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47강 쌍둥이 인생

피/피 2012. 8. 29. 10:20

피47강 쌍둥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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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47강 쌍둥이 인생

[11 대구강의 9] - [피 47] - 쌍둥이 인생
                                                                                
                                                   11,05,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성경을 통한 세상보기 !!

오늘 이 시간에는 교재 157페이지와 158페이지를 보겠는데, 야곱과 에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들은 창세기 25장부터 등장하고 있는데, 그들은 쌍둥이란 말이다. 먼저 157페이지를 살펴보자.

** 창세기 25장부터 야곱과에서 두 쌍둥이가 맏이가 되겠다는 싸움이 치열하다. 에서는 맏이 됨을 유지하려고 하고, 야곱은 그 맏이 됨을 빼앗으려고 한다.

(창 25:21)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창 25: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 25: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창 25: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창 25: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

◈ 야곱과 에서 !!

여기에 '야곱과 에서' 라고 하는 쌍둥이 형제가 나오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 두 명의 쌍둥이들을 가지고 이 세상 전체를 모두 설명해주고 계신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 세상을 볼 때 핵심이 무엇이 입니까?" 라고 의문점을 가진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겠는가?

그 핵심은 다음과 같은데, 즉 한 쪽은 천국에 가고 다른 한 쪽은 지옥으로 가는, 그런 두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서, 이 세상 전부가 모두 그 두 사람을 모델로 해서, 즉 "이쪽 줄에 설래? 아니면 저쪽 줄에 설래?" 라고, 사실은 우리에게 명령하는 게 아니라 이미 결정된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해서 야곱 쪽에 서는 사람과 에서 쪽에 서는 사람이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경을 통한 세상보기인데, 즉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을 일목요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된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에서 이 '에서' 라는 사람이 하나의 나라가 되는데, 그것이 곧 '에돔'이고, 그리고 이 야곱을 통해서도 나라가 나오는데, 그것이 곧 '이스라엘' 이라는 것이다. 즉 에돔과 이스라엘로 말이다.

◈ 이스라엘이과, 이스라엘이 '아닌' !!

그러니 구약선경 전체는 무엇인고 하니까, "이스라엘인가? 이스라엘이 아닌가?" 라는 것으로 구분이 되는데, "이스라엘이다. 혹은 나는 이라크이다" 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이쪽의 이런 수많은 이방나라는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이 아닌 나라이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쪽은 이스라엘이고 말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아닌' 이라고 하는, 이 '아닌'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데, 즉 이스라엘은 야곱 쪽에 속하고, 이스라엘이 아닌 쪽은 에서인 에돔에게 속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이스라엘과 에돔이라는 나라가 대비되어서 이 세상나라를 모두 다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두 민족의 차이가 영원한 지옥과 천국의 차이로서 마감이 되는데, 성경은 그렇게 아주 일목요연하게 전 세계를 다 보여준다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아직까지도 머리가 팍팍 돌아가시는 분들은 무슨 생각이 드는고 하니까, 이렇게 이스라엘이 등장하지 않았으면 어느 나라가 좋은 나라이고 어느 나라가 나쁜 나라인지, 그런 기준 자체가 없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등장하지 않으면 말이다.

제가 친척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니, 우리나라의 역사도 미처 공부를 못해서 모르면서, 왜 굳이 이스라엘이라는 남의 나라 역사까지도 모두 알아야 하는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차원의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 저주의 기준은 '언약'에 !!

여기에 눈이 있으면, 이런 자기 눈으로 이스라엘을 보는 것과, 그리고 이스라엘 속에서 바깥을 보는 것은 시선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모두 똑같은 인간들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속에서 바깥을 보는 것을 하나님의 시선, 즉 '언약'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언약 안에는 거룩이 들어있는데, 이 거룩은 하늘의 거룩으로서, 즉 시내산 위에 있었던 하나님의 거룩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보아야 하는데, 물론 이 세상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을 보면 차이가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그 '아닌' 것은 전부가 다 개가 된다는 말이다. 이 개는 무엇인고 하니, 시편에 보면 언약이 없는 자인데,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의 주(主)를 섬기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다는 것이다.

(시 59:6) 저희가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그것을 신약의 로마서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다고 하는데, 즉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고린도전서에서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다고 하고 말이다. 그러니 저주의 기준에 언약에 있다는 것이다.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 이스라엘도 역시 망하고 마는데 !!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 속에는 있는 앙코, 즉 언약이 거룩한데,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전히 육적이기 때문에 자기 나라가 그만 기준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스라엘도 역시 망하고 마는데, 즉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의 우상을 섬기고 그들을 본받고자 하다가 자기들이 품고 있는 언약에 의해서 그만 자기들이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둑에서는 '자충수' 라고 하는데, 즉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알들이 사는데, 그런데 괜히 자기가 한 수를 더 놓아서 폭파를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없는데, 괜히 벌벌 떨면서 엉뚱한 소리를 해서 자기가 한 짓이 들통나고 마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다른 나라들보다 우수하다고 폼을 잡고 우쭐거리다가, 정작 자기 나라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본인들이 믿지 않아서 이스라엘이 제일 먼저 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에 의해서 제일 먼저 멸망을 당한 나라가 곧 이스라엘이라는 말이다.

◈ 남은자(REMNANT) !!

그렇게 멸망을 당하면서 탈출이 되는데, 그렇게 깨어지면서 '뽕'하고 뭔가 튀어나오는 자들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탈출하게 되는 자들을 두고서 3글자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바로 '남은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REMNANT
라고 말이다.

그런데 로마서 5장(11장?)에서는 이 '남은 자' 앞에다 형용사를 붙여서 어떤 남은 자라고 하는고 하니, '은혜로 남은 자' 라고 하고, 그 앞에 하나 더 부사구로 붙는 것이 바로 '행위로가 아닌'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참고, 명사를 꾸미는 것이 형용사이고, 형용사를 꾸미는 것이 부사임)

(롬 11: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롬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 목사님, 저는 행위로 구원받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

어제 우리교회에 낯선 아주머니가 한 분이 오셨는데, 제 아내는 예배시간에 졸았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제가 앞에서 보기에는 졸은 것이 아니라 그 아주머니가 상당히 경직된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날 따라 설교 초반부부터 행위를 박살내었으니 말이다. 물론 예배시간이 미처 끝나기 전에 나가고 말았지만 말이다.

제가 왜 어제의 그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일반 교인들은 성경말씀을 제대로 모르니, 목사들은 그렇게 그들이 성경을 모른다는 것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일반 교인들이 성경을 모른다는 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다.

