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51강 언약 속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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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51강 언약 속의 죽음

[11 대구강의 13] - [피 51] - 언약 속의 죽음
                                                                                
                                                   11,07,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6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나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현실은 '내가 사라진다' 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발악을 해도 '나' 라는 인간은 매일같이 흐릿하게 지워져간다.

◈ 사라지는 '나' !!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부정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들도 다 죽고 결국 자기도 죽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왜 죽는가?"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 죽음을 죽는 당사자의 탓으로 돌려버리면 그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사람이 죽는 것은 그 사람 탓이고, 이 사람이 죽는 것은 이 사람 탓이다" 라고 하면, 그러면 자기가 죽는 것은 누구의 탓인가? 죽음에 있어서는 '너와 나'가 없고 모두가 다 죽는데, 그러니 모두에게 다 동일하게 적용시킬 원칙을 죽음을 통해서 끄집어낼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다 적용시킬 수 있는 말이다.

◈ '윤회설(輪回說)'의 경우에 !!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불교는 죽음자체를 없다고 보는데, 그렇게 죽음이 없으면 사는 것은 무엇인가? 사는 것도 역시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고 죽는 것이 없는데, 그러니 조립이 되었다가 분해가 되고, 다시 조립되고 하는 것이란 말이다.

흔히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조립되면 살아있는 것이고, 흙으로 분해되면 죽었다고 하는데, 그 다음에는 쥐나 소로 다시 조립이 되는데, 그것을 불교에서는 '윤회설'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분해가 되면 죽었고, 뭉쳐지면 다시 살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보통 그렇게 보는데, 하지만 이렇게 보게 되면, 여기에 무엇이 빠졌는가? 나중에 조립이 될 때, 개나 소나 개구리나 박쥐로 조립이 된다고 하면, 그런데 다시 천사가 될 지, 아니면 짐승이 될 지는, 그것은 처음에 조립이 되어있을 때의 행동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나쁜 행동을 하게 되면 쥐새끼로 태어날 것이고, 좋게 행동을 하면 괜찮은 것으로 태어난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러한 조립은 그 앞에서 먼저 분해된 것이 있을 것인데, 윤회설에 의하면 말이다. 그러면 그건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 있던 분해된 요소가 문제성이 많아서, 즉 자기 것도 아닌 남의 것이 자기에게 들어와서는 덜렁 죄를 짓고, 그래서 자기는 그만 쥐새끼가 되어버리고,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난처한 점은 무엇인가? 자기는 전혀 죄를 짓고 싶지 않는데, 그런데 그만 환경이 죄를 만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죄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인데, 그것은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렇게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 망할 놈의 KTX !!

이번에 KTX가 김천의 어느 터널 안에서 멈추는 바람에, 그것을 모는 기사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있고, 나름대로 착하게 사는 자들도 있는데, 그런데 욕은 통으로 얻어먹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기차를 운전한 기사의 경우에도, 자기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기차가 움직이지 않으니 문제였다는 것이다. 승객들로부터 태만하고 서비스 정신이 없다는 등, 그렇게 욕을 얻어먹는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개통을 하지 않았으면 그런 소리는 듣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의 18만 5천명이 유다를 쳐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들 중에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돌보아주는 착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다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루아침에 천사들에게 그만 모두가 다 몰살을 당해버렸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말이다.

그리고 유월절 밤에 애굽에서도 착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하지만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만 다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주신 사건 앞에서 죽음의 본래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건 앞에서 말이다. 유월절 사건, 여리고 성 사건과 같은 사건 앞에서 말이다.

기생 라합의 경우에도, 그녀가 착한 행실을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닌데, 하지만 라합은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키면 그 사건 앞에서 자기 모습이 어떠한지, 즉 "아하, 나는 멸망을 받아도 마땅하구나" 라는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니, 그녀는 여리고 성이 무너져도 붉은 줄을 내려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구원을 말이다. 

◈ 성령이 아니고서 어떻게 언약사건을 !!

여기서 제가 불교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사람들이 주님의 사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교 신자들처럼 "아이쿠, 모르겠다. 사는 데로 살지 뭐" 라고 하면서,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이 언약사건인데, 그 언약사건을 어떤 식으로 알아야 하는고 하니까, 그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언약사건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으면서도 자기가 왜 죽는지를 모르는데, 하지만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면 죽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언약을 아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자기를 이미 자기를 삼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죽음은 자기가 신경을 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자기는 반드시 죽어야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다. 즉 하나의 구조 안에서 하나의 자리를 점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 정녕 죽으리라 !!

그렇다면 언약은 무엇인가?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필히 죽는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인간을 죽이시는 하나님을 믿게 되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도 그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인간을 죽이시는 하나님이 곧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렇게 되니, 즉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정녕 죽으리라" 라고 말씀이 그렇게 알려주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너는 정녕 살았느니라"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래서 성경전체를 총동원시켜서 우리에게 덮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덮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름에 한국을 다녀간 사람이 "야, 한국은 너무나 더워서 이제는 못 가겠더라" 라고 했다면, 그런데 그 사람이 지난 1월에 왔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그때는 얼마나 추웠는지 모르는데 말이다. 그러나 여름에만 온 사람은 그런 추위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똑같은 한국 땅에도 더운 것도 있고 또 추운 것도 있듯이, 그렇게 같은 언약 안에서 죽음이 있고 저주가 있다고 한다면, 역시 구원도 있고 영생도 있다는 것이다.

◈ 죽음 - '가자, 에덴동산으로' !!

그러니 결국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과거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말이다. 에덴동산에는 두 가지의 나무가 있었는데, 즉 생명나무도 있고 선악과나무도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나무가 보이는 지점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우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대구다. 니는 서울이지?" 라고 하면서, 정작 우리 자신들이 왜 죽는지도 모르면서, 기껏해야 불교 신자들이 하는 이야기나 듣고서, "죽으면 그만이구나. 그러니 살 때까지 살자" 라고 하면서,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 체 죽음의 세계로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 성도는, 언약 안에서 필히 죽어야만 !!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즉 언약의 영이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나무가 있는 그 현장에 있게 했을 때, 그때 우리는 우리 개인의 사적인 구원은 다 날아가 버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 업무로서 벌리시는 구원에 동참하게 되는데, 그런 자들이 바로 죽음의 의미를 아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필히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상식적으로(?) 모두 아는 이야기인데, 이제 본격적으로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는 것이다. 어제 설교를 하면서 잠시 언급을 했는데, 시간 관계상 깊이 말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애석했는데 말이다. 물론 흐름상으로도 그러했고 말이다.

◈ 아브라함의 경우에 !!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시킨 것이 있는데, 즉 "니가 믿음이 있는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은 아브라함이 착한지 그렇지 않은지, 그것을 물은 게 아니라 "니 자식을 바쳐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식을 바치는 것, 그 안에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가름하는 기준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식이 미운 자식이 아니라 아주 사랑하는 자식인데, 즉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독생자라는 것이다. 그러한 독생자를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바친다는 것은 그냥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것을 가지고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알아보고 확인하느냐는 말이다.

아까 제가 거기에 대해서 잠시 언급을 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일만 골라서 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대면하고 나면 무엇이 나오는가?

