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49강 피의 구체화

피/피 2012. 8. 29. 10:25

피49강 피의 구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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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49강 피의 구체화

[11 대구강의 11] - [피 49] - 피의 구체화
                                                                                
                                                   11,06,2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63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피는 약속의 실체를 밖으로 보여주는 유일한 표현방식이다.

◈ 과연, 이것이 그런가 하여 !!

우리가 성경말씀을 대할 때는 "나도 이제는 좀 안다" 라고 하지 말고, 항상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의심한다" 라는 의미인데, 즉 모든 것을 의심하고 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과연 그런가 하여" 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즉 성경말씀에 대해서 자기가 많이 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볼 때마다 10년을 보았으면 그 다음날에, 또한 20년을 보았으면 그 다음날에, 그런 식으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의심해보자는 말이다.

◈ 제가 무엇을 행하게 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성경에서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면, 이것은 자연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고 하니, "어떤 것을 행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가?" 라는 선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누구든지 교회에 처음 나오게 되면 '행함'에 대해서, 즉 "제가 무엇을 행하게 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 마음바탕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데, 물론 그런 마음가짐으로서 성경말씀을 보게 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성경이 시키는 대로 무엇을 행하려고 하면 막상 거기에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그만 '피'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피를 흘린다고 해서, 그런 자기가 피를 흘리는 행함을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피는 그냥 우리의 피가 아니고, 그 앞에 무엇이 붙는가? 예수님의 피인데,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피를 믿어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성경구절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가 무엇을 하셨다" 라는 식인데, 즉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말이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께서 뭔가 일방적으로 피를 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그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라고, 그렇게 한 수 배우려고 교회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그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피를 흘리셨고, 그것이 곧 구원의 약속이다" 라고 하니,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유명무실해진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행함이 전혀 무의미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이 창세기부터 "무엇을 하라" 라고 나오면, 우리는 "오늘은 48개, 내일은 77개, 그 다음은..." 라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행해서 실적을 올리려고, 그것을 그래프로도 그려보고 말이다. 우리는 그런 의도가 있는데, 하지만 성경말씀은 그런 것을 허용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불교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무엇을 하라" 라는 것에 관한 지침서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예수님의 피로 다했다" 라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무엇이 난처하게 되는고 하니,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고 하는 것이 말이다. 지금부터 중요하니 잘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 이순신 장군이 피를 흘려서 죽었다 !!

예를 들어서, "이순신 장군이 피를 흘려서 죽었다" 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우리가 어떤 갭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어떤 사람이 "이순신 장군이 피를 흘려서 죽었기에,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선진국이 되었다" 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무엇이 탈락되어야 하는가? 사도세자도 뒤주에서 피를 흘려서 죽었는데 말이다. 굶어서 죽었는가? 물론 우리가 선진국도 아니지만, 일단 '쮜20'에 가입을 했다고 하니 그렇게 봐주면 말이다.

아무튼 이순신 장군이 피를 흘리고 죽어서 우리가 선진국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 뒤에 영조가 실시한 탕평책이나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같은 것은 모두 삭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의 가슴에 총을 쏜 것도 오늘날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것에 포함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이순신 장군이 죽어서 흘린 피의 노선과만 연결이 되어야지, 그게 아니라 안중근이 총을 쏜 것이 들어오게 되면, 그것은 이순신 장군의 피에다가 알파, 베타, 감마 등등, 그렇게 자꾸만 다른 것을 더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순신 장군의 피만이' 라는 것이 거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히브리서에도 나오듯이 "제물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 라고 하면, 그런 논리의 구조에 무엇이 빠져야 하는가? 제물의 피가 어떤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고 하면, 거기에는 "그 용서를 사람이 헌금했다" 라는 것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당연히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는 노선에서 말이다.

◈ 피의 효과 - '전혀 믿을 만한 것이 없구나' !!

그렇게 나중에 용서받은 자가 찬양했다고 하는 것들을 다 빼게 되면, 즉 인간의 행함 자체가 모두 다 빠지게 되면, 우리 인간은 "내가 무엇을 행해서 구원을 받을 것인가?" 라는 것에 긴장하면서 신경을 쓰고 있는데, 그런데 그런 것을 다 빼게 되면 결국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행할 것을 가지고 교회에 나왔는데, 그렇게 행할 것을 모두 빼게 되면 "아하, 내가 행할 것이 없구나"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아하, 전혀 믿을 만한 것이 없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피의 효과라는 것이다.

만약에 성경에서 우리를 보고 피를 흘리라고 하면 우리는 피를 흘리는데, 천국에 보내준다는데 무슨 짓을 못하겠느냐는 말이다. 즉 "순교하면 천국에 보내준다" 라고 하면, 우리는 순교할 각오까지도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순교를 해도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 가는 것이지 말이다.

사람이 제 아무리 무엇을 하더라도 죽도록 하지는 않는데, 그런데 죽도록 하는 척을 하더라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면, 그러면 "아예 예수님을 위해서 죽어버릴까요?" 라고 하는데, 그렇게 예수님을 위해서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하면 죽을 용의도 있는데, 하지만 예수님을 위해서 죽어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위해서 죽어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행함을 모두 다 빼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 남은 것은 "당체(도대체?), 전혀 믿을 것이 없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인간은 믿을 만한 것을 믿겠다고 하는데, 그런데 행함을 다 거부하니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믿을 것을 거부해서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다시 시작하면 !!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다시금 하겠는데,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항상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성경을 안다고 여기지 말고 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의심하고 보자는 것인데, 즉 "내가 20년을 믿었는데, 이것도 마귀가 장난친 것이 아닌가?" 라고 말이다. "과연 그런가 하여?" 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렇게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내가 행할 것은 무엇인가?" 라고, 쉽게 말해서 "소는 누가 키우는가?" 라는 것인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내가 무엇을 행해서 천국에 갈 것인가?" 라는 문제인데, 그것으로 성경을 펼치는데, 그런데 성경말씀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예수님의 피로 천국에 간다" 라고 하니, "내가 행할 것은 무엇인가?" 라고 시작한 그 모든 출발점이 그만 거부를 당한다는 것이다.

◈ 목사의 설교 - '돈 내라. 얼쑤' !!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믿음을 선물로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인데, 그런 자들에게는 당체 성경에는 믿을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를 해도 성경말씀은 그냥 겉저리로 여겨버리고, 계속해서 인간의 행함만 첫 시간부터 마지막 시간까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이 이것을 알아야 하는데, 목사들이 설교를 하면서, 처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라고 시작을 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무엇이 포함되어있는고 하니, "돈 내라"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말을 안 하더라도, 그것이 생략되어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라고 하면, 그 뒤에 쉼표가 있는데, 그 쉼표의 의미가 무엇인가? "돈 내라"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제가 이것을 내용으로 해서 책으로 낼 것인데, 한국의 모든 큰 교회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작은 교회도 그렇고 말이다. 그것을 일종의 추임새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얼쑤' 라는 것이다. '을수'가 아니고 말이다(ㅋㅋ).

◈ 개혁주의 신학 - '성경에는 행할 것이 없어' !!

그러니 교인들은 그 추임새에 대해서 '아멘' 이라고 하지 말고, "아하, 돈을 내라는 구나" 라고 알아들으면 된다는 것이다. 목사가 설교를 30분을 하든 1시간을 하든 결론은 언제나 "돈 내라" 라는 것이다. 이미 서론 부분에서 결론을 다 추임새로 넣고 간 것이기에, 즉 서론에서 목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라고 하면,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돈을 내라고 하셨구나" 라고 알아들으면 된다는 말이다. 즉 "돈 내라. 얼쑤!" 라는 것이다. 

