다시 그 옛날의 역사로, 즉 '나' 만의 역사로 돌아선다는 것이다. 타인의 역사가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나' 만의 역사로 돌아가게 되면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졸지에 무엇이 되고 마는가? 타인, 즉 남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설교시간에 은혜를 받았을 때는 "주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라고 하다가도, 교회 문을 닫고서 나가면 예수님은 그만 타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때는 버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도 모르는데, 그래서 "누구십니까?"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나' 만의 줄줄이 깔려있기에 말이다. 즉 12시에 예배를 마치고 나면, 1시에는 예식장을 갔다오고, 3시에는 친구를 만나고, 5시에는 아이에게 간식을 만들어줘야 하고, 그렇게 자기 스케줄이 다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 전도사님의 경우에는 손자도 돌봐야 하고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영락없이 타인이 되고 마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리의 스케줄 속에 또 다시 우리의 허락도 전혀 없이 성령으로 개입하시게 되는데, 그러면 "아하, 주님이 이렇게 손자를 돌보게 하셨구나" 라고 하면서 새롭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2초나 3초 정도 가는데, 돌아서면 예수님은 또 다시 타인이고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나' 만의 역사가 또 줄줄이 나오는데, 즉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케줄이 가득하다는 말이다.

◈ 염려하지 말라 !!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루종일 염려할 것은 무엇인가? 그건 하나밖에 없는데,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라는 것이다. 즉 무엇을 입고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입고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하는 것은 이방인들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러니 그런 지옥에 가는 사람들도 구하는 것은 말고, 오직 성령이 와야만 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내놓아보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자기 이름, 즉 자기 역사가 있으면서도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는 것은, 그건 성령이 오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 복을 찾는 사람들 ??

아까 이야기하고 싶던 것이 이제 생각이 났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조금 전에 말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144,000명인데 말이다. 그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때, 그런데 그것을 외부에서 바라보게 되면 어떠한고 하니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복을 찾는 자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복을 찾는 자들처럼 말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야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복을 위해서 기도를 했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오해하는가? 복을 위해서 기도하면 복이 온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즉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즉 정성을 더하면 더할수록, 또 입을 크게 벌리면 버릴수록 복이 많이 오고, 입을 다물면 복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가 교인들에게 전매특허처럼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들이 가난하게 살고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구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라니 왜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왜 교회에 나와서 아가리를 벌리지 않느냐는 말이다. 왜 스스로 기도하지 않느냐고, 주님은 달라고 해야주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 오직 복을 받은 자만이, 그 복의 가치를 알아 !!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제가 그런 댓글을 달았는데,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데 말이다. 복을 받은 자만이 그 복의 가치에 대해서 알 수 있는데, 즉 지금 자기가 채우려고 하는 자기의 한(限)이나, 자기의 목적, 즉 자기가 기대한 욕망보다 더욱 더 가치가 있음을 말이다. 그러니 성령이 와야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이 오게 되면, 즉 복을 받게 되면, 그동안 자기가 누리고 기대하면서 소망했던 것보다도 주께서 자기를 쓰신다는 가치가, 바로 그 가치가 자기가 단독적으로 성공해서 인생을 멋있게 살아보겠다는 가치보다도 더 우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즉 기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새롭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은 오해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근호 목사는 기도도 하지 말라고 했다. 헌금도 하지 말라고 했다" 라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 참된 가치를 모르면, 다른 가치를 쫓아서 움직이는 인간 !!

그런데 사람이 이런 하나님의 가치를 모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꿈틀거리면서 다른 가치를 쫓아서 움직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다른 가치는 마치 중국 사람들이 하는 마작처럼, 자기 역사를 소급해서 자기를 빛낼 수 있는 새로운 좋은 것들을 거기에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꾸 집어넣어서 그것을 중요한 가치로 본다는 말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런 것들이 와서, 과거 자기의 허접스러운, 즉 자기 가치가 떨어졌다는 것을 보상할 수 있는 새로운 일들을 벌리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식이 삼수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런데 삼수 끝에 서울대학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기대했던 것이 등장하게 되면, 과거의 허물이 다 덮어질 것이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 성령의 폭격을 받게 되면 !!

그것이 곧 실타래와도 같은 '나' 만의 역사인데, '나' 만의 가치, '나' 의 영광이란 말이다. 그렇게 오직 '나' 라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자기의 사고방식을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마치 연합군이 카다피의 관저를 미사일로 포격하듯이, 그렇게 성령께서는 우리의 내부를 그만 폭격해서 박살을 내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어느 정도로 폭격을 하시는가? 욥처럼 자기 생일을 저주할 정도로 말이다. 즉 "차리리 이럴 것 같으면 태어나지 말게 할 것이지, 왜 태어나게 해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라고,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도록 폭격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 성도는, 무가치함을 깨닫는 가운데 참된 가치를 !!

그렇게 폭격을 받게 되면, 그 폭격한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생각했던 식으로는 천국에 가지 못하고,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것이 유입되어야만, 그것만을 천국에서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즉 "아하, 나는 무가치하지만, 그러나 가치가 있구나" 라고 말이다.

말이 참 재미가 있는데, 즉 자기를 철저하게 무가치하게 만드는 그 안에 들어있는 것으로 인해서, 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무가치하게 박살내는 그 무엇이 개입됨으로서,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는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 모세의 경우에 !!

모세의 경우에,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을 한다고 하니 누나가 극구 반대를 했는데, 즉 "모세야, 너는 바깥에서 복음만 전해라. 이 집안 일은 여자책임이다. 그러니 이런 결혼문제는 나에게 맡겨라"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서 누나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니 꼬라지를 알라" 라고 해서, 그만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다는 것이다.

