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45강 성령님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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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10418피p145성령님의특징

피45강 성령님의 특징

[11 대구강의 7] - [피 45] - 성령님의 특징
                                                                                
                                                   11,04,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21세기에 웬 '애굽'인가?

오늘은 교재 145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하나님께서 반(反) 애굽적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영(성령)도 반(反) 애굽적인 성격을 나타낸다고 한다면, 악령에게는 필히 애굽적 요소가 있음이 분명하고, 더 나아가서 구원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애굽적 성질을 갖고 활동하는 악령의 정신세계와 보편적 인간과의 연결고리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사실 이 '애굽' 이라는 나라는 과거에 이미 한물 지나간 나라인데, 그런데 여기서 왜 자꾸만 거론하느냐고, 즉 "아직도 애굽인가?"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제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보면 애굽이 또 나온다는 것이다. 거기에 보면 애굽도 나오고, 바벨론도 나오고, 또한 소돔도 나오고 말이다.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 묵시세계에서는, 시공간의 순서가 없어 !!

그래서 제가 가락교회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묵시세계에서는 시공간의 순서가 없다는 것이다. 왜 순서가 없는고 하니까, 사건 하나 하나를 전 역사에서 다 담고 있기에, 그렇게 모두를 같이 다 담고 있기 때문에, 즉 묵시세계에서는 앞뒤가 없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이, 그렇게 항상 사건 안에 모든 것을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산성비' 라는 것이 내리고 있다고 했을 때, 그 중에서 어떤 빗방울은 산성이고 또 어떤 것은 산성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방울 하나하나에 모두 다 산성성분이 들어있으니 말이다. 물론 방사능비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어느 물방울을 봐도 산성이나 방사능 성분이 들어있듯이, 묵시세계라는 것은 "역사는 심판을 받아야 돼" 라고 하는 성격이 들어있는 사건들을 마치 소나기처럼 내려주기 때문에, 그런 소나기가 내리게 되면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물리학에 보면 '양자론'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양자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아주 무질서하다는 것이다. 보통 눈에 보이는 세계는 질서가 있지만, 그런데 양자의 세계는 어떠한고 하니까, 그 작은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되면, 시공간이 무질서하게 튄다는 것이다.

◈ 난타공연을 보면 !!

이것을 제가 어느 곳에선가 강의를 하면서 '난타' 라고 표현을 했는데, 왜 난타 공연을 보면 어떻게 하는가? 북위에다 물을 조금 올려놓고서 막대기로 두드리면 물방울이 마구 튄다는 것이다. 물론 직접 공연장에 가서 보지는 못했는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그렇게 물방울이 마구 튀듯이, 그런 세계 속에 들어가면 아주 무질서한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튀는 하나 하나의 세계에서의 모든 것은, 그것은 물체로 뭉치지 않고 모두가 하나 하나 사건이, 즉 사건화가 된다는 것이다.

◈ 이 세상은 쉼이 없는 튐의 연속 !!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경우에도 멀리서 보게 되면, 즉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등으로 나눌 수 있지만, 그러나 아주 가까이 보게 되면, 이 삼국시대를 우리는 편평하게 보았지만, 그러나 그 한 순간 한 순간은 어떠한가? 쉼이 없는 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사건과 인식과 생각이 말이다.

그러니 우리 현대인들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옛날 삼국시대의 강감찬 장군도 마누라에게 얼마나 시달림을 당했겠느냐는 것이다(ㅋㅋ).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그 어느 시대는 행복하고, 또한 어느 시대는 행복하지 않는다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100평이 넘는 아파트에서 살면 행복하겠는가? 물론 남들이 보면 행복해 보일지 몰라도, 하지만 남들보다 돈을 많이 가지게 되면 그 돈을 유지하고 관리하는데 신경을 남들보다 더 많이 쓰게 된다는 말이다. 밤에 강도가 들어오지는 않을지, 친척이 와서 빌려달라고 하지는 않을지, 그래서 이중삼중으로 철조망을 치고 힘들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현숙씨, 사랑해 !!

그런 것은 그 어느 시대에도 다 있는데,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를 잊을 만한 사랑하는 사람이 등장하게 되면 된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는 사랑을 하면 그만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하꼬방(단칸방?)에 살아도, 돈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연애에 몰입하게 되면 말이다.

그래서 이화여대의 어느 생물학 교수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60이 넘어서도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으면 연애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사랑을 하게 되면 회춘을 하게 되는데, 호르몬도 다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이론이 아니라 옛날 로마제국이나 모든 나라의 왕들이 다 했던 것인데, 물론 다윗도 했고 말이다.

왕들이 그러한 짓을 한 것이 특별히 어떤 연구를 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돈도 많고, 권력도 있고, 시간도 많으니 말이다. 그것은 비단 왕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그렇게 "청춘을 돌려다오" 라는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애굽에서 탈출하라 !!

이러한 것이 모든 사건인데, 그런데 이런 사건을 성령께서 조명하게 되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반드시 "애굽에서 탈출하라" 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애굽은 이미 한물 간 나라인데 왜 애굽을 자꾸 거론하는고 하니까, 지금 시위가 일어나서 무바라크 대통령도 추방되고 엉망인 나라인데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애굽, 즉 요즘 말로 이집트인데, 이 나라가 오늘날 무엇인고 하니, 이런 말을 하기가 참 미안한데(?) 말이다.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이 탈출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애굽에서 탈출 자체가 곧 구원이란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누가 구원을 받았느냐?" 라는 것은, 구원의 열매가 히브리인들이란 말이다.

애굽에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는가? 전혀 없었는데, 모두가 애굽에서 그냥 편하게 살고자 했지 말이다. 애굽에서 구원을 생각한 것은 한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는데, 사람들은 애굽과 같은 세상이 제 아무리 힘이 들어도 빠져 나오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천국이 되었으면 하지 말이다.

◈ 전쟁의 부산물이 곧 '이스라엘' !!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 앞장서서 나오자" 라고 한 것은 오직 하나님인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하나님 이름'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먼저 하나님이 나오고, 그렇게 하나님이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즉 하나님께서 벌리신 전쟁의 부산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를 해서 뭐라고 하는가?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오셨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그래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들이 언제 구원을 받고자 한 적이 있었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데, 그런데 구원을 받고자 나온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란 말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남들보다 더욱 더 여유 있게 잘 살아보려고 나온다는 것이다. 큰소리 치면서 말이다.

◈ 성령이 이끄신 예수님의 경로 !!

그런데 주님의 성령이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정작 본인은 구원을 받기 싫은데, 주님께서 빠져나가신 그 경로를 따라서, 그렇게 나가도록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만든 경로가 전혀 아니라, 주님이 앞장서서 가신 경로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경로가 무엇인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베들레헴에 태어나셔서, 그리고 애굽으로 가셨는데, 그 다음에는 자기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에돔 동네로 가게 되는데, 그곳이 곧 나사렛인데 말이다. 그리고는 그 동네의 사람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 나사렛 예수 !!

물론 예수님께서 일하신 것도 신약성경에 보면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부이고 예수님의 대부분의 성장과정은 어디인가? 예수님은 20대를 어디에서 보내고 자랐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은 바로 나사렛 동네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나사렛 사람으로 말이다.

이근호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저는 광주의 계림동에서 태어났지만, 태어나자마자 원주로 이사해서, 그리고는 5살 때부터는 대구에서 살았는데, 그러니 이근호는 대구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삼성과 기아가 야구를 하면 아무래도 삼성에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다. 물론 둘 다 애굽이지만 말이다(ㅋㅋ).

아무튼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그런데 이 나사렛 동네는 무슨 동네인가? 또 잊어버렸지 싶은데 빛이 없는 어둠의 동네라는 말이다. 그렇게 빛이 없는 어둠의 동네가 나사렛이라고 하면, 이에 반해서 빛이 있는 동네는 어디인가? 예루살렘이란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빛으로 오신 분이면서도 어디에서 사셨는가? 어둠의 동네에서 사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예수님은 어둠의 동네에서 빛의 동네라고 하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신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어둠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빛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나사렛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빛은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빛은 누구라는 말인가? 예수님뿐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그 일당이란 말이다.