그것은 바로 "저는 행위로 구원받을 준비가 되어있으니, 목사님은 저에게 행위로만 이야기해주세요. 그러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준비하고 온다는 것이다. 즉 "내 행위로 말미암아 가정이 복을 받고 천국에 가게 해주옵소서" 라고 하는, 이미 교회에 오기 전부터 그런 마음가짐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더 쉽게 말하면, "제가 빌 테니, 복을 주세요" 라는 것이다. 그들의 직업이 의사든 판사든 그런 것은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들이 교회에 온다는 것 자체가 바로 "제가 잘못한 것을, 겸손하지 못한 것을 빌 테니, 그러니 그저 복을 주세요"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의 깨어짐 속에서 !!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주변에 깔려있는 모든 나라의 행태인데, 그런데 그만 이스라엘이 이러한 이방 나라의 모습을 닮아 가지고는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행위로 나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거기서 그만 '뻥'하고 깨어지면서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하는데, 그렇게 깨어지고 멸망을 당하는 가운데 어떻게 되는가? 어떤 자가 나온다는 말인데, 곧 '남은 자'가 나온다는 것인데, 그런데 남은 자는 로마서에 보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남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행위가 아닌 은혜로 말이다.

◈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

그것을 더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셨기에 남게 된 자인데, 혹은 특별히 창세 전에 구원되기로 작정된 자, 또는 사도행전 13장의 말씀에 의하자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여기서 이 '믿더라' 라는 것은 인간의 능동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 앞에 무엇이 붙는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라고 하는 것은 수동적인 태도라는 말이다. 그러니 '믿더라' 라고 하는 것이 비록 능동이라고 해도, 그 앞의'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 라고 하는 수동이 없다고 하면 그런 능동적인 태도인 '믿더라' 라는 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 자기 행위가 '아닌' !!

그러니 이것은 작정된 자에게만 나오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이런 믿음은 자기가 믿는다고 하는 행위가 아니라 작정이 되었기에, 즉 주께서 붙들어주셨기에 믿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두 가지를 모두 다 포함하는 고백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자기 부인' 이라고 하는데, 즉 '자기 부정' 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겸손하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자기 부정이 아니라, 그 무엇을 하더라도 자기 행위가 아니라고 하는, 그러한 '아님'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 먼저 '경계선'에 대해서 !!

그러면 지금부터 그 '행위' 가운데 특히 어려운 대목을 좀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먼저 이것을 말하고 난 뒤에 교재에 나와있듯이 에서와 야곱으로 전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그 대목을 계속해서 이야기해나겠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봄에 있어서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경계'로 보는데, 이 경계라는 것은 '경계한다' 라고 할 때처럼 긴장되게 살핀다고 하는 의미도 있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경계는 뒤에 글자를 하나 붙이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 즉 '경계선' 이라는 말이다. 즉 일종의 '칸막이' 인데, 이것을 철학에서는, 특히 불교에서는 '분별'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하나 집중을 하는 순간, 그렇게 집중하는 것과 집중이 되지 않는 것과의 사이에 무엇이 생기는고 하니, 그게 칸막이, 즉 경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는 무한대인데, 즉 우리 인간에게는 "이제 그만 해라" 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무엇을 하다가 자기가 도저히 감당되지 않으면 조금 쉬자고 해놓고, 그 다음에 또 다시 계속해서 자기의 영역을 넓히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자아의 무한한 활동성' 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우리가 꾸는 꿈 가운데 보면 우리가 무한히 공중을 날아다닌다는 것이다. 또한 온갖 저지레를 다하고 말이다. 꿈속에서 말이다. 물론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지만 말이다.

◈ 꿈에 대한 이론 몇 가지 !!

이러한 인간의 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이론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꿈은 낮에 억압된 것이 꿈을 꾸는 밤중에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먼저 이런 이론이 하나 있고, 그 다음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 미래가 걱정되어서 그 미래에 되지 않을 것을 염려해서 미리 스스로 다짐하는데, 즉 "이번 일이 제대로 안 되도 참자" 라고 하는, 즉 꿈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미리 해소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꿈에 대해서 이런 두 가지의 이론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두 번째는 미래에 관한 것이고, 첫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과거에 관한 것인데, 즉 이미 낮에 있었던 일이니 말이다. 오늘 낮에 경험한 것, 혹은 10년 전, 20년 전의 낮에 경험한 것인데, 그런 것이 누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낮에는 점잖을 차린다고 참아서 그만 스트레스가 되는데, 그런데 밤에는 의식이 없어지고 무의식의 상태가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활동하니, 그만 튀어나오더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첫번 이론을 뒷받침하는 기술이 바로 '최면요법' 이라는 것인데, 정신과에서 치료할 때 이런 것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면(催眠)이니까, 면(眠), 즉 '잠'의 일종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잠결에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잠결에는 의식이 풀어져있으니, 옆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이다. 편안하게 말이다. 본인의 의식은 거기에서 중지가 되어있으니 고통도 없는데, 때려도 아프지 않고, 무거운 것을 들어도 "이제 가볍습니다" 라고 하면 무거운 것도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꿈속에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혹시 이렇게 되면 큰 낭패인데, 안 되는데" 라고 하는 걱정을 하다보니까, 그것이 꿈속에서 미리 나온다는 것이다. 즉 "큰 낭패를 당하면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 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시험을 앞두고 있다면, "이번 경찰시험만은 합격을 해야돼. 합격이 되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거야. 이번이 3번째인데 말이야" 라고 하는데, 그런데 꿈속에서는 이미 떨어져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깨면 "아하, 꿈이었구나" 라고 하는데, 그런데 아침에 가보니 합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이, 합격이 된 줄도 모르고 괜히 걱정했구나"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보통은 관심사가 꿈에 등장하는데, 특히 자식이나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다든지 하면 말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꿈을 꾸고 나면 뭐라고 하는가? 자식에게 전화를 해서 "야야, 이번에 꿈자리가 무척 사납데이. 오늘은 조심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정작 본인이 걱정을 해놓고는, 본인이 또한 그것을 자식에게 강요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계시가 꿈을 이용해서 !!

그리고 세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닌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계시를 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꿈 자체가 계시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가 꿈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꿈속에서 기가 막힌 계시가 나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꿈을 이용하는 것이지 말이다.

사도바울의 경우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가지고 죽은 사람에게 덮으니 그 사람이 도로 살아났는데, 그렇다면 그 손수건을 들고 있으면 여전히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효과가 계속 일어나는가? 그 손수건에 그런 효과가 있는가? 그게 아니라, 주께서 그때만 그 손수건을 이용하셨다는 것이다.

◈ 사람은 계시의 수단 !!

그러니 세 번째로 이렇게 성경에서 꿈이 나온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더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은 계시의 수단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은 계시의 수단이다" 라는 의미는, 사람의 어떤 독자적인 희망과도 같은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믿고싶다. 믿고싶다. 믿고싶다" 라고 한다고 해서 그게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 자신를 조작해서 하나님의 뜻을 만들어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하고싶다. 하고싶다. 하고싶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될 것이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흔히 그것을 두 글자로 '기도' 라고 하는데 말이다. 

◈ 어휴, 새벽기도 !!