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이 그렇게 되니, 목사가 아무리 성경을 연구해도 결국 성경에서 행할 것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행할 것이 전혀 없으니, 즉 믿음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행할 것이 없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볼 가치조차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무엇인가? 행할 것을 가지고 천국에 보내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고 오늘날 교회의 모습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듣는 우리들이 항상 믿음으로 출발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무엇을 하란 말입니까? 무엇을 행해야 행복할 수 있습니까?" 라고, 그렇게 행위로 출발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성경말씀을 보고 강의를 하더라도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가서 "예수님 덕분에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되는데, 그런데 그 진리가 자꾸만 무엇으로 변하는고 하니까, "'예수님 덕분에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내가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다" 라고, 또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자기 자신의 행함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도 예수님께서 따라간다는 것을 모르고, 교회에서 "예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가 믿었던 그 믿음을 가지고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따라간다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사실은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모든 것이, 마치 장마철에 모든 영역에 걸쳐서 골고루 비가 내리는 것처럼 그렇게 은혜의 비가 내리는 것을 모르고, 자기 믿음을 따로 챙긴다는 말이다.

◈ 왜 '창세 전'의 예정인가?

그러니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창세 이전의 태초(?)로 돌려놓았겠느냐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에 나오듯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말이다. 아예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렇게 처음부터 예정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계속해서 따라다니신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익히 다 아신다는 말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

그렇게 창세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면 이해가 되는데,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 라고 하는 의미를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타락되었다가 구원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범죄하고, 타락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 스스로는 천국에 가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에 주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건지시는데, 바로 그러한 일들이 우리에게는 하나의 시나리오처럼, 주마등처럼, 바로 그렇게 우리를 덮치게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사진을 현상할 때 사용하는 인화지의 경우에 처음에는 그냥 백지인데, 그런데 사진을 찍어서 현상을 하게 되면 이미지, 즉 영상이 나오지만 말이다. 영화의 경우에도, 영상이 나오니까 재미있게 보지만, 철이 없는 아이들은 그게 진짜인 줄 알지만,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냥 흰 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옛날에 비가 새는 대구의 칠성극장에서 영화를 보면 그런 흰 천만 나타나고 했다는 말이다(ㅋㅋ). 

◈ 너는 어둠이야 !!

그렇게 우리는 일종의 백지이고 흰 천에 불과한 존재인데, 바로 거기에 죄가 들어와서 시커먼 페인트로 한 꺼풀을 칠하게 되는데, 그러면 주께서 뭐라고 하는가? "너는 어둠이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둠이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즉 우리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해서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그런데 그만 졸지에 어둠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도 없이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어둠이 되고 난 다음에 빛을 비추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둠임을 깨닫게 되고, 오직 빛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둠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또한 빛을 주신 분도 하나님인데, 그게 이사야 45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즉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의 스크린처럼 사용을 하셔서, 어둠도 비추게 하시고 또한 빛도 비추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시면서 우리 속에서 창세 이전에 준비된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드러내신다는 말이다.

◈ 우리는 '꼬록, 꼬록' 소리만 !!

예를 들어서, 오늘 강의를 마치고 점심을 어떻게 할 것인고 하니, 이것을 미리 아시고 황 집사님께서 밥을 다 해놓으셨다는 것이다. 즉 점심이 이미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가? 그냥 '꼬록, 꼬록' 소리만 내면 된다는 것이다. 즉 "배고프다, 밥을 먹고 싶다, 밥을 준비가 되어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준비된 밥을 위해서 배가 고파야만 한다는 것이다(ㅋㅋ). 아무튼 경로가 그렇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거기에 물들지 못하도록 지금도 마귀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즉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같은 것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러니 매일같이 "니 인생은 니가 사는 거야. 그러니 니 행함이 없으면 니 인생은 개판이야" 라고, 그렇게 협박과 공갈을 한다는 것이다.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 나는 니가 지난 여름날에 한 일을 다 안다 ??

어제 오후설교시간에도 그런 말을 했는데, 마귀는 "나는 니가 지난 여름날에 한 일을 다 안다" 라는 식으로 협박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고소하고 정죄를 하는데, 즉 "이것을 폭로하면 너는 이 사회에서 매장되고, 너는 인간도 아니야. 그러니 너는 부지런히 선하게 살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한다" 라고 말이다. 바로 그런 악마의 전화가 우리 내면에서 계속해서 올라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무슨 '칙' 하는 소리가 들리던데, 아마 주께서 전화를 거는 마귀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렸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그때 주님은 뭐라고 하셨겠는가? "내가 저 놈을 위해서 나의 피를 흘렸는데, 그러한 나의 피가 묻어있는 저 놈을 니가 뭔데 건드려? 내가 저 놈의 수치를 모두 다 없애버렸는데, 그런데 니가 새삼스럽게 무슨 수치를 운운하고 있어"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수치는 수치 축에 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 벌, 벌, 벌 !!

그래도 우리는 한 평생을 떨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즉 "어휴, 이 놈의 한 평생을 어떻게 살아갈까?" 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죽기가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이러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고, 천하의 카다피도 예외가 될 수 없는데, 그 누구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스님이든 신부든 간에 말이다. 모두가 다 벌벌 떤다는 것이다.

물론 제가 얼마 전에 떨지 않는 약간의 사람들을 보기는 보았는데, 서울의 미아리에서 데모하는 여성들인데, 그냥 얼굴을 보여주면서 하던지 않고 얼굴을 가리고서 하던데 말이다. 그녀들도 뭔가 떨림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말이다(ㅋㅋ).

◈ 피 - '하나님의 죽음으로 인간을 보겠다' !!

아무튼 성경에서 '피'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이 피로서 인간을 보겠다"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 "나, 하나님의 죽음으로 인간을 보겠다" 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서 인간들은 무엇인가? "죽지 않은 하나님을 보겠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서로 쏘는 레이저빔의 각도가 전혀 달라서 전혀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은 "하나님이 살아있어야 나도 삽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잘 보여주는데, 그가 뭐라고 했는가? "당신이 살아있던지 해야만 우리를 구해줄 것이 아닌가?" 라고 했는데, 십자가 밑에 있는 무리들도 역시 그런 말을 했고 말이다. 사실은 그게 이성적으로도 맞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서로 다같이 죽어 가는 입장에서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 당신부터 먼저 용감하게 십자가에서 '붕'하고 뛰어내려서 마치 삼손처럼 로마군인들을 다 박살내든지 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디, 감히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까부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마징가제트가 출동하듯이 천사들을 동원시켜서 모두 다 조지고 말이다.

(마 27: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마 27: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3)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마 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 암행어사, 출두야 ??

그렇게 소위 "암행어사, 출두야!" 라는 것이 될 때, 그렇게 해야 살아날 수가 있는데, 마치 춘향이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의 요구사항인데,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구원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일반 교인들은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구원을 한다고 하는데, 즉 기적을 주셔서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무엇인가? 그런 식의 정치적이고 폭력이 가미된 방법으로, 즉 "암행어사, 출두야!" 라는 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 오직 '십자가' 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는, 도대체 무슨 그런 요상한 방법이 다 있느냐는 말이다. 즉 "도대체 십자가를 가지고 어쩌라고? 아하, 십자가를 걸어놓고 큰 교회를 만들라고 하는구나"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큰 교회가 모두 불타버려도 오직 십자가이다" 라는 것인데, 즉 자기 몸이 아파도 십자가, 집안에 우환이 있어도 역시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나는 니가 아무리 재산이 많든 적든 간에 오직 십자가로서 너를 보겠다" 라고 하는 주님의 일관된 뜻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인됨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 앞에서 말이다.

