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46강 죄와 축복

피/피 2012. 8. 29. 10:17

피46강 죄와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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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46강 죄와 축복

[11 대구강의 8] - [피 46] - 죄와 축복
                                                                                
                                                   11,05,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영적 해석'과 '육적 해석' !!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154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얼마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그 남자가 곧 지금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사실로 인해 사도바울은 비로소 '육에 속한 해석'과 '영에 속한 해석'을 가려낼 수 있었다. 누구든지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게끔'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는 자는 모조리 '육적'으로 해석하는 자이며,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이다. 반대로 '나는 나를 신뢰할 수 없다'로부터 계시를 해석하는 자는 모두 '영적'으로 해석하는 자이다.

여기에 보면 '영에 속한 해석'과 '육에 속한 해석'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즉 간단하게 '영적 해석'과 '육적 해석'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 영적 해석의 바탕 위에서 성경을 해석해주어야 한다고, 바로 그런 내용이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목사님, 영적 바탕 위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먼저 육적 해석의 바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나 자신의 행함과 해석에는 신뢰할 수 없어야 한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즉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해석하는 것은 모두가 다 육적인 해석이기 때문에, 그것을 미워하고 싫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도대체 절간에서 무슨 일이?

그런데 이렇게 자기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면, 그것이 무엇인가? 그게 곧 불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소위 영적 해석을 한다고 하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불교가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불교에 다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나 철학과 같은 것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기는 영적 해석이라고 우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절에 가보면 이미 모두 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방언이나 병 고침, 그리고 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5중 축복 등도 그렇고 말이다. 또한 개혁주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것도 불교에 보면 이미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개혁주의 신학이 왜 이단일 수밖에는 없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글을 하나 쓰고 있는데, 보통 교인들이 불교나 다른 것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않고 개혁주의 신학만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복음이라고 우기는데, 하지만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기존의 철학에서 이미 나왔던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번에 '라캉과 들뢰즈와 개혁주의 신학' 이라는 주제로 한 특강의 내용도 이번 글에 가미가 되지 싶은데 말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절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는 성경에 있는 말씀만을 총동원시켜서, 그렇게 말씀에 있는 대로만 하면 되는 줄로만 아는데, 설마 그것이 불교 식의 해석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성경을 천독이나 만독을 해서 해석을 하더라도 그 바탕 자체가 자기의 행함을 신뢰한다고 하면, 그것을 교재에서는 "자기 육체를 신뢰한다" 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성경해석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를 들어서, '네비게이토' 라는 선교단체에서 하는 성경 외우기와 같은 것이 거기에 속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성경말씀을 외우고 해도, 그 바탕 자체가 영적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육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육적 해석이 나오면 나오는 것이지"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런 육적인 해석이 나오게 되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핍박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만이라 아니라, 즉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면 그만이 아니라, 곧 거부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지체와 몸을 핍박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러한 점을 강조한다는 말이다. 

◈ 영적 해석은, 곧 '예수님의 행하심' !!

그렇다면 영적 해석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예수님의 행함으로 나오는데, 즉 '예수님의 행하심' 인데, 거기에 비해서 육체의 신뢰에서 나온 것은 인간의 행함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의 행함은, 인간이 신뢰할 만한 것, 인간이 내세울 만한 것을 두고 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기 존재를 위해서 수고하는 애쓰는 모든 것이 곧 자기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했는데, '육체 신뢰' 라고 말이다. 그런 육체 신뢰가 자기 존재에 대한 신뢰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러한 사실을 자기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가? 제가 왜 이러한 질문을 하는고 하니, 방금 영적 해석이라는 것은 거기서 무엇이 나온다고 했는가? 영적 해석은 곧 예수님의 행함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말이다. 

◈ 하나님을 염두에 두면?

지금 사람들이 제 강의가 어렵고 이해가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기 때문인고 하니까,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꾸 예수님을 이야기하지 말고 하나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하나님은 우상이란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철썩 같이 하나님을 알았던 자들이 곧 바리새인들인데, 이미 그들은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하나님 상(像)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 저 인간이 뭐라고 씨부리노 ??

그런데 그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하나님 상이 우상인 줄을 전혀 몰랐는데, 특히 '사울' 이라는 자의 경우에는 스데반 집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가 사도행전 7장에 보면 그렇게 길게 설교를 하는데, 심지어 구약전체 역사가 다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설교를 듣고도, 요즘 경상도 말로 "저게 뭐라고 씨부리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성경에서는 '성령충만' 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 사도바울의 경우에 !!

여기서 사울이란 사람은, 스데반 집사의 죽음에 대한 증인이 될 정도로 그들이 옷을 맡기고 했는데, 그렇게 예수를 믿던 자들을 핍박하던 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뭐라고 하는가? "그동안 내가 예수님을 알았던 것은 육체로 알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 자기가 제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을 이야기했어도, 그것은 그 기초가 어디라는 말인가? 인간의 육체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행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할 때,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알았다는 말인가?" 라고 하는데,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주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를 않느냐는 것이다. 즉 "권사님은 복음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런 사람도 있지만, 너무나 신기해서 묻는 자들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았는가? 그것은 매우 간단한데, 예수님이 침투해서 알았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사울로 불리던 그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것이다. 어떤 예수님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게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고전 15: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전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고전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12제자들에게 보이시고, 그리고 500명의 형제들에게도 나타났다고 되어있는데, 그리고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8절에 보면, "제일 마지막에 그야말로 인간 같지도 않은 나에게도 나타나셨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이다.

◈ 이미 끝난 이야기 !!

어제 영주에서 드린 야외예배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여기 영주에 보면 5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 여자는 자기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나 살로메와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것이다. 천사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 이미 이야기는 끝이 났는데, 남들은 아무리 죽었다고 해도 말이다. 사도바울과 같이 예수님을 직접 만난 자들의 경우에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냥 빙그레 웃고 만다는 것이다. 죽기는 누가 죽었느냐는 말이다.

◈ 그런데 무슨 부활절인가?

그런데 요즘 교회가 소위 부활절을 지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제사와 같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죽었다고 여기니 고난주일을 지키고, 또한 부활절을 지킨다는 것이다. 맥추절이나 추수감사절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이 살았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러니 교회도 장사가 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돌아가신 그분을 훌륭하게 잘 기억하고 기념하자는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만이 교회가 고객들을 확보하고 잡아놓을 수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을 만난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는 교회의 법이나 전통이나 개혁주의 신학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루터나 칼빈이 무슨 소용이 있고 말이다. 도마의 경우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자기 몸의 자국을 만져보라고 하셨는데, 그게 곧 십자가의 자국이라는 것이다. 그 십자가의 자국으로 나타나신 예수님, 그것으로 100프로 완료가 된 상황이고 끝이 났다는 것이다.