우리 인간의 행함이 나오게 되는데, 그 행함이 진짜로 믿음이 있는 행함인지 믿음이 없는 행함인지, 즉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거기에서 생긴 행함인지, 아니면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우겨서 나온 행함인지, 바로 그것을 통해서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를 걸러내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보고 기뻐한 아브라함 !!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을 바칠 때, 아브라함은 그 자식 속에서 자기 신앙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아브라함은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고, 또한 보고 기뻐했다는 것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사건을 연결시키게 되면, 즉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을 바칠 때, 아브라함이 자식을 바친다고 하는 행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면, 그 행위로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러면 구태여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행위를 믿으면 되지 말이다. "야, 내가 내 자식까지 바치다니, 나는 믿음이 참으로 좋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자기가 행한 것을 자기가 믿으면 구원이 된다고 여기면, 굳이 그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바라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 자식을 바치는 과정에서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런데 만약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자식을 바치라고 하는 말씀이 없었다고 하면, 수풀 속에 하나님께서 감추어놓은 수양을 발견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로 몰고 가시는고 하니, 숨겨놓은 수양, 즉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쪽으로 우리를 몰고 가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그 말씀을 실천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우기지만, 막상 그 현장에 가보면, 우리의 행함은 전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을 죽여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저도 그렇게 할 용의가 있는데(오잉?), 제가 감히 그런 막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행위도 자기를 결코 구원하지 못하는데, 여호와 이레, 즉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 언약은 크고, 아브라함은 작고 !!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수양, 그런데 그 수양이 무엇과 관련이 되는고 하니까, 놀랍게도 아브라함과 관련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자기에게 아들을 죽이라고 지시하신 하나님과 수양과의 관계 속에, 바로 이러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여기 언약 속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즉 언약은 크고 아브라함은 작고, 바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은 넓은데 아브라함의 행동은 그 일부라는 것이다. 알려면 통채로 다 알아야 하는데, 자기 행동만 알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5년 전에 믿었던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되는데, 물론 10년 후에 믿을 예수님도 믿으면 안 되고 말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즉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다 주관하시는 예수님을 5년 전에, 혹은 10년 후에 우리는 거기에 늘 접속되고 접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항상 만나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창고 안에 들어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언약을 알게 되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살 분이 따로 있어서, 즉 "나는 죽어도 마땅한데, 그런데 죽어서는 안 되는 분이 죽어서 죽을 내 몸도 살리라" 라고 하는, 바로 그런 관계가 있을 때, 그런 자가 바로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십자가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

다시 말해서, "나는 죽어서 마땅한데, 죽어서는 안 될 분이 대신 죽어서, 그분이 나를 살려내는 식으로 나는 산다" 라고 하는 내용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게 곧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는 나무토막을 크로스로 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이 2장 20절이라는 말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옛날에 어떤 청년이 죽었단다" 라고 하는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사도바울 안에서 계속해서 발현되는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2장 20절을 말이다. 그러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느냐는 말이다. 즉 인간의 행위는 율법 앞에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데,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자랑거리로 내세울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
(갈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 아브라함아, 너도 죽어라 !!

그렇다고 하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기가 자식을 죽이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식인데, 그를 하나님께서 죽이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사실은 이게 묶어져 있는데, 즉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식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이 있는 것인데, 그래서 아브라함과 자기 자식은 하나의 동일한 운명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을 죽여라" 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아, 너도 죽어라" 라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즉 아브라함은 죽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수풀 사이에 수양이 준비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면,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런 식으로는 전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면서 따라가야 하는데, 그런데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되면, 그 십자가는 자기를 사랑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지, 결코 자기를 죽이는 용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 전도 -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미워하면 찾으리라"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주님이 그 말씀을 전도목적으로 하셨다면, 하필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느냐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이 세상에서 전도하기 위해서 라고 하면, 그런 방식으로 전도가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그러므로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을 꼬드겨서 모이게 하는 것이 전도가 아니고,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주님의 자기 백성을 찾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 라는 말이다.

◈ 다음 수풀에서 양은 몇 마리나 나올까요?

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그림책에 보면 "다음 수풀에서 양은 몇 마리나 나올까요?" 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전혀 모릅니까? (ㅋㅋ) 수풀에서 양은 몇 마리나 나올지는, 오직 자기는 죽어서 마땅하다고 하는, 즉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하는, 그것이 곧 전도라는 것이다.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전도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아브라함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당연히 죽어서 마땅한 존재인데,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라면 위상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죽어서 마땅합니다" 라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왜 그런가?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되는데, 즉 "언약은 내가 살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이는 과정에서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미리 오셔서 나로 하여금 항상 죽이면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차질 없이 이루어갑니다" 라고, 바로 그것을 고백한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도 '죄' !!

그렇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왜 죽어야만 하는가? 아브라함에게서 나올 것은 전혀 죄밖에 없다는 말이다.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이 곧 죄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게 신앙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러나 아브라함 본인이 그것을 신앙적인 행동이라고 쥐고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자기가 신앙적인 행동이라고 말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도 역시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삭을 바치는 죄인인 자기 자신을 준비된 수양인, 즉 예수님께서 구원한다는 것을, 바로 그것을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을 시키지 않으면,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자기가 왜 죽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설명을 하겠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이시는 것은, 그것은 바로 에덴동산으로 사람을 데리고 오는 작업을 하시는 것인데,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는 그 현장에 우리를 데려다가 놓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제 아무리 도망을 치고, 시대가 몇 만년을 흐르고, 여기는 한국 땅이지 예루살렘이 아니라고, 그렇게 그 어떤 소리를 해도 말이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언제나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는 그 현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오셔서, "봐라. 너는 이 현장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선악과를 따먹고 정녕 죽으리라" 라는 원칙과, 그리고 "이제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한다" 라고 하는 원칙이 있는, 바로 그러한 구조에서 우리 인간은 벗어난 적이 없다는 말이다.

◈ 주님의 '터널 뚫기' !!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형편에 있는 가운데서 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이 제대로 다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무엇인가? 주님의 '터널 뚫기' 인데, 이번에 고속열차가 멈춰선 김천의 터널이 무려 10km나 된다고 하는데, 그런 터널을 왜 만드는가? 높은 산이 있어서 그것을 뚫으려고 만들게 되는데, 한 쪽에서만 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다 파고 들어가서 가운데서 만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터널은 어떠한가? 주님은 이렇게(?) 파고 들어가는데, 인간들도 나름대로 파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주님은 생명나무의 인식 속에서 파고 들어가는데, 즉 "이 세상에는 죽음밖에 없고,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 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파고 들어가는가? 자신들의 삽과 곡괭이를 동원하는데, 그게 바로 "이것은 악이고, 이것은 선이다. 그러니 선은 취하고, 악은 버린다" 라고 하는, 그런 자기들의 행함과 신념을 가지고 파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선악과의 인식 속에서 말이다. 그렇게 하면 과연 터널이 뚫리는가?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그게 바로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점점 더 지옥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참 파다가보면 위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위에서 예수님이 이미 자신의 피로서 여호와 이레, 즉 우리 대신에 수양을 준비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내시는, 그것이 바로 창세기 22장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죄 많은 아브라함의 제사를 받아서, 그런 죽은 아브라함이 영생을 얻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터널이란 말이다.

◈ 생명의 터널로 올라가 봐야 !!