남자가 걸린 문둥병은 이 세상에서 고생한 흔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여자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화장발도 받지 않는데(ㅋㅋ),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그야말로 치명적인데, 즉 "그 얼굴에 니가 뭐가 잘났는데?" 라는 것이다.

(민 12:9)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민 12: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

◈ 노아의 경우에도 !!

노아의 경우에도, 그가 구원을 받고 난 뒤에 아들이 3명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들이 축복을 받는 자와 저주를 받는 자로 구별이 되는데, 그런데 그 기준이 무엇이었는가? 사실은 모두가 다 같은 아들이니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가? 노아가 대낮에 그만 술에 취해서 벌거벗고 누워있는데, 그렇게 하체를 들어내고 있으니까, "얼레리, 꼴레리" 라고 하면서 놀린 쪽이 그만 저주를 받고 말았다는 것이다. 덮어준 쪽은 축복을 받고 말이다.

왜 그런가? 모두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다같이 구원을 받았는데, 그런데 그 은혜성을 놓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은혜 자체의 가치보다도 "우리 아버지가 저렇게 하시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 갑자기 자기 집안 단속에 들어가게 되는데, 즉 주님이 주신 은혜보다도 그 은혜를 받아 챙기는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예배시간에는 휴대폰을 끄세요 !!

제가 어제 이장우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머리에 번쩍 하면서 떠오르는 내용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뭔고 하니, "예배시간에 휴대폰을 끄세요" 라고 하는 것인데 말이다. "예배시간에 휴대폰을 끄세요" 라고 하는 한 마디가 너무 가슴에 와서 닿았는데, 저는 예배시간이나 강의시간에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것은 이장우 목사님이 얼마나 교인들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데, 즉 "저는 늘푸른 교회 교인들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여러분이 계시는 곳은 예배를 드리는 곳인데, 그런 곳에 여러분이 오셨으면, 지금 여러분의 마음자세가 주님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즉 클래식 공연에서도 휴대폰을 끄는데, 그런데 얼마나 마음가짐이 해이가 되었으면 예배를 드리면서 휴대폰을 켜둘 수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을 사랑하니 그런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님께 영광만을 돌리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는, 그것을 간단히 줄여서 "예배시간에 휴대폰을 끄세요" 라고 했다는 것이다.

바꾸어서 말하면,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소중한 것인데, 그런데 왜 휴대폰을 켜놓아서 이 세상일이 예배에 끼어 들도록 하시는 겁니까? 저는 그것을 목사로서 도저히 그냥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배시간에는 휴대폰을 모두 끄세요"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왜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고 하니, 여러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포기를 해주어야, 즉 제가 그런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사랑의 잔소리를 하는 새로운 사건이 개입되기를 기다릴 뿐이라는 것이다(ㅋㅋ). 어떻게 말이 안 됩니까?

왜냐하면, 휴대폰을 끈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데, 즉 주께서 찾아오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그런 점에서 저도 이장우 목사님 못지 않게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예배시간에 휴대폰이 동시에 울려서 예배고 뭐고 간에 엉망이 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조차도 주님께서 "아하, 이 자리가 중요한 자리구나"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목사가 잔소리를 하게 되면, 그런 목사의 잔소리 때문에 억지로 휴대폰을 끄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보다도 목사가 더욱 더 부담이 되고 신경이 쓰이게 되고 말이다. 차라니 무감독 시험처럼, 감독관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저의 경우에는 "여러분이 주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을 할지 알아서 하세요. 그것조차도 주님께 맡깁니다" 라는 입장에서 저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랑하는 방법도 참으로 가지각색인데(ㅋㅋ). 아무튼 저는 이장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아직도 이 목사님은 교인들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 축복은 곧 '가치' !!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축복' 이라는 것은 '가치' 인데, 그러니 이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에게만 기도를 해도 어떻게 하게 되는가? 과거에는 자기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주님의 언약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런 축복으로서 야곱은 기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축복이 무엇인가? 주님을 만나도 살 수 있는 자리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으로 마련해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야곱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주시는 분께서, 자신이 축복하는 그대로 이루어나가는 그 현장으로서, 야곱 자신의 몸과 자기에게서 태어난 12자식을 통해서, 주님의 언약이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증거하는 도구로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것은 전부가 무엇인가? 존재가 아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의 기능인데, 성도는 그렇게 주님의 일에 기능공으로서 뽑힌 자들이란 말이다. 즉 존재가 아닌 기능이란 것이다. 야곱을 비롯해서 모든 성도들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143페이지를 살펴보자.

** 그러므로 성경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나는 성경을 모른다' 라고 하는 의미는?

지난 시간에 "다 이루었다" 라는 것과 "때가 가까웠느니라" 라는 것을 이야기했는데 말이다. 어떻게 기억이 납니까? 아무튼 이렇게 사람들이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산다"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환상을 피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즉 환상을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 왜 여자들은 '동해야 웃어라'에 열광하는가?

지난번에 광주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느 집사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는 연속극을 4개밖에 보지 않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호박꽃 순정'과 '욕망의 불꽃'을 보는데, 그것 말고 2개를 더 본다는 것이다. 욕망의 불꽃은 끝났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4개중에서 2개는 매일 연속극이니 매일 본다는 말이고, 그 나머지 2개는 월요일과 화요일에, 그리고 수요일과 목요일에 짝을 이루어서, 그렇게 4번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연속극을 계속해서 보게 되는데, 그러면 여자들은 그렇게 연속극을 좋아하고, 또한 남자들은 연속극보다는 야구나 축구를 왜 좋아하는지, 그것을 한번 생각해봤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여자들에게 있어서 연속극은 무엇인고 하니, 현실과 환상 사이에 있어서 현실이 주는 그 아픔을 환상 속에서 녹여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현실의 아픔을 없애려고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연속극 속에는 자기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을 구체적으로 묘사를 해놓았는데, 즉 "내 인생이, 내 가정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것을 말이다.