◈ 지금은 이 십자가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지겠는데, 즉 "이 십자가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라는 것이다. 지금 21세기인 2011년 6월 27일인 오늘 이 순간에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 십자가는 성도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도를 통해서 말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십자가는 어디에서 나타났는가? 12제들에게 나타났는데, 그 12제자를 예수님은 놀랍게도 이스라엘로 보셨는데, 그것은 이 12제자만 이스라엘이 아니고, "12제자×12제자× 1000"을 하게 되면, 그것을 숫자로 표시하게 되면 '144,000'명이 된다는 것이다. 즉 12의 연속적인 1,000번으로서, 온 이스라엘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12제자와의 연결고리가 무엇인가? 즉 예수님과 12제자들 사이에 무엇으로 연결이 되어야만, 제자들이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무엇이 임해야 하는가? 오직 성령이 임해야 하는데, 그러니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제자들만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의 말을 들은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다.

◈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다시 말해서, 먼저 예수님이 머릿돌이 되시고, 그리고 사도의 터 위에서 성경말씀이 확정되고, 그리고 그 위에서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결국 교회라고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즉 성령이 교류하는 전(殿)이 된다는 것이다. 그게 에베소서 2장의 말씀인데, 즉 교회는 오직 성령으로만 연결연결이 된다는 말이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어리석은 십자가 !!

(어서 오세요)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했는고 하니, 먼저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했고, 그 피가 지금은 어떻게 나타나는지, 거기까지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전혀 모르게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지혜로서는 십자가가 어리석게 보이도록 되어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이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으로 이야기할 수밖에는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십자가를 두고 "영구 없다. 띠리리 리리리" 라는 식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는 말은 아니고 말이다(ㅋㅋ).

소위 그들에게 있어서 지혜롭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철학인데,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지혜로운 것이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말이다. 바로 기적인데, 그러니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기 때문에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고, 그리고 헬라인들은 철학을 해서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철학과 그들의 기적이 '아니오' 라고 한다면, 그들은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힌트가 되는데, 즉 성령께서 일을 할 때는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이 세상이 원하는 모든 기적과 모든 철학적인 지혜가 어리석은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하시는데, 바로 그 안에 숨어 계시는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철학의 종결자는 '행함' !!

그러니 이 세상의 철학을 모두 살펴보게 되면, 동양철학이든 서양철학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 철학의 기본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행함' 이라는 것인데, 그 행함의 결과는 무엇인고 하니, 즉 "내가 무엇을 행해야 천국에 갈 수 있는가?" 라는 것이란 말이다. 바로 여기에 모든 초점이 다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철학과 이런 기적들, 즉 "내가 이렇게 행했더니만 이런 기적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유대인들이 원했던 것이고 말이다.

◈ 유대인들의 경우에 !!

그런 유대인들의 사상이 무엇인고 하니, 간단한데 말이다. 여기에 이렇게 땅이 있고 또 하늘이 있다고 하면, 하늘에서 기적을 베풀어주시면 그런 기적을 받는 그 기적의 현장에 있는 땅의 지점이 곧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주장에 전혀 하자가 없는데, 완벽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기적이 임하는 것은, 즉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지고, 시내산에서 모세가 계명을 받는 것, 그리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기적들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아사 왕 때는 찬양으로 적들을 물리치고 하는, 그런 많은 기적들이 성경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수많은 기적들을 역사적으로 줄줄이 엮게 되면, 마치 꼬지에 오뎅을 줄줄이 엮듯이 말이다. 그렇게 하면,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일종의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이런 기적들 말고 남아있는 것은 현재의 유대인들을 구원할 새로운 기적들인데, 그러한 것을 그들은 또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날마다 새로운 기적을 기다리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활동하실 때 유대인들이 뭐라고 했는가? "우리는 어떤 기적을 기다려야 됩니까?" 라고 했는데, 즉 "당신이 진짜 메시야인지 아닌지는 우리에게 당신이 어떤 기적을 행하고 있는지, 그것을 통해서 당신 스스로 증명해보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는데 말이다.

◈ 요나의 기적 !!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슨 기적을 제시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요나의 기적인데, 즉 예수님께서는 "이 놈들아, 기적은 없다" 라고 하지를 않고, 그들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 그들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해버리신다는 것이다.

(마 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의 기적이라고 했으니 그 핵심은 무엇인고 하니, 요나가 여러 가지 일들을 했는데 말이다. 심청이 처럼 치마를 둘러싸고 바닷속에 뛰어들어서 물이 잔잔해지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그런 기적도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나의 기적은 반드시 십자가와 연결해서 해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와 연계해보면, 요나의 경우에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바로 그 기적이란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여기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기적을 찾는 너희들이 죽어야돼" 라는 기적을 이야기하셨다는 것이다. 더 간단하게 말해서 "주여, 어떤 기적을 받아야만 천국에 갑니까?" 라고 하면, "에라이, 죽어라" 라는 것이다. 즉 "그런 것을 요구하는 너희들이 곧 죽어야 하는 놈들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행할 수 있는 능력 밖의 문제라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행해서 구원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 행함 자체를 부정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차라리 순교를 하라고 하면 힘이 들어도 이해가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순교를 할까요?" 라고 하는 인간도 거부를 당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되는가? 그것도 역시 아닌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다음과 같이 하면 되는데, 즉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저주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은 그냥 속수무책의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은 속수무책(束手無策) !!

그래서 오늘강의의 결론이 벌써 나왔는데, 즉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을 사도들이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의 경우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들과의 동일한 심정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은 속수무책이라는 말이다. 매일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말이다.

◈ 성령은 덮쳐서 !!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질문하기를 "그렇게 목사님의 이론대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10년 전에는 은혜를 주시고 오늘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는데, 즉 매일같이 도와주셔야 하는데, 그런데 10년 전에는 은혜를 주셔서 구원을 받았는데, 그런데 지금은 주지 않는다면 지옥에 가야하는지, 바로 그런 뜻으로 질문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질문에 대한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10년 전에 은혜를 받았다고 간증하는 그 기준을 도대체 누가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즉 자기가 10년 전에 은혜를 받아서 완전히 구원을 받았다고 여기는, 그러한 기준을 말이다.

그래서 "과연 본인이 그렇게 느껴서 그러한지, 아니면 진짜로 성령이 오셔서 그러합니까?" 라고, 그 점에 대해서 물어보면, 대부분이 본인이 그렇게 느꼈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때 진짜 성령이 오셨다고 하면, 방금 질문한, 즉 "지금 은혜를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라는, 그런 소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찔끔찔끔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덮치니 말이다.

◈ 2초 동안의 은혜가 !!

제가 강의를 하면서 종종 하는 말 가운데 "하루에 2초나 3초 동안 은혜를 받습니다" 라고 하니, 어떤 사람은 그것을 오해해서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께서 찔끔찔끔 주시는 것으로 여기는데, 덮치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덮치는 것을 말이다.

예를 들어서,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고 하면,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가 24시간 동안이나 그렇게 사랑스럽겠는가? 자기는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는데, 생일이라고 하면서 갑자기 금은방으로 데리고 가서 반지를 하나 선물해주면 그때 약 5분을 간다는 것이다. "저 양반이 나를 아직도 사랑하는구나" 라고 말이다.