바로 그 생명의 터널로 건져 올리게 되니 어떻게 되는가? 우리 인간이 파고 들어가는 터널이 육에서 나와서 육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즉 자기의 종교적인 열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건져 올릴 때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하는, 즉 오직 피로 말미암아서 용서하시는 새언약이라는 말이다. 피가 곧 언약의 완성인데, 그런 완성된 입장에서 올린다는 것이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동원하고, 아무리 교회에 와서 열심히 해도 자기 터널을 파는 것에 불과한데, 그렇게 파니 옆에 무엇이 쌓이겠는가? 그동안 자기가 애썼던 흔적들이 흙으로 그렇게 수북하게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 오, 내 사랑하는 흙들아 ??

그런데 우리 우리 인간들은 그런 흙들을 보고 또 스스로 감상에 젖게 되는데, 즉 "주여, 제가 이만큼 팠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겠는가? "뭐라고, 그러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게 모두 다 죄인데, 그것도 모르나?"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하면 주위에서 뭐라고 하는가? 영지주의가 어떻고, 또 지식으로만 성경을 이야기한다고 저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와도 혼자서 황무지에 왔다고 여기면 되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 안에서 피만 바르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피에 동참하면 되는데, 물론 목사가 피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자기가 하면 되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교회에 나와서 웅성 웅성거리기 시작하면 문제가 되는데, 즉 "저 사람을 닮아야지. 저 사람과는 교제를 좀 해야지" 라고 한다면, 그만 복잡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교회에 있는 유아실은 교회에서 웅성 웅성거리는 것이 싫어서, 도를 닦는 사람들만 거기에 다 모여 있다는 것이다(ㅋㅋ). 

◈ 인간은, 자기 행함의 역사성만 믿기에 !!

아무튼 이렇게 흙무더기를 잔뜩 쌓아두게 되는데, 바로 그것을 두고서 '역사성'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자들은 자기 행함의 역사성 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를 않는데, 물론 믿고 싶어도 도저히 다른 것은 믿을 게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은데, 즉 "나는 그때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해서 바쳤다. 나는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말고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엘리야가 "나는 죽을 때 불수레를 타고 올라갔다. 그러니 누가 나를 건드린다는 말인가? 누구 불수레를 타본 놈이 있어? 하지만 나는 탔어" 라고 한다고 해서, 그런 것으로 구원을 받는가? 엘리야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보내주신 불수레를 잘 탔습니다" 라고 했는가? 변화산에서의 대화 중에서 그런 말이 있느냐는 것이다.

◈ 변화산 - '제가 언제 죽는데요?'

그가 변화산에서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가? "제가 언제 죽는데요?" 라고 하는 죽음에 관한 것인데, 왜 그런가? 자기가 불수레를 타고 간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을 아니까 말이다. 모세도 홍해를 갈랐다고 해서 자기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니까, 그래서 "주여, 언제 죽는데요? 언제 죽는데요?" 라고 하면서 자꾸만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뭐라고 했는가?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충격을 받는데, 즉 하나님의 음성을 그때 듣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름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구나" 라는 것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지어내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계시는구나" 라고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지금 너희 눈에 누가 보이는가?" 라고 했을 때, "예수님만 보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세나 엘리야는 다 날아가 버리고 없는데, 그렇게 예수님만 보이니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오직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만 믿으면 되는데, 그것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이고 말이다.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눅 9: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 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눅 9: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눅 9: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눅 9: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하지만 자기 행함의 터널을 뚫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전혀 되지를 않는데, 왜 그런가? 교회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어쨌던 간에 참한 교회를 하나 만들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황무지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가 된 것 자체가 곧 문제라는 말이다.

◈ 마귀 - '나는 니가 한 행동을 다 안다' !!

물론 마귀는 다 아는데, 그래서 "그것이 바로 니가 살려고 하는 행동이지" 라고 하면서, 마귀는 조롱하면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 내가 살려고 한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성령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마귀의 권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귀가 얼마나 똑똑한지 모르는데, 마귀는 우리의 모든 것을 익히 알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마귀는 최후의 천국에 가는 길목에 서서 "나는 니가 한 행동을 다 안다. 니가 그렇게 해서는 천국에 가지 못해" 라고 협박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내용을 자기의 행함으로 바꾸는 사람은, 그 행함에 대해서 마귀로부터 질책을 받는데, 그래서 결국 좌절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성령이 온 사람은 뭐라고 하겠는가? 마치 비가 오면 당연히 우산이 필요하듯이, 이번에 갑자기 비가 오고 하는 바람이 우산이 없어서 고생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물론 밖에 나가지 않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 성령 - '마귀에게 비를 맞고 있다' !!

이와 같이 성령께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지금 너거들은 마귀에게 비를 맞고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마귀에게 매일같이 시달린다는 말이다. 질책과 조롱을 말이다. 즉 "그것도 믿는 것이라고 하나? 놀고 있네. 니가 말씀을 지켰다고? 그러면 이것도 한번 지켜볼래" 라고 계속해서 정죄를 당한다는 말이다.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이 간음이 아니냐고 하면서 말이다(??).

알다시피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보면 마귀가 참으로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마귀가 예수님에게 한 시험은 마치 작곡자에게 "여기 정말 좋은 노래가 하나 있는데, 들어볼래?" 라고 하면서, 그 사람이 작곡한 노래를 들려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율법을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가? 물론 예수님인데, 그런 예수님 앞에서 율법을 들이대면서 "이것도 아나?" 라고 시험을 했으니 말이다. 물론 마귀가 이렇게 예수님 앞에서는 멍청해 보일지 몰라도, 그러나 사람에게는 먹혀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지켰다고 하면 저 말씀으로 쑤시고 해서, 그렇게 완벽함에 완벽을 더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 반창고 위에 또 반창고를 !!

그렇게 되니, 어제 설교한 것처럼 반창고 위에 반창고를 계속해서 덧붙이는 것과도 같은데, 그런 반창고로도 모자라면 퍼른 청테이프도 붙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붙이게 되면 결국은 한꺼번에 다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더덕더덕 붙인 반창고를 단 하나만 떼려고 해도 어떻게 되는가?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만약에 저보고 하라고 하면 한꺼번에 모두 떼고 싶은데 말이다. 주님은 바로 그 방법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박온정 집사님이 그것을 인용해서 글을 올렸는데, 즉 페인트를 칠한 무덤 속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해골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해골이 있음을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왜 그런고 하니까, 에스겔 37장에 보면 주님이 에스겔을 보고 뭐라고 하시는가?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라고 하시는데, 그야말로 사골국 전문식당의 주방에 간 분위기라는 것이다(ㅋㅋ).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 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 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 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 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이것들은 소뼈가 아니고 인간의 뼈인데, 그러니 무슨 의미인가? 여기의 인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의미하는데, 즉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라고 하면, "제가 살리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것으로 끝난 문제라는 것이다. 즉 이 마른 뼈들을 주님께서 살리시는데, 그렇다면 이 뼈들이 살아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덕분인가? 뼈의 행함 덕분인가? 뼈가 그렇게 스스로 살아나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또한 뼈가 알아서 주님을 기다리고 했느냐는 말이다.     