◈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그 이외에는 빛이 전혀 없는데, 그것을 요한복음 1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둠 속에서 빛으로 오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몰아세웠기 때문에 그들은 빛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게 요한복음 3장의 내용이란 말이다.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렇게 해서 성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면 이 세상 전체가 애굽임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세상에서 벗어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인데, 그것이 곧 구원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일을 하실 때는 이 세상을 어둠으로, 즉 에돔, 혹은 애굽으로 간주하시고, 그렇게 해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경로와 애굽적인 경로 !!

그 다음에는 굉장히 어려운 것이 하나 정리되어야 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성령이 임해서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인해서 마리아 몸에서 잉태하신 그 전부를 알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 경로와 우리가 애굽에서 배운 교육적인 경로, 즉 애굽적인 사고방식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제가 그것을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둘을 두 개를 그어야 하는데, 하나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경로인데,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그 경로인데, 그것이 곧 구원의 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부자청년이 자기 자리에 그냥 있으니, 그래서 예수님이 그 부자청년에서 "너의 모든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니, 그 청년이 거부했다는 것이다. 
 
◈ 잠시 '자리'에 대해서 !!

여기에서 '자리' 문제가 나오는데, 이 자리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자면, 악마의 원래 자리는 무엇인가? 천사였는데, 그런데 자기 본래 자리를 떠나서 주님의 자리마저 도전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니 악마는 자기 자리마저도 확보하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땅으로 떨어진 것을 두고 요한계시록에서는 땅에 머무르지 않고 땅 속까지 떨어졌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저갱' 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무저갱에는 누가 있는가? 일시적으로 악마와 그 하수인들이 있는데, 그들을 일시적으로 보관하는 장소라는 말이다.

이 무저갱에 있는 것들이 나중에는 유황불에 빠지게 되는데, 그러니 천사의 특징은 계속해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미리 앞당겨서 창세기 3장에서는 어떤 동물로 비유를(?) 했는데, 그것이 곧 '뱀' 이라는 것이다. 그 뱀에게 내린 징벌의 내용이 무엇인가? 이 뱀이 어디와 딱 붙어서 살아야 하는가? 그야말로 땅과 붙어서 땅에 기어다니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 이 지상의 저주받은 땅과 자꾸만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 땅 속은 무저갱이고 말이다.

그러니 땅이 그만 악마 중심이 되고 말았는데, 그렇다면 성도란 무엇인가? 성도는 하늘에 살던 자가 아닌데, 성도는 어디까지나 이 땅에 살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악마가 지배하는 땅을 벗어나서 어디로 올라가는가? 그 올라가는 자리가 곧 예수님의 자리라는 것이다.

◈ 악마는, 예수님의 자리를 !!

그런데 이 예수님의 자리는 원래 악마가 원했던 것인데, 그래서 악마는 하나님이 아닌 예수님을 상대로 한다는 것이다. 즉 악마의 라이벌은 예수님이란 말이다. 제가 이것을 과거에 수련회 때 욥기 1장을 강의하면서 다 했는데 말이다. 기억이 납니까?

다시 말해서, 악마는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고 벌벌 떠는데,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악마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모든 것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인데, 그러니 졸지에 오직 예수님의 지시를 받아야만 하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 바로 그런 예수님 존재 자체에 대한 시기심과 반발심과 질투심, 그것이 곧 악마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때 하나님 자신을 앞장세우는 것이 아니라 누구인가? 예수님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는 자는 구원을 받고, 인정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로부터 잘린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마귀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싫어한다는 말이다.

저도 불교 신자들이나 중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좋은데, 하지만 예수는 그냥 인간이다" 라고 하면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에 대해서 불만이라는 것이다. 물론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만이지, 굳이 예수까지 왜 믿어야 하느냐고 한다는 말이다. 

◈ 그건 너, 바로 너 ♬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무엇인고 하니, 70년대에 '세시봉' 이라는 가수모임이 있었는데,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그리고 조영남이 그 멤버인데, 혹시 권사님은 아세요?(ㅋㅋ) 그들이 이번에 다시 모여서 콘서트를 하니, 미국에 있던 이장희가 잠시 초대가수로 초청을 받아서 나와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있을 자리가 이 자리인데"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는 왜 그 자리에 있지 못했는가? 사업을 한답시고 스스로 포기하고 미국으로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형주나 김세환 등은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 자리에 섰다는 것이다. 이장희는 '그건 너' 하나 부르고는 인기가 시들해지니까 그냥 떠나 가버렸지만 말이다. 그렇게 해놓고는 나중에 나이가 60이 훨씬 더 넘어서 나와서는 "야, 저 자리가 내 자리인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 아니, 어떻게 예수님의 자리에 !!

지금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원래 우리의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계시는 나라이지, 우리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쳐다보기는 어디를 쳐다본다는 말인가? 인간은 땅에서 살면 그만인데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감히 우리가 예수님 덕분에 그 자리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자리에 말이다. 그래서 천국을 예수님의 나라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가 무슨 수로 예수님처럼 거룩해지고 말씀을 완벽하게 다 지킬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우리가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것,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면, 그러한 사랑이 바로 율법의 완성인데, 그 사랑 덕분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애굽인 이 세상에서 말이다.

◈ 사랑을 입은 것이 곧 구원 !!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는 애굽에서의 탈출이 곧 구원인데, 그런데 신약에서는 법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사랑을 입은 것이 곧 구원이라는 것이다. '율법 외의 한 의(義)'이니 말이다. 즉 "너희들이 법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사랑으로 살 것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더욱 어렵게 말해서, "니 자신을 니가 판정할 때에 법적으로 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사랑으로 하는가?" 라는 것이다. 즉 과연 사랑의 차원에서 말씀을 보느냐는 말이다. 

어제 오전설교 시간에도 그런 말을 했지만, 사랑을 무엇이라고 했는가? 벌써 기억이 나지 않는가요? 사랑에는 반드시 상대가 있다는 것이다. 즉 "당신이 없이는 나도 없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말이다. 상대가 있는 것이 말이다.

'순애보' 라는 것이 있는데, 그 경우에 옛날에는 여자들이 그렇게 했는데, 소위 '망부석' 이라고 말이다. 바다가에서 남편을 기다리다가 그만 돌이 되었다는 전설인데 말이다. 남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양심에 찔리는데, 아내는 출장간 남편을 기다리는데, 그 남자는 무슨 짓을 하는지 말이다(ㅋㅋ).

그런데 요즘에는 그것도 바뀌어서, 순애보가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경우에도 그러한데, 특히 남자가 놀고 여자가 돈을 벌 때는 말이다. 그때는 아주 강렬한 순애보가 발생하게 되는데, 특히 앞치마를 두르고 퇴근하는 여자를 기다릴 때는 말이다(ㅋㅋ). 앞으로 그런 장면들이 영화나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지 싶다는 것이다.

◈ 왜 법이 아니고 사랑인가?

아무튼 '구원' 이라는 문제가 신약에서는 왜 법이 아니고 사랑인고 하니, 불쌍히 여겨주지 아니하면 그 어느 누구라도 천국에 가봤자 자기 자리가 없으니, 자기 자리를 찾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사랑으로 그런 우리 자리를 없애버리겠다고 하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우리 자리를 말이다.

어제도 말했지만, 결국 우리에게 짐이란 것은 무엇인가? 짐이란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하게 될 때, 생각하는 그 순간에 그것이 곧 짐이 된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자기를 사랑해줄 사람이 따로 없으니, 죽자고 자기가 자기를 사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불쌍한 노릇이냐는 말이다.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으니 법으로 완전히 자기를 포장해서, 자기 잘난 척을 하면서 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법을 지켰다. 너는 법을 못 지켰지? 이런 나쁜 놈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법으로 자기 몸을 칭칭 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어떤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게 되는데, 갑자기 이순재 보험이 생각는데, 물론 이순재 보험은 다 따지지만 말이다(ㅋㅋ). 강도가 되었던, 창기가 되었던 간에, 전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바로 그분, 바로 그러한 사랑이라는 말이다. 