그러므로 기도라는 것은 자기가 집중할 수 있는 것을 반복해서 강요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마치 자기 기도가 응답이 되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때까지, 그렇게 해서 그게 착각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여겨질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해서 하다보니, 기도시간이 그만 1시간, 2시간, 그렇게 길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기도시간에 나와서 해가 중천에 뜨는 것도 모르고 기도를 하는데, 목사의 입장에서 빨리 아침을 먹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예배당 안에서 벌써 2시간째 그렇게 버티고 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쫓나낼 수도 없고 말이다. 물론 그게 여름이면 또 괜찮은데, 정 아니다 싶으면 그냥 놔두고 나오면 되는데 말이다. 하지만 겨울에는 난로불도 끄고 해야 하는데, 또한 연료 값은 얼마나 비싸냐는 것이다. 그것도 미리 30분에 전에 나와서 미리 예배당 안을 훈훈하게 만들고 해야하는데, 그런 비용을 누가 감당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런 새벽기도 때문에 목사들이 하루 시작부터 완전히 지치게 되는데, 늘푸른 교회의 이장우 목사님도 부산강의에 참석하면 늘 파김치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늘 새벽기도회를 하니 말이다. 그것도 그 연약한 몸에 말이다(ㅋㅋ).

◈ 경계 - '나의 완성을 객관화한다' !!

아무튼 이 '경계'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다시 정리하면, 이 경계는 "나의 완성을 객관화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왕 어려운 것 계속해서 하면, 여기서 '객관화한다' 라는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욕망을 현실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사람들은 경계의식을 가진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오늘하고, 저것은 내일하고"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오늘에 할 일과 내일에 할 일을 칸막이를 치는 것인데, 즉 경계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경계'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무한한 '나' 라는 것이 바깥으로 나가서 현실화가 될 때는 이 경계 때문에 그만 유한(有限)이 된다는 것이다. 즉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 인간들 - '진리와 연관성을 가지면 그것이 곧 진리이다' !!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요상스러운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욕망은 무한한대 실제로는 한 사람이 서너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이것은 지금 하고, 저것은 다음에 하자" 라는 식으로, 먼저 섬기면서(?) 결정하는 그것으로 무한한 욕망을 일단은 이룬 것처럼 일단은 착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자기가 벌리는 일이 진리라는 말인가? 진리가 아니라는 말인가? 그것은 제가 묻고 싶은데, 그게 진리라는 것인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인가? 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전부를 다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와 연관성을 가지게 되면 진리라고 한다는 것이다. 좀 어렵지요?

다시 말해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자기 호주머니에 챙기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렇게 하면 진리가 되지만 이 세상에 그런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그 전체 가운데서 일부라도 하면 가지게 되면, 왜냐하면 사람은 이것저것을 모두 하지는 못하니 말이다.

그래서 제가 '경계' 라는 말을 했는데, 그렇게 자기가 일부만 했지만, 그것이 전체의 사항과 다 연결이 되어서, 그렇게 일부만 알더라도 전부를 안다고 여기고서, 그런 경우에 인간은 "나는 진리를 알았어" 라고,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판정을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의 진리관을 허용하시는 하나님 !!

그렇게 우리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판정을 하는데, 그런데 야곱과 에서 이야기 가운데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신다는 것이다. 지금 이것을 이렇게 포괄적으로 복잡하게 이야기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한번 해보겠는데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고, 또 세상에 인간이 있다고 하면, 지금까지 제가 강의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등장함으로서 나타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3개 4개가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데, 그러면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이름의 원조는 누구인가? 바로 야곱인데,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서 자기 뜻을 이 세상에 전달하신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은, 자기 경계밖에 감당하지 못하지만 !!

그것은 야곱뿐만이 아니라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자기 뜻을 드러내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자기 품에 모든 인구를 다 가지고 있는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식구들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서 헉헉거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의 식구까지도 다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아까 배운 경계, 즉 아브라함은 자기 나름대로 감당할 수 있는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농사를 짓는다고 온 세상에 농사를 다 지었는가? 알래스카까지 말이다. 그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농사를 지은 것은 가나안 땅, 그것도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양을 친다고 해서 전세계의 모든 목초지에 다 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일부에 양을 쳤지만 하나님은 그것은 용납하셨는데, 그래서 야곱의 일부에게 전체의 진리가 되시고 길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주님의 뜻이 야곱에서 집중해서, 마치 햇빛을 모으는 볼록렌즈처럼 집중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을 다시 프리즘과 같이 펼쳐 보이시는데, 그래서 특정 사람이 축복하면 복이 오고, 또한 저주하면 저주가 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프리즘의 역할을 언약맨으로, 즉 언약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배치를 해두셨다는 것이다.

◈ 이방민족 - '니나 나나 똑같다' !!

그런데 이방민족들은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여기는가? 모독한다는 것이다. 즉 "니만 인간인가? 나도 인간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즉 "니만 경계를 지어서 진리를 접했나? 나도 경계를 지어서 진리를 접하고 있다"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니가 나보다 못하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니나 나나 똑같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방인들이 주장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어떻게 여기는가? 소위 '4대성인' 이라고 해서,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와 동일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 분이 누구냐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 이것은 은혜이다 ??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가? 경계를 지어서, 즉 "이것은 은혜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어떻게 여기는가? 자기 혼자 마음이 편치 않아서 뭔가를 의지하고 싶어서 그만 오바해서 "이것은 주님의 은혜이다" 라고 하면서 붙잡은 것이 아닌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인간의 자아는 반성하는 자아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반성한다는 것은 나쁜 것을 반성하는 게 아니라, 다시 한번 더 되새긴다는 의미에서 반성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반성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면 자아는 새로운 '자아1'과 '자아2'로 균열이 일어나는데, 즉 갈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번에 다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하지 않겠는데, 어떻게 되었던 간에 인간은 이렇게 항상 다시 한번 더 되새기기 때문에, 지난번에 은혜를 받았다고 자기는 그렇게 철석같이 믿겠지만,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나면, 그때 주변의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서 그만 휩쓸리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일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은혜를 받았다고 눈물을 흘리고 했으니, "나도 참 너무 눈물이 많아서 탈이다"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물론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그래도 괜찮고 좋은 경우이고,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경우인데, 즉 "아하, 그때 받은 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구나" 라고 하면서 붙잡게 되면 그것은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하는데, 그런데 십자가 밑에서의 자기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붙들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고집인데, 그 앞에 무엇을 하나 더 붙이면 그만 똥고집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ㅋㅋ).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과연 똥고집의 대명사는?

이런 똥고집의 대명사가 누구인고 하니, 바로 한국교회의 장로들인데, 특히 원로장로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들 가운데 똥고집이 없는 자들이 없는데, 개뿔도 성경도 제대로 모르면서 말이다. 자기가 그 교회에서 40년, 50년을 봉직했다는 것이 그만 똥고집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완전히 변비수준인데, 진짜 제대로 된 설사를 만나야 하는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그런 자들에게 복음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정작 중요한 복음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 자기 똥고집을 부리면서 "그래, 내가 이렇게 열심히 교회에 50년 동안을 다녔는데 그 복음을 모르겠나?" 라고 하는데, 물론 복음을 이야기해보라면 그만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만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50년 동안 이단교회에 다녔으니 어떻게 복음을 알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은 그들이 하는 소리가 무엇인고 하니까, "착하면 되지" 라고 하는데, 즉 착한 것이 복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옆에 있으면 똥물이라도 퍼붓고 싶다는 말이다(ㅋㅋ). 