◈ 바짝 마른 뼈가 나올 때까지 !!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렇게 앙상한 뼈가 나올 때까지 다 자르고 잘라버렸는데,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팠던 그 모든 터널들을 말이다. 그런 것들을 바짝 마른 뼈가 나올 때까지 다 뜯어내고, 그 다음에 그 뼈에 주님의 말씀이 임하게 되면, 살이 붙고 피가 돌면서 생기가, 즉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인자가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말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은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목사라는 반창고, 장로라는 반창고, 그렇게 자기가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는 반창고를 떼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 밑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고 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지금 한국교회는 장로교든 감리교든 간에, 또한 신천지든 구천지든 상관없이 전부가 각자의 터널을 뚫는다고 난리라는 것이다. 교인들을 수천 명씩이나 동원해서 말이다.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전도를 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성경바깥으로 튀어나가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곧 '종교' 라는 것인데, 즉 인간의 행함으로는 종교 외에는 아무 것도 만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성경에는,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말씀들만 소복 소복이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지 못할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는데, 전혀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일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 입에서 "제가 했습니다" 라고 하는, 우리의 행함이 나오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주님,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제가 했습니다" 라고 하는 소리가 말이다. 그러니 성경에는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말씀들만 소복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3절까지를 찾아보겠는데, 제가 읽겠습니다.

(딤후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딤후 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 사도바울의 권면과 지시 ??

보통은 이런 구절을 흔히 '사도바울의 권면과 지시' 라고 하는데, 물론 권면이나 지시는 같은 말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표현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웬만한 신학교에서는 1학년 때에 다 가르치는 것인데, 그때 교수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사도의 권면과 지시라고 하는 것은, 사실 사도의 권면과 지시가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의 계시입니다"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의 개인적인 주장이라고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계시라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그렇게 해봐야 신학생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는데, 하루빨리 졸업해서 참한 교회를 하나 만들어서 목회에 성공하는데 있지 말이다.

하지만 그게 왜 하나님의 계시인고 하니, 사도바울이 누구의 계시를 받고 전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즉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전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조직신학시간에 다 배우는데 말이다.

(딤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그렇게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계시이니, 그 말씀이 끊어진다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끊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밥을 먹어라" 라고 하는 엄마가 따로 있고, "일찍 자라" 라고 하는 엄마가 따로 있는가? 그렇게 "밥을 먹어라", "일찍 자라", "손을 씻어라" 라는 것은 모두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인데, 엄마의 입에서 말이다.

그런데 "나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권면이고, 위에 나오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라는 것은 사도바울의 권면인가? 또 다른 것들은 사도요한의 권면이고 말이다. 어디에 그런 것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목사들이 왜 자꾸만 사람을 속이려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교인들이 자꾸 속아넘어가니 재미가 붙어서 그런지 몰라도 말이다. 사기도 자꾸 치면 그게 습관이 되듯이 말이다. 물론 아마추어 교인들은 목사가 전문가들이니 목사가 맞는 소리를 한다고 여기겠지만,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19개 !!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취지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 2절에서부터 뭐라고 하는가? 인간들이 하는 짓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즉 "(1)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2)돈을 사랑하며, (3)자긍하며, (4)교만하며, (5)훼방하며, (6)부모를 거역하며, (7)감사치 아니하며, (8)거룩하지 아니하며, (9)무정하며, (10)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11)참소하며, (12)절제하지 못하며, (13)사나우며, (14)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15)배반하여 팔며, (16)조급하며, (17)자고하며, (18)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19)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라고 말이다.

여기에 이렇게 19가지가 있는데, 여기서 18가지를 지켰는데 하나를 어기면 어떻게 되는가? 그게 지킨 것인가? 예를 들어서, 엄마가 빨리 집에 들어오라고 해서 그 말은 지켰다고 하더라도, 빨래를 걷어놓으라고 했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엄마가 좋아하겠는가? 엄마가 뭐라고 하겠는가? "너는 왜 지독하게 내 말을 듣지 않노?"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런 소리를 듣는 자식은 억울한데, 왜냐하면 자기는 하나는 지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모두 다 지켜야 자기 자식이지, 그것은 고르거나 흥정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 8개는 지키고 2개는 어기고 하면, 엄마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이것은 왜 안 지키노?"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인간은, 말씀을 가지고 타협할 입장이 못 돼 !!

방금 말한 19가지 중에서, 사람이 돈을 사랑하지 않지만 자기를 사랑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도 이 말씀을 주신, 그것을 사도바울의 권면이라고 하지 말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주신 예수님을 시답지 않게(시시하게?) 본다는 것이다. 즉 "웃기고 있네" 라고 하면서 흘려버린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았어" 라고 하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면 니 자신은 왜 사랑하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지키기 힘들지" 라고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흥정하거나 타협할 입장이 되지 못하는데, 지금 우리의 처지가 말이다.

◈ 그러나, 그림자는 언제나 함께 하기에 !!

그러니 이 말씀은 현재 우리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즉 현재 우리가 서있는 그림자가 어떤 그림자인고 하니, 우리가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만든 것인데, 물론 우리의 그림자는 시커먼데, 왜냐하면 죄에서 나왔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시커먼 그림자가 여기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 5절까지 같이 간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자꾸만 떼어내려고 하는데, 즉 "이것은 지키고, 이것은 지키지 못하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지킨 것은 자랑하고, 지키지 못한 것을 발로 차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지킨다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림자는 언제나 함께 하는데, 즉 우리가 잘하던지 못하던지 간에 항상 말씀의 바탕 위에 있다는 것이다.

◈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셋팅된 현장으로 !!

그러므로 이렇게 언약이 있다는 것은, 이 언약의 바탕 위에 우리가 서있다는 것인데, 즉 서있는 바탕 자체가 언약이고, 이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셋팅이 된 그 현장으로 데리고 가고 있고, 또한 그 현장에 가보면 생명나무가 움직인다는 것이다. 물론 선악과도 움직이고 말이다. 그렇게 두 나무의 움직임이 마주쳐서 생명나무 대신에 주님의 죽음이 발생된다는 사실을, 바로 그것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을 되풀이한 것이 곧 창세기 4장인데, 즉 가인과 아벨의 경우에, 바로 창세기 3장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는 한 쪽은 건지시고 한 쪽은 죽이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난리가 났다는 말이다. 즉 창세기 3장 15절에서 이미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확정된 노선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확정된 노선이 요한계시록 끝까지 간다는 것이다.

◈ 이미 주님께서 언약으로 정하신 자리 !!

그렇게 계속해서 진행이 되어 가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자리는 우리가 지켜서 행할 수 있는 것만을 골라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자리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언약으로 정하신 자리라는 말이다.

◈ 이스라엘은 '율법'의 자리 !!

이스라엘의 경우에 그 자리는 무슨 자리인고 하니, 곧 모세언약의 자리인데, 그 모세언약을 두 글자로 하면 '율법'이고 말이다. 즉 율법의 자리라는 말이다. 그런 율법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이 그 율법대로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아무리 자기들이 선택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거기에서 무엇이 올라오는가? 바로 저주가 올라온다는 것이다.