◈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 !!

그것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의 전 재산인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는 것인데, 마치 허비하듯이 그것도 깨어서 말이다. 예수님의 장례식을 하듯이 말이다. 그러자 가룟 유다가 뭐라고 하는가? "저것만 있으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가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허비가 아니라 절정(?)이다" 라고 하시는데, 즉 참된 소비의 최후목적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 14:4)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막 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막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막 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막 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니 지금 제가 설명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인데, 즉 지금 성령께서 애굽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 빠져 나오게 하시는데, 그러니 이 세상을 무엇으로 만드는고 하니, 아까 이 세상을 애굽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애굽을 신학적으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불의 저주가 지배하는 세계인데, 왜 불의 저주가 지배하도록 하는고 하니, 그 이유가 다 있다는 것이다.

◈ 악마는 왜 선악과를 주목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선인지 악인지를 법적으로 규정하는, 그러한 체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노렸는가? 물론 악마가 노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악마는 아담과 하와에게 유독 선악과를 주목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지만 말이다.

아무튼 악마는 "너희들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 라고, 그렇게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는데, 즉 피조물이 신이 될 수 있는 신의 유일한 약점이라고, 마치 그게 하나님의 아킬레스건이나 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물론 거짓말인데, 피조물은 영원한 피조물이라는 말이다. 즉 피조물은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그것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악마가 지상에서 어리숙하게 보이는 인간을 붙들고 그러한 짓을 여전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신이 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즉 "신은 선하니 너도 선한 지식만 알게 되면 악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신이 될 수 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하지만, 선과 악은 서로 떨어지지 않아 !!

하지만 악마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선과 악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선이 있는 곳에 악도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게 전도서에 나오는데 말이다. (어디죠?) 마치 화투장과도 같은데, 앞에는 단풍이 있던 노인이 우산을 쓰고 있던, 뒷면은 언제나 빨간색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겉으로는 아무리 차이가 나더라도 그 속은 똑같은데, 즉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왜 죄인인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선과 악을 알기에, 바로 그것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다. 즉 선과 악을 아는 것 자체가 죄라는 말이다. 원래 이러한 죄는 인간에게 허용된 것이 아니었는데, 그만 따먹어서 죄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말이다.

◈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이렇게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지리적으로 제 아무리 옮기도 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인데, 즉 애굽에서 광야로 옮기고, 또 가나안 땅으로 옮기고 해도 말이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이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도 건너고 요단강도 건너고 신이 났는데, 그야말로 신기하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경험을 한번 해봤으면 좋겠는데, 즉 저기 부산 앞바다에 가서 대마도로 가는데 바다가 갈라진다면 얼마나 신이 나겠느냐는 것이다. 거기가 너무 멀면 금호강에 가서 해도 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신이 나면 무엇을 하겠는가? 선과 악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만약 우리에게 선과 악을 거두어 가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선과 악을 버리는 자아를 또 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선과 악을 버리고 하지 말고, 그런 선과 악을 쥐고 있는 인간이니, 그런 인간 그대로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 땡겨 주시면 땡기는 대로 !!

다만 외부에서 그런 썩어빠진 우리 자신도 사랑한다고 하는, 그 사랑의 주체를 발견하게 되면, 그런 관계로서 이미 의로운 관계가 성립되어서, 주께서 잡아당기면 그렇게 당겨 주시는 대로 빨려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구원의 길이고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땡기는 그 길을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 길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이미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길이 어떠한가?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서 애굽으로 갔다가 어둠의 동네인 나사렛에서 살게 되는데, 거기서 소위 빛의 동네라고 우기는 예루살렘에 가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판을 뒤엎어버리고, 그것이 곧 성전모독인데, 그렇게 해서 성전이 없어지니 지상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장소가 예수님이외는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접속지점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전인데, 그 성전이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성전이 없는데 무슨 수로 구원을 받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 성전은 석가래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 라고 했을 때, 그 성전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의 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몸이 그만 '붕' 뜨고 말았다는 것이다.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 이제 성전은 없어 !!

그러니 이 지상에는 성전이 없는데, 그래서 인간들이 아무리 열심히 예배당을 지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성전이 없는데, 무슨 수로 하나님과 접촉점이 되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바구니가 없는데 말이다. 그 바구니가 영적세계 안으로 숨어 들어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함으로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데, 아예 성전자체가 없으니 말이다. 인간들이 무슨 수를 다 동원하더라도 이 땅에서 접근할 수가 있는 성전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이라고, 소위 장자교단이라고 내세워도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 것들은 모두 육으로 난 것이니 말이다.

◈ 성령께서 가입시켜줌으로서 !!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몸' 이라는 성전에 가입시킨다는 것이다. 마치 회원가입을 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 가입시키는 경로에 대해서 그림을 그려가면서 설명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여기 지상에 이렇게 악령이 있는데, 이런 악마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악마도 도와주어야 경로가 제대로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도와주어야 말이다. 다음과 같이 보면 제일 쉬운데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의 몸에서 어떤 개념들이 나오는데, 예를 들어서, 하늘, 원자, 비료, 미움 등등 그 어떤 개념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만들 수 있는 말이다. 물론 교회도 나올 수 있고 말이다.

◈ 반드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

그런데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성령은 예수님의 몸에서 나오니, 이미 사흘만에 만들어진 성전에서, 즉 우리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접근할 수 없는, 정복되지 않는, 도착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런 성전에서 나온 개념은 물론 인간들의 개념을 사용하는데, 영혼, 육체 등을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드시 포함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난로가 있다면, 이 '난로' 라는 개념 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들어있는 개념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게 어렵다는 것인데, 또한 '머리카락' 이라는 것이 이렇게 있으면, 이것은 인간의 몸에 있는 머리카락이지만, 주님께서 머리카락이라고 할 때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담겨있는 머리카락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머리카락도 예수님께서 자라게 하지 못하면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한데, 즉 자동차, 벚꽃, 야유회 등등, 그 어떤 개념이라도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포함되어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경로로서 이 세상을 떠나고 있는 자들의, 그들만의 특징이고 특권이 된다는 말이다. 모든 개념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예를 하나 들어보면, 여기 '착함', 혹은 '선함' 이라는 것이 있는데, "성령을 주신 것은 너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는 것이 유다서에 나오는 내용인데, 유다서가 맞지요? (디도서입니다. ㅋㅋ)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을 기존의 신학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가 여기에 있고, 구원을 받고 난 뒤에 주님의 말씀대로 착해야 진짜 구원이 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원죄를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를 받더라도, 그만 자범죄(고범죄)를 짓게 되면 구원을 물 건너갔다고 본다는 말이다.

◈ 성경에는 구원론이 없어 !!

오늘 아침에 십자가마을 사이트에서 김대형 씨가 뭐라고 질문을 했는고 하니까, 사람들이 지금 고난주일이라고 은혜를 받고 있는데, 기존 교파들의 속죄론에는 어떤 종류들이 있는지 설명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문제를 출제해놓았는데,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모두 똑같습니다. 원죄는 예수님의 피로, 자범죄는 자기가 알아서 합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원죄를 구원을 받았는데, 하지만 자범죄가 남아있다고 하면, 구원을 받지도 못할뿐더러, 혹시 구원을 받는다고 해도 부끄러운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즉 상급도 없이 팬티 바람으로 천국에 간다는 말이다. 천국의 제일 밑바닥에 말이다. 그것이 기존 교회의 주장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저의 답변이 무엇인고 하니까, "성경에는 구원론이 없습니다" 라는 것인데, 즉 성경말씀에는 인간구원이 없다는 말이다. 성경에는 예수님 구원만이 있는데,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의 구원경로만이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살다가 가셨는지, 그 경로만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 구원은 없는가? 인간 구원은 애초부터 아닌데, 즉 천국에는 인간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자리가 우리 자리인데, 그러니 원래 우리 자리는 하늘나라에는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인간의 나라이지, 하늘나라의 구성원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 예수님의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서 동원된 자들만 !!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 구원은 없고 오직 예수님의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서 동원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론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김대형 씨에게 뭐라고 했는고 하니, "자기 구원을 믿지 말고 예수님의 구원을 믿으세요. 그것이 곧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분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고 하니, 예수님의 구원문제나 성화문제에 있어서 그것을 그냥 통과하게 되면, 즉 "내 몸이 여기에 있다. 나는 선하다" 라고 하게 되면, 여기에는 그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의미가 말이다.