그러니 우리가 항상 생각할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몇 년 동안을 믿고, 또한 자기가 몇 년 전에 은혜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게 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 계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믿느냐는 말이다. 자기가 은혜를 받은 것을 믿는 게 아니고 말이다. 자기가 은혜를 받은 것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지나지 않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일종의 경계라는 말이다.

◈ 반성된 자아는, 자아의 무한성에서 벗어나지 않아 !!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야되겠는데, 방금 자아는 반성하게 되어있다고 했는데 말이다. 사람이 자아를 반성하게 되면 새로운 자아가 나온다고 했는데, 이 자아는 이전의 것을 반성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자아는 항상 자아의 무한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자아의 무한성은 본인이 곧 신이라는 의미인데, 즉 "내가 곧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인간은 바로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방금 말한 똥고집이 그런 경우인데 말이다. 그러니 일시적으로 은혜를 받은 것도 물로 귀한 것이지만, 하지만 그렇게 은혜를 받은 것을 줄곧 반성하면서 자기 자아를 믿을 것인지, 아니면 성경을 믿을 것인지, 그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언제나 성경말씀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나는 외롭게 살기 싫어 ??

성경말씀을 배우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목사들이 그러한 경우인데 말이다. 하지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성경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이지, 자기 똥고집을 주장하는 것이 결단코 아니라는 말이다. "신앙생활이 참 어렵습니다" 라는 소리가 제 귀에 많이 들려오는데,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외롭게 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가 스데반 집사님을 자꾸만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가 죽은 것을 두고서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견딜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주님이 직접 믿음을 준 사람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은 어떠한가? 즉 남들이 보란 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자기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옛날에 배운 가락은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대로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 선물을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주님에게 끌려가기 위한, 즉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라고 하나님께서 위해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자기 신앙생활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고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의 기도가 어떻고 받은 은혜가 어떻고 하는 말이다.

◈ 신앙생활은 '절대 고독' !!

그런데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는가? 꼭 자기 자랑을 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자기 자랑을 말이다. 하지만 주님이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한다고 하면 전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무리 외롭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오직 그런 사람들만이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받은 것이 없으면 어떠한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신앙생활이고 뭐고 없다는 것이다. 알다준다고 하면 또 나서서 뽐내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자들은 주님의 시선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더욱 더 중하게 여기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외로움인데, 그것도 '절대 고독' 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우리가 다 통과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즉 "당신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이 주신 것이 있습니다" 라는, 그런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제가 하는 이런 것도 기회가 있으니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만약에 없다고 하면 이런 말조차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에서가 아닌, 야곱의 경우에는 !!

제가 지금 계속해서 야곱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물론 에서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깜깜한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냥 자기 반성이고 자기 경계에 지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야곱의 경우에는 자꾸만 타겟(?)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다시 하겠는데, 에서는 자기 성질대로 살아가면 그만인데, 하지만 야곱의 경우에는 뭔가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브레이크가 걸리게 되면 야곱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즉 하나의 사건의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받은, 즉 천국에 가는 노선에 속한 사람들의 공통점이라는 말이다.

◈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

그것이 곧 시편 51편에 나오는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라는 것인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 일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 주님과 무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자기가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죄인으로 들통이 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그런데 이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 즉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라고 했으니까, 그 말의 뉘앙스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주께만 범죄를 했으니까, 적어도 너희들 앞에서는 내가 의인이다" 라고, 그렇게 의인으로 행세를 해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하지만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남들 앞에서 자기가 어떠한지, 그런 것은 전혀 비교할 가치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왜 자기를 굳이 남과 비교하느냐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 서면 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주님 앞에 말이다.

◈ 쌍둥이의 특징은?

우리가 야곱이면서도 그 야곱 안에 에서가 들어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어제 제가 예언한대로(?) 말이다. 어제 제가 월요일에 강의를 한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쌍둥이' 라는 것이다. 이들 쌍둥이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다같이 태어났는데, 즉 "저쪽에도 내가 들어있고, 내 안에도 저쪽이 들어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에서는 굳이 건드리지 않더라도 야곱을 건드리게 되면, 야곱 속에 들어있는 에서 쪽을 계시로 강제로 잘라내는 작업을 주께서 하시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님의 작업 가운데서 야곱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자기가 에서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가 죄인임이 말이다.

◈ 절단면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

이것을 본격적으로 해보겠는데, 이 야곱 속에 진짜 이스라엘이 들어있는데, 왜냐하면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니 말이다. 즉 야곱 안에는 이스라엘이 들어있고, 그리고 또한 에서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둘이 합쳐서 야곱이 된다는 것이다.

이왕 어려운 것 계속 어렵게 해보겠는데, 언약에서 자른다고 했는데, 주께서 찾아와서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자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고 주께서 자르게 되면, 그 잘려진 절단면에서 무엇이 '톡'하고 솟구쳐 올라오는데,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 혹은 '하나님의 사자'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언약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 야곱 안에, 이스라엘과 에서가 !!

아무튼 야곱은 이렇게 이스라엘과 에서로 되어있는데, 물론 야곱은 이스라엘이 자기 안에서 나온다는 것을 몰랐지만 말이다. 그러니 야곱은 자기 안에 이스라엘이 있고, 또한 에서가 있어서, 그렇게 둘 다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야곱은 '나'이고 에서는 '남'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이러한 틈을 가르면서 올라오신 하나님의 이름, 혹은 하나님의 사자, 즉 천사가 올라오게 되면, 그게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본 천사인데 말이다. 그 천사가 올라오게 되면, 야곱 본인은 자기가 곧 에서와 같은 쌍둥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에서는 육인데, 하지만 야곱도 역시 육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육이 육의 것이 탐나서 그만 장자권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빼앗고자 하는 장자권도 영이 아니라 육이 된다는 말이다. 전부가 다 육적이고 세속적인데, 바로 그러한 것인데, 그러니 야곱의 특징이 곧 남에게 지기를 싫어한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야곱을 영적으로 '이긴 자'로 !!

바로 그렇게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는 육적인 야곱을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야곱에게 오셔서, 영적으로 야곱을 이긴 자로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드디어 이스라엘이 되는데, 즉 '하나님을 이긴 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창 32: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창 32: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창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 32: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창 32: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창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창 32:29)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하지만 그 이전까지 야곱은 누구를 이기기를 원했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의 쌍둥이 형인 에서를 이기기를 원했는데, 그것이 바로 "누가 누가 복을 더 많이 따내는가?" 라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야곱이 따내려고 한 그 복의 내용도 결국에게는 무엇이었다는 말인가? 즉 야곱이 추구한 복이 도대체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

어제 낮에 설교한 것처럼, 오병이어의 모든 음식물은 실제로는 만나도 아니고 그냥 세속적인 것인데, 그런데 백성들이 그만 거기에 빠져서 "예수님만 있으면 이제 양식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라고 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그들은 그만 몽땅 다 가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버려야만 될 것, 즉 우리 속에 이런 육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힘으로는 아무리 해봐야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이 찾아오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나오지 말라고 해도 육적인 것들이 계속해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나오고 나오고 또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딸딸 긁어서 계속해서 나오게 되면, 그렇게 나오도록 바깥으로 집어던지는 그 주인공 역할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어서, 그 작업을 우리를 통해서 하시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이라는 어르신이 말이다.