어떤 사람은 아침에 눈을 뜨면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고 하는데, 남편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얼마 없다는 것이다. 대구시 전체를 통 털어서도 말이다. 물론 여기 지묘동에는 한 사람 정도가 있고 말이다(ㅋㅋ). 아침에 세수하기도 바쁜데, 언제 "여보, 사랑해" 라고 할 시간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2초의 은혜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한계를 두고서 말하는 것이지, 성령을 찔끔찔끔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덮치게 되면, 그게 2초든 3초든 간에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성령이 덮친다고 해서 24시간 동안, 즉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시작해서 하루종일 "주여!" 라고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잠을 잘 때의 꿈속은 어떠한가? 꿈속에서도 "주여!" 라고 하는가? 그야말로 꿈속에서는 온갖 짓을 다해놓고는 아침에 일어나서 큐티를 한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꼴깝을 떨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참 바쁘지 싶은데, 꿈속의 죄도 다 회개를 해야하니 말이다.

◈ 다시, 교재 163페이지를 !!

교재 163페이지를 다시 하겠는데, 피가 현실 속에 나타날 때는 성도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런데 그 성도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을 받은 사도가 그 롤모델이 될 수 있는데, 즉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성령의 나타남으로 받을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사도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성도들도 역시 고백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럴 때 그게 아닌 자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너희들은 사도들의 것을 베꼈지" 라고 하는데, 사실은 자기들이 베껴놓고 그렇게 '척'을 한다는 말이다. 믿지 않으면서 믿는 척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러나 정말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은, 즉 성령을 받은 자라고 하면, 결단코 자기 행함에 의한 의를 주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있는데, 혹시 순간적으로 주장하더라도 다시 회개하게 된다는 말이다. 즉 그게 잘못임을 인정하게 된다는 말이다.

◈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 !!

아무튼 예수님이 못 박힌 이 세상이 그대로 유지가 되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누가 욕을 들어먹겠는가? 예수님과 똑같은, 그러한 고백을 하는, 즉 성령을 받은 자들이 욕을 먹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17절을 살펴보자.

(계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여기에 보면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주신 것이 무엇인가? 그게 바로 어린양의 피인데, 즉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계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으로 다 이루었다는 계명을 가진 자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공격했던 바로 그 악마의 세력이 지금도 예수님의 남은 자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자진해서 버림을 !!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현실감을 좀 가져야 하는데, 물론 지금 저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목이 물이지만 말이다(ㅋㅋ). 목이 말라서 말이다. 그게 교재 163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인데, 즉 "예수님은 자진해서 버림을 받으신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163페이지를 한번 읽어보자.

** 피는 약속의 실체를 밖으로 보여주는 유일한 표현 방식이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자식이 된다. 이삭의 처지에서 보면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는 자로 작용하는 것이다. 자기를 죽이는 자를 살려내는 것, 도리에 '의롭다'하고 살려내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 제물이 되는 수밖에는 없다.

** 자신을 버린 자를 위하여 버림받은 자신이 친히 대속의 제물이 되어 살려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자신이 사는데 있어 방해가 된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밀치고 제거해버리는 인간들로부터 배척을 받는 대상으로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워두셨다. 그래서 여지없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싫어버린 바 되는 위치에 등장하신다. 자진해서 버림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164페이지에 들어가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이 신약시대뿐만이 아니라, 소급을 해서 구약시대에 있었던 모든 핍박을 받은 자들도 역시 장차 오실 예수님이 당해야만 하는 그 고난을 미리 앞서서 당했다는 것이다. 

◈ 욥은 자기 신앙관리를 하지 않았다 !!

그들 중에서 물론 욥도 포함이 되어있는데, 인천 녹매교회의 구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욥은 자기 신앙관리를 하지 않았다" 라고 말이다. 아주 훌륭한 표현인데(ㅋㅋ),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관리했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들의 행함으로 말이다. 즉 그들은 관리하는 행함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한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데, 즉 세리와 바리새인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리는 자기 신앙을 관리하지 않은데, 그래서 "주여, 저는 무엇을 해도 죄인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뭐라고 하는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십일조도 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를 관리하는 행함을 내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눅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 다시, '예수님의 피가 누구를 통해서 증거되는가?'

그렇다고 하면, 이제부터 조금 어려운 것을 해보자는 것이다. 어려운 것을 하기 전에 다시 한번 반복하면, 예수님의 피가 누구를 통해서 증거된다고 했는가? 성도인데, 그러면 성도는 무엇을 받았는가? 성령을 받았는데, 물론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받아서 십자가를 지셨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것에 대해서 공격한다는 것은 곧 성령을 공격하는 것이고, 그러니 그렇게 공격하는 것은 곧 악령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이 어디에 나타납니까?" 라고 하는 말과, "악령이 어디에 나타납니까?" 라는 말은 결국 동일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악령이 보이고, 복음을 빼버리게 되면 서로 동창생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집을 계약하는데 무슨 복음 이야기가 필요하냐는 것이다. (필요한데?)

◈ 여러분, 영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

지난 수요예배시간에 영어를 가르치는 부산의 장근식 목사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학원강사가 학원에서 영어만 강의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만 본인이 심숭샘숭해서(?) 불쑥 무슨 말을 했는고 하니, "애들아, 영어를 배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천국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그런 이상한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 학부형에게서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제가 강사님이 목사님인 줄을 알기는 알지만, 그래도 영어만 가르치세요" 라고, 아주 따끔한 충고를 받았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므로 악령이라는 것은, 이렇게 복음만 전하게 되면 나타나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당한 그 미움을 함께 받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에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는, 즉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니, 복이 있도다" 라는 말씀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러니 평소에는 좋은 관계에 있을 때는 복음을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시장에 가서 괜히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줌마,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리고 이 시금치는 얼마예요?" 라고, 그렇게 했다가는, 그 장사하는 아줌마가 기분이 나빠서 시금치도 다른 사람에게보다 비싸게 판다는 것이다. 즉 2,000원 짜리를 그만 5,000원에 팔고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개나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지면 안 되는데, 괜히 절의 중들이 입는 그런 진회색 몸배를 입은 아줌마에게 그런 소리를 하지 말고, 차라리 집에 있는 개에게 하라는 것이다. 즉 "뽀삐, 뽀삐야, 예수님이 구주란다" 라고 하면 개가 뭐라고 하겠는가? "와앙!" 하고 달려든다는 것이다.

◈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인간도 아냐 !!

참 이런 것이 심한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인간도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이고, 자식이고, 며느리이고 간에,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소위 '삼강오륜' 이라고 해서, 인간에게서 5개의 가지가 삐쳐 나오는데, 즉 부자유친, 군신유의 등등이 말이다. 공자는 그것이 전부라고 했는데, 즉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5가지의 관계가 있는데, 그것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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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오륜 [三綱五倫] -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며 이것은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오륜은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한다. 이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5가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親愛)에 있으며,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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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지난 지난 주일의 설교였는데, 물론 여러분들이 지금은 다 잊었겠지만 말이다. 즉 아들이 아버지와 싸우고, 딸이 엄마와 싸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예수님의 세례 때문인데, 즉 성령세례를 받게 되니, 예수님이 당했던 그 심정이 그대로 성도의 일상 속에서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 성령을 어떻게 행함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제가 그것을 뭐라고 설교를 했는고 하니, "그때 말하는 게 당신이 아니라, 당신 속에 계시는 성령이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행함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이냐는 것이다. 즉 "목사님, 어떻게 행해야만 천국에 갑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당신이 말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 속에 계시는 성령입니다" 라는 것을,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행함으로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흉내내면 되는가? 자기가 "밥을 달라" 라고 해놓고, 그것을 성령이 하셨다고 흉내를 내면 되느냐는 말이다.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말씀 전체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어떻게 흉내를 내거나 행함이 동원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예수님의 피 사건만이 드러나고 연결될 뿐이라는 것이다.