◈ 카타르시스 !!

그것을 두고 '카타르시스' 라고 하는데, 그게 뭔고 하니까, 즉 '문학' 이라는 것은, 자기가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했지만, 자기가 무엇인가 되고 싶은 상황의 전개를 대신해서 해줌으로서, 현실의 미흡함에서 오는 허전함을 소멸시켜주고 삶의 에너지를 충전시켜 준다는 것이다.

이번에 울산에서 4월말에 '라캉'에 대해서 강의를 하면서 거기에서 할 것인데, 즉 리비도, 주이상스, 향락, 혹은 쾌락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은 이런 향락과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서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즉 손익계산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 인간은 누군가가 자기에게서 즐거움을 빼앗아가 버리면, 그 빼앗긴 즐거움의 부분을 다른 즐거움으로 땜질을 하는 식으로, 그렇게 해서 매일같이 인간은 분주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생각이나 그 모든 것이 말이다.

◈ 남자나 여자나 모두 환상 속에 !!

그런 식으로 삶에서 오는 정신적인 피곤함이나 스트레스를 '연속극' 이란 것으로 대신해서 해소하고 채운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의 환상을 연속극이기 때문에 구체적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스토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성질이 급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냥 짧은 시간에 다 해치우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자는 환상을 유지하는데 초점이 있다고 하면, 반면에 남자는 환상을 맛보고 없애버리는 것인데, 그게 바로 승부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의 주특기가 주로 도박이나 축구, 야구와 같은 것인데, 이것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승자와 패자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교회에서 말하면, 여인은 진선미, 즉 진실하고 아름답고 순수한 것이 아직도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고 환상을 꿈꾸기 때문에, 교회에서 그냥 "은혜롭게, 은혜롭게"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경우에는 승부를 봐야하기 때문에, 그 누군가를 조져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하나님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박살을 내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을 조지지 않으면 자기가 승자가 되기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공격대상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것이 아니라, 좋은 게 좋다고 그냥 덮고 지나가자는 것이다. 굳이 까발려서 무슨 좋은 것이 있느냐는 말이다. 알고도 지나가고 모르고도 지나가고, 그냥 그렇게 살자는 말이다. 이것이 여성들이 가지는 환상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은 승자와 패자가 뚜렷하지 않으면 자기 존재성을, 즉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만 미쳐버리는데, 그것도 반드시 자기가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기기 위해서는 게임을 만들어서, 그 게임에서 끝까지 승부를 보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도박을 하면서 집도 잡히고, 심지어는 자식이나 마누라까지 잡힌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승자가 되지 않으면 살아갈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에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다 모든 것이 환상인데, 그러니 성경말씀을 보지 않으면 사람은 계속해서 환상을 만들어 피우면서, 그렇게 환상 속에서 자기를 자꾸만 덮어가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환상 속에서 말이다.

◈ 에이, 에이, 에이 !!

TV 드라마를 보게 되면 사실은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인데, 하나같이 선악구조에 진선미라는 것이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이기고 말이다. 춘향전이나 심청전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왜 그런 내용인고 하니, 현실 세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인데, 특히 자본주의의 현실은 말이다.

자본주의의 현실은 자기 일만 열심히 할뿐인데, 남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는데, 자기가 전문가도 아니면서 괜히 개입해서 당하면 자기만 손해를 보기 때문에, 그냥 "에이, 에이, 에이" 라는 식으로 해서, 그냥 그렇게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일만 열심히 할뿐이라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에이, 에이, 에이" 라고 하면서 살아가면 되는데, 뭔가 있다고 해도 "에이, 에이, 에이" 라고 말이다. 북한에 핵이 있다고 해도, 또 일본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해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자기 집에만 지진이 일어나지 않으면 되는데, 그렇게 자기 하는 일만 챙기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캡슐형 인간'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캡슐이 무엇인가? 캡슐 안에 들어있는 약처럼, 그렇게 공간 안에만 갇혀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진해서 자기 것만을 소박하게 챙기면서 그 안에 갇혀있는 그것,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지혜로운 처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처신을 남자들이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이 바보야, 또 이용을 당하나?

그래서 남자의 경우에는 여자 말을 들어야 하는데, 괜히 바깥에 나가면 돈만 쓰지 말이다. 전혀 실속도 없이 말이다. 자판기 커피를 마셔도 되는데, 다방에 가서 마담에게 선심이나 쓰고 말이다. 얼굴에 화장을 떡칠을 한 마담이 뭐가 예쁘다고 그 비싼 쌍화차를 사주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마누라가 보면 환장을 하는데, 즉 쌍화차 한 잔이면 도대체 라면이 몇 봉지냐는 말이다. 여자는 이런 경우에 돈으로 따지지, 늙은 마담에게 질투는 하지 않는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여자의 경우에는 무엇인고 하니까, 즉 "우리끼리 그냥 오손도손 잘 살면 되는데, 괜히 바깥에 나가서 잘난 척을 해도 누가 알아주기나 하나? 오히려 전부 당신을 이용할 뿐이다. 바보같이 그렇게 이용을 당하고 또 이용을 당하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갑을 빼앗아버리는데, 물론 카드도 압수를 하고 말이다.

지금 제가 하는 이 말이 너무나 리얼해서 저의 경험담이라고 여러분이 오해할지도 모르겠는데(ㅋㅋ),  아무튼 남자가 그렇다는 말이다. 인간은 이렇게 소박하게 살아가고자 하는데, 또한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 주님은 최소단위의 자아마저도 !!