◈ 유구무언(有口無言) !!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냥 "내가 부활하셨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의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보여주면서 "내가 너희들의 죄 때문에 죽었어" 라고, 그렇게 제자들에게 다가가서 알려주었을 때는, 그것을 두고서 '유구무언(有口無言)'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분 앞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하, 이것이었구나"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유산으로 수천 억을 받는다고 하면 참 신이 날 것인데, 물론 상상이지만 말이다(ㅋㅋ). 하지만 그렇게 재산을 수천 억을 받는 것보다 더 횡재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예수님을 만나서 "아하, 십자가 때문에 내가 살았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바로 수천 억의 재산을 가진 자보다 훨씬 더 여유롭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그야말로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무슨 단어를 잊어도 좋은고 하니, 자기 인생에 있어서 '망했다' 라고 하는 것과 '실패했다' 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단어는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다.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이렇게 '망했다' 라는 것과 '실패했다' 라는 것이 없다고 하면, 그러면 무엇도 없다는 말인가? 요한일서에 보면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라고 했는데, 즉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일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고 애를 먹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여전히 없다는 것이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것까지 다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런 일이 되던 안 되던 간에 그 나라의 의(義)를 확보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곧 실패도 아니고 망하는 것도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게임오버' 라고 하는데, 컴퓨터 게임을 하다보면 제일 마지막 화면에 그런 게 나오는데 말이다. 즉 이미 다 끝이 났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에게는 그 은혜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만하지 말라고 일부러 그의 몸에 가시를 주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사단의 가시를 일부러 주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만큼 사도바울은 온 천하를 다 얻은 것보다 더 큰 것을 얻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스데반 집사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여놓고는 그야말로 '땡' 잡았는데, 그렇지 않은가? 구약에도 그러한 인물이 있는데 말이다. 다윗의 경우에, 그는 간음도 하고 살인죄를 범하고도, 그런데도 정작 다윗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했사오니"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내 몸과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닙니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뜻인가? 즉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주께서 다루시는 몸인데, 그런데 그것을 진작 알지 못하고 이제야 알았는지 모르겠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동안에는 자기 몸을 가지고 남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주께만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주`님께서 자기 몸을 가지고 "이런 것이 죄다" 라고 들추어내는 작용을 해주셨다는 말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해보면, 결국 이렇게 되려고 하면, 즉 자기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만 신뢰하게 되려면, "여기에 인간이 있고, 하늘에 하나님도 있다" 라는 것을 아는 것을 다 버려도 괜찮은 것이고, 왜냐하면 그런 것은 모두 엉터리라는 말이다. 그 하나님은 얼마든지 부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죄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 !!

그런데 그런 것을 다 버리려고 하면, 뭔가 오셔야 될 분이 오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교재 155페이지에 보면 '(3) 죄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밤하늘의 별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래서 동요에도 보면 '반짝반짝 빛난 별'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별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런 별이 하늘에 있고 또 지구가 여기에 있다면, 그 별이 점점 더 가까이 오면 아름답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대기권에 들어와서도 아름다울까요? 그때는 완전히 불덩어리인데, 지름이 2km만 되는 것이 떨어져도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는데, 그 힘에 의해서 지구는 완전히 다 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공룡이 죽은 것은 그런 현상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즉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그런 별이 떨어져서 대기가 완전히 암흑에 뒤덮였다고 한다는 말이다.

◈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면?

아무튼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별도 지구에 떨어지면 그렇게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는데, 하물며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난다고 하면,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고, 이 자연세계에는 우리 인간들끼리 있을 때만 좋은 것이지, 그런데 그만 여기에 하나님이 침투해버리면, 그건 불바다가 아니라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이 땅에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가 있는데, 어떻게 들어오실 수 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그 거룩한 영광을 포기하고 죄인으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있는데, 바로 그렇게 사도바울이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의해서 말이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그 영광스런 모습을 버리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그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란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보는데, 그래서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6절에 보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쉽게 말해서, "이제는 저 하늘을 보고서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십자가를 보고 섬겨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놀라운 전환인지 모르는데, 그 당시에 하나님이라고 하면 모든 인간이 다 알고 있는데, 그런데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모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 '십자가'로 우리 속에 들어오시는 예수님 !!

바로 이러한 대변혁이 일어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죄 속에 들어오는데, 그것은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 속에 들어온다는 말도 되고, 또한 그러한 죄 속에 있는 죄인인, 바로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는 의미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까지, 영혼까지 침투하는 것도 말이다. 바로 그것도 죄 속에 들어오시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올 때는 무엇으로 들어오시는고 하니, 바로 '십자가'로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 이전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자기들 딴에는 나름대로 주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안다고 하면서 까불었는데, 그래서 권능도 행하고 귀신도 쫓고 병도 고쳤다는 것이다. 즉 "이 정도면 주님의 뜻을 아는 게 아닌가?" 라고 했다는 말이다.

◈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께서 !!

그런데 결국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는,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는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아직 보혜사 성령께서 오지 않았기 때문인데, 즉 '예수님' 이라는 보혜사는 오셨지만 다른 보혜사, 즉 성령님께서 마음속까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그 이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들어오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는데, 그 이전에 들어오게 되면,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이전에 들어오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제자들이 죽고 마는데, 즉 영원한 지옥에 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난 뒤에 주어졌던 성령께서 오셔야만, 그 성령 안에 십자가가 주는 구원의 효과가 고스란히 담긴 채로, 그렇게 해서 들어오게 된다는 말이다.

◈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바로 이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아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인데, 그런데 베드로는 뭐라고 하는가? 베드로는 아직까지 성령의 온전한 뜻을 다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발만 씻어주는 줄로 알고 손과 머리도 다 씻겨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침투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즉 그냥 피부인 겉만 씻어주는 것을 염두고 두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런 이야기를 하자, "발만 씻어도 온 몸을 다 씻는 것이 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발만 씻어도 온 몸을 다 씻는 것이 되는가? 그것은 바로 겉 피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전체, 즉 우리의 전체를 다 두고 관여하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요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요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요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요 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 13: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요 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 너희들 손에 내가 죽었다 !!

그래서 성령이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이 세상을 책망하시는데, 그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인데, 즉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그것도 사람들 손에 의해서, 심지어 "너희들 손에 내가 죽었다" 라는 것을 가지고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을 보는 판단력이 바로 육체신뢰였음을, 즉 육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역사하게 되면, 우리의 기본적인 육체에서 나온 판단이나 그 기준이 잘못임을 늘 상 일깨워주게 된다는 말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히브리서 - 십자가 사건 한 번으로 족해 !!