신명기 28장이 곧 그 말씀인데, 즉 "내 말을 지키지 않으면 머리가 아니라 꼬리가 된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이스라엘이 무엇이 되었는가? 머리가 아닌 꼬리가 되었는데, 경상도 말로 '시마이' 라는 말이다. 즉 별 볼일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 앞에서 존재감 자체가 그만 날아가고 말았는데, 그런데 그것을 두고 선지자는 좋다고 박수를 친다는 것이다. "사라졌네, 룰루랄라! 사라졌네, 룰루랄라!" 라고 말이다. 지금 나라자체가 망해서 백성들이 이방나라로 비참하게 포로로 잡혀가는데 말이다.

◈ 자기 아들을 내어버려 두시는 하나님 !!

다음주일 설교가 호세아서 13장인데, 거기에 보면 "그 어린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라고 하는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잔인한 이방민족이 쳐들어와서는 죽이더라도 그냥 곱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어린아이의 경우에도 박치기를(?) 해서 비참하게 죽인다는 것이다.

(호 13:16)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그래서 어제 오후설교시간에 '무자비한 하나님' 이라고 했는데, 이게 하나님의 무자비성인데 말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렇게 무자비하신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자리가 곧 언약의 자리이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얼마나 무자비한지, 자기 아들을 그만 내어버려 두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아들조차도 외면해버리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기도만이 !!

예수님께서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고개를 그만 돌려버리신다는 것이다. 즉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 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말이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여러분은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즉 기도를 2시간이나 해놓고 "절대로 제 뜻대로 되지 않게 해주옵소서" 라고 하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기도인데, 그런데 보통 교회에서 뭐라고 하는가? "성경공부만 하지 말고 기도와 함께 균형이 잡히게 해라" 라고 하는데, 그러나 데모데전서 4장 5절의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라는 것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 여름수련회 시간에 여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것인데 말이다.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 이사야의 입술은, 움직이는 제단 !!

기도에 대해서는 시편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시편의 기도는 반드시 제단에서 나오는데 말이다. 이 제단은 이사야 6장인데, 거기서 출발은 무엇인고 하니, 제단에서 나오는 숯불인데, 거기에 입술을 찌진다는 것이다. 엉덩이가 아니고 말이다(ㅋㅋ). 그러니 이사야의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움직이는 제단이라는 것이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
(사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다시 말해서, 이사야가 보았던 십자가 제단이, 이제는 이사야가 가는 곳마다 움직이는 십자가 제단이 되어서 모든 이방민족들에게 멸망을 선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포하는 가운데 그루터기가 나오게 되는데, 그 그루터기는 누구인가?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데, 즉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는, 그러니 하나님 자신이 곧 그루터기가 된다는 말이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성도의 몸이 왜 거룩한가?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이사야를 보내서 그의 입술을 숯불로 찌지게 되는데, 그러니 이사야의 입술 안에는 항상 작은 제단이 들어있어서, 희생제물을 바쳤던 그 무서운 제단이 말이다. 즉 이사야는 제단을 입에 달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전이고, 또한 십자가인데,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성도의 몸을 성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거룩인데, 왜 그런가? 날마다 "나는 망하게 되었다" 라고 하니, 그것보다 더 거룩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사람이 뜨거운 곳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게 되는데, 특히 아이들이 그러한데 말이다. 그렇게 자기 속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뜨거운 화덕과 같은 것이 말이다. 그때는 "제발 진정해라" 라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자기도 모르게 "아이쿠, 뜨거워라"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뜨거움이 곧 성전이라는 말인데, 성령의 뜨거움이 말이다. 그러니 뜨겁다고 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우리' 엔터테인먼트 ??

그런데 사람들이 굳이 교회를 왜 만드느냐는 말이다. 도대체 모여서 무슨 짓을 하자는 말인가? 어디 고스톱을 칠 일이 있는가? 사람들을 모아서 건물을 지어놓고는 말이다. 사람들을 모으는 것은 저기 청도에 있는 소싸움 시장에 가도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억지로 꼬드겨서 모아놓고는 나중에 입장료를 다 받아내고, 그러니 바로 그것이 엔터테인먼트, 즉 일종의 기획사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서 돈을 버는 연예사업인데,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기가 팠던 흙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도 제법 많이 파놓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런 짓을 하는 것이 특별히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이사야 당시부터 그런 짓을 해왔다는 것이다. 산당(山堂)에서 제사를 드리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산당 자체가 그냥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종교적인 꾐이 있을 수 있는 모습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갓바위에 미륵보살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들 하는데, 아니면 켄터키 치킨집의 그런 인자하신 할아버지 모습을 하던지 말이다. 또는 아주 오래된 고목이 있다든지 말이다. 그래서 거기에 고추를 달곤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있으면 길을 내더라도 비켜나가야 하는데, 함부로 도로공사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자기 행함에 도취된 인간들 !!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신비적인 것을 하나의 영역으로 따로 설정해놓고, 그것을 누림으로서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게 되는데, 즉 자기 존재에서 나오는 죽음과 같은 것을 메우면서 만족해하는 종교적인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오락인데, 즉 자기의 행함을 보면서 자기가 즐긴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보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피가 들어가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분위기가 그만 처참해지니 말이다. 우리 인간에 의해서 짓밟힌 자의 피가 거기에 왜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분위기가 완전히 엉망이 되는데 말이다. '쇼쇼쇼'를 하고 있는데, 거기에 피를 왜 뿌리느냐는 것이다. 개피든 소피든, 피는 뿌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미자 콘서트를 하는데 피를 한번 뿌려보라는 것이다. 무슨 콘서트가 되겠는가? 다들 도망을 가고 말지 말이다.

◈ 지옥이란, 인간들의 고상함을 극단적으로 집대성한 것 !!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지옥' 이라는 것을 따로 찾지 말고, 인간들의 고상하고 거룩한 것을 최극단으로 집대성한 것, 그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말이다. 즉 거기에 자기가 헌금을 했기 때문에 한껏 즐거움으로 다시 가져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인간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야, 주께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나는 복 받은 놈이야" 라고 하면서, 자기 혼자서 감동을 받곤 하는데, (잠시동안 침묵의 시간이 흐름) 참으로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는 말이다. 

교재 167페이지를 다시 살펴보자.

** 나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현실은 '내가 사라진다' 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발악을 해도 '나' 라는 인간은 매일같이 흐릿하게 지워져간다.

◈ 나는 왜 죽어가는가?

쉽게 말해서 "나는 죽어가고 있다" 라는 것인데,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자면 "나는 왜 죽어가는가?" 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죄이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해서 나는 죽어가고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심판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런 심판 속에 있음을, 그것을 주께서는 감사하게도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아도 마땅함을, 거기에 대한 증인으로서 같이 그들과 같이 섞여서 드러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성도의 역할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에스겔이나, 특히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의 경우에, "나는 살래. 너는 죽어라" 라는 게 아니라,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잡혀와서는 거기에서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 아니, 구원자가 먼저 멸망을?

그러므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메시야께서 이 더러운 세상에 직접 오시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마치 요나 선지자처럼(?) "그래, 죽어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구원자가 멸망을 당할 이 세상에 들어오셔서 먼저 멸망을 당해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슨 일이 일단 벌어졌는데, 즉 2000년 전에 무슨 사건이 하나 터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무엇을 증거하는고 하니, 물론 지금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똑같은데, 즉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라는 것이다. 흘러간 물은 또 흘러가고, 산천초목도 변함이 없는데, 해와 달도 그렇고 말이다. 지구가 갑자기 반대로 돌지 않는데, 성경에도 있듯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이다.