◈ 또 다시 '어게인' !!

오늘 강의가 어려워서 또 다시 되풀이하겠는데, 늦게 오신 분도 계시고 말이다. 이순신 장군이 죽을 때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때의 그 피가 2011년 오늘날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들었다고, 만약에 그런 논리를 누가 펼친다고 하면, 거기에서 무엇은 빠져야 된다고 했는가?

이순신 장군 이후에 나타나는, 영정조 시대, 대원군 시대, 이승만 시대, 그리고 박정희 시대 등의 모든 노력들은 이 노선에 들어가면 된다는 말인가? 안 된다는 말인가?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들어가서 이순신 장군의 피와 섞이면 안 되니, 그러한 것들은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천국에 보낸다" 라고 했을 때, 즉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었다" 라고 하려고 하면 무엇은 빠져야 하는가? "예수님은 피를 믿고 내가 무엇을 했다" 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가 다 죄송하지만 사라져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을 다 빼버린다고 하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소리가 무엇인가? "그러면 교회는 누가 키울 것인가?" 라고 하는데, 그것을 알고 목사들이 입만 열면 하는 소리가 바로 "돈을 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마치 추임새처럼 붙인다는 말이다. 

◈ 십자가 사건도 역시 되풀이되지 않아 !!

하지만 주님이 일으키신 홍해사건과 같은 것은, 물론 지금은 홍해에 가봐야 바닷물만이 가득하지만 말이다. 즉 홍해사건은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단강 사건도 되풀이되지 않고 말이다. 그러면 십자가 사건은 되풀이가 되는가? 안 되는가? 참 어려운데, 십자가 사건도 역시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풀이되지 않는데, 하지만 역사에 구애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이다. 되풀이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되풀이' 라고 해석하게 되면 오해가 생기게 되는데, 즉 "주님, 제가 죄를 지었으니 또 되풀이해주세요"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결코 자기 역사에 말려들지 않는데 말이다.

그런데 "십자가는 되풀이된다" 라는 소리를 듣고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주께서 되풀이해서 알아서 해주시겠지" 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가 짓는 죄를 정당화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진짜 그것이 바로 누구의 말처럼 "막 산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십자가를 이용하려고 할 때는 진짜 막 사는 인생이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막가파 인생인데, 그냥 지옥으로 직행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제가 '행함'과 관련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다시 말하겠는데, 아까 "악령이 어디 있는가?"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성령이 어디 있는가?" 라는 것과 같은 지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서 악마의 본색이 드러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지옥을 그리워하는 인간 !!

여러분은 혹시 지옥이 보고싶지 않은지 모르겠는데, 지옥에는 갈 수 없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지옥을 볼 수가 있는데, 지금부터 제가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옥' 이라고 하면 인식이 무엇인고 하니, '지옥의 하나님' 이란 책의 표지도 그렇지만 말이다. 표지가 무슨 선데이서울과 같은 잡지처럼 이상하게 나왔는데 말이다(ㅋㅋ).

지옥은 그렇게 음침하고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상하고도 성스럽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옥을 보고 싶으면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에 참석해보면 되는데, 사제가 입는 모자부터 고깔형태로 되어서 금으로 장식을 해놓았는데, 옷도 얼마나 무거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긴 도포를 입고서, 마치 자동으로 길을 청소하는 청소차처럼, 그렇게 걸어가면서 교회당을 청소한다는 것이다. 그 길다란 옷으로 끌고 가면서 말이다.

천주교는 여기에 비교할 바가 못 되는데, 그게 얼마나 화려하고 성스러운지 말이다. 고깔모자에게는 십자가를 붙여놓았는데, 물론 교황이 쓰는 모자도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한 모자를 쓰고, 긴 도포를 걸치고, 몸을 흔들면서 천천히 걸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분위기가 얼마나 성스럽고 고상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 곧 행함의 극치인데, 그래서 지금 한국의 큰 교회가 다들 이런 식으로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교회는 예배시간이 얼마나 번잡스러운지 모르는데, 밥을 한다고 여기 저기서 둑닥둑닥거리고, 또한 왔다갔다한다는 말이다. 어지간한 목사 같으면 아마 설교를 제대로 못하지 싶은데, 설교를 하다가 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버린다는 것이다(ㅋㅋ).

아무튼 이러한 성스러운 지옥, 바로 그것을 우리 인간이 그리워했다는 것이다. 보고싶어했고 말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게 되면 그것이 황폐해지고, 그렇게 아름다웠던 예배당에 거미줄만 가득하고, 또한 습기가 차서 쾌쾌한 곰팡이 냄새만 난다는 것이다.

◈ 인간의 내부모습은?

제가 지난번에 유럽에 여행을 가서 옛날 성당을 들러보았는데, 돈이 많이 들어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런 몰라도, 바로 그러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즉 거미줄만이 가득하고, 또한 습기가 차서 쾌쾌한 곰팡이 냄새만 나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곧 성전의 모습이자, 우리 자신의 내부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내부는 이렇게 주님이 잘 아시는데, 즉 피로 보게 되면 저주만 덕지덕지 붙어있다는 것이다. 곰팡이균, 비브리오균 등이 말이다. 마치 종균실과도 같은데, 실상은 그런 깊은 동굴의 음침하고 쾌쾌한 모습을 하면서도, 외부에는 화려한 고깔모자에 십자가를 걸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회칠한 무덤처럼 말이다. 또한 그것을 흉내내어서 한국교회 목사들은 로만칼라를 하고 그렇게 목사티를 내면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 종교의 산업화 !!

제가 여러번 이야기를 하지만, 절의 중들이 왜 머리를 밀고 그렇게 승복을 입는지 모르겠는데, 불교의 철학을 이야기하면서도 말이다. 그렇게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는다는 것은 뭔가 돈을 노리는, 그러한 노림수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원래 불교철학에는 그렇게 머리를 깎고 말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옷도 그냥 남들이 입는 양복을 입으면 되고 말이다. 

불교에서 이단이라고 불리는 원불교의 경우에는, 중이 되어도 머리도 밀지 않고 승복도 입지 않는데, 그래서 원불교는 전혀 장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ㅋㅋ). 그래서 원불교도 할 수 없이 여자의 경우에는 한복을 입는데, 까맣고 하얀 한복을 말이다. 얼마든지 원피스를 입어도 되는데, 왜 굳이 한복을 고집하느냐는 말이다. 물론 돈이 되라고 그렇지 한다는 것이다. (아, 첫사랑??)

그것은 바로 종교적인 가치로 성스럽지 않다고 보는 것인데, 그러니 성스럽다고 하는 것은 이미 가진 것이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말이다. 즉 전통적인 성스러움이 좋은 것이니, 그런 전통적인 법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상품화를 시켜서 고객들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즉 일종의 '종교의 산업화'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저는 김성수 목사가 있다는 서머나 교회의 찬양을 보고 너무나 놀랐는데, 왜 그런고 하니, 같은 신자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꼭 성스러운 지옥을 모습을 보는 것 같았는데, 얼마나 감정적으로 부르는지, 도대체 그것을 보고 어떤 것에서 신자의 모습을 발견해야하는지 난감했다는 것이다. 어느 구석에서 신자의 티가 나는지를 말이다.

◈ 야, 신자답다 ??