◈ 인간은 왜 '선함'과 상관이 없는가?

그런데 여기에 십자가의 의미를 집어넣게 되면, "나는 선하다" 라는 것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나는 죽어도 마땅한 인간인데 나에게서 무슨 선이 나오는가?" 라고 되는데, 그렇게 십자가의 의미를 넣게 되면 인간의 행함 자체가 모두 부정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선함' 이라는 것은, 즉 부자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러한 것이 선함이 아니라, 진짜 선함은 오직 예수님만이 선한 분이 되고, 하나님만이 선한 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한 일을 묻는, 그런 인식과 사고방식 속에서는 선함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고 성령이 오셔서, 즉 가르쳐 주더라도 성령이 오셔서 가르쳐준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가? 인간은 그 무엇을 하더라도, 즉 해석을 하나 하더라도 자기에게로 다시 되돌아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우리가 도구가 되었음을 깨닫게 해주시는데, 즉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동원된 자들이란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전혀 주인공의 자격이 애초부터 없음을 성령께서 인식하도록 해주시는데, 성령은 우리의 영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제 교재 146페이지를 살펴보자.

** 여기 본문에서 '먼저 강한 자를 결박 … 결박한 후에야' 라는 표현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다시피 천국 성취자께서는 인간들에게 소위 '강한 자' 라는 대우는 받는 악령에 대해서 정치적 타협을 통해 포로를 송환하는 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단연코 아니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 '강한 자'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 나라 !!

마태복음 12장의 이 본문이 무슨 뜻인가? 어떤 도둑이 들어와서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는, 그 집안에 있는 집주인의 소유인 세간을 들고 나가면 그것이 곧 하늘나라라는 것이다. 하늘나라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늘나라가 이루어지려면 강한 자가 있어야 하고, 다음에 더 강한 자가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강한 자에게 묶여서 꼼짝도 못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나라는 무엇인가?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이 하늘나라가 아니고, 더 강한 자가 강한 자를 묶는 일과 묶였던 우리를 가지고 나가는 그 모든 작업이, 그것이 곧 강한 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은 하나의 결과이고 혜택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그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

그런데 예수님은 그 뒤에 뭐라고 하셨는고 하니, 32절에 보면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 기존 목사들의 경우에 !!

이 대목에 대해서 기존 교회의 목사들이 뭐라고 하는지 먼저 이야기를 하겠는데, 아까 모든 해석에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집어넣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을 염두에 두고 목사들이 뭐라고 하는지 한번 들어보자는 것이다. 

일반 목사들은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교회라는 점포를 운영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성경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라는 말씀이 나오게 되면, 그 말씀을 목사가 보았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목사는 상품을 팔아서 돈으로 환원을 시켜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목사는 성령을 상품화를 시키는 것이 괜찮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예수님을 상품화시키게 되면, 인자는, 즉 예수님은 거역해도 용서가 된다고 하니까, 그만큼 돈을 받고 팔만한 그런 상품성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은 거역하게 되면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그건 참 왔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목사에게는 무슨 총알을 마련하면 되는가? 성령이라는 총알을 많이 준비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목사가 성령을 받았다는 총알을 몇 가지로 보여주게 되는데, 방언하는 것과 병을 고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그리고 목회하는 수완을 보여주는데, 그것을 그들은 성령의 힘이라고 생각해서, 이 목사가 가지고 있는, 여기서 말하는 이 목사는 이(李) 목사가 아닌 이(this) 목사인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이 목사가 가지고 있는 방언을 모독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당신은 영원토록 용서를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게 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또한 이 목사의 설교와 병 고침에 대해서도 모독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도 역시 "당신은 영원히 지옥에 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장로이든 집사이든, 혹은 교수이든 재벌이든 간에 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목사가 하는 방언과 병 고침과 설교와 목회에 대해서 덤벼들면 '영원히'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는데, 조금 마음이 약한 목사는 차마 자기 입으로는 하지 못하고 이웃교회에서 목사를 불러다가 그런 것을 부탁하게 하는데, 헌신예배나 부흥회를 통해서 말이다. 물론 자기는 그 다른 이웃교회에 가서 하고 말이다.

◈ 결국, 남는 것은 자기 '몸' !!

그렇게 해서 결론은 "여러분, 목사에게 잘해주세요" 라는 것인데, 아주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어가면서 한다는 것이다. 어떤 장로는 목사에게 덤벼들다가 그만 사업이 망했다고 하고, 또 어떤 집사는 심한 병에 걸렸다고 구라를 치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하게 되면 교인들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만 졸아들게 되는데, 그래서 다른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만, 교회에서 목사의 명령이나 지시를, 심지어 그림자 등을 건드리게 되면, 그것은 성령을 거스리는 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가 차를 바꾸자고 하든지, 사택에 불편한 것이 있다고 하면 자기가 앞장서서 하게 되는데, 왜 그런가? 성령을 거역하면 영원히 영원히 저주를 받기 때문에 말이다.

지금까지 한 것이 바로 기존 목사들의 성경해석인데,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빠졌느냐는 것이다. 목사의 개인적인 인격이 문제인가? 그런 인격은 사실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죄인인 주제에 인격은 무슨 인격이냐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령을 해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모든 신학용어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집어넣어야만 하는데, 그것을 빼버리니 남은 것은 무엇인가? 자기 '몸'만 덜렁 남는다는 것이다. 자기 몸만 말이다. 

◈ 이제는 투 톱 체제로 ??

그러면 평소에 그 목사에게 불만이 있던 사람이 뭐라고 되받아 치는고 하니, "목사 저 양반은 설교도 잘하고 목회도 잘하고 방언도 잘하는데, 그런데 병 고치는 것을 잘 하지 못하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에 자기 어느 날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지 않고 실험 삼아서 자기 몸에 기도를 해봤더니만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에게도 안수기도를 하니, 아이가 아침에 "아빠, 이제 아프지 않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은 이제 누구와 막 먹을 수가 있는가? 목사와 막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때부터는 어떻게 되는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가 다 죽어있는데, 그런데 이 사람은 뭐라고 하는가? "이제 나도 성령을 받았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이 양반이 장로라고 하면, 이제부터는 목사와 함께 교회운영에 있어서 투 톱 체제에 들어가는데, 과거에는 목사가 혼자서 원 톱 체제로 교회를 운영했었지만 말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 않았으니 자기들과는 레벨이 다른 하수로 보고 말이다.

하지만 동업은 언제나 깨어지기 마련인데,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돈 문제가 걸리면 말이다. 그렇게 해서 깨어지면 뭐라고 하는가? "저 목사는 성령을 받은 이 장로를 대적했기 때문에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 라고, 그렇게 똑같이 써먹는다는 것이다(ㅋㅋ).

저는 그것을 두고 '분재(盆栽)' 라고 하는데, 마치 그 가지를 하나 떼 내어서 심으면 똑같은 것이 나오듯이, 꼭 그대로 배워서 그대로 다 써먹는데 말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기존 한국교회의 150년 동안 그대로 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통일교에서 나온 것, 박태선에게서 나온 것, 장로교에서 나온 것, 전부가 다 꼭 같은데, 그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성령을 받았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서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무엇인가? 위의 32절에 나오는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거역하면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 라는 것인데, 그러한 논리를 다 자기 중심으로 적용시킨다는 것이다.  