◈ 하나님을 이긴 자 !!

아무튼 야곱이 얍복강가의 사건을 거치고 난 다음에 누구를 만나는가? 에서를 만나게 되는데, 형에게 7번이나 넙죽 절을 하면서 "나의 주여!"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야곱은 쌍둥이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즉 "너나 나나 모두 한 뿌리에서 나왔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작업으로 그 뿌리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에서를 만나지 못하는데, 왜 그런가? 이제 야곱은 본인의 몸이 아닌데, 그 솟아올라오는 분에 의해서, 야곱은 이제부터 야곱의 역사 자체가 하나의 계시 덩어리로서, 즉 이스라엘을 만드는 말이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그대로 하나의 민족단위로서, 그것이 곧 이스라엘의 역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우리 성도의 운명이 되어서, 그게 그대로 카피가 된다는 말이다. 즉 주님에게 쓰임을 받는 자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이긴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긴 자의 모습 말이다.

이제 요한복음 16장 33절을 찾아보겠는데,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여기에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 '내가' 라는 분이 누구인가? 물론 예수님인데, 그러면 제자들은 세상을 이겼는가? 전혀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들은 이기고 지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전쟁에 전혀 참여할 자격조차도 없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오히려 그들은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도망치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칼을 가지고 설치고 해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칼을 거두어라. 칼로 선 자는 칼로 망한다" 라는 식으로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아니, 나에게 이런 모습이?

그런데 이 세상을 이긴 분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본의 아니게 무슨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가? 세상을 이미 이긴 자로서, 즉 이 세상을 이길 수밖에 없는 모습들을 드러내게 되는데, 우리의 허락도 전혀 받지 않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니, 나에게서 어떻게 이런 모습이?"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 모습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운명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에서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긴다고 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출세한다고 하는 의미로 여겨지는데, 그래서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할 제목조차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오히려 환난을 당하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육적인 환난이 오게 되면, 그런 육적인 환난을 당하지만, 그러면 우리의 육적인 것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기는 방식으로 육을 무시하고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승리의 결과가 천국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즉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가듯이 말이다. 그러니 천국에는 모두가 다 승리한 자들만 오게 되기 때문에, 그런 승리한 자들은 손에 무슨 가지를 다 들고 있는데, 그게 바로 종려나무 가지라는 것이다. 오직 승리한 자들만 들고 있는 말이다.

◈ 피 묻은 눈부신 옷과 종려가지를 들고 !!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종려나무 가지의 특징이 있는데, 전부가 그 옷에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가 묻으면 옷이 벌겋게 얼룩이 지든지 해야하는데, 그런데 피가 묻었는데 그 옷 색깔이 하얗다는 것이다. 마치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눈부신 옷을 입고 있듯이 말이다.

사실 그 옷이 하얗지도 않은데, 하얀 것을 초월한 색깔이라는 것이다. 눈부신 광채가 나는 빛 덩어리인데, 즉 이 세상의 색깔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죄가 없고 흠이 없으니 그러한데, 그런 흠이 없는 어린양의 피가 오니, 성도의 몸 전체가 흠이 없는 자에게 합당하고 적합한 새로운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변해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면류관을 반납하면서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 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 7: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육적인가?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도대체 무엇이 이기고 지는 것인지, 그것이 정리정돈이 된다는 것이다. 즉 영적으로 무엇이 이기는 것인지, 무엇이 지는 것인지 말이다. 물론 진 쪽은 에서 쪽인데, 그러니 에서 쪽이 혜택을 입지 못하는 육적인 것인데, 그래서 육의 것만 사모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야곱도 육적인 것만 사모하는데, 그래서 둘 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쌍둥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같은 뿌리이기 때문에, 이 둘을 갈라놓고 갈라놓지 않고 하는 것은 누구의 소관인고 하니까, 야곱과 에서 본인들이 알아서 하는, 그런 자기들 소관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니가 똑바로 하란 말이야" 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소리를 해도 그들은 모두가 육적으로 오해하게 되니 말이다.

◈ 아버지를 속이는 야곱, 왜?

그래서 야곱은 누구를 속이는가? 복을 따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짓도 마다하지를 않고 하게 되는데, 아버지를 속인다는 말이다. 만약에 아버지가 복을 주지 않았으면 아마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복 앞에서는 그야말로 부모고 뭐고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데 누가 협조하는가? 누가 뒤에서 조종을 하는가? 야곱의 엄마인데, 즉 엄마와 야곱이 한 편이 되는데, 그러니 남편이고 뭐고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저주받은 아들인 에서가 한 편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만 가족싸움이 되고 말았는데, 하나님은 왜 이런 싸움을 붙이시는가? 그렇게 싸움을 붙여야 패배자와 승리자가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뚜렷하게 갈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상 싸워야 하는데,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싸우는 가운데 주께서 개입하셔서, 그런 육적인 싸움을 무엇으로 바꾸시는고 하니, 영적 싸움으로 변환시키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싸울 때마다 말이다. 육적인 싸움을 영적인 싸움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우리는 영적이라고 우기지만 우리의 내부에서는 영적 싸움에서 얻어지는 어떤 보너스, 그러한 것을 은근히 기대한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것을, 즉 권력이나 정(情)과 같은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해서 좋은 인생이 되기를 바라는데, 그런 육적인 것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 주께서, 육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

그러니 이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런 육적인 것과 이스라엘을, 즉 육적인 자기 자신과 예수님을 구분짓고 경계를 짓는데, 그런 새로운 성령의 역사가 임하게 되면, 본의 아니게 이미 승리자로서, 자신의 죄인 됨과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을 증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환난을 주시는데, 즉 이 세상은 우리에게 환난을 주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환난을 받고 말이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환난을, 즉 육적으로 이기지 못하는 것을 영적으로 이겨낸다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서 죽었는데, 그것은 누가 봐도 패배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는 순교자가 되는데, 죽으면서 스데반 집사가 뭐라고 했는가? "주여, 저들은 게임을 모릅니다. 이 게임의 룰을 모르는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했다는 것이다.

◈ 바둑의 경우에도 룰이 있어서 !!

예를 들어서, 장기만 둘 줄 아는 노인네가 바둑을 두는 곳에 와서 "이 놈아, 여기에다 두어라" 라고 하면서 바둑알을 옮기라고 훈수를 두면 어떻게 되겠는가? "할아버지, 이 게임은 그런 룰이 아닙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룰로서 정해졌다는 말이다.