원래 '신자' 라고 하는 것은 찾아볼 수가 없어야 하는데, 즉 어리석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 신자답다" 라고 하는 것은 지혜이고 이적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고, 유대인들은 이적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능력으로 '성스럽다' 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해야 하는데, 오히려 "저런 망나니가 다 신자가 되었나?" 라는, 그렇게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신자다운 모습을 말이다. 그렇게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구별이 되지 않아야 예수님의 피로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기의 행함이 아니라 말이다.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사랑하는 자를 왜 죽여야 하는가?

여기 교재 164페이지에 이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을 설명하면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사랑하는 자를 왜 죽여야 하는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를 왜 죽여야 하느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 사랑하는 자를 왜 죽여야 하는가? 나의 사랑의 대상이, 내가 타인을 살해하는 살인죄가 성립하는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도 타인의 손에 죽어 그 살인자를 죽도록 미워하면서 죽은 아들을 애도하는 상식적인 역할을 맡은 것이 아니다. 신앙이 있다는 아브라함 본인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된 아들은 무참히 살해되어야 한다.

사랑한다면 그냥 사랑하면 되는데, 피가 왜 거기에 개입이 되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너를 사랑한다" 라고 하면, "예, 고마워요" 라고 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말이다. 흔히 결혼식 때 뭐라고 하는가? "신랑은 신부를 사랑합니까? - 예", 그리고 "신부는 신랑을 사랑합니까? - 예" 라고 하는데, 그런데 거기에서 "그러면 이제 둘 다 목을 따세요. 피를 내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니, 사랑하면 그것으로 되었지, 굳이 왜 피를 내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신학자들도 밝혀내지 못했는데, 물론 신학자들은 신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몰라도 말이다. 사랑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 왜 굳이 피를 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 피는 없애버리고, 사랑만 ??

한국에서 유명한 루터교 신학자가 책을 내었는데, '티끌만도 못한 인간' 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제가 서평도 했는데,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사랑해서 피를 내었기 때문에, 그 피는 없애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한 흔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피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 피는 없애버리고 사랑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 여러분, 사랑입니까? 피입니까?

이것이 바로 그들 철학자들의 한계인데, 즉 신학을 하는 철학자들의 한계라는 말이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의 한계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들은 피를 내는 것에 대해서 '픽' 하고 조롱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과연 사랑인가? 피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진지하게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우리는 이제 그것을 십자가라고 하지 말고, 사랑이라고 하자. 그러면 서로가 부담도 되지 않고 그 얼마나 좋은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 '피'와 '가해자' !!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 피가 있어야 가해자로서 등장하게 되는데, 즉 우리는 사랑을 받을 수 없고, 오히려 주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을 미워한다는 것은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자기사랑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존재임을, 바로 그것을 주께서는 피를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지적을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냥 사랑이라고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다가 항목을 하나 더 만들어서, 즉 빈자리를 하나 만들어서 "주님, 여기에 앉으세요" 라고, 그렇게 주님을 거기에 끼워 넣는 식으로 해버린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평소에 내가 나를 사랑했는데, 그런데 고맙게도 그 사랑하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서도 사랑하시는구나. 그러니 주님도 여기에 넣어주자" 라고, 그렇게 해서 자리를 하나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그게 인간의 한계라는 말이다.

◈ 아하, 나의 사랑이 주님을 죽였군요 !!

그런데 주님은 그게 아니라 피를 흘리셨는데, 그렇게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하는데, 즉 "누가 주님을 죽였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너희가 죽였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다시 "미처 알지 못하고 죽였습니다" 라고, 즉 "나의 사랑이 주님을 죽였군요"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니까, 예수님을 죽이지 않은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게 사도행전 2장 끝에 나오는데 말이다.

(행 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행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
(행 2: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 주님의 상처 입은 사랑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의미하는 것은, "너는 너만 사랑하잖아. 그래서 나는 너 때문에 죽었어. 바로 니가 나를 죽였어" 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곧 '피' 라는 말이다. 즉 '살해자'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예수님은 피해를 입은, 즉 살해를 당한 자의 모습이란 말이다.

바로 그것을 두 글자로 '사랑'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닌데,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간의 대화를 한 번 들어보자는 말이다.

* 여자 : 자기, 나를 사랑해?
* 남자 : 응, 사랑해.
* 여자 : (가슴을 보여주며)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에 내가 이렇게 큰 상처를 입었어.
* 남자 : 아니, 웬 상처?
* 여자 : 당신이 남자가 되어서 군대에 가지 않으니, 내가 해병대에 대신 가서 이렇게 상처를 입었지.
* 남자 : 아니, 이럴쑤가?

바로 이렇게 될 때,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고 "자기, 사랑해" 라고 할 때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기 때문에 입게 된 그 커다란 상처자국 때문에 말이다. 여자의 몸에 새겨진 그 커다란 상처자국으로 인해서 말이다.

◈ 도마의 경우에 !!

도마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데, 도마는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통해서, 그렇게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예수님께서 "니가 나를 사랑하는가?" 라고 하시면서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십자가의 자국을 보여주면서, 그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우리도 그냥 말로만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지 말고, 반드시 "제가 바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라고 하는, 그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아브라함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아들이 무참하게 살해를 당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런 일을 시켰는가? 그런 끔찍한 일을 말이다.

그것이 교재에 나오는데, 164페이지를 보자.

** (그것은 우리가) 단순하게 '의롭지 않다' 라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악했었다' 라는 본성이 드러나야 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살해를 당해야 했다. 그래야만 인간은 비로소 철저한 죄인으로 본색을 드러낼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살해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내가 죽인 하나님이 곧 구원의 하나님 !!

여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살해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라고 하는데, 이 의미가 상당히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 인간이 하나님을 살해하지 않고서는, 즉 자기가 살해하지 아니한 하나님 외에는 자기를 구원해줄 자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죽인 하나님이 아니라면, 나를 구원할 하나님은 없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하나님이 우상의 하나님인가? 자기가 손대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좋은 것만을 해주는 하나님은 다 우상이라는 것이다. 즉 "나로부터 싫어버린 바 된 하나님, 즉 내가 죽어버렸던 하나님이 바로 나의 구원자의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을 잊게 되는데, 그것은 위로의 차원이 아니라, '사울' 이라는 자가 바로 그러했다는 것이다.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람인데, 그렇게 핍박했던 자가 예수님을 사랑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핍박을 했었기에 말이다.

◈ '십자가의 증인'으로서 !!

그러므로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지나간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자기가 있는 것은 십자가의 증인으로서 있다는 말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서 '십자가의 증인' 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당사자, 즉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의 증인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두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답다' 라는 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그런 '나다움' 이라는 말이다. (십자가의 가해자로서의 증인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구원의 대상' 이라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싶어서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나타나야 비로소 그때 구원의 대상도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이 의미가 있고 말이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지금 분위기가 이해를 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 같은데, 한 번 따져보자는 것이다. 육적인 사람의 생각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들이 여기에 있고, 또한 하나님은 저기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것을 후회하신다는 말이다. 즉 "미안하다. 내가 그때 좀 심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 얘들아, 내가 너무 심했지 ??

그것이 개콘에 보면 나오는 '감수성' 이라는 코너가 나오는데, 그게 무슨 내용인고 하니, 임금이 함부로 이야기해놓는, 즉 "능지처참형에 처한다" 라고 해서 신하가 삐치니, 왕이 한다는 말이 "내가 너무 심했지? 미안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있는데, "뭐가 어떻고 해도, 감수성은 남아있다" 라고 말이다. 그런 감수성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여기에 이렇게 인간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 그러니 모두를 다 구원할 것인지, 아니면 택한 자만 구원할 것인지,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이다. 모두를 다 구원하면 보편 구원설이 되고, 반면에 택한 자만 구원한다고 하면 편협한 예정론자가 된다는 말이다.