그것이 무슨 사건에서 나오는가? 바로 십자가 사건에서 나오는데,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이 십자가 사건을 다메섹의 그 사건 한 번으로 족하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 번으로 족하다는 것은 한 번만 적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이 한 번으로 된 사건에 준해서 앞으로는 시간이 그 어떻게 되던지 간에, 바로 이 한 번으로 된 사건에 의해서 모조리 다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다시 말해서, 십자가 사건이 있고, 부활 사건이 있고, 또한 예수님의 재림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이루심의 보따리를 푸니, 그 안에 부활도 들어있고, 재림도 들어있고, 물론 천국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고 하니, 그 어린양에 있어서 이 십자가라는 것은 희생제물인데, 그래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어린양의 기능이 계속해서 발휘하게 되면, 그것이 곧 재림이고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란 말이다. 그것이 곧 자기 백성들을 이끄시는 것이고 말이다.

◈ 초라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전부 !!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영광을 포기하시고, 즉 하나님과 동등하게 취하지 않고 죄 속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죄 속으로 들어오시게 된다는 것은, 그것은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몸이 영광 된 몸이 아닌데, 그러면 무슨 몸인가? 그야말로 초라한 몸인데, 그렇게 초라한 몸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당연히 초라한 하나님인데, 그렇다면 초라한 하나님이 있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초라한 하나님이 바로 우리 인간에게는 전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하나님은 없는데, 즉 초라한 하나님 뒤에 영광된 하나님이 있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초라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영광된 하나님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초라한 하나님이 곧 하나님의 전부라는 말이다. 바로 그 하나님에게 들어갈 때, 성부도 거기 계시고 성령도 거기 계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는 그런 신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실제로 성령이 오셨을 때는, 성령 자신도 성령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義)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활동을 하신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義)를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3) 죄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  죄가 뭘까? 하나님에게는 그동안 비밀스럽게 숨긴 것이 있었다. 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죄의 진실은 신약에 와서야 알려진다. 그래서 구약의 사람들은 죄가 뭔지도 제대로 모른다.

◈ 다시, 죄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 !!

여기에 제목이 '죄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 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인간이 과연 죄가 무엇인지 아는가? 여기에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신다고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상대함에 있어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경험을 대표해서 내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그는 과연 무엇을 죄라고 생각하고 무엇을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겠는가? 당연히 예수님을 믿는 것을 죄로 보았는데, 그래서 그는 예수를 믿는 것을 능지처함형에 처해도 당연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죄관(罪觀)과 의관(義觀) !!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즉 죄란 예수님을 믿는 것인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하심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믿는 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를 믿는 것이 죄라고 한다면,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즉 그가 사울이었을 때, 그 당시에 예수를 믿던 사람들은 어떤 죄를 지어야 하는가?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는 죄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울이 볼 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즉 사울에게 있어서 자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곧 죄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이 아니냐는 말이다. 왜 인간의 행함을 신뢰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곧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그게 개혁주의 신학의 죄관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법, 즉 율법이 있는데, 그것을 인간이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곧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죄관이라는 것이다.

제가 너무 논리적인 비약을 했나요? 다시 하겠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상대하지 말고, 예수님을 먼저 상대했던 사도바울의 경험을 먼저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바울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인, 즉 사울 일 때의 죄관이 뚜렷하게 나오는데, 그리고 그 이후의 죄관도 역시 뚜렷하게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두 개의 뚜렷한 자아상을 비교하게 되면,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사울이 가지고 있던 죄관이 무엇인지를 보자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기의 죄와 의의 구분점에 의해서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사울의 죄관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즉 전혀 엉뚱한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로운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사울이 보기에 의로운 것은 무엇인가?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서 죽이는 것이 곧 의가 되고, 그렇게 하면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것이 그만 바뀌고 말았는데, 그러면 이제는 무엇이 죄인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이다. 여러분도 여기에 동의를 하십니까? 목사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맞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그러면 사도바울의 명령과 권면은?

그렇다고 하면, 사도바울의 모든 명령과 권면 가운데서, 거기서 무엇을 끄집어내어야 하는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모든 명령과 권면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의가 되고, 과거의 자기처럼 그런 행동을 하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 그것이 바로 사도가 된 이후의 사도바울이 죄관이고 의관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따로 하고, 또한 자기 행함을 따로 하고 하는, 그것이 의가 아니라, 모든 행함 속에서 오직 예수님만을 믿어야만 된다고 하는, 즉 "나는 나의 행함으로 결코 되지 않는 거야" 라고 하는 것을 그 어떤 경우에도 끄집어낼 수 있는, 그런 모든 해석이 진짜 의롭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라고 했으면, "그 말씀은 내가 도저히 지킬 수가 없네. 그러니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어.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왔는데, 그것은 내 죄를 드러내기 위함이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성경말씀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를 다시 한번 더 기억하게 된다면, 그것이 곧 주님의 주신 의로운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나는 이 말씀을 지킬 수 있어. 그러니 예수님이 이러한 말씀을 주셨지" 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행함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고, 그게 곧 죄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이 남의 일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도 계속해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자기의 행함으로 여긴다면,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조차도 말이다.

◈ 모든 것이 십자가 안에서 !!

그 이유를 아까 이야기했지만, 다시 한번 더 설명을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반드시 무엇을 거쳐야 하는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다 이루심 안에 있는 내용이지, 단계적으로 십자가를 거쳐서 부활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십자가의 다 이루심 안에서 부활이 있고, 또한 재림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난 다음에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성령은 부활과 재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부활이 있던, 재림이 있던, 너는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에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부활이나 재림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항상 십자가로 환원이 되어야 하는데, 거기서 모든 것이 다 나온다는 것이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런데 십자가를 지나서 부활로 건너뛰고 하는 것은 왜 그런가?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적인 신뢰에서 나온 것인데, 즉 자기가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인간의 구원의지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육체 신뢰라는 말이다.

다시 교재를 살펴보자.

** 죄가 뭘까? 하나님에게는 그동안 비밀스럽게 숨긴 것이 있었다. 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죄의 진실은 신약에 와서야 알려진다. 그래서 구약의 사람들은 죄가 뭔지도 제대로 모른다.

◈ 죄가 뭘까?

여기에 보면 "하나님에게는 그동안 비밀스럽게 숨긴 것이 있었다" 라고 하는데, 그러한 중의 하나가 바로 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비밀스럽게 숨겼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으로, 그러니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죄도 결국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죄도 모르면서, 죄 중에서 죄를 짓는 것을 계속해서 되풀이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했던 것이니, 그러니 사도바울의 눈에는 그대로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바로 죄인데, 나도 과거에 그렇게 살았는데, 그것이 아닌데" 라고 하면서, 사도바울은 자기 동족에게 그런 사실을 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오히려 자기 동족으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는데, 즉 "이 배신자야, 전에는 그렇게 하더니만, 이제 뭐가 어쩌고 어째? 도대체 누구에게 꼬드김을 당해서 그렇게 배신을 했는가?" 라고, 그런 식으로 많은 핍박과 곡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래서 정확하게 죄 지을 줄도 모르고 어렴풋이 죄를 짓는다. 아직 강퍅이 무르익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제가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것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흔히 그들은 자기 자신을 두고서 죄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자기 자신을 보고 죄인이라고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는 근거와 기준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고 싶다는 말이다.