◈ 숨어있던 비밀이 튀어나오면서 '흔적'과 '자국'을 !!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인데, 무슨 일이 말이다. 바로 여기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일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모든 숨어있던 비밀이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흔적과 자국을 남기게 되는데, 그것이 곧 순교라는 것이다. 복음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그런 일들이 모든 역사에 하나의 버짐처럼 생기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모든 구석구석에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함을, 즉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버리신 것으로 인해서 이 세상은 이미 그 성질이(?)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 성공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그것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말이다.

그렇게 심판을 받고 있으니 예수님이 생각나지 않고, 또한 그렇게 저주 아래에 있으니 십자가의 피가 싫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자기의 행함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저주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저주를 받고 있는 중임을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한 사람에게 2천억씩 나누어주면서 "여러분이 알아서 죽을 때까지 사용하세요" 라고 한다면, 그 순간에 우리는 무슨 생각이 나지 않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 라는 것보다는, "야, 내가 이렇게 십자가를 잘 믿으니 살려주시는구나"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사는데 강조점을 둘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도는 그것이 아니라, "아하, 주님이 이 돈을 쓰면서 죽으라고 하는구나"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죽으면 심심하니 말이다. 그래서 나이트클럽에 가서 비비든지 말든지 하면서, 그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죽는다는 것은 변함이 없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여기에 이렇게 돈이 있으니, 한번 살아볼까?" 라고 하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 찜찜함의 철학 ??

그러니 로또에 당첨이 되어도, 그것을 샀던 마음가짐으로 그냥 날려버려야 하는데, 그 복권에 당첨된 목돈을 가지고 살아보려고 한다면, 그 인생자체가 곧 복권인생(?)이라는 말이다. 마치 점을 한번 보게 되면, 처음에는 심심풀이지만 나중에는 계속해서 보게 되듯이 말이다.

마귀의 올무가 바로 그러한데, 한번 버릇을 더럽게 들이게 되면,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구정 때에 토정비결을 보았으면, 그 다음 해에도 보지 않으면 뭔가 찜찜하다는 것이다. 그런 찜찜함이 곧 인생관이 되는데, 그래서 누군가가 "당신의 철학이 뭡니까?" 라고 하면, "예, 찜찜함의 철학입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찜찜함을 목사가 계속해서 교인들에게 주입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인들은 그런 찜찜함을 피하기 위해서 목사의 말을 듣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찜찜함을 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곧 목회성공의 비결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의 삶에서 '죽음의 흔적'이 아닌 것이 없다. 갓 태어난 아이들도 영문도 모르는 채 늙어가고 있다. 산다는 것이 곧 죽는 일이다.

◈ 욥아, 니가 아느냐?

갓 태어난 아이니까, 이건 욥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리고 시편에 보면 있고 말이다. 욥이 하나님에게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나님, 제가 이렇게 살 것을 왜 살려두었습니까?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기 이전에 미리 죽이시지, 왜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니 욥은 자기 인생을 엄마의 태(胎) 속으로까지 가지고 가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욥을 어디까지 데리고 가지고 가시는가?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있는 범죄한 현장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그게 욥기 거의 마지막에 보면 나오는데, 즉 "짐승이 새끼를 어떻게 낳는지 니가 아는가?" 라고, 또한 별을 어떻게 만드는지 니가 아나? 그때 니가 옆에 있었어?" 라고 말이다. 욥은 기껏해야 자기가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이해되는, 그래서 엄마 뱃속이 자기 인생의 시작이라고 보았는데 말이다.

(욥 39: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욥 39:2) 그것이 몇 달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그런데 주님은 별을 만드시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데, 아니 주님께서 별을 만드는데 그 옆에 인간이 있을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요즘 과학자들은 별이 만들어진 것이 150억년 전이라고 자기들 마음대로 지어내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별을 만들 때 누가 계셨는가? 곧 예수님인데, 그게 잠언서에 나온다는 것이다. 지혜, 즉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누가 계셨는고 하니, 지혜자가 되시는 분이 옆에 계셔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욥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런 지혜가 되는 분에게 사로잡혀있고, 그분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그런데도 욥아, 너는 지금 니가 아프다고 그렇게 소리를 치고 있는가? 참 지혜인 내 손에 있는 것을 감지덕지하게 여기지 않고 말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욥은, 그분이 장차 받을 고난을 !!

그러니 이렇게 주님의 손, 그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과 그 하시는 일을, 그 손에 있는 사람에게 그것이 감염이 되게 하시는데, 즉 그런 냄새를 풍기에 하신다는 것이다. 즉 욥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욥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그분이 장차 받을 고난을 욥을 통해서 그 시대에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때 핸드폰 벨이 울리면서) 예, 지금은 강의중입니다. 처음부터 핸드폰을 꺼놓아야 하는데, 이렇게 강의를 하는 도중에 전화를 받으면 강의순서를 그만 잊어버려서 말이다(ㅋㅋ). 이렇게 우리의 하는 짓들은 매사에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 감수성 ♬

아무튼 말씀에 예민한 사람은 어떠한고 하니, 하지만 성령을 받지 않으면 자기가 하기 싫으면 교회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하고 말이다. 하지만 말씀에 예민하고 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말씀에 비추어서 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개콘에 나오는 '감수성' 이라고 아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하지만 자기 합리화에 바쁜 사람들은 자기 죄를 모르는데, 그래서 성령께서는 가면 갈수록 아주 작은 일에도 우리의 육이 가지고 있는 죄성을 파악하도록 하시는데, 그런데 그것이 성도에게는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나 같은 죄인을 다 구원하시다니" 라고, 즉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68페이지를 보자.

** 마치 애초부터 숨쉬는 것이 사람마다 차이가 나듯이 숨이 끊어짐의 상황도 똑같다. 물론 죽으면 소망도 날아간다.

(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Is 2:22) Stop trusting in man, who has but a breath in his nostrils. Of what account is he? (NIV)

◈ 너희의 돈은 부산저축은행에 있으니 !!

여기 이사야 2장 22절의 말씀을 보면,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數)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라고 하는데, 아니 호흡이 코에 있는데 왜 수에 칠 가치가 없다고 하는가? 말씀이 참 어렵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을 요즘 21세기 대한민국의 멘트로 하면 다음과 같은데, 즉 "너희의 돈은 부산저축은행에 있으니, 너희의 돈은 가치가 없다" 라고 하면 되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그렇지 않은가? 아주 적절한 표현이지 싶은데 말이다. 부산저축은행에 자기 돈을 모두 저축을 해놓았는데, 그것도 후순위채권으로 말이다. 그런데 은행이 망해서 그만 다 날아가고 말았는데, 그러니 자기는 지금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돈 없는 인간은 현재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모아놓은 목돈이 다 날아가고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두고 "너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數)에 칠 가치가 어디 없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이게 무슨 의미인가? 수천억의 돈이 있다고 해고 숨을 잘 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호흡의 누구의 몫이라는 말인가? 누가 압박을 가해야 숨을 쉬는가? 주님이 숨을 쉬게 해주어야 숨을 쉴 수 있는데, 그러니 주님이 없으면 우리 인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고백하는 것인데, 누가 말인가? 우리 엄마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일찍 집에 오고, 빨래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이사야서 2장 22절을 가지고 잔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식이 "엄마, 나 이번에 공부를 잘했지? 칭찬해 줘" 라고 하면, 엄마는 "너의 호흡은 코에 있으니, 그런 것은 가치가 없다" 라고 말이다.