그것을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팔다리가 모두 잘려도 최소 단위의 자아가 있는데, 즉 "하나님, 이것만큼은 손을 대면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도망을 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마지막 단위의 자아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분위기를 다 깨고 마는데, 즉 "하나님, 다른 것은 다 날아가도 이것만은 안 됩니다. 이것만은 내 것입니다" 라고 하는, 그 최소단위에 말이다.

하지만 만약에 그런 최소단위에 주님이 손을 댄다고 하면, 그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축복을 받은 것인데, 즉 "이제 너는 니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순간이란 것이다. 주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말이다. 

다시 교재 143페이지를 살펴보자.

** 그러므로 성경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니 성경말씀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환상을 피우는 것인데, 즉 그것은 환상이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교재에 나오는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인간들은 그들의 밑바닥과 우주 공간에 가득 넘치고 있는 하나님의 은총에 무관심하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 대목을 조금 더 구체화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찾아보겠는데, 누가복음 21장의 말씀인데 말이다. 33절부터 35절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눅 21: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 21: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

여기 33절의 말씀은 약 20년 전에 교동(?) 교회의 수련회에 처음 가서 설교한 대목이지 싶은데, 그때는 장로님이 계시지 않을 때인데 말이다. 34절에 "마음이 둔하여지고" 라고 하는데, 그러면 마음이 둔하여진 이유가 무엇인가? 무슨 염려로 인해서 말이다. 생활의 염려로 인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생활의 염려로 인해서 마음이 둔하여진 게 마치 덫과 같이 임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덫이 무엇인가? 알다시피 덫은 오소리나 두더지를 잡을 때 사용하는 도구인데, 곰을(?) 잡을 때도 말이다. 그렇게 쳐놓은 덫에 옴팍 잡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는데, 물론 교회에서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고 말이다.

그러니 생활의 염려로 인해서 마음이 둔하여지면, 그것은 완전히 마귀에게 꼼짝도 못하게 사로잡힌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날이 말이다.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아주 간단한데, 즉 위에서 밑으로 쏟아지기도 대비가 되어있는 그 밑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있고, 그것을 심판하기 위해서 위에서 대비하고 있는 또 다른 현실에 둘러 쌓여있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새로운 현실에 쌓여서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과거에는 물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물이 아니라 이전에 물이 임한 것같이 불이 임한다는 것이다. 마치 옛날 수세식 화장실과도 같은데, 저 위쪽에 물탱크가 달려있는 말이다. 볼일을 보고 나서 그것을 당기면 가끔 물을 다 뒤집어쓰는데, 아마 그런 경험들이 있지 싶은데 말이다. 그야말로 본의 아니게 물세례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물이 아니라 불이라는 것인데, 즉 주께서 잡아당기면 불이 쏟아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성도는 양쪽을 다 봐야 !!

그러니 성도는 양쪽을 다 봐야 하는데, 그렇게 양쪽을 다 보게 되면, 우리가 보는 생활의 염려가 무엇이 되는고 하니, 그것이 곧 환상이 되는데, 즉 환각이고, 환상이고, 허구라는 말이다. 우리는 생활의 염려로 인해서 마음이 둔하여져서 앞뒤를 가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미친 사람처럼 위의 것만 보는데, 아래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를 않고 말이다. 물론 좋게 이야기하면 신비주의인데, 나쁘게 이야기하면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 고생하라고 보내었는데, 그런데 자기는 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 정신병자가 되고 마는데, 굳이 서 목사님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지금 밑에 있는 이 세상에서 놀려는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남자는 죽도록 일을 해야하고, 또한 여자들도 자식이니 가족으로 인해서 죽을 때까지 속알이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속알이를 하면서도 "이런 더러운 세상, 하루빨리 떠나야지"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남편이 아내에게 잘해주게 되면, 물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아무튼 잘해주게 되면, 여자는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여러분은 그런 남편이 없음을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다(ㅋㅋ).

◈ 성도는, '막 살면서' 천국에 !!

다시 말해서, 위에 있는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이 어떤 구조여야 하는고 하니, "주님, 제가 이 세상에 얼마나 집착하는데, 왜 그것을 들어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그런 반발심과 죄인의 본 모습을 터트리면서, 그렇게 자기 성질을 다 부리면서, 쉽게 말해서 막 사시면서, 그렇게 주님에게 얻어맞을 것은 맞으면서 그 나라에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기도원에서 "주여, 저의 이런 고상함을 받아주소서" 라고 한다면, 사실 전혀 고상하지도 않지만 말이다. 기도원에는 전기가 들지 않는가? 그러면 전기세라도 내야 하는데, 그러니 모든 것이 돈 문제인데 말이다. 그런데 어디서 돈에 초월한 것처럼 그렇게 폼을 잡고 앉아있느냐는 것이다. 돈에 초월한 인간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 아니, 된장찌개 한 그릇 먹으려고 ??

인간적인 환상 중에서 제일 괜찮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돈 많은 재벌 남편에게서 엄청난 유산으로 회사를 물려받는 것인데, 유언장을 고치든지 어떻게 하든지 해서라도 말이다. 그것이 최고라는 말이다. 하지만 막상 기업을 운영하려고 하면 어떠한가? 환장을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냥 노가다를 하는 게 낫지 말이다.

노가다를 하나 기업을 운영하나 하루에 3끼를 먹는 것은 다 마찬가지인데, 고 정주영 회장의 반찬이 무엇이었는고 하니 된장찌개였는데, 그 된장찌개 하나를 먹으려고 그런 고생을 했다는 말인가? 알다시피 그분의 3째 아들이 자살했는데, 된장찌개를 먹지 못해서 그렇게 했는가?