◈ 성경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

그러면 대부분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성경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저는 태어날 때부터 주께만 범죄를 했습니다" 라고 나와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성경말씀대로 살지를 못해서 그렇다고 하면,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는 성경말씀대로 사느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 죄를 모르니 죄가 아닌 것을 자기가 상상을 해본다는 것이다. 즉 성경말씀대로 다 지키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본다는 말이다. 또 교회에서는 그러한 사람을 찾고자 하고 말이다. 죄가 없는 사람을, 혹은 자기보다 죄를 적게 짓는 사람을 찾는데, 그렇게 해서 그런 사람을 모델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증거하는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지 못하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을 찾아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교회에서는 이용하는데, 즉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을 모델로 세워서, 헌금을 많이 하도록 강요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사회에서 하던 개 같은 버릇을 그대로 교회에 가지고 와서 하는 짓거리인데, 즉 "아이쿠, 당신은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라고 하는 것은, "당신이 알아서 돈을 좀 더 뜯어내세요"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게 곧 정치노름이고 말이다.

◈ 미셀 푸코 - 권력은 하나의 구조 !!

이러한 정치에 대해서 '미셀 푸코' 라는 철학자는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권력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다" 라고 말이다. 즉 일종의 배치라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 사람의 자리가 그 사람에게 합당하게 행세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자리가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바보 같은 인간도 국회의원을 시켜주면, 그 국회의원에 합당하게 되도록 애를 쓴다는 것이다. 자리가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개그맨에서 국회의원이 된 이주일 씨의 그 놀라운 변모를 한번 보라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게 자리의 위력이란 말이다.

그래서 흔히 교회에서 뭐라고 하는가? "맡겨놓으면 잘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어떤 특정 사람을 보고 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권유하는 것은, 그 사람을 앞장 세워서 뒤에서 뜯어먹으려고 하는 짓인데,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이미 그것을 알고는 어떻게 하는가? 뜯어 먹히는 채 하면서 결국에는 잡아먹고 마는데, 그런 고난이도의 기술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피겨의 김연아가 했던 트리플 악셀이라고, 그렇게 3번을 회전하는 고난이도의 기술이 있는데, 그런데 정치9단은 그야말로 9번을 돈다는 것이다. 뜯어먹으려고 하면 더 뜯어먹고, 심지어 뜯어먹지도 않은 것까지도 모두 다 뜯어 먹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대로 교회에 밀려오면 어떻게 되는가? 교회도 역시 그렇게 되고 마는데, 즉 교회도 복음에 관심이 없게 되면, 상대방을 두고 자기편으로 삼을 것인지, 그게 아니면 자기 밑에 두고 부릴 것인지, 그런 것에 정신이 팔리게 된다는 것이다.

◈ 내가 존중해주겠다 ??

바로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성경말씀은 맞다. 그래서 이것을 잘 지키는 사람은 내가 존중해주겠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존중해주겠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죄는 무엇인가? 자기가 아직도 의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다보는 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온전한(?)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버림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쓰고 성경말씀을 지킨다고 해도, 결코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의인이 될 수가 없음을 이미 확정지어준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다.

◈ 아하, 그래서 내가 죄인이지 !!

그렇게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이 무거운 인생의 짐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그래서 성도가 교회에 왔으면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아, 내가 이래 이래서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데, 그렇게 됨으로 그 동안 자기에게 찌들어져 있던 이 세상의 모든 짐들이 날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가 의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목사의 설교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물론 복음을 전하는 설교의 경우에 말이다. 그러면 "저 목사가 나를 또 치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았으면 자기의 한 평생 동안 성경말씀을 통해서 얻어맞아도 전혀 괜찮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자기를 치는 설교를 한다고 입이 튀어나온다고 하면, 그러면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는 말인가? 자기에게 곤장을 가지고 두드려 패도 아무런 소리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지 말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자기에게 해당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앞으로 살다보면 얼마든지 해당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말이다.

어제 김대식 집사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서울에서 어떤 부교역자가 설교시간에 복음을 전하니 당회장 목사가 하는 말이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제발 목사만큼은 치지를 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래도 아직까지 자기는 말씀을 지키고 해서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잠재되어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 강퍅의 수위를 점점 더 높이시는 예수님 !!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강퍅의 수위를 의도적으로 높이시는데,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바로에게 강퍅을 높일 때 어떻게 하셨는가? 그들이 하지 못하는 사건을 통해서 이야기했는데, 즉 애굽인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말이다. 물론 두 번째까지는 그들도 따라했었지만, 아무튼 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강퍅케 하셨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인간은 자기가 하지 못하면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라, 자기의 못함을 노출시킨 상대방에 대해서 더욱 더 과격한 표현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약올리시는데, 즉 주님께서 우리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하시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 주님의 전도방법 - '다 나가' !!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첫째는 병을 고치는 것인데, 그리고 둘째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인데, 그래서 그들은 처음에는 "야, 이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점점 더 가게 되면, 나중에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고 하는 권능을 행하는 기적이 없어지고 마는데, 그래서 기존의 있던 사람도 다 떠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인간으로서는 해석이 안 되는 말씀을 계속해서 해버리신다는 것이다. 즉 따라오려면 따라오라는 것인데, 전혀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베드로는 순교까지 하려고 했지만 전혀 안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얼쭈(거의?) 비슷하게 모방하면, 그 옆에라도 근접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는, 그런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다 차버리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전도방법인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저는 주님을 그 정도로 존경하니, 따라가겠습니다" 라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모르는, 물론 성령을 받아야 알지만 말이다. 즉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모르는 자들은 아무리 주님을 따라가도 지옥에 갈 것이니까, 주님을 따라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그런데, 왜 신자가 되려고 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교회에서 제일 수상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왜 신자가 되려고 하는가?" 라는 것인데,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이것이 아킬레스건인데 말이다. 왜 자꾸만 신자가 되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도대체 신자가 무엇인데, 뭐가 좋다고 그렇게 신자가 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박신자, 김신자인가?

예수님은 그런 신자가 되기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장치를 마련하셨는데, 마귀까지 동원해서 말이다. 즉 말씀이 떨어지면, 마치 밭에 씨앗이 떨어져 있으면 참새가 와서 주워먹듯이, 그렇게 마귀가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잘 믿어보려면 환난이 생겨서 방해를 하는데, 즉 온갖 재물의 유혹에 빠지도록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그렇게 자꾸만 장애물을 두어서, "니가 신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니가 니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너에게서 그런 아이디어가, 그러한 욕심이 생긴다" 라는 것을 지적하신다는 것이다.