◈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만 모두 다 구원을 !!

그렇게 서로를 욕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를 다 구원하는 것도, 일부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두가 다 구원을 받는데, 어디에 있는 사람들만 그렇다는 말인가?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만 모두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 나타나게 되면, 일부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구원을 시켜주는데, 왜 그런가? 십자가만 나타내어야 인간이기 때문에 말이다. 즉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만이 인간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 질문 - 그것이 곧 선택의 의미가 아닌지요?

물론 선택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그럴 때 일부만 선택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내용도 성경에 있는데,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일부만을 선택을 하시는가?" 라는 것이다. 

◈ 왜 일부만 선택을 하시는가?

여기에서 "하나님 왜 모두를 다 인간으로 만들어놓고 일부만 선택을 하는가?" 라는 논리가 시원하게 풀리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밑에서부터 말이다. 이것을 존재론적 추론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존재론적으로 출발하게 되면, 다른 존재를 남겨두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존재를 남겨두는 의미가 말이다.

신학에서도 이것이 문제인데, 지금도 이것을 두고 박영선 목사가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다. 그 양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선택을 했다는 것은 믿겠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를 버리기 위해서, 즉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서 선택했다는 것은 믿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본인도 헛갈리고 있는데, 자기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버리기 위해서 선택했다고 하는, 그렇게 심하게 차별하기 위해서 선택했다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 양반은 성령을 받지 않아서, 즉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만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신학을 가지고 주물락 주물락거리는 그런 하나님을 말이다. 성경을 집어넣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인데, 그러니 그들은 성경말씀을 가지고서 장난치고 있다는 것이다.

◈ 성경말씀은 '십자가' 라는 바구니에 실어서 !!

모든 성경말씀은 십자가라는 바구니에 실어서 보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 십자가를 그만 빼버리고서, 자기도 십자가를 알고, 자기도 선택을 안다고 하면서, 그렇게 인간 자기가 안다고 하니까, 그만 자기 논리에 성경이 그만 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남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사랑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이 십자가에 같이 실려서 오게 되면, 자기가 과거에 생각했던 자기 위주의 구원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구원이 되었음을 말이다. 그러니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을 공격하는 것은 괜히 그들이 싫고 미워서 하는 것이 아닌데, 교인들이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가니까 목사의 질투심으로 인해서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ㅋㅋ). 무슨 그런 질투가 다 있느냐는 것이다.

◈ 목사님, 다 녹음이 됩니다 ??

제가 어떤 분에게 전화를 하니 그분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상당히 오랜만에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말이다. 즉 "지금 이 목사가 이야기하는 것은 다 녹음이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의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마치 "니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다 안다" 라는 식으로 협박을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사고방식이 나오느냐는 것이다. 그런 발상이 말이다.

물론 우리가 세상의 재판관으로서도 판단할 수 있는데, 하지만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시시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즉 그런 것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이혼을 했다" 라고 해도, 그 부모의 이혼이 그 자식을 지옥에 보내는 것은 아닌데, 그러니 결코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No, problem !!

그야말로 "No, problem!" 인데, 즉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즉 문제가 될만한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있다고 하면, 우리가 십자가를 어떻게 증거할 것인지, 바로 그렇게 주님의 지시와 명령의 문제만 남아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협박이나 공갈과 같은 것들은 전혀 문젯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감옥에 들어가서 쿨쿨 잘도 잤는데, 예수님의 제자라면 잠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이다(ㅋㅋ). 왜 그런가? 그에게는 감옥이 문제가 아니라,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사실상 이 세상 자체가 곧 감옥이고, 이 세상 자체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것이다. 감독자에서 잘 보여야 제대로 밥이나 먹고 살 수 있는 동네, 바로 그런 곳에서 해방을 켰다는 것이다.

◈ '간음한 여인' 제2탄 !!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한 여인이 나오는데, 사람들이 한 여인을 붙잡아 놓고서 짱 돌을 들고 서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가 '간음한 여인' 제2탄을 소설을 한번 써보면 다음과 같은데,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인데 말이다.

1탄의 경우에는, 우리가 알다시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는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서 돌로 치려고 할 때, 그런데 그냥 그렇게 해버리면 시시하니까 예수를 불러서 골탕을 먹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즉 "지금 이 여자가 당신에게 잘 배워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요즘 십자가 마을에서 유행하는 말로 하면, '막 산다' 라는 것인데(ㅋㅋ), 즉 그렇게 막 사니 간음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라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 물러갔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그 여자를 용서했는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지금부터는 2탄인데, 그런데 그 여인이 그만 그 사건이 있고 난 다음에 30분 뒤에 막다른 골목길에서 또 다시 짱 돌을 든 놈들에게 붙잡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돌로 치려고 할 때, 과연 그 여인이 살려달라고 하겠는가? 과연 그런 말을 하겠는가? 비로소 사도바울의 표현처럼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 라고 하는,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 너희들은 어둠에 여전히 얽매여 있지만, 나는 진리가 자유케 했다" 라고, 즉 "너희들은 여전히 죄의 종이고 율법의 종이지만, 나는 율법에 저촉을 받지 않는 세계로 도약을 했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은 진리가 자유케 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심판주로부터 이미 의인이라고 판정을 받았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너는 의인이다" 라는 판결문이 이미 나와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미 판결이 난 상태에서, 죽어서 심판을 받던 받지 않던 간에 이미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곧 복음이고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이제 교재 165페이지를 살펴보자.

** 인간이 붙들고 있는 목숨이란,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기 전까지 유보된 죽음에 불과하다.

목숨이 곧 죽음이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목숨을 가지고 있다" 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내 속에 죽음을 가지고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목숨 색깔이 시커멓다는 말이다. 심히 수상하고, 전혀 시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숨이 붙어있다는 것은, 아직 죽음이 붙어있다는 것이다. 

◈ 인간의 목숨은, 유보된 죽음 !!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나타나기 이전까지 우리는 전혀 몰랐는데, 즉 우리는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곧 죽음으로 보았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고 난 다음에는 이 목숨이 목숨이 아니라 이미 죽은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목숨에 대해서 "너는 이미 죽은 자야" 라고 일깨워주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교회 사이트에 이상규 집사님의 글에 대해서 제가 댓글을 달아놓았는데, 거기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설교하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면, 물론 설교를 하기 이전에 "오늘은 이런 것을 전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것보다도 먼저 "오늘도 주께서는 이것을 전하고 죽으라고 하시는구나"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죽음에서 오는 기쁨을, 즉 "내가 오늘 죽을 수도 있다" 라는 것에서 오는 행복과 희열을 가지고, 그런 편안함과 안도감을 가지고 설교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설교가 윤기가 줄줄 흐르고 찰기가 진다는 것이다. 마치 잘된 찰밥처럼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들이 생각하는 생명이란 생식기능을 두고서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육적 생식기능에 죽음이 섞여서 나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죽음을 보여주는 생식기능을 자신들이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에 !!

여기에 철학과 과학 이야기가 나오는데, 물론 과학도 철학의 일종인데 말이다. 이렇게 인간 속에 생식 기능이 있다는 말은, 제가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서 육적인 세상을 그렇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은 받았지만, 그들이 항상 염두에 둔 것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경우에, 이미 자기 아내의 태가 이미 죽었는데, 자식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없는데, 그런데 자기 이름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인데, 즉 '열국의 아비' 라는 것이다.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다의 모래같이 많은 말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조상이 된다는 것인데, 그것을 육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말이다.