방금 말한 바둑은 알다시피 이렇게 판이 있다면, 양쪽이 각각 19줄로 되어서 361개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둑에서 죽고 사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까만 돌과 하얀 돌이, 과거에는 조개를 가지고 만들어서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가는 길에 4군데가 모두 막히게 되면. 그 안에 있는 하얀 돌은 '죽었다' 라고 하게 되고, 포로로 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바둑에서 '죽었다' 라고 하는 게임의 룰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실제로 성경에서 복음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야구에서 죽었다는 것은 삼진아웃과 같은 것인데, 물론 도루를 하면서도 죽고 말이다. 그와 같이 현실에서도 '죽었다' 라는 것이 룰이 있다는 것이다.

◈ 과연 '죽었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룰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진 것을 죽었다고 보는데, 즉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 과실을 먹지 못하면 무조건 죽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무조건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선물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라고 하시는 것인데, 즉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두고 하늘에서 내려온 참 된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

(요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자꾸만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진실된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는데, 즉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만나이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해도 사람들이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면 알아듣겠지만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 라고 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우리는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그런 것은 필요가 없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게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 선한 선생님이여 ??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뭐라고 했는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했는데,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을 두고 선한 선생님이라고 하는 것은, 선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인데, 그러자 예수님은 기가 차서 뭐라고 하셨는가? "내가 곧 영생이다" 라고 하셨는데, 즉 "예수님이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고 말이다.

(눅 18: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나는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자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사람을 어떻게 뜯어먹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가? 아니, 사람이 무슨 돼지갈비냐는 것이다. 어떻게 뜯어먹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뜯어먹는 방법도 역시나 자기들이 생각하는 육적인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는데, 자기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줄창(?) 고집을 하면서, 그렇게 자기들이 하는 게임에 자꾸만 주님을 보고 들어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납득이 된다는 것이다.

◈ 성경말씀을 영으로 해석한다고 함은?

하지만 성경말씀에 있어서, 이 야곱도 에서와 똑같은 쌍둥이로서, 즉 육이기 때문에, 그런 육으로서 해석할 수 있는 성경말씀은 단 한 구절, 한 단어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뭐라고 했는가? 성령의 편지도 어렵기 때문에, 샛별이 떠오르기 전까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벧후 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성경말씀을 자꾸만 문법적으로 보는데, 마치 개혁주의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성경을 전혀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영으로 풀어야 한다고 것인데, 그렇다면 영으로 푸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푼다는 말이다.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 이미, 생명나무 시대는 끝 !!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전혀 우리 인간에게는 먹혀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간자체가 육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영으로 가는 길이 차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손으로 따먹을 수가 있는 생명나무의 시대는 끝이 나고 말았는데, 주님께서 "임마, 이제는 손을 떼란 말이야" 라고 하면서 생명나무를 숨겨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숨겨놓은 것을 두고서, 우리가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숲을 헤쳐서 찾아내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주실 때 비로소 받는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생명을 주시는 것에는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때부터 환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환난은 육적인 환난이 아닌데, 즉 가난하게 되고 고생을 해야되고 몸이 아파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야 은혜를 받는 것이 말이다.

◈ 성도는, 그냥 조용히 살아도 !!

그냥 가만히 있어도, 즉 영으로 사는 사람은 아무런 일이 없어도, 즉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없어도 이 세상 자체가 곧 환난이라는 말이다. 교회에 간다고 머리를 쥐어뜯고 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아하,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구나" 라고 하는 자세로 견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난을 자초하는 일이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요즘 말하는 것도 그렇고 예전과는 전혀 다르네. 교회에 다닌다고 하더니만 너무 푹 빠진 것이 아니가?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몰라도, 입만 열만 십자가 이야기가 나오고, 이상하네? 전에 졸업할 때는 그렇지를 않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지금 분위기를 다 버려놓고 이게 뭐꼬? 아니, 노래방에서 무슨 찬송가 타령이고? 거기서 십자가가 왜 나오노? 그게 말이 되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하지만 그런 과정이 무엇인가? 그것이 곧 생명을, 즉 주님이 걸어가신 일대기를 우리 몸을 매개체로 해서 보여줄 수밖에 없는, 그것이 곧 성도가 놓인 형편이고, 또한 성도의 일생이라는 말이다. 여자의 일생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 다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

요한복음 16장을 다시 강조하겠는데, 주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라고 하셨는데, 사실 그렇게 당하는 것도 우리가 빼도 박도 못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거기에 자긍심을 가져도 괜찮다는 말이다.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그러니 모든 것이 다 다른데, 즉 사람이 달라져 버리면 세상 자체가 이미 어둠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고 하시는데, 즉 누가 이겼다는 말인가? 여기서 '내가' 라는 것은 누구인가? 즉 우리가 세상을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이기셨다는 말이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의 선장이 되시는, 우리 속에 계시는,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 이 세상을 이겼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곧 어둠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어둠이기 때문에 도망을 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어둠이 더 짙으면 짙을수록 빛의 가치는 더욱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말이다.

◈ 에서와 야곱, 그리고 가인과 아벨  !!

야곱과 에서 이야기는 이렇게 마감을 하면 되는데, 그러면 이제 교재 158페이지에 나오는 '아벨'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아벨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159페이지에 보면 무화과 나뭇잎 이야기가 나오고 말이다.

** 제사 드림이 그에게는 무화과 나뭇잎이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사시키겠다는 그의 시도가 곧 그에게는 자신의 죄와 수치를 가리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그의 위선과 교만을 벗겨낸다. 사실 가인은 거룩한 제사로 자신을 덮는 것이 아니라 죄로서 자신의 미움을 덮은 것이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여기 창세기 4장 7절에 나오는 '죄의 소원'은 물론 악마의 요구하는 바인데, 그런데 그것이 누구인고 하니 가인이기 때문에, 가인은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방금 말한 에서와 야곱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그것을 한번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일목요연하게 이 세상이 어떻게 편성되어 있는지, 그것을 살펴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하자면, 바둑과 같은 게임에도 룰이 있어서 죽고 사는 것이 있듯이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룰이 있는데, 그러면 "이 세상에서는 무엇이 죽은 것인가?" 라는 것인데, 누가 답변을 한번 해보세요.

◈ 이 세상에서는, 무엇이 죽은 것인가?

(누군가가 답변을 하니) 그렇지요.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지 못했으니까 죽었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나무 과실은 없는 것인데, 어떻게 먹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나는 죽었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나무의 과실이 이렇게 자기 옆에 있는데도 따먹지 않으면 그게 자기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데 아예 생명나무 과실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있으면 먹을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있어도 따먹지 못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육적인 방식을 동원해서는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병이어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 "어떻게 주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실 수가 있습니까?"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렇게 생명나무 과실이 있다고 했을 때, 과연 이 생명나무의 과실도 우리가 음식을 먹듯이, 즉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듯이 그렇게 먹을 수가 있는 방식이냐는 것이다.

◈ 과연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가?