그것은 일종의 정신이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기업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했으면 그렇게 했겠느냐는 말이다. 자기 야망을 달성하지 못하니 그만 화가 나서 빌딩에서 뛰어내려서 죽은 것인데, 겨우 된장찌개 한 그릇이 얼마나 한다고 말이다. 그러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그렇게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낙타가 들어가지도 못하는 바늘구멍을 들어가겠다고 애쓰는 것과도 같은데, 그러니 웃기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그게 애를 쓴다고 해서 될 문제냐는 말이다. 자기 몸집이 그렇게 커서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것이 말이다. 정작 예수님은 머리를 둘 곳도 없었는데, 전혀 안 된다는 말이다.

◈ 그리스도의 찢기심에 동참되어야 !!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데, 바늘구멍을 만들되 낙타보다 더 크게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주님은 만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구멍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넣어주는 것도 아니고, 그 구멍에다 가시를 만들어서 들어가는 놈마다 다 갈갈이 찢기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쥐포가 갈갈이 찢기듯이 말이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모두 다 찢어서, 즉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찢어지심의 작업이 들어가게 된다면, 그러면 주께서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것이 되니, 그러면 부자가 아니라 천하의 재벌이 와도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한 자에게는 말이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길이라는 말이다.

◈ 주님은, 화를 내지 않은 적이 없어 !!

그러므로 이러한 이중구조에 대해서, 이것이 나중에 또 나오지 싶은데, 아무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언제나 주어져있다는 것이다. 시편에 보면 "주께서 매일같이 분노하신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90편에 보면, "우리 인생은 소급해보니 한 시라도 주께서 우리에게 화를 내지 않고 지나간 적이 없다" 라고 하는데,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라는 것이다.

(시 90: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시 90: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시 90: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아무튼 주님은 단 하루라도 우리에게 진노를 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그런데 우리는 왜 벌을 받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주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주님의 은총과 자비와 맹세로 인해서, 곧 그러한 주님의 자녀에게 대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의 진노가 진노답지 않게 우리를 이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한 쪽은 치시고 또 다른 한 쪽은 남기시면서, 즉 "이 자식은 내 백성이고, 내 맹세와 내 언약을 이루어야 할, 내 자녀이다" 라고 해서, 은혜를 베푼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진노와 은혜를 다같이 베푸는데, 그래서 한 쪽은 얻어맞도록 하고, 다른 한 쪽은 막아주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막아주는 것을 지우게 되면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그러면 또다시 자비가 와서 데리고 가고 말이다.

◈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

사실 우리가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겁이 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어떤 목사나 사람을 하나 평가하는 것이면 가볍게(?) 할 수 있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그것도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감히 인간들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주제 넘는 짓이 아닌지, 주님이 "니가 뭘 안다고 그렇게 하노?" 라고 하면서, 갑자기 나타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겁나고 두려운 일이냐는 말이다.

소프라노 조수미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데, 그런 것은 오히려 편한 자리라는 것이다. "아이쿠, 노래를 참 잘하네" 라고 말이다. 또한 강호동이 어떻고, 김연아가 어떻고 하는 것은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를 만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그러한 하나님을 피조물인 주제에 평하고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는데, 모든 성경공부의 결론이 그 말밖에는 달리 다른 말이 나올 게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44페이지를 보자.

** 과연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이 현실감 있는 실제성을 보여줄 수 있을까? 예수님의 등장은 얼마 있지 않아서 성령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 예수님의 등장은 곧 '버림받은' 모습 !!

여기서 '예수님의 등장' 이라고 하는 것은, 주일오전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즉 예수님께서 등장하셨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그냥 등장한 것이 아니라, 즉 산상설교를 하시고 물위를 걸으시는 것과 같은 것이 등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등장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버림받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여, 어찌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는,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모습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곧 버림받은 입장에서 버림받은 자리를 만들기 위함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막 15: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런데 그 버림받은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냥 그대로 있어버리면,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모두 저주를 받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버림받은 자리에서 예수님을 사흘만에 부활을 시켜서 건져내심으로 말미암아서, 버림을 받은 자도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여지를, 바로 그 유일한 자리를 '예수 안' 이라고 고정을 시켜놓았는데, 그것이 곧 '십자가 안' 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어디에 들어오면 되는가? 주님께서 버림을 받은 장소, 즉 십자가로 데리고 오기만 하면, 그것이 곧 구원의 장소인데, 즉 일종의 바구니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바구니가 말이다.

◈ 하나님의 버림보다 더 심한 버림은 없어 !!

그러니 우리가 천하의 죄를 지어도 구원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천하의 죄인보다도 더 심하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즉 "너는 내버린 자식이야. 너는 인간도 아니야" 라는 것보다 더욱 더 심하게 버림을 받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바로 그 자리라는 말이다.

세리와 창기도 천국에 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데, 십자가의 살인강도도 구원을 받았는데, 그런 버림을 받은 자리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몸소 만들었다는 것이 진짜 기독교인데,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중동의 모슬렘들이 믿는 알라신도 역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 십자가가 곧 버림받은 곳이고, 구원의 자리 !!

그러니 참된 기독교의 복음은 바로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가 곧 버림받은 장소이고 말이다. 바로 그 버림받은 장소로 불러내기 위해서 주님은 모든 말씀을 총동원하는데, 즉 "니가 지금 먹고 입는 것으로 만족한 줄로 알라. 그런데 또 다시 니가 욕심을 부리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인 줄 몰랐더냐?" 라고 계속해서 지적하시면서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맞습니다. 저는 버림받은 자가 맞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또 "니가 사랑을 받았으면 형제를 사랑해야지. 그런 사랑을 받아놓고 남을 미워해?" 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맞습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우리는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행동만 튀어나오는 버림받은 자임을 깨우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깨우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곧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민 손길인데, 그 손길이 자기 가슴에 능력이 있게 와서 닿았기 때문에, 그것이 일종의 갈쿠리, 즉 포크레인처럼 와서 꽉 잡으니까, "아하, 나는 버림을 받아도 너무나 당연한 자가 맞구나" 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그것을 아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은, 즉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포착된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버림받은 자로서 합류될 때, 그 자리가 곧 구원의 자리라는 말이다. 즉 성령을 받은 영생의 자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기 이전에 구약이 있었는데, 구약에서는 그 갈쿠리가 사람의 마음까지는 들어오지 아니하고, 그 앞까지만 들어와서 뭐라고 하는가? 즉 사람들이 기껏 십계명을 지키고 해봐야, 그것이 그때뿐이라는 말이다. 돌아서면 또 다시 "나는 그때 은혜를 받았어" 라고 하면서 그만 까불락거린다는 것이다.