그렇게 인간에게서는 육적인 것밖에 다른 것은 나올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만 사라의 태(胎)를 죽여버렸는데, 그러니 더욱 더 주님의 약속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는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기적을 기대하면서 설교를 하게 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설교자는 불가능한 것을 이야기해야 되고, 그런 불가능한 상태가 믿어지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그러한 기적을 기대하면서 설교를 하고 또한 강의를 한다는 말이다. 행함으로 가능한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 교재 165페이지 중간에 레위기 12장 2절에서 5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한번 찾아보자.

(레 12: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레 12:3) 제 팔 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레 12:4)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레 12:5)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륙 일을 지나야 하리라

◈ 레위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을 더욱 더 돋보이게 !!

알다시피 이 레위기라는 것은 율법에 속하는데, 그러면 제가 방금 이야기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태가 죽었다는 것은 무슨 언약인가? 물론 아브라함 언약인데, 그러면 이 레위기 12장의 말씀은 무슨 언약인가? 모세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세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바탕 위에서, 아브라함 언약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래서 율법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위의 레위기 12장의 말씀을 육적인 모든 인간은 어떻게 보겠는가? 제가 강의처음에 뭐라고 했는가? 인간은 행함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러니 이 말씀을 보고 어떻게 하겠는가? 아들을 낳으면 7일이 지나고 또 33일이 지나야 무엇을 하려고, 그렇게 자기 행할 것만 생각하는데, 그런데 이 레위 언약은 그것이 아니라 무엇이라고 했는가? 아브라함 언약을 돋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 언약은 불가능성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행함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 언약은 결코 인간의 행함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세 언약을 행함 쪽으로 이야기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아브라함 언약이 이루지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모세 언약을 어떻게 봐야하는가? 즉 레위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우리 인간의 행함 이전에, 즉 "무엇을 행하자" 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어떤 식으로 보시기에 왜 피를 내어야 하는가?" 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혈(産血)이니까 말이다. 즉 피와 관련된 율법을 왜 주었는지, 바로 그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어떻게 보신다고 했는가? 벌써 모두 잊은 것 같은데, '피'로 본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 인간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 안에서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죽으심의 피, 즉 예수님의 피라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소급해서 이렇게 구약에 먼저 나와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 안에는 피가 담겨있는데, 모세 언약의 피가 말이다. 그런데 모세 언약에서는 바로 그 피를 인간의 행함과 지시의 형식으로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육적인 인간들이 이것을 행하려고 하지, 여기서 하나님의 피를, 즉 예수님의 피를 찾아낼 수 있겠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오직, 성령이 임할 때만 !!

그렇다면 언제 이것이 느껴지는가? 자기가 행할 대로 모두 다 행해보았는데, 그것이 "야, 이것이 행할 문제가 전혀 아니구나" 라는 것을 느낄 때, 즉 성령이 임할 때라는 것이다. 무릎을 꿇고 베드로 성당을 기어올라간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의인은 믿음으로 살지, 행함으로 사는 게 아니구나" 라고 하는 것은 오직 성령이 오셔야만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 핸드폰 음이 울리는데) 방금 제 핸드폰에 메시지가 하나 왔는데, "이근호 고객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라고 말이다. 오늘이 저의 생일인 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는데, 러시아 정교회라고 하면 이런 목사는 쫓겨난다는 것이다. (이미 합동측에서 쫓겨났는데, 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도 부정(비거룩)의 경로를 통과하지 않고 출생한 자는 아무도 없다. 인간의 출생자체가 육적 더러움의 작품이다. 

◈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

엄마의 몸에서 아기가 태어나는데, 그렇다고 하면 그 엄마가 산혈을 흘린 것이 그 엄마의 잘못인가? 아니라면 그 아기의 잘못인가? 물론 엄마의 잘못인데(?), 하지만 누구나 다 아기를 낳을 때는 그렇게 피를 흘린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그 피가 무슨 피라는 말인가? 예수님의 피에 비해서, 인간이 자식을 낳으면서 흘린 피는 모두 다 더러운 피인데, 그러니 결국 생명을 낳은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낳은 것인가? 죽을 수밖에 없는 피 덩어리를 낳았다는 것이다. 더러운 피 덩어리를 말이다. 즉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라고 하는 하나의 사슬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은 계속해서 자식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와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낳기는 자기가 낳았지만,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천국에는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식이 아니라 누구의 자식이 되는가? 물론 인간적으로는 섭섭하지만 주님의 자식이,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역할을 먼저 태어난 죄인의 입장에서 부모가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니가 하는 행세를 보니 과거에 내가 한 것과 똑 같구나" 라고 말이다.

◈ 인간은 저주받은 율법의 작품 !!

그래서 제가 울산에서 뭐라고 강의를 했는고 하니, "이 세상, 즉 '땅' 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 체제인데, 우리 인간은 저주받은 율법의 작품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율법이 없어도 양심이 율법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율법의 체제에서, 즉 선악체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그 무엇을 해도 예수님의 피에 대한 대체성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을 하더라도, 예수님의 피에 가담해서 "저도 조금은 했습니다" 라고, 그런 소리를 외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것을 아는 것은 오직 성령이 임할 때, 즉 십자가의 영이 임할 때만 알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이것보다도 더 행복한 것은 없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살아있을 때만 주의 것이 아니라, 비록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향기만 나서 그분만 존귀하게 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것이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 내 안에 누구 있다 !!

어떻게 보면 이런 말을 하는 사도바울이 바보병신이 아닌지 모르겠는데, 아니 인간은 자기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데,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자기에게 유익이 되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곧 "내 안에 누구 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신평마을 여행기 !!

경북 의성에 가면 '산평' 이라는 곳이 있는데, 여러분은 잘 모르죠? 아, 죄송합니다. '신평' 이라는 동네인데, 여기 의성읍에서 안동 쪽으로 가고, 또 대구 쪽으로 가면 그것으로 길이 끝난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산을 넘어가면 탑리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안평이 나오고, 그 안평에서 산을 넘으면 신평이라는 아주 조용한 마을이 나온다는 것이다.

몇몇 가구만 모여서 마늘과 같은 것을 재배하면서 살아가는데, 제가 거기에 가니 그만 낯선 사람이 나타났다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신고가 들어가서 경찰이 출동하고 했는데, 왜냐하면 이렇게 외진 곳에 저런 멋있는(?) 사람이 올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심조심해서 들어가는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온 마을을 다 헤집고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신고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ㅋㅋ). 바로 그런 자유함, 즉 그 어떤 동네에 가더라도 거기에 맞출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 신평마을 이야기를 갑자기 왜 하는고 하니,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여기서는 마을 분위기가 그러하니 조심스럽게 하자" 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난 것이 이미 부모의 산혈 가운데 태어났고, 즉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행동을 제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전혀 고상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어떤 자리에 가더라도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는고 하니, "아하, 이것이 불신의 세계로구나. 그래서 청와대가 어두움이구나. 아하, 교회가 이래서 지옥에 가는구나. 성스러운 교회가 곧 지옥이구나" 라고, 그 어디를 가더라도 그렇게 자신 있게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만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마치 성경말씀을 많이 알고 역사가 오래되어서 수준이 높은 것처럼, 자꾸만 그렇게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항상 기본으로, 즉 십자가의 강도로 돌아가서 오직 주님만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기쁨으로 이 땅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8,05 오후 4시에 마침.

                                                          검은 목요일을 뒤로하고 녹취하는 기쁨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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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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