◈ 구약 '이스라엘'의 경우에 !!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성령을 거역한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자는 말이다. 시대상으로 보면 알다시피 구약시대에 언약이 주어졌는데, 그러면 육적인 이스라엘은 그것을 육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물론 잘못된 것인데,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그만 저주가 오게 되고, 그래서 이방민족이 끊임없이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전쟁은 붙으면 백전백패인데, 즉 이스라엘은 전쟁만 했다하면 무조건 다 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약속의 땅에 있는 주변 이방민족들에게 말이다. 블레셋과도 같은 나라들에게 지배를 당하고 말이다.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그게 계속해서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가끔은 승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두고 '사건'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제가 강의 처음에 이 사건을 두고서 무엇이라고 했는가? 마치 난타공연에서 물방울처럼 튀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규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갑자기 우발적으로 생기니 말이다. 사건이 그렇다는 말이다.

◈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 !!

그런데 그 사건을 두고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에게 발생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를 현대 신학자들은 뭐라고 해석하는고 하니까, '카리스마'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것이란 말이다. 물론 이 '카리스마' 라는 말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지만, 하지만 그 뉘앙스가 뭔가 찜찜하다는 것이다. 왜 찜찜한가?

큰 교회의 당회장들 중에서 카리스마가 없는 자가 누가 있느냐는 것이다. 교회를 누구든지 그 정도는 다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나를 거역하면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 라고 하는, 그런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는 말이다. 제가 이 카리스마에 대해서 글을 적어놓은 게 있는데,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 가운데서 '다윗언약의 형성과정'에 보면 그게 나오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 여호아의 신, 즉 성신은 무엇을 규명하는고 하니, "이미 주신 이 언약은 너희 이스라엘을 위한 언약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이 언약을 위해서 있다. 심지어는 너희들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언약을 담은 상자를 두고 '언약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언약궤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가? 없는데, 그만 죽는다는 것이다.

◈ 오잉, 덜렁 상자 하나 ??

주일학교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옛날에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언약궤를 모신다는 의미인데, 그러니 다윗이나 솔로몬이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이 사실상 무엇인가? 덜렁 상자하나 모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유치한 방법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중에는 상자고 뭐고 간에 불태워 없애버리는데, 왜 그런가?

마치 건물을 짓고 나면 그 건물을 감싸고 있던 아시바와 같이 건물을 짓기 위한 보조 설치물은 철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건물이 완공되었으니 이제 다른 것들은 철거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건물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그런 것들이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약궤의 유지도 그런 차원이라는 말이다.

◈ 언약을 위해서 !!

아무튼 '언약을 위해서' 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신은 어디를 겨냥하는가?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는가? 아니면 언약의 구원에 있는가? 언약구원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사기를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하는 역할이 무엇인고 하니까,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대로 됨을 믿어라!" 라는 것이다.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탱크를 더 주고, 폭격기를 더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문제는 이방민족의 강함이 아니라, 이스라엘 본인 자체가 문제인데, 그게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를 위해서 언약이 있지, 언약을 위해서 우리가 있다" 라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관계에 대해서, 즉 기존의 화살표 방향을 바꾸는 역할을 누가 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가 하는데, 그렇다면 말로 하는가? 그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다 "신이시여, 우리를 도우소서" 라고 할 때, 본인만큼은 "제가 언약을 위해서 죽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바로 기드온이고, 삼손이고, 즉 사사들이란 말이다. 그러니 사사들의 할 일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언약을 위해서 사는 모델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 기드온의 경우에 !!

하지만 사사기에 보면 무슨 사사들에게 무슨 무기가 있고 자기 패들이 있는가? 기드온의 경우에 미디안이 쳐들어와서 22,000명을 모집하는데 있어서, 물론 22,000명이 오기는 했지만 그 숫자가 너무 복잡해서 일이 진행이 안 되어서 집으로 모두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드온는 자기가 지시한 대로 물을 먹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들이 바로 냇가에서 서서 손으로 먹는 자들인데, 마치 개처럼 물을 엎드려서 먹는 자들이 아니고 말이다.

(삿 7:5)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 것 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시더니
(삿 7:6)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왜 그들은 뽑았는고 하니, 그렇게 물을 먹는 자들이 제일 적었다는 것이다. 엎드려서 먹는 자들이 말이다. 그래서 22,000명들 중에서 다 가고 겨우 300명만 남았는데, 그렇게 되면 이 300명은 22,000명이란 숫자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사람인데, 즉 이제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기드온 한 사람밖에는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22,000명이 모여있을 때는 "야, 우리교회가 참 크네. 우리끼리 무엇을 해도 하겠네" 라고 하다가, 이제 그만 모두가 다 가고 나서 겨우 300명이 남게 되니, 미디안의 그 수십 만의 군사와 무슨 재주로 전쟁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 약속의 땅 - 언약대로 하지 않으면 저주가 흐르는 땅 !!

그런데 이 약속의 땅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언약대로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속성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이다. 약속의 땅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이방인들의 힘이 무서워서 언약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힘에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면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되니, 여기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 라는 것은 눈이 뜨인다는 것인데, 그렇게 눈이 뜨이니 할례를 받지 않은 미디안과 같은 이방나라는 이 땅에 살지 못하도록 되어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자기들 땅에서 쫓아내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횃불과 항아리를 들고 나팔을 부니, 적들이 그만 모두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 과연 진짜로 두려 분은 누구인가?

그때 상황을 두고 '겁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누가 겁이 나는고 하니, 과거에는 이방나라들이 겁이 나고 두려웠는데, 이제는 누가 제일 겁이 나는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감격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그리고 너무 너무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무섭다는 것이다. 마치 선지자 이사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언약대로 움직인다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운데, 그러면 지금은 무슨 언약인가? 새언약인데, 그 새언약의 내용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죽었다. 그리고 부활했다" 라고 하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사실이 이 대한민국의 대구, 혹은 서울, 부산, 광주, 울산 등등, 그러한 좁은 땅덩어리에 살면서 그게 너무 무섭고 두렵고, 또한 고맙고 감사하다는 것이다. 그 사실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큰 교회의 당회장이나 돈 많은 사람이 무섭거나 두렵지 않은데, 물론 부럽지도 않고 말이다. 그게 곧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이기에 말이다. 그런 사람은 사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 땅에서 새언약을 증거하는 사명을 말이다.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가 제일 겁나는 것이 교인이 떠나는 것인데, 특별히 헌금을 많이 하는 교인이 떠나게 되면 그야말로 안절부절하게 되는데, 자기 몸에서 간이 하나 그만 '툭'하고 떨어지는 것 같다는 것이다(ㅋㅋ). 왜 그런가? 사람이 자기 미래가 보장되지 못하면 죽을 맛인데, 나이가 많으면 연금이라도 나오는데 말이다. 그런데 아직 연금을 탈 나이도 되지 않았는데, 그만 미래가 보장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 애굽에서는 포트폴리오를 잘 구성해야 !!

그래도 옛날에는 포트폴리오를 펀드로 잘 구성을 해놓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자식을 많이 깔아놓았다는 것이다(ㅋㅋ). 문희갑이 주연한 영화 '팔도강산'에 보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민폐를 끼친다는 것이다. 12 자식들 중에서 한 두 놈만 잘 되면 된다는 것이다. 즉 이쪽 펀드가 손실이 나더라도 저쪽 펀드에서 수익이 나면 된다는 것이다. 비가 오면 소금장수 자식은 안 되더라도, 우산장수 자식이 잘 되면 되듯이 말이다. 그래서 많이 깔아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뜻대로 되지는 않는데, 여러 가지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서 죽으니 말이다. 그래서 더욱 더 많이 낳아야 하는데, 이것을 현재 아프리카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많이 깔아야만 하는데, 그 중에서 축구 선수나 마라톤 선수가 나오게 되면 그 집안은 팔자가 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든지, 아니면 쓰레기통을 뒤지든지 해야한다는 말이다.

◈ 초라한 예수님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 !!