◈ 주님은 이제 상주(常住)하시기로 !!

그래서 이제 주님은 아예 그 사람에게 상주(常住)하시기로 하시는데, 다루시는 정도가 아니고 말이다. 즉 그 인간을 아예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즉 "너는 이미 죽었는데, 하지만 십자가 안에서는 살았어" 라고 말이다. 그러니 살기는 살았지만 그때는 조건이 있는데, 십자가 안에서만 살았다고 규정짓는 조건이 적용된다는 말이다.

만약에 십자가를 벗어나게 되면 이미 죽은 자가 되는데, 오직 십자가 안에 있을 때만 산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때는 그 사람이 산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람은 산 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주님의 소유된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성도는, 곧 '막(膜)' !!

이것을 두고 어제 설교시간에 '막(膜)' 이라고 했는데, 지난 강의시간에는 '껍데기' 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 껍데기보다는 오히려 막이 적당하지 싶은데, 이 막은 삼투압이 작용하기 때문에 외부에 있는 것들이 그냥 여과도 없이 들어오는데, 마구 쏟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셀루로즈와 같은 아주 얇은 막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들이 그대로 모두 다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는 정면에서, 즉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대로 받기 때문에, 항상 죄인이 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은 말이다.

불신자들은 인간들끼리 비교하기 때문에 잘난 척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하지만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은 어떠한가?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주님 앞에 설 때 잘났다고 하는 그 순간에도 역시 주님 앞에서는 못난 자가 된다는 것이다.

서민들이 전세값이 오르지 않았을 때 좋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때 성경말씀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인자는 머리를 둘 곳도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전세값이 오르고 내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이 땅에서의 삶이 더 연장되었다고 좋아하는 모습인데,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이 땅에 대한 집착이 강한지를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 인간은, 타인을 조정할 수 없어 !!

그러니 성도든 목사든 간에 말씀에 대해서 눈이 멀어지게 되면, 말씀이 있던 그 자리에 세상에 있던 환상이 자리를 잡아서, "나는 왜 저 사람처럼 살지를 못하는가? 도대체 나는 무엇이 부족해서, 무슨 복을 받지 못해서 그러한가?" 라고, 그렇게 불만이 가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되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범사에 불만이 가득하다는 말이다. "남의 자식은 말도 잘 듣는데, 내 자식은 왜 이 모양이지?"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그런 자식을 한번 키워봐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을 조정하고 조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그러한 능력은 오직 창조주이신 주님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모두가 같은 피조물의 입장에서 그저 권면하고 이해를 구하는 차원이지, 그 사람을 결코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고 해도 말이다. 

◈ 주께서 허용하셔서, 악마가 인간을 지배하는데 !!

원래 마귀가 인간을 장악하면 안 되게 되어있는데, 단 주님이 허용하셔서 악마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마귀가 성도를 시험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창조의 주인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즉 마귀가 그 창조자의 자리를 찬탈하기 위해서 애썼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로 하여금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마귀가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은 그 마귀마저도 이긴 구주임을 고백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마귀의 시험에 들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원래 지옥은 마귀가 가는 곳이지, 우리 인간이 가는 곳은 아니라는 말이다.

◈ '새언약' 이란?

아무튼 이렇게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서 버림받은 자리가 마련되고, 그 자리가 부활로 이어짐으로 말미암아서 그 자리가 곧 '새언약' 인데, 즉 새로 장만한 언약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 새언약이 이미 다 이루어졌다고, 즉 완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난 시간에 말했는데, 바로 그 새언약이 지금 완성된 상태라는 말이다. 그렇게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완성만을 말하고 완성만 증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은, 새언약의 완성차원에서 죄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된 것인데,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말이다.

◈ 우리는 왜 죄인인가?

그러면 어떤 죄인인가? 새언약이 이미 완성된 차원에서 우리에게서 죄를 끄집어내는, 그러니 우리는 일종의 광산이란 말이다. 즉 죄를 만들어서 끄집어내는 차원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다가왔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차원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이 된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데, 또한 죄의 값으로 죽는 즐거움도 있어야 하고 말이다. 즉 빨리 죽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하신 주님의 그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소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이 세상이 두려운 것이 없는데, 즉 실패와 절망이란 단어가 그 사람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공포와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것은 가장 밑바닥인, 즉 십자가라는 것은 인간이 다가갈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인데, 그러니 자기가 그런 낮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사람에게는 위협이나 공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로서,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산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자기가 살아보려고 애를 쓴다고 하는 것은 자기 현실에 전혀 맞지 않는 태도라는 것이다. 이미 죽은 자로서 살아있는데 말이다.

◈ 거지 나사로가 에쿠스를 ??