바로 그런 이야기가 집안에서 들리고, 그런 것을 남들에게 증거하라는 것이다. 즉 "내가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고,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달렸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성경말씀에 있으니, 그것을 증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굉장히 쉽지 않습니까? (묵묵부답)

◈ 전도 - '중매쟁이에게 영광을' !!

동부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 전도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었다고 하는데, 즉 매일같이 성경말씀을 하나씩 골라서 문자로 보내는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사실 짜증나는 것이 그런 경우인데, 즉 자기는 싫다고 하는데 자꾸만 무엇을 사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유나 신문이 그런 경우인데 말이다.

하지만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도할 때 어떻게 했는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매일 찾아가서 귀찮게 했는가? 이쪽에 천사가 내려오고, 저쪽에도 천사가 내려와서, 그래서 둘이 서로 만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갑게 입 맞추고 포옹도 하고 말이다.

그러면 누가 누구에게 전도를 했는가?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했는가? 아니면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했는가? 둘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전도라는 말이다. 그러면 누가 전도를 했는가? 살아계신, 우주를 만드신, 별을 만드신 주님께서 하셨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양쪽이 서로 만나도록 주선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중매쟁이에게 영광을 돌리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한 것이 곧 전도라는 말이다.

(행 10:30)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행 10: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행 10: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행 10: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행 10: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그래서 전도할 때는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데, 즉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데, 혹시 용납이 되겠습니까?" 라고 말이다. 상대방이 바빠서 안 된다고 하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안 그래도 지금 내가 심심하던 참인데, 어디 한번 이야기나 해보소" 라고 하면, 그때 성경말씀을 전하면 된다는 말이다.

◈ '나는 왜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까?' 라고 하면 !!

전도하는 과정의 예를 들어보겠는데, 제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하는 것보다도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이 답변을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전도를 하는데, 상대방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불신자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당신은 선택을 받았고, 나는 아직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내가 납득이 되도록 설명을 해보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먼저 전도하는 사람이 "창세 전에 예정된 사람만 선택을 받습니다" 라고 하니, 불신자가 그렇게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여기고, 누가 한번 답변을 해보라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답변을 하기를) "내가 잘나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곧 정답인데, 여기 선택을 받은 것을 천국에 갈 사람이라고 하고, 선택을 받지 못한 것을 지옥에 가야될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천국에 가고, 나는 지옥에 가야될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은 나에게 납득이 되도록 설명을 해보세요" 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식으로 나올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해야하느냐는 말이다.

◈ '내가 납득이 되도록' 해주세요 ??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납득이 되도록" 라는 것이 문제인데, 이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자기가 납득이 되는 방식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에게 전도를 해서, 자기가 납득이 되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납득으로 인해서 말이다.

그러니 이 사람은 '선택' 이라는 의미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는데, 선택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자기가 예수님을 선택했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는 자기가 선택해야 비로소 믿기 때문에 말이다. 자기는 평소에 그렇게 선택하고 믿으면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 하지만, 선택은 당하는 것 !!

하지만 성경말씀은 그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예수님을 선택할 수 없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려줄 때, "아하, 나는 선택을 당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그 누군가가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전도하는 사람은 오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 사람은 평생을 자기가 선택하면서 살았는데, 그러니 이 사람에게 있어서 선택은 두 글자로 하면 무엇인가? 바로 '행함'이 되는 것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만 행함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만 이야기하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불신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행함과 행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기가 곧 불신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란 말이다. 

조금 전에 집사님이 이야기한 대로, 인간의 행함과 행위가 지옥에 가야될 마땅한 죄라는 것을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데, 왜 그런가? 그들은 다른 방식에 대해서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행함의 방식 이외에는 말이다.

◈ 바쁘다 바뻐 ??

주님은 찾아오지 않았고, 그런데 자기는 죽어서 좋은 곳에 가야 되겠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피를 믿기는 믿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지식으로 믿으면 안 되는데, 피가 삶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기는 살아야 하는데, 그러니 그들은 지금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피의 정신으로 살아야 하고, 그것이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야 하고, 그러니 엄청나게 바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그게 곧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는 말이다. 엄청 바쁘게 사는데 말이다. 하지만 전혀 예수님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예수님을 얽어매고 받아내었는지, 즉 "나도 받아내었으니, 여러분도 받아낼 수 있습니다" 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 물론 우리도 '막산다' 라고 할 수 있지만 !!

이것이 바로 세 글자로 '막산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자기가 자기를 선택하면서 말이다. 터널을 파서 그 흙을 바라보고는 흐뭇해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매일같이 그들처럼 흙을 파내는 것은 맞는데,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도 그것이 우리 구원에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행위를 매일같이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죄임을 말이다.

그러니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죄를 짓는데, 그런데 그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욱 더 넘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 라는 말씀을 사람들은 어떻게 여기는가? 죄는 치워버리고 은혜만 챙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 죄와 함께 은혜가 넘침으로서 !!

왜 그런가? 그렇게 죄가 없는 상태에서 은혜를 챙기게 되면, 자기는 죄가 없는 의인이기 때문에 은혜를 받을 만하다고 하는, 그런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죄가 있는 가운데 은혜의 용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죄를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죄와 함께 용서도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즉 죄가 없는데 용서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자들에게는 예수님에게 용서받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자기가 의인으로 행동하는 것이 곧 기쁨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아, 자아실현의 욕구 !!

그것이 바로 자기가 숨겨놓은 옛날의 본색인데, 즉 자기는 그렇게 의인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남에게 힘 자랑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런 착한 인간으로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과시하는 재미로, 그렇게 자기를 나타내는 재미로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게 곧 자기 존재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가 되는데, 그게 자아실현의 의미이고 말이다.

이것이 마아슬루의 욕구설에 있어서 최고 단계의 욕구인데, 즉 "나는 나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재미인데, 그러니 예수님의 피로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 그것 자체로 즐기면서 살고 싶다는 말이다.

* 질문 - 행함을 주장하는 자들은, 자기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던데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말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는데, 그들이 오줌을 누면 우리는 그냥 똥을 누면 되고, 아무튼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오줌을 눈다고 해서, 굳이 우리도 똑같이 오줌을 누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 169페이지를 살펴보자.

** 악마의 사주에 의해서 내가 나를 쉴새 없이 협박하는 것이다. '너 신세가 그 꼴이 뭐냐?' 라고 다그친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죽어버려라!' 라고 강하게 추궁한다.  

◈ 마귀 - 이제 '게임오버' !!

여기에 보면 "너 신세가 그 꼴이 뭐냐?", "차라리 속 시원하게 죽어버려라!" 라고 하는데, 악마가 그렇게 속삭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악마가 베드로에도 그렇게 했는데, 물론 가룟 유다에게도 그렇게 했고 말이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에 나오는 것인데, "차라리 죽어버려라" 라고 해서 죽은 자가 누구인가? 바로 가룟 유다라는 것이다.