아무튼 하나님의 신이 이렇게 언약중심으로 왔는데, 그게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사사가 되고 선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예수님의 그러한 모든 것을,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행색을 보고 판단하는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니가 보기에 지금 내 행색이 초라하다는 것은 인정을 한다. 그래서 지금 나를 거역하고 시시하다고 여겨서 부정하는 것은 나중에 기회가 있겠지만, 그러나 초라한 나를 사용하시는 성령의 원리는 영원히 동일한데, 바로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용서를 받지 못한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성령의 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아까 말한 것인데, 즉 강한 자를 물리치고 거기에 잡혀있는 가제도구를 가지고 나가는 식으로만 구원되는 원리인데, 바로 거기에 대해서 거부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 이제는, 주의 자리에서 성령세례를 !!

이렇게 예수님께서 성령에 속하다가 나중에는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께서 성령에서 속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을 하시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는 하늘나라에서 주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의 자리에 앉게 되면, 그때부터는 예수님이 친히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성령의 세례를 주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 세례를 말이다.

◈ 성도는, 애굽과 출애굽을 동시에 !!

이렇게 예수님께서 성령의 세례를 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애굽적인 사고방식과 성령의 사고방식을 그 안에 같이 만나는 장소로서 활용을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는 양쪽이 모두 다 있는데, 즉 "아하, 바로 이것이 애굽이고, 이것이 애굽에서의 탈출이구나" 라고 하는 것이 말이다. 그렇게 해서 양쪽 다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해서 뭐라고 하는가? 애굽을 버렸다고 하는데, 하지만 애굽을 버린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안에 그대로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 성령이 오시게 되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보물이고 진리임을, 그것을 늘 상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애굽적인 몸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죄가 피어오르는데, 그래서 은혜를 받고 돌아서면 어떻게 되는가? "내일은 어떻게 살지?" 라고 하는데, 그러다가도 "아니야, 십자가가 더 중요해" 라고 하고, 그러다가도 또 다시 "글세, 내일은 어떻게 살지? 참으로 기가 차고 코가 찰 노릇이다. 내가 무슨 수로 살지? 봉화에 가서 농사를 짓고 살까? 도대체 어떻게 살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23시간 58분을 항상 애굽적인 사고방식으로 소비를 하는데, 그런데 고마운 것은 그 2분 동안의 틈을 째면서 비집고 들어온다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대부분을 애굽적인 몸의 본성을 발휘하게 된다는 말이다. (2초가 아닌 2분??)

이제 진도를 나가겠는데, 그러니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항상 십자가와 부활로서 개입할 때만 성령의 인도하심이지, 그것이 아니라 "나는 성령을 받아서 방언도 하고 목회를 잘한다. 그러니 나를 거역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그런 허풍에 놀아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나만 입을 다물면 그만이지 ??

제가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이 강의를 듣는 사람도 공감을 하면서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만, 또 그 교회에서 고난주일이라고 돈을 내라고 하면 돈을 내는 사람이 분명히 또 있다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니 "에이, 더러워라. 그냥 줘버리자. 주지 않으면 재수가 없을지 몰라" 라는 식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와 부활로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는데, 그것을 또 다시 잊어버리고는 자기 몸 하나 간수하려고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 질문 - 목사님,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목사님의 말씀을 거역했을 때, 그러면 사단의 능력으로 거역한 우리에게 피해가 올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거역을 하게 되면, 그 피해는 이 땅에서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에게 온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말이다.

* 질문 - 제가 질문한 의도는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비성경적인데, 즉 방언을 한다든지 하면서 허풍을 떠는 목회자의 말을 거부하게 되면, 사단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에게 육체적인 복과 같은 것이 올 수 있느냐는 겁니다.

사실은 방금 제가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했는데, 그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고 말이다. 즉 어떤 성도가 있는데, 그 사람이 목사를 대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목사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덤벼든다는 것이다. 그러면 피해자가 누구인가? 대들었던 성도에게 피해가 온다는 것이다. 보조역할로서 악마가 그렇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 거역을 해서 고통을 받음으로서 !!

쉽게 말해서, 바른 소리를 하면 그 바른 소리를 한 사람이 피해를 입는 것이 이 세상인 애굽의 원리라는 말이다. 즉 바른 소리를 할 때만 자기가 하나님에게 벌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바른 소리를 함으로서 주변에서 쏟아지는 그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느낌을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부담이 되고 싫어서 "나만 입을 다물면 그만이지"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협박이나 공갈을 당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냥 내 혼자서 구원을 받으면 그만이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사의 사명은 그만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오지랍도 넓게 온 동네에 다 돌아다니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도 역시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십자가 마을에 보면 그런 분이 있는데 말이다(ㅋㅋ). 자기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를 확인하는 차원인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다른 교회에 가서 그들을 비웃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이 주신 사명이 아니라 자기가 사명을 만드는 셈이 되는데,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구야?)

이제 교재 147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 본문에서 '인자'와 '성령'을 구분지어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인자' 라고 스스로 호칭하시고 활동에 나서시는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인자차원에서 보지 말고, 즉 성령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결국 인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기적을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인데, 아까 했으니까 넘어가도록 하자는 것이다. 다시 간단히 설명하면, 예수님은 분명히 주(主)시지만, 하지만 주의 자리에 앉기 전에는 성령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러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제 '붕' 뛰어넘어서 교재 151페이지를 살펴보자.

** 사울이 사도가 되기 이전의 상황을 이렇게 고백한다.

(빌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빌 3: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여기 3절에 보면, 무엇과 무엇이 대비되는고 하니까, 즉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면서 예수님을 자랑하고, 그리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 진정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령에 대비되는 것이 곧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것이 육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인가? 성령에 대비되는 것이 육체라는 것이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는 자신의 육체의 행함을 신뢰하고 있기에 구태여 육체의 능력을 불신할 하등의 근거가 없었다.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여호와의 영이 지금 자기 안에서 활약하고, 그것이 자신의 육체의 행함으로 옳게 발휘되는 마당에 새삼 율법에 대해서 다른 이해를 가질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 오잉, '육체신뢰'?

이 대목에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지 싶은데, 물론 이것도 역시 어렵게 이야기할 수밖에는 없지만 말이다. 여기에 이렇게 사도바울이 있는데, 이 사도바울에게서 마치 몸 속의 창자를 끄집어내듯이, 그의 과거 흔적을 한번 끄집어내어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의 사건들이 이렇게 점으로 꼭꼭꼭 찍히게 되는데, 그러면 이제 이 점들을 해독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과거에는 예수님을 핍박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줄을 알고서, 이제는 예수님의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단순히(?) 그렇게 되어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일생이라고 본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사도바울 본인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이 어렵다는 말이다. 

여기에 이렇게 사도바울 말고 여러 가지 교회 공동체가 있는데, 하지만 이렇게 여러 사람이 있더라도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이 이미 앞서서 사도바울에게 일어났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바울처럼 우리도 죽어야 하는가? 그게 아니라, 예수님을 핍박하는 이 전체를 하나로 묶어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게 어떤 개념인고 하니, 바로 '육체' 라는 것인데, 즉 '육체신뢰' 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육체의 신뢰로서 말이다. (어휴!!)

◈ 목사님,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대전에 계시는 권사님이 전화로 저에게 질문을 하기를, "인간의 속마음을 인간의 영혼이 아닌 다음에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속마음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것이 맞지 않습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고 하니까, 그에 앞서서 제가 대전에서 강의하기를, "인간의 영혼은 없고, 그 영혼은 육체에서 나온 이미지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사님은 무엇인고 하니, 영혼이 없다는 것을 자기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답변을 어떻게 했는고 하니, 그것이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는 것인데, 그 마지막에 보면 육체와 영혼을 더해서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육신, 혹은 '육(肉)' 이라고 표현했다는 말이다. '육에 속한 사람' 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육체+영혼'을 육신으로 본다고 하면, 그 육신의 맞은 편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은 '영에 속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린도전서 2장 14절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 권사님, 영혼이 신체 어느 부위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육에 속한 사람' 이라고 하는 경우에도 어떻게 여기는가? 그것이 '육체+영혼'으로 되어있다고, 그렇게 모든 인간이 다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육체라는 것은 이렇게 만져지는 세포 덩어리인 신체인데, 그 신체에는 영혼이 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대전에서 강의하면서 묻기를, "영혼이 도대체 신체 어느 부위에 있습니까?" 라고 했는데, 눈에 있는지, 간에 있는지, 어깨에 있는지, 아니면 장딴지에 있는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혹시 대구에 사시는 권사님은 아세요? (ㅋㅋ)

◈ '육체+영혼'은, 육체에 영혼을 종속시키는 쪽으로 !!