◈ 신자가 되겠다는 것 자체가 '죄' !!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 사도바울이 만난 예수님, 또한 도마가 만난 예수님, 그러한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자국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우리에게는 애초부터 신자가 되겠다고 하는 그 자체가 죄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신자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무엇을 한번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의식자체가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는데,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도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서 죄를 지었다 싶으면, "아이쿠 하나님,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회개를 왜 하려고 하는가? 그 의도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렇게 회개를 해야 신자답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신자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 예수님 소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관을 자꾸만 가지고 와서, 자기가 처리해야 하는 자기의 숙제로 전환시키려고 하는, 그런 못된 버릇을 계속해서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설교를 할 때 항상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여기서 성경말씀을 한 군데 찾아보겠는데, 사도행전 제일 마지막에 있는 28장인데 말이다. 제가 25절에서 28절을 읽겠습니다.

(행 28: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행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행 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행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

여기 16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하는데, 이게 굉장히 어려운 대목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들려주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안 되면 일찍이 그만 두면 되는데 말이다.

경제원리에 의하면, 생산물이 나오지 않는 줄을 안다면 거기에 투자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손님이 없는데 무슨 장사를 하느냐는 말이다. 파리 날리는 것이 무엇이 보기에 좋은가? 그냥 집에서 쉬면 되는데 말이다. 이윤이 없는데, 무슨 투자를 하고 장사를 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경제원리에 반대로 하시는데, 즉 듣지 않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들려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가?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그런데 왜 굳이 들려주시느냐는 말이다.

저는 이것을 천주교 교황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은데, 그것이 바로 이 '교회' 라는 곳이 정치하는 곳이기에 그러한데, 그러니 정치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완전히 판이하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정치를 하는 곳이기에, 들을 만한 것을 듣게 해서 사람을 꼬드겨서, 그렇게 사람들을 모아서 힘이 되어야 하는데, 하지만 전도는 그것이 아니라 성경말씀대로 된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들려주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될 때 말씀이 말씀대로 성취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그런 것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행함도 이 시나리오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즉 "들려주어라. 그렇게 해서 자기들이 깨닫지 못하는 자들임을 알게 해주어라" 라는 것이다.

◈ 흙먼지가 다녀갔음을 증거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에서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씀인가? 먼지를 왜 털어야 하는가? 자기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림으로서 다녀갔다고 하는 증거를 남기라는 것이다.

(마 10: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렇게 함으로서, 즉 다녀갔는데도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지옥에 간다면, 그것은 순전히 자기 책임이라는 말이다. 복음을 듣지 못했다든지 하는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닥에 떨어져 있는 흙먼지가 다녀갔음을 증거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전도는 성령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사람을 꼬드기는 것이 전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위의 사도행전 28장을 보면, 27절에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라고 하는데, 여기에 '완악' 이란 말이 나오는데, 그게 아까 살펴본 바로 그 '강퍅' 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완악하게 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고침을 받으면 안 되는 인간들이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납득되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양발차기 !!

그리고 28절에 보면, 그 다음에 이방인에게로 가겠다고 하는데, 이방인에게 가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이방인도 구원하겠다는 것도 포함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차버리겠다는 것인가? "저리로 꺼져" 라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는 유대인들을 차버리는 식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제로섬' 게임이라고 해서, 마치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합쳐지면 제로가 되는 것처럼, 양쪽 일을 동시에 하시는데, 즉 이쪽 일을 하는 동시에 저쪽 일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25장에 보면, 야곱이 출생할 때 에서도 함께 출생하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야곱은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만 생각하는데, 하지만 야곱이 구원받은 것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에서도 야곱과 함께 태어나도록 해서, 즉 "에서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아서 지옥에 가도록 하셨다" 라는 것도 역시나 반드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말이다.

(창 25: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창 25: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창 25: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

그렇다면 이 양쪽 일을 어떻게 한꺼번에 다 처리할 수 있는가? 그건 복음만 전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양쪽 일이 다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복음만 전하면 말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2장에 보면 15절에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똑같은 말씀을 전해도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향기로운 냄새이고, 그렇지 않는 자들에게는 지독한 악취가 된다는 것이다.

(고후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물론 인간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되지 않는데, 하지만 십자가를 전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십자가를 전해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는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이 되고, 자기에는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고 하는, 그런 중립적인 입장에 있는 자들에게는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악취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죄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이것 하나인데, 즉 '죄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 이라는 말이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죄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이란 말이다. 즉 "너희들은 무엇을 해도 원래부터 죄인이었느니라" 라는 것인데, 원래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즉 복음을 전하게 되면 사람들이 얼마나 복음을 믿지 않는지, 그것을 완전히 노출시키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여정이 된다는 말이다. 노출시키는 일을 하시는 것이 말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이 얼마나 복음을 믿지 않는지, 그것을 보여주는 여정이란 것이다. 물론 십자가 마을의 수련회도 마찬가지 입장인데, 즉 복음을 믿겠다고 모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것은 '자신에 관해서 죄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는 결국 '예수님에 관해서 구성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 당신 말이야" 라고 정확하게 예수님을 삿대질할 때, 죄는 그 정체를 다 그러낸 것이다. 

◈ 예수, 당신 말이야 !!

그러니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즉 "내가 이런 죄 때문에 망한다. 벌을 받았다" 라고. 혹은 "이렇게 해서 잘 되었다" 라고 구성하는 것 자체가 전혀 옳은 것이 아니라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 죄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오직 예수님에 관해서 구성하는 것, 그것에 의해서 비로소 죄와 의가 갈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찬성하는 입장이기에, "설마 그 당시의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삿대질을 했을까?" 라고 여기지만, 하지만 예수님 그 당시의 사람들은 마음놓고(?) 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말이다.

그러면 오늘날 사람들은 누구에게 그런 짓을 하는가? 예수님을 믿는 소자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당신 말이야" 라고 하는 대신, "예수를 믿는 당신 말이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십자가를 믿는 당신을 내가 손을 좀 봐야 되겠어. 당신, 너무 건방져서 안 되겠어" 라고 식으로 한다는 것이다.

◈ 소자에게 한 것이 !!

마태복음 18장에서 "소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인데, 즉 사람들은 "십자가의 피로서 구원받는 그 따위는 없고, 자기 행함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라고 삿대질을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수모가 우리에게 올 때,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성령이 임한 자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니 말이다.

(마 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십자가를 믿는 것으로는 모자라고 자기의 행함이 있어야만 한다고 여기는가?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모델이 있는데, 그렇다면 자기의 모델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인데, 즉 본인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나만 가수다 ??

MBC 예능프로에 '나는 가수다' 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가수들끼리 나와서 노래자랑을 하는데 말이다. 어제 어떤 작곡가가 그 프로에서 아주 유명한(?) 말을 했는데, 그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임재범이라는 가수가 등장하면, '나는 가수다'에서 '나만 가수다'로 바뀐다" 라는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임재범이 노래를 너무나 잘하니 말이다.