마귀가 말하기를, "3년 동안 따라다닌 그 꼴이 뭐냐? 니 스승님은 그냥 갔다. 그냥 끝났어. 이제 게임 오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동전도 없고 그냥 게임오버라는 것이다. 즉 "니가 죽으면 너도 끝이지? 그렇듯이 니 선생님이 죽으면 이제 끝이야. 그러니 이제 정신을 차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것까지만 !!

물론 우리는 이미 드라마가 종영이 되고 난 다음에 다시 보니 그것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가룟 유다의 경우에는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린 그 현장에 한번 가보라는 것이다. 기껏 우리의 양심에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시체가 독수리의 밥이 되지 않도록 시체를 받아내어서 동굴에 돌을 굴러내고 넣어두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인간 됨이고, 인격 됨의 전부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즉 우리를 천국에 보내고 보내지 않고 하는 것은 누구의 몫인고 하니, 주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천국에 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한데 말이다(ㅋㅋ).

◈ 그러면 왜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가?

그러니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의미가 있다면 그것으로 천국에 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자들에게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이 모아놓은 것이란 말이다.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중심으로, 복음 중심으로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복음을 중심으로 모여라' 라는 것인데, 그런데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렇게 모이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쁜 놈들을 시켜서 모두 다 흩어지게 만들어놓았는데, 그렇게 흩어지니 또 구석구석 모인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교회가 몇 개인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빌립보 교회, 무슨 무슨 교회라고 해도, 그런 구분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복음이 계속해서 유지되는가?" 라는 것이다.

◈ 하나의 몸, 하나의 교회 !!

울산강의에서 그런 말을 했지 싶은데, 대형건물에서 냉각기를 통해서 시원한 바람을 각각의 호실로 보낼 때, 그 바람이 같은가? 다른가? 모두 똑같다는 것이다. 즉 한 머리가 되시는 분에 의해서 나오는 부활의 생명의 힘이 어느 교회든 간에, 두 명이 모이든 세 명이 모이든 간에 골고루 미친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 무슨 '니 교회, 내 교회' 라는 것이 있는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고 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듯이, 그렇게 교회도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는 어떻고, 저쪽에는 어떻습니까?" 라고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주님의 십자가 냉기는 그야말로 집에 가있어도 여전한데, 성령께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세요" 라고 설교할 것이 아니라, "그 어디에 있더라도 복음을 들으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모이지 않으려고 하면 안 되고, 모이든 흩어지든 그것은 주님의 뜻이니 그것에 상관없이, 항상 "십자가의 피 때문에 나 같은 죄인이 살았습니다" 라는 것을, 그런 사실만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성도의 남은 인생에 해야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으로 나갈 때마다, 즉 넓은 길로 나갈 때마다 준비된 마귀가 있는데, 즉 "니 꼴이 그게 뭐냐? 그렇게 실패만 거듭한다면 나 같으면 이미 죽었다. 그러니 죽어라" 라고 할 때, 그때 성도는 다시 한번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데, 어제 생각한 것은 오늘 다시 우려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사건 속에서 또 다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 여러분,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런 행함이 나옵니다 ??

마귀가 그렇게 욕을 하니,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말이 또한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즉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을 그럴 사하게 고치면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를 믿는 것에 행함을 더하면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이 아니라, 즉 '믿음+행함'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런 행함이 나온다" 라는 사실을, 그런 이야기를 굳이 왜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행함의 기준을 자기 중심으로 다시 뽑아놓았기 때문인데, 그렇게 행함의 모델을 설정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는가? 반드시 본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봐라, 나는 은혜를 받고 헌금을 이렇게 했잖아. 그런데 니는 머꼬?" 라고 한다는 말이다. 목사는 바로 그러한 점을 노린다는 것이다. 

교인들은 그냥 들으면 그것을 복음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게 바로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것이다. 굳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본인은 정작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인데, 마귀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귀의 새끼로 있으면서, 그것을 들킬까 싶어서 온갖 성경말씀으로 다 포장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 것도 구별하지 못하면서 무슨 마음으로 교회에 다니는지, 참으로 기가 막힌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정작 본인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으니 그것을 위로를 삼아서, 즉 자기도 뭔가를 좀 덮어야 자기의 속내가 드러나지 않으니, 그렇게 반창고를 붙여놓는다는 것이다. 뼈가 바싹 마르도록 다 드러나야 하는데 말이다.

◈ 주님은,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

주님께서는 그런 사태를 일으키시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주님께서는 교회를 세우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해서 어떤 결실을 맺기 원하는데, 하지만 그런 결실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능력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성도는 자기가 구원을 받는데 전혀 보탬이 되는 일을 한 적이 없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복음을 설교했다고 해서, 그것을 듣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의 영이 임해야 하는데, 즉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적이 임한 자를 찾다보니 몇 명이 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게 정상인데, 왜냐하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게 된다면 기적도 아니기에 말이다. 그런 것은 기적이 아니라, 하나의 법칙이나 원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믿지 않아야 당연한데도 굳이 믿는다고 하니, 정말로 그러한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데, 물론 감사하기도 하고 말이다. 오직 놀라울 뿐인데, 그래서 "야, 주님이 정말 살아있기는 있구나. 살아계신 주님이 그렇게 하셨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야, 저런 인간이 예수를 다 믿고, 그 입에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고백이 튀어나오고 말이다. 저런 입에서는 죄인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되어있는데, 뭐가 아쉽다고 저런 소리를 다하지? 모든 것이 다 넉넉한 양반이 말이야. 예수를 믿어서 자기 위치를 더 높이려고 할텐데, 믿으면 믿을수록 자기가 죄인임이 드러난다고 하니, 정말이지 신기하고 놀라워라. 기적은 기적이야"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놀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제 아무리 장마비가 내려도 !!

이제 한 마디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마치 비가 오면 우산이 있어야 하듯이, 지금 저주의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저주의 비를 막아줄 우산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피가 묻은 십자가 우산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우산을 쥐고 있으면 되는데, 물론 우리가 쥐는 것은 아니고, 주께서 쥐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우산을 쓰고 있으면 밑에서는 행함의 지렁이가 계속해서 기어다니고, 참으로 징그럽고도 귀찮게 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왜 그렇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는데(ㅋㅋ), 아무튼 귀찮게 한다는 말이다. 내쫓으면 행함으로 들어오고, 또 내쫓으면 또 다시 행함으로 들어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야, 참으로 꼬락서니가 좋다. 그렇게 믿어서 잘 된 것이 무엇이 있노? 나라고 하면 당장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어버리겠다. 예수님을 믿고 가정이 박살나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야? 너거 집구석부터 먼저 화평하게 해라" 라고 하면서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서 온갖 것들이 다 들어오는데, 하지만 아무리 장마비가 오고 또 와도 우리는 십자가 우산만 쓰면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노아 방주에 들어가는 것이 기적인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십자가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대세인 이 세상에서, 그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 인 줄입니다. 예수님을 몰라도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갈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러주시는지, 그야말로 창세 전에 예정하신 그 위력이, 지금까지도 그 권세가 전혀 변함이 없이 저희들에게 적용이 된 줄 압니다. 그러니 이러한 모든 주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영광을 돌리면서 오직 십자가의 피만 증거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08,20 오후 11시 30분에 마침.

                                                 올해는 어떻게 주님의 비보다 장마비가 더 무섭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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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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