그래서 성경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하는 것을 염려하지 말고, 니가 적어도 이방인이 아닌 성도라고 한다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증거하기 위해서 살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새는 참새의 역할을 하면 되고, 잡초는 잡초의 역할을 하고, 또한 우리는 우리의 역할만 감당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지 나사로는 거지로 죽는 것이 자기 역할인데, 그런데 만약에 거지 나사로가 천억 정도를 유산으로 받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말끔하게 양복을 입고 에쿠스를 타고 돌아다닌다면, 그게 주님이 보시기에 얼마가 기가 차겠느냐는 것이다. 처음부터 거지가 되어서 고생하는 것이 자기의 역할인데, 그것을 거부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 주님에게서 얼굴을 돌리면, 환상만이 !!

바로 그러한 공포와 두려움, 이것이 바로 성경 속에 있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봐야만 알 수 있는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얼굴을 돌리게 되면 타인의 성공과 같은 것들이 환상처럼 눈앞에 아른거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복수심과 한 맺힘과 같은 것들이 자꾸만 쌓이게 되는데, 즉 "나는 왜 저렇게 되지를 않는가?" 라고 말이다. 입이 아주 걸걸한 사람이라면 뭐라고 하겠는가? 그야말로 쌍시옷(ㅆ)이 저절로 나오지 싶은데, "에에, 내 인생 꼭 뭐 같네" 라고 말이다.

◈ 눈물 없는 못 읽는 '성냥팔이 소녀' ??

아마 여러분도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아시지 싶은데, 크리스마스에 눈은 오고 있는데, 소녀는 길거리에서 손을 불어가면서 "아저씨, 성냥을 좀 팔아주세요. 이게 저의 마지막 성냥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가정은 어떠한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는데, 크리스마스 선물이 가득하고, 항상 웃음꽃이 피어 넘친다는 것이다.

저는 어릴 때 그 동화를 읽고서 진짜로 울곤 했는데, 왜 성냥을 좀 팔아주면 되는데 그렇지 않아서 소녀가 죽게 하느냐고 말이다. 성냥이 얼마나 한다고 말이다. 결국 소녀는 죽어서 따뜻한 하늘나라로 가는데,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것이 다 환상이었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환상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집안에서 케이크을 자르고 웃음을 띄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깥에서 겨우 한 개의 남은 성냥개비로 불을 지피는 것이 당연한데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주어야 집안에 있는 자들에게서 감사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주님과 함께 있는 그것이 그 어느 곳이나 천국이 되는데, 물론 그런 찬송가 가사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론 찬송가 가사를 만든 그 양반이 그 내용에 대해서 책임을 질지는 모르는데, 즉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천국이다" 라고,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의 기를 팍팍 죽여놓았으니 말이다(ㅋㅋ). 본인도 정말 그렇게 살았는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과연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이 현실감 있는 실제성을 보여줄 수 있을까? 예수님의 등장은 얼마 있지 않아서 성령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십자가 피의 실제성과 더불어 성령의 실제성이 '영적 인간'의 구체화로 이어진다.  

◈ '영적 인간'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은?

이렇게 예수님의 등장은 버림받음인데, 그렇다면 그 뒤에 등장하는 성령의 실제성은 무엇인가? 여기 교재에 보면 "영적 인간의 구체화로 이어진다" 라고, 드디어 '영적 인간'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중요한데, 영적 인간의 구체화가 도대체 무슨 뜻이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사격을 할 때보면 보이지 않던 사격판이 갑자기 올라오면 발사하면 되는데, 혹은 접시를 날리면 그것을 쏘던지 말이다. 그것이 '클레이' 라는 종목이지 싶은데 말이다. 즉 먼저 예수님이 등장하고, 그 다음에 성령님이 등장하고, 그 다음에는 누가 등장하는가? 불쑥 불쑥 영적 인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적 인간이 말이다.

◈ 종말론적 현상 - '구원은 예수 이름으로만' !!

그렇게 인간이 돌출하게 되는데, 아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나이든 사람의 피부에 버짐이 피어나듯이 말이다. 그것을 두고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종말론적 현상' 이라고 하는데, 즉 종말이 되면 영적 인간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나타나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오직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는, 그야말로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전제는 무엇인가? 믿음이니, 일단은 인간의 모든 행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그런 행위는 모두가 다 죄가 되는데, 심지어 자기 자신의 행동까지도 말이다.

오직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피의 능력인데,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라고 하는데, 바로 그런 희귀한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는 이 세상에서 단 한 군데밖에 없다는 것이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마치 카드가 줄지어 정렬되어있는 도미노 게임에서 카드 하나가 넘어져서 앞의 카드를 밀게 되면 모든 카드의 색깔은 결국 안쪽에 있던 다른 색깔로 다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인간에 있어서 세계관의 변화라는 것은, 쉬지 않고 찾아오시는 성령님의 활동에 의해서 영적 안목을 가지고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 영적 인간 - 이 세상은 악령이 다스리는구나 !!

여기에 교재에 보면, "새롭게 등장하는 사람은 영적 안목을 가지고 세계를 보게 된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이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은 무엇으로 보이겠는가? 이 세상은 환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도서 1장에 나오는데, 즉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말이다.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것이 구약이고, 그러면 신약은 무엇인가? "과연 그렇구나" 라는 것이다. 즉 구약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데, 신약은 거기에다 하나를 더 집어넣는데, 즉 "나도 헛되다" 라고 말이다.

또한 전도서 3장에 보면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라고, 그렇게 무엇이든 때가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신약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진짜 그렇구나. 나도 그렇다. 내가 나 된 것은 내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니라, 때가 되어서 내가 영적 인간이 되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전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그러므로 이러한 영적 인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님의 안목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악령이 다스리는 곳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목사라도 설교시간에 이런 악령이나 귀신이란 말을, 즉 사단이라는 소리를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지금은 강단에서 함부로 눈치 없이 사용할 수 없는 불신의 세계가 그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아니, 저 목사를 누가 불렀지 ??