바로 그와 같이 "나만 신자다" 라고 바뀐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곧 모델인데, 즉 본인이 느끼기에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행함이 따라야만 한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그만 신자의 모델이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모델이 바로 본인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델을 찾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바로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러한데, 하지만 성령을 받게 되면 그 모델이 누가 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인데, 왜 그런가? 성령 안의 예수님께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하시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오직 예수님만이 신자인데, 즉 예수님만이 "나만 신자다"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임재범만이 "나는 가수다" 라고 하듯이 말이다.

◈ 예수님만이 참 인간이고, 신자 !!

그러니 예수님만이 참 인간인데,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가?" 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은 너무 훌륭하니 따로 빼버리고, 인간들끼리 모여서 "우리 중에서 누가 더 힘이 센가?" 라고, 그런 시합을 하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시합을 하지고 나서는 순간부터, 일단 자기는 무조건 신자 편에 모셔놓고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행함에 전혀 기대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 행함이 조금이라도 나온다는 것은 이미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가 모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신자의 모델로 이미 형성되어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즉 "나만 신자다" 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56페이지를 보자.

** "예수, 당신 말이야. 나 당신 없이도 거뜬히 살 수 있어" 라는 태도로 죄를 짓게 되어있다.

◈ 하나님이 아니면 돈 !!

여기 교재에 있는 "예수, 당신 말이야. 나 당신 없이도 거뜬히 살 수 있어" 라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엇인고 하니, "나는 돈이 있어"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돈과 하나님은 동시에 섬기지 못하니 말이다. 하나님이 아니면 돈, 그  두 가지 중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수천 억의 유산을 받는 것보다도 더 큰 횡재는 예수님만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알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을 하겠는가? 전혀 불가능한데, 성도는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큰 유산을 얻었다는 말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한 유산을 두고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인데, 즉 '기업'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기업이 바로 '유산'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유산을 받아야지, 이 세상적인 유산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축복을 받는 모델이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자기가 자기 자신의 모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 말고 또 다른 멋있는 자기를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모델을 따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모델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인간에게는, 언제나 상상된 주체가 따로 !!

그게 지난번에 한 '라캉과 들뢰즈와 개혁주의 신학' 이란 주제의 내용이기도 했는데, 그 어려운 강의에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참석을 해주셨는데 말이다. 일단 그 마지막 시간은 듣지를 못했다고 치고, 그날 한 강의의 핵심이 무엇이었던가요?

(라캉에 의하면) 인간의 주체는 둘로 나누어지는데, 항상 그 새로운 주체는 주위에서의 법의 요구에, 즉 "너는 이런 인간이 되어라" 라는 음성이 맞추어서, 물론 지금은 그렇게 되지 않지만 되고 싶어하는 욕망의, 그런 상상된 주체가 따로 생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 주체가 무엇인고 하니까, 제가 방금 말했는데, 즉 신자의 모델로서 생각하는 그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잘못된 것인데, 왜냐하면 분명하게 예수님이 모델이니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생각한, 즉 자기가 되고 싶은 자기 자신이 모델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하, 예수를 잘 믿어왔으면 좋겠다" 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런 생각 자체가 곧 죄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꼭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는, 그러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실망하지 않는 자기가 되어봤자, 즉 그런 자리에 와봤자 그것은 찢어진 주체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법에 깊게 거치면(?) 그만 동일시가 된다는 것이다. 누구와 말인가? 타인과 그렇게 동일시가 된다는 것이다. 이제 기억이 납니까?

◈ 그런데, 쾌락이 곧 권태로움으로 !!

그러니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것을 알아서 맞추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게 동일시인데, 즉 상상계와 동일시하게 맞추어주면, 그때는 자기에게 쾌락이 생긴다는 말이다. 쾌락이 말이다. 그런데 이 쾌락은 곧장 무엇으로 끝나게 되는고 하니, 그만 권태로움으로 변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제가 강의를 하면서 '식상한다' 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기억이 납니까? 예를 들어서, "야, 즐겁다" 라고 했을 때, 곧장 무슨 생각이 드는가? "내가 겨우 이것 때문에 그렇게 애를 썼나? 이것보다 더 짜릿한 것이 없어?" 라고, 당장에 찾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돌아서서 식상하고 권태를 느낀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타인에게 식상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 그러면, 또 찢어진 주체와 요망을 동일시하면서 !!

그러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니가 원하는 즐거움을 내가 가지고 있지롱"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래, 알았어" 라고 하면서, 주체가 그것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욕망과 주체가 동일시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찢어진 주체와 요구(demand), 혹은 욕망이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래, 바로 이런 게 즐거움이야. 옛날의 즐거움을 즐거움이 아니야"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게 내려오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또 뭐가 없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30평에 살다가 40평을 찾게 되고, 차도 이제는 레조에 만족하지 못하고, 소나타나 K7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BMW에 눈을 돌리고 하는데, 매일같이 그렇게 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것은 자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처음에는 학교걱정을 하다가, 나중에 취직걱정을 하고, 물론 그 다음에는 결혼걱정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나면 또 아들을 낳으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손자를 낳으면, "내가 니 손자를 봐주다가 팔에 기브스를 해야한다" 라고 하면서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여자로서 자식의 욕망이, 즉 타인의 욕망이 자기의 욕망이 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식은 타인인데, 즉 자기와 결부된 타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자기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창세기 25장부터, 야곱과 에서 두 쌍둥이는 맏이가 되겠다는 싸움이 치열하다. 에서는 맏이 됨을 유지하려고 하고, 야곱은 그 맏이 됨을 빼앗으려고 한다.

◈ 쌍둥이조차도 !!

여기 '쌍둥이' 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야곱 안에는 누가 들어있는가? 장차 오실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리고 에서 안에는 누가 있는가? 모든 인간들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의 구조를 사용하시는지 모르는데, 즉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서 죄 속에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 만든 모든 사회적 형성과 그 결속력인 혈육 속에 침투해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요셉은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와의 관계를 어떻게 했는가?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라고 했는데,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요셉이 아무리 착해도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 1: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 요셉의 경우에 !!

여기에 요셉을 '의로운 사람' 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경건하다고 해도, 자기와 약혼한 여자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면, 그것은 결코 결혼하기가 싶지 않다는 것이다.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하나 묻겠는데, "그렇다면 요셉이 왜 마리아와 다시 합쳤는가?" 라는 것인데, 왜 그런가? 그게 20절 이하에 나오는데, 천사가 와서 뭐라고 했는가? "이것은 니 아내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이란 인간의 경우에도 자력으로는 안 되고 누가 와야만 하는가? 천사가 오고, 성령이 오셔서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간단한 문제인데, 그러니 인간이 어떻게 무엇을 행한다는 말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러니 야외예배의 경우에도 !!

우리가 어제 야외예배를 갔었는데, 그런 야외예배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야외예배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끝나고 집에 가고 싶어도 길을 모으면 못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참석하고 싶어도 그만 야외예배인 줄을 잊어버리고 우리교회로 간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경우에는 야외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허락하심이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라는 것이다(ㅋㅋ). 