그런 방식은 안 된다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방식 말고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 방식이 전부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사과가 있다. 그래서 먹었다" 라고 하는, 그것 말고 다른 방식은 우리에게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먹고 마시라" 라고 하시는데,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먹고 마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마치 돼지 바비큐를 해먹듯이 말이다. 물론 지금은 보이지도 않지만, 설령 옆에 있어서 보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도대체 문제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생명나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육의 방식을 가지고서 영의 세계로 올라가 보겠다고 하는, 바로 그러한 우리들의 해결방식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 니고데모의 경우에 !!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거듭나야 한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니고데모가 하는 말이 "어떻게 다시 내어날 수 있습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생각하는 하는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엄마의 자궁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인데, 니고데모는 그것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니고데모는 자기 힘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제 아무리 성경말씀을 이야기해주어도 우리 인간은 본인이 다 알아서 실시하는 쪽으로, 그런 방법으로 밖에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육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육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안 되는데, 그런데 주님은 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요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요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 아벨도, 자기 스스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는 없지만 !!

그러면 그게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에서와 야곱 이야기가 나오기 이전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라는 것이다. 물론 아벨에게도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는 방식은 없는데, 아벨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아벨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방법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아벨에게도 역시 방법은 없는데, 그런데 아벨로 하여금 구원되게 하는 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벨에게 찾아오셔서, 이 아벨로 하여금 가인과는 다른 차이나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차이점은, 자기가 차이가 나겠다고 노림수를 둔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은 바로 본인이 전혀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차이나는 인생을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아벨을 통해서 피가 있는 제사를 드리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아벨을 받는가? 아니면 아벨의 제물을 받는가? 물론 아벨의 제물을 받는다는 말이다. 

◈ 하나님께서, 피 있는 제물의 형상으로 !!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제물의 형상으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좀 어려운가요? 이게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면 나오는데, 즉 아벨이 바치는 그 제물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방식과 일치가 된다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온다는 말이다. 즉 "아벨은 그 믿음으로 영생을 받았다" 라는 것이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그러니 아벨이 영생을 받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바비큐를 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피가 있는 제물인데,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흠 없는 어린양,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흠이 없는 분의 피를 우리 자신이 받는 순간, 우리는 자기의 방식으로는 영생을 따먹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 그것이 자기 인생의 끝날 때까지 완전하게 확정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 나이가 90살이 되던 100살이 되던지 상관이 없고, 또한 그 어디를 가든지 간에, 서울에 강의를 하려고 가던 광주에 가던지 간에, 그 어떤 시점 그 어떤 공간이든지 간에 말이다. 미국, 혹은 영국에 이민을 가든지 간에 말이다. 그 어떤 것에도 구애를 받지 않고 그 사람은 이미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 영생을 먹는 방법은, 오직 '믿음' !!

무슨 말인고 하니, 영생을 먹는 방법은 믿음인데, 그 믿음은 바로 피 있는 제물을 통해서 주께서 나타나신다는 것을, 그것을 믿음으로서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를 해보면, 먼저 인간은 육인데, 그렇게 인간이 육이라는 말은, 인간에게서 육의 행세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이 주어지는데, 쉽게 말해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라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그 소리를 듣고서는 먹고 마시려고 육적으로 나서게 되는데, 즉 쟁반과 포크를 들고 설친다는 말이다.

◈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행위를 '대체'해주심으로서 !!

그런데 그렇게 하면 그건 행위가 되고 마니, 주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믿어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뭐요?" 라고 주님을 쳐다보게 되는데, 그렇게 쳐다보는 순간에 우리의 이러한 행위가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위를 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때, 그 행위가 우리 자신의 행위를 대체해서 믿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국에 이민을 가든지 나이가 80이 넘어도, 그렇게 그 사람이 영국에 이민을 가서 나름대로 사업을 해서 성공했던지, 혹은 80년 동안을 건강하게 살았다고 하는 것이, 그러한 이 영생과는 상관이 있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백수가 되던, 몸이 아프던, 그런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뜻대로 나이지리아 선교사가 ??

왜 그런가? 자기는 행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주님이 주시는 것을 믿고 의지하는 자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하는 행위를 자기가 믿으면 안 되는데, 즉 "저는 하나님의 뜻대로 나이지리아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라는 것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런 것을 장려하고 자꾸만 그런 것을 내어놓으라고 하니 교인들이 환장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말이야 하는데, 왜냐하면 영생과는 무관한 것이기에 말이다. 영생은 오직 예수님에 관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서는 오직 예수님에 관한 것만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행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면서 사람이 행하는 그런 행위를 내어놓으라고 하니, 그게 믿는 자의 표시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교인들이 할 수 없이 억지로 내어놓는데, 그러니 똥오줌이 다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하시는 행위가, 곧 믿음의 내용 !!

그러므로 '믿는다'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의 그 어떤 행위와도 전혀 상관이 없이, 그것과는 무관하게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행위가 자기가 믿어야 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즉 예수님께서 하시는 행위가 곧 믿음의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경우에는 부처를 믿는 게 아니라, 부처가 하나의 모델이라는 것이다. 즉 부처처럼 살면 해탈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믿는 것이 아니라 행함인데, 하지만 복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기독교는 이미 불교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복음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우리 인간들의 행함 자체가 전혀 영생을 얻는데 아무런 쓸모 짝이 없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기도, 전도, 봉사, 찬송 등등이 말이다. 그냥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처럼 믿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냥 믿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육적인 몸을 가지고 한 평생을 살아보게 되면, "내가 이번 주에는 행동에 실수를 너무 많이 했어. 예배시간에도 30분이나 늦게 오고, 이럴 수가 없어. 완전히 벌을 받았어. 그래서 감나무에서 떨어지는 거야" 라고 하게 되는데(ㅋㅋ), 그런 것이 자기도 모르게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예배시간에 그렇게 졸다보니, 아이가 아픈 거야" 라고 말이다.

◈ 과연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게 그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는 말이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하는가? 인간은 자기 행위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존재인데, 즉 자기 행위로 즐거워하고, 자기 행위로 감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정작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해야 하는, 즉 그 어떤 자기의 행위와도 상관이 없음을 인해서 즐거워하고 감사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꼭 우리 자신이 괜찮다고 여기는 것만을 골라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마치 최경주가 17번 홀에서 버디를 잡고서는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골프를 치지 않아서 모르는가?

◈ 피, 피, 피 !!

하지만 교재의 제목처럼 이 '피' 라는 것은 무엇인가? 피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어떤 행동이나 모델이 아니라, 그것을 믿으면 된다는 말이다. "피를 믿으면 됩니다" 라는 이 짧은 문장, 그 가운데는 우리의 몸 자체가 얼마나 허망하고 방해를 놓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평생토록 우리는 통 밥을 굴리고 온갖 것을 다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십자가의 피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해서, 그런 쪽으로 우리의 성질이 기울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때마다 주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분열을 일으키고 잘라내고 벗겨내는데, 즉 십자가의 피를 모독하는, 그런 우리의 모든 자기 행함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는 것을 말이다.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도록 인도해주신다는 것이다.

◈ 주님은, 우리의 행동과 상관없이 !!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유의할 것이 있는데, 우리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해서 스스로 반성하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반성하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우리 사정이 더 나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반성을 했다고 해서 믿음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야말로 갱상도 사나이인데, 그 얼마나 무뚝뚝한지 모르는데, 거기에 비해서 우리는 모두 서울 사람들이고 말이다(??). 마치 상점에서 일하는 일본 여자들처럼 "하이, 하이" 라고 하면서 친절을 베푸는데, 즉 "하이, 제가 이번 일을 회개합니다. 또 회개합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주님은 아예 듣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161페이지를 보자.