제가 만약에 서울에 있는 소망교회에서 헌신예배시간에 설교를 한다고 했을 때,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전무하겠지만 말이다. 그때 악령 이야기를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당장에 "저 목사를 누가 불렀지?" 라고 나오지 싶은데, 그런 교회에서는 그와 같은 용어를 쓰면 안 되는데,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그런 고상하고 좋은 말만 골라서 해야한다는 것이다.

특히 새문안 교회와 같은 경우에는, 현재 한국의 민주화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즉 "억눌리고 피해를 본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중요한 것은 여러분에게 있는 사랑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 말을 해줘야 "역시, 수준이 높은 설교구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수준이 높은(?) 설교를 해줘야 교인들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돈을 번다고 바빠서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이제 남은 여생을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면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야 주님에게 착한 종이라고 칭찬도 받고 상급도 받겠지요" 라고, 그들은 그런 스케줄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그러한 여러분의 모두가 다 악령의 생각입니다" 라고 해버린다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도대체 누구야? 누가 그러한 말을 했다는 말이야? 성경 어디에 그런 것이 있어? 당신이 목사가 맞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목사도 없겠지만 말이다. 

◈ 악마는, 결국 십자가를 가리기 위해서 !!

악령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착할 수도 있고, 또한 그렇게 착하기만 한 자기가 왜 죄인이냐는 것이다. 자기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남에게 해를 끼친 것도 없고,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가정에서 반듯하게 살아왔는데, 그런데 그러한 '나'를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구원해야 하느냐고, 그렇게 의구심이 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로부터 눈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즉 "니가 알아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라고, 그렇게 자기 중심적으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 곧 악령의 술책이었다는 것이다. 악령의 술책 말이다.

◈ 악령의 반란 - 예수님이 아닌 피조물 중심 !!

제가 그것을 '악령의 반란' 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게 '기독교 허상2'에 보면 나오는데, '진리를 찾다가 돌아선 자들' 이라는 글에 말이다. 악마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런데 혼자 하기가 뭐하니까 인간들을 부추겨서 같이 했다는 것이다. 즉 "왜 예수님 중심으로만 가야하는가? 이제 그것은 안 된다. 이제는 피조물 중심으로 돌아가자" 라고 말이다.

그것이 곧 악마의 술책인데, 그런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마이클 잭슨' 이라는 자인데, 그의 노래를 한번 살펴보라는 것이다. 유니세프와 같은 단체들이 하는 일을 격려하는데, 즉 테레사 수녀나 데미안 신부와 같은 자들을 말이다. 특히 데미안 신부는 문둥병자들을 돌보다가 자기도 그만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는데 말이다.

아마 여러분이 그런 사상을 연구해볼 기회는 별로 없었지 싶은데, 저는 이미 신학교에 들어가지 전에 살펴보곤 했는데, 우리 집안에 천주교에 다니는 분이 있어서 그런 종류의 책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읽어볼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그래서 천주교가 어떤 점을 가지고 개신교를 이단이라고 하는지, 즉 그들이 말하는 개신교가 무엇인지를 말이다.

유명한 신부가 쓴 책인데, '왜 개신교는 기독교가 아닌가?' 라고 하는 말이다. 거기에 보면 역사적인 근거들이, 즉 왜 개신교가 천주교에서 갈라지게 되었는지, 또한 루터가 어떤 사람인지, 거기에 대한 것들이 아주 자세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 십자가의 눈부심이 아니라면 !!

제가 그런 것들을 살펴보면서 "아하,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에 죄에 대해서, 즉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도무지 내세울 수 없는 존재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복음의 광채 앞에서, 복음의 눈부심 앞에서 자기 자신은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복음의 광채가, 복음의 눈부심이 없으니, 자기 자신이 사라지지 않고 너무나도 또렷하게 잘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또렷한 '나'와 희미한 '저들'과 경쟁과 승부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저들은 아니고, 나는 맞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 십자가 마을 - '누가 잘하나' ??

이것만 이야기하고 마치겠는데, 우리 십자가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오해를 받는 것이 무엇인가? 십자가 마을에서 "어느 어느 목사는 맞고, 어느 어느 목사는 틀렸다" 라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복음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십자가에 관심이 있으면, 전혀 누가 맞고 누가 틀리고 하는 것 자체가 관심사가 될 수가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로부터 눈을 돌리게 되니, 누구는 맞고 누구는 틀렸다는 식으로, 그렇게 십자가 마을이 비난을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냥 복음의 광채만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말이다. "야, 복음의 광채가 저렇게 찬란합니다" 라고 하면, "정말 찬란합니다. 복음이 최고입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만약에 그 중에서 어떤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면, 즉 십자가 복음의 광채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당신은 어느 신학교 출신입니까?" 라고 하게 된다면, 그 자체에서 곧 균열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감탄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서로 서로 누가 잘났나?" 라고 하게 되면 그만 개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마귀는 그렇게 개판이 되기를 노리는 것인데, 서로 서로 누가 잘났나?" 라는 식으로 나가라고 말이다.

◈ 주님의 버림받은 자리가 곧 나의 자리입니다 !!

그러니 결국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자는 오직 그 복음만을 붙들고 전할 수밖에 없는데, 즉 "그쪽이 아니고 이쪽입니다" 라고 말이다. 달리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달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닌데, 즉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 전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주님의 그 십자가의 버림받은 자리가 곧 나의 자리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즉 복음을 전하는 자의 모습이고, 그것이 또한 성령을 받은 자의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감히 주님의 하신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이없고 모자라고 엉터리인지를 주께서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만을 사모할 뿐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고,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더욱 더 깊게 증거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4,04 오후 1시 30분에 마침.

                                               십자가의 광채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 시간에 녹취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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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40강 육과 영  (0) 2012.08.29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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