여기서 '육체+영혼' 이라고 되어버리면, 육체의 어느 공간을 차지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육체에 영혼을 종속시키는 쪽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즉 "이렇게 육체는 확실하게 있는데, 영혼은 어디에 있지?" 라고 하는 질문자체가, 마치 영혼을 육체의 어느 한 구석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고 하니까, 영혼이 육체 바깥으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혼은 육체의 바깥으로 나가지를 못하는데, 하지만 정작 영혼이 육체의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고, 그러니 미치고 환장한다는 것이다.

영혼이 육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그게 곧 죽음인데, 즉 죽게 되면 육체는 그대로 있는데 영혼은 올라간다고 한다는 말이다. (녹취자 - 요즘에 미국 드라마 'V2'에 보면 외계인이 인간의 육체에서 영혼을 찾아서 끄집어낸다고 난리입니다. 사람의 몸을 낱낱이 분해하고 말입니다. - 매주 금요일 밤 11시 CGV에서 방영)

◈ 영화 '사랑과 영혼'은, 육체 중심 !!

'사랑과 영혼' 이라는 유명한 영화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죽은 남자의 영혼이 어떻게 하는가? 자기가 지금 옆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가? 엄청나게 애를 쓰는데, 그렇게 해서 물론 겨우 동전 하나를 움직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육체와 귀신의 만남에서 에너지가 동전을 움직이는 에너지로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엄청 용을(애를?) 써서 말이다. 왜 둘이 붙어서 도자기를 굽고 하는 영화가 있는데, 알지요?

그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영혼 중심이 아니라 육체 중심으로 보니, "영혼아, 육체는 이렇게 든든하니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여기 든든한 육체 안에 있어라" 라는 것이다. 그런데 육체의 안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극단적으로 되어버리면, 영혼이 여기에(?) 뭉쳐져 있으면 50점이고, 여기 장딴지에 내려가면 장딴지가 그만 파열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영혼은 육체의 어디에 있는 것인가? 사랑을 할 때는 심장에 있는가? 현대과학은 이것을 어떻게 보는고 하니, 영혼은 두뇌에 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하지만 두뇌를 한번 조사해보라는 것이다. 과연 영혼이 거기에 있는지 말이다.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 영혼도, 십자가와 부활의 개념이 포함되어야 !!

그러니 영혼은 무엇인고 하니, 육체를 기반으로 해서 그 육체가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의 개념을 도입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십자가와 부활의 개념이 포함되어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개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가? 모든 육체는 무엇인고 하니, 그 몸은 '언약적 몸' 이라고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언약적 몸' 이란 것은 우리의 신체를 보고 신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왕 어려운 것 더 어렵게 해보겠는데, 괜찮지요? 

여기서 제가 실험을 하나 하겠는데,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주전자가 있고, 컵이 그 옆에 있다고 하면, 그것을 두고 "주전자 옆에 컵이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 주전자 옆에 제 손이 있다고 하면 뭐라고 하는가? 주전자 옆에 손이 있다고 하는가? 아니면 몸이 있다고 하는가? 당연히 몸이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나'의 손과 머리와 어깨 등은 '나'의 몸에서 떨어진 일부로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나'를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때는 '나'에게 속한 사물로서 보지 않는다는 것인데, 물론 주전자는 하나의 사물로 보지만 말이다.

따라서 언약적인 몸이 되어버리면, 즉 우리의 몸 안에서 언약적인 작용이 일어나게 되면, 그렇게 언약적인 작용이 일어나게 하는 '연결체(?)'를 두고서 영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몸과 연결하는 그 관계를 두고서 말이다. 언약과 우리 몸을 연결하는 말이다. (녹취자 - 그러니 이렇게 살펴보아야, 십자가와 부활의 개념이 포함된다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흔히 영혼이라고 하면 육체와 영혼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는데, 하지만 막상 언약이 작용하게 되면 육체와 영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물론 육체가 있을 때는 영혼이 오게 되지만, 그때는 영혼에 관여하고, 혹은 마음에 관여하고, 혹은 자아에 관여한다고, 그렇게 마음과 자아 등을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 육의 몸과 신령한 몸 !!

하지만 결과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 전체가 성경말씀에 있는 대로 '육의 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육의 몸이 되고,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육의 몸이 있고, 또 무슨 몸이 있는가? '신령한 몸'이 있다는 것이다.

(고전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그러니 육의 몸, 또한 신령한 몸이라고 하는 것은, 육의 몸을 쪼개어서 판단하지 말고, 그런 식으로 해서는 그런 개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 전체를 통 채로, 영혼이든 육신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그렇게 통 채로 다 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 "아하, 너는 영에 속했어", 혹은 "아하, 너는 영에 속했어" 라고 하시는, 그렇게 보시는 주체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물론 우리의 손은 사물을 보지 못하지만, '나'는 공간 전체를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볼 때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하나의 사물로서 본다는 것도 말이 되지만, 그것을 두고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본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육이야" 라고, 혹은 "너는 영이야" 라고, 그렇게 과연 주님이 어떻게 보시는지, 그것이 관건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질문하기를 "목사님, 저는 육체로 되어있습니까? 영혼으로 되어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육체와 영혼이 합쳐서 되어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렇게 스스로 자기를 분석해서 자기를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하나의 사물로서, 즉 자기를 하나의 물건으로 간주하는 비언약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주님께서 언약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라고, 바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전에는 자기 자신을 육으로 보았던 것을, 이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말하기를, "나의 과거의 전부는 육신에 속한 일생이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그것이 바로 육신에 속한 것인데, 즉 "우리 몸이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있지를 않습니까?" 라고 하는 질문 자체가 언약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답변도 성경적으로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은 철학책이 아니기에 말이다.

성경은 오직 언약만을 말하는데, 즉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약적으로 보는 게 중요한데, 즉 인간이 육체가 되었든 영혼이 되었던 간에 그 자체로서 이미, 즉 "육적인가? 영적인가?" 라는 것이 중요하지, 그런 육체와 영혼에 대한 질문자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고 하니, 데살로니가전서(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에 그 사람들에게도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아까도 말했지만 인간들은 철학적 용어를 가지고 자기들 입장에서 바라보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을 십자가와 부활의 관점에서, 즉 기존의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용어에 새로운 내용을 담아낸다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관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지방교회와 같은 곳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방금 제가 말한 그런 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용어 하나만을 들고서 계속해서 뽑아내는데,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고 말이다. 과연 그러한가?

◈ 라캉과 들뢰즈와 개혁주의 신학 !!

그래서 이번 주일에 '라캉과 들뢰즈와 개혁주의 신학' 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는데, 소위 요즘 설교를 조금은 한다는 목사들이 뭐라고 하는가? 자기들은 그게 신학이고 신앙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전부가 다 철학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즉 철학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가 그런 주제로 강의를 하는 의도가 무엇인고 하니, 지금까지는 신학을 했으니 이제 철학을 공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철학인지, 아니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인지, 그것을 철학을 가지고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보게 되면, 복음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구구 절절히 느끼게 되는데, 왜냐하면 철학적인 논리가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배여 있기 때문에, 이런 육적인 몸에서 툭 튀오나온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 '육체신뢰'는, 개인적 경험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 !!

여기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보겠는데,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교재에서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했다고 되어있는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해야 하는데, 육체를 신뢰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의미이냐는 말이다. 

** 그는 자신의 육체의 행함을 신뢰하고 있기에 구태여 육체의 능력을 불신할 하등의 근거가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 라는 것은 몸에 힘만 실려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육체와 영혼을 다 합쳐서 그것이 무엇을 움직였다는 말인가? 육적으로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자기가 그러했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육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이런 과정에 모든 교회의 공동체에게 다 해당된다고, 바로 그것을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것 같지만,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는 말이다.