◈ 이제는 작은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

그러니 우리가 점점 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즉 옛날에는 큰 기적으로 왔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작은 기적이라도, 즉 밑에 있던 작은 부분에 있어서라도 큰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그 충만함을 더욱 더 느낀다는 것이다.  

어제 야외예배에서 점심을 먹는데 얼마나 웃기는지 모르는데, 이쪽에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전부가 '저 푸른 초원 위에' 이고(ㅋㅋ), 저쪽의 젊은 사람들은 치킨에다 피자에 돈까스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쪽에서 치킨과 피자를 가져다주면 어떻게 하는가? 이쪽에서는 가져다주어도 맛이 없어서 못 먹는다고 하면서 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가져다주어도 버리게 되는 그러한 옛날 어릴 때의 질서 안에, 거기에 진짜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는 에너지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목사님,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 발음이 너무 꼬여서, ㅋㅋ)

◈ 결국, 저 푸른 초원으로 돌아가는 인생 ??

한 집사님의 경우에도, 나이가 70살이 되면 어디에 있겠는가? 이쪽에서 풀을 뜯으면서 놀게 된다는 것이다(ㅋㅋ). 그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인데, 즉 저쪽에서 이쪽으로 쏟아지도록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김 집사님의 경우에는, 어제 사진을 찍는다고 종일 수고하면서 서 있고 했는데, 하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냥 풀밭에 앉아있다는 말이다(ㅋㅋ).

그만큼 우리가 점점 더 예수님을 믿게 되면, 과거에는 "이것은 너무나 맛이 없어. 아이, 시시해. 이게 무슨 돈이 된다고?" 라고 하면서 놓쳐버렸던 그 작은 것에서, 바로 그런 조그마하고 작은 것에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면서 더욱 더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아이들은 교회에 와서 세상 영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하지만 진짜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 무엇을 새롭게 받는 것보다도, 이미 주신 것에 대해서도 너무나 감사해서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 다시 창세기 25장 - '축복이 어떻게 나오는가?'

다시 창세기 25장으로 돌아가서, 여기서 쌍둥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즉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로 대체하면서 등장하는 것은, 그것은 "축복이 어떻게 나오는가?" 라고 하는,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축복은 어떻게 나오는가? 위에서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즉 여기 아래에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될 때 축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을 달라고 하늘을 보고 외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아래에서, 즉 복을 주는 위치가 저기 하늘이 아니라 이 지상의 핍박받는 자리에서 복이 온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가인의 경우인데, 가인이 복을 달라고 제사를 드릴 때, 실제로 그것 때문에 아벨이 죽는다는 말이다.

◈ 축복은, 지상의 핍박받는 자리에서 !!

다시 말해서, 축복의 자리가 이미 이 지상에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마치 구멍처럼 '뻥'하고 뚫려있어서 누구든지 거기에 가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인도하실 때 어떻게 하시는가? 우리의 소원대로 되도록 해서 축복을 주시는 게 아니라, 일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게 하시면서 계속해서 축복을 주시면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를 해도, 그 기도에 응답이 되지 않으면서도 일은 일대로 빈틈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그 자체가 곧 축복으로 이어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노리는 것은 주지 않고, 노리지 않는 것을 주시는데,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렇게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주심으로 말미암아서, 축복은 우리가 원하는 자리에는 없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자리에 있음을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 라캉 - '내가 없는 곳에 내가 있다' !!

이것을 라캉의 주장대로 하면, "내가 없는 곳에 내가 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나' 라는 것이 몇 개인가? 두 개인데, 즉 기존의 '내'가 있는 곳에 있는 '나' 라는 것은 바로 환상이고, 진짜 '나' 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없는 그곳에 있다는 말이다.

라캉이 왜 그런 주장을 하는고 하니까, 자꾸만 타인의 말을 듣다가 보니, '내' 안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 라는 것이 어디에 들어있는가? 이미 타인의 욕망 안에, 그 안에 누가 들어있는고 하니, '나'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엄마, 곶감을 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왜 그런가? 그 아이는 안방에 있으면서도 그 마음은 어디에 가 있는가? 곶감이 있는 다락방에 있다는 것이다. 저의 경우에도, 어릴 때 할머니가 땅콩강정과 같이 귀한 것은 다락방에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올라가면 매를 맞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마음은 항상 거기에 가있어서, 그 다락방을 바라보면서 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 교회는, 그리움이 있어야 !!

그러므로 자기가 탐하고 욕심을 내는 그곳에 누가 있다는 말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말씀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보물은 무엇인가? 그 나라의 의(義)인데, 아닌가요? 그래서 제가 어제 뭐라고 설교를 했는고 하니, 그런 보물을 그리워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렇게 보물을 그리워하는 것이 교회이지, 그게 아니라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흉내내고, 또한 법을 지키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교회는 그리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움만 쌓이네" 라는 말도 있는데 말이다. 그게 유행가 가사인가요? (ㅋㅋ)

아무튼 교회는 그렇게 그리움만이 가득히 쌓여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 오면 어떻게 하는가? 먼저 도망갈 궁리부터 하고 뒤쪽에다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아무래도 그리움이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아무튼 우리가 진짜 그리워하는 것은 전혀 눈에 보이는 게 아닌데,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그것은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워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을 '때찌!' 하면서 치는데, 마치 할머니가 매를 때리듯이 말이다.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하시는데, 즉 "그것은 그리워하는 게 아니야. 그것은 오히려 권태와 실망을 주는 거야" 라는 차원에서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것이 좋아 보이지만, 하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실망이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마누라님, 잘 갔다 오세요 !!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 사람이 그만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골치가 아픈데 말이다. 그 남자와 결혼을 할 때는 어떤 세상적인 기대가 있었는데, 즉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쉬고 남편은 힘들게 일해서, 자기는 남편의 뒷바라지만 하면 된다고 여겼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그만 반대로 되어서, 자기가 남편의 뒷치닥거리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기가 찬다는 것이다.  

아침에 뉴스를 보니 어떤 통계가 나오는고 하니까, 만약에 아내가 돈을 번다고 하면 남편이 집에서 주부역할을 하고 싶어하는 게 무려 40프로나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자가 집에서 살림을 사는, 그야말로 그 역할이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인데, 그만큼 이 세상에서 돈을 번다는 것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어느 직장이든지 간에 말이다.

물론 지금 젊은 사람들이 말씀에 관심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심신이 그야말로 다 지쳐버렸다는 것이다. 완전히 녹다운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즐겁게 일하고 돈을 버는 직업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만만하고 좋아 보이는 것은 거기에 항상 치열한 경쟁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만만하고 좋은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와르르 달려들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쾌락이겠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빠져 나오지 못해서 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이 세상에서, 만만하고 좋은 일은 없어 !!