** 하나님에게 있어서, 인간의 '자기'란 더 이상 소용이 없는 개념이다. 자기를 내세우는 자는 거부를 당한다. 반면에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는 자는 약속의 취지에 부합된다.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피'가 중요한 것이다.

◈ 인간은, 피의 매개체이기에 !!

물론 인간의 자기가 등장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지만, 하지만 그렇게 자기가 등장을 하던, 불쑥 튀어나오든 간에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기를 내세우면, 그것은 거부를 당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내세우면 말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죽음을 기정사실화를 하고 인정하는 자는 어떠한가? 즉 자아의 죽음을 말이다. 자아의 죽음이라고 하니 말 자체가 어려운데, 아까 이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실컷 자기의 죽음을 이야기했는데, 벌써 다 까먹은 표정인데 말이다(ㅋㅋ).

조금 전에 이 죽음의 의미라는 것은 무엇을 따먹지 못했을 경우라고 했는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못했으면 그게 죽었다는 것이다. 축구를 하면서 전후반을 날아다녀도 그게 죽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나는 벌을 받았어(?)"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도 없는 내가 생명나무 대신에 다른 것을 들고 들어왔다" 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나무도 아닌 것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에게 심판하고 스스로 닦달을 낸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해도 안 된다는 말인가? 3년째 어기고 이번에 또 어겼어. 또 담배를 피우다니. 이렇게 해서 언제 인간이 되겠는가?" 라고 하면서 자기 혼자서 오두방정을 다 떤다는 것이다.

◈ 우리가 언제 제대로 법을 지킨 적이 있었는가?

사실 깨놓고 말해서 우리가 제대로 법을 지킨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물론 결심은 그 얼마나 잘하는지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가지 않는데, 그래서 살짝 또 다시 변개를 시켜서 어겨놓고는, 그것을 지킨 것으로 스스로 합리화를 시킨다고 하면서, 그것 때문에 또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스트레스는 무엇인가? 자기 합리화와 자기 정당성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인데, 쪼다(바보?)인 주제에 쪼다가 아닌 척을 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니, 그게 심적으로 얼마나 스트레스가 되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진리의 눈으로 보게 되면 어떠한가? 우리는 주께만 범죄했는데, 그러니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범죄를 했다고 닦달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보시기에 범죄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누구처럼 성질이 급하고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 심플 라이프 !!

부모를 잘 만나던 잘못 만나던, 착하던 착하지 않던 간에,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못했으면 그것은 죽은 것이란 말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하니 우리는 그냥 간편하고 깔끔하게 살면 되는데,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못했으면 죽은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발이지 호들갑을 떨지 말라는 것이다. "아, 내가 그때 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께서 받아주지 않으면 아무리 실수를 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해도 지옥에 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 '피'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그러니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피'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피의 매개체이니 말이다. 즉 인간은 피의 전달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이 보시기에 피가 중요한데, 그런데 이렇게 피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 인간들끼리는 전혀 모르고,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만 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다시 정리해보겠는데,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지시와 말씀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전적으로 오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것은 예수님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에게 주어졌는데,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오해를 한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 인간에게는 생명나무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까마득하게 자주 자주 잊혀지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생명나무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 주여, 오늘도 바르게 살게 하옵소서 ??

예를 들어서, 아침에 눈을 뜨고 기도하기를 "주여, 오늘도 바르게 살게 하옵소서"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바르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잊어버리는고 하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바른 분이고, 그 예수님의 공로와 예수님의 은혜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라고 하면서, 그런 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복과 저주를, 혹은 진리와 비진리를 누가 결정하는가? 하나님의 지시를 본인이 받았다고 여기니, 본인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이고, 반면에 뜻대로 되면 복을 받은 것이라고 자기 일방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 종결자, 예수 그리스도 !!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인데, 모든 사항은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와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서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가면 예수님으로서 예수님이 최종 종결자인데, 즉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가? 은혜를 주시고, 용서를 주신다는 것이다. 사랑을 주시고 말이다. 사실 우리에게 줘봐야 우리는 전혀 지키지 못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지키지 못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지키겠는가? 

◈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

그러므로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을 위하여 성령께서 탄식하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먼저 우리는 '빌 바를 모름'이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성령께서는 '탄식'인데, 이 두 가지를 종합하면 어떻게 되는가? 즉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이고, 그리고 탄식의 주인공은 성령이라는 말이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가 합쳐져서, 즉 아침에 우리가 눈을 떴을 때 그 두 가지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빌 바도 알지 못하는데, 성령께서는 탄식을 하면서 철딱서니가 없는 우리들을 위해서 오늘도 계속 은혜를 주시고 발걸음도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듯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는 것도 주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가끔은 나지 않는 사람도 역시 주께서 하시는 것이고 말이다(ㅋㅋ). 그렇게 모든 것이 자기 백성에게는 보호와 용서를 하시는, 바로 그런 쪽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 징계 -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바라보라' !!

하지만 우리가 그런 영적인 안목을 모를 때는 어떻게 되는가? 징계가 떨어지는데, 이렇게 징계가 주어진다는 것은 바르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그 시선을 다시 한번 돌리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바라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의 행함을 바라보게 되면 어떠한가? 자기가 '잘했다' 싶으면 잘했다고 하면서 마구 까불다가, 하지만 또 '못했다' 라고 여기면 그만 기가 팍 죽어서 절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수시로 "좋았다, 나빴다" 라고 하면서, 무슨 조울증 환자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하루에도 여러 수십 번을 왔다갔다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조절을 통해서 주께서는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라고, 그래서 이 세상에는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이렇게 허다하게 널려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 정도로 이미 우리는 이 세상을 이겼다는 것이다. 

◈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감사의 이유가 !!

사실 우리가 자기 뜻대로 되고자 하는 것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인데, 하지만 아무도 몰라주어도 주께서만 알아준다고 하면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서, 그러한 본성이 곧 죄성인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내가 주께만 범죄했사오니" 라고 하는 본성을 가지고, "오늘도 주께서는 어떤 은혜를 주실까?" 라고 하는, 즉 "제 아무리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차원에서 감사해야 하는가?" 라고 하는, 그러한 것이 우리가 평소에 하던 일 가운데서, 그렇게 빠지고 숨어있던, 그렇게 외면했던 감사거리와 고마움을 찾아가는 나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렇게 다시 말씀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내일도 없고, 아니 내일을 생각할 필요조차도 없는데, 또한 지나간 잘잘못을 다시 끄집어낼 필요도 없는데, 그러니 그냥 이 몸 이대로, 이 인생 이대로 늘 바치기를 소원합니다. 다만 주께서 우리들을 강도처럼 여기고 창녀처럼 여겨서 용서하시고 받아주셔서, 오직 주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6,12 새벽 1시에 마침.

                                                    오늘도 주님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시니, 탱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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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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