◈ 계시는, 보편적이기에 !!

물론 신학자들은 이것을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는데, 하지만 성경을 그렇게 본다면 간증을 다 빼버려야 하는데, 그러면 사실상 성경에서 남는 것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로 보아야 하는데, 즉 "우리는 누구나 다 그러한 과정을 겪도록 되어있다" 라고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성령이 오기 이전과 그 이후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보여주는데, 그런데 그게 개인적인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작용한다는 말이다. 즉 성령께서는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계시로서 사용을 하시기 때문에, 단순히 그의 개인적 이야기라고 보지 말자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아무리 자체적으로 거룩한 말씀을 끌어당겨서 반성과 회개 체제를 가동시켜 봐도, 최종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바가 자신의 육체의 행함이기 때문에, 이 근원이 파괴되지 않는 한 전체적으로 여전히 '문제없는 자'로 남는다. 즉 '그 어떤 말씀이라도 지키려고 하면 지킬 수 있다' 라는 식으로 해석을 내리게 된다.

◈ 사도바울 -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

강의를 다시 해야하겠는데(??), 여기에 육체적인 것의 예가 나와있는데, 즉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당겨서 회개하고 반성을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우리가 신뢰하는 것이 곧 육체의 행함인데, 그것이 여전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의 속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이제 괜찮기 때문에, 나는 저 사람을 공격할 자격이 있어" 라고, 그렇게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성령께서 "너는 이제 손을 댈 것이 없어. 너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공격할 거야" 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나도 육신 가운데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된다는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할아버지든, 어린아이든 간에 말이다.

◈ 20대에게도 복음을 !!

이제 마지막으로 이것만 더 하고 마치도록 하겠는데,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부끄럽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 그런 질문을 끄집어내겠는데, 즉 "이런 복음을 20대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그러니 그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하고, 더욱이 10대에게는 어떻게 전할 수가 있겠는가?" 라는 것이다. 또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는 어떻게 설명을 해주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차마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까봐서 그런 질문을 대놓고 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만약에 이런 이야기를 40대가 되고 50대가 되어야 알아듣는다고 하면, 그렇게 되면 보편적인 계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이 40도 되지 못해서 죽은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20대에 죽은 사람도 많이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당신은 20대이니 이것을 알지 못해" 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는데,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10대는 빼겠는데, 그들은 아직 미성숙 인간으로서 부모의 영향아래에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부모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반항을 하는데, 그렇게 반항을 하면서도 부모의 눈치를 보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런 10대는 제외시켜두자는 것이다. 그들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모방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대의 경우는 어떠한고 하니까, 20대는 몸도 크고 다 컸다는 것인데, 이렇게 몸이 컸다는 것은, 비로소 잠재되어있고 감추어졌던 것이 육신대로 발휘된다는 의미인데 말이다. 그렇게 육신대로 발휘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 계속해서 십자가의 상처를 유발시키는 인간 !!

복음은 알다시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인데, 그 십자가의 의미를 분석하게 되면, 그게 그냥 십자가가 아니라 누구 때문에 다친 흔적이 있는가? 육신적인 인간들 때문에 받았던 상처인데, 그 십자가가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십자가를 그냥 하나로 사물로서, 즉 물건으로 여기서, 마치 주전자에 있는 물을 마시듯이, "목이 마르니까 마셔야 되겠다" 라고, 그렇게 하나의 물건처럼 받아들이면 안 되고, 이 십자가의 발생이 바로 "너의 그 20대에서 나오는 그 활기찬 육신 때문에 상처받은 모습 때문이다" 라고, 그렇게 설명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무 까불지 마라. 이 세상이 모두 너의 것이라고 막 살지 마라. 예수님은 너보다도 더 못하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너의 교만을 지적하고 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이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저는 지금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것을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합니다. 저는 지금 거기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바로 계속해서 십자가의 상처를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40대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40대가 인생을 다 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꿈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20대도 그렇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꿈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육체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꿈이 말이다.

◈ 눈에 보이는 소망으로 인해서 !!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해야만 하는데,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20대나 40대나 60대나 전부가 다 무엇인가? 매일같이 보이는 소망을 유일한 소망으로 간주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가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똥'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그렇다면 그 십자가를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물론 20대나 40대나 모두가 그런 질문을 할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거기에 대한 해답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주께서 찾아오셔서 침투하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 빛 되신 주님이 찾아오셔야만 !!

무슨 말인고 하니, 주께서는 "십자가를 믿어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니가 어떻게 까불든지 간에 오직 십자가로만 니가 구원이 된다" 라는 사실, 그것을 우리가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데, 왜 그런가? 우리는 육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럴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주께서 찾아와야 가능하지 말이다.

그러니 이런 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은 어둠이다" 라고 하는 것인데, 물론 그것을 나중 40대에 안다고 해도 믿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60대가 남아있으니 말이다. 40대에서 알았다고 해놓고, 60대에서 어떻게 까불지 모르니 말이다. 그건 70대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아하, 나는 방사능 빗물이구나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가 들어와서 균열을 일으키는 그러한 틈 속에서 "아하, 나는 하나의 안개에 불과하구나" 라고 하는 것을, 요즘 말로 표현하면 "방사능 빗물에 지나지 않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그야말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우리는 그저 그런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인간을 주께서 불쌍히 여겨주셨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을 다시 한번 더 깨닫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고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데,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법적으로 하자가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우리 자신을 다그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4,26 오후 6시 10분에 마침.

            목사님, 오늘 내용은 많이 어렵지만, 저에게 주어진 주님의 경로를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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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목사님, 기독교의 원죄론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2011-04-17 김대형)

안녕하십니까? 목사님 오랜만에 인사드리옵나이다.
요즘에 고난주간이라 교회서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해서 큰 은혜를 받고 있는데요. 그런데 제가 오늘 묵상해보니 아무래도 기독교의 선악과의 원죄도 대속죄로 죄사함 받겠지만, 그 죄성은 그대로 남아야 하는 거 같은데요. 제 생각이 맞는지요. 그리고 장로교도 고신합동 교단의 입장도 원죄론에 대한 입장이 저마다 다른 줄 아옵나이다. 어떻게 다른 지도 알고 싶고, 또한 감리교나 성결교단의 원죄론에 대해서도 입장을 자세히 듣고 싶사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 답변(이근호) - 모든 교파의 원죄는 다 동일합니다. 즉 구원받기 위해서는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부터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 원죄는 예수님의 피로 해결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고범죄는 여전히 남아 있기에 이 고범죄에 대해서 성령의 도움으로 성경말씀대로 실천을 옮겨서 본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며 만약에 본인이 알아서 해결 못하면 구원은 국물도 없다는 겁니다. 특히 고범죄 실천의 요지는 교회 충성, 목사에게 충성, 가족들 구원하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이름으로 사회 구제 및 선교및 사랑실천운동을 펼칠 테니 돈을 교회에 집중시키고 가족들도 요원으로 편입시켜서 교회 중심으로 일이 효율적으로 돌아가도록 해야한다는 점을 각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게 됩니다. 종교 사업, 교회영업의 최종 노리는 바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본의 집중입니다. 이런 원죄론이 잘못된 이유는,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구원론 위주로 '죄관'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애초부터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키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추방시킬 때는 언제고 다시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게 해주겠다는 뒤늦게 혜택을 주시는 제안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론은 '예수님의 몸'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인간 구원이 주안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원죄 때로 있고 고범죄 때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죄는 오직 하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죄성 따로 있고 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 세상이 나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 배후에는 당연히 악마가 있고 모든 인간은 악마의 사주를 받으면서 이 세상에서 태어난 겁니다. 그래서 죄 값으로 죽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김대형 씨는 예수 믿고 구원받을 생각하지 마시고 자신을 믿지 않고  예수 믿게 된 것 자체가 구원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서 인간의 죄는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해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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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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