그 좋다고 하는 검사의 경우에도,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퇴근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30살을 먹은 아가씨가 말이다. 사건 서류가 책상에 그 얼마나 많이 수북히 쌓여있는지 모르는데, 그야말로 일 속에 파묻혀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교사의 경우에도, 물론 멀리서 보면 좋아 보일지 몰라도, 아이들이 얼마나 말을 듣지 않는지, 속이 다 썩어서 문들어진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더러워서 때려치우고 싶을 때 한 두 번이 아닌데, 자기 가족들 때문에 그냥 참고서 하는 것이지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모든 것은 돈 때문에 하는 것이지, "나는 일이 좋아서 한다" 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돈만 된다고 하면, 당장에 그동안 하던 것을 때려치우고 다른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돈이 되는 것이 곧 즐거운 것이니 말이다. 그만큼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힘이 든다는 말이다. (레알 아멘!!)

농사를 짓는 것도 얼마나 고생이 되는지 모르는데, 요즘 들어서 귀농을 해서 시골에서 농사를 많이 짓는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텃밭 정도를 가꾸는 것은 되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돈벌이가 되도록 하려고 하면, 나중에는 하다보면 농약 값이 더 많이 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접고 다시 도시로 나갈 수도 없고, 특히 촌에서 몸이 아프면 어떻게 되는가? 감기라도 걸리면, 병원에 가려면 약값보다 차비가 더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우리로 하여금 '때찌!'를 하시면서, 자꾸만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 가운데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알려주는 식으로, 그렇게 축복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축복이 원천이라는 말이다.

교재 157페이지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 구약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피를 받으시는 하나님'이다. 제단에 피를 바칠 때,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다. 백성과 하나님은 피만 주고받으신다.

◈ 돈이 아닌, 피를 받으시는 하나님 !!

여기 교재에 보면, 구약의 핵심이 무엇을 받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곧 '피'를 받으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드라큐라와도 같은데, 정말로 피만 받으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즉 처음 유월절에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거기에서 언약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단에는 피를 뿌리고, 또한 제사장의 몸에는 피를 바른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피로서 도배를 하는데, 모세는 시내산에서 내려오면서 양푼이에 피를 담아서 뿌리면서 뭐라고 했는가?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출 24: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출 24: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출 24: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출 24: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 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하지만 모세가 아무리 그렇게 말을 해도, 백성들은 피를 받는 하나님을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영광이 되는 줄로 알지 말이다. 물론 돈을 받는 하나님은 이해가 되는데, 왜 그런고 하니, 본인이 남에게 돈을 받으니 기분이 좋으니, 하나님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돈을 받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를 받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어디 하나님께서 돈이 없는가? 숲 속에 있는 노루와 사슴도 다 하나님 것인데, 전 세계의 모든 동물원과 식물원이 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말이다. 그것을 대구 수목원에 가지고 온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짓인지 모르는데, 산 전체가 다 수목원인데 굳이 왜 또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돈이 된다고 그렇게 하는가?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피가 없이 그냥 드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 불교가 되고 마는데, 그래서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이 산과 강에 자기 몸을 바친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연에 바치는 것은, 헌신도 아니고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피를 받는데, 그런데 원효대사는 그걸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법정스님도 모르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목사도 이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 그건 특정 목사의 문제가 아니라 !!

대전에서 강의를 하는데 뭐라고 하는고 하니, 대전에 있는 어떤 목사는 연봉이 1억5천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과거에 그렇게 받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얼마나 더 받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어디 그런 목사의 입에서 "하나님은 돈이 아니라 피를 받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물론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또한 무엇인가? 그러니 그것은 전혀 그 목사를 욕할 문제가 아니라, 이미 자기 자신도 어떻게 생각한다는 말인가? 피를 받는 하나님이 자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대전에 계시던 어느 권사님도 "예수님의 행하심이 왜 기적이고 표적인가?" 라는 것을 파악하고 돌아가셨는데, 즉 돈이 아닌 피를 받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니 그동안 그렇게 잘해주던 사람들이 얼마나 미워하던지 모른다는 말이다.

◈ 야곱과 에서, '피는 어떻게 등장하는가?'

아무튼 창세기 25장에 쌍둥이가 등장하는데, 즉 '피를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야곱과 에서를 가지고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이것만하고 마치겠는데, "야곱과 에서 가운데 피는 어떻게 등장하는가?" 라는 것을 말이다. 즉 하나님은 피를 받는 하나님인데, 그렇게 피를 받는 하나님임을 아는 것이 곧 축복인데, 그런 축복을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야곱과 에서에게서 피가 어떻게 나오는가?" 라는 것이, 사실상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데 말이다. 물론 이 야곱의 경우에는 그 아들 요셉을 통해서 피가 나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이고, 이 요셉이 시련을 당하기 이전에 야곱을 통해서 피가 나오는 대목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다.

◈ 라헬의 죽음을 통해서 !!

그게 바로 창세기 35장에 나오는 그의 부인인 라헬의 죽음인데, 즉 사랑하는 아내가 일찍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낳는데 그 이름이 베노니, 즉 '슬픔의 아들' 이라고, 아내가 죽어가면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비극이라는 말이다. 분명히 축복을 받은 가정인데, 그런데 여기에서 자꾸만 비극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창 35:16)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신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창 35: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창 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 성도에게는 실패가 없어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비극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손을 '때찌!' 하시는데, 그래서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는가? 우리 성도에게는 비극이 없다고 했다는 말이다. 즉 성도에게는 실패도 없고, 인생이 망하는 경우도 결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하늘에서 기업을, 즉 복을 받았기 때문에 말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꿈에 나타나서 "내가 복을 줄게" 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야곱은 그런 복을 받았고, 또한 그런 복의 인도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야곱이 생각한 그런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복을 준비하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야곱이 생각한 복은 무엇과 같은고 하니, 기존의 에서가 생각한 복과 같은 종류의 복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야곱과 에서를 영원토록 떼어놓기 위해서는, 야곱에게는 특수한 복이 야곱의 인생 가운데서 배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에서의 복은 버려야만 한다는 말이다. 

◈ 진짜 축복은, '동행' !!

그래서 나중에 야곱이 에서를 만나서 어떻게 하는가? 기존의 자기가 생각한 복을 바꾸는데, 즉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은 형님이 알고 있던 복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행하고 있다는 것인데, 즉 하나님이 동행하신다는 사실, 즉 영생이 선악과나무와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 그 놀라운 사실, 그것이 바로 축복이라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음을, 성령이 오심으로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동행해주심으로서, 그래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았사오니, 우리가 시시하게 여기던 아주 작은 것에서도 주께서는 귀한 복을 남겨주었음을 잊지 않고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5,07 오후 1시에 마침.

                                     나의 삶에 주님의 피가 뿌려져 있음을 날마다 발견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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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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